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황태자 전하!”
“레브노아드 전하!”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열린 연회이지만 내가 회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곳은 나를 위한 무대로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모임이 열리면 각기 지지하는 황자들을 중심으로 두 개 또는 서너 개로 패가 갈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스트라스 내에서 더 이상 내게 대적할 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치열한 황위 쟁탈전 때문에, 후반에는 나의 일방적인 숙청 행위로 인해 황가의 모든 핏줄, 외척들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손이 귀한 편인 엘 파셔 황가와 달리, 스트라스는 언제나 열 명 이상의 황자들이 존재했고 후궁도 최소 다섯 이상이었다. 총 열두 명의 황자, 아홉 명의 황녀, 젊은 새 황후와 여섯 명의 후궁들, 그들을 지지하던 외척과 귀족 세력들. 그들을 모조리 숙청하자 시체 더미가 산을 이루고 핏물이 강을 만들 정도였다.
엘 파셔는 황자가 겨우 두 명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그중에서 장남인 황태자의 자질이 특출하고, 2황자는 병약하니 논란의 여지도 없이 일찌감치 후계 구도가 결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황태자가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휴전 협정을 주장하는 바람에 잠시 무게추가 2황자에게 쏠린 적도 있었지만, 결국 휴전 협정을 진행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황태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엘 파셔를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간단히 황위 계승자가 결정될 수도 있구나 싶어 부러운 생각도 조금 들었다.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바레스노엘 공작이 다가왔다. 공작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가, 전통 따윈 깨라고 존재하는 것이라며 일갈하고 나의 열렬한 추종자로 돌변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낀다는 자신의 딸까지 선뜻 나의 비로 바쳤다.
금발의 소녀가 수줍은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냉철한 두뇌를 가진 그녀는 머지않은 미래에 스트라스의 황후가 될 것이다.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여 회장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남서부의 대군주인 가유트 백작이 특유의 음울한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제발 전쟁터를 전전하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소연을 해왔다. 그러다 눈먼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어찌하냐고 눈물까지 훔치는 것이다.
가유트 백작의 아들은 황태자 직속 친위기사대의 일원이었다. 충성스러운 모시스가 친위대는 무적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다들 보는 앞에서 아버지에게 면박을 주었다. 평소엔 근엄한 두 부자가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고 주위 귀족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내가 그대들의 하늘이 되어주고 땅이 되어주겠다. 사랑스러운 여인들을 내 몸같이 아끼며, 충심 어린 의견은 아무리 지루한 이야기라도 귀담아듣고, 내가 이끄는 병사들은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모두 승리한다!”
“오오오!!”
장내의 사람들이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허세가 잔뜩 들어간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두 눈은 열기로 이글대고 있었다. 내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말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스트라스는 만인지상인 황제부터 시작해 수많은 귀족과 일반 백성, 밑바닥 건달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나의 열렬한 지지자이거나 광신도들이었다. 내가 압도적인 기량과 계획된 선전행위를 통해 그들을 전부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혹은 내게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서 없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느긋하게 파티를 즐기던 도중 문득 회장 구석에서 에드리히를 발견했다.
그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서 서 있었다. 에드리히는 황위를 노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내 휘하로 들어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 지위를 위협하는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경원시 당하고 있었다.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사람을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데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고 에드리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디. 이리 오너라.”
구석진 곳에 홀로 서 있던 에드리히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내 곁으로 걸어왔다. 에드리히가 가까이 오자 사람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나의 검술 스승이며, 황태자 친위대의 대장이자, 내가 가장 신임하는 최측근인 체르도조차 에드리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체르도 경,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지 말고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에게 술이라도 한잔 권해보는 게 어떤가?”
체르도는 내 지적에 공손히 몸을 낮췄다. 그는 어린 시절 내게 검을 알려준 스승이었지만, 자신은 스승이 될 만한 자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낮추며 사람들 앞에서 황태자 전하의 신하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게 공대를 듣는 것조차 극구 사양했다.
체르도는 계속 탐탁지 않은 얼굴로 에드리히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에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제대로 하라고 눈치를 주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토했다. 그는 시종이 들고 있는 쟁반에서 술잔을 하나 가져와서 에드리히에게 내밀었다.
“드십시오, 11황자 전하. 기껏 연회에 참여해서 술도 한 잔 입에 대지 않고 나선다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아직 성년이 아니라…….”
에드리히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바레스노엘 공작도 한마디 했다.
“체르도 경의 손이 무안해지기 전에 한잔하시지요. 이 정도는 다들 눈감아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가유트 백작?”
“저도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음주를 시작했으니 솔직히 할 말이 없군요.”
“11황자 전하, 체르도 경의 술을 받은 뒤엔 제 술도 받아주십시오.”
모시스가 흔치 않게 온화한 태도로 에드리히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에드리히가 얼굴을 붉히며 체르도에게서 술잔을 받아 들었다.
나는 에드리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몸을 낮춰서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혼자서 우물쭈물하지 말거라, 에디. 너는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혈육이 아니더냐.”
“예, 유의하겠습니다.”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다. 걱정하고 있는 것이니까.”
어리고 동그란 얼굴을 손끝으로 살짝 퉁겨주었더니 에드리히가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못내 안쓰러웠다.
에드리히가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손에서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에드리히는 열다섯 살치고 덩치도 작고 얼굴도 심하게 어려 보였는데 그 전부가 나에 대한 두려움으로 위축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때로 아련한 심정이 되어 홀로 자문해 본다. 이 아이는 언제쯤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날까.
“아!”
잠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 하고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옛날 꿈을 꿨다. 어째서 갑자기 전생의 일을 떠올린 것일까. 생각할수록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다.
지스카르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가 내 얼굴에 손등을 대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손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려 지스카르를 바라보았다. 지스카르는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길은 느릿했고 상냥했다.
