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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혼자 사는 방에 여자를 들이는 거라 처음에는 거절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어차피 내 방에 여자가 일이 없던 것도 아니고 .... 아까 유미에게도 말했다시피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구세주 같은 분이라니. 그녀 뒤에서 후광이 다 보일 지경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아...."
"후후. 맡겨만 주세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리사는 준비할게 있다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 있으려니 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석 씨! 문 좀 열어주세요."
"네!"
황급히 현관을 열어보니 방금 가정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양새의 리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진공청소기를 얼른 받아들었다. 그녀는 내 방으로 들어와 한 바퀴 둘러보더니 청소 시작을 선언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뭐랄까. 꽤나 본격적이시네요."
"후후, 그런가요?"
홈드레스 위에 두른 앞치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삼각천으로 만든 머릿수건이라니. 난 저런 건 중학교 시절 배웠던 가정 교과서 삽화 말고는 못 본 거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리사는 겉모습에 꽤나 신경을 쓰는 타입인 거 같다. 그렇다고 겉멋이 들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적재적소의 의상이랄까. 의상을 갖추면서 일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다진다고나 할까. 흐음. 나중에 누가 아파서 드러누웠을 때는 간호복이라도 입고 와서 간호하는 거 아닐까 몰라. 궁금한데 아프다고 하고 한 번 드러누워 볼까?
"아까 보니까 쓰레기는 다 버리시는 거 같던데. 그럼 물건은 지금 어느 정도 정리 된 거죠?"
"그런 셈이죠."
"그러면 일단 이 청소기로 창틀이랑 바닥을 전부 밀어주세요. 전 부엌을 정리할게요."
"옙."
리사의 지시를 받고 부리나케 움직인다. 진공청소기로 밀어버리니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깔끔하다. 구석구석 밀고 있으려는데 리사가 내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청소기를 끄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저, 한석 씨."
그녀는 꽤나 황당하다는 표정, 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내게 묻는다.
"예?"
"혹시 최근에 집에 도둑이 들거나 아니면 부부싸움을 하신 적이 있나요?"
".......도둑은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는데 부부싸움이야 상대가 있어야 하지요. 그건 왜 물으세요?"
부엌에 선 리사가 찬장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떻게 부엌에 그릇이 하나도 없죠? 컵 말고는 그릇이나 접시가 하나도 없는데요? 이런 것만 있구요."
그녀가 내민 것은 납땜할 때 쓰는 인두기랑 PCB판넬이었다. 아아. 마이크로보드 프로젝트 수업 들을 때 필요한 건데 저게 저기에 있었군. 난 그녀가 내민 것을 받아들어 갈무리 해놓고 대답했다.
"저희 집에는 원래 그릇이 없어요."
"어머? 왜요?"
"왜긴요... 집에서는 밥을 안 해먹으니까요."
전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러나 리사의 반응은 그냥 웃고 넘겼던 지혜보다도 더 엄했다. 리사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말한다.
"안 돼요!"
"네?"
"그럼 안 된다구요. 사람이 꼬박꼬박 식사를 하고 다녀야지요. 분명 대충 굶고 맨날 밖에서만 사먹고 다닌다는 거 아니에요?"
"그....그렇지요......"
얌전한 그녀라고 생각했는데 기세가 꽤나 무섭다.
"밖에서 파는 것들이 얼마나 해로운 게 잔뜩이라구요. 앞으로는 꼭 집에서 식사 챙겨 드세요. 만약 반찬이나 밥 모자라면 저한테 말씀하시구요."
"예에...."
어쩐지 "네, 엄마"라고 대답해야만 할 것 같다. 그나저나 그쪽은 동생이랑 잡지에서 본 맛집 찾아가지고 다니던 분들 아니었나요? 이런 반론을 할 틈도 안 주고 훈계를 마친 리사는 걸레를 빨아오더니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나도 걸레 하나를 들고 이곳저곳을 닦아나간다. 역시 여자 손이 닿아서 그런가. 쓰레기장 되기 일보 직전이었던 집이 점점 사람 사는 곳의 모양새를 갖춰간다. 이 정도면 엄마의 잔소리를 충분히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무렵, 리사는 옷장을 열어보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한석 씨!"
"넷!"
선임의 부름을 받은 쫄따구마냥 후딱 달려갔다. 리사는 살짝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옷장 바닥에 쌓여있는 옷가지들을 가리켰다.
"이건 대체 뭐죠?"
"......한번만 입은 옷들인데요."
빨래가 몹시 귀찮은 나의 옷 분류법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입고 벗은 옷은 잘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입는다. 두 번 입은 옷부터는 냄새를 맡아보아서 심하면 빨고 안 심하면 다시 입는다. 입을 옷이 없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내 옷장에 걸려있는 옷은 점퍼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바닥에 쌓여있었다. 지금 그녀가 가리킨 것은 내가 한번 입고 벗어둔 옷을 모아둔 더미였다.
