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루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큰 소리가 귀를 때리는 걸 느꼈다. 그건 천둥소리 같기도 했고, 또 거센 빗소리 같기도 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큰 폭포가 우레 같은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천막에서 멀리서 소리를 들었던 폭포였다.
“일어났어요.”
새틴이 속삭였다. 그녀는 루나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살살 다뤄요. 아직은 쓸모가 있는 여자이니.”
기분 나쁜 목소리가 속삭였다.
루나의 눈에 간밤에 보았던 사내가 들어왔다. 긴 로브를 입은 푸른 눈의 사내였다. 혼절하기 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읽어 봐.”
그 남자가 루나의 머리채를 잡은 채 절벽 끝을 응시하게 했다.
“뭘 읽으라는 거예요 거긴 폭포밖에 없잖아요.”
새틴이 시끄럽게 꽥꽥거렸다.
그러나 루나의 눈엔 아니었다. 루나는 재갈이 물려진 채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글자가 있었다. 멍한 초점으로 자세히 보니 그 글자는 흐르는 것처럼 하늘에서 솟아올랐다.
마법진.
고대어로 이루어진 촘촘한 마법진이었다. 순식간에 그 도식과 글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수많은 마법 주문이 얽힌 수식이었다. 사내가 루나의 귀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읽을 수 있나 보네.”
“…….”
“서부의 한 오래된 던전에서 구한 마법을 섞어서 만들었지. 잘 봐 둬. 네 남편을 요절낼 함정이니까.”
루나는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러나 간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그녀를 꽉 묶고 있었다. 덫 마법이었다. 그녀는 숨 쉬는 것마저 힘겨웠다.
“그건 그렇고, 정말 걸작이야. 공작이 이런 마녀와 혼인하다니…….”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꼭 감았다.
사내는 루나를 짐짝처럼 달랑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마법진 안에 처박았다.
잠옷 차림의 루나의 치마가 뒤집어졌다. 이제 누군가 루나를 조금만 힘을 주어 밀면 루나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위태하게 눕혀져있게 되었다.
로브를 쓴 사내, 실레노스가 루나에게 바짝 다가와 몸을 숙였다. 루나는 수치심에 눈을 꽉 감았다.
“우리 오래 볼 사이인데, 공작 부인의 외모가 반반해 참 마음에 드는군. 다행이야. 추녀는 질색이거든.”
“…….”
“안 그래? 참, 내 이름은 실레노스라 합니다.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
“아, 몸이 계속 아픈가요? 정상입니다. 강한 마력장 안에서는 누구든 사족을 쓸 수 없지요. 당신 남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 이제 이건 감춥시다. 덫이 사냥감의 눈에 보이면 안 될 테니까……. 남편은 금방 달려올 겁니다. 내 메시지를 본다면요. 사랑하는 아내를 이런 곳에 오래 내버려 둘 리가 없지요.”
실레노스는 작은 주문을 외웠다.
그의 손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작은 나비들이 떠올랐다. 그가 손을 휘젓자 한꺼번에 나비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새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비쩍 마른 그녀는 마치 병자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다. 새틴이 루나의 뺨을 여러 차례 때렸다. 루나는 그것에 저항할 수 없어 뺨이 수없이 흔들렸다.
“아하, 정말 꼴좋네. 두고 봐. 공작님을 잡고 나면 더한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너만 공작님을 조종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내게도 마법사가 있거든.”
실레노스는 아주 멍청한 개를 보는 눈으로 경멸하듯 새틴을 보았다.
“거기 오래 서 있지 말아요, 엉뚱한 사람에게 마법이 발동하면 곤란하거든.”
* * *
아키스는 오래된 석조 신전 안에 있었다.
먼저 정화 의식을 마친 황후와 황태자는 아키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신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내가 신경 쓰이는군.’
그러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반짝이는 작은 금빛 나비들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나비들은 수면 위에 앉더니, 천천히 글자로 형태가 변해 갔다.
[공작 부인은 무사할까?
네 아내의 자는 모습이 예쁘더군.]
누군가, 낯선 마법사가 아키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 내용을 읽은 아키스는 곧바로 신전을 박차고 나왔다.
쥐죽은 듯한 새벽의 침묵. 그 사이에 마찬가지로 침묵하고 있는 천막이 있었다.
“……루나.”
그는 조여 오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천막 문을 걷었다. 천막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는 곯아떨어진 경비병들만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누워 있던 것이 분명한 흔적의 침대, 바닥에 떨어진 시트.
그리고 그 침대 위에 흩어진 나비들이 다시 한번 글자를 만들었다.
[단서를 쫓아 여기까지 오시다니, 정말 잘하셨습니다.
당신 아내의 은밀한 비밀에 대해 심문하기 위해 데리고 있습니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그 마녀를 우리가 먼저 심판하기 전에 와서 찾아가십시오.
이곳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내가 무사하길 바라면 반드시 혼자 오십시오.]
* * *
“공작님이 그대를 보고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기를 기대하죠. 신혼의 아내가 이렇게 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미쳐 버리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혹시 이미 갈 데까지 갔다고 망상할지도 모르지요.”
그가 속삭였다.
“이젠 난 뭘 하면 되나요.”
새틴이 중얼거렸다. 한참을 루나를 때리고 소리 지르고 나니 성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실레노스는 피식 웃었다.
“지금부터 숨소리도 내지 말고 있어요. 소리를 내면 무서운 공작님이 당신부터 공격할지 모르니.”
말을 끝내며 실레노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법진이 사라져 갔다.
실레노스와 새틴의 모습도 사라졌다. 그리고 루나 홀로 절벽에 남겨졌다.
‘아키스……!’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직도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루나는 바닥에 댄 뺨을 뒤흔드는 진동을 느꼈다.
지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끔찍하게 싸늘한 표정의 아키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감춘 실레노스는 웃었다.
‘역시 엄청나게 화가 나서 오는군. 공작이 이리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정말 즐거워.’
아키스가 걸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사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 같기도 했다.
“루나!”
다가오지 마. 안 돼, 아키스.
루나가 입속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는 아까 마법진의 수식을 읽었다. 그 마법이 함정임은 자명했다. 아키스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어찌 될지 모른다.
아키스가 루나의 몸에 손을 댔다.
“루나!”
그는 이성을 잃은 사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실레노스가 아키스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실레노스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그 칼날 끝은 아키스의 등을 관통해 루나를 향하고 있었다.
뚝뚝. 관통한 칼날 너머로 섬뜩한 피가 떨어졌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안 돼, 아키스……. 루나는 입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날 아예 보지도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부인이 반가우셨다 보군요. 신혼이시긴 한가 봅니다.”
실레노스가 이죽거렸다.
그가 손을 뗐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스르르 사라졌다. 마법이었다. 그리고 아키스의 배에서는 피분수가 솟구쳤다. 아키스가 루나를 향해 쓰러졌다. 실레노스가 다가왔다.
“안심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죽고 나면 이 괴물 같은 여자는 내가 잘 돌볼 터이니.”
“말이 다르잖아!”
그때, 누군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새틴이었다. 새틴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발작하듯 몸을 떠는 아키스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왜 날 배신하셨어요. 언제부터 그러신 거죠? 아아, 제발 대답해 줘요. 제가 이 여자를 죽이면 저를 용서해 주실 건가요? 언제부터 둘이 붙어먹고 있었죠. 나빠요, 당신은 정말 나쁘다고요.”
“시끄럽긴.”
실레노스가 손짓했다. 그러자 곧 새틴의 입이 다물어지더니 기괴하게 입에 비틀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년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새틴부터 정리할까 싶었다. 실레노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내가 보여 주는 현실은 한 번 의심해 봐야 한다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실레노스는 눈을 크게 떴다. 입이 막힌 루나와 새틴 모두 숨을 멈췄다.
어느새, 아키스는 실레노스의 뒤에 서 있었다. 그가 손을 한 번 허공에 그었다. 그리고 작은 주문을 외우자, 진공의 칼날이 나타나 그대로 실레노스의 목을 베었다.
“끅!”
실레노스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털썩. 실레노스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실레노스는 부들부들 팔을 떨며 루나에게 달려가는 아키스를 보며 손을 뻗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어진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래도, 내가 쓴 수는 풀 수 없을 겁니다……. 내가 건 사술은…… 고통스러울 테니…….”
아키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짓했다.
“시끄럽군.”
칼날이 다시 한번 나타나 실레노스의 목에 다시 꽂혔다. 그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데구르르. 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루나의 몸을 미친 듯 짓누르고 있던 압력이 풀렸다.
동시에 새틴의 입에 걸린 마법이 풀렸다.
“꺄악! 꺅!”
새틴은 쥐새끼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그때였다. 지반이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실레노스가 친 마법진이 발동했다. 억압이 풀리자마자 루나가 외쳤다.
“아키스 안 돼요. 도망쳐요!”
루나는 아키스를 밀어냈다.
쿵!
그러나 때는 늦었다.
실레노스의 마법진에서 뿜어진 빛이 아키스의 몸을 휘감았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폭발이 두 사람을 감쌌다.
아키스는 본능적으로 루나를 감싸 안았다. 아키스의 몸을 중심으로 투명한 구체가 생겨나 루나와 아키스를 감쌌다. 본능적으로 발동된 방어 마법이었다.
먼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건 지반이었다. 마법진에서 일어난 폭발로 그들이 서 있던 절벽이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새틴은 그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새틴의 발 앞까지 바스라진 절벽을 보며 그녀는 히익, 하는 소리를 지르며 발에 불이 난 듯 도망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싼 채 꽃잎처럼 엉겨 붙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아래는 몹시도 좁고 길어, 그 짧은 순간에 루나는 한번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폭포의 수면이 그들을 괴물의 아가리처럼 집어 삼켰다. 괴물은 그들을 삼키고 짓씹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아……!”
아키스와 그녀는 물살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혔고, 온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루나의 몸에 힘이 풀릴 무렵,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끌어내는 것을 느꼈다.
‘아키…… 스…….’
루나는 가물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루나를 안은 아키스가 자갈밭이 가득한 뭍으로 겨우 그녀를 끌어 내렸다.
“푸하!”
루나는 겨우 숨을 쉬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녀는 자신을 간신히 건져 올린 아키스가 정신을 잃은 걸 발견했다.
“아키스, 정신 차려요, 제발. 아키스…….”
이가 딱딱 부딪치며 온몸이 떨려 왔다.
루나는 아키스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조금 미약하지만 뛰고 있었다.
“다행이야. 그가 다친 건 환상이었어.”
실레노스에 의해 찔렸던 부위도 확인했다. 그의 배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아키스의 입술이 새파랬다.
투둑. 툭.
그들의 머리 위로 무거운 새벽 비가 쏟아져 내렸다. 막 동이 튼 시간이었다. 루나는 이를 악물고 아키스의 팔을 잡고 그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체온이 떨어지면 위험해……. 비를 피해야 해…….’
잠옷 차림으로 납치된 그녀는 거의 헐벗은 상태였다. 다행히 루나는 뭍 근처의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아키스, 일어나요. 잠깐만 걸어 봐요. 제발…….”
그녀는 아키스를 끌어 힘겹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아키스의 체온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를 눕혔다.
‘몸이 너무 차가워…….’
그녀는 그의 물의 젖은 셔츠를 벗겨 냈다. 그의 단단한 몸에 기대 루나는 몸을 떨고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재킷을 벗길 때, 루나는 그의 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이건…….’
루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펜던트였다.
‘웬 펜던트지…….’
루나는 어두침침한 동굴 속에서 펜던트를 더듬었다.
그녀는 일단 그걸 목에 걸었다. 펜던트의 생김새가 어떤지는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니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키스, 정신 차려요. 일어나서 여길 나가야 해요. 여기 있으면 아무도 우릴 찾지 못해요…… 여긴 절벽 아래예요.”
루나는 동굴을 나가 나뭇잎에 물을 받아 왔다. 그의 마른 입술을 축이고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아키스는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자…… 그 악마 같은 자가 그이의 몸에 무슨 짓을 한 걸까…….’
고통스러워하는 아키스를 보자,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루나는 작게 흐느끼며 아키스를 감싸 끌어안았다.
* * *
아키스는 혼몽 중에 천천히 눈을 떴다.
당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실레노스의 잔재주에 당하다니.
정신이 돌아왔어도, 도무지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이 축축했고 추웠지만 말캉하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 체온을 길잡이 삼아 그는 겨우 눈을 떴다.
‘또…….’
또 그 환상이다.
그가 자란 호숫가. 썩어 가는 나무 배. 물속으로 침전되는 그의 몸.
그때, 누군가 그의 몸을 건져 올려 주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루.”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그는 한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동굴 입구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의지 삼아 그는 맞은편의 상대를 분간했다.
루였다.
그 미치도록 찾아 헤매던 소년이 그에게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두 개가 아닌지 고민했다. 그는 분명히 온 마음을 다해 아내를 연모했다. 그런데도 소년이 다시 돌아오자 그 소년을 향해 기묘한 애정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상대가 흘리는 눈물이 그의 마음에 와닿았다. 새하얀 살결, 어두침침한 방, 그리고 매끄러운 금발을 뒤로 늘어뜨린 여인.
섬광 같은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이 광경을 기억했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간호하던 여인.
아니, 소년, 그녀의 얼굴은…… 그녀는……. 루나, 그녀였다.
아키스는 손을 뻗어 울고 있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피상적이던 루의 환상이 하나로 합쳐졌다. 당신이었군. 그는 혼몽 중에 생각했다.
‘당신이었어.’
아키스가 움직이는 기척을 읽은 루나는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아키스? 정신이 들어요.”
“루나…….”
아키스가 속삭였다.
“물을 좀 주겠어요.”
계속 목이 말랐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나뭇잎에 물을 새로 받아 왔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가 잘 삼키지 못하자, 루나는 제 입에 물을 머금고 그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그렇게 물을 흘려 넣어 주자 그의 숨이 조금 고르게 변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키스. 당신 상태가 이상해요.”
지금 이곳이 춥긴 했다. 동굴 안은 서늘했고, 비가 오자 날씨는 더욱 성이 났다. 그걸 감안해도 아키스의 몸은 심한 오한에 들끓고 있었다. 아키스는 침통한 신음을 냈다.
“그자가…… 당신을 납치했던 자가 내게 사술을 걸었습니다.”
루나는 자신이 꼼짝을 못하고 이상한 힘으로 붙들려 있던 그 마법진을 기억했다. 그 마법진 안에는 고대어 글자들이 일종의 수식을 이루며 적혀 있었다. 예상대로 그건 그자의 함정이었다.
“그러면…… 치료하려면 마법사가 필요한가요?”
아키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술에 걸렸는지 알면…… 고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구조를 기다려야겠죠.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으니 당신이 혼자 나가는 건 무립니다. 또…… 비가 오는 스틸본 숲은 야생 동물들이 거칠어지니 몹시 위험해요. 내가 정화 의식을 마치지 못했으니 맹수들이 날뛸 겁니다…… 큰 소란이 일어났으니 황가의 병사들이 움직일 테니, 조금만 참아 줘요.”
절벽 아래, 폭포의 깊은 곳으로 갈수록 맹수가 사는 구역이었다. 병사들이라고 해도 쉬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 루나 혼자 구조해 줄 사람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했다.
‘……이렇게 아파 보이는데도.’
그는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루나를 달래고 있었다. 루나는 그런 그의 마음 씀씀이가 슬프고도 염려스러웠다.
“옆에 있을게요.”
루나는 그에게 귀를 가져다 붙이고 속삭였다.
그때, 루나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가 아키스의의 뺨에 스쳤다.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펜던트를 쓰다듬자, 펜던트가 희미한 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뿌연 빛이 두 사람의 바짝 붙은 얼굴위로 비춰졌다. 펜던트에 걸린 마법 중 하나를 활성화시킨 것이었다.
‘……이게 있어 다행이군.’
루나가 목을 더듬었다.
“이건…….”
그제야 펜던트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루에게 아키스가 빌려주었던 그 물건이었다.
루나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풀었다. 그가 언젠가 루였던 자신에게 빌려주었던 펜던트였다.
‘이걸 왜 아키스가 몸에 지니고 다닌 거지……?’
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위로 그 소년이 겹쳐졌다. 할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도저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간헐적인 발작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가 아파하자, 루나는 말을 잊고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키스.”
아키스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그녀의 심장이 놀라 뛰었다.
“정신 차려요, 아키스. 의식을 잃으면 안 돼요.”
한 번, 그가 죽을 뻔한 걸 본 날이 있다. 그가 달빛 서점에 독약을 먹은 채 소년 루를 찾아온 날.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두려웠다. 그를 잃을까 봐.
그녀의 몸은 자신의 것이요, 마음 또한 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아픈 것만으로 그녀는 몸과 마음을 어딘가에 저당 잡힌 듯 똑같이 아팠다.
루나가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키스는 겨우 의식을 잡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 의식을 잃으면 내 몸 안의 마력이 역류할 수 있어요. 내게 말을…… 걸어 줘요. 듣고 있을 터이니…… 아무 말이든 좋아요. 걱정 마요. 난 그리…… 쉬이 죽지 않습니다.”
아키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전부 다…….”
모든 것이.
아키스는 그 말을 눌러 삼켰다. 루나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알겠어요.”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동굴 천장은 축축했고, 이따금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동굴 밖에서는 비가 간헐적으로 내렸다 그쳤다. 몸이 점점 차가워지지 입술이 바짝 타올랐다.
루나는 무슨 말이든 했다.
사냥제에 대한 이야기, 휘멘에 대한 이야기, 저택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페니나 제인이 말해 준 작은 농담까지. 그는 간헐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다시 정신을 잃기를 반복했다.
“아키스, 듣고 있어요?”
그러다 아키스는 어느 순간부터 미동이 없었다. 정말 그의 몸이 시체처럼 느껴졌다. 루나의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죽지 마요 아키스.”
결국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죽으면 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째서 이만큼이나 그를 좋아하게 된 걸까. 이토록 다른 타인인데. 아예 모르고 살아왔고, 서로의 무엇도 아닌 채 이미 한 번 생을 마감했는데. 왜 어째서.
“좋아해요, 죽지 마요.”
“…….”
루나는 그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속삭였다.
“알아요, 아키스. 머나먼 동방 대륙에는 비익조라는 새가 있데요. 어떤…… 어떤 책에서 읽었어요. 그 새는, 두 마리가 한 쌍으로 태어나 눈도 하나, 날개도 하나, 그렇게 한 마리로 살아간대요. 차라리 나와 당신이 그렇게 태어났으면 좋을지 몰라요. 정말로 날개라든가, 눈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지만…….”
“…….”
그의 얼굴 위로 루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면, 당신은 날 선택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어떤 과거를 지녔든,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든…… 이 세상에 당신 짝은 오직 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용서하고 받아 주겠지요. 나를 필요로 하겠지요.”
그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녀 또한 열이 오르고 몸이 떨려 왔다. 아까는 의식하지 못한 요통이 온몸을 휩쓸었다.
“사랑해요.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까…….”
루나는 말을 멈추고 아키스의 품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어두운 동굴에 숨어 있는 것보다는 그가 잘못될까 그것이 무서웠다.
루나의 끊어질 듯한 작은 목소리는, 이윽고 그녀 또한 견디지 못하고 반쯤 정신을 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정신을 잃었던 루나는 눈을 떴다.
발자국 소리였다. 무장한 사람들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 병사들의 소리였다.
“여기 있어요!”
루나는 모든 기력을 짜내 벌떡 일어나 동굴 밖으로 뛰어 나갔다.
“공작 부인이 여기 계십니다!”
병사 중 한 명이 루나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주변에 알렸다. 다가오는 그들의 기척을 느꼈다. 선두에 선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이런, 엄청난 몰골이시군요, 공작 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태자가 말했다.
“남편이…… 동굴에 있어요. 어서…….”
“알겠습니다. 이젠 걱정 마세요.”
루나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탈진해 무릎을 꺾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누구지, 루나는 자신을 안아 올린 사내를 보았다.
‘휘멘…….’
그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만은 안심이 되었다. 루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갈라진 천장과 벽이 보였다. 낯선 방이었다.
“일어나셨습니다.”
낯선 여인 한 명이 다가왔다. 그녀는 루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여인은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를 모두 천을 길게 내려 가리고 있었다. 루나는 그녀가 간호사라는 걸 짐작했다.
“열은 내리셨어요.”
“공작 부인!”
곧, 누군가 문을 왈칵 열고 들어왔다.
제인이었다. 루나의 몸에는 새로운 옷이 입혀져 있었다. 익숙한 옷이었다. 제 옷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옷을 더듬었다.
“어떻게 된 거니, 여긴…….”
“여긴 동부 게이트 근처의 의원이에요. 천막에서 치료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급히 사람들이 마차로 이곳으로 이송하였어요. 공작 부인의 옷은 제가 천막에서 가져왔고요.”
제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루나를 보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아, 공작 부인. 이렇게 고생하시다니…….”
루나는 뺨을 더듬었다. 몸에 생채기가 몇 개 나고, 새틴에게 맞은 뺨이 살짝 부풀어 있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제인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그녀는 휘청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공작님은……. 내가 얼마나 잤니?”
루나의 목이 바짝 탔다. 제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마법사와 의사들이 달려들어 공작님의 상태를 보았어요. 밤새 의식을 찾지 못하셨어요. 암살자가 마법사였는데, 그자가 공작님께 몹쓸 주문을 걸고 죽었대요.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제인이 그렇게 말하며 눈치를 보았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어.”
“조심하세요, 부인.”
간호사가 달려와 루나를 부축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열이 내린 지 얼마 안 되셨어요.”
“괜찮아. 어서.”
아키스의 병실은 바로 옆방이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의사 두 명과 마법사 한 명, 그리고 휘멘이 침대 주변에 서 있었다.
“깨어났군.”
루나를 보자 휘멘은 눈인사를 했다. 그녀를 보며 화낼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위독한가요.”
“죽진 않아. 운 나쁘면 오래 깨어나지 못해 문제지. 그리고 일어났을 때 잘못하면 어디 하나가 망가져 있을 수도 있고. 뭐,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는 쉬이 죽지도 못하거든.”
그가 몹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루나는 그가 여기 있는 연유를 알 수 없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그대들을 찾아낸 건 나니까.”
“어떻게 알고 돌아 오셨지요.”
“운 나쁘게 게이트 검문에 걸려서 근처에서 이용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황태자의 전령들이 날 찾았지. 행방불명된 공작 부부의 수색을 도와달라더군. 그러니 날 의심하지 말라고. 헛소리를 하는 놈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말은 안 믿어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앓고 있는 아키스의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걸린 저주를 몰라서 지체되고 있는 건가요.”
“지독한 놈에게 걸렸어. 진즉 그놈을 죽였어야 하는데. 목숨까지 소진하며 그린 마법진이야. 몇 가지 때려 맞추고는 있는데 내게도 쉽지 않군. 어떤 고대 주문들을 섞어서 만들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루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를 돌아 방을 나갔다. 휘멘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루나는 옆 병실로 가 제인을 불렀다.
“펜과 종이를 가져오렴.”
그녀는 제인이 그것들을 빌려 오자, 빠르게 그때 자신이 본 마법진의 수식들을 번역하여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하찮고 작은 고대어라도 그녀는 그것을 읽은 이상 아주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완전한 복원은 힘들지 몰라도, 휘멘이라면 이 정도 단초로도 분명히 그를 구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루나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려 종이를 잘 접었다.
이제 이걸 휘멘에게 전하기만 하면 된다. 루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키스가 여행이 끝나면 한 번 진지한 대화를 나누자고 했던가. 아무래도 그와 진지한 대화는 나누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이젠 다 끝났구나.
이제는, 더는 감출 수 없겠구나. 되돌릴 수 없겠구나. 그 생각이 들며 맥이 탁 풀렸다.
두려움과 다양한 감정이 루나를 감쌌다.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어쩌면 이 또한 운명일지도.’
두 번이나 그를 구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인, 혹시 여자 한 명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니?”
“여자요.”
“……우리가 행방불명된 자리에서 말이야. 죽은 마법사 말고 그들이 무언가 찾은 건 없니?”
“아무것도…… 사람들이 소리가 난 곳을 수색하자 야영장의 정반대인 숲 건너편 절벽에 목이 잘린 마법사의 시체 한 구만 있었대요.”
“…….”
새틴은 쥐새끼처럼 도망친 것 같았다.
‘아키스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새틴을 아키스도 보았고, 그녀가 연루된 걸 알 것이다. 새틴이 운 좋게 도망쳤다 해도 의식을 회복하면 아키스가 움직일 것이다.
‘새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실레노스는 자신을 마녀라 했다.
그자와 새틴이 왜 같이 있었는지 연유는 모르겠지만, 새틴은 아키스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으리라.
대체 어떤 방법을 통해 그자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걸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루나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난 게이트를 탈게. 공작저로 가서 기다릴 터이니, 황가에는 알리지 말고 게이트에 가서 바로 준비하라 일러. 황족 전용 게이트를 열어 달라 해.”
“네? 지금요?”
제인의 눈이 커졌다.
“큰일을 겪었으니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루나는 제인에게 그리 말했다. 그러나 제인은 의문 가득한 표정이었다.
“마차에는 나 혼자 오를 터이니, 넌 그가 깨어나면 공작가의 식솔들과 함께 오도록 하렴. 명심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으니, 아키스가 깨어나기 전까지 내가 간 걸 아무에게도 이르지 마.”
“……알겠습니다. 공작 부인.”
“공작님이 깨어나면 내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다 전해 주렴.”
루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급하게 떠날 준비를 하며 루나는 팔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자꾸만 가슴께와 팔이 화끈거렸다.
루나는 휘멘이 복도를 걸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아키스의 병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앓는 아키스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침대 위에 쪽지를 올려놓았다.
휘멘이 이 쪽지를 발견하기만 하면 아키스의 안위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불안해 할 새도 없이 게이트가 준비되자 그녀는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하지 않고 급히 의원을 나왔다.
* * *
“수도에 급한 일이 있어 가려 하니 급히 열어 줘요.”
게이트의 담당자는 몹시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황가의 사냥제 중인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공작 부인이 이렇게 이탈하다니? 그의 기색을 읽은 루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일 때문이에요. 긴급한 일이니 바로 일일이 연유를 말할 여유가 없군요.”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게이트 담당자가 찜찜한 표정을 감추고 문을 열었다.
* * *
“공작 부인, 어떻게 혼자 오셨습니까. 그것도 이렇게 일찍…….”
디온과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루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아직 아키스가 심하게 다친 것을 모르는 듯했다. 황가에서 경황이 없어 알리지도 못한 것 같았다.
루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게 되었어요. 내가 고집을 부려 먼저 집에 왔어요. 사냥제가 조금…… 힘들더라고요. 제인은 내일쯤 짐정리를 하고 올 거예요.”
루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디온과 집사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새틴이 때린 뺨이 심하게 부어오르지 않아 그들은 루나가 다친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들은 부부 싸움이라도 했나, 하는 생각마저 했다.
“방에 올라가 쉴게요. 남편도 내일 올 거예요.”
루나는 저번에 그가 최음 독을 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심한 타격을 받았으니 당장 오늘밤은 의식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인즉, 비록 하루지만 그가 자신의 모든 비밀을 눈치챌 순간이 조금은 연장되었다는 뜻이다.
루나는 곧바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의 소파 아래에는 언젠가 그녀가 준비해 놓은 작은 손가방이 있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는 날에 대해 수없이 상상하고 수 없이 대비했다. 루나는 신속하게 꼭 필요한 짐만을 담았다. 붉은 책, 그리고 통장과 돈, 신분증, 약초의 복원법을 적어 놓은 서류들과 지도와 게이트의 루트. 남부의 한 도시가 행선지였다.
“……아.”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드레스 룸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손목과 가슴이 쓰라렸다.
루나는 옷 위로 피부를 꽉 눌렀다. 루나는 옷을 풀어 자신의 피부를 확인해 보았다.
‘이, 이게 뭐야?’
루나의 눈이 커졌다.
일전에 본 적 있는 검은 꽃이 쇄골부터 손목까지 아로새겨져 있었다.
* * *
“하아…….”
아키스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깊고 깊은 악몽 속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는 손을 겨우 움직여 보았다.
“휘멘?”
아키스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왜 네가 여기 있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휘멘이 삐딱하게 말했다.
“네게 건 수식을 푸느라 밤새워 죽는 줄 알았다고, 실레노스가 모르는 사이 잔재주만 늘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문을 엮었더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키스는 욱신대는 가슴과 손목을 느꼈다.
‘루나, 그리고 루…….’
아키스는 동굴 속에서 앓으며 ‘그날’ 밤의 기억 일부를 떠올렸다.
흰 셔츠를 입은 루나, 루의 복장을 한 그녀. 이윽고 그날의 새벽이 끝날 때쯤 그의 품에서 잠이든 루나의 피부는 점차 창백하게 변해 갔다. 마치 어떤 마법이나 약의 효과가 끝난 것처럼…….
‘혹시, 내가 루나가 루이기를 바란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그는 품을 더듬었다. 펜던트가 없었다.
“혹시 내 소지품 중에 펜던트는 없었나?”
휘멘은 대답 대신 턱짓했다.
아키스는 그가 가리킨 병실 한편의 탁자에 놓인 코트와 소지품을 보았다. 역시 그 안에 루의 펜던트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의식을 찾았지? 하루 만에 그 주문을 푸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고맙다는 말은 없냐?”
휘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네가 당한 수식의 정보를 두고 갔어.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휘멘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아키스가 기절하기 전, 무슨 수를 안배해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키스의 그 종이를 훑는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종이를 내리고 휘멘을 향해 묵직하게 뱉었다.
“내 아내는?”
“다른 병실에 있겠지.”
휘멘은 지난 밤 병실 밖으로 거의 나가지 하지 않고 아키스를 치료했다.
“나가.”
아키스가 휘멘을 보며 내뱉었다. 휘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명의 은인을 보고 할 말이 고작 그거냐?”
“내 생명의 은인은 네가 아니라 이 쪽지 같은데. 어서 나가.”
아키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그 문서는 누가 주고 간 거지?”
“……모르겠나?”
아키스가 휘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속으로 내심 안도했다. 휘멘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아키스는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실레노스의 시체는 찾았나?”
“시체를 황가의 병사들이 수습했다. 그놈이 여기 잠복해서 널 기다린 모양이야.”
실레노스의 이름을 들은 휘멘의 낯이 어두워졌다.
“더 발견된 건 없나?”
“없어.”
아키스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다.”
“……네가 나한테?”
‘부탁’이라는 단어를 들은 휘멘의 표정이 단번에 핼쑥해졌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루된 여자가 하나 있어. 실레노스와 같이 있던 여자인데, 새틴이란 이름의 갈색 머리 여자다. 보아하니 그 여자가 잡히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습격 받은 곳 근처에 가서 그 여자를 좀 잡아 오도록.”
새틴이 어디까지 연루된지는 몰랐다. 보나마나 간악한 실레노스가 이용한 것이겠지만, 일단 심문은 해 봐야 했다.
“……말만 부탁이고 어디서 명령이야?”
휘멘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 실레노스의 탓이라면, 처음 실레노스가 파문당했을 때 그를 처벌하지 말자 주청한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휘멘은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키스가 내뱉었다.
“……내 말을 따르면, 실레노스가 처음 죄를 저질렀을 때 바로 죽이려 한 내 결정이 너무 냉정했음을 인정하지. 지금이야 우리 둘 다 그놈을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네가 감정적이 될 만했어.”
“……진짜 인정하는 건가?”
아키스의 말에 휘멘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 여자를 잡아 오는 데 성공하면.”
휘멘은 바로 방을 박차고 나갔다. 아키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단순해서 다행이군.’
어차피 휘멘과는 그런 사이였다. 서로 이를 갈며 해코지를 할 수 있지만 둘 중 하나가 목숨의 위기에 처하면 암묵적으로 구할 사이.
빈방에서 아키스는 종이를 손에 꼭 쥐었다.
자신의 글씨를 숨기려 꾸며 낸 필체지만, 독특한 몇몇 철자를 아키스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수없이 본 그녀의 글자였다. 그리고 루의 글자였다.
‘꿈이 아니었어.’
환상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의 주인은 그녀였다.
그는 천천히 셔츠를 풀었다. 거울 안의 자신의 몸을 살폈다. 손목부터 가슴 근처까지 길게 검은 꽃문양이 피어나 있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이만큼이나 검은 꽃이 자랐다.
이제 각인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는 욱신대는 피부를 누르고 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후 급하게 일어났다.
“루나는, 아내는 어디에 있지?”
아키스는 복도에서 마침 마주친 제인을 보고 다짜고짜 물었다. 제인은 겁먹어 눈을 크게 치떴다.
“부, 부인께서는 어제 먼저 공작가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뭐?”
