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60화 (6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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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키스는 길었다. 문득 예전에 엉겁결에 했던 마리와의 키스가 떠오른다. 지혜로 착각하고 허겁지겁 덤빈 그 키스와 지금의 키스는 차원이 달랐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그리고 마리에게는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리사와의 키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요, 내 몸을 지긋이 눌러오는 감촉까지 비슷한 가슴도 그렇다. 이러다 보니 리사가 떠오르는 건 당연지사. 그도 그럴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감기는 혀의 느낌조차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리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몸도 부드러웠다. 운동을 많이 해서 탄력적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여자였다. 셔츠 안으로 파고 들어간 손은 녀석의 부드러운 복부와 등을 쓰다듬으며 그 위로 점차 올라간다.

"하아...."

둥글고 탱글한 무언가가 손에 잡힌다. 엄지로 언덕 아래를 문지르면서 손가락 전체로 언덕을 잠식한다. 정상에 자리한 말캉한 돌출부를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녀석은 못 참겠다는 듯이 몸을 비비꼬았다. 녀석의 그런 움직임은 내 몸에 있어서도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녀석을 내 몸 위로 더 당기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셔츠가 걷히고 자신의 알몸이 드러나자 마리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서...선배님예....."

녀석의 유방이 내 얼굴 전면에 다가온다. 입을 벌려 한 움큼 베어 문다. 혀로 유두를 희롱하고 입술과 이로 유방을 살금살금 야금거린다. 손은 이미 허리 라인을 지나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지의 버클을 풀어 느슨하게 하고는 실크의 감촉이 감싸고 있는 엉덩이를 어루만진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리였지만 점차 내 움직임에 협력하며 자신의 몸을 맡겨온다. 서툴지만 열의가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나 역시 엉덩이를 살짝 들고 바지를 벗어 내린다. 솟아오를 대로 솟아오른 주니어 덕분에 팬티에 텐트가 제대로 쳐져 있다. 팬티를 까뒤집어 벗어버리자 마리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알몸이 된 나는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마리를 잡아 다시 품에 안는다. 아까와는 달리 서로 몸이 제대로 닿았다. 맨 살이 닿자 마리는 좀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나에게 꼭 붙어온다. 내 손길이 닿자 금세 신음까지 토해낸다.

"하악... 하음....."

다소 버둥거리는 녀석을 가만히 눕히고 팬티를 잡아 내린다. 몸에 걸친 것 하나 없는 나신이 되자 마리는 부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자신의 가슴과 아랫부분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녀석의 다리를 벌리고 갈라진 그 부분에 얼굴을 가져간다.

"거긴 와예...?"

"예뻐해 주려는 건데?"

"그... 그래도 거긴....."

다리를 자꾸 꼬려는 녀석을 달래어 은밀한 부분을 가리지 못하게 한다. 내가 얼굴을 대고 또 혀가 거기에 닿으려니까 녀석이 심하게 버둥거렸다. 아직 경험은 없지만 "느낌"은 이미 알고 있는 녀석이기 때문일까. 혀가 몇 번 닿지도 않았는데 이미 물이 한강이다. 달뜬 신음 소리를 흘리던 마리가 얼굴을 잔뜩 붉히고 내게 물었다.

"어... 언니도 그런 게 했어예?"

"언니 얘기는 왜 해?"

"자꾸 기분이 요상하니까 그라지예."

잔뜩 붉어진 녀석의 얼굴이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아래는 일단 나중에 먹어보기로 하고 다시 위로 올라가 녀석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아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혀를 섞어오는 녀석의 맛을 즐기고 있는데, 그러고 있는데....

"아저씨! 아저씨!"

낯익은 목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온다. 마리와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들처럼 후다닥 몸을 떼고 만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저 목소리는?

"아저씨! 아직 자요?! 아저씨!"

문까지 두드린다. 물론 이쪽 마리네 집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내 자취방 문을 두드리는 거긴 하지만 바로 맞은편인지라 그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마리가 옷을 챙겨 입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조심스럽게 현관을 연다.

"어? 왜 거기서 나와요?"

짧은 미니스커트에 옅은 색의 블라우스. 손바닥만한 핸드백까지 들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여대생 같아 보이는 유진이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녀석은 등 뒤에서 나타난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여기서 아침을 먹느라고 말야."

"아~~~침?"

아주 거짓말은 아닌 내 변명을 들은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뜬다. 내 등 뒤로 마리가 나타나자 날 바라보는 눈은 더욱 더 가늘어진다. 마리는 좀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훌륭하게 대사를 해냈다.

"내사마 선배님 식사 좀 챙기고 있었는데.... 니도 한 상 차리주까?"

"됐어요. 전 원래 아침 안 먹어요."

문득 시계를 본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멀었잖아. 게다가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야?"

