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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27화 (2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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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원래 난 술에 꽤 강한 편인데 오늘은 퍽 약해져 있었다. 정신적 고통 때문인지 육체적 고통 때문인지.... 어찌어찌하여 가게에 들어오고..... 요금 안 냈다고 기사는 쫓아오고....... 박 군인가 김 군인가 그 뭐시기인가 하는 인간한테 택시비 좀 내달라고 그러고.......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죽음의 사신.... 아, 아니, 선영이구나. 암튼 그 여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나타나고....... 지난 일들이 명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시간도 장소도 뒤죽박죽 되어있는 의미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떤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고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밖은 어두웠고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 밤인가? 새벽인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를 가득 둘러싸고 있는 곰 인형들이었다. 크기로 보아 침대는 킹사이즈 급이었는데도 워낙 인형들이 많아 좁을 지경이었다. 그 뭐다냐. 테디베어인가 테리베어인가 하는 녀석들이 크고 작은 사이즈로 다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창가에도, 테이블에도 곰새끼들이 최소한 하나씩은 놓여 있었다. 술 먹고 뻗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태평양 위에 있는 새우잡이 배라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은 가끔 들어보았는데 이건 뭐시기 시츄에이션이냐. 설마 곰굴에 끌려온 건가. 아님 인형 눈깔 붙이기 강제 노동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머리를 움직였더니 뇌가 깨져 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몸을 굴리다시피 억지로 움직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스탠드의 전원을 올렸다.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에 가득찬 방의 일부를 밝힌다. 원룸인 듯 싶었다. 침대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싱크대와 벽붙이 냉장고가 보인다. 그 쪽으로 다가가 냉장고 문을 연다.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냉장고 안에서 그나마 생수병이 보이기에 꺼내서 마신다. 좀 살 것 같다.

다시 방 안을 둘러본다. 내 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거벗고 있자니 좀 추웠다. 이불을 끌어다가 몸에 둘렀다. 이불을 몸에 둘둘 말은 채 방 안을 더 둘러보았다. 벽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아 올렸다. 밝아졌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게 지금 새벽 12시인지 낮 12시인지도 감이 안 잡힌다. 창문에는 아주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검정색 커튼이 걸려있었다. 저래 가지고는 밖에서 땡볕이 쏟아지더라도 여긴 빛 하나 안 들어오는 암실이다. 방 안에는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화장대를 겸한 장식장 하나 말고는 가구가 없다. 아무래도 여자방 같다.

자세히 보니 한쪽 벽이 붙박이 옷장이었다. 옷장을 열어보았으나 전부 여자 옷만 있었다. 그것도 검은 색 일색..... 왠지 슬슬 불안해졌다.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 위에는 탁상용 액자가 이십 여개 정도 놓여있었는데 죄다 한 인물이었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사진 속 인물을 살펴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유진이...."

그렇다. 그건 전부 유진이였다. 요즘 모습부터 시작해서 그 이전까지 다양한 모습이 찍혀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사진도 아마 유진임에 틀림없다. 이 쯤 되면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 때 문 쪽에서 띠리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꽉 잡는다.

"깨어났군요."

선영이었다. 그녀는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봉지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준다.

"숙취해소음료입니다. 드세요."

"아, 예....."

쭈뼛거리며 그녀가 내민 병을 받아들었다. 손 하나를 놓았더니 이불이 좀 내려갔다. 황급히 고쳐 잡아 다시 올린다. 그 모습을 보며 선영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미 볼 건 다 보았습니다. 한석 씨 옷을 누가 벗겼을 것 같나요?"

"에엑? 그....그게 그러니까...."

이곳은 그녀의 방. 난 그곳에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그렇다면?

"토악질로 잔뜩 더러워져서 도저히 그 꼴로는 내 집에 들이지 못할 것 같아서 일단 모두 벗기고 샤워기를 대충 닦아드렸습니다."

"가....감사합니다."

이 여자에게 알몸을 내맡겼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해진다.

"괜히 남의 이불 안쪽에다가 그 흉한 자지 문지르지 말고 그냥 두세요. 쳇. 이불이랑 시트도 다 빨아야겠네."

.........나왔다. 그녀의 자지 소리. 그래, 그래야 한선영이지. 이불이 내려가든 말든 반쯤 포기하고 의자에 걸터앉아 음료를 마셨다. 약간 한약 냄새가 나는 듯한 걸쭉한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속이 화악- 하면서 다소 진정되는 느낌이다. 어라? 이거 효과가 꽤 좋은데? 무슨 구정물이나 양잿물... 것두 아니면 독이라도 타서 먹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 안도하는 표정은 뭔가요? 내가 무슨 독이라도 먹일 줄 알았나요?"