아키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가 떠난 지 몇 시간이나 되었지?”
“대여섯 시간 정도…….”
제인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공작님이 깨어나시면 전 여기서 대기하다 공작가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키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인즉…….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루나는 공작가에서 몇 시간 눈을 붙이지도 않았다.
끔찍하게 피곤했지만,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루나는 더 이상 뒷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새벽 동이 트자마자 공작가에서 나왔다.
아마 그녀가 사라진 것이 알려지면 공작가가 뒤집어 질 것이다. 그전에 게이트를 탈 생각이었다.
아직 날이 더웠지만 루나는 아주 얇은 천으로 만든 여름 망토를 더욱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아파…….’
루나는 손목을 걷었다. 검은 꽃이 드러나 있었다.
‘왜 또…….’
아무래도 남부 도시에 도착하면 의사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루나는 게이트의 이용 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일반인 이용객을 위한 줄이었다.
‘……아키스가 곧 깨어날 거야. 그전에 떠나야 해.’
휘멘이라면 그 수식을 금방 해독해 아키스를 깨울 수 있을 것이다.
루나의 검문 순서가 코앞이었다.
그때였다.
“특별 검문을 시작합니다. 여성분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행방불명된 귀부인의 보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게이트를 지키는 치안 기사들이 앞으로 우르르 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마음속에 번졌다.
루나는 후드를 눌러쓴 채 앞으로 나가는 여인들의 반대편으로 빠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게이트 근처를 벗어나야 했다.
“아…….”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루나는 한 사내와 부딪혔다. 그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인영이 눈앞에 있었다.
아키스였다.
루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키스…….”
그는 루나의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그녀는 냉엄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끊어 뱉듯이 내뱉었다.
“이 시간부터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궁금하군요.”
그가 루나의 손목을 꽉 쥐고 끌어당겨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방을 꼭 쥔 채 그를 따라갔다.
“잠깐만요, 아키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왜 경비병을 불렀는지. 호흡이 가빠지고 피부가 점점 더 아려 왔다.
“모두 나가라.”
그는 경비 기사들의 휴게실 중 한 곳에 들어서며 명령했다.
아키스의 등장에 혼비백산한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닫았다. 루나는 텅 빈 방 안에 둘만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키스를 응시했다.
“말해 봐요.”
그가 나직이 말했다.
“어디로 도망갈 생각이었습니까? 내게 이런 진실을 남겨 두고, 날 그냥 내버려 둔 채…….”
아키스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숨이 거칠었다. 루나는 그가 몹시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순간 루나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가 무사해 다행이었다.
아키스가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나는 움찔했다.
“내게서, 도망칠 생각이었습니까?”
그가 끊어 뱉듯 말했다.
“당신 입으로 말해 봐요, 전부. 날 더 미치게 하기 전에. 지금 기분으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아키스의 온몸에서 소유욕이 들끓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려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그녀를 영영 가둬둘 수도 있었다.
루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도망은 아니었어요. 잠깐 멀리 가 있으려 했어요.”
“그게 뭐가 다릅니까? 당신은 어디까지 날 우롱해야 마음이 풀릴 겁니까?”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황하고 겁먹을수록 이상하게 머릿속이 또렷해졌다.
루나는 작게 말했다.
“……당신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어요.”
“기회?”
루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날 외면할 기회요.”
“…….”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루나는 차마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내가, 당신을 속였어요.”
“…….”
“그것도 아주 오래 속여 왔어요. 결혼 생활 내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장이 저려 왔다. 쿵쿵, 뛰었다.
그러나 그녀의 메마른 마음에는 더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 비밀로 인하여 그간 정말 많은 마음고생을 했다. 수많은 고민을 했다.
‘흉조, 마녀, 불길한 존재…….’
수많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루나의 죄는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었다. 세상이 씌운 죄였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녀를 죄인이나 괴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루나가 여러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말했다.
“내가 루예요. 당신을…… 당신이 친절을 베풀어 준 소년이 나예요. 그리고 나는 여인이고요.”
그녀는 고통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지금 저는 공작 부인이죠. 날 감당할 수 없다면, 당신이 이 진실을 덮는 걸 도와주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최소한 죄책감 없이 날 놔줄 수 있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속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성정이 아닌걸요. 난 모든 기회를 날려 버렸다 생각했어요. 만일 내가 도망가서 사라지면 당신이 날 외면하더라도 내 탓으로 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이런 이타심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메마른 감정은 눈물 대신 고통스러운 비통함이 되어 마음을 적셨다.
아키스가 다가와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주 보는 그의 얼굴은 뜻밖에 고통보다는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간…….”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는 눈이 완전히 마주할 정도로 고개를 숙여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이 날 얼마나 괴롭게 한 줄 압니까?”
“알아요. 내가 당신을 속여서…….”
“그게 아니에요. 난…….”
아키스는 그녀가 자신이 각인자라는 것에 당황했지만 무엇보다 안심하고 있었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가자 루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아키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만일 당신이 임신이라도 했으면…….”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물론 그녀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나 아주 잠깐이라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빌어먹을, 난 우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평생 남을 상처를 줬을 수도 있다고요. 인간관계는 한 번 깨지면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말실수 한 번으로 당신은 평생 날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막상 그런 상황이 와도 아키스는 루나를 의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으로 그녀에게 영영 남을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었다. 아키스는 그 가정 자체에 자책할 만큼 화가 났다.
“…….”
“거기다, 고위 마법사가 미쳐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압니까?”
아키스가 이렇게 감정적인 건 처음이었다. 루나는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
아키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게 가장 큰 문제죠.”
배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비통한 속삭임이었다.
“루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것이 날 얼마나 고통스럽게 한 줄 압니까? 그리고 내가 루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가 루나의 목에 걸려 옷 속에 걸린 펜던트를 끄집어냈다.
루의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가 잠자리에서 루나를 사랑하고 귀애할 때만큼 애틋한 손길이었다.
“당신은 모든 걸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게 그 열쇠를 주지 않았어요. 날 미쳐 버리도록 몰아갔단 말입니다.”
그가 어두움이 가득 스며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나는 모든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상처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루나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루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가 키스했다.
그녀를 잡아먹을 듯 조급한 키스였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를 집어삼킬 듯 그의 혀가 입안에서 움직였다. 루나의 입술근처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잇자국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 아키스.”
루나가 헐떡이며 말했다.
“진정해요, 난…… 당신 마음을 모르겠어요. 내게 뭘 원하는 거죠?”
“당신을 원해.”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다신 놔주지 않을 겁니다. 어딜 가든 지옥까지라도, 같이 갈 겁니다.”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과 내가 서로 해소해야 할 ‘왜’라는 질문이 너무 많아요.”
아키스가 셔츠를 풀었다. 그의 목에는 선명한 검은 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아키스는 그녀의 옷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녀의 우윳빛의 살결위로 새까만 검은 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드래곤의 꽃, 각인을 뜻하는 꽃이었다. 그녀의 몸 위로 떠오른 표식을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 여인을 사랑해도 되는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가정을 줄 수도, 그녀를 당당하게 붙잡을 수도 있다. 이제 그의 인생을 모두 걸고 그녀에게 구애해도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을 사로잡은 운명이 그렇게 허락했다.
“……아키스, 당신 몸에도 나와 같은 문양이 떠올랐어요.”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뭐죠?”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증거죠. 당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왜, 이 질문은 수없이 많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도대체 어떻게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인 그녀가 태어난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이 문양을 지금껏 감추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 당장은 열망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벽에 밀어붙이고 격렬하게 키스했다. 이번 키스는 달랐다. 그녀를 몹시도 원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키스였다.
그녀의 입술을 급하게 빨고 입 안에서 혀와 혀가 서로의 것처럼 얽혀 달아오른 복잡한 감정을 대변했다.
“일단 집으로 가요. 당신이 다시 도망칠까 지금 이 순간도 조급하니까.”
루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키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바깥 사람들이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 * *
집사와 디온은 요즘 별 해괴한 일이란 일은 다 겪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남편을 두고 국가 중요 행사에서 홀로 돌아온 공작 부인, 그리고 기사들의 교대 시간을 틈타 새벽녘에 사라져 버린 공작 부인.
그리고 곧바로 새벽같이 돌아와 야윈 모습으로 루나를 찾아 헤매던 공작. 그리고 그런 공작의 품에 안겨 돌아온 공작 부인.
그들은 고용인들은 본 체 만 체하지도 않고 부부 침실에 틀어박혔다.
“공작님…… 공작 부인……?”
“지금부터 아무도 들이지도, 찾지도 마라.”
그들의 앞에서 침실 문이 쾅, 닫히더니 다시 한번 열렸다.
“……아내가 아침을 먹지 못했으니 간단한 음식만 가지고 들어와. 그리고 술도. 둘이서 길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러곤 다시 쾅, 닫혔다.
그 소란에 비아까지 나와 상황을 지켜볼 정도였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 * *
공작저로 돌아온 루나와 아키스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일단 루나가 진정할 때까지 그는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와인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루나의 말문이 트였다.
“……난 무서웠어요.”
그녀는 아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내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게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어느 날 재능이 개화한 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고대어를 몇 자 배웠다는 이유로 체스터 후작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 마녀가 되어 연행되었어요.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고, 그녀는 평생을 허름한 신전에서 죄수 생활을 해야 한다 들었어요. 그렇게 되기 싫었어요. 심지어 그녀는 나만큼 고대어를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루나는 그제야 왈칵 설움이 치밀어 올랐다.
“죄가 아닌 것을 죄라 하고,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에 떨며 살았어요. 당신이 날 받아 주지 않으면요? 당신은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죠. 당신 손에 의해 재판에 넘겨지는 것만은 싫었어요.”
훌쩍이는 루나를 보며 아키스의 가슴이 저려 왔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왜 그랬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를 조금만 믿어 줬다면, 그랬다면 우린 서로 고통스러울 일도 없었을 겁니다.”
루나를 달래듯이 아키스가 말했다.
“난 이미 당신의 것인데, 당신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이 대륙에 있는 게 문제라면 당신 손을 잡고 도망치겠습니다. 바다를 건너가 먼 곳에서 둘이 살아도 됩니다.”
“……뭐 때문에 날 위해 그렇게 모든 걸 다 버린다는 거예요?”
루나는 와인 잔을 꼭 쥔 채 눈을 깜빡였다.
아키스가 미소 지었다.
“내 말에 이미 정답이 나와 있잖아요. 당신은 날 모두 다 가졌다고.”
“……그건…….”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아키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냥제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말. 루나는 그게 그의 사랑 고백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사냥제가 끝나면 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 했죠. 혹시…….”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그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다만, 저를 사랑함에도 그의 표정에 드리운 어둠이 무엇인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랑 고백을 듣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자각해 주었으면 했다.
“루나, 이야기가 길어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가문의 비밀, 드래곤의 각인, 그리고 루나와 아키스가 어떤 사이가 될 것인지.
그제야 루나는 아키스가 외친 말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루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럼 내가…… 당신의 각인자란 말이에요?”
“네. 정확히 말하면 각인이 완성되어가는 중이죠.”
“그럼 각인이 완성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그건 겪을 때까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긴 공작가의 역사상에도 딱 세 번 일어난 사고라 하고, 고대 시절의 이야기라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으니까요. 다만, 미친 듯이 각인자를 사랑하고 각인자를 통해서만 아이를 가질 수 있으니, 수컷으로서의 종속이라 할 수 있지요.”
“…….”
“하지만 내게 그건…… 큰 문제도 변화도 아닐 겁니다.”
은유적인 그의 말에 루나의 뺨이 부풀어 오른 봄꽃처럼 달아올랐다.
이런 식으로 고백을 듣게 될 거라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 그 이상이었다. 일평생을 묶여도 상관없다니.
“무섭지 않아요?”
루나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각인이라니, 정말 그런 게 있을까? 하지만 아키스와 자신의 몸에 피어오른 검은 꽃이 그 증거였다.
“나 말고 다른 여자는 평생 못 만나는데?”
“당신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날 생각인가요?”
“아뇨. 그건 아니죠. 당신이 날 떠난다면 몰라도…….”
“어이없는 소리. 당신 인생에 앞으로 남자는 나밖에 없을 겁니다.”
아키스는 투박할 정도로 진심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루가 내 각인자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만일 누군가에게 내 인생을 준다면 당신에게 주고 싶다고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이제 그게 이루어졌으니 난 그거면 됐습니다.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괜찮나요?”
“……뭐가요?”
“내가 당신에게 묶이면 나도 당신을 평생 구속하고 묶으려 할 텐데.”
화끈해진 뒷덜미가 더 달아올랐다.
이상했다. 그의 집착과 구속이 두렵지 않았다. 도리어, 좋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준다고 약속하고 결혼했죠?”
“물론이죠.”
“그 약속만 지킨다면, 좋아요.”
루나는 붉어진 눈가를 감추며 작게 눈을 깜빡였다.
아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두 손과 발이 얽히고 시트가 둘의 머리 위로 덮였다. 이불 아래는 둘만의 세계 같았다.
진득한 키스 끝에 그가 속삭였다.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리 황가라고 해도.”
“그게 무슨…….”
루나는 아키스의 눈을 응시하다 말뜻을 깨달았다.
“……공작가에 보랏빛 눈을 가진 유일한 직계 자손이기 때문이군요.”
“네.”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당신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면…….”
제국이 흥망성쇠를 걸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존재.
제국의 상징적 존재.
루나가 유일하게 공작가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녀가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걸 들키더라도, 황가는 루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만일 만천하에 이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황가는 그녀의 공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도 그렇지만, 각인이 완성되고 나면 당신이 죽으면 아마 내가 미쳐 버릴 겁니다.”
루나는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건 보증, 그 이상이었다.
“확실한 건, 각인이 없어도 내 마음은 똑같다는 겁니다. 그건 맹세하겠어요.”
그 말이 루나의 심장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루나는 그제야 아키스가 왜 살의를 가지고 루를 찾아 헤매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루를 찾기 위해 휘멘까지 끌고 왔던 거군요.”
루나는 피식 웃었다.
일단 아키스와 헤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기자 그제야 루나는 속내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루나 자신은 루일 때도 루나일 때도 아키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아니고, 루는 죽이려 하고 루나만을 사랑했다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결국 소년 루가 아니라, 여인인 나만 좋았던 거죠? 난 루일 때 내게 하도 잘해 주기에 혹시 이 사람이 내가 여자인 걸 눈치챘나, 아니면 소년인 내게 마음이 있나 별생각을 다 했다 구요.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나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는지 정말 모를 거예요. 그 힘든 이중생활을 하는데도 매일 밤 당신 생각에 잠에 못 들었어요.”
루나는 툴툴거렸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치게 루의 모습이라, 아키스는 그녀가 루나이자 루라는 걸 실감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키스가 대답을 못하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예요? 혹시 그 이전부터 관심 있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녜요.”
아키스가 구차하게 변명했다.
“……하지만 난 그리 남에게 쉽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루를 데려와 평생을 보살펴 주려 했어요.”
“내가 그렇게 귀여웠어요?”
루나가 작게 웃었다.
“네? 공작님. 루가 그렇게 좋아요?”
루나가 허스키한 톤으로 속삭이자, 아키스의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떻게 한 번도 나를 의심도 안 할 수 있어요?”
“……그건.”
아키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루만큼이나 고대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는 재능의 여인은 절대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법사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요.”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기엔…… 내가 태어났는걸요. 가능할 수도 있어요.”
“아니요, 루나. 정말로 불가능합니다.”
아키스가 딱 잘라 말했다.
“태초의 결계라는 말을 들어 봤나요?”
“……네. 하지만 자세히는 몰라요.”
휘멘이 그런 말을 흘린 적 있다.
“이 세계에 고대인들이 펼친 결계입니다. 태초에 이 제국 땅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과한 공간이었고, 고대인들은 그 마력을 진정시키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결계를 펼쳤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마법사들이 마법사일 수 있게 이 세계를 지탱해 주는 요소 중 하나가 태초의 결계지요. 카리노 대왕은 그 태초의 결계 위에 여자가 고대어를 못하게 하는 마법을 걸었습니다. 오래된 아교와 아교가 엮이듯 두 마법은 이미 결합되어 있지요. 그 마법을 걷어 내기 위해 결계에 손을 대면 균열이 생길 수 있어요.”
“……그 결계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마법사들이 마법사가 아니게 되고, 인류는 조금 남은 마법 문명마저 잃겠지요.”
아키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국 여인은 고대어를 할 수 없군요. 하지만…… 역시 에리스에 대한 전설은 이상해요. 그녀가 정말 죄인이라 한들, 모든 여인들이 그녀의 죄를 대속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키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당신 같은 여인이 앞으로도 태어날지 모르지요…… 이건 연구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아키스는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위로 생겨난 검은 문신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간 문신은 어떻게 숨긴 거죠? 난 마법을 걸어 숨겨 왔다고 해도,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혹시 누군가 마법을 걸어 준 겁니까?”
그 말에 루나는 그 기묘한 꿈을 떠올렸다.
드래곤의 꿈.
루나는 아키스에게 그 꿈 내용을 말했다. 아키스는 뜻밖에 깊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래서, 드래곤이 나오는 꿈을 꾸고 난 후 문양이 생겨났다가 곧 사라졌다고요?”
“네. 그리고 어제부터 계속 아프기 시작하더니 다시 문양이 생겨났어요.”
“……드래곤이 인간사에 자꾸 개입한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닌데요.”
“……그래요?”
“드래곤이 인간사에 개입하면 항상 큰 사건이 일어났지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일이지요.”
드래곤의 신부.
아키스가 드래곤의 계약자이기에, 그와 각인한다는 것은 용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었다. 드래곤의 신부가 된다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스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드래곤에게 강렬한 질투를 느꼈다.
‘아주 내 아내를 처음부터 찍었군.’
내 건데. 내 아내인데.
그는 속을 그 말을 주워섬겼다. 루나가 관련된 일에서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드래곤의 신부가 된다면…… 혹시 드래곤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든가 언젠가 제물로 바쳐져 잡아먹힌다든가…….”
루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상상력은 아키스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육체적 사랑을 원한다든가, 사랑하니 뭔가를 해 주길 바란다는 건 모두 인간의 관점입니다. 당신이 드래곤의 신부라고 해도 드래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애초에 드래곤과 인간은 육체적인 사랑이 불가능하지요.”
아키스는 나직이 말했다.
역대 각인자들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진 않았으나, 그들은 모두 인간으로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들었다.
말 그대로 드래곤은 자신의 신부를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제 이 꽃이 피어나 심장까지 닿으면 각인이 완성될 거예요.”
아키스는 그녀의 드레스를 완전히 풀어냈다.
뽀얗고 말랑한 그녀의 살이 드러났다. 아키스는 숨골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리다 쇄골 아래까지 피어 있는 검은 꽃 위로 키스했다.
‘도망칠 수 없는 운명 같아.’
루나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놀랐다.
오늘 들은 이야기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를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이완시켰다. 아키스가 그녀의 살결에 피어난 꽃잎에 키스했다.
“으응…… 읏…….”
아키스가 그곳에 이를 세우자,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그와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순간, 그를 느끼고 싶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휘멘이 새틴을 잡으러 갔습니다.”
아키스는 살짝 부풀어 오른 루나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의원에서 치료한 붕대가 감긴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하룻밤 사이 동굴에서 고생하며 그녀는 한층 여윈 것 같았다.
‘감히 내 아내를 다치게 하다니…….’
원수도 그런 원수가 따로 없었다. 그 여자를 이번에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상처의 주변 피부를 어루만졌다. 죽은 마법사가 떠올랐다.
“……그 실레노스라는 남자. 그자는 어떻게 내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걸 안걸까요?”
아키스는 실레노스에 대한 내용도 설명했다. 루나는 그가 이전에 말했던, 죄를 저질러 파문된 아키스와 휘멘의 제자가 그라는 것에 놀랐다.
“새틴을 잡으면 자세한 내용을 심문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 당신이 납치된 건 실레노스가 내게 가진 원한 때문이에요.”
아키스가 루나의 이마에 키스했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난 괜찮아요. 당신이야말로, 무사해 다행이에요.”
루나는 자세를 바꿔 그의 무릎에 올라탔다.
자신의 허리를 감은 아키스의 단단한 팔을 느끼며 그의 신비한 보랏빛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새털처럼 자신을 간지럽히는 그 손길을 느끼며 아키스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를 만났으니, 이 얽히고설킨 운명 또한 덜 원망스러워졌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고통스런 길을 걸어 온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각인이라는 방식으로 그들의 운명이 서로를 택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혀끝까지 걸렸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아껴 두었다.
그녀에게 제대로 고백하고 싶었다. 이미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을 터이니.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그래도, 첫사랑이었다. 아내에게 근사한 고백을 해야 한다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루나는 먼저 적극적으로 아키스에게 키스하며 몸을 붙였다.
그의 눈 코 입 모두에 키스하고 귀에 새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 작은 접촉에도 아키스는 폭발적으로 흥분하며 등을 긴장시켰다.
그는 루나의 옷을 급하게 벗겨 냈다. 그리고 스스로의 옷을 벗었다.
팔과 다리가 얽히고 터질 것 같은 몸이 서로 달아올라 닿았다. 그녀를 너무 원했다.
“앗…… 아키스…….”
아키스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루나의 무릎 아래 양손을 넣은 채, 단숨에 그녀의 벌써 벌름대기 시작한 작은 구멍 안으로 성난 페니스를 삽입했다.
“흣…….”
몸안을 벅차게 채우는 그의 엄청난 크기의 성기를 느끼며 루나는 침대에서 몸을 바르작댔다.
질컥, 질컥.
그가 아주 천천히 치고 빠지며 속삭였다.
“우리 첫날밤이 내가 기억한 게 아니었다니.”
푹푹 박히는 소리가 방안에 질척하게 울렸다.
“내가 기억하는 첫날밤도 미치도록 좋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었다고요.”
“흐읏! 으응……! 당신이 기억을……. 못하니까…….”
“아주 조금밖에 기억 안 나.”
입안에서 단내가 났다. 애가 탔다.
“내가 어떻게 만져줬어요.”
아키스가 루나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빵 반죽 빚듯이 빚으며 쥐었다 폈다. 뾰족하게 선 유두를 손바닥으로 간질였다.
“여기가 그날도 이렇게 곤두섰어요? 그날도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색이었나?”
그가 색이 연한 유두 주변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흐응……!”
루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붉어졌다.
“내가 충분히 물고 빨았나? 말해 줘요.”
아키스는 쾅쾅 치고 빠졌다. 루나의 발간 속살이 애액을 토해내며 그의 몽둥이 같은 성기에 얽혔다. 루나가 엉덩이를 들썩이려는 순간, 그는 골반을 꾹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의 굵은 가운데 손가락이 자신의 것을 문 음부 주변을 헤쳤다.
“말해 줘요. 내가 이 예쁜 주름 하나를 다 빨아 줬나, 아닌가. 그랬을 것 같은데. 내 무의식이 바랐을 것 같거든.”
“아키스, 그런 거 묻지 말고. 민망해요……. 빨리…….”
“빨리 말해줘요.”
그가 짓궂게 졸랐다. 루나는 어물어물했다. 눈가가 붉어졌다.
“……당신이 혀로 빨아 줬어요.”
“그리고?”
그가 느긋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에 땀이 배었다. 단단한 팔이 꿈틀댔다. 루나는 일정하게 더운 숨을 쉬었다.
“흐윽, 흣……. 당신이…… 내 안에 넣고 엄청나게……. 깊게…… 몇 번이나 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전에 혀로 빨아서, 질척해지긴 했는데……. 처음이라서 아팠어요.”
제정신 아닌 사람치고는 꽤 젠틀하게 시간을 들여 하긴 했다. 그것도 그의 무의식인 거겠지. 루나는 생각했다. 점점 더 머리에 열이 차올라 생각을 모으기 힘들어졌다.
“루나.”
아키스는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몇 번이나.
입술은 다정했지만 아랫도리는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루나. 그가 계속 속삭였다.
찌걱, 찌걱.
빨간 속살이 그의 것에 엉겨 붙었고, 그는 그 감촉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윽고 아키스가 속도를 줄이며 루나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내가 그날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프기도 했는데. 내가 너무 느껴서 민망했어요. 처음인데…… 그런 느낌에 내가…… 흐응……. 익숙하지 않았어서. 앗…….”
루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칭얼댔다. 아키스는 미칠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정말 뭘까.
“내 의식이 있었으면 온몸을 빨고 시작했을 텐데. 그리고 당신 구멍을 천천히 살폈겠지. 원래 이렇게 예쁜 색인가.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온몸이 예쁜가 궁금해하면서.”
쾅. 아키스가 깊게 박아 넣었다. 그는 세게 자신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루나의 허리가 휘어졌다.
“흐윽, 응……!”
땀에 젖은 두 육신이 비벼졌다. 그 뒤로는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삐걱, 삐걱.
침대 위에서 루나의 몸이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다. 요동치는 그녀의 몸을 침대위에 꽉 누른 채 아키스가 루나의 몸에서 길게 정액을 토해냈다.
루나는 힉힉, 숨을 쉬며 그에게 파고들었다.
아키스가 루나의 땀에 젖은 머리를 넘겼다.
“그날 정말 괜찮았어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 같아서.”
“괜찮았다니까요. 다만 당신이 너무 많이 해서 다음 날 피도 나오고, 또 몸이 부어서 힘들었어요.”
“여기가?”
아키스가 민감해진 구멍 주변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그녀가 토해낸 질척한 애액과 하얀 정액이 묻어났다. 루나는 어깨를 떨었다.
“당신 때문이었다고요.”
“미안해요. 정말. 처음부터 당신인 줄 알았으면 좋았을걸.”
아키스가 루나의 몸을 어루만지고 반대편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졌다.
“다신 잊지 말아요. 그날. 내가 당신 살렸는데.”
루나는 오래도록 참아왔던 작은 원망의 말을 했다. 아키스가 루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다신 잊지 않을게요.”
그가 루나의 손등에 이를 세웠다. 그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제정신이었다면 그날 밤 그녀를 더 정성들여 안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고귀한 주인인 것처럼.
“또, 벌써요……?”
루나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몸을 돌려 엎드리게 했다. 다정한 말과는 달리 인정사정없이 그가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아키스……! 읏……!”
루나는 고양이처럼 엉덩이를 쳐든 채 몸을 떨었다.
* * *
결국, 흐느끼며 그에게 온몸으로 매달린 채 그의 진득한 소유욕을 다 받아 내고 나서야 루나는 긴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녀는 축 늘어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참을 서로를 휩쓰는 감정을 느끼며 그들은 서로의 체온과 촉감을 느꼈다.
“아. 맞다.”
루나가 몸을 조금 일으키며 속삭였다.
“펜던트!”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의아한 듯 그녀를 보았다. 탁자 옆에 빼놓았던 펜던트를 루나는 집어 올렸다.
“건강해지는 마법, 다시 걸어 줄 수 있어요? 당신이 예전에 루에게 걸어 줬던 거요.”
아키스는 그녀의 말뜻을 떠올렸다.
이전에 이 마도구 펜던트에 반영구적으로 체력을 증진시키는 마법을 걸어 줬었다.
“이젠 안 돼요.”
“왜요?”
루나는 상당히 실망했다.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가끔 루에게 아키스가 주었던 그 펜던트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펜던트 덕분에 남들 두 배의 긴 하루를 보내면서도 모든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만드는 마법이 영원하다면, 어떤 병자에게든 그 마법을 걸어 회복시킬 수 있겠지요.”
아키스는 루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며 말했다.
“이런 종류의 마법이 효과가 있는 한도는 한 사람당 딱 1년여 정도. 그 이상 과용하면 오히려 다치거나 죽게 될 수도 있어요. 그게 마법입니다.”
“그렇구나…….”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설명이었지만, 루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녀가 풀이 죽는 것에 아키스는 놀랐다.
“그 마법이 필요한가요?”
“네에, 할 일이 정말 많은걸요. 출판사 일도 있고, 또…….”
고대 약 복원 연구도 계속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아키스에게 고대어 책을 부탁할 수 있겠군.’
그가 이제 자신의 편이니 정말 든든했다. 아키스라면 루나가 원하는 고대어 책을 얼마든 구해 줄 것이다. 루나의 마음속에 희미한 설렘이 차올랐다.
“사업도 그렇고, 더 많은 공부도 일도 하고 싶어요. 당신에게도 소홀하기 싫고, 또 페니랑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고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건 또 질투가 나는데.”
아키스가 루나를 꽉 붙들어 매며 속삭였다.
“하긴, 집필 작업까지 해야 하니 바쁘긴 하겠습니다.”
“……아, 그게요.”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붉은 책에 대해서도 고백해야 했다. 켜켜이 쌓인 서로 간의 비밀이 참 많기도 했다. 그런 불투명한 상황에서 용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니, 거기다 내가 그의 마음의 방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고백해야 하잖아.’
그러자면 도서관의 꿈에 대해서도 고백해야 하고……. 루나의 머리가 조금 아득해졌다.
아키스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일부터 언제 당신이 고대어를 자각했는지, 어느 정도 숙련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기록을 해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루는,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본 케이스 중 가장 천재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더 흥미로워요. 결계의 마법을 깨고 여인인 당신에게 이런 큰 능력이 발현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거든요.”
아키스는 말을 하다 루나의 표정이 좀 이상함을 깨달았다.
“루나?”
“으음, 아키스. 기억해요? 우리 결혼할 때 한 약속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그에게 혼전에 기이한 결혼 조항들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잘못에 대한 한 가지 절대 사면권이라거나, 자유로운 이혼권 보장 같은 것.
“모두 기억납니다. 이제야 이해 가는 것도 있고요.”
그는 땀에 젖은 루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결혼 생활 중 무언가 잘못을 하면 뭐든지 하나를 용서하기로 했지요. 그렇죠?”
“네, 맞아요…….”
“그럼 이제 그건 필요 없겠군요. 내가 당신이 루였다는 걸 알았으니.”
“……꼭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네?”
루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으음, 그 권리는 더 소중히 간직해야 것 같아요. 어차피, 날 그걸로 벌할 순 없잖아요? 난 당신의 각인자고…… 당신도 각인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으니…… 나도 용서할게요. 그건 그걸로 끝내요.”
“……뭐 나한테 용서 받을 일 있습니까?”
“…….”
역시 이건 내일쯤 상황을 좀 추스르고 말해야겠다. 루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생각했다.
“내일, 내일 이야기해요. 내일도 우린, 같이 있을 거니까……, 앞으로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그렇죠?”
아키스는 의아해하는 것 같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루나의 대답이 몹시 흡족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탐욕스런 소유욕을 드러내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결혼 한 지 2년 되는 해 이후에도. 절대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겁니다. 한 번만 더 도망가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 가둬 둘 겁니다. 그리고 나만 보게 하며 살 거예요.”
그의 말은 반은 투정이고 반은 책망이었기에 루나는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우고 그를 부드럽게 달랬다.
“정말 도망까지 갈 생각은 아니었다니까요. 잠시 당신 곁을 떠나, 당신에게 편지를 쓸 생각이었어요. 말했잖아요.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려 했다고. 내 소재를 알려 주고, 상관없으면 날 찾아오라고 말하려 할 생각이었는걸요.”
그 말에 아키스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루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고마워요, 루나.”
그가 속삭였다.
“당신이 루이고, 그걸 내게 드러내 줘서…… 내 운명을 당신에게 걸 수 있게 해 줘서.”
콧날이 시큰했다. 루나는 눈가를 쓸었다.
“두 번이나 날 구해 줘서 고마워요, 루나.”
수없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가 그날 밤을 기억해 주기를 원하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루나의 어깨가 가늘고 길게 떨렸다.
* * *
아키스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방에서 나왔다.
응접실을 서성대던 디온이 다가왔다.
“황궁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기다 두 분 다 몸은 괜찮으신지……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공작가에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정화 의식을 마치지도 않고 사냥제 전에 이탈했으니 황궁에서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키스는 무심하게 물었다.
“그럴 일이 있어 일찍 돌아왔다. 황가의 일은 어떻게 수습했다 하나?”
“전보를 전해 준 전령의 말로는 사냥제는 조기 종료되었으며, 조속히 정화 의식을 마무리해 달라 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 스틸본 숲에 갈 때는 혼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휘멘 님으로부터 온 전보입니다.”
아키스는 그 전보를 받았다. 잠시 편지를 읽은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새틴을 수배해라.”
“네? 현상금 사냥꾼 말씀이십니까? 루처럼…….”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루의 일도 해결해야 한다.
“루의 수배는 없던 걸로 해. 전원 철수시키고, 정보 길드의 의뢰도 취소해라. 그리고 새틴은 황궁 경비대에 알려 수배해. 혐의는…… 공작 시해 혐의다.”
“……알겠습니다.”
