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검의 달인. 오라의 극의를 깨우친 자,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는 시대마다 많아도 다섯 명을 넘는 일이 없었다. 한 번 소드 마스터가 출현하면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그 나라의 국격이 껑충 뛰기도 했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소드 마스터인 지스카르 황태자가 마침내 엘 파셔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냥 소드 마스터가 출현한 것도 아니고, 다름 아닌 현 황제가 소드 마스터였다.
엘 파셔 백성 중에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엘 파셔 황제 본인도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자신의 무위를 드러내기 위해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 총 네 번, 직접 검을 들고 마물 사냥에 나섰다. 장소는 행사 때마다 적당한 마물 서식지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이 마물 사냥은 황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정례 행사였다. 또한 경쟁국인 스트라스를 상대로 자국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십 년 이상 지나면 형식적인 행사가 될 만도 한데…….”
나는 혼잣말을 하며 기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소수정예의 기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였고 후방에서는 마법사까지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 중이었다. 여가로 즐기는 토끼 사냥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나무랄 데 없는 마물 사냥이 분명했다.
꾸웩!! 꾸웩!
기사들이 오크 부족을 소탕하기 위해 한 곳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때 좌측 포위망이 뚫리면서 분노한 오크가 도끼를 휘두르며 튀어나왔다. 숫자는 스무 마리 정도. 오크는 무기를 사용할 만큼 지능이 높고 여간한 성인 남자는 상대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졌다.
스릉.
친위기사들은 뒤로 물러나고 지스카르만 홀로 검을 뽑았다. 엘 파셔 황가에 전해지는 보검이 매끈한 은색 나신을 드러냈다.
나는 눈을 빛내고 전방의 상황을 더욱 관심 있게 주시했다. 지스카르가 직접 나섰다. 이건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그때 한 걸음 내딛는가 싶었는데 지스카르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틀림없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딱 한 번의 도약으로 무려 5미터의 거리를 넘었고 오크의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여기 있었는데 어느새 저곳이었다. 벼락같은 폭발력은 도저히 같은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투콱!
번쩍하는 흰 빛과 그 둔중한 소리는 동시에 일어났다. 지스카르가 백색으로 불타오르는 오라 소드로 선두에 있던 오크의 머리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오크의 머리가 어마한 힘에 휩쓸려 높이 하늘 위로 튕겨 올랐다.
고위기사로 분류되는 소수의 기사들도 오라 소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흔히 보는 일반적인 오라 소드가 검신 위에 얇게 벼리듯 오라를 덧씌우는 데서 끝나는 데 비해 지스카르가 뽑아 든 검은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처럼 오라가 커다랗게 일렁거렸다. 막대한 양으로 전신을 무장하여 신체 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했다. 오라의 총량이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가 되는 순간 한 차원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하더니.
푸화악.
시뻘건 핏물이 사방에 뿜어져 나왔다.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지스카르는 오크 무리 속으로 들어가 검을 찔렀다. 오크는 강철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강철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오크의 가슴 한가운데 검이 틀어박혔다. 그 즉시 검을 옆으로 잡아 빼며, 지스카르는 다시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우지직. 쩌억.
검이 뽑혀나갈 때 가슴부터 어깨까지 박살이 난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커다랗게 포효했고, 거의 동시에 또 한 마리의 오크는 허리가 반 토막 났다.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힘. 게다가 어찌나 빠른지 오크는 항상 검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쩌렁쩌렁 비명을 질렀다.
우적.
쓰러진 오크를 짓밟고 지나며 지스카르는 베고 또 베었다. 항상 일검에 하나씩. 얕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목이 날아가고 몸뚱이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가 지나간 뒤 오크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꾸웨엑! 꾸웨엑!
압도적이라는 수식어조차도 부족했다. 순식간에 스무 마리 오크 중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진격밖에 모르는 오크들이 지스카르 한 사람을 상대로 퍼렇게 겁을 먹었다. 오크들은 방향을 선회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방금 필사적으로 도망 나온 방향을 향해서.
지스카르는 뒤를 쫓지 않았다. 오크들이 충분히 한곳에 모인 것으로 보이자 검으로 목표 지역을 가리켰다.
“일제 폭격!”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읊었다.
우우웅.
우웅!!
마법사들이 가진 수십 개의 마정석이 동시에 떨리며 공명음을 냈다. 마치 수십 개의 나팔을 동시에 부는 것과 비슷한 울림이었다.
콰과과과광.
콰앙!!
수십 개의 커다란 마력 덩어리가 오크 무리를 덮쳤다. 폭격에 휘말려 가까이에 있던 아름드리나무조차 통째로 부러지고 으스러졌다. 오크들은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났고 시체 조각을 남기지 못한 놈도 있었다.
공격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개체는 하나도 없었다. 이것으로 이 일대의 마물 퇴치는 사실상 완료되었다.
“흐음, 훌륭하군.”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감탄했다. 또한 소드 마스터의 검을 처음으로 직접 보았는데, 과연 주변에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흥! 노예 주제에 평가질은!”
나와 함께 안전한 막사에서 대기 중이던 시라크가 눈을 흘기면서 한마디 했다. 시라크도 이번에 마물 사냥에 합류한 상태였다.
오랜 세월 행해진 마물 사냥은 엘 파셔에서 제법 중요한 행사가 되어 있었다. 마물 사냥을 주관하는 것은 엘 파셔의 황제이며, 장차 엘 파셔의 황제가 될 시라크도 일 년 중 두어 번은 이 행사에 참여했다.
황제가 황태자의 폐위를 생각하고 있는 지금 시라크가 마물 사냥에 따라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험을 염려해 마물 사냥에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시라크는 정말로 황태자 자격이 없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아마도 마크시 공작은 이런 상황일수록 시라크가 더욱 마물 사냥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대신 그는 시라크의 안위를 위해 근위기사와 마법사 중 반수를 자기 세력의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
지스카르는 딱히 그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사리던 황후 쪽 인력을 사냥에 써먹을 수 있게 되어 만족했을 것이다.
나는 쓸데없이 이죽대는 시라크를 잠시 보다가 그냥 고개를 돌렸다. 전투가 대충 마무리되며 사람들이 막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를 불렀다.
“레이. 잠깐 이쪽으로 와보게.”
마법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럼포드 백작이었다. 그는 조금 능글맞게 웃더니 갑자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눈치 없기는! 이걸 딱 들고 얼른 폐하께 가보게. 자네가 직접 손수건을 가져다드리면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실 걸세.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드려도 좋고!”
“…….”
