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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금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이 썰렁하고 격 떨어지는 아저씨 유머에 맞장구 치면서 웃은 녀석이 은애 맞나. 현아는 잠자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저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는 은애가 분명하군. 아까까지의 은애 태도와 지금의 태도의 차이는 뭐랄까. 지층 변동에 의해 발생한 땅 갈라짐 만큼이나 심했다. 이에 따른 아노미에 버금가는 가치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동안 차는 종로에 도착했다.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모두 내리자 누군가 나와서 형에게서 키를 받아간다. 오. 저게 말로만 듣던 발렛 파킹? 주차원이 차를 대는 동안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갔다. 중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레스토랑 입구가 나타났다. 커다란 나무를 음각한 간판에는 이탤릭체로 뭔가 써 있기는 한데 영어는 아니었다. 못 읽을 글씨였다. 프랑스어인가 이태리어인가. 암튼 그런 분위기다.
안으로 들어서자 나이 든 지배인이 태근이 형을 알아보며 정중히 인사한다. 딱히 우리에게 어디 앉을 거냐고 묻지도 않고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칸막이 너머 별도의 공간에 자리한 널찍한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이 한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긴 하는데 들여다봐도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얼핏 보니 은애나 현아의 표정도 마찬가지인 걸로 보아 나처럼 곤란한 모양이다. 내가 대표로 나서 형에게 주문을 부탁했다.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한 형은 메뉴판을 펼칠 생각도 않고 지배인에게 바로 묻는다.
"오늘 세프 추천 메뉴가 어떻게 되죠?"
"샤토브리앙 스테이크입니다."
"소스는요?"
"양송이 포트 소스와 페퍼콘 소스가 준비되어있습니다."
태근이 형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뭔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가 마구 쏟아지고 있다.
"지난번에 보니까 소스가 너무 무겁던데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들도 있으니까 고기는 좀 더 연하게 해주시구요."
"예."
형은 그 외에도 거위간이라느니 녹두 스프라느니 샐러드, 디저트, 즐겨 먹던 와인 등을 익숙하게 늘어놓으며 주문을 마쳤다. 우리에게서 스테이크를 굽는 정도에 대해 묻고 나서 지배인이 물러가고 나서 또 다른 웨이터가 와서 테이블 위에 놓인 초를 밝히고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나는 형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형, 고기 먹으러 가자는 게 설마 이 고기였어요? 스테이크?"
"응. 스테이크는 고기로 만들잖아."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비싸 보이는데."
그러나 형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래 보았자 다 사람 먹는 건데 뭐 어때?"
라며 씨익 웃는다. 돈이야 뭐 형이 낼테니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전혀 안 보였는데 이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효진이만 하더라도 평상시에는 그런 거지꼴...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대충 입고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외제차를 끌고 와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 사람도 평상시에는 그다지 돈 있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렇지만 이런데 와서도 결코 재거나 뻐기지 않고 늘 그렇듯이 사람을 꽤 편안하게 대해 주는 게 한결같다. 여러 면에서 효진이를 생각나게 한다.
"요새 효진이는 뭐해요?"
먼저 나온 스프를 떠먹으며 묻는다. 형은 테이블에 놓인 빵까지 찍어 가며 열심히 먹고 있었다. 프랑스 식당인지 이탈리아 식당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고 형이 이런데 자주 오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테이블 매너는 참 한국적이다. 곧이어 사토브리앙인지 사탕불알인지 뭐시기 하는 스테이크가 나왔다. 형은 꽤 큼직큼직하게 썰어 먹으면서 답했다.
"걔야, 뭐. 별거 있나. 맨날 집에서는 선보라 그러고 본인은 도망다니고 있고 그러지. 아버지가 차 압수했는데도 어디서 오토바이 하나를 끌고 와서는 그러고 다니더라. 걜 누가 데려가나 몰라."
오토바이를 탄 효진이라.... 머릿속에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진다.
"전에는 지혜 집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말이야. 요새는 어디 박혀 있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더라구. 나도 뭐, 신경 끄고 산다. 지가 알아서 잘 하겠지."
"동생인데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에요?"
"어린 애도 아니고... 그리고 나 말고도 걜 보살피는 사람은 많거든."
"그게 누군데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
당최 이해가질 않는 이야기를 연신 늘어놓는 형에게 뭔가 더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효진이 이야기는 그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기를 썰어먹는다. 입에 넣어 씹어보니 상당히 부드럽고 육질이 좋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육적만큼이나 말이다. 아니, 육적보다도 훨씬 두툼한데도 더 부드럽다니. 이럴 수가.
