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11화 (12/15)

11

며칠간의 여행 끝에 그들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휘멘은 어딘가에 멈춰 서 나침반을 확인했다.

“여기야. 도착했어.”

휘멘과 아키스가 사용하는 나침반은 몹시 신기했다.

일반인은 읽을 수도 없는 복잡한 숫자와 문자가 적혀 있었고, 그 위로 가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사막의 끝이로군요.”

루나가 말했다.

이 사막이 바다라면 그들은 지평선 앞에 있는 셈이었다. 그만큼이나 루나에겐 이곳이 도시에서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던전을 열게.”

휘멘이 입 안으로 작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사막의 모래 바닥에서 작은 회오리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계단이 생겨나 있었다.

“……와.”

루나는 그것이 몹시 신기해 눈을 크게 뜨고 구경했다.

아키스가 입구가 안전한지 한번 살피고 나서야 루나가 들어갈 수 있게 비켜서 주었다.

그는 휘멘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지하형 던전이 가장 탐색이 어려운데 용케도 해냈군.”

“난 감이 좋아서 말이야.”

휘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갔다.

휘멘이 이미 책이며 마도구들을 다 털어 버린 터라 지하 던전은 한산했다. 그러나 오래된 촛불이며 책장, 책상 등 연구 도구들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음산해……. 공포 소설의 배경을 실제로 보면 이럴까?’

루나는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유령이 튀어나올 것같이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긴 통로형의 던전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루나가 아키스의 옷깃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 지하 연구실이 고대 마법사들이 쓰던 실제 유적이란 말이지요?”

“맞습니다. 고대 고위 마법사들의 고위 연구실. 고대 마법사들이 자신만의 모든 지식과 비술, 주문들을 꽁꽁 숨겨 두는 그들의 지식의 정수이자 보고지요.”

루나는 다신 못할 구경이란 생각을 했다.

“구조가 특이하네요. 마치 미로처럼 길어요.”

루나를 힐끗 본 휘멘이 대신 대답했다.

“원래 이 방을 하나 지날 때마다 함정과 암호문들이 있었어. 내가 전부 푼 거고.”

“……그래서 당신이 한동안 두문불출했군요.”

“연구할 게 많더라고.”

휘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이쪽에 무지한 루나가 봐도 그가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이 방이야.”

휘멘은 던전의 끝에 멈춰 섰다.

“그리고 이 벽을 건드리면…….”

휘멘은 먼저 앞서 나가 그가 말했던 암호 장치를 가동시켰다. 곧,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신묘하게도 투명한 마법진이 생각났다.

‘이건…… 실레노스의 마법진과도 비슷해…….’

루나는 멍하니 눈을 뜨고 그것을 보았다. 투명한 마법진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글자가 모두 날아올랐다.

“글자가 1초에 두 번씩 바뀌어. 그리고 암호는 모두 7가지 종류지. 영상석을 비롯한 모든 게 다 안 먹히더군.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았어. 결국 번역가들을 데려와 직접 푸는 수밖에 없었지.”

아키스는 납득하고 혀를 찼다.

“……할 수 있겠습니까, 루나?”

루나는 어느새 홀린 듯 그 글자 패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휘멘이 입을 열었다.

“암호 규칙을 푸는 법은…….”

“잠깐만요. 괜찮아요. 알 것 같아요.”

루나는 홀린 듯 그것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여. 읽혀…….’

루나의 눈에는 모두 그 단어가 똑똑히 들어왔다. 거기다 고대어로 된 글자는 한번 읽히고 나면 머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달빛, 어둠, 태양, 비단, 황금가지 사슴, 붉은 갈기 사자…….’

루나는 침착하게 그 모든 단어 들을 하나하나 인지했다. 빠른 속도로 계속 단어가 바뀌지만, 공통점을 가진 언어 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루나는 그 단어 들을 천천히 순서대로 눌렀다. 그러자 단어들이 허공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털을 가진 동물들의 이름. 모두 다른 고대어로…….’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건 암호가 아니에요. 그냥 시험이에요. 정말로 한 사람이 일곱 개의 언어를 할 수 있나 보는 시험요.”

루나는 바닥에 앉아 그 단어들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그때였다.

쿠쿵!

“어?”

루나의 눈앞이 흔들렸다. 마법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녀를 집어 삼킨 것이다.

“아……!”

순간 치민 감정은 공포였다. 어느덧 그녀는 생소한 장소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건, 게이트 같은 건가?”

아키스와 휘멘은 어디에 있는 거지? 루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숨을 들이켰다.

‘……시체.’

맞은편 벽에 몸을 옹송그린 누군가의 해골이 있었다.

“힉!”

루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백골의 뒤로 벽에 천천히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입을 막은 채 그 글자를 보았다.

<그대가 자격 있는 자라면 이 건물에 그대의 피를 묻혀라.>

“……또?”

붉은 책 때와 똑같았다. 루나는 사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막힌 밀실.

아키스와 휘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입술을 자근대던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뾰족한 돌에 살짝 긁어 약간의 피를 내어 석조 벽에 묻혔다.

그러나 시체의 등 뒤로 다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카리노 대왕 아래서 일하던 한 이름 없는 마법사이다.

대규모 꿈 이주 계획의 실패 이후, 카리노 대왕이 광범위한 에리스 봉인 마법을 펼치는 것을 반대하다 여기 갇히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내가 평생을 바쳐 온 연구실인 이곳에 감금되어 나는 중요한 이 유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에리스의 후계자가 나타나면 내 기록들을 볼 수 있으리라.

내가 목숨 걸고 지켜 낸 이곳은 결계의 첫 번째 자물쇠이다. 에리스의 후계자라면 내가 남긴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볼 수 있는 힌트니 안심하라.>

루나의 심장이 뛰었다.

‘이건, 무슨 말이지?’

그때, 시체의 몸에서 무언가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어?’

루나가 살짝 건드리자 시체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너무 놀라운 광경을 접하자 무서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시체가…… 이 유적의 주인…… 이겠지?’

그리고 시체가 있던 자리에 숫자들이 나타났다.

“……이게 뭐야?”

루나는 급하게 매고 있던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책에 그 좌표를 휘갈겨 썼다.

써 놓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쪽지 기록을 적은 책이 마법의 붉은 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안, 잠깐만 지우지 말아 줘. 네가 메모장 취급하는 거 싫어하는 건 알아!>

루나가 그리 적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는 루나는 급히 책을 덮었다.

그러느라 붉은 책에서 희미한 빛이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루나, 거기 있습니까?”

그때,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아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나는 주저앉을 만큼 안도하며 마주 외쳤다.

“아키스, 여기예요!”

응답하듯 머리 위에서 다시 쿵쿵 소리가 울렸다.

“거기서 떨어져!”

휘멘이 아래를 향해 외쳤다. 목소리가 쩌렁해서 아키스의 목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는 단숨에 뛰어 벽 너머로 도망쳤다.

그녀의 예상대로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먼지 구덩이 사이로 아키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먼지가 걷히고 루나를 확인하자마자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루나!”

아키스는 곧장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놀란 마음이 느껴졌다. 루나도 그제야 공포가 느껴져 헐떡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루나를 꽉 안았다 놓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휘멘은 아키스가 완전히 동요하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랐다. 한편으로 그도 루나를 몹시도 염려했기에 그는 루나를 향해 걱정스레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을 가만히 내려 감췄다.

“……암호를 풀면 지하의 방이 생성되어 암호를 푼 사람이 강제 소환되는 구조였나 봐. 분명히 암호가 풀리기 전엔 바닥 아래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거든.”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벽 위에 쓰인 고대어 글자를 보았다.

“이건 무슨 내용이죠?”

아키스가 나직이 물었다.

루나는 그들에게 벽이 쓰인 내용을 바로 직역해 주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도대체 카리노 대왕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거기다 꿈 이주 계획이라면…….”

아키스와 휘멘은 의문으로 가득 차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휘멘, 아키스. 둘 중 아무나 좀 적어 줄래요?”

루나는 그제야 서둘러 책을 펼치고 숫자를 불렀다.

“……67. 87. 15. 15. 여기, 그러니까 이 연구실의 주인을 보이는 사내의 시체가 있었는데요. 그 시체가 빛나더니 이 숫자들이 나타났어요. 이게 뭘까요?”

아키스가 바로 대답했다.

“좌표입니다. 마법사들이 쓰는 나침반에 쓰이는 숫자죠.”

“……여기로 가라는 걸까요?”

마치 다음 목적지를 지목하는 것 같았다.

아키스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이번에는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바닥을 살짝 두드려 보았다.

“바닥이 얇아. 휘멘, 이걸 쪼개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루나를 안전한 곳에 멀리 떨어지게 한 후 마법 주문을 외웠다.

마법이 성립하자, 천천히 바닥에 균열이 가며 석조 바닥이 무너졌다. 아키스는 단숨에 석조 바닥의 잔해를 한 손으로 치워 냈다.

그리고 드러난 맨 바닥에는 반짝이는 수정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휘멘이 신음하듯 말했다.

“마정석이군.”

“……그렇다는 건…….”

“그게 무슨 뜻인데요?”

루나만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마법이나 결계를 펼치려면 촉매가 필요합니다. 이건 그 촉매 역할을 하는 돌이죠. 고대에는 다이아몬드의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되었지요. 겉으로 보이는 게 이 정도 양이면, 이 아래 지반이 다 마정석으로 깔린 수준일 겁니다.”

“……그래서 서부의 마력이 이토록 강했군. 학계 가설이 다 바뀔 만한 일이야.”

휘멘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댔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며 재차 물었다.