나는 그 자리에 말없이 서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럼포드 백작이 악의가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나는 대외적으로 황제의 남첩이니까. 그는 손수건을 건네주고 애교도 한번 부리면 황제의 총애가 더욱 대단해질 것이라며 나를 응원해 주었다.
“쓸데없는 참견이오! 럼포드 백작!”
나도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크리스티안이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는 나의 호위 겸 감시 역으로 바로 지척에 대기 중이었다.
크리스티안의 노성에 럼포드 백작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덤으로 나도 약간 놀랐다. 던필이면 몰라도 크리스티안이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것은 항상 크리스티안이었던가?
“럼포드 백작. 레이는 그런 짓이나 시키자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어느새 돌아온 지스카르가 딱딱하게 말했다. 럼포드 백작은 크리스티안과 지스카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뒤따라온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이유는 모르지만 경직된 분위기에 눈치를 보았다.
분위기가 잠깐 이상하게 흘렀지만 어쨌든 회의가 시작되었다. 최종 보고가 쏟아졌다.
“폐하, 총 다섯 개의 부락을 발견했고 전부 불에 태워 완전히 소각시켰습니다.”
“오크 부족이 약탈품과 보물을 숨겨둔 땅굴을 발견했습니다. 현재 발굴 및 확인 작업 중입니다.”
지스카르는 보고를 모두 들은 다음 명령을 내렸다.
“해가 지기 전까지 살아남은 놈이 없는지 샅샅이 수색하라. 특히 수컷은 한 마리도 남겨놓아서는 안 된다. 소탕이 끝나면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다시 이동한다.”
“예!”
나는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크의 사체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역시 개체 수가 조금 많다. 이 정도 부락이 다섯 개나 된다는 사실도 걸렸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다지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좌중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닌 척하지만 다들 황제의 남첩에게 관심이 매우 많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방금 퇴치한 오크 부족은 제법 번성한 축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면 아시겠지만 이 주변은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이 아닙니다.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어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인간을 약탈해서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번 고려해 봄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황후파에 줄을 댄 근위기사와 마법사들이 바로 얼굴에 조소를 띠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충실한 신하들은 애매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아끼는 애첩인 내게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자기 본분을 잊고 군사회의에 끼어드는 것까지 좋게 봐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제파 기사 중 한 명이 최대한 둥글게 말했다.
“충고는 고맙다만 이 정도 규모의 부족은 그렇게 번성한 편이라고 볼 수 없다.”
“실제로 부족을 구성하는 개체 수 자체는 일반 수준입니다. 그러나 전사 계급의 수도 많고, 활동이 유난히 왕성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기사는 그저 웃었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다투기보다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겠다는 의사였다. 다른 이들도 황제가 총애하는 애첩과 말씨름을 원하지 않았다. 이건 대놓고 욕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안 좋다.
어쩔 수 없어서 다소 도발적인 방식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저는 이 지역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사전조사를 엉터리로 했다 이 말이냐!”
체구가 큰 기사 한 명이 벌컥 소리 질렀다. 남첩의 참견에 제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날 만도 했다.
지스카르가 손을 들었다. 뒤늦게 황제의 애첩에게 너무 큰소리를 냈다는 걸 깨달은 덩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지스카르는 가만히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네가 말한 건은 이미 염두에 두고 기사 몇을 보내놓은 상태다. 근방에 특이점은 없는지 살피고 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괜한 참견 말라는 소리에 나는 순순히 수긍해 주었다. 하긴 마물 사냥을 십 년 넘게 했다니 적어도 이 방면에선 관해선 나보다 관록이 있겠지.
“폐, 폐하?”
사전조사를 했다던 기사는 시퍼렇게 질렸다. 무려 황제를 수행하면서 사전에 행한 조사인데 그것을 엉터리로 했다는 식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지스카르는 그의 놀람을 일축했다.
“사전조사가 아무리 철저해도 예측 못 한 상황은 생기기 마련이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예…….”
기사는 겨우 안도해서 쭈그러들었다.
약간의 소란 끝에 군사회의가 끝났다. 아까 괜한 발언을 한 탓에 사람들이 한 번씩 내게 눈길을 주다가 떠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따가운 시선이 하나 있었다. 시라크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어리석은 꼬마라는 감정 외엔 별로 와닿지 않았다. 나는 시라크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웠다.
* * *
다음 날도 마물 퇴치를 위한 일정이 이어졌다. 이른 새벽 해가 뜨자마자 행군을 시작해서 오후가 되었을 때 또 다른 마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오우거와 만티코어. 상급으로 분류되는 굉장히 강한 마물이었다. 하지만 개체 수는 스무 마리 이하로 판명되었다. 소드 마스터가 이끄는 군대임을 감안하면 상급 몬스터 십여 마리보다는 수백씩 떼로 몰려다니는 오크가 훨씬 더 피곤한 상대였다.
행동지침을 정한 후 기사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한숨을 토하며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지스카르가 이쪽을 보았다.
“피곤한가?”
“아주 피곤합니다.”
나는 즉각 반응하며 한쪽 발을 들었다. 족쇄 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 돌부리 등이 장애물이 되어 자꾸 사슬에 걸렸다. 지금까지 걸려 넘어질 뻔한 게 몇 번이던지. 그냥 산을 타는 것만 해도 피곤한데 족쇄까지 차고 발밑에 온 신경을 다 쏟으며 걸으니 힘이 수배로 들었다.
“두고 가려니 신경이 쓰였는데 마침 잘 되었군. 이쯤에서 얌전히 쉬면서 기다려라.”
그래, 힘 빠져서 어디 도망도 못 가겠다. 나는 아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시라크도 호위들과 함께 내 근처에 남았다. 지스카르에게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시라크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3킬로 전방에서 강력한 만티코어 여왕이 출현했단 소식이 들려왔다. 지스카르는 지원을 위해서 잠시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근처에서는 오우거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워워!
키만 5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거대 오우거가 산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괴성을 질렀다. 놈은 제 몸집에 걸맞게 나무기둥을 몽둥이 삼아 휘둘러댔다. 워낙 덩치 자체가 커서 접근조차 힘들고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견제해서 몰아넣고 마법사가 멀리서 공격 주문으로 타격을 넣는 방식으로 오우거의 수는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오우거가 눈이 시뻘게져서 사방으로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놈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선 잠깐만 방심해도 큰 부상자가 나올 수 있다.
“흐음.”
턱을 괴고 콧소리를 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꽤 흥미진진하게 눈앞의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 조금 위험해 보이지만 죽지만 않으면 대기 중인 마법사와 신관이 금방 상처를 치유해 줄 것이다. 엘 파셔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도 하고 싶고.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시라크 전하! 그렇게 앞으로 나가시면 위험합니다!!”
