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5권) (33/43)

목차

8.

“크리스티안, 오늘은 어지간하면 체르도 경과 싸우지 말고 좋게 넘어갔으면 좋겠군.”

청강을 위해 강의실로 향하는 길에 크리스티안에게 충고를 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하지만 분명하게 내 충고에 반발했다.

“제가 언제 그와 싸웠단 말입니까.”

“솔직히 싸웠잖아.”

던필이 깐죽대며 한마디 보탰다. 크리스티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한 소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먼저 숙소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체르도를 포함하여 낯이 익은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모습을 발견한 체르도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엘 파셔와 스트라스의 기사를 동시에 거느리고 미첼 아카데미를 활보하고 다니자니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 이런 상황은 정말로 전례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리히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한참 동안 그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

강의실 건물 앞에 도착해서 우뚝 멈춰 섰다. 자꾸 에드리히에게 신경이 쓰여서 나는 일부러 체르도 경을 불러 질문했다.

“황제께서는 왜 조용하시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체르도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옆에서 듣던 던필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전하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란 생각은 좀 성급한 거 아닐까 싶습니다만. 솔직히 스트라스 황제께서 매일 전하를 찾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찾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근거도 없이 단언했다. 던필이 황당해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이 발언을 철회할 생각 따윈 없었다.

“체르도 경, 정확히 고하라.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체르도는 조금 망설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별일은 아니고, 폐하께서 가끔씩 두통을 호소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오후나 되어야 움직이시는 편입니다.”

나는 순간 인상을 확 찡그렸다.

“스트라스의 주인인 황제가 만성두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별일이 아니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뱉은 것이냐? 그의 몸에 손톱만 한 생채기가 나도 위부터 아래까지 죄를 물어야 할 일이다!”

체르도의 이해할 수 없는 언동에 화를 냈다. 체르도는 말실수를 했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에드리히의 상태를 보러 가기 위해 즉시 발길을 돌렸다.

스트라스의 기사들이 황제가 머무는 건물을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에드리히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나이가 지긋이 든 시종장이 뛰어나와서 몸을 낮췄다.

“대공 전하. 죄송하지만 지금은 폐하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셔서 쉬고 계십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주십시오.”

“…….”

에드리히가 아프다는 말에 무작정 찾아오긴 했지만 시종장의 말에 바로 걸음을 멈췄다. 엘 파셔의 귀족인 내가 와병 중인 스트라스 황제를 만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시종장도 보통 때였으면 경계를 강화하며 나를 숙소 근처에도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에드리히가 ‘레브노아드의 핏줄’인 나를 특별히 대우해 왔기 때문에 시종장은 함부로 날 쫓아내지 않고 계속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폐하께서 예민해져 계십니다. 사람을 잘못 들여보내면 저희가 죽습니다.”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체르도도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폐하께선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나는 다시금 인상을 쓰고 체르도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걱정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설사 정말 별일이 아니라 해도 황제의 친위대장인 체르도가 할 말은 아니었다. 황제가 와병했는데 병의 경중을 떠나서 이 사태를 중하게 여겨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때 크리스티안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공 전하, 다음 기회를 찾으시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여기선 전하를 호위하기가 어렵습니다.”

던필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위에 스트라스 측 기사 수십여 명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엘 파셔의 기사인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압박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에드리히의 상세가 궁금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건물 안에서 에드리히가 항상 대동하고 다니던 검은 머리칼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그가 시종장을 보면서 말했다.

“대공 전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뭐? 책임을 지다니, 경이 무슨 수로 책임을 진다는 겁니까?”

시종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말을 바꾸겠습니다. 그를 문전박대했다는 이야기가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감히 확신하건대 그날로 당신들의 목이 땅바닥을 뒹굴게 될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시다면 대공 전하를 안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시종장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상황이라면 엘 파셔인인 내가 와병 중인 황제를 만나는 것이 허락될 리 없는데, 에드리히가 잔인한 폭군으로 군림한 덕에 공포에 질린 시종장이 결국 상식을 벗어난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게 들어가 보시라고 길을 열어주었다.

“에반,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나서는 것이냐!”

체르도가 검은 머리의 기사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의 이름이 에반이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총애를 업고 있어서인지 에반은 상관의 추궁에도 딱딱하게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저는 성심으로 폐하를 모시고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 간의 분위기가 미묘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눈여겨본 다음 일단 에드리히를 만나러 들어갔다. 엘 파셔의 기사인 크리스티안이나 던필은 당연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체르도가 함께 안내하겠다고 나섰고 에반이라는 기사와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복도는 유난히 고요했다. 분명히 사람이 있긴 한데 이상하게 기척이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시종들은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움직임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허공을 쓸었다. 공기가 죽어 있었다. 마치 산 자들의 무덤 같았다.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에드리히가 잔악무도한 폭군으로 군림한 결과였다.

체르도가 황제의 침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보초를 서던 기사들이 친위대장을 보고 경례를 했다. 하지만 침소 내부의 상황을 더 잘 아는 것은 에반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폐하께서는 약을 드시고 쉬고 계십니다. 가능한 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몸이 불편하신 와중에도 알현을 허락해 주셨는데 당연히 그리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침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반은 밖에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머무는 숙소보다 두 배는 넓은 방 안에 호사스러운 침대가 놓여 있었다. 에드리히가 커다란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었다.

“뭐, 뭐야. 잠들어 있는 건가.”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가 침수에 들었는데 외부인을 혼자 방 안에 들여보내다니 기사들이고 시종들이고 전부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불현듯 에반이 다 알면서도 나를 침소 안으로 들여보낸 것 같다는 의심도 잠깐 스쳤다. 하지만 일단은 다시 에드리히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난 저녁 에드리히가 심하게 두통을 호소했던 일이 생각나서 그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에드리히를 향해 걸어가는데 방 안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매우 황량하게 느껴졌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에드리히가 힘없는 11황자에 불과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는 모친도 없고, 외가, 친인척도 몰살당한 지 오래였으며, 황제인 아버지에게도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에디가 어쩌다 병에 걸린다 해도 그 아이를 찾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침대맡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에드리히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그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까마득한 과거에도 이렇게 에디를 찾아가서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그러면 에디가 몸을 뒤척이다가 잠결에 작게 중얼거리곤 했다.

“형님…….”

거짓말같이, 그의 입에서 상상하던 것과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선잠이 들었던 에드리히가 서서히 깨어나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어색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두통은 어떠냐? 상태는 많이 안 좋으냐?”

에드리히는 이마에 닿은 내 손에 자기 손을 올려 지그시 잡았다. 그 상태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특별히 아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 신기하군…….”

그는 내 손에 머리를 기댔다.

“뭐가 이렇게 똑같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길고 긴 꿈을 꾸고 있는가. 하지만 꿈이 분명히 아닌데.”