“여기서 거대한 마법이 펼쳐졌다고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현재 우리는 결계가 시작된 곳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루나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휘멘을 보았다.

“……당신 정말 엄청난 걸 발견했군요. 그럼 이 좌표는요?”

“아마도 다음 결계의 근원지겠지. 그리고 이 글귀가 맞다면.”

휘멘이 루나를 또렷이 보며 말했다.

“넌 에리스의 후계자고.”

“…….”

“하지만 전설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세상을 망하게 할 뻔한 건 에리스가 아닌 모양이야.”

휘멘이 어깨를 으쓱하고 팔짱을 꼈다. 루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이 벽의 글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만일 모든 내용이 맞다면…….”

“…….”

“그러면, 당신의 꿈속 일기장에서 찾던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여기 있군요. 그게 당신일 모양입니다.”

아키스는 조용히 루나를 응시했다. 루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휘멘은 루나가 알려 준 좌표를 마법사 나침반에 입력했다. 그다음 바로 지도에 대조해 보았다.

“……좌표가 어디로 나오지?”

“북부의 한 산 쪽인데, 근처에 마을이 없어. 아마 그곳도 이곳처럼 대량으로 마정석이 매장되어 있는 마법사의 연구실이겠지.”

“……아마도 그곳이 다음 결계의 진원지겠군.”

아키스가 내뱉었다.

“아무래도 여행이 길어질 것 같은데?”

휘멘이 묘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 * *

그날 밤도 어쩔 수 없이 야숙이었다. 그들은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여행이 길어지겠군요. 당신의 건강이 걱정입니다.”

루나는 아키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조금 불쾌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약간 시무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나 안 힘들어요. 이참에 북부도 가보고 싶은걸요.”

루나는 그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도대체 꿈 이주 계획이라는 게 뭐죠?”

루나는 시체의 등 뒤, 벽에 남겨져 있던 문구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꿈 이주 계획의 실패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고위 마법사들만 아는 이 세상에 대한 비밀이지.”

휘멘이 불쏘시개로 불을 쑤시며 짤막하게 말했다.

아키스가 이어 설명했다.

“내가 이전에 말했던 걸 기억합니까? 고대인들이 꿈속에 사는 걸 택했기에 고대 사회가 멸망했다 했죠.”

“기억나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 또한 꿈 마법을 겪은 적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있는 미래에 대한 꿈.

그 꿈은 어찌나 달콤하고 완벽하던지. 고대인들의 심경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도 아키스가 아니었다면 현실로 돌아오기 싫었을 것이다. 그냥 그 꿈에 살고 싶다 생각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가 멸망한 이유가 그 ‘꿈 이주 계획’ 때문입니다. 환상 마법이 발달하자 고위 마법사들은 점차 꿈에 중독되어 갔죠. 그래서 그들은 희대의 미친 계획을 진행합니다.”

“미친…… 계획요?”

아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루나, 당신도 꿈을 꾸어 봐서 알지요. 꿈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꿈은 자기가 볼 수 있던 미래 중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하루아침에 하늘을 난다던가, 마법사가 되는 꿈은 꾸지 못하지요. 나도 그런 꿈을 꾸게 할 순 없어요. 그건 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해했어요. 가능한 미래 중 가장 멋진 선택지만 보여 주는군요. 현실적인 낙원. 그거군요.”

“그리고, 고대인들은 여러 명이 함께 같은 세계를 공유하며 꿈을 꾸는…… 그런 세계를 창조해 냈습니다. 꿈과 꿈을 연결하는 법을 알아낸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조를 꾸려 천국 같은 꿈의 세계를 만들고 스스로를 안전장치에 가두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생명만 유지해 둔 상태로, 스스로를 혼수상태로 만들어 꿈을 꾸며 사는 걸 택한 거죠.”

“…….”

루나는 입을 벌렸다.

정말 미친 발상이 맞았다. 만일 루나가 꿈 마법을 한번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다는 걸 믿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키스가 낮은 미성의 목소리로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고대 문명의 대부분은 마법사들에게 의지하고 있었기에 세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법사들마저 꿈속으로 도망치자 제국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지요.”

“…….”

루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났나요?”

“당신은 역시 영리하군요. 네, 잠든 마법사들을 민중들이 학살했지요. 그리고 고대가 멸망했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카리노 대왕이고요. 그는 혼란스런 제국의 국호를 고치고 나라를 재정비했습니다. 마법사들은 그래서 카리노 대왕이 마법사가 아니라 민중의 편을 든, 의롭고 대단한 왕이라 칭송하지요.”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사에 무언가 허점이 있다. 카리노 대왕과 에리스에 대해 분명 잘못 알려진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에리스를 마녀로 내세워 숙청한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퍼즐이 맞춰져 갔다.

혼란스런 나라 상황. 그때 나타난 한 명의 영웅 같은 왕. 그리고 제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희생양, 마녀 에리스.

‘그리고 내가 그 에리스의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에리스의 후계자가 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건 꿈속에서도 본 적 없는 정보야.’

루나는 모든 결계의 진원지를 만일 찾아낸다면, 그래서 그곳을 돌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휘멘 또한 어딘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들은 각자 복잡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루나는 문득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졌다.

“……나 먼저 잘게요. 일단 조금 자고, 생각해 봐야겠어요.”

루나는 후드로 머리를 둘둘 싸고 작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 * *

옅은 잠에 들었던 그녀가 눈을 뜬 건 새벽녘이었다. 누군가 낯선 이의 기척이 느껴졌다. 목 근처에 뭔가가 닿아 있었다.

루나의 목에 끝이 뭉툭한 몽둥이를 들이댄 사내가 속삭였다.

“네놈들 돈 있지? 카지노에서 봤어. 가진 것 다 내놔. 아니면 온몸을 두들겨 패 주마.”

바깥의 모닥불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통해 루나는 복면을 쓴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는 곁눈질했다.

‘아키스와 휘멘은…….’

웬일인지 그들은 정신 못 차리고 자는 듯했다.

“바깥 놈들은 정신 모르고 자고 있더군. 멍청한 놈들. 깨워도 소용없어. 밖의 내 동료들이 열 명은 넘거든.”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하게도 이 강도들이 그녀가 여인인 건 눈치치지 못한 듯했다. 모포와 후드를 둘둘 말고 자서 다행이었다.

루나는 새벽녘 빛에 의지해 잠긴 목소리를 열었다.

“저어…….”

“뭐,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당장 돈 안 내놔! 돈만 내면 살려 주마.”

아무래도 원숙한 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말이 앞뒤가 안 맞다는 걸 지적하기에 앞서 루나는 몹시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지금 도망가시는 게 어때요?”

“뭐?”

복면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 꼬맹이가 무슨 미친 소리야?”

“지금 제 일행들이 아직 자고 있나 본데, 깨면 아마도 큰일이 일어날 거거든요. 사실 내가 지금 좀 많이 놀라서, 그 감정이 전해졌으면 이미 그가 일어났어야 옳은데……. 아무튼, 운이 정말 좋네요. 이대로 멀리 도망가면 소리는 지르지 않겠어요.”

루나는 침착하게 설득했다.

루나의 말을 들은 강도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뭐? 뭐라고?”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텐트 밖에서 쑤욱 들어온 손이 사내의 목을 움켜쥐고 끌어냈다.

사내는 꽤액! 하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끌려 나갔다. 루나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아키스가 사내를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어내고 있었다.

“간만에 좀 깊게 자려 했더니만 좀도둑이 들 줄이야. 깼으면 거기서 나오지 마요.”

루나는 몸을 모포로 감쌌다.

등골이 서늘했다. 그녀는 살며시 텐트 밖을 엿보았다.

바깥은 예상한 대로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지 오래였다. 아키스와 휘멘은 열 명은 되어 보이는 강도들을 흠씬 패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미는 순간에도 퍽! 퍽! 으악! 그 순간에도 요란한 소리들이 밖에서 울리고 있었다. 곧이어 휘멘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오호라, 아주 오늘 피곤해 죽겠는데 날 잘 잡았다. 이리 와라.”

“으악, 악!”

한 사내 위에 올라타 신나게 얼굴을 패던 휘멘은 주먹이 아픈지 자세까지 고쳐 잡았다.

‘히익. 역시 무서워…….’

이러다가 이 남자가 사람을 패는 걸 구경하는 데 익숙해질 것 같았다.

“나오지 마라, 꼬마.”

휘멘이 천막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역시.’

루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도 사람 맞는 걸 구경하기 싫어 살포시 천막의 입구 천을 내렸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루나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분명히 어딘가 본 얼굴이었다.

‘사막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용병들?’

카지노 운운하는 걸 보니 루나와 휘멘이 칩을 딴 걸 엿본 자들인 듯했다. 루나는 침을 삼켰다.

‘두 사람이 마법도 안 쓰고, 검도 안 꺼내고 주먹으로 직접 칠 정도면 화가 많이 났나 보네…….’

곧 비명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게 몇 년 만의 일이지? 우리가 강도를 만나다니.”

“감히 저 천막에 들어가? 이 자식은 산 채로 모래에 묻어야겠다.”

상황이 정리되고 아키스와 휘멘은 주먹을 털며 떡이 된 강도들을 내려다보았다. 강도들은 벌벌 떨며 일렬로 꿇어앉아 있었다.

“오호, 나를 카지노에서 보고 돈이 될까 따라온 모양이로군. 혹시 나한테 맞은 놈에게 받은 사주냐?”

“그, 그건 아니고…… 지나가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있어서……. 분명 그쪽들이 카지노에서 돈을 딴걸 보고 현금을 두둑이 가지고 있으리란 생각에…… 우발적으로 그랬습죠. 살려 주십쇼, 제발 살려 주십쇼!”

