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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효진이는 빠르다.
마리는 정확하다.
그리고 지혜는 강했다.
나는 꼴찌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무슨 애들처럼 게임하냐고 못마땅해 하던 지혜였는데 어느 순간 나와 효진이, 마리가 하도 신나게 하는 터라 관심이 동하던지 게임에 은근히 끼어들었다. 초심자인 지혜도 할 수 있는 게임을 찾다보니 뿌요뿌요가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건데?"
"어, 일단 같은 색끼리 모아서 한 줄로 만들어. 네 개 이상이 연결되면 터지는 거야."
"그게 다야?"
"대신 그냥 터지는 게 아니라 최대한 연달아 터지게끔 해 봐. 그러면 상대에게 공격도 가능해."
"왜 이렇게 복잡해? 그림은 귀여운데..."
뿌요뿌요는 테트리스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테트리스가 블록을 쌓는 게임이라면 이쪽은 색색의 방울들을 쌓아올려서 터트리는 게임이었다. 무엇보다 대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씩 터트리는 것이 아니라 잔뜩 쌓아올려서 연쇄로 터트릴 경우 상대에게 무시무시한 악몽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악독한 우정파괴 게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몇 년 간 이 게임을 해온 나는 각종 콤보를 구사하는 전략에 따라 신경 써서 블록을 배치하며 착착 쌓아올리고 있었다. 이제 몇 군데만 더 쌓고 터트리면 나의 승리다.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환상적인 배치가 보여주는 연쇄에 너희들은 무릎 꿇게 되리라. 음화화화화화......... 그러나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초심자가 무심하게 쌓아 올린 후 터트리는 한방이었다. 지혜는 방울 색깔이 예쁘다고 감탄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내가 지금 뭐한 거야? 내꺼 다 터지는데?“
방울이 연속으로 터질 때마다 나오는 음성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쪽에는 방해뿌요가 팍팍 쌓이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혜를 쳐다봤다.
"크아아아아악!! 너 정말 오늘 처음 하는 거 맞아?"
"응."
"으아아아아악!!!
아무것도 모르는 지혜는 자기 화면에서 방울들 - 정확히는 뿌요들이 한꺼번에 없어졌다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렇게 터져나간 뿌요들은 내 화면으로 방해 뿌요가 되어 우르르 쌓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효진이가 배를 잡고 굴렀다.
"푸하하하. 한석이 잘난 척 엄청 하더니 꼴찌네?"
"그라네예. 선배가 꼴찌네예."
마리까지 웃느라 땀을 흘릴 정도였다. 지혜와 게임 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마리와 효진에게도 패한 후다. 결국 내가 나가서 술과 안주를 사오게 되었다. 피땀 어린 내 돈으로 사온 치킨을 뜯으며 효진은 이런 내기라면 얼마든지 하자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열심히 뒷다리를 뜯고 있는 마리에게도 잔을 내민다.
"근데 얘도 술 마셔도 돼?"
이미 잔을 내밀면서 나에게 물어보았자 대답을 해줄 수 있을라나. 그러나 본인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하모요! 지도 서면에서 알아주는 술꾼이었지예!"
"......얼마 전까지는 고등학생 아니었냐, 너?"
"에헤헤헤~ 그리 됐심더."
그렇게 시작하여 장장 새벽 1시까지 이어진 술자리. 온갖 이야기가 오가고 온갖 게임이 펼쳐지며 술잔이 오고갔다. 무자비한 술잔의 릴레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지혜뿐이었다. 효진이는 일찌감치 거실에 드러누워 대자로 뻗어 있었고 마리는 그런 효진이의 허벅지를 베개 마냥 베고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슬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병을 들고 잔을 채우고 있는 지혜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너는, 안 자?"
"자야지. 암. 자야지."
"그럼 얼른 자. 난 가볼게..."
"안 돼! 가긴 어디를 가!"
지혜는 분명 엄청 취했는데도 굳이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어서려고 했더니 소매를 잡아끈다. 잡아끄는 힘이 의외로 세고 나도 휘청거리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왠지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말이다. 불과 몇 달 전인데도 꽤나 옛날처럼 느껴진다.