“상관없잖아. 조금 가까이서 보는 것 정도는! 그리고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그때 시라크가 검을 빼 들고 오우거를 향해 걸어갔다. 호위의 애가 타는 만류도 듣지 않고 말이다.
오우거를 상대하던 기사 중 한 명이 시라크를 힐끗 보며 주의를 조금 흩뜨렸다. 오우거는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몽둥이로 기사를 후려갈겨 말 그대로 날려버린 다음 포위망을 뚫고 뛰쳐나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즉사했음이 틀림없었다.
“아!”
나는 몸을 일으켰다.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는 어느새 끝나버렸다. 오우거는 곧장 시라크를 향해 달려갔고 거대한 손으로 그 몸을 낚아챘다.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시라크를 구해볼 생각으로 한 발자국 나갔다. 하지만 철컥하고 족쇄가 발목을 붙잡았다.
“레이!”
크리스티안도 내 어깨를 붙잡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오우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내가 나서봤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외려 내 목숨만 위태로워질 것이다.
“…….”
발목을 잡았던 족쇄를 보았다. 족쇄에 발이 걸리지 않았더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멈추어 섰을 것이다. 나는 시라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질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시라크 전하께서 붙잡히셨다!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
쿠워어어어!!
“으악! 마법사!!”
기사들이 오우거를 막기 위해서 황급히 움직였지만 쉽지 않았다. 오우거는 마구 몽둥이를 휘두르며 무작정 앞만 보고 돌진했다. 그 행동은 단순했으나 상상 이상의 강력한 돌파력을 선보였다. 어느새 오우거는 시라크를 손에 거머쥔 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
지스카르는 만티코어를 모두 척살한 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지스카르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폭주하는 오우거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막았을까?
분위기는 미묘했다. 시라크 황태자가 몬스터에게 붙잡혀갔다. 죽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시라크를 구해야 한다고 인정에 호소하는 이는 황후파에 속하는 기사들뿐이었다. 시라크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황후 일파는 자연스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들의 권세는 시라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해가 지기 전까지 오우거를 전부 소탕해야 한다. 인력을 나눌 여유는 없다.”
지스카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결정이었다.
“이럴 수가. 그래도 폐하의 핏줄이 아닙니까!! 어떻게 시라크 전하께서 바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뻔히 구경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개인적으로 시라크는 꽤 아꼈는지 나이 지긋한 호위기사가 두려운 황제의 안전에서 피를 토할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에 황제의 친위기사도 언성을 높였다.
“어디서 감히 그 같은 망발을 지껄이시오! 시라크 황자는 이미 죽었소!”
“죽다니!! 새끼를 잃은 암컷 오우거는 다른 종족의 아이를 대역으로 잡아가는 습성이 있소. 이번에도 그 경우임이 틀림없소! 지금 당장 가면 그분을 구할 수 있단 말이오!”
“흥. 꿈보다 해몽이 좋군! 이게 전부 호위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겁도 없이 오우거에게 달려든 결과지. 그 생각 없는 행동 때문에 아까운 근위기사만 목숨을 잃었지 뭔가!”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지껄여보시지!!”
시라크의 호위기사와 황제파 기사가 핏대를 올리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진흙탕 속에서 시라크의 최후는 확정되고 있었다.
“그만.”
지스카르가 낮게 한마디 했다. 지스카르의 모든 행동은 일부러 과장하지 않아도 기묘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고 말싸움을 하던 자들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주변의 모든 웅성거림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지스카르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오우거를 사냥한다. 하나씩 오우거의 둥지를 없애다 보면 시라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 하지만 그런 방법은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지금 당장 그분을 찾으러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렇게 흔적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지스카르가 반발하는 기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을 듯 냉엄한 시선에 소리를 지르던 시라크의 기사는 더 이상 뻥끗도 못 하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무작정 흔적을 쫓아 깊은 곳까지 들어가다가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계획대로 하나씩 오우거 둥지를 칠 것이니 재정비를 하라. 시간은 10분 주겠다.”
더 이상의 이견은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아니 되었다. 사람들은 명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시를 내린 후 지스카르는 내게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느냐?”
“전혀.”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도 지스카르는 굳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직접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아까부터 속을 헤아리기 힘든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쩐지 몇 마디 해주고 싶어졌다.
“정이 많은 자는 좋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현명한 군주는 아니다. 입맛이 쓰겠지만 너는 적절한 선택을 했다.”
“물론이다.”
지스카르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검에 묻은 피를 손수 닦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구석에서 시라크의 기사들이 아예 통곡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황제의 측근 기사들은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었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에서 황제의 결정이 조금 잔혹하다고 수군거리는 자도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바로 나 자신조차도.
나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만약 시라크를 구하고 싶은 것이라면…….”
지스카르는 내 쪽을 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시라크를 구하고 싶은 건 네가 아닌가?”
“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시라크를 구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라.”
지스카르는 무표정을 깨고 인상을 썼다.
“너답지 않게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군. 짐은 시라크를 잘라내야 할 싹이라고 말했다. 벌써 잊었느냐?”
“시라크는 언제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존재다. 굳이 지금 마물의 소굴에 던져 놓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더욱 가당치 않다. 시라크는 어차피 죽을 것이다. 만약 짐이 지금 시라크를 구해오길 원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고 한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지?”
“하지만 구하고 싶을 것이다. 값싼 연민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 모든 하찮은 감정으로 인해서.”
레브노아드가 자기 손으로 죽인 형제들에게 시시한 동정심을 품었던 것처럼, 지스카르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줄 알면서 시라크를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정말로 쓸데없지만, 인간인 탓에 때때로 하찮은 감정을 충족시켜야만 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다시 엄격해져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반드시 행해야 할 시기가 왔을 때, 그 어떤 감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틀림없이 행하는 것이다.”
잠시 강하게 바람이 불었다. 땀에 젖어 엉망이던 머리가 더 흉하게 흐트러졌다.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크게 뒤로 쓸어 넘겼다. 이마가 드러나자 그 위에 키스했다.
방심하는 사이 키스를 당하고 흠칫했다. 주위 시선이 굉장히 따갑다.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이쪽을 열렬하게 훔쳐보고 있었다.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 억지로 웃는 낯을 하고 지스카르의 가슴팍을 꽉 눌러 지그시 뒤로 밀어냈다. 지스카르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약간 달아오른 내 뺨을 차가운 손등으로 쓸어 올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지스카르가 지휘관들을 불러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내 지휘관을 포함한 근처의 모든 기사가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데, 폐하께서 네 말 몇 마디에 결정을 뒤집으셨군.”