“그래서, 우릴 발견하고 이 근처에 잠복하고 기다렸군. 그래, 이 중에 감히 저 천막에 들어가 그 녀석을 협박한 게 누구라고?”

아키스는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루나에게 칼을 들이 댔던 사내가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아키스는 혀를 찼다.

“이놈 빼고 다 가라. 목숨만은 살려 주지.”

아키스가 피식 웃었다.

“……넌 열외다. 평소 반가운 얼굴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하도록.”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이상한 데서 인정 있는 놈이라니까. 작별 인사할 시간은 왜 주냐? 그냥 바로 처리해 버리지.”

휘멘이 투덜거렸다. 아키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모래바람이 불어와 그 사내를 감쌌다.

“꽤액!”

모래에서 허우적대는 사내를 보며 아키스가 팔짱을 꼈다.

“그런데 카지노에서 뭘 어쨌다고? 낯익은 얼굴들?”

휘멘이 크게 움찔했다.

그는 딴청을 부리며 아키스의 시선을 외면했다.

* * *

“아니, 둘 다 적당히 좀 하지. 어쩌면 사람들을 그렇게 패요? 치안 기사들이 보면 도리어 우리를 잡아갔을 거라구요. 그냥 좀도둑인 것 같던데…….”

루나는 새벽부터 종알대며 그들을 따라나섰다. 이미 어색한 침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받아치듯 대답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조용히 여행하자면서요. 마지막에 그 사람은 뭐예요? 그자, 정말 모래에 묻혀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요.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분명히 죽었다니까요?”

“그놈이 당신이 자는 천막에 들어가 위협했잖습니까.”

“……아니 그렇다고…….”

루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저를 구하기 위해 그랬다는데 더 따질 수도 없었다.

이어 아키스가 물었다.

“그리고 휘멘과 몰래 카지노에 갔다오다니요. 그런 거면 차라리 나와 다녀오지.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숨겼습니까?”

“…….”

“…….”

루나와 휘멘은 짠 듯이 서로를 힐끔 보고 동시에 모른 척했다.

루나가 아키스에게 휘멘과 나갔다 온다는 쪽지를 남기긴 했다.

그러나 아키스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것이 생각보다 늦어져 쪽지를 파기하고 루나와 휘멘, 둘이서 카지노에 다녀온 것을 암묵적 비밀로 간직했던 것이다.

“가지 말라고 했을 거잖아요. 지금 그렇듯이 말예요.”

“어차피 당신 고집에 지잖아. 안 그렇습니까?”

“나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니까요!”

“그럼 혼자 보내야지 저놈을 왜 끌고 갑니까?”

대답은 루나가 아닌 휘멘에게서 돌아왔다. 휘멘은 말 위에 탄 채 버럭 짜증을 냈다.

“내가 끌고 간 건데? 사람 무시하는 거냐? 내가 끌려갈 사람으로 보여?”

“아아, 휘멘. 당신은 좀 조용히 해요!”

루나는 팩 쏘았다.

“아키스, 당신도요. 다 지난 일로 싸워 뭐해요?”

그제야 휘멘과 아키스는 루나가 성이 났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종알종알 말싸움을 하느라 새벽부터 기력을 다 뺐다. 힘이 빠진 루나는 아키스의 등에 고개를 기댔다.

“…….”

싸우다가도 루나가 힘든 것을 눈치채자 아키스는 마법으로 작은 바람을 만들었다.

그래서 루나의 옷 속으로 작은 바람을 밀어 넣었다. 사막 여행 내내 루나가 너무 힘들어하면 아키스는 이렇게 마법을 걸어 주었었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타고 지나가자 좀 살 만했다. 루나는 등을 부르르 떨었다.

“빨리 끝내요. 그 결계의 진원지가 백 개고 천 개고 있겠어요? 어서 끝내고…… 그냥, 난. 같이 안전해지면 좋겠어요. 당신이랑 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요.”

일렁이는 사막 속에서 루나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댔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후 오매불망 꿈을 기다렸지만 미래의 일기장에 대한 꿈을 꾸는 일은 더 없었다.

루나는 며칠 후, 북부의 한 여관에 있었다.

루나는 아키스와 휘멘이 쉬는 사이 후드를 눌러쓴 채 여관의 식탁에 앉았다.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 여관 식당에는 손님이 루나뿐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 후드를 내렸다.

여관의 어린 여종업원이 루나의 얼굴을 보고 뺨을 붉혔다.

‘어쩜, 저리 예쁠까. 여자보다 더 좋은 향이 날 것 같은 사내야.’

종업원은 괜히 루나의 주변을 돌며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루나가 씩 웃자 그녀는 뺨을 더욱 붉히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루나는 문득 붉은 책을 떠올렸다.

‘무언가 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아는 방법은 없을까.’

그녀는 요즘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골몰한 그녀는 붉은 책을 펼쳤다.

머리가 답답해서 생각을 좀 전환하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일을 마치자고 아키스와 루나, 휘멘까지 셋이 담합이라도 한 듯 한달음에 게이트와 마차를 타고 산맥까지 왔다. 정신없는 며칠이었다.

그러느라 이동 중에 책을 펼칠 틈이라곤 없었다. 마지막에 붉은 책을 펼쳤을 때가 급한 마음에 책을 메모지 대용으로 사용했을 때였다.

‘남장을 하면 붉은 책을 어디서든 볼 수 있으니 편하긴 하네.’

오늘 밤을 지내고 내일은 좌표에 위치된 산맥에 들어가기로 했다.

루나는 책을 펼치고 글씨를 휘갈겨 썼다.

<안녕. 잘 지냈어? 늦어서 미안해. 정말 큰일이 있어서…….>

<날 메모지 취급하고 이제야 펼치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군요, 당신.>

책은 오늘도 도도했다. 루나는 쓰게 웃었다.

<미안. 사정이 있었어. 좌표는 이제 지워도 돼.>

<중요한 거라 남겨 두긴 했습니다. 그런데 북부 결계 진원지엔 왜 가시는 건가요? 좌표를 분석해 보니 그 장소가 맞더군요.>

그 말을 듣자 루나의 등골이 서늘했다.

‘뭐라고……?’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도대체 이 책에 어디까지 정보가 저장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너, 결계에 대해 알아?>

<당연합니다. 나는 1만 개 이상의 정보를 저장한…….>

<결계의 진원지가 몇 개야? 도대체 에리스의 후계자란 뭐니? 저장하고 있는 정보가 더 있어?>

그러자, 책은 이번에도 딱 잘랐다.

<나는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내 역할은 인간의 서정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그리고 즐거움을 위한 문학적 소양 증진에 있습니다.>

증진이 뭐? 루나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또 이 말의 반복이었다.

‘소설만 되는 거라고.’

그 순간 루나는 머리를 굴렸다.

<네가 가진 이야기 중 가장 재미없는 소설이란 게 뭐야?>

<그야, 역사 실화 소설이지요. 가공하지 않은 자극적인 소설은 교훈적이기만 하고 그다지 재미는 없답니다.>

그래. 소설을 보여 주고 싶다는 거지?

루나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하나 스쳤다. 그녀는 이 책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네 말이 맞는 말이네.>

<그렇지요.>

루나는 일부러 뜸을 좀 들인 후 이렇게 적어 냈다.

<그런데, 재미라는 건 주관적인 것 아닌가?

난, 역사 소설도 아주 좋아해.

그래서 말인데. 결계의 진원지와,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자 마도사, 에리스가 관련된 소설이 있다면 보여 줄래?>

책은 답변이 없었다.

루나는 부드럽게 글씨를 적어 나갔다. 마치 책과 밀고 당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네가 보여 주는 고대 시절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쏙 빼놓으니 말이야.>

<관련 내용이 있는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루나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근, 지금 내 마스터인 당신의 나에 대한 열람 권한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해당 소설의 열람이 가능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루나는 책에 떠오른 글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서 글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부터 보여 드릴 소설은 이 책에 첫 번째로 수록된 이야기이자, 이 책을 만든 주인이 가장 마지막에 공개하도록 설계한 책입니다.

금일 가능한 열람 분량의 이야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용은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 위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 * *

이번에도 책은 신비한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 소설들과는 달랐다.

가공되고 각색된 일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한 담담한 서술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에리스라 했다.

<고대의 수도에 살던 에리스.

그녀는 몹시도 뻬어난 마법사였다.

그녀는 평범한 가문의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의 언니는 신성한 마법사 왕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여왕이었다.

왕족의 혈통으로 태어난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는 날 일곱 가지 언어를 모두 할 수 있게 된다.

‘아아, 내가 선출되었구나.’

그녀는 창문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이어지는 내용에 루나는 입술을 깨물고 집중했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책의 내용은 놀라웠다.

‘모르겠어, 모든 게 다 진실인지는……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소설 속 내용은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신비한 힘을 가진 일곱 종족. 그리고 그들은 각기 마법의 힘을 가진 ‘일곱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이름 붙이기를.

요정의 언어는 백의 언어이다. 그리고 마계에서 온 악마족의 언어를 흑의 언어라 한다.

그리고 숲 요정은 녹의 언어를 사용한다. 적의 언어는 정령의 언어를 뜻하며, 청의 언어는 인어족의 언어이고, 금의 언어는 수인족의 언어이다. 은의 언어는 흉악한 괴물 일족의 언어였다.

일곱 가지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각 이종족에게 선출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처음 제국의 이 땅에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 세계에 살던 일곱 종족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태초의 결계를 완성했다.

그들을 설득해 대결계를 완성한 인간은 <결계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자를 로드라 부른다.

