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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70화 (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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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유미는 자기가 직접 의자를 끌어다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숄을 걸치고 있어서 상체의 노출은 거의 없었지만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원피스의 라인과 허벅지까지 길게 나 있는 슬릿으로 인해 하반신의 노출이 더 돋보였다. 이 여자는 이런 차림으로 이 사람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닌단 말인가. 가게 내에서나 입을 옷을 입고.....

"누구....신지?"

지애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나와 유미를 번갈아 본다. 그녀의 눈빛이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설명했다.

"아, 저 이 분은... 제가 예전에 과외 하던 애 어머니 되시는데요...."

순간 유진이의 이름이 나올 뻔 했지만 황급히 삼켰다. 어쩐지 지애가 유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하긴 청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든 유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지애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렇기에 이런 자리에서 유진이의 이름을 꺼내면 어쩐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유미와 유진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모르긴 몰라도 유진이가 앞으로 학급의 반장 역할을 하는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유미는 내가 마시고 있던 맥주병을 뺏어 들더니 상표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저랑은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계속 빼시더니 여기서 맛없는 수입맥주나 드시고 있었어요? 저희 가게 오시면 맥주 말고도 더 찐한 서비.... "

"하하, 이 분이 주류 판매점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남의 맥주병을 가져다 홀짝이는 유미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미리 차단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애의 불편한 기색은 여전했다. 그녀는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가게가 많이 한가하신 분인가 보네. 지나가다 갑자기 남의 술자리에 끼기도 하고."

"남의" 술자리에 미묘한 강세가 느껴진다. 날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말의 화살은 명백히 다른 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저 과녁판 노릇이나 하면서 화살을 얌전하게 받고 있을 이가 결코 아니었다. 유미는 다소 심드렁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남자가 많이 고픈 분인가 보네요.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분 데려다가 술 먹여서 어찌하려는 걸 보고 있노라니..."

"뭐라구욧?"

명백한 도발적 언사에 지애의 말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러나 유미는 따로 대꾸도 하지 않고 내 맥주를 다 마셔버렸다. 여전히 지애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날 보며 말했다.

"요새 선영이가 잠적을 했거든요. 걔한테 맡겨둔 일들이 전부 저한테 쏟아지고 있어요. 어쩌면 좋죠, 선생님?"

질문을 할 거면 그냥 말로만 하세요, 유진이 어머님. 손가락으로 남의 쇄골 부분을 긁지 말고.

"저...저런, 힘드시겠어요. 선영이는 무슨 일이라던가요?"

"글쎄요. 어떻게 하라고 전화가 몇 번 오긴 했는데 통 알아듣기 어려워서...."

유미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걷어 손에 말았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슴골이 확 드러나면서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녀의 가슴이 어디 보통이어야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꼽으라면 지혜보다는 작을지 몰라도 리사나 선영보다는 확실히 컸다. 역시 아가씨들은 따라갈 수 없는 애엄마의 위대함...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그 의미는 바로 이런 풍요로움이 있을 것이다.

암튼, 그런 크기에 옷의 파인 정도가 상당하다 보니 참 아름다운 계곡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런 가슴을 밀어붙이며 팔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있던 내 팔뚝에 천 한 조각 너머의 가슴 온기가 전해질 정도다. 감촉으로 미루어보아 브래지어도 안 한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아찔하고 참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귀에 착착 감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전에 고양이 손 보내서 도와드렸잖아요. 이젠 선생님이 은혜 갚음 좀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하하... 그... 고양이 손 말입니까."

도움은 개뿔! 욕실에서 알몸으로 씻고 있다가 당돌하기 그지없는 그 녀석에게 당한 수모가 떠올라 잠시 울컥했다. 그러나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유진이 이야기니까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유진이 이름을 꺼냈다가는 정말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다. 일단 최대한 말을 둘러대기로 한다.

"봐가면서요. 제가 지금 실습 기간 중이라..."

"그래도 시간 되시면 저희 가게 들려 보세요. 선생님,"

"그...그럴까요."

팔을 꾸욱 눌러 감싸오는 유미의 젖은 내게 참 여러 가지 감동을 주었지만, 맞은편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불쾌감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급기야 나와 있을 때의 착한 누나 모드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학교 모드의 송 선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지금 들리는 저 딱딱한 목소리가 바로 그 증거로다.

"지금 대체 뭐하는 거죠?"