던필이 처음으로 그 얼굴에서 장난기를 없애고 말했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너는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모든 것이 범인과는 다르고 특별나서,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계속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군.”
그가 괴짜의 가면을 벗고 황제의 신하로서 깊은 염려를 드러냈다. 그는 내가 보여준 특이하고 과한 행보에 항상 웃으면서 반응했지만 더 이상은 웃지 않았다.
친위기사 중에 바로 지척에 있었던 던필과 크리스티안만이 방금 했던 대화를 들었다. 크리스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나를 응시했다.
시라크를 찾기 위한 구출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오우거가 남긴 흔적을 따라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무엇보다도 속도가 중요했다. 큰맘 먹고 시라크를 구하기로 결정했는데 정작 가보니 죽어 있더라는 결말이면 정말 허무할 것이다.
수색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다른 마물의 습격이 없었던 것이 가장 유효했고, 시라크를 잡아간 오우거의 둥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물길이 지나는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막다른 곳에 얕은 토굴이 나타났다. 눈에 익은 암컷 오우거가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수컷 오우거 한 마리도 그곳에 있었다.
“시라크 전하시다!”
시라크의 호위기사가 기뻐하며 외쳤다. 토굴 안에 짚이 잔뜩 깔려 있었는데 시라크는 그곳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특별한 외상을 보이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검을 꺼내 들고 직접 나설 준비를 했다. 구출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좀 더 뒤로 물러나서 안전한 곳에서 대기해라.”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시라크에게 사달이 났기에 지스카르는 새삼 내게도 더욱 신경을 썼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을 포함해 호위 역할을 맡은 친위기사가 다섯이나 있는 상황에서 그런 걱정은 아주 쓸데없었다. 온갖 마물보다 내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족쇄만 풀어줘도 저의 안전이 한층 더 보장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급하게 산을 오르는데 진심으로 족쇄가 거치적거렸다. 사슬이 자꾸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혹사당한 발목이 굉장히 얼얼했다.
그때 던필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던필?”
“어허, 가만히 좀 있어. 폐하, 저희가 단단히 지키고 있겠습니다. 염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목숨을 걸고 지켜 보이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크리스티안도 진지하게 덧붙였다.
지스카르는 적어도 이 두 사람만큼은 크게 신뢰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오우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스카르가 손에 쥔 보검 위로 하얗게 빛무리가 맺혔다. 나는 불평을 멈추고 그 모습에 집중했다. 오라 소드였다.
십여 명의 기사들이 수컷 오우거를 토굴 바깥쪽으로 유인해 왔다. 다시 봐도 그 덩치가 어마 무시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자기보다 세 배는 거대한 놈을 상대로 틈을 노리는 전략을 쓰지 않고 정면 승부를 했다.
수컷 오우거가 자기 팔뚝 크기밖에 안 되는 인간을 향해 마구 몽둥이를 휘둘렀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의 뼈를 박살 내버리는 오우거의 공격을 지스카르는 여유 있게 피했다. 그리고 안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오우거의 허벅지를 찔렀다. 오라 소드가 허벅지를 꿰뚫고 깊숙하게 박혔다. 하지만 오우거는 대단히 강인한 마물이고 덩치 또한 거대해서 다리에 이쑤시개 같은 검이 하나 박힌다고 해서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기사가 오우거를 상대하기 힘든 이유였다.
지스카르는 개의치 않고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뿌드득.
뼈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스카르는 어마한 힘으로 검을 내리찍어 오우거의 허벅지를 베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수깡처럼 분질러버렸다. 다리가 부러진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우거의 자세가 낮아지자 지스카르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허리를 검으로 내려쳤다. 짧은 순간 그의 오라 소드가 더욱 휘황한 빛을 뿜었다.
오우거의 허리가 쩌억 쪼개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입을 벌렸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강철 기둥보다 단단하다고 알려진 두꺼운 오우거의 몸통이 한낱 날붙이에 의해서 반 토막이 나버렸다.
“……절대 저 검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안 되겠군.”
나는 턱을 만지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크오오오!!
수컷 오우거의 죽음을 목격한 암컷 오우거가 노성을 터뜨렸다. 암컷이 곧장 지스카르를 노리고 몽둥이를 높이 들어 내려쳤다. 그 공격은 당연히 목표물을 스치지도 못했다. 오우거가 헛방질을 하며 바닥을 치는 순간 지스카르가 이글거리는 오라 소드로 단칼에 오우거의 두꺼운 팔뚝을 잘라버렸다.
캬아아아악!!
팔을 잃은 암컷 오우거가 광분하여 사방으로 팔다리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곧장 본인을 노려주면 편한데 저렇게 광분을 하면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진다. 지스카르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공격해라. 가능하다면 머리에.”
그는 손짓을 해서 마법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인 럼포드 백작이 직접 마법을 사용했다. 3중 영창으로 강화된 화염 덩어리가 운 좋게도 정확하게 오우거의 머리에 명중했다. 폭발 이후 머리통과 어깻죽지의 반이 날아갔다.
모두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콰앙!!
그때 머리가 반만 남은 오우거가 아직 숨이 붙어서 사방으로 팔다리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날아갔으니 그 자리에서 절명해야 했는데 가끔 저렇게 불가해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마물들이 있었다. 피아 구분이 없어진 오우거가 주위에 닿는 것이 없자 바닥이나 근처 벼랑을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그 여파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쿠쿵!
쿠르르르.
근처 지반이 그리 단단하지 못했던지 위에서부터 굉음이 나며 작은 규모의 산사태가 시작됐다. 산 구릉이 무너지면서 바위, 흙더미가 우르르 쏟아졌다.
“물러서! 다들 물러서라!”
“폐하께서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재수 없게 위치가 나쁜 곳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모래 더미에 깔려버리기도 했다. 나는 충분히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소동에 휘말리진 않았다.
내 주변으로도 흙모래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긴 했다. 몸을 낮춰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지스카르와 시라크를 찾았다. 특히 시라크는 토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지스카르가 어느새 토굴에서 시라크를 꺼내와 허리에 끼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오우거는 계속 난동을 부렸으나 금세 발을 잘못 디뎌 제풀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쿠웅!
계곡 아래 바위 위로 오우거가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우거가 사라지자 약간의 산사태는 금방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흙더미가 쏟아지는 것이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서서히 진동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해. 뒤로 물러나라.”
크리스티안이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더 이상은 별일이 없을 것 같지만 여파가 약하게 남아 있긴 해서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크리스티안을 뒤따랐다.
