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체크 메이트.”
내가 가진 왕이 체스판을 완벽하게 점거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지스카르를 보았다.
“더 이상 체스로는 내 상대가 안 되는데?”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체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말고 이제는 인정하시지? 전략 게임은 내가 한 수 위라는 것을 말이다.”
“…….”
지스카르가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일어섰다.
“가봐야겠군. 너도 그만 들어가거라.”
시간이 지나 어느새 한여름이 되어 있었다. 꼬박 두 달 가까이, 나는 거의 방 안에서만 생활했다. 지금 내원에 나온 것도 거의 2주 만에 얻은 외출의 기회였다. 그것이 단 한 시간 만에 끝을 고했다.
지스카르가 체스에서 졌다고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건 아마도 아닐 것이다.
최근 지스카르는 이른 아침에 나가 아주 늦은 시간에나 돌아왔다. 브뤼셀 황후 및 외척 세력과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 같았다. 내가 외출을 금지당한 것은 그 문제와 관련이 깊다. 어수선한 시기에 수상한 놈을 밖에 풀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황후파가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어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추측한 것은 거기까지다. 방 안에만 갇혀 있는 나로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스카르에게 일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냐고 캐묻진 않았다. 황후나 마크시 공작에게 어떤 죄목을 뒤집어씌울 것이고 시라크를 어떻게 폐위할지 그런 일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놈이면 알아서 잘 하겠지. 막연히 그런 확신도 있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금세 내원 입구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자아, 이제 들어가면 또 언제쯤 나오려나?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내가 할 만한 일이 없을까? 요즘 방 안에서만 지내느라 지나치게 한가해서 말이야.”
“서류의 양을 늘려주면 되겠나?”
“그게 아니라!”
나는 멈추어 섰다.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햇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없어도 돼.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욕구불만이었나 보다. 이렇게 돌발행동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아니다. 못 들은 걸로 해.”
“무슨 일을 원하지?”
이어지는 지스카르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녀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스카르는 지금 외척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굉장히 민감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아주 사소한 문제도 큰 타격으로 돌아올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럴 때이다. 내가 밖에 돌아다니다가 무슨 사고라도 치면 황권이 걸린 중차대한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스카르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가끔 내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었다.
“……무슨 일을 원하냐고. 글쎄다. 뭘 하지?”
나는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지스카르는 내 말에 멀리 분수대 쪽에 시선을 던졌다. 분수 너머에는 연무장이 있었다.
“낮 시간 동안 검을 배워보겠느냐? 물론 감시하에 연무장 내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음?”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로 생각 못 했다.
“검술 훈련을 하게 해주겠다고? 수상쩍다고 여태 족쇄도 풀어주지 않고 있으면서?”
“돌아다니게 해줄 수는 없고……. 연무장 안에만 있어야겠지만 검에 골몰하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겠지…….”
지스카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겨서 대답했다. 애초에 내가 감금 생활을 하는 게 전부 지스카르의 탓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나를 위해서 보여주는 아량이 실로 놀랍다.
“내가 제대로 검을 익혀서 널 찌르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괜히 농담 삼아서 물었다.
“걱정 마라. 체스에서는 졌으나 검에 관한 한 네게 당할 일은 없을 테니.”
지스카르가 말하는데 뭔가 자신감 같은 것이 엿보였다. 뭘 하든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놈이라는 걸 감안할 때 눈에 띄는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다시 말했다.
“잠깐 지스카르. 검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배우면 안 될까?”
“무엇을?”
“마법을…….”
“불허한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단박에 거절이 튀어나왔다.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원하지 않았나? 마법이라니?”
“갑자기 뭘 배워보라고 하니 그냥 생각이 나서 말이다.”
만약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마법을 배우게 되면 당연히 마정석도 주어질 것이다. 어릴 적부터 단련을 거듭한 레브노아드와 달리 지금 레이의 육체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은 다르다. 마정석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과거의 힘을 온전하게 모두 되찾는다. 이 끔찍할 만큼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정석의 보유량이 한 나라의 국력을 좌우한다. 노예에게 내줄 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검을 익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라.”
지스카르는 잘라 말했다. 크게 아쉬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좋아. 검을 배우겠다.”
지스카르는 뒤에서 따르던 크리스티안을 불러왔다.
“크리스티안. 네가 감시를 겸해 레이를 맡아라. 원치 않는다면 지금 이야기해도 좋다.”
“아닙니다. 전부터 그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이 허락함으로써 나의 검술 훈련 일정은 정해졌다.
* * *
부웅!!
