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40화 (4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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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좀 받아라. 에구, 허리야...."

"뭘 또 이렇게 잔뜩 싸와."

"니 또 암것도 안 해먹고 살거 아녀?"

"그래도 이렇게까지...."

엄마의 몸보다 더 큰 부피가 아닐까 싶은 머릿짐을 받아든다. 엄마는 그제서야 허리를 주욱 펴며 에구구 소리를 낸다. 그 때 우리 집에서 두 여자가 나와서 엄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석 씨 어머님 되시죠?"

"아... 안녕하세요."

리사는 무척이나 예의바르게 인사했지만 유진은 좀 뻣뻣했다. 엄마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아들내미 혼자 사는 집 안에서 여자 둘이 튀어나오니까 놀란 모양이다. 리사와 유진의 인사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본다.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여긴 앞집 사는 리사 씨고 쟤는 내가 과외 하는 유진이라는 애야. 리사 씨는 청소를 도와준다고 왔고 유진이는... 어, 그냥 왔어."

"그려어? 으음... 그려. 반가워요들."

엄마는 나에게서 의심 섞인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온 짐은 전부 먹을 것이었다. 떡이랑 전 부친 거, 산적꼬치랑 찰밥 등등.... 먹음직스러운 것들이 한 가득이다. 안 그래도 점심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있어서 꽤나 배가 고팠다. 엄마는 기숙사의 사감 선생처럼 방안을 둘러보다가 흠 잡을 곳을 발견하지 못 했는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근데 웬일이여? 집이 아주 그냥 번뜩번뜩 하네?"

"하하. 엄마 온다고 청소 좀 열심히 했어. 그리고 여기 리사 씨가 많이 도와줬고."

리사를 가리키자 그녀는 살짝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답했다.

"제가 뭘요."

"흐음... 그려요? 고마워요."

엄마는 뭔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리사는 엄마가 싸온 먹을 것들을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제가 이거 데워 드릴까요? 모처럼 맛있는 거 드시는데 식은 상태면 아쉽잖아요."

"그럴까요? 아, 그리고 리사 씨도 같이 드세요. 그래도 되지, 엄마?"

"그려. 맘대로 혀."

리사가 음식들을 들고 자기 집으로 건너갔다. 양이 많아서 유진이도 거들었다. 그러는 사이 엄마는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작년 여름 방학 때 올라와보고 처음이라 여전히 낯선 듯 했다.

"이건 뭐시여?"

엄마가 가리킨 건 침대였다.

"엉... 그게... 이 건물에 살던 사람이 이사 가면서 주고 갔어."

"침대 같은 건 함부로 받는 거 아녀."

"응? 그래도 ... 뭐..."

"하이고. 야가 암것도 모르네."

리사네로 음식 배달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한쪽에 멀뚱멀뚱 서 있던 유진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요. 남의 침대 함부로 가져오면 귀신 든다고요."

"....끄아... 이게 무슨 은행나무침대냐...."

"야가 누구라고?"

엄마는 유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유진은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다소 부끄러워했다.

"어, 내가 과외 하는 애야. 유진이라고....."

"과외를 여 와서 받는겨?"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그냥 ..... 지나가다 들렸어."

설명하기가 참 난감했다. 얘네 엄마가 전화로 콜 해서 이곳으로 보냈습니다만 라고 하면 이야기가 너무 꼬일 것 같다. 엄마는 유진에게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학상. 교복 입은 걸 보아하니 학상 맞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함부로 오고 그러는 거 아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제? 아무리 어려도 여자는 여자니께."

"아, 예....."

유진이도 여자였구나! 몰랐던 사실인데 엄마 덕분에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의 유진이는 어쩐지 꽤나 순했다. 나한테나 혹은 마리에게 대들던 것처럼 억세지 못 하다. 흐음. 이 녀석이 이런 날도 있군, 그래. 어디 아픈가? 혹시 그 날?

"오늘은 일단 왔으니께 밥이나 한 숟갈 하고 가드라고."

"예."