손가락 끝의 감촉이 간질간질해서 목덜미를 조금 움츠렸다. 지스카르가 상반신을 일으켜 키스를 했다. 입술을 살짝 갖다 대었다가 혀를 넣어 부드럽게 입 안을 머금고 다시 떨어져 나왔다. 그가 위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옛날 일을 떠올렸다. 에디가 꿈에 나타났지.”
“…….”
에드리히의 이름을 들은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곧 평화 협정이 열리고 에디가 도착할 것 같으니까 이런 꿈을 꾼 모양이다.”
길게 한숨을 쉬며 이마 위에 팔을 올렸다. 에드리히는 여러모로 내게 애증의 존재인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 오늘 당장이라도 엘 파셔로 돌아가라.”
지스카르가 굳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그는 평회회담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엘 파셔로의 귀환을 독촉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내 쪽에서 먼저 갈 것이다. 쓸데없이 귀찮게 구는군. 평화회담까지 아직 열흘이나 남지 않았느냐!”
“열흘이나 남은 것이 아니라 열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진짜로 그 목에 개목걸이라도 씌워야 짐의 말을 들을 것인가!”
“어디 한번 해보시지?”
근래 들어 지스카르와의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내 쪽에서 먼저 까칠하게 군 탓일 수도 있고, 지스카르가 너무 강압적으로 나오는 탓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자 둘 다 의도치 않는데도 자꾸 말이 험하게 나오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말싸움을 하다 말고 입술을 덮쳤다. 감정이 실려서 좀 전과는 달리 입맞춤이 길고 거칠었다. 그의 손이 아랫배를 더듬기 시작했다. 고개를 비틀어 지스카르를 뿌리치고 외쳤다.
“윽,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지 마라. 어젯밤에도 그만큼 했으면서……!”
“개목걸이를 씌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너도 이쪽을 좋아하지 않느냐.”
“누가 좋아한다고……!”
버럭 화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지스카르가 양팔을 붙잡아 강하게 침대 위에 짓눌렀다. 나는 한참 기를 쓰다가 제풀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지고 말았다. 숨을 몰아쉬는 동안 지스카르가 다리 사이로 손을 옮겨 내 음경을 쥐었다.
그냥 한번 해주고 끝내버리자는 생각으로 지스카르에게 몸을 맡겼다. 성기를 어루만지던 손이 갑자기 엉덩이로 이동했다. 손가락이 오목하게 들어간 입구 가운데를 살짝살짝 건드렸다. 약간 습해져 있는 부분의 살이 살짝 맞붙었다가 진득하게 떨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극이 반복되자 간지러운 기분에 구멍이 움찔움찔 오므라들었다.
“으, 그런 식은…….”
가벼운 수치심에 내가 다시 저항하려고 하자 지스카르가 입구만 지분대던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벼운 마찰감이 있었지만 어젯밤 정사로 안이 젖어 있었던 탓에 그걸 받아들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이내 손가락이 구멍을 들락날락하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흐으.”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냈다. 얕은 흥분으로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하지만 자극으로 인한 쾌감보다는 심리적인 불쾌감이 몇 배나 더 컸다. 지스카르가 집요하게 손으로 구멍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으, 적당히 좀 해라. 손가락으로 하는 거 아주 기분 더러워!”
“손이 싫다니, 네가 진짜 즐거움을 모르는구나.”
“뭐?”
“짐이 오늘 즐기는 법을 가르쳐 주지.”
무뚝뚝한 말투가 갑자기 내 귀에만 이를 데 없이 음탕하게 들렸다. 녀석이 어찌 나올지 무서워서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지스카르가 가장 안쪽부터 바깥쪽까지, 손가락으로 내벽 전체를 천천히 더듬어갔다. 움직임이 너무 느릿한 것이 더 기분 나빴다. 정신없이 흥분하던 때와는 달리 손가락이 어디쯤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지가 중간 즈음에서 내벽을 눌러보고 있었다. 아, 입구 쪽으로 빠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모든 신경을 손가락의 위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에 열중하면서 작게 입술을 열었다. 얼굴 위로 조금씩 열이 오르고 있었다.
입구 부근에서 맴돌던 손가락이 뱀처럼 다시 위로 기어들어 왔다. 그대로 내부를 훑으며 지나가는데 갑자기 엉덩이가 간지러워 약간 몸을 움츠렸다. 순간이었다. 지스카르가 그곳을 움켜쥐듯 손가락을 구부려 강하게 짓눌렀다.
“아으읏!”
놈의 난폭한 행위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동시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신을 크게 퉁겼다.
“거기가 좋은가.”
지스카르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고개를 돌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지스카르는 내 눈가에다가 상냥하게 입을 맞췄다. 키스가 상냥했기에 행위도 부드러울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긴 손가락을 뿌리까지 콱 집어넣고 검지를 하나 더 추가하여 내벽을 벌리며 무자비하게 쑤셨다. 굉장히 거칠었으나 마구잡이는 아니다. 그는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부근을 정확하게 공략 지점으로 삼고 있었다.
“하, 흐읏, 그거……, 읏, 흐……!”
깊은 곳에서 시작된 저릿저릿한 쾌감이 심장을 지나 뒷덜미까지 꽉 쥐어짰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토해냈다. 허리가 점점 더 강하게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안쪽을 찌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잔뜩 움츠렸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사납게 박아대던 손가락의 속도를 천천히 줄여나갔다. 이내 구멍 안쪽에서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참 뜨거워지는 와중인데 이렇게 멈추다니! 안타까운 탄성이 목구멍 끝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 때문에 지스카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뺨에 연이어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 손을 멈춘 이유에 대해서 해명했다.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 없다. 여기 말고도 좋은 곳이 더 있을 것이다. 짐이 찾아주지.”
“흐…….”