마지막으로 백 번째 가로 베기를 끝내고 겨우 검을 땅에 내려놓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이틀 정도 지났던가? 그동안 나는 크리스티안의 지시에 따라 단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불만은 전혀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체력 단련이니까.
황태자 시절에 배운 검술을 모두 기억하고 있고,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감각이 그대로 몸에 남아 있었다, 동체 시력, 반사 신경까지 대부분 기능이 건재하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러나 근력이 너무 형편없어 검을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력은 훈련을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완전히 바닥을 보였다.
“하아, 한심하군.”
“그게 한심한 거야? 네 나이 때 내가 어떤 수준이었는지 떠올려보니 쪽팔려서 죽고 싶어지는데?”
연무장 주변에 수상한 자는 없는지 한 바퀴 돌아보고 귀환한 던필이 오만상을 다 썼다. 지금 나의 감시 및 호위 역은 크리스티안과 던필 두 사람이 전담하고 있었다.
“후우, 네 평가는 사양하겠다. 내 훈련 담당은 크리스티안이니까.”
“그래? 그럼 크리스 대장님의 의견을 들어볼까?”
크리스티안은 나를 주시하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딱 졌다.
“네가 가진 기술은 오랜 경험으로 얻어낸 것처럼 보인다. 타고난 몸놀림에 기댄 어설픈 것이 아니야. 그러나 팔다리엔 단련한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 한 번도 검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몸에 근육의 흔적도 없다. 기본 체력도 평균 이하다. 앞뒤가 맞질 않아.”
크리스티안이 해답 없는 문제에 계속 골머리를 썩이지 않도록 나는 훈련을 재촉했다.
“평가는 됐으니 훈련이나 계속하자. 후우우. 가로 베기 백 번, 다시 반복하면 되겠느냐?”
죽을 만치 힘들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못해도 수십 번 이상은 근육통으로 죽다 살아나길 반복해야 이 야들야들한 팔에도 근육 비슷한 것이 생기겠지.
“며칠간 네 자세를 지켜보며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오늘은 그에 대해서 알려주지.”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크리스티안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바로 설명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나를 보면서 사족을 덧붙였다.
“너는 수준급의 검술을 체득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최고라고 치켜세워 줄 수준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라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가 갑자기 마법사가 되겠다며 다 때려치웠으니까.
“별로 불만이 없나 보군.”
“내가 불쾌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앞으론 그런 일로 내 눈치 볼 것 없다. 바로 시작해.”
“……시범을 보이겠다.”
크리스티안은 눈치라는 말에 혼자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노예의 심중 따위를 살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실제로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이 황당한 것이다. 어쨌든 크리스티안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오늘 처음으로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하고 차가운 금속음이 짧게 울렸다.
쿵!
크리스티안은 강하게 땅을 밟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고 체중이 쏠렸다. 동시에 그는 검을 횡으로 힘껏 베었다. 전신의 무게가 단번에 실리며 검이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갑옷을 입은 적을 만나면 갑옷째로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힘. 일련의 자세에 힘의 낭비 따윈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크리스티안은 검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무엇을 지적하고 싶은지 이해했는가?”
나는 굳어진 몸을 풀면서 대답했다.
“힘을 싣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지.”
자세를 흩뜨리지 않기 위해 바로 직선거리에 보이는 깃발을 목표물로 삼았다. 나는 깃발을 보며 발을 내밀고 강하게 굴렀다.
철컥.
“윽!”
사슬이 짧았다. 마음만 앞서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족쇄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크게 비틀거렸다. 나동그라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레이!”
크리스티안이 놀라서 내게 다가왔다. 그가 더 접근하기 전에 나는 손을 들었다. 손짓 하나로도 크리스티안은 용케 내 뜻을 이해하고 멈춰 섰다.
나는 불만스럽게 족쇄를 노려보았으나 이내 다시 검을 들었다. 사슬의 길이를 충분히 감안하면서 발을 내디뎠다. 중심을 밀어내듯 휘둘러라!
쿵.
부우웅!
검이 무겁게 바람을 갈랐다. 내 귀에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좋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자서 잠시 기쁨을 만끽하다가 크리스티안을 돌아보았다.
“어때?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
크리스티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겨우 대답했다.
“……기대를 상회할 정도로.”
“역시 인간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던필이 끼어들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이 녀석 몇 년 안에 소드 마스터로 거듭나는 거 아니냐? 우리 지금 그 역사적인 순간 앞에 있는 거야?”
“기대해도 좋다. 세상에 태어나 검을 한번 들었으면 마스터 정도는 찍고 가야겠지.”
