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50화 (5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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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점

서울을 벗어나서 한참을 달린다. 한 시간 정도 국도로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차를 세웠다. 효진이 말로는 평소 같으면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갈 거리인데 주말에는 차가 많이 밀린단다.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씩 시킨다. 효진에게 왜 자주 안 왔느냐고 묻자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지혜도 없는데 내가 뭐 하러?"라며 반문한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노라니 효진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 등을 두드린다.

"보고 싶으면 연락하지 그랬어? 어휴~ 우리 한석 군. 이 누나가 보고 시퍼쪄여?"

"놔라. 내가 왜 널 보고 싶냐. 너도 나 안 보고 싶어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락처도 모른다고."

"어라? 내가 안 가르쳐 줬던가?"

그제야 펜을 하나 꺼내더니 냅킨에다가 자기 꺼라면서 휴대전화 번호를 하나 적어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대전화라면 몹시 바쁘게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나 들고 다니는 거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꽤 대중화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언젠가 개나 소나 다 휴대전화를 들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효진은 메모를 건네주며 말했다.

"연락처를 물어보지 그랬어."

"말을 할래도 니가 또 안 왔잖아."

"아, 그렇지."

효진은 무슨 상관이냐면서 대충 웃고 넘긴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은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라면 자기 친구 청첩장만 이런 식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기 결혼식 때가 되어도 뜬금없이 문 앞에다 청첩장만 떨렁 던져놓고 가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게 아니면 지 결혼식에 날 부르지도 않아놓고 나중에 가서 "야, 니 왜 안 와?"라며 따질지도 모를 녀석이다. 어떻게 보면 마리보다 더한 벽창호라면 벽창호다. 마이 페이스의 지존이랄까. 더 이야기해보았자 속만 탈 것 같아 화제를 돌린다.

"근데 저건 웬 차야? 게다가 외제차잖아. 저건."

"저건 오빠 차야. 내 차는 수리 중이라서 말야. 아빠는 차를 안 빌려준다 그러고."

효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쪽쪽 거리며 여상스럽게 대꾸한다. 니 차는 또 따로 있었습니까? 게다가 아빠 차나 오빠 차라니. 어째 이 녀석 평소 하고 다니던 꼬락서니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게 집이 좀 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입은 차림새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좀 세련되어 보이기도 하고 옷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비싼 옷 같다.

"자자, 그럼 얼른 출발하자. 춘천 접어들면 또 한참 막혀."

출발 직전 효진은 나에게 면허가 있냐고 묻더니 그렇다고 대답하자 곧바로 운전을 내맡긴다. 자기는 뒷자리에 가서 쿨쿨 자 버린다. 코까지 골면서 말이다. 난데없이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외제차 운전이라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나중에는 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마리는 아까 효진이랑 있을 때와는 영 딴판으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평소 같으면 자기 하고 싶은 말로만 적어도 수백마디는 하고도 남았을 녀석인데 그러고 있으니 꼭 다른 사람 같다. 어째 아까 휴게소에서도 조용하더라니.

효진의 예상대로 춘천에 접어들기 시작하자 차가 제법 밀리기 시작했다. 청첩장 약도에 따르면 결혼식장은 춘천시청 근처였다. 차에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는 화면도 달려있었다. 현재 위치에 따라 자동으로 지도가 갱신되는 신묘한 물건이다. 이정표로 보면 이제 몇 킬로미터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차가 좀처럼 나가질 않았다. 정체되고 있는 틈에 마리를 불러본다.

"마리야."

"......."

대답이 없다. 조금 힘주어 다시 불러본다.

"어이, 김마리."

"......와예."

뾰로통한 대답이 돌아온다. 힐끔 보니 입이 이만큼이나 나와 있다.

"왜 그렇게 심통이 나 있어?"

"제가 뭘예?"

"그렇잖아. 평소와는 다르게 얌전하고...."

"핫. 지는 얌전하믄 안 됩니꺼? 언니맨치로 얌전하면 또 누가 이쁘게 볼란지 누가 압니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심각한 표정의 마리를 옆에 두고 웃으면 좀 미안할 것 같아서 간신히 입을 틀어막기는 했는데 그 전에 새어나온 웃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그게 더 부아가 나는 모양이다.

"짐 웃었어여? 남은 마, 속이 확 디비지는데 여서 웃고 막 그랍니꺼!"

"푸하하하하."

