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3권) (15/43)

목차

14.

노예 상회를 떠난 뒤 목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지금 내가 목적지로 삼고 있는 곳은 스트라스가 아닌 아베크 중립국이었다. 나는 크롬 산맥을 넘으면 일정을 보름은 단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크롬 산맥은 엄청난 수의 고블린이 터를 잡고 있어 보통 사람은 그곳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는 위험지역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실력에 너무너무 자신이 있었다. 크리스티안도 말만 안 하지 은근히 자기 실력에 자부심이 넘쳤다. 황제의 친위대 대장직을 꿰차고 있었는데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놈이 바로 바보다.

그래서 크리스티안과 나는 단둘이서 거침없이 크롬 산맥으로 발을 들였다.

고블린은 각각 개체의 힘도 별로 강하지 않고 많아야 서른 마리 정도 무리를 지어 활동하기 때문에 오크보다 훨씬 위험도가 낮다. 하지만 한 마리라도 살아남으면 도망을 쳐서 주위의 다른 무리를 불러 모으고, 불러온 무리가 당하기도 전에 다른 무리를 부른다. 근방의 모든 고블린이 사라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크리스티안과 나는 크롬 산맥을 넘는 동안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길을 돌아서 가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매일 한탄했을 정도로 여정은 매우 고달팠다. 이 모든 것이 실수로 고블린 딱 한 마리를 놓친 대가였다.

죽을 고생을 하고 산을 내려오니 멀지 않은 곳에 마을과 성이 보였다. 고블린과 싸우느라 흙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하게 위장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검도 그대로 든 채 성으로 향했다.

나의 부상이 거의 회복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행보를 숨길 필요는 있지만 예전처럼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농사꾼과 수레 등이 드문드문 성문을 지나고 있었고 병사 두 명이 문지기로 서 있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대충 지나가는데 병사들은 우리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

“병사들이 경계하는 기색이 없군. 바룸 남작이 내가 떠난 뒤에 신고를 했다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성에도 소식이 전해졌을 테고 경계도 강화되었을 텐데. 남작은 우리를 그냥 못 본 척할 생각인가.”

“…….”

대답이 없다. 크리스티안은 근래 들어 조금 굳어 있었고 뭘 말하려 하다가도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다.

나는 크리스티안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기지개를 크게 켰다. 이제 아베크 중립국은 바로 코앞이다. 여기서 하루 정도만 쉬고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여관을 찾았다.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자주 탄식을 터뜨리곤 했다.

적당한 여관을 택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가하게 늘어져 있던 주인이 손님을 보고 건들건들 일어섰다.

“예이, 어서 오십쇼!”

“하룻밤 쉬어 갈 것이다. 가장 깨끗한 방으로 내와라.”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자마자 여관 주인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엇! 예, 옙! 여기 의자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말투나 행동에서 단번에 그가 귀족임을 알아본 주인장이 즉시 태도를 바꿔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는 거듭 인사를 한 뒤 방을 정리하기 위해 위층으로 뛰어갔다.

크롬 산맥의 고블린도 단둘이서 때려잡고 온 마당에 별로 거칠 것도 없긴 한데, 그래도 크리스티안은 정말 조금도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수배자임이 드러나서 병사들이 들이닥치면 오늘 밤도 고블린과 함께 저 산속에서 자야 한다. 알고 있는 거냐?”

“산속에서 자는 한이 있어도 더는 무례를 참지 않겠다.”

“노예상회에서 정말 쌓인 게 많았나 보군. 나도 마찬가지긴 하다만.”

나는 의자에 앉아서 잠시 신발 위로 발등을 주물렀다. 부상은 거의 회복됐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특히 발이 문제였는데 조금만 오래 움직여도 통증이 생겼다. 크리스티안이 즉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살폈다.

“상태가 안 좋은가?”

“네게 내 상태를 일일이 알리고 싶지 않은데? 너는 황제의 명령이 최우선이지 않은가. 사정이 달라졌을 때 내 약점을 이용하려고 들면 곤란하거든.”

나는 일부러 웃으면서 그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랬더니 크리스티안은 얼굴색이 어두워져서 또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크리스티안이 말을 잘 못하게 된 이유를 잘 안다. 내가 심심할 때마다 갈궈서 말문이 막히게 했거든.

잠시 후 주인장이 준비가 다 되었다며 나타났다. 나는 쉬러 가기 전에 그에게 조금 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물었다.

“마을 분위기가 어두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주인장은 나도 귀족 도련님쯤으로 여기고 허리를 굽혔다.