“농담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기냐……. 마스터가 옆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
“내가 하고자 마음먹어서 못 해낸 것이 없어서 말이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던필의 잡담에 어울려주었다. 그야 내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마스터가 되는 건 끝까지 도전해 봐야 아는 일이긴 하다.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지스카르가 떠올랐다.
“지스카르는 소드 마스터이지.”
“딱 성인식을 치르던 해에 마스터가 되셨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인간답지가 않아.”
던필이 황제를 가리켜 이놈 저놈 하며 혀를 내둘렀다. 크리스티안이 던필의 멱살을 움켜쥐는 것까지 보면서 나는 지스카르의 평소 모습에 대해 떠올렸다.
“검의 달인이라고 듣긴 했는데, 어째 한 번도 검을 들고 수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군. 평소에 들고 다니는 건 검이 아니라 서류 뭉치들뿐이고…….”
지스카르가 무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하게 짜인 근육질의 몸에, 힘은 또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붙잡히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나 싶을 정도로 평소에 지스카르는 단련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간신히 크리스티안의 손에서 벗어난 던필이 한탄을 했다.
“옛날부터 그랬지. 나랑 크리스, 그리고 황제 폐하 모두 같은 시기에 검을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똑같이 시작해도 결과는 같지 않더군. 나랑 크리스가 죽도록 수련해서 하나를 익힐 때, 폐하는 눈대중으로 본 것만으로 모든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결국 우월한 신체조건과 타고난 재능으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마스터가 되어버리더군.”
“흐음…….”
“폐하만큼은 아니어도 크리스도 엄청나게 강하다. 두 놈이 힘만 세가지고 나를 얼마나 핍박하는지. 내가 황제였으면 말도 편하게 하고 이놈 저놈 정도의 농담은 할 수 있게 해줬을 텐데.”
던필은 이번엔 멱살을 잡히는 대신 크리스티안에게 호되게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그 옛날, 스트라스엔 레브노아드, 엘 파셔엔 지스카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가 되어 실전조차 겪어보지 못한 지스카르를 애송이라고 여겨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제법 훌륭한 재목이라고 인정해 줘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나름 지스카르에게 후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에 잠겼다.
“스트라스의 황제는…….”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실랑이를 멈추고 내게 시선을 주었다.
“에드리히 황자가 스트라스의 황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만.”
그간 스트라스에 대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대충 운을 떼며 두 사람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에드리히 황제가 왜?”
다행히 던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역시 에드리히가 황제가 되었군. 나는 정보를 머리에 담으며 다시 물었다.
“그도 강한 기사라고 들었다. 에드리히 황제도 혹시 소드 마스터인가?”
“뭐어, 진짜인진 몰라도 그렇다는 소문이 있지. 전 대륙을 통틀어도 소드 마스터는 몇 명 안 되는데, 양대 제국인 엘 파셔와 스트라스의 황제가 전부 마스터라니 좀 믿기 어려운 일 아니냐?”
내가 아는 에드리히라면 틀림없이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고, 내가 죽기 직전엔 이미 오라도 발현시키는 단계였으니까. 하지만 던필은 계속 음모론을 제기했다.
“아무래도 스트라스 놈들이 엘 파셔를 의식해서 헛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농후해. 누가 알겠어?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 에드리히 황제가 친정에라도 나서지 않는 이상은 알 방도가 없잖아. 레브노아드 황태자라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인데 혹시 알까? 그 인간처럼 진짜로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마법을 쏴댔으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세계 최초의 4중 영창 마법사였다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내 이름이 튀어나온 덕에 나는 몸이 굳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크리스. 너는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를 본 적이 있지? 당시 황태자였던 폐하를 모시고 휴전협정 식장에 참석했으니까.”
“본 적이 있다.”
던필이 잡담 형식으로 쉽게 물었고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끄러미 크리스티안을 살폈다.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잡담은 충분히 했겠지? 레이, 다시 횡 베기 자세로 서라. 자세를 교정해 주겠다.”
“……좋아.”
나는 검을 들고 크리스티안을 스쳐 지나가며 툭 말했다.
“크리스티안. 뜻밖에 좀 둔하군.”
“뭐라고?”
“아니다.”
당시의 레브노아드는 스무 살 중반의 장성한 청년이었고 지금의 나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게다가 대외적인 분위기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인상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어차피 크리스티안은 그 옛날 휴전 협정식에서 딱 한 번 나를 봤을 뿐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검을 들었다.
* * *
지스카르의 말대로 검에 열중하게 되자 시간이 금방 흘렀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열흘이 지났다.