귀신이냐, 이 년은. 그게 아니면 정말 나란 놈은 그 때 그 때 드는 기분을 전혀 숨길 줄 모르는 모양이다. 선영의 날카로운 찌르기에 대충 웃으며 넘어갔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선영이 뭔가 내밀었다. 무슨 목록 같은 게 적힌 종이였다.

"뭔가요, 이건?"

"읽어보고 말하세요."

"예...."

A4 용지 위에 검정색 볼펜으로 따박따박한 느낌이 드는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청구목록 및 비용

택시비 1만 5천원

영업방해 손실금 278만원

취객 운송비 8만 7천원

카시트 교체비 153만원

1일 숙박비 15만원

의류 세탁비 3만 3천원

숙취해소음료 1만원

합계 4,605,000원』

점점 어처구니가 사라져가는 나에게 선영이 크게 선심 쓰듯이 말한다.

"십만 원 미만으로는 절사처리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사백 육십만 원만 주시면 되겠네요. 아참, 그리고 제 침대시트 세탁비는 일단 세탁소에 맡기고 금액을 물어볼 테니 추후 정산해 주시길 바라요."

"에... 이게 대체?"

"뭐긴요. 최한석 씨가 저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입니다. 결코 임의로 증액하거나 하지 않았으니 나중에 해당 요금의 영수증도 모두 보여드리죠."

차분한 말투의 선영과는 달리 나는 제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이걸 나보고 내라구요?! 당신한테?!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종이나부랭이만 들이대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넘어갈 순댕이 같아 보이나요?"

종이를 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누구네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만한 돈이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무슨 항목들이 이 모양이야?

"그 흉한 자지부터 안 보이게 일단 앉으세요."

아차, 내가 지금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너무 갑자기 벌떡 일어나버렸다. 그 바람에 두르고 있던 이불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참이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 앉고 이불을 끌어당겨 하반신을 덮었다. 차분하고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항목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 설명을 모두 들은 후에도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 묻도록 하죠."

"좋아요. 설명해 보세요."

내 비록 지금 발가벗고 있어서 위엄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디 이런 여자가 나를 등쳐먹게끔 놔둘 수 없다.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마주본다. 선영은 나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다만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만약 한석 씨가 지불을 거절한다면 법의 힘이라든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잘 아는 어떤 분들은 떼인 돈만 전문으로 받으러 다니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다른 방법? 떼인 돈 전문?.... 살짝 불안해진다.

"어디 보자.... 우선 택시비. 기억나시죠? 한석 씨는 택시를 타고 와서 저희에게 내달라고 생떼를 부리셨죠. 제가 지불했습니다만 저는 한석 씨에게 부디 택시를 타고 저희에게 왕림해 주십사 부탁드린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비용은 한석 씨가 내주셔야겠지요."

"예에.... 그건.... 그렇죠......"

그제서야 내 지난밤의 행적들이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택시에서 내릴 때는.... 으으.... 가관이었지.

"그것도 조용히 들어오셨다면 다행일 텐데 입구에서부터 기사님과 한 바탕 하시고, 또 들어오면서 박 군과도 드잡이 질을 하셨구요, 덕분에 그 때 들어오려던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몹시 언짢아하시며 발길을 돌리셨어요. 그 분이 평상시에 저희 가게에서 쓰던 비용과 인원수를 산출하면 손실금이 나옵니다."

"헉...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저희 단골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를 부렸나 까지 일일이 설명해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저는 그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많은 금액이 제게 부담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서...."

"나중에 이 손님이 평소 어느 정도의 매출을 올려주시는지 장부를 보여드리도록 하죠. 장부는 가게에 있으니까요. 나중에 가게로 가면 확인시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예에...."

어라. 이건 좀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녀의 말 빨에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영업이 끝나고 그때까지 그러했듯 대충 방에 처박아두고 잠가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괜히 룸에 있는 물건을 더럽힐까봐 제가 직접 끌고 여기로 왔습니다. 운송비는 그에 상응하는 값이구요. 제 차를 타고 오면서 뒷자리에서 오바이트를 제대로 하셨습니다. 덕분에 제 차는 지금 쓰레기 냄새를 피우면서 공장에 입고되어 있어요. 카시트를 싹 교체해달라고 하니 저 금액을 청구하더군요."