그런데 흙이나 자갈 따위가 아직도 계속 굴러 내려오는 중이라 족쇄의 사슬이 같이 묻히면서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잠깐 멈춰서 있자니 부러진 나무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손을.”
크리스티안이 자기 손을 잡으라고 말했다.
“고맙군.”
나는 바로 그 손을 붙잡으려 했다. 그때 무언가가 다리를 와락 잡아당겼다. 순간의 일이었다.
“윽?”
크리스티안이 나를 붙잡기 위해 뻗은 손이 내 손가락 끝에 닿았다가 어느새 저만치나 멀어졌다.
“어엇?”
나는 비명보다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족쇄 사슬에 나무뿌리라도 걸려 있었나 보다. 부러진 나무가 계곡 아래로 떨어질 때 나도 부록처럼 끌려와 함께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계곡물이 아니라 바위 위에 머리를 처박고 말 것이다.
뭐야, 이런 식으로 죽는 거냐?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따위야!
“온!”
그때 누군가 마법 시동어를 절박하게 외쳤다. 아래서부터 바람이 크게 불어 추락하던 몸이 거꾸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다시 밑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으윽!!”
떨어지다가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까지 했다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마법사가 기지를 발휘해 계곡 아래에서 위쪽으로 부는 돌풍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중간에 한 번 퉁겨 올랐기 때문에 추락하는 가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게다가 방향도 조금 바뀌었다. 바로 아래쪽이 바위 더미가 아닌 계곡물이었다.
“레이!!”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지스카르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개자식아, 네놈이 족쇄를 채우지만 않았어도!
첨벙!!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게 더 급했다. 그런데 도무지 위아래를 분간할 수 없었다. 다리가 굉장히 무겁고 거치적거렸다. 계곡이라 물살도 거칠 텐데 족쇄까지 차고 수영이 가능할지 걱정되었다.
되는대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럴수록 숨이 차올랐다. 숨이 부족했다.
거의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 거세게 휘몰아치는 물살에 나는 또 한 번 휘말렸다.
“푸하!”
공기!!
물살에 휘말려 끌려간 곳은 수면 위였다. 나는 있는 대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물살이 다시 나를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가까스로 수면 밖으로 한 번씩 얼굴을 내밀며 허우적댔다. 도저히 수영을 할 여건이 되질 않았다.
이대로 진짜 죽나 싶을 즈음이었다. 우연히 바위에 몸이 턱 걸렸다. 옆으로 미끄러져 다시 떠내려가기 전에 나는 필사적으로 거기에 매달렸다. 그리고 조금씩 물가를 향해 움직였다. 바로 한 발자국 전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깊던 계곡물이 갑자기 허리 높이만큼 얕아졌다. 겨우 땅에 발을 디디는 데 성공했다.
“하아! 하아! 하아!!”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져서 마음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참 후에야 가쁜 숨을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옷을 털면서 일어나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넓게 살폈다. 상당한 거리를 떠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근처에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뜬금없이 탈출의 기회?”
아무도 없는 데서 혼잣말을 하고 피식 웃었다. 어떤 마물이 어디쯤 분포하고 있는지 대충 기억해 놓았다. 검도 마정석도 없지만 위험천만한 마물을 적당히 피해갈 자신이 있었다. 나는 먼저 물기를 짜서 옷을 정돈했다. 그리고 적당히 무기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뭇가지를 구해 집어 들었다.
“좋아, 그럼 가보실까.”
* * *
지스카르는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흙모래 따위가 떨어지고 있어서 시야가 불명확했다.
그는 무의식중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문득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품 안에 시라크가 안겨 있었다. 죽었을 아이는 살고 레이는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이 허튼 감상에 몸을 맡긴 결말인가?
지스카르는 팔 힘을 느슨히 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사람들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 숨이 막힐 만큼 공기가 무거웠다. 지스카르는 먼저 시라크를 기사에게 맡겼다. 다음에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안을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레이의 호위를 담당했던 자가 바로 그였다.
“폐하! 레이가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은 족쇄 때문입니다.”
그때 던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강경하게 말했다. 지스카르는 눈동자만 움직여 던필을 보았다. 좌중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느낌을 맛보았다.
“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잘잘못을 따지겠다고 했던가?”
지스카르가 물었다. 던필은 흠칫한 후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주위를 샅샅이 수색하라.”
지스카르 황제가 수색을 명령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면죄부라도 받은 것처럼 숨통을 틔웠다. 지휘관급 기사가 서둘러 수색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혹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제가 반드시 레이를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크리스티안이 딱딱한 음성으로 다짐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질책 대신 내려온 말에 크리스티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믿음에는 반드시 보답해야 했다.
그는 즉시 계곡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던필이 어깨를 붙잡았다.
“크리스, 도와주겠다.”
“필요 없어. 혼자 움직이면서 이 일대를 뒤져 보겠다. 그편이 빨라. 너는 친위기사들을 모아 생존자를 구해내라. 흙에 파묻힌 자 중에 살아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
크리스티안은 거칠게 던필의 팔을 뿌리쳤다. 던필은 다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거 알아? 진정해!”
“생존자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대답은?”
던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안 것이다. 그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바로 기립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대장님.”
* * *
“후우.”
크리스티안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물길을 따라 내려온 지도 세 시간째다. 계곡 근처를 이 잡듯이 헤집고 다녔지만 아직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끝내 계곡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휩쓸려 내려가 버린 것일까? 아니다. 뛰어난 자이니 일찌감치 물 밖으로 나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도주해 버렸을 수도 있다. 물에 빠져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후자도 문제였다. 한 번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를 쉽게 다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작정하고 몸을 숨긴다면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크리스티안은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변명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레이를 찾아내서, 반드시 황제께 다시 데려갈 것이다. 그것만이 주군의 신뢰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절그럭.
그때 가까이에서 금속음이 들려왔다.
절그럭.
또다.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수풀을 걷어내며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크리스티안. 드디어 찾았군!”
금색 머리카락, 여름 들판을 닮은 녹색 눈동자.
틀림없이 레이였다. 그가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는 도망가기는커녕 오히려 반갑게 손을 흔들며 크리스티안을 향해 다가왔다. 크리스티안은 당황해서 잠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뭘 하고 있지?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답이라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 주었으면 하는데.”
레이는 뒤쪽으로 보이는 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크리스티안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어째서 떠나지 않았지?”
왜 도망치지 않았냐는 질문에 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는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생각해 봐라. 이곳은 마물이 우글대는 깊은 산중이다. 도망치기 위해 경솔하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변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요행히 산을 빠져나가더라도 추적의 손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목에는 족쇄가 있고 외모는 눈에 띄지. 모든 것이 문제다. 혼자 몸만 달랑 빠져나가 봤자 수일 만에 도로 잡혀올 것이 뻔해.”