나를 가르치면서 크리스티안은 고지식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엄격한 일정이 이어졌다. 매일 체력이 향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훈련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지스카르는 여전히 바쁜 것처럼 보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솔직히 아주 궁금했지만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는 법. 나는 검에만 전념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 일정을 마친 뒤 노곤한 몸을 이끌고 황제궁으로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문득 시야에 마탑이 들어오기에 잠시 멈춰 섰다. 황성 좌측에 높다란 마탑이 서 있었다.
“마탑에 뭔가 있나?”
크리스티안이 물었다.
당연히 마정석이 산더미처럼 많이 있겠지. 하지만 나는 순진한 척 속내를 숨겼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것에 호기심이 느껴져서.”
“처음 폐하께도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 검이 아니라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검에 대한 너의 재능은 대단하다. 내가 인정하겠다. 다른 곳에 한눈팔지 말고 정진하는 편이 좋아.”
크리스티안의 극찬에도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검에 재능이 있다는 말은 전생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마법에 집중하겠다며 검을 냅다 갖다버리자 체르도와 다른 명망 높은 기사들이 몇 날 며칠 동안 내 바짓단을 붙들고 재고해 달라고 애원했지. 체르도는 황태자 친위기사대의 대장이었고 나의 검 스승이기도 한 자이다.
그때 누군가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았다. 상대를 보는 순간 나는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님을 확신했다. 시라크가 땀을 흘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마 내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이 근처 땡볕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그는 날 보자마자 날카롭게 외쳤다.
“더러운 노예 자식! 네 주제에 무슨 검을 배우고 있다지? 폐하께서도 정말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시라크의 말 중에 조금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황제라면 찍소리도 못 하던 녀석이 날 비난하기 위해서라곤 해도 불경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약간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그래 봐야 여전히 어리광투성이의 어린애지만.
나는 옆으로 길을 내주고 말했다.
“시라크 전하, 먼저 지나가십시오.”
시라크는 날 노려보면서 씩씩거렸다. 시비를 걸고 싶은데 상대를 안 해주니까 답답한 것이다. 시라크는 길을 지나가는 척하며 연속해서 나를 힐끗힐끗 보다가 또 갑자기 바락 외쳤다.
“너, 너는?!”
“예?”
“그러니까 넌 왜 안 가고 있느냐? 이런 곳에서 뭐 하고 있었어?”
“마탑을 보고 있었습니다.”
“흥! 그렇겠군. 노예 신분에 어떻게 마탑에 출입해 보았겠어! 그곳은 대단히 신비로운 곳이다.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빗자루도 보았다!”
“그건 무슨 허무맹랑한…….”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순간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날아다니는 빗자루, 만들려면 못 만들 것도 없다.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빗자루를 띄우면 된다. 다만 비싼 마정석으로 빗자루 따위를 허공에 왜 띄우는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아마 시라크가 억지를 부리자 힘없고 불쌍한 마법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날아다니는 빗자루를 만들었으리라.
“아…… 예……. 그러셨군요.”
나는 애매하게 표정을 구기면서 대답했다. 시라크는 몸을 좀 숙이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너 지금 안 믿고 있지?”
“아닙니다, 믿습니다.”
“안 믿고 있잖아!! 좋아, 따라와! 내가 증거를 보여주지!”
“예?”
순간의 그 얼떨떨한 심정이라니. 지금 시라크가 날 마탑에 데려가겠다고 한 게 맞나?
크리스티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시라크 전하, 레이는 이제 황제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잠깐 빗자루만 보여주고 돌려보낼 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만두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뭐가 문제라고 이렇게 막아? 이놈이 다칠까 봐 그러냐? 네놈들도 따라오면 될 것 아니냐!”
지스카르까지 들먹이는데도 시라크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빗자루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내게 보여주고 처음으로 진짜 승리감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가만히 서서 상황을 파악했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마탑에 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라크의 막무가내를 막으려는 의사밖에 없어 보였다.
내가 처음 외출하고자 했을 때 지스카르는 황제궁이나 황후궁 등이 있는 황성 내의 우측 구역만 출입을 허락하고, 마탑과 유리 정원 등이 있는 좌측 구역에는 발도 못 디디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난 일이다. 현재 나는 연무장과 황제궁만 오가고 있었고, 좌측 구역에 출입을 금지했던 명령은 옛날 것이 되었다.
“따라와! 빨리! 네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시라크가 내 팔을 꽉 붙잡고 잡아당겼다. 죽어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던필이 크리스티안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 먼저 황제궁으로 떠났다. 던필을 통해 곧 지스카르에게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나는 갑자기 조금 조급해졌다. 하지만 조급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척하며 시라크의 팔에 붙들려 마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라크 전하! 어쩐 일로 또 여기까지…….”
