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2 / 0471 ----------------------------------------------
Main Route
"그 전까지는 선생님의 냄새를 나 같은 사람만 맡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열어 버리니까 사방으로 냄새가 퍼지고 말았네요. 만약 그 분이랑 잘 되었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잘 안 된 모양이죠. 그래서 주변의 다른 여자들이 선생님의 냄새에 끌리고 있죠. 다들 자신이 왜 끌리지는 몰라요. 하지만 느낄 순 있어요. 결과적으로 저와 선영이, 그리고 유진이에게는 도리어 잘 됐지만요. 후후후."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말들은 하나하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는 유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나와 선영의 관계도 대강 알고 있는 듯 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여하튼 전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요. 가능하면 제 곁에 두고 싶기도 하고 안겨보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근데 이제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일부러 잊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스스로 잊은 채 살고 있더군요."
"유진이 어머님....."
"또, 또 그렇게 절 부르는 군요. 아무도 절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난처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제 이름을요. 유미라는 제 이름을 부르시면 돼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래도 그건 좀...."
"훗, 역시 애엄마를 상대로 그렇게 편하게 부르는 건 쉽지 않겠죠?"
그녀는 새로 나온 마티니 잔을 홀짝였다.
"아무튼. 전 그런 이유로 선생님이 좋다. 이 말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 뭐, 특별히 더 할 말은 없어요."
"그러신가요."
어쩐지 맥이 빠졌다. 뭔가 굉장히 거창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끝에 와서는 시시하게 끝났다.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아주 이상한 걸 상상하거나 야리꾸리한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내가 손을 맞잡고 흔들자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유진이를 잘 부탁해요."
"네? 유진이요?"
"예. 제 딸이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한 여자. 제 연적."
자신의 딸을 여자, 그리고 연적이라고 칭하는 그녀의 말투는 굉장히 낯설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녀는 손을 놓았다.
"지금은 제가 한 이야기들이 이해가 잘 안 가시겠죠? 그렇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예요. 따로 배웅은 안 할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녀는 어느새 마티니 여러 잔 비우고 있었다. 내게 딱히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는 듯 바텐더를 불러 다음 잔을 청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바를 나왔다.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어쩐지 취한 느낌이다. 술보다는 유미의 신비로운 이야기에 취했다고나 할까.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제법 멀었다. 그러나 나는 택시를 잡아타지도 않고 계속 걸어갔다. 골목길마다 길이 갈라져 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졌다. 이 길. 저 길. 그리고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내가 가지 않은 저 길. 모든 것이 이 세상에 놓여있다.
술을 그리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명희와 연인이 되는 꿈을 꿨다. 지혜와 키스하는 꿈을 꾸었다. 리사와 함께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꿈을 꾸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나를 안아주는 마리를 보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감옥에 갇히는 꿈도 꾸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들판만이 내 앞에 펼쳐 있는 것을 보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과 쏟아 붓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맹렬하게 타올랐고 이윽고 나를 태워버렸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몸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간신히 불구덩이를 나와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눈 앞에는 총구가 있었다. 미처 피하기도 전에 총구가 불을 뿜는다. 총알이 날아와 내 심장을 관통한다.
"흐억!!"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지만 현실이었다. 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내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 꿈들이 너무 생생하여 오히려 깨어난 지금이 현실 같지 않았다. 마리는 땀으로 가득한 내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
"어제 술 억수로 많이 드셨나 보네예?"
"어? 어.... 그런 건 아닌데...."
"지가 밤늦게 문 뚜들기가 불렀는데도 답도 없고... 오늘 아침에도 식사 하라고 불렀드만 기척이 없기에 함 와봤심더. 허락도 안 받구 들어온기 좀 그렇긴 한데..."
"그러니? 괜찮아. 잘 했어. 내가 만약 늦잠이라도 잤다면...."
문득 시계를 보니 으악! 벌써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찾는다. 그 순간 마리가 꺄악- 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왜 그래, 마리야?"
"선....선배님요. 그게... 그러니까....."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찾아 헤매던 나는 그제서야 내 차림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으니 차림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냥 벌거벗고만 있어도 창피도가 100%일 텐데 하체 중요부위는 아침 기상나팔을 불고 있는 중이었다. 상방 각도는 약 70도. 황급히 다시 이불로 뛰어 들어갔다.
