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 - 13화 (14/15)

13

3일 후.

아키스는 최근 아카데미에 복직한 상태였는데, 그는 요 며칠간 유난히 빨리 퇴근했다.

파티에서 쓰러진 루나의 건강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저택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어수선한가 하면 다들 묘하게 들뜬 얼굴로 그를 보고 미소 짓는 것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알렉이 아키스의 코트를 받았다. 알렉 또한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요즘 정원 뒤쪽에 가 보신 적 없으시지요?”

“아, 아내의 약초밭이 있는 곳? 그곳에 접근하지 말라기에 가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십니까?”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건지 몰라,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내는?”

“안 그래도 지금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정원 뒤쪽에서 공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이 터질 것 같은 광대를 꽉 누르고 큼큼, 기침을 했다.

아키스는 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 *

그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덧 계절은 가을에 성큼 가까웠다. 하늘은 맑고 파랬고, 정원의 풀들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번도 와 본 적 없군.’

거대한 저택 뒤쪽으로 향하자, 벌써부터 약초 내음이 진동하며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저택 정원 뒤쪽의 정경이 참 많이도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새로 심은 약초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을 뽐내며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자, 그는 묘한 정경을 보았다.

은빛 꽃의 밭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입을 오므린 꽃은 오묘한 은빛으로 온 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키스는 그곳에서 팻말을 발견했다.

[꽃을 세게 흔들지 말 것. / 흑마법사의 지혜.]

아키스는 찌푸리며 꽃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새하얀 것이 흩날리며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씨앗이 흩날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꼭 환상 속에 빠진 것 같군.”

그는 천천히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길을 다시 지나자 이번에는 무성한 수국 밭이 있었다.

[공작 부인의 수국, 밟지 말 것!]

이번에도 팻말이 있었다.

‘……아내가 이런 걸 키우고 있었나?’

연보라, 흰색, 핑크. 수많은 수국들은 몹시 아름다웠다. 아키스는 또다시 그곳을 지나갔다.

‘……아내가 수국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언제 한번 꽃다발을 선물해야겠군.’

이윽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나오던 비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얼른 물러났다. 아키스는 비아에게 이게 무슨 영문이냐 물을 기회를 놓쳤다.

‘저 안에 아내가 있다고?’

아키스는 그 작은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안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났다.

루나의 목소리였다. 아키스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따뜻한 음식 냄새가 그의 코를 확 자극했다.

루나는 은은한 분홍색 드레스에 하얀 앞치마를 매고, 금발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커튼 너머로 금빛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뒤로 햇빛이 쏟아지는 광경은 이곳에 갇히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아키스의 심장이 잔잔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뭡니까?”

아키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두막은 몹시도 가정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장식장, 소박한 체크무늬 커튼, 따뜻해 보이는 카펫,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큰 4인용 식탁.

그리고 그 위에는 정성껏 만든 요리들이 김을 내며 올라와 있었다.

꿀을 발라 구운 닭 요리, 로스트 비프, 야채수프, 갓 구운 빵들, 체리 파이, 우유, 돼지고기 구이, 모두 평범한, 조금 부유한 가정에서 호사스러운 날에나 먹을 것 같은 음식이었다.

“오늘은 내가 당신을 대접하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루나는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 * *

공작가 뒤쪽에는 예전에는 고용인들이 살던 작은 오두막들이 있었다.

루나가 꿈 마법을 통해 꿈을 꾼 그날 이후, 그녀는 오두막 중 하나를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꾸몄다. 아키스가 보여준 꿈속의 오두막과 같은 곳을 만들고 싶었다.

루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오늘의 만찬을 준비했다.

‘요리를 직접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아직 손이 녹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하나도 지겹지 않네.’

이전에는 요리며 빨래라면 정말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그 모든 것은 숙부 가족의 노예처럼 부려지던 시절에 배운 것이었으니.

그런데 이상하게 양파를 까고 고기를 썰고, 간을 맞추고, 소스를 만드는 그 과정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하면서 콧노래가 났다.

‘이제는 달라. 그를 위해 만드는 요리니까.’

이제 루나에게 요리는 원할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서 앉아요, 아키스.”

루나가 마지막 접시를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꿈꾸는 기분이군. 너무 환상적이라 말입니다.”

아키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루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의자에 앉았다.

“한번 식사를 차려 주고 싶었어요. 내 요리는 처음 먹죠?”

여행 중에는 내내 아키스와 휘멘이 루나에게 요리에 손도 못 대게 했으니 지금이 처음인 셈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저어, 당신 생일이잖아요.”

루나는 망설이다 수줍게 말했다.

“…….”

그랬던가. 오늘이 생일이었나?

아키스는 생일을 챙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예전부터 집사를 통해 매년 아무것도 하지 말고 티도 내지 말라 단단히 말해 둔 터였다. 어차피 정확한 생일도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에 부모가 내버린 호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를 다시 공작가로 데려온 아비는 아키스가 태어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얼추 기억하는 날짜를 멋대로 정해 호적에 올렸다. 그러니 그가 제 생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당신이 생일 챙기는 걸 번거로워 한다는 건 집사에게 들었어요. 혹시 정 싫다면 다시는 하지 않을게요. 이번 한 번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루나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 기뻐요, 고마워요. 루나.”

아키스는 점잖게 말했다.

“뜻밖에 깜짝 선물을 받아 어안이 벙벙하군요.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냥요.”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껏 우리는 따로 떨어져 살았죠. 각기 다른 환경에서 말예요. 지금껏 당신이 자라 온 어린 시절의 모든 생일상을 한 번에 차려 주고 싶었어요. 원래는 작년에 하려 했어요. 하지만 급히 여행을 가느라―”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저에게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닐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까. 그녀는 저와 너무 달랐다.

저가 타고나지 못한 상냥함과 달콤함, 아름다움을 신이 대신 각인자인 그녀에게 나눠준 것이 아닐까.

그녀는 미소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평범한 사가의 부부처럼 말이에요.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가 화덕에서 빵을 굽는 그런 가정. 작지만 따뜻하고, 때로 화를 내도 아이들을 자주 안아 주는 집. 그런 골목 사이사이, 수도의 작은 집들에선 어떤 일상을 보낼까 궁금했어요.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밝지 않았거든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키스도 이런 집을 바라 왔음을 안다. 아키스가 한번 꾸게 해 준 환상의 꿈에서 마주친 그가 말해 줬으니까.

평범한 가정에 대한 동경.

오두막 안의 구석구석 눈에 들어오는 광경하나 사랑스럽고 따뜻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보상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따끔하고 알싸했다.

‘심장이 아파. 이런 감정도 있군.’

너무 달콤하고 애틋해서 아프기까지 했다. 그가 이런 걸 가져도 되나, 이런 행복을 손에 넣어도 되나 싶기까지 했다.

평생을 메마르게, 남을 불신하며 살아가리라 믿던 인생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아키스? 식사해요.”

루나가 말했다.

아키스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조용히 식사했다. 너무 행복하면 마음속이 고요해진다는 걸 그는 처음 깨달았다.

식사는 달았고 행복했다.

“이게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들이에요.”

루나는 눈으로 웃었다. 아키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로서의 그녀의 매력은 출구가 없었다. 소년 루부터, 앞치마를 두른 아름다운 아내 루나.

둘 중 하나만 그의 아내인 것이 아니라, 양성적인 매력을 가진 그녀였다. 가끔은 그녀의 인생을 가지는 것조차 황송했다.

그냥 대가 없이 제 모든 인생을 바치고 평생을 봉사해야 할 것 같은 여인이 그녀였다.

그는 천천히 모든 음식을 충분히 맛보았다.

“잘 먹어 줘서 너무 좋았어요. 가끔 이렇게 할까 봐.”

그들은 오두막의 천장을 보며 푹신한 카펫 위에 신발을 벗은 채 나란히 누웠다.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았다.

“한 번이면 돼요.”

“음식, 맛없었어요?”

“아뇨, 너무 좋았습니다. 정말로, 믿겨지지 않을 만큼. 하지만 당신이 힘들까 봐 그렇습니다. 일을 해 줄 사람들은 있으니 손에 물 묻히지 마요. 한 번으로 이미 충분히 날 행복하게 만들었으니까.”

아키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도 평범한 가정에 대한 동경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이 내게 가정을 줄 수 있겠죠. 그래서- 좋았습니다. 역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정말 많이.”

“……아키스.”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아, 그건 아닐걸요.”

루나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고 속삭였다.

이 남자가 최고라는 말을 함부로 쓴다. 더 좋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아, 더는 못 참겠어.’

루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키스의 귀에 흘려 넣었다.

“이 오두막에 내년에는 세 명이서 와요. 가족끼리 말예요.”

아키스는 처음엔 바로 이해를 못했다.

“휘멘을 초대해도 되지만, 가족은 좀 심한 표현 아닙니까. 내 가족은 당신뿐입니다.”

“……아, 휘멘도 한번 초대하고 싶지만 그걸 그렇게 알아듣는 건 좀…….”

루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과신하지 말라니까요. 당신 가족이 나뿐이 아닐지 어떻게 알아요?”

“…….”

“이미, 말예요.”

이쯤되자 아키스 또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쐐기를 박듯 그의 큰 손을 끌어 배 위에 올려 놓았다.

“조금은, 기뻐해 주실 거죠? 난 정말 기쁘거든요.”

아키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녀의 아랫배는 아직 판판했다.

“언제…….”

“두 달 되었대요. 그게, 페니의 가든파티에서 현기증을 일으킨 게 임신 초기 증상이었다지 뭐예요.”

“하.”

아키스는 제 턱을 쓰다듬었다, 루나의 어깨를 잡았다 놓았다 안절부절못했다. 루나로서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많은 상을 차렸다고요? 임신한 몸으로?”

“……그것부터 지적하는 거예요?”

이건 예상외였다. 루나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지적이라뇨, 당신 몸이 중요한데. 거기다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라면…….”

“아키스.”

루나는 따라 일어나 아키스의 무릎을 손으로 꾹 누르고 그의 눈을 보았다.

“건강하대요, 나랑, 우리 아기. 둘 다.”

‘우리 아기’라는 말은 강력하게 꽂혔다.

아키스 또한 막연하게 후계자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지금껏 생기지 않은 게 이상하니까.

그러나 현실로 닥치니 막연함은 부서지고 그의 삶은 요동쳤다.

“그리고, 당신도 내게 보석을 사 주거나 산책할 때 손을 잡아 주거나 심부름을 해 주면서 좋아하잖아요. 나도 당신에게 뭘 해 주고 싶었다고요. 어차피 배가 부풀면 일하기도 힘들어요.”

루나는 아키스의 보랏빛 눈을 보았다. 그의 눈과 똑같은 보랏빛 눈의 아이가 태어날까?

“빨리 말해 줘요. 기쁘다고.”

“기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늦게 아키스가 루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말투는 오히려 고저가 없었지만, 루나의 심장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찰랑이는 그의 감정이 닿았다.

환희, 그런 감정이었다.

가끔은 말이나 태도보다 각인의 감정 전이가 더 빨랐다.

아아, 다행이다. 그가 우리 아이를 순수하게 기뻐해 줘서. 루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 * *

“당신이 외출한 사이 산부인과 의사가 들렀거든요. 그때 고용인들이 알게 되었죠. 아, 내가 먹은 미용 약들은 임신에 아무런 나쁜 영향을 주지 못한대요.”

모두가 저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루나의 임신 소식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아키스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새로운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 좋고 당황하면 오히려 말이 없어지는 면이었다. 잠시 과묵해진 것도 무색하게 이튿날부터 아키스는 끔찍하게 루나를 챙기기 시작했다.