유진이에게서 시선을 거둔 엄마가 이젠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

"닌 공부 잘 허고 있냐?"

"아무렴. 이번에도 장학금 받았잖아."

"그려. 니가 그것만 아니면 진즉에 학교 때려치우고 군대나 가라고 했을낀데."

"아하하하...."

우리 엄마는 말 뿐인 사람이 아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내가 장학금 심사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당장에 내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서 병무청 앞에 떨구어 놨을지도...

"니 군대는 어쩔겨?"

"굳이 바로 안 가도 졸업하고 나면 병특 지원도 남아있고 아니면 학사장교로 갈 수도 있고...."

"뭐시 그리 복합하다냐. 그냥 영장 나오는 대로 가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좀 편하게 가려는 거지."

"편한 거 찾다가 나가리 되는 수도 있어야. 뭐, 니가 알아서 하겠다만 잘 생각해보구 혀."

"알았어."

그때 예린이 문 밖에 나타나 날 불렀다. 아까 청소할 때는 없던 거 같던데 어디 다녀온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 차림이다.

"리사 아가씨가 저희 쪽에서 드시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요. 큰 상으로 준비해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엄마, 저기 바로 앞집인데 거기서 먹으면 안 돼?"

예린이 전한 리사의 초대 메시지를 엄마에게 전하자 엄마가 손사래를 친다.

"뭐더러 남우 집에 신세를 진다야."

"내 방은 거실에 침대를 놔서 좁잖아."

"멀쩡히 제 집 놔두고 뭐하는 짓이여."

엄마는 툴툴거리면서도 내가 이끄는 대로 앞집으로 건너갔다. 새로 나타난 예린을 보고 엄마는 딱 한마디 했다.

"아따, 크네....."

나와 엄마, 유진과 예린이까지 한꺼번에 리사네 집에 들어갔다. 거실에는 큰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엄마가 싸온 음식들이 큰 접시에 나누어져 먹음직스럽게 담겨있었다. 개인별 앞접시는 물론이고 언제 준비해두었는지 막걸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막걸리는 정말 나이스한 선택이로군. 우리 동네의 전설적인 여자 술꾼, 우리 엄마의 표정이 막걸리 병을 보자마자 확 바뀐다. 자리에 앉은 엄마는 막걸리 병을 잡고 흔들어 보더니 리사에게 묻는다.

"히야시까지 제대로 해놨네. 아가씨, 이거 언제 준비한겨?"

"저희 집에 막걸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항상 준비해놓고 있답니다. 많이 있으니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어머님."

"하이고.... 이런 막사발까지 준비혀놓다니.... 아주 지대로네...."

리사가 내어주는 커다란 사발이 모두에게 돌아갔다. 유진에게도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는데 유진이가 내 손에서 뺏어가다시피 사발을 가져가 엄마가 따르는 술을 받는다.

"탁주는 술이 아니라 곡주니께 괜찮허."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무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 하아. 내가 주변 어른들에게 받았던 술교육 대신 제대로 된 영재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쯤 하버드대에 갔을지도 모른다. 생각치도 못한 술에 신이 난 엄마는 싱글벙글하며 유진과 예린은 물론 리사에게도 찰랑찰랑 아낌없이 따라준다. 아아. 왠지 예감이 안 좋아. 우리 엄마가 저런 표정으로 술자리를 시작한다는 건 오늘 끝까지 달리겠다는 의지 표현인데....

엄마가 들고 있는 잔에 막걸리는 가득 따라 붓는 리사가 어쩐지 부담스럽다.

"근데 어머님, 이렇게 맛있는 거 바리바리 싸들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아, 이눔 생일이잖어. 이번 주 토요일이. 그래서 올라왔지."

아까는 몹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리사를 보고 있던 엄마가, 이제는 아주 그냥 친구 대하듯이 자연스럽다. 옆자리에 앉은 리사의 등까지 두드려가며 친근하게 군다. 리사는 내 쪽을 향하며 묻는다.