그러나 유미는 마치 그 자리에 지애가 없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고 나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역시 맥주는 맛이 없네요. 저는 좀 더 독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참, 선영이는 보드카 좋아하거든요. 알고 계세요?"

"아뇨. 몰랐는데요. 저기, 유......"

하마터면 유진이 어머님이라고 부를 뻔 했다.

"유미 씨. 제가 지금 이 분이랑 이야기 하고 있던 중이라...."

유미는 그제서야 지애를 발견했다는 듯이 힐끔거렸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거두어 나를 쳐다본다.

"전처럼 어머님이라고 안 부르네요? 이젠 저를 이름으로 부를 마음이 드신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무어라 답변하면 좋을지 몰라 쩔쩔 매고 있는데 거칠게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최 선생, 많이 바쁜 거 같은데 다음에 이야기 하죠. 여기 계산은 제가 할 테니 마저 먹고 와요."

아아. 결국 폭발한 모양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와 유미를 쏘아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렸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유미에게 말했다.

"유진이 어머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선생님을 보고 싶은데, 왠지 여기 계실 것 같아서요."

이 여자는 정말 귀신인가? 아니면 족집게인가? 맹세코 이 가게에서 이렇게 식사하는 게 처음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유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 편 빈자리를 가리키며 호들갑 떨었다.

"... 어머나, 제가 데이트에 방해가 된 건가요? 그런 거예요?"

결코 몰라서 묻는 게 아닐 텐데 방정 떨며 어쩔 줄 모르는 "척"하는 여자는 왜 이렇게 얄미운 것인가. 툭하면 90도도 아니고 180도 바뀌는 유진의 태도가 대체 누굴 닮아 그런 것인지 대번에 깨달았다.

"아뇨, 뭐.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선배랑 밥 먹는 거였어요. 다만 그 분이 제 직속 사수라서 나중에 실습 종료할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야 되는 분이라는 거죠."

그제서야 유미는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는 "척"을 하더니 말했다.

"저런.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 분 다 저희 가게로 가서 극진히 모셔야 하는 건데요. 잘못 생각했네요."

"아뇨, 그랬다면 그거 나름대로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 같네요."

ROSE에서 난리치던 은애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애가 그 가게에 들어오는 날은 천지개벽이 와도 없을 것이다. 하나 남아있는 클럽 샌드위치를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기분은 우울했지만 맛은 좋았다.

"그럼 2차는 제가 쏠게요."

"네에? 2차요?"

"여기 이렇게 파장 만든 책임은 저니까요, 2차는 꼭 제가 쏘지요."

내 팔을 잡아끄는 유미를 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옷차림이 워낙 헐거워서... 함부로 뿌리쳤다가는 옷이라도 벗기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주저되었다.

"유진이 어머님, 전 근데 룸은 좀...."

"또 그러신다."

"네?"

"아까는 유미라고 불렀잖아요. 그냥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았는데 왜 안 그러세요?"

"그거야, 아까는 유진이 이름을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거구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유미라고 불러주세요. 앞으로도."

유미나 지애나.... 왜 이렇게 자신을 향한 호칭을 내게 강요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대신 룸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유미는 웃으며 다른 곳이라도 대답했다. 그녀와 함께 간 곳은 유흥가에서 조금 벗어나 뒷길에 있는 어떤 작은 가게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이라고는 벽 쪽에 붙은 2인용 테이블 두 개가 전부였고 반대쪽 벽면은 바텐더와 마주 앉은 바로 되어 있었다. 바텐더와 익숙하게 눈인사를 주고받는 걸로 보아 종종 오는 곳인가 보다. 유미는 바 쪽에 앉아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늘 마시던 걸로 두 잔."

오오. 저걸 진짜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대사인 줄 알았는데. 바텐더는 정말 묻지도 않고 투명한 잔 두 개를 꺼내어 거기에 뭔가 따랐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과일을 안에 하나씩 넣더니 우리 앞에 내놓는다. 유미는 그걸 한 잔 비운 후 바텐더에게 두 번째 잔을 요구했다. 나도 살짝 맛보았는데, 떨떠름하고 이상한 술이었다. 술의 이름은 마티니라고 했다.

"제가 몇 살로 보이세요?"

"네? 갑자기 그건 왜...."

사람 기껏 불러다 앉혀놓고는 말도 없이 혼자 술을 홀짝이던 유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나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맞춰보세요. 맞추면 상 드릴게요."

빙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참 매력적이긴 하지만 어째 주겠다는 상의 정체가 수상하다고 생각되어 일단 상은 거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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