마탑에 도착하자 늙은 마법사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라크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라크는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자기 요구부터 불쑥 말했다.
“일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빗자루! 그거 다시 한번 보여다오!”
“예? 그, 그건 치워버렸는데.”
시라크가 돌아가자마자 마법사는 바람 마법을 거두었을 것이고 하늘을 나는 빗자루는 다시 평범한 빗자루로 변했을 것이다. 빗자루가 없다는 말을 들은 시라크는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뭐, 뭐라고? 당장 그걸 가져와! 아니면 같은 걸로 만들어와! 못 한다면 네놈들의 목을 전부 베어버릴 것이다!”
마법사의 얼굴에 시커멓게 먹구름이 끼었다. 그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예……. 들어와서 기다리십시오. 얼른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늙은 마법사는 견습에게 안내를 맡기고 들어갔다. 우연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빌어먹을, 또 아까운 마정석을 날리게 생겼군. 곧 마크시 공작이 축출당하면 더 이상 저런 덜떨어진 놈에게 시달릴 일도 없겠지.”
노마법사의 말을 곱씹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지스카르가 황후 일파를 몰아내면서 일은 마무리될 모양이었다. 제 어머니와 외조부,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경각에 달렸는데도 시라크는 그저 날아다니는 빗자루 따위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작은 방에 안내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상석에 앉은 시라크는 히죽 웃었다.
“기대해라. 진짜 신기한 것을 보게 될 테니까!”
“…….”
나는 그냥 무시하자고 생각하며 주위를 신중히 둘러보았다. 평범한 응접실로 눈에 띄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곧 마법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이 손에 든 짧은 지팡이가 단숨에 내 눈길을 끌었다. 지팡이 끝에 고정되어 있는 보석, 마정석이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마정적을 낚아채고 싶었지만 바로 곁에 있는 크리스티안이 걸렸다. 성급하게 움직였다간 마정석을 손에 넣기도 전에 크리스티안이 수상함을 눈치채고 날 먼저 제압해 버릴지도 모른다. 몸싸움을 해봐야 지금의 나 같은 건 크리스티안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나는 평정을 가장하면서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자, 어서 빗자루를 공중에 띄워보아라!”
“예…….”
시라크가 희희낙락하며 말했고, 마법사는 억지로 마정석 지팡이를 들었다.
“온.”
시동어가 떨어지자 지팡이 끝의 마정석이 가늘게 진동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마법이 시연되는 것을 보면서 크게 감동했다. 암살의 위협 때문에 해독 주문에 잠깐 손을 댄 이후로 마법의 매력에 푹 빠지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의 열렬한 감각이 다시 태어난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을 일으켜 빗자루를 허공에 띄운 마법사가 다시 한번 시동어를 외었다.
“온.”
2중 영창. 황궁에 적을 둔 마법사라면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겠지. 음역으로 보건대 바람 마법과 빛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 것 같았다.
빗자루가 바람에 휩쓸려 가볍게 회전하며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빗자루 주변에 화사하고 신비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내겐 희극이 따로 없었지만 시라크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보거라! 아주 대단하지? 네 평생 구경도 못 할 것인데 이렇게 보여주는 거다. 이 몸에게 감사해!!”
“예, 대단하군요.”
나름 감탄해 주었지만 시라크는 내 반응을 별로 신통치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시라크는 더욱 안달 난 모습이었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던 시라크는 이를 악물고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시라크를 보았다.
“신분이 비천한데도, 별로 배운 것도 없을 텐데 아는 것이 많잖아. 그래서 폐하께서 너를 아끼는 것이겠지? 너처럼 되면 폐하께서도 생각을 달리하실까?”
“…….”
순간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져서 시라크를 마주 보던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렸다. 이래서 시라크와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죽여버려야 할 꼬마의 처량한 속마음 같은 것은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깊은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크리스티안의 존재를 무시하고 성큼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마법사는 무방비한 상태로 내가 뭣 하러 다가오는지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크리스티안도 조금 뒤에 떨어진 채 그냥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하하!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을!”
나는 크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마정석을 향해서. 마침내!!
쾅!
그때 누군가 부숴버릴 것처럼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스카르!
내가 서둘러 마정석 지팡이를 빼앗으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지스카르가 내 어깨를 먼저 붙들어 옆으로 밀쳐냈다. 강한 힘에 밀려 나는 근처 장식장에 심하게 처박혔다. 어디에 잘못 부딪혔는지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덤으로 장식장 안쪽에서 뭔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까지 들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장식장을 짚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지스카르, 이 자식……!”