그런 거 찾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나는 작은 짐승처럼 얕고 빠르게 숨을 헐떡거렸다. 손가락이 음란한 곳을 찾아 구멍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지스카르가 손가락을 깊이 진입시켜 고환과 가까운 쪽의 내벽을 건드렸다. 잠깐 동안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순간 지스카르가 와락 입술을 틀어막고 강압적으로 키스를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구멍을 강하게 쑤셔댔다. 무시무시한 쾌감이 엉덩이부터 등허리를 거쳐 머리 꼭대기까지 강타했다. 나는 억눌린 비명을 터뜨리며 허리를 심하게 뒤틀었다.
지스카르는 입술을 억지로 짓누르고 빨아올리면서 혀를 찾아서 다시 빨았다. 극도로 흥분하여 지스카르에게 공기까지 전부 빨아 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놈이 날 괴롭혀 죽일 작정인 게 분명하다. 내가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지스카르가 입술을 떼고 물러났다.
“하아!”
지스카르도 격정적인 키스 때문에 숨통이 막힌 듯 떨어져 나올 때 크게 한숨을 토했다. 나도 크게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 신음을 터뜨렸다.
“허윽! 흐읏! 하악! 아!”
“대단하구나, 레이. 그리도 좋은가.”
“아, 아냐, 아니…….”
정신없이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성기가 무섭게 고개를 쳐들고 당장이라도 다 쏟아낼 것처럼 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애무는 일절 없이 손가락으로 엉덩이를 쑤신 것만으로 이 정도까지 쾌락에 빠져버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을 뒤틀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손가락이 다시 약한 부분을 짓눌렀다. 나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숨기려다 말고 허리를 크게 들고 엉덩이를 있는 힘껏 조이면서 쾌락에 몸부림쳤다.
“지스카르! 하으읏, 아!!”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또는 진짜로 느꼈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버릇이다. 부끄러워서 눈앞이 다 아찔했다. 지스카르는 교묘하게 손가락을 놀리면서 가차 없이 날 궁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구석에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나를 냅다 끄집어내서 아주 수치심의 늪에 내팽개쳐 버릴 기세였다.
“그만, 그……!”
이젠 나도 정말 모르겠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 무서울 정도의 쾌락과 수치심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데 문득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아까완 달리 완전히 행위를 중단했다.
“레이.”
지스카르가 내 입술에 손등을 댔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그의 손길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멍하게 헐떡이면서 스스로 입술을 만져 보았다. 손끝에 피가 꽤 많이 묻어나왔다.
내가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깨문 이유는 부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까고 말해 너무 흥분되고 기분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내가 괴롭힘을 참다못해 자해라도 한 줄 아는 것 같았다. 지스카르의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았다. 그가 내 입술의 상처를 보고 어둡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 다시는 이러지 않을 테니…….”
지스카르는 껍데기처럼 밀려나 있던 이불을 끌어다가 몸에 둘러주었다.
“…….”
그는 옆모습을 보인 채 곁에 앉아서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훑어내고 있었다. 내가 죽도록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알기에 아마도 날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말 한마디 없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러고 있자니 괜히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지스카르. 이쪽을 봐라.”
지스카르의 턱을 당겨서 날 보게 했다. 쓸데없는 언쟁을 하며 벌써 며칠째 놈과 대치 중이다. 그만 관둘 때도 됐다 싶어서 나는 몸을 일으켜 먼저 지스카르에게 키스했다.
춥.
그의 입술을 깊이 빨아당기며 제대로 입맞춤을 했다.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입술을 겹치며 혀를 빨았다. 각도가 잘 안 맞는 느낌이다. 매일 지스카르에게 주도권을 넘긴 채로 키스하고, 혹은 피하려고만 하다 보니 키스하는 법을 잊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입술을 떼고 물러나며 지스카르의 희고 말쑥한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내게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너뿐이다. 내게 키스를 할 수 있는 것도, 내 몸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직 네게만 허락한 일이란 말이다. 내가 얼마나 널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지스카르가 자꾸 날을 세우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그는 항상 나를 두고 안달하고 집착하고 쓸데없는 요구를 한다. 나는 지스카르의 얼굴을 쓸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날 바라보고 있던 지스카르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게 키스를 했다. 나는 오랜만에 그에게 보조를 맞춰주었다. 혀가 서로 얽히는데 단것이라도 입에 문 것처럼 침이 고였다. 지스카르가 입을 바짝 겹치며 그것을 빨아 마셨다.
굉장히 오랫동안 키스에 열중한 것 같다. 시간을 정확히 헤아린 것은 아니지만 입술이 얼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물에 적신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져서 지스카르의 손에 거의 의지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사실 꼿꼿이 버티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노곤하게 늘어져서 입 맞추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
키스를 끝내고 떨어져 나온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기껏해야 몸뿐인가. 레이. 그런 걸로는 근원적인 허기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봄볕처럼 따뜻한 키스 후에, 얼음보다 차가운 음성으로 지스카르가 말했다. 푸른색 눈이 차갑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마지막 경고다. 레이, 지금 당장 엘 파셔로 귀환해라. 짐에게 네 목에 사슬 따위를 채우게 만들지 마라.”
“…….”
지스카르는 끝까지 강압적인 태도로 내 앞에서 명령하고 있었다. 나는 지스카르를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내 쪽에서 완전히 숙이고 들어간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놈이 감히 내가 내민 손을 거부한 것이다. 처음 놈에게 치욕을 당했을 때만큼이나 모욕적이고 불쾌한 일이었다.
“오늘 오후에 크리스티안이 도착할 것이다. 그를 호위로 붙여줄 테니 함께 돌아가도록 해라.”
“호위라고? 맥스 경도 있는데 크리스티안을 새삼스럽게 왜 호위로 붙인단 말이냐? 호위가 아니라 감시역이겠지.”
“부정하지 않겠다.”
지스카르가 바로 자신의 의도를 인정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놈의 독선을 참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참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정말로 사슬로 묶어두는 수밖에.”
“그전에 네놈 목부터 꺾일 거란 생각은 못 해보았나? 네가 스스로 제 수명을 줄이는구나!”
