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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가 따로 있다 공표했기에 루나의 역할은 각색과 편집이었다.
그럼에도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루나는 힘든 작업 끝에 결국 <월플라워 부인> 1권을 완성했다.
그쯤, 루나는 붉은 책과 전우애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치열하게 같이 뭔가를 준비한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 같은 것 말이다. 하루 종일 책과 필담을 통해 각색과 편집을 의논했기 때문이다.
“바로 출간을 준비하겠습니다. 소문이 식기 전에 일을 진행하죠.”
벨이라는 출판사 담당자는 독특하게도 여인이었다. 그녀는 사내처럼 하얀 셔츠에 허리에는 가죽 벨트로 졸라매고 긴 무명 치마를 입고 다녔다. 귀에는 언제나 펜이 꽂혀 있었고 안경을 썼다. 루나는 그런 차림의 여인을 처음 만나 보아 참 신기했다.
“잘 부탁해요.”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나 공작 부인, 익명 출간을 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익명이라도 이름을 짓기는 하여야 할 텐데, 필명을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루나는 순간 붉은 책을 떠올렸다.
“……레드라고 해 주세요.”
“작가 레드의 책, 알겠습니다.”
벨은 원고를 끌어안고 부리나케 인쇄소로 향했다.
* * *
이튿날, 루나는 벨의 급한 연락을 받았다. 지금 당장 출판사로 와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루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급하게 출판사로 향했다.
“무슨 일이죠, 벨?”
“큰일 났습니다, 공작 부인.”
벨이 당혹한 얼굴로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루나는 벨이 내민 편지를 급하게 읽어 보았다.
[우리 서점들은, 다섯 곳 모두 <월플라워 부인> 서적 입고를 거부합니다.
수도의 모든 출간물을 유통하는 것은 우리 유통을 담당하는 서점 연합의 의무입니다만, 작가라는 일을 너무도 고귀한 분께서 하시는 것은 불법으로 사료됩니다.
부디 당 출판사는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이렇게 적힌 성명서의 말미에는 총 다섯 곳의 서점의 이름과 대표자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루나는 처음에는 당혹하여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시내의 모든 대형 서점에서 우리 책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벨이 부연 설명을 했다.
‘설마…….’
루나는 곧 상황을 눈치챘다. 무슨 말인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가명 발표인데도, 내가 월플라워 부인 책의 저자라 의심한다는 거군요. 공작 부인의 신분으로 소설을 출간하는 일이 법에 저촉된다며, 불법이니 책을 유통할 수 없다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벨이 몹시 송구스러워 하며 말했다.
“저희도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보통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출간의 경우, 익명으로 출간을 하곤 하지요. 익명 출간의 경우 작가의 진짜 신분을 파고들지 않는 게 암묵적 업계 관례인데…… 왜 이번만 유독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루나는 머리가 아찔했다. 그녀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대형 서점에서 책 입고를 거부하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말 그대로 전국 어디에서도 책을 유통할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서점부터 도서관까지, 책 공급은 모두 그 다섯 곳이 맡지요. 출판계에서는 그 다섯 서점이 강력한 힘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방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들도 모두 수도 대형 서점들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세라면 그쪽에서도 곧 성명 발표가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일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갔다. 결국 어디든 유통이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나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남편과 의논해 보겠어요. 변호사를 불러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루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가 외출에서 돌아온 루나를 맞이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오셨군요, 공작 부인. 응접실에 손님맞이 준비를 끝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낮에는 페니가 놀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요즘 아카데미 시험 기간이라 아키스도 매일 출근을 하고 있었기에 아직 그도 귀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루나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페니와 티타임을 할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그녀를 소홀이 할 수도 없었다. 예상외의 상황에 대해 페니와 대화를 하며 긴장을 풀고 싶기도 했다.
곧, 페니의 마차가 도착했다. 루나는 현관으로 나가 직접 페니를 맞이했다.
“어서 와, 페니.”
루나는 페니의 팔을 잡고 그녀를 손님맞이가 준비된 응접실로 안내했다.
페니는 루나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책 출간 준비가 잘 되어 간다며. 한참 과정을 상담하더니, 이젠 출간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
페니는 요즘 책 출간 준비를 하며 줄곧 생기가 넘치는 루나를 보며 은근히 귀엽다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녀를 맞이하는 루나의 얼굴이 며칠 전과 딴판이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루나의 유일한 친구인 페니가 놀러 왔을 때, 시간을 보내는 응접실은 기존 1층 응접실을 새로 꾸민 공간이었다.
부인용 데이베드가 여러 개 배치된 방은 붉은 벨벳으로 벽이 장식되고, 바닥에는 호화로운 양탄자가 깔린 중간 사이즈의 방이었다.
루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페니가 말문을 열었다.
“무슨 문젠데?”
“사실은…….”
루나는 페니에게 상황을 털어놓았다. 대형 서점 다섯 곳의 횡포에 대한 사정이었다.
“일이 꽤 커졌는데, 이런 일로 출간이 힘들지도 모른다니 힘이 빠졌어. 사실 지금도 심장이 계속 뛰어. 은근히 놀랐나 봐.”
“남편하고는 의논해 보았니?”
“오늘은 그이가 아카데미에 일을 보러 갔어. 돌아오면 의논해 보려고 해. 사실 남편에게 도움을 받지 않겠다 결심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더 걱정돼.”
페니는 그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루나가 말을 이었다.
“정말 이상해. 익명 출간은 흔한 일이라고 들었거든. 왜 갑자기 대형 서점들이 똘똘 뭉쳐 출간을 하지 않겠다고 드는 걸까? 경계하기엔 고작 책 한 권인걸.”
“……글쎄,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출간한 책인 게 문제 아닐까?”
“응?”
페니는 무언가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알기로 수도에서 가장 큰 유통 서점이 라미라 가문 상회인 소유인 것으로 알아.”
“……그럼 이게 달리아 드 라미라의 짓이라는 거야?”
“조사해 봐야겠지만, 내 생각으로 그 애는 그러고도 남아.”
“도대체 왜 내게 그렇게까지 한다는 거야?”
“그걸 알면 내가 이 꼴이 안 났지.”
페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
“응?”
루나는 페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방법인데?”
“일단 나도 집에 가서 의논을 좀 해 볼게.”
“의논이라니……?”
“부모님과 의논하겠다는 말이야. 걱정 마, 나쁜 방법은 아니니까.”
페니의 입술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집이 엄청난 부자라는 건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었다.
* * *
그날, 귀가한 아키스는 루나에게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보내 이 미심쩍은 일을 조사해 주었다.
디온은 시내로 나가 몇 가지를 알아보더니 바로 돌아와 보고했다.
“……배후에 라미라가가 있다는 예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형 서점 중 가장 큰 곳인 <루이스 유통 서점>의 주인이 대형 서점 점주들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합니다. 그 뒤 대형 서점 연합에서 성명서를 발표했고요. <루이스 유통 서점>의 소유주가 라미라 상단입니다.”
“……라미라 후작이 미쳤군. 제 딸아이의 철없는 바람을 들어주고자 공작가에 시비를 걸다니.”
아키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루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책 출간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해결할 방법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지요. 그리고 두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뭔데요?”
“첫 번째는 법을 바꾸는 겁니다.”
“……네?”
“황족이 예술 계통의, 소위 귀하지 못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건 오래되고 낡은 법이지요. 이 법은 고대에는 사람들이 쾌락에 빠지는 일이 많아, 황족의 금욕적 생활이 중시되었기에 생긴 초기 법입니다. 그러니 헌법 수정을 청원해 볼 수 있습니다. 마법에 관련된 법이라면 모를까, 관습법은 비교적 건드리기 수월하거든요.”
