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진짜 이상하군.”
황태자는 정말 기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잘못되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공작이 너무 그에게 상냥하게 행동하고 있어 문제였다.
‘아니, 아키스가 먼저 스틸본 숲에 사냥을 가자고 청하다니…….’
사냥을 위해 가기엔 스틸본 숲만 한 곳이 없긴 했다. 그곳은 황가의 사람들 외에 감히 접근도 할 수 없는 곳인 데다 희귀한 사냥감들이 즐비했다.
원래라면 1년에 단 한 번 사냥하는 것이 규칙이었으나, 황태자는 아주 가끔 편법으로 사냥을 하러 가곤 했다. 아주 적은 사냥감 정도는 슬쩍 잡아도 되었다.
‘거기다 이 비밀스런 사냥에 흑마법사도 참여한다고?’
최소한의 식솔만 데리고 조용히 사냥을 하러 가고 싶다. 흑마법사 휘멘도 이전에 가당치 않은 멸망론을 발표한 사실을 크게 반성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마스터들과 황가 사이의 친교를 다지고 싶다. 조용한 자리에서 긴밀하게 나눌 이야기도 있다.
이게 아키스가 보낸 쪽지의 내용이었다.
‘공작의 부름을 거절할 순 없지. 그런데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공작가와의 사이를 공고하게 하는 건 더없이 중요하다. 황후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온 말이다.
결국 황태자는 찜찜한 기분을 정리하고 행장을 꾸렸다.
* * *
공작가의 식솔들은 이미 귀빈용 천막을 치고 미리 사냥 준비를 해 두었다. 아키스는 없었고, 공작가의 식솔들과 함께 휘멘이 황태자를 맞이해 주었다.
“아니, 휘멘. 그대가 정말로 있을 줄은 몰랐군.”
“예전엔 실례했습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진솔한 이야기도 별로 나누지 못했군요.”
정말 아키스의 말대로 휘멘은 한층 고분해져 있었다. 아키스가 휘멘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황태자는 씨익 웃었다.
“아니네. 모처럼인데 뜻깊은 시간을 가져 보지. 이제 슬슬 그대도 작위도 승계하고 번듯한 자리도 가져야 하지 않겠나?”
“그건 오늘 사냥이 끝나고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아키스 녀석은 성질이 워낙 급해 숲속에서 먼저 사냥을 하고 있겠다 합니다.”
휘멘은 황태자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발판도 없이 말에 휙 올라타 활을 맨 채 숲속으로 향했다.
“너희들은 뒤에서 따라와라.”
황태자가 빠르게 말했다.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몰아 휘멘을 따라갔다.
휘멘은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황태자의 말이 숨차할 무렵, 한참을 달려 그들은 숲 중간의 공터에 멈춰 섰다. 황태자는 기사들이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 추호도 의심치 않으며 말에서 내렸다.
“여기 아키스가 있다고?”
휘멘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했습니다.”
휘멘은 말을 매어 두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황태자는 눈을 의심했다.
숲의 중간에는 천 년은 되었을 것 같은 큰 아름드리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 곱게 준비된 흰 천 테이블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앞에 뜻밖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작 부인, 루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루나가 싱긋 웃었다.
그때,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났다. 아키스가 숲속에서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황태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루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키스, 호위 기사들은 다 처리했나요?”
“아아. 다들 숲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잠시 기사들을 물렸어요. 오래 끌지 않을 터이니 앉으세요. 너무 중요한 이야기라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또, 이 숲이 가장 안전했거든요. 건물이 있는 곳들은 시범을 보이기에 적절치 않아서.”
“……시범?”
황태자의 머릿속에 큰 물음표가 떠올랐다. 루나는 눈짓으로 재차 자리를 권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이지?’
황태자는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는 경계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루나는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휘멘과 아키스도 마주 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키스? 그리고 휘멘까지…….”
휘멘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 우리가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
“그것도 집단으로.”
오늘도 아찔한 휘멘의 주둥이는 루나를 경악하게 했다. 루나는 정색하고 덧붙였다.
“휘멘, 그게 아니죠. 우리가 어떻게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야죠!”
“……둘 다 틀렸습니다. 일단 반역자라는 것부터 선언하고 설명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
아키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황태자를 보며 툭 던졌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황태자는 머리가 아찔했다.
“할 농담이 따로 있지, 나를 우롱하는 건가? 이게 무슨 수작들인지…….”
“황가의 진실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진짜 황가 말이에요. 여왕의 황가 말이죠.”
루나가 황태자의 눈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하께서 어디까지 아시는지 모르지만, 제국의 전신이 된 고대 왕국에는 따로 황가 혈통이 있었지요. 카리노 대왕은 그 찬탈자였고요. 표정을 보아하니 아시는 것 같네요.”
황태자도 들어 알았다.
에리스 탄압과, 황권에 대한 진실을.
그 진실은, 황가의 직속 후계자들 사이에서만 전해졌다.
<에리스의 후계자가 나타나면 황가는 황가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가 황태자가 되고나서 황가 소속의 신관을 통해 들은 진실이었다. 황태자의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 자네들이…….”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키스가 황태자의 손을 꽉 쥐었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십시오, 전하. 금방 끝날 터이니.”
그가 속삭였다. 황태자의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황태자가 빠르게 말했다.
“만일 황가의 정당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해도, 이미 구황가의 혈통은 끊겼을 거네. 살아 있다 해도 천민이 되었거나 이 제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있겠지. 피가 희석되어 더 이상 황가도 아닐 거란 말이네. 진짜 황가의 사람을 데려오지 않는 한, 황위 반환은 일어날 수 없어.”
루나는 황태자의 윽박지르는 듯한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데요.”
“……뭐?”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어, 저도 의도한 건 아녜요. 제가 그 황가의 후계자인 것 같아서요…….”
“…….”
황태자는 눈과 귀를 의심하며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조금 민망한 듯 수줍게 눈을 깜빡였다.
“루나, 보여 주세요.”
아키스가 더없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싸늘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황태자는 이게 뭔가 싶어 루나와 아키스, 휘멘을 한 번씩 돌아보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가져 보면 어떨까?”
“루나, 괜찮아요. 원래 처음엔 다 그렇습니다.”
거기다 아키스와 휘멘은 도리어 루나의 눈치를 보며 격려하는 것이다.
황태자는 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루나는 살짝 붉어진 뺨을 하고 둘을 보았다.
“잠깐, 조용히. 격려는 좋은데 그거 도움 안 된다니까요. 좀 기다려 봐요.”
아키스와 휘멘은 모두 어린 시절 마법사들의 이공간을 열어 그걸 자유자재로 조정한 천재들이었다.
듣기로 이 방을 여닫고 조종하는 게 초보 마법사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라는데, 워낙 타고난 천재들인 그들은 왜 자유자재로 문을 여는 것이 안 되는지 종종 이해를 못해서 루나의 혈압을 올리곤 했다.
‘내가 모든 종류의 고대어 못 읽는 사람은 왜 그러나 몰라 이러면 좋아요?’
루나는 그때마다 그들에게 일침을 가했는데, 그럼 그들은 꿀 먹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키스와 휘멘은 앞다퉈 루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는 편하게 해 주려고…….”
“그럼요, 당신 말이 다 옳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의 여유 있는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루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켜봐요.”
그 순간이었다.
‘뭐지?’
황태자는 루나의 왼쪽 팔목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나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자신이 환상을 본 건가 했다. 다음 순간, 눈앞이 흔들렸다.
쿠쿵.
나무가 흔들리며 새들이 날아갔고, 찻잔이 덜걱거렸다. 황태자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지진인가?”
루나는 약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일으킨 지진이에요. 우리 주변으로 50미터 정도를 범위로 해서 작은 지진을 일으켰죠. 안심하세요. 동물 한 마리도 다치지 않도록 조절했으니까요.”
황태자는 입을 떡 벌렸다.
“고, 공작 부인이 마법사라고?”
“아뇨, 마법사가 아니라…….”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 나라의 적법한 황가의 후계자라는 증거를 보여 드린 거예요.”
“…….”
“안 믿으시는 것 같길래.”
루나의 태평한 말이 황태자의 고막을 때렸다.
“그게 무슨…….”
루나는 싱긋 웃었다.
“이 나라의 적법한 황가의 사람들에게만 발현한다는, 결계의 ‘관리자’의 재능이죠. 정확한 호칭은 인간의 로드입니다.”
그의 앞으로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읽어 보세요.”
황태자는 빠르게 눈으로 글씨를 훑었다. 서류 제목은 이러했다.
[소송장
–제국 황가의 황위 반환 소송.]
황태자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는 건 순간이었다.
이어, 휘멘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것도 읽어 보십쇼. 이 나라의 진실에 대한 게 모두 적혀 있으니. 아, 그리고 앞으로 1년 안에 발표할 겁니다. 결계 때문에 8년 후 제국이 망한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근거 첨언 부분엔 나도 함께했으니 논문의 규모가 커질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모두 진실이라는 거겠지요.”
아키스가 나직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야!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셈인가?”
황태자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가 믿을 겁니다. 이번엔 증거가 있으니까요.”
아키스는 나직이 말했다.
“그게 무슨…….”
“에리스의 가문, 진짜 황가에서는 대대로 결계의 ‘로드’가 배출되었지요. 그리고 루나는 일곱 가지 언어를 모두 할 줄 알아, 이종족에게 선출된 ‘로드’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이는 그녀가 황가의 피를 이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건 소송 자료가 될 겁니다.”
“지, 지금……. 공작 부인을 제국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건가?”
“사실, 자신은 없지만 정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루나는 책방에서 손님들을 상대할 때의 ‘루’처럼 천연덕스럽고 능글맞게 말했다.
황태자는 손이 떨리는 일을 경험했다.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죽을 뻔했을 때도 떨려 본 적 없는 몸이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안심하세요.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니까. 꼭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녜요.”
황태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아키스를 보았다.
“아키스, 공작 부인이 없는데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지. 자네도 공작 부인이라면 진심으로 귀애하지 않나. 이런 일에 부인이 끼어드는 건 위험하지 않겠나? 이 일을 덮어 주면 황가가 공작가에 뭘 해 줄 수 있나 긴밀히 의논할 수 있을 거야. 일단…….”
황태자는 아직 상황 파악을 완벽히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곱디고운 귀부인인 루나가 이 일을 계획했을 것이라 생각도 못하고, 이 일의 뒤에는 아키스가 있다 믿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결국 휘멘이 말을 툭 끊었다.
“이 여자가 리더인데요.”
“…….”
황태자는 침묵했다.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이 자리를 만든 것이 그녀라서 말입니다. 우린 이 일에는 철저히 그녀의 뜻을 따르죠.”
“……그러니까, 공작가에서 공작 부인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 제국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 반대라면 모를까.”
“…….”
황태자는 식은땀이 흐르는 등을 느끼며 딱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루나를 응시했다.
“……요구 조건을 말해 보세요, 공작 부인.”
루나는 싱긋 웃으며 두 번째 종이를 내밀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선택권을 가지고 계세요. 전 황가를 상대로 반드시 소송을 걸 겁니다. 다만, 두 가지 중 어떤 소송을 받아들이실지 미리 선택하실 수 있어요.”
황태자의 눈이 떨렸다.
그는 루나가 내민 두 번째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는 침통한 소리를 내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제국의 법을 바꿀 셈이군요. 공작 부인.”
“맞아요.”
“하지만 여인의 고대어를 금지하는 법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겁니다. 악법도 법입니다. 어떤 법이든 한순간에 바뀌면 민중들이 혼란에 빠지는 법이지요.”
황태자는 태세 변환이 빨랐다.
그는 루나에게 순식간에 예의를 차려 말했다.
“그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주변 사항은 내가 준비할 겁니다. 일은 제가 주도할 거예요.”
“……그럼 내가 할 일은…….”
“받아들이시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
“사회 분위기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월플라워 부인’이 소설의 판도를 바꾸었듯이 말이죠.”
루나가 나긋하게 말했다.
황태자는 입을 떡 벌렸다. 어쩌면 이런 여인이 있단 말인가? 생긴 건 가녀리고 청순한, 그런 여인인데 어쩌면 이렇게 강단이 센지.
채찍 다음은 당근이었다.
루나는 황태자의 식은 찻물을 버리고 새 차를 따라 내밀었다.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건가?”
“네.”
루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고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이 나라에 현 황가는 자리 잡은 지 오래. 만일 내가 정말 황가 반환 소송을 걸면 나라는 파탄에 처하겠지요. 공작가는 황위에 오래도록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고요. 만일 현 황가가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루나는 꿈속의 일기장에서 본 미래를 떠올렸다.
민중들은 비탄에 빠졌고 황가가 몰락한 제국은 비참했다. 덧붙여 코앞으로 다가온 공국과의 전쟁 위험도 있었다. 여러모로,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황가가 그릇된 방법으로 제국의 황위를 찬탈하고 그간 억울하게 많은 여인들이 희생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돌려 받기엔 현 황가는 너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국민들은 현 황가를 지배자로 인식하고 있지요.”
“…….”
“안심하세요. 나는 황위를 잇는 가문이 바뀌기를 원하진 않아요. 다만, 현 황가가 변하기를 원할 뿐예요.”
황태자는 절감했다.
황가의 명줄을 틀어 쥔 이는 공작이 아닌 공작 부인이었다. 황태자는 탄식했다.
“공작, 그대가 왜 공작 부인과 혼인했나 했더니 여기 정답이 있었군. 어떻게 공작 부인의 혈통과 능력을 알아보고 혼인했지?”
“…….”
황태자의 오해에 루나는 순식간에 침묵했다. 아키스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게 아니라 혼전에 둘이 사고 쳐서 결혼한 건데.’
심지어 처음엔 계약 결혼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키스는 잠시 후 대답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사랑하고 보니 그녀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뭐, 반한 건 첫눈에 반한 것 같은데 그게 상황이 애매해서.”
“……아키스, 당신은 정말.”
루나는 살짝 뺨을 붉혔다.
“그럼 정말 우연히, 그대가 공작 부인과 혼인했는데 그 여인이 고대 황가의 피를 이은 여인이었다고?”
“그런 셈입니다.”
아키스가 묵직하게 말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명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내 아내에게 손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공작가와 드래곤을 잃고 싶지 않으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키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공작 부인과 내 생명이 묶여 있단 말입니다. 그녀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미쳐서 제국을 멸망시키려고 들지도 모르니 기억해 두십시오.”
황태자는 모든 전말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하얘졌다 파래졌다, 이내 흥분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운명이란 거군.”
황태자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공작 부인은 이제 철옹성의 위치에 올라갔다. 황가에서는 공작이 필요하니 공작 부인에게 손 하나 대지 못하지만, 공작 부인은 황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상황을 만들 수 있나?”
“네. 있어요. 그러니, 때가 오면 귀족들을 설득해 주세요. 약속을 지킬 것을 기대하겠어요.”
루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그들이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비밀스런 조약문이었다.
“그래, 황권을 지키는 대가로 이 정도면 싼 편이지.”
“알아주셔서 기쁘군요.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거예요.”
그리하여, 루나는 결국 터무니없게도 이 반역자 무리에 조력자로 황태자를 합류시키고야 말았다.
“앞으로를 기대해 주세요.”
루나가 속살대듯 말했다.
“하…….”
황태자는 자포자기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어깨를 으쓱했다.
* * *
황태자와의 대담을 끝낸 루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동부에 볼일이 남아 있었다.
“그럼, 대담도 잘 끝났으니 나는 수도에서 기다리지. 결계의 수리 작업을 시작하면 바로 달려올 테니 연통 보내 달라고.”
“곧 봐요. 휘멘.”
루나는 휘멘을 먼저 보내고 아키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다시 한번 동부 신전으로 향했다.
* * *
며칠 전.
여행의 마지막에 아키스와 루나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완성시키기 위해 단둘이 동부 신전으로 갔다.
밤늦게 도착해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바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동부 신전은 아름다운 곳이군. 하지만 청빈한 곳이야.’
루나와 같이 장기 기도를 하러 온 귀부인들을 위한 신전의 방들은 별채 형식으로 숲 속에 있었다.
숲 중간에는 아주 작은 샘이 있었는데, 아주 마력이 강한 샘이라 했다.
루나는 아키스가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샘가를 산책했다. 그러다 그녀는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흐흑……. 흑……. 흑…….”
처음엔 제가 무언가를 헛들었나 했다. 루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쟁반을 든 채 밖으로 걸어 나오던 한 여신관과 마주쳤다. 그때 루나는 드레스 차림에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나를 알아본 신관이 무릎을 굽혔다.
“공작 부인. 이 앞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유폐 구역이지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셨는지…….”
“우는 소리가 들리기에 쫓아왔더니 여기까지 왔네요.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그녀는 조심스레 루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 앞에는 죄인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본디 귀한 신분의 죄인이라 가혹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죄인? 신전에 죄인이 있다니요?”
“그분께서 여죄수라 그렇습니다.”
“설마…….”
루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죄인의 이름이 뭐죠?”
“그분은…… 체스터 후작 부인입니다. 공작 부인.”
여신관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루나는 탄식하고 싶었다.
‘맞아……. 체스터 후작 부인. 고대어를 배운 혐의로 잡힌 그녀가 수감된 곳이 동부의 신전이라 했어. 앞에는 대신전이, 대신전 주변의 별관들을 지나 샘 너머로 유폐된 신전이 있는 거구나.’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알겠어요. 산책이나 좀 하다 갈 테니 당신은 물러가세요. 그냥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어 그래요.”
신관은 루나를 힐끔거리며 고민하다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공작 부인이 혼자 있고 싶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루나는 울음소리를 쫓아 서서히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루나는 폐신전의 한 창살이 쳐진 창문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루나가 다가가며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야윈 얼굴로 고개를 들어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두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 * *
그것이 체스터 후작 부인과 루나의 첫 만남이었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어둑해질 때야 동부 신전에 도착했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네. 그쪽이 집중되기도 하고. 그거 조심해서 날라요.”
하인들이 루나의 짐을 날랐다. 루나는 머리 모양을 고치고 천천히 폐신전으로 들어섰다.
동부 신전의 대신관은 오래전부터 공작가와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기에 루나가 여기 있다는 거짓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도 협조했던 대신관이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작업을 위해 친히 동부 신전에 아낌없이 로비를 했다. 그 덕분에 신관들은 루나가 체스터 후작 부인에게 향하는 길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
“한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관이 공손하게 말했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숲속으로 들어가, 체스터 후작부인이 갇힌 폐신전으로 향했다. 그녀는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루나가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스터 후작 부인.”
* * *
오래된 신전 방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시종들은 체스터 후작 부인과 루나가 마주 앉은 테이블 위에 타자기를 올려놓았다. 루나는 타자기에 종이를 끼웠다.
체스터 후작 부인은 현재 제국에 ‘고대어 사용 혐의’로 수감된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건은 근 몇 년간 실형 선고를 받은 유일한 사례라 했다.
그녀가 워낙 지체 높은 명문가의 부인이라, 실제 감옥에 수감되는 꼴만은 면했다 했다.
대신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신전에 맡겼다. 그녀는 동부의 오래되고 낡은, 폐건물인 신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체스터 후작 부인은 남편에 의해 고발되어 수감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슬하에는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는데, 둘 다 아직 어리다 했다.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어요.”
“아뇨, 이렇게 다시 와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난 어차피 무기징역이니, 기다림은 이골이 났죠.”
실제로 본 체스터 후작 부인은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꽤 단아한 얼굴이었다. 오랜 시간 햇빛을 보지 않아서인지 피부가 창백했다.
체스터 후작 부인이 운을 띄웠다.
“저도 공작 부인이 출간하신 월플라워 부인을 읽었어요.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그 소설의 어떤 부분이 좋으셨어요?”
“나처럼 당하고 살던 귀부인들에게는 아주 호쾌한 이야기지요. 나 또한 또 한 명의 월플라워 부인이었답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런 나라도 취재하고 싶다면 얼마든 하도록 해요. 내 일을 소재로 쓰고 싶으신 거죠?”
“맞아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절절하고 자극적인 소설을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맘대로 해요. 사람과 대화해 본 것이 오래되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군요. 나와 같은 죄인이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죄인이 아님을 알아요.”
루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네?”
“읽을 줄 모르시죠? 그저 몇 자 끄적이는 법을 배우셨다 들었어요.”
체스터 후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진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달라요.”
루나는 체스터 후작 부인 앞에 늘어놓았던 종이 중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곳에 고대어 글자를 적어 놨어요. 하지만 한번 흘깃 쳐다보시기만 할 뿐, 전혀 뜻을 모르더군요. 만일 이 중에 한 글자라도 알아보셨다면 그리 침착하지 못하셨겠지요.”
“당신…… 어떻게……. 설마.”
“이 글자는 후작 부인의 자녀들의 이름을 음절만 표기하여 일곱 가지 고대어로 적은 거거든요.”
이어, 루나는 그녀의 의문에 화답하듯 눌러 말했다.