"어머. 한석 씨 생일이에요? 축하해요."

"아직 아닌데요. 뭘. 그러고 보니까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 토요일에 안 오고...."

"니 에미 토요일 날 계원들이랑 놀러가기로 했단 말여. 니 생일상 미리미리 챙겨두고 나도 놀러가부러야지."

"아, 예에......"

뭐냐. 아들 생일 일찍 챙겨주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결국 자기 놀러가는 일에 방해 안 되게 일찌감치 생일 치르자고 올라온 거잖아! 쳇. 결국 첫 잔의 건배사는 내 생일을 축하하는 걸로 시작하게 되었다.

"축하혀!" / "축하해요." / "축하합니다." /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호탕하게 꿀꺽꿀꺽 마시는 엄마. 그에 뒤지지 않는 예린. 살짝 입만 대는 건가 싶었는데 꽤나 길게 입에 대고 천천히 꾸준히 마시는 리사.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고는 인상 한번 쓰고 다시 주욱 들이키는 유진까지 모두 잔을 비웠다. 물론 나 역시 한 번에 비웠다.

"흐흐. 장승같은 아가씨가 역시 생긴 거 만치로 잘 마시네."

엄마가 병을 들고 예린의 잔을 채워준다. 예린은 잔을 받아들고 꾸벅 한다. 아무래도 이 집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라? 이게 갑자기 무슨 파티야?"

한창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마리가 나타났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효진이가 마리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효진아!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내가 너....."

전부터 효진에게 연락을 하려다 못한 내가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하려니 마리가 소리를 꽥 지른다.

"선배는 내보다는 효진 언니가 우선이지예? 그래봤심더. 어라? 니가 우리 집엔 웬 일이래니?"

내가 효진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마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유진의 옆에 앉았다.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진은 마리를 보고 잠시 경계했지만 마리가 유진의 빈 잔을 채워주자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난 엄마에게 마리와 효진을 소개하고 자리에 앉게 했다.

"쌍둥이여? 둘이?"

"예." / "야."

"그렇구나...."

엄마가 깜짝 놀란 표정이다. 쌍둥이가 흔한 게 아니니 신기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심하게 놀라는데? 나의 둔감하기 짝이 없는 성격은 엄마한테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엄마는 어지간한 일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좋아하는 술 마시는 것까지 잊은 채 마리와 리사를 계속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쌍둥이를 처음 봤나....?

효진에게 지혜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새로 온 인물들에게 잔이 돌아가고 술이 채워진다. 이 집은 대체 막걸리를 몇 병이나 상비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막대한 수요에도 불구하고 공급물량이 달리지 않은 걸로 보아 적잖이 준비해놓고 사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막걸리 빈 병이 엄청 늘어났다. 못해도 1인당 한 병 이상씩은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엄마가 해온 음식이 떨어져 갈 때쯤에는 리사가 부엌으로 가서 두부김치도 해오고 파전도 부쳐온다. 안주도 푸짐하고 술도 떨어지지 않고.... 우리 엄마가 꿈꿔오던 천국이 바로 여기 있도다. 누구의 제의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바탕 노래자랑도 시작된다. 반주도 없고 마이크도 없는데 아주 다들 명창이다.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부산 아가씨 리사가 부르니 감회가 남다르군.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유진의 노래.... 인마! 넌 이제 열일곱이잖아! 어디서 뻥을 쳐!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해~ 뱃고동 소리도 울리지 마세요~"

또 다른 부산 아가씨 마리의 열창. 음... 신기하게도 노래를 부를 때는 사투리를 안 쓰네. 신기하네...