"여기 진짜 맛있다. 그치, 현아야?"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은애와 현아를 바라본다. 나와 마주 앉은 은애는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하며 말하고 있었고 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깨작거리면서 먹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답답할 지경이다. 이런 쪽은 잘 안 맞는 것 같다. 신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은애가 밝은 표정으로 형에게 말을 건다.
"오빠는 여기 자주 오세요?"
"나? 뭐.. 그냥 고기 먹고 싶으면 오고 그러지. 내가 입이 좀 짧아서 말이야. 가던 곳만 자꾸 가고 그래."
"어머나. 그래도 몸이 좋으신데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어요?"
아아. 속이 거북하다. 전에는 태근이 형이 무슨 말만 했다하면 아주 총알이라도 나갈 것처럼 쏘아대던 은애가 지금은 형에게 과도한 시선을 퍼부으며 꿀 발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형은 은애에게는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맞은 편에 앉은 현아를 계속 신경썼다.
"고기가 질기지 않아? 내가 썰어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러자 은애가 나선다.
"오빠, 저는 잘 못하겠어요."
"그래? 근데 넌 웰던이라 그냥 썰면 될 거야. 힘내라."
울상이 된 은애의 모습이 몹시 웃겼지만 속으로만 웃기로 했다. 그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현아에게 묻는다.
"현아야. 넌 와인 안 마셔?"
"응. 난 별로 그다지... 맥주라면 모를까."
현아의 말을 들은 은애는 크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머, 얘. 원래 스테이크에는 레드 와인인거 모르니? 상식이잖아. 무식하게 맥주가 뭐야. 맥주가."
그... 그런 상식이 있었나. 난 내 앞에 놓인 와인 잔에 채워진 붉은 술이 영 술 같지 않고 달짝지근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스테이크 먹을 때는 레드 와인을 먹었어야 하는 거구나. 하아. 오늘도 지식이 하나 늘었다. 그러나 태근이 형은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형은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 주세요."
웨이터가 가져와 현아와 형 앞에 놓은 맥주잔을 보면서 은애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맥주를 청한다. 솔직히 상식이라는 와인과 스테이크는 대체 어떤 궁합인지 모르겠는데 맥주에 스테이크는 꽤 잘 어울렸다. 현아도 맥주는 한 잔을 다 비웠다. 그런 분위기로 식사는 주욱 이어졌고 후식으로 나온 샤베트까지 먹고 나서 한참 만에 레스토랑을 나섰다. 은애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남기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먼저 휑하니 가버렸다. 태근이 형은 은애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현아를 돌아본다.
"현아는 어떻게 할래? 태워줄까?"
"아뇨. 전 지하철 타고 갈게요. 그리고 오빠 술 드셨잖아요."
"아, 그랬지. 참....."
잘 먹었노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는 현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태근이 형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인마."
"쟤가 어디가 좋아요?"
"귀엽잖아."
순간 머릿속으로 형과 현아가 나란히 걸으며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여태 참았던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서 크게 웃어버렸다.
"이게 비싼 밥 먹고 돌았나, 왜 웃냐. 인마."
"아, 아뇨. 형이랑 현아랑 사귀는거 잠깐 상상해봤는데...."
"그래? 어때? 잘 어울리지 않냐?"
"네. 진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녀지간 같아요."
잘 어울린다는 소리에 잠깐 좋아하던 형은 뒤에 이어진 단어의 의미를 좀 늦게 파악하고는 나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으윽. 효진이가 헤드락 걸 때는 좀 좋았던 말캉함이라도 있었지만 남자가 걸 때는 정말 괴롭구나. 탭! 탭! 기브업!!!
태근이 형과 헤어지고 집에 가려다가 마침 종로에 온 걸 깨닫고 교보문고에 들렀다. 베스트 셀러 쪽과 신간 서적 쪽을 기웃거리며 보고 싶었던 책 몇 권을 골랐다. 문체가 마음에 드는 소설을 서서 한참 동안 읽기도 한다. 마음 같아서는 더 사고 싶기도 했지만 이번 달은 유진이 과외를 쉬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준 용돈 말고는 쓸 돈이 별로 없어서 자제했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다가 팬시 매장에 놓인 인형 판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유진이에게 사주었던 그 인형과 같은 시리즈인 모양이었다. 생긴 건 이상하게 생겼는데 다른 종류가 계속 나온다는 건 이게 나름 인기 있다는 건가. 하긴 내 침대 위에도 하나 올려져 있으니 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인형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일 녀석을 볼텐데 사과의 의미로 하나 사다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확인해보니 으음.... 좀 아슬아슬 하긴 하지만 인형 하나 못 살 정도는 아니다. 가격표를 보니 두 개도 살 수 있긴 하다. 그런데 막상 사려고 하니 이것도 꽤나 난이도가 있는 선택이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옷차림이나 포즈 같은게 조금씩 다르다. 고민이 깊어진다.