말을 하는 동안 몽롱한 잠기운은 사라지고 그의 눈에 선명하게 이성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언제까지고 바라볼 것처럼 그러고 있었다.

나는 붙잡힌 손으로 에드리히의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 강아지 털처럼 포근하던 적금발이 이렇게 붉은색으로 변해버릴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통은 좀 가라앉았느냐?”

에드리히는 멍하니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한 덩치를 해서 너무 순순하게 구니 웃음이 조금 나왔다.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다. 네 손에서 스트라스의 명운이 결정되니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

에드리히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방 안이 무척 고요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몸도 괜찮다 하니, 시간이 있다면 잠시 이야기라도 할까. 전부터 너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대화?”

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너의 진의를 듣고 싶다. 내게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고 너는 자주 과거 이야기를 했었지. 과거의 공포를 떠올리게 만드는 내가 싫으냐? 그런데 왜 나에게 그토록 너그럽게 구는 거지?”

에드리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숨기지 않고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나 자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레브노아드임을 전제하면서 그간 궁금하게 여겼던 에드리히의 진의를 바로 물어보았다.

이 행동에 대한 에드리히의 반응은 내 예상과 많이 달랐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네가 뭐기에 레브노아드를 자칭하느냐’면서 추궁하거나, 혹은 아주 온건하게 ‘네가 정말 레브노아드라면 증거를 내놓으라’라고 요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에드리히는 아무 확인도 없이, 내가 했던 방식대로 그냥 나를 레브노아드라고 전제해 버리고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어떻다는 것이지? 그냥 옛날 일이지 않은가.”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이하게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에드리히는 고개를 기울이며 뭐가 문제냐고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기가 막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을 죽일까 봐 무서웠다고 몇 번이나 말해놓고 그냥 옛날 일이라고?”

“짐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몰랐다는 건가?”

에드리히가 말짱한 얼굴로 반문하는 것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에드리히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 이야기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나를 두려워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과거에는 아닌 척하고 숨겨왔던 일을 네가 굳이 입 밖으로 꺼냈으니까.”

나는 그것을 당연히 증오나 분노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바닥이 없는 늪처럼 음습하고 우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에드리히는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옛날에는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 두려운 형님의 앞에서 어떻게 함부로 입을 놀리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났고 짐도 보다시피 제법 담대해졌지. 그러니 이제는 무슨 이야기든 다 할 수 있다. 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지금이라면 당신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 있겠지.”

그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나를 보면서 미소까지 띠었다.

에드리히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솔직히 에드리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저 성격이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말에 정말로 아무런 증오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내가 의심을 하며 묻자 에드리히가 순간 표정을 조금 굳혔다.

“증오라고?”

하아, 하고 그가 망연하게 한숨을 뱉었다.

“당신을 두려워해서……, 그래서 짐이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줄 알았나? 그런가?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어?”

에드리히는 한 번 묻고, 몸을 내밀면서 한 번 더 물었다. 그가 완전히 몸을 일으켜 카펫이 깔린 바닥을 딛고 바로 섰다. 막 침상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상태였으나 조금 나른하게 보일 뿐 에드리히는 대단히 위협적이고 강인했다. 그는 더 이상 힘없는 소년이 아니었고 스트라스의 절대자이며 황제였다.

에드리히가 친히 몸을 낮춰 내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굴을 만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손끝에 닿는 머리카락만 뒤로 쓸어 넘겼다.

“당신을 두려워했지만……, 그래도 당신 곁에 있고 싶었다. 두렵고도 경애하는 형님. 당신은 항상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누구보다 멀리 내다보았다. 이 땅에 당신을 숭배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1황자 제노비스 형님조차 당신을 끔찍하게 증오하면서도 결국 경외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짐은 알고 있다.”

나를 경애하고 있었다고? 내가 정말로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나는 어릴 적 에디의 온순했던 모습은 모두 가면이며 여태 나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그 정도로 에드리히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정말 나를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면, 이 말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면 정말로 기쁜 일이 될 터였다.

귓가에서 방황하는 에드리히의 손을 앞으로 끌어왔다. 내 손 위에 에드리히의 손을 얹고 가만히 마주 잡았다.

“네게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찮은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목에다 칼을 꽂아놓고 그 위에서 미안하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기꺼워할까. 제노비스 형님이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분통이 터져서 관을 박차고 무덤에서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그런데 에드리히는 뜻밖에도 이 모든 대화가 무척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이 짐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짐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지금처럼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해.”

에드리히는 마주 잡은 손을 뒤집고 내 손등에 키스하며 경의를 표했다. 살 위에 입술이 닿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고 이내 황홀경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리히의 반응이 지나치게 과한 것도 찜찜하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손을 바로 거두었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알고 있었다면, 아주 괘씸하게 여길 일이 있었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에서 광대가 되고 싶다는 둥 그런 헛소리를 했느냐? 내 뜻을 읽었다면 당당하게 검을 익혀 이 몸의 곁을 지켰으면 되었을 터.”

에드리히는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과 죽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닌가. 당신은 형제들을 불쌍하게 여겼지만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죽여야 한다고 판단하면 죽였다. 당신은 항상 그래 왔지 않나?”

“…….”

나는 일순 말문이 틀어막혔다. 에드리히는 개의치 않고 웃는 낯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짐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 이 몸 따윈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당신에게 알려왔다. 검을 들지 않았고, 광대가 되겠다고 하고, 구석에 숨어서 어른이 되지 않으려고 수염을 깎았다. 그렇게 영원히 당신의 곁에 머무르려 했지.”

이야기는 끝이었다.

에드리히는 말을 마치고 웃음기를 조용히 거두었다. 나른하게 서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비딱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너는 누구지?”

저런 질문을 하기는 시기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일 것 같은가.”

그는 이미 나를 레브노아드로 가정하고 긴 대화를 나눴다. 에드리히가 납득하기 어려운 얼굴로 물었다.

“형님의 아들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니며, 네가 정말 레브노아드 형님이라는 것인가.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그건 네가 결정하기에 달렸다.”

에드리히가 마음먹기에 따라 나는 레브노아드의 아들이 될 수도 있고, 그냥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레브노아드 본인이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레브노아드만 알 법한 정보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신성한 드래곤을 불러내 내가 누구인지 말해보라고 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

“하아……!”

에드리히는 고개를 들고 탄성을 터뜨렸다. 서서히 얼굴에 얕게 흥분이 돌았다. 흥분은 곧 유쾌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는 만면에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크게 흥분을 하여 양손으로 내 어깨를 와락 붙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정말 레비 형님이 맞다는 것이지!”