마정석을 얻을 기회를 놓친 데다가 이렇게 짐짝처럼 처박히기까지 했다. 나는 격분해서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지스카르 역시 전에 없이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무자비한 손길로 내 팔을 붙잡아 뒤로 꺾었다. 아니 꺾는 게 아니라 거의 부러뜨리는 것 같아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묶을 것을 가져와라!!”
“에, 예!”
마법사가 후다닥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스카르는 다시 크리스티안을 보며 노성을 터뜨렸다.
“크리스티안! 마탑 쪽으론 절대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을 텐데!!”
“폐, 폐하. 죄……송합니다…….”
크리스티안의 목소리에는 놀람이 배어 있었다. 지스카르는 특별히 마탑을 딱 짚어 출입을 금지하라고 한 적이 없다. 지금 지스카르는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노여움이 크리스티안에게 굉장히 갑작스러웠을 것이다.
마법사가 황급히 밧줄을 가져왔다. 정신을 차린 크리스티안이 지스카르 대신 밧줄을 받아서 내 팔을 단단히 묶었다.
“끌고 가라!”
지스카르는 다시 명령했다. 한발 늦게 황제를 쫓아온 친위기사들이 나를 짐짝처럼 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폐, 폐하…….”
크리스티안조차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참이니 시라크는 더욱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지스카르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시라크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차갑게 돌아섰다. 끌려가는 와중에 시라크가 잔뜩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 * *
“크윽!”
침실 바닥에 나동그라지자마자 뒤쪽에서 크게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 고개를 들었다.
“왜 이래! 뭐야, 갑자기!”
마정석을 들고 탈출을 시도한 직후였지만 나는 뻔뻔하게 영문을 모르겠다고 소리쳤다. 지스카르는 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상반신이 위로 번쩍 들렸다.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대체 네 정체가 뭐지?”
“그따위 질문 지겹지도 않은가? 이미 조사할 만큼 조사해 봤을 텐데? 나는 레이다! 빈첸시오 성에서 태어난 노예! 그것에 한 치의 착오가 있더냐?”
“노예? 노예라고?”
지스카르가 얕게 노한 표정을 지었다. 놈이 갑자기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버둥댔다.
“뭐? 그, 그만……!!”
팔이 묶여 있는 상태에선 제대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렸다. 지스카르는 나를 바닥에 다시 내던졌다. 머리가 호되게 부딪치는 바람에 나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그 상태로 기다리는데 주위가 잠잠했다. 나는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스카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벌거벗겨져서 알몸으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나를 높이 서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깨닫는 순간 이제 와서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진짜 노예가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알고 싶으냐.”
지스카르가 경고하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나는 진정한 의미로 노예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전부 놈이 과할 정도로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긴 했다.
나는 약간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어깨를 짓밟아 나를 다시 찍어 눌렀다. 진짜 노예를 대하듯이 벌레처럼 짓밟았다.
뱃속이 뜨거웠다.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속이 들끓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부터 뻣뻣하게 굳어왔지만 몸을 가리기 위해 웅크리진 않았다. 모멸감에 턱이 바르르 떨려왔으나 그 자세로 있었다.
정말 이걸 원한다면, 그래. 네놈 마음대로 해라.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더 이상 상관치 않겠다면, 나를 그냥 하찮은 노예로만 취급하겠다면 나로서는 별수 없다. 하, 벌거벗겨 대중 앞에 던진다 해도 내가 어떻게 저항하겠는가!
방 안은 적막하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팔을 뻗어 나를 끌어와서 품에 안았다. 가늘게 경련하는 몸뚱이를 억지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몸을 비틀었다.
“……놔!!”
손이 허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소름이 끼쳤다. 맨살에 닿은 손이 역겨울 만큼, 진저리날 만큼 끔찍했다.
“이거 놔! 개자식이!”
“입 다물어라……!”
지스카르는 나지막이, 그러나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처럼 정체도 알 수 없는 노예 따위 팔다리를 부러뜨려 심문할 수도 있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에 영원히 가둬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민감한 시기에 연무장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그 손에 검까지 들려주었지! 짐이 이만큼 아량을 베풀었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손가락이 거칠게 아래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두 개가 단숨에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으으윽!!”
나는 헐떡거렸다. 고통에, 굴욕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큭! 아량을 베풀었다고? 날 감금하고 헐벗겨 굴욕을 주는데 그깟 선심 따위가 대수라는 것이냐! 내가 언제까지 네놈 밑에 깔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온몸으로 저항하자 지스카르는 손가락을 빼고 나를 곧장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에 거의 던지다시피 하고 놈이 막무가내로 내 다리를 붙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족쇄 때문에 다리는 어중간한 정도만 벌어졌다. 정말 우스운 꼴로 엉덩이와 치부가 훤히 드러났다.