“맞아요. 난 정말로 읽을 줄 알거든요.”
“아아, 세상에…….”
체스터 후작 부인은 깜짝 놀랐다.
“절대로 들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저와 달리 진짜 읽을 줄 안다면 화형까지 갈지도 몰라요. 부인께서 에리스의 현신으로 몰릴 거라고요.”
루나는 끝까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 둘 중 누구도 죄인이 아니에요. 난, 당신을 도우러 왔어요.”
“날, 돕는다고요?”
“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꺼내 주기 위해 왔어요.”
루나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후작 부인의 얼굴에 희망이 샘솟았다.
“정말로요? 아무리 당신께서 공작 부인이라도 법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라고 뾰족한 수가…….”
“모르는 일이죠. 내가 법을 어기게 될지, 아닐지.”
수수께끼 같은 루나의 말에 체스터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이전에 잠시 마주쳤을 때 말씀드린 대로 당신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필요해요. 아주 자세한, 그런 사연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이건 함정이 아닐까?’
이 여자를 믿어도 될까? 그러나 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는가. 그녀는 더 잃을 것이 없었다.
“여기서 나가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날 여기 처박은 남편의 얼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거든요.”
체스터 후작 부인은 루나에게 자신이 살아온 나날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자라 온 자작 가문의 모습, 그리고 그 근처의 아름다운 광경들과 남편을 만난 일,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일까지…….
루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는 자료를 모으듯 타이핑했다.
그리고 루나가 느낀 점은 그것이었다. 역시 사람 이야기는 들어 봐야 안다는 것.
“……그래서 부군이, 그러니까 체스터 후작이 당신의 옛 친구를 내연남으로 의심해 당신을 고발했다는 건가요? 거기다, 그 지목당한 내연남으로 의심 받은 남자는 당신의 첫사랑이었고요?”
“맞아요.”
“……하, 세상에.”
체스터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웠다.
그녀는 혼전에 알고 지내던, 소위 첫사랑 격이던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가 다름 아닌 번역가였다.
“처음부터 사랑 없는 결혼이었죠. 제국의 수많은 부부들이 사랑하지 않고 따로 애인을 둬요…… 남편도 그랬죠.”
정략혼인 만큼 남편과 그녀 사이에는 조금도 사랑이 없었다. 결혼하고도 정을 붙이지 못하던 남편은 금방 애인을 만들었다.
체스터 후작 부인이 남편을 사랑하지 않기에 참을 만은 했다. 그러나 마음이 쓸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첫사랑과 재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번역가였어요. 하급 귀족 집안 출신 영식이었죠. 물려받을 작위도 없었고요.”
“실례지만, 후작 부인. 그 남자와…….”
“뒷조사를 해 봐도 좋아요. 솔직히 말해, 그래요. 남편은 대놓고 애인을 두고 다녔고, 나도 바람을 피울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몇 번 만났죠. 그 사람의 작업실에서요. 거기엔 고대어 책들이 즐비했죠. 그 남자는 내게 몇 글자를 가르쳐 주었어요. 서로 연락할 때 쓰는 암호로 삼자며 말이죠. 그리고 그걸 들켰어요.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남편이 주장하는 대로 진짜 ‘불륜’을 저지르기도 전에 나는 마녀로 몰렸죠.”
당시 체스터 후작 부인이 실형을 받은 배경은, 그녀가 직접 고대어 글자를 쓴 편지가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더 질척한 진실이라고 할까. 루나는 침통한 소리를 냈다.
“……사적인 문제를 법을 이용해 당신을 옭아맸군요.”
“네, 덕분에 남편은 내가 가져온 수많은 지참금들을 독점하고 지금은 내연녀를 후처로 들여 잘살고 있다고 하죠. 아주 지저분한 진실이지요? 그게 다예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했다.
결계에 쳐진 카리노 대왕의 마법은 아직 작동하고 있었다. 여인에게 고대어 능력자가 발현하지 않게 만드는 마법 말이다.
그러니, 체스터 후작 부인이 진짜 제대로 고대어를 알 리 없다. 그녀가 염문을 일으킬 뻔한 사내가 번역가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손쉽게 그녀를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실에서는 유명무실한 법이라도 본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인은 절대 고대어를 할 줄 알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희생양, 본보기.
“……아까 날 보고 소설가라 했나요?”
루나는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공작 부인이 익명으로 소설을 쓰시는…… 그러니까, 작가 레드 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식사를 날라 주는 여신관이 가끔 소문을 물어다 주거든요.”
“틀렸어요. 난 유능한 소설가를 데리고 있죠. 난 편집자고요. 그리고 그 소설가가 이번엔 당신 이야기를 소설로 써 줄 거예요. 그리고 여론을 바꾸기 시작할 거고요.”
“……정말로요? 진심이에요?”
“물론이죠. 그렇지만 괜찮겠어요? 내밀한 가정사나, 자극적인 이야기로 탈바꿈되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첫사랑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각색될 거고요.”
“……이런 지저분한 치정 문제가 이야깃거리가 된다고요?”
체스터 후작 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지저분한 치정 문제가 아니라, 복잡하고 뜨거운 열애사지요. 우리 독자들은 항상 그런 것에 열광하고요.”
“소설 출간으로 내가 정말 출소할 수 있다 보나요?”
“네. 난 어떤 방식을 써서든 당신을 여기서 내보낼 거예요. 기다려 줘요.”
체스터 후작 부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루나를 보고 결연히 말했다.
“난 내 속옷 색깔까지 세상에 드러내 보일 자신이 되어 있어요.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모두에게 알려 줘요. 그 결과 사형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거든요.”
“그 말을 기다렸어요.”
루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열애사라뇨? 그 번역가에 대한 건 그냥 불장난이었는데. 진짜로 끝까지 간 사이도 아니었다니까요? 그 뒤 별별 일을 겪으면서 남자고 뭐고 다 정 떨어졌다고요.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이해해요. 장난이었다지만 당신에게 고대어를 가르치다니, 조심성 없는 남자네요. 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필수적이거든요. 이제, 당신의 첫사랑은 아주 달콤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아, 남주인공은 대배우 테세스 남작을 닮았다는 설정이 좋겠어요. 그게 잘 먹히거든요.”
“네?”
체스터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 * *
체스터 후작 부인과의 대화가 끝났으니 이제 중요한 건 작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루나는 붉은 책을 꺼냈다.
<안녕.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은데…….>
<드디어 그 지긋지긋하고 재미없는 ‘에리스 이야기’ 말고 다른 소설을 원하는 건가요? 좋아요.>
간만에 요청하는 루나에 책은 반색했다. 루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아냐, 역시 됐어. 고대 소설은 좀…… 질린다고 할까.>
<뭐라고요?>
책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대번에 대답했다.
루나는 글자가 떠오르는 걸 보며 눈웃음을 짙게 했다.
<하지만 현대 소설을 보고 싶은 날도 있는데, 네가 보여 주는 소설은 모두 배경이 고대라서 한계가 있지 않니?>
루나는 그렇게 적어 놓고 속으로 미안, 하고 사과했다.
루나는 작가 레드의 편집자이자 열렬한 팬이었기에, 사실은 붉은 책이 보여 주는 소설들을 엄청나게 좋아했기 때문이다.
<으음, 현대 소설은 역시 네게 무리겠지? 안 되는 걸까?>
<내 안에 수록된 소설은 개수에 한계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 소설들은 모두 1만 개 이상의 역사적 사건과 소설적 기록들에 의한 창조입니다. 그 안에 고대 외의 배경은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원하던 대답이었다.
루나는 조급하지 않게 글씨를 적어 넣었다.
<재미있는 사건이 있는데, 한번 새로 써 보지 않을래? 현대 배경으로 말이야. 자료만 입력되면 가능한 것이 아닌가?>
<…….>
<설마 그런 기능은 없는 것이 아니겠지? 아아, 나의 정서적 함양과 감성 고취에 너는 정말 필수적인 존재라, 너무 아깝다. 세상 사람들 모두 작가 레드의 신작 소설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한번 해 보죠.>
책이 말했다.
루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기뻐서였다.
<일단 영감이 될 만한 사건을 한번 입력해 볼게. 작가 레드의 신작 현대 소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까?>
<어서 입력해 주세요.>
루나에게 이제 책을 다루는 방법쯤은 너무 쉬웠다. 그녀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책에 첫 줄을 적어 넣었다.
<실화 사건― 란샤 드 체스터 후작 부인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1개월 후.
제국 역사에 획을 그을 소설이 발표된다.
* * *
루나는 마지막으로 체스터 후작 부인의 집안에 대해 아주 낱낱이 조사했다.
그 결과, 체스터 후작 부인은 그녀에게 조금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 부인을 마녀 혐의로 직접 재판에 넘기고 바로 코르티잔 출신의 내연녀를 집에 맞아들였어? 거기다,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사교 모임 자리에서 쓰러진 적도 있다?’
체스터 후작에 대한 주변의 평판은 정말 끔찍했다. 루나는 체스터 후작 부인이 서슬 퍼런 원한을 가진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루나가 숨겨 둔 대문호, 작가 레드. 마도구인 붉은 책은 순식간에 체스터 후작 부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써 냈다. 물론 실화에 자극적인 양념을 친 건 기본이었다.
매장, 매화 사건이 터지는 건 규방 소설의 기본이다. 루나의 신조였다.
‘이렇게 빨리 완성될 줄이야.’
루나는 붉은 책이 한 장씩 보여 주는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다. 소설은 길지 않은, 한 권짜리였다.
‘만일 붉은 책이 소설을 쓰는 걸 거부했으면 다른 작가들을 기용하려 했지.’
그러나 루나의 예상은 맞았다. 책은 엄청나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건 월플라워 부인만큼 재밌잖아?’
번역가와 체스터 후작 부인의 사랑이야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이 절절했으며, 그녀가 시댁에서 받는 구박은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역시 이 책은…… 뭐랄까, 자극적 이야기의 화신이야.’
읽다가 과몰입한 루나가 혈압이 오를 지경이었다. 재미있는 건 물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2장 주인공을 란샤 드 체스터 후작 부인의 딸로 설정하다니. 천재인가? 계모에게 구박 받는 이 작은 소녀의 모습이 얼마나 불쌍한지…… 다락방에서 소녀가 혼자 기도하면서 가상의 티파티를 하는 장면은 눈물이 다 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루나는 이번에도 책과 편집에 대해 조금 의논했다. 원고가 완성되자 루나는 자신의 홍보 담당자, 페니를 만나러 갔다.
“기다리던 신간 소식이네. 최선을 다할게.”
둘은 신간의 홍보 계획을 의논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사교계에서 공작의 이야기밖에 안 하는 거 알아?”
“무슨 이야기?”
“마정석 광산 말이야. 공작이 그래서 기행을 보인 거구나? 흑마법사와 마정석 광산을 탐색하러 여행을 떠난 거였어. 그 귀하다는 마정석 광산을 다섯 개나 찾아냈다면서? 이번에 황가에 대량의 마정석을 선물하고, 하나는 흑마법사에게 양보했다던데.”
“아,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어?”
“사교계 사람들이 돈 이야기라면 귀를 쫑긋 세우잖니. 공작도 정말 난 사람이야. 이미 부자인 그 가문을 더 부유하게 만들다니. 이러다 이 제국을 사 버리겠어. 황가에서도 기겁하고 있대.”
아키스가 결계의 근원지인 유적이 있는 마정석 매장 장소를 하나하나 구입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후 루나와 같은 결계의 소유 권한을 잇는 자, 그러한 자가 태어날지도 모른다.
아키스와 휘멘이 예상이 맞다면, 그 능력 또한 혈통으로 이어지므로 루나의 후계자격인 아이들이 발현할 가능성이 컸다.
아키스는 그때를 위해 공작가에서 그 부지들을 보유하려 하는 것이다.
‘아키스가 유적이 더 낡지 않도록 보존 마법을 걸고 유적의 구조를 연구해 보겠다 했지.’
마정석을 얻은 건 여정의 덤이었으나, 그 가치가 워낙 어마어마했기에 호사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아키스가 마정석 광산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 거라 믿으면 좋지.’
루나는 작게 웃었다.
‘거기에 황실에 진상한 마정석들은 일종의 로비이자 입막음인데 말이야. 지금부터 내가 할 일에 대한…….’
루나는 페니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그보다 페니, 이번 책은 아주 중요해. 예산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책이 꼭 히트할 수 있도록 온 수도 사방에 이 책을 깔고 싶어. 공격적인 홍보가 가능할까?”
“연달아 두 작품을 대히트한 작가 레드의 작품인걸. 지금이라면 뭘 내도 팔릴걸?”
월플라워 부인이 수도 로맨스 소설계의 판도를 바꿔 버렸고, 후속작인 보석 영애 이야기도 불티나게 팔렸다. 두 작품을 대성공시켰으니, 세 번째 작품은 루나가 낙서집을 내더라도 많이 팔릴 것이 자명했다.
“걱정 마. 최선을 다할게.”
역시 페니였다. 루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 페니. 잘 부탁해. 이번 책은 작가 레드의 작가 인생을 건 작품이거든. 열심히 해 보자.”
* * *
그해 여름에는 사방에서 공작의 이야기를 참 많이도 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공작의 기행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는 매해 초, 그 해의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대해서 좋은 논문을 쓸 것을 장려했다. 작년의 주제는 ‘재생 마법의 역사’였다. 그런데 올해는 이례적인 논문 주제가 선정되었다.
‘에리스 복원 작업’.
아키스가 첫 논문을 발표했다. 논조는 이러했다.
에리스는 고대의 필요악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이나, 마지막에 카리노 대왕과 의견 차이로 갈라졌다.
그러나 카리노 대왕과 갈라져 마녀가 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업적을 세운 인물이며 고대의 빼어난 마스터 중 하나였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녀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것은, 당시 마법사에 대한 민중의 증오 때문이며, 그녀는 희생양이다. 그런 논조였다.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천재인 공작이 구구절절 논리적인 논문을 써 댄 것은 물론, 소실된 고대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내 붙였다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 이런 논문을 발표했다면 사람들은 맹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표한 사람이 공작이었다.
살아 있는 신화. 드래곤을 보유한 가문의 가주, 마법계 역사상 최연소 백마법사 마스터, 천재.
그러니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빼어난 천재인 건 사실이니, 이제 역사 속에서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받아들일 때다.]
아키스의 논문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이어 흑마법사 마스터 휘멘이 비슷한 논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건 한술 더 떴다. 여성 마법사들 전체를 재발굴해야 한다는 논지의 논문이었던 것이다.
“더, 더는 못 참겠소! 이건 헛소리요!”
“여자가 마법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보수적인 학자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아키스와 휘멘은 마스터였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
그중 몇몇은 둘의 말이라면 목숨을 걸 종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 그들의 동료들…….
사실, 아카데미 내에서도 이전부터 온건파는 존재해 왔다. 여성에 대한 마법과 고대어의 탄압이 과하다는 걸 주장하는 부류들이었다.
그들이 뒷받침을 하는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마법계를 기반으로 모든 학계가 시끄러워졌다.
‘에리스는 마녀다.’
지금까지 제국의 모든 학계의 당연한 주지의 사실이자 기반이었다.
“이건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해! 마스터들이 미쳤으니 제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결국 흥분한 보수 학자들은 황궁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그해 가장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평의회와 황가에서 이 사실에 대해 ‘근거 있음’이라 의견을 낸 것이다.
[여인의 고대어 금지법이란 관습법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몇백 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에리스의 후계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아키스가 물고 늘어진 부분은 그것이었다.
제국의 황가에 대한 존경심의 근원인 인물, 카리노 대왕.
그는 에리스와 같은 존재가 태어나지 않게 하는 마법을 펼쳤다 한다. 그리하여 여인에게는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개화하지 않는다 했다.
그럼 그 전능하고 대단한 카리노 대왕의 마법이 있는데 왜 에리스의 후계자가 태어난단 말인가?
[카리노 대왕의 전설은 왜곡되고 거짓된 부분이 없는가?]
만일 있다고 한다면 황가의 근원에 생채기를 내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황가에서는 아래 같은 어딘가 수상쩍은 의견을 내놓았다.
[대신관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다. 카리노 대왕은 정말 에리스의 후계자가 태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에리스의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는 시점이 되면 마법이 풀릴 것으로 설계해 두셨다. 그분은 너무도 위대하고, 완벽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카리노의 마법은 8년 뒤 세계를 궤멸시킬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사실을 발표하는 것이 루나와 황태자의 거래 내용이었다.
루나의 조건은 법 통과를 위해 뒤에서 힘써 줄 것. 그리고 에리스를 악녀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역사 속 오명을 쓴 천재로 만들기로 했다.
그 대신 루나는 카리노 대왕의 신성성을 훼손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카리노 대왕이 찬탈자라던가, 반역자라는 말을 발표하는 것을 미뤄 주기로 했다는 뜻이다.
공작가와의 긴밀한 관계와 영웅인 카리노 대왕. 그것이 지금의 황가를 신성성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틸본 숲에서의 대담. 루나는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단, 이거 하나는 약속해요. 에리스에 대한 실화 소설, 모든 진실은 우리가 죽고 난 후 발표할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기반을 만드세요. 신화에 기대지 않고도 황가를 존속할 수 있도록.’
그때, 황태자는 가련한 한숨을 쉬다 결국 동의하고 사인했다.
* * *
아무튼 휘멘과 아키스가 떨어뜨린 폭탄으로 수도는 연일 시끄러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수도 여론의 판도를 바꿀 책이 출시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후작 부인의 눈물’이라 했다.
한 아름다운 후작 부인이 가문의 사정 때문에 바람둥이 남편에게 시집와 고생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옛사랑, 고대어 번역가였던 첫 사랑이 그녀를 찾아온다. 예전과는 달리, 그녀를 데려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절세미남인 내연남…….
소설은 몹시도 재미있었다. 자식들과 생이별한 후작 부인의 사연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이번 소설은 짜릿한 불륜 이야기군요. 재미있어요.”
“월플라워 부인의 비극 버전인가? 아이들이 엄마를 찾으면서 우는 장면에는 좀 찔끔했어요. 어쩌면 아이들이 그렇게 영민한지. 이튿날부터 엄마가 없다는 걸 알고는 웃는 모습만 보여 주려 노력했잖아요. 웃는 얼굴로 엄마한테 기억되고 싶다던가?”
“그런데 말이에요.”
독서 토론회에서 대화를 나누던 여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아요?”
“……나도, 그 생각을 했어요.”
* * *
제국 최고의 인기 소설가가 만든 파급은 엄청났다.
“진짜로 에리스 법이 의미가 없는 법이었다면 체스터 후작 부인은 뭐야?”
“내가 체스터 후작의 친구의 지인하고 아는 사이인데, 내연녀가 대놓고 마님 행세를 했대. 체스터 후작은 부인과 잠자리를 한 적도 거의 없다지 뭐야. 아이를 낳았으니 이제 필요 없다며 후작 부인을 찾지도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잡혀가야 할 놈은 남편 아냐?”
사교계에는 원래 지인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던 체스터 후작 부인의 친구였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다행히, 모두 후작 부인을 동정하고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지인들이었다.
“이야기 속의 번역가는 대배우 테세스를 닮은 미남자라며?”
“아냐. 이번 모델도 공작님이라 했어.”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민중을 바꾸는 건 감성이다.
책이 루나에게 준 가르침이었다. 이 이야기가 ‘체스터 후작 부인을 모델로 한 실화 소설이다’라는 것이 밝혀지자 책의 판매량이 미친 듯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서서히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출간 후 회의에서 페니는 루나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너, 혹시 천재니?”
“응?”
“어떻게 뜨거운 감자인 체스터 후작 부인 사건을 건드릴 생각을 했어? 에리스 법으로 사회가 시끄러운데 지금 이런 소설을 들고 나오다니. 이건 팔릴 수밖에 없잖아. 거기다 소설 내용은 어찌나 절절하게 재미있던지……. 세상 사람들이 다 체스터 후작과 황실을 욕해. 그녀는 이미 무고한 죄인이 되어 있다고.”
루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미소 지었다.
“그게 아냐, 페니.”
“뭐?”
“내가 이 이야기를 들고 왔기에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이거든.”
페니는 무슨 말을 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내가 도대체 어떤 여자랑 친구가 되어 버린 건지…….’
평소의 루나는 아이처럼 순진해서 페니에게 보살펴 줘야 할 존재 같았다. 그러나 아주 가끔, 루나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루나가 이상하게 거대한 존재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애라니까. 이럴 때 보면 공작과 꼭 닮았어.’
그런 페니의 속을 모르는 루나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 * *
소설 출간 후, 대중들은 체스터 후작부인을 동정하며 공감하고 그녀의 편을 들었다.
‘억울한 피해자를 해방하라!’
‘이건 황가의 실책이야!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돌려보내 줘요!’
불륜, 스캔들, 미혼 남녀 정분 이상으로 제국민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가족애였다.