에드리히는 긴 고민도 없이 나를 레브노아드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간단히 믿어도 되는 게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너무 쉽게 나를 인정해 준 탓인지, 기분이 좋아야 할 일인데도 어쩐지 바로 웃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고 있는 나와 달리 에드리히는 크게 기뻐했다.

“당신이 정말로 그라면 앞으로 레비 형님이라고 불러야겠군!”

“그만둬. 그냥 레이라고 부르면 된다.”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자기보다 스무 살은 어린 엘 파셔 귀족을 형님이라고 부르다니 황당함을 넘어서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짓이었다.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안 될 일이다.

“레비 형님.”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 했건만 에드리히가 확인하듯이 한 번 더 불렀다. 나는 그만 손을 놓으라는 느낌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옛날과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부르면 안 되지.”

“무엇이 바뀌었다는 건가. 과거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당신이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그는 어깨를 더욱 강하게 쥐며 유쾌하게 외쳤다.

에드리히와 과거 일을 이야기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긴 이야기 속에서 에드리히가 거짓을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 * *

에드리히는 오전 중에만 해도 두통에 시달리며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내가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정양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나 에드리히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웃으며 함께 밖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실내에만 있는 것보다 볕을 쬐는 것이 그의 몸에도 좋을 수도 있겠다 싶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체르도의 말을 통해 짐작할 때 에드리히는 꽤 오래전부터 두통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복도를 걸으며 증상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오늘처럼 두통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느냐? 신관을 불러 좀 더 병세를 살피지 않고.”

“짐에게 적이 얼마나 많은데 매일 병상에 드러누웠다간 이 목을 부지하기 힘들지. 이런 일은 많지 않다.”

에드리히는 여전히 살벌한 이야기를 웃는 낯으로 쉽게 말했다.

중앙 계단을 통해 1층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1층 로비에 시종장과 함께 아젤로스가 서 있었다. 내가 에드리히와 함께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놀란 표정은 이내 약간의 부러움으로 변했다. 아젤로스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몸이 조금 불편하시다고 전해 듣고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언짢아 하실까 봐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지금은 바쁘다. 나중에 다시 오너라.”

에드리히는 아젤로스를 힐끗 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젤로스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가 얼굴을 약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동행을 해주었던 시종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곧 도망치듯 먼저 건물을 떠났다.

나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젤로스를 너무 홀대하는 것이 아니냐.”

에드리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구나. 짐도 선황에게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 황제의 자식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그건…….”

황제였던 아버지는 황위 계승자로 선택했던 내게만 총애를 베풀었고, 다른 자식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냥 무시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서 형님들과 동생들을 제거하는 데 한 손 거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 끔찍한 일이다. 아비이면서 친자식을 죽이는 데 동참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은 황실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지스카르조차 외척세력을 줄이기 위해 시라크를 냉대한 적이 있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크리스티안과 던필, 그리고 체르도가 긴장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이나 던필이야 적국의 기사들 사이에 경계를 하느라 그렇다 쳐도, 체르도는 걱정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별고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크리스티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내 안전을 확인하며 곁에 있는 에드리히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아프다고 들었던 황제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에드리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비가 쏟아졌는데 날씨가 갑자기 밝아졌구나. 야외에서 차라도 마시겠느냐? 당신은 본래 따뜻한 블린즈를 좋아했지. 아직도 취향이 그대로인지 모르겠군.”

“차에 대한 취향은 쉽게 바뀌지 않더군.”

어차피 오늘 청강은 물 건너간 것 같다. 나는 에드리히의 권유에 따르기로 했다. 에드리히가 차를 준비하라고 명령했고 시종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라 미첼 아카데미 부지 내이다. 시종들이 나름 재주를 부려 자리를 만들었지만 테이블 자체가 허름해서 모양새가 다소 초라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시종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에드리히의 반응을 확인했다. 에드리히는 느긋하게 있었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시녀가 다과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리는 동안 거의 숨을 쉬지 않았고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녀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그 긴장감이 내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시녀를 가리켰다.

“네가 어찌했기에 시녀가 다과 하나 준비하는데도 이렇게 긴장을…….”

갑자기 내게 지목을 당한 탓인지 몹시 긴장해 있던 시녀가 흠칫 놀라며 테이블 위의 찻잔을 손끝으로 조금 건드렸다. 찻잔이 아주 약간 흔들리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이었다. 에디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돌변하여 시녀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우득.

가느다란 목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에디가 엄청난 악력으로 그대로 시녀의 목을 꺾어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에디!!”

나는 급히 일어나 에드리히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에드리히가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내가 만류하거나 말거나 자기 마음대로 시녀의 목을 꺾어버릴까 봐 마법까지 준비했는데 다행히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녀를 놓아줘라.”

에드리히는 서늘한 눈빛으로 시녀를 내려다보다가 내 요구대로 시녀를 놓아주었다. 시녀는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근처의 기사들이 서둘러 뛰어와서 그녀를 끌고 사라졌다.

나는 당혹스럽게 한숨을 토하며 자리에 앉았다. 에드리히가 사람을 함부로 다룬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삼 충격을 받았다. 겨우 이 정도 실수에 시녀를 죽여버린단 말인가.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나는 허탈하게 에드리히를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서 옅게 살기가 느껴졌다. 에드리히는 사람을 너무 죽여 살기에 찌들었고 법도 도리도 없이 포악했다. 나는 망연히 자문해 보았다. 자주 머뭇거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소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지?

에드리히는 나를 마주 보며 쉽게 웃음을 머금었고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 옛날 스트라스는 가장 위에서부터 저 밑바닥까지 완벽하게 레비 형님의 나라였다. 형님이 죽고 난 뒤에 독살 의혹까지 받는 짐이 나라를 다스리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나?”

“…….”

“아무도 짐의 말 같은 것은 듣지 않았다. 하찮은 시녀조차 그랬다. 하지만 짐이 한 놈을 잡아 죽이고 핏물이 떨어지는 검을 들면 그때는 말을 들었다.”

에드리히는 웃는 낯으로 그저 그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었고 내게도 차를 권했다.

나는 찻잔을 들었다. 에드리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자꾸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애써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했다.

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에드리히가 매일 대동하고 다니던 에반이란 기사가 뒤늦게 정원에 도착했다. 그는 조용히 다른 기사들과 함께 시립했다. 그가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에 시선이 갔다.

그것은 단순한 반지가 아니라 마정석이 박힌 반지였다. 마정석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고 왔는지 마력이 한층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무슨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에반 경이라고 했던가? 경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가까이 오너라.”

에반은 뒤에서 머뭇거렸다. 좀 전만 해도 에드리히를 만날 수 있도록 도움까지 줬으면서 지금은 가까이 오길 꺼리는 분위기이다.

“전하께서 가까이할 자가 아닙니다.”

