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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33화 (3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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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치고 나서 한바탕 울어버렸던 선영은, 몹시 다행스럽게도, 다음 과외부터는 우는 일이 없었다. 운동하러 간다고 날 기다리게 하는 일도 없었고 매번 제시간에 딱 맞추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틀린 부분이 조금씩 있기는 했지만 숙제도 틀림없이 해냈고 진도에 맞춰서 나름 예습도 하는 모양이었다. 좋은 학생이었다.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빚을 갚아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나름 최상의 과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선영의 문제는 그녀의 학업 성취도가 아니었다. 뭐랄까. 너무 올곧게 밤의 세계에만 살아온 그녀인지라 낮의 세계, 그러니까 일반인들의 삶에 대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모른다는 걸 종종 드러내는 게 그녀의 문제였다. 하루는 이런 날도 있었다. 수업 끝나고 질문 있냐고 했더니 그녀가 내게 물었다.

"여기 수업 끝나면 바로 유진이에게 가나요?"

"그럴 때도 있고...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다 갈 때도 있습니다."

"카페?"

"커피 파는 곳이요."

"아아, 커피."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선영은 내게 다시 물어보았다.

"다방 말이군요."

"....뭐, 다방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옆에 다방 레지 끼고 커피 마시는 곳 말이잖아요."

".....아뇨."

대체 카페가 뭐하는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일하는 "술파는 곳"이 그렇고 그런 곳이다 보니 "커피 파는 곳"도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기로 했다.

"선영 씨는 카페 한 번도 안 가보신 건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나름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눠본 내 경험에 의하면 그녀는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때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긍정해야 할 때는 보통 침묵하는 편이었다. 미간도 살짝 찡그린다.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 대신 내가 대답했다.

"안 가보셨으면 모를 수도 있죠. 선영 씨 일하는 곳처럼 술을 비싸게 파는 게 아니에요. 커피 한 잔에 이천 원, 삼천 원. 그렇게 파는 곳이라 서요. 아가씨는.... 계산하고 커피 내려주는 분은 있지만 옆에 앉아서 같이 마시거나 그러진 않아요."

내 설명을 들은 선영은 표정이 약간 새초롬해졌다.

"나도 알아요."

"아니, 방금 전에는 다방처럼 카페에 아가씨들이 나오냐고 물어보셔서..."

"안다고요. 그건 농담이었어요."

이러곤 입을 고집스럽게 다문다. 농담 치고는 너무 리얼해서 못 알아들은 내 죄가 큰 걸까... 그러고 나서 다음 과외에 갔더니 책상 위에 종이컵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냥 종이컵이 아니라 커피숍 테이크아웃용 컵이었다. 선영은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커피를 밖으로 가져가서 마시는 걸 테이크아웃이라고 한대요."

나도 알아요....라고 대답하면 분명 그녀가 또 꿍한 표정을 지을 게 분명했기에, 태어나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처음 본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 그래요? 몰랐네요."

선영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늘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살짝 웃기까지 했다. 그녀는 크게 선심 쓰듯이 말했다.

"방금 사온 거니까 식기 전에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상상해보았다. 여태 다방은 알아도 카페는 모르던 아가씨가, 난생 처음 카페에 혼자 가서 어떻게 주문하고 있었을지 말이다. 늘 내게 보여주는 당당한 태도를 떠올려 보면 선영은 가게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리 오너라! 여기 커피를 다오! 라고 외쳤을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선영 쪽을 힐끔 보니 그녀는 자신이 해낸 작은 성취에 꽤 기뻐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뭐랄까. 참 보기 좋았다.

그렇게 선영과 유진의 과외로 방학을 보내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학교는 개강을 맞이했다. 방학동안 비어있던 교정에 학생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온다. 두리번거리는 신입생, 조금 적응되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의 2학년, 피곤한 표정의 3학년, 학교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쏠려있는 4학년.... 각양각색이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선배~"

공대를 벗어나 학관 쪽으로 가는데 등 뒤에서 누가 부른다. 특유의 어투에서 이미 누군지 알아버렸다. 뒤돌아 아는 체를 해준다.

"벌써 수업 끝났어, 마리?"

숨을 할딱이며 마리가 달려와 내 옆에 선다.

"하모요. 뭐 허는 것도 없네예. 기냥 교재만 알려주더니 끝이라네예."

같이 학관 쪽을 향해 걷는다.

"교수님 누군데?"

"누더라? 최 모시기 하는 교수님인데...."

"설마.... 최강희 교수님? 설마 C프로그래밍 입문?"

"아, 근가보네. 근데 와예? 그 선생님이 뭐 문제인가 보죠?"

"뭐... 문제라면 문제인데.... 휴강을 자주 하시니...."