“루나,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아아, 정말. 이제 괜찮다니까요. 간식도 충분히 먹었고, 아까 발도 주물러 줬잖아요. 그보다 배도 아직 안 나왔는데 발 마사지는 왜 벌써부터…….”

해 주니 시원하고 좋아서 받았지만, 이건 뭐 거의 폭주 수준이었다.

“알렉과 디온이 해 주면 좋다고 조언하길래…….”

“둘 다 미혼이잖아요!”

루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왜 거기서 충고를 듣는단 말인가. 집사 알렉은 혼기를 놓친 우아한 외모의 중년이었고, 디온은 이제 새신랑이 될 몸이었다. 그 둘에게 조언 받아 봐야 뭐 대단한 의견이 나온다고.

그뿐이 아니었다.

“모두 안으로 옮겨라.”

아키스는 수많은 아기 물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옥이 달린 요람, 벌써 아기 옷 재단사에다가 소아과 주치의까지 수배했다. 심지어 아기의 첫 초상화를 그릴 화가까지 섭외해 놓았다.

“잠깐잠깐, 이런 건 성별을 알게 된 후 해도 늦지 않다고요. 정말, 당신 다 물러요!”

결국 루나는 아키스를 혼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초상화 전속 화가는 왜 필요한 건데요?”

“요즘 아기의 초상화를 연도별로 그리는 게 유행이라길래…….”

아키스는 군색한 핑계를 댔다.

“……다 걸어 둘 데도 없더라구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당신은 좋은 아빠가 될 테니까. 응? 우리들의 아이잖아요. 천천히 기다려 줘요. 아이가 좀 커야, 아빠 내리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요.”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알렉을 불러 말했다.

“다 물러라.”

“……정말로요?”

“……옥 요람만 빼고.”

“네. 알겠습니다. 이 요람이 참 좋긴 하죠. 탁월한 결정이십니다.”

알렉은 웃음을 꾹 참고 하인들을 시켜 물건들을 날랐다.

* * *

페니와 루나가 준비한 이벤트 날이 다가왔다.

페니의 가든파티에서 약과 편지 꾸러미를 받은 영애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집안의 부유한 아가씨, 부인네들이었다.

그녀들은 편지를 들고 소곤대며 서 있었다.

그녀들이 받은 편지.

그곳에는 약의 이름과 자세한 설명과 함께 효능이 적혀 있었다.

“그 연고는 정말 잘 듣더라고.”

“아주 오래된 흉터까지 없어졌다니까.”

“엄청나게 비싸겠지? 아아, 궁금해 미치겠네.”

다들 집으로 돌아가 약을 시험 삼아 먹고 발라 보았다. 붉은 키스라는 약은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정말 입술이 발그레 붉어졌다.

백옥환은 피부가 순간 조금 밝아지며 약간 뽀얗게 변했다. 피부 화장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약의 판매를 시작하는 날짜와 함께 적힌 장소.

그곳은 예전 버몬드가였던 장소였다.

약의 효능을 한 번 본 여인들이 넋을 놓고 약 구매를 위해 달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이런 건물이 있었나?”

허름한 버몬드가는 완벽하게 개조되어, 아름답고 고풍스런 갈색 저택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고 가게로 들어가는 입구가 독특하게도 두 개였다.

저택에는 큰 간판이 달려 있었다.

[공작 부인의 고대 약학 연구소]

그녀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고급스럽고 깔끔한 안은 가게처럼 꾸며져 있었다. 신기한 건 카운터가 두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기선도 두 줄, 판매 선도 두 줄이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약 구매를 원하시는 분은 번호표를 뽑아 주세요.”

새로 뽑은 직원들은 그들에게 번호표를 배분해 주었다.

“약 판매는 언제 시작하나요?”

“공작 부인이 드시면 시작할 겁니다.”

하녀들은 잘 교육 받은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곧, 페니와 루나가 들어왔다.

“네 아이디어 훌륭했어. 가든파티에서 편지를 배포해 구매자들을 모이게 하다니 말이야.”

루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 앞서 페니에게 소곤댔다. 이 비밀스런 행사는 페니의 의견이었다.

“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이 왔네? 이렇게 많이 불렀어?”

“귀족가문의 소문은 몹시 빠르지. 기자들이 그 냄새를 안 맡겠니? 그리고 제국 신문과 몇몇 잡지사에는 내가 연락했고, 나머지는 안 불러도 온 거야.”

페니가 당당하게 말했다.

“곧 네 약은 완전히 유명해질 거야. 손님도 구름떼처럼 몰려들 거고.”

루나와 페니가 사람들의 앞에 나섰다. 기자들과 구경꾼들, 돈을 싸들고 온 예비 고객들…… 모두가 난간 위에 나타난 루나와 페니를 보고 있었다.

홍보 담당자로써 페니가 기조 연설자로 나섰다.

“오늘 이곳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공작 부인의 새 가게를 소개하는 자리. 이런 귀빈들을 모시게 되어 반갑습니다.”

루나의 홍보 담당자인 페니가 먼저 사회자 노릇을 자처하며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공작 부인께선 약학에 항상 관심이 많으셨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고대 약학을 오래 공부하셨습니다. 이제 여인들을 억압하는 고대어법이 사라지자 공작 부인께서는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용단으로 약을 판매하는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전매특허를 내신 이 약들은 금일부터 이 장소에서만 판매될 예정입니다. 그럼, 나머지 소개는 공작 부인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페니는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공작 부인이 약학의 대가라고?’

‘잠시만, 저 말이 사실이면 고대어 법이 개정되기 전부터 고대어 책들을 접하며 공부했다는 거 아냐?’

‘무슨 재주로?’

‘남편이 마법사인데, 번역가들 시켜 몰래 번역하고 공부한 거 아냐?’

좌중에 소곤거림이 번졌다.

사람들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 연한 푸른빛의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루나가 등장했다.

고귀한 공작 부인의 등장에 모두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의문 가득한 눈으로 루나를 보았다.

“오늘 제가 소개한 미용 약을 사기 위해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루나가 미소 짓고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저는, 이전부터 여인들을 위한 고대 지식들이 많이 사멸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여자 마법사에 대한 기록도 모두 사라졌지요. 그리하여 세상이 변한 지금 고대의 여인들을 위한 소중한 지식들을 이렇게 소개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럼 공작 부인께서 이전부터 고대어 책을 몰래 읽으셨다고요?”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루나는 눈을 휘며 웃었다.

“그건 비밀로 할게요.”

전면 부정하진 않는 말이었다. 홀 안에 잔잔한 충격이 번졌다.

“세상에…….”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법이 불법이 아니니, 사람들은 놀랄 뿐 시비를 걸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가 한 거짓말에 대해 자세히 말해 드리려 해요. 사실 오늘은 미용 약만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여인들을 위한 필수적인 약을 소개하려 해요.”

그녀는 미리 준비된 쟁반 위의 아름다운 달 모양과 꽃모양이 새겨진 병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통안에 든 약은 로웨나의 눈물이라는 얼마 전 복원이 가능해진 식물을 사용한 약입니다. 제가 특허권을 가진 약이며 흑마법사도 제작에 협조한 약입니다. 이 약은 여인들을 위한 특별한 진통제예요. 한 달에 한 번, 몸이 아플 때 먹는…….”

“어머나, 세상에.”

“이 약의 이름은, 달의 선물이라 합니다.”

제국 여인들에게 달거리는 몹시 남우세스러운 단어였다.

피를 흘리는 달거리 기간엔 아무리 아프고 불편해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심술부리지 않는 여인이 훌륭한 품성의 여인이었다.

아프다고 티내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달거리 통증을 호소해 봐야 방정맞다는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달거리 통증은 여자의 잘못이다. 지독히 보수적인 제국민들의 편견이었다.

“현재 많이 쓰이는 트리베 나무 열매를 사용한 약은 여인의 몸에 때로 좋지 않은 효과를 일으켜요. 달거리가 일찍 끝나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다음 달거리를 하지 않기도 하지요. 이 약은 여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고대 여자 마법사들의 비밀 약입니다.”

루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이어 말했다.

“오시는 길에 카운터가 두 개인 걸 보셨지요? 한 카운터에서는 귀족에게 판매하고, 한 카운터에서는 평민에게 판매할 겁니다. 카운터를 나눈 이유는 가격 차등 때문입니다. 미용 약의 수익의 일부는 약 제작에 계속 쓰일 것이며, 그 수익을 이용하여 평민 계층에게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약을 판매할 겁니다. 달거리를 부끄럽게 여기고 아픔을 참는 여인이 없게요.”

루나도 성인 이전에는 달거리 통증에 시달리는 편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숙부의 음흉한 시선과 음탕한 여자니 달거리 통증을 겪는 거란 숙모의 정신 나간 소리에 스스로 약초를 찾아 씹으며 참았다.

루나가 편집한 책인 <보석 영애 이야기>의 원본 소설. 붉은 책이 보여 준 소설 원본에서는 여주인공인 젬 영애가 이 달거리 통증 약을 개발하여 대성공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뒤, 루나는 반드시 이 약을 복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리고 휘멘이 찾아다 준 로웨나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식물을 복원하고 드디어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이 약이 제국 문화를 바꾸길 바라요. 가치 없는 부끄러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루나는 그 약에 달의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주 아름답고 그럴싸한 용기까지 만들었다.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귀부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약을 보았다.

‘……역시 반응이 안 좋군.’

루나는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루나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깟 달거리 통증이 뭐가 부끄럽다고.’

제국이 앞으로 찬찬히 변할 것이지만, 어떤 부분은 아직 미개할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숨겨야 할 달거리 통증을 언급하는 공작 부인, 그 약을 대놓고 파는 공작 부인. 그들에게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루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페니만이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럼, 10분 후 약 판매를 시작합니다. 두 카운터 모두 오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나는 아무도 약을 사지 않으면 어쩌나 했다. 지금은 그들이 미용 약만 구입하더라도 언젠가 세상이 변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

10분 후, 오른쪽과 왼쪽을 가득 메운 열을 보며 루나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던 여인들이 결국엔 눈치를 보다 왼쪽에도 넉넉히 줄을 섰다.

“우리 어머니도 아직…… 출산 후에도 달거리 열이 있으셔서.”

“사실 난 심한 편이야, 다섯 개 줘요.”

그날, 준비된 모든 약이 소진되었다.

물론 달의 선물도 매진된 약에 포함되었다.

향후, 100년간 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릴 약으로 꼽힐, 약이 세상에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 * *

일제히 기사가 실렸다. 공작 부인의 약국에 대한 소문이 수도에 번지기 시작했다.

“약을 주세요!”

“약 공급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질의하면 되나요?”

“우리 상점에도 꼭…….”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약국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카운터에는 돈을 둘 곳이 없이 은행 직원이 대기하고 있다 금화 자루들을 받아서 바로 예치하기 위해 은행으로 향했다.

매일매일, 약을 구매하기 위한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루나의 약 가게는 수도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루나의 입가에 번진 기쁨의 미소는 지워질 줄 몰랐다.

* * *

루나가 자란 버몬드가에는 연일 사람들이 몰려들어 약을 사려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특히 미용 약은 생산량이 달려서 못 팔 정도였다.

“어휴, 종일 줄을 섰네. 이 약을 먹으면 입술이 자연스럽게 장밋빛이 되고, 이 약은 피부를 하얗고 뽀얗게 만든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 약은 뭐예요?”

“이 약은 피부를 거무스름하게 바꿔 주는 대신, 야외 활동을 할 때 피부가 거칠어지는 걸 막아 줘요. 대신, 피부는 탄 사람처럼 까맣게 변한답니다.”

“이거 다 주세요.”

그리고 그 부인은 소곤대며 말했다.

“그리고 그…… 달의…… 뭐라고 하는 약도…….”

종업원은 미소 짓고 약을 케이스에 잘 싸서 주었다.