"그럼 빨랫감이잖아요. 왜 안 빨고 둔 거죠?"
".....다시 입을라고..."
"한석 씨!!!"
아이고,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네. 내가 찔끔 놀라있는 사이 그녀는 그 빨랫감을 한데 모아서 한꺼번에 안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집 세탁기는 내가 아까 넣고 돌린 세탁물이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작동중이라 넣을 곳이 없었다. 리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내게 말했다.
"이건 저희 집에서 빨아올게요. 청소는 이제 다 끝난 거 같구요... 이제 남은 건...."
리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팔을 들어 몸을 가려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석 씨만 씻으면 되겠네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싹 벗어서 저 주시구요, 샤워하신 후에 옷 갈아입으세요."
"그러면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하아. 그래도 일단 다 벗고 씻고 계세요. 저희 집에 한석 씨에게 맞는 옷이 좀 있을 거예요. 속옷은 있으시죠?"
"예."
"그럼 얼른 벗으세요."
엄마야. 이 아가씨가 왜 이렇게 진도를 빨리 빼시지.
"지금요?"
"이거랑 한꺼번에 빨아야죠."
"예에...."
리사가 얌전하고 조용조용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폭발하는 걸 이미 본 적 있는데도 왜 나는 그녀가 얌전하다고만 생각했을까. 끄응.... 난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다 벗고 문 앞에다 내놓았다. 문틈으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다 돌려놓고 한석 씨 입을 옷 가져다 드릴게요. 구석구석 깨끗이 씻으세요."
"예에...."
다시 한 번, "네, 엄마"라고 대답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지적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방안 청결상태도 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몸의 청결상태도 엄마가 늘 잔소리하는 대상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씻고 닦는다. 한참동안 신경 써서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다. 이제 헹구기만 하면 된다. 밖에서 문소리가 들린다. 리사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나는 욕실 문에 대고 외쳤다.
"리사 씨! 옷은 욕실 문 앞에 두세요. 그럼 제가 알아서 입을게요!"
알았다는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인기척은 있는데... 혹시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외친다.
"리사 씨! 옷은 욕실 문 앞에....."
그런데 그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린다.
"아저씨.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죠?"
"으악!"
갑작스럽고 난데없는데다가 예상치 못 했던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비누거품이 가득한 샤워타올로 황급히 다리 사이의 중요한 부위를 가린다. 몸을 반쯤 돌려 내 나신의 전면이나 후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교복 차림의 유진이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니.....니가 여긴 웬일이야!"
"왜요? 제가 오면 뭐 곤란한 일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지. 곤란하다. 몹시도 곤란하다! 그러니 제발 빨리 문부터 닫어!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죠?"
"인마! 그럼 넌 목욕하고 있는데 누가 문 갑자기 열면 안 놀래?"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문부터 닫아주지 않을래?"
"알았어요."
문이 닫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빨리 비누거품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타올은 내려놓고 샤워기에 손을 뻗었다. 그 때,
"근데 말예요."
"으악!!!"
지금 손에 들린 건 샤워기뿐이다. 몸을 다시 돌려 손과 샤워기로 중요 부위를 가린다.
"아까 누구한테 말한 거였어요? 리사? 그게 누구예요?"
"그건 좀 이따가 나가서 이야기 하면 안 될까?"
"왜요? 지금 말하기 곤란해요?"
"곤란하다니까!!! 너어! 이젠 문 열지 마! 내가 나갈 때까지!"
"쳇. 알았어요."
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나는 왠지 순결을 뺏긴 처녀의 기분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한숨을 푹푹 쉬려는데 그 때, 또! 문이 살짝 열리더니 유진이의 머리가 쏙 들어왔다.
"사실 가릴 필요 없어요. 예전에 다 본 건데요. 뭐."
"인마!!!!!"
기어이 폭발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뭐 하나를 들어다가 열린 욕실 문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그게 문에 닿을 때쯤에는 이미 유진은 혀를 살짝 내미는 것까지 잽싸게 마치고 문을 닫은 터라 샴푸통은 녀석의 머리통을 맞추질 못하고 문에 부딪힌다. 샤워기를 최대한 크게 틀어 몸의 거품을 황급히 씻어낸다. 욕실에 미리 가지고 들어온 팬티를 입는다. 지금 당장 욕실 밖으로 뛰쳐나가서 유진에게 헤드락이라도 걸어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속옷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욕실 문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다시 현관 문소리가 들린다.
"어머, 넌 누구니?"
리사의 목소리.
"사투리 아줌마.... 당신이 여긴 또 왜?"
이건 유진의 목소리다. 나는 황급히 문 밖을 향해 외쳤다.
"리사 씨! 옷 좀 빨리 주세요!"
"어머, 제가 좀 늦었죠?"