"워메.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응. 그런데 레포트는 꼬박꼬박 나와. 수업을 하든 안 하든. 채점도 칼같이 하시면서 그걸로 평점 매겨."

"하이고야."

내가 하는 말에 웃다가 다시 울게 된 마리는 쭐래쭐래 나를 따라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학관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아직은 학기 초라 학관밥의 퀼리티에 비교적 여유가 있다. 그리고 신입생들은 아직 학관밥에 절망하지 않았을 터다. 이때쯤이면 부속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꽤나 몰려온다. 따라서 3월에서 4월까지는 학관 식당이 비교적 붐비게 된다. 제법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한참 동안 마리는 내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근까예, 그 때 언니야가 사왔던 나풀나풀 거리는 옷을 예린 언니야헌테도 입어 보라고 막 권하는데 예린 언니야가 도망가고.... 선배, 듣고 있어예?"

"어어. 듣고 있어."

그렇게 티를 안 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여자들끼리는 대체 뭐하고 지내는가 궁금한 마음이 큰 건 사실이었다. 애써 무심한 척하며 귀를 쫑긋거린다.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난 번에 있었던 쇼핑과 그 이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리의 수다는 식권을 내고, 밥을 타고, 자리를 맡아 앉을 때까지도 이어졌고 덕분에 나는 내가 살지도 않는 202호에서 벌어진 어지간한 이벤트를 모두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말하느라 수고 많았다. 밥 먹자."

"야아."

입으로 뭔가 먹을 것이 들어가면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숟가락을 손에 들고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마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하며 나를 쳐다본다.

"선배님예. 그 때 지한테 맛있는 거 사준다고 안 그랬심니까? 맞지예?"

"어... 그랬었나?"

"어메. 이 사람 보소. 지가 그랬지예? 제가 다른 건 기억 못 해도 지한테 맛난 거 사준다고 한 사람은 반드시 기억한다고예."

철저한 추궁에 할 말이 없다.

"으윽... 지금은 좀 곤란하고 나중에 과외비 받으면 사줄게. 뭐 먹고 싶은데?"

그러자 마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박수까지 쳐가며 신나하더니 뭐가 좋을까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면서 자기 언니와 함께 잡지에서 읽은 학교 주변 맛집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어휴, 누가 들으면 이곳에서 산지 몇 년은 된 사람인 줄 알 정도다. 나도 우리 학교 주변에 맛집이 그렇게나 많은지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마리의 수다를 귓등으로 넘기며 밥을 퍼먹고 있는데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기 자리 비어? 같이 앉아도 되나?"

"어? 누....누구신데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대각선 방향 자리에 누군가 앉는다.

"이야, 너 한석이 맞지? 짜식. 오랜만이다, 임마."

"재윤 선배....."

이 인간을 다시 보게 되다니. 젠장. 먹고 있던 밥이 도로 올라올 지경이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는데 영문도 모르는 마리는 그냥 내 눈치만 보고 있다.

"임마, 너 벌써부터 신입생 후려가지고 끼고 다니는 거야? 능력 좋네, 우리 한석이."

"그런 거 아닙니다."

"짜식. 정색하기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저 손길. 아, 씨발 진짜 욕 나오네. 그래도 마리 앞이고 선배고 해서 참는다. 애써 참는다. 꾹꾹 참는다. 무반응에 가까운 내 반응이 재미없는지 재윤 선배가 이번에는 마리 쪽을 돌아보며 묻는다.

"신입생이야?"

"예에..."

"말투 보니 아래쪽인가 보네? 대구? 부산?"

"부산인데예...."

"오! 부산! 진짜 좋지. 나도 예전에 해운대 자주 놀러갔었어."

분명 첨보는 사이일 텐데도 말을 찍찍 놓은 저 무례함. 친하지도 않으면서 대놓고 들이대는 저 품성. 아... 진짜. 씨발새끼...

"해운대가 말야. 물이 진짜 좋더라."

"해운대요? 그렇지예. 깊지도 않아서 계서 수영 많이 합니다."

"아니, 아니. 그 물 말고. 이거 말야. 이거."

손가락으로 천박한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꼬라지를 보고 있노라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더는 못 참겠다. 아직 다 먹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바닥에 긁히며 거친 소리를 낸다.

"마리야. 가자. 아까 니가 말한 거 사줄게."

"예? 예에...."

마리도 재윤 선배와 내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식판을 들고 따라 일어난다. 재윤 선배가 내 쪽을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야. 너 지금 선배가 이야기 하는데 막 일어나고 그래? 엉?"