"돈 오백 원이 어디냐고 난 고집을 피웠지만~ 사실은 좀 더 일찍 그대를 보고파~"

음... 우리 엄마가 모를 것 같은 노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나는 고로 좋은 선곡이었다. 효진이가 불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크으... 우리 엄마가 왜 남진 노래를 안 부르나 싶었다. 다들 한 곡조씩 불러제끼고 아주 그냥 잔치의 흥은 극으로 달했다. 노래를 안 부른 사람은 이제 나랑 예린만 남았는데 다들 내 노래보다는 예린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우리 엄마만큼이나 막걸리를 많이 들이켠 그녀였지만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눈은 시뻘게지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처음에 한참을 사양하다가 결국에는 방으로 들어가 통기타 하나를 들고 나왔다.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타 현을 몇 번 퉁기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자 리사와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항상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녀가 그렇게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우리나라 노래도 아니었다.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You are an angel from above

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

발음이 엄청 좋다.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나저나 저 노래 제목이 뭐더라... 라디오에서 어쩌다 한 번은 들어봄직한 노래인데 제목은 생각이 안 난다. 평소 팝송이라면 질색을 하던 우리 엄마라서 안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웬걸....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I don`t know how I ever lived before

You are my life my destiny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If you should ever ever go away

There would be lonely tears to cry

The sun above would never shine again

There would be teardrops in the sky

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그래. 제목이 저거였다. You mean everything to me. 가수는 모르겠지만.... 암튼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좌중을 휘감았다.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드렸던 젓가락들도 모두 내려놓은 상태다. 리사와 마리는 이 노래를 이미 많이 들어본 모양인지 제법 허밍까지 해가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자...잠깐. 저게 뭐야. 지금 엄마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게 설마 눈물인건 아니겠지? 여장부로 소문난 우리 엄마가 눈물을 짓다니!!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So hold me close and never let me go

And say our love will always be

Oh my darling I love you so

You mean everything to me......"

오 마이 달링이 나올 무렵, 엄마는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예린의 손이 멈추고 현의 떨림마저 멈추자마자 우리 엄마는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다들 노래에 취해 멍해 있다가 엄마가 선행한 박수세례에 다들 동참했다. 예린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통기타를 가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두고 나왔다. 엄마가 몹시 감탄하며 예린에게 물었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이 노래를 워째 안당가.... 내 처녀적 노래인디."

"저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노래예요."

말수가 적은 예린 대신 리사가 대답했다. 엄마는 노래주라며 예린의 잔을 듬뿍 채워준다. 저렇게 마시고도 연주가 된단 말인가. 나는 멀쩡한 상태에서도 학교 종이 땡땡땡도 못 하는데.... 하기야 원래 기타를 못 치니까.

"예린 언니야가 그래서 저 노래만 죽어라 연습했다 아입니꺼. 저거 말고 딴 노래는 아예 연주도 할 줄 몰라예."

마리가 키득거리며 말하자 엄마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그려? 나가 남진 노래로다가 반주 좀 부탁허려했는디 못 쓰겠네."

그러자 마리가 엄마 말투를 따라한다.

"암요, 참말 못 쓰지라~"

부산 아가씨의 전라도 사투리 흉내에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별로 웃긴 것도 아닌데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좌중은 어지간한 일에 다들 폭소를 터트렸다. 이후로도 리사나 마리, 효진이의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유진도 우리 엄마가 알 법한 옛 노래를 곧잘 불렀다. 나도 딱 한번 노래를 불렀다가 모두의 야유를 받고 중도에 탈락했다. 아아, 나도 잘 부르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쩝. 음정, 박자, 가사가 안 맞는 게 뭐 대수라고. 참나.

어둑어둑해져서야 잔치가 끝났다. 이른 오후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다. 내 살면서 생일파티를 이렇게 거하게 해본 건 손으로 꼽을 지경이다. 물론 시골 살 때야 내 생일 핑계 대고 삼촌들이 몰려와 술파티를 열긴 했지만 그건 하도 일상적이라 기억도 안 나고 말이다. 엄마를 일단 내 방 침대에 모셔다드리고 나서 술자리로 돌아가 뒷정리를 도우려했다. 그런데 리사가 나를 잡아끌더니 유진을 가리킨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거실 한 쪽에 얌전히 앉아 딸꾹거리고 있는 녀석을 말이다.

"한석 씨는 저 아이 집 아시죠?"

"아, 예. 끄읍....."