“어머, 예쁘다. 난 이 케이스 꼭 간직해야지.”

몇몇 여인들은 부끄러움 없이 그 약을 대놓고 손에 들고 나갔다.

반면, 경제적으로 만든 작은 종이봉투에 담겨 달 모양이 찍힌 보급형 ‘달의 선물’ 약이 바로 옆 카운터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최소한의 마진만 남긴 판매였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고객들을 위한 배려였다.

“나 참, 세상이 아주 망하려고.”

달거리 약 판매 포스터와 그 모습을 보고 대놓고 혀를 차거나 욕을 하고 다니는 사내들도 있었으나, 약 판매 장소를 지키는 호위병들이 째려보자 바닥을 보는 척하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 * *

루나의 약 가게는 수도의 유행이 되었다. 매일 약이 연일 매진되어 약 가게에 약을 사러 왔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카운터에는 돈을 둘 곳이 없이 은행 직원이 대기하고 있다 금화 자루들을 받아서 바로 은행으로 예치해 주었다.

“우리 상회에도 꼭 좀 약을……!”

약국과 잡화점에서는 제발 좀 약을 대어 달라고 조르고 졸랐다.

그런 소란 가운데, 루나는 페니와 함께 약초밭을 보러 나왔다.

“이걸 다 언제 준비했어?”

“공작가의 남는 수도 근교 땅을 개간했지. 아, 일단은 남편에게 땅 대여료도 내기로 했어. 다행히 내가 기르는 약초들은 모두 쑥쑥 잘 자라거든. 다들 한두 달이면 수확할 수 있게 자라. 대단하지?”

페니는 끝도 없이 펼쳐진 땅들을 보았다.

다행히 아키스가 근처에 큰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공작가에서는 그 옆의 빈 땅들을 모두 매입했다.

허허벌판이었던 땅은, 끝없이 펼쳐진 오색의 약초밭이 되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새로 고용된 일꾼들이 일하다가 루나를 보고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약초밭을 둘러보러 오는 김에 페니를 데리고 시찰 온 참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 큰 건물이 약을 만드는 사무실이야. 엄청 크지?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폐가 저택을 개조했어.”

훌륭한 약 제작 절차가 갖춰져 있어 페니는 감탄을 연발했다.

“……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는 중에 이런 걸 했구나.”

“충분히 시간이 있었으니까.”

과연 공작가에선 시류를 읽는다고 할까. 법 개정이 될 것을 알았으니 고대 약을 루나의 이름으로 발표해도 된다 생각하고 이렇게 준비해 둔 것이리라.

“몸은 어때?”

“응, 아주 좋아. 의사도 오늘 길게 외출해도 된다 했어.”

루나는 조금씩 테가 나기 시작한 배를 어루만졌다. 아직 세간에는 그녀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 * *

리튼 게이트에서 약초밭은 멀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를 타는 구간도 길지 않았다.

요즘 아키스는 임신 중인 루나를 더욱 과보호했다. 오늘 약초밭 시찰을 가는 것도 그가 반대하는 통에 출산 전 마지막 현장 점검이라는 말로 그의 입을 막은 터였다.

“루나.”

아키스는 루나가 귀가하자마자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루나는 단단한 그의 품에 안겨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루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랜만의 긴 외출인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네. 당신 일찍 들어왔네요.”

“당신이 멀리 나간다니 아카데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내보내 놓고 불안해 살 수가 없어서.”

“열심히 안 하면 학생들에게 내가 원망 받을지도 모른다고요. 자꾸만 교수님을 학교로부터 빼앗는 존재니까.”

“누가 감히 당신에게 뭐라 한다고.”

아키스는 설핏 웃었다.

그는 루나가 깨질세라 조심조심 부축해 계단을 올라가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

* * *

달이 차고, 루나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루나는 외출을 삼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부인. 언제 와 주시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문의 공작 부인.

제국 은행에 계좌를 튼 후 한 번도 들른 적 없는 그녀가 제국 은행에 등장하자, 모든 직원이 나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렇게 화려한 응대는 필요 없는데. 아무튼, 나와 주어 고마워요.”

루나가 오늘 제국 은행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휘멘 때문이었다. 루나의 약국에서 파는 약 중, 가장 마지막에 개발된 두 약.

<붉은 키스>와 <달의 선물>을 만드는 데는 휘멘이 찾아낸 <로웨나의 눈물>이라는 재료가 핵심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여행 도중에 이런저런 충고로 약을 만드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 루나는 휘멘에게 약 저작권의 일부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변호사의 자문을 구해 고급형 약의 수익의 일부를 휘멘에게 증여하기로 했다.

그녀는 새 계좌를 만들어 휘멘에게 줄 돈을 이체해 두기로 했다. 그 김에 직접 계좌에 있는 금액을 확인차 은행에 방문했다. 한번 직접 은행에 가 금고를 보라는 건 아키스의 충고였다.

‘돈이 꽤 쌓여 있었지?’

매달 책 정산금이 쌓여서 이제는 확인하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약이 막대하게 팔린 데다, 아키스도 매달 루나가 쓰고 남은 품위 유지비를 차곡차곡 계좌로 넣어 주고 있었다 했다.

“직접 금고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러죠.”

루나는 은행 직원을 대동한 채 긴 복도를 걸어 귀빈들의 전용 금고 가장 끝으로 향했다.

은행 직원은 <루나 드 로텐베른>이라 적힌 방문을 열었다.

‘어?’

고대 전설에 드래곤들의 둥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 드래곤들이 이 세계에 살 당시, 그들은 지상의 금붙이를 몹시 좋아했다 한다. 그래서 드래곤의 둥지에는 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드…… 드래곤?”

“네?”

루나의 금고에는 수없는 금화와 은화가 쌓여 있었다. 루나의 눈이 흔들렸다.

“혹시 여기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예상보다 너무 많은 금액이라 한 말인데, 도리어 은행 직원들의 눈이 흔들렸다.

“예, 공작 부인. 계좌를 만들 때도 들으셨겠지만 은행에서는 계좌당 각각 자산의 40퍼센트만 현물 금화로 마련해 놓습니다. 하지만 바로 인출을 하실 경우를 대비해 공동 금고에는 충분한 돈을 마련해 놓습니다. 만일 부인께서 전재산을 인출하신다면 나머지 금액을 공동 금고에서 꺼내와 충당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나머지…… 요?”

“실제 공작 부인의 재산은 이 금액의 두 배 이상이십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우리 은행의 0.5퍼센트 고객으로 원하신다면 준비금 비율 조절을…….”

“그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루나는 잠시 현실감을 잃을 정도였다.

“그간의 예금 내역을 보고 싶어요.”

은행 직원들은 그녀를 데려가 찬찬히 그간의 거래 내역을 보여 주었다.

“아키스 미쳤나 봐.”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가 주는 매달 품위 유지비는 엄청났고, 책 인세며 약 판매금도 상상을 못할 정도였다.

“이 돈이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작 부인께서는 수도의 전체…… 정도는 아니지만 3분의 1정도는 구입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근 10년 안에 이렇게 사업으로 성공하신 분은 공작 부인께서 처음이시지요. 우리 제국 은행도 귀빈으로 모시며 앞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건 이미 정산서를 통해 알았다. 그러나 쌓인 돈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 *

임신 중기에 접어들며 루나는 늦은 입덧을 시작했다.

‘임신 초기에는 멀쩡하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신기하게 입덧을 하다가도 이튿날은 식욕이 폭발하고, 그 이튿날은 뚝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의사는 아기씨의 변덕으로 어미의 입맛이 영향 받는 것이라 했다. 갑자기 뒤늦게 아기가 무슨 변덕인가 싶었다.

“아키스, 딸기 타르트가 먹고 싶어요.”

원래도 단것을 잘 먹긴 했지만, 이제는 한 번 먹고 싶어지면 참을 수가 없었다.

못 먹으면 초조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거기다 갑자기 자다가 새벽에 깨서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어서 가져오죠.”

아키스는 자다가 가운을 걸치고 급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루나가 하도 단것을 먹고 싶어 하기에, 아키스는 주방장에게 이르러 그날 밤에 그녀가 자주 먹는 케이크를 두세 가지 구워 놓으라 했다.

그녀가 혼자 먹어 봐야 한계가 있어, 남은 파이와 과자, 케이크들은 고용인들과 나눠 먹었다.

“아아, 이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

여성 고용인들이 맛있긴 한데 살이 찔 것 같다고 울상일 정도였다.

아키스는 새벽에 급히 부엌에서 딸기 타르트를 가져왔다. 루나는 오물오물 먹었다.

더 미치겠는 건 변덕이었다.

“싫어요. 입도 대기 싫어.”

자신도 이런 게 싫은데, 몸도 마음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타르트에 정이 뚝 떨어져 제가 이런 걸 왜 먹었나 했다.

“짭짤한 것 먹고 싶어요…….”

“어떤 거요?”

“절인 생선이요. 그리고 소금 과자.”

“……절인 생선?”

갑자기 이렇게 자극적인 걸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나쁘지 않을까.

“새벽에 너무 자극적인 걸 먹으면 속이…….”

“귀찮은 거예요?”

루나는 툭 치면 울 것 같은 눈으로 아키스를 보았다.

“싫으면 됐는데…….”

“아뇨. 바로 구해 오겠습니다.”

아키스는 급히 나가 어떻게든 그녀가 먹고 싶은 걸 구해 오곤 했다. 이제 고용인들은 새벽녘에 시장으로 뛰어 가는 주인의 모습에 놀라지도 않았다.

아기가 임신 초기부터 하도 단 걸 밝혀 태명은 슈가라고 지었는데, 너무 빨리 지은 게 아닌가 싶었다. 임신 중기가 되며 갑자기 그녀가 짠 음식도 찾아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고 짠 걸 정신없이 번갈아 먹는 그녀를 보면 아키스는 아찔했다. 이러다 배탈이라도 나면?

“싫어요. 다 먹고 싶단 말예요.”

걱정스럽게 말을 건네도 세상 서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통에, 아키스는 제가 무슨 나쁜 말을 한 양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책에서 본 것보다 너무 살이 찌는 것 같은데.’

거기다 루나의 배는 엄청나게 부풀기 시작했다. 팔다리는 여전히 가늘어 더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화를 낼까 염려를 말하지도 못했다.

요즘 싸우다가 ―사실 일방적으로 루나가 신경질을 내는 것이었지만― 루나는 가끔 아키스에게 밉다는 말을 하곤 했다.

“정말 미워요, 당신.”

그러면 아키스는 양손을 다 들고 항복했다. 그녀가 싫다는데 당연히 제가 죄인이었다.

‘벌써부터 이래서야.’

왠지 아키스는 자신이 엄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그뿐이 아니라 가끔 감정 동조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그녀가 미친 듯 단것이 먹고 싶은 날엔 아키스도 참지 못하고 옆에서 케이크를 같이 퍼먹었다.

물론 루나의 입에 들어가는 걸 다 확인하고 나서 조금 입에 대는 식이었다.

“우욱.”

저번에는 식탁에서 루나가 입덧을 심하게 하기에, 몇 분 후 아키스도 저도 모르고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태어나 처음 겪는 기분이었다.

“공작…… 님?”

그때 아키스의 표정을 알렉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은 이런 적도 있었다.

아카데미 마스터 중 가장 격이 높은 아키스의 수업 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아카데미의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온 원형 강의실. 그 중간에 선 아키스는 신화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우아하고 완벽했다.

그런 아키스가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강의 중간에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수업을 중단했다, 다시 진행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공작님?”

“교수님!”

학생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키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다들 자리로.”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품에서 사탕을 꺼내 먹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보는 게 현실이 맞는지 눈을 의심했다.

‘……사탕 드시는 건가 지금?’

‘지금은 초콜릿도 드시고 계셔?’