체르도가 또다시 나서서 에반과의 접촉을 막았다. 나는 체르도가 이상하게 몹시 예민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마십시오. 전하의 눈과 귀를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체르도 경, 무엇 때문에 그를 그리도 싫어하는 것인가?”

체르도는 단순히 에반을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혐오감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체르도를 추궁하다가 고개를 돌려 에드리히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반은 에드리히가 항상 대동하고 다니는 측근 중의 측근이다. 체르도가 이러는 이유를 에드리히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체르도 경의 말이 맞다. 네가 가까이할 인간이 못 되니 관심을 두지 마라.”

에드리히는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체르도가 경계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고 수많은 기사와 시종들이 바짝 겁에 질려 있었다.

에드리히 혼자서만 웃었다.

* * *

하루 종일 에드리히와 대화를 나누고 가볍게 근처를 산책했으며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 식사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항상 엘 파셔의 밍밍한 음식만 먹다가 스트라스 특유의 향취를 가진 음식을 먹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기분 좋게 식사를 거의 마쳤을 즈음이었다. 나는 뒤늦게 식탁 위에 과실주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애들이나 마실 만한 술만 잔뜩 내놓았구나.”

나는 쓰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술병을 퉁겼다. 에드리히가 조금 실망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가? 여기에 앙꼴주도 있는데.”

“처음 유곽에서 만났을 때도 내 앞에다가 과실주를 내놓았지. 그리고 내가 제대로 된 술을 가져오라고 하자 갑자기 표정이 굳었고.”

나는 황태자 시절, 형제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암살에 시달렸다. 언제 어디서 적의 위협에 노출될지 모르는 관계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독한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나마 내가 즐겼던 것이 여러 과실주, 그리고 앙꼴주였다.

“현재 엘 파셔는 그 어떤 시기보다도 풍요로우며 평화롭다. 그곳에 나를 암살하려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독한 술을 저어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

“아아,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군.”

그제야 에드리히가 의문을 풀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 시종을 불러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하는 롱고스 42년산을 가져오게 했다.

잔을 들어 살짝 맛을 보았다. 혀끝만 대었는데도 시원한 향이 느꼈다. 어째서 이 술이 그렇게 유명해졌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나는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드리히를 바로 응시했다.

“에디.”

짧게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에드리히는 식기까지 전부 내려놓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과거에 그랬듯이 그는 내게 무한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나를 두려워했으나 결코 미워한 적은 없었노라고 에드리히는 말했다. 하지만 자꾸만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잔악무도하게 변해버린 에드리히, 기이한 측근들의 반응, 그리고 결코 웃어넘기지 못할 과거사가 내게 어두운 의심을 가져다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속마음을 삼키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에드리히가 황제 신분임에도 몸소 나를 배웅해 주러 나왔다. 먼 곳까진 나오지 말라고 에드리히를 억지로 되돌려 보냈다. 체르도는 끝까지 날 쫓으려 했지만 던필과 크리스티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를 떨어뜨렸다. 체르도는 떠나는 순간 크리스티안을 보며 무척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스트라스 쪽 사람이 전부 떠난 것을 확인한 직후에 크리스티안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두 사람도 숙소로 돌아가라.”

“어디를 가시든 함께 하겠습니다. 저희의 임무가 호위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크리스티안이 강경하게 말했다. 오늘 온종일 스트라스 기사들 사이에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놀러 가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할 일이 생겼다. 너희 실력으로는 방해만 된다.”

나는 마정석이 박힌 팔찌에 손을 얹고 냉정하게 말했다.

“확인할 일이라니, 낮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번엔 던필이 의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멀리 스트라스 황제가 머무는 건물을 응시했다.

“나 혼자 움직이겠다. 일단 복귀해.”

기척을 죽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에드리히가 묵고 있는 숙소 근방에 도착해 보니 낮 동안에 얼굴을 익혔던 스트라스의 기사들이 길목마다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을 쓰러뜨리고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에반이 숙소 밖으로 나왔다. 잘은 몰라도 무슨 심부름이라도 하러 나온 것이 아닐까?

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둑 흉내를 내며 여기까지 숨어들어 온 것은 모두 저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에반이 건물 사이를 지나는 순간 돌풍을 일으켜서 그를 구석진 곳으로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반은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날 응시했다.

“황태자 전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반이 날 보고 ‘대공 전하’라 하지 않고 ‘황태자 전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전부 해줄 정도로 에드리히가 그를 신뢰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에드리히는 에반을 조금도 귀히 여기고 있지 않았다.

기분이 몹시 찜찜했다. 나는 이 찜찜함의 정체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마법이 무엇이냐. 체르도 경이 널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전하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됐다! 그 답은 내가 직접 알아보겠다!”

어차피 내 질문에 순순히 답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불쾌하게 언성을 높이며 마법으로 그를 벽에 짓눌렀다. 에반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구석에 처박혔다. 마정석을 가지고 다니기에 어느 정도 마법에 소양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마법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 것 같았다.

점점 더 느낌이 이상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에반의 약지에서 반지를, 마정석을 빼앗으려 했다.

“그만두십시오!”

반지에 손을 대는 순간 에반이 절박한 얼굴로 외치며 나를 뿌리쳤다. 그의 표정 때문에 더욱 상황을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마력 덩어리가 정확히 에반의 복부를 가격했고 그는 신음을 내며 몸을 확 굽혔다. 나는 에반의 팔을 뒤로 꺾어서 마정석 반지를 빼냈다.

“잠……깐……!”

마정석을 빼앗긴 에반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가 갑자기 자기 얼굴과 머리를 움켜쥐었다.

구름이 달을 반 이상 가려서 주위가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에반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에드리히가 ‘진짜 금발’이라고 말했던 뿌리까지 빛나는 화사한 허니 블론드였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그는 평범한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눈동자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스트라스의 여름 들판을 연상시키는 녹색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끼쳤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나의 그것과 너무나 똑같아서.

“대체, 대체 너는 뭐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에반이 천천히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제가…… 그만두라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나는 아직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때 음울하게 서 있던 에반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직접 당신을 만나보니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사람의 이목을 이끄는 힘이 있고, 고고하고 교만하며, 마법에 학식까지 훌륭하십니다. 침묵에 짓눌려 있던 황실의 기사들을 순식간에 웃게 만드는 당신의 재주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게다가 벌꿀로 만든 것처럼 매끈한 머리카락과 귀한 녹색 눈동자까지. 하다못해 당신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뭐라는 것이냐?”

뜬금없는 에반의 말은 나를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레브노아드 황태자라면, 정말로 그러하다면 어째서 바로 스트라스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무려 이십 년 가까이 기회가 있었을 텐데!”