법을 바꾼다니 정말 큰일이다 싶었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요?”
“라미라 상단의 대형 서점을 망하게 하는 겁니다.”
루나는 그 말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시간이야 좀 걸리지만 자금줄을 압박하면 됩니다.”
“그럼 두 방법의 단점이 뭔데요?”
“먼저 두 가문의 다툼이 커질 수 있고, 둘 다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기회군요. 라미라 가문이 그리 나왔다면 상하를 가르쳐 줄 때가 된 거지요 안 그래도 한번 손봐 주려 했습니다.”
루나는 그 말에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책 출간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제국 3대 명문가의 내전의 원인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뇨, 난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요. 거기다 출판사 측에서 출간이 시간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 했어요. 작품이 입소문을 탄 동안 출간해야 승산이 있다 했거든요.”
현재 제국 출판 시장은 기성 로맨스 작가들이 쟁쟁했고, 이미 유명한 몇 가지 레이블이 로맨스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그 안에 루나의 새 신간이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니, 귀족들의 입소문을 이용하자는 것이 출판사의 전략이었다. 만일 아키스가 말한 방법을 쓴다면 시간을 끄는 동안 월플라워 부인의 화제성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겠군요.”
아키스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실력 행사나 협박을 하는 방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쪽이 더 빠르긴 했다.
하지만 아키스가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 루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나도 조금 더 방도를 생각해 볼게요. 의논해 줘서 고마워요, 아키스.”
* * *
그 무렵, 페니는 모친인 르시타 후작 부인에게 달려가 이 일을 모두 고했다.
“달리아라면 그런 음모를 꾸밀 수도 있지. 그 여자애는 공작 일이라면 제정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후작 부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공작 부인을 돕고 싶다고? 가문의 힘으로 압박을 가하는 거면 공작가에서 직접 하는 것이 나을 터인데. 혹, 공작이 부인의 일에 힘을 쓰지 않는다 하니?”
“그럴 리가요.”
페니는 잠시 아키스에 대해 떠올렸다. 요즘 아키스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 얼굴 보기도 귀하신 분께서, 아주…….’
극장 사건 이후로 페니는 종종 루나의 집에 놀러 갔다.
페니는 이제 루나와 수다를 떨거나 놀 때 불쑥 찾아와 안부를 묻고 가는 아키스에 익숙했다. 구실은 안부지만 제 아내가 보고 싶어 기웃대는 것이다.
그런 사내이니, 아내 일에 발 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페니는 아키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루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번만큼은 제가 공작 부인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집안에 소유한 건물 중, 갤러리 거리 중앙에 있는 잡화점 말인데요…… 그 잡화점의 소유권을 3년 전에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생신 선물로 주신 걸로 알아요.”
페니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르시타 후작 부인은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도움이 되겠구나. 네가 저번에 말하기로 공작 부인이 감히 네게 무례하게 구는 영애들을 큰소리로 꾸짖었다 했지?”
“네, 기억하시네요.”
“네 편을 들어 줄 친구라면 너도 두말할 것 없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렴. 르시타 가문의 힘을 보여 줘.”
역시 어머니는 이해가 빨랐다.
페니는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나는 급히 만나자는 페니의 편지를 받고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그녀가 갤러리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서점 외의 곳에서 책을 팔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우편 판매를 한다든가…….’
루나는 고심하는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갤러리 거리 한복판 분수대에서 루나를 기다리던 페니가 미소 띤 낯으로 다가왔다. 루나는 페니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랑 다르게 갤러리라니, 쇼핑할 것이라도 있어? 무슨 일이야?”
페니는 그날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루나의 손을 잡고 갤러리 거리를 사뿐사뿐 걸었다.
“네 고민을 해결할 방법 중 하나를 제안하려 해.”
페니는 여태껏 루나가 봐 온 것 중에 가장 자신감이 넘쳤고 도도해 보였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안이라니? 좋은 수가 떠오른 거야?”
“먼저, 이리 와.”
페니는 루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루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페니가 워낙 훤칠해서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곳 기억하니? 갤러리 중앙에 있는 최고급 잡화점 말이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거긴 정말 별세계잖아. 예쁜 물건들을 가득 파는 그 큰 상점 말하는 거지?”
갤러리 중간에는 수도 최대 규모의 큰 여성용 잡화점이 있었다.
르시타 가문의 소유인 그곳은 드레스와 보석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파는 곳으로, 여성용의 화장품과 자잘한 미용 도구부터 스카프, 양말, 손수건을 비롯한 여성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치장하고 다듬는 모든 물건을 파는 고급 잡화점이었다.
또 잡화점인 만큼 중산층도 큰맘 먹고 살 수 있는 가격대의 물건들도 많았기에, 물건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아침저녁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래. 그곳 말이야.”
“……설마.”
루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페니가 루나를 잡화점 안으로 안내했다. 그러곤 화려한 잡화점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서 책을 판매하는 것이 어때? 독점 판매 말이야.”
“……하지만, 이곳은 서점이 아니잖아? 나도 잘 모르지만 책 판매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루나는 <달빛 서점>에서 일했던 당시 필립에게 여러 가지 주워들은 것이 있었다. 듣기로 서적은 서적 나름대로 판매 규정이 있으며, 허가 받은 서점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 들었다.
“잊었니? 여긴 잡화점이야. 여인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을 파는 곳이지.”
“……아.”
루나는 잡화점 정중앙의 진열대를 보고 감탄했다. 진열대에는 여인들에게 인기 있는 여러 종류의 잡지들이 팔색조 같은 아름다운 표지를 과시하며 진열되어 있었다.
“이 가게는 이미 서적 판매 허가 받은 곳이야.”
“그렇구나. 이곳에서도 책을 판매할 수 있겠어…….”
루나는 페니의 생각에 감탄했다. 페니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 중앙을 전부 다 비워 줄게. 여기서 책을 팔아.”
“그렇게까지 신세를 져도 될까?”
루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페니의 가문에 너무 의지하는 일이 아닐까?
페니가 도도하게 말했다.
“당연히 판매 수수료는 뗄 거야. 많이 팔아서 이윤을 남겨 주면 되잖니?”
그 말에 루나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페니도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제국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 뭐지?”
루나와 페니는 동시에 대답했다.
“한정판.”
그다음에 루나와 페니는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출판사에 가야겠다. 아니다, 같이 가자.”
“좋아.”
루나와 페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가게를 나섰다.
* * *
“고급화 전략으로 책 판매 방법을 바꾸자는 거군요. 위험한 시도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일리는 있어요. 어차피 귀족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책이잖아요?”
“먼저 1차로는 금박 글씨와 최고급 가죽을 쓴 양장본을 판매하고 입소문이 돌기시작하면 2차로 종이 표지의 책을 판매하는 거예요. 한정판과 일반판을 차별화하는 거죠.”
루나는 마차를 타고 오며 페니와 급하게 교환한 의견을 내놓았다.
출판 담당자인 벨은 두 명의 의견을 귀에 꽂고 있던 펜으로 정신없이 적어 넣었다.
“좋아요, 그거 괜찮은 이야기군요. 하지만 대형 서점 쪽은요?”
“일단 책의 가치를 올려 대중적으로 히트만 시키면, 대형 서점 다섯 곳 중의 최소한 한 곳은 굽히고 들어올 거예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게 장사치들이죠. 그럼 마지 못하는 척 일반판 책을 보급할지 말지 결정하면 되어요. 그들의 태도를 봐서 말이죠.”