강의실 가득 달콤한 냄새가 찼다.

‘오늘은 안 되겠군. 그녀에게 이 정도 입맛 변덕이 일어나고 있으면 빨리 가서 달래 줘야겠어. 비상사태다.’

아키스는 나직이 숨을 쉬었다.

각인이라는 게 따로 연통도 필요 없이 그녀의 상태를 알려 줬다. 아키스는 달달한 맛이 퍼지는 입 안을 혀로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 오늘은 여기서 수업을 마친다.”

수업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그를 보며 아카데미 학생들은 귀신강사, 공포의 백마법사에 대한 위엄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애처가시군.”

그들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 * *

“슈가가 이렇게 갑자기 속을 썩일 줄 몰랐어요. 거기다 남편이 워낙 큰 사람이라 그런지 배가 무서울 정도로 부풀기도 했고.”

루나는 부인과 의사가 오자 울상이 된 채 말했다. 페니가 소개해준 의사는 진료를 꽤 잘 봤고, 루나를 임신 초기부터 돌보고 있었다.

“확실히 조금 심하게 배가 부푸시긴 했는데…….”

의사는 고개를 계속 갸웃했다.

뭐가 좀 이상하긴 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맥을 짚고 진찰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군요. 세상에. 왜 이걸 몰랐을까요. 중기를 넘어서니 확실히 느껴지는군요.”

“뭐가요?”

“두 분이십니다.”

“네……?”

“아기씨가요.”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 * *

진료가 끝나고 아키스가 급히 들어왔다. 안 그래도 요즘 워낙 힘들어하는 루나를 걱정하고 있는 터였다.

“괜찮습니까, 루나?”

“네. 난 괜찮은데.”

루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태명을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슈가가…… 슈가로는 부족했어요.”

“네?”

“쌍둥이래요.”

루나의 설명을 들은 아키스는 그녀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입을 살짝 벌린 표정.

“그러니까 새벽에 갑자기 동방 대륙에서 수입한 복숭아가 먹고 싶다며 당신을 울먹이게 만든 아이와, 복숭아를 한 입 먹고 짭짤한 소금 절임 땅콩으로 바꿔 먹겠다고 말하게 만든 애가 각각 다른 아이였던 것 같다고요.”

“네.”

“그럼 갑자기 달달한 크림 스튜를 먹다가 짭짤한 그냥 스튜를 먹고 싶다고 하던 아이도…….”

“응, 배 속 아이들 입맛이 다른 것 같아서.”

그것참 개성도 강한 아이들인 듯했다. 부모가 어련히 관심 안 줄까, 자기 존재를 눈치채 달라 이렇게 난리일까.

아키스는 헛웃음만 나왔다.

“……보통 첫아이가 보라색 눈을 가진 후계로 태어난다 하죠?”

“네. 아들에 한해서. 그래서 공작가는 딸이 귀합니다. 보통 아들이 많이 태어나죠.”

“그런데 왜 드래곤의 계약은 사내만 계승할 수 있는 거죠?”

아키스는 매우 짧게 대답하여 루나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드래곤이 수컷이라서요.”

“아.”

“이성간에는 드래곤의 계약을 할 수 없지요. 만일 드래곤이 암컷이었다면 여가주 집안이 되었겠지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배를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그래, 서로 먼저 내려오겠다 앞다투다 동시에 왔나 보군요. 우리 아이들이.”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앞으로 고생할 일이 정말 걱정이라니까요, 아들 둘이 한꺼번에 태어나면 어쩌죠?”

“저택이 아주 떠들썩해지겠군요. 만일 그렇다면 유모를 넉넉히 고용해야겠습니다. 당신이 직접 아이를 돌보면 고생할 테니 말예요.”

그래도 루나는 자신이 가능한 한 아이를 직접 돌보고 싶었다.

기대 반, 설렘 반이었다.

* * *

그러나 설렘에 젖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우울해, 무서워. 아키스는 또 왜 이렇게 안 돌아 안 오는 거야.’

몸이 무거워지며 루나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이제는 식욕만이 아니라, 갑자기 기뻤다가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이러다 아키스가 내가 싫어질지도 몰라. 내가 왜 이렇게 성질을 내게 되는 거지?’

요즘 루나는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들이 다들 루나를 끔찍하게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속을 탁 터놓고 풀 곳이 필요했다. 못 참고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했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난리가 나서 루나를 달랬다.

심지어 저에겐 자유가 없다는 생각까지 더해져 우울해졌다.

해결책은 뜻밖에 찾아왔다.

어느 날, 루나는 집사인 알렉이 편지뭉텅이를 들고 집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왜 편지를 밖으로 들고 나가지? 집으로 온 편지 같은데.’

루나는 알렉을 불렀다.

“알렉,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 편지들은 뭐죠?”

알렉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급히 편지를 등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작 부인.”

“아니긴요. 편지 봉투에 내 이름이 적힌 것 같은데.”

“…….”

“알렉, 혹시 책에 대한 독자들의 편지인가요? 그러면 꼭 읽어 봐야 하는데.”

결국 옥신각신하다, 알렉은 마지못해 편지 뭉치를 루나에게 내밀었다.

“공작 부인, 정말 보여 달라니 드리긴 합니다만 꼭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버려도 되는 편집니다. 광고 같은…… 그런 하찮은 편지라서…….”

“……이만한 양이 광고로 올 만큼 제국에 가게가 많은가요?”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몇 년 후, 게이트 물건 판매법이 통과되며 카탈로그 식 물건 우편 판매가 활성화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것이 편지를 꼭 읽어 보실 필요는…….”

루나는 가장 첫 편지를 읽고 바로 알렉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나 이해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나라의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계시며, 본을 보이셔 할 분께서 영애와 귀부인들의 타락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당장 그 사악한 약을 몰래 판매하거나, 아예 판매 중지를 하십시오.

우리 ‘수도 윤리 위원회’ 멤버들은 내일 황궁에 가 ‘달의 선물’ 약 판매 금지령을 주청하는 항의를 할 것입니다.

여인들의 달거리는 은밀하고 비밀스런 문제. 문란한 세상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나는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그래, 내가 약 사업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보수적인 노인네들이 이런 항의 편지를 보내는데 알렉이 숨기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그건 괜찮은데. 누구의 지시인가요? 아키스가 편지를 숨기라 했나요?”

루나가 상냥하게 물었다.

알렉은 입을 다물었다.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편지들은 내가 가져가겠어요.”

* * *

그리하여 루나는 뜻밖의 화풀이처를 발견했다.

그녀는 당장에 책상머리로 달려갔다.

[여인의 달거리가 문란하다 하시니, 이 편지를 보낸 익명 백작님께서는 신의 아들이신가 봅니다.

여인의 몸은 달에 비유되는 숭고한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로 인해 아이를 잉태할 수 있지요.

그런 여인의 일을 박대하며 무시하시는 백작님께서는 바닥에서 혼자 솟아나시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신이 낳은 자식 아니겠어요?

앞으로 저는 백작님을 신의 아들이라 말하고 다닐 생각인데 그래도 되나요?

부디 백작님의 명함을 보내 주세요. 익명 편지 같은 비겁한 방법 쓰지 마시고, 신의 아들답게 전면으로 나서시길 바랍니다.

제가 신의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루나는 청산유수로 편지를 썼다.

그간 붉은 책의 편집자 노릇을 하며 루나의 글발도 제법 늘어 있었다.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비꼬는 말이 얼마나 술술 나오던지.

사람은 환경을 따라 변하는 존재라 한다. 급격한 삶의 환경변화와 여행이 지금의 루와 루나가 섞인 성격을 만들었다.

루나는 어처구니없는 항의 편지를 보고도 화가 나기는커녕 도전 의식에 불타올랐다.

‘제 인생을 되돌아보고 똑바로 살아라’라는 항의 편지에는 ‘이딴 편지를 쓰는 댁 같은 분을 보니 내가 참 똑바로 살고 있구나,라는 안심이 듭니다’라는 답장을, ‘약 판매를 당장 중지해라’라는 내용의 세 장짜리 글에는 ‘싫어요’라는 한 줄 답장을 듬뿍 쓰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야 루나는 보람을 느끼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후, 왠지 오늘밤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편지를 붙이고 싶었지만 일단 이런 일은 홍보 담당자에게 의논해 봐야 했다.

안 그래도 타이밍 좋게 그날 미용 살롱 예약이 있는 날이었다.

아키스를 달래 그가 루나를 위해 만든 대극장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미용 살롱은 놀랍게도 아직 영업 중이었다.

“오늘은 임산부들의 몸에 좋은 바다 해초를 갈아 만든 오일로 마사지해 드리겠습니다. 배 부분은 조심하여 만지겠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말씀해 주세요.”

관리사는 루나의 몸에 정성껏 좋은 향이 나는 오일을 발라 주었다.

그사이 페니는 발을 오일과 가루약을 가득 묻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고 발 관리를 받는 중이었다.

페니는 관리를 받으며 루나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약혼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법으로 ‘달의 선물’ 약이 쓰이고 있다고?”

“응. 나이가 찬 영애들이 약혼자에게 결혼이라든가, 혹은 어차피 결혼할 건데 그 이전에…… 그걸 말이지. 독촉하는 방법으로 슬쩍 가방에서 아픈 척하면서 그 약을 꺼내서 보여 준데. 나도 여자랍니다, 하는 거지.”

“……그건 기발한데? 나는 그런 용도로 약을 만들지 않았는데.”

루나는 풉, 웃어 버렸다. 그녀는 좋은 뜻으로 만들었어도 앙큼한 귀족 영애들은 대담하게 응용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제인, 준비한 편지들을 좀 가져와 줄래?”

약 이야기가 나온 김에 루나는 페니에게 편지를 꺼내 보내 주었다.

“이 편지를 네가 다 썼다고?”

“아. 속이 얼마나 다 후련하던지.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되나 싶다니까. 거기다 몇 개는 치사하게 익명에 가짜 주소로 발송해서 답장도 못해. 어이없다니까.”

“……루나, 태교는?”

“몰라. 열 받긴 했는데 또 내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거든.”

경악한 것도 잠시, 페니는 루나가 쓴 편지들을 보며 폭소했다.

“내용이 재미있는데? 이거 홍보의 일환으로 유출시켜도 괜찮겠다.”

“그러든가. 하지만 답장은 꼭 보낼 거야.”

루나는 관리사의 부드러운 어깨 마사지를 받으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페니는 정말 상관없냐 단단히 확답을 받고 나서, 이틀 후 바로 신문에 이 설전을 실었다.

기사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았다.

[공작 부인께서는 위와 같은 항의 편지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익명으로 온 편지들에는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으시다 한다.

그리하여, 편지를 보낸 이 모든 이들에게 답장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 본문을 싣는다.]

* * *

“세상에, 신의 아들이래요.”

“이 뻔뻔한 편지는 뭐예요? 세 장짜리 욕 편지에 공작 부인은 싫어요,라는 한 줄로 답장했다. 이 대목도 웃겨서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편지들이 익명으로 왔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문장이며 쓰는 단어 보니 꽤나 배우신 양반들 같은데 밥 먹고 할 짓도 없어. 아주 비겁해.”

다음 주의 수많은 살롱들의 대화 주제도 공작 부인이었다.

루나에게 독설 편지를 보낸 익명 백작은 ‘신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한동안 수도 살롱의 조롱거리였다.

“버르장머리 없긴. 공작 부인이라 하면 황족에 버금가는 위치. 그런 그녀가 아름답고 젊은 여자니까 이리 더 낮은 신분의 이들이 가르치는 듯한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거지.”