“그러나 너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레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전능이 아니다.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크리스티안은 지금까지 자신이 내렸던 평가에 확신이 있었다. 삐죽하게 서 있던 레이는 손을 내저었다.
“아아, 좋아. 사실 진지하게 도주하는 것을 고려는 해보았는데.”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독촉하듯 물었다. 레이는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더군. 내가 사라지면 지스카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파스스스.
바람이 불었다. 레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크리스티안은 레이가 계곡물에 빠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여름 날씨지만 산중의 바람은 차다. 그는 망토를 벗어서 레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레이는 사양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크리스티안의 시중을 받아 망토를 걸쳤다.
레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햇빛이 드리워 눈가의 그늘은 거의 사라졌다. 녹색 눈동자가 먼 곳을 널리 굽어보았다. 그는 아주 거만하며 대단히 우아하였다. 크리스티안은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일부러 의식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부모님이 신경 쓰인다는 건가. 그렇다면 절대 떠날 수 없겠군.”
“그럴까? 내가 가차 없이 부모님을 버리는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다. 홀로 설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 만큼 충분한 힘을 손에 넣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곳을 떠나겠지. 나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레이는 망토를 걷으며 돌아섰다.
“그만 가자. 피곤하군.”
* * *
크리스티안의 안내를 받아 야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오늘이 보름날이라 밤길이 밝았던 것이 행운이었다. 내가 사지 멀쩡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스카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크리스티안을 맞이했다.
“크리스티안, 수고했다.”
먼저 크리스티안을 치하하는 말이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 차례에 지스카르는 내게 안부를 물었다.
“상처는 없느냐?”
“특별히 없습니다. 크리스티안 경 덕분이고, 무엇보다도 계곡에 떨어지기 직전 마법을 사용해 주신 마법사님의 도움이 아주 컸습니다. 어떤 분인지 알려주신다면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스카르는 낯익은 사람을 불러왔다.
“럼포드 백작.”
“예!”
일전에 내게 손수건을 건네며 괜한 참견을 했던 마법사단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내게 무사히 돌아와서 참 잘되었다며 말했다. 기본 심성이 선한 인간처럼 보였다.
“짐이 경황이 없어 그대의 공을 생각지 못했군.”
“황공하옵니다!”
황제가 치하의 말을 했고 럼포드 백작은 기분 좋은 얼굴로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내게 시선을 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또 같은 질문이었다. 이미 그거 물어봤잖아, 라고 말하면 아랫사람 앞에서 지스카르의 체면이 구겨지겠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발목이 무척 쓰라리지만 달리 다친 곳은 없습니다.”
나는 발목이라는 단어에 특히 강세를 두어 대답했다. 지스카르의 시선이 발목에 닿았다. 족쇄 때문에 내가 죽을 뻔한 일까지 있었다. 내심 족쇄를 풀어주겠다는 말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끝까지 그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팔을 뻗어 내 등에 올렸다. 한 걸음 다가와 나를 안고 머리 위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있었다. 자기 일을 하느라 약간 소란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쉬거라.”
금방 나를 놓아주고 지스카르는 남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떠났다. 죽을 뻔한 사람을 맞이하는 것치고 반응이 심심한 맛도 있었지만 황제를 아는 기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몇몇이 수군거렸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황제의 진노가 엄청났을 것이라 확신했다.
주위가 분주해졌다. 이곳에서 밤을 지내기 위해 간이 막사들이 추가로 세워졌고 내 행방을 찾는다고 떠났던 수색조도 속속 돌아왔다. 나는 육포 몇 개로 배를 채우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크리스 대장님, 피곤하실 텐데 가서 숨 좀 돌리시지요. 제가 대신 호위하겠습니다.”
내가 돌아온 다음에도 크리스티안은 계속 내 감시 또는 호위 목적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던필이 피곤할 거라고 교대를 권했지만 크리스티안은 강경하게 거절했다. 그는 내가 계곡 아래로 추락한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호위를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은 크게 위험할 일이 없을 테니까. 나무에 기대고 서서 딴 곳을 보다가 문득 시라크를 발견했다. 황후파 기사들의 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내 시선을 느끼고는 표정을 굳혔다. 다행이랄지 상처 하나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때 시라크가 기사들과 무슨 일인지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다툼에서 승리한 시라크가 혼자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기세 좋게 접근한 것치고 금방 말을 못 하고 입을 우물댔다.
이참에 나도 할 말이 생겼다. 나는 시라크에게 따라오라고 턱짓을 했다.
“이익!! 이놈!”
평소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황태자인 시라크에게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모욕적인 행동이었나 보다. 그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씩씩대면서도 나를 졸졸 뒤쫓아왔다.
근처에 적당히 듣는 귀가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에게 잠시 떨어져 있으라고 요구하려다가 내가 방금 계곡 아래로 추락했다가 귀환한 직후라는 걸 기억해 내고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죽어도 내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앞머리를 만지다가 눈앞의 어린애를 보았다.
“시라크.”
“뭐? 지, 지금 뭐라고!”
존칭도 없이 이름만 부른 것은 처음이다. 시라크는 입을 뻐끔거리며 이 모욕적인 대우에 몹시 분개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누가 네놈 따위에게 할 말이 있다고! 그보다 지금 이놈이 말하는 행태가!!”
“할 말 없으면 말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휙 등을 돌렸다.
“잠깐!”
시라크가 서둘러 내 옷자락을 잡았다. 애가 상대이니 한 번만 봐주자 싶어 붙잡혔던 옷을 툭툭 털고 돌아섰다. 시라크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이야기를 꺼냈다.
“외조부님은 너를 수상한 천것일 뿐이라고 하시지만……. 나는 폐하께서 이상하게 너만 아끼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폐하께선 원래 그런 분이고. 네놈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나도 보면 알아. 그러니까 네놈 말을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일전에 연회에서 내가 해줬던 말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지.”
턱에 손을 올리면서 물었다. 시라크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래.”
연회에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마탑에서 했던 말도 기억났다.
“어떻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냐고 했던가?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죽었다가 환생이라도 하지 않는 한. 생각해 보니 단순히 환생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일 테니까.
내가 피식 쓴웃음 짓자 시라크는 비웃음을 당했다고 여기고 확 얼굴을 붉혔다.
“뭐라고? 젠장, 너 같은 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보려 한 내가 멍청이지!”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펄펄 뛰는 꼬마를 달래기 위해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라크, 너는 너 자신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
돌아가려던 시라크가 걸음을 멈췄다.