그리고 로드를 뽑을 권한은 일곱 이종족에게 있다.

이종족들이 로드를 선발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신성한 황가 혈통의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어느 날 자신들의 언어를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그러나 로드는 황제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황제가 그릇된 일을 한다면 유일하게 저지할 수 있는 자도 인간의 로드이다.

로드는 고대 제국의 구심점이며, 빛이며.

열쇠이다.

…….

그리하여, 이번에는 에리스가 선출 되었다. 그녀는 전통대로 다섯 개의 결계의 근원지를 돌며 자신의 피를 묻힐 것이다.

로드인 그녀는 다른 말로 열쇠라 불리었다. 일곱 개의 종족과 세계를 잇는 열쇠.

그러니 그녀는 결계의 관리자 역할을 하며, 이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로드인 그녀가 원한다면 이 세계에 지진을 불러올 수도, 또 재앙을 불러올 수도, 하지만 반대로 이 세계를 수호할 수도 있었다.>

루나는 정신없이 나머지 이야기들을 읽었다. 내용을 다 읽은 루나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하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에리스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건 그런 뜻이었어. 당시의 제국 황가에, 그러니까 카리노 대왕에게 그녀는…… 위협적인 존재였던 거야……. 그녀는 마녀가 아니었어.’

루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여관방으로 올라갔다.

“아키스, 아키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잠깐 계단을 올라오는데도 등에 땀이 배었다.

루나가 여관방의 문을 급히 두드렸다.

“무슨 일이죠?”

여관방의 의자에 걸터앉아 문서를 읽던 아키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나, 엄청난 사실을 읽어 버린 것 같아요.”

“네……?”

“아무래도, 우리 여행이 길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아키스는 영문 모를 그녀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휘멘,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나와요!”

그다음, 루나는 맹렬한 동작으로 옆방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얼빠진 표정의 휘멘이 나온 건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 * *

“지금 황가는…… 진짜 황가가 아니었어요. 카리노 대왕은 정통성 있는 왕이 아니었거든요. 에리스의 가문이 이 나라의 정통성 있는 진짜 황가였어요.”

“……지금의 황가가 찬탈자란 말입니까?”

“맞아요. 그리고 에리스가 진짜 황족 가문의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친언니는 여왕이었고요. 에리스는 다른 의미의 왕이었죠. 상징적인 인간의 왕이요. 그걸 로드라고 불렀고요.”

루나가 아키스와 휘멘을 번갈아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에리스가 마녀가 되어야 했던 거예요. 카리노 대왕이 황위를 찬탈했으니까. 하지만 정통 왕가가 아닌 카리노 대왕에게는 결계를 제어할 힘이 없었죠. 결계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러니까 이종족에게 선출된 로드는 정통 황가에서만 나왔거든요.”

“……카리노 대왕은 뭘 믿고 그런 거지? 결계가 무너지면?”

휘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론상 결계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은 거지. 실제로 몇백 년은 버티지 않았나.”

아키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루나는 그들이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일부터 말할게요. 우리 여행은 길어지지 않을 거예요. 결계의 진원지가 모두, 다섯 개뿐이니까요.”

루나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키스와 휘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키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꿈속의 일기장에서 얻은 정보입니까, 루나?”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한 마음에 그들에게 이것을 어디서 읽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이건 아마 꿈속의 당신도 몰랐을 사실일 거예요. 기억해요? 내가 가진 마도구, 붉은 책 말예요.”

“……월플라워 부인의 저자 말입니까?”

“네. 맞아요. 그 책이 알려 주었어요.”

아키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나의 말로는 그 소설은 고대의 소설들을 수록한 일종의 마도구 정도라고 했었다.

루나는 차분히 책속의 내용과 책에 대한 것들을 설명했다. 그들은 루나의 말을 경청했다. 이야기의 끝에 휘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그 책은…… 어떤 물건인지. 왜 이전에 네가 연구를 해 보지 않았지, 아키스?”

휘멘은 아키스를 응시하며 물었다.

“내가 손을 대면 작동하지 않아. 마도구가 인정한 주인이 손을 댈 때만 글자가 떠오르는 구조지. 그녀에게 전해 듣기로, 그 책은 스스로를 주석이 달린 마도구라 정의했다 해서 나도 당장은 연구할 방도가 없어 보류하고 있었지.”

휘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이 책에서 더 얻은 정보는 없습니까?”

“네. 없어요. 에리스에 대한 실화 소설 외에는 읽지 못했죠. 이 책이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믿을 만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휘멘이 나직이 말했다.

“그 책이 무엇이든 일단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일곱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 이만 풀 수 있는 암호, 카리노 대왕을 비난하던 낙서. 그리고 피를 묻히자 유적은 반응했잖아.”

“……그녀가 ‘열쇠’일 거란 가정에는 우리 모두 동감했어. 맞아. 모든 것이 앞뒤가 맞아떨어지는군.”

아키스는 루나를 응시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아키스가 루나에게 몸을 숙였다.

“존재 자체가 반역자이자, 존재 자체가 이 제국에 위배되는 존재군요.”

“…….”

“하지만 동시에 원한다면 황가도 소유할 수 있겠죠. 당신은 이 나라의 약점 그 자체이니. 보통 사람은 알 수도 없는 비밀들을 소유하게 되었고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존재는, 이 일을 해결할 열쇠기도 하죠.”

그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리고 여행의 준비를 서둘렀다.

* * *

4개월 후.

그들은 게이트의 존재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게이트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단기간 내에 제국의 끝과 끝을 도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곳들을 조사하며 그들은 이러한 유적지들이 지금껏 숨겨져 왔다는 데에 감탄했다.

두 번째 유적지에서 아키스와 휘멘은 미공개 고위 주문 200개를 발견했다.

루나는 여행하는 내내 시간이 나는 대로 그들에게 주문을 번역해 주었다. 이미 세계 최강의 마법사인 두 명은 다른 마법사들은 평생 손에 쥐기도 힘든 마법 주문을 보강하여 더욱 강해졌다.

“얻은 게 아예 없는 여행은 아니죠?”

루나는 어렴풋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 유적지는 산 속의 아무도 모르는 공간, 지하에 있었다. 조사 결과 그들은 첫 번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산 전체가 마정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정석은 탐지도 잘 되지 않는 데다 채굴량이 몹시 적은 보물이었다.

아키스는 두 번째 유적지를 떠나기에 앞서 영주를 찾아가 산을 구입하겠다 말했다.

전체가 국가 소유라 사소유가 불가능한 서부 사막과 달리, 북부는 영주와 거래하면 산림의 소유가 가능했다.

“이 쓸모없는 산을 사시겠다고요?”

“익명으로 구입하고자 하니 일단 계약서를 써 주게. 선금은 치르겠네. 차후 계약서를 보내지.”

영주는 아키스가 공작인 것도 알아보지 못한 채 거래를 마쳤다.

영주는 그 안에 어마어마한 가치의 마정석이 매장된 것도 모른 채 희희낙락해 돈 많은 바보에게 하등 쓸모없는 산을 비싸게 팔았다 신이 났다.

두 번째 유적지에 루나가 피를 묻히자 세 번째 결계의 진원지, 유적의 좌표가 드러났다.

세 번째 결계의 진원지, 유적의 입구는 북부의 강바닥 아래였다. 아키스와 휘멘의 마법을 총동원하여 그들은 강바닥을 수색했다.

네 번째 유적은, 남부의 한 오래된 저택 지하실에서 통로를 찾았다. 네 번째 결계에서 찾은 좌표를 통해 찾은 결계의 마지막 진원지.

그곳은 다시 동부였다.

루나는 시골 마을의 여관에서 몇 번이나 읽은 ‘에리스 이야기’를 다시 펼쳤다.

그녀가 알게 된 진실들은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나는 세계의 진실을 읽고 또 읽었다.

‘첫 장도 놀라웠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니.’

루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 * *

황태자는 측근에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공작이 4달째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네, 서부로 떠났다 합니다. 그리고 거주조차 불분명하게 두문불출합니다. 거기다 공작 부인은 동부 신전에서 기도만 하고 있다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흑마법사 휘멘의 광증이 공작 부부에게 옮기라도 했나.”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미모의 부인. 아키스가 작년에 맞이한 부인에게 미쳤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기에 황태자는 요즘 아키스의 행동이 더 기묘하게 느껴졌다.

‘……아직 신혼인데, 공작 부인이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일로 구박이라도 받았나? 그래서 사이가 틀어졌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러기엔 좀 이상했다.

황가에서 공작 부인을 압박한 것도 아니고, 공작가에는 시부모도 없었다.

“공작은 정말 어려운 사람이군. 황제야 이제 고양이 손 안의 쥐처럼 다루기 쉽지만 공작이 그것보다 훨씬 두려워. 다룰 방도도 모르겠고 의중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으니.”

듣기로 서부의 새로 발견된 던전 몇 곳을 구입한 다음 그곳에 틀어박혔다 한다.

아키스의 기행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이번 기행도 잠시 호사가들의 입에 올랐다 금방 사라졌다.

“휘멘과 여행을 떠난 건 확실한가?”

“네. 마지막 목격담이 시종 한 명을 대동하고 흑마법사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합니다.”

측근이 보고하는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정황이 딱 맞아 떨어져 더 수상한데…….”

그러나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연락두절이라기엔…… 먼저 제게 편지까지 주잖습니까. 결혼 후 사람이 변한 건지……. 거기다 오랜만에 아바마마도 상태가 계속 안정적이니 아바마마를 구실로 공작을 불러낼 이유도 없지요.”

아키스는 황태자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 소재를 알렸다.