대화를 나누면서도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뱃속에서 잘 삭힌 막걸리 깊은 향 그대로 상대방 얼굴에 뿜을 판이니까. 이 정도로 마셔놓고 리사와 마리, 예린이 멀쩡한 것은 정말 미스터리다. 이 여자들도 술에 어지간히 강한 모양이다. 효진은 일찌감치 뻗어서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티셔츠 안쪽에 손을 넣어 배를 북북 긁으며 자고 있었다.

"정리는 저희가 할 테니까 유진이 좀 부탁드려요. 이 시간에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그렇죠...."

나는 유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유진은 마리와 리사, 예린에게 일일이 머리를 꾸벅하고는 나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잡을까 싶었는데 유진이가 지금 차를 탔다가는 위험할 것 같다고 말하기에 같이 걷기로 한다. 걸어서 가면 꽤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안 힘드려나. 좀 걷게 하다가 술이 어느 정도 깨면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알 것 같아요."

"뭐가?"

한참 조용히 걸어가던 유진이 꺼낸 첫 마디는 굉장히 뜬금없었다.

"사람들이 .... 흡.... 으음.......왜 술을 마시는 건지."

"하아. 그런 건 벌써 알면 곤란한데."

"언니들이나.... 엄마가 마시는 걸 보고 있으면..... 참 불쌍해보였는데.....오늘 보니 ......  참 즐겁구나.... 싶어요."

"그 분들이야 일이니까 그런 거지...."

"그럴까요?"

"그 분들에게도 즐거운 술자리가 있을 거야. 니가 못 본 곳에서."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생각이 없는 놈이다. 과외 하는 학생을 데려다가 술이나 잔뜩 먹여서 돌려보내다니. 순간, 유진의 집에 가끔 출몰하는 검은 옷의 사신을 떠올린다. 끄아아아악.... 만약 이 상태로 그녀를 만났다면 나는 그대로 사망이다!

"유...유진아, 혹시 너희 집에 지금 누구 있니?"

"아뇨. 그건 왜요?"

"아... 아무 것도 아니다."

동네를 벗어나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어지럽게 길을 밝힌다. 그러나 그런 번화가를 벗어나고 나니 또 금방 어두워진 골목길이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길을 혼자 가게 두었으면 좀 안 좋을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할 무렵 내 손에 무언가 와 닿는다.

"응? 어지러워?"

"....."

녀석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채로 걸어갔다. 어두운 길이라 무서운 걸까? 안 그래도 키도 쪼그마한 녀석이라 마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어디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녀석의 손이 몹시도 뜨거웠다. 술을 엔간히 먹이는 건데 잘 못 했다. 그렇지만 내가 말린다고 안 먹일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생각보다 유진이네 아파트에 금방 도착했다. 현관 앞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녀석이 손을 놨다. 그렇게 꽉 잡은 것도 아닌데 워낙 한참을 잡고 온 탓에 녀석의 온기가 내 손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다.

"잘 자. 내일 아침에 좀 어지럽겠지만 물 많이 마시면 괜찮아."

"그 말 말고는 할 말 없어요?"

"양치질 꼭 해라. 막걸리 먹고 자면 입 냄새 장난 아냐."

"......그거 말고는요."

"없는데?"

집에 도착했으면 후딱후딱 들어가서 발 씻고 잘 것이지 왜 이렇게 미적대는 거야. 이 녀석은.

"아까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지는 왜 물어봤어요?"

"어? 그거야 뭐... 별 이유 없는데?"

선영이 있으면 도망가려고, 라는 대답은 하지 않는다.

"아니면."

녀석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에게 바짝 다가와 붙는다. 녀석의 실팍한 가슴이 내 배에 와 닿을 정도로 바짝 이다. 유진은 고개를 치켜들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늘 하얗던 녀석의 얼굴에 빨갛게 달아오른 홍조가 마치 인형에게 분칠을 해놓은 것 같다. 인형의 입이 열리며 무어라 말한다.

"자고 갈래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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