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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도서관을 나왔다. ROSE로 가야 되는데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떨렸다. 배신감? 실망? 분노?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감정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야 하나.
작고 귀여운 햄스터가 손을 물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도서관 앞 광장을 왔다 갔다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ROSE에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있어 오늘 나가지 못 하겠다고 했더니 유미가 흔쾌히 알았다고 답했다. 대신 다음에 두 배로 봉사를 해야 한다고 어쩌고 하는데 그냥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후문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 자취방이 후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듯 현아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방향이 반대라서 그렇지... 거의 뛰다시피 걸었기에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고 현아네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시계를 본다. 밤 아홉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에 참 껄끄러운 시각임에 분명하지만 이 일은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일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벨을 누른다. 찌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띵똥- 하는 벨 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인터폰에서 잠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아는 아니었다. 엄청 활기찬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저,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현아 친구 한석이라고 합니다. 현아 있습니까?"
나보다 먼저 갔으니 분명 집에 있을 것이다. 나오면 단단히 따져 물어 볼 테다. 그러나 나오라는 현아는 안 나오고 난데없이 환호와 함께 비명 소리 비슷한 게 들려왔다. 인터폰 터지는 줄 알았다. 아이구, 깜짝이야.
"한석이!!!!? 설마 최한석?"
내가 방금 성을 말했던가? 이름만 말하지 않았나? 이 사람은 대체 내 성을 어떻게 아는 거지?
"네? 그런데....요?"
그러자 인터폰 너머에서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꺄아~ 언니! 최한석이래! 엄머낫!!"
"진짜? 진짜? 얘! 내가 나가볼게!"
"나도 나가, 언니!"
어안이 벙벙하다. 뭐지.... 이 폭발적인 반응은.... 대체? 내가 성을 이야기했던가?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기에 날 보겠다고 앞 다투어 나오겠다는 거지?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마당 너머 현관 쪽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웬 아가씨 둘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뭐...뭐지, 날 잡으러 오는 건가? 그럼 도망가야 하나? 그러나 내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들이 대문에 도착했고 그대로 문이 활짝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를 꾸벅 하고 그들을 살폈다. 나보다 서너 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여자 둘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한 쪽은 푸른 색 츄리닝 차림. 다른 한 쪽은 붉은 색 츄리닝 차림이었다.
"우와, 진짜 최한석이네! 반가워! 어머니는 잘 계셔?"
"그러게. 너 진짜 키만 컸지 어렸을 때랑 똑같구나?"
"........네에?"
난데없이 엄마 안부를 묻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둘은 내 손을 하나씩 잡더니 안으로 성큼 끌어당기기 까지 했다.
"들어와. 어차피 좀 있으면 현아도 올 테니까 들어와서 기다리면 되겠다. 그지?"
"그러게. 현아가 어찌나 니 이야기를 많이 하던지... 호호호. 그 녀석 숙맥인줄 알았는데 집까지 알려준 거였어? 제법인데?"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그저 서로 웃고 떠드는 통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그대로 끌려들어간다.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날 앉혀두고 양쪽에 앉은 그녀들의 수다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게 얼마만이야, 한 십 년 되었나?"
"내가 중학교 때고 언니가 고등학교 때니까 그 정도 되겠지. 히야. 그때는 정말 쪼끄마했는데 많이 컸네."
"아줌마는 여전히 술 좋아하시고?"
"어련하시겠어? 아줌마 닮았으면 너도 술 좀 하겠다?"
"아, 그래. 그러면 주스 말고 술 줄까? 우리 집에는 군인연금매장에서 사다 놓은 맥주가 늘 있거든."
좋다, 싫다 혹은 당신들은 대체 누구세요 라는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내 앞에는 맥주 캔이 놓여졌다. 빨간 츄리닝을 입은 여자가 그걸 따더니 손에 들려준다. 그리고 파란 츄리닝의 여자가 있는 부엌을 향해 소리친다.
"언니! 거기 냉동실에 지난번에 강원도 놀러 갔을 때 사온 반건조 오징어도 있어! 구워줘!"
"어휴, 기집애! 지가 안 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휩쓸려 여기까지 끌려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까와는 다르게 내 상대가 한 명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현아의 언니 되시는 분이죠?"
조심스럽게 묻는데 그녀의 반응은 털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풋 하고 웃더니 내게 반문했다.
"뭐? 현아의 언니.....? 푸핫. 너 나 기억 못 해?"
"네? 기억이요?"
"언니!! 한석이가 나 기억 못 하나 본데?"
"뭐? 진짜?"
한 손에 구이용 철망을 든 여자가 뛰쳐나왔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다소 비난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한석이, 실망인데? 너 나도 기억 못 해?"
"..........죄송합니다만 저기....잘 모르겠는데요."
두 여자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 실망의 원인이 나인 것 같아 몹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우물쭈물했다.
"저는 오늘 여기 현아 만나러 온 건데... 뭐 좀 물어보려구요."
"현아가 말 안 했어? 우리가 너 보고 싶어 한단 이야기?"
"네? 처음.... 지금 듣는데요?"
"현아, 이 기집애... 들어오기만 해봐라."
파란색과 빨간색이라... 이게 말로만 듣던 청실홍실인가. 두 여인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석이 너 기억 안나? 예전에 내당리 살았을 때 부대 뒤 양조장에...."
