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잠에서 깨자마자 허리 위로 둔중한 통증이 전해졌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왜 이렇게 거기가 욱신거릴까? 자연스럽게 어제 낮 동안 있었던 정사가 떠올랐다.
욕구불만이었던 것이 분명한 지스카르가 시작부터 사람을 죽일 듯이 괴롭혔다. 그런데 나란 놈도 거기에 흥분해서 혼이 쏙 빠질 만큼 느끼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쯤 되면 나도 남색에 상당히 취미가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으, 진짜냐…….”
괜히 혼자 자괴감을 느끼며 몸을 조금 뒤척였다. 겨우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지스카르의 팔을 베고 반쯤 안긴 상태로 누워 있었다.
“……!!”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쳐 불에 덴 것처럼 퍼뜩 몸을 일으켰다. 남색에 취향이 있는지 없는지 그딴 건 지금 모르겠고, 일단 맨정신으로 남자 새끼와 바짝 붙어먹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
그때 언제 깼는지 지스카르가 팔을 붙잡고 나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힘에 못 이겨 나는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지스카르가 놓칠세라 한쪽 팔로 내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를 붙들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놔라.”
어제 일을 치르다 그대로 잠들었기 때문에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맨살이 밀착되자 목구멍 끝까지 욕이 치밀어 올랐다. 찰싹 달라붙은 피부 하며, 특히 다리가 교차로 얽히면서 중심부의 살덩어리가 느껴지는데 진짜 이보다 더 불쾌할 순 없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불쾌한 느낌이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자극으로 돌아왔다. 한번 의식을 하기 시작하자 사타구니로 슬슬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서로 빈틈없이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지스카르가 내 변화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내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자 녀석이 날 진정시키려는 듯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자연스러운 반응에 부끄러워할 것 없다. 여기서 무반응이라면 그쪽이 더 문제지.”
“죽여줄까?”
나는 바짝 약이 올라서 지스카르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힘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세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 놈이 오늘따라 내 발길질을 한 번에 쉽게 떨어져 나갔다.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붙들고 정사를 벌였더군.”
지스카르가 자기 이마를 짚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문득 그의 얼굴이 무척 창백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북방 출신인 엘 파셔 황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부색이 희멀겋다. 처음에는 흰 피부에 그늘이 져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금방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크게 휘청거리며 침대맡 기둥을 붙잡았다. 그는 움직이질 못하겠는지 낮게 숨을 토하며 아예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지스카르?”
어지간해서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 녀석이 다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뒤늦게야 침대가 온통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 지스카르의 손등에 칼을 박았는데 거기서 비롯된 출혈이었다. 이만큼 피를 쏟았으면 보통 사람은 벌써 넘어가고도 남았다.
“미친놈이!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이런 데다 쓰지 마! 밖에 누구 없느냐!!”
이제 와서 엘 파셔의 황제가 급사라도 하면 정말로 골치 아프다. 전쟁 나는 거 막아보겠다고 제 발로 놈의 손 안으로 걸어 들어온 내 꼴은 뭐가 되지?
내 목소리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급히 침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황제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들은 서둘러 신관과 의원을 부르는 한편 내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갑자기 할 말이 매우 궁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칼로 찌른 거라고 말하면 상황이 엄청 복잡해지겠지?
쾅.
“폐하!!”
그때 브란덴 백작이 어떻게 근처에 있었던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황제의 변고에 사색이 되었다가 갑자기 내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네 이놈!! 간밤에 폐하와 함께 있었던 것은 너 하나뿐이었다! 역시 네놈은 스트라스의 간자가 틀림없어. 일전에 폐하를 시해하려 했듯이 또다시 같은 일을 시도한 것이 아니더냐!”
에브라함 요새가 반파되는 것을 목격한 많은 병사들이 나를 위대한 신의 사자라며 칭송하고 하늘처럼 받들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은 인간들은 여전히 내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서 운반해 온 수만 갈론의 마정석, 그리고 분주했던 마법사들. 그들이 무슨 꾀를 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맨살에 닿아 있는 브란덴 백작의 손이 몹시 불쾌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행동하기도 전에 지스카르가 브란덴 백작의 손을 비틀어서 떼어냈다.
지스카르는 노기 어린 얼굴로 브란덴 백작의 팔목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팔목에서 으득 하고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힘이 센 줄 알고는 있었지만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도 저런 괴력을 발휘하다니.