제국의 귀족 가문사이의 끈끈한 가족애나 형제애는 동경과 존중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례에 쉽게 공감했다.
심지어 일부 남자들마저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몰려 –어느새 사람들은 체스터 후작 부인이 무조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주장하기 시작했다- 잡혀간 후작 부인의 사례에 십분 공감하여 황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루나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뜨거운 반응에 아연실색했다.
붉은 책은 이렇게 코멘트 했다.
<사람 개개인의 마음은 깊고 복잡한 물 같은 것이지만, 이것이 군중이 되면 다릅니다.
군중들의 마음이란 고요한 끓는점 같아서, 단 한 번 차가운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금세 달아오르죠.>
책이 필담을 통해 이어서 말했다.
<나쁜 쪽으로 달아오르기도 하지만만, 동정심이나 공감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지요. 이번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 같군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책을 덮었다.
책의 말이 맞았다.
가엾은 사연에 눈물로 자식들을 그리는 후작 부인. 이런 재료는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 충분했다.
‘애초에 체스터 후작 부인의 수감이 위법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진짜로 고대어를 하는 것도 아니라잖아요.’
사람들은 소곤대기 시작했다.
새로운 쟁점이 대두되었다. 체스터 후작 부인이 정말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지 새로운 감정을 해 보자는 주장이었다. 이전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주장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여자가 고대어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바로 체포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었다.
<후작 부인이 정말 마녀인지 재검증하자.>
결국, 체스터 후작 부인은 아카데미 고대어 연구 교수들의 입회 아래 엄격한 시험을 보았고, 그녀가 진짜로 고대어를 읽을 줄은 모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법적 공방이 벌어졌다.
‘고대어에 대해 자각한 여인만 처벌한다, 혹은 접근한 모든 여인이 처벌받아야 한다. 이는 위헌인가 아닌가.’
어느새 여자는 절대 고대어에 접근할 수 없다. 여인에게는 가당치 않다.
이 제국의 절대 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위원회에 각 학계가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이전보다 황가의 역할이 많이 축소되었다 해도 제국은 제국이었다.
중앙 집권자인 황가에서 그렇다고 하면 악법도 법이 되기 마련인데, 이번 황가는 계속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위법일 수도 있다, 혹은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식이었다.
이 틈을 치고 온건파 귀족들과 결탁한 아카데미 학자들이 점자 기세를 불려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아키스는 침대 머리맡에서 루나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온건파 귀족들, 반 황가를 지지하는 자들은 황가에서 매일 아침에 우유를 마신다 해도 반대할 자들이므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이번 일에는 그들을 십분 활용하도록 하죠.’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이 일을 둘러싸고 귀족들은 입방아를 찧어 대며 수군거렸다.
“역시 공작가의 앞에서는 황가도 어쩔 수 없군요.”
대표적인 황가의 편이던 공작가가 이번에는 반대파의 손을 들며 힘을 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황가가 공작가에게 꼼짝을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이 제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군. 어쩌겠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가문인데…….”
* * *
두 달 후.
결국 체스터 후작 부인은 신전 연금에서 자택 연금 처분을 받는 것으로 선고가 일시 변경되었다.
이제는 루나도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지 알았다. 루나는 머리를 썼다.
“연출이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줘요.”
체스터 후작 부인이 신전 연금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날. 루나는 게이트 근처에 온갖 언론사를 불러 놓고 체스터 후작 부인과 아이들이 재회하는 모습을 취재하게 했다.
“엄마!”
“아아, 피터! 레나!”
아이들이 뛰어 나가 막 게이트를 타고 도착한 후작 부인의 품에 안겼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그 모습을 보다 감동을 받아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찍어 내기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안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흐느꼈다.
루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작 부인이 흐느끼다 기자들을 향해 심경을 발표하는 장면에서는 웅성대던 대중들이 침묵하기까지 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우리 아이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 있다니, 이 순간 죽어도 좋아요.”
루나가 미리 시킨 대사였다. 하지만 후작 부인의 진심이기도 했다.
길이길이 남을 대사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루나는 마차 근처에 후작 부인을 마중 나와 있었다.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들을 안고 마차에 올라타며 후작 부인은 마지막 순간 루나에게 눈짓하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괜찮게 했죠?”
그녀의 탁월한 감정 표현력에 감탄하며 루나가 사람들에게는 뒷모습만 보인 채 눈짓했다. 아주 좋았다는 의미였다.
‘후작 부인이 아주 일을 잘해 줘 다행이야.’
* * *
다음 주, 체스터 후작과 후작의 새 부인이 사교계와 민중의 비난을 견딜 수 없어 아이들을 두고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돌았다.
“남자가 바람피우면 재혼, 여자가 바람피우면 감옥? 그것도 후작 부인은 고작 의혹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며 수도 귀부인들은 체스터 후작을 맹비난했다. 남자들 모임에 체스터 후작을 끼워 주면 말도 안 섞겠다는 부인들이 속출했다.
귀부인들이 사회를 움직일 순 없어도 사교계를 흔들어 놓을 순 있었다.
심지어 그가 시골로 도망가기 전 주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길에서 한 노부인이 체스터 후작과 마주쳤다. 그를 바로 알아본 노부인은 이렇게 호통 쳤다 한다.
“이 못된 놈이 제 부인을 감옥에 보내고 고개를 쳐들고 다녀?”
그리고 욕을 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고 한다.
꽁지 빠지게 도망친 체스터 후작의 이 사건은 신문 기사로 실렸고, 전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한다.
체스터 후작이 도망친 이유는 바닥 친 평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난 민심이 체스터 후작을 무고죄로 처벌하라는 주청을 치안 기사단과 시청에 수없이 보내고 있었기에 낯을 들고 다닐 수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 *
몇 개월 전만 해도 루나가 불임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했다. 그녀가 동부 신전에서 눈물을 쏟으며 4개월이나 기도를 드리다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작을 차지한 데다 예쁘고 능력 있으면 뭐 해. 거참 안됐네. 그 젊은 나이에 신전에 가서 회임 기도를 하고도 임신을 못하다니.”
사람들은 다 가진 여자는 없다며 루나를 동정하는 체하며 고소해했다.
그러나 그 여론은 통쾌하게 뒤집혔다. 루나의 차기작 발표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회임 기도를 하는 체하며 몰래 체스터 후작 부인을 취재하고 있었대요.”
“신전 안에서 집필 작업을 했다는데?”
“회임 기도라는 핑계를 이용할 줄이야.”
작가 레드의 세 번째 소설, <후작 부인의 눈물>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사람들은 루나가 대단하고 무서운 여자라며 탄복했다.
* * *
후작 부인의 눈물 출간 다섯 달 후.
황실 위원회에서는 ‘에리스 관습법 폐지’가 다음 위원회 모임의 주요 화제가 될 것이며 폐지 쪽으로 논의될 것이라 밝혔다.
결계의 보수가 끝나고 나면 이제 여인을 억제하는 마법은 사라지고 여자 번역가가 태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키스는 근 10년 안에 여자 마법사도 태어나기 시작할 것이라 보고 있었다.
드디어 법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루나와 아키스, 휘멘은 결계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휘멘과 아키스, 루나 셋은 오랜만에 뭉쳤다. 그들은 한 달 간 공작가의 한 방에 머물며 결계 보수에 매달렸다.
* * *
“좋아요. 오늘도 아주 잘했어요.”
아키스는 휘멘이 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루나를 뒤에서 포옹했다.
그 상태로 그는 결계를 만지는 루나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그쪽을 내가 만지게 해 줘요.”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꼭 이런 자세로 안 해도 되는 걸 알면서. 그녀는 아키스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폭 기댔다.
결계를 보수하는 작업은 긴밀하게 공조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결계의 세부적인 곳, 아주 작은 곳에 손을 댈 때도 루나가 그들에게 손을 댈 수 있도록 허락해야 했다.
“아! 거기예요.”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가 누른 결계의 부분이 카리노 대왕의 마법의 핵 부분이었다.
아키스가 손가락을 세워 결계를 눌렀다. 휘멘이 걷어 낸 마법 부분에 부서진 결계를 수복하기 위해 마력을 주입했다.
아키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루나는 그의 무릎에 완전히 올라와 있었다.
“아주 좋아요. 이대로라면 금방 끝날 겁니다.”
아키스가 루나의 귀를 살며시 깨물며 속삭였다.
그녀는 공연히 몸이 달아올라 아키스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카리노 대왕의 마법을 제거하고 결계를 수복하는 작업은 수월하게 마지막으로 접어들었다.
“……좋아요, 이제 거의 다 없어졌어요.”
루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방 안에 펼쳐져 있던 금빛 결계의 구조도가 희미하게 흔들리다 사라졌다. 드디어 오늘이 작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끝났어요. 그 불쾌하고 지저분한…… 카리노 대왕의 마법이 사라졌어요.”
그들은 이날 마시기 위해 귀중한 술을 한 병 마련해 두었다.
한 잔 값이 사금과 비슷하다는 고가의 샴페인으로, 사금이라는 별명을 가진 물건이었다.
그들은 샴페인 잔을 부딪혔다.
“우리가 세상을 구했군.”
휘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당신 꿈속의 미래는, 영영 사라졌군요.”
아키스가 금빛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있어 줘서 그런 거예요. 두 사람 다 고생 정말 많았어요.”
루나는 미소 지었다.
“전부 당신 덕이에요, 루나.”
“말은 바로 해야지. 이 일을 주도한 건 너였어.”
아키스와 휘멘이 각각 말했다.
그들은 세상에 진 빚을 덜어 낸 것처럼 어깨가 가볍다는 표정이었다.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잡았다.
“그래, 결국 그래서 난 당신 제자가 된 셈인가요, 휘멘?”
루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루나는 여행 중에 휘멘에게 약학의 기초를 배웠다. 세계 최고의 약학자에게 배운 건 큰 도움이 되었다.
“난 복원에 성공한 고대 약들을 판매할 준비를 할 거예요. 아예 이참에 저택에 머물면서 나랑 약 사업 준비 안 할래요?”
“그건 사양할래. 지금도 오래 한곳에 머물렀더니 좀이 쑤셔서.”
휘멘은 그 말에 잠시 기분이 혹했다.
어느새 루나와 정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선 상식을 가진 사내였다.
친구의 아내였다. 아무리 누이처럼, 혹은 그 이상처럼 가까워진 사이였다. 하지만 그건 긴급 상황이기에 용인된 것이고, 더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요, 언제든 제 집처럼 생각하고 돌아와요. 그리고 수도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속살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봄바람처럼 파고들었다.
휘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과정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판결은 바로 떨어졌다.
드디어 체스터 후작 부인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녀가 진짜로 고대어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아아, 모두 당신과 당신의 소설 덕분이에요, 공작 부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여한이 없어요.”
“이건 모두 후작 부인이 제 역할을 잘해 주셔서 생각보다 빠르게 판결이 난 것인 걸요. 우리 둘이 해낸 일이에요.”
체스터 후작 부인은 미소 지었다.
“내가…… 불륜을 하려 마음먹었던 여자라 벌을 받나 생각했어요. 한때 흔들리긴 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여 선을 넘진 않았을 거라는 걸 믿어 줘요. 다만 난 그냥 마음 댈 곳이 필요했죠. 나에 대한 진실을 포장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 덕에 사람들이 내게 온정의 시선을 보냈죠.”
그녀의 말은 맞고도 틀렸다.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죄책감을 버리세요, 후작 부인. 피해자가 꼭 백색일 필요는 없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에 다양한 일을 겪어요. 어떤 이유로든 당신이 억울하게 큰 벌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후작 부인이 결백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체스터 후작부인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눌러 참고 눈을 깜빡였다.
‘괜히 그녀가 공작 부인까지 된 것이 아니야. 정말. 내게는 평생의 은인이야.’
그녀는 루나에게 탄복하며 감사함을 표시할 뿐이었다.
루나는 여유 있게 말할 뿐이었다.
“그런 말은 일러요, 후작 부인. 아직 안 끝났는걸요.”
“네?”
후작 부인은 묘한 표정을 짓는 루나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시작인데요, 뭘.”
루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송이 시작되었다.
후에, 개인이 제국의 법체계를 바꾼 것으로 기록될 소송이었다.
몇 년 후, 그 소송은 체스터 후작 부인의 손해 배상 소송이라 불리게 된다. 체스터 후작 부인이 제국을 대상으로 한 소송이었기 때문이다.
루나는 이미 그녀를 위해 아키스의 도움을 받아 최고의 변호사들을 선임해 놓았다.
승소 확률이 대단히 높은 데다, 엄청난 배상금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국가에 의해 고위 귀족 부인이 억울하게 몇 년이나 수감되어 자식들과 생이별했던 것이다.
체스터 후작 부인의 소식도 호사가들의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임신 중인 내연녀 출신 새 후작 부인과의 결혼이 혼인 무효 판정을 받을 위험에 처해 울상이라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소송이 시작되고, 루나는 황실에서 편지를 한 장 받았다.
‘……황태자의 편지라. 아키스도 아닌 내게?’
그날은 루나 혼자 보내는 티타임이었다.
그녀는 달콤한 생크림 케이크를 오물대며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녀는 픽 웃어 버렸다. 편지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살살 좀 하시게. 이러다 황실이 공작 부인 손에 납작해지겠네.]
황태자의 편지였다.
스틸본 숲에서의 비밀 회담. 그곳에서 체스터 후작 부인의 소송을 크게 만들어 법 제정에 추진력을 주자는 건 이미 서로 협의된 바였다.
그걸 아는데도, 체스터 후작 부인 문제로 안팎으로 두드려 맞으니 고달프긴 한 모양이었다.
‘금방 끝납니다, 황태자 전하.’
루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황가가 치를 대가가 이 정도라면 솜방망이 처벌이나 다름없지. 운 좋은 줄 아세요.’
* * *
‘어젯밤엔 악몽까지 꿨어.’
황태자는 요즘 자다가도 ‘공작 부인!’ 이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혼수상태로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황제를 대리해 섭정을 하고 있는 것이 황태자였다. 그 말인즉, 고대어법 개정 문제로 난리가 난 평의회의 상황은 그가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태자 전하, 결단을!”
“이 나라의 전통을 깨면 안 됩니다!”
“전통 같은 소리! 무의미한 관습법 폐지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몇 년 전부터 노력하시던 내용 아니오!”
“당신들이야 공작의 개니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이 나라엔 질서라는 게 있소, 그놈의 연애 소설이 뭐라고 국정을 희롱해?”
“뭐요? 못하는 말이 없군.”
황태자도 여인에게 고대어를 금지하는 법이 이제 유명무실하다는 건 안다.
전설로 내려오던 대로, 진짜 에리스의 후계자인 공작 부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작 부인은 에리스 같은 공포의 마법사는 아니었다. 그녀는 세계 멸망을 시도하지도, 황위 찬탈을 노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 그 법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황태자도 일이 이렇게 된 거, 가능하면 그 법을 폐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쓸모없는 관습법이라도 오래도록 이 나라를 관통해 오던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없애려 하면 말 많은 귀족들과 왕당파가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아키스의 그 태도는 뭔지. 그 친구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
확실히, 아키스는 변했다.
이제는 아내만 개입되면 거의 미쳐 버린다고 해야 할까.
그 난리였던 대회의장에서 아키스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분명 황태자는 회의에 들어가기 전, 아키스에게 왕당파를 구워삶는 데 도움을 좀 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들을 구워삶기는커녕 불에 태워 버렸다. 그것도 아주 활활.
“내가 이곳에 왜 오기 싫어하는지 이번에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금과 녹봉을 받아먹고 살찌는 데만 힘을 쏟는 그대들이 핏대를 올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제국 꼴이 알 만하군요.”
“……뭐, 뭐라고, 공작. 그건 말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시끄럽습니다.”
탕!
아키스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드래곤의 계약자인 공작에게는 항상 몸에 특수한 기운이 따랐기에 보통 사람보다 기가 훨씬 세었다.
그의 기백에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내일 내가 다시 이곳에 오면 탁상공론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법안을 논의하도록 하십시오. 몇백 년 전의 전설을 기반으로 한 어린애 같은 법안보다는, 차라리 내 아내가 발표하는 소설이 훨씬 실효성이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
“난 밥값도 못하는 이들과는 겸상을 안 하니, 오늘은 더 할 말이 없군요.”
아카데미 마법사들을 혼낼 때 그렇게 무섭다는, 그 유명한 로텐베른 교수의 독설. 그걸 고스란히 맞은 귀족들은 초토화된 지 오래였다.
야속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아키스는 의자를 거칠게 밀더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아무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공작의 퇴장과 동시에 회의는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공작이 나가자, 왕당파 귀족들이 뒤늦게 황태자를 물어뜯었다.
“황태자 전하! 공작의 저 태도는 뭡니까!”
“저 태도를 용인하실 겁니까?”
그리하여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황태자는…… 매우 민망해졌다.
‘상대가 공작인데 어쩌란 말인가. 공작 부인 일이면 말이 안 통하는데.’
결국 공작 부인이 문제였다.
아키스도 저가 죽고 못 사는 부인의 안위가 직결된 일이니 논리라곤 없다는 듯 격렬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공작 부인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이었으니.
‘정말 이 법이 통과 안 되면 그게 더 큰일이겠군.’
황태자는 골치가 아팠다. 차라리 저가 황위를 이은 상황이면 더 강경하게 나가겠는데, 아직까지 그는 황제 대리였다.
황태자의 곤혹은 줄줄이 이어졌다.
이튿날 제국 신문을 비롯하여 모든 신문사가 일제히 하나의 기사를 발표했다.
[체스터 후작 부인,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소송 발표. 억울한 피해자를 위한 나라는 존재하는가.]
기사의 제목이었다.
“이런 기사가 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단 말인가! 정말 공작 말대로 황궁 정보부는 밥벌레란 말인가?”
“그, 그것이, 마지막까지 다른 기사를 내는 척하고 아침에 인쇄판을 바꿔치기해 버린 모양입니다. 아주 막무가내 식입니다. 이름만 제국 신문이지, 공작 친화적인 걸 보면 신문을 공작 신문으로 바꿔야 될 판이랍니다.”
소송을 발표한 체스터 후작 부인의 뜻이 곧 공작 부인의 뜻이요, 그 뒤에 공작가가 버티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바보였다.
‘일이 더 커졌군.’
내일은 국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공작 부인, 정말 엄청난 여자야.’
거기다 공작 부인의 무서운 점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강적이라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관계가 얽히고설킨 데다 그는 친우이자 최대 조력자인 아키스의 아내였다. 모르긴 몰라도 공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날, 드래곤이 제국을 멸망시키는 날일 것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인인 것도 사실이지. 아름다운 데다 소름 끼치게 영리해. 다시는 여자를 우습게 보면 안 되겠어…….’
황태자는 황후에게 의논해 볼까 생각하다가 관뒀다.
‘도대체 이일에는 왜 어마마마조차 이상한 태도를 보이신단 말인가.’
스틸본 숲에 다녀온 직후.
황태자는 공작가에 황가의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과 그것을 빌미로 고대어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을 황후에게 알렸다.
황후는 처음에는 창백하게 질려 기겁했다.
“공작가에서 드디어 황권에 간섭을 시작했다고?”
그러나 황태자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서 공작가에서 입을 다물고, 카리노 대왕의 위엄을 지켜 주는 조건으로 단 하나만 요구한단 말이냐?”
“네. 그냥 여인에게 고대어를 금지하는 법을 없애 달라 합니다. 그럼 황위를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써 준다는 조건입니다.”
황후는 놀란 심장을 진정 시키고 재차 확인했다.
“그럼 공작가에서 이제부터 드래곤의 계약을 계승하는 혈통과 일곱 가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혈통이 같이 태어나게 될 거라고?”
“네. 그렇습니다. 터무니없는 괴물 가문이 탄생한 셈이죠. 혈통을 잇지 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드래곤의 혈통은 이어져야 하니까요.”
황태자는 날 때부터 황궁에서 자랐기에,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었고 자신에게 이득 되는 것이 아닌 일은 절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여인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처음이군요. 공작도 문제지만 공작 부인은 공작도 마음대로 휘두를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황후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그녀는 뭔가 골몰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야, 머리야. 갑자기 두통이 이는구나.”
“……네? 어의를 부를까요?”
“좀 자면 나을 것 같구나.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시녀들을 불러 낮잠을 자겠다고 방으로 향했다.
황태자는 어릴 적부터 모친에게 대단히 의지하고 있어 큰일은 그녀에게 늘 의논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황후가 그날 이후 이상했다. 공작 부인 이야기만 꺼내면 머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하며 답을 기피하는 것이다.
‘아무리 이제 권력에는 관심 없다 선언하셨다지만…….’
황태자는 참지 못하고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냐 대놓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황후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의도를 모르는 위압이라면 문제지만, 그쪽에서 확실히 요구하는 게 있는데 뭐가 문제니? 공작 부인의 요구를 들어주거라.”