“너에게 할 충고는 하나뿐이다. 시라크, 황위를 포기해라.”
으드득. 대단히 모욕적이라고 여겼는지 시라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너에게 세 가지 선택지를 준 적이 있지.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 너에게 가능한 일이 있다. 황위를 포기하고 구석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네 어미와 외조부가 더 이상 너를 통해서 권력을 탐하지 못하도록 해라.”
시라크는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성질대로 했으면 벌써 다 때려치우고 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목구멍의 가시가 결국 그의 발을 붙들었다.
“내가, 내가 그렇게 구제 불능이라고? 그래서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
“…….”
철없는 시라크가 마음속 깊이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것은 알겠다. 황제가 진심으로 자신을 내치려 하는 것을 보고 시라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충격적이고 어떻게든 이 사태를 되돌려보고 싶었겠지. 그를 단시간에 여기까지 변하게 만든 것은 아마도 그 탓일 것이다.
“너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고집쟁이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이런 천것의 충고도 들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뜻밖에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라크,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어린애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는 진짜로 시라크의 일에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시라크를 뒤로하고 지스카르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지스카르는 마법사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할 일 계속하라고 대충 눈짓으로 말하고 그의 곁에 앉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온몸이 노곤했다. 나는 기지개를 크게 켜고 간이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
지스카르가 유난히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했다.
“……!!”
그랬다가 발작적으로 등을 일으켜 세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당연한 것처럼 지스카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달 황제의 남첩 역할을 하더니 이제 아주 심취해 버렸구나.
당장 박차고 저만치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기도 어쩐지 꼴사나웠다. 나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지스카르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네게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군.”
나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계곡에서 벗어나서 숲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상한 열매를 밟는 등 갑자기 짚이는 부분이 여럿 떠올랐다. 하지만 산행을 하면 다들 어느 정도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지독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
“따라와라.”
지스카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씻을 곳으로 안내해 줄 것 같아서 뒤따랐다. 솔직히 냄새가 난다 해서 좀 신경이 쓰였다.
근처에 계곡과 한 줄기를 이루는 너른 물가가 있었다. 지스카르는 뒤따라오던 크리스티안 및 호위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라.”
“폐하. 하지만…….”
“명령이다.”
크리스티안이 황제의 신변을 걱정했지만 추상같은 황명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황제가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자보다도 강력한 기사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사람을 전부 물린 뒤 지스카르는 검과 망토를 벗고 웃옷도 벗어서 내려놓았다. 나는 즉각 인상을 썼다.
“너는 왜 옷을 벗는 거지?”
“이 기회에 짐도 씻을까 한다만.”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
지스카르는 지그시 날 쳐다보다가 먼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녀석이 물에 들어갔다고 밖에 서서 구경만 하려니 뭔가 꼴이 우습다. 아예 옷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저놈은 당당히 벗는데 나 혼자 부끄럼 타는 꼴이 되어 그것도 마뜩잖았다. 나는 그냥 웃옷을 벗어버렸다.
조금 차가웠지만 물속으로 들어가서 세수를 했다. 며칠간 산을 오르느라 땀을 많이 흘렸다. 계곡물에 빠진 뒤에도 다시 산을 헤매느라 땀범벅이 되었고. 오랜만에 얼굴부터 몸까지 시원하게 씻으니 무척 상쾌했다.
“씻으러 오길 잘했군. 계곡물에 빠져 죽을 뻔한 뒤로 한동안 물은 보기도 싫을 줄 알았더니.”
지스카르가 물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나?”
“너도 계곡 높이를 봤을 것 아닌가.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사실 죽다 살았지.”
나는 쉽게 말하면서 물을 헤치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보름달이 구름 밖으로 완전히 얼굴을 드러냈다. 수면에 빛이 반사되어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나는 풍경에 취했고 몹시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잠시 수영을 할 생각으로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레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지스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은 물이 깊다. 이리 와라.”
물에 빠져 위험했었다는 소리를 듣고 새삼 신경을 쓰는 건가.
“괜한 참견이다. 이곳은 안전해.”
“이리 와라. 당장.”
지스카르가 짧고 강하게 깊은 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풍경에 취해 기꺼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쩐지 짜증이 치밀었다. 놈과 대화할 때마다 나는 항상 조금씩 짜증이 났다.
지스카르는 엘 파셔의 지엄한 황제이며 발아래 모든 자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황제의 신변을 걱정하던 기사들도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빠르게 물가에서 물러났다. 하물며 천한 노예 따위야 당장 황명에 복종해야 함이 마땅했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하지만 내게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언젠가 반드시 이 빌어먹을 엘 파셔를 벗어나고 말 것이다. 북방의 희멀건 놈들 따위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레이.”
지스카르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비틀어서 빼내려 했지만 힘으로는 절대 지스카르를 당해낼 수 없다.
“놔!”
지스카르는 요구대로 팔을 놓았다. 대신 한쪽 손으로 내 뺨을 붙들었다. 다른 손으로 허리가 꺾일 만큼 강하게 끌어당기고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기회가 되면 혀를 깨물어버리려고 턱에 힘을 주었다. 그 기색을 느끼고 지스카르는 뒤로 떨어졌다.
그는 옆으로 나를 끌고 가서 밀어붙였다. 길게 늘어진 나무뿌리가 등허리에 툭 부딪혔다. 지스카르는 그곳에 나를 밀쳐 놓고 턱을 강하게 짓눌렀다. 입이 벌어지자 바로 혀를 집어넣었다. 나는 질색하면서 고개를 뒤로했다. 지스카르는 이 기회에 얼굴을 틀어 다시 입술을 덮치고 빨았다. 입술과 혓바닥을 뭉개듯 누르는 동안 목구멍 안쪽부터 뜨끈하게 열기가 올랐다.
“하아…….”
“레이.”
입술을 떼고 지스카르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키스에서 해방된 김에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역시 이러려고 물가로 데려왔지! 기사들을 물린 이유도 이거고.”
“그래. 네가 무사히 돌아온 직후부터 당장 끌어안아 버리고 싶은 것을 계속 참았다.”
놈은 뻔뻔하게 자기 속셈을 인정했다.
그는 다시 입술을 짓뭉개며 눌렀다. 키스가 거칠게 또다시 이어졌다.
“웁, 하아. 이런 데서. 적어도 사냥이 끝날 때까지는……. 그동안은 잘 참았잖아.”
“네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단숨에 인내심이 휘발되어 버리더군. 자의든 타의든 네가 짐을 자극한 결과다. 항상 짐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네가 명심할 것은 그뿐이다.”
“미친 소리를. 윽!”