“크으윽! 폐, 폐하!”
브란덴 백작이 고통스레 신음을 흘렸다. 지스카르는 한참 뒤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간의 공로를 생각하여 이번 한 번만 용서하겠다. 신의 힘을 부여받은 자이니 짐을 받들듯이 그를 받들라. 무례를 범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과잉 충성을 발휘한 브란덴 백작은 지스카르의 으름장에 무릎을 꿇었다.
지스카르는 허리에 시트를 두르고 제 발로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주위의 부축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잠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브란덴 백작과 실랑이를 하느라 몸에 두르고 있던 침대 시트가 조금 흘러 내려왔는데 그것을 목덜미 위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내심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긴 허리 아래만 가리고 웃통을 다 드러낸 주제에 나는 왜 어깨와 목덜미까지 전부 가려주는 건가. 이놈이 내 성별을 착각하는 거 아냐?
나는 살짝 인상을 쓰고 지스카르를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몸을 낮추어 이마에다 입을 맞췄다. 주위 기사들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무뚝뚝한 황제의 애정표현에 익숙해지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덤이지만 나도 저놈의 이런 행동에 평생 익숙해지지 못할 듯하다.
“폐하.”
시종이 의복을 가지고 들어왔다. 지스카르는 사람을 모두 물리고 환복했다. 그동안 신관도 도착했고 지스카르는 응급조치만 받은 뒤 일어났다.
“쉬고 있거라.”
쉬어야 할 사람은 네놈이라고 맞받아치려다가 말았다. 이 몸과는 기본 뼈대부터 다른 놈이니 저러고도 움직일 만한 모양이지. 나는 건성으로 손을 저어 배웅해 주었다.
* * *
에브라함 요새를 점령한 뒷수습이 대충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올해 봄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행군하기에 딱 좋았다. 내전이 끝날 때까지 이런 날씨가 쭉 계속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보니 크리스티안이 대기 중이었다. 그는 나를 호위하라는 지스카르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생이 많구나. 그런데 지스카르의 손은 어떻게 됐지?”
나는 크리스티안을 보자마자 지스카르의 상태부터 물었다. 크리스티안은 긴말하지 않고 나를 연무장으로 안내했다.
에브라함 요새가 반파되면서 성벽 근처에 붙어 있던 연무장도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이틀간 복구 작업을 거치면서 현재는 너른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스카르는 공터 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러잖아도 키가 큰데 검은 옷에 검은 머리카락이 그를 더욱 장신으로 보이게 했다.
지스카르가 붕대를 두르고 있는 왼손으로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부우웅.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굉음을 내면서 떨어지다가 정확히 수평 상태에서 멈추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력할지 짐작되었다. 자세도 그림으로 그린 듯이 완벽했다. 지스카르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부상을 입은 왼손으로 완벽하게 검을 제어하고 있었다. 나는 연무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혀를 찼다.
“회복이 굉장히 빠르군. 아쉽게도 신관들의 실력이 훌륭했던 모양이야.”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만.”
지스카르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다친 손부터 시작해서 왼팔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의 경련을 억눌렀다.
“신관이 말하길 평생 후유증을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
“뭐라고? 아니 그런…….”
나는 와락 인상을 썼다. 그냥 고생 좀 해보라고 찌른 거지 진짜로 손이 망가지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게 칼로 찔렀을 때 바로 신관에게 보였으면 별일 없었을 것 아닌가. 상처를 하루 꼬박 방치하니 저 꼴이 될 수밖에.
지스카르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반응이구나.”
“하. 나도 내가 이렇게 심성이 고운 줄 처음 알았지 뭔가. 이 몸이 왜 네놈의 상처 같은 걸 걱정해야 하는 거지? 이쪽은 손톱 발톱 다 빠져가며 구른 적도 있는데.”
“정말로 짐을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 맞다는 말이로군.”
지스카르가 갑자기 몸을 숙이고 얼굴을 들이밀어 키스했다. 살짝 입술만 누르고 그는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과한 힘만 주지 않으면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다. 금방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기습 키스를 당하고 반사적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손사래를 쳤다.
“됐다. 내가 찔러놓고 무슨 걱정을 더 하겠어. 그보다 그만 움직이자. 중요한 회의가 시작될 텐데 황제 폐하께서 빠져서야 쓰겠는가.”
나는 먼저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지스카르는 대기 중이던 시종들에게 시중을 받아 의복을 챙겨 입고 천천히 뒤따라 나왔다.