“예, 전쟁이 터진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들 겁에 질려 있습니다.”

“전쟁?”

순간 조용하던 크리스티안이 표정을 확 바꾸고 반문했다. 나는 턱을 만지다가 물었다.

“혹시 최근 제도에서 큰 사건이 있었나?”

“어, 예……. 황태자가 반란을…….”

“뭐라고?!”

크리스티안이 크게 분노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크리스티안을 옆으로 밀어내고 물었다.

“황태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래서 어떻게 됐지?”

“예, 그냥 황제께서 당일에 싹 다 잡아들이셨죠.”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바룸 남작의 발언을 통해 대강 반란이 일어날 것 같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미쳐서 헛짓만 하고 있다더니 그걸 또 금방 하루 만에 제압한 모양이다.

“반란을 잘 제압했는데 전쟁이 터진다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그게 말입니다. 저기 남쪽으로 옛날 아델만 왕국이 있던 지역에서 황제께 반기를 들었답니다. 높으신 분 몇몇이 황제 폐하의 지난 실수를 비난하며 황태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군요. 미친 거 같지 않습니까? 반란을 일으킨 황태자가 뭐 잘했다고?”

분개하며 이야기를 하던 주인장은 뒤늦게 나와 크리스티안의 눈치를 보더니 슥 입을 막았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반군을 지지하는 귀족일 수도 있는데 너무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이다.

“좋은 정보 고맙군. 우린 반란군과 무관하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의 충심에 황제 폐하께서도 기꺼워할 것이다.”

“예.”

그제야 주인장이 환하게 웃으며 2층 방으로 안내했다. 크리스티안은 방문을 닫자마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도에서 일어난 황태자의 반란이 즉시 진압된 것까지는 좋은데 남부 귀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니 마음이 심란한 것이다.

“반란이라니…….”

나도 겉옷을 벗어 던지며 아까 주인장이 했던 말을 잠깐 곱씹어보았다.

“반란이 일어난 곳이 아델만 연합 왕국이 있던 지역이라 했지. 아베크 중립국 바로 위쪽에 붙어 있던 그 소국.”

“맞다. 연합국은 정복 전쟁 가장 막바지에 엘 파셔에 복속되었다. 왕국의 왕족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구왕국의 신하였던 자가 제국에서 작위를 받아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구왕국의 신하인가. 이래서 정복지는 본국의 귀족에게 맡겨야 해. 시라크 황태자의 복권은 명분상 하는 소리고 제도가 어지러워 보이니 이참에 독립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턱도 없을 짓으로 보이지만.”

정권을 잡는 것이 지스카르가 됐든 누가 됐든 엘 파셔가 구왕국의 헛짓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독립을 한다고 딱히 호응을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도 그 옛날 엘 파셔가 정복한 여러 구왕국 중의 한 곳인데 반란을 지지하는 자는 별로 없고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판이다.

다만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지스카르에게는 뼈아플 것이다. 놈의 권위가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이게 다 지스카르가 그동안 빌미가 될 짓을 너무 많이 한 탓이다.

“후우.”

골치 아픈 일은 다음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신발을 벗어 던지면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발이 계속 욱신거렸다. 상처 자체는 다 나았지만 후유증이 남아서 통증, 열감 등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더 이상 마법이나 신성력이 통하지 않고 그냥 푹 쉬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심하면 진통제를 먹을 수도 있긴 하다.

내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크리스티안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둥글넓적한 통이 들려 있었다. 신관이 가르쳐 준 대로 발을 주물러주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앉았다.

“공작가문 출신에 평생 출세가도만 달려온 친위대장님에게 시종이나 할 짓을 시키자니 솔직히 마음이 편치 않군.”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노예상회에 머물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여관에 사람이 있을 테니 불러서 시중을 들게 해라.”

크리스티안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굳이 자기 손으로 내 발을 들어서 물속에 넣었다.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함부로 일을 맡길 수는 없다.”

“시중 하나 들게 하는데 뭘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나는 황당하다고 웃었다. 크리스티안은 계속 묵묵하게 발을 주물러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러고 있다가 그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됐다. 네가 이런 허드렛일까지 할 필요는 없어. 지스카르가 그러라 시키더냐?”

나는 일부러 지스카르를 들먹였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평소처럼 난감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눈을 조금 내리깔고 계속 마사지를 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몸이 약해져 있을 때 아무나 손을 대는 것이 마뜩잖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을 뿐.”

“…….”