"여기서 뭐 하세요?"
으아. 깜짝이야. 생각에 잠겨있어서 뒤에서 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현아가 서 있었다. 손에 들린 종이봉투로 보아 그녀도 여기서 뭔가 산 모양이다.
"아, 책 좀 사려고 왔어요."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살짝 들어 보여준다. 그러자 현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 앞에 놓인 인형 판매대를 가리킨다.
"근데 펀치 브라이스 인형은 왜 보고 계세요?"
"펀... 뭐요?"
"펀치 브라이스요. 지금 바로 앞에 있는 거 말이에요."
인형이면 그냥 인형이지 무슨 이름씩이나 붙어 있냐 이건 대체. 눈만 커다란 그 인형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살펴본다. 그제야 박스에 휘갈겨 써 있는 글씨가 펀치 브라이스라는 걸 알았다. 한 번 사보기도 했고 선물 받아보기도 했는데 이름을 안 건 처음이다.
"헤에. 이게 이름이 있었군요. 몰랐네요."
"어머, 이거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데.... 들여다보고 계시기에 당연히 아시는 줄 알았어요."
현아가 자연스럽게 내 곁에 서더니 자기도 인형을 골라본다. 내가 보기엔 입고 있는 옷만 다르고 다 똑같은 녀석인거 같은데 현아의 말에 따르면 애들마다 종류가 다 다르단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고르기가 더 어려워졌다.
"전에 한 번 사본 적은 있는데... 뭐가 좋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요."
"선물 하시게요?"
"아, 예. 고등학생인 녀석인데... 전에도 한 번 사준 적이 있구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순간 우리 고등학교 녀석이라고 말할 뻔했다. 어쩐지 그건 밝히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동생이세요?"
"아뇨. 동생은 아니고.... 전에 과외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러시구나...."
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러 인형 중에서 두 개를 골라 각각 한 손에 집어 들고 날 보여준다.
"얘네들 어떠세요?"
내가 볼 때는 둘 다 똑같이 못생겨 보인다. 별수 없이 현아 보고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인상까지 써가며 한참 고민하더니 둘 중에서 빨간색 외투를 입고 있는 녀석을 내민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 군말없이 계산을 치른다. 포장까지 해 달라고 해서 돌아오니 현아가 아직도 그 인형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것저것 들어보다가 가격표를 확인하고는 도로 내려놓는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다.
"마음에 드시나 봐요? 현아 씨도 하나 사드릴까요?"
"네? 아뇨. 뭐하러요. 괜찮습니다."
"골라주신 거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괜찮아요."
두 손을 뻗어 맹렬하게 흔드는 그녀를 보니 태근이 형 말마따나 나름 귀엽긴 했다. 나중에 형한테 이 인형을 사라고 귀띔을 해주어야겠다. 난 이제 볼일이 끝났고 현아도 책을 다 샀다고 하기에 함께 서점을 나와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학교 근처란다. 나랑 같은 방향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말했더니 맞단다. 역시 우리 동네는 학교랑 가까우면서도 빌라 같은 게 많아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나는 버스정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라면 여기서 버스 타고 가는 게 더 빨라요. 전철은 한 번 갈아타야 되는데 버스는 한 번에 바로 가거든요."
"아, 정말요? 전 몰랐는데..."
우리 둘은 발걸음을 돌려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주에 있었던 교생실습 이야기가 주된 화제였다. 현아는 자기 담당인 선생이 엄청 늙은 남자 선생님인데 말을 하도 웅얼거려서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는 술에 찌든 나날과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인 고충을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동네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서 올라탔다. 자리가 딱 한자리 남아있기에 현아를 앉혔다. 나는 의자 등받이와 천장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짐은 저 주세요."
"그럴까요?"
책과 인형이 담긴 종이봉투를 현아가 받아들었다. 포장되어 있는 인형 박스를 만지작거리던 현아는 내게 물었다.
"과외하는 학생이 귀여운가 보죠?"
"엑? 귀엽다기 보단... 건방지죠. 쪼끄만 게."
그러자 현아가 풋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도 쪼끄마한 데요?"
"아아.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쪽도 만만치 않게 쬐깐하군. 굉장히 실례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내가 사과하자 현아는 손사래를 치며,
"아뇨. 정말 괜찮아요. 제 별명도 그런데요. 뭘."
란다. 그녀의 태도가 날 안심시켰다. 안심은 되는데 궁금한 게 생겼다.
"별명이요? 뭔데요?"
"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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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브라이스란 인형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비슷하거나 겹치는 것이 있어도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