문을 살짝 열고 손을 내밀자 리사가 내민 옷가지가 잡혔다. 티셔츠와 면바지였다. 최대한 빨리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간다. 냉랭한 표정의 유진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리사가 대면하고 있었다. 난 유진에게 소리쳤다.
"인마! 너 장난 좀 작작해!"
"아, 그건 됐구요. 아저씨. 이 아줌마는 학교 후배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집에까지 들어오는 거죠?"
부르지도 않은 니도 들어왔잖아! 라고 외치고 싶었는데 리사의 대답이 먼저였다.
"아아. 혹시 네가 유진이니? 맞지?"
그제서야 유진도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유진이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 리사는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리 말한대로 엄청 예쁘게 생겼구나. 우리 마리랑 친하게 지낸다면서?"
"핫. 제가요? 누구랑 친하다고요?"
유진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것과는 달리 리사는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난 마리 언니 리사라고 해. 마리랑 똑같이 생겼지? 우리 둘은 쌍둥이야."
"아, 네에...."
마리랑 대면했을 때는 꽤나 전투적인 유진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유순하다. 신기하군. 아니지, 지금 신기해하고 있기만 할 때가 아니지. 교복 차림의 유진이 여기에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지? 아직 학교 끝날 시간도 아닐 텐데.
"그나저나 넌 여기 어쩐 일이야?"
"하아... 엄마가 갑자기 학교에다 전화를 했어요."
"학교에?"
"예. 갑자기 방송으로 교무실에 제 앞으로 전화 와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갑자기 여기로 가보래잖아요. 주소 하나만 덜렁 알려주고...."
고양이 한 마리 보낸다는 건 이 소리였습니까. 유진이 어머님. 저한테 조크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셨군요.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암사자 아니면 암표범이잖습니까. 아니, 사자나 표범도 고양잇과의 동물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이 아닌 건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급하게 왔더니 이러고 있고.... 여기가 아저씨 자취방이에요?"
"그래. 인마. 근데 넌 남의 집에 노크도 안 하고 그냥 막 들어가고 문 벌컥벌컥 열고 그러냐?"
"억울하면 아저씨도 다음에 우리집에 올 때 안 잠겨 있으면 그냥 들어오세요. 아저씨처럼 문단속 안 하고 살면 누가 들어와도 이상할 건 없겠네요."
"끄아아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요 얄미운 녀석을 콕 쥐어박고 싶은 감정이 우럭우럭 샘솟는 건 꼭 내가 성격이 드럽고 나쁜 놈이라서 그런 건 아닐 거라 믿고 싶다. 정말 진심으로 믿고 싶다. 몸 안에 사무치는 격한 감정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킨 것은 리사였다.
"우리 이러고 있지 말고 차라도 한 잔 할까요? 한석 씨도 청소하느라 수고하셨는데요."
"수고는 리사 씨가 많이 하셨죠."
"일단 앉아 계세요. 제가 준비해올게요."
리사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까 청소하며 찾아낸 앉은뱅이 탁자 하나를 거실에 펴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온 몸에 퍼지는 피로감에 지친 내가 그 앞에 털썩 앉아버리자 방안을 둘러보던 유진도 맞은편에 앉는다.
"설마 저 언니랑 동거한다거나 그런 거예요?"
"아니거든."
"근데 아까 그건 대체 뭐예요?"
아까 그거라는 건 옷 갖다 준 거 말하는 건가. 나는 오늘 엄마가 오는 거랑 청소하느라 리사의 도움을 받은 일을 해주었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지만 빨랫감 이야기도 했다. 그래야 옷 가져다 준 것도 설명이 되니까 말이다. 내 설명을 다 듣고도 유진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흥 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언니들이 말하던 게 생각나서."
"언니들?"
이 녀석이 말하는 "언니들"이 했던 이야기 중에 정상적인 이야기는 없었기에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유진이는 문 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신기하긴 하네요."
"뭐가?"
"아저씨 같은 사람도 구르는 재주가 있구나 싶어서요."
"구르는 재주는....... 굼벵이가 가진 재주 아니었냐?"
"뭐든 간에요."
몹시 빈정 상하게시리 비아냥거리던 유진의 목소리도 리사가 돌아오자 딱 끊겼다. 쟁반에 유리로 된 주전자와 유리잔을 받쳐 들고 돌아온 리사 덕분에 따뜻한 국화차를 마실 수 있었다. 유진은 제법 리사에게 겸양까지 떨어가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뭐지, 이 녀석. 국화차에 대해서 불평하면서 리사에게 뭔가 한 마디 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런 것도 없고.... 마리한테 대하는 거랑 너무 다르잖아. 그렇게 평화롭기 그지없는 티타임을 갖고 있는데 밖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한석아~ 에미다."
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올 것이 왔구나... 아니, 올 분이 오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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