입을 다물고 있다가 성실함이 과다하다고 핀잔을 주었다. 결국 사람을 부르지 않고 크리스티안이 끝까지 시중들어 주었다.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고 식사까지 끝내고 나니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침대를 쓰고 크리스티안은 근처의 소파를 쓰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 *

얼마나 잠을 청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자 크리스티안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밖에도 인기척이 있었다. 수가 일곱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복면에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이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내가 묻자 문가에 서 있던 자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고 왔다.”

“……지스카르란 말이군.”

어떻게 우리를 찾아냈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바룸 남작이다. 내가 진짜 스트라스의 첩자일 수도 있는데 나를 아예 못 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직감이 있어 다른 곳에는 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일부러 지스카르를 찾아 직접 나의 행방에 대해서 알린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용건은? 와르르 들이닥쳐 그냥 잡아들이지 어째서 잔뜩 폼을 잡고 있지?”

“수배령 때문에 체포하려는 것이 아니다. 폐하께서 긴히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시니 조용히 따라라.”

나는 대놓고 비웃음을 보냈다.

“너희 황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해라. 아쉽거든 네놈이 직접 와라. 내게도 일정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보고 감히 오라 가라야?”

복면인은 아마도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레이. 정말로 폐하의 밀정이라 한다면…….”

“그래서?”

“그분께 생각이 있으실 것이다!”

“그놈의 생각 따위 내 알 바 아니고.”

물론 나는 바로 코웃음을 쳤다.

“레이!!”

나는 왈칵 인상을 쓰고 크리스티안을 노려보았다.

“네 정체성은 내 충분히 알았다. 네놈은 나무랄 데 없는 황제의 충신이야. 이제 충분하니 저놈들을 따라 네 주군의 곁으로 돌아가거라! 전부터 어떻게 네놈을 떼어놓을까 고심했는데 마침 잘됐군!”

일순 크리스티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렇게 못 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이 몸이 성치 않을 때까지의 이야기지. 내 앞에서 네가 어디까지 멋대로 굴 수 있을 것 같으냐? 저놈들과 합공이라도 해서 한번 시험해 보겠느냐?”

나는 마정석 주머니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복면인들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내 신상에 대해서 들은 게 틀림없다. 복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순순히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어미와 아비, 그 외의 많은 노예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지 않은가?”

잠깐 멈칫하고 복면인을 보았다. 나는 살짝 짜증을 드러냈다.

“재미있군. 이제 와서 그런 제안이라니. 내가 도망친 순간 부모님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납치를 당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그곳을 떠나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네놈들의 황제는 모른다고 하더냐? 노예들 따위 갈아먹든 토막을 내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

내 반응이 몹시 의외였나 보다. 복면인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 기회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조신하게 돌아가서 황제께 보고나 올려라.”

복면인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강제로 나를 끌고 돌아갈 것인지 고려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나는 가볍게 숨을 돌리며 침대에 도로 앉았다. 크리스티안이 아직 방 안에 우뚝 서 있었다.

“크리스티안, 놈들을 따라가라고 했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 않나.”

“어째서? 나는 쾌유했고 충분히 힘을 되찾았다. 더 이상 내가 위험에 처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지켜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게 아니지. 내가 쾌유한 날부터 네 역할은 감시로 바뀌었군. 내가 지스카르의 수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감시하는 것이 네 일이 되었어.”

“…….”

크리스티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맞는 말만 하니까.

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남은 새벽 시간 동안 마저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여관을 나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베크 중립국이 코앞이었다. 내 목적지가 아베크 중립국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베크 중립국 동부를 에워싸고 있는 엠버 산맥의 어딘가였다.

나는 며칠에 걸쳐 구슬땀을 잔뜩 흘리며 험한 산등성이를 올랐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하아, 크리스티안. 너는 여기서 그만 돌아가라. 네가 지스카르의 신하인 이상 더 동행할 수는 없다.”

크리스티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표정을 굳히고 강경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렇게 못 하겠다고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7일만 기다려라.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

크리스티안은 여태 내가 자신을 떼어놓고 멀리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내가 굳이 약속이란 말까지 들먹이며 돌아오겠다고 하자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7일을 기다리라고 하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유의 대답을 반복했다.

“절대 혼자는 보내지 않겠다.”