그제서야 유진은 몸을 살짝 꼬며 말했다.

"뭐, 어차피 집도 가깝고.... 왠지....."

"왠지 뭐?"

녀석은 날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약속에 안 나오고 도망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하아. 그래서 직접 잡으러 오셨다? 아침도 안 먹고?"

"아침 원래 안 먹는다니까요."

유진이 툴툴거리는 동안 난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 좀 기다려 봐. 나도 나갈 준비 좀 해야지."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마리가 내 옷깃을 잡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녀석이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녀석을 두고 가야 하는 건가. 음... 같이 가자고 부탁이라도 해볼까?

"음, 저기, 유진아?"

"안돼요."

난 아직 용건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단칼에 거절한다.

"뭐가 안 돼?"

"저 아줌마도 같이 가자는 거죠? 전 싫어요."

"왜?"

"싫으니까요. 저 아줌마랑 가려면 그냥 가세요. 전 집에 갈 테니까."

내가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마리가 고개를 젓는다.

"지는 마, 됐심더. 그냥 뭐, 이따 저녁에 보지예."

순순히 납득해주는 마리가 너무 고마웠다. 머리를 슥슥 문질러 주고는 이따 저녁에 보자고 말해두었다. 유진이가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무시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준비를 마치고 유진과 함께 외출을 한다. 애초에 종로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쪽으로 가기로 한다. 종로까지 한 번에 가는 전철 노선을 타기 위해 대학교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집을 나서면서 유진은 내가 아침부터 그 집에 가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며 나를 갈구었지만 내가 내민 선물을 받아들고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녀석은 내가 준 인형이 담긴 쇼핑백을 빙빙 휘두르며 말했다.

"정말 아침에 밥 먹으러 간 거 맞죠?"

"그렇다니깐."

조금 뜨끔하긴 하지만 최대한 표정 변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유진은 한 번 더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쳇. 그런 걸로 해둘게요."

"해두다니. 정말 맞다니까."

"아, 알았다구요."

유진은 내 옆구리를 한번 꼬집더니 발걸음을 크게 내딛어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봤자 나보다 다리가 짧은 녀석이라 금방 따라 잡히긴 했지만... 녀석은 전철역이 왜 이렇게 머냐구 투덜대었다.

"택시 타도 되는데..."

"넌 좀 걸어. 운동 좀 해."

"치잇. 난 아저씨보다 다리가 짧아서 쫓아서 걷기 힘들다구요."

"허이구. 쇤네가 속도를 맞춰 드리겠나이다."

그러나 막상 캠퍼스 내로 들어오니 유진이도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붙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내가 학교 건물 이곳저곳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자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쪽이 도서관이고 이쪽이 공대로 가는 길."

"알아요. 가끔 저기 도서관 가서 공부한 적도 있어요. 1층 열람실에서요."

"그리고 저게 우리 학교 호수야."

"알아요. 축제 때 저기에 배도 띄운다면서요?"

"그러게. 그걸 누가 타나 몰라."

무슨 동아리에서인지 조잡하기 짝이 없는 판자때기 넝마 비슷한 걸 배랍시고 띄워서 돈 받고 대여하기도 한다.

"아저씨는 안 타봤어요?"

"나? 내가 왜?"

수영은 할 줄 알지만 그렇다고 우리 학교 호수에서 수영 하는 건 극구 사양이다. 아, 수영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배가 아무래도 가라앉기 딱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나중에 나랑 타봐요."

"그러니까 내가 왜?"

"내가 타고 싶으니까요."

"아, 예에."

이 녀석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대화를 나누어 보았자 페이스에 휘말릴 뿐이다.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한참 조용히 있던 녀석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중학생 과외 말예요, 계속 해요?"

"어? 어... 그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중학생"에게 전화가 오긴 왔었지. 이 녀석이 쳐들어오기 몇 시간 전에.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으려나. 어디 간다고 하던데... 잘 갔을까? 다시 걱정이 되려는데 유진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진다.

"왜요? 저야 아저씨가 실습 나가는 학교 학생이니까 과외 안 하는 거지만 걔는 아닐 꺼 아니에요?"

"그게 말이야. 시간이 좀 안 맞아서."

"그럼 걔도 그만 해요?"

"응. 그렇게 됐어."

"으음. 난 또 저녁 늦게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묘하게 차분한 녀석의 언사가 마음에 걸린다. 뭔가 눈치라도 챈 건가? 그러나 유진은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과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전철역에 도착했고 종로까지 갔다. 이른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제법 많았다. 시간이 이래서 조조영화라도 볼 수 있나 했더니만 얼마 안 되는 시간 차이로 조조는 지나가버렸다. 다음 화를 보니 어라, 벌써?

"데블스 오운은 다 매진이라는데?"

"늦게도 없어요?"