“일단 책이 히트를 쳐야겠군요. 저희 쪽에서도 로맨스 도서 레이블을 가지고 있긴 한데…….”
제국에서는 로맨스 소설을 출판하려면 아무리 작은 출판사라도 레이블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 레이블에서는 다양한 작가들의 책을 출간했지만, 책을 선정하고 편집하는 건 출판사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레이블의 브랜드 가치도 몹시 중요하게 여겨졌다. 작가들은 레이블의 이름을 믿고 신인 작가의 책도 서슴없이 구입했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 이번 출간은 조금 더 차별화되어야 할 것 같아요. 새 레이블을 만들어야겠어요. 저번에 말씀하시길, 이미 후속작이 있다 했지요?”
출간에 관련해서는 붉은 책과 의논해야 하지만, 이미 <보석 영애 이야기>가 완결 났다. 그 이야기 또한 소름 끼치게 재미있었다. 루나가 마음만 먹으면 그것도 바로 출간이 가능했다.
“있어요.”
“두 권 이상만 있어도 레이블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요. 그러면 아예 새 레이블을 만듭시다. 레이블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벨의 질문에 루나는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달빛이 비치는 신비한 도서관.
거기 들어갔다 나온 후, 고대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루나가 지금 이 일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도서관 덕분이었다.
“……레이블 이름은 문(moon)으로 해요.”
“그럼 러브 문(love moon)이라는 이름은 어떠신가요? 저희 로맨스 소설 레이블의 기존 이름이 러브거든요.”
“사랑과 달빛은 뜻이 비슷하지. 달은 환상과 추억, 꿈을 은유하는 단어기도 하니까. 그러니 속뜻은 둘 다 비슷한 단어야. 괜찮은 이름이네.”
페니가 의견을 내어 놓았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책 디자인부터 바꾸어야겠군요. 그리고 황후 폐하의 추천사를 서문에 넣도록 하죠.”
벨은 바쁘게 움직였다.
페니와 루나는 서로를 바라보고 의미 있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하여 일은 쏜살처럼 진척되기 시작했다.
* * *
마침내 책이 나왔다.
“와…….”
초회 한정판으로 출시된 책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남색의 가죽 양장에 번쩍이는 금박을 아낌없이 장식한 표지에서는 돈 냄새가 풀풀 풍겼다.
‘책 한 권 단가가 상당히 높으니,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것이 힘들겠어.’
과거 상업학을 공부한 페니는 아는 것이 많았다. 루나는 그녀에게 ‘손익 분기점’이란 단어를 배웠다. 책을 만들고 홍보한 비용이 판매 수익과 맞먹을 때의 분기점을 손익 분기점이라고 했다.
보통 제국에서 책 한 권이 저렴한 것은 은화 두 개, 비싼 것은 은화 네 개였는데, 페니의 조언으로 루나는 파격적으로 책 가격을 무려 은화 아홉 개로 결정했다.
그렇기에 한 권만 팔아도 이득이었지만, 반대로 실패할 경우의 손실도 몹시 컸다.
‘책을 가능하면 많이 뽑아, 과감하게 배팅 해. 책은 이미 화제야. 그러니 초반엔 팔릴 수밖에 없어.’
페니는 사업가의 딸답게 과감한 구석이 있었다. 루나는 그 조언에 동의했다.
그리고 출판하기로 한 출판사는 자금이 꽤 탄탄한지 유명 여성 잡지와 수도 곳곳에 광고까지 걸었다. 한정판 단독 판매임을 널리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돈을 너무 많이 썼는데……. 망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이쯤 되자 루나는 등골이 살짝 써늘했다. 최악의 경우, 공작가에서 책으로 손해 본 비용을 출판사에 갚아 줘야 할지도 모른다.
‘아냐, 책은 정말 재미있어. 최소한 본전은 찾겠지.’
그 외에도 최근 매사에 무심하여 사교계에 거의 등장하지 않은 황후가 대외적으로 추천사까지 써 주었다는 것도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우습고, 유쾌하고, 자극적이지만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추천사는 그녀답게 간결했다.
마침내 출간 전날이 되자, 루나는 은근한 긴장을 느꼈다. 그녀는 저녁 식사 전에 방에 틀어박혀 책에게 말을 걸었다.
<내일 세간에 책이 공개돼. 기억나? 익명 출간이라 필명을 사용할 거야. 작가 이름은 네 표지를 따 레드로 결정했어. 긴장되지 않아?>
<제가 긴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세요?>
루나는 책의 대답에 작게 웃어 버렸다. 하긴, 책이 어떻게 긴장하겠는가.
<너 또한 마법만큼이나 고대의 소중한 유산이야. 널 알리게 돼서 기뻐.>
루나는 그러면서도 언젠가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 세상에 당당하게 공표할 수 있으면 좋을까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과를 내놓는 마도구라니, 혹여나 발표된다면 마법계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루나는, 그 발견자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책이 출간되면 가치 있는 감상들을 선별해서 전해 주세요. 그럼 저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게 저의 존재 이유입니다. 자아가 있는 마도구들은 목표가 있고, 그것이 제 목표니까요.>
루나는 피식 웃었다.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존재 목표라니, 마도구가 인간보다 나았다.
곧 이어진 저녁 식사 시간에도 루나의 긴장은 풀어질 줄 몰랐다.
“왜 그래요, 루나?”
아키스가 그녀의 모습을 살피며 물었다.
“아, 일을 크게 벌이고 나니 조금 긴장이 되어서요. 내일 어떨까 싶어요.”
루나는 식사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키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비판 받거나 주목 받는 것이 싫어 익명으로 남편이나 식솔들에게도 비밀 아닌 비밀을 만든 그녀다. 그런 그녀이니 다소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다.
“잘될 겁니다. 걱정 마요.”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읽어 본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야기 구조가 아주 괜찮았으니 말이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해요?”
“수학이든 예술이든 마법이든, 훌륭한 것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좋은 구조와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토대가 탄탄한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사랑 받는 법입니다.”
아키스가 이렇게 길게 칭찬한 건 처음이었다. 루나는 붉은 책이 그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 기뻤다.
‘그건 그렇고, 대단한 사람이야.’
루나는 아키스에게 자신이 책을 내는 걸 모른 척해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그렇게 행동했다. 오늘 그녀가 이야기를 직접 꺼내기 전까지 그는 출간에 관해 한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휘멘이 왜 그이에게 변태라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보통 사람이 이렇게까지 칼 같나 싶었다.
그러나 루나는 그의 그런 면이 좋았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사내다우면서도 강압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꽤 존중해 주는 사내였다.
“……고마워요, 아키스.”
루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아키스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알아서 잘되겠지만.’
혹여나 글이 잘 안 될 경우, 그녀는 크게 낙담할 것이다. 그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아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아카데미 문학부 교재로 채택해 쓰는 법도 있고, 화제성을 더 만드는 법도 있고…….’
아내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였지만, 다행히도 상식선을 지킬 줄은 알았다. 사재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잘 알았다.
‘일단은 추이를 봐야겠군.’
그는 묵묵히 뒤에서 루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언제든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면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품으며.
* * *
갤러리.
제국 수도 최고의 고급 쇼핑가.
실내 지붕이 씌워져 손님들이 쾌적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곳. 그곳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인 타르티아 잡화점 중앙 진열대는 이래적으로 기존의 모든 진열 물건을 뺐다.