“어마마마, 그래도 저, 이 나라의 황태자입니다. 제가 여인에게 농락당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농락이라니?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공작 부인은 네 힘을 이용해 옳은 일을 하려는 것이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란다. 정녕 모르겠니?”
“…….”
그 말에 황태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마마마, 저도 공작 부부의 요구가 옳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걸 빌미로 더한 것을 요구 받으면요?”
“아마 안 그럴 거다. 그녀가 이제 와 더한 권력을 바랄 이유가 뭐가 있겠니? 내가 늘 말했지. 옳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그렇지만 않으면 네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지.”
“그 말은 기억합니다.”
“그리고 너도 어미인 나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음을 잊지 말거라.”
황후는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정말 황가를 위협하는 요구를 시작한다면 그건 그때 경계해도 늦지 않아. 그때는 내 목숨을 걸고라도 저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라. 이번에 그녀의 말은 틀린 것이 없으니 나 또한 어쩔 수 없구나.”
공작 부인이 구워삶은 적은 내부에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황태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번 일에는 지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가 죽은 후 에리스에 대한 전설의 진실을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공작 부인의 말은요?”
황후는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가 죽은 뒤가 무슨 상관이니.”
죽은 뒤가 무슨 소용이냐니. 솔직히 황태자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황후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충격이었다.
“……네?”
“아키스, 공작 부인. 그리고 현 황가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죽은 후 발표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뜻이 아니니?”
“……그건, 맞습니다.”
“네 자리를 보존하며 버티거라. 그게 황가에서 살아남는 법이지. 그리고 이번 법안을 개정하는 데 협조하면 공작 부인은 네 편이 돼 줄 거야. 그게 우리 모자가 가장 안전하게 천수를 누리는 법이지. 기억하렴. 황위는 살아남은 자가 잇는 것이라는 걸.”
“…….”
역시 어머니에겐 당해 낼 수 없었다.
황태자는 수긍했다. 사실 그는 무난한 왕이 되고 싶었지 저 때에 치세를 떨치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황태자는 황후의 말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송은 좀 천천히 걸지.”
아마도 고대어 금지법이 위헌 처리될 터이니, 체스터 후작 부인에게 배상금은 얼마나 막대하게 뜯길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황태자는 진심을 담아 공작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살살 좀 해 달라는 편지였다.
하루가 지나 답장이 도착했다. 황태자는 편지를 열었다.
[겨울은 짧으니 봄이 되면 다 같이 차를 마실 수 있을 겁니다.]
과연 황후의 말이 맞았다. 공작 부인은 이 일이 해결된 후에도 황가와 척을 지지 않겠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공작가와 황가 모두 그녀의 손가락 위에 올라와 있으니까.
‘어머니와 좀 닮은 면이 있나.’
피식 웃으며 황태자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 * *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눈을 뜨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설레는 건 아직 신혼이기 때문일까.
루나는 천천히 아키스의 품에서 눈을 떴다. 그가 잠에 들어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 주는 일은 드물었다.
‘잘생기긴 했다…….’
베일 듯한 콧날이며 흠 하나 없어 보이는 피부하며.
정말 매일 보는데도 심장 떨어지게 잘생겼다. 루나는 몸을 웅크리고 그의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다. 그가 속눈썹을 움찔하는 게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앗!”
정신 차리니 아키스는 그녀의 허리를 훅 안아서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 위에 엎어지게 된 루나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어요?”
“당신이 일어나기 전부터.”
“……왜 자는 체하고.”
“그냥 당신 숨소리를 들으니 일어나기 싫어서요.”
그가 루나를 꼭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그래서 당신 숨소리 들으면서 조금 더 잤습니다. 당신 옆에 있으면 느긋해지거든요.”
루나는 미소 지었다.
자다 깨서 제 곁에서 편히 잠을 자는 아키스라니. 상처 입은 맹수가 사람에게 몸을 기대면 이런 기분일까. 맹수를 길들인 기분이었다.
‘요즘 그가 낮에 힘든 것 같은데 밤에라도 편히 자서 다행이야.’
녹을 듯이 사랑스런 그 미소를 아키스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에 덜 깬 그는 그 나름대로 사랑스러웠다.
아키스가 나직이 중얼댔다.
“당신은 아침에 보니 더 예쁘군요.”
건강함의 증거인지 아침부터 힘차게 일어선 그가 다리 사이에 닿자, 루나의 체온이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루나는 고양이처럼 옹송그린 채 그의 눈을 보았다.
“오늘도 황성에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루나가 뒤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페니와 협조해 연일 신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지만, 황실 내부에서의 싸움은 오롯이 아키스의 몫이었다.
“괜찮아요, 당신?”
루나는 아키스의 가슴에 턱을 댄 채 물었다.
“뭐가요?”
“요즘 집에 있으면 낮에…… 당신이 황궁에 가 있을 시간에 가끔 가슴이 따끔따끔하곤 하거든요. 당신이 힘든 건가 하고요…….”
루나는 아키스의 앞머리를 넘겼다. 베일 것 같은 콧날이 아찔하다 생각하며 그녀는 걱정스레 속삭였다.
“나 때문에 무리하거나 힘든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마음이 좋지 않아요.”
아키스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다. 각인의 여파인 감정 전이가 처음에는 자주 일어났는데, 요새는 여간 격렬한 감정이 아니면 쉽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이 전해질 정도로 매일 자신이 격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던 건가.
‘그 돌대가리들 때문에 내 아내를 걱정시키다니.’
이미 아키스의 머릿속에서는 루나의 걱정돼요, 걱정돼요, 걱정돼요,라는 말이 다각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아키스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속삭였다.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당신이 내게 정체를 들키기 전에 불안해했던 걸 생각하면 국정 회의에 불을 질러서라도 어서 당신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 서두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의 말에서 배어나오는 진심에 루나는 뺨이 발그레해졌다.
“기뻐요, 아키스. 나도 노력할게요. 그리고 그게 옳은 길이기도하고.”
루나는 잠시 생각하다 뭔가 이상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황궁에 불을 지른다는 말은 농담이죠?”
아키스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라를 세워서라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마요.”
그를 믿었다.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법 개정을 위해 며칠간 계속된 회의.
국정 회의에 참가하는 귀족들은 아키스가 화를 내고 독설을 내뿜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저 아름다운 공작이 오늘은 무슨 말로 그들의 대가리를 깨 버릴까, 자포자기한 그들의 숭고한 관심사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오늘 국정 회의에 참석한 아키스는 평소와 달랐다.
그는 몹시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닌데 그간 너무 감정 소모를 한 것 같습니다.”
아키스는 황태자를 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이건 또 무슨 신박한 헛소리인가 싶었다. 임신이라도 한 게 아니면 홀몸이 아닐 건 뭔가.
“오늘은 전혀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긴장한 귀족들 사이에서 더없이 부드럽고 나긋하게 말했다. 절세미남의 부드러운 태도란 과연 중년의 귀족들도 당황할 만큼 우아한 것이었다.
“마음의 평온이 중요하니 다들 의견을 내 보십시오.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웅성대다 하나둘씩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의장이 개싸움 판이 되는 데는 딱 20분 걸렸다.
폭풍 같은 오전 시간이 지나가고 아키스는 그 시간 동안 정말로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 했다.
그리고 잠시의 쉬는 시간이 끝나고 귀족들이 삼삼오오 돌아올 무렵, 아키스가 손짓했다.
미리 지시를 받은 황궁 시종들 두엇이 다가와 의자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나갔다. 순식간에 빠진 자리를 보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지시를 내린 아키스를 보았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공작?”
“오늘부터 회의장에서 무작위로 의자를 하나씩 뺄 겁니다. 그리고 이튿날도 의자를 넣지 않을 겁니다.”
아키스가 그야말로 극상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불필요한 자리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서 있는 사람을 기억할 겁니다. 아주 오래요. 내일부터…….”
아키스가 흘리듯 말했다.
“황궁에 빈자리가 아주 많아지겠군요.”
“…….”
그들에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이제부터 빈자리에 당첨되는 자는 다음 날 성하게 황궁에 입궁할 수 없을 거라고.
그들은 구원을 청하듯 황태자를 보았지만, 황태자는…… 이번에도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차라리 화를 내시오! 공작!’
그들은 경악하여 공작을 보았다. 공작은 매우 평온했다.
“걱정 마세요. 내가 지금껏 왜 화를 냈는지…….”
“…….”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요. 더 쉬운 방법이 있는데.”
공작이 흘리듯 말하는 목소리는 그들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회의장에 공포 분위기가 스미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공포 분위기는 더 팽배해졌다. 다음 날 의자를 빼앗긴 대신이 모종의 이유로 정말 입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몇 달이 지나서야 입궁하지 못한 자들은 마차 사고, 또는 감기 등의 급한 문제가 생겨 입궁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입궁하지 못한 자들은 왕당파와 귀족파, 자문 학자들 등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러나 오해가 풀리고도 공작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후에 그 사건은 공포의 의자 사건이 불리게 되었다.
* * *
에리스 특별법에 대한 논란은 신문에서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르게 결론이 났다.
책 출간일로부터 6개월, 처음 논란 시작일로부터 7개월 만이었다.
[카리노 대왕의 경고는 시효 만료로 판단, 여인들은 고대어에 접근해도 된다.
고대어 능력자인 여인들이 태어나더라도 그녀들은 에리스의 후계자가 아닐 것이다.]
에리스 특별법의 폐지가 발표된 날.
그날 모든 신문들은 그 소식을 실었다.
[제국의 새로운 시대, 전설에서의 해방이 도래하였다.]
제국 신문은 이런 자극적인 대표 기사를 써 신문 판매 부수를 늘렸다.
투자자들은 관련하여 여성 직업인이 늘어날 것이라 관측해, 직업소개소에 투자해야 한다 의견을 냈다. 다양한 꿈을 숨기고 있던 많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조용한 환희가 번졌다.
아키스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랑하는 아내를 찾았다. 그녀는 뛰어나와 아키스의 품에 안겼다.
이제, 정말로 그녀는 안전했다.
사랑하는 그녀와 무사히 살기만 하면 된다.
* * *
“휘멘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참 아쉬워요.”
루나는 아키스가 그놈 이야기는 왜 꺼내냐 정색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키스는 몇 초 후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휘멘은 아카데미와 협상하기 위해 본인의 복직 조건까지 걸었습니다. 그 자도 나름대로 당신을 위해…… 세상을 위해 노력한 거죠.”
“그는 좋은 사람예요.”
아닌 게 아니라, 아이를 낳으면 내심 휘멘이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루나는 저가 고아로 자라 대부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어린 시절 그녀가 부모님을 여였을 때, 제대로 된 대부가 있었다면 그녀 또한 더 나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 있으리라.
루나는 아키스의 입술에 깊숙이 키스했다.
“사랑해요, 이제 나랑 평화롭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요.”
아키스의 기분은 한껏 하늘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너무 완벽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자 모든 것인 여인을 끌어안았다. 그녀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루나는 그날 밤 고요한 달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달에 더 이상 소원을 빌지 않았지만, 그녀의 소망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으니.
그러나 그런 세상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붙들어 주는 것이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이 많지.’
루나는 미소 짓고 생각했다.
그녀는 테라스를 닫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 *
[순백의 죄인, 체스터 후작 부인. 국가로부터 배상금 받을 예정.]
신문 속보로 난 기사 한 줄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무죄이며, 국가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 받기로 결정되었다.
그녀는 루나에게 편지로 감사하며 은혜를 갚기 위해선 뭐든지 하겠다고 몇 번이나 알려 왔다.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자유의 몸을 만들어 주셨으니 남편과 이혼 소송을 해야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걸 수 있는 모든 소송을 걸 생각이니, 근황을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변호사 수임료는 걱정 마세요. 국가 배상금으로 앞으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말예요.]
그녀의 편지 끝맺음 내용을 읽은 루나는 슬며시 웃었다.
‘그녀가 생각보다 영리한 사람이니, 앞일은 걱정할 것이 없겠어.’
루나는 편지를 접으며 생각했다.
‘……체스터 후작 부인의 안전과 내 안전. 모두 같은 문제야. 우리는 연결된 거야. 서로 도와야 하지.’
한때 에리스에 관련된 특별법, 여인이 고대어를 하지 못하는 법이 치세를 떨치던 몇백 년 전에는 같은 여인끼리 고발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녀 혐의로 정말로 감옥에 가거나 죽는 여인도 있었다고 했다.
‘낡은 법은 단두대로 보내야지.’
루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붉은 책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책의 정체는 뭘까? 항상 적절할 때 내게 도움을 주니 말이야.’
이것만큼은 지금도 루나에게 미지로 남아 있는 일이었다.
* * *
그날 오후, 루나는 아키스가 아카데미에 간 사이에 혼자 드레스 룸의 책상에 앉아 서적을 번역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계절은 초여름이었다. 하늘이 몹시 파랬다.
‘이러다 축제가 오고 겨울이 오겠군.’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두렵지 않은 건, 이제는 아키스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어서이리라.
그때, 루나는 어떠한 기척을 느꼈다.
‘……응?’
하늘대는 나뭇잎과 햇살들 사이로 이상한 것이 보였다.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얀 것 같기도 하고…….
‘눈?’
루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절대 눈이 내릴 계절이 아닌데?
“뭐야 이게?”
루나는 급하게 숄을 추스르며 달려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코니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아, 휘멘…….”
루나는 입술을 다물고 눈을 떴다. 그가 발코니에 기대 서 있었다.
“잘 있었나?”
“휘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정문으로 오지 않고요?”
“그럼 집사니, 시종들이니 수선 떨어서 싫다. 귀족 나리 노릇은 나한테 안 맞아.”
“……아니, 진짜 귀족 나리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역시 오늘도 휘멘은 엉뚱했다. 그러나 루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는 그녀를 보며 휘멘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건강해 보이는군.’
아키스에게서 뭘 부탁 받은 게 몇 년 만이더라. 한 4년 만인가.
갑자기 연구실에 쳐들어와서 하는 말이 약을 지으라는 거였다.
루나에게 줄 약이라 했다. 마법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아내의 몸을 보강할 약재를 써서 영양제를 만들어 달라는 말에 휘멘은 덜컥 걱정이 되었었다.
‘그리 괜찮다고 하더니, 역시 험한 여행에 몸이 상한 거잖아.’
정성껏 약을 만들어서 오긴 왔는데 괜히 쑥스러웠다.
‘좀 쉬면서 하지,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그냥 두지 못하는 여자군.’
그 뒤 루나는 책인지 뭔지를 발표하고 체스터 후작 부인을 내세워 뭔가 일을 꾸미는 듯했다.
걱정을 해 본 적 없어 서툴렀고, 그래 본 적 없어 챙겨 주는 것이 어색했다.
“들어와서 차 한잔 마시고 가지 않고요?”
“됐어. 그냥 용무가 있어 얼굴이나 볼 겸 온 거니까.”
“뭔데요?”
휘멘은 루나를 바라보다 툭 던졌다.
“네 정체를 드러낼 셈이야?”
루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법이 달라졌으니 천천히 정체를 공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붉은 책에 대한 것도…….
“지금 당장은 아녜요. 아키스는 2, 3년 후로 하자고 했어요. 법이 폐지되고 상황이 정리되면요.”
“그때는 내 보호가 필요 없겠지?”
“아마도요. 이제 세상이 본격적으로 변해 가기 시작할 테니까요.”
휘멘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선물이 있어 왔어.”
“그래요? 뭔데요?”
휘멘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으며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사탕 선물인가요? 나 이제 단것 많은데.”
“누가 겨우 그런 걸 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겨우 그런 거라니.
루나는 남부 도시에서 단 걸 간절히 먹고 싶었을 때, 휘멘이 사다 준 사탕을 기억했다.
‘하여간 루한텐 친절한 남자라니까.’
그러나 곱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공작 부인 루나가 그때의 일을 꺼내어 다정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루와 휘멘은 경계가 없을지 몰라도, 루나와 휘멘은 아니었다.
그래서 루나는 그냥 가만히 웃기만 했다. 그러나 휘멘은 자꾸 기분이 간질간질해져 콧잔등을 긁적이고 싶어졌다.
“몸에 좋은 재료는 다 넣어 만들었어. 여자 몸에 좋은 건 만들어 본 적 없어서 몇 번을 검증했지. 임산부나 어린아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순한 약이니, 너 가지라고.”
“……고마워요, 휘멘.”
루나는 뜻밖에 말에 눈을 깜빡였다.
“아키스에게 돈 받고 만든 거니 고맙다는 말은 말아.”
휘멘은 더욱 민망해져 괜히 손을 휘휘 저었다. 돈은 받은 적 없는데, 거짓말까지 보탰다.
“잘 먹을게요. 와, 나 많이 건강해져야겠네요. 휘멘에게 약을 다 받고. 그리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으니까요.”
“알아.”
휘멘은 짧게 말했다.
“응?”
“넌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야. 나에게…… 6월에 눈을 내리게 만들었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이 이런 면이 있었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설도록 다정한 걸까 싶었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마워요, 하지만 눈은 왜 내리게 한 건가요? 이것도…… 마법이죠?”
“그건 두 번째 선물.”
휘멘이 짧게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것도.
휘멘은 뒤에 감춰 둔 무언가를 내밀었다. 루나는 그것을 받았다.
“……화분? 이게 뭐예요?”
“진짜 선물. 그리고 네가 바라던 것.”
“설마…….”
루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은빛 초롱 모양의 꽃이었다. 루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는데, 자연의 것이라기엔 영롱한 꽃의 모양새가 몹시도 예뻤다.
“고대 약 재료 중에 이걸 원하던 거지?”
“어떻게 찾아냈어요?”
루나는 저도 모르게 감격해 입이 벌어졌다.
“마지막 유적지에서 나온 책에서.”
“역시. 나한테 번역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럼 훨씬 빨랐을 텐데.”
“……그냥.”
휘멘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냥 다 내 힘으로 해 주고 싶어서. 그래서 다른 번역가들을 독촉해서 번역했고, 로웨나에 대한 내용을 찾아냈어.”
“씨앗은 어디서 났구요?”
“그 연구실에서 찾았지.”
“수백 년 전의 씨앗을 개화시켰다고요?”
휘멘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는 요 몇 개월 동안 이 식물을 개화시키는 데 정성을 다했다. 수백 년 전의 보존 마법이 걸린 식물을 복원하고, 또 제대로 키우고, 수십 번을 죽이고 살렸다.
그러나 그 고생에 대해 징징대며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건 그의 성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그냥 이렇게 그녀에게 이것을 구실로 꽃을 주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꽃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키스에게 휘멘은 친우였다. 원수 같은 친우라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러니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진 여인이라 해도 사심을 가지는 건 가당치 않았다.
그러니 개화되기도 전의 감정은 정리하더라도, 꽃을 피워 주고 싶었다.
“그냥 쉬웠어. 보존 마법이 잘 걸려 있더라고.”
휘멘은 툭 던지고 정리했다.
루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서 어쩌죠?”
“덕분에 꽃을 피웠으니 되었어.”
휘멘은 나직이 말했다. 루나는 그가 오늘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휘멘이 손을 뻗었다.
“봐.”
그는 은빛 꽃을 흔들었다.
두세 송이의 꽃이 흔들리면서 반짝였다. 그리고 눈앞에 눈이 내렸다. 순식간에 이 작은 발코니만 겨울이 되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보았다.
“이미 사멸된 식물인 로웨나라는 식물. 그리고 이 꽃은 한 달 만에 자라, 다 자라면 이렇게 눈처럼 휘날리는 꽃가루를 뿜어내지. 그때가 되어 꽃잎을 따서 잘 압축해 짜내면 돼.”
“하지만 이래서야 양산이…….”
“한 방울이면 네가 원하는 약을 천 알은 만들 수 있어.”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뻐요. 꼭 좋은 약을 만들어 보답할게요. 그리고 약 수익도 배분할게요…… 약에도 저작권이 있다면서요?”
“돈은 됐어. 그냥 선물이라 했잖아.”
휘멘은 루나를 찬찬히 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서 뭔가를 느꼈다. 휘멘이 당장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또 떠나요?”
휘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해. 네 덕에 모든 일을 다 해결했으니. 이제 나한테 맞게 그냥 여행이나 더 해야겠다.”
“아카데미에 다시 복직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충분히 돌아다닌 후에 할 거야.”
루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키스도 이번엔 휘멘이 작위도 물려받고 정착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루나도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살아가다 살갗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너랑 스쳐서 좋았다. 루와도, 루나와도.”
휘멘이 나직이 말했다.
“……언제든 돌아와요, 휘멘.”
루나는 속삭였다.
“당신 친구들은 여기 있으니까.”
그 말은 휘멘의 불같은 마음에 물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을 넘었으니 그거면 되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언제든 올 테니까.”
“영광이네요. 천하의 휘멘이 그런 말을 해 주고.”
루나는 그의 뜻 모를 다정함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는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올리더니, 어느새 발코니를 뛰어넘어 사라졌다.
* * *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루나는 이상하게 감성적이 되는 기분에 화분을 괜스레 한번 어루만졌다.
