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51화 (5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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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그러면 나도 따라 올라가지 뭐. 여기서 돌아가는 길은 안 그래도 빡빡한데 말야."

예전에 춘천에 한번 놀러온 적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몹시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버스 타고 춘천역인가 어딘가 가서 또 경춘선 타고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길도 기억이 잘 안 나고 말이다.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차가 있을 때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그러자 그럼. 마리도 괜찮지?"

효진이가 묻자 마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다 같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지혜에게 한 번 더 인사를 할까 했지만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정신없을 텐데 거기에 더 보탤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이제 완전히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그녀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볼 일 없겠지. 보아서도 안 되고.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홀을 한 번 더 둘러본다. 역시 그놈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 본 게 틀림없다. 하기야 여기가 어디라고 그놈이 무슨 낯짝으로 오겠는가 싶다.

"선배님요. 안 가세여?"

"간다, 가."

계단 아래쪽에서 날 재촉하는 마리의 머리를 한번 흐트러뜨리곤 앞서 걸어간다. 효진이가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은색 JEEP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를 기다린다. 마리가 뒤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탔다.

"일단 가평까지는 내가 운전할게. 그 뒤는 니가 좀 해줘."

"알았어. 인마. 어? 근데... 너..."

바로 옆에서 효진이의 얼굴을 봤더니 눈가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설마 울었어?"

"울기는."

효진이 씨익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효진과 지혜 사이도 남들이 모르는 뭔가가 확실히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굳이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그냥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은 꽤나 막혔다. 아까 춘천 들어갈 때 막힌 것 이상이었다. 점심시간 조금 지나 출발 했건만 우리 집까지 도착했을 때는 저녁시간이 다 되었을 정도였다. 꽤나 오래 걸리고 말았다. 자기 오빠한테 안 혼나려나 걱정되는데 효진이 녀석은 우리를 집까지 태워다주었다.

"지하철역에 내려줘도 됐을 텐데. 암튼 고맙다."

"고맙기는. 너도 애썼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리를 깨워 데리고 내린다. 효진이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곤 차를 출발시켰다. 선 채로 졸고 있는 마리를 자기 집에다 들여보내고 나도 집으로 돌아온다. 정장을 벗는다. 옷걸이를 꺼내와 그것을 잘 걸어두었다. 리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에게 보내진 청첩장을 숨기고 그러면서도 이런 옷을 준비해놓고 있었을 리사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문득 리사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오늘 아침에 출발했으니 지금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예전에 받아 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예린의 명함을 꺼내어 전화를 건다. 신호가 몇 차례 가더니 누군가 받는다.

"네. 성예린입니다."

무뚝뚝한 낮은 목소리는 여전하다.

"아, 예린 씨? 최한석입니다."

"아, 예."

"도착했어요?"

"예."

"리사는요? 같이 안 있나요?"

"아가씨는 사무실에 가셨습니다."

"아, 그래요."

"......"

"......"

뭘 물어도 단답형의 대답. 거기서 대화가 뚝 끊긴다. 하기야 내가 예린이랑 무슨 이야기를 해봤어야 말이지.

"에..... 운전 오래 했을 텐데 안 피곤해요?"

"괜찮습니다."

회심의 안부 묻기 질문도 단칼에 대화종료. 예린과의 대화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그럼 저... 리사에게 선물 잘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늦게라도 저한테 전화 좀 달라구 해주시구요."

"알겠습니다."

무슨 ARS 상대로 통화하는 기분이다. 용건을 남기고 끊으려는데 예린이 나를 부른다.

"한석 씨."

"네?"

"......마리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부디."

"아, 예."

갑자기 마리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앞집 사니까 잘 봐달라는 걸까. 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난 별 생각 없이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린은 그때 칼국수 집에서도 내게 이런 식으로 인사를 했었다. "부디 리사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와 리사가 뭘 했더라....

순간적으로 멈칫한다. 설마. 설마....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막연한 생각 하나가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운다. 설마 예린은 리사가 그 날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쉬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런 식으로 "부탁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나. 그걸 그녀가 어떻게 알지? 문득 아침에 마리가 중얼거렸던 말이 떠오른다. "언니한테는 얼추 듣긴 들었습니다만...."

크악-

그러고 보니 대체 이 여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어디까지 서로 주고받는 건가 싶다. 나야 형제가 없이 자라서 친형제나 자매 지간에 당최 어떤 대화를 하는지 전혀 감도 안 잡히지만 적어도 나는 사촌 형들이나 사촌 누나들에게도 내가 동네 누구누구를 좋아하는지조차 말한 적이 없다. 하물며 남녀 사이에 있었던 밤의 일까지 이야기한단 말인가? 사촌 형제와 친형제는 다른 건가?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만약 예린이 항상 그래왔듯이 계속 리사 곁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날 리사와의 밤은 성사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대쉬하기로 마음먹은 리사가 예린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내가 여자라면.... 어떤 남자를 유혹하겠다고 할 때 그런 이야기를 자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할 것인가 싶다. 아니지. 아니지. 마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리사라면 그런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했지만 답은 나올 리 만무했다.