나는 골치가 아파서 애먼 머리를 흩트렸다. 사실 번거롭게 설득할 것 없이 저런 말도 안 통하는 녀석 따위 그냥 따돌리고 혼자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크리스티안을 떼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에게 너무 큰 도움을 받은 탓이다. 크리스티안이 없었다면 머리를 식힐 시간도 얻지 못하고 아직까지 황성에서 버르적대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친 몸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도 크리스티안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크리스티안 없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라는 건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이젠 어쩔 수가 없다.

“이 부근이 목적지라는 것을 아는 네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곤란한 일이지만……. 내가 찾아갈 곳에 스트라스의 기밀이 있다. 나는 엘 파셔가 그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 너를 떼어놓고 가길 원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스트라스의……?”

“끝까지 나를 따라오겠다면 네 명예를 걸고 맹세해라. 여기서 본 모든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함구하겠다고.”

몇 분간 대답을 기다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스트라스와 엘 파셔는 같은 하늘 아래에선 못 사는 원수지간으로, 보통 스트라스에 득이 되면 엘 파셔에는 독이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스트라스의 기밀이라는 것이 엘 파셔에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함부로 맹세하겠노라 대답을 못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다.”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쓰게 웃으며 앞장섰다.

“이제부터는 네 마음대로 걸어서는 안 돼.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내 뒤를 정확히 밟아라.”

“…….”

아마 이것저것 묻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나를 따랐다. 내가 스트라스 제국의 기밀이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아베크 왕국만이 중립지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아는가?”

“……스트라스와 엘 파셔의 세력권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운 좋게 그리된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트라스와 엘 파셔가 어느 쪽으로 진군하는가에 따라 휘에른 왕국이나 파오니소스 공국이 중립지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내가 우연히 아베크 중립국 근처에서 ‘어떤 것’을 발견했지. 그래서 아베크 왕국이 중립지역이 될 수 있도록 안팎으로 힘을 썼고 운도 따라주어 내 의도대로 일이 성사되었다.”

“어떤 것이라면?”

“오감이 극에 다다른 이들만이 이 일대가 다른 곳과 무언가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이곳의 이질감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아마 소드 마스터 정도 된다면 알 수도 있겠지.”

특별한 것 없는 숲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걸었다. 점점 숲이 무성해졌다. 나무가 틈 없이 빽빽이 들어섰고 잎사귀가 더욱 풍성해졌고 끝없이 하늘 위로 뻗어나갔다. 나무 기둥은 열 사람이 둘러서도 전부 잡지 못할 만큼 굵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이 거대한 나무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의 풍경은 실로 웅장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가 감히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곳까지 뻗어 있었다.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수십 년 묵은 나무만 했고, 그것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무성한 잎사귀로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은은하게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무 위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소녀는 손가락 한 뼘 길이의 길고 뾰족한 귀를 가졌는데 이쪽을 보는 동안 강아지처럼 계속 쫑긋거렸다. 소녀는 가늘고 하얗고 아름다운 팔다리로 유연히 나무를 밟고 바닥에 내려섰다. 색소가 빠진 것 같은 연녹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나무 사이에서 소녀와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주변으로 작은 반딧불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반딧불은 작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온몸으로 환하게 빛을 뿜는 중이다. 그것이 바로 전설에서나 들었던 정령이란 존재다. 이 자리에 들어선 순간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실감각을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크리스티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꿈을…… 꾸는 것 같군. 엘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벌써 20년도 넘은 과거 일이로군. 중립국 주위를 탐색하다가 우연히 엘프의 마을을 발견했다. 나도 당시엔 그런 기분이었지.”

감상에 잠겨 있을 때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엘프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엘프는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 하지만 긴 세월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어떤 뜻깊은 일을 이루어내면 엘프는 늙어간다. 허리가 꼬부라지고 흰 수염이 성성한 노인은 더없이 위대한 존재였다.

늙은 엘프가 우리를 하나씩 바라보며 물었다.

“결계를 한눈에 파해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네.”

“두 번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카리스웰.”

“두 번이라고?”

카리스웰은 의문을 표했다. 대답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내 이름은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우리는 구면이지. 긴 세월이 흘렀으나 현명한 그대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리스웰이 아니라도 모든 엘프가 레브노아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엘프가 신기한 것처럼 엘프들에게도 인간은 신기한 존재였다.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레브노아드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때보다 어려졌다.

“에스키아라의 후손을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는가. 너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가 아니다.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다. 내가 시답잖은 거짓말이나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 같은가?”

카리스웰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무엇이 네 존재를 증명한단 말인가?”

“이것으로 증명해 보임은 어떤가?”