뭔가 익숙한 지명이 흘러나오고 구체적인 장소가 언급되자 내 머리 속 어딘가에서 스위치가 켜졌다. 끊겼던 회로가 완성된다. 전류가 파직하고 흐르고 그동안 꺼져 있던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아주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서히 밝아지는 전구. 그 빛에 비춰진 기억이 양감을 더해간다. 그렇구나. 이 사람들이구나.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앗!"
"그래, 이제 기억나는 구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난 두 사람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이 분이 현주 누나... 이 분이 현미 누나? 맞죠?"
"이제야 기억하는 구나. 근데 왜 현아는 보고도 못 알아봤어?"
"현아... 현아.... 현아!!! 으악! 그게 그 현아였구나!"
그제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전에 한식당에서 나와 걸어가면서 현아는 내게 말했다.
"반장까지 했으면서?"
내가 언제 그걸 말해준 적이 있었나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녀석은 알고 있었다. 이미 봤었으니까. 새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노라니 두 여인이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솔직하게 기억이 안 났던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거야 당연히 현아가 그때는 저보다 크고 지금이랑 성격도 완전히...."
내가 기억하는 현아는 결코 햄스터 따위가 아니다.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대형 세퍼트...? 다소 맥 빠진 내 대답을 들은 현미 누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는다.
"푸하하하. 하긴 걔가 사람이 달라지긴 했지. 완전히. 아니, 어떻게 보면 겉모습은 정말 그대로인데 말야."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암튼... 나는 내당국민학교에서 반장을 했었다. 그 때는 친구들에 비해 키도 작고 조금 마른 편이라 부침이 심했다. 어찌나 약골이었던지 심지어는 여자들에게도 힘으로 밀릴 정도였다.
특히, 여자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아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장", 양현아였다. 원래부터 끼리끼리 모이는 습성이 있는 여자아이들의 그룹 중에서 단연 가장 강력한 그룹이 바로 현아가 이끄는 소위 "부대 여자애들" 그룹이었다. 어쩌다 여자애들과 남자애들 사이에 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나타나 양쪽 다 힘으로 평정을 하고 그랬다. 어지간한 남자애들은 다 쥐어 패고 다니는 걔네들 때문에 얼마나 분란이 끊이지 않았던가.
하아. 내가 어떻게 그걸 잊고 살았지? 그런데 그게 무리도 아닌 것이 내 기억 속의 현아라는 아이는 언제나 내가 올려다보던, 그러니까 나보다 키가 큰 이미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때 현아는 정말 키도 크고 사내대장부 같은 성격에.... 그랬었는데요?"
"그래. 걔는 그 때가 다 큰 거야. 원래 여자애들 중에서 빨리 크는 애들이 있어. 그런 애들은 딱 거기까지만 크고 말거든. 그리고 너처럼 쪼끄만 하다가 늦게 크는 애들도 있는 거고."
현주 누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 언니가 구워온 오징어를 현미 누나가 쟁반에 놓고 찢고 있었다. 다들 앞에 맥주 한 캔씩을 두고 있었다.
"현아 지금 키를 봐. 그걸 국민학생 키라고 하면 엄청 큰 키잖아. 그러니 애들을 다 휘어잡고 다닌 거지. 성격도 아빠 닮아서 괄괄하고."
그래. 언젠가 지프차를 타고 온 현아와 함께 있던 땅딸막하면서도 눈빛이 부리부리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군복이 무척 삐까뻔쩍 했었다.
"하아.... 아저씨는 진급하셨어요? 그때 소령인가 하셨는데..."
"지금은 예편해서 지방에서 사업하셔. 엄마는 아빠 뒷바라지 한다고 내려가 있고."
"그러셨구나...."
지금은 그런 곳이 별로 없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에는 양조장이 두어 개씩 있었다. 밀주를 만들어 파는 곳이다. 우리 집에다 양조장을 직접 차리는 게 싸게 먹힐 거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우리 집의 삼촌들과 엄마에 의해 소비되는 술의 양은 엄청났기 때문에 술심부름을 담당하는 나는 동네 양조장에서 꽤나 환영받는 고객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분명히 불법인데.... 내당리에 있는 부대에서도 양조장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다. 부대 뒤쪽에 간부 관사가 줄지어 있고 그 끝에 있는 건물이 양조장이었다. 관사가 있는 곳에는 당시로 쳤을 때 꽤 시설이 좋은 놀이터가 있었기에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걸 통제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현아였다. 큰 키도 키거니와 현아의 와일드한 성격을 뒷받침 해주는 권력은 거기서 십분 발휘되었다. 현아 말을 안 듣는 녀석은 놀이터는커녕 부대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
"전 삼촌 심부름 때문에 양조장 가야 되는데 현아가 관사 입구에서 으스대면서 막을 때 얼마나 얄미웠는지 아세요?"
해묵은 원한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새삼 이가 갈린다. 누나들이 깔깔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넌 꼬박꼬박 왔잖아. 그래서 우리가 널 기억하는데."
"그거야 현아한테 숙제도 대신 해주고 준비물도 사다주고 그랬으니까 그랬죠."
"푸하하하. 현아 고것이 아무래도 낌새가 그때부터 있었단 말야. 그게 나름대로 너한테 관심을 표시한 거라고. 넌 몰랐니?"
좋아하는 여자애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꼬마도 아니고, 아이고 유치해라.
"관심을 그딴 식으로 표시해요? 무슨 애도 아니고...."
"국민학생이 애 맞잖아!"
"어.....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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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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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주. 29세. 159cm. 50kg. 75B.
양현미. 28세. 158cm. 49kg. 70B.
.......일회용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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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당시는 국민학교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