페니도 의외라 생각한 건, 놀랄 정도로 여론이 루나의 편이었던 것이다. 약 판매는 이 촌극으로 인해 추진력을 얻어 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거기다 대중의 심리란 참 묘했다. 루나가 좋은 의도에서 발매한 약이 욕먹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화가 난 영애들은, 더 보란 듯이 약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

* * *

“집사, 오늘은 항의 편지 없나요?”

그래서 루나는 새로운 감정 해소처를 발견했다. 독설 편지를 쓰는 순간의 그녀는 몹시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종류의 태교지?’

그녀를 열린 문틈으로 훔쳐보던 아키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요즘 그녀의 기분은 몹시도 안정적이었다.

아키스는 집사를 불러 지시했다.

“……집사, 편지를 먼저 읽어 보고 너무 심한 내용은 아내에게 절대 보여 주지 말도록.”

“안 그래도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명문가의 집사라면 편지의 씰 인장을 슬쩍 제거하고 뜯어 본 적 없는 것처럼 다시 봉납하는 솜씨쯤은 기본이었다.

‘설마 배 속 아이의 영향인가.’

루나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는 아이의 성질머리는 꼭 저였다. 아키스는 태어날 아이의 성격이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둘 중의 한 아이 말이다.

‘날 너무 닮아도 곤란한데.’

제발 아내에게 영향을 좀 받아라. 아키스는 속으로 그 생각을 떠올렸다.

**

그해 축제 무도회는 참 묘한 분위기였다.

절친한 친구나 자매끼리 색만 다른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도 은근히 눈에 띄었다.

“요즘은 옷을 저렇게 입고 다닙니까?”

“아, 두 미인으로 유명한 페니 드 르시타와 공작 부인이 무도회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맞춰 입고 온 후로 유행이 된 모양입니다.”

루나와 페니의 우정이 널리 알려진 후 의자매처럼 지내며 고급스럽게 옷을 맞춰 입는 등, 그녀들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무슨 그런 유행이 다 있냐며 헛웃음을 짓는 이들도 있었지만, 옷을 맞춰 입은 영애들은 제가 공작 부인이 된 양 턱을 치켜들고 다녔다.

이윽고 공작 부부가 입장하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임신 중인 루나는 드레스 너머로 한결 티가 났다.

“어머, 정말 공작 부인이 회임했군요.”

“정말 잘 어울리네요. 두 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녀를 유리 다루듯 소중히 다루는 공작을 보자 여인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가득해졌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 드십니다.”

곧 전령이 외쳤다. 사람들이 모두 부복하고 황후의 입장을 기다렸다.

“페니, 언제 왔어?”

“방금.”

페니가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디온의 팔짱을 끼고 루나의 뒤에 섰다. 디온이 부드러운 미소로 눈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디온이라 그도 달가웠다.

“오늘 이렇게 귀한 사람들을 모시고 연회를 가지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올해의 추수제는 조금 특별합니다.”

황후는 난간 위에 올라서서 부드럽게 인사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건강해 보았다. 황후는 무도회의 시작을 여는 말을 늘어놓았는데, 말솜씨가 유려해 루나는 집중했다.

‘오늘 따로 찾아뵙고 싶은데 만나 주시려나.’

루나의 심장이 뜨끔했다.

사실, 오늘 여기 오며 루나 또한 황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좀 했다.

‘내가 평판이 좋지 않을 때도 늘 잘해 주시고 책을 출간해 보라 응원해 주셨지.’

황가에는 솔직히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건 황가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황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고마움과 호감에 가까웠다.

그런 그녀에게 일언반구 없이 황태자와 일을 만들어 고대어 법을 개정하는 작당을 했다. 황태자의 조언자이자 기반은 황후이니 지금쯤 황후 또한 루나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

‘이제 거북한 사이가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황후가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수많은 귀족들 틈에서 눈을 마주친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하게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공작 부인의 품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루나에게 꽂혔다.

“내 황궁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지만 바깥의 큰일들을 즐겨 듣지요. 듣자 하니 공작 부인이 수도에 기묘한 가게를 열었다는데. 이 태도는, 정말이지…….”

황후는 손을 올려 가벼운 제스처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세상에 변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귀부인의 덕목에 순종, 순결, 순응을 최고로 칩니다. 나 어릴 적만 해도 그렇게 배웠지요. 하지만 이제 그 기조가 변할 때도 온 것 같습니다. 공작 부인은 집에 있는 것보다 세상 밖으로 나와 활발한 활동으로 수도의 문화, 경제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훌륭한 약을 복원해 평민들에게는 저렴하게, 그리고 귀족들에게는 제 값을 받고 공급하니 고위 귀족의 봉사 정신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요. 또한 훌륭한 소설로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했음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루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뺨이 붉어졌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황후는 뜻밖에 루나를 치하하고 있었다.

“내 오늘 공작 부인에 대해 거론한 이유는 하납니다. 그녀가 약국을 오픈하는 날, ‘달의 선물’이라는 약이 너무 파격적이라 놀란 귀부인들이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걸 잊어 침묵 속에 약 판매가 시작되었다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

“그녀는 박수갈채를 받아 부족함 없는 여인이니, 이 자리에서 대신 박수를 보내지요.”

황후가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시작된 그 박수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모든 귀족이 루나를 보고 박수를 쳤다. 그 짧은 박수 속에서, 루나는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

그녀의 목덜미부터 뺨이 붉어졌다. 감동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난, 그저. 공으로 얻은 능력이니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그런데,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는 느낌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페니가 루나의 손을 잡았다. 루나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 가슴에 손을 댄 채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세상이 망하려고.’

‘혼을 내실 줄 알았는데 도리어 치하를 하시다니.’

몇몇 보수적인 귀족들만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소수라는 입장을 확인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루나를 향해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고 우아한 고귀한 임산부. 제국민들의 호감을 사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또, 르시타 가문의 여식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내 듣자 하니 공작 부인과 둘이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친 모양이군요. 르시타 가문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황후는 말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페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것은 페니가 이제 사교계에서의 위치를 인정받았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이리 올라오도록 하시지요.”

끝으로 황후는 루나와 페니를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그녀는 사람들 눈앞에서 그녀들을 총애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그래, 결국 사교계에 왕권 교체가 일어나는군.”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납득했다.

루나는 황후에게 다가갔다.

“황후 폐하.”

루나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황후가 속삭였다.

“설명할 필요 없네.”

“…….”

“미리 말해 두는데, 너무 과하진 말게. 큰 변화를 겪는 세대는 진통을 겪거든. 그리고 황가 사람들도 숨을 트여야 하지 않겠나. 대대로 공작가와 황권이 대립하는 시대는 아랫것들이 고생해 왔거든.”

“……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았네. 매일매일이 재미있더군. 그대 덕분에 웃고 살아.”

황후는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조금도 비꼬는 어조가 아니었다.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이분이 황후이시기에 망정이지, 사내셨으면 이미 황궁을 다 꿰차셨겠군.’

과연, 황후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몸을 떼어 페니에게도 들리도록 보통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내가 절대 공작 부인을 해코지하지 않는다 전하게. 나 참, 아까 내가 그대를 호명하니 공작이 얼마나 나를 무섭게 노려보던지 오금이 저리는 줄 알았네. 나를 그리 모르는가.”

“공작은 항상 공작 부인의 안위만을 생각하지요. 그건 아무도 못 말린답니다.”

페니가 짓궂게 말했다. 둘의 놀림에 루나의 뺨은 살짝 붉어졌다.

* * *

그해 축제 무도회는 특별했다.

루나는 황가의 기밀을 덮어 주는 마지막 조건으로 그간 무고하게 희생된 여인들을 위한 황가의 정식 사과를 요구했다.

축제 마지막에는 일련의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추모 기도를 하고, 황가의 정식 사과가 있을 것임이 발표되었다. 이 일은 주신전이 맡기로 했다.

호사가들과 전문가들은 이를 곧 황위에 오를 섭정 황태자가 치를 첫 진통이라 평가했다.

* * *

루나는 무도회의 말미에 황태자와 춤을 한 곡 췄다.

임신 중인 루나를 배려해서 황태자는 아주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황태자가 루나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그래, 만족하시는지요? 결국 고대어 법을 바꾸셨군요.”

“절반 정도는 만족했어요.”

루나가 그렇게 말하자, 춤을 추는 와중에 황태자의 얼굴이 하얘졌다. 사람들은 공작 부인과 춤을 추는 황태자를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공작의 눈빛 때문에 그런 줄만 알았다.

“설마, 또…….”

“가주 계승 제도에 슬슬 요즘 의문이 생기려 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살려 주시게, 공작 부인…….”

황태자가 우는 소리를 냈다.

루나는 담뿍 미소 지은 채 마지막 스텝을 마무리했다.

* * *

이번 공작 부부는 고분고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능하면 황궁 무도회의 일주일 일정을 모두 참석하라는 황태자와 황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아키스와 루나는 축제 마지막 날 몰래 변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해요, 루나.”

둘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두 손을 잡은 채 거리로 나와 불이 환한 거리를 걸었다.

“오래 있지 말고 갑시다. 당신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되니.”

“네. 조금만 구경하고요.”

그들은 과거를 추억하며 거리를 걸었다. 먼저 그들이 간 곳은 그들에겐 기억이 많이 쌓인 고서점 거리였다.

“이 길을 걸어 매일 몰래 남장을 한 채 서점으로 출근했어요. 당신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에 매일 감사했었죠. 그전엔 하루에 두 시간씩 자고 코피 흘려 가며 일했지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속삭였다.

“매일매일이 바빴어요. 하지만, 당신이 오기로 한 날이면…….”

루나는 그녀의 수줍은 첫사랑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그 전날부터 짧은 잠을 줄여 가며 당신 생각을 했죠.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럴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루나는 배에 손을 댄 채 천천히 길을 걸었다.

“이렇게 거리의 끝에 도착하는 날에는 어찌나 설레던지. 당신이 온다고 해놓고 안 온 날은 또 얼마나 슬펐는 줄 알아요?”

아키스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솔직하고 수줍은 말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나도 하도 그 서점을 드나들다 보니, 디온과 집사가 자꾸 왜 그러냐며 물었죠. 그냥 정이 갔습니다. 사실, 난 정말 남색이라면 질색을 하지만 내가 최음 독약을 먹고 당신에게 간 날, 그 소년이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자신을 바로 의심했지요.”

루나와 아키스는 서로 묘한 기분에 젖어 후드를 눌러쓰고 손을 잡은 채 낡은 서점의 외관을 바라보고 걸어갔다.

“우리가 첫 동침을 한 날도 축제 마지막 날이었죠.”

그때를 생각하면 뺨이 다 붉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주…….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리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정말로 당신에게 가서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갔다면 우리의 인연은 다시 꼬이고 꼬였겠지요.”

“맞아요.”

루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서점 안을 살피니, 올해의 달빛 서점은 축제 영업을 하지 않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고서점 거리를 빠져나가 중심부로 나아갔다.

올해 또한 풍작이라, 축제에 젖은 거리 내부에는 기분 좋은 흥청임이 번지고 있었다.

강가에 모여든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강가에 꽃을 띄워 보냈다. 거리 전체에 음식냄새와 술 냄새, 꽃냄새로 진동했다.

루나는 길에서 종이에 쌓인 고기와 야채 구이를 샀다.

아키스는 입 안을 델 만큼 뜨겁지 않은지 확인하고 나서야 루나에게 건넸다. 루나는 강가에 앉아 음식을 조금씩 먹었다.

“지금은 솔트예요, 슈가예요?”

“솔트가 먹고 싶어 한 것 같아요. 짭짤해서 좋은데요.”

오물대는 그녀는 작은 동물 같았다. 루나는 음식을 다 먹고 그의 팔에 고개를 기댔다.

“정말 꿈만 같아요. 너무 좋아요.”

“……나오길 잘했군요.”

“근데 웬일이에요? 위험한 덴 가지 말라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먼저 데이트하러 나가자 하더니.”