결국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하고 만다. 볼을 부풀리고 씩씩거리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더 웃겨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시선을 앞으로만 유지한다. 길이 좀 뚫린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니 서서히 미끄러져 나가면서 차가 굴러간다. 그러다 또 금세 정체되고 만다.

"아아, 미안. 비웃는 건 아냐. 정말 마리 모습이 웃겨서 그래. 귀엽기도 하고."

"증말 못됐꾸루....."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서 김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쉰다. 뭐라고 한참 꿍시렁거리는데 반 수 이상은 못 알아먹겠다. 그저 오른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어째 내가 미안해야 되는 거 같기는 한데.... 일단 네 언니랑 나 사이는 문제잖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지 성격대로라면 내 손을 물어뜯었을 법도 한데 다행히도 마리는 얌전히 있었다. 녀석은 시트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언니야랑 내랑은 그렇게 착 분리가 안 되니까 그라지요....."

"뭔 소리야, 그게?"

"선배님은 몰라도 됩니더. 그런 게 있어예."

알쏭달쏭한 소리였지만 그 사이 시내에 완전히 진입했기에 운전에만 집중해야 했다. 효진을 불러 깨우고는 길안내를 시킨다. 초행길이라 헤매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문제없이 결혼식장에 도착했다. 식이 시작하려면 아직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식장으로 올라간다.

결혼식장은 꽤나 복잡했다. 단일 식장인데도 불구하고 커다란 홀에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효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리의 손을 잡고 따라간다. 효진이가 신부 측으로 가더니 한 아주머니와 정답게 인사를 나눈다. 지혜의 어머니인 모양이다. 효진이가 나와 마리 쪽을 보고 친구들이라고 소개한다. 엉겁결에 인사를 한다. 지혜의 눈매는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처음 보는 아주머니에게서 낯익은 느낌을 받는다. 지혜 어머니는 우리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다른 쪽을 향했다.

효진이가 접수처에 축의금 봉투를 낸다. 미처 준비를 안 했기에 지금이라도 나가서 돈을 찾아와야 되나 어쩌나 고민했다. 문득 내 정장 안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던 무언가가 생각난다. 손을 넣어 꺼내보고는 리사의 철저함에 다시 한 번 웃어버렸다. 하얀 봉투에 앞면에는 "祝 華婚"이라고 적혀있었고 뒷면을 보니 우측 하단에 내 이름과 리사의 이름이 세로로 나란히 쓰여 있다. 마리도 자기 몫을 따로 준비해온 것을 내기에 별 수 없이 리사가 준비해 놓은 봉투를 신부 측에 낸다. 나중에라도 지혜가 저 봉투를 보게 되면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리사 이름을 보게 되겠지. 하아. 리사. 넌 정말 대단하구나.

"신부 보러 가야지."

"그럴까예?"

효진이가 마리를 데리고 신부대기실로 향한다. 나도 따라 가야하나 멍하니 있다가 모르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는 이곳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낫다 싶어서 그쪽으로 향한다.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식장 입구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이의 모습을 한 번 더 바라본다. 말쑥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제비꼬리 같은 연미복을 입은 이라면 당연히 신랑이겠지. 얼굴만으로도 꽤나 사람 좋게 생긴 녀석이었다. 못 생겼으면 그걸로나마 위안을 삼았을 텐데.... 쳇.

"꺄아~ 언니 너무 예뻐요."

신부대기실에 가까워지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소음을 제압하고도 남을 마리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온다. 트인 입구 옆에 있는 기둥을 돌아들어가 안으로 들어간다.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호박마차를 연상시키는 둥그렇게 생긴 방, 그 가운데 얌전히 앉아있는 지혜의 모습이 보인다. 하얗고 순결하니 몹시도 눈부신 4월의 신부였다.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던 지혜가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줬구나? 고마워."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지혜는 너무도 밝게 웃으면서 맞아주었다.

"너무 웃으면 딸 낳는다는데?"

고작 이런 소리밖에 못 하겠다. 나란 남자.... 허이구.