휘멘이 주고 간 주머니를 열어 보니 두 개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로웨나 식물의 씨앗, 또 하나는 영양제 봉투였다.
루나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 한동안 사라질 줄은 몰랐다.
‘은근히 멋지다니까. 평소엔 어린애 같고 특이한 사람이지만 말이야.’
* * *
루나는 휘멘이 주고 간 씨앗을 정원 뒤쪽의 오두막 근처에 심었다.
아키스에겐 비밀로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으니 당신은 참견하지 말아 달라, 귀띔했다.
아키스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랐다.
* * *
어느 날 페니가 공작가에 놀러오자 루나는 그녀를 자신의 약 실험실로 안내했다.
“……이게 다 뭐야?”
정리해 둔 환약으로 가득한 테이블을 본 페니의 눈이 커졌다. 루나는 가타부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먼저 이것부터 받아. 선물이야.”
마지막 재료인 로웨나의 눈물을 갖추고 루나는 책에 나온 약들의 대부분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주머니에 든 건 그 약들이었다.
“네가 나한테 준 영감으로 만든 것들이기도 하니까 어서 열어봐.”
페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머니를 열었다.
“……화장품? 그리고 이건 알약?”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 안에서 나온 물건을 살폈다.
“첫 번째 제품은 장미 연고라고 해. 어떤 상처든 없애 주고, 절대 몸에 흉터가 남지 않게 해 주는 약이지. 그리고 이미 남은 흉터를 희미하게 만들어 줘. 두 번째는 백옥환이라는 약이야. 한번 먹어 봐. 나도 이미 먹어 봐서 검증된 성분이거든.”
페니는 수상해하면서도 약을 삼켰다. 마침 페니는 옅은 화장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세상에.”
곧 페니의 피부가 서서히 뽀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옅은 색조 화장을 한 볼 위로 장밋빛의 생기가 떠올랐다.
루나는 손거울을 건네주었다. 페니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하얀 피부가 아니라 화장 위로 봐도 내부에서 광채가 나는 듯한 색으로 변한 얼굴색이 생소했다.
“이거 도대체 무슨 약이니?”
“이걸 먹으면 여덟 시간 정도 피부가 아주 하얗고 고르게 변해. 네가 일전에 화장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 했잖아.”
루나는 어깨를 으쓱대고 싶은 기분이었다.
페니의 뺨이 붉어졌다.
“그렇게 오래전 일을 기억해 주다니……. 루나…….”
페니는 연신 감탄하다, 이번에는 연고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정말 좋은 냄새가 난다.”
“그렇지? 장미 연고라는 이름도 마음에 들어. 꽃이라든가, 아름다운 건 약하다는 편견이 있잖아? 이런 좋은 냄새가 나는데도 완벽하게 상처가 낫는, 그러니까 따끔하고 정확한 효과가 있다는 게 좋았어.”
“대단해. 그래서, 너 설마 이걸…….”
“맞아. 나 약 사업을 준비하고 있어.”
“네가 약사라고? 도대체 이걸 누가 개발한 건데?”
“으음, 말하자면 긴데. 일단.”
페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새 사업의 홍보담당을 해 주지 않을래? 이번엔 가게를 낼 건데 말이야.”
“물론 네 일이라면 쌍수 들고 도와주겠지만 갑자기 가게라니……? 봐 놓은 터라도 있어?”
“응. 있고말고. 시내에 있어.”
루나는 미소 지었다.
* * *
“고대를 통해 얻은 지식들을 세상에 소개하고 싶어요.”
아키스는 루나가 원하는 사업은 뭐든지 하라 했다. 아키스는 일의 진행을 돕기 위해 디온을 붙여 주었다.
루나가 찍어놓은 가게 터는 이전 버몬드가의 저택이었다. 버몬드가는 작지만 수도의 중심에 있었다. 또 루나 소유의 건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루나는 보수공사중인 버몬드가를 돌아보았다.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네요. 아주 훌륭해요.”
루나는 디온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네. 아마도 이 일이 수도에서의 제 마지막 일이 될 것 같은데, 공작님은 물론 부인께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디온의 말에 루나는 내심 놀랐다.
“어디 가나요, 디온?”
“아아, 이전부터 결정된 내용이었습니다. 공작님의 보좌관에서 지방 영지를 관리하는 영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지요.”
“아…….”
전생의 기록이 담긴 일기장.
루나는 공국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에 팔려 가 매매혼을 했는데, 당시 괴팍한 시부모도 쩔쩔매는 이들이 대영주의 대리인이었다.
대영주를 대신하여 실무를 처리하는 대리인. 그들 앞에서는 작은 영지의 영주도 아랫사람처럼 굴었다.
‘굉장한 출세 코스군.’
디온이라면 성격도 좋은 데다 영리하고 준수하니, 아키스가 높게 사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디온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께서도 앞으로 안전하게 지내실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 말에 루나는 흠칫 놀랐다. 디온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키스에게 들었나요?”
디온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아뇨, 아닙니다. 이틀 전에…… 공작님께서 루에 대한 일을 모두 종료하고 케이스를 정리하라 하시면서 알려 주셨지요. 저는 이미 공작가의 각인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정리하는 의미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다만, 공작님께서는 ‘각인자를 찾았다.’라는 말만 한마디 하셨지요. 그리고 갑자기 고대어 법을 폐지하는 활동을 시작하셨고요. 그래서…….”
“그 뒤는 직접 눈치챈 내용이라 이거군요. 그럴 법도 해요. 그럼 처음에 새틴의 심부름으로 저택에 온 날 봤을 때 이상한 표정을 지은 이유도…….”
“정말이지 처음 뵈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디온인 엷게 미소 짓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공작님은…… 그분은 누군가에게 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인데, 루라는 소년은 이상하게 각별히 대하셨지요. 그 소년을 데려온다며 호화로운 방을 준비하시고 소년을 위해 아카데미에 자리까지 마련해 두시고요. 그리고 준비된 방까지 직접 확인하시며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과 꼭 닮은 느낌의 영애께서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얼마나 놀라웠는지…….”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가만히 그 말을 들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두 번이나 공작님께 특별한 존재가 되셨으니, 이것보다 강한 인연은 없는 법이지요. 두 분께서 만나시기 위해 그간 많은 일이 있었나봅니다.”
루나는 그의 다정한 말에 미소 지었다. 나중에 연애를 참 잘할 남자다 싶었다.
“그랬군요. 그런데 공작가의 각인에 대한 일은 극비가 아니던가요? 정말로 아키스는 당신을 신뢰하는군요.”
“그분이 첫 각인기를 맞이하셨을 때…… 그때도 그분의……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분을 차지하려는 여인들이 몹시 많아, 저는 어쩔 수 없이 알아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사고도 있었고요.”
“…….”
안 봐도 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루나는 눈썹을 추어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야 할 큰 사고도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여인이라면 워낙 질색하셨던 분이라. 오히려 그 상대 영애들의 안위가 걱정될 만한 사건이라면 있었지요.”
디온이 딱 잘라 말했다.
하긴. 아키스는 철벽이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모두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마음 둘 분을 찾은 것에요. 그리고 공작 부인께서는 그분의 인생을 바꾸실 만한 분이십니다. 오래 그분을 모신 입장에서 저도 감사합니다.”
디온의 말에 공연히 수줍어진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아키스가 유해진 건 그녀도 체감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 * *
그 다음주, 루나는 별러 오던 대로 페니의 집에 놀러 갔다.
가족 식사에 참여하기 전, 루나는 페니와 함께 차를 마셨다.
“결혼식을 앞당길까 해.”
“결혼식?”
“내 결혼식 말이야.”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페니에게 약혼자가 있었다 했다.
“왜?”
페니는 수줍게 미소 짓고 말했다.
“사실은…… 아버지의 사업을 내가 물려받기로 했어.”
“정말 잘됐어. 페니. 네 꿈이었잖아! 너라면 할 수 있어. 그럼 이제 네가 상단의 주인이 되는 거야?”
“……응. 여가주의 취임이니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될 거야. 아버지도 많이 고민하셨고. 하지만 내가 네 소설의 홍보 담당자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가문의 인맥을 적극 활용하는 모습에 감동받으셨대.”
루나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런데,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인데?”
“데릴사위 제도 말이야. 내가 남편을 맞이하면 난 작위를 승계할 수 있어. 그럼 상단도 물려받을 수 있고.”
“아…….”
그녀는 문득 페니의 약혼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그날 저녁 만찬 자리에 갑작스레 페니의 약혼자가 참석한 탓이다.
“이야,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는데 맞이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곧 가족이 될 터인데, 언제든 편히 찾아와요.”
그자는 저녁 만찬 자리에 약속도 없이 나타났다. 페니는 그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 루나는 제가 뭔가 소개를 잘못 들었나 했다.
“공작 부인, 리던 경을 소개할게요. 페니의 약혼자예요.”
페니의 모친인 르시타 후작 부인이 몹시도 상냥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루나는 자기가 악몽을 꾸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저 사내는 카지노에서 휘멘에게 얻어맞은 사내잖아?’
이름이 뭐더라? 윌리엄 드 리던.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수도로 오길 잘했습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명성 이상으로 아름다우시고, 또 고귀해 보이십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다행히 윌리엄은 과장해 공작 부인 루나를 칭송하는 인사를 했을 뿐, 루나를 전혀 알아보는 기색은 없었다.
거기다 윌리엄은 아주 싹싹하고 고분하게 르시타 후작 부부의 비위를 맞추었다. 서부 카지노에서 창부들을 끼고 놀던 사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리던 경, 완전히 멀쩡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군. 이건 내숭인가? 이중적인 남자군.’
기묘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페니는 저녁 식사 내내 리던 경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루나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자, 페니는 식사 후 티타임 자리를 고사했다.
“괜찮아? 어디 아파?”
루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원래 후작가에 자주 드나드니?”
“누구 말이야?”
“그…… 약혼자라던…….”
“아, 리던 경.”
페니는 식사 테이블에 있던 후추 병이나 양념 접시를 말하듯 윌리엄 드 리던을 거론했다. 그게 테이블 근처에 있긴 했지, 이런 투였다.
“필요한 게 있으니 왔겠지. 사실 거의 대화도 하지 않아. 별 관심도 없고 말이야.”
루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게는 적절한 약혼자니까 말이야.”
“……뭐?”
“그자는 멍청하잖아. 내게는 가문의 돈이나 타 쓸, 별로 똑똑하지 않은 약혼자가 필요하거든. 그런 남자는 돈만 주면 다루기 쉽지.”
루나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쓸데없는 말하지 마, 잘 모르시니까. 그자가 연기를 잘해서 싹싹한 남자인줄 알거든. 그자에 대해 자세히 아시면 걱정하실 거야.”
“페니, 난…….”
페니는 부드럽게 루나의 말을 끊었다.
“데릴사위를 구하는 건 몹시 힘든 일이야. 데릴사위로 들어오면 평생 여가주의 그늘로 살아야 하지. 앞날이 창창한 사내가 들어올 자리가 아니니, 내게는 그가 필요해. 난 우리 가문의 재산을 지켜야 하거든.”
페니가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니 루나는 면전에서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
페니의 야무진 얼굴이 오늘따라 야속해 보였다.
* * *
루나는 그 뒤 여러 차례 윌리엄에 대해 페니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 놈이랑 결혼하면 후회할 거야.’
그러나 페니는 루나가 약혼자에 대해 말을 꺼내면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루나. 난 지금에 만족하는걸.”
루나는 페니가 가진 어처구니없는 소문, 그것 때문에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길 바랐다.
‘꿈속의 일기장에서 페니와 디온 사이에 연이 있는 것 같았어. 영문은 모르겠지만 페니는 디온과 아키스가 제 은인이라 했지. 둘 다 미혼으로 보였고. 거기다 디온은 미래의 백작이고……. 그리고 페니는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윌리엄과 잘될 리 없어. 혹시 그놈이 페니에게 해악을 끼치나?’
루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페니, 혹시 디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페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져, 루나는 저가 무슨 말을 잘못 꺼낸 줄 알았다.
“갑자기 디온은 왜 나오는 거야?”
“아니, 인생사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리고 디온도 미혼이고 말이야. 외적인 조건을 떠나 그는 대단히 훌륭한 청년인데, 조금도 남자로 보이지 않니?”
루나는 시침을 떼고 페니를 떠보았다.
미래에 디온과 네가 약간 뭐가 있는 것 같은 사이야, 그렇게 말할 순 없었으니까.
“외적인 조건…… 이 그렇게 부족하진 않아. 디온의 출신도 그렇게 떨어지는 가문은 아냐.”
“……응?”
“……디온은 명문가의 후손이야. 유명한 기사도 많이 배출한 명문 백작가거든.”
“그래?”
“으응, 어릴 적에 몰락한 명문가의 학생이라 우리 집에서 공부하며 장학생으로 자랐어. 우리 집안과 대대로 연이 있었거든. 할아버지 대 디온의 집안이 크게 파산 했기에, 장남인 그는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의무를 가지고 있지.”
“…….”
“그러니 나와는 맞지 않아. 데릴사위가 되면 본가의 작위 승계를 못하거든.”
“그럼 그가 싫진 않은 거야?”
“……사실은…….”
페니는 토마토처럼 발간 얼굴로 작게 말했다.
“이미 그에게 한번 청혼을 받긴 했어.”
“뭐어?!”
루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무슨 말인데?”
“……알잖아. 달리아가 농간을 부려…… 내가 큰 소동을 일으킨 날. 그 스캔들이 일어난 후, 그 직후에 나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급히 약혼자를 구해야 했어. 그렇게 윌리엄과 약혼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을 들은 디온이 네게 와서 바로 청혼한 거야?”
그렇다면 디온은 자신의 출셋길을 포기하고 이미 한 번 페니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페니는 어떻게 지금껏 이런 말을 한 번도 안 했을 수 있지?
“그는 동정심으로 내게 청혼한 거야.”
페니는 눈길을 피하며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줄 남자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한 거야. 그는 내 첫사랑이었거든. 같은 집에서 자랐으니.”
안 봐도 선했다. 디온은 윌리엄의 평판을 알았을 거다. 급한 마음에 못된 사내와의 결혼을 막고자 청혼했고…….
‘망한 거군.’
루나는 페니를 설득했다.
“페니, 이건 알아 둬. 동정심으로 청혼할 만큼 멍청한 남잔 세상에 흔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나쁠 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대부분 네 편인 것.”
“…….”
페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뺨은 더욱더 붉어졌다.
“그리고 나라면…… 아키스가 날 동정심으로 사랑해 준다 했다면 그것조차 달가워했을 거야. 정말 마음이 움직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페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아키스는 그날따라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그녀가 불만스러웠다.
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아키스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뭐가 그리 근심스러워요. 누가 힘들게 합니까?”
“그냥요.”
루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키스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사실은 페니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있잖아요, 아키스.”
“네.”
“만일 가문에 사정이 생긴다면,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나와 혼인해서 살면 공작가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면 어쩔 거예요?”
“가문을 버립니다.”
그는 1초도 안 되어 대답했다.
“공작가야 당신이라는 보석에 비하면 그냥 쓸모없는 고철 같은 거지요. 그런 다음에…….”
“……다음도 있어요?”
“네. 아무도 공작가를 차지하지 못하게 방해할 겁니다.”
“그건 왜…….”
“내가 당신 때문에 공작가를 버렸다고 당신이 죄책감을 가지면 안 되니 가능하면 공작가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거기까지. 요즘 당신 적당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다고요.”
루나는 체온이 달아올랐다. 그는 이런 사내였다. 이런 격렬한 애정 표현이라니.
‘남의 애정사에 참견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윌리엄은 아니었다. 루나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빨리. 고민거리 말 안 하면 이대로 가두고 한 3일은 내보내 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내 방식대로 심문할 겁니다.”
주로 혀와 이를 쓰는 심문이 되겠지만. 아키스는 그 말은 삼켰다.
아키스가 루나의 턱을 치켜들며 그녀의 초록색 눈을 보았다. 루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은…….”
루나는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이 그렇긴 하군요. 페니가 신분이 너무 높고, 디온은 출셋길이 창창하니 페니는 신분을 낮춰 혼인해야 할 거고, 디온은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녀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테니까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외적인 이유일 뿐이고, 어떻게 해 줄까요?”
“네?”
“당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해결해 주죠.”
그 순간 루나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키스에게 맡기면 둘을 납치해서 서로 한방에 몰아넣고 가둘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뭐 그렇게 바로 뭘 어떻게 하겠다 그래요? 이 정도 실행력이면 나라도 세우겠어요.”
“당신이 한숨 쉬었잖아요. 더 뭐가 필요해.”
“……됐어요. 디온은 당신도 아끼는 부하잖아요.”
루나는 그가 농담을 했다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뭐, 가능하면 디온이 내 사람으로 계속 있어 주는 게 좋긴 하지요. 그는 몹시도 유능하고, 드물게 믿을 만한 사람이니.”
루나는 솔직히 생각하는 바를 토로했다.
“그냥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이렇게 참견해도 되나. 그게 걱정예요. 페니는 그냥 놔두라 하는데…….”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아키스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나직이 말했다.
“그 사람의 인생을 강제로 뒤틀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게 뭔데요?”
“글쎄요, 난 누군가가 내 뜻대로 움직여 주길 바랄 때, 눈앞에 선택지를 하나 더 놓아 줍니다. 아주 교묘하게 말입니다. 그러나 몹시도 매혹적인 선택지로 하지요. 당장이라도 발을 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지로 말입니다.”
“누군가를 조종한다고요?”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내가 제시한 선택지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 사람이 결국 갈 길이었단 말입니다. 그걸 운명이라 하지요. 다만 나는 은유와 암시를 통해 길을 보여 줄 뿐입니다.”
“……당신이 갈 곳 없는 데다 가족에게 팔린 나에게 결혼 계약서라는 선택지를 내민 것처럼?”
루나는 살짝 흰 눈을 뜨고 물었다.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그땐 당신에게 그게 유일한 길이었잖아.”
“네에, 당신은 가진 선택지가 많아서 좋았겠군요.”
루나는 이런 면이 가끔 그가 못된 남자 같다 생각했다.
투덜거리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 아키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덕분에 내 선택지도 하나로 좁아졌잖아요. 그때를 시작으로 당신이 내 모든 선택지를 빼앗아 버렸거든. 이젠 당신밖에 없는데…… 그게 행복하니 잘된 거지요.”
루나는 붉어진 뺨을 작게 끄덕였다.
“그날 하룻밤을 보내고 당신이 그대로 날 떠나게 놔뒀다면, 난 평생을 후회했을 겁니다. 결국 우리도 만날 인연이었으니 난 후회하지 않아요.”
루나는 어느새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각인한 이후, 이제 그들은 어차피 서로의 감정들을 다 숨길 수 없어 생각에 대해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나의 근원적 외로움을, 불행한 고아로 살아온 세월들을 모두 해소해 주었다.
“좀 자요. 당신 자면 나갈 테니까.”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전에 애플파이 좀 더 먹고 싶은데 가져다줄래요? 주방장이 낮에 만든 게 남아 있을 거예요.”
아키스는 요즘 그녀가 퍽 식사량이 늘었다는 것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눈에 띄게 자기 직전에 단 음식을 즐기는 그녀였다. 이와 위가 상할 수도 있는데.
“……바로 잘 건데 지금 먹으려고요?”
“휘멘이 두뇌를 많이 쓰면 살이 찌지 않는다 했으니 괜찮아요. 요즘 매일매일 일하고 있잖아요?”
“…….”
그건 휘멘이 좀 잘못 알려 준 것 같았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걸 바로 지적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살이 찔까 걱정하는 거예요?”
루나는 조금 시무룩해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뚱뚱한 나는 싫은가 보죠?”
아키스는 그것만으로 심장이 쿵 떨어져 쩔쩔맸다. 어느새 루나의 눈썹 하나만 꿈틀해도 그의 세상은 크게 뒤흔들렸다.
“……그럴 리가요.”
아키스가 그녀의 지시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에게 애플파이를 떠먹여 주며 자기는 살이 통통한 여자도, 정확히 말하면 통통한 루나가 되어도 얼마나 좋아할지에 대해서 길게 설명해야 했다.
“난 뱃살 잡히고 말랑한 것도 좋아해요. 정말 귀여울 것 같습니다.”
“그거 듣고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루나는 얼굴이 좀 빨개져서 괜히 툴툴거렸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냉정하고 차갑던 공작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그리하여 루나는 아키스의 충고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마침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디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곧, 마차가 들어왔다. 루나는 화단에 웅크려 앉았다.
“공작 부인.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마침 말쑥하게 차려입은 디온이 들어오다 힘이 없는 루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 물었다
루나는 그냥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생각할 일이 있어 정원을 좀 보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되었네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공작님과 싸우기라도 하셨는지요?”
디온이 놀라 물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 부인이라면 정신 놓을 듯 다 져 주는 공작의 요즘 모습을 잘 아는 디온이었다.