디온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아키스가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기에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키스는 자세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써 디온 편에 들려 보냈다.
* * *
실레노스는 사냥제가 열리기 한 달 전, 새틴을 데리고 스틸본 숲에 왔다. 그리고 한 달 간 그들은 동굴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고 살았다. 그 임시 거처의 입구에는 실레노스가 마법을 걸어 두었기에 두 사람이 아니면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이동 마법이라는 건데, 아주 희귀한 마법이랍니다. 나도 단 한 번밖에 못 쓰는 마법이죠. 여기 보입니까? 이 동굴 안의 바위 아래에는 이동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 안으로 뛰어들면 수도로 통해 있지요. 일을 다 해결하고 나면, 우리는 이 루트로 도망치는 겁니다.
새틴이 공작 부부를 처리한 후 도망칠 방도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귀찮다는 듯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게이트 같은 건가요?”
“비슷하죠. 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때의 일이긴 하지만요.”
그는 왠지 새틴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새틴은 그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서 절벽이 무너지며 눈앞에서 아키스와 루나가 떨어져 내렸을 때, 새틴은 벌떡 일어나 은신처로 도망쳤다.
‘하, 하하, 하……. 이 모든 게 꿈같군. 하하.’
반쯤 실성한 새틴은 은신처에 도착해 실레노스가 가르쳐 준 방법대로 바위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법이란 정말 굉장하군.’
정신 차려 보니 새틴은 수도의 거리 뒷골목에 서 있었다.
그녀는 거지꼴을 한 채 수도 거리를 서성였다. 뒷골목에서 밤을 지새웠는데 하루가 지나도 공작 부부의 비보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돈도 한 푼 없고, 이걸 어쩌지?’
새틴은 고민에 빠졌다.
공작 부부가 살아 있다면 이제 저는 죽은 목숨이니 멀리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게이트 이용비는커녕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차라리 비렁뱅이들 틈에 섞여 계속 숨어 있을까? 하지만 만일 공작 부부가 죽었다면 당분간 나는 무사하다는 건데…….’
사람들은 지저분한 그녀를 보고 눈을 피하며 지나갔다.
문득 새틴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실레노스가 죽고 나서 머리가 또렷해졌다. 그렇지만 루나에 대한 증오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상관없어. 루나가 죽었으면 죽은 대로 살면 산 대로 명예를 더럽혀 주지.’
그녀는 수도에서 살았기에 수도의 지리를 훤히 알았다. 그녀는 씩 웃었다.
* * *
그날 오후, 제국 신문사는 놀라운 방문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공작 부부의 엄청난 비밀을 안다니까요!”
거지꼴을 한 한 여인이 신문사 1층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좋게 돌려보내려 해도 그녀는 신문사에 드러누워 꼼짝을 하지 않았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기자가 내려갔다.
“공작 부부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제야 누군가 제 말을 들어 주려는 것 같다는 생각에 새틴은 눈을 번뜩였다. 그 초점 없는 눈빛에 말을 건 기자는 흠칫 놀랐다.
“익명 제보를 하겠어요. 공작 부인에 대한 비밀 정보예요. 그들이 결혼 전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예요.”
그녀가 속삭였다. 새틴이 다가오자 악취가 훅 풍겼기에 기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공작 부인의 자매예요. 그리고 이건 엄청난 사실이에요. 이게 공개되면 전 제국이 뒤집어질 거예요. 뭐하면 제국 신문에서 공작과 거래할 수도 있겠죠.”
“정말 그런 정보가 있단 말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기자가 그녀를 보았다. 공작가를 잘못 건드리면 신문사가 망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기자의 망설이는 기색에 새틴은 후드를 걷어 얼굴을 똑똑히 보여 주었다.
“나, 몰라요? 내가 처음 약혼한 날, 이 신문사에서 특집 기사까지 실었잖아! 사진 가져와 봐요. 비교해 보라구요!”
“…….”
이쯤 되니 기자도 진짜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용히 이야기 좀 하고 싶어요. 그 전에 정보 제공에 대가에 대해 협상이 필요한데요…….”
* * *
시골의 장례식은 지독히 길었고 지루했다. 페니는 조금 피곤함을 느끼며 제국 신문사에 들어섰다.
‘루나가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지. 사냥제를 잘 치르고 왔으려나?’
페니는 홍보와 유통 전략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는데, 그래서 작가 레드의 홍보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도 시골에서 돌아오자마자 저택에 돌아가 쉬기는커녕 옷만 갈아입고 신문사에 나온 참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일에 흠뻑 빠지게 되었는지, 페니도 가끔 제 상황이 재미있었다.
<월플라워 부인>과 <보석 영애 이야기>를 연달아 히트시킨 작가 레드의 위상은 엄청났다. 당장에 신문사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와 굽실댔다.
요즘 페니는 엄청난 고료를 받고 작가 레드의 미공개 삭제 분량 원고를 신문에 싣는 일을 조율 중이었는데, 신문사에서는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아아, 르시타 영애가 오셨군요.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신문사 담당자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가던 그녀의 눈에 소란스런 광경이 들어왔다.
“뭐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럽죠?”
“아, 저 허름한 여인이 아까부터 고위 귀족에 대한 스캔들을 팔겠다며 버티고 서 있어서요.”
“고위 귀족 누구요?”
“거참, 해괴하게도 공작 부부라고 합니다. 미친 여자 같은데 왜 끌어내지 않고 있는지…….”
신문사 담당자가 혀를 찼다. 페니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작 부부라고? 루나에 대한 정보를……?’
신경이 쓰여 페니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그 여자가 강짜를 부리는 데 성공했는지 사람들이 새틴을 데리고 한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페니에게 다가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이봐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네?”
“내 듣자 하니 이 거지 여인이 공작 부부에 대해 헛소문을 팔러 왔다 들었는데. 그런 가십 정보를 구입하려 하다니, 이 신문사에 크게 실망이군요. 안 그래요?”
“저 아가씨가 자기가 공작 부인과 자매라 주장하기에…….”
기자가 머쓱하게 말했다.
페니는 성큼 다가가 새틴의 얼굴을 살폈다.
‘……이 여자는.’
새틴은 이전에 공작의 약혼녀로 그럭저럭 유명인이었다. 페니도 새틴과 사교계에서 한두 번 스친 적 있었다.
무엇보다 루나의 결혼식. 그날 일어난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새틴의 인상이 팍 찌푸렸다.
“……왜, 허위 정보를 산 다음 정말 신문 1면에라도 실으려 하셨나요?”
“네?”
페니의 싸늘해진 표정이 신문사의 사람들이 쩔쩔맸다. 곧 페니를 쫓아온 직원이 귀에 뭐라고 수군거리자 새틴의 말을 들어 보려던 기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여자는 미친 여잡니다. 유치장도 다녀온 여자예요. 공작 부부의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려 황족을 모독한 죄인데, 그걸 모르셨나요? 정말 이 신문사는 정보가 느리군요.”
“아…….”
새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새틴은 눈에 핏발을 세웠다.
“거짓말 아니에요! 공작 부부가 결혼 전에 무슨 놀음을 벌인지 알아요? 세상에, 공작이 공작 부인을 남장시키고 절대 드나들어선 안 될 곳에 드나들었다고요.”
“……아, 나 참.”
페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또 이러네.”
“네?”
“이 여자, 저번에는 공작의 결혼식에 쳐들어와 공작 부인이 결혼 전에 남자가 있었다고 주장했어요.”
“…….”
페니는 도도한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담았다.
“이번엔 시나리오를 바꿨나 보지요? 흥미롭네요. 이런 망상 소설을 신문에 실으려 하다니, 귀하의 신문사는 작가 레드의 작품을 싣기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하물며 이 일이 공작 부부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신문사 직원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고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기사를 싣다니요. 우린 그냥 잘 타일러 돌려보내려 한 겁니다. 그렇지요?”
“맞아요, 네. 그렇습니다.”
페니는 생각할수록 괘씸하여 팔짱을 꼈다.
“뭐, 고려해 보죠. 하지만 오늘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날은 아닌 것 같군요. 제 아버지가 이 신문사의 지분을 꽤 가지고 계신데, 공작 부부의 가십 기사에 대한 것을 고려했다는 것만으로 꽤 충격 받으실 겁니다.”
이쯤 되자 으름장이 치사량이었다.
“영애, 제발 그것만은…….”
“이 여자는 당장 끌어내겠습니다.”
페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하얗게 질린 새틴을 보고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 호위 기사를 불러 끌어내죠.”
“아니야, 정말 아니라구요. 공작 부인이 고서점 거리에 드나들었더니까! 그년이…….”
급하게 달려온 페니의 호위 기사들이 그녀의 입을 막아 끌어냈다. 페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전히 미쳤군요.”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도도한 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영애, 그럼 오늘 논의는…….”
“내일 다시 오죠.”
그녀는 고개만 살짝 돌려 말했다. 일할 때는 절대 굽히는 모습 보이는 것 아니다. 페니는 부친에게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다만 오는 시간은 내가 정할 테니, 기다리세요.”
그리하여, 새틴은 기사들에게 입을 막혀 끌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걷어차여 신문사 밖으로 쫓겨났다.
‘이딴 것도 가족이라니, 정말 내가 다 화나는군.’
가끔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어두워지던 루나 표정. 극도로 사람 관계에 대해 면역이 없던 루나. 거친 그녀의 손. 집안일을 잘한다고 말하던 고백.
피가 섞인 자매 같은 친구가 루나였다. 그런 루나의 그늘을 만든 것이 이 계집애라고 생각하니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고개, 들게 해.”
페니가 명령했다. 호위 기사들이 새틴의 고개를 쳐올렸다.
“이 여잔 볼 때마다 이 꼴이야.”
페니가 피식 웃었다. 새틴의 뺨이 수치심에 달아올랐다.
“이봐요, 그쪽 같은 금수들이 가족이라고 괴롭혀 대는 그 집안에서 겨우 탈출한 아이가 루나예요. 그걸 알면 고개 숙이고 주제 알고 살아야지. 아직도 그 애를 괴롭혀 대? 주제를 알고 반성하세요.”
페니의 경멸하는 표정에 새틴은 수치스러움에 온몸의 털까지 쭈뼛 섰다. 일찍이 달리아마저 질투하게 한 대귀족의 태도가 페니에게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새틴이 평생 되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내가 마음만 같아선 루나 대신 손봐 주고 싶은데. 그럴 가치도 없어 놔주는 거니까 이런 모습이 한 번만 더 눈에 보이면 공작가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선에서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거예요.”
페니는 호위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새틴을 놔주었다.
“가자.”
새틴을 돌아보지도 않고 페니는 자리를 떠났다. 페니는 걸어가며 호위 기사 중 한 명에게 말했다.
“……공작가에 연통을 보내 저 여자의 수작을 알려라. 아마 공작이 알아서 정리하겠지.”
* * *
모욕을 당한 새틴은 수치심과 분함에 새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못할 줄 알아?’
새틴은 사거리에 가서 루나의 죄를 큰소리로 외치고 다니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반성은커녕 그녀는 더 분기탱천해 미친 듯이 광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거지?’
사람들이 자신을 힐끔댔다. 새틴은 길거리에 붙은 방을 보았다.
[현상 수배
공작 시해 혐의.
― 새틴 드 버몬드.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젊은 여인. 중간보다 조금 큰 키에 마른 체구. 단정한 외모. 찾으면 황실 경비대로 연락.]
자신의 얼굴을 그린 수배지가 붙어 있었다.
“저 사람, 좀 수상해요!”
누군가 외쳤다.
곧 새틴의 주변을 황실 기사들이 둘러쌌다. 새틴은 발악했지만 곧 그들에게 끌려갔다.
* * *
“싫어, 아아, 유치장만은 싫어! 제발!”
루나의 결혼식에서 난동을 부리고 유치장에 끌려간 날. 그날 새틴의 인생이 망가졌다. 새틴은 발악하며 유치장에서 날뛰어 댔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새틴이 끌려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공작님……?”
그곳엔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남자가 자신을 보며 서 있었다.
다만, 예전과는 다른 것은 그의 표정이 무관심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피곤한 것을 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제발 절 용서해 주세요. 제가 얼마나 공작님을 사랑했는지 아시잖아요!”
아키스는 달라붙는 새틴을 끌어냈다. 기사들이 새틴을 다그쳤다.
“배신감 때문에 그랬어요. 공작님도 절 속이셨잖아요! 어떻게 절 앞에 두고 그년과 대놓고 간통을 하실 수 있나요!”
아키스는 새틴이 뭐라 하는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 온 건 실레노스가 도대체 어떻게 루나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지 알았는가, 그 단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직접 심문할 가치도 없는 여자였으나 혹여나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 직접 온 것뿐이었다.
아키스가 손짓했다. 호위 기사들이 모두 방밖으로 나갔다.
“살고 싶으면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라. 실레노스가 당한 방법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첫마디였다. 실레노스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충격은 컸다. 새틴은 흠칫 놀랐다.
“아아, 내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우리 사이가 좋았잖아요, 공작님.”
새틴은 울먹였다가 하소연을 했다가 난리가 났다. 그러나 죽기는 싫은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는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아키스는 실레노스와 새틴이 어떻게 같이 있었는지 연유를 알게 되었다.
“공작님, 루나의 꾐에 빠져 그러신 거죠? 그 애가 남장을 하고 다가가 유혹했나요? 전부 그 애 잘못이죠? 항상 그래요. 그년은 어딜 가든 재앙을 만든다고요!”
“시끄럽군.”
아키스가 나직이 말하며 몸을 숙였다.
“네가 아는 게 그게 전부인 걸 확인했으니, 이제 널 살려 둘 필요가 없다.”
“히익!”
새틴이 몸을 떨며 넙죽 엎드렸다.
아키스는 새틴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공작가와 버몬드 가문의 은원. 지금이나 그때나 새틴에겐 아무 감정 없었다.
그러나 새틴 드 버몬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약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틴의 가족은 약혼을 지키지 않으려면 보상을 해 달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 건방진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벌을 주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날의 충동은 왜였을까. 애초에 새틴의 설득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오묘해서, 새틴과의 약혼 덕분에 루나와 재회할 수 있었다.
“끝까지 내 아내의 탓이라니, 너도 참 대단하군.”
아키스는 나직이 혀를 찼다.
“루, 루나뿐만이 아니라……. 맞아요, 그 연놈들이 나빠요. 전 달리아와 실레노스의 꾐에 빠진 거예요. 전 이용당한 거라구요.”
아키스는 새틴을 싸늘하게 보았다.
“혼이 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도리가 없군.”
새틴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왜 몰랐을까? 이 사람에게 자신은 인간도 아니었다.
아키스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새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 아내의 몸에 손을 댔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아키스가 건조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루나는 살기 위해,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남장을 하고 고서점 거리로 나섰다 했다.
그녀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내걸고 그런 모험을 한 이유는 빤했다. 버몬드가가 훨씬 더 지옥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미 말로 수많은 죄를 지었으니 영원히 혀가 없는 것이 낫겠군.”
아키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새틴의 동작이 멈췄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아키스를 보았다.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키스는 손짓을 해 호위 기사들을 불렀다.
“미친 여자이니 신전으로 보내면 되겠구나.”
아키스는 무언가 생각을 떠올렸다.
“달리아와 사이가 좋은 것 같으니 그녀와 같은 신전으로 보내면 좋겠군. 그리고…… 그 꼴이 되어서도 둘 다 아직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니 두 명 다 아무에게도 면회를 허락하지 말라 전해라. 이건 공작으로서의 나의 명령이다. 미친 자들이니 그녀들이 하는 말과 행동, 필담마저도 누구도 믿지 말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아키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실을 나왔다.
그리하여 새틴은 이 모든 음모가 시작된, 그녀가 처음 달리아와 만난 신전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키스의 마법이 그녀의 혀를 단단히 묶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라한 모습으로 신관들에게 끌려 옆방으로 들어오는 새틴을 보고 달리아는 몹시 즐겁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 너도 이 꼴이 될 줄 알았다니까? 내가 이곳에 갇혀 있어도 너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 난 언젠가 여길 나가겠지만, 넌 평생 여기서 살게 될 거다. 그는 내 남자야! 단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약혼했던 너를 내가 용서할 리 있니?”
정신을 놓아 버린 달리아는 그녀를 보자마자 배가 찢어지게 웃어 댔다. 새틴은 달리아에게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마법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해서 숨만 쌕쌕 쉬었다.
거기다, 새틴이 머무르는 방과 달리아가 머무르는 방은 딱 봐도 굉장히 차이가 났다. 새틴은 그것마저도 열등감을 느끼며 달리아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달리아는 다시 환상이 보이기 시작하는지 헛소리를 시작했다. 이제 이 미친년외의 사람을 만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새틴은 허공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쿵. 철장의 문이 잠겼다.
* * *
며칠 후, 루나는 아키스에게 책에 대한 진실마저 털어놓았다. 고대어가 처음 트인 날부터, 그 달빛 도서관의 꿈까지.
“……그게 다 사실입니까?”
아키스는 두 번째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 강렬한 감각이란. 그는 어이가 없었다.
“내 서재에 그런 엄청난 마도구가 있었다고요? 거기다 그 꿈은 도대체…….”
“그 꿈을 꾼 이후로 고대어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루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의 존재부터 기묘한 도서관의 꿈, 그리고 여자만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까지. 정말 연구거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책을 좀 보죠. 내가 직접 봐야 연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요.”
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가져왔다. 그러나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무 글자도 안 떠오르는데요.”
“정말이에요, 나랑 둘이 있을 땐 대화도 가능하고, 내 피도 책이 묻혔고, 또 온갖 소설과 정보들이 떠오른다고요.”
아키스는 책을 이리저리 펼쳐 보았다.
“……아.”
책은 자신을 놓으라는 듯이 빛나더니 따끔한 전류를 아키스에게 흘려보냈다.
“……만지지 말라는 뜻 같은데요.”
“그, 그러게요. 괜찮아요?”
루나는 놀라 책을 받았다. 아키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이건 보기보다 고성능의 마도구인 것 같군요. 자아가 있는 마도구는 국가에도 몇 가지 없는 물건이지요. 아주 귀한 마도구입니다. 당신이 대단한 물건을 발견한 겁니다.”
아키스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 꿈을 아키스가 직접 체험해 볼 방법은 요원했지만 그게 가장 이상하고 묘했다.
‘묘사를 보면 누군가, 어떤 존재의 도서관임이 분명한데.’
설마.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설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다.
“아키스?”
아키스는 고개를 들었다. 루나가 그를 초록색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 달 모양의 표지는요? 꿈속에서 본 내 미래가 적힌 일기장과 이것의 표지가 똑같았어요.”
“고대에는 이런 책 표지가 상당히 흔했습니다.”
“그래요?”
“네. 당신이 읽는 로맨스 소설이나, 잡화점에서 파는 공책의 표지가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달 모양의 표지는 특히 백마법서에 많이 사용되던 표지였죠.”
“……그렇군요.”
의문이 하나 풀렸다.
“그럼 이 책을 내가 발견할 수 있던 건…….”
“아직은 각인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당신은 나와 반만 각인 된 상태지요. 그럼 아마 나와 같은 체질로 마력이 점점 변화할 겁니다. 그러니 내 공간들이 당신을 또 하나의 주인으로 인식해도 이상할 것 없지요. 아마 울프가 당신을 잘 따르는 이유도 그래서 일겁니다. 그 녀석은 키메라라, 나의 마력을 통해 공작가의 사람임을 인식하고 따르는 거니까요.”
“아…….”
많은 의문이 풀렸다.
루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의 발치에서 자고 있던 울프가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알아듣고 일어나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루나의 치마에 고개를 박고 응석을 부렸다.
“스틸본 숲에서 돌아온 후로 울프가 계속 이렇게 응석을 부리네요.”
스틸본 숲에서 루나와 떨어진 날, 그녀가 변을 당한 것을 아는지 공작가의 하인들 손에 끌려 돌아온 울프는, 그날 루나에게 구슬프게 울며 달라붙었다.
마치 그 울음소리는 옆에서 듣던 디온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 ‘주인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 두고 가지 마요’.
그 뒤로 설움이 가득한 울프는 루나의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루나는 울프의 귀 뒤를 긁어 주며 아키스에게 물었다.
“그럼 출간 활동을 계속해도 되나요?”
“그건…….”
그녀가 뭘 하든 도와주고 싶지만 약간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어요.”
루나가 힘주어 말했다.
“지금 고대 지식들을 접할 수 있는 건 일부 사람들- 그러니까 남자 번역가나 마법사들의 영역이죠. 특정 계층이 고대 지식을 독점해서는 다양한 지식을 번역할 수 없어요. 물론, 번역가가 부족하니 문학 같은 것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난 달라요.”
“당신은 천재 번역가니, 당신에겐 일도 아니겠죠. 당신 정도 수준이 아니면 손쉽게 긴 장편 소설을 번역하는 건 힘든 일일 테니. 하지만 왜 굳이 그러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군요.”
“아예 다른 두 가지 사회를 비교할 수 있잖아요. 고대에는 여자 마법사도 많고 지금과는 다른 점들이 많았어요. 물론 책을 출간할 땐 배경을 현대로 각색하긴 했어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두 세상의 다른 점을 알아차리고 내가 출간한 글들에 호응해 주었죠. 그러다보면 이 세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루나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루나의 말에 아키스는 감탄했다.
루만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몹시 영리한 여자였다. 학자로서도 통감하며 그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의견이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더 안전하게 해요. 나도 옆에서 돕겠습니다.”
“네. 그리고 내가 고대 약을 복원하는 법도 배웠는데요…….”
그녀는 재잘재잘 앞으로의 야망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홀린듯 그 이야기를 들었다.
‘미치겠군, 정말.’
이렇게 영리한 데다 이토록 완벽한 여자가 있을까. 이 운명의 오묘함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키스는 감탄하기도 했다.
* * *
아키스는 루나가 좀 안정되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그녀에게 새틴의 근황을 전했다.
그러나 마법으로 말을 못하게 만든 것이나 평생 신전에서 가혹한 대접을 받고 살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정신 병원에 처박힐 거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새틴이 병원에 갔다니 다행이군요. 마지막에 봤을 땐 정말 미친 것 같았어요.”
지금도 납치당해 끔찍한 일을 겪었던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실레노스가 죽는 모습이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요 며칠간, 루나가 괴로워하기에 아키스는 몇 번 마음을 안정시키는 마법까지 걸어 주었다.
“평생을 치료소에서 보낸다면 좀 뉘우치겠지요.”
“다시는 보기 싫어요. 범죄에 협조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어요.”
도리어 제가 피해자라고 굳게 믿던 새틴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다신 볼일 없을 겁니다. 이번엔 확실해요.”
아키스는 루나의 손등을 들어 올려 가볍게 키스했다.
며칠 사이 루나의 팔을 뒤덮은 꽃줄기는 하루하루 자라나 어느덧 왼쪽 심장 위까지 왔다.
“당신 꽃도 많이 자랐군요.”
아키스의 말에 루나는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몇 개의 꽃잎이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루나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각인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걸까?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우리가 각인한 건 불의의 사고인데…….”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미 각인은 시작되었어요. 죽지 않는 한 끊을 수 없죠.”
“…….”
“그것이 드래곤의 규칙이죠. 인간의 규칙으론 깰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
정작 각인을 하는 쪽인 아키스는 몹시 태연하고 침착했다. 루나는 불안해하는 자신이 도리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 * *
요즘 루나는 붉은 책과 대화할 때마다 진땀을 흘렸다.
<그만 화내라니까. 널 실험하려 한 건 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네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넌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 안 해 주잖니.>
<나를 외간 남자 손에 맡기다니,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아키스에게 내준 일 때문에 붉은 책은 굉장히 화가 났다. 그 뒤로 며칠간 책은 루나가 필담을 통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도 읽어 주지 않고, 당신은 요즘 참 소홀하군요. 난 감정이 없는 존재지만 예의는 안답니다.>
붉은 책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심지어 책은 으름장까지 놓았다.
<이제 내가 가진 글 중 제일 재미없는 소설만 보여 드릴 거예요.>
<그건…… 좀…….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줘…… 널 기다리는 독자들도 많은걸?>
<……독자들이 많다고요?>
<그럼! 팬레터 적어 줄게. 그거 읽는 거 좋아하지?>
루나는 사람을 달래듯 책을 달랬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창 일을 하고 있으면 요즘 분리 불안이 온 애완견 울프까지 엉겨 붙어 왔다.
“아아, 알았어. 울프. 이제 아무 데도 두고 가지 않는 다니까.”
루나는 한 손으로는 소파에 엎드려 글씨를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발치에 누워 있던 울프의 턱을 긁어 주며 달랬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공작 부인,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신지요?”
비아의 목소리였다.
루나는 책을 쿠션 아래 숨기고 문을 열었다. 알렉까지 서 있었다.
“좋아하시는 초콜릿 스콘을 구웠는데 드시겠어요? 요즘 간식도 잘 안 드시지 않습니까.”
“아, 그래요? 먹을까?”
스틸본 숲에서의 난리가 공작가에 전해진 후, 비아와 집사의 과보호까지 더해졌다.
수시로 차며 과자를 준비해 주거나, 몸이 괜찮은지 아침저녁으로 체크했다. 어제는 다 나은 것 같으니 약을 먹지 않겠다는 말을 했더니 비아가 기절할 듯 놀라기까지 했다.
‘다들 고맙긴 한데…….’
그야말로 루나는 과한 관심에 파묻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 *
디온은 아키스의 기분이 요즘 계속 널뛰던 이유를 알았다.
바로 루라는 소년 때문이었다. 그 소년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반쪽짜리 각인은 아키스를 괴롭혀 온 골치였다.
그러나, 숲에 다녀와 공작은 갑자기 완전히 평온해졌다. 그는 그것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소년에 대한 수배까지 풀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묵묵하게 제 일을 하는 보좌관답게, 아키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때가 되면 아키스가 새로운 지시를 내릴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상사의 근심에 제 근심을 보태는 건 오만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보석상을 집으로 불러. 연말 경매에 납품하는 보석상으로.”
루나가 외출한 사이, 아키스는 보석상을 저택으로 불렀다.
‘그녀에게 제대로 고백을 해야겠군. 그러려면 새 반지가 필요해.’
수도에서 가장 비싼 보석들을 모두 다 가져오라는 말에 보석상은 기함하며 즉시 달려왔다. 그는 수많은 보석을 눈에 늘어놓았지만, 아키스는 유난히 푸른색 보석에 눈이 갔다.
그날 밤의 그녀가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밤하늘 아래, 그것보다 더 짙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리튼의 그녀. 그뿐만 아니라 낮의 부서지는 해변 위에서도 그녀는 몹시 눈부셨다. 평생을 기억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푸른색이 좋을 것 같군.”
아키스가 관심을 보이자 보석상은 가져온 가장 값진 푸른 보석들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이 세 가지들은 정말 값진 보석들입니다. 황가에서도 이전부터 매입하고 싶다 말씀을 타진해 오셨습니다만, 제시하시는 금액이 맞지 않아 팔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그래?”
“네. 먼저 이 보석은 바다의 심장이라 하는 보석입니다. 이웃 왕국의 왕비가 애지중지하던 푸른 사파이어 반지지요. 이 최상급 사파이어는 100년 전에 발굴이 중지된 공국의 한 도시에서만 소량 생산되는데, 이만한 캐럿은 역대급이지요. 이제는 돈이 있어도 구할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요.”
사파이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행운을 부른다는 몹시 상서로운 보석이었다. 나쁜 마력을 흡수해 준다는 고대 사람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아키스가 고개를 돌려 다른 보석을 턱짓했다.
“그리고 이건 20캐럿 천연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이번 경매의 꽃이 될 물건입니다, 이름은 밤하늘의 보배라고 하옵죠. 한밤중의 밤하늘만큼이나 오묘하고 맑은 이 푸른색이 일품입니다.”
아키스는 그 둘을 유심히 보았다.
뭔가 좀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아키스의 표정이 심드렁하자, 업자가 급하게 다른 목걸이를 권유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별들의 결정이라 불리는 작품으로, 수많은 다이아몬드를 엮어서 만든 고대 시절부터 내려온 작품입니다. 정말 아름답죠. 현재 수도에 있는 보석 중 가장 고가의 물건입니다. 역시 귀부인들에게는 백색의 다이아몬드가 최고지요.”
“셋 다 괜찮군.”
“네, 그러면 셋 중 무엇으로…….”
아키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디온.”
아키스가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공작님.”
“뭐가 좀 부족하지 않나?”
“네?”
“보조석의 질이 약간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는 사파이어와 블루 다이아몬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풀어서 보조석으로 쓰면 되겠구나.”
“……네? 지금 제국 최고가의 보석을 보조석으로 쓰시겠다고요?”
아키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 보석들을 새로 고쳐 하나의 세트로 만들어. 아내의 피부에 푸른색이 어울리니 그게 좋겠군.”
“그, 그러니까, 전부 다 구입하시겠다고요?”
하나만 사도 일국의 보배가 될 만한 물건들이었다.
아키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줄 선물이니 그 정도는 해야 부족함이 없지. 거기다 이름들이 마음에 드는군. 바다에다 밤하늘, 그리고 별. 내 아내에게 지평선 안의 뭐든 걸 다 줘도 부족하지 않거든. 지금 공작저에 보관중인 아내의 사진이 있던가?”
“신문사에서 결혼사진을 찍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결국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결혼식 사진을 싣는 것은 불발되었지요. 사진은 회수해 저택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랬지. 그 사진을 보낼 터이니 아내에게 어울리는 세공으로 고쳐 세트를 만들도록 해. 목걸이의 중심석은 블루 다이아몬드로 하고, 사파이어는 보조석을 모두 다이아몬드로 해서 반지로 만들어.”
“알겠습니다!”
업자는 희희낙락해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올해 보석 경매에 괜찮은 물건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키스가 이미 다 쓸어 버렸으니.
공작가는 이 정도 사치한다고 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지만, 공작 부인의 성향이 문제였다. 디온이 보기에 그녀는 보석을 안겨 준다 해도 그리 신나할 성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엉뚱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책 출간 작업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약을 만들고 새 사업을 꾸리는 일에 웃는 독특한 여자였다.
“공작 부인께 의논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물론 받으시면 기뻐하겠지만 그분이…….”
아키스는 디온의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녀가 보석이나 사치를 그리 즐기지 않는 성정이라는 건가?”
속내를 간파당한 디온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보석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적당한 물건을 주어서야 되겠나. 그녀가 힐끔 보는 곳도 가장 빛나게 해 둬야 하는 법이다. 사랑 받기 위해 사내는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지.”
아키스가 그런 말을 하자 너무 당황해 디온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나 수도의 일등 신랑감답게 디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배웠습니다.”
아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석상을 향해 명령했다.
“그리고 기한은 일주일 주지. 그 안에 세공을 완성시켜 보내도록.”
“아니, 세공을 고쳐야 할 텐데 일주일은 정말 무리입니다, 공작님.”
상인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키스는 혀를 찼다.
“광물 제련에 특화된 마법사를 고용해 보내 주지. 대장장이에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거다. 열흘 줄 테니 정리해 와라.”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업자는 공작의 맘이 바뀔 새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키스가 나직이 덧붙였다.
“보석 디자이너든 누구든, 내 아내의 사진을 오래 쳐다보면 안 된다 전해라.”
디온은 이쯤 되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보석상은 비고란에 울며 겨자 먹기로 ‘착용하실 모델 분에게 영감을 받는 작업 시, 곁눈질로만 쳐다볼 것.’이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 * *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루나는 자신의 심장 위에 다섯 가지 꽃잎 문양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아키스를 깨워 확인해 보니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끝이구나. 더는 생기진 않겠구나.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저도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이게 다야? 아무 변화도 없는데?’
루나는 아키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당신은 느낌이 어때요?”
아키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습니다.”
루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리 두려워했나 싶었다.
“이거 진짜 맞아요? 그냥 전설 같은 거 아니에요?”
“루나, 만일 그게 정말 전설이라면 당신은 내 허락 없이 절대 내 비밀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하긴, 그건 그렇죠.”
루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조금은 실망인걸요. 각인을 하면 미친 듯이 상대를 갈망하게 된다기에, 난 뭐 우리 포커페이스 공작님이 어떻게 변하려나 조금 두근대면서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날 엄청나게 원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가 귀엽다는 듯 속삭였다.
“나 때문에 미친다고 하진 않으려나. 좋아 죽지는 않으려나, 하고.”
루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이미 하고 있습니다.”
루나의 뺨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민망해져 그의 얼굴을 피했다.
“어제도, 그제도, 지난주에도. 이미 그런 지는 오래됐는데. 몰랐나 봅니다.”
“…….”
침대에 엎드리는 그녀의 위에서 아키스가 그녀를 포옹하고 그녀의 귀를 잘근잘근 씹었다.