그리고 단 한 종류의 책을 수없이 진열해 두었다. 반짝이는 금박 글씨의 남색 책이 조명 아래 위치하자, 그 모습이 볼만했다.
“전용 계산대도 준비되었고, 점원도 충원했어.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
가게 오픈 전, 루나는 페니와 함께 내부를 돌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하아, 아직도 긴장돼…….’
익명 발표이니 만큼 책이 망한다 해도 비난 받지 않을 것이다. 루나는 대외적으로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고 있었다.
‘내용은 참 좋은데. 너무 파격적이라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붉은 책은 이야기 대한 애착과 소유 따윈 없다고 했다. 그야 책은 감정을 못 느끼니까. 그러니 결국 세상에서 <월플라워 부인>에 애착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루나뿐이었다.
“정말 손님들이 올까?”
“나는 요즘 사교계 소식엔 어둡지만, 우리 어머니는 여전히 사교계의 마당발이거든. 듣기로 나이 있는 귀부인들이 살롱에서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꽤 한대.”
페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픈하면 멀리 떨어져 있어.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네가 실질적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잖니. 그러니, 근처를 맴돌면서 초조해하면 없어 보일 거야. 사교계는 이미지가 생명이야.”
오늘도 페니의 충고는 뼈와 살이 되었다.
가게 점원들이 가게 2층 난간 위에 작은 테이블 자리를 준비해 주었다. 1층 진열대가 보이는 자리였다. 페니는 루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대형 서점들이 더 강경하게 나오고 있어서 오늘 작품이 잘 팔리지 않으면 책은 그대로 사장되는 거야.”
루나는 바쁘게 개점 준비를 하는 점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달리아가 어떻게 대형 서점 점주들을 구워삶았는지, 그들은 꾸준히 책 출간을 항의하는 성명서를 여러 번 출판사로 보냈다.
“심지어 오늘은 직접 찾아와 정식 항의까지 하겠다고 했잖아.”
“진짜 오겠니? 다 으름장이야. 사업가들은 원래 그래.”
제국은 풍요로웠기에 시골 영지에까지 교육 시설이 발달되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 농민 아이도 2, 3년은 기초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문맹률이 낮아 제국의 서적 시장은 상당히 규모가 있는 시장이었다.
그런 만큼 대형서점 점주들은 돈줄이 위협 받자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이런 방식의 독점 판매가 유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페니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내일이 없는 거지. 그렇게 처신해서 공작의 분노를 사는 걸 모르고. 지금 당장은 공작이 네가 온건히 성공하길 바라 가만히 있지만, 그 성질머리에 진짜로 가만히 있겠니? 잊지 않고 라미라가와 대형 서점에 보복할 텐데, 아주 집단으로 뭉쳐 조직적으로 무덤을 파고 있으니 웃기는 일이지.”
페니는 그리 말하며 피식 웃었다.
아키스에 대해 칭찬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건 루나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게 오픈 시간이 되었다.
* * *
“……아무도 안 오잖아?”
가게 오픈 시간이 되자마자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개점 30분이 지나도록 오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잡화코너가 썰렁했다.
루나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점차 손발이 떨리며 초조해졌다.
그런 루나를 바라보던 페니가 여상하게 말했다.
“기다려 봐. 우리 가게는 동네 구멍가게가 아냐. 부자 손님들은 보통 이 시간까지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슬슬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인걸. 고급 잡화점은 개점 시간에 한산한 편이야.”
루나를 위로하고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렇게까지 손님이 들지 않는 날은 페니로서도 처음이었기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를 불안하게 할까 둘 다 말을 아꼈다.
루나를 도와주려고 잡화점의 센터 자리를 빌려준 것인데, 가게 자체에 손님이 오지 않아서야 문제였기 때문이다.
‘……서적 판매 때문에 잡화 손님까지 들지 않는 건가?’
한편, 여전히 긴장한 루나는 그런 생각까지 떠올렸다.
“오후까지 추이를 지켜보자.”
페니가 속삭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그러곤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했다. 거리에 치안 기사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디로 몰려가고 있었다. 거리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루나는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혹시 거리에 무슨 사고라도 있는 걸까?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문에 정신을 팔고 있던 루나가 등을 돌리자, 1층에는 정말 거짓말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
어느새 진열대 근처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줄을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정판 책을 판매한다지요?”
“제 주인님께서 책을 세 부 사 오라 하셨습니다.”
하인도 있었고, 직접 외출 나온 귀족도 있었다.
의외로 남자도 많았다. 판매 사원들이 급하게 장부를 적고 책을 팔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나왔습니다. 시녀들이 단체로 책을 구입하고 싶다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이 책을 좋아하시니, 시녀들에겐 필독서거든요. 백 권 주십시오.”
“배…… 백 권이요? 알겠습니다.”
“정문의 가드들을 불러 책 상자를 나르라고 해요!”
루나가 마지막으로 본 손님은 근위 기사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백 권을 구입하는 모습에 루나는 솜털까지 쭈뼛 섰다.
점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움직였다. 결국 다른 파트의 점원들까지 달려들어 책 판매하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루나와 페니는 동그랗게 뜬 눈을 교환했다. 그러곤 환호성을 지르지 않기 위해 겨우 꾹 눌러 참았다. 페니는 루나의 손을 꽉 잡고 뒷문으로 나왔다.
입을 여는 루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 여기서 계속 책이 판매되는 걸 지켜보면 안 되겠지?”
“안 돼. 없어 보여. 고급스런 인상을 유지해야지.”
페니가 루나에게 밉지 않게 잔소리를 했다. 루나는 몸가짐을 다듬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
“아주 좋아.”
루나와 페니는 뒷문을 지나 앞문으로 나갔다.
문 밖까지 사람들이 진을 치며 줄 서 있었다. 루나의 마음속에 비로소 안심이 차올랐다.
“혹시, 아까 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루나는 앞을 지나가는 치안 기사를 붙잡고 물었다.
그는 루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여염집 귀부인이라 생각했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루나 같은 젊은 귀족 여성이 기사에게 거침없이 말을 거는 일은 잘 없었기 때문이다.
“네. 사실 갤러리 거리 앞쪽에서 대형 서점 연합의 점주들이 모여 불법 출간을 규탄한다면서 시위를 하고 있었지 뭡니까?”
“……그래요?”
루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일까?
“그런데 아주 근거 없는 불법 시위라, 우리 치안 기사들이 모두 끌어냈으니 안심하고 쇼핑을 즐기시면 됩니다.”
루나는 페니를 돌아보았다. 페니도 즉시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그랬군.’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들의 시위가 마차들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었던 것이다.
“웃기는 사람들이네, 아주 혼이 나야지.”
페니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거 아니? 장사꾼들은 본능으로 돈 냄새를 맡아.”
“……그래?”
“그래. 저 대형 서점 점주들이 저토록 강경하게 나오며 널 경계하는 걸 보면, 아마도 이 소설은 아주 흥행할 거야.”
루나는 본능으로 돈 냄새를 맡는 건 장사치들뿐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페니 또한 그런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나는 페니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그날 오후, 판매 장소인 <타르티아 잡화점>에서는 몰려오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 뒷문에 따로 도서 구입자 전용 입구를 열었다.
책은 1초가 멀다 하고 쉴 틈 없이 팔렸고, 갤러리에 평범하게 쇼핑을 하러 온 이들까지 무슨 일이냐며 몰려들어 잡화점은 사람들로 몸살을 앓았다.