“지스카르!!”
지스카르는 자기 성기를 내 구멍에 대었다. 뜨거운 것이 닿자 나는 심하게 진저리를 쳤다. 거의 경련에 가깝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혀 소용없었다. 지스카르가 아무 준비도 안 된 몸뚱이에 성기를 강제로 처박았다.
“으으윽!”
순간 숨을 멈추고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강타했다. 한 번도 향유 없이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것도 없이, 전희조차 없었다. 지스카르는 오직 힘만으로 밀어붙여 빠듯한 내부로 성기를 끝까지 박아버렸다.
“커헉!”
결국 숨이 모자라 숨통을 터뜨렸다. 눈앞이 일순 희게 점멸했다. 뿌리까지 파고든 성기가 마른 내장을 깊이 찍어대고 강제로 후벼 팠다. 이 행위에 쾌락 따윈 전혀 없다. 고통스럽고, 그저 미칠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개자식! 죽여버릴 테다!! 죽여버리겠어!!”
내가 벌겋게 분노해서 고함을 지르자 지스카르도 일순 노기를 드러내며 다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놈이 내 양다리를 밀어붙여 허리와 엉덩이를 완전히 위로 들어 올렸다. 잠시 쑥 빠져나간 성기가 단숨에 뿌리까지 구멍에 꽂혔다.
“아윽!! 그……으윽! 아아악!! 아……!”
나는 고통스럽게 자지러졌다. 억지로 비명을 참았다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소리를 지르고 곧 껄떡거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구멍을 거의 찢는 듯한 행위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나는 심하게 경련하며 쉰 소리만 간신히 내고 있었다. 그래도 지스카르는 계속 허리를 처박았다. 무자비하게 내부를 쑤시다가 어느새 멈추었다. 다리를 놓고 성기를 빼고 물러났다. 항상 냉담했던 놈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허옇게 질리고 식은땀 범벅이 된 내 얼굴에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얼굴을 만지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두 팔로 부숴버릴 듯이 전신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귓가에 들리는 숨이 많이 거칠었다. 나는 약간 쉬어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 말라고 했다. 끝까지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스카르가 강제로 나를 안긴 하지만 다치게 만들거나 아프게 하는 걸 즐기진 않았다. 가끔 노예랍시고 복종을 강요하다가도 얼마 못 가서 제풀에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짐이…… 어째서 이래야 하지? 짐이 네 사정을 봐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노예 따위가 굴욕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 대수라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키지 않는다. 대체…… 무엇 때문에…….”
놈의 목소리에 기가 찼다. 나는 거친 숨을 꾹 누르고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묻겠다. 황제씩이나 되는 자가 왜 사색이 돼서 마탑까지 달려왔지? 노예가 마정석 좀 만지는데 어째서 그렇게 정색하느냔 말이다.”
허리를 안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나는 미약한 통증에 조금 떨었다. 귓가에 낮은 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말해봐라. 너는 대체 뭐지?”
“하아. 내가 뭔지……, 네 눈으로 확인해라. 내가 하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스스로 레브노아드라고 주장하는 일엔 아무 의미도 없다. 전생이나 환생 같은 일은 과거의 나 자신조차도 믿지 않았던 일이다. 지스카르가 비현실적인 일임에도 기꺼이 나의 전생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겠다 하면, 그때야 의미가 생긴다.
놈이 날 옆으로 눕히고 팔을 구속하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팔과 어깨가 굉장히 뻐근했다. 팔을 뒤로 묶어놓고 위에서 짓눌러댄 탓이다. 밧줄에 묶였던 팔목도 쓰라렸다. 그래도 몸이 자유로워진 것에 반쯤은 안도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지스카르가 위쪽에서 몸을 낮추며 내 얼굴을 감싸고 입술에 키스했다. 지스카르는 꽤 오래 입술을 머금은 뒤에 떨어졌다. 그때 다리 사이를 더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 하지 말라고…….”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나마 남은 힘으로 약간 저항해 보았다.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저항이 통한 적은 없지만.
지스카르는 손으로 다리 사이를 완전히 감싸 전체적으로 주물렀다. 손이 깊이 주무를 때마다 허리가 약간씩 들렸다. 나는 허벅지를 바짝 움츠리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크……으으. 하지 마…… 좀…….”
지스카르는 몸을 숙여 악다문 내 입에 다시 키스했다. 아랫입술부터 잡아먹을 듯이 삼키고 혀로 입술 사이를 훑다가 틈으로 밀어 넣었다. 축축한 타액이 섞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질색하면서 고개를 돌리자 지스카르가 따라붙어 다시 키스했다.
