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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다. 명희의 자취방 난입, 그리고 노예 선언 이후로 벌써 2주일이 지났다. 수시로 명희에게 여러 번 불려나가 갖은 노력을 다해야 했다. 퇴근 시간에 모시러 가는 건 기본이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퇴근길이었는데, 그녀가 내게 말했다.
"뭐 좀 사러 가자."
"뭘요?"
"잔말 말고 따라와."
따라오라면 따라가야지. 그러나 도착한 곳에서 나는 "윽!"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뭐해? 안 들어와?"
"저...도 들어가야 되나요?"
가게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날 향해 명희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나는 최대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안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들어갔다.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여자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 같다. 난 최대한 명희만 쳐다보려고 애썼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있는 형형색색의 온갖 천 쪼가리가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곳은 여자 속옷 가게였다.
"이거 어떠냐?"
"그...글쎄요.."
"이건?"
"나....나쁘진 않을 듯..."
아무래도 똑바로 못 쳐다보고 대답을 하려니 명희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내 조인트를 한번 까고는, 으윽. 검정색 레이스가 달린 팬티 두 개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날 불렀다.
"자, 이걸로 사줘."
"......네?"
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안 앞에 있는 점원은 바코드를 찍어 총 금액을 일러준다.
"두 개 합쳐서 이만 이천 원입니다."
"에엑? 무슨 팬티 두 장에 이만 이천 원씩이나...."
너무 목소리가 컸던 걸까.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명희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뭐해? 잔소리 말고 빨리 계산이나 해."
엉겁결에 지갑을 연 나는 계산을 마쳤다. 작은 종이가방에 담긴 팬티가 명희의 가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가게를 나선다. 그녀에게 항의했다.
"갑자기 팬티는 왜요?"
"왜긴? 예쁘잖아."
"그게...그렇게 됩니까?"
할 말이 없다. 이야기를 길게 해봐야 불리하기만 하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내 점심값이 삼천 원도 채 되지 않는데 이만 원이 넘는 팬티라니.
"게다가 왜 두 개죠? 예쁘면 하나만 사면되잖아요."
"예비품."
.......이런 식이니 내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한두 개가 있을 때는 남자들을 그토록 흥분시키는 물건이지만 그게 떼거지로 있는 곳에 가면 너무 압박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아주 그냥 자연스럽게 쫄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주에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야! 뭐하냐?"
"집에 있는데요?"
"나와. 여기가 어디냐면 말이야..."
반쯤 혀가 꼬인 그녀가 말한 곳은 그녀의 병원 근처에 있는 어떤 술집이었다. 안 나오면 쏴버리겠다는 둥 어쩌고 잔소리가 심해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명희는 물론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아가씨들 세 명이 더 있었다.
"어머, 남자 친구 분 오셨네?"
"안녕하세요?"
"명희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쏟아지는 여자들의 집중 시선.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간신히 인사를 마치고 명희 옆에 앉자 명희는 내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한석 씨는 내가 취해서 집에 가면 걱정이 된다고 말이야. 이렇게 꼭 나와서 데리고 가고 그래."
"아니, 제가 언제 그...."
뭔가가 내 발등에 쿵! 떨어진다. 명희의 발이 내 발을 밟고 있었다. 으읍... 입을 다물라는 신호겠지. 명희의 자랑 아닌 자랑에 다들 부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K대생이라면서요? 명희 너무 부럽다. 혹시 친구들 중에서 다른 남자 분들 좋은 분들 없어요?"
"좋은....이요?"
"예, 솔로인 분이요."
명희를 마중하느라 오가면서 병원에서 얼굴은 익혀 알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이 적극적이기 짝이 없는 간호사 아가씨들 대하는 건 참 고역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생각지도 못한 개인기를 펼치는 건 물론, 나올 때 앞장서서 술값까지 계산했어야 한다.