에브라함 요새를 점령하고 그 이후의 행보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실에 군 수뇌부가 전부 모였다. 지휘관들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다들 입을 모아 진격을 주장했다.
“적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반란군은 에브라함 요새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는 생각에 제대로 준비를 갖춰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적시입니다!”
나는 신의 사자라는 웃기지도 않는 직함을 달고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구구절절 옳은 것이지만 나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황제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부터 크롬 산맥의 여섯 번째 봉우리, 발루아 산 정상에 올라야만 합니다. 반란군 토벌은 그다음 일입니다.”
“발루아 산?”
장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스카르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위기이다. 내 뒤에 시립해 있던 크리스티안만이 유일하게 그 이유를 짐작했다.
나는 엘프 장로가 알려준 대로 발루아 산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곳에 틀림없이 보물이라 불릴 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진귀한 보물의 주인이 되는 순간에 관객은 많을수록 좋으므로 나는 잠시 진군을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반란군은 언제든 토벌할 수 있으나 발루아 산에 오를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뿐입니다. 이달 그믐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엘 파셔와 황제 폐하를 위하여 반드시 그 날에 발루아에 올라야만 합니다.”
나는 태연하게 모든 것이 황제와 엘 파셔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했다. 사실 내가 아주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신의 사자로서 정당성을 얻을 때마다 지스카르도 실수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얻는다. 황제가 과거의 권위를 되찾으면 엘 파셔도 안정을 구가할 확률이 높다. 언제든지 반란군을 토벌할 자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며칠 전 내게 시비를 걸었다가 혼쭐이 났던 브란덴 백작이 억지로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신의 사자여, 발루아에 무엇이 있기에 적을 코앞에 두고 산행을 하자고 주장하십니까?”
“지금은 자세한 것을 알려줄 단계가 아니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이 시급한 판국에 산행을 하자 하셨습니까? 하하.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고 신의 사자시다 보니 병사들이 산행으로 크게 지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브란덴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지그시 백작을 응시하다가 지도 위에 놓인 깃발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발루아 산은 에브라함 요새와 반란군의 주둔지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해당 지역까지 이동해서 남은 병력은 산기슭에 진을 치고, 오백을 차출해서 발루아 산을 오른다. 볼일을 마치고 바로 진군해서 반란군을 치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돌리지 마시고 왜 발루아 산에 올라야 하는지 연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뜬구름 잡는 정보만 듣고 대군을 움직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저 역시 브란덴 백작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브란덴 백작 외에 다른 지휘관들도 하나둘씩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때 난데없이 드와이트 후작이 와악 소리를 지르면서 나섰다.
“신의 사자께서 아무 이유 없이 산에 오르자고 주장할 리 없다고 생각하오!!”
이놈 저놈 하며 불손하게 굴던 그는 에브라함 요새를 함락시킨 뒤로 완전히 태도가 바뀌었다. 내 지시에 따라 직접 마법진을 구상하고 그 결과를 두 눈으로 목격한 마법사들은 나를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드와이트 후작은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낮추고 경외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이러십니까?”
어느덧 숭배자에 가깝게 돌변한 드와이트 후작을 보면서 나는 실소를 지었다. 나를 의심하는 놈도 있지만, 날 신봉하는 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천천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들 중 반은 온전히 나의 신성을 믿고 있으며, 나머지 반은 여전히 나를 크게 불신하고 있다. 시시하게 백작위나 얻을 요량이었다면 이 정도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의심 많은 놈들을 찍어누르고 대공위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발루아 산을 올라야만 한다.
한 번 죽고 새로운 삶을 얻었을 때, 나는 비천한 노예라도 상관이 없었다. 흙이 묻은 마메 뿌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평생을 그렇게 살자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과거에 대제국 스트라스의 황태자였던 자이다. 그 지위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면 엘 파셔의 유일한 대공이라도 되어야겠다.
“오백 년간 난공불락이었던 에브라함 요새가 하루아침에 함락되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군. 하지만 신의 힘을 처음으로 접한 자들이 쉽게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발루아에서 나의 신성을 온전히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나는 호언장담을 하고, 엘 파셔의 황제 지스카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스카르는 이번 일에 대해 일절 듣지 못했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고 푸른색 눈이 언뜻 검은빛으로 보일 정도로 깊고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지스카르는 대단히 신중한 성품이라 확실하지 않은 일은 결코 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내가 걸린 문제만큼은 때때로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다.
