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르시타 후작 부인은 마차를 멈추고 쉬어 가기로 결정했다.
“기다려 보지. 안전하단 판단이 들면 출발하는 게 낫겠네.”
추가 낙석이 있을 수도 있었다. 회임 중인 공작 부인이 조금이라도 놀라면 몸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아마 별일 없겠지만…….’
다행히 길 중간에 빈 쉼터 오두막이 있었다. 하인들이 급히 오두막으로 들어가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드시며 잠시 쉬세요, 공작 부인.”
하녀들이 분주하게 가져온 간식을 풀어 놓았다.
사과와 달걀이 든 샌드위치, 햄, 달콤한 쿠키, 철통에 든 깨끗한 우유. 모두 오늘 새벽에 르시타가의 하녀들이 만든 요깃거리였다.
“낙석이 또 일어날 가능성도 있나요?”
“글쎄, 이런 일은 몇십 년 만에 처음이라 하는군요. 사람들이 상황을 알아보고 있으니, 잠시 여기서 쉬도록 해요.”
“네에.”
다행히 오두막 안에는 긴 의자도 있었다. 르시타가의 하인들은 그녀들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 위에 푹신한 비단 쿠션과 요를 깔아 주었다.
루나는 워낙 사교계에 무지해, 그녀들이 말해 주는 귀족들 세계의 재미있는 일들 이야기가 다 몹시 신선하고 재밌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루나는 약간 졸려졌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꼬박 졸았다.
“루나?”
페니가 루나를 작게 불렀다. 그에 르시타 후작 부인이 깨우지 말라며 작게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저때는 자도 자도 졸리단다.”
* * *
루나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아주 깊고, 깊은 꿈이었다.
‘아, 여긴 오랜만이다.’
그녀는 검은 꽃이 무성한 꽃밭에 있었다. 무릎에 풀물이 든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꽃들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꽃잎이 하늘로 쳐 올라 소용돌이치며 루나의 배 안으로 날아들었다.
잘 보니 그 것은 커다란 금빛의 새였다. 불처럼 타오르는 새.
‘……아, 이건…….’
그 순간이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에서 치솟더니 루나의 배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는 너무 놀라 웅크리며 비명을 질렀다.
천천히 눈을 뜨자, 루나는 눈앞에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러자 또다시 도서관이 있었다.
‘일기의 뒷이야기를 읽어야 해. 나와 아키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루나는 급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다시 쿵쿵대는 소리가 났다. 꿈이 벌써 끝나는 걸까? 그녀는 급히 책을 빼 들었다.
그때였다.
도서관의 천장, 아름다운 달빛 너머로 처음 보는 보석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루나는 놀라 일기장을 떨어뜨렸다. ‘그것’이 웃었다. 드래곤이었다.
―너를 찾아오려 했단다.
드래곤이 속삭였다.
―드디어 내 신부를 만날 수 있겠구나. 오늘은 꿈이 너무도 짧아 길게 말할 수 없겠구나. 곧 만나러 가마. 아키스에게 돌아가지 말거라. 그 아이가 너에게 너무 많은 보호 마법을 걸어 둬서 나도 접근하기 힘들거든. 알겠느냐?
루나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나,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아.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아.”
“으, 응…….”
페니가 잠든 루나를 깨웠다. 루나는 일어나서도 아직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마차를 다시 타서도 계속 꿈이 떠올라 멍하기만 했다.
“루나? 괜찮니?”
“아, 아무것도 아냐.”
르시타가의 숲속 별장은 몹시도 훌륭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절경의 별장이었지만, 루나의 눈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루나, 몸이 안 좋니? 주치의에게 좀 봐달라고 할까?”
“아니, 아니에요.”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행의 첫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또다시 밤이 되었다.
‘다시 잠들면 낮에 꾼 꿈을 이어 꿀 수 있을까?’
꿈속에서 드래곤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꿈을 너무 의식해서인지 루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도서관에 있었다.
* * *
그녀는 달빛이 비추는 꿈속의 도서관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일기장을 펼쳤다.
루나는 급하게 일기장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었다.
페니의 사연, 아키스를 사랑한 일, 전생부터 이어진 휘멘과의 인연, 마지막으로 일기장의 내용을 붉은 책 안으로 옮겨 준 아키스.
루나는 아키스가 왜 자식을 가지는 걸 두려워했는지 알았다.
‘아키스, 이곳이 당신이 말한 그 신들의 도서관인가요? 당신 말대로 이 안에 내 일기장이 있었어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그제야 루나는 왜 자신이 일기장을 읽을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미래의 아키스가 이 붉은 책 안에 일기장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루나는 지금, 그가 말한 그 신들의 도서관에서 일기를 읽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규칙을 가진 곳…….’
이윽고 루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전부 읽었다.
‘이 일기를 마지막으로 미래의 나는 죽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루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그렇지. 결국 당신을 사랑했잖아. 아키스, 당신 말이 틀렸어요. 우리가 미래에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 했잖아요.’
루나는 책을 덮고 번호가 있었다는 책의 모서리를 쓸었다. 그 위로 숫자가 드러났다.
“이건 첫 번째 책이구나. 그래, 내가 가진 붉은 책과 모두 같은 시리즈였던 거였어.”
루나가 가진 책도, 이곳에 있는 책도. 모두 같은 달이 그려진 붉은 표지의 책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사랑했어. 하지만, 지금과 다른 점이 있어. 난 내가 그의 각인자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모르고 죽었어.’
도서관 바닥에 주저앉은 루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서 이번엔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루나는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드래곤은 커다란 주둥이를 그녀에게 향한 채 그저 기다려 주었다. 루나는 아이처럼 히끅 대고 있었다.
“내, 내 아기들 어디 갔어요?”
루나가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의 배는 임신 전처럼 훌쭉했다.
루나는 드래곤이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긴 꿈속이잖니. 괜찮아. 네가 일어나면 네 배 속 아이들은 무사할 거다. 잘 자라고 있단다.>
드래곤이 다가오자, 루나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신비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걸 제게 보여 준 건가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고 싶으셨나요? 내가 당신의 계약자인…… 아키스의 각인자라서?”
<그리고 넌 내 신부기도 하지. 인간의 부부와는 다르지만, 넌 내게 가족 같은 존재란다.>
드래곤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몹시도 따사로웠다. 루나는 그 순간 드래곤에 대한 모든 공포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말해 줘요. 왜 이제야 오셨지요? 아키스의 보호 마법은 무슨 말이에요?”
<아키스는 내 힘을 빌어 쓰는 아이지. 내 마법은 내 자신에게도 치명적이란다. 그 아이가 네게 걸 수 있는 모든 보호 주문을 걸어 나도 쉬이 접근하지 못했다. 아마 너는 살아가는 동안 무탈할 거다. 그가 모든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그 말에 루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종종 아키스가 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가 몰래 마법 주문을 건 건가, 루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랬단 말이지…….’
루나는 그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과보호도 이 정도면 병이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이 도서관에 있을 수 있죠? 아키스가 제게 신들의 도서관이라는 곳에 대해 말해 주었어요. 혹시 그곳이 여긴가요?”
<영리한 아이구나.>
드래곤이 속삭였다.
<맞다, 이곳은 내 도서관이다. 그리고 네 일기장을 여기 소중히 간직해 놓았지. 언젠가 네게 보여 주기 위해…….>
그 말에 루나는 숨을 삼켰다.
<이곳은 이 세상 모든 지식이 있는 나의 도서관이지. 이곳에 들어온 자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읽을 수 있단다. 다만, 너는 살아 있는 자이기에 너에 관련된 이야기만 읽을 수 있지. 그래서 일기장 외엔 아무것도 읽지 못한 거란다.>
“그렇군요.”
알 것 같은 이야기였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전 여기 오기 전엔 고대어를 한 자도 몰랐어요.”
<너는 아직 자각하지 못했지만, 신들의 도서관에 들어갔다 나온 이는 이 세상 모든 이종족의 언어를 할 수 있단다. 모르겠니? 누가 널 로드로 만든 건지.>
드래곤이 루나의 귀에 속삭였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신 건가요? 내가 로드가 돼서 결계를 움직이라고? 하지만 미래의 나는 죽었는데…….”
<난 제국을 수호하지 않아. 내겐 의미 없는 개념이지. 하지만, 내 계약자의 부탁을 들어주려 노력하지. 네 일기장에 적힌 아키스는 제국이 위험에 빠지자, 나를 소환해 제국의 수호를 요구했다.>
루나는 어렵지 않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미래의 아키스는 드래곤을 불러낸 대가로 죽어 갔는데, 그는 당연히 파탄 난 상황을 구제해 달라 했을 것이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선 새 로드가 필요했군요.”
<잘하고 있다. 더 생각해 보렴. 에리스의 예언을 떠올려 봐. 누가 로드가 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한낱 인간인 카리노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여자가 누군지. 더 강한 자의 규칙에 지배를 받는 게 누군지.>
루나는 전율했다.
드래곤은 미래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여자를 드래곤의 신부, 각인자로 요구했다 한다.
“애초에 나만 로드가 될 수 있었겠군요. 카리노의 마법에서 벗어나려면 아키스의 각인자가 되어 당신의 규칙의 지배를 받아야 했어요. 그래서 나는 고대어의 재능을 가질 수 있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날 로드로 만들기 위해 신부로 찾은 거고요.”
드래곤은 말없이 긍정했다.
“……정말 드래곤은 대단하군요. 마음대로 로드를 선출할 수 있다니.”
<아직 모르겠니? 에리스도 여기 왔다 갔어. 로드가 선출되면, 그들은 신들의 도서관에 다녀온다. 그러기에 일곱 가지 언어를 할 줄 알게 되는 거야. 일곱 가지 종족이 인간에게 권능을 주었다 하지만, 결계에 마지막으로 힘을 실어 준 건 드래곤들이었다. 그들만으론 역부족하지.>
“에리스도 자신이 이 도서관에 다녀온 일을 기억했나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이곳에 오가면, 신들은 그들의 기억을 지우지. 그래서 에리스도 그걸 몰랐던 거야. 다만, 몇몇 영민한 역대 로드들이 무의식중에 기억해 신들의 도서관의 전설을 만들어 냈지.>
“아아…….”
루나는 알게 된 진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그러면 아키스를 불러 로드로 만들지 않으셨어요? 그가 결계의 제어권을 가진다면…….”
<공작가의 아이들은 로드가 될 수 없단다. 무엇보다…… 에리스는 로드의 혈통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특별한 마법을 걸었다. 자신의 생명을 소진시키는 마법. 다음 대 로드는 무조건 자신과 같은 여인으로 태어나는 마법을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네가 이곳에 왔지. 너는 에리스의 후계자이나 피는 이어져 있지 않단다. 다만 그 조건을 충족시켰을 뿐이지.>
“그랬군요…….”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드래곤은 에리스의 피를 이은 여인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로드의 일가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키스가 내게 보호 마법을 걸기 전에는요? 그땐 왜 제게 오지 않으셨지요?”
“그건.”
드래곤이 속삭였다.
<나도 언제나 널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내 신부와 각인이 시작될 때, 그리고 네가 공작가의 후계자를 임신했을 때, 그리고 네가 죽을 때. 그때만 만날 수 있지. 그때가 아닐 때 널 만나려면 여간 힘을 써야 하는 게 아니다.>
<…….>
<그리고 얼마 전 아주 큰 힘을 쓸 일이 있어 내 힘이 많이 약해져 있지. 저번에 네가 도서관에 왔을 땐 널 여기까지 부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만나는 덴 실패했지.>
전능한 드래곤이 실패라는 말을 하는 건 몹시 묘했다.
루나는 그때, 제국이 멸망하는 미래의 이야기를 도서관에서 읽은 날을 떠올렸다.
도서관이 계속 진동하던 것이 그것이 드래곤이 도서관 안에 들어오기 위해 몸부림 친 거라면……. 그렇다면…….
주변 정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제가 가진 붉은 책도 당신이 보내 주신 건가요?”
<그건 내 마법이 아니란다. 이미 알고 있지 않니? 그 책의 주인이 누군지. 그만한 진실을 알고 있는 자가 누구일지. 네 짐작이 맞다.>
루나의 몸이 굳었다. 역시 드래곤은 뭐든지 알고 있었다.
“이 도서관이 있기에 당신이 모두 아는 건가요?”
<그게 너희와 나의 유일한 차이점이지.>
어느덧 드래곤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것은 거대한 괴물의 형태에서 사람 모양의 빛무리로 작아져 있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세상 모든 지식이 담긴 도서관을 갖고 있는 것. 그리고 이 형태 또한 너희가 상상한 모습이란다.”
루나는 빛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음 아이가 생길 때까지 당신을 만날 수 없겠군요.”
“네 배 속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축복하기 위해 한 번 더 내려올 수 있지. 아키스도 어린 시절 내 꿈을 꾸었다 말했을 거다. 그때 네 꿈에도 찾아갈 수 있을 거야.”
루나는 빛무리를 어루만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두려워해요. 당신이 우리 아이를 앗아 갈까 봐. 그렇게 하실 건가요? 만일 두 명 다 보라색 눈을 가진 아이로 태어나면요? 그럼 한 아이는 빼앗아 가실 건가요? 누군가를 선택하면 다른 아이는 죽나요?”
드래곤의 몸에서 흩어진 작은 빛무리가 루나의 귓바퀴에 스며들었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하나만…….”
루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일들은 정말 일어났던 일이 맞는 거죠?”
드래곤의 입이 움직였다.
<맞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이…… 아키스를 위해 시간을 돌렸나요?”
드래곤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그렇게 운명이 크게 움직인 일은 말할 수 없다. 이제 꿈이 끝나 가는구나.>
루나는 뭐라 입을 열려했다.
<다음 꿈을 꿀 수 있을 거다. 이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났어.>
루나는 드래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빛무리가, 사라져 갔다.
* * *
루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루나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눈가가 아직 축축함을 느꼈다.
그녀는 배를 끌어안고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숄을 걸치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아키스가 보고 싶었다.
‘다음 주까지는 못 기다려.’
본래 이번 여행은 일주일 계획이었다. 출산을 하고 한동안 여행을 가지 못할 터이니, 길게 가자는 르시타 후작 부인의 권유였다.
루나는 일어나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던 페니를 조심스레 깨웠다. 페니는 영문도 모르고 일어났다.
“저기, 페니. 나 좀 도와줄래?”
이번 한 번만 고집 부릴게. 도와줘. 루나가 속삭였다. 페니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니?”
“마차 좀 준비해 줄래? 마부를 깨워 줘.”
* * *
공작가의 아침 정경은 아직 새벽빛에 젖어 있었다. 루나는 망토를 걸친 채 현관문을 두드렸다.
“공작 부인?”
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집사, 알렉과 마주쳤다. 알렉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가끔 이렇게 깜짝 놀랄 만한 순간에 등장하는 루나였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일찍…… 리튼에 가시지 않았습니까.”
“잠깐 일이 있어 돌아왔어요. 아키스는요?”
“지난밤 잠을 설치셔서 아침 일찍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셨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키스가 갔을 것으로 분명한 산책길을 향해 등을 돌렸다.
“공작 부인, 어딜 가십니까. 잠시만요. 너무 빨리 걸으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알렉.”
루나는 배를 안은 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집사는 왠지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눈을 크게 떴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 * *
길을 걷는데 감정이 격양되었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
아키스를 처음 만나고, 그는 이상하게 사내인 루를 편애했다. 항상 잘해 주었다.
‘그 사람은 모든 약속을 지켰어.’
미래의 루나. 그녀는 죽어 가며 다시 태어나면 아키스가 저 따윈 모른 척할 거라 생각했다.
그때, 루나가 그에게 다시 만나자고 한 말은 그저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던진 농담이었다.
아키스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 선의의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걸까? 아니면 모두 우연일까?’
그러나 어쩐지 루나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삶은…… 그 사람이 약속했던 삶이야.’
지금 그녀의 행복한 삶은 그의 약속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자꾸만 눈앞이 일렁였다.
너무 큰 감정이 몸을 뒤덮였다. 아키스를 너무 사랑했다.
‘진심이 아닌 말도 있었는데, 그랬는데.’
칭얼거리며 한 말이었으나, 그는 모두 이루어 주었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라.’
‘그냥 당신과 평범한 사람들처럼 거리를 걷고 싶어서요.’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다시 만나면 바로 알아보죠.’
사라진 미래와 현재가 교차되었다.
그 꼬인 매듭이 하나가 되어 루나의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루나는 그 가장자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걸어,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지 못한 것까지 전부 이루어 주었어. 그의 마음을 보여 주었어.’
차마 못했던 말. 사랑해 달라는 말. 사랑하자는 말. 필요로 인해 자신을 원하는 것이 아닌, 그녀를 원해 단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
루나는 당장이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호숫가에 아키스는 없었다. 낡고 썩은 나룻배만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후드득.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숫가와 숲 뒷길로 이어지는 곳에는 자그마한 정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가 배를 안은 채 잠시 비를 피했다. 날씨가 쌀쌀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비 사이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쓴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가 성큼 다가왔다. 우산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두 번의 삶에 걸쳐 사랑한 사람.
루나는 떨어져 내리는 비가 굉장히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느꼈다. 동시에 빗물은 수정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루나?”
그가 정자 안에서 울고 있는 루나를 보고 놀라 다가왔다. 밭은 그 목소리가 마음속에 가득 찼다.
“왜 그래요? 어떻게 이렇게 혼자 돌아왔습니까.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뇨, 아니에요.”
루나는 한 발짝 내려갔다.
긴 드레스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놀란 그가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웠다. 그 그늘이 그녀에게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루나는 그의 가슴에 코를 댔다.
“그냥요, 당신이 보고 싶어 왔어요.”
“괜찮습니까?”
“으응. 괜찮아요.”
그녀는 훌쩍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키스.”
“네?”
“고마워요. 모든 것에.”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쥐었다. 그의 손등 마디에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로.”
그녀의 작은 훌쩍임은 배 속의 아이가 보채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키스는 당황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 * *
아키스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루나의 머릿속은 몽롱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또렷이 자리 잡혀 있었다.
‘꿈은 끝났어. 이제 그 미래는 오지 않아.’
아키스의 팔에 안겨 저택에 들어가자, 루나의 기행에 모두가 수선을 피웠다. 아키스는 시녀를 물리고 루나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직접 도와주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집사가 당신이 와서 정원에서 날 찾고 있을 거라 하더군요. 얼마나 놀랐는지.”
“또 꿈을 꿨어요, 아키스.”
“…….”
루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말해 주고 싶었어요. 꿈 이야기를요.”
그들은 뿌리가 붙은 나무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일들은 지어낸 것도, 또 예언도 아니었어요. 모두 일어났던 일이래요.”
루나는 아키스의 귀에 자신이 알게 된 일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 * *
지금은 사라진 미래.
드래곤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결계가 무너져 지상이 박살이 난 미래.
드래곤은 루나가 죽은 후의 일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마지막 일기를 쓴 날 이후, 루나는 열흘을 내리 잠들었다. 그리고 자는 사이 조용히 죽었다.
<네가 죽은 후 나에게 왔지. 내 계약자와 그 후손, 그리고 각인자들이 죽으면 나는 직접 너희를 맞이하러 간다.>
의식불명의 그녀는 꿈속에서 신들의 도서관에 향했다. 그때도 같았다. 루나는 붉은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를 보았다.
‘아키스의 말이 맞잖아. 내 일기장이 정말 여기 있네. 여기가 정말 신들의 도서관이구나. 아아,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어.’
루나는 싱글벙글 미소 짓느라 자신이 적은 일기장 내용이 점점 신비한 언어로 변해 가는 것도 몰랐다.
죽은 후 드래곤을 만나는 건 좀 예상외였지만. 그러나 드래곤이 말해 준 사실들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이제 아키스가 살 수 있을 거란 거죠? 병이 재발하는 건 없고요?”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이제 내 힘을 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전쟁도 나가야 할 테고 조금 힘든 일도 남았지만 어쨌든 천수를 누릴 거다.>
그녀는 세계의 멸망에 끝에서 로드로 지정되었다. 루나는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됐어. 아키스가, 그 남자가 살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되었어.’