"그....그랬다고 싹 교체라니! 청소도 아니고.... 그러면 금액이 너무!!!"

그나마 협상을 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항의를 해보았더니, 그녀는 아주아주아주 차분하게 날 쳐다보며 말했다.

"몹시 더러운 기분이 들어 이참에 아예 폐차시키고 새로 뽑을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무슨 불만이라도?"

"........아뇨. 없습니다. 계속하시죠."

서슬 퍼런 저 눈빛에 감히 대항을 못 하겠다. 선영은 그 이후로도 나를 이 방에서 재운 비용과 내 옷을 가져가 세탁하는 비용, 거기다 방금 먹은 그 효과 좋은 숙취해소음료의 가격까지도 모두 언급했다.

졌다.

완벽한 KO패다.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그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내 일 년치 등록금 플러스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이 거기에 고스란히 적혀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해보려고 해도 뭐하나 대들 구석이 없다. 아니라고 하고 싶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흘러나오는 기억의 단편들은 지난밤의 내 추태를 생생히 재연하고 있다. 술집에서, 차안에서, 길바닥에서 벌인 온갖 추태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프게 떠오르는 건 껍데기 집에서 나에게 끝이라고 외치며 먼저 나가버리던 명희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옷을 황급히 꿰어 입고 나가버린 나에게 뭔가 더 이야기하려던 지혜의 모습..

"제가 해드린 설명에 이의가 없으시다면 해당 금액을 기준으로 차용증을 작성하도록 하죠."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내 다른 종이를 꺼내어 거기에 뭔가를 기록하기 시작하는 선영을 보며 최대한 물기 어린 목소리를 짜내어 물어보았다.

"저..... 선영 씨. 정말 미안합니다만.... 어떻게 좀 안될까요? 학생인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돈도 없는 분이 택시를 타고 룸살롱에 오시나요? 그것도 곱게 오는 것도 아니고 와서 깽판을 치고?"

"그건 그러니까 모르는 곳도 아니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부탁 좀 드릴게요."

"무슨 부탁인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아는 분이니까 직접 제가 모시고 금액을 청구하는 거지, 모르는 분이 이랬다면 바로 경찰에 넘겼겠죠?"

".........넘겨주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런데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한 번만 뭐요?"

"봐주세요."

그러자 선영이 쓰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요?"

"예?"

"한석 씨가 한 짓을 돌이켜보면 지금 바닥에 엎드려서 빌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면서 사과를 한들, 받아들이겠어요?"

후다닥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를 땅에 대고 외친다.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흐음....."

선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펜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꼴사납군요."

순간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태껏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중 가장 차가웠다. 물론 그렇다고 평상시 내게 건넨 말 중에서 따뜻하게 말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던 게 아니지만 지금만큼은 결코 아니다. 지금의 말투는 정말이지 겨울 중에서도 한 겨울, 그 중에서도 시베리아 벌판에서나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한기를 담아 내게 말하고 있다.

"남자가 고작 돈 몇 푼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곧바로 엎드려 비는 건가요? 그게 당신이라는 사람의 수준인가요? 정말이지.... 한심하고도 한심하군요."

뭔가 좀 울컥했다. 고작? 몇 푼? 아, 진짜!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고작? 당신한테는 고작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일 년 등록금보다도 더 된다구요! 생활비로 치면 2년 치도 될 것이고.... 그만한 금액이 고작이라니? 무릎을 왜 못 꿇어! 내가 이렇게라도 해서 당신 마음이 풀리면 좀 줄여줄지 어떻게 알고....."

"안 풀리는데요. 전혀."

"........크윽! 당신 진짜!!!!"

"일단 앉아 봐요. 정 그러하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자리에 앉는다. 채권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지가 보이지 않도록 잘 덮었다. 선영이 다른 종이에 펜으로 뭔가를 적으며 묻는다.

"지금 유진이 과외로 한 달에 얼마 받으시죠?"

"에? 40만원인데요...."

"460만원을 40만원으로 나누면 12가 조금 안 되겠군요. 좋습니다. 지금부터 1년간 과외를 해서 그 돈을 갚도록 하세요."

뜬금없는 과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한다.

"학생이 있나요? 제 과외를 받을 학생이 유진이 말고 또....?"

"있습니다."

선영이 대답한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저 말입니다."

바로 이해하지 못 하고 약 3초간 멍 때리고 있었다.

"에엑?"

내가 잘못 들었나 한참을 고민했지만 선영은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저를 가르치시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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