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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아는 사이라고 말해도 될까. 다행히도 지혜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녀의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용달차에 실려 있던 짐들은 모두 202호, 그러니까 내 바로 앞집에 채워졌다. 짐 옮기기가 다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까 그 숏컷 여자가 맥주 한 잔 하라고 날 붙잡았다. 이름은 효진이라고 했다. 성화에 못 이기고 202호로 들어가게 되었다.
효진이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러 가고 지혜와 나는 앉은뱅이 탁자를 하나 두고 마주 앉았다. 상당히 뻘쭘했다.
"여기로 이사 오신 거예요?"
"........네."
대화가 쉽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구조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과 방향만 반대고 똑같이 생긴 방에서 살고 있기에... 헛기침을 괜히 한 번 해보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네요. 정말이지...."
'인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혹은 '운명'? 그렇지만 말을 삼켰다. 인간 드글드글하기로 유명한 이 서울바닥에서 약속도 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세 번이나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 집 앞으로 이사 오는 일이라니. 정말 식상하기 짝이 없는 삼류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지혜를 앞에 두고 차마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단어를 말하긴 어려웠다. 내 시선을 피하고 방 한쪽을 보고 있는 지혜의 모습은 뭐랄까.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의 느낌이 났다. 다시 볼 일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그녀로서는 나를 대하기 꽤나 민망했을 터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옆얼굴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녀의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저 입으로 그녀가 무얼 했는지 기억났다. 그녀는 분명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저 붉은 입술로 그걸....
"201호라구요? 여기 맞은 편?"
한참 만에 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대답하느라 내 목소리는 약간 새된 소리가 났다.
"아, 아, 예. 예, 여기 산지는 이제 막 2년 되어 가는데요. 학교도 가깝고 해서 괜찮습니다. 가끔 온수가 잘 안 나와서 그게 문제지만요."
그밖에 가까운 슈퍼, 독서실, 운동장, 동사무소 등에 대해서 설명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별 반문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걸까, 아님 무슨 뜻이려나. 다시 또 대화도 없이 멀뚱멀뚱 앉아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효진이 돌아왔다.
"둘이서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아.... 방금까지 이런저런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뭔가 수상한데?"
진은 캔맥주를 따서 하나씩 돌렸다. 일단 한 모금 들어 마른 목을 적신 후 본격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한다.
"내가 지혜를 알고 지낸지가 어언 6년인데 말이에요. 그 동안 한석 씨라는 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거든요?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알고 지낸 거예요?"
"아, 그게 그러니까....."
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담아 지혜에게 보냈지만 그녀는 눈도 안 마주치고 혼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무어라 말해도 반박을 하지 않을 참인가? 그래서 내 마음대로 말하기로 했다.
"알게 된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몇 주 전에 소개팅을 했었거든요.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 중에서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참 저급한 편에 속한다. 그나마 통밥을 굴려 나온 소리가 이 정도다. 효진은 두 눈을 깜빡였다.
"소개팅?"
"예, 선배가 주선해주셨거든요..."
"지혜가 소개팅?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화살은 지혜에게 넘어갔다. 효진은 의아함을 가득 담아 지혜를 이리 저리 찔러보았지만 그녀는 별 대답 없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효진은 거듭 질문했다.
"그럼 설마 한석 씨랑 같이 지낼라고 이쪽으로 이사까지 한 거야?"
"그건 아냐."
지혜는 단칼에 잘라 즉시 대답한다.
"대학 근처라서 작은 방도 많고 가격도 싸더라고. 어차피 회사도 그만 두었는데 회사 근처에서 계속 비싼 월세 내면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 부동산에 물어봤더니 첫 번째로 나온 데가 여기였을 뿐이야. 게다가 니가 이쪽 동네를 추천했잖아. 기억 안 나?"
"그으래? 뭐... 그건 그렇지만 말이야."
아직 의혹이 덜 풀린 듯 한 효진이었지만 지혜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남은 어색함은 술이 해결해주었다. 병 속의 술이 점점 없어지고 취기가 오를수록 대화는 거침없이 흘러갔다.
"저기, 효진 씨는 뭐하시는 분이세요?"
"아하하하하하핫! 뭐하기는, 그냥 놀지. 백수, 아니 백조닷! 화려한 백조! 백조 아시죠? 물 위에 떠있을라고 발을 요롷게~ 요롷게~ 죽어라 휘젓는 애들 말이에요."