"죄송합니다.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더 이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벗어난다. 마레기가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마리를 끌고 식당을 나온다. 하아. 바깥 공기를 마시고 나니 이제 좀 열을 덜 받는다. 심호흡을 한다. 따라 나온 마리를 돌아본다.

"후우... 아까 말했던 데 중에서 제일 맛있는 데가 어디야? 지금 가자. 사줄게."

"그라믄 저야 좋기는 한데예.... 아까 그 선배 분이랑 그리 하고 나와도 괜찮나예?"

"선배는 무슨 놈의.... 후우. 말 말자. 한 번 이야기 꺼내면 골 아프니까."

"예에."

마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내 표정을 제대로 읽었는지 나를 데리고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가 보았다던 잡지에서 나온 가게라는 곳까지 안내했다. 마리를 따라 걸어가며 재윤 선배에 대해 생각한다.

이름은 마재윤. 나보다 2년 선배다. 내가 신입생 때 3학년이었는데 그때에도 이미 평판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어느 정도 였냐하면 재윤 선배의 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마재윤 쓰레기"

그걸 줄여서 "마레기"라고 부르는 게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평소에 후배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예사였고 선배들에게 막 대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를 엄청 밝혀서 과순이에게 하도 치근덕거려서 도저히 못 견디고 나간 애도 몇몇 되었다. 그나마 그런 그가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까닭은 딱 하나, 돈을 잘 써서 였다. 어디서 났는지, 아니면 집이 원래 잘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돈을 잘 썼다. 그러다 보니 다들 뒤에서는 욕을 하는데도 그가 나타나면 으레 따라붙는 추종자들이 있곤 했다.

그러던 그가 결국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 동기들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내 동기 중에 여자 동기 채은이라는 애와 남자 동기 준규라는 녀석이 입학 초부터 서로 좋아하며 사귀고 있었는데 재윤 선배가 채은이에게 항상 집적거리는 통에 준규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한 번은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채은이에게 거의 성추행에 가까운 짓을 하고 있는 걸 준규가 발견했고 평소의 불만이 폭발한 준규는 그에게 한방 먹이고 말았다. 모두 달려들어 뜯어 말리기 전까지 준규는 거의 재윤 선배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이 끼어들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재윤 선배가 준규를 폭행 혐의로 고소하면서 일이 커졌다. 준규가 재윤 선배에게 사과하고 - 물론 준규는 절대 사과할 수 없다고 버티고 또 버텼지만 학교가 시끄러워지길 원하지 않는 다른 선배들이 종용한 측면이 크다. - 재윤 선배가 사과를 받아들여 고소 취하로 일이 이렇게 무마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웬걸. 이대로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대 앞에 붙은 대자보 때문에 모두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재윤 선배가 폭행 사건을 빌미로 자기 말 대로 하지 않으면 준규를 감방에 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채은이를 강간했다는 사실이 적힌 대자보를, 그녀 본인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붙여놓았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채은이는 임신중절 수술을 하고 자퇴서를 낸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준규는 이 사실을 알고 미쳐 발광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제지로 인해 군대로 끌려가다시피 하여 학교에서 사라졌다.

결국 공대 내에서도 해결이 안 되고 이 사건에 총학과 총여학생회가 끼어들어서 전체 학교의 문제로 번지고 말았다. 다들 이 정도 사건이면 재윤 선배가 제적되거나 아니면 자퇴를 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그는 "다들 자신을 너무 몰라준다"며 휴학계를 내고 사라져버렸다. 당사자가 없으니 논쟁은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그게 만으로는 2년 전, 횟수로는 3년 전 일이다. 당시의 선배나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다 졸업하고 지금은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나랑 같이 입학한 동기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선배들 말에 따르면 우리 과가 원래 여학생이 잘 안 들어오는 편이라 우리 기수에서부터 여학생이 많아 과 분위기가 상당히 흥했는데 마레기가 그렇게 해놓고 가는 통에 분위기가 완전히 침체되었다고 말이다.

더욱 잊을 수 없는 건 입대 전 날, 동기들과 함께 송별회를 갖다가 술이 좀 들어가서는 나중에 자기가 손에 총 들게 되면 가지고 탈영해서 재윤 선배부터 쏴죽이겠다고 울분을 토하던 준규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제대할 때도 된 거 같은데 .... 진심으로 걱정된다. 저 마레기가 다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학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하아... 나는 소화가 안 되고 기분이 더러운 정도이지만 준규라면 아마 정말 미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것두 아니면 예전에 못 다 죽인 걸 마저 죽이려 들던가.

이래저래 한숨만 푹푹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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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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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픽션이며 현실의 그 어떤 이름, 지명, 장소, 단체, 명칭, 조직 등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우연입니다. 참고로 진호 선배의 성 씨는 "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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