나는 마정석을 꺼내어 마법을 보여주려 했다. 순간 신체 건강한 엘프 셋이 카리스웰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주위를 돌고 있던 작은 정령들도 빠르게 점멸하며 경계를 표했다.

“그만.”

카리스웰은 나와 다른 엘프들의 행동을 한꺼번에 멈추게 했다.

“인간이여, 네가 결계를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위대한 마법사임을 알고 있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도 위대한 마법사였다. 그대와 똑같은 오만한 인간이었고 그대와 똑같은 얼굴과 녹색 눈동자를 가졌다. 허나 그것으로는 너를 증명할 수는 없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는, 죽었다.”

카리스웰은 지팡이를 들어 가볍게 바닥을 찍었다. 땅 하고 크지도 않은 소리가 인상적으로 귀에 박혀들어 왔다. 결계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죽은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위대한 카리스웰, 네가 하는 말은 옳다. 실제로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히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다! 그것은 진실이므로 너희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 걸음 걸어나가 팔을 내밀었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증표를 다오! 증표는 무엇보다도 특별하고 고결한 것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째서 증표를 준비해야 하지?”

“진실을 증명하는 일인데 거리낄 것이 있는가?”

엘프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리스웰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을의 모든 현명한 엘프와 네가 제의한 문제를 상의해 보겠다. 마음이 닿는 곳에서 자유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거라.”

카리스웰은 조용히 말한 다음 돌아섰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다가왔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네 요구는 너무 억지가 아닌가? 저들은 어째서 그런 억지를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해 보겠다고 말하는 거지?”

나는 피식 웃고 크리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크리스티안, 그들을 인간과 똑같이 여기지 마라.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엘프다.”

내 말에 크리스티안은 새삼 엘프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는 경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 엘프에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고 엘프는 인간과 사고방식이 조금 다르거든. 같은 인간에겐 씨알도 안 먹힐 소리지만 엘프니까 한번 밀어붙여 보는 거지. 잘 되어서 증표를 얻으면 좋은 거고.”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게다가 나의 추측인데, 엘프들도 우리가 인간이니까 사고방식이 달라서 저러나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니까 아주 신뢰는 말고.”

크리스티안은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을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이 진실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민감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엘프의 전신(前身)이라고 믿어지는 에스키아라는 녹음과 진실의 신이니까.”

“만약 일이 뜻대로 안 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신기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 아무거나 하나를 달라고 해서 나를 증명할 표식으로 삼을 생각이다.”

“……그런 걸로 무슨 증명이 될지?”

나는 훌쩍 뛰어서 나무뿌리를 밟았다. 워낙 나무가 거대해서 뿌리도 굉장히 굵었다. 뿌리 위를 천천히 거닐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상 펴.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엘프들에겐 잡다한 생활 물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로 여겨지는 일도 있다. 보물을 손에 넣는 자는 예로부터 특별한 정당성을 부여받곤 했다. 전설의 보검을 손에 넣은 자가 왕이 되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많지 않더냐.”

“이미 엘프의 물건을 전설의 보물이라고 선전해서 활용해 본 적이 있군.”

크리스티안이 제법 날카롭게 지적을 해왔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술에 검지를 댔다.

“요는 진실만 드러나지 않으면 되는 거다. 극적으로 엘프의 마을을 발견했는데 물론 신기한 물건만 얻고 끝내진 않았지. 나는 이곳에서 정령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스트라스의 마학은 일보 거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것은 스트라스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 중의 극비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너는 입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티안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너는 여전히 스트라스인이로군. 그래도 10년 넘게 엘 파셔에서 살지 않았나?”

“하.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건데 누구 좋으라고 공짜로 가르쳐 줘. 네가 나라면 이걸 지스카르에게 가르쳐 주겠느냐? 고문을 당해 뼈다귀가 아득거리는 느낌을 아직 기억해!”

“……국적 문제보다도 폐하가 문제인 건가.”

그때 낯익은 얼굴이 불쑥 눈앞을 가렸다. 레브노아드로 첫 방문을 했을 때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엘프 소녀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보고 있었다. 소녀는 뱅그르르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소녀는 이십여 년 전과 똑같은 앳된 얼굴을 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레브노아드를 알아. 너는 가짜야.”

“안타깝지만 나는 진짜 레브노아드다. 네리네.”

나는 옛 기억에서 소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자 네리네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레브노아드에게 내 이름을 전해 들은 게 틀림없어. 너 같은 땅꼬마가 그 멋있는 인간과 동일 인물일 수가 없어.”