손이 바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엉덩이를 꽉 쥐었다.
“지, 진짜로 하겠다고?”
다음에 이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다.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어 내벽을 문질렀다.
다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지스카르는 혀를 집어넣어 천장과 혀의 뿌리를 헤집었다. 자꾸 침이 고였다. 지스카르의 것까지 더해져 입 안이 흥건해졌다. 지스카르는 입술을 잡아먹을 듯 덮치고 벌어진 입을 깊이 빨았다.
키스하는 동안 손가락이 구멍을 깊숙이 찔렀다. 나는 입이 틀어막혀 소리도 못 내고 몸을 경직시켰다.
키스를 끝내자마자 지스카르는 내 몸을 뒤집어 등을 보이게 했다. 바지가 풀려서 흘러내리고 엉덩이 사이에 지스카르의 성기가 닿았다. 정말로 할 셈이다. 나는 진짜 기겁했다.
“진짜 이런 데서, 윽……!! 아……!”
지스카르가 성급하게 삽입을 시작했다.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흉기 같은 살덩이가 뻐근하게 밀려들어 왔다. 나는 더 말하길 멈추고 양손으로 나무를 꽉 붙들었다. 깊이 들어올수록 악 깨물었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나는 턱을 몹시 떨었다. 지스카르가 손가락으로 내 턱과 입술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내부가 작은 여유조차 없을 만큼 지스카르의 것으로 완전히 꽉 들어찼다.
“하아…… 하아…….”
나는 나무에 팔과 머리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스카르는 경련하는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머리에 얼굴을 대고 진정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약하게 떨면서 입을 열었다.
“다…… 필요 없으니 그것부터 빼…….”
“그럴 수는 없지.”
지스카르는 목덜미 위로 속삭이며 가슴께를 더듬었다. 가슴 전체를 주무르던 손이 유두를 찾아 꾹 쥐었다. 금방 그곳 돌기가 빳빳하게 섰다. 다른 손은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은 이내 아래로 내려가서 내 음경을 거머쥐었다.
놀라서 허리를 움찔 튕기자 뒤쪽에서 지스카르가 뭔가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놈이 배 속 깊숙이 자기 물건을 박아 넣고 내가 움츠러드는 것, 바르르 떠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부끄럽고 견디기 힘들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나와……, 개자식. 좀……!”
“가만히…….”
지스카르가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이 말했다. 조금만 참고 더 따라와 보라면서 손끝으로 귀두를 쥐고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손가락 중에 검지만 세워서 입구를 가볍게 연속해서 긁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자지러졌다. 허리를 비틀고 자극받을 때마다 구멍을 꽉 옴츠렸다. 그때마다 내부에 들어찬 지스카르의 성기도 흥분하며 더욱 크기를 키워갔다.
“으읏! 아……, 젠장!”
“레이…….”
지스카르가 안쪽에 넣어두고만 있던 성기를 드디어 움직였다. 평소 쓰던 향유가 없어서인지 뭔가 둔하고 불쾌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 음경을 잘근잘근 주무르며 허리의 움직임을 최대한 천천히 하자 나는 금방 그 행위에서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물이 차가울 텐데 차갑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몹시 흥분해서 전신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철퍽 철퍽.
물 튀는 소리가 이상할 만치 자극적으로 들렸다. 지스카르가 성기를 빠른 속도로 처박았다. 나는 속절없이 놈이 밀어치는 대로 흔들렸다.
“읏으……. 흣! 아, 아아!”
조금씩 짧게 오는 자극에 입을 꾹 다물고 견디다가 어느 시점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젖히며 뜨겁게 소리를 질렀다. 내장을 헤집는 둔통에 짜릿한 쾌감이 같이 찾아왔다.
몸속 깊숙한 곳부터 시작된 쾌락이 등줄기를 쫙 관통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하아, 빌어먹게도 너무 좋았다. 지스카르가 성기를 꽉 쥐어짜는데 또 엄청난 쾌감이 쏟아져 내렸다.
놈과의 관계가 정말 자극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손끝만 대도 과도하게 긴장하고 흥분해서 혼이 쏙 빠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쾌락은 내 의지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죽을 만치 황홀한 쾌락도, 흠뻑 빠져들고 싶은 전율스러운 감각도, 전부 이 몸이 인정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란 말이다. 날 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놈 때문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그만두라고……, 멈추라고 말하고 있잖아!!”
내 고함소리에 주위가 쩌렁 하고 울렸다. 놀란 새들이 푸드덕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지스카르는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는 물가 바깥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소리가 커서 멀리서 대기하라 했던 기사들이 황제의 신변을 걱정해 되돌아올 가능성을 생각하는 듯했다. 놈도 한참 흥분해 있었을 텐데 이대로 행위를 중단하고 갑자기 물 밖으로 이동했다. 그는 바닥에 내려놓은 자기 망토를 집어 들었다.
내가 허옇게 질려 비틀거리며 물가로 오자 지스카르는 즉시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 언제 당도할지 모를 기사들 앞에서 내가 벗은 꼴로 있지 않게 몸을 가려주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랬다. 지스카르는 항상 침대 시트를 덮어주는 식으로 내가 헐벗은 채로 남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곤 했다.
“하!”
나는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웃기지도 않는 짓이었다. 애초에 나를 헐벗겨 모욕한 놈이 누구지?
사납게 지스카르의 손을 뿌리친 다음 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반드시 이 개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곧 죽어도 이 거지 같은 데서 시체가 되지는 않으리라. 나는 다시 이를 갈았다.
그때 거칠게 손이 닥쳐와 내 목을 움켜쥐고 밀어붙였다. 지스카르가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마치 속마음을 그대로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가 분노한 이상으로 지스카르도 하얗게 노기를 드러냈다.
“명심해라. 짐의 손에서 벗어날 생각 따윈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네가 무엇이건 지금 짐이 소유하고 있는 노예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짐의 것이다!”
“나는…….”
나는 목을 틀어쥔 지스카르의 팔을 붙들었다. 빠득 소리 나게 깨문 잇새로 말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떤 놈도 이 몸을 멋대로 휘두르게 두지 않아!”
“그런 꼴로? 그것이 가능한가?”
지스카르가 철옹성 같은 무표정을 깨고 마치 조롱하듯이 물었다. 놈의 물음에 새삼 자기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았다. 발가벗겨지고 놈의 손아귀에 짓눌려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리나 지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목구멍 저 언저리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지스카르는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추슬렀고 윗옷을 주워 입었다.
“폐하.”
생각대로 기사들이 도착했다. 아무 내색 없이 지스카르가 먼저 움직였고 나도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