아, 루나는 작게 소리 지르며 양손으로 귀를 가렸다.
정말이지 나쁜 남자 같으니.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각인은 그가 했는데 여전히 꼼짝 못하는 건 자신뿐인 것 같다.
“당신 때문에 미치겠고, 온몸을 원해서 죽을 것 같고. 평생 그럴 것 같아서 가끔 내가 미친놈 같을 정돕니다. 그러니 아무 변화가 없지요.”
“…….”
“이미 당신이 날 묶어 놨나 봅니다.”
그의 손이 잠옷 천을 타고 내려가 그녀의 일자로 패인 등골을 정확히 그렸다. 그리고 치마 속으로 들어가 손가락을 음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날 자극하지 마요. 더 미칠까 무섭거든.”
“흐응…….”
루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독점욕에 오싹했다.
한편으로 어서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그가 쉽게 그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님은 알았다. 사람의 감정 표현 방식은 다양하니까.
그는 솔직하고 애절한 고백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다. 하지만 한 번은 그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촌스러울 정도로 진솔한 방법으로.
그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다는 상상만 해도…….
루나는 눈을 꼭 감았다.
정말로 아키스가 좋았다. 그걸 자각하고 그의 품에 안겨 있는데 새삼 가슴이 요동쳤다.
기분이 몹시도 이상했다.
이대로 녹아서 그에게 달라붙을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알아 온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상적으로 알던 것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를 구속하니까.
실제 그에 대한 감정은 상상한 것보다 더 들쩍지근하고 강렬한 감정이었다.
“읏.”
그 순간 아키스의 입에서 더운 탄성이 터졌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돌렸다. 아키스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더운 숨을 한번 내쉬었다.
“왜 그래요?”
“방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잠옷을 위로 끌어올렸다.
“방금 이상한, 쾌감이나 감동 같은 감정이 느껴졌어요.”
“……네?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루나는 가감 없이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키스는 웃음을 참았다.
“혹시…….”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냥 당신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루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키스의 표정이 흡족하고 나른해졌다.
“그냥 기분이 좋군요. 특히 아까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무슨 감각 같은 게 느껴졌거든요.”
“그래요? 정확히 어떤?”
“굳이 비유하자면 마약을 했을 때의 몽롱한 기분 같은데, 아니면 검술 훈련을 오래 한 후의 고양감 같기도 하고…….”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그보다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당신, 마약 해 본 적 있어요?”
“…….”
아키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굴렸다.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안겨 눈을 흘겼다.
“정말이에요? 정말 그런 거 해 본 적 있어요?”
“어릴 적에 한두 번. 난 뒷골목에서 자랐잖아요.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거기 아이들은 흔하게 접하지요.”
“놀래라…….”
루나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그는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이런 단정한 얼굴을 하고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 이상한 감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루나는 평소처럼 자신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작업실에서 한참 약을 제조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따끔했다.
“뭐지?”
기분 탓인가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키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서재에서 한창 일을 하는 중인 아키스의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 * *
종종 생각했다. 그녀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혹시 몰라 버몬드 부부에 대해 근황 보고를 명했다. 시골에서는 신속하게 보고가 올라왔다.
새틴은 오래전 가출한 것으로 알고 있는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패악을 부리며 귀족 행세를 하다 따돌림당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공공연하게 ‘공작 부인이 된 루나가 자신들을 부양하지 않는다. 은혜도 모르는 계집’이라며 황실 모독에 가까운 욕을 하고 다녀서, 주변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거지꼴로 그러고 나돌아 다닌다 한다.
‘버러지 같은 것들.’
저런 것들 사이에서 루나가 자랐다니 혀가 다 차졌다.
‘한다면 독살이겠군, 식중독으로 보이게 처리해서. 그 방면의 약이 있었지.’
어쨌든 이 소식으로 아키스의 기분은 괜히 더러웠다. 그것도 몹시.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키스는 책상에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아키스?”
루나가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괜찮아요?”
“뭐가 말입니까?”
“그냥요. 당신이 잘 있나 해서.”
“별일 없습니다. 그냥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그러나 아키스는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다.
“뭔데요? 말해 줘요.”
“새로 온 아카데미의 번역가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당신이 말한 것이 신경 쓰여서 그 후에 서부에서 꿈에 대한 고대 자료를 좀 수집했는데, 번역이 더뎌서 피곤하군요. 몇 군데 서툰 곳도 있구요.”
루나는 그의 책상에 다가갔다.
“내가 좀 도와줄까요?”
움찔. 아키스의 동작이 멎었다. 그건 너무 매혹적인 소리라, 거의 섹시하게 들릴 뻔했다.
“굳이 무리해서 일하지 말아요, 루의 솜씨가 탐나긴 하지만 번역 실력이 없더라도 당신은 완벽하거든.”
그는 루나에게 부담을 줄까 그렇게 말했다.
루나가 저에게 무얼 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더 잘해 주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부인에게 일을 부탁한다는 건 그녀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급한 일이 없는걸요. 약 제작도 핵심 재료를 구하지 못해 미뤄지고 있고.”
루나는 아키스의 무릎에 올라가 그의 볼에 쪽 키스했다.
그의 심장이 기분 좋게 요동쳤다. 이 여인의 너무 많은 것을 원해 문제일 정도였다.
그녀의 미소, 속삭임, 체온, 움직임, 그리고 몸, 그리고 실력까지.
소유욕이 아키스의 마음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이 거미처럼 파고들자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간 남으면 해 줘요. 그리고 다른 것도 해 줘도 좋고.”
아키스의 말뜻을 알아들은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사실 난 후자가 더 좋거든. 서재에서 하는 일이 한 가지는 아니잖습니까.”
“아으…….”
아키스가 루나의 몸을 책상 위에 올렸다.
“이래서 낮에 당신 서재에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고요.”
“난 좋은데.”
“왜 요즘 자꾸 이렇게 뜬금없이 흥분하고. 뭐, 동물도 아니고…….”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평생 당신에게만 발정할 텐데.”
“…….”
루나의 뺨이 화르르 붉어졌다.
“그러니까 당신도 솔직해지면 기쁠 것 같은데.”
그가 짓궂게 속삭였다.
그리고 바로 키스하려 하자 루나는 그의 볼을 잡아 멈췄다. 황홀한 보랏빛 눈이 찡그려지는 걸 보고 루나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받아들이는 건 동의하는데, 일단 할 말부터.”
“…….”
“아키스, 아까 당신이 서재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가슴이 따끔했어요. 아주 미약했지만, 그 느낌을 받은 순간 갑자기 당신이 생각났어요.”
아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오늘 아침에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정 반대로 그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설마. 아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추측이 떠올랐다. 각인, 아키스는 그녀에게 각인한 상태였다.
“혹시 우리가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전에 그것 외에도 기분이 크게 좋거나 나쁜 일은 없었습니까, 루나?”
“으음. 요즘은 계속 기분이 좋아서……. 아, 주방장이 만들어 준 새로운 레시피의 크림 파이를 아침 간식으로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정말 신이 났어요. 힘든 일은…… 붉은 책과 대화하느라 글씨를 많이 쓴 것?”
“……아무래도 일상적이고 생리적인 사소한 감정은 전달되지 않는 것 같군요. 조금 독특한 감정만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완전히 무작위로 전달되거나. 추이를 지켜보고 관찰해야겠지만 지금 보기엔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요.”
“……아.”
“그 추측이 맞다면.”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어루만지며 깍지를 끼었다.
“당신이 불행하거나 슬프면 내게도 전달될 터이니 최선을 다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줘야겠군요. 안 그래요.”
“……그건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은데.”
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루나는 아키스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최선을 다해 볼게요, 공작님.”
“나도 약속하죠. 일단 지금은 키스부터 좀 하고.”
루나는 작게 키득였다.
아키스의 입술이 질척하게 얽혀 왔다. 말랑하고 야들한 그의 입 안에서 그가 마치 그녀를 삼킬 것처럼 움직였다.
야들하고 질척한, 뜨거운 입 안이 그의 혀로 점령되고 입술이 발개질 때까지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의 손은 쉴 새 없이 루나의 가느다란 허리와 허벅지 위에서 움직였다.
“으응…….”
루나는 눈을 감고 말랑한 혀끝을 음미했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진도가 더 나가기 전에 루나는 눈을 꾹 감고 그의 코끝에 키스 한 후 떨어졌다.
“이제 일해요. 번역 작업은 시간이 남으면 하고 싶을 때 할게요.”
“그렇게 해요.”
아키스는 스킨십이 몹시도 아쉬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내의 몸이 약해서 어떻게든 마도구 펜던트라도 다시 줘야 할 판이었다. 그는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싶었는데, 아내는 밤새 하는 것만으로 다음 날 뻗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쪽에 있는 서류들은 내가 가져갈게요. 드레스 룸에서 작업하는 게 편해서요.”
아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를 나서며 루나는 시원섭섭함을 느꼈다. 루일 때는 그토록 저의 실력을 원하더니, 이제는 여인이자 아내로써만 저를 원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가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이전처럼 자신을 부리거나 사무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아키스는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번역가 열 명이 사흘 동안 매달려야 간신히 할 일이 두 시간 만에 모두 끝나 그의 서재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유래 없이 완벽한 작업이었다. 너무 깊은 감동이 느껴져서 잠시 그는 말을 잊었다.
“아키스? 방금 마음이 지잉 했는데 무슨 일 있어요?”
루나가 서재 문을 빠끔 열고 물었다.
아키스는 새삼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요.”
“……네?”
루나는 고개만 갸웃했다.
아키스는 말없이 그녀를 폭 끌어안았다.
* * *
이튿날 오후.
저녁 식사 전에 루나는 약초를 정리하고 관련 법조항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종종 꿈에 대한 일이나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 묘하게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다시 그 도서관의 꿈을 꿔야 해. 미래에 대해 신경 쓰이는 일들이 있어…….’
그때, 급하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죠?”
“공작 부인. 저, 큰일이 났습니다. 정원에서 일하던 집사님이 크게 다치셨어요.”
“……알렉이?”
루나는 당황해 치마를 쥐고 일어났다.
“혹시 내 약초밭 일을 돕다 다쳤니? 아아, 약초밭 일이 은근히 힘들어 알렉에게 손대지 말라 몇 번을 말했는데도…….”
루나는 허둥지둥 치마 자락을 쥐고 제인을 따라갔다.
“어?”
마침 노을이 지는, 하늘이 제일 예쁜 시간이었다.
루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원에 있는 호젓하고 작은 정자에 수많은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도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당황해 입을 살짝 벌렸다.
“알렉은?”
“저기 계세요.”
제인이 흐뭇한 웃음을 꾹 눌러 참고 공손하게 말했다.
알렉과 비아가 정자 근처에 단정히 서서 그녀를 미소 짓고 응시하고 있었다.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정신을 차려 보니 아키스의 손길이었다. 익숙한 품, 크고 단단한 손을 느끼며 루나는 뺨을 붉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댔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지만 너무 기대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꾹 눌러 참았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대답은 담뿍 웃음을 지은 알렉에게서 돌아왔다.
“사실은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과 너무 급하게 결혼해 제대로 청혼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내내 마음이 쓰시다 오늘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루나는 눈만 깜빡였다.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이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오는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알렉이 친절한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꽃 장식은 비아가 직접 했습니다. 제인도 도왔구요. 뭔가 해 드리고 싶다면서…….”
“나 참, 그런 건 나중에 말해요.”
비아가 집사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주었다. 제인도 웃고 있었다.
고마움과 감동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너무 고맙고 기쁘면 말이 안 나온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루나가 붉어진 얼굴로 머뭇대며 대답했다.
“다들 고마워요…….”
그리고 루나는 아키스를 돌아보았다.
“당신, 나 몰래 이런 걸 준비하고…….”
“아직 준비한 건 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정자로 이끌었다. 고용인들은 눈치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고 자리를 비켰다.
“아!”
고용인들이 사라지자, 아키스는 아예 루나를 안아 올려 정자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스런 벨벳 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루나를 정자 안의 긴 의자에 곱게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아키스가 상자를 열자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푸른 보석과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목걸이와 반지가 드러났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보석은 처음 보았다. 이전에 아키스에게 깜빡 속아 보석상 심부름으로 선물을 고를 때도 이만큼 대단한 건 보지 못했다.
“이건…….”
“늦었지만 프러포즈 선물이라고 해 두죠.”
그가 속삭였다.
“루나, 나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 주겠습니까?”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심장이 터질 듯했다. 따뜻한 감정이 부드러운 천에 퍼지는 물처럼 잔상을 남기며 마음속으로 번져 갔다.
아키스 또한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그 감정이 더욱 컸다. 서로 교환한 감정이 이윽고 더 크고 따뜻한 것이 되어 번졌다.
루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아키스가 루나의 귓가에 작은 말을 속삭였다.
루나가 은근히 기다려 온 말이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그의 큰 손을 잡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할게요.”
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루나는 코로 작은 숨을 쉬며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서로 오래 기다려 온 말이었다.
* * *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얼굴로 알렉이 미소 지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 저택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두 분이서 아이만 가지시면 걱정할 게 없군요.”
비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추운 겨울 같았던 저택은 이제 없었다. 이 저택 안에 홀로 살아가는 독불장군을 구제하러 씩씩한 공작 부인이 와 준 것에 매일매일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서서히 지기 시작한 노을이 더욱더 젖어 들었다.
“오늘 밤은 부부침실 주변에 더더욱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야겠군요.”
비아가 담뿍 웃으며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공작 부부는 둘 다 깊고 깊은 늦잠을 잤다.
프러포즈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은 고용인들의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들었다. 아키스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부부가 차를 마시는 티 룸으로 들어간 디온은 노크하기 전에 움찔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보석 대체 얼마예요? 저만한 사이즈는 박물관에도 없을 것 같은데. 아키스, 당신 내게 의논도 없이 이런 고가의 보석을 사다니……. 보석은 이미 예전에 선물해 주신 것이 있잖아요.”
“<월플라워 부인>에서 기사 우드가 여주인공에게 레드 다이아몬드 10캐럿을 선물했지요. 내가 당신이 관여한 소설 남주인공 정도는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과소비를 했다구요?”
월플라워 부인에서 남주인공이 선물한 레드 다이아몬드는 10캐럿이었지만, 20캐럿은 넘어 보이는 블루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끝없이 달린 굵직한 다이아몬드들을 보면 다 합해서 100캐럿은 수월하게 넘을 것 같았다.
“……당신이 그 소설을 좋아하니까…….”
“다음부터는 꼭 나한테 허락 받아요, 아키스.”
“……알겠습니다.”
“거기다 반지를 끼고 다니고 싶어도 이렇게 큰 반지라서야 평소에 끼고 다니지도 못하잖아요.”
아키스는 헛기침을 했다.
“그럼 끼고 다니는 용도의 반지를 하나 더 맞추죠, 좋은 물건으로…….”
“아아, 그런 걸 과소비라고 하는 거라고요! 정말 반성 안 할래요! 정말 당신!”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언제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던가. 의기양양하게 충고하던 아키스의 모습이 아련하게 디온의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땐 조금 존경스럽기도 했는데…….
‘혼나고 계시구나…….’
디온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되었다. 그는 조용히 발길을 돌려 떠났다.
* * *
아키스는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늘 싸늘하리 만큼 정적인 분위기도 똑같았다. 각인 후도 저를 대하는 게 그다지 달라지진 않았다.
가끔 이럴 때를 빼면.
‘정말, 이 사람 못 말려…….’
루나가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자, 그는 영원히 백년해로 하겠다는 한 줄 조항만 유난히 강조된 새로운 결혼 계약서에 그녀의 사인을 요구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계약서에 사인하기에 앞서 그는 기어이 2년의 계약 결혼 기간이 명시된 이전에 쓴 결혼 계약서를 제 손으로 불태웠다. 그것도 귀한 마법까지 써서. 그러라고 있는 마법이 아닐 텐데.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사실 그건 루나에게 더 좋은 일이었다. 재산 분할에 대한 건 물론 결혼에 불리한 여러 조건들이 2년의 계약 결혼 조항과 함께 사라지니까.
“아아, 정말. 이렇게 안 해도 당신이랑 같이 평생 살 거라구요.”
아키스는 루나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를 뒤에서 안고 속삭였다.
“안 돼요. 내일 내가 스틸본 숲으로 떠나니까, 그전에 꼭 해야 합니다.”
“뭐가 그리 불안해요? 꼭 묶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아. 완전 자기 옆에 꽁꽁 붙들어 두려고.”
“맞아요.”
아키스가 루나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불안합니다. 당신이 너무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또 도망갈까 봐.”
“…….”
“그러니 빨리 나한테 묶여 줘요. 지금 당장.”
“……그 반대는 아니구요? 나만 당신한테 묶이면 되나?”
“그럼 말을 바꾸죠. 나 빨리 구속해 줘요. 난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게 좋습니다.”
그의 나직하고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척추를 타고 파고들어 온몸에 쾌락을 전달하는 것 같다.
쓸데없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좋고, 목울대가 울릴 때 움직이는 목젖 감촉은 이렇게 섹시한지.
“알겠어요. 당신을 가져 드리죠, 공작님.”
루나는 결국 장난스레 투덜거리며 사인했다. 아키스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바로 침대로 데려갔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걸 알면서도 져 줄 수밖에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각인을 한 쪽은 자신이 아닐까. 루나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저녁 아키스는 스틸본 숲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하인들이 싼 짐을 점검했다.
“……모처럼 내가 짐 싸는 거 도와준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아요?”
“그런 건 집사나 하인들이 합니다. 안 해도 됩니다.”
“나도 가끔은 아내 노릇을 하고 싶은데요.”
“당신은 이미 내게 충분히 과분할 만큼 잘해 주고 있어요.”
역시 이 사람이 기뻐할 땐 그걸 할 때와 번역 일을 해 줄 때뿐인가. 워낙 잘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니 뭘 해 주는 것도 쉽지 않다.
그가 너무 좋아서, 루나는 요즘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만날 내가 잘해 주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해 주는 것 중 뭐가 제일 좋아요?”
아키스는 그녀의 머리를 마치 쓸듯 쓰다듬었다. 루나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가 소년 루의 머리를 이런 방식으로 쓰다듬었을 거라는 상상.
“존재하는 거요.”
“네?”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는 거, 그게 제일 좋단 말입니다.”
루나의 귀가 은근히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분명히 귀가 붉어졌을 거야. 감추고 싶어. 루나는 베게로 얼굴을 푹 파묻으며 생각했다.
가끔 아키스는 루나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아키스는 자로 잰 듯한 말투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번역 일도 도와주면 고맙지만 안 해도 됩니다. 무리하지 마요.”
“……뭐 그건 제게 별거 아니니까요.”
번역가 백 명의 몫을 하는 천재가 이렇게 말을 하자 아키스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살짝 입술에 키스했다.
“스틸본 숲의 일정이 3일 걸린다고요?”
“네. 황태자와 함께 가는 거니 그리 일정이 잡혔습니다. 괜찮겠어요?”
이전에 스틸본 숲의 행사에서 정화 의식에 실패했기에 아키스는 다시 한번 의식을 치르러 숲에 가야 한다 했다. 루나로서는 무슨 행사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황가에서는 중요히 여기는 행사라 했다.
“괜찮아요. 사실 난 무슨 행사인지 잘 모르겠지만…….”
“황가는 은근히 미신을 믿죠. 또, 황제가 혼수상태인 상태에서 황태자가 섭정을 하고 있으니, 흠 잡힐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거든요.”
“알겠어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이제 아키스에게 대부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딱 하나 털어놓지 않은 건 가장 마지막에 꾼 꿈이었다. 불현듯 그 꿈들에 대해 생각이 닿았다.
루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일단 그 일은 먼저 휘멘과 대화해 봐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고, 또 아키스에게 조금 더 아는 일이 생긴 다음 휘멘과 함께 그에게 지원해 달라는 설득을 해 볼 생각이었다.
‘……8년 후, 내가 죽기 전 초토화된 수도의 꿈. 그 꿈만은 틀렸으면 좋겠어.’
루나도 그 꿈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확신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이전과는 달리 일기장의 내용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 * *
이튿날.
아키스는 게이트를 타고 스틸본 숲으로 향했다. 루나는 이튿날 하루를 바쁘게 보내다 모처럼 혼자서 침대에 들었다.
그날 밤, 루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의 꿈을 꾸었다 그녀의 미래를 처음 안 곳. 달빛이 스며드는 신비한 도서관.
‘아…….’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녀는 급히 뛰어가 책장에서 책을 뽑았다.
‘저번에 읽은 페이지…… 내가 수도에 온 뒤…….’
루나는 그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일기장에 집중했다.
* * *
(일기 내용)
내가 보낸 신청서는 통과했다. 나는 국가에서 실행하는 실험의 후보자가 되었다.
시험 장소는 신전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환자가 되어서도 시험을 봐야 한다니. 나는 평생을 먹고사는 걱정에서 해방되지 못할 모양이다.
“그냥 루나예요.”
“성은 없고요?”
시험관이 나를 보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은 버린 지 오래니까.
한 장소에 이렇게 아픈 젊은 여인들이 많은 것은 나는 또 처음 보았다.
시험 전 대기 장소에는 병자들이 이따금 기침을 하는 소리만이 어두운 신전에 울렸다. 서로서로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 우리를 이곳에 부른 걸까? 아픈 사람들을 데려다 어디에 쓰겠다고.”
“듣기로는 실험 지원이라고 하던데,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에이. 설마 국가에서 그럴까.”
내 옆의 여인들은 소곤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렬로 걸으시면 됩니다.”
의사로 보이는 이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걸으라고 했다.
그들은 한 무리의 양떼처럼 일렬로 걷고 또 걸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방마다 방에 칠해진 색깔이 달랐다.
“합격.”
“불합격.”
그들이 방의 끝까지 걸으면, 맞은편에 서 있던 사내들이 다가와 합격과 불합격을 말했다.
마침내 모두가 불합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나만 서 있게 되었다. 나는 피곤에 지쳐 아직도 영문을 몰랐다.
‘도대체 이런 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지?’
곧 문이 열렸다.
“최종 시험까지 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한 사내가 나왔다.
평생 동굴 안에 산 것처럼 낯이 창백한 사내였다. 왠지 기분 나쁜 느낌에 루나는 흠칫했다.
“소인은 드래곤의 신전의 유일한 신관입니다. 모든 시험을 다 통과하셨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제 마지막 시험입니다.”
방 끝에는 석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석문을 가만히 열어 주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의 끝에는 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몹시도 아름답고 오묘한 색의 꽃이었다.
검은색? 아니, 청보라색?
알 수 없는 빛으로 고고하게 빛나는 꽃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 뭐가 보이십니까?”
신관이라는 사내가 중얼댔다. 나는 몸을 숙였다.
“꽃이 보여요. 검은 꽃 한 송이요. 청보랏빛이 도네요. 어떻게 이런 맨바닥에 꽃이 피어나 있지요?”
“그래요?”
신관은 그 말에 반색했다.
“정말로 무언가 보입니까?”
“네. 보여요. 당신 눈엔 이게 안 보여요?”
신관은 아주 희희낙락했다.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찾았습니다! 찾았어요! 공작의 ―를 찾았습니다!”
―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곧이어 몇 명의 남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가장 선두에 선 사내가 다가왔다.
“저는 공작님 휘하에서 일하고 있는 디온 드 시드라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드 백작이라 부르지만, 그냥 디온이라 불러 주셔도 무방합니다.”
사내는 꽤 준수한 데다 부유해 보였다. 나랑은 정반대. 나는 괜히 그가 싫어졌다.
또 기침이 나와서 나는 콜록콜록 소리를 냈다. 병에 걸리고 이따금씩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여기까지 온 여자들은 어찌 되었지요?”
“모두들 치료를 받거나 공짜 약을 받을 겁니다. 심한 사람들은 병동에 입원 허가도 받을 거고요.”
“그럼 나만 왜 여기 있죠?”
“루나 님이라고 하셨지요. 미혼이고 가족은 없으시군요.”
디온이 서류를 한 번 보고 말했다. 모두 가짜로 적어낸 서류였다. 오직 이름만 진짜였다.
“어디서 오셨나요?”
“외국요. 여기 오는 데 한 달이나 걸렸죠. 게이트 사용료를 내느라 가진 패물도 다 써서 돈도 한 푼도 없고요.”
“실례지만 아픈 몸으로 왜 이곳까지…….”
“내가 온 곳의 구빈원은 아주 끔찍하거든요. 나처럼 연고 없는 여자는 제국에서 지내는 게 안전하다 했어요. 구빈원에서도 사람처럼 살 수 있게 해 준다기에…… 그리고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그 일이 일어났고요.”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 솔직하게 말했다.
“죽을 때가 되니…… 이왕이면 고향인 제국에서 죽고 싶었어요. 아무튼, 내 사정이 좋지 않아요.”
나는 가능한 한 돈을 빨리 주길 바란다는 말을 담아 그에게 돌려 말했다.
염치고 뭐고, 가난 앞에선 뭣도 없는 법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인데 죽기 직전까지 굶을 순 없잖은가?
디온이라는 남자는 내게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제부터 사소한 걱정은 마세요. 그냥 여기 머무시면 됩니다. 물론 치료도 제공될 겁니다…… 일단 의사에게 가시지요.”
디온이라는 남자는 입안의 혀처럼 친절하게 굴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 * *
달빛이 스며드는 도서관에서 루나는 정신없이 다음 날, 또 그 이튿날의 이야기를 읽었다. 도대체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최종 시험이라니, 도대체 내가 뭘 위해 뽑힌 거지? 거기다 디온이…… 어째서 디온이 나오는 거지? 아, 안 돼. 아직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이야기를 더 읽고 싶어.’
기분 탓일까, 도서관의 정경이 점차 흐려지는 것 같았다.
루나는 그 느낌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도서관의 꿈에서 강제로 깨어나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8년 후의 루나가 쓴 일기를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갔다.
「10월 1일.」
그들은 나를 화려한 방으로 안내했다. 오늘부터 내가 사용할 방이라고 했다.
나는 신기해서 귀족 아가씨나 쓸 것 같은 방을 여러 번 돌아보았다. 구석구석 예쁜 것이 참 많았다.
아 참, 여기 사람들은 나를 ‘루나 아가씨’라 부른다. 시부모님은 루나, 이년, 이 계집애, 나를 그렇게 불렀는데. 아, 내가 어릴 적 숙모와 숙부도 그랬다.
하여튼 이렇게 공주님 대접을 받아 본 적 없어서 낯간지럽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의사가 들어왔다.
“정말 의지가 강하십니다, 이 정도 병세라면 오래 버티지 못하셨을 텐데 긴 여행까지 견디셨다니…… 아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계세요.”
잡초 같은 내 생명력을 한껏 칭찬한 의사는, 그다음에는 내가 빤히 아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오래 살지는 못하실 겁니다. 폐병이 심하게 드셨어요, 그래도 공작님이 오시면 달라질 겁니다. 그분의 마법이면 어떤 병자도 한동안은 아픔을 잊을 수 있지요.”
“왜 공작이 날 치료해 준단 말인가요?”
“그건 루나 아가씨께서 그분의 손님이기 때문이죠. 이 건물 또한 그분의 것이고요.”
의사는 내 말에 답하며 묵묵히 웃기만 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공작과 그 측근들은 다 미쳐 버린 게 아닐까? 그들은 나를 호의호식 하게 해 주며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정말이다. 아무리 아픈 나라도 물일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심지어 그들은 내게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요구해도 된다 했다. 그들은 정말 친절하다.
‘그런데, 도대체 이렇게 잘해 주는 이유가 뭐죠?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이유가 뭔데요?’
그러나 그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계속 캐물을 수도 없다. 그러다가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정말 날 몹쓸 실험의 재료로 쓸 것 같으면 그때 도망가야지.
‘갈 곳도 없으니까.’
나는 아직도 밤이면 혼자 침대에서 숨죽여 운다. 다가오는 죽음을 혼자 기다리는 일은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콜록……!”
그런 날 밤이면 어김없이 피를 토했고,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때로는 서 있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기를……. 자는 사이에 죽고 싶어.’
그나마 여기서 비싼 약을 받을 수 있게 된 후 고통이 덜하다.
이 건물의 주인은 공작인데, 나는 그 유명한 공작님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이 건물은 총 3층짜리인데 1, 2층에는 항상 분주하게 사람들이 드나든다. 나는 2층 끝의 호화로운 방에서 영문 모를 시중 속에 살고 있다.
다만 디온도, 의사도 내게 하나는 신신당부했다.
절대 밖으로 나가진 말라고 했다. 대신 이 건물 안에서라면 뭐든 해도 좋다고. 내가 아파서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오늘, 너무 지루해서 나는 처음으로 3층으로 올라갔다.
‘와…….’
그곳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먼저, 나무가 많았다. 어떻게 건물 3층에 나무가 많을 수 있지?
그곳은 인공적으로 조경된 온실이었다. 조경이라는 단어가 맞나? 책을 읽은 지도 너무 오래되어 가끔 단어가 헷갈린다. 이곳 사람들의 기준에서 나는 무식한 여자로 보일 것이다.
아무튼, 그곳은 근사했다.
그리고 그 온실 끝에는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이렇게 큰 피아노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그 남자가 있었다.
공작, 아키스 드 로텐베른.
나는 얼른 나무 사이에 숨어 그 자를 훔쳐보았다.
넓은 어깨, 단단한 손, 그리고 수도 여자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외모. 완벽한 외모의 그 남자는 피아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때.
그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장면은,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남자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그자와 눈이 마주쳤다.
“히익!”
공작은 제국 제일의 마법사라 했다. 그런데 내가 자신이 우는 것을 훔쳐봤다는 걸 눈치챘으니 내게 몹쓸 마법을 걸어 죽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도망쳤다.
조금만 뛰어도 내 몹쓸 몸은 지치기에 나는 금방 쌕쌕, 거친 숨을 내쉬며 기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하다? 왜 계속 공작의 옆얼굴이 생각나는 거지……?’
그날 밤은 몹시 괴로운 밤이 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이상하게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 * *
사람들이 내가 잠든 방에 들어와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내가 밤마다 가슴앓이를 하고 우는 걸 눈치챘다. 내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아프다고 했다.
그 말들을 듣는데 은근히 화가 났다. 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자는 사이에 하는가.
“나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이튿날, 나는 그들에게 화를 냈다.
“아무래도 아가씨와 더 수월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할 것 같군요.”
날 보며 디온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리고 이튿날, 그녀가 왔다.
“난 페니라고 해요. 병자들을 돌보며 봉사하고 있지요.”
그녀는 약간 피로한 느낌이었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검소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아, 이게 대귀족이구나 싶은 외모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몰락 귀족임을 깨달았다.
‘가난해 보이는데 품위가 넘치네.’
난 사람을 깔보는 부자를 싫어했으므로, 이상하게 고생한 티가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페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디온의 부탁을 받아 당신 말벗이 되어 주러 온 거긴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나도 적적해서 온 게 커요.”
그 순간, 나는 갑자기 그녀가 조금 더 좋아졌다.
그녀는 몹시 쌀쌀맞은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환자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다들 날 곧 죽을 어린애 취급하곤 했으니까.
나는 일어나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당신은 알죠?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으면, 아는 것을 전부 다 알려 줘요. 디온이라는 남자에게 이르지 않을게요.”
페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짧은 사이 나는 그녀의 눈에 떠오르는 것이 명백한 동정임을 눈치챘다.
“여기 사람들을 너무 믿지 마세요.”
페니가 속삭였다.
“이 사람들은 당신 안위보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디온과 공작은 내 은인이지만, 그래도 당신 같은 여자가 이용당하는 건 가엾어요.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거든요. 정신 차리고 당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거예요. 알겠죠?”
“그게 무슨…….”
더 물으려던 찰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페니가 낮은 한숨을 쉬더니 내 팔을 부드럽게 붙잡고 창가로 데려가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때마침 내 머리 위로 거대한 은빛의 형태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놀라 폐부까지 숨을 들이켰다.
‘저, 저게 뭐야.’
커다란 드래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날갯짓 소리는 천둥 같았고 날 때마다 아름다운 은빛 잔상을 뿌렸다. 나는 겁먹어서 웅얼댔다.
“드래곤, 드래곤이에요…….”
“맞아요. 제국의 수호신인 드래곤이죠. 당신,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페니가 속삭였다.
그때였다. 테이블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페니가 나를 가만가만 달랬다.
“이제 지진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요. 걱정 마요, 그 끔찍한 대지진이 우리를 휩쓸었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드래곤이 있는걸요.”
“…….”
“드래곤은 사신이지만 수호신이기도 하죠. 재앙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만 나타나 우리를 지켜 주는…… 그러니, 당신을 지켜 줄 거예요.”
두 번에 걸친 대지진.