* * *
그리고 루나가 죽은 이튿날.
새틴은 이상한 꿈을 꿨다. 어떤 도서관의 꿈이었다. 그 안에서 새틴은 루나의 일기장을 읽었다.
‘아침부터 기분 나쁜 꿈을 꿨네. 하여간, 그 루나 그 애는 엄살쟁이라니까. 가난하고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것을 영주 집에 시집보내 줬으면 행복하다 느끼며 만족할 줄 알아야지. 후반부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었다니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재수 옴 붙는 꿈이었어. 근데 일기 내용이 다 사실일까? 사실이면 좋겠다.’
새틴의 입가에 간악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 애가 운 좋게 공작의 정부가 되었다면 나름대로 이용할 수 있을 텐데. 아, 루나 이름 팔아서 공작에게 접근하면 되겠다. 우리가 좀 닮은 부분이 있나? 같은 혈통이면 걔보다야 내가 낫지.’
가끔 루나가 시집간 후에도 그녀가 생각나긴 했다.
머리는 그 애가 제일 잘 말았는데. 일을 시킬 사람이 없어져 참 아쉬웠다. 루나가 다음으로 온 하녀들은 모두 죽는 소리만 했다.
‘이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다 하는 건 무리예요. 일을 줄여 주세요.’
그래, 루나만큼 말을 잘 듣는 애는 없었다.
‘뭐, 지금이야 하녀는 얼마든 고용하면 되지만.’
그녀의 남편은 엄청나게 부유한 상인이었다. 신분은 좀 떨어졌지만, 그녀는 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제국이 파탄 지경이 되었지만, 그녀는 당시 공국으로 부부 여행을 가 있어 안전했다.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남편은 식량을 매점매석했다. 그리고 경제가 파탄 나고 수도에서는 보석과 모피, 귀한 재물을 내놓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새틴은 손가락에 반지를 네 개나 끼고 다녔다. 남편이 식량을 발 빠르게 독점한 덕에 값비싸게 식량을 팔아 더 호화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모두 매입해요. 빨리, 대리인을 보내요!’
그날 남편에게 충고한 덕분에 새틴은 매일매일 극찬을 받고 살았다. 남편이 여론을 의식해 식량 창고를 조금 풀까, 물어봐도 새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걸 왜 해요? 우리 건데.’
모두가 굶주리는 시기에 식량값을 폭등시키는 그녀의 가문에 맹비난이 가해졌지만 새틴은 전혀 이해를 못했다.
“참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네. 본인이 가난한 게 왜 우리 탓이지? 이건 거래라고, 거래. 세상 사람들은 어리광이 많아.”
연일 신문에 그들 부부에 대한 비난이 실렸지만 그녀는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이상하다…….’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릿속에 왜 자꾸 이상한 언어가 떠돌지? 나는 외국어를 할 줄 모르는데. 지나가다 들었나?’
* * *
“잠깐만.”
아키스가 루나의 말을 끊었다.
루나는 꿈에서 알게 된 일을 아키스에게 설명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미래에서 죽은 후 일어난 일을 드래곤이 상세하게 말해 줬다, 이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네.”
“당신이 죽기 전에 로드가 되었고, 당신이 죽은 후…… 새틴이 일곱 가지 고대 언어를 할 줄 아는 로드로 발현했다고?”
“네. 잊었어요? 당신 가문과 같아요. 특이한 형질의 가주가 죽으면 그 재능이 살아 있는 혈육에게 가요. 위로는 안 가고 아래로 가죠. 새틴이 동갑이긴 하지만, 생일로는 나보다 몇 개월 동생이거든요. 내가 죽기 전에 꿈에서 아카식 레코드, 신들의 도서관에 가 유일한 로드가 되었죠. 그리고 내가 죽었으니 새틴이 나 다음 로드가 된 거예요.”
루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땐 얼마나 기겁했는지. 꿈속이 아니었다면 배 속 아가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큰일이었겠군요.”
“그쵸? 만일 시간이 되돌려지지 않았다면 새틴이 로드가 되는 세계가 남았을 거라고요.”
“하지만 왜…….”
“아키스, 로드가 되는 법은 신들의 도서관에 다녀오는 법이에요. 잘 생각해 봐요.”
그 단서만으로 아키스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눈치챘다. 그는 침통한 신음을 냈다.
루나는 작게 웃고 아키스를 보았다.
“맞아요. 어차피 로드로 선출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었어요. 당신의 미래 각인자인 나요.”
* * *
르시타 후작 부인은 아침에 일어나, 공작 부인이 사라진 것에 몹시 놀랐다.
“얘, 이게 무슨 일이니? 공작 부인은?”
급하게 페니를 깨웠으나, 페니는 졸린 얼굴로 다시 베게에 얼굴을 댈 뿐이었다.
“잠깐 공작가에 갔어요. 여행 일정은 기니, 다시 돌아오겠지요. 하루 있다 금방 오겠다 했거든요.”
“……뭐?”
어제 도착한 참인데 갑자기 집에 돌아간 게 정상인가? 르시타 후작 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페니는 몹시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건…… 좀…… 혹시 무슨 일이 생겼니?”
“그건 아니랬으니 아닐 거예요. 온다고 하면 오는 애예요. 그냥 아무 말도 묻지 말아 달라 했으니 그런 거죠.”
페니는 느긋이 미소 지었다.
* * *
카리노 대왕의 마법.
그가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펼친 마법은, 여인에게 고대어의 재능이 발현하지 않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마찬가지로 여자 마법사도 탄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규칙에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혈통이 있었다. 보랏빛 눈의 아이들, 공작가의 아이들이었다.
에리스는 그 반대로 여인만 로드가 되는 마법을 펼쳤다. 그러니, 공작가의 각인자인 여인이 아니면 로드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드래곤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어요. 선조 중 마법사와 번역가가 있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혈육이 있었죠.”
루나는 미소 짓고 긍정했다.
“각인자인 내게 병을 옮기고 당신을 살린 다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당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을 거예요. 드래곤은 그 기간이 10년 정도라 했어요. 그럼 마력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가 자손도 볼 수 있었을 거였고요. 그리고 죽은 나의 혈육 중 하나가 로드가 되어 결계를 제어할 수 있게 되는 미래. 그게 원래 드래곤이 그린 미래였어요.”
“그러나 그 미래에 당신은 없었군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끔찍하게 죽은 제국의 사람들도 돌아오지 못했겠죠. 아마 그 후, 제국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을 거예요.”
그녀는 아려 오는 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루나는 일기장의 내용을 전부 세세히 읽었다. 미래에 공작가의 사람들 대부분이 죽는다. 지진 첫날 공작가의 본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가 변했다, 시간이 되돌려졌다, 그겁니까? 그게 우리의 구명줄이었군요.”
아키스가 탄식하듯 말했다.
“네. 시간이 되돌려져 우리의 각인은 깨졌죠. 하지만 나는 아직 ‘로드’일 수 있었어요. 그 증거로 꿈속에서 신들의 도서관을 드나든 거죠.”
루나는 손을 뻗어 아키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럼 어떻게 시간이 되돌려진 거죠? 그것도 드래곤의 마법인가요?”
루나는 초록색 눈으로 아키스의 보랏빛 눈을 보았다.
“그렇지 않을까 해요. 내가 물었을 때 부정하지 않았거든요. 다만, 드래곤은…… 그분 또한 운명이 바뀐 큰일은 발설하지 못한다 했어요. 그러니 아마도…….”
루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 세상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은 단 한 가지. 시간 마법뿐일 거예요.”
아키스는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시간을 돌아 당신이 내게 온 거군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돌이켜진 건 가장 큰 기적이었어요. 그리고…….”
루나가 아키스의 품에 뺨을 기댔다. 그녀는 배를 어루만졌다.
“만일 그대로 미래가 흘러갔다면, 이 아이들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아키스는 루나의 손에 손을 겹쳤다.
배 속의 아이들은 자고 있는지, 어미와 아비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오늘따라 아주 조용했다.
‘이 여자는 내 운명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아키스도 순간 가슴이 벅차 왔다. 그는 루나가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녀를 너무도 만지고 싶었다.
“아키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술이 겹쳐졌다. 자신을 너무 원해서 갈구하는 만큼 빨아들이는 그의 혀가 버거웠다. 루나는 숨을 덥게 몰아쉬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잠깐,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드래곤에게 들은 말이 더 있거든요.”
루나는 아키스의 뺨을 쥐고 속삭였다. 투명한 눈물이 다시 눈에 고였다.
“아키스, 오늘 아침에 왜 호숫가에 갔어요? 요즘 한참 호숫가의 나룻배에 가지 않았잖아요.”
루나는 아키스가 고민하는 일이 있을 때만 호숫가의 나룻배에 간다는 걸 알았다. 루나가 덮개를 만든 이후로 묘하게 가는 것이 줄어들더니 요즘은 거의 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여행을 가자마자 호숫가를 찾아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루나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흘러넘쳤다.
“당신, 그간 은근히 불안해하고 있었지요? 우리 아이들을 드래곤이 앗아 갈까 봐. 당신의 이복동생이 죽고 나서 당신이 보라색 눈으로 발현했잖아요. 그렇지요?”
아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버림받은 아이였다. 그가 이 가문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그의 계모이자 이복동생의 생모. 공작 부인이 드래곤이 아이를 물어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였다.
“일기장에서 읽었나 보군요. 미래의 내가 말했나 봅니다. 아니면 드래곤이…….”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꿈에서 드래곤을 보고 직접 물었어요. 당신의 불안감에 대해.”
루나는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안심해요, 아키스. 당신은 신의 사랑을 받는 일족이에요. 드래곤은 계약자들을 해치지 않아요. 그는…… 당신의 이복동생 단달로스를 죽이지 않았어요.”
루나는 속삭였다.
“미래의 당신에 대해 일기장에 적혀 있었어요. 단달로스라는 이복동생이 죽은 것에 대해 당신은 죄책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더 강한 자신이 드래곤에게 선택받은 이유가 미래의 재앙을 대처하라고, 체스 말로 이용당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루나는 속삭였다.
“그건 그냥 그 아이의, 어렸던 단달로스의 운명이었대요. 그애는 공작가의 힘을 계승하기엔 너무 약한 그릇으로 태어났다고 해요. 그래서 사실은 더 어릴 적에 죽을 몸이었대요.”
“……그 애는 사고사 한 걸로 아는데.”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오히려 그 아이의 수명을 늘리려 노력했대요. 시간 마법이 아니고서야 드래곤도 사람의 수명이나 운명을 바꾸진 못한다 했어요. 시간 마법이 일어나고, 단달로스도 수명이 늘어날 수 있었대요. 이번 현실에서는요……. 하지만 그 앤 너무 약해서, 공작가의 후계자론 살 수 없었대요. 날 때부터 그리 정해진 운명은 드래곤도 쉬이 바꾸지 못한다 했어요.”
루나는 가슴이 아팠다.
반대로, 공작가의 비틀린 운명 때문에 아키스는 현재의 시간에서는 바깥에서 더욱 고생하며 커야 했다.
어쩌면 그가 치러야 할 대가인지도 몰랐다.
“……믿을 수 없군요.”
아키스는 전율했다.
“그럼 단달로스가 죽은 건…….”
“당신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요. 공작가에서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죄책감을 심어 준 거예요.”
루나는 아키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마주친 녹색 눈동자에 아키스는 숨이 멎을 듯했다.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신비할까. 정말 저를 구원하러 온 이가 있다면 그녀가 아닐까.
“그럼 우리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나요?”
루나는 눈물을 닦고 미소 지었다.
“공작가는 번영할 거래요. 그리고 우리 모두 오래오래 천수를 누릴 거래요. 곧, 신관을 통해 신탁을 보내겠다 했어요.”
그제야 아키스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드래곤이라는 이름의 신은 우리 가문을 수호하는 거죠?”
“글쎄요. 그것도 다음번에 만나면 물어볼게요.”
드래곤은 다시 꿈속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타이밍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키스가 수명이 다할 때,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복할 때.
“아이들이 건강할거래요. 기다려져요.”
루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폐부에 숨이 벅차올랐다. 그와 그녀의 아이는 무사할 것이다, 영원히.
‘그녀에게 나는 단달로스의 이름을 알려 준 적 없어.’
그녀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 의심할 것도 없지만 증거 또한 너무 또렷했다. 아키스는 경건함과 숭고함을 담아 그녀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입술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어루만졌다.
“참, 당신이 다 좋은데. 하나 못해 준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아키스는 고개를 들었다.
“물질적으로만 너무 잘해 주셨어요. 드레스, 보석, 뭐 비단 이불. 리튼에서의 결혼식이랑 밤바다를 같이 본 건 좋았으니까 이건 예외.”
루나는 손가락을 접다가 아키스의 고개를 손으로 잡고 쪽 키스했다.
“미래에도 현재에도 내가 진짜 바란 건 그것만이 아니거든요.”
“그게 뭐지?”
“아침저녁으로 사랑한다 해 주기.”
지난 삶에는 그에게 차마 말하지도 못했던 작은 소망이었다. 루나는 눈을 휘었다. 아키스는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자신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온점이었다. 그래서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데.”
“으음…… 그럼 이틀에 한 번.”
루나의 말에 아키스는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렇게 익숙해졌다가 늘리죠. 그리고 꼭 매일 아침 사랑한단 말을 하게 만들 거예요.”
아키스는 농담으로 한 말에 그녀가 몹시도 귀엽게 반응하는 것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말 자신이 맹수가 되는 기분이었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온몸을 깨물고 싶을 정도다. 그녀를 초콜릿처럼 빨아들여 온몸이 그녀의 향에 적셔져 그 질척함 사이에 녹고 싶었다.
‘좋아 죽겠군.’
그런 삶이라면 중독되어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포근한 우유 냄새와 달콤한 체향을 빨아들이며 아키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온몸으로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는데 그게 전해지지 않은 건, 유감입니다.”
아키스는 루나의 허벅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온몸을 사랑하는데. 다 깨물고 삼키고 싶을 정도로, 지금도…….”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손등을 탁, 때렸다.
“당신은 정말…….”
아키스가 루나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뚜렷히 마주보았다.
“당신이 원하면 해야죠.”
아키스가 속삭였다.
“낮에든 밤에든 당신이 흠뻑 젖을 때까지 사랑해야지. 안 그래?”
루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살며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얼굴이 풀려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죠. 드래곤이 꿈속에서조차 접근하기 힘들 정도라니, 도대체 몰래 내 몸에 수호 마법을 몇 개나 걸어 둔 거예요.”
루나는 아키스의 무릎을 손으로 꼭 누르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키스는 잠시 눈을 피했다가 말없이 한 손을 들어 보았다.
“……다섯 개?”
“아뇨.”
“50개요?”
아키스는 침묵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 개 더 걸 생각이었는데……. 그리고 휘멘이 오면 더…… 흑마법사만 쓸 수 있는 종류의 보호 마법도 있습니다.”
“나 참, 정말 못 살아요.”
루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대로 그를 바라보던 루나가 아키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다음번엔 말 좀 하고, 그리고 마법은 좀 걷어요. 숨 막혀 죽겠네.”
“알겠어요.”
아키스의 손이 루나의 허리를 반사적으로 잡았다. 그리고 서서히 입술이 겹쳐졌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아키스가 셔츠를 벗으며 루나의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위에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고 선 그가 목덜미와 턱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키스했다. 입술이 얽혔다. 그가 손가락으로 루나의 아랫도리를 길게, 오래 풀었다.
“내가 올라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너무 깊게 들어오면…….”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임신 말기라 조심해야 했다. 아키스가 주도적으로 삽입하면 너무 깊게 들어갈 수도 있었다.
“천천히 올라타요.”
아키스가 루나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루나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의 위에 올라탔다.
“당신 구멍을 내 것에 맞춰 봐. 착하지.”
아키스가 속삭이며 달랬다.
“으응…….”
루나는 민망함을 느꼈다. 아키스가 그녀의 엉덩이 위쪽을 독촉하듯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엉덩이를 쥐고 주물렀다.
루나는 눈을 꼭 감고 아키스의 우뚝 서 쿠퍼액을 흘리는 것에 자신의 구멍을 맞추고 비볐다. 질구가 살짝살짝 그의 흉흉한 귀두에 자극받으며 몸이 바르르 떨렸다. 이미 질척한 애액이 흘러내려 루나의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다.
“천천히, 그대로 삼켜 봐.”
아키스가 루나에게 속삭였다. 루나는 아주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아키스가 루나의 양손에 깍지를 낀 채 몸을 지탱해 주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아!”
루나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구에 마찰되는 기둥에서 찔걱대는 소리가 울렸다. 하나의 물결이 된 것처럼 아키스가 맞추어 아주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예뻐, 당신은. 정말 사랑스러워…….”
“흐응. 하아.”
“당신 안이 질퍽해서 녹아서 달라붙을 것 같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아키스의 것을 조르는 루나의 내벽 은 녹진했다. 닿은 곳에서 쿠퍼액과 섞인 애액이 거품 섞여 줄줄 샜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가슴을 딱 붙였다. 부푼 배 때문에 완전히 붙지 못한 상체가, 스칠 때마다 바짝 선 유두가 아키스의 탄탄한 가슴 근육을 간질였다. 그 감촉은 아키스를 더 미치게 했다.
“흐으, 응, 아아!”
루나의 새된 신음을 들으며 아키스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인자의 감정 공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키스가 느끼는 쾌감이, 루나가 느끼는 쾌감이 서로에게 흘러들어왔다.
‘너무 좋아, 아, 미치겠어…….’
온몸의 신경이 쾌감을 위한 감각으로 바뀐 느낌. 이 세상에 맞물린 상대만이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라는 느낌. 너무 큰 쾌감에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키스가 마저 몸을 움직였다.
“으응…….”
아키스의 입술이 루나의 입술을 덮었다. 루나의 입 안에서 아키스의 혀가 유영했다. 루나는 기꺼이 그 혀를 휘감고 그를 입 안으로 받아들였다.
위아래로 연결된 몸 위로 설탕을 바른 듯 달콤한 감촉이 서로를 덮쳤다. 아키스의 허리가 더 느려졌다.
그랬다가 천천히 속도를 높이고…….
아키스는 루나의 안에 아주 오래, 천천히 머물렀다. 아주 느긋하게 그녀의 몸을 누볐다. 이대로 영원히 하나가 된 채 있고 싶었다.
“누워 봐요. 천천히.”
끔찍하게 쾌감으로 얼룩진 낮은 목소리로 아키스가 중얼댔다. 루나는 아키스의 팔에 의지한 채 조심조심 뒤로 몸을 눕혔다. 루나가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은 걸 확인하고 아키스가 주도적으로 허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아, 응……. 아앗…….”
질컥, 질컥.
아키스가 앞뒤로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검붉은 성기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루나는 반사적으로 배를 부둥켜안았다.
아키스가 루나의 발목을 잡아 올렸다. 그대로 그가 한쪽 다리를 높이 치켜든 채 성기를 빼냈다. 아키스는 루나의 부푼 배 위에 하얗고 진한 정액을 토했다.
아키스가 루나에게 몸을 숙였다. 그의 이마에 젖은 땀이 루나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아키스가 루나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사랑해요.”
루나가 몽롱하게 중얼댔다. 그는 대답 대신 루나의 온 얼굴에 키스했다.
“나도요, 너무 많이.”
아키스가 속삭였다.
수십 번을 서로 사랑하고 수십 번을 몸을 겹쳤어도 유별나게 애틋한 밤이었다.
* * *
“이제 그만―.”
루나는 목소리를 길게 뺐다. 루나의 어깨를 감싼 아키스의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으음, 응…….”
끈덕지게 섞이는 입술이 더웠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일 때마다 루나의 얇은 입술이 까뒤집어졌다.