“흑마법사 휘멘을 달래 좀 입을 다물게 해 달라는 건 제가 공작에게 이미 부탁했던 내용이고요.”

사실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만 무시하면 황태자는 앓던 이를 뺀 것처럼 시원했다.

멸망론을 계속 발표하던 휘멘이 드디어 입을 다문 것이다. 황태자는 아키스와의 여행이 휘멘을 달랬다고 판단했다.

아키스와 휘멘, 둘이 원수 사이지만 연구적으로는 은근히 통하는 것으로 알려져, 이 또한 그러려니 하고 납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감시를 붙일까요?”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이 지금은 제 편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변심하면 제국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적이 될 것이다.

황후는 정색했다.

“일개 기사들이 공작을 쫓는다고? 어이없는 소리 말거라. 괜히 그러다 덜미가 잡혀 공작가와 황가의 사이가 되돌릴 수 없어질 수도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황가가 공작가의 위가 아니다. 공작가의 위치를 존중하기에 우리 황가도 황가일 수 있는 거야.”

황후는 나직이 얼렀다.

“알겠습니다.”

“다만, 괜히 이상한 예감이 들긴 하는구나.”

황후가 중얼댔다. 황태자도 찜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 * *

<요즘 계속 이 소설만 읽는군요. 소설적 가공이 되지 않아 역사서에 가까운 이 실화 소설이 그리 좋으신가요?>

루나는 붉은 책에 떠오른 글귀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책은 책이었다. 책은 에리스에 대한 진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고대어를 배웠다는 이유로 수감된 체스터 후작 부인 사건 같은 건 없었겠지. 지금 생각해도 그녀는 가엾어…….’

루나는 몇 번이나 읽은 ‘에리스 이야기’의 후반부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아무리 읽어도 엄청난 진실이군. 인간사는 모른다더니.”

책이 알려 준 진실은 그들이 배워 온 것과 너무도 달랐다.

에리스의 친언니, 고대 제국의 여왕 네튜아.

붉은 책이 보여 준 실화 소설 속 등장인물이자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고대 제국의 마지막 여왕.

네튜아, 그녀는 고대의 멸망을 가져온 꿈 이주 계획의 실행자였다.

에리스는 본디 친언니인 네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종족들이 선출되는 로드가 되자, 네튜아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까 그것을 숨겼다.

그리고 네튜아가 어리석은 계획, 꿈 이주 계획을 추진하자 뒤에서 조용히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루나는 책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어 보았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은 대사였다.

<카리노, 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요. 나를 새 여왕으로 세우면 이주 계획을 막을 수 있어요.>

혼자 힘만으로 반란을 일으킬 순 없었다. 에리스는 당대 명문가의 가주이자 자신만큼 뛰어난 마법사인 카리노를 설득하며 말했다.

<마법사들이 특권 계층으로 살아온 건 일반인들에게 봉사할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마법사들이 이 세계를 버리고 도망치면 백성들은 우리 왕가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전설속의 사내, 카리노 대왕.

당시에 그자는 에리스의 언니인 네튜아의 약혼자였다.

그는 에리스의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카리노는 에리스를 배반한다. 황위가 탐났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그대의 왕가는 이미 실책을 저질렀어. 더 이상 멍청한 너희 가문 것들에게 황위를 맡길 수는 없지. 에리스, 죽어 줘야겠다. 황위는 우리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어.>

<나를 배신하는 건가요?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차피 내가 죽어도 우리 가문에서 결계의 관리자는 다시 태어날 겁니다. 결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드를 배출하는 건 우리 가문뿐인 걸 잊었나요?>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었다.

“다시 읽어도 정말 충격이에요.”

루나는 짐마차 위에 올라가 앉아있었다. 옆에는 휘멘이 있었다.

“이런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니.”

마부석에 앉아 있던 아키스가 말했다.

“카리노 대왕은 영악했죠. 에리스를 마녀로 내세워 사람들의 마음을 달랬으니 말입니다. 광기의 상황에서 고대 황가의 마지막 생존자인 에리스는 정말 좋은 희생양이었을 겁니다.”

귀가 다 먹어 가는 마차를 빌려준 농부 노인은, 이 얼굴이 잘나다 못해 빛이 나는 듯한 청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덕에 결계를 제어할 로드의 혈통을 잃고 말았지요.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8년 후, 고작 몇백 년만에 결국 제국을 멸망시켰을 겁니다.”

“그러게요.”

루나는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그 벌을 받았잖아요. 이 책의 내용에서 카리노 대왕은 결국 미쳤죠. 거기다 그 덕분인지 현 황가의 마법사 혈통마저 끊겨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밖에 태어나지 않고요.”

반란을 일으킬 당시 카리노와 에리스는 결국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황위를 위해 에리스를 마녀로 몰아 민중 앞에서 처형한 카리노는 매일 밤을 떨었다. 에리스가 죽기 전에 한 저주 때문이다.

<네 황가는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내 후계자가 나타날 터이니, 아무리 나를 죽인다 한들 진짜 왕의 탄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카리노, 네 자손이 내 발밑에 무릎 끓고 뒤집어진 세상을 다시 바꿀 것이다. 너 따위가 진짜 왕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후계자는 나와 같은 여자아이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을 거다.>

에리스는 광장에 매달려 죽었다.

처음에는 에리스의 말을 무시하던 카리노는 점차 매일 밤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결국, 에리스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던 그는 결국 결계에 마법을 펼친다. 여인에게 고대어의 재능이 발현하는 것을 막는 마법이다.

<에리스의 후계자가 다시 태어나선 안 돼.

이제 내가 황제다. 그 계집은 제 후계자가 여자가 될 것이라 했지. 그러니 여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으면 결국에, 내 황가에서 결계의 관리자가 선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결계만 우리 손안에 들어오면 돼.>

그뿐이 아니었다.

에리스에게 끌려가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왕은 마법사인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모두 삭제했다.

<에리스를 떠올려. 그녀 같은 여인이 다시 태어나면 안 되니, 미리 방비해야 할 것이다.>

그는 당대 유명한 여성 마법사들의 책을 모두 가져와 광장에서 불태웠다. 그녀들을 옹호하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있었으나 모두 구금되거나, 지위를 박탈당했다.

에리스를 끝까지 옹호하고 로드가 없으면 안 된다 주장하던 한 마법사는 자신의 연구실에 갇혀 굶어 죽었다.

루나는 연구실에 감금당해 죽은 이, 그가 첫 번째 결계의 진원지를 지키던 마법사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왜 나일까?’

많은 의문이 풀렸지만 아직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결계를 제어할 수 있는 자격.

일곱 개의 언어의 발현이 왜 루나 자신에게 나타났냐는 것이었다.

그사이 마차가 멈췄다. 귀가 먹은 농부는 모자를 벗고 물었다.

“정말 여기서 내리시려우?”

“여기면 충분합니다.”

아키스는 후드를 쓰고 농부에게 충분한 금화를 주었다.

“그럼, 약속대로 다섯 시간 후 데리러 오겠수.”

농부는 모자를 벗어 보였다. 그는 금화를 받고 희희낙락 해 마차를 출발시켰다.

“여기가 마지막인가요?”

“그렇지. 이번에도 결계의 입구를 찾아내려면 고생이겠군.”

“잘할 수 있죠?

루나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휘멘은 말없이 주먹을 내밀었다. 루나는 자그맣게 웃으며 조그만 주먹을 내밀어 그와 손을 스쳤다.

‘정들었어, 진짜.’

4개월의 여행은 셋을 단단한, 일종의 유대감으로 묶어 주었다.

‘정말 놀랍게도 말이지.’

아키스는 둘이 주먹을 마주치는 장면을 심란하게 보았다. 루와 루나가 주는 혼란 속에 벗어나, 드디어 제 아내이자 평생의 각인자, 사랑을 찾은 건 좋았다.

그러나 셋이 4개월이나 여행을 다니게 될 줄이야. 이쯤 되니 미친 듯 아내에게 집착하는 아키스도 휘멘과 루나의 사이에 생긴 일종의 동료애까지 질투할 순 없었다.

‘정말 그녀는 사람 미치게 하는 여자야. 애가 다 타는군.’

아키스는 어이 없어하며 생각했다.

한 시간에 걸친 탐색이 끝났다.

휘멘은 초원의 텅 빈 한 장소를 발견했다. 휘멘과 아키스가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초원의 바닥에 석조로 된 유적 입구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쿠쿵.

휘멘과 아키스, 루나는 가만히 바닥을 밀고 올라오는 그 장소를 바라보았다.

루나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 * *

열흘 후.

공작가는 오랜만에 떠들썩해졌다.

장기 여행 중이던 공작과 동부의 외딴 신전에서 혼자 기도 중이던 공작 부인이 나란히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공작이 동부 신전까지 공작 부인을 데리러 가, 직접 에스코트해 온다는 기별은 이미 받은 바였다.

아키스는 연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루나의 손을 잡아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아아, 이제야 오십니까.”

“공작 부인, 건강해 보이십니다.”

시녀장 비아와 집사 알렉을 비롯한 공작 가문의 식솔들은 일렬로 서서 그간의 마음고생을 꾹 누른 채 공작 부부를 맞이했다.

공작 부부가 신혼에 갑자기 길게 집을 비우니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나, 혹시 다시금 공작가에 정이 떨어지신 것이 아닌가 식솔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피곤하니 바로 쉴 수 있게 준비하도록. 공작가는 별일 없었나?”

“네.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두 분께서 계시지 않은 동안에도 모두 제자리를 지키며 공작가를 지켰습니다.”

“고생 많았다.”