에반은 점점 감정이 격앙되어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혈육을 모조리 다 죽이고, 자신의 명에 거역하는 자들을 전부 다 죽이면서, 스트라스를 뿌리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 다 내팽개치고 여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니. 엘 파셔의 대공이라니 황당함에도 정도가 있지. 당신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에반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고함을 지른 뒤 그는 흠칫 몸을 굳혔다.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내게 마정석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조금 지체하고 있자 그는 억지로 내 손 안에서 반지를 빼앗아 손가락에 꼈다.

마법을 사용하자 머리 색은 검게, 눈동자는 갈색으로 변했다. 바로 그 직후에, 에드리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키가 무척 컸기에 건물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도 유난히 길었다.

에드리히는 나와 에반을 번갈아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아무것도?”

이렇게 수상쩍은 장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통할 리가 없다. 에반은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서 내가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자의 정체가 수상해서 직접 알아보러 여기까지 왔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짐이 너에게 불만 같은 게 있을 리가 있겠느냐.”

에드리히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황제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시종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체르도 경도 뒤늦게 이곳에 당도했다.

나는 잠시 상황을 보다가 다시 에드리히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는 무슨 이유로 에반 경을 곁에 두고 있지?”

에드리히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에반에게 걸어갔다. 그가 에반의 멱살을 움켜쥐고 짐짝 다루듯 벽에다가 강하게 처박았다.

쿵!

“이거? 신경 쓰지 말라는데도 그러는구나.”

에반이 숨통이 막히는지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나는 평소처럼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했다. 목덜미가 뻐근하다. 에드리히가 에반의 멱살이 아니라, 내 멱살을 쥐고 벽에 메다꽂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체르도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폐하! 그만두십시오. 전하께서 보고 계십니다!”

에반은 나와 똑같은 머리 색과 눈을 가지고 있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빼닮은 에반을 에드리히가 가축 이하로 취급한 지는 아마도 아주 오래되었을 것이다.

체르도의 얼굴이 혐오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체르도는 에드리히가 에반을 학대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 끔찍하게 싫었던 것이다. 내게 레브노아드가 모욕당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체르도는 무엄하게도 황제의 앞에서 당장 그만두라고 재차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바락바락 대들다가 에드리히가 칼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살벌한 생각을 하며 피식 고소를 지었다.

“에디.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독살한 자가 누구지?”

일찌감치 해야 했을 질문을 지금에서야 했다. 에드리히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캘러웨이 대공이다. 그 멍청한 작자가 주제도 모르고 형님에게 독수를 썼지.”

“그래.”

더 이상 에드리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에드리히를 뒤로하고 길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헤치고 그곳을 떠났다. 에드리히가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무슨 생각을 하고 걸었는지 모르겠다. 발이 닿는 대로 걷는 도중에 밤이 더욱 깊어졌다. 나는 가볍게 한기를 느끼고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고문의 후유증을 대비해 작은 추위도 피하고 항상 몸을 사리고 다녔는데 급히 나오느라 외투 같은 것을 준비해 오지 못했다.

누군가 어깨 위로 옷을 걸쳐 주었다. 기척도 거의 없이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났지만 나는 경계하지 않았다. 익숙한 향이 났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지스카르를 확인했다. 녀석에게선 항상 같은 냄새가 난다. 깔끔한 나무향인데 여전히 그 향의 이름은 잘 모른다. 어쨌거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냄새였다.

지스카르는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팔을 뻗어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여기까진 또 어떻게 온 것이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냥 얌전히 안긴 상태로 물었다.

“할 일이 있다며 크리스티안까지 떼어놓았다지? 너 혼자 위험천만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시간이 지나도 네가 돌아오지 않아서 짐이 친히 찾으러 나왔다.”

“안 그래도 바쁘신 황제 폐하를 내가 더 바쁘게 만들었군.”

지스카르는 나를 놓아주었다. 무표정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분명 나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또 스트라스 황제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스카르에게 전부 이야기해 주기로 했었다. 그 약속이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 에드리히의 행태가 실로 괘씸해서 누군가에게 속마음까지 전부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다.

지스카르가 근방에서 대기 중인 호위 기사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람을 전부 물리고 잠시 걸었다. 그리고 담장이 끝나는 부근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곳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마도 에디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에반 경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서 나를 증오한 적이 없다고? 기가 막히는 소리지. 나를 레브노아드라고 인정한 게 맞는지 그것도 확신이 안 서는군. 일반적으로 그게 단시간에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나?”

나는 지스카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크리스티안, 던필까지 합쳐 내 전생을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오랫동안 날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이놈이다. 침묵하고 있는 지스카르에게 피식 웃음을 던지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나도 참 어리석지. 에디는 유년기에도, 황제가 되어서도 매번 나 때문에 골탕을 먹었다. 내게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죽기 직전까지 그를 벼랑으로 내몬 주제에 그래도 나를 싫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단히 이기적인 감정이며 가당찮은 희망이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에 대한 에디의 증오가 일반적인 수준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증오가 심해도 상대가 죽어버리고 나면 그자의 무덤에 침이나 뱉고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지, 에디처럼 일부러 죽은 사람의 닮은꼴을 곁에 두고 모욕을 주면서 괴롭히지는 않는다. 에디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질 않는군.”

생각해 보면 이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스카르를 바로 보며 말했다.

“당장 열흘 후에 평화회담이 있는데 내 문제 때문에 열이 오른 에디가 제대로 합의를 할지 모르겠구나. 그냥 에디에게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 것을 그랬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내가 최대한 책임을 지겠다.”

“네게 원하는 것은 그런 일이 아니다.”

지스카르가 약간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짐과 그자가 부딪치면 네가 중간에서 곤란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자를 피해왔다. 하지만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구나. 너는 언제까지 그자 앞에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이냐? 짐이 언제까지 그 꼴을 봐야 하지?”

나는 토끼 눈을 하고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그의 발언은 정말로 의외였다.

“여태 서재에 틀어박혀서 일만 하고 있었던 것이 에디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였나? 내 입장을 고려하느라 그런 것이었다고? 전혀 예상도 못 했다. 용케 그런 생각까지 하는구나.”

나라면 절대 그렇게까지 남을 배려하지 못할 것이다. 부모님을 일찌감치 피신시켰을 때도 내심 그의 사려 깊음에 감탄을 했었다. 그의 눈이 항상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짐의 노고를 안다면 더 이상 그자를 만나지도 말고 관심도 주지 마라. 하지만 이런 명령을 해봤자 어차피 짐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테지.”

차갑게 명령을 하던 지스카르가 마지막에 말을 바꾸고 낮게 한숨을 지었다. 나는 몸을 바로 일으키고 그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그를 올려다보면서 검지로 가슴팍을 꾹 찔렀다.