"저...마...마리야, 내가 지금 급해서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면 안 될까? 나 지금 바로 나가봐야 돼."
마리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마리가 뛰쳐나가고 나서야 다시 이불에서 나올 수 있었다. 새 옷을 찾을 틈도 없어 어제 벗어 두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대체 왜 나는 잠들기 전에 옷을 다 벗어버린 걸까. 아무리 몸이 뜨거웠다고 해도 말이다. 암튼 머리를 정돈할 시간도 채 가지지 못하고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오늘따라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같은 데서 주인공이 손만 뻗으면 어디선가 택시가 날아와 앞에 딱 서는데... 나는 드라마의 잘못된 폐해를 온몸으로 느껴가며 학교까지 미친 듯이 달려갔다.
"허...허억...허억...하악....."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지애는 교무실에 이미 없었다. 벌써 수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녀의 책상 앞에 놓인 수업배치도를 확인했다. 으윽. 젠장.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지금 바로 1학년 3반 수업 중이었다. 나는 다시 교실까지 달려갔다. 중간에 학생주임을 만나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잔소리를 듣느라 좀 더 지체했다. 간신히 교실에 도착해서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띵-동-댕-동---
1교시 종료 종이 울려 퍼졌다. 이런 젠장할..... 반 아이들의 눈이 전부 갑자기 등장한 지각생... 아, 아니, 난 학생이 아니라 교생이지. 그러니 지각생. 맞군. 암튼, 나에게 쏠렸지만 지애는 교탁을 두드려 자신을 향하게 했다.
"반장, 인사해."
그러자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령을 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유진이 옆 자리가 비어있었다. 저 자리의 주인은 분명....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우렁찬 인사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정자세를 취한다. 교단에서 내려온 지애가 나를 지나치며 살짝 비꼬는 투로 말한다.
"참, 대~단한 밤을 보내고 온 모양이죠?"
교실을 나서는 지애의 뒤를 부리나케 쫓아갔다.
"아, 아뇨. 오늘 어쩐지 늦잠을 자서...."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라니, 집에도 안 들어가고 대체 어딜 간 거예요?"
"아닙니다.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여자 집?"
"아니요. 누....아니, 송 선생님."
교무실까지 가는 동안 지애의 날카로운 지적과 비아냥거림에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고깝게 받아들였고 결코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결국 오전 내내 지애에게 이리저리 잔소리와 핀잔을 듣다가 하교를 하게 되었다. 어디 좋은 데 놀러가자는 태근이 형을 간신히 떼어놓고 혼자 걸어갔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교문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선생님."
"어? 유진이구나...."
학교에서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여간해서는 아는 척을 안 하는 녀석이었는데 이상했다. 수업이 끝난 지 시간이 좀 되었기에 이미 갈 애들은 다 갔다고 해도 아직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애들이나 오고 가는 애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주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시간 되세요?"
"시간? 그건 왜?"
"소란이 집에 가볼까 하는데 괜찮다면 같이 가실래요?"
"소란이?"
그제서야 아침에 보았던 소란의 빈자리가 떠올랐다. 유진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도 학교 안 나왔어요. 지난 번 월요일에도 갑자기 안 나와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거든요. 아무리 봐도 아픈 건 아닌 거 같고.... 아무래도 찾아가 보려구요."
유진과 소란은 굉장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하긴 소란이가 유진을 꽤 생각하고 있던 걸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소란에게 들었던 또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서 사뭇 걱정되었다.
"아픈 것 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다른 이유요? 뭐, 좀 알고 계세요?"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아차 싶었다. 소란이는 자신의 사정을 비밀로 하고 싶어 했었지.... 나는 황급히 팔을 휘저으며 딴 소리를 생각해 냈다.
"어, 뭐... 집안일이라든가 이것저것 복잡한 무언가?"
"어쩌라구요. 그게 대체."
내가 말을 흐리멍텅하게 하고 있으려니 유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한석 씨 되시죠?"
고개를 돌리자 은색 정장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