“너는 언제나 짐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러하리라고 확신한다. 전군은 출정 준비를 하라. 준비를 마치는 즉시 발루아 산으로 이동한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에 누구도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이달 그믐날까지는 시간이 조금 빠듯했다. 황제군은 서둘러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
* * *
“뭐? 엘프를 직접 만났다고?!”
크리스티안을 대신해서 친위대장을 맡고 있는 던필이 대장의 품위 따윈 개나 주고 소란을 피웠다.
“누가 듣겠군. 목소리를 낮춰라, 멍청아.”
내가 짜증을 담아서 말하자 던필은 입을 댓 발을 빼놓고 투덜거렸다.
“이것 참. 이제 저 녀석한테 멍청이 소리까지 듣게 되네.”
“던필! 그는 더 이상 노예 신분이 아니다. 예를 갖춰라!”
크리스티안이 당장 표정을 굳히며 경고했다. 하지만 연이어 욕을 먹고도 던필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오랜만에 사방에서 타박을 받으니까 너무 좋구나. 이제야 겨우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그리고 너무 정색하고 그러지 마라. 나는 황제 폐하를 상대로도 막말하는 놈이잖아.”
던필이 넉살 좋게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토하며 잔소리하는 것을 포기했다.
“엘프의 유산을 찾으러 간단 말인가. 너는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일만 벌이는구나.”
바로 옆에서 지스카르가 흑마를 몰고 가면서 말했다. 긴 행군을 위해 내게도 갈색 군마가 주어졌다. 말안장에 앉아 먼 곳을 내다보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예측불허의 일이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일반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가 어찌 신의 사자로 추대받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엘프의 은신처 위치는 극비 중의 극비니까 물어볼 생각도 마라. 크리스티안, 너도 맹세한 대로 반드시 기밀을 지켜야 한다.”
“알았다…….”
크리스티안은 조금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 앞에서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이 꺼림칙한 것이다. 지스카르도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한 소리 했다.
“엘 파셔에서 작위까지 받을 작정이면서 끝까지 스트라스의 기밀을 지키겠단 말이냐.”
“이건 비밀인데 지스카르 네게만 살짝 알려주마. 내가 비록 엘 파셔의 작위를 받을 생각이긴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스트라스만을 생각하고 있다. 나의 조국 스트라스를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바칠 수도 있지.”
“짐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밝혀선 안 될 비밀 같다만.”
엘 파셔의 황제 지스카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농담 따먹기는 그쯤하고, 나는 무엇 때문에 발루아 산에 있는 엘프의 유산을 찾으러 가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크리스티안을 제외한 지스카르와 던필은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였다.
“여태 엘프들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발루아 산 정상에 틀림없이 경악할 만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내가 보물을 손에 넣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시 한번 나를 신의 사자라고 추켜세우기 시작하겠지.”
“그거 사기 아니냐?”
옆에서 던필이 지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네가 뭘 모르는구나. 가끔은 시기적절하게 사기극을 가미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불패의 명장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소규모 전투에서 몇 번 패배한 적이 있다. 그걸 부하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불패의 명성을 지켰지.”
“……그건 정말로 비밀로 묻어두는 게 나을 뻔했군.”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조금 음울해져 있었다. 나는 콧소리를 내며 일부러 가깝게 말을 몰아가서 지스카르를 쳐다보았다.
“흐음? 혹시 너도 ‘레브노아드 황태자’에게 환상을 품고 있는 녀석 중 하나인가? 내가 세간에는 아주 완전무결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거든. 타고난 제왕의 재목으로 어머니의 태를 벗고 나올 때부터 한 마리 사자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산했으며 걸음마를 떼는 한 살 무렵엔 검에 통달하였고 말을 트기 시작하는 세 살엔 마법의 신이 되어 마침내 세상 모든 이치에 통달한 자! 소문에 따르면 하늘도 날 수 있을 것 같던데.”
웃자고 해본 말인데 지스카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시선도 딴 곳인 걸 보니 정말로 내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물론 허황한 소리를 믿은 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레브노아드에게 환상을 품고 있었단 말이다. 나는 웃겨 죽겠다고 놈을 놀렸다.
“아니, 진짜인가? 귀여운 녀석 같으니. 그래서 처음 이 몸을 봤을 때도 계속 눈을 못 뗐던 거지!”
“…….”