“<월플라워 부인>은 전용 계산대가 있습니다. 줄을 서 주세요!”
“<월플라워 부인>과 다른 물건을 같이 구입할 경우에만 기존 계산대 사용이 가능합니다!”
덩달아 다른 상품마저 매출이 크게 올랐다. 타르티아 잡화점의 물건들은 고가기도 했지만, 나도 한 번쯤은 무리해서 사 볼까? 싶은 품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사러 온 중산층의 부인들이 한두 개씩 물건을 추가 구입하며 덩달아 매상의 호재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대대적인 신문 기사까지 났다.
[월플라워 부인, 황후가 극찬하고 공작 부인이 소개하는 이야기책이 화제.]
[갤러리 거리로 몰려든 손님들.]
“……이게 무슨 일이야?”
신문도 신문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더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오늘도 책의 판매 추이를 보기 위해 마차를 타고 외출한 루나는, 아침 일찍 사람들이 긴 행렬을 만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마차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설마…….”
그러고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잡화점 개점 시간도 전에 사람들이 갤러리 거리 바깥까지 줄 서 있었다.
“모두 길 한편으로 비켜서세요!”
“질서를 지켜요!”
치안 기사들까지 출동하여 줄 선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루나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와 페니가 예측한 대로 책이 ‘유행’이라는 물살을 탄 것이었다.
제국 부유층. 즉, 귀족들과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유행하는 물건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 줄 알았다. 너도나도 하인을 보내 책을 구입하려 했다. 지금 당장은 책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수중에 넣는 게 우선이었다.
개점 시간이 되자 더 난리였다.
사람들은 유행이라는 이유로 책을 여러 권 구입했다.
“한정판은 소장할 가치가 있다지?”
루나는 분명히 출판사를 통해 책은 한정판이 먼저 발매되고 일반판도 곧 발매될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책이 흥행에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사람들은 더욱 한정판을 구하고 싶어 했다. 나중에 한정판 값이 올라갈 것이란 계산 때문이었다.
오전에는 어제 책을 사재기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웃돈을 붙여 줄을 선 사람들에게 책을 판매하려다가 들켜서 치안 기사들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다.
줄을 선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루나는 정신이 없었다.
“공작 부인, 조심하십시오.”
루나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가 놀라서 말했다. 숨 쉴 틈 없이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책 한 권을 사자고 다들 이렇게 나와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어…….’
그때, 한 무리의 하인들이 루나를 스쳐 지나갔다. 정신없이 서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루나.”
시끄러운 사람들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몹시도 익숙했다.
아키스였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당신이 채 아침을 먹기도 전에 뛰어나가니, 어디로 가는지야 뻔하죠.”
아키스는 루나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정신없는 사람들 틈을 지나쳐 갔다. 탄탄한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사람들에게 치이는 일 없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위험하니, 이제 집에 돌아갑시다.”
“그치만…….”
그러나 루나는 미친 듯이 책이 팔리는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
아키스는 그런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어 버렸다.
“여기, 구경하고 싶습니까?”
“책이 이렇게 잘 팔리는 것이 신기한 걸요…….”
“그럼 계속 구경합시다. 이리 와요.”
“네?”
아키스는 루나를 데리고 한 건물로 들어갔다.
“여긴 어디예요?”
“내 소유의 호텔입니다. 발코니에 자리를 만들어 달라 할 테니, 거기서 천천히 구경해요.”
이쯤 되니 갤러리 쪽에 건물 하나 없는 건 자신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는 시내에 호텔을 가지고 있어 예전엔 종종 거기서 지냈다는데 이곳이 그 호텔인 것 같았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은 채 호텔 직원들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2층의 객실로 올라갔다.
객실은 산뜻한 마룻바닥에 붉은 벨벳과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월플라워 부인을 구입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인 거리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준비한 일이 이렇게 잘되다니…….”
루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좋은 날이니 샴페인을 마셔야겠군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그리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오늘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곧 호텔 직원들이 황금빛 샴페인과 딸기, 초콜릿을 가져왔다. 루나는 아키스가 샴페인을 가져오는데도 발코니에 난간을 붙잡고 앉아 거리 풍경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좋아요?”
“……잘 모르겠어요.”
루나는 아키스가 건네는 샴페인을 받으며 그를 보았다.
문득 번역 일을 할 때가 떠올랐다. 정체를 숨기고 사는 일이 두려웠지만, 그때는 숨 막히게 살았던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달랐다.
그냥, 심장이 뛰고 아직 샴페인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마치 두 번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 느낌은 차라리 사랑 같았다. 기쁨으로 머리가 팽팽 도니까.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냥 내가 뭘 해낸 것이 처음이라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내가 이런 일을 해낼 것이라 생각도 못했거든요.”
아키스는 루나의 옆에 앉았다.
그들은 좁은 발코니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뺨을 기댔다. 곧, 그녀는 살짝 흥분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훌륭해요, 당신은 내 자랑입니다.”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 웃었다.
“이번엔 질투 안 해요? 요즘 일에 빠져 당신에게 소홀했는데.”
“난 내가 당신에게 가장 관심받고 존중받는 사람이면 됩니다. 일과는 경쟁하지 않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한다면 존중받아야 하는 거니까.”
아키스가 그녀를 살짝 떼어 내며 마주 보았다. 루나의 뺨이 상기되고 녹색 눈은 기쁨으로 그렁그렁 빛났다.
“키스해요, 우리.”
루나가 속삭였다. 그녀의 안에서 묘한 환희가 떠올랐다.
루나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아찔하고 급한 키스가 시작되었을 때, 루나는 그를 자신이 터무니없이 흥분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아키스는 목마른 사람처럼 그녀를 빨아들이고 급하게 바닥에 눕혔다.
“잠깐, 이대로는 아래에 다 보여요…….”
루나가 급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루나의 몸은 그에게 끌려가듯 떠올랐다. 아키스가 그녀를 한 팔로 안고 급하게 커튼을 친 것이다.
몸 안에서 이상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벽에 등을 대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혀와 혀가 진득하게 얽혔다. 말캉한 감촉이 서로의 열정을 대신했다. 맞닿은 곳에서 끈적한 타액이 줄줄 새는데도 몰랐다.
“오늘은 내 아내의 기분이 이렇게 좋으니.”
아키스가 속삭였다.
“각별하게 봉사해야겠군요.”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루나는 척추를 타고 흐르는 찌르르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니 벗어요, 내가 당신을 기분 좋게 만들려면 빨아야 하니까.”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해서 손이 바들 떨리면서도 극도의 흥분이 계속되었다. 루나는 등을 돌리고 위에서부터 드레스 끝을 풀었다.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도왔다. 옷이 스르르 벗겨졌다.
그가 루나의 거들을 확 잡아 내렸다. 루나는 순식간에 벽을 잡은 채 알몸이 되었다. 루나는 등을 돌리려했다. 아키스가 만류했다.
“오늘은 뒤에서부터 빨 겁니다.”
아키스가 무릎을 꿇는 게 느껴졌다. 그는 허리를 어루만지며 엉덩이에 이를 세웠다. 루나는 파득 몸을 떨었다.
“아!”
그는 낼름낼름, 말랑하고 포동한 엉덩이를 깨물고 핥았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 골부터 회음부, 허벅지까지. 혀와 입술을 이용해 쉴 새 없이 애무했다.
“아, 아키스!”
그가 조그만 항문에 손을 가져다대자 루나는 펄쩍 뛰었다.
“쉬. 살짝 만지기만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 온몸을 애무할 거라고. 그냥 예뻐하기만 할 겁니다.”