“이제 그만 가요. 밖에서 마차를 보고 무슨 생각하겠어. 네? 지금쯤 내가 도착한 거 모두들 알았을 거예요.”
떨어진 루나의 입술은 퉁퉁 부어있었다. 아키스가 아쉽다는 듯 선홍빛 도는 입술을 보았다.
“조금만 더. 페니는 조금 있다 봐도 되잖아.”
“안돼요. 페니와 할 말도 있고. 그리고 갑자기 떠난 것도 사과해야죠. 페니는 소중한걸요.”
루나는 페니에 대한 마음도 애틋했다.
죽기 직전에 제 곁을 지켜 준 친구, 페니. 그리고 그녀가 그 나쁜 놈과 결혼할 뻔했다는 건 생각만 해도 속이 서늘했다. 디온과 그녀를 이어 준 건 맞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루나의 말은 아키스의 질투에 그대로 직격해 버렸다.
“페니 이야기하면 더 괴롭힐 거야. 안 놔줄 겁니다.”
아키스는 루나의 옷깃을 내렸다. 뽀얀 가슴이 튀어나오자, 말캉한 젖무덤에 이를 세웠다.
“아앗…… 싫어, 아키스으…….”
움찔 굳은 그녀의 몸을 느끼며 문신이 있는 곳을 더듬어 살결을 쪽 빨아들였다. 평소에는 마법으로 문신을 가리고 다니는 그녀였다.
“각인을 가린 마법 풀어 버릴까 싶은데. 그럼 내 각인자라고 온 세상에 알리고 다닐 수 있잖아.”
“온 세상에 내가 당신 약점이다, 광고하고 다니고 싶어요?”
그의 아이 같은 투정에 루나는 픽 웃었다. 말캉한 젖무덤 위로 낙인 같은 울혈이 금세 올라왔다. 길고 진한 애무는 한참 후에야 끝났다.
“끝까지는 안 돼. 이 몸으로 어떻게 끝까지 해. 그것도 마차 안에서…….”
길게 말꼬리는 빼는 루나에 아키스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입맛을 다시고 떨어졌다.
이런 점이 사람 미치게 한다.
아키스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는 오직 루나뿐인데 그녀는 아니었다.
루나는 그에게만 매달리는 여인이 아니었다. 초연하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그렇게 제게 태연하게 구는 그녀를 보면 정말 어느 날 자신이 미쳐서 그녀를 가두지 않을까 싶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자신의 배에 얹었다.
“아기들한테도 인사하고.”
아키스는 조금 어색하게 배를 어루만졌다. 나름대로 인사를 하는 건지, 소중하게 댄 손을 조심스레 떼어 낸다.
“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요. 인내심 끊기면 밤에 들어와서 납치할 거니까.”
“……으응. 알겠어요.”
루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하고 풉, 웃을 뿐이었다.
“내 생각만 하고.”
“……당신도 참.”
루나는 미친 듯이 애정을 밀어붙이는 그가 민망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휘면서 웃었다.
“사랑해요.”
아키스가 루나의 머리카락을 넘기고 볼에 키스했다.
“나도.”
* * *
“이제 왔니?”
갑자기 여행지를 뛰쳐나가 집에 갔다 돌아온 루나를 보고 페니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페니는 거실에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바꿀 수 있어. 페니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미래도.’
루나는 그녀를 보고 생각했다.
“페니, 나 좀 한번 안아 줄래?”
“얘가 징그럽게 왜 이래?”
페니는 눈을 깜빡이면서도 다가가 루나를 안아 주었다.
“우리 재미있게 시간 보내자. 매일매일.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니까. 애기 나와도 이모 해 줘야 해. 알겠지?”
“알았어, 알았어.”
페니는 루나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 또한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여서 이러실까.’
페니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간식 먹을래?”
“아니, 그보다 몸이 피곤해서…….”
“침실에 가서 낮잠 자. 안 그래도 어머니도 낮잠 드셨어. 그리고 내일 떠날 거지?”
루나는 페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페니는 귀신이었다. 루나는 배를 끌어안고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그녀는 페니를 향해 등을 돌렸다.
“참, 페니.”
“응?”
“혹시 부모님께서 여행 계획 잡히신 것 있니? 내년 겨울에 말이야.”
“아아, 내년에 공국을 일주하신대. 작년부터 잡으셨던 계획이야.”
“……그래.”
꿈속의 일기장. 그곳에서 페니는 부모님이 긴 공국 여행을 갔다 낙석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했다.
르시타 후작 부인은 루나를 맹신했다. 정 안 되면 아프다고 꾀병이라도 만들어 간호해 달라고 하면 될 거다. 아니면 여행지를 바꾸게 하거나.
‘여행이야 취소하게 만들 수 있지. 쉬워.’
루나는 미소 짓고 말했다.
“고맙고 미안해. 두고 간 거.”
페니는 그 어조가 묘한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었는지 나중에 말해 줘.”
페니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래,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너무 긴 이야기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페니는 묘한 기분에 눈만 깜빡였다.
* * *
이제 마지막으로 대화할 상대가 남아 있었다.
‘오늘 새벽엔 내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이 붉은 책까지 두고 갔다니까.’
루나가 아키스를 두고 급히 돌아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루나는 붉은 책을 꺼내 짤막한 글귀를 적었다.
<이 책의 소유자인 내가 이번 로드예요.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언제든 신호를 보내 줘요.>
루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 줄 더 적어 넣었다.
<에리스,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준 힌트로 루나는 심증을 굳혔다. 자신에게 뭔가 가르치고 교육시키려는 듯한 책. 그리고 책의 서문. 이 책이 천재 마법사의 피조물이라는 글.
결계의 진원지에 대해 잘 아는 존재가 몇이나 될까? 특히 그자가 여성으로 짐작되는 말투를 쓰는 이라면, 그렇다면.
적어도 이 책은 에리스와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한 루나였다.
‘이 책은 내 피를 묻힌 후 동작하기 시작했어.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여인이라서가 아냐. 일곱 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로드라서야.’
루나는 여행을 다니며 결계 소유권에 자신의 피를 묻히고 다니던 과정을 기억했다.
로드를 알아볼 수 있는 자.
최소한 그자는 에리스이거나, 에리스와 관계된 측근일 터이다.
책은 한참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 내가 잘못 짚었나?’
그러다 20분 정도 지나자, 책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루나는 깜짝 놀라 급하게 책을 펼쳤다. 그 위로 천천히 고대어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안전하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인가요? 황가의 추적자들이 지척에 와 있진 않은가요?>
그녀는 급하게 펜을 들었다.
<지금은 안전해요. 현 황가는 당신을 쫓지 않아요. 정말 당신이 에리스인가요?>
<맞아요. 내가 에리스예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아아,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뭐가 궁금한지 알겠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 있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거죠? 내가 역적죄를 뒤집어쓰고 죽기 직전, 감옥에 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왔죠. 난 그들에게 내가 소중히 여기던 이 책을 주었어요. 내 후계자에게 이 책이 전해지길 바라면서요.>
<들었어요. 이런 붉은 달 표지의 책은 고위 마법사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던 용도의 번호가 붙은 책이라고.>
<네, 그래요. 동시에 이 책은 마도구로 만드는 것도 가능한 책이죠. 난 이 책에 죽기 직전 내 영혼 조각의 일부를 실었어요.>
<그럼 나와 평소 대화한 건…….>
<그건 내 영혼이 재료로 작용해 이 책 본연의 의지를 가지게 된 거예요. 나와는 별개의 자아입니다. 지금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건, 내가 살아생전 이 시간을 대비해 두었기 때문이에요.>
루나는 다음번엔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몰랐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두서를 잡기 힘들었다.
<난 내 후계자에게 이 책이 전달되도록 마법을 걸었죠. 그런 마법을 ‘주인 찾기 마법’이라 해요. 잘 전달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아마 공작가에서 이 책을 보관하고 있었을 겁니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내 언니의 실책 때문에 나를 돕지 않기로 결정했지요. 하지만 비교적 중립이라, 책 보관 정도는 도왔을 거거든요.>
글자는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책 안에 봉인된 나의 조각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내 후계자, 나 다음의 로드가 내 이름을 이 책에 적는 것이었답니다. 방법을 잘 찾아 주셨군요.>
루나는 가장 궁금하던 것을 질문했다.
<……왜 소설책인가요? 후계자에게 지식을 전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았잖아요.>
<재밌는 걸 좋아해서요.>
<네?>
<난 생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도구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어요. 내 언니가 여왕이었으니, 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통치할 필요 없었죠. 이 책은 평생을 바친 내 최대 연구 성과예요.>
극악무도하다고 알려진 대마법사 에리스가 소설광이었다니. 자신만 알기 아까운 이야기였다.
루나는 그녀가 좋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난 내 후계자에게 무언가 유산을 남겨 주고 싶었어요. 후계자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산을요.>
<영향요?>
<난 끔찍하게 탄압 받고 죽었어요. 내 다음 후계자가 태어나 그 사람이 로드로써 이 세상을 증오할까 걱정되었어요. 후계자와 이 책이 대화하고, 그 후계자가 살아가는 환경에 맞는 이야기들을 제공하여 공감 능력을 높이는 것이 내 목표였죠.
로드에게 따뜻한 마음과 가르침을 줄 수 있었으면 했어요. 물론, 가장 큰 목적은 내 즐거움을 위한 거였지만, 그래도…….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아, 어쩐지 책이 그리 정서 함양이니 하는 말을 자주했나 싶었다. 생각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나의 이런 생각을 황가의 사람들은 늘 바보 같다고 비웃었지만요.
하지만, 나는 내가 틀렸다 생각하지 않아요.>
루나의 심장이 간질거렸다.
이 세상은, 그녀의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걱정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에리스라면 끔찍한 상황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죽었을 것 같은데. 역시 대마법사는 그릇이 다르구나. 죽는 순간에도 로드로써의 제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어.’
루나는 책 페이지를 어루만졌다.
<그래요.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난 평소 이 책과 대화하며 몹시 즐거웠어요.>
<기쁘네요. 이 책의 자아는 내 생전 성격이 많이 녹아들어 가 있지요.>
곧 긴 글귀가 고대어로 떠올랐다.
<로드가 없는 황가란 불완전한 것이지요. 오랜 세월 그들이 로드의 일가를 탄압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내 피를 이은 후손들은 거의 다 죽었겠지만, 그 와중에 당신이 각성했다면 대단한 겁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수백 년 전의 사람에게서 따뜻한 칭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루나의 가슴이 아렸다. 루나는 글씨를 계속 적었다.
<사실 난 당신의 혈통을 이은 자는 아녜요. 하지만 당신 후계자는 맞아요. 저로서 새로운 로드의 일가의 시작되었거든요.
지금껏 있었던 일을 말씀드릴게요.>
루나가 묵묵히 적는 이야기에 책 속의 에리스는 몹시 놀랐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흡족하게 만족했다.
<피는 중요치 않아요. 내 후계자가 안전하다면 그걸로 되었어요. 황가는 정말 멍청한 일을 저질렀군요. 카리노, 그자는 정말 이기적인 자였죠.
나는 카리노가 황가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어요.
당신은 앞으로 현 황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 될 거예요.
운명이란 정말 오묘하군요. 이제 공작가와 로드의 혈통이 결합했으니 황가는 오래 그 죄를 갚으며 당신 혈통의 눈치를 보며 떨어야 할 겁니다.>
루나는 작게 웃었다.
<네, 그럴 것 같아요.>
책이 필담을 통해 말했다.
<이제 당신이 이룬 일들을 들었으니 되었어요.>
<당신의 정체에 대해 너무 늦게 뒤늦게 눈치채 미안해요.>
<아뇨, 적절할 때 나를 불러 주었어요. 결계의 진원지에 드나들며 당신이 내 후계자가 확실하다는 걸 이 책은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의 진실을 알려 준 거고요.
이 책에는, 로드의 자격 검증을 엄밀히 하라고 일러두었어요. 책이 당신에게 고집을 피우며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 때문일 거예요.>
루나는 이제 모든 일이 이해되었다.
<이제 곧 당신에 대한 혐의가 풀릴 거예요.>
루나는 자신들이 죽은 후 발표하기로 한 계획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정말로 잘해 주었어요. 이제 내 조각은 완전히 잠들어도 될 것 같아요.
로드의 혈통을 잘 부탁해요.>
루나는 왠지 그녀가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급하게 글을 적어 넣었다.
<그런데, 이제 붉은 책의 자아는 사라지나요? 요즘 이 책이 잘 대답하지 않거든요. 혹시…….>
<이번 대에 로드가 훌륭한 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당신의 정서 함양에 도움을 주었지요. 정보 수집도 충분히 했고요.
이번 로드에게 이 책은 이제 역할을 다한 겁니다. 다음 로드가 나타날 때까지 책은 기능하지 않을 거예요.>
루나의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그녀는 진정 아쉬웠다. 이 책과 정이 많이 들었다.
<그럼, 이제 소설도 끝이군요. 거기다 이 책과 친구가 된 기분이었는데…….>
<말미를 드릴게요. 마지막으로 이 책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그 시간 동안, 작별 인사도 하고 물어볼 것이 있다면 모두 물어봐요.
걱정 마요, 다음 대 로드가 탄생하면 그때 이 책을 물려주세요. 그때가 되면 다시 책이 기능하기 시작할 겁니다.>
루나는 조금 시무룩한 기분으로 납득했다.
<만일 내가…… 다음 대 로드에게 책을 전해 주지 못할 상황이면요?>
<그땐 책이 주인을 찾아 나설 거예요. 걱정 마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고마워요. 에리스. 당신이 없었다면…….>
그러나, 책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책에서 희미한 빛이 나왔다. 루나는 책 표지에 표시된 숫자를 보았다. 이건, 네 번째 책이었다.
페니가 그녀를 찾으러 올 때까지 그녀는 오래, 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 * *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어.’
루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었다.
‘일기장과 현재의 다른 점이 있어. 새틴과 아키스의 약혼.’
처음 루나가 일기장을 접했을 때, 새틴의 결혼에 대한 내용을 읽고 루나는 새틴이 파혼하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기장은 루나가 성인이 되어 처음 쓰여지기 시작했고, 그 이전 과거의 일은 루나가 즉흥적으로 적은 내용인 탓에 상세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미래의 아키스는 새틴이 누군지 아예 모르는 눈치였어.’
루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라진 미래. 그때는 아키스가 새틴과의 약혼을 얼굴 한번 대면 않고 아예 수락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가문의 약혼을 약속한 편지가 발견된 일이 없거나……. 그렇게 아예 가문의 접점이 없었을 수도 있지.’
만일 전자가 맞다면 이번 세상에서 그의 무의식이 루나를 찾으려 했듯, 그 기억 때문에 그가 버몬드 가문과의 혼약을 수락했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예감이라던가.’
버몬드라는 가문 이름을 듣고 그가 뭔가 떠올린 걸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점도 아니었다.
* * *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루나가 요즘 절감하는 말이었다.
책 속에 봉인된 에리스의 조각과 대화를 나눈 지 3일 후, 붉은 책이 다시 루나의 말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루나는 미소 지었다.
<사실 나, 임신 중이야. 아름다운 동화를 좀 들려줄래?>
<듣던 중 기쁜 말이네요. 그러죠. 당신의 책에 대한 권한이 모두 열렸습니다. 이제부터 자주 찾아 주세요.>
그날부터 루나는 매일 붉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단편 동화들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물어보았다.
<있지, 고대 여성 문화에 대한 건 뭐든지 알려 줘. 작은 거라도 좋아.>
책은 알고 있는 한, 모든 진귀한 정보를 주었다. 더 이상 빼거나 군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늘도 많은 걸 알려 줘서 고마워.>
루나는 매일매일 그 정보를 기록했다.
‘우리 아가들은 똑똑한 애들로 태어나겠어.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이만치 고대어를 공부했는걸.’
루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렇게 알아 가는 것이 많을수록 루나의 배는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어느덧 출산 예정일이 임박했다.
이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배를 끌어안고 책을 펼친 어느 날, 그 말이 떠올랐다.
<아마 오늘이 당신을 보는 마지막일 것 같네요.>
루나가 마음의 각오를 했을 때, 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루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오늘이구나. 에리스의 배려로 너랑 충분히 대화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임신 중이라 하셨죠? 당신의 배 속의 아이가 다음번 로드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당신 직계 혈통이 발현할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책은 한참 답이 없었다.
<그럼 그 아이를 통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루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응, 나도.>
<잘 있어요. 다음 로드를 위해서 나는 이 안의 마력을 아끼기 위해 시동을 종료하겠습니다. 마력이 무한정 하진 않으니까요.>
<정말 그간 고마웠어. 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읽고, 많이 배웠어. 널 만나서 정말 좋았어.>
<나도요.>
마지막, 책의 모습은 몹시 솔직했다. 루나는 작게 웃었다.
<안녕, 또 만나자.>
<안녕.>
마지막 인사는 짧았다.
루나의 눈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정 들었던 것을 떠나보내는 순간은 언제나 심장에 저며 들었다.
* * *
아이가 태어나던 날은 아키스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그녀가 아픈 거지?”
“원래 그렇습니다. 진정하세요, 공작님. 지금 잘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이 느껴진단 말이다!”
“네, 네에?”
산부인과 의사는 아연한 심정을 느꼈다. 공작의 부인 사랑이야 유명하지만 이렇게까지 같이 힘들어하는 신랑은 처음이었다.
루나는 출산 직전까지 쌍둥이를 낳는 것이 만만찮은 일이라는 것에 두려워했다.
그런데 정작 출산이 시작되자, 비명을 지르면서도 침착했다. 정작 이성을 잃은 건 아키스였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루나가 느끼는 통증과 공포가 얼마나 큰지, 그 감정이 아키스에게 전이되었다.
물론, 단순한 전이였으므로 간접적 통증이라, 아키스는 심한 두통과 요통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내라면 정신 못 차리는 아키스가 공포에 빠지기엔 충분했다.
‘나한테 이만큼 통증이 느껴질 정도면 그녀는 얼마나 아픈 거지? 적어도 나의 몇 배 이상…….’
자신보다 훨씬 아플 그녀를 상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다 가만 안 둘 거다. 한 명도 살려 돌려보내지 않겠어.’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산실로 꾸며진 방에서는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인! 힘을 주세요!”
아키스는 보이지 않는 살기마저 피워 올리며 멍하니 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발작적으로 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숨을 몰아쉬며 벽을 두드렸다가 머리를 댔다가. 보는 사람이 저 사람 미친 거 아닌가, 하고 말하기 딱 좋았다.
그런 아키스의 반 광란 상태를 보는 페니와 디온의 입은 쩍 벌려진 지 오래였다.
“내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단 말이다. 빌어먹을, 언제 끝나는 거야.”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아키스.”
“진정하세요. 공작님.”
아키스를 돕는다고 온 디온과 페니는 다른 의미로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 페니의 배 속에도 얼마 전 들어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스의 부하 출신 아니랄까 봐 알차게 애처가인 디온은 ‘우리 커플도 저렇게 미쳐 버리는 과정을 치러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으로 착잡해졌다, 페니는 그냥…… 아키스가 매우 당황스러웠다.
‘매번 새롭다니까. 이건 뭐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이 변했는데.’
잠시 후, 산실에서 힘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가 되어야 아키스의 광란이 멈췄다.
“쌍둥이 아기님이세요!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3시간만의 순산, 쌍둥이치고는 기적적일 정도로 수월한 출산이었다.
“아키스의 표정만 보면 난산이 따로 없어요. 휴, 순산이라 다행이지.”
페니는 디온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말했지만 마지막엔 아키스의 공포가 전염되어 페니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들은 아키스가 먼저 방에 들어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키스.”
침대 위의 루나는 산파와 간호사, 의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얼굴은 땀과 머리카락으로 얼룩져 있었다. 울었는지 눈가는 부어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였다.
