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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요. 그리고 그 아줌마는 아저씨에게 삐삐 왔었다는 이야기도 안 해줬어요? 왜 나중에라도 전화 안 했죠?"
"아니, 그게...."
니가 지금 아줌마라고 매도하는 그 사람이랑 그 당시에 굉장히 열심히 땀 흘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느라 연락할 생각을 못 했다고 대답하면 이 아이가 뭐라고 반응할까. 궁금하긴 했지만 하지 않았다. 잘 참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나...나도, 사생활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내가 곤란해지니까 되도록이면 호출은 하지 말아줘. 이유가 좀 있거든."
"됐거든요. 앞으로는 삐삐 치라고 해도 안 칠거예요."
"그래, 알아주니 고맙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다며 시내 극장으로 날 끌고 간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극장 간판 그림체로 멋들어지게 그려진 한석규가 양아치 차림을 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이가 한석규를 좋아한단다.
"니가 보고 싶다던 게 저거야?"
"네."
"미성년자 관람불가라고 쓰여 있는데?"
"아저씨가 가서 표 사오면 되잖아요."
평일이라고는 하나 저녁이 되어서 그런지 아님 영화의 인기가 좋은 건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표가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예약도 안 하고 무턱대고 왔으니 자리가 있을 리 없다. 빈손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유진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시간도 늦었는데 집에 안 가 봐도 되겠어? 다음에 보러 오자."
"제가 아저씨랑 왜 영화관을 같이 가야 되요?"
매진이라고 써 붙여진 매표소를 뒤로 하고 유진은 몸을 홱 돌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 진짜. 여기 오자고 한 건 너거든! .......하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대인배니까. 참자. 참아. 유진을 따라 걸어가던 내 눈에 한 장소가 보였다. 유진을 불러 세운다.
"유진아, 그럼 저기 갈래?"
"어디요?"
내가 가리킨 방향에는 "비디오방"이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저기가 화면도 크고 좋은 좌석이 갖춰진 시설에서 영화를 보는 곳이란 소리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유진은 간판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안 그럴 것처럼 그러더니 의외로...."
"응? 영화보자면서? 가기 싫어?"
"아뇨. 가요. 가."
오히려 나를 끌고 유진이 앞장선다. 비디오방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꽤나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나는 노래방 같은 분위기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그보다는 뭐랄까. "룸"에 가깝다고나 할까. 앉아서 보라고 놓여 있을 소파는 거의 침대 수준이었고 몹시 친절하게 옆에는 곽티슈까지 놓여있었다. 대체 용도가 뭐지.... 막상 들어와 보니 굉장히 뻘쭘해졌다. 그러나 유진은 몹시도 태연했다.
"뭐해요? 영화 시작해요."
"어? 어..."
먼저 자리 잡고 앉은 유진의 옆자리에 앉는다. 아니, 앉는다기 보다는 거의 눕는 자세가 된다. 손을 어떻게 두나 싶다가 얌전하게 모아 배 위에 얹었다. 무슨 관 속에 들어가는 시체 마냥 말이다. 녀석과 나의 거리는 50cm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가만히 누워있는 와중에 들숨과 날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녀석의 흉부가 몹시도 신경 쓰였다. 아직 애라고 생각했는데... 언덕이라고까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봉긋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지혜나 명희랑 왔다면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을 텐데. 아니... 팔만 두르고 끝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뜻하지 않게 유진과 나란히 누워 있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나고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가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영화가 시작되었다. 제목이 뭐래더라. 은행나무침대인가, 은행나무의자인가.... 암튼 유진이가 좋아하는 한석규가 나오는 영화란다. 비디오방에 들어오자마자 이 녀석이 골랐다. 작년에 주변에서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하도 이야기를 많이들 해서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뭐 환생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과학적인 사실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있지 않은 터무니없는 영화라고 말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신기술을 썼다는데 엄청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나는 내심 투덜거리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으아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유진을 훔쳐보았다. 이 녀석은 이 영화에서 이런 낯 뜨거운 장면이 나오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걸까. 뭘 믿고 이런 영화를 고른 거야. 영화의 도입부에서 의외로 강렬한 씬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동기들이랑 연구실 안쪽에서 발표용 프로젝터를 몰래 돌려서 보았던 포르노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명백히 달랐다. 유진을 힐끔 쳐다보니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다. 내가 자꾸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그 녀석도 나를 보더니 한 마디 던진다.
"왜요? 흥분 돼요?"
"뭐, 인마?"
"남자들은 시각적인 자극에 쉽게 흥분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상한 비디오도 열심히 구해다보고 그런다면서요? 아저씨도 그래요?"
"가끔 보긴 하... 아니, 그게 그러니까..... 아니다. 말을 말자."
너무나도 정확한 사실을 말씀하시니 반박을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대충 손을 내젓고 무마시켰다. 다행히도 야한 장면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나름 흥미로운 것이었다.
