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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마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녀석의 시선이 효진에게 닿았다.
"효...효진 언니?"
제아무리 효진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이불을 추슬러 가슴을 가렸다.
"마리야, 이건 말야... 그러니까....딱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러나 마리는 그녀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효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침대 한 쪽에 있던 내 바지를 찾아내어 던져주었다.
"빨리 나가봐. 쟤는 달래야 될 거 아냐."
"그...그래. 그럴게. 잠깐만."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바닥으로 내려온 다음 낑낑거리며 바지를 껴입었다. 팬티를 입을 틈도 없이 바지만 입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문소리가 따로 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앞집으로 들어가진 않은 것 같고 밖으로 나간 것 같아 길로 나가본다. 발걸음이 워낙 빠른 녀석이라 그런지 전혀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방향 하나를 정해두고 뛰었다. 한참을 달려보아도 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사람 하나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예전에 갔던 놀이터를 가보았지만 거기도 비어있었다. 집 근처를 한참 돌아보며 찾았지만 어디에도 마리는 없었다.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효진이 나를 맞이했다.
"못 찾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를 벗었다. 갑자기 이리저리 뛰는 바람에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효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모텔로 갈 걸 그랬나... 괜히 지혜 침대 가겠다고.... 미안하다, 한석아."
"아냐. 니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평소 녀석에게 분명히 이야기 했었어야 하는데.. 집에 막 들어오지 말라고."
"마리가 너 좋아하긴 많이 좋아했나 보다. 충격이 좀 크겠지?"
"아무래도...."
얼마 전 마리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던 사실을 효진에게 따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그녀는 마리와 나 사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암튼 미안해."
".......니 입에서 미안하단 소리 들으니까 왜 이렇게 어색하냐. 관둬."
들고 있던 셔츠를 빨래 바구니에 던져버렸다. 효진은 우물쭈물하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도망가서... 우리 한석 군 많이 심심해지면 이 누나가 앞집으로 들어올까?"
"하아. 됐다. 마음만 받을게. 넣어둬."
"농담이 아니라 진짜. 너 마리랑 안 되면 왠지 내가 미안하잖아."
"됐어. 마리랑 나랑..... 아주 그런 사이도 아니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열 여자 싫다는 남자 없다는 옛말은 진리인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마리와 틀어지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난 이미 마리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아놓은 터 아닌가.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 놈이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걸 보고 만 마리는 대체 얼마나 상심했을까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나중에 마리한테 우리 사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깊은 건 아니라고 이야기 해줄까?"
효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있는 걸 봤는데... 믿겠어?"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냥 심심해서 서로 만지면서 놀고 있었다고 하면....."
".......말이 되냐? 욕이나 더 안 먹으면 다행이겠다."
"안되나?"
누가 효진이 아니랄까봐 내놓는 대책이 참, 쓸모없다. 효진은 나중에 마리를 보면 연락 달라고 해놓고 나갔다. 효진을 배웅하고 돌아오며 앞집을 쳐다본다. 불이 꺼진 그곳으로 마리가 언제쯤 돌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앞 집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아가씨인데 밤새 어디 가서 뭐하고 있었을까 싶었다. 별 수 없이 돌아섰다. 공부할 것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간만에 도서관 가서 공부나 해야지 싶었다. 그러나 학교로 가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선영의 집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걸어서 선영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그녀의 방 앞까지 간다. 문은 잠겨 있었다.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넘버락 덮개를 열고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되려나.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진이의 생일을 입력하자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방 안의 곰돌이들만이 날 맞이한다.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남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기까지 했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이세요?"
"그야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도 없으니까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목이 부러질 정도의 스피드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유미가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답했다.
"아무도 없긴요. 제가 있는데?"
"유...유미 씨, 여긴 어떻게....?"
들어오면서 문을 닫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다. 한마디로, "좆됐다!". 내 질문에 도리어 유미가 반문한다.
"어떻게라뇨. 선영이가 챙길 게 있다고 가보라고 해서 온 건데... 그러는 선생님은 여긴 어떻게 오셨나요? 게다가 문도 잠겨 있었을 텐데?"
"그게 그러니까...."
헙.... 내가 선영이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어떻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군. 젠장할.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 거리고 있노라니 유미가 알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자기 손을 탁 친다.
"설마 빈집털이?!"
어째서 결론이 그쪽이야!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니면 여자 혼자 사는 집을 노리는 강간범?"
"으엑!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강렬하게 부정해보지만 그녀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차 묻는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데요. 여긴 선영이 혼자 사는 집인데 선생님이 여기 서 계신 이유가 말이죠."