내가 웃고 있자 지스카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 팔을 잡아당기고 자신도 몸을 내밀어 입술에 키스했다. 멋대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잠시 후에 떨어져 나갔다. 나는 거칠게 입술을 닦았다. 이 자식이 다들 보는 앞에서.
“할 말 없으니까 입부터 막고 보자 이거냐?”
“그런 뜻보다는…… 네가 웃고 있는 것이 귀여워서 그리했다.”
“아하. 그런 식으로 귀엽다는 말에 복수하시겠다?”
“그것이 아니라.”
지스카르가 나를 보면서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사실 귀여운 것은 네 쪽이 아닐까 싶다만.”
“그건 맞는 말이야.”
옆에서 던필이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유감스럽게도 놈들의 말을 반박하기엔 그들과 나 사이에 신체 조건이 지나치게 차이가 났다. 지스카르와 크리스티안, 던필까지 세 놈 전부 180 중후반의 장신이었고 기사 출신이라 어깨가 떡 벌어져 체격도 훌륭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직 키가 173센티미터에 불과하고 얼굴에 소년티도 남아 있었다.
나는 짜증을 밀어 넣고 손가락을 두 개 폈다.
“딱 2년만 기다려라. 귀엽다는 소리가 쏙 들어가게 해줄 테니. 전생에 내 키가 187센티였다. 네놈과 키가 거의 비슷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얼마든지 기다리마. 짐은 그편이 더 좋으니.”
지스카르는 예전부터 체격이 좀 더 컸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어쩐지 내가 매우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제안대로 산 아래에 병영을 만들고 오백 명을 차출해 산행을 시작했다. 적을 앞에 두고 무작정 산행을 해야 한다는 것에 지휘관이나 기사들은 불만이 아주 큰 것 같았다.
며칠에 걸친 산행 끝에 드디어 발루아 산 정상에 도착했다.
“발루아 산의 지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기사들이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루아 산 정상은 누가 썩둑 잘라놓은 것처럼 평편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그 평지의 넓이가 상상보다도 훨씬 컸다. 산을 오른 병사 전원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도 남을 공간이었다. 지휘관이 군장을 풀고 휴식을 명했다.
지스카르는 바람의 흐름을 느끼려는 듯 허공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서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기이하군. 뭔가가 나올 것 같은 장소이긴 하구나.”
“그렇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나도 허리에 손을 얹고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상에 도착한 순간부터, 한 발자국 아래의 산과는 완벽히 별개의 세상인 것처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똑같이 바람이 불었고 서늘한 산의 기온도 그대로였지만 이곳 정상에서 틀림없이 커다란 이질감을 느꼈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하셨습니까?”
크리스티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던필도 뭐가 이상하냐고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래도 이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와 지스카르 정도인 것 같았다. 엘프의 은신처를 찾아낼 때와 비슷한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신경을 거스르는 기이한 이질감만이 있을 뿐, 아무리 주위를 수색해도 특별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예정된 그믐날까지 아직 이틀이 남아 있었다. 결국 수색을 중단하고 정상에 야영지를 만들어 대기하기로 했다. 아무 소득 없이 이틀을 보내는 동안 기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은 더욱 반발심이 심해졌다. 특히 브란덴 백작은 나와 눈만 마주쳐도 대놓고 인상을 썼다.
이틀 후 마침내 엘프 카리스웰이 지정했던 날이 되었다. 나는 일찍부터 일어나 산 정상에서 해가 뜨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하늘이 붉게 변하며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아직 남색 밤하늘이 남아 있지만 금방 어둠이 물러가고 완전히 날이 밝을 것이다.
문득 머리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여명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일순간 숨을 멈추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며 산 정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그 수가 서른 마리를 넘었다.
산 정상엔 야영을 위한 간이 막사가 여러 개 지어져 있었다. 드래곤은 빈자리를 찾아서 땅에 앉았고 막사 사이에 자리 잡기도 했다. 그들은 어지간한 집만큼 거대했지만 마치 체중이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움직일 때 바람도 일지 않았고 땅을 울리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 카리스웰, 그대는 정말……!”
나는 카리스웰의 안배에 진심으로 전율했다. 정말이지 진실의 신 에스키아라를 신봉하는 엘프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발루아 산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드래곤이었을 줄이야!
“허억! 드, 드래곤! 드래곤이다!”