아키스가 알렉에게 나직하게 칭찬의 말을 했다.

그 어조에서 눈치 빠른 알렉은 직감했다. 공작의 변덕은 끝났다는 것을. 알렉은 공작이 한동안 수도 저택에 머무를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디온도 앞으로 나서 공작 부부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부인. 동부는 어떠셨습니까?”

그 말에 루나는 나긋하게 대꾸했다.

“평생을 못해 볼 경험이었어요. 무덤까지 지고 갈 만한 시간이었죠.”

“……그렇게 동부 신전의 경치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루나는 싱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아키스는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드디어, 집이었다.

* * *

집사부터 비아까지, 모두 루나를 크게 반겨 주었다. 하인들이 짐을 옮겼다.

루나는 먼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거울 앞에 앉았다.

꽃장식이 달린 커다란 자개 거울 너머로 풍성한 금발 머리는 뒤로 풀어 내리고, 하늘거리는 재질의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으음, 조금 낯설지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도 들고…….’

네 달이나 남장을 하고 여행을 했더니 그녀 자신도 정체성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동부가 맞으셨나 봐요. 피부가 더 좋아지셨어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레이디스 메이드, 제인이 급하게 루나의 시중을 들며 말했다.

제인을 비롯한 저택 사람들은 루나가 회임 기원 기도를 위해 동부 신전에 머물다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게. 나도 신기해.”

루나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험한 여행길에 네 달이나 매달렸다.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변장을 위해 루비트 씨앗 약을 먹었다.

‘……피부가 타기는커녕.’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얼굴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가 더 튼튼하고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루비트 씨앗 약이,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이전에 달빛 서점에서 일할 때도 계속 루비트 씨앗 약을 먹었다. 그때도 이렇게 피부가 좋아졌다. 혹시 그게 약의 효능 이었던 건가?

‘……난 아키스의 마법 덕분에 피부가 좋아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씨앗 약에 그런 효능이 있는 건가. 휘멘과 한번 의논해 봐야겠어.’

루나는 긴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몸이 녹는다……. 저택이 이렇게 편안한 곳이었구나…….’

그간 긴 여행길에 고생했더니, 부드러운 드레스는 몸에 녹을 듯이 달라붙고 긴 의자는 몹시도 푹신했다.

‘한 3일은 죽은 듯이 자고 싶어…….’

4개월 치의 무거운 피로가 그녀를 짓눌러 왔다.

루나는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한 비밀스런 여행길이 떠오른다.

마지막 유적지.

그곳에서 루나는 다른 유적지에서 한 것처럼 자신의 피를 그곳에 묻혔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루나는 자신의 왼팔을 어루만졌다.

“수도까지 우리 셋이 같이 입성하면 좀 이상하잖아. 너희, 그러니까 공작 부부는 따로 만나서 온 걸로 하고 난 하루 후에 수도에 들어가는 걸로 하지.”

휘멘과는 마지막에 헤어졌다.

루나와 아키스는 마지막 알리바이의 완성을 위해 동부 신전에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마지막 유적지가 신전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휘멘은 수도로 복귀해, 며칠 안에 다시 방문하겠다고 했다. 물론 아키스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서로 그게 진심이 아님은 잘 알았다.

제인은 세 달 만에 할 일이 생겨서인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언제 돌아오시나 기다렸어요. 절 데리고 가지도 않으셔서…….”

루나는 긴 의자에 앉아 있다 눈을 떴다.

“동부 신전은 청빈한 생활을 하는 곳이라 하니, 시녀를 데려가 호의호식할 순 없지……. 네가 평소 나를 부족하게 대해 그런 건 아냐.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마.”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긴 여행은 급박하기도 했으나, 생각할 시간도 많았다. 루나는 새삼 그 여행길에서 주변 사람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살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의 불안감을 알아본 듯한 루나의 말에 제인은 약간의 감격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녀는 오랜만에 본 주인의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무시겠어요, 부인?”

몰려오는 피로는 어쩔 수 없어 잠깐 졸았나 보다. 제인이 묻는 말에 루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아니, 사람을 좀 보내 줄래? 페니에게 연통을 보내고 싶어. 그녀에게 내가 집에 돌아왔음을 편지로 알려 줘.”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직접 글씨를 쓰지 않는 것을 알기에 제인은 능숙하게 편지를 대필했다. 루나는 페니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페니…….’

그녀에게는 신전에 내려간다고 편지 한 장만 딱 던진 다음 네 달이나 일방적으로 연락을 두절했다. 동부 신전에서 기도하는 동안은 집중하기 위해 연락도 할 수 없다는 말까지 편지로 전했다.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을까. 그녀가 서운해 해도 할 말이 없다.

‘내 미래와, 현재를 통틀어 소중한 친구…….’

그 반대 상황이었으면 루나는 서운해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루나는 페니를 보면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일이라도 페니에게 찾아가야지.’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씻고 자고 싶어. 목욕물을 준비해 줄래?”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목욕물을 준비하러 나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루나는 욕조 벽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살 것 같아. 우리 집에서 하는 목욕이 최고구나.’

루나는 다시 한번 왼팔을 어루만졌다.

* * *

열흘 전.

마지막 결계의 근원지. 그곳에서 그들은 마지막 유적지를 찾아냈다.

그날, 휘멘은 약학자의 연구실로 보이는 마지막 유적지에서 희희낙락했다.

“괜찮은 약학 서적들이 보존되어 있군.”

“내가 찾는 자료들이 있다면 공유해 줘요. 아, 아예 내가 번역해도 되고.”

“이번에는 네가 찾는 ‘로웨나의 눈물’이라는 재료의 단서가 있으면 좋겠군.”

휘멘은 흘리듯 말했다. 로웨나의 눈물은 루나가 복원하려는 마법약들의 핵심 재료 중 하나였다. 다른 건 휘멘과 여행하며 대체제를 배웠는데, 그것만은 찾지 못했던 것이다.

루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작은 검을 꺼냈다. 그리고 피를 낼 준비를 했다.

“조심해요. 루나. 저번 유적에서처럼 많이 찢어지면…….”

아키스가 말했다.

“알아요. 조심할게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피를 몇 방울 내어 유적의 벽에 문질렀다.

결계의 소유권을 가지는 일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그저 유적지에 루나의 피를 묻히는 것이면 되었다.

“이제 돌아갈 길도 없군. 축하해, 반역자가 된 걸.”

휘멘이 말을 툭 던졌다.

“축하해요, 공범이 된 걸.”

루나는 장난스레 받아쳤다.

“그래, 잡히면 내 이름 대고 감형 받아.”

“잡히게 둘 리 없잖나. 지금 상황이라면 제국의 안위도, 명운도 모두 그녀의 아래에 있는데.”

아키스가 뒤에서 루나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이번 생에 반역자에게 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 싫어진 건 아니죠?”

“설마. 반역자가 아니라 살인자라 해도 사랑했을 겁니다.”

“너는 그런 말할 때 정말 진심인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단 말이지…….”

휘멘은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끄럽군.”

루나는 피식 웃었다.

이윽고 세 사람의 시야가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문양은…….”

그리고 그녀의 왼팔에 어떤 문양이 떠올랐다.

아주 작고, 작은 문양이었다.

드래곤과, 그 드래곤을 감싼 삼각의 방패. 그 주변으로 제국의 상징인 금빛 원 모양. 그 원모양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이게, 뭐지?’

루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그때, 눈앞에 빛의 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점들이 이어져 복잡한 도형 모형으로 방 안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사라져 버렸다. 아키스와 휘멘은 그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이런 구조일 줄은 몰랐는데.”

“과연, 정말 맞군.”

아키스와 휘멘은 탄식했다. 루나는 영문을 모르고 그들을 볼 뿐이었다.

“도대체 뭔데요?”

“……마법사의 방, 기억합니까?”

“네. 기억나요. 당신이 비밀 주문을 담아 두고 당신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볼 수 있는 그 비밀의 방 말예요?”

“……아키스가 네게 자신의 방을 허락했나?”

휘멘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는 몹시 의외라는 투였다. 아키스는 대수롭잖아 긍정했다.

“한 번. 아무튼 샛길로 빠지지 마. 그 문양은…… 마법사들의 비밀 공간과 같은, 이공간을 불러낼 수 있는 종류의 마법 주문인 것 같습니다.”

루나는 놀라 물었다.

“……그럼 내가 마법사가 되었다고요?”

“그건 아닙니다.”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만의 이공간을 불러 낼 수 있는 자가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것을 알지요?”

“네. 알아요.”

“당신에게 그 공간을 심어 주는 마법이 생겨난 겁니다.”

“……결계를…… 제어하는 용도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키스의 말에 이어 휘멘이 쐐기를 박았다.

“이제 네가 이 제국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결계를 소유하게 된 셈이지.”

루나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

“먼저 이 힘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겠군요. 공간을 자유롭게 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와주죠.”

“……훈련을 받으면 된다는 거군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휘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이 힘을 어떻게 쓸래?”

* * *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루나는 목욕을 하다 스르르 잠에 들어 버렸다.

까무룩 잠에 들었던 그녀는 익숙한 체취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루나는 아키스의 품 안에 있었다.

가운이 입혀져 있었고 침대 위였다.

루나는 하품을 하며 아키스의 품에 뺨을 비볐다. 그리고 중얼대듯 물었다.

“내가 욕조에서 잤어요?”

“피곤해 보이더군요.”

“얼마나 잤어요?”

“한 시간 정도.”

아키스도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었는지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나마 자고 나니 머리가 좀 맑았다.

‘여행 중엔 아무래도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 많았으니. 이렇게 맘껏 안기는 건 오랜만이야.’