"엑!"
"음냐........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아냐......"
하필이면 지혜 쪽으로 넘어지며 그녀를 안고 바닥에 뒹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뻗은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다리 사이로 묻게 되었다. 당황하며 손을 빼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다리를 조이며 손을 빼지 못 하게 했다. 푹신하면서도 알싸한 느낌이 손을 구속한다. 그리고 내 귓가에 와 닿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일부러 그래도 괜찮아. 너라면....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얼굴을 지혜의 가슴에 묻었다. 푸근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나를 감싼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아무리 술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나라도 취할 때는 취하는 법이다. 게다가 지혜에게서 풍겨오는 좋은 향기가 나를 더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인공적인 향수가 화장품 따위에서 오는 냄새가 아니다. 옷 너머 사람의 살결에서 나오는 내음이다. 바로 얼마 전에 이 내음에 이끌려 꿈같은 밤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리고 그 때 나는 남자가 되었지. 어찌 그 밤을 내가 잊을 수 있을까.
숨을 한껏 들이켜 그녀의 살 냄새로 콧속을 가득 채우며 비교적 자유로운 나머지 손을 꿈틀거려 푹신한 언덕으로 옮겨놓고 마음껏 움직이게 했다. 나의 움직임에 민감한 부위를 자극받은 지혜는 거칠어지기 시작한 숨소리를 토해낸다.
"하윽... 지...지금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주무르잖아."
"하지 마...."
정말 하지말기를 바라면 나를 밀어내야 할 텐데 왜 더욱 끌어당기는 걸까. 이러다가 자칫하면 숨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푹신한 살 언덕은 나를 질식사시키기에 충분하다.
"푸앗!"
"아, 미안."
"괜찮아. 기분은 좋았어."
"증말.... 한석이는 뵨태야..... 처음 봤을 때부터....."
"뭐?"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렷다.
"순진한 나를 그런데로 끌고 간 사람이 누군데. 그때까지만 해도 난 총각이었단 말이야."
"꺄악- 하지 마아~ 꺄악~"
그녀는 까르르 웃어 넘어지며 뒤로 훌러덩 넘어갔다. 펑퍼짐한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그녀의 배가 드러났다. 저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아름다운 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손을 뻗어 그녀의 속살을 더듬어가려고 하자 지혜가 내 손목을 잡는다.
"여기서 이러지마."
잠시 멈칫했다.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다. 옆에서 효진이는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며 배를 긁고 있었고, 마리는 살짝 코까지 골고 있었다. 일단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뇌를 필사적으로 가동시켜 생각했다. 예전의 나라면 전혀 못 했을,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캐치해낼 수 있는 말의 "진의"를 찾아낸다. 그렇다. 여자의 말은 포인트를 잘 짚어야 한다. 그녀는 하기 싫다고 한 게 아니다.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 방으로 가자."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보일 듯 말 듯한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귓속말을 해온다.
"씻고 갈게. 좀만 기다려..."
나는 후다닥 집으로 달려가 바닥을 주섬주섬 치웠다. 이불을 미리 깔아두고 미리 사두었던 콘돔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명은 모두 껐다. 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흘러들어오는 가로등 특유의 노란 불빛이 방안을 절반 정도 밝게 해주고 있었기에 더 이상의 조명은 불필요했다.
옷을 다 벗고 기다릴까 하다가 왠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샤워를 후다닥 하고 가장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유사시에 가장 벗기 편하도록 츄리닝 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냄새가 나지 않나 확인해보고 이따가 아무래도 옷을 다 벗을 테니 춥지 않도록 보일러 온도를 올려놓았다.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조바심이 나서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참 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
저기고 여기고 간에 지금 내 물건은 팽창해서 대폭발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다. 전희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이미 그녀고 가득 젖어있지 않았던가. 현관문을 벌컥 열고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황급히 끌어당겼다. 얼굴을 양 손으로 부둥켜안고 깊은 키스를 나눈다. 침 맛에는 술맛이 섞여 있었다. 키스를 하면서 손을 뻗어 옷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틀며 내 손을 거부하지만 이미 그런 행동은 무의미하다. 거칠 것이 없이 나아가는 내 손 아래에서 탄탄한 복부가 만져진다. 손을 더 뻗어본다. 브래지어가 없었다. 가릴 것도 없기에 더욱더 마음껏 가슴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타. 분명 아까 만질 때만 해도 이 정도 사이즈가 아니었는데.... 사이즈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감촉이 다르다. 아까는 분명 뭉클-뭉클-뭉클-뭉클- 이런 기분이었다만 지금은 탱글-탱글-탱글-탱글- ......... 이건 마치 다른 사람의 가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분....