“진짜 드래곤 맞는 거야?”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소리 질렀고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밖으로 뛰어나왔다. 드래곤이 바로 막사 옆에 앉아 있었던 탓에 밖으로 나오다 말고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병사들도 많았다.
“맙소사! 내가 이 두 눈으로 드래곤을 직접 보는 날이 오다니!!”
드와이트 후작이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탄사를 질렀다. 내가 허튼짓을 꾸민다며 산행을 반대했던 브란덴 백작도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경악과 경탄에 가득 찬 목소리가 연방 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드래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드래곤의 거체에 손을 뻗었다.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비늘에 손이 닿는 순간 병사의 몸도 같은 색의 빛으로 화했다. 그러곤 찰나 간에 드래곤의 몸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으악!”
“뭐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서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인하지 못한 자는 드래곤과 접촉을 삼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직전,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직접 말이 전해졌다. 여러 드래곤 중에 회색빛을 띠며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놈이 날개를 크게 펼치고 홰를 쳤다. 바로 그 회색 드래곤이 인간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놈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키워 말을 걸어보았다.
“그대가 이 드래곤 무리의 수장인가.”
[수장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 나는 젊은 드래곤의 스승이다.]
드래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더욱 기분이 고양되었다.
“우선 묻겠다. 사라진 병사들은 어찌 되었지? 죽어버린 건가?”
[자아가 약한 인간이 무궁히 사고하는 드래곤에게 휘말려든 것이다. 사라진 병사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드래곤과 하나가 되어 앞으로 천만년의 세월을 함께 궁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 인간의 눈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자아를 강하게 지키지 못할 자는 드래곤과의 접촉을 삼가라.]
잘못 건드렸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병사들이 기겁하며 드래곤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드래곤이 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강인하지 못한 자는 드래곤과 접촉하는 순간 자아를 잃고 동화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만약?
“만약 충분히 강한 자가 드래곤과 접촉한다면 어찌 되는가?”
나는 거대한 회색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는 마정석이 박힌 팔찌를 훑어 내렸다. 마력이 함께하는 이상 나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노쇠한 드래곤은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라. 그대는 이곳에서 목적했던 바를 기어코 이룰 것이다.]
나는 노회한 드래곤이 말한 대로 주변의 풍경을 넓게 시야 안에 담았다. 산 정상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서른 마리의 드래곤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놈이 있었다. 나른하게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황금색의 드래곤이었다.
황금 드래곤이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응시했다. 짧은 순간 틀림없이 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마치 이끌리듯 황금 드래곤에게 다가가 망설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손이 닿는 순간 황금 드래곤은 눈부신 빛으로 화하여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평범한 병사들은 무궁한 드래곤의 앞에서 자아를 지키지 못하고 동화되고 말았다. 나는 반대로 드래곤을 내 것으로 만들어냈다. 팔목에서부터 목덜미에 이르기까지 기다란 용 문신이 생겼다. 바로 이 몸에 황금의 드래곤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온통 검은빛을 띤 드래곤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내 바로 옆자리에 착지했다. 검은 드래곤은 고개를 든 채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하자는 거지? 검은 드래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지스카르가 걸어왔다. 그는 내 곁에 서 있는 검은 드래곤의 앞에서 멈춰 섰다.
“화, 황제 폐하! 아니 됩니다!!”
브란덴 백작이 비명을 질렀다. 지스카르가 무엇을 하려는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다. 드래곤과 잘못 접촉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곳에서 황제를 잃다니 만에 하나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른 측근들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지스카르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사람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검은 드래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이 닿는 순간 드래곤의 몸이 빛으로 화하여 지스카르의 내부로 흘러들어 갔다. 내가 오른쪽 팔목에서 어깨에 이르기까지 문신이 생겼다면, 지스카르는 왼쪽 팔뚝에서 시작해 목덜미까지 문신이 나타났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측근들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지스카르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걱정에 가득한 측근들은 물리고 곧장 내게 다가왔다. 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고 있느냐. 뭔가 문제가 있는가.”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스카르만 들을 수 있게 이를 갈았다.
“그거 도로 토해내시지!”
지스카르의 용 문신을 노려보며 나는 되지도 않는 억지소리를 해댔다. 이곳에 지스카르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놈도 강력한 소드마스터이니 드래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자격은 충분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날 따라왔다가 무려 드래곤을 전리품으로 얻어가다니. 저 자식 잘되는 꼴을 보니 없던 혈압이 오를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황당한 듯 말했다.
“그게 불만이었던 건가.”