듣기로 몇 년 전에 그것을 예고하듯 제국에 첫 지진이 왔다 했다.
그날은 나도 기억한다. 신전에서 예견한 개기 일식 날이었다. 100년만의 일이라고 제국 신문에 크게 기사까지 났다.
나는 공국에서 개기 일식을 보았다. 그리고 그날 제국에는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너무 작은 지진이라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가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몇 년 뒤, 아주 큰 지진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졌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죽은 사람도 많았다. 지진은 일차적인 문제였으나, 지진이 원인이 된 대화재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수도는 골목과 골목, 길이 좁았고 화재에 취약했다.
사망자가 속출했고 고아가 늘어났다. 그 여파로 지금도 거리에는 부상자가 넘쳐 난다.
그날, 제국이 자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했다.
수많은 고대 시설들이 대파되어 수도의 상황은 더 최악이었다.
‘우린 다 멸망할 거예요, 그럴 거예요. 다 죽을 거예요.’
제국민들은 그렇게 울부짖었다.
황가에서 드래곤의 계약자인 공작을 전면에 내세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작은 사람들을 설득했고 민심은 서서히 안정되는 것 같았다. 일단 보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겉핥기식의 조치이다. 젊은 황제가 집권하는 현 황가는 사상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걱정 마요. 당신이 죽더라도 병으로 죽지, 천재지변의 사고로 죽진 않을 테니까.”
페니는 어린애를 달래듯 나를 아주 오래 달랬다.
“알아요? 공작은 드래곤을 이 땅에 불러내 재앙을 막죠. 그게 공작가의 후계자들의 역할이구요. 하지만, 그 정도의 마법을 쓰면 공작도 성치 못해요. 그 사람도 죽어 가고 있죠…….”
“그럼, 공작이 죽으면 누가 우릴 지켜요?”
나는 멍하니 눈을 크게 뜨고 페니를 보았다.
“공작은 자식이 없잖아요?”
“그래요. 계약을 계승할 사람이 없죠.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페니가 속삭였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공작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예요. 그걸 기억하세요.”
페니는 여전히 달래듯 말했다.
그녀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걸까? 왜 내게 친절한 걸까? 알 수 없었다.
“내일 또 올게요.”
페니가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방을 나갔다.
* * *
아무래도 나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페니의 충고를 듣고 또 3층으로 기어 올라가다니.
아주 어릴 적 새틴의 생일날 숙부와 숙모가 음악가들을 불러 주었다. 그들은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켰다.
정말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이상하게 공작이 온실에 혼자 앉아 있는 걸 볼 때면 그 선율이 떠올랐다. 이제 너무 오래돼서 기억조차 안 나는 그것. 귓가에 지잉 울리던 그 아름다운 것.
나는 살금살금 온실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제국 황가를 그냥 놔둬? 우리가 속아 온 게 얼마인데. 빌어먹을!”
“진정해라, 휘멘. 그럼 이 시기에 황가 사람들을 교수형이라도 처하면 퍽이나 민심이 안정되겠군.”
“애초에 카리노 대왕이 태초의 결계에 손만 안 댔어도 이 꼴은 안 났어. 황가를 유지하자고 나라를 이 꼴로 만들어? 유적을 찾아내면 뭐 해. 우린 결계의 제어권에 손도 못 대는데! 이제 네가 죽으면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겠지. 이제 다 끝장이라고.”
“아직 안 죽어.”
“그 여자? 아주 다 죽어 가는 여자더군. 그게 뭐? 병자 하나 왔다고 상황이 달라지나? 우린 ―를 잃었어. 그게 필요하다고!”
휘멘이라 불린 남자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가 말한 말 중에 단어 하나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공작이 내 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휘멘이라는 사내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두 남자는 몹시도 키가 컸다.
“이게 누구야?”
그가 비꼬듯 말했다.
불타는 듯한 머리에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미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겁을 집어먹고 긴장에 숨을 크게 삼킨 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순간, 나는 천천히 쓰러졌다.
* * *
「10월 2일.」
“밤새 앓으셨습니다.”
나는 하룻밤을 꼬박 죽다 살아났다. 오늘 새벽,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누군가 나를 어루만졌다.
아주, 아주 큰 손이었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그 남자가 보였다. 공작이었다.
‘아키스 드 로텐베른.’
그 남자가 빛이 나는 손으로 내 이마를 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가셨다. 나는 겨우 쌕쌕 숨을 쉬며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페니가 내 옆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눈을 뜬 그녀는 피곤한 눈가를 눌렀다.
“당신, 잠꼬대를 하더라고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녀가 내 눈을 피했다. 다시 바라본 그녀의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
“엄마를 찾더라고요.”
그녀가 속삭였다. 내 뺨이 붉어졌다.
“잘못 알았어요. 난 엄마가 없는걸요. 엄마 얼굴도 모르고요. 말실수예요.”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아팠던 모양이다. 그 순간 나는 정말 바보 같은 소리를 해 버렸다.
“……나, 싫어하지 않을 거죠?”
내 멍청한 소리를 듣고도 그녀는 날 경멸하지 않았다.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오후에 또 오겠어요.”
오전에 왕진을 온 의사가 페니가 나를 밤새 간호했다는 걸 귀띔해 주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은 무늬를 통해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더듬었다.
‘눈동자에 붙었나…….’
난 처녀로 죽을 팔자였다. 병든 내 남편은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죽었고, 난 노망난 시아버지에게 추행당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당했다. 그리고 병들고 볼품없는 병자로 죽어 가고 있다.
공작.
그래, 그 남자가 문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이제 이 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적을 차례이다.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에 대한 것이다.
나는 공작의 마법으로 한결 나아졌는데도 한동안 아프다고 온갖 엄살을 떨었다. 페니는 생각보다 마음이 약해서 내가 아파 죽겠다 하면 순순히 원하는 걸 들어줬다. 나는 그것을 빌미로 그녀에게 공작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결혼은 했니?”
“루나, 공작은 결혼이 세 번이나 깨졌어. 뒤늦게 의사들이 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
페니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는 아내와 2년 만에 이혼했어. 그가 부인에게 너무 무관심했지.”
그에 부인의 이름을 물었지만, 생전 처음 듣는 귀족 여인의 이름이었다.
부인과 이혼했을 때, 공작이 부인에게 좋은 혼처를 잡아 주었고, 어떤 한 지방의 사별한 귀족의 아내가 되어 잘 살고 있다 한다.
“부인에게 버림받은 거야?”
“표면상으론 그렇지만, 사실은 아키스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거야. 그는 여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극도로 관심이 없거든…… 그는 사랑이란 마음이 없어. 여인에게 애정을 주지 못하지. 그를 봐. 그는 항상 길 잃은 것 같잖아? 그러니 여인들은 그에게 간 쓸개라도 빼 줄 듯 끌리는 거야.”
페니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황후의 컨디션이 난조라, 효자인 젊은 황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정신병리학을 연구시켰다. 그러면서 학자들은 공작의 정신도 진단했다.
“감정이 현저히 무디시며,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사회성 또한 마찬가지고요. 공작님 같은 케이스도 치료가 필요하답니다.”
의사들은 아키스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했다.
“그래서, 그가 치료 받았어?”
“아니, 그럴 리가. 헛소리 취급했지. 그런 남자잖아.”
나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럼 두 번째, 세 번째 여자는?”
“네가 상상하는 거랑 똑같아. 뭘 바라겠니.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모두 약혼녀였고 차례로 공작을 떠났고, 버림받았지. 황가에서는 정말 오래도록 노력했어.”
페니는 두 약혼녀들이 상당한 미인이었다는 것도 덧붙였다.
“……황가에서 공작에게 아이를 가지라 종용했구나.”
“하지만 말을 들으면 공작이 아니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페니는 소곤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공작이 정말 죽어?”
“……아마도. 꽤 고통스러운 것 같아. 3층에 온실을 만들고 나오지 않잖아. 사람들이 자기의 고통스런 모습을 보는 걸 싫어해서 그렇대. 디온이 그랬어.”
페니가 속삭였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다들 그 질문에만은 입을 꾹 다문다..
“그건 아마, 공작만이 대답해 줄 수 있을 거야. 모두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해. 그러나 그는 필요한 데가 아니면 절대 시간을 쓰지 않지. 그가 너에게 시간을 낼 거고, 곧 널 부를 거야.”
* * *
이곳에 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드디어 공작이 날 불렀다. 나는 그냥 평소 입던 대로 화장기조차 없는 얼굴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음식이 한 식탁에 차려지는 건 오랜만에 본다. 따뜻한 전체 요리, 고기 파이, 그리고 딱 맞게 구운 쇠고기 요리.
하지만 나는 환자였다. 나는 수프를 홀짝였다.
“왜 불렀는지 묻지 않습니까.”
공작이 나른하게 말했다.
체구도 크고 보랏빛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오묘하다. 보이는 대로라면 도저히 아픈 사람 같지도 않았다.
“내가 궁금한 걸 물어봐도 되는 건가요?”
그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죽어요?”
놀란 듯, 그는 마시던 와인을 뱉을 뻔했다. 그가 가만히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보았다.
그가 가진 기운은 엄청났다. 일견 조용하고 차가워 보이나,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세상 모든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더웠다. 굉장히 더운 남자였다. 동시에 존재만으로 여인을 긴장시킬 수 있는 남자였다.
“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도 죽겠지요. 둘 다 병에 걸렸으니.”
“그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저승길 말동무?”
그의 무심한 눈길에 비로소 흥미가 생겨났다.
“맹랑하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희미한 흥미를 담고 나를 보았다.
저 얼음 같은 남자가 날 인지했다는 데 싸한 심장 통증이 왔다. 그건 묘한 쾌감과도 비슷했다.
“그건 좀 나중에 대답하죠.”
그의 시선이 나의 목선을 쫓고, 옆 뺨을 쫓았다.
“얼굴에 생기가 도는군요.”
그가 속삭였다.
“덕분에요.”
그의 마법이라면 달라질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공작의 마법 덕분에 오랜만에 몸에 활력이 돌았다. 잘하면 오늘은 복도에서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이제 빨리 걸을 수도 있어요.”
“그거 잘됐군요. 나중에 보여 주십시오. 천천히 보고 싶으니까요.”
그가 무심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주 샅샅이 말입니다.”
나는 비꼬려 말한 것인데 공연히 뺨만 붉혔다.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나, 여기 있어도 돼요?”
“네.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반가운 말이었다. 난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결계’가 뭐예요?”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어제 나와 휘멘의 대화를 훔쳐들었지요. 그렇죠?”
“아, 아녜요. 당신이 내가 서 있는 데서 대화했을 뿐이라고요.”
나는 괜히 역정을 냈다.
시부모와 살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려 먹히고도 저녁이면 어김없이 욕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나를 공격하면 날 선 대답을 하는 데 이골이 났다.
말해 놓고 내 뺨이 훅 달아올랐다. 그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궁금해하니 설명하죠. 결계란 태초의 결계를 말합니다. 고대인들이 이 세계에 쳐 놓은 결계죠. 그 결계가 지금까지는 마법사들을 위한 것이라 알려져 왔습니다만, 이번에 그게 아니란 것이 밝혀졌죠.”
“뭔데…… 요?”
“이 땅은 마력 성향이 너무 강해, 부정기적인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 땅에 흐르는 마력 구조와 그것이 지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나는 거의 못 알아들었다.
대충 알아들은 내용은 이러하다. 땅 밑에 거대한 힘이 있어서 그게 멋대로 지상으로 올라올 때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이것도 알아들었다. 이 땅이 특수했기에 고대에는 수많은 이종족–이를테면 요정이나 마족, 엘프 같은 존재들-이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고대 제국은 마법사 왕국이라 불릴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제국 땅은 원래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었지요. 그래서 고대인들은 이곳에 살던 이종족들의 힘을 빌어 그 지진을 막는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 마법이 태초의 결계인가요?”
“맞습니다. 그 결계가 완성되고, 태초의 결계를 통해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멈췄지요.”
“그런데 그게 왜…… 어째서 지금은 지진이 나는 거죠? 새삼 이제 와…… 고대는 몇백 년 전의 일이잖아요?”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결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건 황가의 실책이지요. 카리노 대왕은 과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여인들이 고대어를 할 수 없는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 마법 탓에 결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 균열이 몇백 년 후 발발해 결계가 망가진 겁니다.”
그건 듣던 중 통쾌한 소리였다.
난 늘 카리노 대왕이 싫었다. 에리스가 나쁜 년이면 나쁜 년이지, 그 죄를 왜 세상 모든 여자가 갚아야 하냔 말인가.
“그럼 또 지진이 나요? 페니는 아니라고 했는데.”
그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어렴풋 올렸다.
“지금도 지진이 나는 중입니다.”
“네?”
나는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나와 제국과 계약한 드래곤이 그 지진을 막고 있지요. 내가 손만 떼면 이 땅은 언제든 흔들립니다. 끔찍한 재해는 다시 발생하겠지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요…….”
“……그게 문제지요.”
아키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나 동시에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멸망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공작가에 복수하기 위해 자손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공작가의 힘이 방계 가문으로 갈 줄 알았지요. 내가 그랬거든요. 보랏빛 눈을 가진 내 이복동생이 죽고, 그 후 내가 보라색 눈으로 발현했지요. 내가 죽어도 살아 있는 방계 집안의 아이만 있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건 공작가에서 오래 감춰 오던 진실이지요. 직계 가문이 힘을 보존하기 위해선 알려져선 안 될 현실이거든.”
“그런데?”
“지진이 나던 날, 방계 가문의 사람들은 공작가의 연례행사를 위해 공작가문에 있었습니다. 공작가가 무너진 사실은 알지요?”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몹시 황폐해 보였다.
“그날 방계 가문의 아이들이 다 죽었습니다. 공작가의 건물이 수도 화재로 다 탔고, 방계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 식솔의 대부분이 죽었지요. 그러니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드래곤의 마법도 쓸 수 없으니, 제국에서는 내 목숨을 오래 붙여 놓는 것으로 어떻게든 버티려 하고 있지요.”
그 순간 부끄럽게도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난 어차피 죽는데, 하는 생각. 세상의 멸망이니 존속이니 하는 일은 지금 내게 너무 과했다.
‘혹시 그날, 그래서 울었던 걸까.’
이 남자가 온실에서 혼자 울던 것을 기억한다.
어쩌면, 혹시, 왜.
이런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그 많은 걸 다 어떻게 알았어요?”
“드래곤이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드래곤이 가르쳐 준, 우리가 살아날 길은 하나입니다.”
“뭔데요?”
나는 조금 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방법은, 당신이 갖고 있습니다. 그게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지요.”
“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그를 보았다.
“당신이 나와 사랑에 빠져 내 연인이 되면 됩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후려쳐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알아들은 게 맞나? 이 사람, 다 죽어 가는 환자를 농락하는 건가? 나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드래곤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네.”
아키스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은 미친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진지했다.
“당신이 나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각인자로 선택하면 그때는 내가 살아날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나직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신의 선택에 모든 것이 달려 있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난 그냥 평범한…… 그런 사람이에요. 거기다 못 들었어요? 나, 죽을병에 걸렸다고요.”
“그것도 압니다.”
그가 우아할 정도로 묵직하게 대답했다.
“드래곤이 당신을 선택한 것도 잘 알고요.”
아름다운 공작과 방금 구운 스테이크, 그리고 저녁 식사의 식탁 주제는 세계 멸망.
그리고, 사랑.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나는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탄식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계속 설명해 주길 바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 * *
‘……세상에.’
탁―
미래의 루나가 쓴 일기장.
그 일기장을 읽던 루나는 충격적인 내용에 일기장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꿈속인데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거짓말.
그런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나와 아키스가 미래에 도대체 어떤 사이였던 거지?’
그와 자신이 아는 사이라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이건…….
그때, 쿵 하는 큰 소리가 났다.
도서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쿵!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책들이 흔들렸다.
‘제발 깨지 마라.’
루나는 뒷이야기를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바라며 일기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일기장 속의 루나와 아키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 * *
아키스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계속 설명했다.
“난, 첫 지진이 일어난 날 꿈속에서 드래곤을 만났지요. 압니까, 드래곤이 인간계에 내려온다는 건 나쁜 증표입니다. 그는 이 제국을 수호하되, 정말로 멸망 위기의 큰일이 벌어졌을 때만 드러나 수호하지요.”
나는 얼어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머리가 몹시 아파 왔다.
“그래서요? 정확히 드래곤이 뭘 알려 준 거죠?”
“드래곤은 내게 조언이자 제안을 했습니다.”
“뭐라고 했는데요?”
물어보는 내 목소리가 떨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의 신부를 만들라 했지요. 만일 신부를 맞이하게 되면, 내가 살아날 길이 있다 했습니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럼 설마,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드래곤은 신관의 꿈에도 나타났습니다. 신관은 드래곤이라면 환장을 하는데, 그자는 너무 좋아서 그날 미친 사람처럼 춤을 췄지요. 나는 그자가 실성한 줄 알고 칼로 벨 뻔했습니다.”
아키스의 얼굴에 희미한 경멸이 떠올랐다.
“그래서요?”
“드래곤은 신부를 선별하는 법을 알려 주었죠. 특정한 나이 때의 여성, 과거 조상 이력에 마법사와 번역가가 있을 것.”
“…….”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것. 그리고 무엇보다 드래곤의 마음에 드는 여인일 것.”
나는 내가 시험을 보며 걸어온 방들을 떠올렸다.
벽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각 방은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럼 그 방들이 각 조건들을 검증하는 법이었나? 그것도 마법인가? 난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내가 본 꽃은…….”
“드래곤은, 자신이 원하는 여인에게 신호를 보내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꽃을 본 사람은 여자는 당신뿐이었습니다. 다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요.”
“아픈 사람만 모집한 이유는요? 그것도 조건이었나요?”
아키스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보랏빛 눈은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원한 조건입니다. 드래곤은 인간의 건강 상태 따위야 신경 쓰지 않으니, 상관없었죠.”
그 말에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일부러 병자를 모집했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어.’
다시 숨이 차기 시작했다.
내가 쌔근거리자,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내가 몸을 기울였다. 난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난 제물이 되어 드래곤에게 잡아먹히나요?”
용의 큰 몸과 날씬한 은빛 몸체가 떠올랐다.
그건 마치 날아다니는 큰 성 같았다. 그것의 앞발에 짓이겨지고 물어 뜯겨 죽는 걸 상상만 해도 속이 매슥거렸다.
“진정해요…… 당신은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드래곤은 인간 여자의 신체에는 관심 없으니 산 채로 바쳐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겐 선택권이 있지요.”
“그럼요?”
그는 나를 보며 속삭였다.
“아까 말했죠. 당신이 나와 각인하면 된다고.”
“맞아요, 그게…… 도대체 뭐죠?”
“드래곤의 신부가 된다는 건 내 각인자가 된다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그건 아까 말했듯,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지는 걸 뜻하죠. 각인자가 생기면 내 생명을 연장할 방도가 생깁니다.”
“…….”
“그러니 내 명운은 당신이 날 마음에 들어 하냐 마냐에 달렸지요.”
그렇게 말하는 아키스의 태도는 너무 오만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내가 당신을 싫어하면요?”
“그건 그거대로 끝이지요.”
그는 설핏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그의 웃음은 검은 잉크 같다. 원하지 않는데 내 마음속에 번져 가니까.
안타깝게도 아무리 비벼도 빠지지 않는 자국이 될 미소 같았다.
“그럼 제국이 망한다면서요?”
“네. 그렇겠지요.”
그는 식탁에 바로 앉아 평화롭게 말했다. 이 세상의 끝을 보는 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때, 페니의 말이 떠올랐다. 의사들이 공작의 정신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
“……그렇게 볼 필요 없습니다. 난 미치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건 믿지 마세요.”
내 기색을 읽어 낸 것인지 그가 말했다.
“내게는 신념이 있습니다. 어차피 난 죽을 겁니다. 그건 내 몸을 부술 정도로 능력을 쓴 대가니 어쩔 수 없지요. 만일 내가 살아남는 데 무고한 여인을 강압해야 한다면 난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내 심장이 다 뛰고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내가 결정하면…… 그러니까 내가 당신 맘대로 다 하라 허락하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당분간은.”
아키스는 내게 나직이 속삭였다.
“도대체, 왜 어떻게요?”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르듯 물었다. 그는 대답을 피하듯 내 시선을 피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그때 결정하면 됩니다.”
“세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싫어요, 전부 다 말해요! 내게 선택권을 주었다면 근거도 달란 말예요!”
나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가 무서운 것도 잊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당신과 내가 각인하면, 당신은 내 병을 옮겨 받을 수 있습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래서 그는 다 죽어 가는 여자를 원했던 것이다.
공포가 오싹 돋아났다.
난 이미 충분히 고통스럽다. 더 아프고 싶지 않아. 난 그의 병까지 짊어져 줄 여력이 없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쿵! 무거운 의자가 요란하게 뒤로 넘어갔다.
심장이, 아프다. 폐가 쑤셔 온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런 게 아니니 내 말을 들어요. 당신이 고통을 느낄 일은 없을 겁니다. 난 당신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삶을 연장하도록 최선을 다해 마법을 퍼부을 겁니다.”
“……아프지 않다고요?”
“네.”
나는 실제로 그의 마법의 효과를 보았다. 하얀 빛의 마법. 그 뒤로 며칠간 나는 보통 사람처럼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내게 물었죠. 내가 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픈 사람을 모집했는지.”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어서가 아닌가요?”
“아뇨.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어서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뭐가 필요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건 내 인생을 고치는 것뿐이에요.”
난 고작 살날이 3, 4개월 남았다.
의사가 그리 말했다. 지금 이렇게 건강한 편인 것도 기적이라 했다. 아마 다음 달. 다다음 달이면 나는 누워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공국에서도 그리 진단을 받았다.
아키스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1년.”
그가 속삭였다.
“내가 가진 모든 마법을 퍼부어 당신 생명을 지금부터 1년 연장해 주겠습니다.”
그는 정녕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 눈이 떨렸다.
“……그게, 가능하다고요?”
아키스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내 몸을 좀먹고 있는 병이 나으면 나도 용의 마법 외에, 내가 가진 모든 마법을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힘을 다 써서 당신 생명을 회복시킬 겁니다. 난 그 최대 기간을 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휘멘도 있지요. 이 세계 최고의 흑마법사와 백마법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써서 당신을 보살필 겁니다.”
“…….”
“그러니, 당신에게 남은 삶보다 더 오랜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는 손해 볼 것이 없다. 생명 문제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어차피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공작의 마법으로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조금 더 명을 이어 간다면……. 그렇게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그걸 거절하면 제국이 멸망한다고요?”
“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내게 몸을 숙였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마치 숲속의 섬뜩한 맹수 같았다. 곧, 그 신비한 보라색 눈이 나를 향해 이지러졌다.
“정말 고통이 없다고요.”
“그건 내 마법사로서의 모든 걸 걸고 맹세하죠. 죽는 날까지 아픔을 줄여 주겠습니다. 내 생명을 깎아서라도요.”
“당신, 아프잖아요. 왜 고통을 없애는 마법을 스스로를 위해 안 써요?”
“마법사의 마법은 무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자신의 각인자를 위해 고통을 줄이는 마법 주문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요? 공작가의 재능은 유전되잖아요. 당신과 같은 색의 눈의 아이를 낳으면…….”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눈치가 빠르군요.”
그가 내 귀에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마법사 병에 걸린 사내는 마법사인 자식을 낳을 수 없답니다. 마력이 완전히 뒤틀려 버리는데, 정상적인 자식 생산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아키스는 찌푸린 채 짓씹듯 내뱉었다.
“난 사내입니다, 원한다면 확인도 시켜 줄 수 있는데요.”
그는 불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불임이었다. 나는 스르르 의자에 주저앉았다.
“편하게 선택해요. 난 누굴 희생시켜 이 세상을 구하고 싶지 않거든.”
“아주 잘도 말하시는군요. 세상 초연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 비꼬았다. 그는 맞받아쳤다.
“어차피 난 죽을 건데 내가 죽은 뒤가 무슨 상관입니까.”
“……정말 책임감이란 게 없군요.”
“이봐요. 책임감이 정말 없다면 그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견디며 마법을 사용하겠습니까.”
아키스가 옷깃을 젖혀 자신의 몸을 보여 주었다. 나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그의 몸 위로 섬뜩한 푸른 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몸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내가 그의 병을 안고 죽어도, 그는 내가 죽은 뒤에도 다시 혹사당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당신 병을 안고 죽어도 당신 병은 재발하겠군요.”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죠?”
아키스는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고치지 않는 한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몇 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그 결계를…… 고칠 수 없나요?”
“불가능해요. 우리에겐 열쇠가 없으니까.”
“열쇠……?”
* * *
쿵!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루나는 일기장에서 시선을 뗐다.
더 이상 큰 소리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앞이 암전되었다.
* * *
“……어?”
그녀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더듬었다. 거울을 보니 목의 검은 꽃 문신도, 그리고 자신의 잠옷도 똑같았다.
공작 부인, 루나 드 로텐베른.
틀림없는 현실의 그녀였다. 루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의 뺨까지 한번 쳤다.
‘……지금 꾼 꿈은…….’
너무 엄청난 꿈을 꿔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작 부인, 일어나셨어요?”
“으응, 들어와.”
제인의 목소리였다.
아키스가 없어서인지 침실까지 몸시중을 들기 위해 온 듯했다.
“아침 식사는 방에서 드시겠다고 하셨죠?”
“어, 그래…….”
“공작 부인? 괜찮으셔요?”
루나가 얼이 빠져 있자, 제인이 놀라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루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는 제인이 수선을 피우는 통에 겨우 세수를 했다. 제인이 갓 구운 따뜻한 토스트와 홍차, 그리고 달걀 요리를 가져왔다. 루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루나는 계속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이 현실도 꿈이 아닐까?
‘아키스가 돌아오면 내가 꿈에서 본 미래에 대한 내용을 의논해 봐야겠어.’
그녀가 본 일기장의 미래가 실제로 이뤄지는 거라면, 그럼 아키스를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뭐라고 설명하지?’
아키스, 제국이 멸망할 것 같아요.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기엔 일이 너무 컸다.
루나는 꿈에서 본 내용을 모두 적어 보았다.
태초의 결계- 고대인들이 친 결계.
결계는 지진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져서 지진이 일어난다.
결계의 붕괴 원인은 카리노 대왕의 마법.
아키스에게 자식이 없어 그 재앙을 막을 사람은 오직 아키스뿐인 상황, 그때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나와 아키스는 지난 생에 만난 적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공작에게는 ‘열쇠’가 필요하다.
‘휘멘을 다시 만나야 해. 그 남자만이 이 세상에 올 이변을 눈치챘어. 그가 옳았던 거야.’
루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정말 엄청난 꿈이었어…… 나만 불행해지는 미래라면 혼자 감당하고 말지, 이건 정말이지…….’
꿈속의 여운으로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미래의 아키스. 고독하게 죽어 가던 칼날처럼 아름다운 공작님, 그런 그를 생각하자면 속이 오싹했다.
‘아키스가 그렇게까지 쓸쓸한 미래를 맞이할 줄이야.’
루나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했다. 루나의 낯이 좋지 않자 식솔들은 크게 염려했다.
‘꿈속에서 아키스가 말했지. 처음 지진이 일어난 날 공작가의 식솔들 대부분이 죽었다고…….’
꿈속 일기장에서 저와 아키스가 머무르던 수도의 건물. 그 건물에는 아키스에게서 떨어질 리 없는, 이를테면 집사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
혹시, 어쩌면.
루나의 등골이 오싹했다.
‘아아, 답답해. 아키스가 빨리 돌아 왔으면…….’
심장이 계속 뛰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루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공작 부인, 여쭈어 올릴 일이 있습니다.”
문 밖의 목소리는 알렉이었다. 루나는 숄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요?”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급작스런 손님이 방문해서요.”
누구지? 오늘 올 사람이 없을 텐데.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손님의 이름에 루나의 눈이 커졌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갈 터이니, 기다리고 있으라 전하세요.”
“직접 만나려 하십니까?”
“남편이 없는 집에서 안주인이 손님맞이를 하는 건 당연하지요.”
루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종을 쳐 제인을 불렀다.
* * *
수수한 드레스 차림의 루나는 응접실로 급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손님, 휘멘은 그야말로 그다운 모습으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흙 묻은 부츠, 테이블에 올라간 발. 삐딱하게 기대앉은 몸. 그의 몸에서는 뒷골목의 사내다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끝이 치켜 올라간 눈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사막 한가운데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육식 동물 같았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순식간에 반말로 돌아간 그의 말투에 루나의 배 속이 오싹했다.
그녀는 직감했다.
아, 이 남자가 다 눈치챘구나.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자리에서 성큼 일어나 루나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 루? 쪽지를 남겨 두고 간 건 꽤 깜찍했어.”
루나는 아키스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만큼의 절망은 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왜 이제야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루나는 침착하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바람을 좀 쐬면서 대화해야겠어요. 머리가 좀 아파 오려 하거든요.”
* * *
루나는 알렉에게 정원에 다과를 준비해 줄 것을 일렀고, 식솔들이 급하게 정원 한가운데 다과를 차렸다.
“이제 내가 직접 할 테니, 모두 물러가세요.”
“……하지만…….”
“나를 남편 없이는 손님맞이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진 않겠지요?”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결국 알렉은 곤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인사하고 나갔다. 루나는 그의 잔에 잘 우려낸 홍차를 직접 따랐다.
“너, 도대체 누구냐?”
루의 모습이었다가, 방금 집사를 설득해 보내는 모습은 완벽한 귀부인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휘멘은 혼란스러워졌다.
루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휘멘의 분위는 아키스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키스의 느낌이 베일 것 같은 온점이라면, 그는 이미 타고 있는 발화점이었다.
“그때, 병원에서 눈치챈 거예요?”
“그 쪽지를 보고도 모르면 바보지. 단서가 그렇게 확실한데.”
“아키스는 결계 때문에 나만큼 고대어를 하는 여인이 절대 태어나지 않을 거라며 날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다르군요.”
루나는 작게 웃었다.
그날, 아키스를 구하기 위해 제가 가진 능력을 드러낸 걸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같은 상황이 와도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
다만 휘멘이 입을 다물어 줄지, 그것이 문제였다.
휘멘이 차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루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정말로 고대어를 할 수 있어? 네가 루가 맞나?”
이제 숨기기엔 늦었다.
루나는 휘멘을 마주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휘멘은 탄식했다.
“정말 연구거리군.”
“…….”
“내 생각이 맞았어. 큰 이변이 일어날 터이니 여러 징후가 나타나는 거지. 예를 들면 고대어를 하는 여자라든가. 그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맞더군.”
휘멘은 다행히 그녀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루나는 말없이 그의 의중을 가늠했다. 그때 휘멘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키스도 알아?”
“네.”
“처음부터?”
“그건 아녜요. 그도 당신과 똑같죠. 내게 속아 왔어요, 하지만, 실레노스의 습격으로 숲에서…….”
“마법진의 수식을 풀기 위해 네가 메모를 남길 수밖에 없었고, 그도 그때 알았군. 알겠어.”
휘멘은 이마를 누르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괜히 기다렸네.”
“네?”
“아키스가 모르는 줄 알고 널 만날 타이밍을 기다렸다고. 알았다면 바로 이 저택으로 찾아와도 됐잖아?”
“왜 내가 당신을 만나요?”
“의논하기로 한 일, 잊었어? 거기다 난 루가 필요하다고 몇 번을 말해.”
“그건…….”
루나는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휘멘, 당신. 설마 아키스가 내 비밀을 아직 모른다고 생각하고 숨겨 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군요.”
“…….”
루나는 그의 침묵에서 긍정을 읽었다.
“혹시 오늘도 아키스가 집에 없는 걸 알고 온 건가요?”
“……그날 숲의 정화 의식이 실패했으니 그 녀석이 당연히 거기 갔을 테지. 정보야 게이트 문지기들에게 돈 좀 쥐어 주면 금방 얻는 거고.”
“왜…… 그렇게까지…….”
“이봐, 네가 여자라는 걸 확실히 알았잖아.”
휘멘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내가 갑자기 찾아와 네 정체를 들이대면 널 협박하고 수작 부리는 것처럼 보이잖아. 난 여자를 괴롭히는 짓은 안 해!”
“…….”
이번엔 루나의 맥이 조금 풀렸다.
그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순진한 사람에 가까웠다.
“안 그래도 의논할 일이 있어요.”
루나는 놀란 심장을 눌렀다.
그녀는 휘멘에게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젠 도리가 없다. 그를 한배에 태우는 수밖에.
꿈속의 일기장.
미래의 휘멘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흉조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지? 너처럼 멀쩡한 여자가 무슨 흉조야. 흉조는 다리 세 개 달린 새나 머리 두 개 달린 괴물 사슴 같은 걸 말하는 거 아냐? 징후나 현상이라면 모를까.”