“그것이, 누구에게 말하기도 어려운 고민이라……. 남편이 알면 저를 채신머리없다 생각할 일이라서요.”
디온은 루나의 의도를 눈치채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사실은…….”
루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털어놓았다.
“페니 때문인데요. 좀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요.”
루나는 페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디온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았다. 그러나 그를 애태우기 위해 곧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렸다.
“그게 친구의 사생활 문제라 어디 말할 데도 없고……. 거기다, 남편이 페니 이야기를 평소에도 내가 과하게 많이 한다고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혼자 냉가슴만 앓고 있었어요.”
“…….”
그건 그랬다. 공작이 얼마나 부인에게 맹목적인지, 두 여인의 우정마저 질투하곤 했다.
루나가 이쯤 냄새를 피우니, 디온은 제발 알려 달라 거의 쩔쩔맸다.
“공작 부인.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혹여 그 분의 명예에 누가되는 일이라면 은유적이라도 괜찮으니 제발 알려 주세요.”
루나는 은근히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사실 페니의 약혼자의 행실이 몹시 나쁘다는 말을…… 이전부터 들었어요. 그런데 그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거든요. 남편과 내가 서부로 비밀 여행을 다녀온 걸 알죠?”
디온이 루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라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루나는 카지노에서 목격한, 페니의 약혼자인 윌리엄의 추태를 디온에게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여자를 쫓아다니던 부분을 강조했다.
디온의 얼굴은 파래졌다 창백해졌다, 이내 무섭게 굳었다.
“페니 영애께서는 이 일을 아십니까?”
“말 못했어요. 비밀 여행 중에 본 걸 어떻게 말하겠어요? 그래도 살짝 운을 띄워 봤는데……. 잘 안 됐어요. 더 자세한 증거가 있으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루나는 디온이 가장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말을 해 주었다.
“윌리엄에게 페니가 그다지 마음이 없는 것 같아,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더라고요. 관심이 없다고나 할까?”
“……그래요?”
“거기다 르시타 후작 부부도 사람이 워낙 좋으셔서 잘 모르는 것 같고요. 듣자 하니 디온이 그 가문과 오랜 연이 있었다 들었는데…… 내가 말을 꺼내긴 그렇잖아요? 비슷한 3대 명문가의 귀부인이 그 가문 약혼자의 흉허물을 지적하면 두 분이 많이 놀라지 않을까요?”
루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고 말했다. 디온은 역시 머리가 좋아,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르시타 후작 가문에서도 필히 이 일을 아셔야 할 것 같군요.”
“무거운 일을 맡기게 되어 정말 미안하네요.”
“당치도 않습니다. 공작님도 그렇지만 르시타 후작 부부는 어릴 적에 몰락 가문의 후손인 저를 가문의 연으로 보살펴 주시고 지원해 주셨지요. 비록 쓴 약이 될지언정 직언으로 은혜를 갚아야겠습니다.”
디온은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은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걸 루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도 할 줄 아는구나. 역시 맹추가 아닌 이상, 제가 좋아하는 사람 일에 사내는 진지해지는군. 내 감이 맞았어. 디온은 아직 마음이 남아 있어.’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그럼 오후 간식 시간이라 난 들어가야겠어요.”
루나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디온은 루나가 본 적 없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뛰어 다시 마차로 향했다.
돌아선 루나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루나는 페니의 약혼이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새로운 사내에게 구혼을 받았다는 소식도.
“당신 생각대로 된 거군요, 안 그래?”
그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뜻밖에도 아키스였다. 디온이 사흘 만에 퇴직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루나는 그가 의외의 추진력을 가진 데에 기겁했다.
“갑자기 그렇게 퇴직할 건 뭐예요?”
“난 그 심리를 알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면 좋아하는 여자가 부담을 느낄 거라 생각한 거지. 출세 코스에서 알아서 내려온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키스는 간략하게 말했다.
페니의 약혼 소식에 온 사교계가 뒤집어졌다.
사교계에서 미혼의 유망한 신랑들을 일컬어 은어로 ‘매물’이라고 했다.
최상급 매물은 아니라고 해도, 웬만한 집안에서 탐낼 만한 상등품 매물이 디온이었다.
명문가 출신이니 웬만한 집안에서 혼담을 넣을 만한 명분이 있는 셈이고, 곧 영지 대리인으로 가서 몇 년을 일하면 아예 영지 하나를 받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성품도 좋았고 잘생겼다. 마음만 먹으면 지참금이 두둑한, 좋은 집안의 영애와 혼인하여 영지 대리인 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다 버리고 여가주의 그림자 자리인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거기다, 페니에게는 스캔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놀라운 결합이었고 사교계는 그 일에 대해 연신 떠들었다.
곧이어 이 청혼의 비화도 밝혀졌는데, 디온이 페니에게 단단히 반해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고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평생을 르시타 가문에서 일해도 상관없다는 말까지 했다 한다.
그야말로 저의 모든 미래를 버리고 오로지 사랑 하나를 보고 가기로 한 셈이다.
* * *
“뭘 어떻게 한 거야?”
소식을 들은 다음 날, 페니가 찾아왔다. 루나는 시침을 뗐다.
“뭐가?”
“갑자기 디온이 우리 집에 찾아와 부모님과 두 시간 정도 길게 이야기를 하더니 바로 내 방에 와서 청혼했다고. 거기다 영지 대리인으로 가기로 한 거랑, 자기 가문의 가주 계승까지 포기하겠다 했어. 동생이 가문을 이으면 된다나. 난 그 남자가 미쳤나 했다니까.”
루나는 눈으로 웃었다.
“그래서 넌 수락했지? 소문이 파다하더라.”
페니는 뺨만 붉힌 채 가만히 루나를 보았다. 눈빛과 표정 가득 설렘이 감춰져 있어, 루나는 페니가 그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기로 했다.
“그날 바로 수락하진 않았어…….”
“그럼 언제 수락한 건데?”
“사실은 좀 긴 이야기가 있어.”
페니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그리고 페니가 들려준 청혼 후의 이야기에 루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윌리엄이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그 말을 왜 지금 해 주는 건데?”
“그거야 내겐 호위 기사들이 있으니까.”
페니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윌리엄은 갑작스런 파혼 통보를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실 생각은 못하고 페니를 쫓아다녔다 한다.
“뻔뻔한 남자 같으니.”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 날 카페에 들어가는 페니 앞에 나타난 윌리엄은 온갖 난동을 부렸다.
‘네 주제를 알아! 너같이 더러운 년, 나 아니면 만나 줄 사람이 있을 줄 알아?’
루나는 그 말에 치를 떨며 페니를 보았다.
“그자가 감히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서?”
“디온이 카페에서 뛰어나와서…… 음…….”
페니는 표정 옅은 얼굴 가득히 수줍음을 띄우고 눈만 굴렸다.
안 봐도 알 만했다. 디온이라고 성질이 없는 건 아니니까.
“바로 호위 기사들이 달려들기도 전에 가서 한 대 쳐 버렸어…….”
“어머. 로맨스 소설 같아!”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양 뺨이 소녀처럼 달아오른 지는 오래였다.
“그래서? 그래서?”
“……카페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좋아요. 결혼하죠,라고 대답해 버렸어. 아아, 내가 미쳤었나 봐.”
“미치긴 뭘 미쳐. 아주 잘했어.”
루나는 제 일처럼 난리가 나서 두 손을 흔들어 댔다.
이렇게 될 거였다. 제 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루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담뿍 묻어났다.
“그리고 그 윌리엄이란 사내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안 그래도 아버지가 가만 안 놔두신대. 수도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게 할 거라 하셨어.”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시타 후작이 가능하면 일을 크게 만들어야 감히 페니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내가 다시없을 것이다.
“고마워. 고마워, 루나.”
페니는 잠시 후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정말 멍청한 짓을 할 뻔했어. 그런 남자와…… 윌리엄과 혼인하려 하다니, 미쳤었나 봐.”
“손에 들어 있는 나쁜 패는 더 나은 패를 볼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는 법이지. 하지만,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디온이 네게 잘하기만을 바랄게.”
루나가 소곤대듯 말했다.
루나는 오래전에, 페니가 몹시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걸 알았다.
페니를 모략에 빠트린 달리아는 신전으로 쫓겨나고, 페니를 납치했던 사내는 시골로 쫓겨났지만 여전히 사교계에서 그녀가 듣는 말들은 부당하다 생각했다.
그날 밤, 루나는 아키스와의 잠자리가 끝나고 그의 옆에 누워 이마를 쓸었다.
“사람들이 페니의 결혼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댈 거예요. 전 페니가 그럴 자격이 있기에 멋진 남자를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요. 돈 한 푼 없는 사내를 데릴사위로 들이면, 이전과 비슷한 말을 들을 거예요.”
“비슷한 말?”
“데릴사위를 사 왔다느니, 그런 거요.”
“……뭐, 페니가 사위를 사 온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윌리엄과 디온은 고철과 옥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요.”
“아.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루나는 가만히 아키스의 눈을 보았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지는 몰랐는데.”
아키스는 디온이 공작가에서 나와 데릴사위가 되어 르시타 가문의 일을 돕기로 한 것에 납득하면서도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디온은 그가 중책을 맡기고, 각인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신뢰하는 부하였기 때문이다.
“페니는 내 첫 친구인 걸요.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자존심도 강하고, 주변인들을 많이 의식하죠. 사실 난 나와 페니가 당신을 좋아해 준다면 아무래도 좋지만…… 사교계의 여왕에게는 적절한 명예가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페니가 사교계의 여왕이 되면 좋겠다고요?”
“뭐, 그러면 이제 나도 사교계에서 기를 좀 펴고 살겠지요. 알다시피 당신이라는 잘난 신랑감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나도 꽤나 미움 받았잖아요? 단짝이 사교계에서 날아다니면 나도 최소한 무시는 안 당하지 않겠어요?”
아키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페니가 사교계에서 힘을 쓴다면, 그녀는 루나를 싸고돌 거고, 사교계 입방아와 텃새에서 루나를 지켜 줄 것이다.
게다가 아키스는 디온에게 은인이니, 디온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페니와 디온, 그 부부가 루나를 배신할 일은 요원할 터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여왕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보석은 빛나는 신랑감이었다.
“……디온에게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미소 지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당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아키스는 사르르 녹는 듯한 심장을 느끼며 그녀의 몸을 꼭 안았다.
“……혹시 내가 가르쳐 준 방법을 내게 쓴 건 아니지요?”
아키스는 잠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루나를 보았다.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고, 슬쩍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 딱 아키스가 쓰는 방법이었다.
“그럴 리가. 그러지 않아도 당신은 내 부탁 들어줄 거 아녜요?”
루나가 나긋하게 속삭이자 아키스는 금세 다시 흐물흐물 녹았다.
“그건 그렇죠.”
“응, 그럼 이제 그런 말 말고 굿 나잇 키스나 해 줘요. 잠옷입고 어서 자고 싶어요.”
몇 번이나 몸을 겹친 후라 온몸에 힘이 빠져 루나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키스는 한 말을 하면 두 말을 알아듣는 사내라, 루나를 위해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몸을 닦아 주고 실크 잠옷을 입혀 준 다음에 굿 나잇 키스를 했다.
루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키스의 입술에 쪽 키스하고 잠들었다.
‘……정말 되잖아?’
루나는 잠드는 순간까지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아키스가 가르쳐 준 선택 전략은 꽤 효과가 있었다. 심지어 아키스에게도.
한편, 아키스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 이마에 다시 한번 키스하고 옆에 누웠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귀여우니 알고도 속아 줘야지. 그리고 그녀를 위한다는 선택지는 언제나 선택할 수밖에 없군.’
* * *
아키스는 디온에게 막대한 퇴직금을 주었다. 그 안에는 비옥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온은 몹시도 감격했다.
“이 정도면 르시타 후작가에서도 기 펴고 살 수 있을 거다.”
그뿐이 아니라, 디온의 가치를 높여 주기 위해 아키스는 황궁의 직위도 하나 마련해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님. 이 모든 게 공작 부인 덕분이군요. 그러니, 앞으로 페니 영애와 공작 부인께서 계속 긴밀한 우정을 지켜 나가실 수 있도록 옆에서 노력을…….”
“아니, 그 노력은 안 해도 돼.”
아키스는 딱 잘랐다. 이미 너무 친해서 문제였다.
“부인을 꼭 붙들어 매, 그녀가 남편의 사랑으로 다른 데 눈 돌릴 틈 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안 그래?”
아키스는 지극히 사심을 담아 말했다.
부하를 위해 엄청난 거금의 재산 수여는 턱턱하면서 아내와 절친한 친구의 우정은 은근히 질투하는 것이 그가 가진 비밀스런 치졸함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디온은 영문을 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주, 이례적으로 디온은 일주일 만에 예작 직위를 받고 황궁에서 한 달간 황족들의 편지를 대필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황궁에서 일해 본 귀족의 경력은 대단히 귀한 것으로 쳤다. 거기다 외국 사절에게 쓰는 편지까지 대필해, 우아한 글씨체와 명문을 뽐내 역시 공작가의 부하 출신이라며 극찬을 받았다 했다.
“아니, 예작이야 봉록도 없는 직위니 백번 양보해 상관없다지만, 고관대작의 친척들부터 그 자녀들까지 황궁에서 일 하나 잡자고 얼마나 길게 줄 서 있는 줄 아나?”
서신을 읽다가 한참을 투덜거린 황태자는, 마지막 줄까지 꼼꼼히 읽더니 표정이 싹 변했다.
“아, 이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
그는 바로 작위를 수여를 하고 디온을 황궁에 불러들였다 한다.
“그런데 공작가가 무섭긴 한가 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이례적으로 자리를 빨리 만들었는지…….”
귀족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황태자에게 직접 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공작가를 많이 살피시나 봅니다.”
그러자 황태자는 초연한 듯한 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한다.
“공작이 거절할 수 없는 마법의 말을 사용했거든.”
“마법의 말이요?”
“으음, 그런 게 있네.”
황태자는 아키스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디온이 황궁에서 일하기를, 공작 부인도 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편지의 마지막 줄이었다.
‘그래, 이 제국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공작 부인이니, 그녀의 말을 따라야지. 공작 부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황태자는 공작 부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지만 그녀가 미워지거나 싫어지진 않았다. 언젠가 봄에 차를 같이 마시자는 말을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공작 부인의 능력이야.’
* * *
“음, 맛있다. 너무 맛있네요.”
“요리사의 신작입니다. 이번엔 이것 어떠십니까? 제철 복숭아 타르트입니다.”
집사, 알렉이 새하얀 접시에 담긴 파이를 내밀었다.
루나는 빛나는 끈끈한 잼과 생복숭아가 올라간 파이를 썰어서 한입 먹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맛은 천국 같았다. 그녀는 감탄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입술을 한 번 내밀었다.
“정말, 너무 맛있어요.”
“그렇군요.”
알렉은 요즘 다람쥐처럼 오물오물 식사량을 늘려 가는 공작 부인을 흐뭇하게 보았다.
이제 공작가의 분위기는 봄바람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요즘 요리사의 실력이 더 는 것 같아요.”
“공작 부인께 신작을 선보인다며 오늘 주방장이 콧노래까지 부르더군요.”
“다음 신작도 기대한다 전해 줘요.”
루나는 싱긋 웃고 말했다.
웃는 얼굴은 얼마나 사랑스러우신지. 알렉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치고 과한 몸짓을 하며 네! 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명문가의 집사의 품위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알렉이 접시를 정리하며 식당 밖으로 나오자, 주방장이 급하게 달려왔다.
“공작 부인의 반응은 어떠셨습니까?”
“네,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 입술을 내미셨습니다.”
“세상에, 진짜군요! 신작 만들 맛이 납니다!”
공작 부인의 감정 상태를 내밀하게 살피는 것도 고용인들의 의무였다.
그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그들은 공작 부인의 몸짓을 통해 정말 맛있다고 말할 때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눈치채고야 말았다.
무표정하게 맛있다고 하면 그저 그렇다, 그냥 먹을 만하다. 이런 뜻이었다. 입술을 내밀면 진짜 맛있다, 거기에 고개를 두 번 끄덕이면 맛있어서 거의 환희 상태라는 뜻이었다. 특히 고개 끄덕이기와 입술 내밀기까지 같이한 날은 최고의 찬사였다.
공작가의 요리사의 제과 제빵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는 공작 부인의 몸짓 사인을 받지 못한 날에는 시무룩하기까지 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내일 드실 간식 준비를 미리 해야겠습니다.”
주방장은 날 듯이 신작을 실험하기 위해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요즘 단 걸 정말 많이 찾으신단 말이지.’
알렉은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듯했다.
‘……충치를 걱정해 드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 * *
페니는 결혼 전에 화려한 가든파티를 열었다.
저녁에 열리는 가든파티는 밤에는 파자마 파티로 이어져, 내일 아침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참가 자격은 귀부인과 영애들에 한했다.
페니의 파티는 사교계를 뒤흔들었는데, 이는 페니의 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교계에 복귀하겠다’라는 의사표현이었다.
페니가 한때 행실 문제로 하도 욕을 먹은 적이 있어 사교계의 영애들은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그녀는 평판이 좀…….”
“근데 이제 와서 그게 뭐 중요하긴 하데요?”
사실 눈치 싸움의 본질은 그러했다. 솔직히 가고 싶은데, 먼저 누가 움직일 지에 대한 것이었다.
“거기다, 공작 부인도 오실 거 아녜요?”
공작 부인. 유명한 작가로도 알려진 그녀에게 들이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몹시 많았으나, 그녀는 가끔 마리벨 후작 부인의 티 파티에나 참석할 뿐 사교모임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뭐 사실 그 여자가 잘못해봐야 뭘 잘못했어? 그게 무슨 반역죄라도 돼? 난 참석할래.”
하나 둘 참석하겠다는 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 * *
루나는 파티 장소인 르시타 후작가에 일찍 도착해, 페니의 드레스 룸에서 몸단장의 마무리를 했다.
“어때?”
“정말 예쁜데.”
루나와 페니는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둘은 일부러 비슷한 드레스를 맞춰 입었다. 루나는 흰색, 페니는 검은색인 것만 달랐다.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은 각자의 부드러운 몸 선을 뽐냈고, 페니는 더 어른스럽고 우아해 보였으며 루나는 더 청순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둘은 두 손을 맞잡고 가든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다들 찬탄의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정말 예쁘군요. 3대 명문가 중 공작가의 안주인과 르시타 후작가의 여가주라니, 희대의 우정이 될 거예요.”
“마담 모이라의 신작인가요? 주문이 밀려 1년은 신작을 주문하지 못한다는데 어쩜 저렇게 멋진지…….”
루나는 주빈 못지않게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공작 부인.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꼭 좀 소설의 뒷이야기를 해 주세요. 저희가 정말 팬이라서요.”
공작 부인에 유명한 책의 발행에 관여한 루나는 진심 어린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루나의 단짝이 페니이니, 그녀의 주가는 더 올라만 갔다.
어느새 사람들은 과거는 잊은 듯 페니에게 접근해 친한 체를 시작했다.
“르시타 영애, 요즘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꼭 좀 우리 티파티에 언제 참석을…….”
그들은 루나 다음으로 주최자인 페니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천대받고 박대받던 사교계의 스캔들 영애, 페니는 없었다.
페니는 그녀들을 부드럽게 응대했다. 그러나 달리아의 추종자들이던 영애가 다가오자 우아하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아주 좋습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듣는 이의 신경을 쭈뼛 돋게 만드는 말이었다. 페니를 욕하거나 박대한 적 있는 영애들은 숨 가쁘게 모른 척하며 드레스 자락을 단장하는 체했다.
* * *
“밤샘 파티는 처음이지?”
“응, 가든파티가 끝나면, 거실에서 잠옷을 입고 게임을 하고 논다니. 이런 건 처음이라 너무 놀라워.”
“아키스가 뭐라 안 해?”
“사실. 그게…….”
루나는 조금 민망해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밤 보고 싶으면 잠깐 오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이따가 들른다고…….”
페니의 눈이 둥글어졌다.
정말 대단도 했다. 하룻밤 아내가 집 비우는 게 애가 타, 잠깐이라도 비밀 데이트를 하러 여기 들르겠다는 아키스나, 그걸 기뻐하는 루나나.
언제나 불타는 신혼 상태라고 할까.
“그도 참 대단해. 네가 외출하면 종종 데리러 오잖아. 조금이라도 네가 일찍 보고 싶어 그런 거지?”
루나는 가만히 뺨을 붉혔다. 페니의 말이 그대로 맞았기 때문이다.
“으음, 오늘 오전에 좀 피곤했거든. 오랜만에 파티에 간다고 오래 꾸며서 그런가. 아침에 좀 현기증도 났고. 그래서 아키스가 신경 쓰였나 봐.”
페니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약 사업 때문에 너무 신경을 쓴 것 아니야?”