"그런가 보더라. 브레드 피트가 인기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간판에 그려진 브레드 피트와 해리슨 포드를 보았다. 물론 저게 브레드와 해리슨이라는 걸 알고 봤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만 모르고 봤으면 웬 시골농꾼 둘이 서 있는 그림인줄 알겠다. 극장 간판의 묘미는 바로 실제와 제법 큰 간격에 있다. 유진도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다가 이내 팸플릿으로 시선을 돌린다.

"당연하죠. 멋있잖아요."

"너도 브레드 피트 좋아하냐?"

"싫어하지는 않아요. 아저씨는 가을의 전설도 안 봤어요?"

"응, 근데 너 전에는 한석규 좋아한다더니..."

"여러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죠."

"예, 예. 암튼 어떻게 할래? 영화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곳은 영화관이 모여 있는 곳이니 다른 영화관을 찾아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길을 건너야 하나 돌아보고 있는데 유진이 내 팔을 잡아끈다.

"아직 매진 아닌 영화도 있던데요."

"뭐가?"

"저거요."

유진이가 가리킨 것은 쁘아종이라는 영화였다. 그런데 포스터가 어째 좀 야릇하다. 게다가 우측 하단에 빨간 글씨로 떡하니 박혀있었다. "미성년자관람불가"

"야, 저건 성인영화잖아."

"뭐, 어때요. 아저씨가 가서 두 장 사와요."

"입장할 때 체크할 거 아냐."

"엄청 동안이라고 우기면 돼요."

기가 막혔다. 이놈은 무슨 논리가 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말이 되냐."

"방법은 다 있으니까 일단 표나 사와요."

녀석의 완고한 기세에 등 떠밀려 매표소로 다시 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아크릴 칸막이에 대고 쁘아종 두 장을 말했더니 작은 딱지처럼 생긴 티켓 두 장을 내준다. 표를 사 가지고 돌아오니 유진이 묻는다.

"시간이 어떻게 돼요?"

"지금 바로 시작인데?"

"빨리 가요, 그러면."

상영관 입구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표를 검사하던 직원이 유진이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럼 그렇겠지. 체크를 하겠지. 괜히 아까운 표 값만 날리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 제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요?"

당황하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유진이가 핸드백에서 뭔가 꺼내들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돌려준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유진에게 그게 뭐냐고 살짝 물어보자 녀석이 말없이 그것을 내밀었다.

『S대학교 영문학과 임승현』

대학교 학생증이었다. 이름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유진이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런 것도 만들었어?"

"다양한 영화를 보러 다니려면 필수죠. 뭐."

세상에. 별게 다 필수구나. 나중에는 위조여권을 가져오면서 많은 나라를 여행하려면 필수품이라고 하시겠어.

"대체 누구야, 이 임승현이라는 사람은."

"전에 저희 가게에서 잠깐 일했던 언니예요. 그 언니도 영화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런 빈틈없이 노련한 사기꾼을 보았나. 아, 물론 이 말은 내 속으로만 했다. 그나저나 S대학교면 우리나라에서 명문 중의 명문인데 거기 다니는 아가씨가 이런 가게에서 알바를 했다고? 좀 의아하긴 하지만 가끔 신문 같은 데서 나오는 명문대생 호스티스 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런가 보다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사기꾼에 대해 생각했다.

"하아. 너란 녀석은 정말이지..."

"영특하다고요?"

"그래, 인마! 영특하기 그지없다. 아주 그냥."

"으흠. 알면 됐어요."

"어이구."

자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조명은 이미 꺼져 있어 실내가 제법 어두웠지만 스크린에서 광고가 나오고 있었기에 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 많은 종로에서 일요일 낮에도 이 정도로 사람이 없다는 건 흥행이 별로 안 되고 있다는 건가. 다른 영화는 매진 사례던데. 유진이와 나는 뒤쪽 줄에서 적당히 가운데인 곳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영화가 그렇고 그런 영화다 보니 곳곳에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꼭 붙은 채로 있었다. 문득 유진이와 내가 같이 있는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 무렵,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으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낀 생각은 불편함이었다. 스토리도 좀 뜬금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난데없는 베드신이 강렬하게 펼쳐지는 통에 굉장히 거북했다. 전에 유진이와 같이 봤던 은행나무침대 앞부분에 나왔던 야한 장면은 이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었다. 악독 경찰로 나오는 녀석이 여주인공을 잔인하게 폭행하고 강간할 때는 나도 모르게 유진이 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괜스레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곳곳에 널려있는 커플들은 영화보다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몽환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영상이 펼쳐지고 있다면 이쪽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에로티시즘이다.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를 난감함 속에서 영화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부산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유진이가 먼저 일어나더니 날 내려다본다.

"안 일어나세요?"