[사라진 드래곤은 그대들과 평생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경지에 오른 그대들이 인간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면 한다.]
회색 드래곤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일단 성질을 누르고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처럼 교육이라도 하라는 뜻인가?”
[그대들은 치열하게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드래곤은 그대들의 여정을 밟아가며 스스로 많은 것을 터득할 것이다.]
회색 드래곤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몸을 뒤튼 다음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다른 드래곤도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고 발루아 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서른여 마리의 드래곤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드래곤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새겨두었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드래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떠나는 광경은 아마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때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멈추었다. 문득 주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이 숨을 죽인 채 지스카르와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유독 내게 반항적이었던 브란덴 백작을 지목하며 물었다.
“브란덴 백작, 아직도 그에게 불만이 있느냐?”
“어, 어, 없습, 없습니다!!”
브란덴 백작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지스카르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하지만 강하게 명령했다.
“그렇다면 경의를 표하라!”
브란덴 백작은 마치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머리를 눌렀다. 눈앞의 모든 이가 등을 보이고 납작 엎드린 광경은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광경을 예전부터 자주 보아왔다.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었다. 나는 대제국 스트라스의 황태자로, 간단한 손짓만으로 평민은 물론 귀족들까지 이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이 몸에 경외를 표하며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과거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던 일을 지금에서야 간신히 이루어내었다.
“두 번 다시 노예로 되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문신이 새겨진 손등에 입을 맞춘 뒤 그대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문신에서부터 황금색 드래곤이 다시 세상에 몸을 드러냈다. 더 이상 의심할 수도 없고 의심해서도 안 될 절대적인 증표 앞에서 사람들이 더욱 숨을 죽였다.
오직 한 사람만이 고개를 들고 드래곤을 담담하게 올려다보았다. 지스카르가 자신이 거느린 검은 드래곤을 불러냈다. 황금색 드래곤과 검은색 드래곤이 발루아 산 정상에 선 채 장관을 이루었다.
“결국엔 바라던 것을 모두 이루어내고 말았구나.”
“당연한 말을 하는군. 이 몸은 하고자 마음먹어서 못 해낸 것이 없었다.”
나는 교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검은색 드래곤에 시선을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스카르가 운수 좋게 드래곤을 얻어간 것이 아주 배가 아팠다. 그래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하겠지.
지스카르는 자격이 있기 때문에 드래곤을 얻은 것이다. 백 번 드래곤을 만날 기회를 얻은들 일개 범부에 불과했다면 한 줌의 먼지가 되어버릴 뿐.
나는 지스카르의 역량을 인정했다.
“축하한다. 너도 귀한 것을 얻었구나.”
“글쎄다. 드래곤 같은 것이 대수인가. 상징성은 대단하나 어차피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스카르는 드래곤을 일개 미물로 치부했다. 나는 의문을 느꼈다. 드래곤이 가진 전략적 가치를 놈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목적한 바를 이루었듯, 짐도 이번에 매우 값진 것을 얻었다.”
그가 말하는 값진 것이 드래곤은 분명히 아니다. 드래곤도 평가 절하할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지스카르는 어딘가 배부른 사자 같은 분위기로 내 뺨 위에 손등을 올렸다.
“드래곤을 내세워 너는 끝내 엘 파셔의 대공이 될 것이다. 너는 언제든 짐의 곁에서 떠날 수 있다고 했으나, 여기까지 와서 공들여 이룩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겠다고 말할 리가 없다. 너는 엘 파셔의 대공이 되어 짐의 곁에 남을 것이고 그 결과로 짐은 온전히 너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너를 얻게 된 것에 비하면 드래곤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
지스카르는 드래곤을 보며 낮게 웃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놈의 말에서 오류를 지적했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아니, 너는 짐의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려 해도 네가 짐의 곁에 남기로 한 이상은 그것이 진실이지.”
지스카르가 오늘따라 유난히 강하게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오랜 내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그는 굉장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사실 놈의 말은 일부분 옳았다. 내가 이번 일에 들인 공이 얼만데 이제 와서 엘 파셔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 나는 엘 파셔의 대공이 될 것이고 못해도 십수 년은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뒤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 이 몸이 네 곁에 머물기로 정했다 해서 그것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적어도 오늘내일 사이에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겠지…….”
지스카르가 눈을 내리깔고 내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아직 반란군을 토벌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내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지스카르는 다시 준엄한 황제로 돌아가 하산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