루나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말하는 걸 보니 당신에게 의논해도 될 것 같네요. 이야기가 좀 길어요”
루나는 미소가 가신 얼굴로 그를 진지하게 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꿈에서 본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키스는 내일이나 되어야 올 거야. 마법사들의 근간을 흔들지도 모르는 이야기이니, 아키스가 있을 때 말하는 게 낫겠어.’
휘멘은 좋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가 루나가 알려 주는 사실들을 용인하지 못하면 어디로 튀어 버릴지, 그게 문제였다.
‘마법사들이 이성을 잃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했으니…….’
그를 육체적으로도 제어할 수 있는 아키스가 있는 자리에서 의논하는 것이 옳다, 루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내일 모레 아키스가 올 거예요. 스틸본 숲이 거리는 몹시 멀지만 게이트 바로 옆이라 저녁 전에는 도착할 거고요.”
“……그래서?”
“그가 오면 당신이 내 비밀을 알게 된 일을 의논해 봐요.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주겠어요. 당신이 놀랄 만한 정보고, 믿을 만한 정보일 거예요.”
휘멘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줄 정보가 있단 말이야?”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충격적이고 많은 정보라 문제였다.
“답답해 미치겠군. 뭘 더 기다리라는 거야?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건데? 저번에 내게 한 경고는 도대체 뭐지?”
그가 거칠게 말했다.
루나는 그가 정말 기센 사내라는 생각을 했으나, 한 번 움찔했을 뿐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본 채 턱을 추켜올렸다.
“기다려요, 그동안 여기에…… 공작가의 손님으로 머물러 주면 좋겠어요. 당신이 며칠을 할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거예요.”
휘멘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루나는 혀를 찼다.
“참아요. 기다리라니까.”
휘멘은 루나가 저를 강아지 다루듯 하자 움찔했다.
“그럼 이것만 지금 물어보자. 정말 일곱까지 고대어를 할 수 있나?”
“가능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도 왜 그런 재능이 생긴 건지는 몰라요.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나는, 전부 읽히고 머릿속으로 들어와요. 처음엔 일곱 개의 각 언어를 구분할 줄도 몰랐는걸요.”
휘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진지하게 보았다.
“그럼 나와 어디 좀 갈 데가 있어.”
“네?”
“내가 찾아낸 유적에는 앞으로 닥쳐올 재앙에 대한 관측과 함께, 일곱 개의 언어를 한꺼번에 풀어야 하는 암호로 된 방이 있었어. 그리고 여러 명의 번역가를 데려가서 암호를 푸는 데 성공했지.”
“그런데요?”
“그 너머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어. 그렇게 정교하고 어려운 함정으로 가득했던 던전의 마지막 방이 누군가를 골탕 먹이려는 것처럼 텅 비어 있다니. 이상하지 않아?”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하군요.”
불현듯 루나의 머릿속에 붉은 책에 대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붉은 책은 아키스가 여러 차례 사용법을 찾아내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그 책이 암호를 푸는 방법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가 책에 피를 묻히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혹시 어떤 사람이 그 일곱 개의 고대어를 한꺼번에 할 줄 안다면, 그때 정말 암호가 해독되고 유적의 진짜 비밀 방이 열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렇게 예측하는 거죠?”
“이해가 빠르군. 역시 똑똑해, 루.”
휘멘이 비꼬듯 말했다. 그러나 눈 안에는 뚜렷한 감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던전은 서부 던전 지대에 있지요? 거긴…….”
서부는 마법사들과 용병의 도시였다.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 그것도 귀부인의 몸으로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유적 지대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잡혀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공작 부인의 신분을 빌어 행차할 수도 없고…….’
루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유적이 혹시 결계와 관련이 있다면…….’
꿈속에서 보았던 아키스와 휘멘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결국 그들이 이 세계를 지키려면, 그 ‘결계’라는 것. 그것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뭐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거기 뭐가 있다고 어떻게 확신해요?”
“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뭔가가 있을 것 같아.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것처럼.”
그 말에 루나의 배 속이 서늘했다.
‘……일기장 속에서…….’
그곳에서 휘멘은 유적지를 떠돌고 있었다. 지금처럼.
‘휘멘이 전생과 현생에서 찾아 헤매던 곳이라면, 만일 그가 일기장 속에서 언급한 그 유적이 지금 이 유적이라면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어. 그는 거기서 분명히 무언가를 찾아낼 거야…….’
루나는 테이블을 손으로 꼭 쥐었다.
“아키스가 오면 그것도 의논해 봐요. 하지만 내가 서부에 가는 일은 쉽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받아들인다고 해도, 세상은 그렇지 못해요. 이번 일만 해도…… 내 정체를 안 게 다른 마법사였다면 내 일신은 몹시 위험했겠지요.”
루나는 휘멘에 대해 반은 신뢰했지만 반은 아직도 불안했다. 이 남자가 어디까지 정체를 숨겨 줄까. 믿을 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건 그저 감이었다.
“당신의 요구를 들어 주려면 확신이 필요해요. 내가 당신에 의해 마녀로 몰려 잡혀가지 않으리란 확신요.”
루나가 조금 풀이 죽어 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
휘멘이 이상하게 쩔쩔매며 은근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혹시, 내가 널 무섭게 했나?”
“…….”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이 남자. 날 루로 대해야 할지 루나로 대해야 할지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건가?
“그럴 거면 차라리 예의를 지키지 그래요……? 공작 부인 대접까진 아니라고 해도, 난 당신 친구의 부인이에요. 내가 루가 아니라 그냥 루나라면 당신이 이렇게 대하진 않을 거 아녜요?”
루나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려워하든지 소년처럼 서슴없이 대하든지 하나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또 예의?”
휘멘이 인상을 살벌하게 구겼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라온 루나의 장갑 낀 흰 손을 보았다.
잠깐. 루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 정말. 손등 키스 말고. 어쩌면 이렇게 쓸데없는 것만 말을 잘 들어요?”
진짜 말을 잘 듣는 건지 아닌 건지. 휘멘의 뺨이 괜스레 달아올랐는데,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요란하게 화가 난 척했다.
“진짜 까다로운 여자군.”
“그러니까, 여자 취급인지 남자 취급인지 하나만 골라 하라고요.”
휘멘은 루나의 대답에 묵묵히 침묵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로 확신을 주면 날 믿을 건가?”
“네.”
“그럼 내 제자가 될 마음은 영영 없겠군.”
“……아니, 편견 없이 대해 주는 건 좋은데 최소한의 상식을 가져 줄래요? 내가 어떻게 당신 제자 노릇을 하겠어요.”
루나의 지금 신분은 대귀족의 부인인데 그녀가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랬다가 피 보는 건 그녀였다.
“네 실력이 탐나는 걸 어떻게 하나.”
휘멘이 우울하게 말했다. 루나는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뭐, 상황이 정리되면 친구로서 번역을 가끔 도와주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잠깐.
휘멘은 루나의 엄청난 번역 실력에 대해 떠올렸다.
“……그럼 아키스는 이제 네 번역 실력을 독점하는 건가? 나쁜 놈. 이런 운 좋은 놈. 이런 천재를 독점하다니…….”
“……칭찬은 고마운데, 당신이 지금 욕하는 사람이 내 남편이거든요?”
루나는 일단 결혼은 상대의 실력을 독점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지적해 줄까 하다 참았다.
아키스가 샘이 나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휘멘에, 루나는 심각한 상황도 잊고 웃을 뻔했다. 몸만 컸지 어린애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루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내 신뢰를 얻고 싶으면 아키스가 올 때까지 얌전하게 굴어요.”
“알았어. 어떻게 얻으면 되는데?”
루나는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흑마법사는 약학의 대가라 했다.
“‘마르시엘라의 샘물’이라는 거 들어본 적 있어요?”
“그건 어디서 주워들었지? 약초 이름이야. 지금은 사라진 고대 약초인데, 독 꽃인 라스텔라 꽃의 독을 뺀 후 가루를 정제하면 대체할 수 있어.”
루나의 입이 벌어졌다. 루나가 고대 약을 복원하지 못한 이유는 핵심 재료가 뭔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마르시엘라의 샘물은 핵심 재료였다.
“그래서 신뢰는 어떻게 얻으면 되는데?”
루나는 헛기침을 했다.
“가만있어요. 지금 잘돼 가고 있으니까.”
“…….”
* * *
루나는 예전에 응접실이었던 방 하나를 약초실로 개조했다. 그 방에서는 언제나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휘멘은 루나의 약초실을 구경하고 감탄했다. 약초 다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래서, 고대어 천재에 약도 만드신다?”
“친정이 약재상 집안이었어요. 내가 철들기 전에 정리했지만.”
“무슨 약을 만드는데?”
루나가 배합 중인 약에 휘멘이 관심을 보였다. 루나는 레시피를 보여 주었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레시피인데.”
“이건 백옥환, 이건 장미 연고라는 약이에요. 둘 다 여인에게 최상의 효과를 발휘하는 훌륭한 약이죠.”
“……어떤 곳에서 찾았지?”
“고대어 책이죠. 관련 고대어 책을 구하고 싶어요. 고대 약에 관심이 있거든요. 이런 연고나, 감기 약 같은 실용적인 거요.”
“그건 구한다고 쉽게 구해지는 게 아냐.”
“왜요?”
“고대어 마법책이 그리 많은 이유를 모르나?”
“몰라요.”
“마법사의 던전에서 발견되는 책들은 거의 마법책들이지. 그리고 마법사의 던전에는 대부분 보존 마법이나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 책의 보존이 잘돼. 그런데 이런 새로운 고대 약학의 레시피는 구하기 힘들어. 특히 여성을 위한 약에 대한 서적은 발견된 적이 없지. 혹시 그 책을 구할 수 있다면 나도 번역본을 보고 싶은데.”
루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고대어로 된 일반 교양책은 가치도 낮고 구하기 쉽잖아요.”
“약학책은 마법책만큼이나 귀중해. 미용약 책이라니, 주력 분야는 아니라도 배우고 싶군.”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붉은 책이 대단하구나.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그 책에 저장된 정보들은 생각보다 정말…… 엄청난 것이 아닐까?’
* * *
그 무렵, 새벽부터 일어나 동굴 안에서 정화 의식을 하던 아키스는 아침쯤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뻐근하고 따끔한 감각. 아키스는 이 감각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내가 무슨 일 때문에 놀란 거지?’
몸이 다치거나 큰일이 일어난 거라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번 감각은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키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졸며 같이 기도하던 황태자가 따라 벌떡 일어났다.
“아키스? 무슨 일 있나?”
“아내를 좀 보러 가야겠습니다.”
“지, 지금? 조금만 버티면 정화 의식이 끝나지 않나.”
“그래도 지금 가 봐야겠습니다. 전하, 붙잡지 마십시오.”
말 그대로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아키스는 냉엄하게 뿌리쳤다.
“……도대체 공작 부인은 갑자기 왜?”
아키스는 각인에 대해 설명할 길 없어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안 하던 놈이 하면 더한다더니, 신혼의 공작이 미쳐 버린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의 머리가 아찔했다. 영문을 모르는 황태자는 두 번이나 중요한 행사를 깨려는 아키스를 붙잡고 거의 애걸복걸하며 말렸다.
“아니, 기도는 마치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제발 좀 참게. 아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
“안 그래도 그대가 못 말리는 사랑꾼인 것 온 황가에 소문 다 났네. 주책도 그 정도면 민폐네! 아내는 모레 만날 수 있잖나!”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내일 사냥을 포함한 일정은 모조리 취소입니다.”
아키스는 이를 갈며 말했다.
* * *
아키스는 본디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제 권리인 양 이번에도 게이트 담당자를 독촉한 탓에 낮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보를 보내는 것보다 직접 가는 것이 빠를 것 같아 마차조차 답답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런 그가 저택에서 본 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루트베키아 뿌리는 사선으로 정리하면 좋아.”
“알겠어요. 이렇게? 그런데, 정말 신경 쓰이네요. 이 로웨나의 눈물이라는 재료가 뭘까요.”
“그건 나도 모르는 재료인데 정말 궁금한…….”
집사가 루나가 약초실에 있다는 말을 해 주었고 그는 급히 그곳으로 향했다. 안타까운 점은 그가 몹시 서두르느라 집사에게서 급작스런 손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약초실에 도착하자마자 본 건, 루나와 휘멘이 고개를 숙이고 속닥대는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고대 약에 대한 대화를 은밀하게 나누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광경은 아키스의 머릿속을 폭격하기 충분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키스가 문가에 서서 이를 갈며 말했다. 루나와 휘멘이 고개를 들었다.
“아, 아키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빨리 왔어요!”
루나는 아키스를 보고 반색했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의미로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참이었다.
“네. 루나.”
아키스는 루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주변을 감싼 냉랭한 분위기에 루나는 움찔했다.
“샤프롱이 저기 있는데.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니니 안심하라고.”
휘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 지목된 샤프롱, 문간에 둔 의자에 앉아 자수를 놓고 있던 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아내를 대상으로 상상 운운해? 건방진 놈.”
아키스가 이를 갈았다.
“그런 게 아니라. 음. 아키스, 휘멘이 손님으로 왔는데…….”
굳이 변명을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루나도 아키스가 밀폐된 곳에 다른 여자랑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싫었기 때문이다.
“비아, 이제 샤프롱은 됐습니다.”
아키스는 이성을 가누기 위해 가급적이면 온화하게 속삭였다. 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한 번 굽히고 나갔다.
“휘멘, 일단 이따가 봐요.”
루나가 휘멘에게 손짓하자 휘멘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몹시 순종적으로 그 말을 따랐다.
그걸 보는 아키스는 더 속이 터졌다. 저놈이 언제 이렇게 남의 부인을 따르게 됐지? 원래 들개 같은 치라 누굴 따르지 않는 휘멘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아키스, 할 말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일인데, 읍…….”
그러나 루나의 말은 정리되지 못했다. 아키스가 급하게 그녀에게 키스하며 그녀를 안았기 때문이다.
아키스는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빨면서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그녀를 약초를 정리하는 용도의 두껍고 큰 테이블 위로 한 번에 올렸다. 그의 손이 루나의 허벅지로 파고들어 가터벨트에 손가락을 끼우고 꾹 눌렀다.
루나의 드레스 자락이 어지러운 약초 사이로 흩어지며 부채꼴로 펼쳐졌다. 얇은 천 한 장으로 가려진 허벅지 사이가 다 드러났다. 루나는 뺨을 훅 붉혔다.
“아키스, 밖에 사람이 있어요…….”
그는 심술을 부리듯 루나의 아랫입술을 아플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 놓았다.
“앗……!”
그리고 큰 손으로 그녀의 배를 쓸고 쇄골을 타고 올라와 턱선을 야릇하게 손등으로 쓸어 올렸다. 루나는 솜털이 다 쭈뼛 서고 다리 사이에 힘이 풀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3일 만에 보는 건데.”
“그래서 내 성에 찰 때까지 인사한 건데.”
그가 뻔뻔스레 말하며 루나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끌어내렸다.
그 위로 드러난 까만 꽃에 이를 세우고 쪽하고 키스하고 나서야 떨어졌다. 그가 깨물고 문 피부가 달아올라, 다리 사이에 저릿저릿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에도 인사했으니 이제 됐습니다.”
루나는 붉어진 눈으로 원망하듯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툭툭 쳤다.
“……이 남자가 정말…….”
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뚝뚝 흐르는 이 남자의 못 말리는 독점욕을 어찌해야 할지.
루나는 공연히 붉어진 뺨을 손으로 누르며 일어났다. 낮에 이 정도면 오늘 밤엔 큰일 났다 싶었다. 아키스는 루나를 끌어안았다 놓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했어요. 어제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 갑자기 마음속이 찌릿하더군요.”
“아……. 알 것 같아요.”
휘멘이 제 정체를 안다 했을 때. 그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각인이라는 것은 순간의 격렬한 감정을 상대에게 대중없이 전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때 놀란 루나의 기분이 아키스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어 급하게 달려왔는데…….”
아키스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본 모습이 루나가 휘멘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니 그가 서운할 만했다. 루나는 달래듯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루나, 혹시 휘멘이 당신을 괴롭힌 건 아니지요?”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당신에게 의논할 일이 있어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가능하면 휘멘도 같이 이야기 했으면 좋겠고요.”
아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나는 그의 볼에 쪽 키스했다.
“내 말 믿어요. 당신도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무슨 일이죠?”
“휘멘이 옳았어요.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고요. 그리고 당신, 내 꿈을 믿는다 했죠?”
루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키스는 점점 더 영문 모를 기분이 되었다.
* * *
그리하여 기묘한 삼자대면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키스는 옷을 갈아입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휘멘을 보고 있었고, 휘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녀석이 당신 정체를 눈치챘다고요.”
“……네. 당신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그러긴 했죠.”
스틸본 숲에서 쪽지를 본 휘멘이 무언가를 눈치챌까 봐, 아키스는 일부러 새틴을 잡는 임무를 주며 휘멘의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 이놈이 엉큼하게 다 눈치채고 제 아내를 감싸 준다는 구실로 입을 다물고 있었을 줄이야.
“잠깐, 내 설명부터 들어요. 지금 진짜 진지해요. 다가올 일식 날이 언제죠? 혹시 알아요?”
“2주 후.”
“2주 후.”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신문 기사로도 날 겁니다. 일식 날은 신성한 날이니까요.”
그리고 아키스가 덧붙였다.
“……나만 일식 소식을 몰랐나요?”
“일식 날은 마력 환경이 미세하게 변합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요. 그뿐입니다, 루나.”
아키스가 차분하게 설명했으나, 그 말을 들은 루나의 얼굴은 계속 창백할 뿐이었다.
일기장 속에서 미래의 루나가 말했다. 100년만의 일식 날, 미세한 지진이 일어났다고. 그 후 오랜 잠복기를 거쳐서, 미래의 대지진이 일어난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그게 100년만의 일식인가요?”
“맞아.”
“그게 지금 중요한가?”
휘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루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패닉에 빠진 사이 아키스가 휘멘에게 턱짓했다.
“그리고, 네 용무는?”
“네 아내와 함께 서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휘멘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절망적인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키스에게 휘멘이 바로 그렇게 쏴 버린 순간 루나는 탄식하고 싶었다.
“잠깐 휘멘…….”
루나가 말리기 전에 아키스가 폭발했다.
“내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건 뭐야? 이 자식이 미쳤나. 감히 내 아내를 협박하려 들어? 오늘이 네 버릇 고치는 날이구나.”
“그게 아니라 내말 좀…….”
루나는 중간에서 제가 먼저 중요한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 둘은 당연하게도 듣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서야. 네 아내도 협조하기로 했다고. 이상한 뜻은 아니라니, 넌 날 뭘로 보는 거냐?”
“아주 정확히 보고 있지. 그리고 아내가 정말 너와 협조해서 뭔가를 하기로 했다면 나랑 먼저 의논했겠지. 거론할 만한 가치도 없는 일이군.”
휘멘이 발끈했다.
“너 유능하고 잘난, 귀여운 번역가와 결혼했다고 기고만장한가 본데…….”
“감히 내 아내를 귀엽다고 생각했어? 역시 버르장머리가 없군.”
……왜 생각을 못했을까. 아키스와 휘멘이 한자리에 앉아 있는데 싸움이 안 날 리가 없다.
‘아키스는 왜 휘멘 옆에만 있으면 이렇게 어린애가 되는 걸까.’
루나는 혀를 차고 싶었다. 거기다 귀엽다 어쨌다는 뭐지? 민망해서 머리가 다 어질했다.
그녀가 피곤함을 느끼는 사이, 결국 폭발한 아키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다과용 나이프를 한 손으로 휘멘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야 말았다.
팽팽한 분위기가 응접실을 물들였다. 다행히 휘멘이 앉은 의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등받이가 두껍고 튼튼한 고가구였다.
나이프는 휘멘의 바로 옆 귀에 꽂혔다. 휘멘은 순간 식은땀이 흘러 소리 지르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그리고 몇 초 후, 휘멘이 성질의 성질은 바로 폭발했다.
“이게 무슨 짓…….”
그러나 이번엔 루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가능한 한 또렷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휘멘 말이 다 맞아요, 아키스!”
“……네 당신은 정말 귀엽죠. 그런데 저놈 입으로 그런 말을 들으면 당신 귀가 썩습…….”
“그게 아니라, 휘멘 말대로 제국이 멸망한다구요!”
루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두 남자는 침묵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두 마스터가 이렇게 싸울 건가요? 내 말을 들어 봐요.”
“…….”
루나는 아키스를 바라보았다.
“아키스, 휘멘에게 일기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건…….”
아키스는 움찔했다.
그 일은 너무도 은밀한, 비밀스런 일이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소중한 비밀을 감춰 주고 싶었다. 아내의 미래의 불행은 그녀에게 상처였던 일이기도 했으니.
“말해야 해요. 진지한 일이니.”
루나는 아키스를 또렷이 보았다.
루나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한 아키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휘멘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미래 예지의 꿈이라고?”
휘멘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집중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꿈을 꾸었어요. 아키스도 모르는 새로운 내용이에요…….”
그리고 루나는 자신이 꿈에서 본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휘멘과 아키스는 집중해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그럼, 제국민들이 전부 카리노 대왕에게 속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이 가장 충격 받은 부분은 ‘태초의 결계’가 카리노 대왕의 과실로 균열이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그럼 에리스에 대한 전설도 모두 거짓말이라고?”
루나는 확신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런 일이 가능해?”
“가능은 하다. 애초에 이 땅이 지진이 일어나는 땅인데 태초의 결계가 그걸 누르고 있는 거라면……. 마법사들을 위해 만든 결계라는 말 자체가 거짓이라는 방향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론상으로는…….”
그들은 언제 싸웠냐 싶게 진지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들 사실 진짜는 친한 사이죠.’
루나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이럴 거면서 아깐 왜 싸운 건지.
결국 둘은 동시에 루나를 바라보았다.
“……증명할 수 있나요, 루나?”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미래의 공작님이 내게 공작가의 비밀도 하나, 알려 주었어요.”
“그게 뭐죠?”
“공작 가문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예요. 만일…… 보랏빛 눈의 직계 자손이 없으면 방계의 어린아이 중 하나가 보랏빛 눈으로, 그러니까 드래곤의 계약 계승이 가능한 체질로 발현할 것이란…… 그런 사실요. 그래서 꿈속의 일기장에서 당신은 방계 가문의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었어요.”
루나는 작게 말했다.
아키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공작가의 유전은 직계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보라색 눈의 후계자가 태어난 상황에서 그 후계자가 죽으면, 피를 이은 다른 후계자가 각성한다. 그건 아키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의 부친이 죽기 전에 그에게 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우수한 아이가 아니면 죽이려 했지. 다행하게도 넌 대단한 후계자였고. 사실 방계 아이들이 더 다루기 쉬웠거든. 하지만 방계에서 아이를 빼앗아 와 양자 삼는 건 방계 가문에 힘을 실어줄 수 있어 하고 싶지 않았지. 방계 놈들은 결국 제 가문으로 돌아가려 하거든. 정말 다행이다, 이 긴 세월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은 공작가의 직계 혈통을 이을 수 있어서.’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직계 가문의 후계자는 지금 아키스뿐이지만 공작가의 방계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휘멘, 당신은 미래에서 황가의 사람들을 처형하자고 주장하고 있었죠. 당신들은 미래에서도 싸우고 있었다고요.”
루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리고 미래의 아키스 당신은 내게 각인을 종용하고 있었죠. 당신은 분할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또 고압적인 남자였어요.”
둘은 조용히 침묵했다. 루나는 미소 짓고 말했다.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압도된 듯 루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증명할 방법이 있어요. 방금 당신들이 말해 준 대로, 일식 날에 모든 걸 알게 될 거예요.”
* * *
그리하여 2주 후, 신전에서 예지한 일식 날이 왔다. 그동안 아키스와 휘멘은 뭐 이렇게 다양한 것으로 싸울 수 있냐 싶은 주제로 언쟁했다.
“그때 일은 네가 잘못한 거라는 거 인정해.”
“내가 왜? 그런 놈을 살려 둔 네가 멍청한 거다.”
“그 여자를 잡아 오면 인정한다고 하지 않았나?”
“새틴을 놓친 건 너야. 덕분에 수배령까지 내려야 했지.”
휘멘은 이를 갈았다.
사실이었다. 실레노스를 살려 둔 것이 비인간적인, 냉정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새틴이라는 여자를 잡아다 주기로 했었다.
당시, 새틴은 이미 도망친 상태라 찾을 수 없었고 새틴과 실레노스가 지내던 동굴의 일회용 워프 게이트를 찾아 아키스에게 전보로 알렸다. 휘멘은 그 일에 대해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 자신이니 잡은 거나 다름없다 우기고 있었고 아키스는 그건 아니라 딱 자르고 있었다.
“마법사라면 약속을 제대로 지키도록.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아, 혹시 죽은 자를 살려 낼 비술을 연구한다면 환영이야. 실레노스를 살려 내서 감히 내 아내의 몸에 손을 댄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거든. 가능하면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야.”
그때 루나가 물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들은 새틴에 대한 언쟁을 루나가 다가오자마자 뚝 멈췄다.
“그보다, 일기장의 내용을 해독하는 데 더 집중하면 어때요? 오늘은 무슨 일로 싸웠는지 모르겠군요.”
루나는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 둘은 맹렬한 2차전에 돌입해 이내 일기장의 내용–결계에 대한 것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작가의 정원에 나와 있었다. 혹시 지진이 일어나면 차라리 탁 트인 야외가 안전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공작가의 사람에게는 지하실 대청소를 지시했다. 혹시 생각보다 지진 규모가 클까 봐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올해는 조금 이른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신전에서는 개기일식이 점심 전에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정원에 나와 일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 일식은 수도 중심부 전체에서 보일 거래요.”
혹시 아주 지진이 미약할 경우에 대비해 루나는 물그릇을 준비했다. 그리고 물그릇에 작은 방울을 띄웠다. 지진이 일어나면 방울 소리가 나리라. 루나는 물그릇을 손으로 건드리며 턱을 괴었다.
“이봐, 시작하는 것 같아.”
휘멘이 중얼거렸다.
과연 태양이 신비하게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듯, 태양이 가려진다. 그 광경만큼은 몹시 신비해 루나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지배했다.
“……아무 일도 없네요?”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일기장의 내용이 다 맞는 건 아닌…… 건가?’
그럼 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니 좋을 것이다.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휘멘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면, 오늘 저녁쯤에 일어나는 건가?”
그 순간이었다.
시야가 흔들리며 몸에 진동이 왔다.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물그릇에 담긴 방울이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그 소리가 루나의 정신을 깨우듯 귓가를 두드렸다.
“……정말, 당신의 말이 맞았군.”
아키스는 탄식했다.
* * *
[원인 불명의 지진, 미약한 강도라 사상자도, 사망자도 없어.
그러나 화산조차 없는 제국 최초의 지진이라, 원인 규명 중에 있다……. 이는 제국 역사상 최초의 지진이다.]
그날 저녁, 제국 신문 1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호외 신문을 보는 루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키스와 휘멘은 조용했다.
“내 꿈 없이도 휘멘은 이변을 독자적으로 눈치챘어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난 휘멘이 말하는 유적이 신경 쓰여요. 내가 한번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요.”
루나는 아찔한 말을 내놓았다. 아키스는 딱 잘라 말했다.
“절대 안 돼.”
“돼요. 지금 우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고요.”
루나가 혀를 찼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휘멘은 아키스의 심기도 모르고 눈치 없이 반색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휘멘을 보았다.
“멸망론을 연구한 고대 학자의 유적지라면 분명 무언가 쓸모 있는 단서가 있겠지요. 내가 직접 암호를 풀어 보고 싶어요. 휘멘, 길 안내를 해 주겠지요?”
“물론이지.”
아키스는 이마를 짚었다.
“당신 정체를 숨기기로 우리 약속했잖습니까. 그건 위험해요.”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난리가 나면 우린 다 큰일인 걸요. 지금 당장의 안전이 문제겠어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휘멘의 감을 믿기도 하고요.”
아키스는 조심스럽게 루나를 설득했다.
“……루나, 나와 휘멘이 다녀오겠습니다. 먼저 철저히 조사한 후 위험한 것이 없으면 그때 당신이 가도 늦지 않아요. 당신은 서부를 모릅니다. 강도도 있고, 현상금 사냥꾼도 있습니다. 야영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알아요. 난 고서점에서 일했고, 서부를 드나드는 마법사 손님도 많이 왔었거든요.”
“아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건 다릅니다. 서부 여행은 스틸본 숲으로 가는 여행과 달라요. 서부 도시는 거칠고 사막 안은 열악합니다. 때로는 며칠간 발로 걸어 사막을 헤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가면 눈에 띌 거고요.”
루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공작 부인이 간다면 그렇겠지요.”
방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아키스는 이마를 감싸 쥐고 싶어졌다. 루나가 안 간다면 루가 간다는 뜻이었다.
“루의 모습으로 가는 건 안…….”
“절대 안 된다는 말하기 없기. 안 그러면 당신이 미래에 나한테 각인하려 한 일로 화낼 거예요.”
루나는 재빨리 아키스의 말을 끊었다.
아키스가 침묵했다. 그는 최근 자신이 일기장 속의 미래에서 루나에게 혹시 무언가 더 잘못했을까 고민하느라 꼼짝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낮에만 꼼짝 못하지, 밤에는 아주 사람을 기절시킬 때까지 몰아붙이긴 했지만.
한편 부부의 속사정을 모르는 휘멘은 오늘도 부드럽고도 단호한 태도로 아키스를 휘두르는 루나에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하지만 휘멘도 걱정스레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을 비울 핑계는 제대로 만들어 둬야겠지만요.”
아키스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핑계 문제가 아니에요. 몸에 티끌만한 상처라도 나면 난 미쳐 버릴 겁니다. 난 당신이 안전하길 바라요.”
“왜 티끌만큼이라도 다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두 명이 옆에 있을 텐데. 두 분은 나와 함께 여행하며 누구 하나 호위할 자신이 없나요?”
차분하게 말한 루나의 말에 아키스는 더는 반박할 수 없어 이마만 감싸 쥐었다. 그리고 휘멘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치가 없었다.
“내 모든 걸 걸고 널 지키지.”
“좋아요, 아키스, 당신은…….”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 아내에게 닿는 것도, 오래 쳐다보는 것도, 미소를 받는 일도 모두 금지하지만 아내를 지키는 일 하나는 허락하지.”
“당신도 도와 줄 거죠?”
“내 목숨이 당신 건데, 별 걸 다 묻습니다.”
아키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루나는 손뼉을 쳤다.
“그럼, 이제 떠나 있을 구실만 만들면 되겠군요.”
아키스는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나와 휘멘은 연구 목적으로 지방에 잠시 떠나 있는다 하고, 당신은 그사이 동부 신전에 기도를 하러 간다 합시다. 달의 신전이면 되겠군요. 거기라면 의심 받지 않을 겁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루나는 뺨을 붉혔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말한 대로 공작 부부가 당분간 집을 비울 것임을 그날 바로 식솔들에게 알렸다. 여행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달의 신전에 기도하러 간다는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건 루나만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젊으세요. 비록, 공작 부인의 역할이 몹시 중요하긴 하지요.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것이 제국을 번영하게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압박감을 느끼고 계신 줄은……. 아직 신혼이시지 않습니까. 결혼 4, 5년차에 아이가 생기는 부부도 허다하답니다.”
아이가 없는 유부녀가 달의 신전에 기도를 하러 간다. 그 말인즉, 회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한다는 뜻이었다.
루나가 남장 하고 서부로 몰래 나간다는 것을 모르는 식솔들은 거의 통곡을 했다.
특히 비아는 거의 기절 수준으로 충격을 받았다. 황금하고도 바꾸지 않을 그들의 귀하신 공작 부인께서 신전 기도를 갈 만큼 임신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식솔들에겐 충격이었다.
“아아, 우리 부인께서 그렇게 고민하시는지도 모르고.”
옆에 서서 알렉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까지 꺼내 이마를 닦았다.
“……다들 진정해요…… 언젠가 한번은 기도하러 가려고 했어요. 아키스가 마침 출장을 간다기에 이참에, 라는 생각에 가는 거라구요.”
루나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에둘러 말했다.
“왜 동부 신전은 경치도, 공기도 좋다 하잖아요. 얼마 전 습격 받은 것에 충격도 받고 해서 요양 겸 가려고요.”
“아아, 그렇게나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단 말입니까!”
알렉이 이번엔 질겁했다.
그런 그들을 달래며 루나는 진땀을 뺐다. 거기다 침실로 오자 더 강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울프가 컹컹대며 루나에게 달려들었다.