“우리 아기예요. 쌍둥이 둘 다 건강하대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러다 그녀는 아키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키스? 왜 이렇게 지쳤어요, 당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키스는 비척비척 걸어와 루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내가 앞으로 정말 잘하겠습니다. 평생.”
그는 자신의 몸으로 직접 출산의 위대함에 대해 체험한 제국 최초의 남성이었다.
“정말 출산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가 진정성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는 기운이 없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 순간까지도 아키스는 온통 제 아내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의 세계에서 아내가 너무 크고 거대한 존재라, 아기의 존재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다가왔다.
“한 분은 따님, 한 분은 아드님이십니다.”
두 명의 아이는 부드러운 비단에 싸여 있었다. 아키스는 눈을 들어 아기들을 보았다.
처음 본 감상은 쭈글쭈글하다였다. 너무 작고 쭈글쭈글해서 지금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지잉, 하고 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아이를 어찌할 바 모르고 우물쭈물했다. 손가락을 대야 할지 안아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은 눈도 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눈을 떴다. 자색 눈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님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제국을 수호하는 고귀한 혈통인 아이와 공작부부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나머지 한 아이는 루나와 꼭 빼닮은 초록 눈이었다.
그 작은 눈동자들을 처음 본 그 순간, 그의 세계는 이 작은 아이들만큼 넓어졌다.
“아키스, 아이를 보여 줘요.”
루나가 더운 숨과 함께 말했다.
아키스는 아이들을 받았다. 힘을 주어 안으면 깨질까,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 번 걸을 때마다 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아내에게 아이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너무 예쁘다, 그쵸?”
아키스는 몽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인생의 모든 관념이 부서져서 재탄생되었다.
아, 그랬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나 살아온 것이었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루나. 고생 많았습니다.”
“으응, 근데 누가 슈가고 누가 솔트일까요.”
“자라나며 입맛 보면 되겠죠.”
아키스는 속삭였다. 그는 그녀의 볼에 살며시 키스했다.
아아, 그의 세상은 완벽했다.
* * *
“축하해. 루나. 정말 축하해.”
뒤늦게 들어온 페니가 루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뒤에 선 디온을 스쳐 지나가며 아키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임산부들을 위한 복지를 늘려야겠다. 그녀들은 정말 위대한 존재거든. 자선 사업을 시작해야겠어…….”
디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멋진 생각이십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반드시 기뻐하실 거고요.”
* * *
아이들은 금세 공작가 안팎의 관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빼어난 재능의 공작 부인과 그 유명한 공작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특히 공작이 엄청난 미남으로 유명했기에 아기들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다.
공작가 사람들의 얼굴은 봄바람처럼 폈다. 다들 아가님들, 아가님들 하며 요람에 몰려들어 아가들의 표정을 살피고 한 번 관심이라도 받기 위해 안달을 냈다.
“착한 울프, 작은 아가들을 지켜 주는 거니?”
울프는 아무도 곁에 없을 때면 늘 아이들의 곁에 앉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루나는 그때마다 울프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곤 했다.
아이들은 무섭도록 빨리 자랐다. 작은 딸아이의 이목구비는 놀랍도록 루나를 닮아 있었다. 아키스는 딸아이만 보면 정신을 차릴 줄 몰랐다.
“루나, 아가의 눈매가 당신과 똑같습니다. 어쩌면 벌써부터 이렇게 예쁜지.”
딸아이는 아키스를 알아보는지 아키스가 안아 주면 방긋방긋 웃었다.
어느 날, 루나는 아키스의 서재에서 쪽지를 발견했다. 그는 아이가 웃어 준 날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루나는 한참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때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아이를 안고 어루만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 루나는 가슴이 너무 찡하고 벅차올라 그에게 키스하곤 했다.
* * *
그러던 와중 휘멘이 왔다. 거의 1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휘멘, 잘 지냈어요?”
웬일인지 그가 이번엔 정문으로 당당하게 손님으로 방문했다.
지금은 사라진 미래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된 후, 루나는 휘멘이 정말 가족처럼 느껴졌다.
“아니, 임신 사실을 이제야 알렸단 말이야?”
“아기가 태어나면 대부가 되어 달라 하려 했죠. 그러니 낳자마자 편지한 걸요.”
루나는 이어 물었다.
“그런데 당신, 어떻게 편지를 바로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아는 주소지는 수도의 당신 집뿐이라 항상 거기로 편지하는데 떠돌다가도 재까닥 확인하고 오는 게 신기하네요.”
“그거야 내가 가진 집마다 모두 마법을 걸어서 편지가 도착하면 알 수 있게 해 놨으니 그렇지. 너나 아키스의 편지는 바로 확인한다고.”
“아.”
못 본 사이 휘멘은 분위기가 좀 변해 있었다. 조금 더 분위기가 무르익고 사내다워진 느낌이었다.
“할 말이 있어요. 마침 아키스도 황궁에 갔으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야기 하면 되겠네요.”
루나는 아이들을 어루만지다 아이들이 잠들자 테이블에 앉았다.
“……그랬군.”
그녀가 꿈의 마지막 이야기를 끝맺을 때까지 휘멘은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집중했다.
“휘멘?”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잠시 찌푸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만.”
휘멘은 갑자기 발코니로 나갔다. 루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휘멘은 발코니를 서성였다.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나에게 두 번이나 루나를 데려갈 기회가 있었다고? ……내게도 그녀의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니.’
이미 사라진 미래.
그때 시골에 감금당해 살던 그녀를 먼저 도와줄 기회가 그에게 먼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시간대에도 마찬가지야.’
고서점에서 루나가 남장을 하고 일하던 당시.
습격을 당한 루를 구해 준 것도 그였다. 그 소년과 인연을 이어 갈 기회가 제게도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기회들은 존재했다.
휘멘은 지금껏 멋대로 살아왔다. 그는 루나에 대한 감정도 대수롭지 않게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1년이나 여행했는데 쉬이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감정은 음욕도 아니었다. 숭고하고, 이상한 기사도 같은 마음이 자꾸 그를 감싸 루나를 떠올리게 했다. 요즘 겨우 침착해진 심장이 다시 헤집어졌다.
‘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지.’
그녀에게 준 마음은, 꽃이 피고 지듯 정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조각을 하나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각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루나에게 심어졌다. 루나도 모르는 사이에 준 것이니까. 심지어 휘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휘멘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루나는 아들을 안아 올리고 흔들던 중, 그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일순 불처럼 타오르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그녀에게 준 그의 조각이, 그녀와 함께 따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루나는 너무 아름다웠다. 휘멘은 맥이 풀리는 듯한 체념을 느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두 번이나 이어지지 않았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키스 놈은 항상 나보다 집요했지.’
휘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생겨났다.
“아기들 이름이 뭐라고?”
“여자애는 플로라. 남자애는 보레아스예요. 아키스와 내가 고심해서 지었죠.”
휘멘은 아이들을 살폈다. 그녀를 빼닮아 대단히 귀여웠다.
“좋은 이름이네. 대부, 할게.”
휘멘은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이죠?”
루나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맹세할게.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애들을, 부모 다음으로 내가 지킬 거야.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아무래도, 계속 후회하는 일만 하게 되어도,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제 역할인 것 같으니까.
“고마워요, 휘멘.”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만일 휘멘이 혼인하여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키스와 자신을 대부와 대모로 삼아 주길 바랐다.
‘일단 정착시키는 게 큰일이지만.’
루나는 일기장 속의 자신의 유언을 기억했다.
휘멘을 좀 그만 떠돌아다니게 하라니. 그는 사라진 미래에서도 참 골칫거리인 사내였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매력이었다.
“여자애 이름이 참 좋군. 플로라라.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라는 뜻이지? 꽃을 많이 피우라는 뜻인가 보군. 욕심이 많은 이름이야. 하지만 너다워.”
루나는 뜻밖에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다들 꽃처럼 예쁘게 크라는 이름의 뜻만 이해하던데. 역시 당신은 달라요, 휘멘.”
“별말을 다 하는군.”
휘멘이 멋쩍은 듯 말했다.
“이제 좀 수도에 머물러요. 새해를 같이 보내고, 축제도 보고, 무도회도 가자고요.”
“그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휘멘은 고분하게 대답했다.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참, 그리고 정산할 돈도 있어요. 당신이 찾아내 준 식물 덕분에 약 사업이 대단히 잘되었거든요. 그 돈으로 자선 사업도 준비하는 중이에요.”
“자선 사업?”
“네. 규모가 큰 사업이에요. 아무튼 이거, 은행 증서예요. 앞으로도 약 판매금만큼 수익이 분배될 거예요.”
대충 봐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휘멘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왜요. 받아요. 반대 상황이면 휘멘은 나한테 안 줬을 거예요? 친구잖아요. 챙겨 주고 싶어요.”
루나의 표정에 휘멘은 맥이 풀렸다.
“나 부자야, 그럼 네 자선 사업에 써.”
“일단 받고 나서 기부해요. 알겠죠?”
루나가 또렷이 바라보자 휘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그녀는 이길 수가 없다. 어쩌면 평생 이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간을 돌리는 마법이 일어났단 말이야? 드래곤은 굉장하군.”
“……그러게 말이에요. 공작가의 사람들이 신의 사랑을 받는 일족이 맞긴 한가 봐요.”
휘멘은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정석 위치를 찾아내 지상에서 마법을 펼친 건가?”
“네?”
“아마 대결계 위로 시간을 돌리는 마법을 걸었을 텐데. 시간은 연동되기 마련이니 제국의 시간과 동시에 전 세계의 마법이 돌려졌을 거야. 그런 규모라면 드래곤이 개입하긴 해야겠군. 가설이 맞는 것 같아. 마정석이 매장된 위치 중 한곳에서 마법이 펼쳐졌겠지.”
“그러게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왠지 한참 말이 없었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녜요.”
* * *
루나는 아키스의 서재에 있는 순간이 좋았다.
그의 서재는 늘 책 향기와 햇빛 냄새가 났다. 책상 위에 있다가 고개를 드는 그의 눈길을 받을 때면 루나의 가슴이 짜릿했다.
그럴 때면 그는 평소보다 금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루나는 그의 옆에 앉아 책을 읽거나 종종 번역을 도왔다.
그날도 그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아키스는 상단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필요한 증서를 찾기 위해 금고를 열었다. 그러던 중 그가 조용히 루나를 불렀다.
“루나. 이걸 봐요.”
그는 편지를 한 장 보여 주었다. 루나는 편지를 살피다 탄성을 질렀다.
“와, 이걸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로텐베른 가문과 버몬드 가문의 혼약서잖아요.”
버몬드 가문의 창고에서 발견된 낡은 편지. 두 가문의 자식들을 한 번 혼인시키기로 한 약속의 편지였다.
‘이건 내 증조부의 필체일까? 아니면 옛날에 증조부가 구했다는 당시 공작의 필체?’
편지 내용은 낯선 필체로 두 가문의 혼약을 약속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한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공작가의 조상을 구한 대가로 받은, 영악한 청혼서. 그 편지 덕분에 아키스는 새틴과 약혼했었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차라리 당신이 이 편지를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바로 만날 수 있었잖아요. 안 그래요?”
루나는 이 편지를 찾은 날을 떠올렸다. 이 편지는 선반 위의 상자 위에 섞여있었다.
창고 정리를 하는 중에 새틴이 제 드레스 손질을 안 해 놨다는 구실로 쳐들어와 루나를 밀쳤다.
“어쩔 수 없었어요. 편지를 열어 보려는 순간에 새틴이 날 밀치고 편지를 빼앗았거든요.”
“그래요? 혹시 당신에게 버릇없이 굴었나요?”
루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반에 어깨를 부딪혀서 좀 아팠지. 아키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여자는 역시 정리해야겠군. 이제 루나의 혈통이 새로운 로드의 일가가 되었으니 그 여자가 살아 있는 것도 꺼림칙하고. 로드의 혈통을 관리한다는 구실이 있으니 좋군.’
아무래도 사인은 독살이 적절하겠지. 루나는 아키스의 속내를 모른 채 부드럽게 미소 짓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당신도 대단해요. 수십 년 전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약혼을 허락했어요? 위조 편지면 어쩌려고?”
“위조 편지일 리가 없으니까.”
아키스가 편지의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직인이 보입니까?”
반짝이는 가문의 문양이 편지 아래에 찍혀 있었다.
“이 인장은 뭐예요? 신기해요. 꼭 마법같이 빛나요.”
“공작가의 인장은 실물 도장이 아니라는 말, 들어 봤습니까?”
“아, 들어 본 것 같기도.”
“드래곤의 계약자인 공작가의 혈통은 대대로 마법사지요. 그래서 그들은 후손에게 진짜 도장 대신 마법을 물려줍니다. 몇만 번은 쓸 수 있게 압축된 마법을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맹세를 할 때면 그 마법을 꺼내 도장대신 여기 새깁니다. 그러니 이 편지가 위조가 아니라 판단한 겁니다. 마력 구조를 해석하면 진위 여부를 알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그러니 아예 위조가 불가능하죠.”
그렇구나. 역시 공작가는 신비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편지를 믿고 수락한 거군요. 당신은 약속을 중요히 여기니까요.”
“편지를 직접 보기 전엔 돈이나 많이 줘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수락하고 말았죠. 새틴과 약혼한 건 실수였지만…….”
아키스는 찌푸린채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날 내 기분이 조금 변덕스런 날이었나 봅니다.”
“덕분에 우리가 다시 재회했죠. 연이라는 게 있긴 한가 싶고.”
루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좀 억울하네요. 내가 이 편지 사수해서 당신 찾아갈걸 그랬어. 그럼 당신이 거액을 줬을지도 모르는데.”
루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아니지. 나한테 와서 혼인을 요구했어야지. 그럼 약혼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날 바로 내 여자로 만들었을 텐데.”
루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못 알아봤으면 어쩌려고?”
“사내 모습인데도 내 본능을 움직였잖아. 아마 사내 모습 아니었으면 바로 손대 버렸을 겁니다.”
“손대니 뭐니, 대낮부터 그런 표현 쓰지 말라니까요. 뭐, 나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그럼 나한테 맘대로 손대든가요. 난 당신 것이니까. 머리카락 한 올까지.”
루나의 심장이 저며 왔다. 너무 좋아서였다. 그녀는 한참을 그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그거 보여 줘요. 응?”
루나는 장난기가 도졌다.
“빨리. 보고 싶어요. 응?”
아키스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루나는 요즘 그의 마음의 방을 다시 보여 달라 장난스레 조르곤 했다.
‘아직도 이 사람의 마음속에 내가 가득 들어찼을까.’
루나는 아키스의 마음의 방, 그 밤하늘의 정경을 기억했다. 그녀의 이름으로 가득 찬, 자신만이 아는 그 밤하늘.
그때만큼은 아니라도 자신의 이름이 별처럼 크게 자리 잡은 걸 보고 싶었다.
루나의 부탁이라면 세계 멸망도 고려해 볼 정도로 그녀를 귀하게 여기는 아키스였지만, 이 부탁만은 곤혹스러워하곤 했다.
“……그건 좀 그렇군요.”
루나는 아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곤란해하는 게 느껴지자 루나는 작게 웃으며 그냥 그의 무릎에 올라탔다.
“농담예요. 아침저녁으로 사랑한다고 해 주는데 뭐가 필요해. 다 알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의 마음속은 소중하고 내밀한 장소였다. 거기다 자신의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아키스 스스로도 읽지 못하는 글자로 가득 담긴 장소다. 억지로 졸라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귀엽단 말이야.’
다만, 조르면 그가 곤란해하는 것이 좋았다. 이 사람의 사랑스런 점이라고 할까.
아키스는 루나의 허리를 안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우유 냄새가 포근했다.
오늘밤엔 저 작고 사랑스런, 우유 내음이 나는 가슴을 오래 음미해야겠군. 그의 입가에 맹수 같은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역시 안 됩니다.”
“…….”
“기념일 선물을 들킨단 말입니다.”
“……네?”
아키스의 의외의 말에 루나는 풋, 웃어 버렸다.
이제 그들에게 서로 숨겨야 할 비밀이란 고작 기념일 선물 정도였다.
“그렇죠, 비밀은 소중하니까.”
“물론.”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웃었다. 그들의 하루는 완벽했다.
<‘달빛 도서관’ 마침>
에필로그
그리고, 어느 날 미래에서
역사서에 제국의 멸망 원인은 대지진으로 기록될 것이다.
공국에 제국 대지진의 원인이 새어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수백 년간 봉인되어 있던 지진의 여파는 공국과 그 아래의 왕국까지 인접한 도시들에 피해를 주었다. 그들은 배상을 요구하며 군사를 모았다.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침략을 정당성을 인정한다 간주하겠다.]
마침내 공국에서 통보가 도착했다.
전쟁이 터지기 일촉즉발의 상황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결국 그날은 왔다.
‘제국은 어떻게 흘러가는 건가. 거기다…… 공작까지 미쳐 버렸고.’
젊은 황제, 이전에는 황태자였던 그는 이를 갈며 옥좌에 앉아 있었다.
드래곤의 신부를 구해 병을 전이시켜 결국 공작은 살아남았다.
문제는 그 여자가 죽고 각인자를 잃은 공작이 반쯤 미쳐 버렸다는 것이다.
거기다 마력이 아직 회복 시기라, 공작의 불임 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다. 지금 자손을 봐야 그 아이는 평범한 아이일 것이다.
가능하다 한들 지금 상태의 공작이 허락할리도 없다. 지금 잘못 건드리면 턱 끝까지 치민 공국의 군사가 아닌 공작의 손에 황제의 목이 따일지도 모른다.
‘루나라던가, 그 여자가 죽고 공작의 자살 시도만 벌써 세 번째야.’
공작의 세 번째 자살 시도를 막아 낸 건 애물단지였던 흑마법사, 휘멘이었다.
그날 이후 공작은 흑마법사외의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공작을 불러와라. 드래곤이 필요하게 될 거다. 군사들의 선두에 드래곤이 설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사자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큰일 났습니다. 공작이 사라졌습니다!”
* * *
아키스가 반쯤은 그냥 미친 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는 휘멘뿐이었다.
‘미친놈. 이놈은 원래부터 미친놈이었어.’
처음에는 루나, 그녀가 죽고 아키스가 진짜 미친 줄 알았던 휘멘이었다.
첫 번째는 충동이었다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로 아키스가 손목을 그었을 때 휘멘은 눈치챌 수 있었다.
‘드래곤을 협박하다니. 또라이야, 정말.’
계약자라고 해도 드래곤을 멋대로 불러낼 순 없다. 아키스가 해 준 말이었다. 일생에 드래곤을 불러내는 건 단 한 번.
그리고 그때 드래곤이 소원을 들어주면, 계약자는 소원만큼의 힘을 감당해야 했다. 이번 건처럼 큰 소원을 빌면 계약자는 죽는다.
그러나 아키스는 기어이 드래곤을 다시 불러내 대화하는 법을 찾아냈다.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 드래곤은 계약자가 죽을 때 마중을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키스는 지혜를 얻기 위해 다소 과격한 수단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드래곤을 만나고 왔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 * *
공국의 침공을 예견한 날 아침, 아키스는 휘멘을 깨웠다.
“일어나, 갈 길이 멀다.”
그들은 곧장 먼 길을 떠났다. 야반도주나 다름없는 여정이었다.
“미리 이동 마법을 설계해 두길 다행이지.”
게이트가 파괴되고 제국인들의 발은 묶인 지 오래였다. 휘멘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며 아키스는 말에서 내렸다.
“그건 수고했다.”
그들은 복부의 한 이름 없는 산에 도착해 있었다. 휘멘이 그간 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곳이었다. 이 산 전체가 마정석이라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가.
“정말로 이 미친 계획을 실행할 거야?”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해.”
아키스는 그간 미친 척하고 방 안에 숨어 아무도 하지 못한 생각을 떠올렸다.
“카리노 대왕이 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내겐 너도 있지. 흑마법과 백마법이 합쳐질 때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시간 마법.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마법.”