"그...그건...."
유미답지 않은 날카로운 추궁에 사정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관에 서서 이야기 하고 있기에 좀 무엇해서 일단 방 안으로 들어와 평소 선영과 내가 과외 할 때 쓰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나는 몇 달 전 ROSE에서 내가 부렸던 추태와 그것에 대한 선영의 청구, 그리고 과외 계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외를 이 집에서 하기 때문에 그래서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유미는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뭐야, 남은 지금 절대 들키면 안 되는 일을 들켜가지고 고자 될 위험을 무릎 쓰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웃어?
"유미 씨... 절대로 선영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그녀는 자신의 웃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말했다.
"왜요? 들키면 고자라도 만들어 버리겠다고 했던가요?"
"헙..... 그걸 어떻게....."
"선영이 평소 말투라면 그러고도 남죠. 하하, 선생님 정말 제대로 물리셨네요."
"물리다뇨?"
......설마 입으로 해주는 그걸 가지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유미는 잠시 생각을 고르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음.. 우리 가게에서 그런 일까지는 하지 않지만 가끔 질 낮은 가게에서 그런 거 할 때가 있어요. 그걸 우리는 문다고 표현하죠."
"가끔? 그런 거?"
"네. 술에 꼴은 손님 하나 물어다가 룸에 앉혀놓고 빈 병이랑 아가씨랑 옆에 앉혀놓는 거예요. 그래 놓고 술에 깬 사람에게 청구서를 내밀죠. 적당히 조작도 되고 부풀려진 청구서를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거 못 내겠다 하는 손님에게는 추심 전문으로 하는 아저씨들을 붙여드린다거나.... 암튼, 이쪽 업계에서는 흔해 빠진 일이에요. 호호호. 선영이는 그걸 그렇게 응용해서 썼군요."
뒤통수가 띵했다. 선영이 내게 내밀었던 청구서가 떠오른다. 당했다. 아주 제대로 당했다. 생각치도 못한 선영의 사기행각에 놀아나버린 멍청하고 얼빵하기 그지없는 최한석이가 입을 떡 벌리고 있노라니 유미는 계속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과외를 받는다라... 흐음. 선영이도 선생님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네? 마음에 들어요?"
속으로 한선영, 이 사기꾼 같은 여자야! 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던 나는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영이가 내가 마음에 들었다니.... 문득 나를 향해 "자기"라는 호칭으로 애틋하게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요새 궁금했거든요. 선영이가 어머니 탈상하고 애 기분이랄까, 암튼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기에 무슨 일일까 싶었죠. 그리고 지난번에 가게 오셨을 때 선생님이 선영이 찾는 거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거든요. 그런데 둘이서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랐네요. 호호호호."
그 이전에 유진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유로 몸의 계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이것까지 말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거듭 비밀 엄수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니 유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선영이가 자존심이 센 아이이고 하니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입을 다물어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고자가 되긴 아직 이른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런데 유미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사탕장수에게 가장 큰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으로.... 이 여자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걸까.
"그럼 저한테는 뭐가 있나요?"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리다냐.
"남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비밀을 지키기로 했는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막 못 참겠고 이런데 이런 저를 위한 어디 좋은 거 없나요?"
"아... 유미 씨...."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려니까 그녀는 도리어 싱긋 웃으며 몸을 이쪽으로 살짝 기울여온다. 입술을 살짝 내미는 그녀를 보고 몸을 뒤로 빼내려다가 너무 대놓고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살짝 들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짧은 키스. 그러나 유미의 입술은 상당히 부드러웠고 달콤한 맛이 났다. 이곳은 작은 방 안. 침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고 혈기왕성한 남자와 농염한 매력을 뿜어내는 여자가 단 둘이 마주 앉아 있다. 그리고 둘의 입술은 방금 붙었다가 떨어졌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고 설레게 된다. 이거... 이거... 이러다 사고라도 치는 거 아닐까 몰라.....
"음... 나쁘지 않네요."
맛있는 주스를 마시고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감았던 눈을 뜨는데, 그 눈빛이 정말이지 보통이 아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지금 만약 유미가 나를 요구한다면.... 차마 거절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오늘은 바쁘니 여기까지만 하도록 해요."
"네? 오늘은...이라니...."
"어머, 선생님도 참. 비밀 엄수 대가가 겨우 뽀뽀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잖아요. 상식이 없으시네. 상식이."
.........두 번만 상식 있다가는 대체 무슨 짓까지 하라고 할 지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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