아침 댓바람부터 죽일 듯이 싸우고 결국엔 냉랭하게 서로 등을 돌리고 말았다.
* * *
스트라스와 엘 파셔는 4월 초 아베크 중립국 내의 미첼 아카데미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회담이 열리기 열흘 전, 엘 파셔의 황제가 일찌감치 미첼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아베크 중립국의 국왕이 직접 그를 맞이하기 위해 아카데미 정문까지 나와 있었다. 미첼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스트라스의 3황자인 아젤로스의 모습도 있었다.
지금까지 양대 제국의 황제가 직접 중립국을 찾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아베크 중립국의 백성들도 큰 구경거리를 보러 아카데미 근방에 몰려나왔다. 엘 파셔 황제의 행렬이 거리로 들어왔다.
화려한 세 대의 마차 뒤로 각기 친위대와 근위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행렬은 그리 길지 않고 비교적 단출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 단출한 행렬조차 중립국 백성들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는지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구름떼처럼 모여든 인파를 지나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하여 마차가 멈춰 섰다. 기사들이 꼿꼿하게 기립했다. 이윽고 대제국의 황제가 마차에서 내려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황공하여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멀찍이서 그 광경을 보다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신기한 일이로군. 엘 파셔 황제가 두 명으로 늘었는데?”
아버지가 하나 더 생겨버린 시라크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황제의 행렬이 나타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거기서 황제가 하나 더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나 보다.
정작 지스카르 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동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엘 파셔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
“헉?”
“이게 무슨!”
“폐하!”
그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중립국 측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엘 파셔의 기사들까지 기겁했다. 기사들이 급히 뛰어나와 황제를 지키기 위해 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황제를 마주 보고 있는 자 또한 황제처럼 보였다. 그들은 이대로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심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멈춰라.”
그때 크리스티안이 나와 기사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는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는지 정확히 지스카르를 알아보고 몸을 숙였다.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지스카르가 수습에 나섰다.
“돌아오너라.”
그는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엘 파셔 황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명령을 받은 황제는 말없이 지스카르를 응시하더니 갑자기 형체도 없이 사라져 한 줌의 빛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지스카르의 어깨와 목덜미에 스며들어 용 형태의 문신이 되었다.
“짐이 거느리는 드래곤이 잠시 장난을 친 모양이다.”
그는 이 초유의 사태를 딱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폐, 폐하……!”
기사들이 뒤늦게 진짜 황제를 보필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서 해쓱했다. 가짜 황제를 지키겠다고 진짜 황제의 앞을 가로막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 파셔에서 아베크 중립국까지 오는 열흘간 황제가 부재 상태인 줄도 모르고 가짜를 호위해서 온 셈이니 충격이 클 만했다.
사람들이 당혹해서 술렁거렸으나 지스카르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먼저 움직여서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 가던 지스카르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젤로스가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글렌 백작이라고…….”
아젤로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스카르를 일개 백작이라 오해하고 건방지니 뭐니 한 적이 있는데, 뒤늦게 그 일이 떠올랐던지 얼굴이 허예졌다 퍼레지기를 반복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글렌 백작을 안내했던 서덜랜드 교수도 아젤로스의 바로 옆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체통도 잊고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지난 일은 기억 속에 묻어버리도록 해라.”
지스카르는 두 사람에게 짧게 당부했다. 아젤로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서덜랜드 교수가 간신히 머리를 조아리며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짧은 용무를 마치고 지스카르는 크리스티안을 불러들였다. 무슨 명령을 들었는지 크리스티안은 대열에서 이탈해서 뒤로 물러났다. 던필도 크리스티안과 함께 대열 밖으로 나왔다.
아베크 중립국의 국왕이 걸어와 지스카르의 앞에서 다시 한번 깊이 몸을 낮추었다. 국왕의 인사를 받으며 지스카르는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떠나기 전에 그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지스카르와는 냉전이 풀리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 찜찜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지스카르와 아베크 중립국의 국왕 및 주요 인사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주위가 좀 한산해지자 아젤로스가 성난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냅다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시라크! 너 잠깐 나 좀 보자!”
그가 무슨 용무로 이렇게 달려오는지 묻지 않아도 뻔하다. 시라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게 그분 앞에서 함부로 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 알겠어?”
“으윽! 어떻게 그가, 그 사람이, 그런 분이 그런 곳에 있는 거냐! 이걸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옷자락까지 당기며 그만두라고 극구 말렸잖아. 분위기 파악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시라크와 아젤로스는 미첼 아카데미에서 제법 유명인사다. 시라크는 엘 파셔의 폐황자에, 아젤로스도 스트라스의 3황자이기 때문이다. 둘이 아웅다웅 싸우고 있자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슬그머니 그들을 훔쳐보았다. 나는 꼬맹이들에게 멀리 손짓을 했다.
“보는 눈도 많은 데서 계속 이럴 것이냐. 정 싸우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싸워라.”
시라크와 아젤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시에 날 쳐다보더니 서로 이를 으득 갈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떠났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둘이 꽤 친해진 것 같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꼬맹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대공 전하께서는 여전하시군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던필이 히죽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던필.”
“저 녀석들 저리 봬도 전하와 몇 살 차이도 안 난단 말입니다. 뭘 그렇게 인자하게 쳐다보시는 겁니까?”
던필이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농담을 건넸다. 크리스티안은 실없는 말 대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과 간단히 해후하고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이야기를 주워듣자니 또 굉장한 일을 벌이고 있다던데?”
자리에 앉자마자 던필이 입을 열었다. 사석이었기에 그는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하인이 다과를 내놓고 인사를 한 뒤에 물러났다. 듣는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던필이 본론을 꺼냈다.
“지금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강짜를 부리고 있다며?”
던필의 말에 크리스티안이 표정을 굳혔다.
“던필, 쓸데없는 소리는 꺼내지 마라.”