“그 정돈 아냐. 좀…… 요즘 계속 현기증이 오고 단것이 당기네.”
“힘들면 바로 말해.”
“응, 하지만 지금 몹시 즐거워. 네가 주최하는 파티인걸. 아주 멋진 파티기도하고.”
루나는 페니가 과하게 신경 쓸까 미소 짓고 그렇게 말했다.
* * *
페니와 루나가 연회장에 돌아가자, 그녀들은 다시 벌떼 같은 영애들에 둘러싸였다.
“저어,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다들 묻지 못하던 것이 있는데요.”
한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해 봐요.”
페니가 우아하게 대답했다.
“두 분…… 계속 피부가 좋아지시고 있지 않나요? 저는 공작 부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는데, 그때부터 얼굴이 뽀얗고 아름다우셨지만 요즘은 점점 더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 같으셔서요.”
그들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루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 우리 둘은 특별한 화장품을 만들어 쓰거든요.”
“역시! 화장품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눈을 번뜩이며 모든 영애들이 루나와 페니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둘의 피부 비결에 대해 어떤 방법을 쓰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페니의 차례였다.
페니는 손뼉을 짝짝, 쳤다. 곧 하인들이 큰 테이블을 날라 왔다.
“이건 공작 부인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선물이에요.”
그들은 참석한 영애들 모두에게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주머니를 풀어 보니 각기 아름다운 케이스에 든 약 두 알씩과 카드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날짜와 장소였다.
[오늘부터 2주 후. 수도 6번가 파란 지붕 집. 오후 1시.]
“이 장소와 날짜는 뭐고, 약은 뭐죠?”
“안에 든 편지를 읽어 보면 알 겁니다. 질문은 더 받지 않겠어요.”
“편지 안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요.”
한 영애가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말했다.
루나와 페니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저녁에 파티가 다 끝나면 편지내용이 떠오를 겁니다. 그 뒤에 꼭 약을 복용하도록 하세요.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편지는 간단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루 뒤에 글씨가 떠오르는 마법이었다.
현재 주머니에 동봉된 편지에는 약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각기 ‘백옥환’, ‘장미 연고’, ‘루비트 씨앗 약’, ‘붉은 키스’라는 약이었다.
통일성도 없고 어쩌면 민망하게도 느껴질 수도 있는 이름의 약도 있었다. 그녀들은 눈을 크게 뜨고 주머니를 잘 챙겼다.
루나는 약을 나눠 주는 깜짝 행사를 하느라 감정이 조금 격양된 상태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 거릴 만큼 강한 현기증이 왔다.
‘내가 왜 이러지?’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나!”
페니가 놀라 루나의 몸을 받으며 같이 휘청였다.
그리고, 루나의 눈앞이 암전되었다.
“공작 부인께서 쓰러지셨다!”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파티에 참여한 여인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페니는 루나를 부축했다.
“어서 저택으로 모시고 주치의를 불러라!”
급하게 시종인들이 달려와 루나를 안아 올려 저택 안으로 옮겼다.
* * *
루나가 눈을 뜬 건, 두어 시간 정도 후였다.
“페니?”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걱정스런 표정의 르시타 후작 부인과 페니의 얼굴이었다.
“괜찮아, 루나?”
“네,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야?”
“파티장에서 갑자기 쓰러졌어.”
페니가 대답했다.
그랬지. 갑자기 현기증이 들어 머리가 어질어질했었다.
루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르시타 가문의 손님방 침대인 듯했다.
“십년감수했습니다. 몸이 아프신 줄은 몰랐어요.”
르시타 후작 부인이 걱정스런 얼굴로 루나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치의였다. 두 모녀는 주치의를 닦달했다.
“어서 진찰해 보세요.”
주치의는 급히 진맥을 해 보았다.
“현기증이 난 건 처음이신가요?”
“네. 요즘 좀 피곤하긴 했는데…….”
“흔한 일입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의사의 태연한 말에 세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이유 없이 쓰러진 적이 없는데요. 흔한 일이라뇨.”
“아, 현기증은 회임 초기 증상으로 나타기도 하니까요. 쓰러질 때 어디 부딪치지 않으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일시적인 증상으로 보이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의사가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다.
“……뭐라고요?”
루나는 귀를 의심했다.
“루나, 너 임신 중이었니?”
페니가 놀라 말했다. 르시타 후작 부인이 감탄했다.
“경사로군요! 축하해요.”
“아, 아니. 나도 몰랐…… 잠깐만, 정말 임신이라고요?”
의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달 정도 되신 것 같은데…… 모르셨나 보군요.”
“아…….”
루나는 입을 막았다. 놀라운 감정 다음으로, 당황스런 감정이 다가왔다.
‘언젠가는 아이가 생기겠거니 했지만…… 이미……?’
그러고 보니 요즘 유난히 단것이 당기고, 자기 전에 야식 생각이 많이 나고, 낮잠이 늘었다. 단순히 여행 후의 피로라고 생각했는데…….
‘여행 때는 몸이 너무 힘들어 달거리가 불규칙했으니까.’
사막을 헤매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여행을 했으니 매달 달거리를 제대로 할 리 없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 달거리를 건너뛰어도 그러려니 했다.
당황스런 마음이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가자, 다음번에 느껴지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기뻐. 나와 그의 아이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의사는 절대안정을 강조하고 나갔다.
루나는 벌써부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남자아일까, 여자아일까.
“정말 축하해, 루나.”
“아아, 좋은 날이네요.”
르시타 가문의 모녀는 각기 루나를 포옹하고 달래 주었다. 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루나?”
“아, 아니. 기분이 이상해서. 임신도 정말 놀랍지만. 난 엄마도 없고 친자매도 없으니까 임신 소식을 들을 때, 이렇게 옆에서 누가 축하해 줄 거라고 생각 못했거든. 나 지금 너무 기뻐. 그리고 축하 받아서 더 기뻐.”
루나는 코를 훌쩍였다. 커다란 녹색 눈이 금세 촉촉해졌다.
르시타 후작 모녀가 그 가련한 루나의 말에 녹아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 부인, 그런 말 마세요. 공작 부인이 우리 가문에 베풀어 준 은혜를 생각하면 가족이 아니라 은인으로 모셔야 할 정도라 생각합니다.”
르시타 후작 부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때 힘든 일을 겪었던 페니가 기대도 안 했던 번듯한 신랑감까지 얻었다.
거기다 그 번듯한 신랑감이 페니에게 단단히 반한 건 물론이요, 평생 페니를 보좌하며 살겠다 보필하는 자세로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일이 루나 덕분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원래 친딸처럼 예쁘다 생각하던 그녀인데 은인이기까지 하니 후작 부인은 고맙고 예뻐서 어쩔 줄 몰랐다.
‘얘는 정말, 루나…….’
페니는 루나의 말에 가슴이 찡해져 자신의 결혼식에 대한 생각 따위는 저 멀리 날렸다.
“이참에 내가 임신 중반까지 공작가에 가서 말벗을 해 주며 몸을 보살피는 걸 도와주면 어떨까?”
르시타 후작 부인은 손뼉을 쳤다.
“어머, 페니. 그래도 네 결혼식은 해야지. 아, 아니면 결혼식을 마치고나서 다 같이 우리 가문의 숲속 별장으로 가서 태교를 도우면 어떨까요? 그곳 공기와 경치가 이 세상에서 제일 절경이랍니다. 임신 내내 페니와 내가 옆에 있어 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
그녀들은 수선을 떨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말만이라도 기뻐요. 자주 놀러 와 주는 걸로 충분한 걸요…….”
루나는 발개진 코를 훌쩍거렸다. 페니가 루나를 포옥 끌어안았다.
‘아아, 이럴 때 보면 지켜 주고 싶어 미치겠다니까. 어쩌면 좋아.’
페니는 루나를 토닥이며 생각했다.
* * *
아키스가 르시타 후작가에 내렸을 때, 파티장에는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아키스의 등장을 눈치챈 귀부인과 영애들이 수선을 피운 덕이었다.
“세상에, 공작님이야. 이런 데까지 오실 줄이야.”
“부인을 데리러 오신 걸까?”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그를 본 영애들이 얼굴을 붉혔다. 르시타 후작가의 집사가 아키스를 안내했다.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사실은 공작 부인께서…….”
* * *
루나가 쓰러졌다는 말에 아키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는 급하게 르시타 가문의 집사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섰다.
“루나!”
루나는 드레스 차림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도 혈색은 괜찮아 보였다. 아키스는 급하게 그녀의 몸 곳곳을 살폈다.
“쓰러졌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괜찮습니까? 의사는?”
“진정해요, 아키스. 르시타 후작 부인께서 보고 계세요…….”
루나는 뺨을 붉히며 눈짓했다.
아키스는 그제야 페니와 르시타 후작 부인이 방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사는 이미 다녀갔어요.”
초조해 보이는 아키스의 기색을 읽고 르시타 후작 부인이 대답했다.
“별일 아니래요. 잠깐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고, 잠시 누워 있으니 괜찮아졌어요. 푹 쉬면 된대요.”
루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니와 르시타 후작 부인은 눈치 빠르게 루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의사가 정말 별일 아니라 했으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오늘 파자마 파티는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페니가 눈치 빠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루나는 아쉬웠지만, 고집부리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죠. 마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아키스는 루나를 한 번에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폭 안긴 루나는 뺨을 붉히며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두 모녀는 뺨을 붉혔다. 그리고는 상냥히 말했다.
“그래요.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서 쉬어요. 조만간 페니를 보낼게요.”
“아주 자주 들를 테니 걱정 말아, 루나.”
르시타 후작가의 모녀는 뜻 모를 눈짓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무슨 뜻이지?’
아키스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루나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팔을 꼭 잡고 집에 가자 재촉하기에 생각은 금세 뚝 끊겼다.
* * *
‘아키스가…… 좋아해 주겠지?’
집으로 가는 마차에서 루나는 아키스의 옆얼굴을 힐끔댔다.
“정말 괜찮아요, 루나?”
“네. 정말로요.”
루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문득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대의 유물인 마법 등으로 환하게 밝혀진 수도의 정경.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과 밤하늘까지 모두 특별하게 느껴졌다.
“집에 가서 간식 먹을래요. 파티다 드레스다 해서 오늘 제대로 못 먹었어요.”
배 속의 아이가 욕심쟁이인 것 같았다. 어느새 배가 출출했다.
“그래요, 먹고 푹 쉬어요.”
아키스는 그러고는 루나를 보았다.
“그리고 당분간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 말아요. 알겠습니까?”
“하루 푹 쉬면 낫는다니까요.”
“그래도 안 돼. 당신 몸에 문제 생기면 난 미쳐 버릴 겁니다. 알겠죠, 나 살린다 생각하고 그렇게 합시다.”
루나는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이런 사람이니, 분명히 일기장에선 아이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다를 것이다.
저에게만 보여 주는 이 다정한 모습을 아이에게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요. 그럼. 이삼 일 푹 쉬죠, 뭐. 일단 침대에 누워서 주방장이 만든 남은 간식 좀 먹고.”
아키스의 큰 손이 루나의 뺨과 머리를 쓸었다.
심장이 간질간질 두근거렸다. 이 비밀을 그에게 어서 말하고 싶어 통통 튀었다.
이제 내년엔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인생을 뒤흔들 일이 일어날 것이니까.
아키스의 품에 뺨을 기댄 루나의 입꼬리는 줄곧 부드럽게 올라간 상태였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마차는 루나의 마음속을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설레게 해 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외전 / 과거 편―
루나의 일기(2)
「11월 15일」
페니는 구빈원으로 봉사 활동을 다니느라 나와 놀아 줄 시간이 없어졌다. 선량하지도 않고, 바쁘지도 않은 나는 하릴없이 아키스의 서재에서 시간을 쓰곤 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오늘은 키스 안 할 겁니다.”
아키스의 서재 근처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숫자와 이상한 문양 같은 것이 잔뜩 적힌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키스의 말에 공연히 얼굴이 붉어진다.
“누가 그런 거 기대했대요?”
“자꾸 키스해 달라는 얼굴로 바라보기에.”
“…….”
내 뺨은 더욱더 붉어져 홍당무처럼 되었다.
나는 괜히 그의 책상 끝을 발로 툭툭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내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 * *
그날 나는 아팠다. 나는 아키스를 불러 달라 계속 짜증을 냈다. 아키스는 밤새 다섯 번이나 내 방에 드나들었다. 그가 평소보다 마법을 퍼붓고 나서야 나는 편해졌다.
“꾀병은 아니겠지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다 죽어 가는 내 마음을 알아요?”
“당연히 알죠.”
그는 코웃음 쳤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의 손목을 놔주었다.
“나가요. 나 이제 내발로 멀쩡히 걸어 다니니까.”
나는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일어났다.
축객령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발이 꼬여서 그의 품 안에 정확히 안착해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는 물과 가죽 냄새가 났다. 남성적이고 좋은 냄새였다.
“대단히 유혹적이군요, 인상적이야. 루나.”
그가 비꼬았다. 나는 화가 나서 그를 팍 밀었다. 물론,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우리의 입술은 겹쳐졌고, 그는 정신없이 내 얇은 입술을 물고 빨고 삼켰다.
그의 발기한 몸이 내게 비벼지자 나는 기겁했지만, 그래. 솔직히 흥분한 것도 인정했다. 그리고 그건…… 상상이상으로 묵직했다. 질감만으로도 말이다.
하는 건가? 하는 거겠지? 그래야 세상을 구할 수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 안 무서워.
내가 속으로 되뇌며 눈을 꼭 감았다.
“해, 해도 돼요. 해야 한다면서요.”
한참 후에 눈을 뜨자, 그는 나를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는 상태였다.
“왜, 뭐, 뭐 하는 거예요. 해도 된다고 하잖아요.”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와 아키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아키스가 문도 열지 않고 외쳤다. 그 목소리는 으르렁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황제 전하께서 급한 일로 보자 하십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젊은 황제가 여기까지 행차한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그대로 내게서 조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으니 내일까지 기다리라 전해.”
정말 이 사람은 내일이 없나? 황제를 그렇게 막 대해도 되나?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가 나직이 말했다.
“정확히 뭘 해도 되는 건데?”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참고 있는 거 말예요. 안 참아도 된다고요.”
“흥미로운 말이지만…… 지금은 참는 게 좋겠군요.”
“왜요, 마음대로 해도 된다니까? 당신한텐 손쉬운 일이잖아요.”
나는 또다시 거절당한다는 생각에 팩 토라져 말했다. 그는 무언가를 겨우 눌러 참으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그게 문제죠. 나도 사랑보다는 소유에 익숙하거든.”
그가 내 양 손목을 꽉 잡아 침대에 눌렀다. 그는 순식간에 내 위로 올라탔다. 새까맣고 큰, 맹수 같은 짐승에게 점령된 기분이었다.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내 눈동자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을 가지는 건 너무 쉬워.”
“그래서 뭐, 그래서 싫다는 거야, 뭐야.”
“가엾잖습니까.”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에게 남은 건 몸뚱이와 당신 자신뿐인데 그걸 빼앗는 건.”
그가 내 손을 놓았다. 손목이 화끈거렸다. 나는 손을 어루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 기다려요. 어차피 곧 하게 될 것 같으니까. 내 인내심도 한계지만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거든.”
나는 그에게 베개를 던졌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손쉽게 그것을 막았다.
「11월 17일」
최악이다. 최악이야. 정말 난 최악의 인간이다.
(스크래치 자국)
「11월 18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일기를 써야겠다. 몹시도, 길고 긴 하루였다.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페니가 나와 동행했다. 구실은 새 화장품을 산다는 구실이었다.
돈이라면 공작이 얼마든 내주었으니까.
그리고 길에서 새틴을 만났다.
어쩌면 그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았을까. 호화로운 복장에 반들반들한 피부. 그리고 여전히 뻔뻔한 표정. 악몽처럼 성긴 몸과 큰 코. 새틴, 이 바퀴벌레 같은 년은 지진에서도 무사했던 것이다.
“어머, 이게 누구야. 루나 아니니? 너 지금 공작가의 마차에서 내린 거니? 좀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어.”
* * *
최악이었다. 정말 끔찍했다.
나는 페니를 독촉해 급히 공작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책을 다 떨구고 침대 시트를 집어 던지고, 그리고 구석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의사와 신관, 그리고 디온까지 쫓아와 나를 살폈다. 한참 후에 아키스가 왔다.
“왜 웁니까? 밖에서 누굴 만났죠?”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내게 화를 내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근본적인, 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을 품은 목소리였다.
“내 인생을 망친 사람을 만났어요. 정확히는 내 인생을 망친 사람의 딸이죠.”
말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자가 당신에게 해코지를 했습니까? 뭐라 하던가요?”
나는 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정말 바보 멍청이다. 왜 새틴 앞에서 한마디도 못했지? 왜?
“그 사람은 내게 친절했어요. ……그리고. 기억하지 못했어요.”
“뭐라고?”
“그 여자는, 내 인생을 망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고요. 내 어런 시절을 망쳐놓은 자들이, 나를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들의 딸이…….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렸더라고요. 내가 공작저에서 나오는 걸 보고 쫓아 나왔대요. 혹시 공작가에 연을 댈 수 있냐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내 인생은, 공국에 팔려 가고 나서 연일 지옥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거의 10년 만에 재회해서 웃으면서 무언가를 부탁할 정도로, 가해자들에겐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키스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젯밤, 나는 아키스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이상하게 그 단단한 품은 몹시도 편했다. 나는 악몽에 꾸다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 * *
그 다음날도 저택의 사람들은 내 비위를 맞췄다.
“아키스가 널 울린 사람을 찾아내겠대. 그가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건 오랜만에 봤어.”
침대에 웅크린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페니가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내 가족이 페니의 반만 닮았다면 난 다른 인생을 살았을까? 다시 태어나서 어차피 고아가 된다면 페니의 집에 맡겨지고 싶었다.
그럼, 페니도 짐 덩이라고 날 싫어하려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다. 페니는…… 그냥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찾아서 뭐해. 살날 얼마나 남았다고.”
“넌 꼭 그러더라. 하루뿐인 삶이라도 소중한 거야. 그리고 난, 내 남은 삶에 널 만나서 기쁜걸.”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괜스레 뺨이 붉어져서 나도 그래. 라고 대답해 주지 못했다.
「11월 19일」
아키스는 가만히 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정원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왜 읽지 않았지.
생각해 보니 한동안 사랑을 꿈꾸는 일도 잊었었다. 지금은, 음, 사랑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다시 태어나 시간이 충분하다면 천천히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싶다.
“산책이나 할까요.”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나섰다.
내가 뭐라고 지껄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괜스레 내가 한번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워서, 내가 너무 싫어서. 그래서 그 기분을 감추기 위해 그에게 계속 둘러대는 헛소리만 했을 것이다.
“페니가 그렇게 잘해 줍니까?”
정신 차려 보니 그가 내게 그리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니는 아주 예쁘고 반질반질한 타원형의 심장을 갖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차분하고 또, 영리하고, 세상의 풍파에 깎여 나가지 않았으니…….”
나는 소심하게 말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렇지만, 내 심장은 아마 별 모양일 거예요. 많이 깎여 나가서요.”
그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거다. 난 내가 못생기고, 신경질적이고, 또 올바른 생각이라는 걸 못하는 것이 고생해서 그렇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그게 그제 난동 부려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것보다 편했다.
이윽고,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부터 밤이 되면 당신 심장을 떠올려야겠군요.”
내 뺨은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떻게 하면 사랑에 빠지나, 나는 그걸 고민했다. 어쩌면 나는 그 답에 근접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정답이라는 것처럼 귓가가 지잉, 하고 울렸으니까.
어쩌면…….
「11월 24일」
했다. 처음이었다.
어, 으, 음…….
좋았던 것 같다.
아니, 좋은 것 이상이었던 것 같다. 눈앞에 별이 번뜩이고.
아 몰라.
이 부분은 자세히 쓰지 않겠다. 몰라. 못하겠어.
―외전 / 과거 편―
루나의 일기(3)
「11월 24일」
아무래도 조금 더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아 추가해서 일기를 쓴다.
어제 나는 아키스의 방에 들어갔다. 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그가 있었다.
그가 아파하는 건 처음 봤다.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병마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밤을 거기서 지샜다. 그리고 아키스는 나를 곱게 나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역시 바보 취급하는 거 아냐?’
어이가 없었다. 난 여자도 아닌가? 나는, 그에게 따지러 가기로 했다.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문 너머에 그가 서 있었다.
남녀 간의 신호란 가끔 말이 필요 없는 것인가 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내 방 안으로 들어서며 키스하고 있었다.
“으음, 응.”
그의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고, 내 안의 모든 감각들이 그를 향해 미쳐 날뛰었다.
사실 어젯밤 일어난 일이 아직 믿겨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음, 선 채로 여자 속옷을 그렇게 벗겨 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아키스.”
“안 돼. 지금 당장 해야 돼. 더는 못 참아.”
“그러게 누가 지금껏 참으래요?”