그가 속삭였다. 손가락과 혀가 질척하게 오가고 춥춥 핥는 소리가 날 때마다 벽을 잡은 팔이 떨리고 루나의 손이 후들거렸다.
“이제 뒤돌아요.”
루나가 등을 돌릴 때 다리 전체가 후들거렸다,
아키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수풀 사이에 코를 파묻었다. 그가 음핵을 아랫입술로 문질렀다.
춥, 춥.
그는 정성을 다해 봉사했다. 이미 질척하게 젖은 그곳에 아키스의 혀가 드나들었다.
음탕하게 빠는 소리가 났다.
“아아!”
결국 루나는 선채로 한 번 절정을 맞이했다.
“굉장히 젖는군요. 가는 것도 평소보다 빠르고-.”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애액에 아키스가 손바닥으로 길게 허벅지를 문질렀다.
“어쩌면 이렇게 흘러요, 바빠서 못해서 오늘따라 기분 좋은 겁니까.”
아키스가 키득였다.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내가 상대 안 해 줬다고 삐친 거 아녜요?”
“설마. 당신 기분 좋은 날이라, 좋아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요.”
아키스가 장난기 어린 눈을 휘었다. 이럴 때면 정말 낮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럼 진짜로 좋아하는 거, 해 줘요.”
루나가 입술을 삐죽이다가 말했다. 아키스가 숨을 들이켰다.
“어떤 거?”
“…….”
망설이던 루나가 조그맣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거.”
루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박아 줘요?”
“으, 으응…….”
아키스가 단번에 루나를 안아 올렸다. 그는 호텔의 침대 위로 루나를 올렸다. 그는 질척하게 젖은 질구에 자신을 맞췄다. 그가 단번에 삽입하자, 루나는 자동으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움직여 줘요, 아키스. 빨리.”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하는 섹스는 마약 같았다. 루나가 붉어진 목소리로 졸랐다.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야할까. 이미 당신이 드레스 벗을 때부터 미칠 것 같았는데.”
아키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루나는 마주 허리를 움직였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였던 것 같은 살덩이들이 맞물리며 완벽한 쾌락을 만들어 냈다.
퍽퍽!
찌걱이는 소리가 점점 거세져 갔다.
마구 튀는 루나의 애액이 아키스의 음모를 적셨다. 한참을 움직이던 그는 이제 크게 허리를 움직여 쾅쾅 박아 넣었다.
“흐읏, 아……!”
그때마다 루나는 더 그에게 엉겨 붙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가슴을 주무르며 깊게,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그간의 금욕을 해소하듯 자신을 풀어놓았다. 이윽고 아키스가 폭발했을 때, 루나는 두 번째 절정을 느끼며 침대 위에 늘어졌다.
“으응, 아키스……!”
아키스가 빠져나가자 루나는 허무감마저 느꼈다. 몸 안을 빠듯하게 채우는 그 엄청난 감촉에 중독된 건지도 모른다. 아키스는 약속을 지켰다.
아까 놓친 부분에 혀를 대고 애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앗, 거긴. 아키스, 좀 쉬었다…….”
이를테면 겨드랑이 안쪽, 무릎 뒤, 목 뒤까지. 온몸을 그에게 내맡긴 채 깨물린 루나는 몇 번이고 절정을 맛보았다.
* * *
한 달 동안의 판매 기간을 가지려던 책 한정판은 고작 사흘 만에 동이 났다.
타르티엔 잡화점은 당당하게 신문 광고를 냈다.
[여성이 원하는 모든 물건을 파는 타르티엔 잡화점, 이번엔 제국인들의 즐거움을 팔다.
월플라워 부인 2권 한정판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잡화점 매출 상승도 상승이었지만, 수도 최고의 고급 잡화점을 표방하는 타르티엔 잡화점은 <월플라워 부인> 한정판 판매로 면을 세웠다.
페니는 오랜만에 몸가짐이나 숙녀의 교양 외의 사업적 유능함으로 아버지에게 극찬을 받았다.
* * *
“우리, 성공했어.”
루나는 페니의 손을 붙잡고 결연하게 말했다.
“책이 엄청나게 팔리고 있대. 돈도 많이 벌게 될 거야, 너의 판매 전략과 도움은 다 옳았어, 페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그런데 페니는 루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표정도, 대답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루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페니의 눈가에서 눈물이 반짝인 탓이었다.
“페, 페니? 왜 그래?”
루나는 기겁하며 말했다.
페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어?”
영리한 페니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네가 잘된 걸 보니 좋아서. 책 출간은 정말 용기 있는 결정이었어.”
“페니…….”
“네 일을 도우며 나도 보람찼어. 네 일이지만, 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거든. 나 꼭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거야. 아무리 반대하셔도 꼭.”
사교계에서 돋보이고, 또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해 신부 수업을 받았다. 꽤 좋아하던 공부마저 사교계에 진출을 위해 중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의 사교계 생활은 망가졌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한 때, 자신의 능력으로 루나를 도울 수 있었다는 건 생각보다 그녀의 자존감을 회복시켰다.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몹시도 즐거웠다. 보람찼다.
“누군가 날 이렇게 도와준 건 처음이야.”
루나가 수줍게 속삭였다.
“정말, 네가 있어 다행이었어. 고마워, 페니.”
페니의 말에 루나도 왠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들은 더 깊어진 유대를 느끼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 능력이 페니를 도왔어. 페니는 날 도왔다고 하지만, 사실 우린 서로를 도와준 거야.’
루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느끼며 생각했다.
* * *
이렇게 월플라워 부인이 수도를 뒤흔드니, 결국 5대 대형 유통 서점에서는 책을 판매 금지하겠다는 선언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초라한 패배였다. 그들은 은근슬쩍 일반판은 자기들이 유통을 맡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죠. 먼저 그쪽에서 책을 구입하지 않겠다 했는데 왜 이제야 그쪽 좋은 일을 해 주나요?”
루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일반판 발매일.
이례적으로 출판사는 직접 소형 서점들에 직접 책을 유통하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시도라 여러 가지 난항이 있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책 판매는 잘되었고 출판사와 루나는 유통 서점을 끼지 않고도 훨씬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유통 서점에서는 소형 서점에 책을 공급하며 수수료를 떼었기 때문이다.
“이건 변칙이고 위법입니다!”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요!”
그러자 라미라 후작 가문의 소유인 루이스 서점을 필두로 대형 유통 서점들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일시에 세무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가 직접 추천사를 쓴 책을 이렇게 작정하고 짓밟으려 들다니, 제국민으로서 기본적인 황가에 대한 존경심이 없군.”
황후는 기분이 단단히 상했다 한다.
보복성 조사였지만, 조사 기간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루이스 서점에서 일부 소형 서점들에 뇌물을 요구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비밀 장부가 발견된 것이다. 루이스 서점은 임시 폐업에 들어갔다. 결국 대형 서점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수고했다. 디온.”
그리고 이 일에 깊숙이 관여한 이는 당연하게도 아키스였다.
“그러게 장부 관리를 잘했어야지.”
아키스가 피식 웃었다.
“라미라 가문은 어떻게 할까요?”
“한 번에 꾸짖기엔 힘든 상대니, 그쪽은 지켜보겠다. 그러나 빚은 늦게 갚을수록 커지는 법이지.”