“네리네. 바깥 세계의 평범한 인간들은 거의 다 나와 키가 비슷한데 그들도 전부 땅꼬마인 거냐?”

“그런 건 내 알 바 아닌걸! 멋진 인간 남자는 원래 이만큼은 키가 커야 하는 법이야, 누가 뭐라든 너는 땅꼬마다. 내일 하늘이 녹색이 되어도 너는 땅꼬마야. 모신의 세기가 끝나는 날에도 너는 땅꼬마! 영원히 땅꼬마!”

“…….”

어린애 억지이긴 한데 자꾸 듣고 있자니 이거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그러잖아도 레브노아드 때와 비교해 키나 체격이 많이 작아서 내심 신경 쓰였는데 말이다. 성장기도 사실상 끝물에 들어갔는데 왜 이렇게 키가 안 크는 것인지.

그때 네리네를 많이 닮은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네리네를 번쩍 들어 품에 단단히 안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 딸 네리네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쳤군요.”

떨떠름한 기분이 표정으로 조금 드러났나 보다. 그녀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기에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니다. 그냥 애가 장난을 친 것뿐이고.”

“아, 모르셨군요. 엘프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순간 눈앞에 번개가 번쩍 치고 지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 모신의 세기가 끝나는 날에도 땅꼬마!!

“설마 앞으로는 키가 안 클 거라는 말이오?”

흥분상태인 나 대신 크리스티안이 급히 물었다.

“그럴 리가요. 드래곤도 아니고, 엘프의 언령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가 잘 안 클 거라는 뜻이지 않소?”

“영양가 많은 음식을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면 틀림없이 언령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힘내세요.”

엘프 여인이 참 예쁜 얼굴로 매우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나는 표정을 구기지 않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화가 많이 나셨군요. 제가 사죄의 의미로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니, 마을에서 며칠 보내실 동안 아예 저희 집에서 머무시겠습니까?”

크리스티안이 눈빛으로 내 의중을 묻고 있었다. 이제 와서 언령이라는 걸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초대를 받아들였다.

* * *

엘프 마을을 방문하고 열흘이 흘렀다. 어쩌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장난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나는 그간 보상 차원에서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네리네의 어머니가 매우 싱싱해 보이는 사과를 한 바구니 두고 갔다. 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크리스티안에게도 하나 던져 준 다음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크리스티안! 나랑 놀아요!”

네리네가 평소처럼 달려 나와서 크리스티안의 팔에 매달렸다. 나는 크리스티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지 말고 네리네와 놀아주거라.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유리문 밖으로 내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느냐?”

집에서 머무는 열흘간 네리네는 크리스티안에게 바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저 엘프 소녀는 건장한 인간 청년이라면 무조건 다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자, 크리스티안. 이 지도 보이죠? 모신이 창조한 세 번째 대지는 이제 인간의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결계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그곳은 엘프를 위한 성지지요. 지금은 불안한 모양새로 겹쳐져 있지만 언젠가 엘프의 성지와 인간의 땅은 완전히 분리될 거예요.”

“결국 한곳에 섞여 살다가 각자의 영토로 떠나가는 것이군. 지금은 과도기 단계이고.”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드워프, 페어리도 같은 상황이고요. 저는 한 번도 못 봤지만 카리스웰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그건 무식한 엘 파셔 놈들만 모르지 스트라스의 신학자들은 벌써 다 아는 이야기다.

나는 거실 끝에 설치된 유리문을 열고 제법 세련된 형태로 만들어진 테라스로 나왔다. 네리네의 집은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 정도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는지 새삼 감탄사가 나왔다. 그때 거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간은 정말 레브노아드인가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거라. 그는 ‘레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흥.”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레브노아드 황태자다.”

나는 통짜 유리문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볕이 따뜻했다. 눈을 감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당신도 레브노아드의 기사로군요?”

“음?”

“예전에 레브노아드는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을 거느리고 왔어요. 그들이 전부 레브노아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기사래요. 하나같이 멋지고 당당한 인간들뿐이더라고요. 그때 정말 좋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당신 한 사람밖에 안 왔어요?”

“…….”

그게 아니라 저놈도 내 기사가 아니다. 귀여운 네리네.

네리네가 작은 새처럼 조잘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박자 맞추듯 여기저기서 파스스 파스스 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들이 사는 땅은 여름도 겨울도 없고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했다. 이것을 영원히 아름답다고 느낄까, 아니면 똑같은 풍경만 바라보면서 언젠가 지겹다고 생각하게 될까.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크리스티안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네리네는 어디론가 놀러 나간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은 쓸데없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

“아, 지난번에 채찍질 당한 상처. 치료해 주겠다고 말해놓고 깜빡했군. 거기 웃통을 벗고 앉아라.”