휘멘이 나직이 말했다.
“그래서 실레노스가 너와 나의 제자였지. 그놈은 미쳐서 죽었지만.”
실레노스는 환란의 상황을 틈 타 아이들을 납치해서 실험을 하다 붙잡혀 죽었다. 거리에 고아가 넘쳐 났기에 가능했다.
실레노스는 시간을 과거로 돌려낸다는 타임 홀을 불러내는 연구를 했다.
당시 발견된 연구실에서는 시간이 뒤틀려 노인처럼 변해 죽어 버린 아이도 있었다. 너무 끔찍한 사건이었기에 국가에서는 은폐를 결정했다.
“결국 실레노스를 죽인 건 휘멘, 너였잖아. 내가 옳았어.”
“……그래. 내 실책이었다는 건 인정해.”
휘멘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일 또한 우리가 성공하면 없어지겠지.”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가 준비해 온 마법진을 열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2백의 수식과 마법진이 모두 바닥에서 떠올랐다.
이윽고 휘멘 또한 자신의 주문을 펼쳤다.
도합 4백여 개가 넘는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온 하늘을 감쌌다.
그사이에 선 두 마법사는 밭은 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다. 피가 많이 흐를 날인 걸 하늘도 아는지, 오늘따라 노을이 붉었다.
“알고 있지? 제국 전체에 쳐진 결계를 이용해 시간을 돌리는 거지만 시간은 연동돼.”
“알아. 카리노 대왕의 광범위한 결계는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그래서 인접한 공국과 왕국에서도 마력장이 깨져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들이 태어나지 않은 거고. 시간 마법은 세계의 규칙을 건드리는 거라 그보다 범위가 넓지.”
“……온 세상의 시간이 돌아갈 거다. 그것도 우리가 성공할 때의 이야기지만.”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임 홀을 완벽하게 조종하진 못해. 다만, 우리가 불러낼 수 있는 크기의 타임 홀로는 아무리 시간을 많이 돌려도…….”
“10년 전에서 15년 전. 나머지는 마정석에 기록된 시간이 달렸지. 마력 파동이 가장 크던 시점으로 돌아갈 거야.”
가장 최근의 마력 파동이 큰 사건은 대지진이었다. 그 시점으로는 돌아가지 않도록 마력홀을 조정했으니, 그 이전에 결계 균열이 가장 크던 시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생각했다.
휘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과거에서 만나자.”
아키스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웃었다.
그들은 평소 사이가 나쁘지만, 상황이 나빠질수록 사이가 좋아하지는 이상한 사이였다. 아키스는 정면을 보았다.
휘멘과 저가 불러낸 마법진이 합쳐지며 점점 더 거대하게 커져 가고 있었다.
“너, 이 지경이 난 제국을 되돌린다는 건 핑계지?”
휘멘이 속삭였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나러 가는 거잖아.”
아키스는 긍정도 부정도하지 않았다.
“너도 눈치챘으면서 반대 안 했지.”
“난 반반이거든. 어쨌든 미리 말해 두지만.”
휘멘이 코웃음 쳤다.
“다시 만나면 루나, 그녀에 대해 나도 기회가 있는 거다.”
“죽여 버릴 뻔했으니까 말조심해.”
“지금 날 죽인다고? 타임 홀을 앞에 두고 사이좋게 죽어 볼까?”
휘멘이 어이없다는 듯 아키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우리 기억의 대부분이 날아가겠지만 아마 작은 일부라도 남을 거다. 그 조각을 벗 삼아서 우리가 많이 기억해 두길 바라자고. 지금 시간에 피 땀 흘려 알아 둔 것들을.”
“만일 일이 변하지 않더라도 그냥 재난이 반복될 뿐이지 잃을 것이 없으니.”
아키스는 속삭였다.
이윽고 커진 타임 홀이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을 때, 아키스가 휘멘을 보았다.
“고생했다, 휘멘.”
“너도.”
뜻밖의 상냥한 말에 휘멘의 눈이 커졌다.
“만나서 더러웠지만 함께한 마지막 일만은 좋았다.”
아키스가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올렸다. 그의 얼굴이 타임 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희끄무레하게 물들었다. 그는 정면을 보았다.
‘그런데 왜 이리 감이 안 좋지.’
그 순간, 휘멘의 등골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잠깐, 이 자식이 이렇게 고분고분한 게 정상인가? 그런 놈이 아닐 텐데.
“그래, 마지막 일일지는 지켜보자고.”
아, 빌어먹을.
이 자식이 어떤 놈인지 잊고 있었다. 휘멘은 욕을 하고 싶었다. 아키스의 보라색 눈은 희미한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 * *
휘멘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저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아키스가 갑자기 타임 홀에 뛰어들었고, 당황한 휘멘은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추락하고 추락했다. 다음 순간 아키스의 손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였고, 그들은 바닥에 처박혔다.
미친 새끼. 망할 놈.
휘멘은 머릿속으로 아키스를 향해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여기가 어디야.”
휘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키스는 길 너머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휘멘은 절뚝이며 아키스에게 다가갔다. 아키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미친 새끼야! 타임 홀에 뛰어들어? 제정신이야?”
휘멘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그렇지, 네놈이 웬일로 고분고분하다 했어.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타임 홀에서 잘못 이동하면 영혼이 가루 단위로 분해된다는 거 몰라? 과거로 돌아간다면서 그전에 존재 자체가 소멸되고 싶어? 운 좋게 빠져나와 다행이지.”
아키스는 매우 귀찮다는 듯 휘멘의 손을 밀어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특히 발목이…….
“다 계산 범위 내야. 괜찮아. 그보다 넌 도대체 왜 따라온 거냐?”
“그거야 네 영혼이 가루가 될 것 같아서…….”
“오지랖 떨지 마. 만일 내게 강한 타격이 오면 나와 연결된 계약자인 드래곤도 타격을 받아. 그러니 난 어떻게든 초월적 존재인 드래곤이 구제해 줄 거란 말이다. 너야말로 도대체 왜 따라온 거지? 무사해 망정이지, 쓸모없는 도움이었다.”
“뭐? 내가 짐 덩이라고?”
“……짐 덩이라곤 안 했는데.”
그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 악을 쓰며 싸웠다. 그거 하나만은 변치 않았다.
아키스는 계속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일었다. 그때, 휘멘은 똑똑히 보았다. 아키스의 다리 뒤쪽으로 새까만 뱀이 지나가는 것을.
“아, 젠장. 검은 살모사다. 그 뱀은 북부에서만 사는데 그렇다는 건…… 여긴 북부 산맥인 것 같은데.”
“장소는 똑같군. 그럼 시간 계산만 맞추면 되는 거였군. 아무리 좌표 설정을 잘해도 시간 마법이 공간을 벗어날 순 없군. 그건 배웠어.”
아키스가 절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너.”
“눈치가 빠르군.”
아키스가 기침을 했다.
“그녀를 만나러 갈 거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지금은 그녀가 다섯 살일 때야.”
“루나를 만나기 위해 타임 홀에 뛰어들었다고? 미친놈, 다섯 살짜리 네 애인을 만나려고?”
“그녀의 인생이 망가진단 말이다.”
아키스가 이를 갈았다.
“그녀를 데려다 어린 내 앞에 놓을 거야. 그럼 우린 만나서 같이 자랄 수 있겠지.”
휘멘은 어이가 없어 맥이 탁 풀렸다.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너 진짜 그녀를 좋아했군. 각인자라서?”
“…….”
“언제부터?”
“…….”
아키스는 그녀를 처음 본 날을 기억했다.
그녀는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격렬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그녀, 루나에게서 도망치듯 제 온실로 도망갔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분이 너무 역겨웠다. 그 기분의 이유는 후에야 알았다.
필연적으로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파고들 것을 알았기에 흘린 눈물이라는 것을. 각인자따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 여자라면 거부할 수 없다는 걸. 그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네게 과거 이야기를 했나? 왜 다섯 살인데?”
“……아니, 죽을 때까진 제 입으로 한마디도 안 했어.”
아키스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약속했다. 그녀의 기록을 전 세계 모든 지식이 있는 신들의 도서관, 아카식 레코드로 보내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했다.
달 표지의 붉은 책 시리즈.
그 책은 대부분 소실되고 몇 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책 시리즈는 전부 아키스가 소유하고 있었다.
짝을 모르기에 그 누가 읽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모두 새까만 거짓말. 아키스가 원하면 그 안에 저장된 일기는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유도하면 일기장을 붉은 책 안에 기록하고 싶어 할 걸 알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기억을 알고 싶었다. 그녀의 조각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루나가 죽은 후, 그녀의 모든 일기장은 페니가 태웠다. 생전에 짧게 만난 건 페니나 자신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녀는 참 이상하게 페니에겐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많이 의지했다.
‘나도 아니고 페니에게 일기장을 태우라 하다니.’
그건 몹시 상처 되는 기억이었다. 아키스는 페니를 질투했다.
그 감정은 아키스의 뇌리에 또렷하게 남았다. 하지만 그 또한 그녀를 잃은 슬픔의 한 종류였다.
아키스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긴 했다. 일기장 내용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렸다. 아키스가 가진 붉은 달 표지 책 속에 루나가 죽고 그녀의 일기장 내용들은 날짜도, 페이지도 제각각으로 일곱 권의 책에 무작위로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고생했다고?’
루나의 기억은 슬픔 어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은 헐벗은 기억이었고, 어느 날은 끔찍한 시골의 추억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린 시절 노예처럼 부려진 기억들. 그 모든 고통스러운 것을 아키스는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미쳐 갔다.
‘뭐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여자가 다 있어.’
자다가 악몽을 꾸며 일어난 적도 있었다.
‘다신 그렇게 살지 않게 만들 거다.’
좋은 부분도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삶, 동경하는 것들, 그리고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테세스의 공연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써 놓은 건 의외였지만. 대배우 테세스는 대지진 때 다쳐 얼굴이 망가져 노래는커녕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했다.
‘처음부터 바로잡아야 해.’
그리하여 아키스는 휘멘을 속였다.
단순히 시간을 돌린다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영혼이 가루가 될 부담을 감수하고 타임 홀에 뛰어들었다.
좌표는 계산해 놓았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납치해서라도 제 곁에 데려올 것이다.
“그래, 지금 그녀가 갓난아이일지도 모르는데 데려와 어쩌게? 오차 범위 몰라? 그리고 네가 공작가로 간 나이가 몇 살이었지? 그땐 너도 힘이 없지 않았나?”
“손을 잡고 도망치라고 어린 나한테 시키기라도 할 거야. 그리고 어차피 그녀와 내가 만나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닌가? 그쪽도 조금은 생각해 뒀어.”
“……보통은 반대로 말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지만 상대가 그녀라면 휘멘도 이해는 갔다. 휘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 갈 데 없으면 우리 영지에 오든가. 꽤 부유하다고.”
“싫어.”
아키스는 딱 잘랐다.
“네 아버지 폭정 영주잖아. 그것 때문에 집 나와서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놈이 별소릴 다하는군.”
휘멘은 움찔했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에 대해 잘 알거든.”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아키스의 눈앞이 핑 돌았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그 순간 아키스는 현기증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꺾었다.
“이봐. 왜 그래, 갑자기 죽지 말라고. 시간 여행 중에 동행이 죽어 본 경험은 없단 말이야.”
휘멘이 아키스를 향해 몸을 따라 굽혔다.
“좀 닥쳐. 이럴 때 농담하고는…….”
아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발목이 계속 욱신거리는데. 이상하군. 떨어진 충격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그 말에 휘멘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아키스의 발목을 걷어 올렸다. 뱀에 물린 잇자국이 보였다.
“빌어먹을, 독사에 물렸군. 의식을 잃었을 때 물렸나 봐.”
“그럼 괜찮아. 독사에는 내성이…….”
“없어. 검은 살모사였다고.”
휘멘이 내뱉었다.
“잊었나? 널 잡을 만한 유일한 독을 만들 사람이 누구지?”
“……그런 네가 보증하는 독사에 물렸다고?”
이쯤 되자 아키스도 어이가 없었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그녀를 불행에서 구하러 가는 길은 보통 가시밭길이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가 불러낸 타임 홀이 닫히면 우리도 사라질 거야. 못해도 과거로 가면 되겠지.”
“……후우. 미치겠군. 좌표 계산도 불확실해, 장소 선정도 틀려…….”
아키스는 이마를 쓸어 올렸다.
“……그녀를 만나야 해. 잘못하면 내 기억이 다 날아갈 수도 있어. 그럼 다음 세상에서 그녀를 아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일이 잘 풀린다 해도 회귀해 내 기억이 모두 날아가면? 혹시 다른 여자가 내 각인자가 되면 의미가 없어.”
최악의 경우에는 각인자를 만들어 로드를 만든다. 그 기억만 제게 남을 수도 있다.
그 즈음, 자살 시도를 반복하며 아키스는 드래곤의 계획에 대한 전말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제국을 멸망까진 가지 않게 하고 저를 살려 준다는 드래곤의 말에도 아키스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간을 돌린다는 결정 또한 그 일환이었다.
루나가 없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시간을 돌린다 해도 그녀를 만나리란 보장이 없었다. 만난다 해도 그녀를 희생시키는 미래를 반복할 수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눈앞도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거기 누구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마차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외진 산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휘멘과 아키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참 해괴한 사람이군.’
둘은 동시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의 복장이 참 묘했다. 복식은 누가 봐도 귀족인데 마차를 직접 몰고 있었다.
거기다 복장이 기괴하게 촌스러웠다. 옷은 또 왜 저러며, 마부가 없는 귀족이 있다고?
“별일 아니오. 댁은 뉘시오?”
휘멘은 퉁명스레 물었다. 시간 여행 중에 낯선 사람과 접촉해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은 탓이었다.
청년이 모자를 벗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휘멘의 눈빛이 변한 것은.
“어이, 혹시 의사인가? 이건 약초 냄샌데.”
“아아, 저는 순방 약사입니다. 북부 영주 집안의 따님이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신다 하여 약을 지어 주고 오는 길이랍니다.”
“이 사람이 독사에 물렸는데 약 좀 가진 것 있나?”
그 말에 청년은 허둥지둥 약상자를 내렸다. 휘멘은 그 사내에게 이것저것 조언했고 둘은 급하게 약을 조합했다.
‘빌어먹을.’
아키스는 슬슬 포기하고 그냥 독사에 물려 죽어 버릴까 자조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타임 홀은 무사히 지나왔고, 이 시간의 아키스가 죽으면 과거의 아키스가 깨어날 것이다.
시간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아니, 안 돼. 어떻게든 그녀를…….
‘이 남자와 접촉한 것 정도는 별일 없겠지.’
아키스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그들은 길 한편에 아키스를 눕혔다.
“지금이 몇 년도지?”
“제국력 663년인데요.”
아키스는 청년의 말을 듣고 머리가 더 띵해졌다. 좌표에서 100년이나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녀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한 번 읽은 건 대체로 외우는 편이라 공작가의 연표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지금 공작이 누구더라…….
“마셔.”
휘멘은 아키스의 동의도 없이 약을 내밀었다.
고통이 점점 심해져서 아키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약을 먹었다. 그사이 그 남작이란 자가 그의 발목에 지혈제를 발랐다.
“그런데 뉘시기에 이런 독사에 물리고 지금껏 의식이 무사하시오? 둘 다 여염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딱 봐도 보통 미남자들이 아니었다.
그 순간, 청년은 흠칫 놀랐다. 신비로운,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고혹적인 자색 눈동자의 청년. 거기다 검은 머리에 큰 키. 보통 사람이 아닌 체구와 풍채.
제국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런 눈동자의 혈통은 한 사람 뿐이니까.
“혹시 로텐베른 공작님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이 사내를 죽여야 하나? 그는 저도 모르게 품 안의 단도를 떠올렸다.
“이것 참 영광입니다. 저는 버티 드 버몬드라 합니다. 이래 봬도 남작입니다. 전국을 돌며 영약을 파는데, 약의 효과를 인정받아 작위도 받은 집안이지요. 시내에서 큰 약방도 하고요.”
아키스의 표정이 굳었다.
버몬드 남작.
일기장에 떠오른 루나의 결혼 전 성이 그것이었다. 그녀의 숙부가 버몬드 남작이었다. 그리고 숙부가 죽기 전에는 그녀의 부친이 남작이었다.
아키스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자는 혹시……. 루나의 혼인 전 성을 모르는 휘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아키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 내게 뭘 바라지?”
아키스가 나직이 물었다. 아키스의 눈은 사내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잘 보니 눈앞의 청년은 녹색 눈이었다. 루나와 같은 색이다.
“지금 돈은 가진 게 없는데. 빚을 졌군.”
“당치 않습니다. 사례라니요. 이런 분을 구하게 되어 영광일 뿐이지요.”
“그런가? 그래도 말해 봐. 목숨 빚인데 뭐든지 들어줘야지.”
“정말 뭐든 들어주시렵니까?”
그의 표정이 슬쩍 변했다.
“정 하나 들어주시려거든…….”
사내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제 집안에 딸이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사내는 맹랑한 청을 했다. 목숨 빚 대신 제 딸을 공작가의 신부로 데려가라는 말.
아키스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정말로, 이 운명이라는 것이 우스웠다.
‘현 공작이라면, 카엘 드 로텐베른 공작. 이 연도에, 그자는 비밀리에 이미 결혼한 상태지. 첩도 있고.’
아키스는 남작에게 명령했다.
“증서를 쓰지. 자네 필체로 직접 써.”
휘멘은 귀신을 보는 표정이었다.
“너 미쳤냐?”
남작은 아키스의 마음이 변할세라, 급하게 약속 증서를 썼다.
“기한은 어떻게 할까요?”
“무기한이지. 공작가의 약속은 늘 그런 편이거든. 혹시, 이번 대에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지.”
아키스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그는 계약 증서에 작은 마법을 걸었다. 일단 한 100년은 충분히 잠들어라. 아키스는 입 안으로 속삭였다.
‘내가 가진 주인 찾기 마법이 있어 다행이군.’
그리고 증서 위로 공작가의 도장이 새겨졌다. 아키스는 남작이 편지를 봉하는 걸 보고 생각했다.
‘그녀가 편지를 발견하길 바라지. 다른 사람이 발견해도 상관없어. 일천한 가문과 공작가의 혼약 약속이니 적어도 이 편지가 세간에서 화제가 되겠지. 그럼 그대로 인연이 이어질 거다.’
그것은 아키스가 루나에게 보내는 100년 후의 청혼서였다.
아키스는 자신을 가호하는 드래곤의 마법을 절감했다. 이것 또한 그것의 뜻이라면, 그렇다면.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하늘이 흐려졌다.
“시간이 됐어.”
휘멘이 속삭였다.
아키스는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순간 남작은 눈을 비볐다. 눈앞에서 두 사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꿈을 꾼 것 같군. 하지만 증서는 진짜야. 진짜라고!’
그는 부리나케 마차에 올라탔다.
“내 딸은 공작 부인이 될 거야! 하하, 우리 가문이 출세하는 거라고!”
* * *
「제국력 773년」
“아아, 죽겠다…….”
버몬드가의 창고 정리를 하는 날은 죽어나는 날이었다.
숙모는 밖에서 사람을 부른다. 하녀를 일당을 주고 부른다 하다가 결국 일을 전부 루나에게 맡겼다.
15살의 아직 덜 자란 몸의 그녀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다.
‘어지러워. 배 아파.’
하필이면 몸이 죽도록 아픈 날이었다. 달거리 통증에 감기까지 겹쳤다.
제발 하루라도 쉬게 해 달라 부탁했으나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감히 일을 미루고 꾀병을 부리려 했다는 이유로 새틴은 하루 종일 붙어 루나를 감시하고 괴롭히고 있었다.
“너, 브로치 하나라도 빼돌리면 가만 안 둬. 우리 증조부 때는 약을 많이 팔아 돈을 많이 벌었으니 창고에서 보석이라도 나오면 다 가져와야 해. 증조할아버지 짐이 이제야 발견될 게 뭐니?”