“무서운 놈. 너는 이 몸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

지스카르가 앞에 서 있는 나를 끌어안았고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이 등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길이 점차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질겁하며 당장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만둬, 이런 데서……!”

지스카르는 순순히 손을 놓고 물러났다.

힐끗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짧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주저앉자마자 지스카르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괜히 투덜거려 보았다. 지스카르가 뺨에 뽀뽀를 하면서 남은 바지와 속옷을 전부 벗겨냈다. 날 헐벗긴 다음엔 자신도 옷을 벗었다.

벌거벗은 채로 뒤엉켜서 키스를 했다. 지스카르의 커다란 음경이 다리를 스쳤다. 징그러운 느낌이 들어서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흔히 있는 일이기에 지스카르는 능숙하게 내 팔을 붙들고 저항을 눌렀다.

입 안에 자꾸 침이 고인다. 지스카르는 입술을 빨지 않고 내 혓바닥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고개를 틀면서 입술을 비비자 침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어쩐지 뒷덜미가 뜨끈해서 목을 뒤로 젖혔다. 키스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저항하던 것을 멈춘 줄도 몰랐다.

지스카르는 키스에 열을 올리는 한편 손으로 등과 허리, 허벅다리를 어루만졌다. 허벅지 안쪽 살을 만지던 손이 중심부의 음경을 슬그머니 쥐었다. 나는 음경이 아니라, 전신을 꽉 쥐어짜는 듯한 쾌감에 눈을 꼭 감고 몸을 잔뜩 경직시켰다.

향유를 사용해서 구멍을 충분히 적신 다음 지스카르가 천천히 삽입을 시도했다. 매일 관계를 가지는데도 처음 녀석의 것이 들어올 때면 가벼운 통증을 느낀다. 두꺼운 살덩어리가 뒤를 빡빡하게 채웠다. 자신의 것을 꽉 조이는 느낌에 지스카르는 몹시 만족한 듯했다. 그는 혼자서만 즐기지 않고 내 성기를 손으로 주물러주었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뒤로 자극이 시작되자 입에서 젖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스카르가 좀 더 소리를 내라며 성기를 강하게 박아대면서 재촉했다. 사타구니부터 전신이 땀으로 끈끈해졌다.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지스카르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거의 절정에 다다른 것을 알고 지스카르가 손으로 중심을 한창 강하게 자극해 주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정액을 모조리 토해버렸다. 지스카르도 내 몸 안에서 파정을 맞이했다.

사정을 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한숨을 토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쇄골과 가슴에 키스를 하면서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절대 한 번으론 끝내질 않지.”

“몇 번이고 네가 만족하는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지스카르가 축 늘어진 내 중심을 손으로 세우고 뿌리까지 단숨에 입에 물었다. 방금 사정한 직후라 정액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걸 입에 넣다니 정말 비위도 좋은 놈이다. 뭐, 이러쿵저러쿵해도 나는 입으로 직접 빨아주는 데 무척 약하다. 사타구니가 간질거리며 금방 흥분이 몰려왔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귀두를 핥으면서 물러났다. 그는 구석에 둘둘 말려 있는 침대 시트를 끌어와서 내 허리 밑으로 밀어 넣은 다음 허벅다리를 잡고는 양쪽으로 크게 벌렸다. 은밀한 부위가 그의 앞에 훤히 드러났다. 지스카르는 바로 구멍을 입으로 빨기 시작했다.

“자, 잠깐. 지스카르! 더럽게!”

성기를 빨아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진심으로 더럽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안에다 가득하게 사정을 해놓은 상태에서 그걸 지금 입으로 빨고 있는 것이다.

지스카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엄지를 집어넣어 구멍을 옆으로 꾹 벌렸다. 그렇게 입구를 벌리고 혀를 넣어 내벽을 깊숙하게 핥았다.

“흐윽! 아, 흐, 그만……. 거짓말……. 진짜 역겹지도 않은 거냐?”

“역겹기는커녕 지나치게 깨끗하다 싶구나. 금방 살갗이 하얗게 변했군.”

지스카르가 자꾸만 움츠러드는 다리를 손으로 꽉 붙들고 허벅지에 입술을 눌렀다. 지난번에 사타구니에 잔뜩 자국을 남겼는데 어느새 그 자국의 희미해져 있었다.

그는 영역 표시하는 짐승처럼 다시 다리 안쪽에 붉은 자국을 잔뜩 새겼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뜨거운 것이 닿은 것처럼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문득 구멍의 주름을 손으로 만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수없이 만지고 괴롭혀주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깨끗한지 모르겠군.”

“흐, 뭐야. 지저분했으면 좋겠다는 거냐?”

“물론이다. 짐에게 수없이 안겼다는 흔적을 이곳에 남겨주고 싶구나. 짐으로 인해서 하얀 피부가 검게 더러워지는 것을 보고 싶군.”

놈의 구접스러운 소망에 입을 뻥긋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다 보니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양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움켜쥐었다.

“바보냐……. 멍청한 놈이…….”

지스카르는 뭔가 내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가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다시 구멍을 강하게 빨아주었다. 순간 심장이 터지는 줄만 알았다.

나는 극도로 흥분하여 밀물처럼 몰려오는 자극에 몸부림쳤다. 어느새 중심이 뻣뻣하게 발기했다. 지스카르가 부끄러운 줄로 모르고 고개를 치켜든 성기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흣, 흐으! 아, 흐. 하아아!”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다. 한참 구멍을 빨고 성기를 주물러주던 지스카르가 불쑥 몸을 일으켜서 위로 올라왔다. 그는 시트를 붙들고 있는 양쪽 손목을 잡아서 침대에 눌렀다.

“레이, 조금 아프게 해도 되겠느냐?”

“으음……? 어떻게…….”

지스카르는 자세를 바로 한 다음 입구에 성기를 맞췄다. 넘칠 만큼 애무를 받았던 구멍이 그의 촉감을 느끼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움찔거렸다. 다시 두툼한 성기가 끝까지 들어온다. 안쪽 점막이 쪽 빨아당기듯이 그를 받아들였다. 창피함에 얼굴이 은근히 붉어졌다.

그때였다. 지스카르가 성기를 완전히 뽑히기 직전까지 빼냈다가 끝까지 힘차게 찍어 올렸다. 둔중한 동통에 저도 모르게 윽 소리를 냈다. 지스카르가 인정사정없이 성기를 박기 시작했다.

얼마나 거친지 한 번 박을 때마다 몸이 조금씩 위로 밀려 올라갔다. 좀 과장해서 구멍에다 두꺼운 말뚝을 박고 못질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하아, 레이……!”

지스카르가 팔목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면서 탄성을 터뜨렸다. 지스카르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구멍 가장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쾌감이 올라왔다. 둔중한 아픔에 정체 모를 쾌락이 뒤섞였다.