일주일을 황궁에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날 도망쳐 밖에서 몰래 놀자고 한 아키스의 말은 몹시 뜻밖이었다. 이 사람이 이런 면도 있었나,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아키스가 속삭였다.

“당신이랑 이 세상 좋은 건 다 해 보고 싶어서. 예전에 축제 구경을 마음 놓고 해 본 적 없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그랬나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나? 아마 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축제 때 손님초대로 부려먹히느라 느긋이 구경한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너무 좋아요.”

루나는 아키스의 팔에 기대 속삭였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면 1년에 축제를 다섯 번도 열겠군요.”

“그건 너무 일이 커지니까. 그러진 말고.”

루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긴 외출은 하지 마요. 몸이 걱정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키스는 루나가 이토록 좋아하니,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나면 루나와 단둘이 변장하고 외출을 종종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매해 여름엔 리튼에 가고, 또 축제도 봅시다. 겨울에는 눈 구경을 가고 가을엔 숲에 가면 되겠군요.”

“……갑자기 왜 이러실까, 우리 엄한 공작님이. 그렇게 말랑하게 사는 건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그냥.”

아키스가 속삭였다.

“세상 모든 좋은 걸 당신이 놓치는 것이 싫어서.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응, 나도 더 잘할게요. 고마워요. 사랑해. 아키스…….”

“나도요.”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강가에 스며든 수많은 비밀스런 연인들처럼 입을 맞췄다.

* * *

다 좋았고, 흠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요즘 루나에겐 작은 고민이 생겼다.

‘으음……. 이렇게 오래 안 한 게…… 처음이지?’

임신 안정기에 들어서고 배가 부풀며 아키스는 루나를 사기그릇 대하듯 조심조심 대했다.

그게 너무 과해서, 얼마 전부터 둘은 밤일이 거의 없었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자꾸 야릇한 생각이 들고 그의 스킨십이 아쉬웠다.

물론, 의사가 하지 말라는 시기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를 만지고 달랬다. 그러나 요 한 달간은 그런 일도 없었다.

‘혹시 내 배가 부르고 몸이 살이 붙어서…….’

얼마 전 검진 온 의사에게 고민을 묻자, 의사가 담뿍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닐 거예요. 태내의 아기님이 너무 귀해서 아내를 다치게 하면 어쩌나 그러시는 겁니다. 가끔 금슬 좋은 부부들은 그런 일이 있죠. 평소 여간 금실이 좋으신 게 아니셨나 봅니다.”

루나는 그 말에 살짝 뺨을 붉혔다.

“이제 완전히 안정되셔서 부드러운 관계는 오히려 몸에 좋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그러니까. 여인으로써 욕구가 강해지는 시기가 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랍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결국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루나는 처음으로 아키스에게 먼저 하자는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키스? 안 자요?”

그런데 그날따라 그가 야속하게 침실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루나는 실크 잠옷에 가운 차림으로 아키스의 서재를 갸웃거렸다.

마침 책장을 보고 있던 그가 눈을 돌렸다. 책을 찾고 있었는지 접어 올린 셔츠 너머의 힘줄 돋은 팔이 아찔했다. 그의 몸이 이렇게 단단했던가. 뒤돌아선 그의 탄탄한 허벅지와 늘씬한 키가 그녀의 눈에 직격으로 꽂혔다. 루나는 뺨이 훅 달아올랐다.

“아직 안 잤어요?”

아키스가 다가왔다.

“오늘부터 학생들의 승급 시험 기간이라 조금 바쁘군요.”

“아…… 그렇군요.”

아카데미 교수가 1년 중 가장 바쁜 기간이 승급 시험 기간이라 들었다.

루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생긴 거야. 그럴 거면 바쁘지나 말지.’

루나는 속으로 멋대로 툴툴댔다.

살짝 비죽여지는 루나의 입술을 보고 아키스가 안경을 벗었다. 요즘 그는 종종 바쁠 땐 안경을 꼈다.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뇨. 누가 먹고 싶은 거 있을 때만 당신 찾는 줄 알아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가가 잠 못 자게 보채요?”

아키스가 루나의 부푼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막 덤비지도 않고, 정말 내가 그리 예전보다 매력이 없나.’

평소에는 손끝만 스쳐도 책상 위에 올리고 바로 덮쳐 버리던 사람이, 오늘따라 어쩜 이리 초연한지.

에라, 모르겠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목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나, 하고 싶은데.”

순간, 아키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루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과 귀가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왜…….’

아키스가 루나의 손목을 놓았다.

“먼저 침대에 가서 기다려요.”

그가 속삭였다.

그 말에 루나는 서재에서 침실로 돌아와 가운을 벗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그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왔다.

* * *

침대 위로 올라온 아키스는, 먼저 루나를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귀 뒤에서부터 루나의 귓바퀴, 목덜미까지 입술로 훑었다. 그는 손끝으로 루나의 귓불을 쥐었다 폈다 했다.

“참 이상하지. 왜 귓바퀴까지 예쁘지. 여기 구멍도 참 귀엽고.”

루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이 단번에 실크 잠옷을 위로 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몸에 닿았다.

“아, 당신……!”

“몸이 좀 변한 것 같긴 하군. 색도 변한 거 같아. 여기도 더 도톰해진 것 같고.”

그가 유륜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리고 두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가두고 쥐었다 폈다 했다.

“만져 주면 뾰족하게 세우는 건 여전한데 말입니다.”

그가 유두 끝을 살짝 쥐고 당기며 말했다.

“흐응…….”

루나의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순식간에 속옷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평소보다 질척해지는 것도 더 빨라.”

그가 말을 마치고 바로 행동했다.

아키스는 가능한 한 부드럽게 움직이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그의 더운 숨을 정면으로 맞자, 루나의 온몸이 불타올랐다.

“으응…… 왜, 변해서 싫어요?”

아키스가 루나의 귀를 물어뜯었다. 루나는 새된 신음을 높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요즘 참느라 미치겠어.”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얼마나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줄 알아?”

그가 끔찍한 소유욕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러면 당신이 다칠 것 아닙니까. 아까도 서재에서 덮치면 못 참고 세게 할까 봐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춥. 추웁.

아키스가 루나의 아래를 빠는 소리가 질척하게 방 안에 울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음핵을 살살 눌렀다 놓았다.

“흐윽!”

혀는 쉴 틈 없이 대음순을 빨아들이고, 구멍 안으로 긴 혀가 파고들었다. 파고든 혀는 그녀의 빨간 내벽 안에서 위 아래로 움직였다. 루나는 배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튕겼다. 루나는 흐느끼듯 말했다.

“아키스, 이제 그만. 벌써 혀만으로 두 번이나 갔잖아요.”

루나는 침대 위에 정자세로 누워 그에게 온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아키스의 눈이 루나의 부푼 배에 닿았다. 그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자. 참자.’

이대로 삽입하면 평소처럼 그녀의 질 안이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쑤시고 싶을 거다. 아키스는 천천히 루나의 작은 손을 끌어당겼다. 루나가 바지를 풀었다. 이미 발기한 아키스의 페니스가 그녀의 작은 손바닥을 때렸다.

“손.”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는 그녀의 손바닥을 핥았다.

“당신 애액이 섞였을 거야.”

“아키스…….”

루나는 민망해져 중얼댔다. 아키스가 손목을 당겼다. 루나는 아키스의 큰 것을 작은 손으로 휘어잡았다. 그녀가 몇 번 위아래로 쑥쑥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의 성기는 단단해져 루나의 손바닥을 자극했다.

“입으로 할까요?”

루나가 속삭였다.

“하지 마요. 당신 입은 너무 작아서 찢어질지도 몰라.”

“할 수 있는데…….”

늘 아키스가 정성들여 긴 애무를 하니, 자신도 뭔가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임신 때는 못하는 시기도 많다고 들었다.

“안 돼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런 말할 기운 있는 걸 보면 더 가고 싶은 건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루나의 허벅지를 벌리고 천천히 삽입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그녀의 쫀득한 속살은 여전히 그의 몸을 죄여왔다.

철퍽,철퍽.

그대로 그가 반만 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푹!

그러다 그의 우뚝 선 페니스가 안으로 더 깊게 쑥 파고들어왔다.

“흐읏, 너무 깊어…….”

루나가 배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키스는 자세를 바꿔 루나를 옆으로 돌렸다. 루나는 옆으로 누운 채 쿠션으로 배를 받쳤다. 그대로 그가 천천히 삽입하기 시작했다.

“흐응……!”

마지막까지 맞물린 성기의 압력이 루나를 압박했다. 오랜만이라서, 기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찰박, 찰박. 찌걱. 그가 그대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루나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간질간질한 쾌감이 작은 불꽃처럼 배 아래를 긁었다.

“흐응, 읏……! 좋아……!”

루나가 더운 숨을 토했다. 아키스가 루나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퍽. 퍽.

그가 치대고 들어갈 때마다 루나의 내벽이 녹진하게 아키스를 조였다.

“당신 몸에 박고 싶어서.”

“아아…….”

밀려오는 쾌감에 루나는 어깨를 벌벌 떨었다. 그녀의 몸 안의 점막이 그의 페니스를 감싸며 빨아들인다.

“어떻게 계속 싸. 응?”

아키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세 번이나 절정에 간 그녀의 음부가 아키스의 페니스를 콱 조여 왔다.

“흐읏, 응!”

멈추기는커녕, 더 빨라지는 피스톤질에 루나의 정신이 혼미했다. 아키스가 루나의 몸을 확 당겼다. 한순간 깊게 결합된 채 아키스가 루나의 안에 길게 토해냈다.

“안 닿았어.”

아키스가 속삭였다. 자궁구에 닿을까 봐 걱정했던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빨고 키스했다. 긴 금발머리가 아키스의 콧날을 간질였다.

아키스가 루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아래 깔린 채로 눈이 마주쳤다. 루나가 아키스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혀 내밀어 봐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느끼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아키스의 혀가 공중에서 루나의 혀를 건드렸다. 서로 간을 보듯 톡톡 치던 혀가 얽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쪽쪽. 춥.

그다음엔, 서로의 혀가 얽힌 채 음미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루나의 입가에는 타액이 흐르고 있었다.

“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요. 당신 여기에 봉사하는 건 언제든 환영이거든.”

아키스가 톡톡, 그녀의 발갛게 달아오른 균열 사이를 두드렸다. 루나는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기들, 놀라지 않았을까 몰라요.”

“엄마가 그렇게 좋아했는데, 아이라고 그걸 모를까 봐. 좋은 영향을 주었을…….”

루나는 아키스의 팔을 꼬집었다. 이이가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

“혹시, 불안했어요?”

“……조금은요.”

“당신은 여전히 너무 예뻐. 하지만 다칠까 걱정됩니다. 이제 홑몸도 아니니까요, 걷는 것도 뒤뚱뒤뚱하는데 내게 맘대로 했다가 몸이 놀라면…….”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에 불안감이 씻을 듯 사라졌다. 루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루나는 그를 먼저 유혹한 일을 조금 후회하게 되었다. 그가 말 그대로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물고 빨고 놔주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게 참고 있었던 거구나, 이 사람. 그러니까, 끝까지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할 방법이 많을 줄은…….’

루나는 지쳐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했다.

* * *

축제가 끝나고 루나는 아키스를 통해 나름대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집사, 알렉과 시녀장 비아가 내년쯤 혼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루나는 저도 모르게 에, 네?라고 대답해 버렸다.

“신혼집은 공작가 내부의 코티지에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당신 코티지와는 정반대편으로요. 따로 자택을 마련해 준다 했는데, 공작가 안에서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하더군요.”

비아는 서른 후반쯤 되어 보였고 알렉은 못 되도 50쯤 되어 보였다. 루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으음,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좀 나지 않을까요?”