“폐하께서도 우리가 레이를 설득시켜주실 원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뭐, 나로선 폐하의 깊은 속을 읽기 어렵지만 말이야.”
“…….”
크리스티안은 침묵했다. 내심은 던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들었다.
“나는 대공가의 대소사를 관장할 부인이 필요하다. 용모가 빼어나고 지혜로운 여인과 혼인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최소 셋 이상의 적자를 볼 것이다.”
지스카르와 부딪치며 신물이 날 정도로 다퉈왔던 이야기를 녀석들 앞에서 또다시 시끄럽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특별할 것 없다는 태도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남아 있던 던필이 표정을 굳혔다. 그가 쓸데없이 자기 입술만 만지작거리다가 아까 했던 질문을 또다시 했다.
“이봐……, 정말로 폐하를 두고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챙강.
나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고 던필을 노려보았다.
“네놈들은 아직도 이 몸이 황제의 남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런 건 아니다.”
던필이 즉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 얄팍한 태도는 무엇이냐? 드래곤을 휘하에 거느리며 신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대공이 되었다. 대공 가문이 열렸으니 당연히 대공부인이 있어야 하고 후계자도 있어야 한다. 네놈의 눈엔 대공가의 중대사가 장난으로 보이는 모양이지!”
“…….”
던필은 입을 열었다 닫으며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는 경박한 겉모습과 달리 굉장히 현실적인 성품이었고, 이번 문제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던필은 당혹스럽게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내가 폐하의 편에서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당연히 초대 대공으로서 대공가의 초석을 다져야지. 하지만 네가 여자를 만나겠다는 말을 폐하께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텐데.”
나는 이를 갈면서 그간의 불만을 씹어뱉듯 말했다.
“그 자식은 간섭도 작작 해야지! 가장 비천한 노예들조차 당연히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루고 사는데 내가 왜 그놈에게 안주인을 들이는 일을 허락받아야 한단 말이냐. 게다가 내 혈통을 물려받는다면 틀림없이 특출한 자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텐데 그걸 쓰레기통에 그냥 처박아버리라고?”
“……확실히 네 혈통이 아깝긴 하지…….”
“사실 처도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녀가 다산하는 체질이 아니면 어쩌라는 거지?”
“아니, 애는 몇이나 가지고 싶어서 이래?”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가문을 존속시킬 수 있으니까. 다수의 후계자는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국가를 번영시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황위쟁탈전이 벌어지면서 내가 나라 안의 황족이란 황족은 아주 씨를 말리다시피 했으나 에드리히는 결국 살아남았고 그가 황위를 이으면서 스트라스 황실은 무사히 존속되었다. 이것 또한 그 증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쾌하게 말하며 소파에 깊이 등을 기댔다. 던필은 어중간한 자세로 내 앞에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할까, 그 사고방식 말이다. 스트라스 황가에서 그런 생각으로 황손을 많이 만든다고 들었다. 그동안 체감을 잘 못하고 있었는데 넌 정말로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맞구나. 스트라스의 황제가 될 예정이었던 그 인물 말이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널 보면 정말 위태위태하다는 느낌이 든다. 네가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크게 뛴다. 폐하께서 예민해지신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크리스티안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장 박동을 느끼듯이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폐하께서 그러하듯, 내가 널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크, 크리스!”
순간 던필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걸 폐하께서 들으신다면, 다른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곳에 누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던필이 황급히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정작 크리스티안은 남의 시선 따윈 관심이 없었다.
“레이,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와 살을 맞대는 것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인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크리스티안은 이야기를 하면서 반듯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허둥대던 던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크리스티안을 바라보다가 홀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확실히 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잘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스카르의 이야기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두고 대뜸 유곽을 찾고 그랬을 테지.
하지만 지스카르가 어떤 기분일지 짐작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차라리 눈치가 없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내 손바닥 보듯 훤히 읽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스카르를 싫어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가 종종 고통스럽게 표정을 일그러뜨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놈의 행동이 정말로 불쾌했다면 엿 먹어보라는 심정으로 벌써 옛날에 여자를 만나든 무슨 짓이든 저질러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지리멸렬한 냉전 따윈 시작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폐하께서는 벌써 수년째 후궁들에게 손도 대지 않고 계신다. 사실 그녀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지. 황후파의 반란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었음에도 폐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이니. 대신들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황후는 계속 공석이다. 네가 이러한 상황을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아,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건 나와 지스카르가 타협해 나가야 할 문제다.”
크리스티안은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오늘 중립국을 떠날 예정이라고 들었다. 준비는 되어 있는가?”
“크리스티안. 성급하지 굴지 마라. 아베크의 왕이 오늘 저녁 연회를 열 텐데 거기에 얼굴을 비춰주고 내일 오전쯤 떠날 생각이다. 황제가 도착하자마자 대공이 떠나버리면 꼴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느냐? 너희도 지금 막 도착한 참이니 하루 정도 여독을 푸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우리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중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던필이 중재에 나섰다.
“크리스, 대공 전하께서 맞는 말을 하시잖아. 내일 바로 떠나신다고 하는데 하루 정도 어때?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트라스 황제는 오늘 본국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평화회담 당일이나 돼야 이곳 중립국에 도착할걸?”
그렇게 두 사람과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아베크 왕이 보낸 칙사가 오늘 밤 연회에 반드시 참여해 주십사하고 정중히 요청을 해왔다. 나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 * *
아베크 중립국의 국왕이 엘 파셔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중립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나도 적당히 시간을 맞춰서 크리스티안과 던필을 대동하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 시라크가 당연하다는 듯 아젤로스와 어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부딪쳤다 하면 티격태격하고 싸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붙어 다녔다. 둘이 언제부터 그리 친했다고 저러고 다니는지 보는 내가 웃길 정도였다.
시라크와 아젤로스는 아베크 중립국 출신의 귀족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시라크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대공 전하, 오셨습니까.”
“그레이언 대공, 오늘 떠날 거라고 하시더니 연회에 참석하셨군요.”