아키스는 황태자에게 빠르게 손써 준 데에 감사하다는 편지를 작성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 * *
월플라워 부인 일반판은 대형 유통 서점을 끼지 않아, 다른 책보다 낮은 가격으로 책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평민 계층에까지 퍼져 나갔다. 여성의 물건들을 파는 잡화점 진열대마다 월플라워 부인이 놓여 있었고, 소형 서점마다 전면에 배치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금만 번화한 거리를 걸어도 월플라워 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루나는 자주 외출해 수도를 돌아보았다. 공원에서, 카페에서, 레스토랑에서 수많은 영애들이 월플라워 부인을 읽는 걸 볼 때마다 루나는 심장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월플라워 부인은 총 다섯 개의 기록을 세웠다.
발매 첫 주 양장본 최대 판매 기록, 단권 최단 기간 판매 기록, 최단기간 매진 기록, 유통 서점을 거치지 않은 출판사 첫 직접 판매 기록, 신문 기사 노출 최다 기록.
사람들이 이토록 이 책을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월플라워 부인의 배경은 여인도 마법사가 될 수 있고, 버젓하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세계였다.
그런 세계인 만큼 월플라워 부인은 아주 당찼다.
힘든 일을 겪으면 남몰래 눈물을 찍는 고전적인 타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들에 비하면 그녀는 거의 악당 수준으로 영리하고 똑똑했다. 그런 귀부인 캐릭터에 답답한 생활에 억눌려 있던 여인들은 월플라워 부인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꼈다.
특히 사람들은 월플라워 부인의 대담한 복수담에 열광했다. 당연히 보수적인 사람들인 이 소설을 증오한다 싶을 만큼 싫어했다.
“아니, 여자가 바람피우는 내용이 버젓이 베스트셀러가 되다니!”
“이게 무슨 내용입니까, 남편과 자기 싫어 아내가 약을 먹여요? 이런 미친 여자가 다 있습니까?”
“욕설을 내뱉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는 행동을 젊은 규수들이 보고 배울까 걱정이군요!”
특히 마리벨 후작 부인과 그 측근들은 공식적으로 ‘월플라워 부인을 독서회에서 읽는 것을 권장하지 않겠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워낙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기에 루나는 그 말을 듣고 뒤통수가 쌔했다. 내심 황후의 친구인 마리벨 후작 부인이 제 편을 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소설을 읽어 보니 너무 파격적이라 놀라셨나 보군. 보수적인 부인들은 그럴 수 있지.’
그러나 반대로 이 책을 몹시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작가가 익명 발표를 했다 공표한 책이기에 이 책을 각색, 편집하고 발간하는 것을 도운 후원자로 알려진 루나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공작 부인, 또 이만큼이나 초청장이 도착했어요.”
루나는 제인이 가져온 한 뭉치의 편지를 보았다.
티파티 초대장부터 파티 초대장, 심지어 강연회를 해 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루나는 지금껏 수도 모든 독서 모임의 초청장이란 초청장은 다 받은 상태였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제국 귀족들이란 하루아침에 손바닥을 뒤집는구나.”
“공작 부인께서 인기를 얻으셔서 그래요.”
심지어 아키스를 통해 아카데미 문학부에서 루나를 초청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당연히 단번에 거절했고, 아키스도 그녀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초대 거절 편지를 타이핑하다 지쳐 루나는 제인에게 대필을 시키기 시작했다.
루나는 단번에 사교계의 인기인으로 등극했다. 책을 읽은 귀부인들은 루나를 초대해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도 하고 친분을 가지는 것을 꿈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야말로 물살보다 빠른 변화였다.
* * *
붉은 책의 바람대로, 사방에서 팬레터가 날아왔다. 칼럼도 여러 번 썼고, 기성 작가들의 서평까지 날아왔다.
[월플라워 부인의 인기 요인은, 여성들의 비밀스런 욕구를 맞췄다는 데 있다. 학대하는 남편보다 제게 헌신적인 미남 기사가 좋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은 관습과 규범, 억압의 위에 있다!]
주옥같은 서평들이 많았다.
이제는 루나의 차례였다. 루나는 붉은 책과의 약속을 지켜, 모든 팬레터를 읽고 고심하여 다양한 감상들을 추렸다.
의미 없는 비난이나 중복되는 내용을 모두 제외하고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책에게 전했다.
<다들 너에게 이렇게 찬사를 던져.>
<훌륭하군요. 대부분 유의미한 감상입니다. 또, 아주 근거 있는 비판들도 잘 읽었습니다. 내가 소유자를 잘 선택한 것 같군요. 이건 우리의 작품이니, 당신도 찬사를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루나는 손이 닳도록 글씨를 고대어로 쓰고 또 썼다. 고대어에 능통한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 *
마침내 월플라워 부인 2권 출간일이 다가왔다.
그 즈음, 루나는 어디 외출만 하면 티파티 초대며 독서회 토론회 초대에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한번은 아키스를 따라 입궁했는데, 온갖 사람들이 달려들어 월플라워 부인을 모델이 된 인물을 소개해 달라느니, 2권 내용을 좀 미리 알려 달라느니, 심지어 사인을 해 달라며 그녀를 귀찮게 해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와중, 루나는 뜻밖의 인물에게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
[공작 부인, 제 예법 연구회에 한번 들러 차를 드시지 않겠습니까?
강제적인 가입 권유는 아니니 안심하세요. 우리 예법 연구회는 예의와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요즘 유행하는 소설 이야기는 삼갈 생각입니다.
주목 받는 입장이 아니시더라도, 공작 부인께서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실 고운 심성을 가지신 것을 압니다. 와서 친교를 다질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에게 이와 같이 정중한 초대 편지가 오자, 루나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마리벨 후작부인이 날 불러다가 소설 내용에 대해 잔소리하려는 건 아닐까 좀 걱정되네.’
듣기로 마리벨 후작부인은 월플라워 부인을 싫어한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낸 초대장이니 거절하기 애매했다.
어쨌든 호의로 초대장을 보냈을 터인데 이것마저 딱 잘라 거절하면 척을 져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2권 내용을 미리 알려 달라고 괴롭히진 않겠군.’
요즘은 제인마저 2권 내용을 알려 달라 졸라 댈 정도였다. 루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월플라워 부인을 싫어하는 이 꼬장꼬장한 모임이 귀찮은 사람들로부터의 도피처일수도 있겠어.’
루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녀는 아키스에게 마리벨 후작 부인의 다과회에 한번 나가 보겠다 말했다. 마침 다과회는 책 출간일이었다.
‘페니는 집안 행사가 있다 했고, 그이가 입궁하는 날이니까 오전에 갔다 오자. 책 출간일은 긴장되는 날이니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아무리 1권이 대흥행했다고 해도 2권이 더 잘될지 아닐지 긴장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루나는 출간일의 긴장을 풀기 위한 방편으로 마리벨 후작 부인의 다과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 * *
“우리 예법 연구회에서는 엄선된 책만 읽습니다. 세속적이고 육감적인 소설들은 지양하지요. 많은 젊은이들이 요즘은 환락과 즐거움만 쫓으니, 누군가 중심을 잡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좋은 책을 읽어야 바른 몸가짐이 나오는 겁니다.”
예상대로 마리벨 후작 부인 주최의 모임의 노부인들은 꼬장꼬장했다.
그녀들은 루나가 앉자마자 에둘러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듣기 싫을 정도로 악의 있는 말들은 아니었기에 견딜 만했다.
이들 모두 지방에 광대한 영지를 가진 집안 출신으로, 수도에서도 꽤 발언력 있는 여인들이었다. 즉, 루나가 진즉 안면을 터 두었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진즉 찾아뵙고 여러 조언을 청했어야 하는데, 이제야 와 죄송할 따름이에요.”