나의 결론은 내려졌다. 역시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다.

신발을 챙겨 신고 집을 나와 앞집으로 향한다. 그래보았자 딱 두 걸음 거리다. 문을 두드리려다가 멈칫했다. 마리를 불러서 대체 뭘 어떻게 물어본 건가 싶다. 급한 마음에 집을 뛰쳐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설마 마리를 불러내 가지고,

"니 언니랑 나랑 어젯밤 한 거에 대해서 어디까지 들은 거야?"

............라는 직접적이고 다이렉트한 질문이라도 할까. 그게 아니면,

"헤이, 유어 시스터랑 미랑 섹스했다! 라스트 나잇에!"

...........라고 미쿡인처럼 쾌활하고 가볍게 이야기라도 할까. 마리는 영어에 약하니까 이게 좀 먹힐지도...... 허이구. 내가 드디어 돌았구나. 이런 미친 생각까지 하고 말이다.

늘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던 문을 코앞에 두고 난 한참동안이나 끙끙거려야 했다. 오늘 아침 마리가 보인 태도라든가 리사가 혹시나 남겼을 말이라든가 암튼 뭐든 간에 마리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화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꽤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일단은 밥이라도 먹자는 이야기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살짝 뜬금없는 말이고 다소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을 시간도 가까워졌기에 그리 갑작스럽거나 어색한 제안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그러기 직전 나도 모르게 손을 멈추게 된다. 묘한 소리를 들은 탓이다. 그것은 목소리라기 보단 신음에 가까웠고 리사와 밤을 바로 어제 보낸 나에게 있어 그리 낯선 소리가 아니었다. 나직하고 가느다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들을 수가 있었다.

"하아...하아..... 선배님요...... 하악........"

귓가에 전해지는 소리는 분명 마리의 목소리. 그러나 평상시의 쾌활하고 목청 큰 그런 마리의 목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젯밤 내 품 안에서 그 눈부신 몸을 퍼뜩거리며 달콤한 신음을 흘려대던 리사의 목소리 같았다.

"하음....하악...하악...하...."

달뜬 목소리가 나를 이끈다. 현관 문고리를 쥐고 살짝 돌려본다. 잠겨있지 않았다. 돌아간다. 문소리를 내지 않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연다. 내 몸이 들어갈 정도로만 당겨 열고 몸을 비집고 넣는다. 역순으로, 다시 천천히.... 결코 문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닿는다. 손바닥에서 땀이 저절로 난다.

"아항....하흥....하악....하아악....."

마리의 방은 바로 이 쪽, 현관 바로 옆방이었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만 걸어 거실에 올라선다. 반쯤 열려있는 문 안에서 예의 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짝.... 정말 살짝 문을 더 밀어 열고 안쪽을 들여다본다. 싱글 침대 위.... 아직 옷도 채 다 벗지 않은 마리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있기에 그녀의 손동작이 보이진 않지만 팔 한쪽은 두 다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러고 있지?

"하아...하아..... 선배님요...... 하악........"

내 귀를 의심한다. 녀석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 그래, 물론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녀석이 동기들과 친하게 어울려 지내는 것처럼 나 말고도 친한 다른 선배가 있을 수도 있지. 마리가 부르고 있는 저 선배가 꼭 최한석만을 의미한다고는 안 했잖아. 그렇지만 묘한 열기에 취해버린 나는 어느 샌가 문을 밀고 몸을 방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침대에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마리는 나의 존재를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킨다. 손을 뻗는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마리를 불러서 어쩌겠다는 걸까. 지금이라도 못 본 척하고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자신의 비밀스러운 행위가 들통 났을 때 마리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생각보다도 내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음란한 욕구가 나를 더 과감하게 만들고 있다. 마리가 "스스로" 위안하게 만들지 말고 "나를 사용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저열한 욕망. 이미 난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여인과 지난 밤 뜨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 때의 리사가 얼마나 뜨거운 몸을 가졌는지 새삼 깨닫지 않았나. 리사와 쌍둥이인 마리라고 내가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는가.

뭔가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손을 뻗는다. 욕망이 날 이끈다. 손이 닿았다. 내 손가락이 마리의 어깨에 닿았다.

"꺄악!"

역시 마리의 목소리는 진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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