아키스의 품은 익숙했지만 새삼 낯설었다. 강건한 그의 몸은 여행 중에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뭐, 여행 중에도 할 건 다하긴 했지.’

솔직히 금욕 생활을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키스가 그녀를 그냥 놔둘 사람이 아니었다.

‘……시골 여관에서 그건 너무했지.’

방음도 안 되는 시골 여관방에 선 채 입을 막고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심장 뛰는 경험이었다.

그것도 루나가 그만 좀 하자 자제하라 달래서 그 정도였지. 루나는 그때 계속해서 저택에 돌아가면 마음껏 하자,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다. 이러면서 아키스를 달랬다.

‘……뭔가 두려운데. 이 사람 이제 엄청 요구할 것 같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 반, 기대되는 마음 조금, 몸이 화끈해지는 느낌이 나머지. 그런 기분이었다. 루나는 지금은 일단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나 자는 동안 뭐 했어요?”

“당신 자는 거 구경.”

“웬일로 구경만 했어요?”

루나가 장난스레 속삭였다.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제 구경은 그만하려고요.”

아키스가 속삭이며 루나의 위에 올라탔다.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당신은 힘들지도 않아요? 체력이 무한인 것 같군요.”

“……여행은 익숙해서 말입니다.”

“음……. 당신도 좀 쉬어야…….”

그가 속삭였다.

“쉬는 건 됐고, 당신만 괜찮으면 바로 회포를 풀고 싶은데. 당신 체력이 예전만 못해 아쉽군요. 위든 아래든 아무 데나 먼저 맛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아키스가 짓궂게 속삭였다.

루나의 뺨과 목이 화끈 달아올랐다. 예전엔 신사 같은 짐승이라면 이제는 신사인 체도 안 해서 문제였다.

“정말 왜 더 심해져요. 못하는 말이 없어요.”

루나는 웅얼댔다. 그러면서도 딱 달라붙은 몸을 떨어트릴 줄 몰랐다.

“일단은 당신 좀 쉬고요. 그리고 내일은 돌아온 기념으로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겁니다.”

루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요, 내일 밤에…….”

“아뇨, 아침에 할 건데. 밤까지는 못 기다립니다. 만 하루를 기다리기엔 나도 내 몸도 인내심이 없어서.”

“…….”

“그러니 빨리 저녁 먹고 자요. 체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되어야 내가 잡아먹지.”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뺨만 붉혔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루나가 동부 신전에 네 달이나 처박혀 있었단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동부 신전은 회임 기도로 몹시 유명한 곳이었으니.

‘……사람들이 내가 임신할 거라 기대하겠네.’

그곳에는 처음 생각이 미쳤다. 기분이 이상했다.

‘언젠간 아이가 생기겠지? 그래야 제국이 안정되기도 하고, 어쨌든 공작가는 황가와 다른…… 독립적인, 그런 위치니까. 황가에서도 회임 소식을 턱 괴고 기대하고 있을 거야.’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아키스도 아이를 원할까? 이 사람 생각을…… 모르겠어.’

꿈속에서 그는 분명히 아이를 가지는 일을 혐오하여 자식도 만들지 않았다 했다.

나와의 아이는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는 건 오만일까.

적어도 필요로 인해 아이를 만들고는 싶어 할 거다. 미래에 그에게 후계자가 없어 제국이 위기에 빠졌으니까.

아키스가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키스의 몸에서 나는 비누 냄새와 남성적 체취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결계에 대한 생각이요. 내가 엄청난 일을 맡아 버렸구나, 하고. 결계를 제어하고 움직이는 건 세상의 운명을 건 일이잖아요.”

“혼자 지게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있잖아요.”

루나는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요. 휘멘도 있고.”

“…….”

그놈 이름은 왜 나오는지. 그러나 아키스는 휘멘에 대해서는 어느새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그녀 인생의 전부는 제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녀에게 어느 정도 저 외에도 소중한 사람을 용인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질투와 독점욕이 일어나는 건, 저는 그녀 외에 소중한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얏.”

루나는 왼팔을 움찔했다. 아키스가 왼팔의 문양에 이를 세운 탓이다.

“이런 문양은 없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죠. 이게 결계를 가지는 대가라잖아요.”

루나는 속삭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위에 올라타, 작은 주문을 외웠다.

<카일라.>

그러나 마법으로 가려져 있던 그녀의 뽀얀 살결위로 검은 꽃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행 중에는 여러모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마법으로 가리고 있었다.

“드래곤의 문양은 괜찮고요?”

아키스가 자신의 검은 꽃문양을 어루만지자 루나가 작게 웃었다.

“이건 나와 이어져 있는 거잖아.”

아키스가 불만스럽게 속삭였다.

“그래. 이 나라의 명을 건 것은 모두 당신에게 있군요. 결계를 제어하는 문장과, 내 명줄을 틀어쥔 문장과.”

“내가 드래곤의 문장을 가진 게 두려워요?”

“전혀.”

아키스가 속삭이며 그녀의 숨골 위에 키스했다.

“기쁘게, 내 명줄이라는 목줄을 쥐여 주겠습니다.”

그가 속삭였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못된 손이 루나의 하반신으로 파고들었다.

“……말만 그러면 뭐 해요. 당신이 말을 하나도 안 듣는데. 앗…….”

“왜. 내 목줄을 쥔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건 좋은 일이잖습니까.”

그가 손가락을 지분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루나는 바르르 떨며 뺨을 붉혔다.

“진짜로, 안 돼. 지금은 하다 잘지도 몰라.”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는 불만스런 얼굴로 그녀의 귀를 한번 물고 떨어졌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아키스의 볼에 한번 키스했다. 그때 문을 박박 긁는 소리가 났다.

“울프인가 봐요. 문 열어 줄래요?”

아키스는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울프가 뛰어들어 와 침대의 루나에게 안겼다.

“울프, 보고 싶었어. 이제 계속 집에 있을 거야.”

울프를 어루만지며 루나가 속삭였다.

“나 좀 잘게요, 아침 일찍 깨워 줘요. 페니를…… 만나러 가야 돼. 그다음 시간은 모두 당신에게 줄게요, 그리고 그다음엔…… 혹시 휘멘이 오면 결계를…….”

루나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울프의 따뜻한 몸을 끌어안은 채 꼬박 잠들었다. 루나가 눈을 감자마자 아키스는 루나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날 밤, 루나의 침대에서는 오랜만에 재회한 주인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울프와, 아내의 옆자리를 독점하려는 아키스 사이에 은밀한 사투가 있었다.

오늘도 승리자는 아키스라, 울프는 풀이 죽은 채 침대 아래로 내려가 턱을 괴고 잠들었다.

* * *

루나가 집에 왔다는 소식에 먼저 갈 것도 없이, 페니가 바로 찾아왔다.

루나는 페니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임신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면 왜 말 안 해 줬어? 말도 없이 동부 신전으로 가다니. 그쪽으로 편지해 봤자 면회 금지라는 말이나 돌아오고.”

페니는 눈물마저 보였다. 루나는 그녀를 달래느라 쩔쩔맸다.

“정말 미안해. 사정이 있어서…….”

페니에게 모든 일을 다 말할 수도 없고 달래는 것도 큰일이었다. 결국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야 페니는 납득했다.

“……정말 너란 애는. 난 내가 싫어졌나 하고 별생각 다 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이야. 내게 소중한 친구는 페니뿐이니까.”

마음을 풀고 나자 두 사람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특히 루나는 페니와 저의 사라진 미래의 연을 알고 나자 마음이 더 애틋했다.

* * *

페니는 루나와 30분 정도를 더 이야기 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루나는 페니의 기분이 풀려 몹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마음먹는 건 나쁜가, 그래도 페니를 상처 줄 뻔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감정적이 될 정도로 페니가 저를 좋아해 주는 게 조금 감동적이었다.

“점심 먹고 가면 안 돼?”

“오늘 오후는 좀 바빠. 거기다, 신혼부부가 간만에 재회했는데 방해할 순 없지.”

페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루나는 그녀를 배웅했다. 그때 루나와 페니는 집 안으로 들어오던 디온과 마주쳤다.

디온은 루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페니를 보았다.

“르시타 영애. 오랜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오랜만이에요, 디온.”

페니는 도도한 얼굴로 턱을 까딱여 인사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아아, 제가 어릴 적에 르시타 가문에 신세를 진 적이 있지요. 영애께서 어린 시절 자주 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페니가 공작가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상하게 둘이 대화하는 것을 거의 못 본 것 같았다.

페니가 저녁을 먹고 가는 날에는 공교롭게도 디온이 일이 있을 때가 많았다.

루나는 상냥하게 물었다.

“디온, 아키스를 만나러 가던 중인가 보네요. 바쁘지요?”

“공작님께서 갑자기 동산과 아무것도 없는 초원 한복판의 땅, 그리고 강가 뭍 땅 등을 후한 값으로 잔뜩 구입하셨더군요. 영문을 모르겠지만 회계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디온은 평소의 그다운 몹시 부드럽고 신사적인 태도로 말했다.

혹시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어조였지만 루나는 가만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키스는 여행 중에 발견한 결계 근원지 주변의 마정석이 매장된 땅들을 모조리 사들였다.

‘마정석이 잔뜩 매장되어 있으니, 정말 큰 가치가 있는 땅이지. 하지만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냥 쓸모없는 땅 투기겠고. 마지막 초원 땅은 휘멘에게 양보하기로 했지만, 아키스는 더 부자가 될 모양이야.’

여행에 대한 기념으로, 올해 말쯤 아키스는 그렇게 취득한 자산 중 하나를 루나의 명의로 해 주기로 약속했다.