"아, 가야지. 그냥 좀 앉아 있을려구."

"왜요? 혹시 흥분해서 발기했다거나..."

으악!! 얘가 진짜!!!

"얌마! 닌 여자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뭐, 어때요. 조절 불가능한 생리현상이잖아요. 우리도 성교육 시간에 다 배웠어요."

"아무리 그래도 니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 특히 내 앞에서."

"치잇."

궁시렁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서둘러 극장을 나섰다. 아까 열심히 서로를 탐닉하던 한 커플은 우리를 보며 뭔가 소곤거렸다. 이 사람들아! 난 너네처럼 이상한 짓은 결코 안 했거든? 응? 지금 비록 유진이랑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건 그냥 어두운 곳에서 애 잃어버릴까봐 손 잡아주는 거라고! 아, 진짜라니깐!

종로에서 황학동까지 걸어가서 이런 저런 구경을 했다. 황학동에는 벼룩시장이 있었다. 사람만 빼곤 뭐든지 판다는 그 이상한 시장을 구경하는 게 뭐 그리 재미있는지 유진이는 특이한 물건을 볼 때마다 연신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이태리 음식 전문점 하나에 들러서 다소 느끼한 스파게티도 한 그릇 비운 다음 녀석에게 이끌려 전자오락실도 갔다. 납작한 플라스틱 공을 쳐내는 게임을 했는데 운동신경이 나름 있다고 자부한 나였건만 영악하게 플레이하는 유진에게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말았다. 그나마 농구공을 던져 넣는 게임은 내가 이겨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오락실을 나와 옷구경을 하고 싶다는 녀석을 따라 옷가게가 많은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쩐지 녀석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아침부터 걸음걸이가 좀 느리다고 생각은 했다만 지금은 숫제 거북이 수준이다. 녀석을 붙들고 신발을 벗어보라고 했다. 유진은 괜찮다고 극구 주장을 했지만 억지로 근처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혀놓고 녀석의 구두를 벗긴다. 주제에 하이힐까지 신고 나오다니. 이 녀석. 어쩐지 전보다 갑자기 키가 컸나 싶었다.

"이래 놓고 어딜 걸어가? 피나는 구만."

발뒤꿈치가 다 까져있고 엄지와 새끼발가락 부분은 벌겋게 되어있었다. 혀를 끌끌 찼지만 유진이는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안 아파요."

벌겋게 된 부분을 한 번 쿡 찌르자 꺄악하는 비명을 지른다.

"억지 부릴래? 너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가만있어."

아까 지나오면서 본 약국으로 가서 반창고를 샀다. 한 블럭 더 돌아가니 신발가게도 하나 있기에 컨버스화 하나와 스포츠 양말도 샀다. 그걸 가지고 유진에게 돌아가니 녀석이 성질을 부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도망간 줄 알았잖아요."

"도망?  무슨 나한테 돈 빌려준 거 있냐? 너 아침부터 왜 그래?"

"그럼 알아서 잘 하든가...."

"으이구. 이거 사느라 그랬지. 그만 궁시렁 거리고 발 대봐."

벤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녀석의 발에 반창고를 붙이고 스포츠 양말을 신겨주었다. 운동화까지 신겨주고 나서 올려다보니 녀석이 얼굴을 붉힌 채 딴 데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발을 만지는 게 많이 간지러웠나?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녀석을 향해 좀 유세를 부려본다.

"인마, 고맙다는 소리도 못 해?"

"누가 그렇게까지 해 달랬어요? 치잇. 신발 색깔도 이게 뭐야. 완전 구려. 그리고 지금 내 옷에 양말이라니. 이게 뭐예요.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본전도 못 찾았다. 버럭 하는 심정으로 소리 질렀다.

"그럼 벗어!"

"어머, 어디 여자한테 막 벗으라 마라 하고 그래요? 길바닥에서 그러는 건 진짜 변태거든요?"

"끄아아아악...."

술 사주고 뺨맞는다던데 난 양말에 신발까지 사주고 변태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말 섞기도 귀찮아서 녀석의 하이힐을 챙겨 쇼핑백에 담았다. 그러는데도 유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안 가?"

"......발이 아파서 못 걷겠어요."

"아까는 안 아프다며!"

"아저씨가 만지작거리니까 아프잖아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반창고를 붙여주고 푹신한 양말까지 신겨주었건만... 이 녀석의 억지는 가히 월드클래스 급이다. 억지 부리기 월드컵 나가면 본선 진출은 물론이요, 16강 4강이 문제가 아니라 곧바로 우승이다, 우승.

"그럼 여기 이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게?"

"옷 사러 가야죠."

"그럼 일어나."

"발 아파요."

"으으.... 진짜...."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노라니 녀석이 팔을 뻗는다.

"왜?"

"업어 줘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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