“윽, 크!”

짧게 약간 신음을 냈더니 지스카르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 괜찮겠느냐?”

지스카르가 내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조금 헐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됐다. 그냥 계속해.”

“아파 보였다만.”

“네가 너무 좋아하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하라고.”

시선을 약간 피하면서 대답하는데 지스카르가 와락 입술을 덮쳤다. 일순 녀석이 정액이 덕지덕지 묻은 뒷구멍을 쪽쪽 빨았다는 것이 뇌리를 스쳤다. 잠시 동안 무익한 저항을 하다가 결국 입술을 내주었다.

지스카르와 입을 맞추다 보면 기력이 쏙 빨리는 기분이 든다. 비릿한 맛이 나거나 말거나 그냥 기분 좋은 나른함에 몸을 맡겼다.

지스카르가 자세를 잡고 다시 허리를 추어올렸다. 살덩어리가 강하게 내벽을 두드릴 때마다 깊숙한 벽과 결합 부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아래 구멍이 온통 뜨거웠다. 반면 성기는 덩그러니 내팽개쳐져 있었다. 내 것이 저 혼자 팽팽하게 발기하여 끄트머리에 투명한 액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성기를 만져주지 않았다. 그가 팔목을 억누르고 있던 손으로 내 손을 쥐었다. 나는 그냥 눈 질끈 감고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레이, 좀 더. 그래, 좀 더.”

행위가 너무 거칠고 성기를 자극해 주지도 않으니 절정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계속 달래면서 나를 절정까지 끌고 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희한하게도 그렇게 싫지 않았다. 녀석이 다정하게 좀 더, 좀 더, 할 때마다 사타구니가 찌르르 울렸다.

“지스카르. 앗, 아! 지스카르, 흐……!”

어렵사리 절정에 올랐으나 느낌은 굉장히 좋았다. 지스카르도 거의 동시에 사정을 하고 내 위에 엎드렸다.

“하아, 하아, 너는 이런 식으로 거칠게 하는 게 좋은 거냐?”

숨을 얕게 몰아쉬면서 지스카르를 향해 물었다. 지스카르가 대답하기 위해 팔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진 않다. 네가 짐을 위해서 애써 견뎌주는 것이 좋은 것이지.”

“뭐……? 이 자식 정말로 변태였잖아.”

“이해를 못 하겠느냐?”

내가 변태로 매도하는데도 지스카르는 평온하게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자기를 위해준다는 부분이 핵심인 것이다.

지스카르가 팔을 잡아당겨서 나를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 별짓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맨살이 맞닿는 감촉에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지스카르는 한참 동안 날 안고 있었다. 점점 날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엔 그대로 날 진짜 으스러뜨릴 기세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레이……, 레이. 그 눈으로 다른 자를 바라보는 것은 그만둬라. 다른 놈에게 네 감정의 편린조차도 주지 마라. 너를 이대로 어딘가에 가둬놓았으면 좋겠구나. 목에 사슬을 걸고 다리엔 무거운 족쇄를 채워서.”

지스카르가 독점욕을 참지 못해 이런 소리를 내뱉을 때면 나는 으레 발끈해서 어디 해보라고 큰소리를 치고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스카르가 내게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스카르는 내가 정말로 싫어할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지스카르가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키스하다가 잠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까맣고 긴 속눈썹이 눈길을 끌었다. 눈을 감고 키스에 열중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몸이 뜨거워졌다. 나도 눈을 감고 입 안을 헤집고 있는 녀석의 혀를 덥석 빨았다.

녀석이 한 번 더 할 기세로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 * *

먹구름 사이로 숨은 달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방문이 열리자마자 난데없이 에반을 발로 걷어차서 침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따르던 모든 기사들과 시종들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스트라스의 황제, 에드리히 반 스트라스는 대단히 잔인한 인물이었다. 숨만 잘못 쉬어도 황제가 휘두른 칼에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더욱 두렵게 했다. 유쾌하게 웃는 것도 잠시뿐이고 금방 평소의 몇 배 이상으로 잔혹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에드리히는 에반을 한 번 더 걷어차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물었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아무리 불러도 네놈이 보이지 않기에 친히 찾으러 나섰더니 이런 상황이 되어 있을 줄이야.”

“큭,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정말로 이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단 말이냐?”

에반은 억지로 비명을 삼켰다. 에드리히에게 붙들린 머리카락이 통째로 뽑혀나갈 것 같았다.

“겨, 결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마정석을 빼앗기기 직전에 폐하께서 도착하셨기 때문에…….”

에드리히가 비로소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에반은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때 에드리히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군.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네놈의 머리카락이며 눈동자를 봤기 때문이겠지.”

에드리히는 손을 내저으며 주위 사람들을 물렸다. 기사들과 시종들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체르도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그의 불손한 시선을 느낀 에드리히가 조소를 보냈다.

“가끔씩 짐의 인내심에 감탄할 때가 있다. 여태 경을 살려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야.”

“……물러나겠습니다.”

체르도는 힐끗 에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침실문이 닫히자 에반은 좀 전보다 더욱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손가락의 반지를 빼냈다. 머리카락이 본래의 금발로,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되돌아왔다.

에드리히가 비틀린 웃음을 보이며 에반의 가슴 한복판을 발로 짓밟았다. 흉곽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에반은 낮게 비명을 질렀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웅크렸다.

“그렇게 벌벌 기어 다니지 마라. 형님은 네놈처럼 비굴하게 굴지 않아.”

“큭, 폐, 폐하.”

“엘 파셔와 대전이 벌어질 당시에 형님이 오른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는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전투가 일단락될 때까지 부상을 숨기고 아픈 내색조차 보이질 않았다. 알았느냐?”

“커억!!”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인 에반이 헛구역질을 했다. 그가 침을 흘리며 경련하고 있자 에드리히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쓰레기 같은 놈! 네놈도 그를 보았을 것이 아니냐? 겨우 그렇게밖에 못 하겠느냐? 비슷한 것은 그 눈깔과 머리털뿐이지!”

그는 에반의 뒷덜미를 잡아서 옆얼굴을 벽에 처박았다. 에반이 힘들게 입가를 닦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그러니…… 당연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 정말 주둥이 하나는 잘 놀리는 놈이다.”

에드리히는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에반의 겉옷을 잡아당기며 명령했다.

“벗어.”

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에반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겉옷을 전부 벗었다. 셔츠와 바지만 남은 상태에서 윗옷의 단추를 반 정도 푸는데 에드리히가 손을 뻗어 셔츠를 잡아 뜯어버렸다. 앞섶이 풀어진 상태로 그가 직접 바지를 잡아 벗겼다. 아무리 걷어차도 가만히 있던 에반이 처음으로 약하게 저항했다.