유진이는 한석규를 좋다고 했지만 나는 내심 신현준이 너무너무 멋있었다. 남자로서의 무게를 꽉 채운 그를 보고 있노라니....그런 그가 악역으로 나오다는 사실 자체가 슬퍼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결말까지.... 아후윽. 황장군님.... 아흐윽....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스탭롤이 올라가는 동안 왼손을 들어 빠르게 눈을 비볐다. 유진이가 그런 날 보고 있었다.
"울었어요?"
"아니. 내가 왜..."
"울었잖아요."
이런 귀신같은 년. 황장군보다 더 집요한 년 같으니. 그럴 때는 그냥 모른 척 해줘도 된다고!
"영화가 따분해서 졸려가지고 하품을 했더니 그래서 눈물이 쬐끔 나온 거야."
"따분해요? 엄청 집중해서 보고 있던데."
"내가 언제 집중했다 그래."
"얼마나 집중하시는지... 제가 손잡아도 모르던데요?"
"뭔 손을.... 어라?"
그제서야 내 오른손을 잡고 있는 녀석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발견했다. 황급히 손을 뺐다.
"왜.... 왜 이래?"
"그냥 수현이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싶어서요."
......뭔 뜬금없는 소리냐. 참고로 수현은 한석규의 영화 속 배역명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지 못 해 다음 생까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물론 그의 고생이 참 버라이어티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단 코웃음쳐줬다.
"저런 비리비리하고 우유부단한 놈이 뭐가 좋다고. 차라리 황장군이 백 배 낫겠네."
"뭐에요. 아저씨도 황장군 쪽이에요?"
"마, 당연히 남자답고 멋진 건 황장군이지, 잠깐, 아저씨도?"
"도"라는 건 나 말고도 누군가 황장군을 또 좋아한다는 거잖아. 누구냐 그게. 유진이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선영이 언니도 수현보다는 황장군 쪽이던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별로 반갑지 않은 이름이 나온다. 그 사람이랑 나랑 좋아하는 배우가 같다니 은근히 기분 나쁘다.
"당연히 황장군이 훨씬 낫지.... 아니, 그나저나.... 너 말야 전에 이 영화 본 거였어?"
"한석규 나온 영화는 LD판으로 다 가지고 있어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멍 때리고 있었다. 한석규 나온 영화는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는 한석규가 나왔다. 그렇다면?
"봤던 영화냐!"
"그 간단한 사실을 그렇게 한참 동안 추론한 건가요?"
"대체 본 영화를 왜 또 보는 건데?"
"아저씨는 안 봤을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만...."
정말이지 이 녀석의 사고패턴을 이해하려면 내 뇌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대체 왜 봤던 영화를 다시 돈까지 들여가면서 보는 건데? 그러고 보니 비디오방 계산도 이 녀석이 했다. 아무리 집이 잘 살아도 그렇지 돈이 썩어나나. 최근 들어 여자들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이 녀석 앞에서는 정말이지 무용지물이다.
비디오방을 나와 다시 택시를 타고 유진이네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인지라 아무래도 집까지 바래다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집까지 갈 필요가 없어보였다.
"유진아!!!!!"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선영이 나와 있었다.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자마자 황급하게 달려온다. 유진이를 한번 부둥켜안고는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살피는데, 그 꼴이 흡사 무슨 이산가족 상봉장면 같다.
"잠깐 나갔다 온다하더니 어딜 갔다 온 거야! 연락도 없고!"
"미안, 언니. 나도 잠깐 다녀올려 그랬는데 중간에 선생님을 만나서 시내까지 다녀왔어."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선생님이 워낙 급하게 데리고 가는 바람에..."
자...잠깐! 그런 소리를 하면 저 신경질쟁이 탑 클래스의 여자가 나를 보고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역시나 내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분노 가득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이봐요! 대체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이 시간까지 애 데리고 대체 어디서 뭘 한 거죠? 제정신이에요?"
"아...아니, 난 그저 유진이가 서점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서점? 서~점? 지금 장난해? 시간이 몇 시인데 서점 다녀오는데!! 책을 아주 만들어 가지고 와도 지금보다 일찍 왔겠네."
유진이가 뜯어말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선영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빼들어 날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 유진이 간신히 선영을 진정시키는 사이에 그 자리를 뜨기로 했다. 유진이 내 쪽을 바라보며 혀를 내민다. 유진과 헤어지기 직전, 살짝 물어보았다.
"대체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핀치로 몰아?"
"일종의 벌이에요. 쳇."
"벌?"
"암튼, 영화 잘 봤고 생일 선물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뭐? 어라?"
유진은 아직도 펄펄 뛰는 선영을 밀어 아파트 쪽으로 가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흔들었다. 눈 튀어나오고 웃기게 생긴 그 인형은 유진의 손끝에서 방정맞은 동작을 선보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마주 흔든다.
"하아, 대체 뭐냐고..."
정말이지... 저 유진이라는 녀석을 이해하는 데는 아마도 평생 걸려도 부족할 것 같다. 아니지. 굳이 평생 보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근데 나는 왜 자꾸 저 애를 이해하려 애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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