근 10년만의 창고 정리였다.
루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그녀는 선반 위의 봉인된 상자를 발견했다.
‘저 위에서 빛나는 건 뭐지?’
금빛 먼지가 내려앉는 환상을 본 듯했다. 루나는 손을 뻗어 상자를 집었다.
‘오래된 편지들이네.’
편지 중 하나가 빛나는 것 같은 건 착시일까. 루나는 편지에 손을 댔다.
그때, 새틴이 그녀를 밀쳤다.
“이건 뭐야? 귀족 가문들과 주고받은 편지? 우리 집안에 이런 인맥들이 있었나?”
새틴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편지를 빼앗아 들고 급히 창고를 나갔다.
“엄마, 이 문장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엄마, 어디 계세요?”
루나는 어깨를 문질렀다. 밀쳐진 통에 부딪힌 어깨가 욱신욱신했다.
“아파라.”
그런데 왜 기분이 싸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오늘도 하루는 흘러갈 것이다.
* * *
휘멘은 목욕을 하고 가운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테이블엔 편지가 쌓여 있었다.
“이상하군.”
뭔가 이상해. 그중에는 아키스가 그를 소환하는 편지도 있었다.
‘이번에 아카데미에 안 가면 그놈이 좀 피곤하게 굴겠군.’
그런데, 괜히 그는 서부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이 든 지 꽤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심장이 싸했다. 뭔가를 두고 잊어버린 것 같았다. 무언가를…… 어딘가를 찾아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던전을 좀 탐색해 봐야겠어. 난 촉이 잘 맞거든.”
그는 턱에 손을 대고 말했다. 역시 아카데미는 사퇴해야겠다.
“뭐, 서부에서 좋은 던전을 찾아내면 좋지.”
그는 별생각 없이 떠올렸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떠돌이 생활을 계속해야겠다.
* * *
「제국력, 776년」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
새틴에 대한 결정은 대단히 큰 실책이었음을 아키스는 인정했다.
그런 편지 따위 무시하고 돈을 줘서 파혼했으면 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버몬드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새틴과의 약혼은 충동이었다.
‘내가 충동을 가져 본 적이 있던가?’
새틴이 공작가의 이름을 팔아 벌이고 다니는 일들이 벌써부터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이전부터 기묘한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가 굵어질 때까지 길거리에서 자라서인지도 모른다. 종종 그 상실감에 젖을 때면 자기 자신을 잃는 듯했다.
버몬드 남작가에서 약혼 증서를 들고 온 날.
그날은 아침부터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다.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소식을 듣는 날처럼.
충동적으로 약혼을 수락한 그때는, 그냥 마음이 약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러지?’
거기다 그는 새틴에게 가끔 맹렬한 적개심을 느꼈다.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저도 정말 왜 그런지 몰랐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제가 맡긴 엄청난 업무를 사흘 만에 해냈다는 천재 소년 번역가가 나타났다.
창밖으로 수도의 정경이 흔들렸다.
오늘 그는, 그 소년을 직접 만나러 가기 위해 마차를 타고 고서점 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마차에서 내렸다.
작은 서점의 입구는 활짝 열린 채였다. 그때 청명한, 중성적인 소년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공작은 남자도 안 좋아할걸요? 분명히 피까지 차가운 냉혈한일 거야.”
공교롭게도 자신을 욕하는 소리였다.
아키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때 서점 안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낀 남루한 복장의 소년이었다.
‘이게 뭐지?’
그 순간, 아키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에 무언가가 꽂히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타인을 보고 느껴 본 적 없는, 기묘하고 이상한 설레는 감정이었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살며시 벌어지는 핑크빛 입술을 보고 그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아, 날 알아봤군. 아키스는 직감했다.
그는, 서점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인상적이군.’
아마 저 소년과는 길게 알고 지내게 될 것 같다. 그는 그런 근거 없는 예감이 들었다.
아키스의 입꼬리는 어느새 살짝 올라가 있었다.
<에필로그 ‘그리고, 어느 날 미래에서’ 마침>
외전1
“그래서 말이지, 흑흑. 그 불쌍한 놈. 루는 정말 엄청난 재능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내가 우리 가게 상황만 좀 나아지면 그놈 학교 보내 주려고 남몰래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이고. 우리 가게를 일으켜 세워 주고는 그 녀석은 그만…… 그만…….”
유서 깊은 고서점 ‘달빛 서점’의 주인 필립은 술만 마시면 울먹이며 이렇게 중얼대곤 했다.
필립의 직원으로 일하던 미소년으로 이름난 천재 번역가가 있었는데, 그 번역가가 홀연히 사라진 뒤로 필립은 술만 마시면 소년을 찾으며 주정했다.
“또 그 이야기예요? 세 시간이면 다른 사람의 열흘 치 일을 해냈다는 전설의 번역가?”
그 소년의 이야기는 고서점 거리의 전설이었다. 샐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애초에 샐리가 필립과 눈이 맞은 것도, 술을 마시고 한탄하는 필립을 다독여 주며 시작된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필립 친구의 먼 친척이었다.
‘이거 하나만 빼면 참 단점 없는 남잔데.’
샐리는 살짝 웃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본래 고서점 주인들은 보통 장가들기 힘들었다. 여인들이 잘못해서 조금만 접근해도 경비병에 잡혀가는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법 개정이 되어 여인들도 고서점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샐리만 해도 남편인 필립 가게에 이제는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기운 내요, 당신. 요즘 일도 잘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은인이야. 그 애가 없었으면 이 서점은 진즉 망했다고.”
필립이 울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우울함과는 반대로, 서점 일은 최고 호황을 찍고 있었다.
고대어 법 개정.
일명, 에리스 특별법 해제.
그 이후로 이제 여인들이 고서점 거리에 접근할 수 없고, 고대어를 익히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유명무실해졌다.
처음에는 고서점 거리의 주인들도 뭐가 달라지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지, 진짜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들이 생길 거란 말이야?’
그들이 크나큰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 건, 1년 후였다.
갑자기 고대어 능력이 출중한 번역가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어는 본디 번역가가 부족하지, 책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돌연 번역가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몸값이야 좀 줄어들었지만, 업무량이 늘어나 중개비도 늘고, 결과적으로는 번역가들의 벌이도 늘어났다.
아카데미에서는 이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다. 카리노 대왕의 마법이 풀리며 여인들도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세상이 올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옳은 길이기에 지금까지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던 마력 제한이 풀려, 번역가들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루 같은 천재는 없었지.’
필립은 술잔을 기울이며 울적하게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그 애를 지켜 주지 못했다니까. 공작이 와서 다그치니, 미주알고주알 아는 거 모르는 거 다 일러 버렸어.”
“……뭐 아는 것도 없어서 알려 준 것도 없다면서요? 그리고 당신 같은 소시민이 어떻게 공작을 막아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도 안 될 걸요?”
“그걸 아니까 그렇지. 아이고, 하여간 그렇게 이쁘장하면 남자를 조심했어야지! 그리 미소년이니 공작에게 찍혀 한입에 먹혀 버린 거지.”
이 또한 필립이 술만 마시면 하는 한탄 레퍼토리였다.
“그러니까, 공작이 그 미소년을 콕 찍어서 데리고 놀다가 공작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싹 정리하려고 했다 이거죠? 그걸 눈치채고 소년이 허둥지둥 도망가니, 여기 찾아와 찾아내라 다그치고 종래에는 수배까지 내렸다, 이 말을 하려는 거죠? 언제 들어도 놀라운 이야기네요.”
샐리는 중얼댔다. 필립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지금도 연통이 없으니, 아마 공작 손에 그 소년의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싶은 거죠?”
“맞아, 그땐 정말 몰랐다니까. 공작이 루, 그 소년 번역가 이름이 루였던 건 알지? 그 녀석을 야릇하게 보는 건 알았지. 둘 다 너무 잘생겨서 혹시 그런 사이가 아닐까, 싶은 순간도 있었는데 그냥 내가 미쳤나 했지. 그런데 그 녀석, 갑자기 야간에 가게를 보다 납치범들에게 납치를 당할 뻔하지 않나, 어딘가에 쫓기는 것처럼 눈치를 보지 않나.”
필립은 한탄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높으신 분들이 이렇게 무서워요. 아아, 미인박명이라더니.”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작 부인과 혼인하려 그랬다는 건 좀 공감이 가네요.”
샐리는 유명한 익명 작가, ‘레드’의 팬이었다. 레드의 후원자이자 자선 사업가로 알려진 공작 부인을 동경하는 건 당연했다.
“듣기로 공작 부인은 영리한 데다 미모의 소유자라 하니, 그런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괴팍한 공작이 무슨 짓을 한 것도 이해는 가는군요.”
그렇게 중얼대는 샐리의 눈은 살짝 풀려 있었다.
요즘 놀라운 행보를 보이는 공작 부인이라면 이렇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여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물론, 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필립은 더욱 통탄하고 싶어졌다. 그 나쁜 연놈들. 루는 어쩌고.
“아이고, 불쌍한 루…….”
“술이나 더 마셔요. 그리고 잊어요.”
샐리는 시원하게 필립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그때, 1층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문을 안 잠갔나?”
“이 시간에 웬 손님이죠? 내가 내려가 볼게요.”
서점 사업이 호황이 되며 24시간 개점에서 20시간 개점으로 바뀐 후부터는, 영업시간 종료 후엔 긴급 업무만 받고 있었다. 샐리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시간에 어떤 손님이 올 줄 알고…….”
필립도 비틀대며 급히 샐리를 따라 내려갔다.
“뉘십니까?”
필립은 문안에 서 있는 손님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레이스 달린 모자를 써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사장님이 혼인을 하셨나요? 아니면 고서점에 새 여직원이 뽑혔나요?”
“제가 이 서점의 안사람이긴 한데요.”
샐리의 대답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새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필립은 기함을 토했다.
‘루랑 꼭 닮은 여인?’
그녀가 눈을 휘면서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필립 사장님.”
필립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그녀의 웃음이 너무도 익숙했다.
‘내가 귀신을 보는 건가?’
루나는 수줍게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 당황스럽죠? 그래서 예전처럼 입고 올까 했는데…….”
“귀, 귀하신 분께서 저를 이렇게 놀리시면 곤란합니다.”
필립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위아래로 여인을 훑어보았다. 루나는 그의 반응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았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눈을 휘둥그레 뜬 샐리가 허둥지둥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 맞아요.”
“……아니, 어찌 알고 오신지 몰라도 사람을 이리 놀리시면.”
그녀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루 말투는 오랜만이었다.
“사장님, 제대로 서랍 정리하시라 했죠? 저 책은 머리글자대로 정리해 둔 거였는데 또 망가뜨려 놓으셨네요.”
그 말투에 필립은 입을 쩍 벌렸다.
“루, 루 맞아?”
“네, 맞아요. 맞다고 했는데.”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필립은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보았다.
“그렇게 되었어요.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불법 아닌 거 알죠?”
“……너…… 너…….”
필립은 몸을 발발 떨었다.
“고…… 고…… 공작이…….”
“네?”
“너를 여자로 만들어 버린 거냐, 루?”
“네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고, 이 나쁜 사람, 아니 나쁜 분!”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장님, 술 마셨어요?”
루나는 필립의 말을 듣고 웃어 버렸다. 공작이 저를 잡아가 마법을 걸어 여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 태어날 때부터 여자였어요. 아아, 그렇게 떨지 마요. 정말 이제는 합법이니까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필립에게 안부를 묻고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필립은 루나의 정체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십니까. 세상에, 내가 왜 몰랐을까…… 거기다 외모도 좀 달라진 것 같고.”
“그때는 화장도 하고, 약도 먹어서 변장을 했으니 그렇지요. 인근 거리에 물어보니 필립 사장님이 술만 마시면 내 이름을 부르며 운다 하기에 걱정 말라 인사하러 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나 아주 잘 지내요.”
“아니 그럼 어떻게 이제야…… 그리고 비밀로 하셔야 할 일을 왜 굳이 말하러 오신 겁니까.”
루나는 설핏, 신비하게 웃었다.
“내게 아카데미 입학하라고 했죠, 사장님? 배워야 한다고 많이 안타까워했잖아요.”
“그건, 그런…… 데.”
필립은 어떤 말투를 써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됐다고요. 이제 나, 아카데미 다니게 되었으니 걱정 마요. 그리고 다음엔 손님으로 올게요. 잘 지내요.”
루나는 일단은 이 서점에서 일한 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 비밀로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인사하고 사라졌다. 필립은 내내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하하…….”
“언제까지 손 흔들고 있을 거예요?”
샐리는 뒤늦게 나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 마차는 뭐지?’
샐리가 선 창문에서는 마차의 문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대귀족의 마차로 보이는 번쩍이는 고급 마차가 낡은 서점 앞에 서 있었다.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마차 위로 올라탄다. 그러자 마차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몸을 숙여 낚아채듯 그녀를 품에 안아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 어디서 본 듯한 사내인데?”
“……공작……?”
필립은 입을 떡 벌리고 중얼댔다. 그의 머릿속에서 완성되면 안 되는 퍼즐이 완성되고 있었다.
“여, 여보? 당신 왜 그래요?”
“아하하. 잘 지내니 되었다, 루. 하하…….”
“네?”
* * *
아키스는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루나를 낚아채듯 마차에 태워 제 무릎에 앉혔다.
루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왜 그래요?”
“아아, 이 건물에서 나오는 당신을 보니 흥분돼서. 첫날밤 일도 상상되고 말입니다.”
“기억도 없으면서.”
“그게 애석한 일이지요.”
아키스가 루나를 마차 벽에 밀어붙이고 키스했다. 혀와 혀가 끈적하게 얽혔다. 루나는 더운 숨을 내쉬면서 아키스의 품에 뺨을 기댔다.
“……역시 남자 모습이 더 좋은 거 아녜요? 고서점 앞에서 흥분하다니.”
“그럴 리가. 내가 당신의 여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키스가 손을 내려 루나의 여성스런 곡선을 어루만졌다. 소름이 쭈뼛 돋는 느낌에 루나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정말, 집에 가면 아기들 앞에선 조심해요.”
“아직 한 살 반인데, 엄마 아빠가 이런들 뭘 알까.”
“다 안다니까.”
루나는 툴툴댔다. 아키스는 루나의 입술에 한 번 더 쪽, 키스했다.
“내일 첫 수업, 긴장되지 않습니까?”
“당신도 휘멘도 있는 아카데미인데 긴장될 게 뭐 있어요?”
루나가 아카데미에 다니기로 한 건 최근에 한 결정이었다.
아카데미에 여학생 입학을 늘리기 위한 행동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제가 아카데미에서 고대 문화를 전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공작 부인의 또 다른 기행에 대해 신문도 곧 보도를 시작할 것이다.
‘내가 먼저 나서야 해.’
루나가 해야 뒷말이 적었고, 뒤를 따라오려는 여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당신이 학교 다니는 것을 곤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태반은 토론과 여러 가지 수단을 이용해 박살 내 버렸지만. 아키스는 그 말을 삼켰다.
“그럼 옆에서 지켜 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인데.”
루나는 실실 웃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고대 문화지? 비인기 강좌인 데다 나나 휘멘도 전공한 바가 없어서 수업 이수 못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죠. 두 사람 다 내 담임 교수 한다고 덤비면 정말 화낼 거야. 과보호도 정도가 있지. 정면으로 부딪힐 때도 있어야죠.”
“뭐랑 정면으로 부딪치는데.”
“세상의 편견.”
아키스는 낮은 신음을 토했다.
“……알겠습니다. 당신 담당 교수나 부교수가 되는 건 그만두죠.”
“아주 좋아요.”
루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그냥 고대어를 전공하면 안 되었습니까? 그럼 내가…….”
“아키스.”
루나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누구에게 고대어를 배울 단계예요?”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숨 막히게 매력적인 그녀였다.
* * *
‘고대 문화 연구’는 너무도 비인기 수업이라 매 학기 폐강 위기를 맞이하는 수업이었다.
다만, 중요한 과목이라는 명맥 아래 겨우 최소한의 수강생들로 꾸려 나가고 있었다.
고대 문화 연구 중급. 이번 시즌에는 무려 세 명이나 수강하기로 하여 나이 든 노교수는 오랜만에 끓는 피를 느꼈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간 교수는 입을 쩍 벌렸다.
“……세 분 다 수강생이시라고요?”
“네.”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흑발에 보라색 눈을 한 절세 미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옆의 적색 머리의 사내도…… 꽤 익숙한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줄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재킷을 입고 그 아래 긴 드레스를 입은 차림이었다.
“아닌데요.”
“네, 네에. 공작 부인?”
“……이 중 저만 수강생입니다.”
“네?”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저 사람들 곧 나갈 거예요.
루나는 수업 첫날, 약간의 설렘과 민망함을 담은 얼굴로 수많은 학생들의 눈빛을 받으며 강의실로 걸어갔다.
‘정말 공작 부인께서 입학하셨어?’
‘세상에, 정말 진짜야!’
그렇게 경외와 충격 속에서 강의실에 입장하며 본 것은…… 먼저 수강을 신청한 두 사람이었다.
제국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라는 교수, 아키스와 휘멘.
그들이 뻔뻔하게 학생 행세를 하며 앉아 있었다. 교수도 수강 신청이 가능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학생으로 강의를 들으러 들어오다니.’
루나는 이건 몰랐다, 하는 기분이 되었다.
‘거기다 휘멘, 당신까지……. 내가 이 사람들 때문에 못살아.’
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었다.
“두, 두 분이 제게 배울 게 있으시다고요?”
“제국 문화사는 초보라서.”
휘멘이 강의실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있다가 대답했다.
“나도 아는 게 없습니다.”
이어서 아주 뻔뻔하게 대답하는 아키스였다. 루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둘은 수강 신청 취소할 거예요.”
“쟤만 취소할 건데.”
“저자만 취소할 겁니다.”
아키스와 휘멘은 동시에 서로를 가리켰다. 루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장 안 나가요? 가서 수업 준비나 해요.”
노교수는 진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두 사내를 가녀린 공작 부인이 눈빛만으로 굴종시키는 모습 말이다.
“이제 수업 시작하셔도 됩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야 루나의 아카데미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감히 루나를 누가 쳐다볼 새라 데리러 오고 데리러 가는 아키스의 모습은 순식간에 아카데미의 명물이 되었다.
아키스가 바쁠 땐 휘멘이 대신 가곤했는데, 붉은 머리 흑마법사와 금발의 공작 부인이 나긋한 걸음걸이로 대화를 나누며 교정을 누비는 모습에 곧 많은 학생들이 익숙해지게 되었다.
* * *
그리고 루나가 고대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외전2
요즘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의 일상을 축약한다면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었다.
연전연패.
이전에는 고집을 굽히는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던 인생이다. 그 선대 공작마저도 아키스의 고집이라면 진절머리를 내고 학을 뗐으니까.
그런 그를 속수무책으로 지게 만드는 상대가 요즘은 세 명이나 되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아키스의 앞을 거대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으응? 아버지.”
“…….”
“나 딱 두 개 마안― 응?”
장남 보레아스가 아키스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
통통한 볼에 저와 닮은 날카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애교로 반짝였다. 혹자는 네 살 보레아스의 외모를 보고 살아 있는 천사라고 했다.
‘그래, 네가 슈가였어. 진작 알아봤지.’
테이블 아래서 낑낑대며 쿠키를 손에 넣으려는 아이의 작은 정수리를 발견한 것이 방금 전이다. 빼꼼히 움직이는 테이블 아래의 검은 머리 정수리가 얼마나 귀엽던지.
‘점심밥이 모자랐나?’
낮에도 유모의 돌봄을 받으며 저 조그만 입으로 준비된 식사를 남김없이 비운 것을 본 터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간식을 조르는 걸 보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래 아이들보다 긴 보레아스의 팔다리는 아무리 봐도 나이 때 아이들보다 말랐으면 말랐지 뚱뚱하지 않았다. 골격도 이미 꽤 테가 났다.