아젤로스가 나를 반기며 같이 이야기를 하던 중립국 귀족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크로포드 백작이라고 합니다.”
기회를 얻은 크로포드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소문이 자자한 대공 전하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아이는 제 아들 녀석으로 젠슨 크로포드라고 합니다.”
그는 십대 후반 정도인 아들에게 어서 나서보라고 눈치를 주었다. 젠슨이 앞으로 나와 반듯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 전하. 저는 마법을 전공으로 삼고 있으며 내년에 아카데미를 졸업할 예정입니다.”
“그 반지의 보석, 마정석이지? 딱 봐도 마법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보이더군. 성취는 어느 정도고?”
“부족하지만 이중영창이 가능합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이중영창인가. 대단하군.”
아젤로스도 옆에 있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거들었다.
“그도 방과 후 모임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상태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모임에 참여할 의사를 보이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인원을 늘리면서 과목도 회계뿐만이 아니라 수사학, 천문학으로 영역을 넓혀볼 생각입니다.”
“의욕이 넘치는구나. 작게 시작된 모임이지만 좋은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군.”
나는 아젤로스를 격려하고 젠슨의 어깨도 가볍게 두드려준 뒤 고개를 돌려 크로포드 백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크로포드 백작, 요즘 광맥 상태는 좀 어떤가.”
“예?”
“크로포드 백작가는 중립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 가문으로 마정석이 산출되는 작은 광산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내가 아베크 중립국에서 마정석 유통로를 찾고 있는데…….”
나는 크로포드 백작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라크와 아젤로스에게 따로 놀고 있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시종이 술잔이 든 쟁반을 들고 회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시종에게서 잔을 두 개 받아서 크로포드 백작에게 하나를 건넸다.
“중립국 내에 마정석 광산을 보유하고 있는 가문들을 소개해 줄 수 있겠는가? 아니, 내가 며칠 중립국을 떠나 있을 생각이니 일단 대공가에 연통을 하나씩 넣으라고 전해주면 좋겠군.”
“아, 예에. 그런데 마정석은 국외 유출이 불가한 상황이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내가 마정석을 구하고 있는 이유는 실험연구에 필요해서니까. 마정석이 소모되는 연구를 중립국 내에서만 시행한다면 규정에 위반될 일이 없겠지.”
“아…….”
아까부터 크로포드 백작이 대답하는 것이 한 박자씩 늦었다. 뒤따라오던 던필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크로포드 백작은 대공께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을 소개하고 친분을 쌓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만, 전하께서는 크로포드 백작만 붙들고 애먼 소리를 하고 있군요.”
나는 새삼 크로포드 백작을 보다가 엄지를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가? 저기로 가서 애들이랑 같이 놀아주고 올까?”
“아, 아닙니다.”
크로포드 백작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필이 그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애들이라니, 전하와 몇 살 차이 안 난다는 거 모르십니까?”
“미안하군. 늙은 놈 취향이라.”
나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자주 교분을 나누며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자들은 던필이나 크리스티안, 지스카르처럼 못 해도 서른 살을 족히 넘긴 자들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라크 또래의 학생들은 말 그대로 꼬맹이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그런데 지스카르는 언제쯤 얼굴을 내밀 셈이지?”
연회가 중반에 접어들었음에도 그가 당도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크로포드 백작은 의문을 표했다.
“지스카르? 아! 엘 파셔의 황제 폐하……!”
크로포드 백작이 뒤늦게 놀라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허둥대는 것을 보고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늦어도 너무 늦는 것이 아닌가? 그가 시간을 어기는 것은 본 적이 없거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등장하는 방법을 택하는 자들도 있지만 지스카르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그는 정확하게 필요한 행동만 하는 것으로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때문에 그의 권위는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다. 잠시 출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자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연회 막바지 즈음에 도착하실 예정이십니다. 일 때문에 단순히 일정이 늦어지시는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걱정은 하지 않아. 궁금했던 것뿐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또 던필이 끼어들었다.
“계속 황제 폐하와 냉전을 이어가실 생각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대공 전하의 심정을 이해하는 쪽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젠 화해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던필,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입조심 해라!”
크리스티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잔소리를 했다. 내가 보기에 던필이 유난히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 것은 크리스티안이 정색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실랑이를 옆에서 보면서 웃었다.
“이런 곳에 있었군.”
그때 조금 낯익은, 묵직한 음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두 번 마주쳤었던 붉은 머리 사내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항시 대동하고 다니는 호위기사의 모습도 보였다. 휘하에 다른 기사도 있을 텐데 언제나 저자만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꽤나 신임하는 자인 모양이었다.
“너는 여기에 어떻게 온 것이냐?”
“내가 어디 못 올 곳이라도 왔던가?”
사내가 느긋하게 연회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하긴 제법 신분이 높아 보였으니 아베크 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크리스티안이 표정을 굳히고 사내를 경계하고 있었다. 사내의 전신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는 전에 충고한 적이 있는데도 도통 살기를 죽이는 법을 몰랐다.
“눈에서 독기를 좀 빼라고 내가 말했을 텐데?”
나는 혀를 차며 사내를 나무랐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순식간에 전신을 장악하고 있던 살기가 줄어든다.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것이 버릇이라서 말이다.”
“너는 어째서 내게만 특별대우를 하는 거지?”
“흠?”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이 몸을 대할 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다르지 않으냔 말이다.”
내 말을 들은 사내는 갑자기 얼굴을 짚고 킥킥 비틀린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기 멋대로 화냈다가 웃었다가, 이번엔 비웃었다가. 대체 머릿속에 뭘 생각하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이다.
던필이 사내를 눈짓하면서 물었다.
“대공 전하, 저자는 누굽니까?”
“나도 모른다.”
“아는 사이 같은데 모른다니요?”
그때 대화 도중에 끼어든 던필을 노려보며 사내가 살기를 드러냈다.