"헉!"
몸을 뒤로 확 젖힌다.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을 들여다본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실루엣으로 비추어지는 짧은 머리카락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긴 생머리를 가진 지혜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름 모를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고 나를 부른다.
"서....선배님....."
"헉! 마....마리야...."
뒷걸음쳐보았지만 그래보았자 좁아터진 현관 구석이다. 손을 뻗어 현관 조명을 켰다.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그 아래에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몸을 비비꼬고 있는 마리가 있었다. 마리는 내게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노....놀랬심더.... 이리 갑자기...."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윽수로... 적극적이시네예.... 지는 그저 오늘 고마웠따고 인사나 할라꼬...."
"아니...난 모르고 그만...."
"모르고예?"
손을 내저으며 부정의 뜻을 표하자 마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현관이 열리며 지혜가 들어왔다.
"문이 열려있....어?"
"어라?"
현관에 서 있던 마리와 안으로 들어오려던 지혜가 서로 눈이 딱 마주친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나는 우주를 보았다. 우주에서 초신성이 폭발하고 또 하나의 별이 태어나는 그 과정을 나는 보았노라. 아아. 이것이 빅뱅이론인가. 그렇게 쇠를 녹일 듯한 불꽃 튀는 눈빛이 서로 교환되고 의문과 질문과 추궁을 담은 표정이 상대방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곧바로 나로 향한다.
"이 시간에 후.배.님.이랑 뭐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최한석 씨?"
이것은 지혜의 질문.
"혹시 선배님이 이 언.니.야.를 불렀능교?"
이것은 마리의 질문.
나를 향한 질문이긴 하지만 결코 나에게서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어버어버 벙어리 삼룡이 흉내를 내고 있자 잠시 후 지혜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리가 안 보여서 어디 갔나 찾으러 나와 본거야. 이제 됐으니까 돌아가자."
역시 사회 물을 먹은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이 껄끄럽기 그지없는 상황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한 그녀가 손을 뻗어 마리의 어깨를 짚는다. 그렇게 그녀를 데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는 그 손을 살짝 밀어내며 말한다.
"지는 그냥 선배님에게 고맙따고 할라고 왔지예. 근데 언니야는 지 찾으러 나왔담서 윽수로 야시시하게 차리고 나오네예?"
"윽..."
사실 지혜의 차림은 좀 그랬다. 나만 두고 혼자 보고 있었다면 참 좋아라 하며 감사했을 레이스 가득한 시스루 슬립이었지만 지금 상황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슬립 너머에는 그 재질로는 도무지 가리지 못할 환상적이게 크고 아름다운 두 개의 복숭아가 너무도 잘 익어 있었다. 지혜는 그제야 자신의 차림을 깨닫고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싼다. 물론 한 손으로 그게 다 가려지겠습니까만은....
"나...난 원래 잘 때 이러고 자. 니가 몰라서 그래."
"하이고마. 자기 전에 항상 머리도 감꼬 향수도 뿌리나 보지예."
"남이사..."
지혜와 마리는 다시 눈빛교환, 텔레파시 싸움에 돌입할 기세다. 두 사람을 뜯어말리고 집으로 돌려보내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이미 내 물건은 기운을 잃고 흐물흐물해져버렸다. 한 때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있던 짐승은 이제 잠들어버렸다.
울고 싶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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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설정상 한석의 게임기는 초기 패밀리 게임기입니다만 뿌요뿌요는 사실 이 당시 패밀리판이 없었습니다. 설정오류이긴 합니다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