문득 생각이 나서 소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상처는 벌써 다 아물었다.”

“하지만 흉터가 남았을 것 아니냐. 없애줄 테니 앉아.”

“그럴 필요 없다.”

“앉아. 그런 게 남으면 내가 찜찜하다.”

크리스티안은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셔츠를 벗었다. 근육질의 매끈한 등에 보기 흉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나는 마정석을 꺼내 치유 마법을 시행했다. 희미한 빛이 닿을 때마다 흉터들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마정석의 울림만 빼면 모든 것이 조용했다. 크리스티안은 벌써 한참 전부터 말을 꺼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겨우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 나는…….”

나는 대뜸 크리스티안의 턱을 잡고 뒤로 당겼다. 놀란 크리스티안의 얼굴이 아주 가까워졌다.

“네리네의 말을 듣더니 표정이 더욱 울적해졌군. 감히 나를 불쌍하게 보느냐? 네 행동이 오히려 나를 우습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과거와 달리 거느릴 가신이 없어 억울한 것이 아니다. 나는 참을성 있고 강인한 네가 마음에 들었고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는 이미 오래전에 지스카르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제 와서 내가 그것을 뒤집을 수는 없겠지.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알았느냐? 너는 더 이상 우울한 표정을 지을 것 없고 내게 이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데 우쭐하면 되는 거야.”

나는 실소를 지으며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놓았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항상 나를 만지는 것을 어려워했으나 이번엔 작은 망설임조차 없었다. 크리스티안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나를 네 것으로 만들고 싶다라?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러지?”

“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런 말로 나를 도발하는 건가?”

언제 그렇게 망설였나 싶을 정도로 크리스티안은 똑바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나에게 사사로운 마음을 품었다는 건 안다.”

이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불만을 이참에 전부 토로했다.

“나는 솔직히 이런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지스카르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너까지 이러는 것이냐. 나는 남자인데 다들 상관이 없는 거냐?”

“네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나는 아무 상관없다. 늙어빠진 노인이라 해도, 솜털도 못 벗은 어린아이라 해도, 아예 인간이 아니었다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티안……. 어느 정도는 상관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난감하게 인상을 쓰며 크리스티안을 뒤로 밀었다. 이 인간이 조용하고 융통성 없던 그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긴 크리스티안은 전혀 안 그렇게 보이지만 은근히 막가는 경향이 있었다. 뒷감당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데리고 도망 나온 것만 해도 그렇다.

서른이 넘어도 자기가 싫으면 결혼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던 식이었지. 귀족가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 특히 후계자를 생산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워낙에 다방면으로 잘난 인간이라 울펜가모트에서도 당분간은 지켜보자는 식이었을 게 틀림없다.

“어차피 너는 지스카르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잖나?”

크리스티안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서 나는 정확히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배신하겠다고 한다면?”

“뭐?”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리를 했다.

“배신하겠다면 너는?”

“잠깐…….”

“기사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 몸을 받아줄 것인가?”

더 이상은 들어주기 힘들다. 나는 사납게 인상을 찡그리며 당장 어깨 위에 올린 크리스티안의 손을 떼어냈다.

“그만 멈춰! 이런 건 지스카르 한 놈만으로도 넘칠 정도니까.”

“…….”

가만히 있기 불편할 정도로 긴 침묵이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완전히 물러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네 말은 항상 옳다. 나는 절대로 폐하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니 몇 날 며칠 동안 수많은 가능성을 꼽아가며 생각해 본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지.”

크리스티안은 가만히 아무것도 없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처럼 눈을 내리깔고 이미 긴 시간 동안 고민해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스스로 말한 대로 크리스티안이 황제에게 충성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한, 의미도 없고 전혀 해결점이 없는 문제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로선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네리네가 현관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면서 외쳤다.

“카리스웰 님께서 두 분을 부르세요!”

나는 바로 일어섰다. 크리스티안도 사적인 일은 접고 바로 움직였다.

네리네를 따라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마을 입구 즈음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엘프들이 나와 있었다. 내가 요구했던 것에 대한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카리스웰에게 물었다.

“어찌하기로 결정하였는가. 위대한 카리스웰.”

“열 번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수없이 지혜를 나누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는 진실을 헤아릴 만한 능력이 없다.”