키스하는 동안 손은 더 강하게 사타구니를 압박했다. 지스카르의 손아귀에 내 허리와 엉덩이가 완전히 들려진 상태였다. 나는 다리를 가늘게 떨며 힘들게 그 자세를 버텼다. 정말 힘들었다. 너무 아팠다!
“하악! 좀 그만해! 구멍 있는데 아프단 말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살인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설마 또 넣을 작정은 아니겠지! 개자식아!”
지스카르는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리 사이를 만지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놈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마른침을 삼켰다. 아프거나 말거나 끝까지 해보겠다는 건가. 그런데 완전히 벗은 지스카르가 뭘 하려는지 다리 하나를 내 다리 사이로 넣었다. 그는 내 허리를 붙잡고 바짝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리가 얽히면서 지스카르의 성기와 내 성기가 맞닿았다. 민감한 곳에 놈의 촉감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무슨!”
지스카르는 손으로 자기 성기와 내 성기를 동시에 쥐었다. 나는 기겁해서 진심으로 저항했다. 황급히 지스카르의 오른팔을 붙들자 놈이 낮게 말했다.
“아프지 않게 할 테니 걱정 마라.”
“그……!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흣!”
일순 소름이 끼쳐 파르르 몸을 떨었다. 지스카르가 자기 음경 위에 내 음경을 짓눌러놓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처음이었다.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얼굴을 벌겋게 만들고 다리를 비틀었다. 그러지 말 것을 그랬다. 다리를 비비적대서 더욱 자극적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성기가 벌써 터질 것처럼 단단히 섰다.
“으…… 읏……! 아아…… 아아!”
내가 고개를 젖힌 채 떨자 지스카르는 허리를 좀 더 갖다 붙였다. 꺼칠한 음모가 거슬렸다. 고환까지 완전히 밀착되었다.
“기분……! 더러워! 정말로……!”
“레이.”
지스카르가 내 이마 위에 입술을 눌렀다. 뜨거운 한숨 소리와 낮은 목소리 울림이 동시에 전해졌다. 그는 다시 말했다.
“하아, 레이.”
“흐……, 아…….”
얽혀든 사타구니가 아주 뜨거웠다. 그리고 땀으로 아주 습했다. 음경을 쥔 지스카르의 손도 엄청나게 미끈대고 있었다. 손이 성기를 강하게 당기고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나는 어느새 과도할 만큼 느끼고 있었다. 발로 침대 시트를 마구 밀어냈다. 그것만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 다리를 꼬아 지스카르의 다리에 바짝 붙었다.
“아읏……. 아아……. 지……!”
“조금 더…….”
지스카르는 내 머리를 안고 자기 품에 으스러뜨릴 듯 끌어당겼다. 독촉하듯이 손의 움직임을 더욱 강하게 했다. 나는 괴로움에 고개를 저었다. 결국 공기를 삼키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스……카르! 지스카르……!”
“크!”
낮게 신음을 토하며 지스카르가 절정에 올랐다. 나도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지스카르는 마지막 한 방울이 나올 때까지 성기를 쥔 손을 계속 움직였다. 사정감이 전부 가시자 겨우 그 움직임은 멈췄다.
다리가 엉킨 상태로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타구니에 지스카르와 내가 쏟아낸 사정액이 묻어 온통 미끈거렸다. 아, 정말로 기분 더러워.
내가 불편해하며 신음을 흘리자 지스카르가 나를 안아서 바로 눕혔다.
“읏…….”
뒤로 전해지는 통증에 나는 약간 몸을 움츠렸다. 어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자기 좆을 강제로 쑤셔 넣어 구멍을 다 헤집어놓은 덕분이다. 지스카르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나를 눕혀주었다.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가려준 뒤에 놈이 말했다.
“신관을 불러오마.”
“필요…… 없어…….”
나는 힘들게 대답했다. 뒤가 굉장히 쓰라리고 괴로웠지만 이런 꼴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아프고 말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신관을 불러오겠다.”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힘이 없다. 말싸움하기도 귀찮았다. 지스카르는 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주위가 아주 고요했다. 지스카르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는 입술을 벌렸다. 입 모양이 익숙한 단어를 내뱉을 것 같았다.
“…….”
꽤 오랫동안 말을 기다렸다.
결국 지스카르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권에서 계속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1권
지은이: 레브노아드
발행처: 대원씨아이(주)
ⓒ 2021 레브노아드 / 대원씨아이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출판권자로부터 서면에 의한 허락 없이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
The Man of Destiny, MoD(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