“잡놈들에게 발언권을 준 적이 없다. 뒤로 꺼져라.”
순간 던필도 웃음기를 지우고 얼굴을 불쾌하게 굳혔다. 그는 평소 실없는 장난을 치긴 해도 결코 잡놈이라는 말을 들을 신분이 아니었다. 나는 단단히 착각에 빠져 있는 사내를 위해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엘 파셔의 고위 귀족이다. 양대 공작가인 그랜트 가의 적통 후계자로 십 년 후쯤엔 공작 각하라고 불리며 거드름을 떨게 되실 몸이지. 너 같은 건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거물이니 지금이라도 태도를 달리하는 게 신상에 좋을걸.”
“핫하, 그럴 리가?”
사내는 과장되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와 대화를 계속할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사내가 보여준 반응 때문에 미심쩍은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엘 파셔의 공작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단순히 스트라스 출신이라 엘 파셔에 대한 반감이 강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 장내가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중갑을 입은 기사가 황급히 뛰어들어 와서 아베크 국왕에게 귓속말을 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언을 들은 국왕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안색이 파리해졌다.
국왕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면서 연회장 분위기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도 특별히 전해 들은 이야기가 없기에 다른 이들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아베크 국왕을 직접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물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달려온 기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연회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가 목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스트라스의 황제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순간 주위가 크게 술렁거렸다. 엘 파셔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는 오늘 막 본국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서 실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잠시 혼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데 크리스티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흠칫 놀라며 나는 바로 등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향했다.
“난 먼저 나가 있겠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붉은 머리의 사내가 내 팔을 낚아챘다.
“어딜 도망가려고?”
사내가 저 위에서 살벌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를 물을 시간이 없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사내의 힘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윽! 지금 뭘 하는 거야?”
“대답해 봐라. 뭐가 그렇게 다급한 것이냐?”
사내와 말싸움하는 사이에 활짝 열린 문을 통해서 스트라스 황제 일행이 들어왔다. 일행의 가장 앞줄에 눈에 익은 이가 있었다.
체르도. 나의 스승이며 가장 충성스러웠던 최측근. 순간 심장을 저릿하게 쥐어짜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몇 년 만에 그를 보는 것인가? 믿기지 않게도, 거의 이십 년 만이었다.
체르도는 그사이 나이를 먹어 오십대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트라스 황제가 대대로 사용하던 보검을 들고 그가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붉은 머리의 사내를 보고 시선을 멈추었다.
“폐하! 이렇게 자꾸 단독행동을 하시면 저희가 제대로 호위를 할 수가 없……!!”
불만을 터뜨리던 그가 불현듯 사내의 곁에 서 있는 날 발견했다.
정확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체르도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황제의 보검이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캉.
황제의 보검이 땅바닥에 처박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검은 언제까지 바닥에 처박아둘 셈이냐?”
사내가 서늘한 음성으로 적막을 깼다.
“아.”
그제야 체르도가 검을 주웠다. 하지만 감히 황제의 검을 땅에 떨어뜨리고도 그 행동에는 전혀 성의가 없다. 그가 대충 한 손으로 검을 들고 다시 날 응시했다.
“폐하…….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사내가 가뿐히 대답했다.
“그쪽도 이미 아는 자이다. 그레이언 대공이라고, 온갖 소문을 뿌리며 기어이 작위를 손에 넣은 그 인간 말이다.”
“그레이언 대공……?”
체르도의 시선이 따갑게 얼굴을 찔렀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약간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간신히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폐하라고? 네가……?”
“그렇다. 짐이 바로 스트라스의 황제이다.”
스스로를 지칭하는 칭호가 짐으로 바뀌었다. 한 나라의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말도 안 돼! 네가 에디일 리가 없다. 얼굴이 완전히 달라!”
순간 사내의 얼굴에 기이하게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사내가 사납게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에게로 한 발 끌려갔다.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그가 물었다.
“달라?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이냐?”
“……!!”
사내가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기에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똑바로 확인했다. 그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디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들었지?”
그가 턱 끝을 들면서 물었다. 입꼬리에 지독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때 누군가 사내의 손을 내 팔에서 떼어냈다. 사내의 악력이 실로 무시무시했는데, 그 이상의 힘으로 사내의 손목을 꺾어버렸다.
사내에게서 자유를 찾은 나는 욱신거리는 팔을 쥐었다. 고개를 들어 지스카르가 온 것을 확인했다. 낯익은 체취와 특유의 신중한 움직임 때문에 보지 않고도 그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지스카르는 맞은편의 상대를 응시했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완벽하게 무표정이 된 그는 붉은 머리 사내와 맞먹고도 남을 정도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소문대로 성급하고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군. 에드리히 반 스트라스.”
“그런 식으로 불려보긴 또 오랜만인데.”
사내는 낮게 실소를 흘렸다.
지스카르의 입을 통해 그의 신분을 확인했다. 눈앞의 사내는 정말로 스트라스의 황제, 에드리히였다.
에드리히가 지스카르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마침 잘 나타났군. 우리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지 않은가?”
“회담은 열흘 후에 있을 것이다. 할 말이 있다면 그때 가서 하라.”
“회담?”
엄청나게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에드리히가 이마에 손을 얹고 웃었다. 어깨는 들썩이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가 손을 내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음산하게 한마디 씹어 내뱉었다.
“평화회담 따윈 개나 주라고 해라……!”
자기가 먼저 회담을 제안했던 주제에 그는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내 어깨에 잠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 * *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엘 파셔와 스트라스의 황제가 마주 보고 앉았다. 아베크의 국왕도 그 자리에 동석을 허락받지 못했다. 양측의 황제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보다 분위기가 더 살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판으로 찍은 듯 그를 닮았더군. 네놈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에드리히 황제가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아랫사람의 처우를 결정하는 두려운 폭군이며 고리타분한 예의와 격식 따윈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한편 이십 년 가까이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엘 파셔의 황제 지스카르는 그와 정반대로 법도에 엄격한 인물이었다.