주말에는 교회까지 따라 나가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찬송가도 불러보았다. 의외로 리듬이 쉬워서 나 같은 박치도 몇 번 들으니 잘 따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 일인지 학교까지 찾아왔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어머~ 한석 씨!"
내 이름을 반갑게, 아주 살갑게, 기쁜 듯이 부르는 저 목소리는....
"며...명희 씨?"
"어머, 한석 씨. 왜 말을 더듬고 그래요. 너무 반가워서 그래요? 우후훗."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뿐히 내 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등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눈짓으로 내게 신호한다. 요 며칠간의 경험으로 저 눈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똑바로 해'
......라고 명희, 아니 주인님이 말하고 있다.
"와.아. 정.말 반.갑.다. 명희 씨가 어쩐 일로 저희 학교까지 찾아오신 거죠?"
국어책을 읽을 때도 이것보다 부드럽게 읽었을 텐데. 그러나 나의 부자연스러움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진호 선배는 그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했다.
"이야~ 명희랑 한석이가 이렇게 사이좋을 줄은 몰랐는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소개시켜 주는 건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호호호."
방금까지 나를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명희는 순식간에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 진호 선배를 쳐다보며 마주 웃는다. 틈바구니에 끼인 나는 애써 웃으려고 노력했다.
으.하.하.하.하.
..........이제 앞으로는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가 연기 못 한다고 절대로 까지 않으리라. 연기가 이토록 어렵고도 고된 일이라니!!
레포트를 내고 조만간 있을 시험일정을 확인하러 과사에 들른 거였는데 이미 명희와 진호 선배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기론 명희가 국민학생, 선배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교회에서 만나 알던 사이라고 했다. 입을 가리고 호호 웃어 가며 선배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평상시 나와 있을 때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심히 불편해졌다.
"일정표, 이거대로 출력해주세요."
과순이에게 미리 적어놓은 신청서를 내밀면서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쪽을 힐끔 보았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진호 선배이기에 선배의 모습은 별 색다를 게 없었는데 명희의 모습은 뭐랄까, 좀 수줍어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나랑 있을 때처럼 또랑또랑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약간 겸연쩍어 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선배랑 알고 지낸지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왜 저럴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나다. 과사에서의 볼일이 끝나고 명희와 함께 나와 교정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물어보았다.
"저, 혹시 말이에요. 진호 선배랑 사이가 안 좋나요?"
그러자 그녀는 펄쩍 뛰며 반문한다.
"뭐? 사이가 안 좋냐고? 대체 뭔 소리야?"
"아니... 뭐... 좀 어려워한다고 할까. 평상시에 명희 씨는 말도 되게 잘 하고 그러시는데 아까 진호 선배랑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자니.."
"시...신경 꺼. 니가 알 바 아니잖아."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통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진호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좀 불편한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해준 사람인데... 흐음.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죠?"
"따라와. 찍소리 말고."
"옙."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학교 앞에 있는 통신사 대리점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삐삐를 하나 고르더니 나에게 안겨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주시는 거예요?"
"미쳤냐? 니가 사."
식비가 다 떨어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가입서에 싸인했다. 이제 매달 삐삐요금까지 고정적인 지출이 되게 생겼다.
"맨날 니 학교 과사에 전화해서 연락 전해달라기도 귀찮잖아. 앞으로 이 삐삐가 울리면 당장 나한테 콜 해. 알았어?"
"예...."
그녀는 토끼 모양의 핀이 달린 펜을 꺼내어 마찬가지로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는 표지의 다이어리를 꺼내어 거기에 내 삐삐번호를 적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명희 씨는 삐삐 없어요?"
"있어."
"근데 왜 저한테 안 가르쳐 줘요?"
"내가 왜 니한테 번호를 까야 되는데? 대가리에 총 맞았냐?"
"아뇨...."
........아직 총은 맞지 않았지만 맞을 뻔 한 적은 있지. 참고로 명희의 핸드백에는 예의 그 포텐셜머신인가 뻐킹머신인가 하는 놈이 항상 들어있다. 그녀는 호신용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사냥용을 잘못 말한 게 아닐까 싶다.