“평소엔 당신 독설을 뱉는 입이 꽤 귀여운데, 오늘은 대화보다 다른 일이 급해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입술을 막아 버렸다. 음, 당연히 입술로.
아키스는, 그는 너무 급해 내 옷을 다 벗겨 내지도 않았다.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타액과, 혀와, 애무로 엉망이 된 채로 첫 경험을 했다.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삐걱, 삐걱. 침대가 흔들렸다.
온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갔다. 눈앞이 눈물에 흔들렸다.
내 몸이 이만큼 흠뻑 젖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리가 부들거렸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앗, 아키스. 아아……!”
“……이게 참는 거란 말입니다. 제발, 루나. 몸에 힘 빼요. 착하지.”
“이렇게 큰 게 힘 뺀다고 될 일이야? 아, 정말, 아파…….”
고통은 서서히 묘한 쾌감이 되었다.
그날 밤, 나는 그가 부서진 댐 같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오래 참아 온 욕구는 내 위로 고스란히 부서져 내렸다. 마치 깊은 숲에 사는 맹수처럼, 아키스는 급하게 저를 살릴 먹이를 먹어 치웠다.
난 먹이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랬다는 거다.
……그리고. 좋았다.
아침에 되어 나는 물소리에 눈을 떴다.
온몸이 뜨겁다. 이불을 내리고 몸을 살피니 언뜻 봐도 이곳저곳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때, 내 개인 욕실에서 그가 나왔다.
“세상에…….”
내 입에서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그는 전라였다. 그런데, 아침 햇살 속에 드러난 몸이.
음…… 꽉 짜인 몸이며, 조각 같은 피부며. 아니, 늘 서재에 있는 모습만 보았는데 어떻게 몸이 저럴 수가 있지?
“깼어요?”
“깨, 깬 게 아니라. 그건…… 옷은…….”
“내 옷은 이미 엉망이라.”
그가 피식 웃으며 바지를 입었다.
“아직 당신이 자는 줄 알았는데.”
잠 다 깼거든요. 나는 이불로 붉어진 얼굴을 가린 채 눈만 빼꼼히 내놓았다.
“시녀를 부를 겁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나 모르겠군요. 어차피 서로 다 준 몸인데.”
뭐 그런 표현이 다 있지? 누가 주고받는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뭐, 뭐예요. 벌써 후회해요?”
“후회할 단계는 지난 것 같은데.”
그가 나를 보며 못된 남자답게 입술을 비틀어 올려 웃었다.
“그러니 이제 끝까지 가 봅시다. 잘되었군요. 적어도 둘 다 동반자 없이 세상의 끝에 가진 않을 것 같으니.”
나는 그에게 베개를 던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심장 떨림이 자꾸 멈추지 않아서…… 정말, 곤란했다.
「11월 26일」
내 몸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튿날, 나는 하루 종일 발열이 일어나고 몸이 가려웠다. 눈을 떠 보니 내 가슴엔 검은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모두가 난리였다.
“세상에, 정말로 일어났군요. 각인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기분 나쁜 남자를 보았다. 용의 신관이라 했나.
그자는 아키스의 몸에 피어난 똑같은 문양을 보고 울기까지 했다.
“아아, 드래곤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용께서는…….”
그자는 내게도 문신을 한번 보여 주면 안 되냐고 했다가 아키스에게 한 대 맞고 쫓겨났다. 으음, 맞을 만했다.
그리고 이제 아키스의 병을 내가 옮겨 받는 일을 시작할 것이라 한다. 내게 그 말을 하며 아키스가 뜻밖에 쓸쓸하고 우울한 표정을 지어서 놀랐다. 바보 같은 남자 같으니.
“자기가 하자 그래 놓고 왜 이래요? 병을 옮겨 받든 아니든 나는 죽어요. 그거 모르고 시작했나? 빨리해요, 뭐든. 나 아프면 당신 가만 안 둘 거예요. 마법이든 진통제든, 효과 있는 걸로 달란 말예요.”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따지니 그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하여간 웃기는 남자다.
웃기고, 신경 쓰이는 남자.
「11월 30일」
나는 매일을 아키스와 지낸다. 아침을 먹고 저녁을 먹고. 한 침대에 들어가고.
밤이면 그걸……. 하고.
“마법이 잘 듣는 체질이십니다. 이 정도 차도를 보이시다니 기대 이상입니다.”
마법사들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
두 번째 달라진 점은 디온과 페니, 주치의 외에도 대화할 사람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자는 두 번째 만남에도 몹시 인상이 나빴다. 또다시 흙발에 거친 차림으로 내게 걸어 들어왔으니까.
그자를 두 번째 만난 날, 나는 아키스의 서재 한구석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뭐야, 또 너냐?”
휘멘이라는 이름의 사내.
저번에 나를 기절시킨 사내가 날 보자마자 한 말이 그거였다.
“또 당신이에요?”
나는 대뜸 그렇게 대답했다. 지기 싫어서 한 대답이었다. 그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여자가…….”
그는 아키스를 보고 물었다. 그러더니 납득한 듯 휘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더 살 수 있게 돼서.”
“말조심해, 휘멘.”
아키스가 나직이 그를 위협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 하는 거지?”
그가 내 일기장에 관심을 보였다.
“보지 마요.”
나는 짜증을 내며 책을 덮었다.
“뭘 쓰는 건데? 일기?”
“몰라도 된다니까.”
내가 그를 팩 노려보았다.
“조심해라. 그 여자, 무니까.”
아키스는 휘멘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내가 그 말을 지금 무서워할 것 같냐?”
휘멘은 어이 없어하며 대답했다.
“근데, 너 어디서 나 본 적 없나?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별 수작을 다 거네요. 저리 가라니까!”
내가 날카롭게 말했다. 휘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휘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등을 돌렸다.
“휘멘, 다음번엔 그녀를 더 예의 바르게 대해.”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날카로운 눈이었다.
* * *
그날 저녁 식사는 휘멘이 동석했다.
휘멘은 계속 귀찮게 굴었다.
“정말 낯이 익은데.”
그러더니 한참 후, 그가 내 심장이 떨어질 만한 말을 내어 놓았다.
“……뤼베유 영지의 시골 여자……?”
뤼베유 영지는 내가 도망친 시골이었다.
내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 순간 그의 기울인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얼어붙어 입을 열었다.
“……걸인?”
우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손가락질 했다.
몇 해 전이었다.
나는 동네 잡화점에 약초를 팔러 갔다. 그때, 한 남루한 사내가 망토와 후드를 걸치고 잡화점에서 흥정하고 있었다. 딱 보니 남자가 늘어놓은 약초들이 입이 벌어지게 비싼 것들이었다.
‘바보 아냐? 이런 시골 동네에서 이걸 왜 팔아?’
보아하니 뜨내기 여행자가 급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골 영지의 찢어지게 가난한 잡화점 주인은 열심히 가격을 후려치고 계셨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뭘 모르나 본데?’
정말 먹고 죽을 것도 없는 시골이 되면 그 동네의 유일한 잡화점 주인과 영주 부인이 돈 한 푼 때문에 치열한 흥정을 하는 일이 정말로 있었다. 뤼베유 영지는 정말 놀라운 곳이 아닐 수 없다.
내 그렇게 막장 영지는 제국, 공국, 소국인 왕국을 통틀어 다시없을 거라 장담한다.
“또 사기 치고 다녀? 나 참, 그걸 은화 5개로 사려 하다니. 아무리 이 영지가 볼 것 없는 곳이라지만 외부인한테 못할 짓이 있지. 그리고 저번에 나한테 떼먹은 돈은 기억도 안 나나 보오.”
나는 잡화점 주인을 크게 혼냈다.
그리고 나그네에게 시간 낭비 말고 나가라 말했다.
“내 받을 약초값 대신 이걸 가져가지.”
그리고 은근슬쩍 장미수를 한 병 가지고 나왔다.
장미수는 탄 피부에 아주 좋은데, 나는 매일 약초를 따고 바깥일을 하느라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주 사람 잡네. 우리 가게에서 가장 비싼 화장품인데! 빚진 약초값이 되어 봐야 얼마나 된다고!”
당연히 우리 죽는 소리는 둘째가라 서러운 잡화점 주인이 따졌다. 자연스레 나와 드잡이질이 시작된 건 당연한 모양새였다.
“안 팔아, 안 팔고 안 사니 어서 나가!”
결국 이번에 드잡이질에 진 건 나였다.
“그 장미수, 필요한 거였소?”
걸인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언뜻 본 얼굴은 상당한 미남자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는 다시 후드를 썼다.
“왜요? 그쪽이 줄 거 아니면 묻지 마세요. 이런 시골 마을에선 그런 귀한 약초 팔아도 돈 못 받아요. 다른 동네 가세요.”
나는 혀를 찼다.
“……이쪽으로 쭉 가면 공국 수도로 가는 길인데, 기다리다 지나가는 마차가 있음 태워 달라 해 봐요. 며칠 가면 소도시가 나올 겁니다. 뭐, 나도 직접 가 본 적 없어 들은 거지만.”
“이 도시엔 여관도 없소?”
“도시? 여기의 어디가 도시예요? 당연히 없지. 농가에 돈 좀 내고 마구간을 빌리면 모를까.”
“곤란하군. 지금 정말 한 푼도 없소. 지갑을 잃어버렸거든. 당장 풀칠할 돈만 마련하려 한 건데. 오늘 밤 머물 돈도 없어서 말이야.”
“알아서 야숙하세요.”
나는 쌀쌀맞게 말하고 갔다. 그런데 그 사내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장미수는 왜 필요한데?”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피부가 이렇게 시커멓고 몸에 점 많은 여자를 보고 못하는 말이 없네요! 당연히 탔으니 바르고 피부라도 뽀송해지려하는 거지.”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늦었다. 또 늙은 사냥개를 풀어 날 잡으러 올지도 몰랐다.
그는 한참을 피식 웃더니 내게 레시피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루비트 씨앗 약?”
“그걸 써 봐. 그럼 될 거요.”
“돈 돼요?”
“될 거야. 한번 만들어 보라니까.”
나는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쪽으로 와요.”
나는 그자를 내 산속 비밀 약초밭으로 데려갔다. 그 안에는 작업용의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다.
“오늘밤 여기서 머물고 가요. 예전에 산지기가 살았던 오두막인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오늘은 재수 옴 붙었다 생각하고 다신 이런데 실수로도 오지 마요. 먹고 죽을 것도 없는 시골 동네라구요. 보아하니 가난해서 돈 많이 벌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긴 뭐요?”
“내가 푼돈벌이로 개간한 약초밭이에요. 뭐, 나 혼자 하느라 그다지 손이 많이 가는 건 못하지만. 저기 바구니 열면 마른 빵 몇 개 있으니 알아서 드시고.”
그리고 나는 뒤돌아 갔다.
그 뒤, 그 남자를 오두막에 두고 온 일을 잊어버렸다.
나중에 루비트 씨앗 약을 만들어 먹어 보았더니 피부가 하얘지기는커녕 일부러 태운 빛이 되었다.
잘 익는 약이라니, 장난하나. 난 그 남자한테 온갖 욕을 했다. 이거 또 어떻게 그 비싼 장미수를 구한담.
과거 회상을 마친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때 그 사기꾼 아냐? 여기 왜 있는 거야?”
“누가 사기꾼이야? 그보다 약초 키우던 네가 왜 있는 건데?”
우리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요란스레 따졌다.
“사기꾼 맞잖아. 피부에 좋은 약이라고 속여 까매지는 약을 만들게 했잖아!”
뭐, 그 뒤 그 약이 카바레 무희들에게 팔리는 약이라는 걸 알고 행상인에게 팔아 푼돈 좀 벌었다. 휘멘은 되려 내게 큰소리였다.
“너야말로 왜 거기 없었는데?”
“……뭐?”
“그 뒤, 그 산속 오두막에 갔는데 네가 없었다고.”
휘멘의 말인즉, 그러했다.
그는 이튿날, 오두막에서 나와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런데 산속에 내가 개간해 놓은 약초밭을 보고 말을 잃었단다.
‘이걸 혼자서 개간했다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랬다. 그 안에는 까다로운 수많은 종류의 약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뭐, 키우는 게 어렵다고. 별거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2시간에 한 번씩 물 주고, 또 한 달에 한 번씩 수확하고 계속 옮겨 심고. 노동력은 공짜니까.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근데, 그게 왜?”
“약초 키우기에 워낙 재능 있는 여자 같아 계속 생각나서 데리러 갔는데, 오두막은 텅 비어 있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입을 꾹 다물더군.”
“……아.”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지?
아, 끔찍한 시어머니. 그 할망구가 고뿔이 났다. 그 할망구를 간호하느라 또다시 성에 감금당했다.
내가 성안에서 나오지 못하면 상황이 빤하니 영지민들도 입을 다물었을 거고.
역겨운 치들이다. 다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면서도 그런 일에는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뭐에 재능이 있던가?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내 뺨이 붉어졌다.
“근데 그 약은 왜 만들라 한 건데?”
“루비트 씨앗 약은 고대 미용약인데 그걸 먹으면 피부가 안 탄다고. 밭일할 때 먹으라고 한 거였지!”
나는 입을 벌렸다. 진짜?
“그것도 설명해 줬어야지. 웃기는 남자네?”
“……지금 내 탓 한 거야? 말이 돼?”
재회의 충격에 휩싸여 있느라 나는 그날 아키스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식탁에 스푼을 탁, 내려놓았다.
“내가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네가 잘 알고 있다니 의외인데, 휘멘.”
* * *
인연은 결국 만나는 건가? 신기하기도 하다. 한 번 엇갈렸어도 우리가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다시 만나 매일 싸우고 있다는 게.
휘멘은 그 뒤로 나의 말장난 상대 겸 게임 상대가 되어 주었다.
“당신 보기보다 재밌는 것 같아.”
나는 휘멘을 보며 말했다.
“내 일기장 보려 한 건 용서해 줄게.”
“……그거 참 고마운데.”
휘멘은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12월 1일」
좀 귀찮아졌다.
아키스가 자꾸 내 과거를 물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세상만사 관심 없는 사람이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공국 시골에서 살았다구요. 농사짓고 살았다는데 뭐가 필요하죠?”
“내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당신 살아온 세월을 하루 단위로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숨길 겁니까. 이전에 어디서 뭐 하고 살다 왔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하, 언제는 조건 없이 나이기만 하면 뭐, 신부니 뭐니 될 수 있다면서. 왜 말이 바뀌어?”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심장이 따끔했는데 많이 아프진 않았다. 질투? 그런 감정.
갑자기 이런 감정 전이가 일어날 때면 곤란하다. 각인이니 뭐니, 진짜 웃겨.
“조사해 봐요. 그 이튿날부터 하루 종일 그쪽하고 한마디도 안 할 거니까. 그리고 방에 들어올 때마다 베개 집어 던지고 당신이 잠들면 때릴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나의 눈을 보았다.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예전이랑 똑같이 무뚝뚝하면서. 그러면서 요즘 신경 쓰이는 눈빛으로 쳐다봐서 기분 이상하게 만든다.
“그쪽이 아니라, 아키스.”
“……아키스.”
“그래. 잘했어요.”
아키스는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적어도 그때 당신을 괴롭힌 사람과 무슨 관계인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당신 본명은 도대체 뭐지?”
그는 내가 페니와 외출을 했다 울며 돌아온 날을 지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꽤 신사적인 남자인가 보다.
여적 내 뒷조사를 안 한 걸 보면.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요.”
나는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나중에 언제?”
우리에게 나중에라는 게 없을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아는 아키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가 된 후에.”
내가 죽은 후에.
곧, 그날이 다가올 테니까.
나는 그 말을 가슴에 묻고 속삭였다.
난 내가 낡고 초라한 곳에서 온 여자라는 걸, 고생만으로 가득 찬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걸, 그가 몰랐으면 했다.
만일 그가 모든 걸 안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그는 나를 떠올릴 때 그 을씨년스러운 시골 정경만 생각하겠지.
그냥 차라리 내가 했던 못된 말만 기억해 줬으면 했다.
그러면 내가 죽은 후, 나를 떠올릴 때 따끔하게 내 기억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 것 아닌가.
그거면 되었다. 아주 가끔이라도 좋다.
‘나 죽고 일이 년 뒤에 죽는다고?’
그러나 왠지 그가 나처럼 병으로 죽진 않을 것 같다. 그 대단하신 공작가의 혈통이잖아? 드래곤이 어떻게 해 주겠지.
내가 풀이 죽자, 그는 나의 눈치를 본다. 이 남자가 내 눈치를 보는 건 지금도 적응 안 된다.
나는 그냥 침대에 몸을 묻었다. 그는 이불로 나를 돌돌 감싸고 그대로 폭 끌어안았다.
“그냥 자.”
그가 속삭였다.
“꿈도 꾸지 말고 그냥 자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죠. 무슨 이야기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잠들었다.
「3월 1일」
어느새 봄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은 쏜살처럼 지나갔다. 난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죽기 전의 휴가인가.’
나는 날이 갈수록 초연하고 담담해졌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슬슬 내게 정을 떼려는 듯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처음엔 그런 사람들이 미웠지만, 날 돌보던 간호사 중 하나가 나를 울 것 같은 눈으로 보는 걸 발견한 날 이후로 난 가능하면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특히 의외로 휘멘이 초조해졌는데, 그는 조금이라도 내 수명을 늘릴 방법을 알아보겠다 한다.
“뭘 그리 난리야? 이렇게 경거망동해서 앞으로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나 언제 봤다고 정들었어? 안 죽을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나는 휘멘과 서로 막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거침없는 꾸짖음에 그는 이번에도 몹시 억울해했다.
“그때 내가 널 데려가는 데 성공했으면 무슨 사이가 됐을지 어떻게 알아?”
“아, 그건 그렇지.”
생각해 보니 참 억울했다.
“근데 어차피 당신, 가난하잖아. 나 데려가도 밥이나 잘 사 먹였겠어? 당신도 나 부려 먹으려 한 거 아냐?”
내 말에 휘멘은 억울해 기절하겠단 표정이었다. 나는 그를 놀린 게 너무 재미있어 작게 웃었다. 그는 생각보다 순진한 남자였다.
페니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아하하, 그가 가난하다고? 진짜 널 어쩌면 좋니, 루나. 그는 정말 부자야. 좀 괴짜라 떠돌이 팔자라 그렇지. 그래도 너한테 정 들어서 그런지 이번엔 오래 머물러 있는 거야.”
“부자라고? 근데 왜 그렇게 고생하고 살아?”
“글쎄.”
그녀는 알 듯 말 듯 웃었다.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페니의 집이 그렇게 부유했다 했다. 공작가 다음이었다고 했나? 그녀의 부모님은 여행을 가다 낙석으로 인한 마차 사고로 즉사하셨다 한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말해 주는 페니의 얼굴은 몹시 어두웠었다.
“그거 아니, 루나?”
“뭐가?”
“사람 인연 없고 남자 인연 없는 여자 팔자는 말이야, 그 여자의 진짜 인연이 질투해서 연애를 못하는 거래. 자기 진짜 상대를 만날 때까지 다른 사람 만나지 말라 하는 거지.”
“그게 뭐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키스는 질투심이 엄청나지 않니?”
“……그게 뭐.”
페니는 부드럽게 말했다.
“때로 사람은 고통스런 과거를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게 도움이 되지. 그러니까 너도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잖아.”
나는 페니의 이런 면이 좋다 생각했다.
「4월 2일」
내 몸이 급변했다.
“마법이 너무 잘 통해서 내성이 생겼어요. 이대로라면 생명 유지 마법도…….”
“곧 병에 대한 통증도 시작될 겁니다. 공작님이 미쳐 버리실 거예요.”
“어서 방법을…….”
나는 잠이 늘어났다. 생명 유지 마법의 부작용이라 했다.
아아, 얼마 안 남았구나.
예상한 일이지만 막상 다가오자 모든 것이 무서웠다. 아키스는 시간의 대부분을 내게 붙어 보냈다.
내 병실은 기묘한 모양으로 변했다. 한편엔 나의 침실과 의료 시설, 나머지 방의 반은 아키스의 서재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는 늘 복잡한 글자와 수식을 연구한다. 고대어를 보면 안 된다는 법은 이럴 땐 예외인 모양이다. 그는 휘멘과 시간과, 미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했다.
대부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다.
“많이 아프게 될까요?”
나는 아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많이 고통스러우면 꿈 마법을 사용해 줄게요.”
그가 속삭였다.
“그러면 고통은 없을 겁니다. 좋은 꿈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거고요. 내 고통까지 짊어지게 하지 않을 겁니다. 하루라도 덜 아프도록, 어떻게든 할 겁니다.”
아아, 난 정말 구제 불능의 여자인가 보다. 그 순간 그가 내게 온 진심을 다 보이고 있는 게 좋았다.
부서질 것 같은 그의 모습이 좋았다.
그저, 두렵고, 아프고, 떨렸지만.
그 와중에 그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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