아키스는 점잖게 말했다.

“알렉이 비아보다 한 살 연하입니다.”

“……뭐라고요? 도대체 비아가 몇 살인…….”

그 순간, 루나는 깨달았다. 알렉이 열 살쯤 나이 들어 보이고, 비아는 열 살쯤 어려 보인다는 것을.

“거기다 알렉은 초혼이고 비아는 재혼입니다. 알렉이 공작가를 건사하느라 혼기를 놓쳤지요.”

“……그렇군요. 알렉은 지금도 인기 있는 사내일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잘되었어요.”

알렉은 꽤 우아한 외모의, 같은 연배의 여인들에게 인기 많을 것 같은 중후한 사내였다.

루나는 일기장에서 본 미래를 떠올렸다.

알렉은 공작가에 모든 것을 건 이였다. 그런 이가 아키스의 곁에 없다는 건 아마도…… 가슴이 아려 왔다. 이 미래가 혹시 바뀐 미래라면, 그렇다면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질 거야. 이제 모두 같이 나이 들어 가겠지. 식솔들도, 친구들도…….’

아키스가 루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아무튼, 둘은 서류상으로만 조용히 이름을 올릴 거라 합니다. 비아가 재혼이고 해서 결혼식을 할 마음은 없다 하는군요. 그러니 괜히 신경 쓰지 말라 합니다. 두 사람이 그리 말했으면 존중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네. 네에. 그러면 축하금을 충분히 지급하도록 해요. 항상 고마운 사람들이니, 아주 두둑이 말예요. 나도 개인 적인 축하 인사 정도만 하도록 할게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그날 오후, 비아에게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비아는 수줍어했다. 나이를 잊을 만큼, 그녀는 곱디고웠다.

“이제 저희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둘이서 오래 공작가를 위해 일하다 보니 동료애가 생겼고, 나이가 들어서는 이 감정이 모호하다가 어느새 같이 살아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요?”

“이전부터 집사님이 그런 뜻을 암시했지만, 제가 용기가 없었죠. 오래전 혼자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공작 부인이 들어오시고 공작님께서 변해 가시는 걸 보며 이젠 괜찮겠다 싶었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는 주변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이 공작가를 위하는 건 조금도 변치 않을 터이니 안심하세요. 요즘 유모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 제가 옆에서 단단히 지켜봐야지요. 제 손으로 아기님들이 다 자라도록 돕고 나서야 은퇴할 거예요.”

루나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비아의 몸을 한 번 끌어안았다. 비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공작 부인?”

“항상 고마워요, 비아. 비아가 날 돌봐 주는 만큼, 나도 언제든 비아에게 힘이 되어 줄게요.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줘요. 알겠죠?”

비아는 그녀의 사랑스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 부인.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은 알까, 이미 그녀에게 충분히 도움 받았다는 것을. 이런 상냥한 마음 씀씀이로 충분하다는 것을.

* * *

이렇게 주변에 경사가 넘쳐서인지, 임신이 안정기에 들어서인지, 루나의 기분도 점차 나아졌다.

약 판매 사업도 순항에 들어섰고, 책은 가만히 있어도 잘 팔렸다. 루나는 간만에 붉은 책을 위해 시간을 많이 쓰기로 했다.

루나는 이번에도 팬레터를 잘 골라, 하루에 하나씩 붉은 책에게 써 넣어 주었다.

<대단해. 네 작품들이 이렇게 큰 영향을 주었어. 고대어 특별법을 없애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했어.>

<고맙습니다.>

다만 요즘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책이 지나치게 과묵해진 것이었다.

‘내가 너무 억지로 현대 소설 창작을 시켰나?’

하루에 몇 번을 불러도 책은 대답이 없었고, 그나마 팬레터를 써 줄 때만 짧게 대답하곤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책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나다가 꺼지곤 했다.

하지만 아키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의 손에 책을 넘기면 이번엔 책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서웠다.

‘……이젠 거의 말을 안 해.’

그러던 와중, 결국 책은 한마디도 하지 않게 되었다. 루나는 걱정되었다. 매일 책을 열어 몇 글자 적어 넣긴 했다.

‘일단 너무 독촉하지 말고 기다려 볼까…….’

* * *

공작 부인의 오랜만의 긴 외출이었다. 하인들은 짐 가방을 싣고, 이번에 동행하는 제인은 설레는 얼굴로 루나의 짐을 점검했다. 마차 앞에는 집사를 비롯한 전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키스는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루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르시타 후작 부인이 모처럼 배려해 주신 태교 여행이라 했잖아요.”

“그런 거면 나와 가도 되지 않습니까. 이제 제법 배가 나와 위험한데.”

“주치의도 괜찮다 했다니까요. 그리고 여자들끼리 여행인데 남편 데려오면 날 뭘로 보겠어요?”

“…….”

아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변 휴양 도시 리튼. 그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고 풍경이 아름다운 숲을 끼고 있었다.

르시타 후작가에는 리튼에 별장이 두 개 있었다. 특히 숲속 별장의 풍광이 몹시 아름다워 르시타 후작 부인이 어린 페니를 데리고 종종 놀러 갔던 추억의 장소라 했다.

임신 중기를 넘어선 루나가 거동이 더 불편해지기 전에 태교를 겸한 여행을 가자며 그녀는 약속대로 여인들의 여행을 주선했다.

루나는 몹시 설레서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다.

다만, 페니도 신혼이고 아키스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넘쳐, 두 남자는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따라가려 시도를 했다. 당연히 그 시도는 페니와 루나의 손에 저지되었다.

* * *

루나는 게이트에서 페니 모녀를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루나는 페니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빨리, 잘 다녀오라 해 줘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뺨에 키스했다.

“잘 다녀와요.”

디온의 손을 잡은 페니와 르시타 후작 부인이 다가왔다. 디온의 얼굴에도 서운함이 듬뿍 묻어 있어, 루나는 풋 웃을 뻔했다.

“정말 우리도 같이 가도 되는데.”

“전 결국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갈 터이니, 전보를 보내 주세요.”

디온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데릴사위를 르시타 후작 부인이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루나와 페니는 서로의 남편에게 손을 흔들고 게이트를 탔다.

* * *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소일거리로 만들었지요. 선물이에요.”

루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르시타 후작 부인은 아기 옷이며 아기의 요람에 걸 자수가 새겨진 작은 인형에, 아이 옷에 달 레이스까지 떴다. 거기에 자수 담요까지.

“……이런 걸 다 해 주시다니.”

루나는 마음이 찡했다.

“아, 이쪽 자수는 잎사귀는 페니가 놓았어요. 얘는 자수는 못한다고 늘 빼기만 하더니, 많이 늘었더라고요.”

“……어, 어머니는 참.”

페니는 뺨을 붉혔다. 따뜻함과 진심이 루나에게 전해졌다.

“소중하게 간직해서 요긴하게 쓰겠어요.”

여자 셋이 모이니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올해 말에 열릴 경매와 새 피부 관리법, 루나의 책까지 수많은 화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때였다.

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아?”

루나는 순간 놀라 배를 감싸 쥐었다.

아주 작은 덜컹임이었다. 곧 마차가 서서히 멈췄다.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르시타 후작 부인이 놀라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가 곤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후작 부인. 낙석입니다.”

“낙석?”

그들은 산 옆의 마차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네, 멀리서 낙석이 떨어지는 소리에 말이 놀라 흥분한 것 같아 일단 멈췄습니다.”

“……이 근처는 별일 없는 곳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네, 마차를 계속 달릴까요? 심각한 낙석은 아닌 것 같아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르시타 후작 부인은 마차 안을 보았다. 공작 부인을 계속 길에서 기다리게 해도 될까?

‘별일 아닌 것 같은데, 빨리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

-외전 / 과거 편-

루나의 일기(4)

「4월 14일」

내 시간이 촛불이라면 심지는 거의 다 타 버렸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꿈 마법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아키스가 속삭였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그 꿈 마법이라는 걸 거절했다. 어떤 꿈을 꾸게 해 주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통을 느낄망정 나는 현실 속에서 죽고 싶다. 그리고 아키스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감정을 마지막까지 생생하게 갖고 싶다.

“당신이랑 대화하는 것이 더 좋아요.”

그 남자는 이제 종종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왜 아이를 가지지 않았어요? 다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여자를 찾아서 애 낳고 잘만 살던데.”

아키스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공작가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이 드래곤에게 선택되고, 대신 죽은 동생의 이야기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동생이라 불쌍하진 않았습니다. 그 애는 두 살 때 병으로 죽었거든요.”

그의 새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키스를 원망했다 했다. 그러던 그녀는 결국 아키스의 눈앞에서 목을 맸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키스의 탓으로 돌렸다 한다. 네가 살아남아 단달로스의 자리를 빼앗았다 말했다 한다.

아키스는 가문의 불행은 모두 그의 탓이라 주입 받고 자랐다. 그 중 아키스가 가장 절망했던 것은, 아버지가 저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증오할 정도의 관심도 없었죠, 그가 내게 죄의식을 주입시킨 건, 그냥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뿐이죠.”

“…….”

“그걸 깨달은 순간, 누가 날 만지든 역겹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쭉 그랬죠. 누군가를 내 삶에 들이는 게 싫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튀어나온 못이었을 거다. 그런 반항적인 성격의 그가 금욕적이고 엄한 가문에서 얼마나 지옥처럼 자랐을지 눈에 선했다.

“다만 내 자식이 나처럼 드래곤의 계약을 잇기 위한 체스 말 중 하나가 되는 건 싫었습니다. 우리들의 목숨은 언제든 드래곤이 앗아 갈 수 있지요. 계약자이지만 종속되어 있는 거니까. 결국, 그리고 나도…….”

당신도, 드래곤의 계약자라서 죽게 되었다.

난 그 말을 삼켰다.

그러나 드래곤이 있었기에 제국민이 명맥을 이어 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마워하기엔 내가 너무 반골인가 봅니다.”

나는 속으로 그의 말에 긍정했다.

「4월 15일」

내가 죽은 후에, 내 기억은 모두 뿔뿔이 흩어 사라질 것이다. 존재도 사라지고 먼지조차 남지 않아 모두가 날 잊겠지.

난 며칠간 끔찍한 공포에 시달렸다.

며칠을 자다가 겨우 눈을 뜨면 울며 발작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조금 진정이 되면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내일이 없어지는 게 무서워.

죽는 거야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괜찮지만, 그냥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조차 없어질까 두렵다.

나란 존재에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건 당연한 거다.

내게 의미가 있다면, 내가 뭔가 해낼 존재였다면 세상은 내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구석에 처박혀 굶어 가며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인생을 마련해 줬겠지.

나는 이제 공작을 대신해 죽음으로써 유일하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아키스는 말했다.

“당신을 계속 기억하죠. 약속할게요.”

“아뇨, 당신은 날 잊을 거예요.”

나는 미소 짓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당신 마음이 전해집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뭐가 그리 무섭죠?”

* * *

그날 오후, 아키스는 나를 자신의 서재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가 몹시 신기한 이야기를 해 주었기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화를 자세히 적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는 내게 책을 한 권 보여 주었다.

붉은 표지의 책이었다.

책표지에는 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뚫어져라 보았다. 펼쳐 보았지만 내용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카일라.>

그가 속삭였다. 그러자 표지 가장자리에 낯선 글자가 드러났다.

“이게 무슨 글자죠?”

“숫자입니다. 고대어라 당신은 읽을 수 없을 거예요……. 이 책이 3번째 책이란 뜻이죠.”

아키스가 책을 펼쳐 보여 주었다. 책은 여전히 텅 빈 백지였다.

“이 책은 고대 최고위 마법사들이 쓰던 특별한 마도구입니다.”