“…….”
그는 침묵을 지킨 채 스트라스 황제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레브노아드 황태자.”
에드리히는 정확하게 익숙한 이름을 입에 올렸다. 상대 쪽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는 특유의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일이 이렇게 흥미롭게 돌아갈 수도 있는 게지. 엘 파셔가 설마하니 형님의 핏줄을 손에 넣었을 줄이야.”
“그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지스카르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아들이겠지. 만약 아들이 아니라면……, 대체 그게 뭘까?”
에드리히는 턱을 괸 채 손가락을 하나 펴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느긋하게 혼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그는 형님의 아들이다. 예전부터 엘 파셔의 대공이 레비 형님을 닮았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지. 그러나 귓등으로 흘렸다. 4중 영창 마법사라는 헛소문을 사실처럼 꾸미려고 일부러 형님의 이름을 엮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일찍 확인해야 했어!”
뿌득.
에드리히는 손을 내려 손등의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에드리히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체르도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양대 제국 황제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 그레이언 대공이…… 정말로 전하께서 남긴 친자란 말입니까?”
“이제 와서 따분한 소리 마라. 황실에 대대로 전해지던 보검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던 이유가 뭐지?”
“…….”
체르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놀란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스트라스에서 방금 도착한 많은 수의 기사들이 그레이언 대공을 직접 보고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중의 반수는 젊은 시절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를 모신 적이 있다. 엘 파셔의 젊은 대공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전 황태자를 닮아 있었다.
“상황을 한번 정리해 볼까. 지금으로부터 대충 이십 년 정도 전이면 형님이 아베크 중립국에 머물 무렵이다. 당시 형님이 남긴 씨가 중립국에서 엘 파셔로 넘어갔다면, 어떤가.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나?”
에드리히의 말에 체르도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시 전하께서는 여성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가? 경이 형님의 모든 행적을 완벽하게 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아닙니다. 그분께서 작정하고 잠행하셨다면 저로선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스카르가 그들의 대화를 중간에서 잘랐다.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 그는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아들이 아니다.”
순간 에드리히의 두 눈이 위험하게 번뜩거렸다. 큭큭, 하고 그의 잇새로 광기 어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변명이 너무 구차하군. 형님과 판에 박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말이 안 돼! 무엇보다도 엘 지스카르 파셔, 네놈이 그를 대공으로 만든 것이 가장 큰 증거이다. 그는 스트라스의 황족이다. 또한 형님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의 그 어떤 자보다 독보적이고 경이로운 자질을 가지고 있다. 마치 신의 힘을 내려받은 존재처럼. 그러하기에 그는 신의 사자라 추앙받으며 대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면 진짜로 시궁창의 노예를 데려와 대공 작위를 쥐여 주었다는 것이냐? 그래?”
“…….”
“웬 노예에게 온갖 명목을 갖다 붙여 대공으로 삼았다기에 무슨 꿍꿍이로 그런 미친 짓을 벌이는지 계속 궁금했었지. 하하, 짐이 드디어 그 의문을 풀었구나.”
그는 속이 시원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에드리히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지스카르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를 당장 스트라스로 돌려보내라.”
순간 크리스티안이 불끈해서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했다. 던필이 거의 간발의 차로 그를 붙들었다. 엘 파셔 측 기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스트라스의 기사들도 검신 위로 손을 올리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부하 기사들을 자제시켜야 할 체르도 친위대장도 전에 없이 살기 어린 눈빛을 하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레이언 대공이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의 눈은 증오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촉즉발인 분위기 속에서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계속 가당치도 않은 소리만 지껄이는군.”
처음으로 그의 말투가 거칠어져 있었다. 에드리히는 상대의 평정이 깨진 것을 몹시 만족스럽게 여기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는 태연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그레이언 대공은 짐을 오해하고 있다. 짐이 레브노아드 형님을,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였다고 믿고 엘 파셔에 숨어 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짐이 이번에 오해를 풀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정 있어야 할 장소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바로잡겠다.”
“설혹 그가 정말로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와 관련이 있다 해도, 그는 이미 엘 파셔의 대공이 되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스트라스행을 요구한다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느냐?”
에드리히는 눈을 가늘게 반으로 접었다.
“물론 가능하고말고! 그가 엘 파셔에서 백 년, 아니, 만 년을 살았다 해도 그의 영혼은 영원히 스트라스에 있다. 그가 다름 아닌 스트라스의 고귀한 황족이기 때문이다! 스트라스에 뿌리를 둔 자는 결국 스트라스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지!”
크리스티안이 온몸으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크리스티안이 진짜로 돌발행동을 하면 정말 끝장이라 던필은 전력을 다해서 그를 막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스트라스 황제의 단언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엘 파셔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솔직히 엘 파셔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는 사고방식, 행동 양식, 사소한 입맛까지도 전부 스트라스의 황족 그 자체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제국을 한 손에 쥐고 호령하였던 자, 바로 레브노아드 황태자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어딘가 위태위태하고 심장이 떨렸던 것이리라.
던필은 떨리는 시선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치 이러한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유난히도 레이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다.
자기 멋대로 대화를 끝내고 에드리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놈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네가 그에게 작위를 주지 않았다면 짐은 평생 그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정말로 수고가 많았다. 그를 찾아내 준 것을 진정으로 감사한다는 소리다!”
에드리히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회장을 떠났다. 체르도를 비롯한 기사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지스카르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위기사들이 먼저 출입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문을 통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심한 듯 출입구 바로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쾅!
그가 갑자기 입구 옆쪽 벽을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갈겼다. 무서운 힘에 천장까지 희미하게 진동했다.
가까이 있던 기사가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며 다가갔다. 그러나 황제의 표정을 보고는 흠칫 몸을 굳히며 멈춰 섰다. 오랫동안 황제를 보필해 왔으나 그가 이 정도로 격심하게 분노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