‘……전형적인 건강 체질이군. 나만큼 클 모양이야.’
생각해 보니 루나가 달콤한 음식을 참 좋아했다. 이런 점을 장남인 보레아스가 빼닮았다 생각하면 전율할 정도로 귀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보레아스의 외모는 아키스와 똑같았지만, 내용물은 루나를 속 뺐다.
“딱 한 개 만이다.”
“안 돼. 두 개, 으응?”
“…….”
아이가 아키스의 옷깃을 잡았다. 근데, 세 살 반짜리가 말을 왜 이리 잘하는지.
자신은 어릴 적부터 아이답지 않아 징그럽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보레아스는 아주 애교가 뚝뚝 넘친다.
“……엄마한텐 비밀이다.”
“녜~”
아키스는 오늘도 아이의 사랑스런 말투에 지고 말았다. 그는 접시에서 큼직한 초코 칩 쿠키를 두 개 집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작은 손이 양손으로 야무지게 커다란 쿠키를 집었다.
보레아스는 아키스의 품에서 쿠키를 암냠암냠, 오물거리며 바로 먹어 치웠다. 그리고 두 번째 쿠키를 아키스에게 주었다.
“자.”
아키스는 눈앞으로 내밀어진 단 향을 풍기는 쿠키를 보았다.
“이거 아버지 거. 그래서 항상 내 건 두 개.”
“…….”
아키스는 보레아스를 꼭 끌어안았다. 한숨까지 나왔다.
‘정말, 귀여워서 미치겠다…….’
그의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사랑하는 아내, 루나와 혼인한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그 아내와 닮은 자식을 본 것이었다.
결국 보레아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아키스는 좋아하지도 않는 단 쿠키를 하나 다 먹었다.
“웅, 맛있지? 아버지, 너무 좋아!”
보레아스는 사르르 웃었다. 아키스는 네가 좋으면 뭔들.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는 저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 자식들이 태어나기 직전만 해도 그의 인생에 아이들이 이렇게 큰 존재가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 엄마 왔어!”
마차 소리 듣는 건 귀신이었다. 보레아스를 안은 채 내려간 아키스는 루나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걸 발견했다.
“엄마!”
루나의 드레스 자락 너머로 플로라의 작은 발이 보인다. 보나마나 루나가 귀가하는 것 같으니 유모를 재촉해 1층으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보레아스에 비해 수줍음을 잘 타는 플로라의 작은 몸이 루나의 드레스자락을 꼭 쥐고 휘청거리며 엉금대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우신지.’
터질 것 같은 광대를 애써 누르며 참고 있는 알렉과 비아가 보였다.
루나가 플로라를 못 본 척하며 말했다.
“우리 플로라가 어디 갔지? 우리 딸 못 봤어요? 외출하고 돌아오니 안 보이네요.”
“글쎄요, 정말 못 찾겠습니다.”
알렉은 변죽 맞추기의 달인이었다.
요즘 세 살 반의 플로라는 숨기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옆에서 울프가 컹컹 울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얼마나 영민한지 울프 또한 플로라를 못 찾는 척하고 있었다.
“당신, 잘 있었죠?”
루나는 요즘 새로운 자선 사업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여성 교육원 설립, 여성과 아이를 위한 복지 시설 확충, 그리고 머무를 곳 없는 처지의 여성들을 수용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그녀의 이례적 행보는 신문에서도 연일 칭찬을 받고, 그녀는 최근 제국민들에게 새 별명으로 불리는 중이었다.
레이디 주얼.
제국의 반짝이는 보석 같은 여인. 그녀에 대한 제국민들의 애정을 담뿍 담은 별명이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죠.”
“아카데미 일이 일찍 끝났나 봐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키스하려 했다.
그런데, 그전에 플로라가 루나의 드레스를 잡고 대롱 매달렸다. 천국 같은 키스를 빼앗긴 아키스는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당신도 빨리해요.’
플로라 못 찾겠다 놀이에 동참하라는 뜻으로 루나가 재빨리 아키스에게 눈짓했다.
아키스는 영 이런 데는 재주가 없었다. 아키스가 입을 다물자, 알렉과 비아가 플로라 아가씨의 동심을 깨지 말란 눈빛 신호를 번뜩이며 강렬하게 보냈다.
“……플로라.”
아키스는 매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있지?”
그러자 플로라는 그 조그만 고개를 아키스를 피해 반대로 쏙 빼며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 아키스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보레아스가 루나를 빼닮은 애교로 그를 홀린다면, 딸 플로라는 존재 자체가 귀여웠다.
루나도 미인이었지만, 아키스는 희대의 절세 미남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둘의 좋은 점만 쏙 빼서 태어났다.
보레아스와 플로라는 이란성이었는데, 플로라는 특히나 루나를 쏙 빼닮았다. 그래서 아키스는 플로라라면 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럼 엄마한테 잘 다녀왔어요, 뽀뽀는 누가 해 주지요? 플로라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러자 플로라가 뒤에서 쏙 나왔다.
“저요, 저요!”
“어머, 우리 플로라가 여기 있었네. 너무 잘 숨어 있어서 여태껏 아무도 몰랐어.”
“헤헷.”
플로라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아아아아…….’
이제 비아와 알렉은 거의 소리 없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거의 풀려 있었다. 아키스는 십분 공감하는 제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나도 엄마한테 뽀뽀할래요~”
두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존재는 엄마였다. 뭐든지 동생에게 양보하는 보레아스도 딱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것. 엄마의 마중 뽀뽀와 굿 나잇 키스였다.
“나 먼저.”
“나 먼저 할래~”
아직 둘 다 혀가 짧아서 ‘나 멍저.’로 들렸다. 양쪽에서 드레스 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통에 루나는 솟아오르는 입가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아기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아키스가 루나의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당겨 쪽 하고 키스해 버린 것이다.
“아키스…….”
루나의 볼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아키스는 떨어질 때 루나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렉과 비아는 재빠르게 눈을 피했다.
“미안하지만 엄마 입술은 아빠 거다.”
“히잉…….”
두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내기 전에 아키스는 둘을 동시에 안아 올렸다. 플로라는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고 착 매달렸다.
아이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아키스는 두 아이의 통통하고 하얀 볼에 쪽 키스했다.
아이들의 녹색 눈과 보랏빛 눈이 아키스를 응시했다.
결국, 루나는 저녁 먹고 나서 동화책을 읽어 준다는 말로 아이들을 달랠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책 읽어 줄까? 겨울의 나라 이야기 어때?”
루나는 동화책을 꺼내 들며 말했다.
겨울의 나라 이야기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으로, 붉은 책이자 작가 레드의 마지막 시리즈였다.
봄의 나라, 여름의 나라, 가을의 나라, 겨울의 나라 시리즈는 대단히 아름다운 4권의 동화집이었다.
동화책을 마지막으로 작가 레드가 은퇴 할 것임이 수도에 알려졌을 때 슬퍼하는 독자들의 성토가 줄을 이었다.
그만큼 작가 레드는 사랑 받던 존재였다. 루나는 재차, 자신은 작가 레드가 아니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익명작가는 은퇴한다는 뜻을 밝혔다.
‘아무리 아이 양육에 바쁘셔도 독자들 생각도 해 주셔야지요.’
‘아이 양육 때문이 아니랍니다. 작가 본인이 은퇴 뜻을 밝혔어요. 제가 작가 본인이 아닌 걸요.’
한동안 루나는 사교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루나는 좀 억울했다.
‘나도 소설 읽고 싶다고.’
작가 레드가 출간한 소설의 가장 열렬한 팬은 다름 아닌 루나, 그녀였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 레드의 다음 소설은 언제 볼 수 있죠?’
마리벨 후작 부인의 질문에 루나는 속으로 대답을 삼켰다. 글쎄요, 한 몇십 년 후, 다음 로드가 나타나면?
루나는 본디 붉은 책을 발표하고 싶었지만, 그 책이 비밀스런 이 땅의 지배자, ‘로드’에게 전해지는 유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럴 수 없었다.
아키스와 휘멘도 책의 존재를 숨기자고 말했다. 거리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귀중한 유산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작가 레드는 영원히 비밀스런 익명 작가로 남게 되었다.
‘작가 레드 없인 못 삽니다! 이 노부인들 삶의 낙인데!’
루나는 늘 침착한 사교계의 대모, 마리벨 후작 부인이 그렇게 목소리를 올리는 걸 처음 봤다. 황후도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했다. 하지만, 낙심했다 해도 이전보다 상태는 훨씬 좋아진 황후였다.
어쨌든 작가 레드는 은퇴했다.
이제 작가 레드의 은퇴 작품인 동화들은 수도의 전설이자,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엄먀?”
정신 차려 보니 루나는 책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이 루나를 초롱초롱 보고 있었다.
“동화책 싫어.”
플로라가 수줍게 말했다. 금발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것이 깜찍한 인형 같았다.
“다 외웠단 말이야.”
“그러니……?”
보통 다 외웠다 하나?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읽던 거 읽어 줘. 응?”
“그거, 그거어―.”
아가들이 깜찍하게 졸라 대는 통에 루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알았어. 어제 읽던 마법학개론 초급 읽어 줄게.”
“우웅, 중간부터~”
도대체 이 아가들은 어떤 애들로 자라날 것인지. 아키스의 자식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지식에 대한 욕구가 왕성했다.
‘남편은 몸도 무섭게 튼튼한데 너무 공부만 하는 애들로 자라진 않겠지.’
어차피 앞으로 자라며 계속 주목 받게 될 아이들이었다. 재능이나 지위 모두 세상이 놔두지 않을 아이들이라, 어릴 적이라도 천진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아가들은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루나는 다른 마법사들은 소년기에나 시작하는 마법학 개론서를 읽어 주었다.
아직까지는 제국어로 번역된 기초 과학서나 초급 마법서로 만족하고 있었지만, 점점 더 지식을 원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컸다.
“……마력 파동은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일어나며, 자연계의 움직임은…….”
그보다, 정말 이 아가들 이해하는 건가? 루나 자신도 고대어 문화라면 모를까 마법은 무지한데 아가들은 눈을 초롱대고 있었다.
‘으응, 하지만 정말 귀여워.’
그러다가 꼬박 졸기 시작하면 천사들이 따로 없었다. 루나는 책을 한참 듣다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키스는 서재에서 보좌관과 이야기하다, 2층의 가족용 작은 거실로 향했다. 작년에 아키스가 가족들을 위해 구입한 북해 여우 카펫 위에 쌍둥이들과 루나가 뺨을 맞대고 자고 있었다.
‘화가를 불러다 이대로 그림을 그리라 하고 싶군. 시간을 박제하고 싶어.’
너무 달콤한 모습이라 아키스는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우웅, 아빠.”
플로라가 눈을 비비며 속삭였다.
“나, 또 꿈꿨어.”
아키스는 루나와 보레아스가 깨지 않게 하기 위해 플로라를 조심히 안아 올렸다.
등을 토닥이자, 플로라가 옹알대며 속삭였다.
“창밖에 날개 달린 작은 사람 있었어. 반짝여서 아주 예뻤어.”
“그랬니.”
절로 사르르 부드러운 말투가 나왔다. 플로라는 루나 다음으로 로드로 발현될 가능성이 높은 아이라, 꿈을 꾸면 모두 이야기하라고 가르쳐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루나의 힘이 사라지고 이 아이가 도서관의 꿈을 꾸면 그녀가 로드가 될 것이다.
‘꿈을 꿔도 잊을 확률이 높고 이 아이 대엔 다음 로드가 탄생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혈통은 직계에서 손아래로 이어지니, 아이들이 다 커서 자식을 낳으면 루나와 아키스의 손자뻘에서 다음 로드가 탄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이 늘어놓는 꿈 이야기는 재밌었다. 아이들은 사소한 걸 본 것까지 다 이야기하곤 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다채로웠다. 보레아스와 플로라는 다양한 꿈을 꾸고, 또 다양한 걸 보았다.
불 안에서 춤추는 사람, 창밖의 요정, 눈송이 사이에서 놀고 있는 정령들…….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대단했다.
“요정이랑 놀 수 있을까?”
“언젠가는.”
플로라는 아키스를 바라보다가 헤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아키스도 이런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를 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의 세계는, 몹시도 달콤했기에.
외전3
그날은 간만에 드래곤의 신전에 가는 날이었다.
드래곤 계약자의 혈통을 이은 후계자, 보레아스의 마력 정화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계약자들은 2, 3년에 한 번 씩 신전에 가서 몸의 운기를 보전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놈의 신전, 없애 버리고 싶습니다.”
신전에 향하는 날이면 아키스는 그렇게 투덜대곤 했다. 그 모습이 꼭 병원 가기를 싫어하는 아이 같았다.
‘으음, 나도 그곳은 음침해서 싫지만…….’
루나는 제인의 시중을 받아 옷을 입었다.
요즘 제국 여성들의 의상 유행은 모이라가 주도하고 있었고, 모이라는 신상 옷을 루나에게 가장 먼저 보내 주었다.
루나가 옷을 입고 다니면 홍보도 되었지만, 무엇보다 모이라가 좋은 마음으로 그런다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예전처럼 치렁치렁한 옷을 안 입어 다행이지.’
고대어 법이 해제된 이후, 여성의 취업률도 늘어났고 복식 유행도 급변했다.
지금 유행은 흐르는 듯한 옷에 금이나 은실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 정도만 차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풀어서 꽃과 금은 핀으로 장식하는 것이 가장 유행이었다.
아키스는 루나가 유행하는 대로 꾸민 걸 볼 때면 여신 같다고 말하곤 했다.
“외출 준비 끝났어요?”
“네.”
마지막으로 루나의 손에 장갑을 끼워 주는 것으로 제인은 몸단장을 마무리 했다.
“오늘 예쁜데.”
“고마워요, 공작님.”
루나는 작게 웃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쌍둥이를 출산한 후, 그녀는 다시 살이 쏙 빠져 버렸다.
사실 너무 바빠서 빠진 것에 가까웠다. 루나는 여전히 자선 사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거기다 페니의 행사에도 다녀야 했고, 제약 사업도 가끔은 들여다봐야 했다.
거기다 신문사의 취재, 황궁의 행사……. 또, 작가 레드의 작품에 관련된 행사도 가끔 있었다. 거기다 루나는 시간이 나면 아마추어 작가들의 편집자 노릇도 계속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서 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에게는 그녀를 도와주는, 아키스가 붙여 준 전문 지원 조가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가족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즐거워. 이런 거 못하고 지난 생처럼 단명했으면 어쩔 뻔했어.’
하루하루 바빠서 비명을 지를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기운이 넘치는 건 그런 하루하루를 몹시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키스가 결혼 전 이상으로 그녀를 원하고 갈구하는 건 새삼 놀라웠다. 아이를 낳으면 변하는 부부도 많다 하던데.
“그건 그렇고, 세상엔 참 변하는 일이 많아요. 그 신관이 그리 변할 줄이야.”
아키스는 침통한 소리를 냈다.
“난 늘 그 녀석이 싫었습니다.”
“네에, 이해해요. 드래곤의 계약자가 드래곤에게 소원을 빌면, 보통 드래곤의 마력을 감당 못해 죽는다. 그런 것일 줄은 몰랐잖아요. 그런데 그 신관의 소원이…….”
“일생에 단 한 번, 드래곤을 직접 보는 거였죠.”
아키스는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 드래곤을 소환하면 계약자는 마력을 감당 못해 죽는다는 거였다.
그러니 정말 극한의 상황이 아니고서야 드래곤 소환은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신관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소원을 가진 건지.
‘그러니까. 드래곤의 계약자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는 거잖아, 웃기는 사람이야.’
루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게 다행인 자였다.
‘내 미래 일기장에도 그자는 싫다, 뭐 그런 말이 적혀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좀 미묘하다고 할까.
어느 날, 드래곤이 나오는 꿈을 꾼 신관은 그날 이후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작 루나는 꿈에서 다시 드래곤을 만나지 못했다. 드래곤이 루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대신, 드래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어린 보레아스에게 전하고 갔다.
‘나, 꿈꿨어. 이상한 사람이 나왔어.’
어느 날, 늦잠을 자는 루나의 침대에 파고들며 보레아스가 잉잉댔다. 그러면서 아가가 속삭인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때, 루나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겨우 눈을 비비며 그러니? 했던 것 같다.
‘황금처럼 반짝이는 사람이었어. 엄마를 보고 가고 싶은데, 지금 그 사람이 힘이 많이 약해져서 거기까진 무리래. 세상의 규칙을 어긴 걸 자기 몸으로 전부 감수하는 중이래. 하지만 우리 가족을 사랑해서 그런 거래.’
루나는 너무 놀라 숨죽이며 눈을 반짝이는 작은 보레아스를 보았다. 빛나는 사람이라면, 루나가 본 드래곤의 본모습이었다.
빵빵한 볼에 말랑한 몸을 한 작은 아이는, 짧은 혀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치만, 걱정은 하지 마로. 우웅, 괜찮다고 했어. 언젠간 다 낫는대.’
루나는 공연히 눈시울이 붉어져, 눈가를 닦았다.
‘너도 사랑한다고 했니?’
‘응, 그 빛 덩어리 아저씨가 나도 사랑한대. 그리고…….’
아이는 루나의 귀에 엄청난 사실을 속삭였다.
‘그 아저씨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도 말해 줬어.’
‘그게 뭔데?’
‘그 아저씨도 인간이었대. 그리고 음…… 책……? 책……? 책방. 도서관을 만들기 전에는, 그때는 우리 조상이었대. 그 아저씨는 아내와 평생 함께 살고 싶은데 아내는 인간이라 그렇게 못했다구. 그래서 아내를 버리고 떠나왔대. 하지만, 평생 아내만을 사랑했대.’
결국, 루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아내의 자손들을 지켜 주는 거랬어. 그러니까, 그 아저씨도 우리 친척이고 그 사람 아내도 우리 친척이지, 그치? 우리 다 가족이다.’
‘으응, 그래.’
‘엄마, 울어?’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저 어린 보레아스를 꼭 끌어안았다.
‘아스, 그 꿈 이야기 다시 해 줄래?’
‘웅? 무슨 꿈? 내가 거대해졌던 꿈?’
그리고 정말, 아이들은 신비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사실을 보레아스는 며칠 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는 아무리 물어도 모르겠다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키스와 루나는 그제야 마지막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신관의 꿈에 나타난 건 의외였어.’
그날, 신관은 공작가의 태평성대를 예언하는 드래곤의 꿈을 꾸었다 한다. 어찌나 기쁜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수도 한복판을 뛰어다녔다는 모양이다. 아키스는 신관이 공작가와 연관된 자라는 것을 애써 모른 척했다.
문제는 그 뒤, 아예 사람이 변했다. 삶의 보람을 찾은 듯, 요즘은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
요즘은 볼 때면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공작 부인! 오늘도 정말 좋은 하루랍니다!’라고 외친다. 아니면 볼 때마다 싹싹한 얼굴로 신전을 닦고 있거나, 앞마당의 잡초를 뽑고 있거나.
그건 그거대로 꿈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
“그 신관은 정말 드래곤이 좋았나 봐요. 꿈에서 봐도 상관없는 거였나 봐.”
“……그래, 사람의 기호라는 건 매우 복합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니 말입니다.”
루나는 아키스와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서로 말을 돌렸다.
“저녁에 휘멘을 초대했는데 괜찮지요?”
“언제 초대했어요?”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요.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같이 먹거든요.”
“……어디서 뭔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니, 자주 부르기라도 해야죠.”
요즘 아키스와 휘멘은 언성을 높이거나 싸우지도 않았는데, 둘 다 플로라와 보레아스 쌍둥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해 그런 것도 있었다.