"안 그래도 딸 낳으려고 지금 계속 웃는 중이야. 도우미 언니가 웃으면 얼굴 땡겨서 화장 잘 안 먹는다고 웃지 말라는데도 말야."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지혜의 대답에 웃어버렸다. 나도 웃어버린다. 효진과 마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지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 했다. 내가 들어오고 또 얼마 안 되어서는 사진사까지 들어와 조명 들이대고 사진 찍는 통에 밀려나다시피 하여 대기실에서 나와 버린다. 하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제는 남의 여자가 될 사람인데 말이다. 효진이랑 마리는 지혜와 함께 사진까지 찍고 나온다. 나도 찍으라고 권했지만 사양했다. 무엇보다 사진은 기록으로 남을 텐데 그런 건 원치 않는다.

잠시 후 장내방송이 나와 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린다. 양측 어머님이 입장하고 바로 그 뒤에는 신랑과 지혜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 지혜는 아버지가 안 계실 테니 동반입장을 하는 모양이었다. 등이 가득 파인 지혜의 웨딩드레스를 보며, 정말 엉뚱하게도 난 그녀의 알몸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여자랑 하던 그날 밤. 내 위에 올라타던 그녀. 내 밑에서 신음하던 그녀. 내 물건을 입에 물던 그녀. 내 정액을 가득 쌌던 그녀의 뜨거운 안쪽까지..... 젠장. 내가 이렇게나 변태스러운 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의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상대로 음란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아니... 상상이 아니라 회상이라고 해야 하나. 으아아. 머리를 흔들어 끈적한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쓴다. 옆에 서 있던 마리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멀미하십니꺼?"

"......비슷하다."

신랑 신부입장이 끝나고 주례사가 시작되면서 난 식장을 나왔다. 마리가 따라오려고 했지만 효진이랑 사진까지 찍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건물을 나와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있노라니 맞은편에 편의점이 하나 보여서 길을 건넜다. 한참 망설이다가 음료수 하나, 담배 한 갑과 라이터 하나를 샀다. 편의점 앞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인다.

"크음. 크음....큼."

역시 담배는 나랑 맞지 않는다. 신입생 때 술 잔뜩 마시고 멋모르고 몇 모금 빨아보았지만 입맛만 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런 시추에이션에 이런 포지션에서는 담배 하나 물어줘야 모양새가 맞을 것 같다. 현실은 전혀 폼이 안 나지만 말이다. 몇 모금 빨기도 전에 꺼버린다. 담뱃갑도 버려버릴까 하다가 나중에 담배 피는 후배나 만나면 줘야겠다는 생각에 대충 넣어둔다.

라이터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면서 멍하니 맞은편에 있는 결혼식장만 보고 있다.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생각한다. 주례 끝나고 신혼부부 행진하고 사진 찍고.... 이러면 대충 30분은 넘게 걸릴 테다.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이쯤이면 되었겠지하고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맞은 편 길에 웬 중형차 하나가 불법주차를 한다. 처음에는 별 신경을 안 쓰고 지나가려다가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대체 저 인간이 여길 어떻게.....?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하필 이럴 때 지나가는 차들이 많아 건너기가 곤란하다. 녀석이 건물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길을 건널 수 있었다. 황급히 2층 식장으로 올라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식이 방금 끝났는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쏟아 나오고 있다. 마치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곳이라 사람 하나 찾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홀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잘못 본 건가.

"야, 여기서 뭐해. 한참 찾았잖아."

어느 샌가 나타난 효진이가 내 팔을 잡고 이끈다. 마리도 같이 있다. 효진이가 내게 빠르게 설명했다.

"지혜는 폐백 하러 갔어. 이따 나가는 것도 보고 싶기는 한데 지금 오빠한테 전화 와서는 빨리 차 가져오라고 성화거든. 지금 바로 서울 가야 해."

"그....그래?"

"미안하게 됐다. 모처럼 간만에 춘천 왔으니 구경도 좀 하다가 닭갈비도 먹고 갈까 했는데 말야. 오빠가 하도 지랄 맞아서....."

"그러냐."

아무리 오빠가 그러더라도 지랄이 뭐냐. 지랄이. 에휴.

"넌 어떻게 할래? 마리랑 춘천에서 좀 놀다 올 거야? 아니면 나랑 지금 바로 올라갈래?"

"글쎄다."

마리를 돌아보니 마리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겠단다.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다. 지혜에게 이미 인사는 했고 더 이상 볼 일도, 만날 일도 없다. 그렇지만 아까 본 그 인간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잘못 본 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효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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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플레이에서는 선택지가 하나만 제공됩니다.

1회차 엔딩을 감상한 후 또 다른 선택지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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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A. 지금 바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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