“울프, 너는 어째서 이렇게 똑똑한 거니. 벌써 다 알아듣고 나 떠나는 거 눈치챈 거야?”
루나는 울프의 턱을 어루만지며 이마를 긁어 주었다.
“널 데리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띄어 안 된대. 조금만 기다려, 우리 강아지?”
울프는 헥헥대며 서러운 얼굴로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 * *
“비밀리에 다녀오는 여행이니. 사람들 입단속을 잘하도록. 그리고 동부 신전에도 말을 잘 맞춰 두라 해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런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지요?”
공작가 내부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아키스는 디온에게 일부 진실을 털어놓았다. 대충 사정이 있어 부인을 데리고 비밀 여행을 간다는 말 정도였다.
디온은 요즘 아키스가 범상치 않다 생각했다. 루에 대한 현상수배도 모두 없애고, 각인 문제도 신경 쓰지 말라 했다. 그런데 공작 부인을 동부 신전으로 보내다니. 평온해 보이던 그의 모습 이면에 무슨 일이 있나 했다.
“……다녀와서 상황이 정리되면 이야기하마. 어쨌든, 저택의 수습을 잘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루나와 아키스는 따로 마차를 타고 저택을 출발했다.
그리고 둘 다 도중에 마차에서 내려 게이트 근처의 익명으로 빌려 둔 한 호텔 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준비해 왔죠?”
휘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루나의 말대로 그녀의 치수와 맞춘 옷과 가발들을 가져왔다.
루나는 피부색을 검게 물들여 주는 루비트 씨앗 약을 먹고, 오랜만에 직접 화장을 하고 옷을 입으며 남장했다. 파티션 너머에서 루나가 준비하는 것을 아키스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 됐습니까, 루나?”
“네. 이제 됐어요.”
루나는 작은 손거울로 자신의 매무새를 확인했다.
‘루는 항상 허름한 옷만 입었는데, 이건 좋은 옷이네……. 남장할 때 이런 옷을 입은 건 처음이야.’
휘멘이 재단사에게 부탁해 직접 맞춰온 옷은 루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귀족가의 소년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런 코트와 베스트, 그리고 바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부츠였다.
“……다 됐어요.”
루나는 파티션 밖으로 나갔다. 아키스와 휘멘은 잠시 말을 잃고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가 거기 서 있었다.
막 과거에서 빠져 나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 가요?”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굳어 버린 사내들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새삼 기분이 이상해져서요.”
아키스는 관자놀이를 살짝 눌렀다.
‘이전부터 루가 귀엽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고 보니 루가 영락없는 사내아이라고 생각했을 때부터 귀엽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녀가 여인임을 알아본 건지도 모른다.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니 배덕감 같은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너, 정말 루 맞구나.”
휘멘이 루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에 루나는 왠지 기분이 머쓱해졌다. 마지막으로 루나는 얼굴을 가려 주는 후드 망토를 푹 눌러썼다. 그들은 게이트로 향했다.
* * *
서부에 도착해서 아키스는 신신당부했다.
“이제부터 계속 아카데미 학생인 척하는 겁니다. 알겠지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또 목적이 은밀한 여행인 만큼 루나를 아카데미 학생으로 신분 위장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뜻밖에도 아키스 때문이었다.
“그러게 루 좀 작작 찾지.”
“난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아키스가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다름 아니라, 아키스가 루가 루나인 걸 몰랐을 때 루를 찾으라 온 서부에 현상금을 걸어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 아키스와 루 모습으로 변장한 루나가 같이 돌아다니면 피곤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키스도 루나도 또 한 번의 미소년 스캔들은 사양하고 싶었다.
“현상 수배는 확실히 철회한 거지?”
“물론이지.”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말을 타는 게 편하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휘멘은 그렇게 말하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어디서 말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어디서 난 말이에요?”
“지난번에 공용 마구간에 맡겨 둔 거. 난 서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거든.”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아키스는 지나가는 마차꾼을 불러 마차를 빌렸다.
“말을 타면 더 빨랐을 텐데…… 내가 승마를 못해 아쉽네요.”
루나는 괜히 급한 맘에 입술을 삐죽였다. 아키스는 마차 문을 먼저 열어 주며 루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난 좋은데요. 둘만 있을 수 있어서.”
그 말을 알아들은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루의 모습일 때 그가 사내로서 녹을 듯 다정하게 구는 게 낯설었다. 그녀는 괜히 부산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랐다.
“하루 종일 마차를 타고 가야 할 거예요. 오늘 하루는 사막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묵고, 내일부터 바로 사막에 들어갈 겁니다. 야숙도 해야 할 거고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정도 고생은 각오한 바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당신은 서부에 저택이 있지 않나요?”
부유한 고위 마법사들은 보통 서부와 수도 양쪽에 집을 갖고 있었다. 루나의 물음에 아키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네. 도시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는 마법사들의 저택 구역에 내 저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휘멘도 철저히 정체를 숨기기로 했고, 또 시간도 절약하기 위해 그쪽엔 가지 않을 겁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의 모습을 한 자신과 아키스가 함께 저택에 드나들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아키스의 표정을 보았다.
“여기 온 게 아직도 그리 마음에 안 들어요?”
루나는 옆자리에 자리한 아키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의 눈을 빤히 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요.”
“……아직도 그 생각?”
아키스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입니다. 미래의 내가 당신에게 못되게 굴진 않았나.”
아키스는 루나가 꿈속의 일기장에서 읽은 내용을 세세히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픈 루나에게 각인하자는 말을 했다.
‘그딴 세상이 뭐라고, 미래의 나란 놈은.’
차라리 세계 멸망을 보고 말지.
지금 자신이 그때의 병들고 연약했던 루나를 만난다면 온몸으로 감싸 꽉 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신 놔주지 않을 거다. 하지만 미래의 저는 그런 건 몰랐을 거다.
하지만 그건 당연했다. 루나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온 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뻔했다.
아버지와 가문, 그리고 불합리한 출생에 대한 분노만 가득 안은 모습. 반면에 지독히 감정은 메마른 인간. 그런 저의 천성을 숨길 생각도 없이 긴 시간을 보내왔을 거다.
‘……그녀가 없으면 난 다시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겠지.’
공감도, 사랑도, 애틋함도, 보호 본능도 모두 루나가 가르친 것이다.
“하지만 그 일기장 속의 미래, 그때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당신은 내게 선택권을 주었고 조금도 거칠게 굴지 않았어요. 약도 못 구하고 있는 병자인 내게 치료도 해 주었고요.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은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서로 자책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루나가 아키스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러다 자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해 잡아먹지 않을까 걱정되는 기분. 그런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냥한 성정에 감복하게 된다.
반면 미래의 병든 루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싸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평생 지키고 귀하게 살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 뒤 일어났을 일이 걱정이라는 겁니다.”
“뭐, 별일 있겠어요. 여자라면 돌 보듯 보시던 분이. 당신, 전혀 위험하지 않았을 걸요?”
루나는 쿡쿡 웃었다.
상대가 당신이라면 꽤 위험할 텐데.
아키스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가 루나의 턱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초록색 눈을 보는데,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이 포근한 체향도, 목소리도, 그를 녹이는 눈빛도 모두 루나였다. 그러나 외모는 틀림없는 루였다.
“나한테 처음 흑심 품은 건, 루나를 봤을 때였다 했죠?”
“루는 영락없는 소년인 줄 알았으니 당연하지요.”
“정말이에요? 이렇게 쳐다보고……. 이러다 당신, 정말 나 잡아먹겠는데요?”
아키스가 루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지금 헷갈리는 중이니까 그만해요.”
루나는 작게 웃었다.
* * *
정말로 마차는 꼬박 하루를 달렸다.
아키스와 휘멘이 몇 번인가 마차 속도를 늦추자거나, 아니면 중간에 내려 쉬고 가자는 말을 했지만 루나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했다.
“차라리 호텔에서 쉬는 것이 나아요.”
여행지에서 둘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한편 아키스와 휘멘은 그런 루나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마침내 그들은 서부의 게이트 근처 마을에 도착했다. 루나는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그냥 마차 안에 앉아만 있었는데도 고역이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아키스는 자연스레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완벽한 예법에 입각한 에스코트 태도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안에 남자분이 계신 것이 아닙니까?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지…….”
마차꾼이 사투리 섞인 목소리로 어색하게 말했다.
루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조금 비틀대며 혼자 힘으로 내렸다. 허리가 아파서 몸이 삐걱거렸다.
아키스는 반사적으로 루나의 팔을 잡았다.
“여기선 귀부인 취급 금지.”
이러다간 밟고 지나가라며 망토까지 깔아 주겠다 싶어 루나는 아키스를 스쳐 지나가며 작게 속삭였다.
옆에서 그 말을 엿들은 휘멘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키스는 못마땅함을 감추고 마차꾼에게 은화를 건네주었다.
* * *
그들은 마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을 걸어 호텔로 향했다.
‘역시 던전과 번역가의 도시, 서부…….’
제국 수도의 고서점 거리처럼 서부에는 밤새 영업하는 가게들이 많았다.
취객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에 책상과 의자만 두고 즉석으로 번역 일을 받아 주는 이들도 있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번역가가 흔하군요.”
“이곳은 제국 마법서의 대부분이 발견되는 곳이니 당연합니다. 그만큼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지요.”
아키스가 설명했다. 휘멘은 루나를 힐끔 보았다.
“네가 알던 호텔이랑은 좀 다를 거야. 고위 귀족 나리들이 묵는 호텔이 있긴 한데, 거긴 나나 공작의 얼굴을 알아보는 치들이 있을 수도 있어서 말이야.”
“침대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루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막상 도착한 호텔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화려한 외관은 흰색 회벽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외벽에는 마법 등이 몇 개나 걸려 있었다. 그리고 현관에는 호텔 팔레스라는 멋들어진 명패가 걸려 있었다.
“가급적 이곳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키스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댔다.
“꽤 멀쩡해 보이는데요?”
휘멘이 대신 대답했다.
“여긴 신흥 부자나 모험가들이 자주 묵는 곳이거든. 시설은 나쁘지 않은데, 좀 부산스러워.”
루나는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일단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지하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올라왔다.
‘지하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늦은 시간임에도 로비에는 사람들 북적였다. 사람을 찾느라 소리를 지르는 사람, 무도회 날도 아닌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또 곱게 꾸민 한 무리의 엄청나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까지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곧 아키스가 방을 두 개 빌려 왔다.
당연히 루나와 아키스가 2인실, 휘멘이 1인실이었다.
키를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셋 다 각방 쓰자니까.”
“그건 안 됩니다. 외지에서 당신 혼자 자는 건 안 될 일이죠.”
루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약속 지켜요. 이곳에선 허락할 때까지 스킨십 금지.”
루나는 아키스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아키스는 계단 난간을 꾹 쥐었다. 루나는 못 본 척했다.
‘배고파, 피곤해…….’
하지만 막상 약간 조악할 정도로 화려한 방에 도착하자 루나는 배고픔도 잊고 뻗어 버렸다.
침대에 늘어진 루나를 보며 피식 웃은 아키스는 그녀 몫의 짐까지 모두 옮겨 놓았다.
“졸려요?”
루나는 눈을 비비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겠지만 식사해 둬요. 사막으로 들어가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힘드니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으응……. 알겠어요.”
루나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독이라는 것이 이런 건가 싶었다. 평생 긴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처음 겪는 일이었다.
“스틸본 숲이나 리튼에 간 건 여행도 아니었군요.”
“거긴 유람에 가깝죠. 힘들 거라 했잖습니까.”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키스가 포기하라 할까 봐, 그녀는 도리어 씩씩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1층으로 내려갔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도착한 시간이 늦어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다.
“지하의 사교 클럽으로 가야겠는데?”
휘멘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아키스가 루나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피곤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사교장은 그녀를 데려갈 만한 장소가 아니었으나, 그녀를 굶길 순 없었다. 아키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의 클럽에 들어선 순간,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와.”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일단 의외로 여인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대담하게 남자와 귓속말을 하기도 하고, 소곤대며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거의 안은 자세로 한구석에서 춤을 추는 남녀도 있었다.
“……서부는 서부대로 활기차군요.”
엄청나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눈을 마주친 루나가 공연히 뺨을 붉히며 후드를 푹 눌러썼다.
“돈이 많이 흐르는 도시잖아. 마법은 돈이 되지.”
“……아.”
루나도 고서점에서 일할 때 들어 알았다.
던전에서 나온 마법책들은 국가와 아카데미, 그리고 개별 마법사들에게 팔린다.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모여들고 번역가와 마법사가 넘쳐 나는 도시. 돈이 흐르는 곳에 환락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들은 가능한 한 구석 자리로 가 늦은 저녁 식사를 시켰다. 곧 웨이터가 차가운 햄 요리와 샐러드, 빵, 그리고 과일들을 내왔다.
루나는 주변을 살피고 조심스레 후드를 벗었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으나 막상 식사를 하니 허기가 채워져 정신이 좀 들었다. 루나는 작은 입을 오물대며 식사했다.
아키스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식사만 마치고 오늘은 일찍 자요. 오늘은 괴롭히지 않을 테니.”
그 말에 루나는 미미하게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식사를 하던 루나는 낯선 시선을 느꼈다. 그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와, 화려하다.’
화려하게 꾸민 여인 한 명이 문에 기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화장을 하고 입가에 점을 찍은 것이 보통 요염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러다 루나는 바로 은근한 위기감을 느꼈다. 여인이 그들 일행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건 뻔했다.
‘아키스를 보는 건가?’
아키스는 숨만 쉬어도 여인들의 주목을 끄는 남자였다. 아키스가 루나가 무언가를 바라보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마음이지만, 아키스가 저 여인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키스가 저를 보든 말든 대담하게 눈을 곱게 반달로 접어서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것이다.
루나의 가슴이 순간 철렁 떨어졌다.
머리로는 아키스가 저 외에 다른 여자에게 먼지 한 톨만큼도 안 흔들릴 건 알지만 기분 상의 문제였다.
‘아, 안 돼. 아키스는 여자 자석이란 말이야.’
마침내 그녀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꽃처럼 차린 아름다운, 일행으로 보이는 여성들도 뒤따랐다.
그들이 아키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 분만 오셨나요?”
루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인이 샤프롱도 없이, 소개도 없이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그녀가 자라 온 보수적인 세계에서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서, 서부 여인들은 개방적이구나. 거기다 이런 매력적인 여자들이…….’
아키스는 이런 식의 접근이 몹시 익숙하면서도 지겨운 듯했다.
어느새 여인들의 시선이 그들 테이블에 모이기 시작하자 루나는 괜히 식사를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성격이 저 모양이라 그렇지 정말 잘생겼지…….’
휘멘도 아키스에 비해서 평범할 뿐이지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몹시 준수했고, 거친 남성미가 넘쳤다.
다가온 여인이 루나와 아키스의 중간에 자리 잡고 서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적적하시면 저희가 동석해도 될까요? 저희 술은 사 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아키스는 대답 대신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계신 분들에게 좋은 술을 내어 드리고, 오늘 밤은 조용히 보내고 싶다 전하게.”
아키스는 단정한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여인들은 어머, 세상에. 하고 감탄했다. 아키스의 말은 축객령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녀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도리어 아키스가 라라라 노래를 부른다 해도 박수를 칠 기세였다. 육감적인 미모를 지닌 그녀의 눈이 더 번뜩였다.
“제가 사고 싶었는데…….”
아키스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평생을 여자에게 시달려 온 사람만 지을 수 있는 오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긋하게 부채질하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잘생기셨는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냥 이름 한 자락이라도 꼭 듣고 싶네요.”
“난 혼자 있고 싶다고…….”
그리고 그녀는 아키스의 말을 무시했다.
“…….”
그녀의 눈이 고정된 위치는 정확히 루나였다.
‘응?’
그녀는 대담하게 루나의 의자 팔걸이에 손을 댄 채 더 몸을 숙였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옷이 워낙 파여서 출렁이는 큰 가슴이 다 드러났다. 와, 이렇게 가슴이 큰 여자도 있구나 싶었다.
“네? 도련님. 옆에 앉아도 될까요?”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휘멘까지 침묵했다. 그녀는 침묵을 무엇이라 해석했는지 아예 루나의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귀티가 흐르는 것이 보통 분이 아닐 것 같네요. 어느 집의 도련님이신가요? 어머, 곱기는 여인 저리 가라시군요.”
“이봐, 그 아이가 우리보다 잘생겼단 말이냐?”
휘멘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녀는 눈을 팔랑이며 말했다.
“두 분도 잘생기셨지만…… 남자는 어린 것이 최고지요. 이분은 막 스물을 넘긴 걸로 보이는데, 성년은 되셨지요? 어쩜 이리 까무잡잡한 피부가 건강하고 고와 보이시는지…….”
결국 휘멘은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풋, 푸하하! 그래, 이 중 최고 멋진 사내가 이 녀석이구나. 네 말이 맞다.”
아키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루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 순간 아키스는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루나의 손을 타고 루나의 소맷자락 안으로 살짝 들어가는 것을.
‘으아아…….’
루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여인이 소매 속으로 집어넣은 손가락을 야릇하게 지분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작이 어찌나 육감적인지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나의 허벅지를 은근히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쓰윽 훑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는 아키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
정신 차려 보니 아키스가 루나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쪽 도련님은 시간이 늦어 오늘은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아키스가 더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루나는 밥을 먹다 말고 아키스에게 끌려가게 되었다. 여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키스가 루나의 어깨를 거의 안 듯이 하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저 두 분은 무슨 사이인가요? 저 미남자가 자그마한 남자분을 숫제 바람난 애인 다루듯 무섭게 보시는군요?”
“아. 신경 쓰지 마. 둘 다 변태들이니까.”
휘멘이 웃음을 꾹 누르고 대답하자 어머나, 세상에. 하고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지하를 나가는 계단, 차양이 내려진 그곳에서 움직이는 네 개의 발을.
‘방으로 올라갈 때까지 좀 참지.’
휘멘은 욕을 하고 싶어졌다.
사내의 큰 발이 움직일 때마다, 그보다 작은 부츠 신은 소년의 발이 사내의 발 사이에서 움찔대고 있었다.
여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몸을 낮추며 그 광경을 보았다.
이내 작은 사내의 발은 큰 사내의 품에 안기듯 하여 계단 위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들은 공연히 붉어지는 뺨을 감추며 제각기 시선을 분산시켰다.
“오늘 밤은 꽝을 뽑았구나.”
허탕만 친 여인을 보며 휘멘이 또 터지려 하는 웃음을 참았다.
* * *
“내가 여자한테까지 질투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아키스가 급하게 호텔 방으로 돌아와 루나를 팔 사이에 가두었다.
그가 이런 날것의 질투를 드러내 보일 때는 새삼 민망했다. 루나는 살벌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키스가 혀를 차듯 말했다.
“피하지 그랬어요.”
“같은 여잔데 뭐 어때요. 거기다가 너무 당황스러우니까…….”
자신에게 이성으로서 흥미를 보이는 예쁜 여자라니, 평생은 못해 볼 경험이었다.
“당신 매력이 넘쳐 큰일이군. 난 앞으로도 평생 불안하게 살겠어.”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그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루일 땐 그러지 마요. 부끄럽단 말이야.”
아키스는 그 말에 대답조차 않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루나의 팔을 잡고 그녀를 부드럽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
루나는 벽에 뺨을 댄 채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에 그에게 등을 보이고 무방비하게 서 있게 되었다.
“이 모습일 땐 허락 받으라니까요.”
“지금 허락 받고 있는데.”
그가 속삭였다.
달라붙는 바지를 입은 그녀의 엉덩이 골에 그가 자신을 비볐다. 당장 바지를 뚫고 나올 듯 터질 듯 묵직하고 팽팽한 그의 것이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로 느껴졌다. 하반신이 두근거리는 느낌.
루나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루 모습일 때 이러는 건 몹시 배덕감이 들었다.
루나는 반사적으로 천이 덧대진 벽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의 손이 베스트에 감싸인 허리를 어루만지며 내려왔다. 그리고 바지에 감싸인 둥그런 엉덩이를 더듬다 천천히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흐응…….”
천 위로 음부 모양을 두드리며 그의 손가락이 덧그렸다.
루나는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벽에 댄 팔과 떨리기 시작한 허벅지 안쪽에 꽉 힘이 들어갔다.
“해도 되죠.”
그가 속삭였다.
“네? 루. 착한 아이니까.”
그가 속삭이자 루나는 배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정말 그는 나쁜 남자였다.
루나는 더 붉어질 수도 없는 귀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가 낮게 웃었다. 그는 천천히 루나의 바지에 손을 가져갔다. 바지를 속옷과 함께 단번에 내린 그는 그녀의 말랑한 엉덩이를 손으로 주물렀다. 하얀 살덩이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짓눌렸다. 야릇한 감촉에 루나는 엉덩이를 치켜세웠다.
“참 이상하지.”
“…….”
“똑같은 당신인데 정말 다양하게 흥분시켜. 아마 당신한테만 발정하나 봐.”
아키스가 그녀의 음부로 손가락을 하나 넣으며 말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천천히 세 번에 걸쳐 집어넣는다.
“잘 젖어서 참 좋아.”
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느새 살살 젖어오기 시작한 음부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진작 이렇게 검사해 볼걸. 루였을 때 말입니다. 이렇게 발가벗겨 세세히 검사해 봤으면 처음부터 여자인 걸 알고 업어왔을 텐데 말입니다.”
음탕한 농담이었다. 루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자리의 흥분을 돋우기 위한 부부간의 농담.
“……. 진짜, 별말을 다해요.”
그는 대답 대신 루나의 목덜미와 깨끗한 하얀 등에 쪽쪽 키스했다.
“이렇게 좋은 향이 나는데 왜 몰랐을까 해서. 이제 난 당신 목덜미 냄새만 맡아도 서거든요.”
“흐읏…….”
로맨틱한 건지 변태인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키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만인데도 이렇게 꽉 무니, 나만 박고 싶어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기껍습니다. 당신 안쪽도 벌써 이렇게 잔뜩 흘리고 있으니까.”
“흐으…….”
“당신이 다 입고 하얀 아랫도리만 내놓은 채 이렇게 기뻐하니. 나만 당신한테 미친 게 아니다 싶거든요.”
어느새 느슨해진 입구를 느끼며 아키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그의 손가락을 물고 있던 붉은 내벽이 딸려올 듯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젖어 있었다.
“당신 만지면서 이미 섰어요. 들어갈게요.”
아키스가 자신의 것을 손으로 쥐고 뒤에서 삽입했다. 루나는 벽을 꽉 쥐었다. 그대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자연히 허리가 숙여졌다. 그는 한손으로 단단히 그의 허리를 감았다.
“하앗, 응……. 으응!”
탁탁. 찌걱, 찌걱.
말랑한 엉덩이살과 그의 고환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벌떡 선 단단한 성기가 그녀의 하얀 엉덩이 사이를 누볐다. 루나의 애액이 허벅지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앗, 아키스……!”
아키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무릎에 손을 집어넣어 벽에 닿을 듯 밀어붙였다. 휘청이던 루나가 균형을 잡았다.
푹!
아키스는 한번 빠졌다 깊게 치고 들어갔다. 깊게 박히는 소리가 나며 루나는 몸을 떨었다. 필사적으로 벽을 쥐었다. 그가 그대로 뒤에서 빠졌다 깊게 전진하기를 반복했다.
“흐으, 이상해……!”
옆으로 비껴 박는 각도에 새로운 쾌락이 파도처럼 루나의 몸을 덮쳤다. 허벅지 안쪽이 뻐근하게 당겼다.
“하앗, 응……!”
그대로 쑥쑥 전진하던 그가 다리를 놓았다. 루나의 몸이 스르르 앞으로 기울었다. 경사진 허리의 각도를 즐기며 그가 성기를 박아 넣었다.
“하아…….”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의 내벽이 그를 쥐어짰다. 뜨거운 내벽에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이 느껴져, 아키스는 더 전진했다.
“흐응!”
루나가 더운 숨을 토했다. 거친 섹스지만 색달라서 좋았다. 쑤컥대며 페니스가 박힐 때마다 자꾸만 힘이 빠졌다. 아키스가 루나의 허리를 꽉 잡았다.
“하아, 으응……!”
푹, 푹.
끊임없이 쑤셔대던 뜨거운 막대기가 멈췄다. 그 큰 것이 루나의 몸 안에서 마지막으로 꽉 다물렸다.
“흐으……!”
이윽고 진한 절정이 토해지는 느낌에 루나는 벽을 짚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단번에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그는 살며시 손가락으로 음부를 벌렸다.
“흐읏, 아키스…….”
“루나 맞네요.”
그는 핥듯이 하얀 액체를 흘려대며 뻐끔대는 그녀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셔츠를 벗기고 붕대를 풀었다. 루나가 한숨을 쉬며 가발을 쓴 머리를 매만졌다. 엉망으로 흐트러졌지만 일단 머리에서 버티고는 있었다.
“루의 옷 아래에 이런 몸이 있었다니.”
아키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못 알아보다니 난 정말 바보 멍청이였어요.”
루나는 힘없이 쿡쿡 웃었다.
“그러니 오늘밤은 천천히 살펴야겠어요. 루에 대해 더 알고 싶거든.”
아키스가 속삭이며 루나의 볼에 키스했다.
‘가끔 보면 못됐다니까.’
곧이어 드러난 젖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루나는 뺨을 붉혔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 * *
호기롭게 마차 여행을 버텨 낸 것이 무색하게, 이튿날 아침 루나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아키스는 먼저 식당에 갔나.’
그녀는 급하게 루비트 씨앗 약을 먹고 옷을 차려입었다. 사내 복식을 다 차려입는 중에도 아키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로비로 내려갔다. 주변을 두리번대며 일행을 찾던 루나의 눈에 아키스와 휘멘이 로비의 소파에 앉아 맞담배를 피우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 모습이 몹시 뜻밖이었다.
둘이 별말 없이 한 공간에 있는 것도, 그가 흡연을 하는 것도.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키스가 곧 루나를 발견하고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담배를 끄라는 뜻으로 살벌하게 휘멘을 바라보았고, 그건 휘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휘멘은 루나를 보고 고분하게 담배를 비벼 껐다.
“일어났어요?”
“잘 잤나?”
아키스와 휘멘이 번갈아 가며 인사했다.
“늦잠 자서 미안해요. 아침은 생략해도 되니 어서 출발해요.”
“쓸데없는 소리. 굶으면 안 됩니다. 아침부터 먹죠.”
어젯밤과는 달리, 식당은 정상 운행을 했다.
루나는 아침 식사가 나오기 전에 아키스의 냄새를 살짝 맡았다.
“담배 냄새 나요. 당신 담배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
“가끔 누구와 이야기할 일 있을 때만 핍니다. 입을 씻으면 돼요. 싫다면 앞으로 피우지 않겠습니다.”
아키스는 루나를 달래듯 말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아주 가끔이라면 괜찮아요.”
“……허락해 줘서 고맙군요.”
휘멘은 정말 이상한 것을 관찰하는 표정으로 그런 둘을 보았다. 놀랍게도 아키스는 그녀에게 순종적이기까지 했다.
곧 조식으로 따뜻한 수프와 과일 주스, 그리고 달걀 요리를 비롯한 몇 가지 음식들이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는 휘멘은 몹시 피곤한 표정이었다. 루나는 마음이 쓰여 그에게 물었다.
“어제 안 잤어요, 휘멘? 말을 오래 타서 힘들었죠?”
“내가 너희 옆방이라는 걸 잊은 모양인데, 남의 숙면을 방해한 게 누구지?”
“…….”
루나의 뺨이 다시 발그레해졌다.
그렇다는 건 지난밤에 휘멘이 그들이 내는 소리의 일부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휘멘은 이미 이 여행에 살짝 환멸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나, 이 여행에 따라온 게 잘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뭐, 이참에 너도 진짜 부부라는 걸 체험해 보고 철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내 아내처럼 완벽한 여인을 아내로 맞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게 무슨 안팎으로 꽉 찬 개소리지?”
휘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키스, 그런 민망한 소리 하지 말랬죠. 거기다, 결혼해도 철 안 들 사람은 안 든다고요!”
“……너 지금 내 욕한 거냐?”
휘멘은 점점 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아무튼, 어느 정도 준비되고 성숙해졌을 때 짝을 만나는 게 좋죠.”
루나는 슬쩍 웃었다. 휘멘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에요. 아무튼, 우리 식사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나요? 사막에 들어가야죠.”
“안 그래도 아침에 알아보고 왔는데, 어쩌면 오늘 사막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막의 폭풍이 시작되었거든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오늘 새벽에 무리해서 들어갔다간 사막 폭풍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니.”
“모래 폭풍이라는 건…….”
“비는 오지 않지만 바람이 폭풍처럼 계속 부는 걸 뜻합니다. 그때 사막에 들어가면 몹시 고생이지요. 아무튼, 오후가 되어도 폭풍이 그치지 않으면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지 않을 겁니다.”
“알겠어요.”
그럼 꼼짝없이 도시에 머물러야할 터였다.
어제 오늘 피곤해서 조금 단 음식을 먹고 싶은데,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식사에는 디저트가 없었다.
옆 테이블을 힐끔대니 사람들이 단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여행에서 케이크 운운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루나는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키스와 휘멘은 잠시 여행 준비로 살 것이 있다 하고 외출했다. 침대에 누운 루나는 자신의 짐 가방을 뒤졌다.
‘……책을 가져왔지.’
어디서나 대화할 수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녀는 펜을 꺼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침대 위에 엎드렸다.
<안녕.>
루나는 책에게 글을 적어 나갔다.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거의 다 풀었습니다.>
책이 부루퉁한 느낌이 만연한 대답을 했다. 물론 필담이었다. 루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미안해. 글 좀 보여 줄래? 정말로 가장 재미없는 소설이라도 상관없어. 네 안의 모든 글을 읽고 싶으니까.>
<…….>
책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정말로 내가 그리 좋으시다구요?>
<그럼, 정말로 좋지.>
<……일레덴에서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기 마력 환경이 변한 걸 보니 여긴 서쪽이로군요.>
<……일레덴……?>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이 책은 위치가 바뀐 것도 인지하는 건가?
<고대의 도시 이름입니다.
서쪽 마법사들이 던전이 밀집한 곳에 번성한 도시지요. 그리고 그 옆으로 가면 라엔이 있습니다. 여기는 고위 마법사들의 저택이 있는 곳이지요.>
둘 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키스가 말한 것과 똑같았다. 서쪽의 마법사 주거 구역과 이 떠들썩한 도시…….
‘이 책은 대체……. 정말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엄청날 거야.’
이 책은 ‘위치 이동’에 대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고대 도시의 명칭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루나의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넌 도대체 누구니?>
<이전부터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누구’도 아닙니다.>
그 말에 루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 혹시…… 그러면…….
<넌 무엇이니?>
<난 1만 개의 역사적 사실들과 사건, 그리고 과거 고대에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저장된 기록의 집대성입니다.
그 외에도 소설을 포함한 문화, 예술에 대한 것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고요.
나는, 자격 있는 자만 주인으로 인정하는 특수한 마도구입니다. 주인의 기쁨을 위해 제작되었고요.>
루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전에도 이 책에 이런저런 것들을 질문했다. 고대에 대한 정보가 가득 든 책이니. 그러나, 이 책의 답변은 그때마다 똑같았다.
<난 백과사전이 아니에요.>
다만, 이미 읽은 소설이나 내용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하면 그녀는 ‘주석을 제공합니다’라는 명목으로 답을 알려 주었다.
‘……어쩌면 이 책에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는 법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루나는 펜을 쥐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키스가 벌써 왔나?’
루나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뜻밖에도 휘멘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눈앞에 뭔가가 쑥 들이밀어졌다. 루나는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았다.
“이게 뭐예요?”
루나는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작은 주머니 안에 색색의 사탕이 들어 있었다.
‘……어?’
휘멘은 무뚝뚝하게 루나를 보더니 등을 돌렸다.
“앞에서 팔길래 그냥 버리려다 주는 거야.”
루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휘멘은 아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쉬운 얼굴로 옆자리에서 케이크를 먹고 있던 것을 지켜보던 루나를 떠올렸다.
“아……. 고마워요…….”
루나는 뜻밖의 선물에 눈만 깜빡였다.
“그런 민망한 소리 하지 마.”
휘멘은 루나가 더 말을 붙이기도 전에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보기보다 착한 사람이라니까.’
루나는 사탕을 하나 입에 넣었다. 달콤한 과일 맛이 입안에 굴러 가며 터졌다. 꽤 고급 사탕이었다. 루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루나는 한 시간쯤 짧은 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아키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루나는 휘멘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나는 얼른 휘멘을 따라 나갔다.
“어디가요?”
루나는 휘멘을 붙잡고 물었다.