"저기, 실제로 백조는 물 위에 그냥 떠있는데요. 발 그렇게 열심히 젓지 않아요."
"푸하하하하하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히힛."
웃음소리가 꽤나 호탕하고 특이한 효진은 지혜와 동갑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셈이다. 직업은 백수. 아니, 백조라고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하하. 더 좋게 말하면 신부수업중? 그렇게 말하면 좀 뽀대가 나려나? 아하하하."
그러고는 지혜의 어깨를 탁탁 치며 외친다.
"자자, 니두 이제부터는 이 언니랑 마찬가지로 화려한 백조다! 알았어? 이제 이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응?"
"......알았어."
살포시 웃는 지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목이나 축이자고 맥주로 시작했는데 어느 샌가 탁자에는 빈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 사람당 적어도 맥주 서너캔, 소주 서너 병 이상은 들어간 상태였다. 효진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말이 많았고 처음에는 조용하던 지혜도 점점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대충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졸업 후로도 항상 연락을 주고 받아온 절친인 듯 싶었다. 이번에 개인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 둔 지혜가 - 나는 왠지 그 사정을 알 것도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방을 옮기려고 조언을 구하자 근처에 살고 있던 효진이 이 동네를 추천했다고 한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면서도 나름 교통도 편리하고 대학교 근처라서 작은 방의 매물이 제법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효진의 백수로서의 애환, 직장을 그만둔 지혜의 허탈함 등을 토로하던 자리는 어느덧 남자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이 자리에 대한민국 건강한 남성인 나도 앉아있었지만 몹시 털털한 효진은 내 존재 따위는 쿨하게 잊은 채 지혜에게 직구를 던지고 있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니년 나한테 말 안한 남자 있었지? 그렇지?"
"........왜 그런 걸 물어."
"왜 물어보긴 궁금해서 그렇지! 까놓고 말해서 너나 나나 처녀도 아닌데 왜 그런 걸 숨기고 그래? 혹시 불륜이라도 돼?"
"......아니야."
아마도 지혜는 효진에게 불륜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 친구인 효진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 했을리 없다. 정확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침통한 표정의 효진은 낮은 목소리를 이야기했다.
"야, 이년아. 귀신을 속여라. 니년 오늘 입고 있는 팬티가 무슨 색일지도 맞출 수 있는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 니가 굳이 이야기 안 하니까 나도 말 안 하고 있었던 거지.... 너, 그러는 거 아냐."
효진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뭔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앉은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먼저 일어나서 내 방으로 돌아가야 되나 고민되기 시작했다.
"효진아....."
울먹이던 지혜는 효진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이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펑펑 운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그러더니 좀 있다가 또 자기들 고등학교 때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울다가 웃으며 어디어디에 털 난다고 하던데 그 어디어디가 정확히 어디어디인지 떠올리려다가 어렴풋 잠들어 버렸다. 두 사람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얼마나 잤을까. 이삿짐을 다 옮겼을 때가 늦은 오후쯤이었는데 지금은 창밖에 완전히 어두워져있다. 방안에 불도 켜있지 않아 시계가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커다란 쿠션에 등을 댄 채 반쯤 누워있었다. 발치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지혜 씨?"
"쉿-"
낮은 목소리의 대답. 그리고 다른 대답이 이어졌다. 입으로 하긴 했지만 소리를 내는 대답은 아니었다.
"읍-"
무언가 내 입술을 덮는다. 촉촉한 살덩이가 위 아래로 포개어져 있고 그 사이에서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무언가가 비집고 나와서 내게 침입한다.
"훕-"
내게도 같은 것이 있어 이쪽에서도 내밀어 그것과 이것을 섞어본다. 비벼본다. 문질러본다. 빨아본다. 휘감아 본다. 타액과 타액이 치밀하게 섞이고 숨결과 숨결이 끈적끈적하게 엮인다.
손을 뻗어본다. 이쯤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만져진다. 뭉클하면서도 풍만하고, 둥글면서도 부드러운 그것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티셔츠 위로 만지는 것은 몹시도 감질났다. 손을 아래에서 위로, 셔츠를 들추고 안에 있는 브래지어를 밀어내고 그 안에 숨겨진 것을 움켜쥔다. 낮은 탄식과 거친 호흡. 한 손으로 모자라 두 손을 모두 그 작업에 투입시킨다.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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