지금도 책을 판 돈 등과 아키스가 혼인 후 선물해 준 보석류로 이미 부자지만, 이쯤 되면 루나도 저가 이렇게 부자가 되어도 될까 싶었다. 듣기로 마정석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변덕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요.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디온은 루나와 페니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걸어갔다.

‘……바쁜가? 오늘따라 디온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 같지?’

루나는 그의 뒷덜미가 좀 달아오른 것 같았다. 얼마나 바쁘면 격양되어 보이기까지 하나 했다. 늘 흐르는 물처럼 온유한 사람이었기에 낯설었다.

“나, 갈게.”

“어? 페니. 배웅은?”

이상하게 페니도 조금 서두르는 투였다.

혹여 아직 마음이 상했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의 마차까지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그에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점심을 먹자마자 루나와 아키스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흐으…….”

루나는 위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강한 압력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진동했다.

‘그간 참고 있었던 거군.’

진득하니 참아 온 그의 성욕은 강하고 또 질척했다.

자신의 안을 모조리 저로 채우고서야 성이 찬다는 아키스의 행동에 루나는 죽어났다. 루나는 다리를 벌린 채 그의 허벅지 위에 타고 있었다.

“아아!”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그가 거세게 치밀고 올라오자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온몸이 조이며 부르르 떨었다.

아키스의 입에서 덥고 황홀한 숨이 나왔다. 그는 그녀를 탐욕스레 끌어안고 귀를 물었다.

“미치겠어, 당신 때문에.”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해 주기엔 너무 힘들었다.

“아, 으. 응. 힘들어……. 이제 그만…….”

“왜,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껏 해도 된다, 나를 다 풀어놔도 된다 했잖습니까.”

그건 당신이 시골 여관방이나 야숙할 때 진정하라고 일단 던진 거짓말이고.

루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둘만 있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안 그래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루나를 일으켜서 침대에 밀었다. 부드러운 비단 침구 위에 그녀는 꽃잎처럼 흩어졌다.

아키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두 번 정도로는 조금도 진정하지 않는다는 듯, 그가 멈추지 않은 정력으로 그녀에게 몸을 문댔다. 루나의 허리가 풀렸다.

‘각인이라는 거,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들어.’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그가 미치도록 자신을 원하는 날이면, 영문도 모른 채 그녀에게 그 마음이 흘러 들어와서 그를 거부할 수가 없다.

사실 체력이 달려서 그렇지 그가 한 번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미칠 듯이 좋기도 하고.

‘아아……. 정말, 못살아.’

흐응. 싫어. 루나가 작게 칭얼댔다.

그의 상체와 이마에서는 더운 땀이 흘렀다. 온몸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몸을 숙이고 입술을 내밀었다. 닿은 곳곳에서 작은 화산이 피어나는 듯 온몸이 아팠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시험하듯 그녀에게 자신을 문댔다. 화끈했다, 떨어졌다. 더 안으로 와 줬으면 하다가…….

“아아, 제발. 아키스…….”

루나가 끊어질 듯 애원했다.

아키스는 땀에 젖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한 번에 치달았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루나의 다리가 치켜 올라갔다.

* * *

결국 아키스가 원한대로 한껏 정을 나눈 후, 루나는 그의 품에서 정신없이 잠들었다.

‘……보약은 뭐가 좋지. 스틸본 숲의 암사슴 심장, 동방 대륙의 귀한 약재.’

예전에 1년 정도 마도구로 루나에게 건강 마법을 걸어 준 적 있었다. 체력 증진 마법은 쉬이 내성이 생겨 지금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보약을 사용해야 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휘멘의 연구실을 털어야겠군. 약학은 그놈이 대가니까.’

아키스는 루나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고 키스했다.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져, 몸이 약해져서 걱정이었다. 그녀는 저의 생명이자 쾌락, 모든 것인데.

아프고 약해지면 안 되지.

아키스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 * *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끌어안고, 키스하기 금지.”

루나는 아키스에게서 떨어져 엄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도 아리송한 것이, 요즘 아키스는 ‘금지’라는 말을 ‘꼭 해 보고 싶은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발개진 입술을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자, 그게 너무 귀여워서 아키스는 웃어 버렸다.

“아아, 웃지 말라니까. 진짜.”

루나는 성을 냈다. 그녀는 아키스의 어깨를 밀어내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때 집사가 휘멘의 도착을 알렸다.

곧 집사가 휘멘을 데려왔다. 그는 조금 피곤한 낯이었지만 수려한 낯은 여전했다.

휘멘은 긴 금발을 뒤로 늘어뜨려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내린 후 은실로 묶고, 머리 위에는 작은 보석 꽃핀을 꽂고 은은한 연녹색 드레스를 입은 루나를 보았다.

그녀가 루라는 걸 몰랐다면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을 감싼 분위기, 눈빛, 표정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내가 여인 차림이라 낯가리는 거예요?”

아까부터 저를 안보는 휘멘을 보며 루나가 미소 짓고 물었다.

“……여전히 귀부인으로 대할지 잘 아는 소년으로 대할지 헷갈려 하는군요. 그쵸?”

저를 의식하는 휘멘의 속도 모르고 루나가 설핏 웃었다. 휘멘은 그 해맑은 미소를 보자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사담은 되었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휘멘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루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키스의 도움으로 연습은 해 봤어요. 남은 건 당신들 손에 달렸어요.”

휘멘과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나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루나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들이 자신의 방을 여는 방법.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이공간을 자각하고 그곳을 천천히 떠올리며 생각을 집중시킨다.

‘말이 쉽지.’

이공간을 처음 자각한 마법사들도 몇 달을 하는 훈련이라 했다. 마법사의 마자도 모르고 살아온 루나에게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휘멘이 살짝 긴장한 루나를 격려했다.

“정신을 집중해. 괜찮아, 잘못돼도 우리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맞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이놈을 방패로 써서라도 알아서 해 줄 테니.”

“뭐야?”

“아아, 둘 다 지금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있거든요?”

휘멘과 아키스가 말다툼을 하자, 루나는 웃느라 정신 집중이 깨질 것 같았다.

‘다시,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아키스와 휘멘에게 배운 훈련법대로. 단 한 번 본 그곳을 떠올리고 다시 떠올린다.

‘갈 수 있다. 그곳에 갈 수 있다. 그런 마음에 초점을 두고…….’

그러자, 천천히 방안이 희미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루나가 눈을 뜨자 그 신비한 금빛의 구조체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것이.”

아키스가 속삭였다.

“제국 땅에 쳐진 결계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제어판이기도 하죠.”

루나는 땀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빛의 구조체에 끈적한 붉은 액체 같은 것이 흩뿌려져 있었다.

“이물질이 끼얹어져 있어요. 좀 기분 나쁘게 생겼어요. 붉고 치덕치덕해 보이는…….”

“당신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아마 그게 카리노 대왕이 친 마법일 겁니다. 아마 오래되어 그렇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걸 걷어 낼 수 있다고요?”

“네. 이걸 걷어 내고 망가진 부분을 보수하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외과 의사들의 수술 같은 작업입니다. 이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내고 결계의 고장 난 부분들을 살려내야죠.”

루나는 그들이 하는 말이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했다. 결계를 고친다는 건 망가진 집기나 건물을 고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인 듯했다.

휘멘이 이어서 간결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이 결계를 네가 언제든 불러낼 수 있어야 해. 그리고 우리가 손을 대는 것을 허가해야 하지……. 이 결계의 주인은 너니까.”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유적에서 나올 때 둘에게 몇 번이나 설명을 들은 내용이었다.

“일자로 치면 며칠쯤 걸릴까요?”

“얼마나 수월하게 이루어지냐에 달렸지만 늦어도 한 달 안엔 결계를 보수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빨리 되네요. 결계 보수에는 두 사람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 했죠?”

휘멘이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걷어 내는 건 흑마법사인 내가. 그리고 보수하는 건 백마법사인 아키스가 할 수 있어.”

“그럼 가장 중요한 걸 정해야죠. 언제 시작할까요?”

아키스가 물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루나를 두고 존중하고 있었다.

“결계에 쳐진 이 쓸모없는 주문을 없애고 카리노 대왕이 몇백 년 전 건 주문을 걷어 내면, 이제 여인이 고대어를 하지 못하는 마법이 사라질 겁니다. 단순히 법은 여인이 고대어에 접근하면 안 된다 했으나 사실은 여자 마법사도 탄생할 수 없었지요. 고대어에 접근하지 않고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여인인 고대어 능력자와 마법사들이 태어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사회적 준비가 필요하겠죠.”

“……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야기를 나눴던 바였다. 휘멘이 말했다.

“……갑자기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아이들이 태어나게 되면 그 부모가 아이들을 경비병에 넘기게 될 수도 있다고. 고대어는 재능 언어라 세 살 이전에 자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건 그렇군.”

“논문을 준비하고 황가의 약점을 잡고, 법안을 제정하는 데까지 1년여 정도 잡으면 충분하겠군. 그 후엔 당신의 정체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일엔 너도 협조해. 아카데미부터 의견을 움직이기 시작할 거니까.”

휘멘은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나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내가 좀 생각을 해 봤는데요.”

휘멘과 아키스의 시선이 루나에게 모였다.

“내가 떠올린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볼래요?”

아키스와 휘멘은 눈을 크게 뜨고 루나를 보았다.

“모처럼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반역자가 되어 보지 않을래요?”

루나는 셋만 있는 방 안인데도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속닥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 알리바이를 위해 동부 신전에 방문했을 때 내가 누굴 좀…… 만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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