“마도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재작년쯤 이 책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다.

“이 책은 무한한 글자를 저장해 놓는 것이 가능합니다. 책의 주인들은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지식을 불러낼 수 있었죠.”

나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마도구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었죠. 이런 달 모양 표지의 책은, 고대에 흔한 모양의 표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마도구들의 진짜 힘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여기 표지에 숫자가 숨겨진 책들은 말입니다, 이 안에 특수한 방법으로 글자를 남기면 그 글자는 자신이 원하는, 똑같은 표지에 숫자가 붙은 다른 책으로 전해졌습니다. 편지를 보내듯 상대를 지정하여 글자를 전송하는 것이 가능했죠.”

“……그러니까, 책을 통해 대화가 가능했다고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위 마법사들은 이 번호가 붙은 붉은 책에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죠. 그래서 같은 표지의 번호가 붙은 책을 가진 동료들에게 자신의 위치와 연구 성과를 알렸지요. 이 책을 가진 사람들을 고대의 ‘마스터’라 불렀습니다.”

“……그랬군요. 그러니까, 언제든 전보를 보낼 수 있는 책이라는 거죠. 굉장한 물건이네요.”

내게는 몹시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나는 집중해서 그 말을 들었다.

“때때로 그들은 이 책에 보낼 사람을 지정하지 않고 무작위로 글씨를 기록했죠. 말하지 못한 속내나, 진심들을.”

“왜요?”

“이 책 안에 글자를 그냥 기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압니까? 다른 책에 보낼 생각 없이 그저 단순한 기록 말입니다.”

“몰라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글자들은 이 책 안에서 사라집니다.”

“네?”

“받을 이가 없으니, 당연히 그냥 이 책에 흡수되듯 사라져 버리지요. 고대 마스터들은 이 책 안에서 사라진 글자들이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고 책과 책 사이의 공간에 영원히 남는다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볼 수 없는 영원한 공간에 갇힌다고요.”

왠지 가슴이 술렁였다.

그러면, 내가 글씨를 쓰면 그 이야기는 사라질까? 어딘가에 남을까?

마치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언젠가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그 사라진 글씨들은 무작위로 같은 표지의 다른 책들에 떠오르기도 했지요.”

“이 책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누군데요?”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고위 마법사는 수도 적을 뿐더러, 내가 이 책의 사용 용도를 밝혀낸 것도 얼마 전의 일이라서요. 아마 이 세계 어딘가에 흩어졌거나 이미 사라졌겠지요.”

“그렇구나…….”

내 표정을 본 아키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생각보다 감성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가 찾은 기록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군요. 사라지는 글씨는, 마법사들의 천국으로 가는 것일 거라고요.”

“마법사들의 천국이 뭔데요?”

그가 짧게 말했다.

“아카식 레코드.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있는 곳입니다. 마법사들이 가길 원하는 존재이자, 신들의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이죠. 전설에 가까운 곳이지만요. 그곳은 모든 세상의 규칙을 초월한다고 하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절대적 규칙을 가진 곳이라 합니다.”

“……고대 마법사들의 종교 같은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마법사들은 죽어 그곳에 가, 자신의 지식도 그 안에 기록되길 바랐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의 일부가 되길 바란 거죠. 그리고 가장 경지에 오른 마법사는 신들의 도서관을 가지게 되어, 신적인 존재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

“때로 죽음을 목전에 둔 마법사들은 살아생전 적을 수 없었던 고백을 이 책에 적어 넣었죠.”

아키스는 책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그는 그밖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언어요? 이 책에 적은 내용이 고대어로 변하기도 한다고요?”

“이 책의 소유자는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 마도구에 자신이 할 줄 아는 고대어를 설정해 놓았죠. 그러면 타인이 보낸 글귀가 자동으로 고대어로 바뀌어 수록되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제국어와 고대어를 똑같이 했다 하니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럼 이것도 고대어 책으로 분류되는 셈인가?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이 책은 백지니까.”

“……으응, 고대어는 좀 그러니까요. 그건 불법이니까.”

나는 고대 마법사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순간 내 일기장을 떠올렸다. 어차피 내가 사라진다면 내가 평생을 걸쳐 쓴 일기가 이 안에 남았으면 한다.

아무도 읽지 못한다 해도, 이 세계 어딘가에 내가 적은 문자들이 떠돌아다닌다 생각하면 기쁠 것 같다. 어쩌면 그 …… 도서관이라는 곳에 기록될지도 모르고.

나는 일기장이 없었다면 미쳐 버렸을 것이다. 속내 터놓을 사람 한 명 없는 그 미친 시골 영지에서 나는 이 일기장을 대화 상대 삼아 제정신을 유지했다.

“내 일기장 내용을 이 안에 적고 싶어요. 하지만 내 일기장은 여러 권이라서.”

“알아요. 일곱 권이나 되죠. 그걸 늘 소중히 여기는 걸 봤습니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직접 쓰지 않아도 책에 글귀를 옮길 방법이 있습니다. 마법을 사용해 글자를 옮기면 됩니다.”

나는 미소 짓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지 모르겠는데요, 그럼 내가 옮겨 놓은 일기장 내용이 이 책 안에 우연히 떠오를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일도 있다 했잖아요.”

“맞아요. 잘 이해했군요.”

나는 괜히 심장이 아리고 아팠다.

“만일.”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만일 내 일기장 내용이 이 안에 무작위로 떠오르면 그땐 읽어도 좋아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아키스는 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괜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사라져도 내 일기장의 기록은 남는다면, 어쩌면 이 세상이 달의 여신의 가르침대로 윤회하는 것이라면, 다음 세상의 나나 아키스가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이 일기장을 볼 수도 있을까?

그러면 좋겠다.

아키스는 내 일기장들을 모아 붉은 책 위에 쌓아 놓았다.

그가 작은 주문을 외우자, 빛이 책들을 감쌌다. 나는 글자가 스며들어 가는 과정을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4월 19일」

다음 세상이 온다 해도 아키스와 내가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다음 세상에도 보통 비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날 테니까.

현실적으로 내가 그의 각인자가 되어 대신 죽는다는 이 상황이 아니면, 그는 나와 평생 옷깃 한 번 스칠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5월 1일」

잠이 더 많아졌다.

“장기 마법의 부작용이 잠이 많아지는 것으로 나타나다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끔찍한 고통이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거든요.”

아키스는 약속을 반만 지켰다.

그는 나를 1년이나 살게 해 주진 못할 것 같았다. 의사들이 수군거리는 걸 보면 안다. 대신 고통만은 겪지 않게 해 주었다.

“미안하다, 이것밖에 못해 줘서.”

“뭐가 미안해. 잘해 줬잖아요. 고마워.”

어제는 휘멘이 우는 모습을 보았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 나는 괜히 그를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오늘, 열흘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기장은 페니가 대필해 주고 있다. 이것도 자주 부탁할 순 없다. 페니가 일기장을 대필해 주다 울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길 기록들이 있어서 일기를 쓸 수밖에 없어. 미안해, 페니.

(글자를 지운 흔적)

결론은, 아키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내가 죽은 후, 일기장이 흘러 흘러 그가 가진 책에 떠오르면 오해할까 봐 오늘 자 일기를 적는다.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어차피 그가 없으면 더 비참하게 죽을 몸이었다.

항상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남이 잘되길 바란 적이 없다. 지금은 내가 그의 각인자로 선택되어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죽기 전에 만난 사람들을 돕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이렇게 부조리하면서도 서로를 지탱해 나가는 것인가 보다.

어쨌든 나는 페니도 좋아하고, 그 남자도 좋아하니까. 아, 휘멘도 좋다.

그러니까, 죽기 전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게 돼서 다행이다.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들의 생각을 하며 죽을 테니. 예전보다는 훨씬 낫다.

「5월 2일」

이틀이나 의식이 멀쩡했다.

내가 잠들지 않자 아키스는 줄곧 내 옆에 있었다. 그는 두 시간의 쪽잠을 잤다. 그가 3일 만에 처음 자는 것이라 했다.

숨만 쉬어도 힘이 없었다. 아키스는 그날 밤 내게 청혼했다.

“나와 결혼해 줘요.”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말을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리튼에서 결혼해요. 아주 화려한 결혼식을 해요.”

리튼은 첫 지진이 온 날, 수도 중심부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다.

그곳은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한 지대였기에 엄청난 가격의 집들이 무너져 경제 가치 손실이 막대하다 했다. 첫 지진이 일어난 며칠 후 신문에서 읽었다.

“알겠죠? 그리고 웨딩드레스도 맞춰 줘요.”

나는 그가 우스워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어떤 걸로?”

“역시 모이라의 드레스죠. 잡지에서 자주 봤거든요.”

물론,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그 여자는 수도가 무너지고 우울증에 걸려 가게를 접었다 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모두 원 없이 고르게 해 주죠. 그러니 정말로 결혼해요.”

“다음에요.”

아주 멀리, 다음 세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왠지 이 일이 해결될 것만 같다.

대단한 사람이니까. 나 죽은 후에 알아서 하겠지, 뭐.

아니면, 최소한 드래곤이 그에게 다른 신부를 내려 주지 않겠는가. 다음 여인이 생긴다면 그 여자가 아키스의 병을 옮겨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는 다시 수명이 연장될 거고.

‘나 다음 여자한텐 청혼 안 했으면 좋겠다.’

청혼은 나만으로 끝나길 바라는 건 이기심일까.

그는 몇 번을 더 청혼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나는 내친김에 이것저것 주문했다. 내가 꿈꾸는 일상에 대해서. 내가 동경하던 인생에 대해서.

“매일매일 아름답게 관리 받게 해 주고 비단 침대에서 자게 해 줘요. 공작가에서 마나님 생활하게 해 줘요.”

“그리고?”

“결혼하면 나만 좋아해야 해요. 절대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면 안 돼. 그럼 죽일 거야.”

나는 사실 진심으로 날 사랑해 달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까지 솔직해질 수 없었다. 지금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날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감상적이 되어서인지 모르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아마 후자일 거다.

어차피 다음 세상 같은 건 없을 텐데, 나는 그 뒤에도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보석도 사 주고, 또…… 같이 여행도 가 주고 소풍도 가 주고, 또…….”

사실은 아침저녁으로 사랑한단 말을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리튼의 아름다운 바다 ―하지만 정작 바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아래를 걸으며 사랑을 고백해 달라 하고 싶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리튼의 밤바다에서 청혼 받는 여주인공 이야기는 백번도 넘게 읽었다.

해 줄 리가 없지만. 그럴 거면 어차피 사 주지 않을 보석을 말하는 것이 더 쉬웠다.

기약 없는 다음 세상의 약속이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그런 다음도 없이 떠나기엔 먼 길이 너무 두려웠다.

바보 같지만, 이 남자가 좋았다. 그게 위안이 되었다.

“그것도 괜찮군요.”

종내에는 그도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다 약속하죠.”

그가 속삭였다.

“전부, 다.”

“믿어 보죠.”

“믿어도 될 겁니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라.”

그가 점잖게 말했다.

「5월 10일」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 아키스와 나와 혼인하는 걸 포기한 것 정도.

“다음 세상에 결혼해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럽시다.”

아키스는 나직이 나를 보며 속삭였다.

“다음 세상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평범한 남자로 태어나겠습니다. 그때는 평범한 부부가 되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요.”

“…….”

“그때는, 내가 이 모든 걸 보상하고…… 그리고, 당신을…….”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마 이제는, 다시는 일기를 쓰지 못할 것 같다. 잠에 드는 날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휘멘한테 좀 정착해 살라고 전해 줘요. 그리고, 나 죽으면 일기는 다 태워 달라고 페니에게 전해 줘요. 직접 해야 한다고 전해 주고요.”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표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정말 끝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리 두렵진 않다.

이제,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