“오랜만에 카지노나 갈까 하고.”
“카지노……?”
루나가 눈을 반짝였다.
카지노라는 곳을 들어서 알았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의 나쁜 남자 설정의 남주인공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주 화려하고, 환락이 넘치는 장소라 했다.
“나도 가서 구경하면 안 돼요?”
루나가 퍼뜩 떠올린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녀가 언제 또 그런 세속적인 장소를 구경하겠는가.
“네가?”
루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가 난리가 날 텐데.”
“아직 낮인걸요. 아키스는 오늘 바쁘다했어요. 그리고 대낮에 무슨 일이 생겨 봐야 얼마나 큰일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키스가 알면 휘멘의 목을 따겠다 덤빌 것 같았다.
휘멘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돼.”
“그래요. 그럼.”
루나는 포기하는 척했다. 그러나 휘멘이 걸어가자 졸졸 그 뒤를 따라갔다.
“…….”
휘멘은 어이가 없어서 멈춰 섰다. 루나가 따라서 멈춰 섰다.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싶어졌다.
“……알겠어. 아주 잠깐이다.”
“아키스에게 쪽지 남기고 올게요.”
루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길을 걸으며 휘멘은 계속 루나를 살폈다.
“건물 외관은 허름한데 안은 딴판이네요.”
도착한 카지노 안은 호텔 클럽만큼이나 신기했다.
여긴 여기대로 별세계라고 할까. 한구석에서는 부유해 보이는 사내들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중앙의 룰렛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휘멘에게 카지노는 가끔 들르는 곳이었지만, 후드를 푹 눌러쓴 루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괜스레 조금 뿌듯했다. 루, 혹은 루나가 무언가를 신기해하고 즐기는데 괜히 제가 기분이 좋았다.
“오래 있지 말자. 딱 한 시간만.”
“알겠어요. 와, 세상에 이런 데가 있군요. 나, 해 봐도 돼요?”
“네가 한다고?”
“……네. 한 게임만.”
“그럼 룰렛이 낫겠군.”
이거라면 중독 될 일도 적고 단순히 운에 걸린 게임이니 괜찮겠다 싶었다.
휘멘은 루나 몫의 칩을 조금 사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룰렛에 집중했다.
“와 또 맞았어요!”
루나가 작게 환성을 질렀다.
‘……이런 건 그놈이 왔을 때 빼고는 본 적이 없는데.’
드래곤은 확률의 신이라고 하던가. 드래곤의 신전에서는 인간의 운명과 수학, 확률을 상징한다. 달의 여신이 여인과 육아, 그리고 소녀들을 수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아키스는 룰렛이라면 귀신같이 맞췄다.
“이번엔 무엇에 거시겠습니까?”
“37요.”
루나가 기쁘게 외쳤다. 그리고 다음 주사위도 적중했다.
후드를 푹 눌러쓴 키 작은 사내와 키 큰 사내, 두 일행에 룰렛 테이블을 휩쓸고 있었다. 카지노 측의 주목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이봐. 이제 가자. 이번이 마지막 판이라고.”
휘멘은 루나에 비해 전혀 늘지 않은 자신의 칩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려 보니 사람들이 저만 보고 있었다.
“주사위에 입 맞춰 줘.”
휘멘이 저의 주사위를 내밀었다.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네게 행운의 신이 깃든 것 같으니 말이야. 그냥 전통이야.”
루나는 잠시 주저하다 휘멘의 주사위에 입을 맞췄다. 휘멘은 딜러에게 주사위를 주었고, 그 주사위를 공 삼아 딜러는 손으로 룰렛을 돌렸다.
그리고 루나와 휘멘은 둘 다 숫자를 정확히 맞췄다. 딜러가 종을 치자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반면, 루나와 휘멘 옆에서 룰렛을 하던 사내는 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사내는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이것들 사기 아니야?”
그 사내의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칩을 받는 휘멘과 루나에게 여인들이 접근했다. 그녀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속삭였다.
“당신들, 정말 멋진 남자군요. 그런데 얼굴은 왜 가리고 있죠?”
“오늘밤 숙소에 초대해 주지 않겠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의 옆에서 연신 잃기만 하던 한 사내가 몹시 화를 냈다. 그들에게 접근한 여인들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이봐, 캐시. 말이 다르잖아. 제길, 내가 네년 비위 맞추느라 며칠을 공들인 줄 알아?”
“당신, 개털 아녜요? 아까부터 잃기만 하던걸, 난 관심 없네요. 그보다, 이봐요. 돈을 땄으니 파티 안 해요? 우리도 초대해 줘요.”
그 말에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사내가 섬뜩한 표정으로 루나를 보았다. 잘못하면 한 대 치겠다 싶은 표정이었다. 휘멘이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사내를 턱짓하며 캐시라 불린 여자에게 물었다.
“저놈은 뭐지?”
“윌리엄 드 리던인가 하는 변변찮은 귀족인데, 이 동네에선 호구로 유명해요. 뭐, 운 좋게 부잣집 영애를 약혼녀로 삼았는데 벌써부터 그 집안 돈을 끌어 쓰며 서부며 수도에서 코르티잔들의 집이며 잔칫집이란 잔칫집은 다 돌아다니나 봐요.”
그녀는 휘멘이 관심을 보여 준 게 기쁘다는 듯 담뿍 웃으며 대답했다.
휘멘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가자, 루.”
루나는 쪼르르 휘멘에게 달려갔다.
휘멘은 루나를 데리고 나갔다. 윌리엄이라는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새끼들이 나를 무시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번개처럼 달려온 그 리던이라는 사내가 휘멘에게 덤벼든 것이다.
물론, 당하고 있을 휘멘이 아니었다. 그 사내의 억센 주먹을 한 번에 피한 휘멘은 바로 사내를 룰렛 판에 메다꽂아 버렸다.
쿵! 룰렛 테이블이 내려앉았다.
사내는 머리부터 처박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드들이 달려왔다.
‘정말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사건이 빵빵 터진다니까.’
루나는 혀를 차고 싶어졌다.
‘그러게, 사람 봐 가며 덤비지. 그런데 이름이 윌리엄이라고? 흔한 이름이긴 한데……. 저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아.’
휘멘이 주먹을 털며 다가왔다. 후드는 흘러내려 그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난 지 오래였다. 여인들이 수줍게 뺨을 붉혔다.
가드들이 다가오자 휘멘은 손을 들었다.
“됐어. 우리가 나가지.”
루나는 휘멘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여인 중 한 명이 루나의 후드를 슬쩍 젖혔다.
“당신도 얼굴 좀 보여 줘요. 운 좋은 분이 누군지 얼굴이나 봅시다.”
루나의 여인처럼 고운 얼굴이 드러나자 여인들이 놀란 시선을 던졌다.
“잠깐, 이러지 마십시오.”
루나는 허둥지둥 후드를 썼다.
휘멘은 재빨리 루나를 감싸 카지노를 떴다. 급하게 칩을 교환하고 빠져나가는 그들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 * *
“……정말 정신없었어요.”
루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밭은 숨을 뱉었다. 고작 1시간 있었을 뿐인데 그 안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휘멘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루나와 나란히 일부러 뒷골목을 타 넘어가며 길을 걸었다. 루나는 한참을 빠르게 걷자 인적이 없어지자 조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 아찔한 나날들을 보내는군요? 여인들은 규방에서 바느질하는 법이나 배우는데요.”
“그것참 안타깝군. 네가 진짜 루라면 매일 더 아찔한 하루를 보내게 해 줄 수 있는데.”
“아쉽지는 않네요.”
루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일탈은 즐거웠어요. 앞으로 이런 날은 다시없을 것 같지만요.”
“……혹시 아키스가 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구속하나?”
“아아. 그런 건 아니에요.”
루나는 제가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고개를 저었다.
“푸념은 아니었어요. 아키스와 함께 사는 삶은…… 지금은 내가 선택한 거니까요. 힘들게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건 사실인걸요. 세상엔 그것보다 힘들고 부자유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철없이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어요.”
철없이 일상이 따분하다, 부족하다 투정만 부리며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출간하고 약 사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고 하루가 보람차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더 나아질 수 있다 싶은 점이 있지?”
루나는 휘멘을 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휘멘. 정말로 이 일이 잘 풀려서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그래.”
“……무슨 말할지 알아요?”
“너, 여자들에게 고대어를 금지하는 법을 없애는 걸 도와달라고 할 생각 아니야? 도와줄게.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과격한 이론은 이미 몇 번이나 주장해 봤어.”
루나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역시 휘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휘멘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그녀는 이번일이 잘 해결되면 세상을 바꾸는 걸 도와 달라 말할 생각이었다.
아키스라면 당연히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영향력 있는 마스터 한 명이 더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이렇게 쉽게 협조하겠다고요?”
“당연히 도와야지. 이전이라면 카리노 대왕의 마법 때문에 여성 고대어 능력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어. 하지만 너로 인해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잖나?”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휘멘이 얻을 게 뭔데요?”
“왜 세상이 나에게 뭘 해 줘야 하는데? 난 천재고, 또 신체 건강하게 태어났고 돈도 많은데. 그러니 내 의무를 다해야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남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그런 자만이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거다.”
루나는 그 순간 아키스가 왜 휘멘과 매일 싸우면서도 사실은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둘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평행선 같은 사이…….’
루나는 작게 웃었다. 휘멘은 투덜댔다.
“그만 웃어. 정든다.”
“싫어요. 웃을 건데요.”
어느새 휘멘의 입가에도 설핏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 * *
이튿날 바로 사막 봉쇄가 풀렸고 그들은 아키스가 사 온 말을 끌고 사막 입구로 향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루나와 아키스, 휘멘은 검문을 받았다. 사실은 검문이랄 것도 없었다. 몇 명이 사막에 들어가는지 이름만 적고 통과하면 되었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구나. 모두 마법사일까?’
루나는 그때 사막 문 근처에 하릴없이 죽치고 있는 사내들을 발견했다.
용병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여인인 것이 티가 나는 건 아니겠지.’
루나는 후드를 더 푹 눌러썼다. 그러고는 사막을 통과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사막의 광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 * *
사막으로 들어간 지 이틀 째.
루나는 아키스가 왜 저를 그리 걱정한 지 바로 깨닫게 되었다.
‘……보통 일이 아니네.’
루나는 아키스와 함께 크고 튼튼한 준마를 타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물은 충분하니, 천천히 마셔요. 이 안에서 이동 마법은 쓸 수 없어도 식량과 물 저장 마법은 사용할 수 있거든.”
그나마 물 제한이 없어 살 만했다.
아키스는 종종 수통을 챙겨 주고 루나의 상태를 돌봤다. 그래도 루나는 힘들다는 말을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낮을 버텨 냈다.
“당신이 이 서부 던전 지대에 들어온 유일한 귀부인일 겁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겨우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의 태양 아래를 걷다 보면 이내 금방 밤이 되었다.
밤의 사막은 또 다른 장소 같았다.
말에서 내려 모래 바닥에 발을 딛는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리는 순간 허벅지 안쪽이 크게 욱신거린 탓이었다.
아키스가 루나를 거의 안 듯이 받았다. 휘멘도 다가왔다.
“이봐, 괜찮아?”
“……괜찮, 아요. 잠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아키스가 루나를 부축했다.
“금방 야영을 준비할 테니 잠깐 앉아 있어요.”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첫날에 그들은 루나를 우려했고, 여행 둘째, 셋째 날이 되자 이제는 거의 감탄하고 있었다.
본래 고귀한 귀부인의 생활을 한 그녀인데 아키스와 휘멘도 피곤해하는 사막 여행을 루나는 잘 버텨 내고 있었다.
“정말 당신은 보통 인내심이 아니군요. 힘들었을 텐데.”
아키스가 속삭이며 루나를 달래듯 어깨를 매만졌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나만 힘든 것도 아니잖아요.”
아키스와 휘멘은 빠르게 야영을 준비했다.
아키스는 루나를 위해 순식간에 천막을 쳤다. 아키스와 휘멘은 굳이 역할분담을 하지 않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할 일을 찾아서 척척 해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더니, 손발은 잘 맞네.’
휘멘은 능숙하게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고, 말들에게는 물과 먹이를 주었다.
“공간 마법이 없었다면 말을 데려오는 건 상상도 못하지. 이 녀석들을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한 영양제와 물, 충분한 먹이를 줘야 하거든.”
루나는 지친 말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곧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루나가 일을 하려 해도 휘멘과 아키스는 밖에서는 사내들이 일을 하는 거라며 하지 못하게 했다.
모닥불에서는 원초적이고 꿉꿉한 냄새가 났다. 그 위로 철판을 드리우고 휘멘과 아키스는 치즈와 빵, 고기를 구웠다. 천국처럼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이렇게 하루 종일 사막을 헤매고 맡는 음식 냄새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뭘 좀 먹을 수 있겠어요?”
“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가 달콤한 사과 한 알을 주었다. 그녀는 보존 마법에 감탄하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지친 입안에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단맛이 가득 퍼졌다. 순식간에 사과를 해치운 루나는 이어서 휘멘이 건네주는 음식들을 먹었다.
노릇한 치즈와 따뜻하게 구워진 빵, 소금 간만 한 부드러운 쇠고기를 먹다 보니, 자신이 이렇게나 식욕이 왕성했던가 싶었다.
‘살 것 같다.’
그러다 루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내의 시선을 발견했다.
“왜요, 안 먹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키스는 작은 입으로 냠냠 식사를 하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휘멘은 기분이 이상해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진짜 뉘 집 자식인지 물어보고 싶군.’
휘멘은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의 딸일 그녀였다.
그런 루나가 친동생처럼, 혹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여자의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이 이렇게 뿌듯하고 귀여울 리 없었다.
제가 미쳤나 싶어서 휘멘은 스스로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누구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모두들 기분이 묘해졌다.
“마실래?”
휘멘이 루나를 위해 달게 탄 차를 내밀었다. 루나에게 사탕을 준 날 이후, 휘멘은 늘 그녀에게 주는 차에 충분한 꿀을 넣었다.
“고마워요.”
루나는 작게 미소 짓고 차를 받았다.
힘들다 힘들다 해도 이 여행에서 둘은 철저하게 루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보존 마법이 있어 살았어요. 힘들어서 묻는 건 아닌데, 이 사막에서 이동 마법이라든가…… 그러니까, 게이트 같은…… 그런 마법을 이용한 방법으로는 이동할 수 없나요?”
아키스가 술을 한 모금 홀짝이며 대답했다.
“어떤 대단한 마법사도 마력장이 대단히 강한 이곳에선 이동 마법도, 또 고속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지요. 그러니 이 사막은 마법사들에게는 성전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경건하게 두 발로, 혹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니까요.”
“……마법사들의 사막이란 신비한 곳이네요.”
문득 루나는 자신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별을 보았다.
사막의 깊고 검푸른 밤하늘은 어두웠고, 그 위의 별들은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믿겨지지 않아.’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다시 루의 모습을 하게 된 것도 그렇고, 아키스와 휘멘과 함께 여행을 하는 상황도 그렇고.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키스가 불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냥요, 이 시간이 몹시 신기하다는 생각이요.”
루나가 턱을 괴고 나직이 말했다.
“루의 모습으로…… 두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에요. 그때 못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으니까. 이제 무언가 제대로 정리한 기분이 들어요.”
저를 지키기 위해 루를 외면해 왔다. 그러나 한 번 더 루가 되니, 루 또한 자신의 일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가 있었기에 지금의 공작 부인, 그리고 번역가이자 사업가인 루나가 완성된 것이다.
또 루가 있었기에 아키스를 사랑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도 모두 포함해서 루의 기억은 루나가 일생을 안고 갈 기억이었다.
“작별 인사라니?”
“……앞으로는 루나로 살게 될 것이니, 두 사람에게 루로서 작별 인사를 해야죠.”
“……루도 루나도 내 연인입니다. 그리고 내 아내기도 하죠.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약속한 듯 그들은 조용히 다시 침묵했다.
바짝바짝 타는 불을 동시에 바라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키스 또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와 나의 미래, 루나가 일기장을 통해 엿본 것…….’
요즘 아키스는 자신이 겪어 본 적도 없는 그 시간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결계’와 ‘열쇠’라는 것에 집중하느라 깊게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루나와 아키스가 만난 미래. 제국의 파멸을 보는 미래에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첫번째는 그녀가 보았다는 도서관. 자신의 가정이 맞다면…… 그 도서관은…….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째는 자신이 혼인했다던 여인. 루나는 이름조차 생소한 귀족 여인과 자신이 혼인했다 이혼했다 했다.
그 후로도 두 번이나 줄줄이 약혼이 깨졌다 했다. 왜 혼인했는지는 빤했다. 제국 황실과의 약속 때문에 혼인했을 것이다. 공작위를 물려받기 위해선 기혼자여야 하니까.
‘그럼 새틴은?’
생각만 해도 정 떨어지는 여자, 새틴.
루나는 그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파혼한 약혼녀 이야기까지 있다면 새틴과 약혼한 사실이 일기장에 거론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루나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거기다, 일기장 속 루나는 고대어를 할 줄 몰랐다.
‘뒤바뀐 약혼녀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인이라.’
그때와 지금 달라진 두 가지.
아키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요?”
루나가 아키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키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루나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잠깐 당신 꿈속의 일기장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아서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키스는 휘멘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휘멘은?”
“잠깐 순찰한다고 나갔어요. 이 근방에도 도적이 있다면서요?”
“부유한 마법사들의 마도구를 비롯한 짐을 노리는 도적들이 좀 있죠.”
루나는 설핏 웃었다.
“모처럼 단둘인데, 나를 안 쳐다봐 줘서 서운했어요…….”
아키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지끈할 정도였다.
신이 뭘로 빚으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런 여자가 탄생하는지. 그러나 정작 아키스가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루나는 슬쩍 고개를 피했다.
“왜 그래요?”
루나는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씻지도 못했다고요. 나한테서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모닥불의 퀴퀴한 냄새와 모래 냄새가 섞인 탓에 민망했다.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공간 마법을 써도 목욕물까지 실어 오는 건 무리였다. 요 이틀 사이 기껏해야 세수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다니까요.”
루나는 툴툴댔다.
“그럼 휘멘이 돌아오면 씻으러 갈까요?”
“……씻을 수 있어요?”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휘멘은 돌아와 이 근방에 야영을 하는 건 그들뿐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불침번을 부탁하고 아키스가 휘멘에게 말했다.
“곧 새벽 2시가 되니, 최초의 던전에 좀 다녀오지. 교대로 다녀오는 것이 낫겠어.”
“……아, 지하의 샘 때문이군. 알았다. 문제 있으면 소리를 내든 빛을 내든 마법으로 신호해.”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아키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어디 가는데요?”
“샘이요.”
“이 근처에 샘이 있어요? 사막인데……?”
그렇게 20분쯤 걸어 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까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작은 성탑이 생겨 있었다.
“……이게 뭐예요?”
“새벽 2시 경에만 나타나는 던전이지요. 이곳이 사막 지대에서 최초로 발견된 곳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던전이라 불리지요. 발견 당시 이곳에서는 3천 개가 넘는 마법 주문이 발견되었고요.”
아키스는 루나를 데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아키스는 계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아주 작은 샘이 드러났다.
“……이곳은 아무도 안 보니 목욕하도록 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한 번에 옷을 벗어 내렸다.
아키스 또한 옷을 벗고 샘으로 들어갔다. 문득 천장을 보자 훤히 뚫린 곳 위로 달과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 살 것 같아요.”
물은 조금 차가웠지만 오한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루나는 몸을 감싼 채 물 안에서 웅크리고 몸을 씻었다.
아키스가 다가왔다. 그의 탄탄한 몸을 달빛 아래서 보니 새삼 뺨이 붉어졌다.
“이리 와요.”
아키스가 속삭이며 물속에서 루나를 무릎에 앉혔다. 말캉한 가슴과 단단한 몸이 닿았다. 루나는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요즘도 달에 소원을 비나요?”
“……요즘 내가 비는 소원은 이 세계의 안위에 관련된 거라 달도 감당을 못할 걸요.”
아키스는 작게 웃었다.
그녀의 매끈한 흰 뺨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아키스는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우리가.”
루나가 그에게 몸을 꼭 붙인 채 속삭였다.
“일기장 속의 미래. 그때 만난 우리 말예요, 우리가 미래에도 결국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아키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 아닐 겁니다.”
“그래요?”
사실 루나도 그건 예상하던 바였다. 병들어 죽어 가던 루나는 아집에 가득 찬 인간이었다.
삶에 치이느라 이기적으로 변한, 삶에 마모된 여자. 그러니 아키스에게 끌렸다 해도 그다지 정순한 첫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기장 속의 그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신이 울었잖아.’
아키스가 울 정도로 고통스러워할 일이 뭘지, 왜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다. 지금의 자신이 이토록 그를 사랑하는데, 미래의 자신이라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짝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뭐, 미래의 아키스는 날 본체도 안 했을 것 같지만.’
루나는 작게 웃으며 생각했다.
아키스는 물에 젖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아무 짓도 안 했길 바랍니다. 미래의 당신은 무력하고, 작고, 사랑스러웠으니까. 내가 당신을 지켜 줄 수 없고 당신만을 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그러니 그때는 당신이 내 여자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데 가슴이 싸하게 저미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아키스……. 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으면 세상이 망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땐 당신이 내게 뭘 하든 불가항력이었을 텐데.”
“망해도 상관없어요. 지금 다시 미래를 바꿀 기회가 주어졌으니. 내 세상의 중심은 당신이니까, 당신이 불행한 세상이라면 몇 번이든 다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아키스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루나는 미소 띤 채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에요. 미래에 우리는 서로 남을 보듯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서로 좋아하다니, 그쵸?”
각인의 마법인가. 루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 눈을 보았다.
“아마도 미래의 나는 고독하게 죽었을 겁니다. 아집과 이기심에 가득 차,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겠지요.”
“…….”
“그래서 나는 후회했을 겁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생각했을 겁니다. 그 여자를 사랑할걸. 루나라는 여자를 조금 더 좋아할걸. 그러니, 다시 태어나면 그 여자를 사랑하자고.”
아키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루에게 끌린 걸 겁니다. 당신에게 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만일 이 시간도 끝나 버린다면, 그렇다면 가장 먼저 당신을 찾아내려 노력하겠지요.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과거가 없었으면, 더 일찍 만나 사랑할 수 있었으면. 이게 지금 내가 바라는 거니까.”
뜻밖의 말에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괜히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어느 세상이든 당신이 아파하는 건 싫어요, 아키스.”
루나가 속삭이며 그의 가슴에 피어난 꽃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미래의 당신도 참 어지간해요. 도대체 왜 그렇게 여인을 싫어하는 건가요?”
“글쎄요. 당신의 사람이 되려고 기다렸나 보죠. 아주 오래.”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나를 당신에게 바치려고 기다렸나 봅니다.”
루나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외전 / 과거 편―
루나의 일기(1)
「10월 9일.」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더 세세하게 쓰기로 했다. 세계가 멸망하면 이건 중요한 기록이 될 거다.
아무튼, 그 직후 놀랍게도 공작과 나 사이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매일 저녁 식사를 공작, 그러니까 아키스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심심할 때면 그가 있는 층으로 방문했다. 그는 항상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턱을 괴고 그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아키스는 나한테 ‘하지 말란’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나를 은근히 우쭐하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내 멋대로 구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절세미인에 권력자라고 해도 옷자락 한 번 스칠 수 없는 남자가 내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작은 내게 같은 말만 한다.
“당신 선택을 존중하죠.”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생각했다. 내가 득 볼 일밖에 없을 수준이잖아, 이건. 아키스의 마법으로 아프기 전처럼 건강해진 나는 스스로의 뺨을 매만졌다.
이렇게 삶을 더 얻어도 되는 건가?
이렇게 공짜로 얻은 삶의 종착지는 무엇일까?
동정? 연민?
* * *
또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흐른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나는 내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때는…… 꽤 예쁜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손이야 항상 거칠었지만, 피부도 뽀얀 색이었고, 눈에는 광채가 돌았다.
지금의 나.
머리카락은 푸석하고 너무 말라 몸은 부러질 것 같고, 또 밭일이며 약초 캐는 일을 오래해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뭇가뭇하다.
조금도 예쁘지 않아. 이런 나 같은 여자에게 사랑에 빠져 달라 운운하는 사람이 공작이란 것이 참 웃기다.
“뭘 그렇게 봐? 그만하면 귀여워.”
그때, 페니가 방 안에 들어왔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 거울을 내렸다.
“아, 아무것도 아냐. 입술이 마른 것 같아서…….”
페니는 피식 웃었다.
“오늘은 날이 좋은데 산책을 갈래?”
“나…… 공작이 없을 때도 산책 가도 돼?”
“앞 정원이면 괜찮아. 야트막한 곳이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이 좋았다. 난 페니의 팔을 잡고 조심조심 걸었다.
그러다 나는 말을 타고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공작과 마주쳤다. 새까만 흑마에 탄 그는 도저히 환자로 보이지 않는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
그가 말에서 한번에 뛰어내렸다. 목덜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말채찍을 쥔 채 다가왔다. 손목에 도드라진 핏줄이 파랬다.
“어딜 가는 거지?”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루나가 밖을 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너무 멀리 가지 마요.”
페니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한 그는 말을 끌고 마구간으로 갔다. 힐끗 본 바로는 그가 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믿기지 않아.”
“뭐가?”
“저 남자, 온갖 절세미인들을 다 거부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사랑에 빠지자니, 미친 남자 같지?”
페니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공작의 병을 대신 안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분명했다.
“……난 그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네가 억지로 그를 받아 줄 의무는 없지 않니?”
“넌 살고 싶지 않아?”
페니가 나를 염려하는 건 퍽 이상하다. 우리 상황이 반대라면 난 어떻게든 페니를 공작과 사귀도록 종용했을 거다.
“어차피 죽는 것보다 못한 환경에 있었어. 난 디온과 아키스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에 만족해. 잘 모르겠어. 나도…… 살고 싶긴 해. 하지만 네가 불행하지 않았음 해.”
“……죽는 것보다 못한 환경이라니?”
잠시 망설이던 페니는 조곤조곤 자신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나는 페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네가…… 그 데릴사위 구금 사건의 피해자였단 말이야?”
얼마 전,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제국에는 아들이 없어 재산과 작위를 상속받지 못하는 귀족 가문들을 위한 데릴사위 제도가 있다.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내는 가문의 작위 및 재산 상속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 상속권은 아내에게 이어진다. 자식을 낳으면 그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 다음 상속자가 된다.
작위 또한 한시적으로 아내가 이으며, 남자는 이름만 준 귀족으로 불릴 뿐 실질적으로 가문에서 힘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아내가 병에 걸려 운신이 불편할 경우, 그래서 가문을 다스릴 수 없을 경우, 그 경우에는 데릴사위가 대리로 가문을 다스릴 수 있다.
그 예외를 이용한 제국의 한 명문가의 데릴사위가 아내를 구금하고 학대한 사건이 있었다.
기억났다. 그 사건이 르시타 가문 사건이었다. 그 데릴사위의 이름을 빌어 그 사건을 윌리엄 드 리던 사건이라고도 불렀다.
“그럼 네가 남편에게 3년이나 감금당한…….”
“그래. 그게 나야. 놀랐지?”
페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디온이 어쩌다 우리 가문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불러 주지 않는 게 좀 이상하다 생각했대. 그가 우리 가문과 원래 아는 사이였거든. 그래서 공작에게 부탁해 집안을 수색해 주었어.”
드디어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페니에게 내가 이상하게 정을 느낀 이유도.
그녀와 나는 무의식중에 끔찍한 생활을 한 사람들 사이의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에 대해 듣고 굉장히 가엾다고…… 생각했어.”
난 세상은 참 뭣 같은 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망해도 페니는 살았으면 좋겠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이다.
“아무튼 공작은 의외로 로맨틱하네. 네게 연인이 되자 말하다니.”
“……그렇지도 않은데.”
나는 투덜댔다.
“그 잘난 사람한테 내가 여자로나 보이겠니? 지금이야 공작의 마법으로 사람 꼴 하고 있지 그 전엔 아주 다 죽어 가고 있었다니까.”
“그래? 난 네가 재미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건 정말 매력적인 거야, 루나. 사람의 관심을 끈다는 거잖아.”
“…….”
“그리고 네가 공작을 육체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이거 하난 보장할게. 그는 여자를 강제적으로 어떻게 하려거나…… 절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냐. 그러니…….”
“잠깐.”
나는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육체적…… 이라니?”
페니는 내 말에 오히려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네게 말하지 않았어?”
* * *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공작은 마구간에서 마침 장갑을 벗고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쁜 놈! 내가 우스워?!”
눈물이 핑 돌았다.
나 같은 걸 여자로 보지도 않는 건 잘 알았다. 천하의 공작님이 나처럼 볼품없는 여자한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바보 취급해?
“사랑 따위 빠지지 않아도 되었잖아! 그냥 한 번 잠만 자면 되는 거라며! 그런데 사람 마음을 이렇게 가지고 놀고 장난감 취급해! 왜, 내가 우스워? 역겨웠어? 나같이 냄새 나는 병자와는 키스조차 하기 싫어서?!”
페니가 내가 솔직히 말해 주고 나서야 알았다.
그 각인이라는 것이 서로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는 것. 그냥 한번만 동침하면 된다는 걸. 이 남자는 나를 속이고 있었던 거다.
나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났다.
저 혼자 공작에게 육체적 매력을 느끼고 설렌 것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밤 그의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사랑이 시작될까 고민한 것이.
씩씩대는 나의 팔에 묵묵히 맞던 그는 나의 양팔을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나랑 자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그런 핑계 대면 좋아?”
시선 한 번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권리로 누려 온 당신 같은 남자는 모를 것이다. 나처럼 그늘에서 살아온 초라한 여자 따위의 심정은.
얼마나 내가 하찮고 웃기면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내가 예쁜 여자라면, 멀쩡한 여자라면 그런 쓸데없는 말로 핑계 대고 빙빙 돌리기를 했을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정말 내가 조금이라도 여자라면 그럴 리 없다. 어떻게든 내게 수작 부리려 쩔쩔매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날 침대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그 순간 스스로도 이해할 수조차 없이 화가 났다. 그가 나를 이렇게 못난이 취급하고 무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무시하지 못한 것이 화가 났다.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그가 내 팔을 꼭 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내게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나를 마구간의 외벽에 격렬히 밀어붙이며 키스했다.
마구간 야외에는 아트막한 테이블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그 위로 나를 누르고 삼킬 듯이 물어뜯었다.
“아…….”
내 속옷 위로 그가 손가락을 꾹 눌렀다. 찌르르하는 느낌에 다는 다리를 떨었다.
춥, 추웁.
정말 귀에 그런 소리가 울렸다.
그의 혀는 말캉하고 좋은 냄새가 났고, 나를 벌하듯 혀를 뽑아 버릴 듯 굴었다. 내 마른 입술에서 피가 났다. 나는 내 입술을 더듬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이제 잘 알았겠군요.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
“말이 나온 김에 말하는데, 당신이 허락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 속옷을 찢어발기고 넣고 흔들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 자극하지 마요. 지금은 상상만으로 참죠. 아. 그리고.”
아키스가 내 턱을 살짝 추켜올렸다.
“키스 빼고는 이미 다 상상해 봤었는데, 잘됐군요.”
내 뺨은 폭발할 듯 붉어졌다.
“으…….”
그가 손가락을 위 아래로 문질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얇은 속옷이 내 몸에서 나온 물로 적셔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꼭 쥐었다.
“처음은 내가 제정신일 때 하는 게 좋잖아.”
“나…… 나는…….”
그가 왜 이렇게 날 열망하는 것처럼 볼까? 그럴 리가 없는데. 아키스가 손가락을 떼어내고 나를 내려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 순간 나는 정말 바보 같은 말을 해 버렸다.
“난 아주 창백하고, 어, 말랐어요. 주근깨도 있고 못났잖아요.”
그는 내 뺨에 손을 댔다. 천천히 주근깨를 하나하나 잇듯이 손가락을 눌렀다.
“정말로 있군요. 그렇지만 아주 귀여운 위치에만 있어요.”
내 온몸이 붉어지고 달아올랐다.
“허락해 준다면 언젠가 하나하나 애무하고 싶군요. 그리고…….”
그가 내게 속삭였다.
“목 아래 점이 어디 있는지도 상상하게 될 것 같으니 여기까지 하죠.”
그가 속삭였다.
나는 그를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비켜 주었다.
“일단 사랑만 합시다. 내 인내심이 박살 나기 전에 말이죠.”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그를 한참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섰다.
심장부터 배, 온몸이 떨려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분했다.
‘나쁜 남자 같으니.’
이상하게 그날 밤은 힘이 넘쳐 나, 나는 몇 번이나 베개를 퍽퍽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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