“뭘 버르적대는 것이냐? 네가 벌써 제 주제를 잊고 진짜 기사라도 된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

에반이 그 사실을 잊었을 리 없다. 황제가 뒷골목에서 비천하게 살아가던 그를 주웠고, 단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휘하의 기사로 집어넣었다. 원래 황제의 친위대는 실력이 확실한 귀족 위주로 편성된다. 그의 존재에 황실이 한동안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그는 말만 친위기사일 뿐, 실제로는 밤마다 황제의 정욕을 받아내는 성노나 다름이 없었다.

에드리히는 헐벗은 에반을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에반이 침대를 잡고 엎드리자 에드리히는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냈다. 형님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중심이 단단히 발기했다. 그는 아무 준비도 없이 에반의 구멍에 자기 성기를 쑤셔 넣었다.

마른 몸이 거대한 살덩이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달달 경련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에드리히는 개의치 않고 에반의 양 볼기를 꽉 쥐어 벌리고 힘으로 허리를 꾹꾹 눌러 성기를 끝까지 쑤셔 넣었다. 에반은 머리를 침대에 박고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침대를 짚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거칠게 성기를 박아대면서 에드리히는 에반의 금발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그레이언 대공의 화려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그래, 형님의 금발은 좀 더 밝은 색이었다. 이런 색이 아니었어.”

“윽, 으.”

“닥쳐라. 시끄러워.”

에드리히가 신음 소리를 내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괴로……워서…….”

마른 몸으로 흉기 같은 성기를 받아내느라 전신에 식은땀이 차갑게 배어났다. 에드리히는 조소를 짓다가 성기를 잡아 빼며 떨어져 나갔다.

“구멍을 적실 것이 필요하다는 거군.”

에반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자 황제가 향유가 든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

에반은 숨을 가다듬으며 침대를 짚고 엉덩이를 들었다. 에드리히가 갑자기 배 쪽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더 높게 들어 올리고 병 입구를 항문에 쑤셔 박았다.

에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드리히가 병을 흔들어 구멍 안으로 향유를 흘려 넣었다. 에반은 이를 악물며 수치스러운 감각을 견뎠다. 이내 향유 병이 빠져나왔다. 그는 남은 향유를 엉덩이 사이에 치덕치덕 발랐다.

에드리히가 다시 그의 허리를 잡고 성기를 욱여넣었다. 에반은 몸을 경직시켰다. 그래도 확실히 향유를 쓴 덕분에 몸이 한결 편해졌다.

“벌써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군?”

“…….”

“말로 물었는데 왜 밑으로 대답하는 거냐? 여기가 꺼떡거리는데?”

황제가 손을 뻗어 반쯤 발기한 에반의 음경을 검지로 툭 쳤다.

“천한 놈은 절대로 본성을 숨기지 못한다 했지.”

그는 짐짝처럼 에반의 몸을 들어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한쪽 발목을 잡고 엎드려 있는 그를 바로 눕도록 확 뒤집었다.

에반의 녹색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리히는 에반의 금발을 움켜쥐고 눈동자 위에 입을 눌렀다. 눈꺼풀을 빠는 압력이 너무 강했다. 에반은 이대로 눈알이 뽑히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실제로 눈이 뽑혀 죽어나간 자를 많이 봐왔다. 하루 만에 죽어나가는 자들에 비하면 에반은 굉장히 오랫동안 황제의 곁에서 살아남았다.

“그래도 눈동자 색깔만큼은 형님과 정말 똑같군.”

입을 떼며 에드리히가 말했다. 그는 다시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깊이 박아 넣었다. 퍽퍽 엉덩이를 박아대자 에반은 숨을 헐떡이며 허리를 비틀었다.

“형님도 네놈처럼 음란하게 허리를 뒤틀까. 형님은 도락을 즐길 줄 아는 분이니 이렇게 박아주면 의외로 잘 느낄지도 모르지.”

그는 자기 몸 아래에 깔린 형님을 상상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를 직접 안아본 적이 없으니 몇 번을 상상한들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에반의 반응에 만족하고 어떤 날은 그와 다르다고 윽박질렀다.

고통으로 몸이 자꾸 뒤틀려 에반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잠깐 감았다.

“눈을 떠.”

얼음장 같은 명령에 에반은 퍼득 눈을 떴다. 에드리히는 행위 중에 절대로 눈을 감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눈으로 짐을 보고 에디라고 불러봐라.”

황제는 자주 그에게 에디라는 애칭으로 부르라고 명령했다. 오직 레브노아드 황태자만이 그를 애칭으로 불렀다고 들었다.

에반은 모든 명령에 다 복종했으나 그 명령만큼은 한 번도 따른 적이 없었다. 그는 두려운 황제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황제 폐하.”

“멍청한 놈.”

에드리히는 무섭게 입을 비틀었다. 잔혹한 주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대가가 있을 것이다. 에반은 벌을 각오하고 입술을 조용히 깨물었다.

에드리히는 에반의 한쪽 다리를 크게 들고 몸을 옆으로 틀게 해서 가차 없이 구멍을 쑤셔댔다.

투둑.

묵직한 성기를 끝까지 뽑아내었다가 다시 안쪽까지 확 처박자 결국 입구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에반에게 이 정도는 익숙한 고통이었다. 아픔에 허덕이는 가운데에서도 성기가 발기해서 선액을 조금씩 흘러댔다. 이런 폭력적인 행위로도 어김없이 쾌락이 찾아들었다. 에반은 자기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에드리히가 그를 비웃으며 성기를 계속 처박았다. 에반은 자위를 하며 뒷구멍으로 황제의 물건을 받아냈다.

“하아.”

한참 만에 에드리히 황제가 에반의 몸 안에 사정했다. 에반도 몸을 웅크리다가 자기 손 안에 정액을 주륵 흘렸다.

파정하자마자 에드리히는 에반을 던지듯 내려놓고 돌아섰다. 에반은 침대를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폭행당한 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어 시트를 꽉 쥐고 한참 숨을 골랐다. 거친 숨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그는 황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분을…… 정말 황태자 전하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에드리히 황제가 의자에 앉아 이제야 겉옷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엘 파셔에서 작위까지 받았고 스트라스로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에반은 때때로 두려운 황제 앞에서 겁도 없이 입을 놀리곤 했다. 에드리히 황제는 조금 전에 정욕을 푼 덕인지 제법 너그러워져 있었다. 그는 에반을 벌하지 않고 선뜻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앞으로 천천히 설득해야지.”

“설득이 될는지요.”

“그는 스트라스의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뼛속까지 오만한 스트라스 황족 그 자체이지. 그는 절대로 스트라스를 버리지 못해.”

에드리히는 입꼬리를 들어 느긋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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