실망은 하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에 들어 있던 결과였다. 그때 카리스웰이 지팡이를 들었다.

“다음 달 마지막 날에 크롬 산맥 여섯 번째 봉우리에 올라라. 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증표를 얻을 것이다.”

땅!

지팡이가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정말 인상적이다. 나는 하얗게 웃었다. 살갗에 가볍게 소름이 일었다. 엘프는 결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에스키아라의 율령을 어긴 자는 혀를 자르고 눈을 뽑아 평생을 살게 하였다. 카리스웰이 말한 그곳에 틀림없이 소름 끼치도록 엄청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프의 대지를 딛고 나는 돌아섰다.

“가자, 크리스티안.”

* * *

엠버 산맥을 벗어나 실로 오랜만에 평지에 접어들었다. 길을 찾고 있을 때 낯익은 검은 복면인들을 만났다.

“또 네놈들이냐?”

“폐하의 마지막 전언이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직인이 찍힌 밀봉된 편지를 건넸다. 그 자리에서 찢어버릴 생각도 했으나 마지막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단 받아 들었다. 복면인들은 즉시 그곳에서 물러났다.

적당히 장소를 이동해서 나무 그늘에 등을 기대고 섰다. 크리스티안은 황제의 전언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할 텐데도 내가 직접 편지를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밀봉을 제거하고 편지를 열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략하게 줄이자면 이랬다.

내전을 종식할 방법이 있다. 내가 도와준다면 빠르게 혼란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힘을 빌려달라. 만약 요구를 거부한다면 정확히 보름 후에 나의 양친과 빈첸시오 자작령의 모든 노예를 처형할 것이다.

이놈이 대놓고 부모님을 인질을 내세우고 협박질이다. 크리스티안도 곁에서 함께 내용을 확인했다.

나는 한참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한 손에 구겼다.

“이 자식은 같은 말을 얼마나 할 생각인지 모르겠군. 죽이겠다는 말만 몇 번째야? 언제쯤 진짜로 죽일 심산이신지?”

침묵하던 크리스티안이 처음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양친은 아직도 무사히 살아 계시다. 폐하께서는 항상 말씀만 하시고 실행에 옮기지 않으셨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분은 아마 진심이실 것이다. 그 뜻을 밝히려고 일부러 마지막임을 강조하고 서신을 보내셨겠지.”

나는 침묵했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마지막 경고라……. 일리가 있군.”

“너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여전히 양친을 걱정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넌 부모님이 화를 입을까 봐 오열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게 네 진심이 아닌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해를 가리던 구름이 지나가며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주변의 공기도 따뜻하게 온기를 머금었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따뜻함을 만끽했다.

“지스카르의 요구를 거절한다. 보름까지 돌아오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편지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선언했다. 크리스티안은 몸을 낮추고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을 거란 것을 그도 일찌감치 예상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지스카르에게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해 왔고, 이제 와서 그걸 바꿀 만큼 만만한 성격이 아니다.

크리스티안이 내 목덜미를 응시했다. 그 부근에 지스카르가 남긴 낙인이 있었다. 노예상회에서 벗어나는 즉시 치유 마법으로 없애버렸지만 당시의 굴욕이 잊힌 것은 아니다.

“폐하께서 네게 많은 잘못을 했다. 그래서 그분을 증오하고 있는가?”

크리스티안이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목을 주물렀다. 목의 낙인뿐만 아니라 온몸에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지스카르 그놈이 자기 입으로 심문을 명한 주제에 끝까지 그 뜻을 관철하지도 못하고 거의 이성을 잃는 지경까지 간 것을 안다. 심지어 자기 손에 자해까지 했다.

“증오라는 말은 너무 가볍지 않은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나는 고문을 당해 죽어가는데 자기는 왼손에 생채기 하나 남기고 끝낼 셈이었나 보지? 눈에 띄기만 하면 그놈의 손부터 완전히 아작 내주겠어.”

“…….”

크리스티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내 태도가 다소 가벼워 어찌 해석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는 모양이었다.

“네게 무슨 생각이 있겠지.”

크리스티안은 결국 내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할 일이 많은 몸이다. 다음 달 말에 엘프들이 알려준 대로 크롬 산맥에도 올라야 하고…….”

“그건 아직 두 달이나 남지 않았나. 먼저 폐하를 뵙고 나서 가도 시간은 충분하다.”

“네 녀석 포기한 거 아니었느냐?”

나는 크리스티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전 동안 나무 그늘에서 조금 더 쉬다가 짐을 챙겨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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