거기다 일기장의 소상한 내용을 들은 후, 둘은 갑자기 사이가 좋아졌다. 요즘 들어서 휘멘은 젊은 삼촌처럼 집을 드나들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내가 그 녀석을 막 대하는 것 같아 보인다면 이유는 하나죠. 서로 마음껏 치고받아도 상처 받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은 서로밖에 없으니까. 그때는…… 우리가 소년기에는 그렇게 보내는 게 맞았던 겁니다. 이제는 다른 방식의 교류가 가능해진 거죠.’
아키스는 휘멘과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정리했다.
그들에게는 전생과 현생 모두 엄청난 일을 함께 겪었다는 동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라면 루나에게 접근만 해도 물어뜯을 듯 구는 아키스도, 휘멘만큼은 한수 접어주곤 했다.
* * *
그날 저녁.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부엌 하녀들을 확인한 후, 루나는 페니에게 답신을 썼다.
페니는 요즘 불꽃의 여가주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일들을 해치우고 새로운 계획들을 설립했다.
그녀의 아들은 루나의 쌍둥이들보다 한 살 어렸는데, 아이들과도 아주 사이가 좋았다.
최근에는 공국에서 안 풀리는 무역 일이 있다고 하여 직접 달려가 거래처를 굴복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 봐도 우아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언변을 뽐내고 있을 페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아, 페니가 보고 싶어.’
게다가 디온은 진심으로 페니를 보좌하며 훌륭한 부부 파트너십을 보여 주고 있었다.
페니를 사랑하는 디온의 마음은 아키스에 비견할 만했는데, 아키스와 디온을 일컬어 ‘수도의 두 애처가와 경처가’라고 하기까지 했다.
아키스가 아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처가인 건 유명했고, 디온은 그걸 넘어서서 아내를 상관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내는 여전히 수려했고, 멋진 사내였다. 그러기에 두 여인은 수도 귀부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부부 금실이 좋은 데다, 자신의 능력으로도 승승장구하는 루나와 페니는 수도 여인들이 동경하는 존재가 되었다.
루나와 페니의 우정은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굳게 이어져, 수도 여인들에게 자매결연을 유행시키고 있었다.
“엄마, 이고 봐.”
“휘멘 아저씨! 휘멘 아저씨!”
“응?”
여섯 살 난 쌍둥이들이 오도도 뛰어와 루나에게 낯선 잡지 한 권을 내밀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니?”
“……휘멘 아저씨 여기 나왔어! 사진 똑같아!”
“으응?”
혹시 휘멘이 또 이상한 논문이라도 발표해 신문에서 비난당하고 있나? 루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아이들이 내미는 잡지를 보았다.
곧, 그녀의 눈이 커지고 웃음이 생겨났다.
“세상에.”
루나는 잡지를 내려놓았다.
“이거, 어디서 났니?”
“제인이 보고 있었어.”
“……제인도 참.”
마침 아키스가 거실로 들어왔다. 루나는 담뿍 웃으며 잡지를 보여 주었다.
“이거 봐요, 당신. 휘멘이 잡지에서 대배우 테세스를 이겼어요.”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잡지인 ‘제국 여성’에서는 매년 그해의 가장 인기 있는 독신 남성을 선정했다.
결혼 전에는 늘 아키스가 독식하던 자리를 테세스가 독식하다가, 한때는 작가 레드가 쓴 소설의 남주인공 기사 우드가 장식하기도 한 자리였다.
[급부상 중인 젊은 마스터, 휘멘. 집중 취재!]
작년에 테세스가 파트너인 여배우와 결혼한 후의 빈자리를 휘멘이 채운 모양이었다.
“……그가?”
아키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수도에서는 휘멘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몇년 전, 마정석 광산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가 제법 부유하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국의 귀족 가문에서는 휘멘을 슬슬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키스 다음으로 최연소 마스터를 취득한 천재에, 꽤나 준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껏 인기가 없던 것이 이상했다.
가장 큰 변화는 휘멘이 가끔 사교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루나가 끌고 가는 행사에 강제로 끌려와 뚱하게 서 있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변했다.
이제는 공연히 화를 내지도 않았다.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토론할 땐 가끔 화를 내긴 하지만 이젠 여자들에겐 아주 공손하니, 인기를 끌 만도 하지.’
심지어 귀부인들이 말을 붙이면 겸손하게 대답하기까지 했다. 물론, 옆에서 루나가 눈치를 주고 있을 때 한정이지만.
그리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루나를 존중하고 언제나 흠모하는 태도를 보였으니, 이 또한 수도 귀부인들이 과연 공작 부인이라며 찬탄하는 점이었다.
‘그 무서운 흑마법사도 공작 부인 앞에선 꼼짝을 못한다면서요?’
‘자기가 존경하는 유일한 여인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대요.’
본디 그가 가진 거친 매력에 수려한 외모는 여전하니, 내로라하는 신랑감으로 급부상한 모양이었다.
“잘됐다. 오늘 저녁 식사 때 이걸로 휘멘을 놀려야지.”
루나는 손뼉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아가들은 뜻도 모르고 와아, 하면서 깔짝대며 박수를 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녁 식사 장소는 루나의 오두막이었다.
루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저녁을 위해 파이를 새로 구웠다. 따끈한 체리 파이를 바라보는 보레아스의 입이 벌어졌다.
“나, 요거. 요거.”
“조금만 기다려. 밥 먹어야 후식을 먹지.”
“우웅…….”
보레아스의 옆에서는 조그만 플로라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짭짤한 소금 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키스는 플로라를 안아 올려 볼에 키스했다. 플로라도 아키스에게 볼 키스를 하려는 순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휘멘인가 보다. 우리 아스가 문 좀 열어 줄래?”
“녜!”
보레아스는 도도도 뛰어가 작은 몸으로 오두막 문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플로라의 볼이 발그레해지고 보레아스의 눈이 빛났다. 휘멘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엄청나게 좋았다.
일종의, 인간 놀이 기구로 말이다.
“와아아!”
“아스! 카펫 위에서 뛰면 위험해!”
아스는 도도도 뛰어가 휘멘에게 몸으로 부딪혔다.
“이 녀석, 오늘 또 혼나 볼 테냐?”
“아저씨, 나 전쟁놀이해 줘. 전쟁놀이.”
“나, 나랑도 퍼즐…….”
플로라는 어느새 아키스를 잊고 휘멘에게 소심하게 손을 뻗었다.
아키스는 묘한 질투를 담아 그들을 돌아보았다.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순수한 사람은 동물과 아이에게 인기가 많다지.’
루나가 직접 접시를 날랐다. 휘멘과 아키스도 도왔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 * *
“울프, 웅, 울프!”
멍멍!
오두막의 열린 문 안에서는 울프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플로라는 바닥을 기며 울프의 흉내를 내었다. 울프는 아이들의 지킴이이자 좋은 친구였다. 너무 귀여워서 그 모습에 어른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곧 아키스와 루나, 휘멘은 샴페인을 한 잔씩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루나의 오두막 앞은 빛나는 조명과 새로 심은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두막 문에는 저번 주에 아이들이 만든 가렌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서부 여행을 가자니까요. 뭐하면 남장해도 좋아요. 서부에 가서 고대어 문화책을 더 찾아보고 싶어요. 내가 직접 찾는 게 가장 빠르니까.”
“……그러니까, 서부는 위험하잖아요.”
“휘멘과 아키스가 지켜 주면 되죠.”
“남장은 삼가 줘. 한 번만 더 루가 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올 테니까…….”
휘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는군요. 결국, 작년에 내가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걸 발표했는데, 처음엔 경악하더니…….”
아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이었다.
“이제는 아카데미에서 당신을 교수로 초빙하겠다며 문학부와 고대어 문화부에서 싸움이 났지요.”
루나는 고대어 법 개정 이후 바로 자신의 정체, 즉, 그녀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성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최대한 안전한 시점까지 기다리자며 그녀를 만류했다.
결국 작년에 대대적인 발표가 있었고,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외부의 공격도 엄청났다. 하지만 아키스는 루나가 그걸 모르도록 감추고 잘 숨겼다.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는 마녀다! 공작가는 각성하라!]
공작가의 앞에서 이렇게 난동을 부리며 페인트를 던지던 사내가 소리 소문 없이 수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아키스는 루나 호위 전용 기사단을 조직했고, 루나의 털끝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쫓아가서 박살을 냈다. 아키스의 유난한 공작 부인 사랑은 이미 수도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대어 법이 개정된 지 몇 년이 흘렀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오히려 몇몇 사내들은 루나를 더 신비로운 존재로 숭상했고, 루나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여인들이 늘고 있었다.
‘굳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활동하실 수도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대대적인 정체 발표를 하셨죠?’
‘간단해요. 내가 먼저 정체를 드러낸다면, 두 번 세 번째는 더 쉬워질 터이니. 세상은 변할 겁니다.’
루나는 제국 신문에 이렇게 우아하게 코멘트를 했다 알려져 있다.
그 뒤 일어난 일들이 참 많았다. 결론적으로는 이제 많은 상황이 정리되고 있었다. 거기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온갖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아카데미에 머물러 달라 난리였다.
“그래, 아카데미 교수로 가긴 할 거야?”
“작년까지 문학부와 고대 문화부에서 계속 연락이 오긴 했는데요. 으음, 역시 둘 다 마음에 안 든달까.”
루나는 싱긋 웃었다.
“문학도 좋고 고대 문화도 좋은데, 그걸 둘 다 할 수 있는 학부를 생각해 보려고요.”
루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생각했다.
고대 여성학, 만일 그런 학부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겠지. 그러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엄마아…….”
그때, 누군가 루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몸을 숙이니 보레아스가 졸린 눈으로 루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졸려?”
“우웅…….”
“오늘 아가들은 오두막에서 재워야겠어요. 너무 늦은 시간인가 봐. 이리와.”
“내가 가지.”
아키스가 샴페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 집안의 최고 권력자인 보레아스는 빵빵한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저었다.
“시져, 오늘은 엄마가 재워 죠.”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보레아스를 끌어안고 재우기 위해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이제 오두막에는 큰 부부용 침대를 비롯해 작은 아이들의 침대도 갖추어져 있었다. 아이들이 묵고 갈 경우를 대비해 여분 잠옷도 갖춰져 있었다.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눕히는데, 보레아스가 루나를 붙잡고 속삭였다.
“오늘 울프랑 자도 돼?”
“응, 오두막에선 괜찮아.”
“엄마. 있잖아아-.”
“응?”
그때, 보레아스가 루나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엄마가 물어본 거 생각났어.”
“엄마가 뭘 물어봤는데?”
“저번에 그 빛나는 아저씨. 엄마가 드래곤이라고 했던 아저씨 있잖아…….”
루나의 온몸이 꼿꼿하게 굳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
“응, 그 아저씨가 나한테 물어봤어. 나중에, 아주 나아중에 내가 두 번 크고 세 번 커서 다 큰 어른이 되고 집사처럼 나이가 많아지면.”
“……응.”
“나도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데, 그렇게 할 거냐고 했어. 내 재능이라면 가능하다고.”
“…….”
“그런데 걱정하지 마로. 나, 싫다고 했거든. 엄마랑 아부지랑 평생 같이 살아야 되거든. 둘 다 외로움 잘 타잖아. 플로라는 같이 데려갈 수 있다는데 그것도 싫다 했어. 잘했지?”
“…….”
루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응. 잘했어,라고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평생 그 맘 변하면 안 돼. 알겠지?”
“으응, 약속할게.”
루나는 미소 짓고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플로라가 루나의 옷깃을 당기며 저도 키스해 달라 졸랐다. 루나는 아이의 이마에 나란히 키스를 해 주고 나서야 일어났다.
* * *
그리고 아이의 말뜻을 알게 된 건 바로 이튿날이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아스! 불장난하면 안 돼!”
루나는 놀라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보레아스와 플로라가 까르르거리며 웃고 있었다.
“불장난 아냐!”
방금 내가 잘못본 건가? 아이들의 손은 성냥 없이 비어 있었다.
“그냥 환상이라고 했어. 플로라가 할 수 있다고 해서 시험 삼아 해 본 거야.”
“……응?”
“아이참, 몇 번을 말해. 요정이 창밖에 있다니까.”
“…….”
“요정이 플로라에게 주문을 가르쳐 줬대.”
“……플로라?”
플로라는 수줍은 듯, 칭찬 받기를 가득 기대하는 눈으로 루나의 목을 끌어안고 마법 주문을 속삭였다.
“엄마 이름이랑 비슷한 주문이다? 이 주문은 예쁜 거 만들 수 있는 주문이래. 요정이 글자 보여 줬어. 나 이제 엄마처럼 어려운 글자 쓸 줄 알아.”
루나의 입이 벌어졌다.
루나는 아이들에게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달래고 급히 서재로 달려갔다.
<둘 다 빨리 와요.>
루나는 자신 몫으로 가진 붉은 책에 글귀를 적어 넣었다.
에리스의 유산으로 작동했던 책이자, 꿈속 일기장에서 그녀의 일기 내용을 실어 보냈던 고대 마스터들의 붉은 책.
그 붉은 책 시리즈가 발견된 건 작년 한 아키스 소유의 던전에서였다.
그 뒤 아키스와 휘멘은 그 책을 나눠 가졌다. 루나는 본디 책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책은 아키스와 휘멘의 것, 세 번째 책은 루나의 것이다.
그리고 셋은 이 책 사용법을 개발해 서로 대화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었다.
<뭔데?>
<무슨 일이죠?>
곧이어 루나가 가진 붉은 책에 글자가 떠올랐다. 각각 휘멘과 아키스였다.
<아이들 일. 긴급.>
그리고 그날 루나는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30분 만에 마차로 주파한 공작의 기적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다른 종족을 보는 것 같아요.”
루나는 아키스와 휘멘에게 아이들이 보는 환상과, 그 환상의 종족 –플로라가 설명한 대로라면 요정이었다- 이 아이들에게 마법 주문을 가르쳐 준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키스와 휘멘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그러니까…….”
휘멘이 딱딱하게 손을 들어 둘을 가리켰다.
“……네 아이들이 일곱 종족과 접촉할 수 있다고?”
“보인다잖아요. 인간에게 마법 주문을 전해 준 일곱 종족, 요정족이랑…… 아아, 알잖아요. 마법사라면 달달 외우잖아요.”
“그들이 아직 인간계에 남아 있다고?”
“…….”
그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현대의 마법사는 고대 마법사와 달랐다. 고대의 마법사는 이종족에게 얻은 지식들로 진짜 주문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이를테면 진정한 마법사였다.
그러나 현대의 마법사들은 고대인들이 남긴 마법책의 주문을 빌려 사용할 뿐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종족과 교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태어난다면, 그 아이들이 마법 주문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이 진짜 마법사가 된다면―
거기다 그들의 곁에는 희대의 천재가 둘이나 있었다. 아이들을 지식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마법사들.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일단 감당 못할 주문은 배우지 말라 해야겠군요.”
“아이들은 어쩌죠? 환각 보여서 피곤하게 사는 거 아니야?”
루나는 걱정스레 말했다.
그런 그녀를 아키스가 부드럽게 달랬다.
“고대 종족은 귀신이 아닙니다. 다만 그 아이들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는 거죠. 아이들의 인생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인류 문명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일은 너무 큰일이라…….”
아키스와 휘멘 루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들은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알았다.
“어찌할까?”
“어찌하자면?”
아키스가 휘멘의 말에 나직이 물었다.
“하나, 호들갑을 떨면서 이 사실을 아카데미에 알리고 아이들을 특별하게 관리하며 교육한다.”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재로 자라서 피곤했던 사람?”
휘멘이 손을 들었다. 아키스는 그냥 서 있다 휘멘과 루나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인류에 충분히 기여했다 생각하는 사람?”
그대로 둘은 눈으로 긍정했다.
“그럼 두 번째는?”
“그냥 모른 척하고 아이들을 평범한 애들처럼 대한다.”
휘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거 좋네요.”
모른 척하자. 그들은 뜻을 공유했다. 어차피 저 정도 천재라면 두 손발을 묶어 놔도 뭐든지 시작할 것이다.
그전에 저 천진한 모습 그대로 어린 시절을 보내도록, 할 수 있는 한 행복하고 태평한 성장기를 보내도록 해 주고 싶었다.
셋은 재빠르게 합의를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소풍 이야기나 하죠.”
휘멘과 아키스는 동시에 끄덕였다. 아키스는 묘한 표정으로 휘멘을 보았다.
“그보다 넌 소풍도 따라오는 거냐?”
“안 될 게 뭐 있어?”
“……뭐, 그렇다 치지.”
루나는 아키스와 휘멘의 대화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그들 일가는 세계의 운명에 어느 정도 기여할 듯싶었다.
* * *
그리하여 평화로운 하루는 흐르고 흘렀다. 아키스와 루나는 아이들에게 밤마다 책을 읽어 주고 두 손을 잡고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면 되었다고, 아키스는 생각하며 오늘도 아이들과 루나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그것만이 그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그의 가장 최근 고민은 ‘벌써부터 이렇게 예쁜 데다 사랑스러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내 딸을 나중에 어떻게 시집보내지’ 정도였다.
그는 디온과 페니 부부를 주의 깊게 지켜보다, 아이가 혼기가 꽉 차면 데릴사위 선발 대회를 선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데릴사위 선발 시험을 23단계까지 설정하다가 들켜, 루나의 손에 저지당했다.
‘적어도 당신 같은 천재 말고 인간이 볼 수 있는 시험으로 하라니까요! 아니, 환각 미로를 일반인이 어떻게 빠져나와요? 거기다 이 구조라면 사람이 다칠 수도 있잖아요! 이게 뭐야? 천장에서 떨어지는 톱날 함정?’
결국, 아키스가 공들여 만든 미로 설계도는 루나의 손에 압수당했다. 실제로 미로로 개조해 사용할 용도의 던전도 구입했다는 건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 * *
아키스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의 방을 가득 채운 글자를 읽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아마도 그 글자들은 모두 루나와, 루나와 연관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중 단연 많은 것은 쌍둥이들일 것이다. 그의 세상은, 이제 별처럼 무수하고 다채롭게 빛났기에.
* * *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늘 사이로 스며든 햇볕이 따스하게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바람은 기분 좋았다.
‘아아, 잠깐 잠들었구나.’
오늘은 벼르던 소풍날이었다.
나무 그늘에 깐 자리에 누워 잠시 쉬다 잠든 모양이었다. 멀리서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때 아키스의 큰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아키스.”
루나가 속삭였다.
“애들은요?”
“휘멘이 물가로 데려가서 놀아 주고 있어요.”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루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를 다시 만난 기적까지도. 인연을 이어 준 세상에까지도.
어쩌면 만날 운명이었을까? 그러니 가문의 은원 같은 약속이 있었던 거겠지.
다시 한번 그가 자신을 선택해 주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게 된 현재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곤 했다.
너무, 기쁘고 벅차서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그냥요. 당신 다시 만나 좋다는 생각.”
아키스는 루나의 입술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다음 세상에도 나 만나 사랑해 줄 거죠?”
“물론.”
아키스의 손이 야하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만지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루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혀를 간질이고 애무하는 그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루나는 아키스의 팔 안에 있었다.
“당신. 아이들은…….”
“괜찮아. 저맘땐 물에 들어가면 두 시간은 안 나오거든. 한창 놀고 있잖아.”
아키스가 루나의 입술에 키스했다. 몇 번을 겹친 입술인데도 그 입술에 입술이 닿는 순간은 머릿속에서 별이 튀는 것 같았다.
“으음…….”
루나는 저도 모르게 딴생각을 했다. 가끔 이렇게 행복한 날이면, 오늘 이런 하루가 꿈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는 날이면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당신이 내게 오기 위해 생각보다 더 고생하진 않았나, 그녀가 아는 기적이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저 예감과 같은 생각이었다.
“약속 지킬게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
그의 말에, 루나는 기쁘게 미소 지었다. 루나가 아키스의 단단한 어깨를 손으로 쥐었다. 한들대는 바람이 사랑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달빛 도서관’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