"야, 받아."
그녀는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찢어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015로 시작하는 번호가 적혀있었다.
"내 번호야. 혹시나 싶어서 주는 거니까 비상상황 아니면 괜히 쓸데없이 연락하지 마라."
"비상상황이요?"
"그래. 정체 모를 세력에게 납치를 당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거대 범죄조직의 킬러에게 총을 맞았다거나 하는 비상상황이 아니면 연락 하지마. 괜히 쓸데없이 음성 넣어두고 이딴 짓 하면 진짜 죽는다? 응?"
"네에....."
대체 그런 일이 나한테 왜 일어난단 말인가. 이 종이는 그냥 고이 접어 가방 한 켠에 넣어두어야겠다.
"아, 참. 그리고 괜히 니 삐삐 생겼다고 주변사람한테 번호 알려주고 이딴 짓 하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노예 콜 전용이니까 나 말고 딴 사람이 거기에 연락 못 하게 해라."
"아니, 뭐 하러 그렇게까지..."
"그래야 니가 내 연락에 제깍제깍 응답하지. 안 그래?"
".......그렇기도 하네요."
그녀의 악마 같은 웃음에 대들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안 봐도 비디오.
그 이후 그녀와 함께 시내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한편 보고 난 후 집에다가 모셔다 드리고 나서야 해방될 수 있었다. 남들이 보면 남녀의 평범한 데이트 장면이라고 오해할는지도 모르겠다만 주인님 모셔야 되는 노예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100% 고스란히 내 지갑으로부터의 지출인지라 꽤나 뼈아프다. 용돈이 오려면 아직도 보름 넘게 남았는데 이제 슬슬 내 통장 잔고는 위험해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찾아야 할 것 같다.
집 근처에 왔을 때 앞쪽에서 뭔가 시끌시끌한 모습이 보였다.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빌라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부 두 명으로 해달라고 했잖아요."
"아, 언제요. 나는 그런 연락 못 받았수다."
"아니, 그럼 아저씨 혼자서 이걸 어떻게 들고 가신다고요."
"아따, 그냥 하면 된다니껭. 대충 끌고 올라가면 되겠구먼."
"그랬다간 침대 다 망가지죠!"
비닐로 싸인 침대가 하나 길가에 놓여있고 웬 아가씨 한 명과 이삿짐센터 인부로 보이는 아저씨가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구를 막고 있는 통에 집에 들어가질 못하고 엉거주춤 한 쪽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대충 사정이 짐작이 갔다.
"저기,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서로에게 신경질을 부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제야 나를 향했다. 그 눈빛들은 내가 누구냐고 묻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요기 2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지금 이러고 계시면 다들 드나들기도 불편하고요... 말씀 들어보니 이 침대를 가지고 올라가면 되는 거죠?"
"네, 맞수다."
인부 아저씨는 그러자며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아가씨는 좀 탁탁치 않은 눈치였다. 머리카락은 여자답지 않게 꽤 짧았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아가씨였다. 아마도 낯선 남자가 자기 물건에 손대는 게 마뜩하지 않은 듯 했다. 잠시 고민하던 숏컷 여자는 집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얘, 지혜야. 잠깐 좀 나와봐. 우리도 거들자."
지혜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흔한 이름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아저씨와 합을 맞추어 침대를 들어 올리려고 하는데 집에서 나온 사람이 나를 알아보았다.
"어머, 한석 씨?"
"어? 지혜 씨?"
얼마 전 잊을 수 없는 밤을 내게 선사해준 여자. 그리고 그토록 뜨거웠던 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차가운 모습을 보이며 내가 등을 보이고 떠나간 여자. 그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숏컷의 여자가 나와 지혜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지혜가 대답을 못 하고 어물어물 거리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먼저 대답하고 말았다.
"예. 쫌 잘 아는 사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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