루나는 겸손하게 말했다. 노부인들은 루나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태도가 누그러졌다.
“별말을, 젊은 아이들이 따분한 모임을 싫어하는 건 우리도 알아요.”
“거기다 공작 부인은 아주 유명한 분이니까요.”
“그런 말 마세요. 제게는 지금이 아주 유익한 시간이니까요.”
루나는 이곳이 속세와 분리된 곳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모임이 끝난 후, 양장본 한정 판매 장소인 타르티엔 잡화점이나 돌아보면 오늘 하루의 긴장감을 잘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부인들은 원예나 높은 사람을 시중드는 예절에 대해 천천히 토론했다. 그런데 돌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여인이 들어왔다.
“큰일, 큰일 났습니다!”
루나는 처음 보는 여인으로 곱게 차려입은 노부인이었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경거망동하는 모습에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페타 백작 부인, 너무 늦었군요. 큰일이고 뭐고 간에 왜 이리 늦었습니까?”
“죄송합니다, 급한 볼일이 있어서…….”
“무슨 급한 볼일이기에 예고도 없이 늦습니까? 설마, 서점에 다녀온 건 아니겠지요?”
루나는 그 말에 눈치를 보며 숨을 죽였다.
“멍청한 하인이 책 예약을 잊었지 뭐예요. 참을 수 없어 아침 일찍 줄을 서 제가 직접 잡화점까지 가 책을 사 왔습니다.”
루나의 동작이 굳었다. 동시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아아, 큰일 났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월플라워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데…….’
과연, 루나의 생각대로 마리벨 후작 부인이 정색했다.
“지금 월플라워 부인을 읽느라 늦었다는 겁니까?”
“맞아요.”
“페타 백작 부인!”
마리벨 후작 부인이 노성을 터뜨렸다.
“다 같이 읽고 토론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네?”
루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말을 기점으로 다들 주섬주섬 옷자락이며 가방, 그리고 테이블 아래에서 월플라워 부인 2권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큰일이란 말인가?”
오늘 모임 참가자중 가장 연령대가 가장 높은 한 부인이 말했다.
할머니에 가까운 그녀는 유란 남작 부인이라 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페타 백작 부인이 외쳤다.
“……드디어, 잤다고요. 월플라워 부인과 우드가 잤어요!”
다시 한번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곧이어 모든 부인들이 짜기라도 한듯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은근슬쩍 넘어가는 장면으로 무마하는 건 아니겠지요?”
페타 백작 부인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네 페이지나 되는 자세한 정사 장면이 나옵니다. 아아, 간만에 얼마나 피가 끓어오르던지…….”
“그게 정말인가?”
그 말에는 오늘내일 하는 유란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덜 읽어 뒷부분이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난 지금 읽을래요!”
목소리를 크게 내는 한 여인은 이미 몰래 소설을 읽고 온 듯했다.
“조용, 다들 조용.”
마리벨 후작 부인이 손뼉을 쳤다. 루나만 눈이 동그래져서 이게 무슨 일인가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이러다가 공작 부인이 도망가겠습니다.”
“……설마, 후작 부인…… 께서…….”
당했다.
루나는 그제야 짚이는 바가 있었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씩 웃었다.
“발매 첫날 공작 부인을 모시고 책 내용에 대해 토론회를 가질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루나는 마리벨 후작 부인의 계략에 싹 넘어간 셈이었다.
‘책에 무관심한 척 덫을 치다니…….’
마리벨 후작 부인이 괜히 사교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사교계의 수법…….’
루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세속적인 소설은 읽지 않는다 하시지 않았나요?”
“네에, 월플라워 부인처럼 교양 있는 소설을 읽어야지요. 이건 정말 참된 소설입니다. 여인의 일생에 대해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하아…… 수많은 통속 소설 속에서 진짜 정의를 세우는 소설이지요. 못된 남편 놈과 첩을 혼내 주는 장면마다 아주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부인, 먼저 낭독회를 시작해 볼까요? 작품 내용에 대한 질문은 순차적으로 받도록 하죠.”
루나는 귀부인들이 동시에 눈을 번뜩이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루나의 입이 벌어졌다. 곧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난 이 장면이 좋아요. 월플라워 부인을 맘대로 하지 못하니 남편 놈이 약을 먹이지요. 그런데 그 약을 도리어 남편에게 먹이고는, 남편을 짝사랑하는 첩의 시녀를 방에 들여보내는 장면이요.”
“다음 날 아침 첩과 남편, 시녀가 뒤엉켜 집 안에서 큰 싸움이 일어나잖아요. 아, 그 장면은 얼마나 웃기던지. 그 광경을 보고, 월플라워 부인이 ‘어머 당신, 뜨거운 밤을 보내셨나 보군요.’라고 말하는 대사가 얼마나 통쾌한지 몰라요.”
그들의 열띤 토론과 질문 세례는 아키스가 그녀를 데리러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토론이 파하기 직전에는 각자 자기 남편이며 주변 못된 사내들을 욕하느라 장소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공작님 드십니다.”
하인이 말했다. 노부인들은 이채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아키스.”
부인들의 질문 세례에 기쁨인지 당황인지 모를 애매한 감정에 루나가 허덕이고 있을 무렵, 아키스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원 세상에. 공작님이 직접 오시다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 내 아내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무리 신혼이라도 그렇지. 호호, 세상에. 이리 부인을 쫓아다니시니 보는 우리 부인네들이 다 민망합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부인 없이는 하룻밤도 평화롭게 보내는 게 불가능한 남자라, 무례를 용서해 주시죠.”
“아키스…….”
루나는 그의 말에 뺨이 붉어졌다.
“공작님이 데리러 와 주시다니, 어쩔 수 없지요, 어서 일어나세요, 공작 부인.”
마리벨 후작 부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의 대표로 말씀드리죠, 용기를 내서 이토록 통쾌한 소설을 발간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들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답니다.”
그 말에 루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
루나가 인사를 마치자, 아키스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저녁 일정이 바빠서, 이만.”
그는 뭐라 말할 세도 없이 루나의 허리에 손을 감고 나섰다. 빈틈없이 부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아키스의 탄탄한 팔을 보며 부인네들은 반달눈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역시 우드의 모델이 공작일까요?”
“아냐, 월플라워 부인은 실존 인물이라니까요!”
그녀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 울렸다.
* * *
“공작 부인, 기다리시던 편지가 왔습니다! 출판사 편지입니다!”
루나는 날듯이 뛰어 내려갔다. 출판사 편지라면 아마 정산서일 것이다.
“아아, 부인. 제발 뛰지 마세요!”
비아가 깜짝 놀라며 외쳤고, 알렉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한 걸 참고 뒤에서 루나를 따라갔다.
“공작 부인, 조심하십시오. 만일 부인께서 다리라도 다치시는 날엔 공작님께서 집안을 뒤집으실 겁니다!”
“알았어요. 편지 주세요.”
정확한 정산 금액부터 판매량까지를 알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카데미로 치자면 성적표를 받기로 한 날이라고 할까.
루나는 서둘러 편지를 뜯었다. 제인과 비아마저 귀를 쫑긋 세웠다.
“응……?”
루나는 편지 내용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혹시 0이 잘못 붙은 것 아니야?’
돈을 떠나서 팔린 수치라든가 금액이 너무 커서 루나는 순간 머리까지 어질했다.
“지…… 진짜?”
농담이 아니고 손발이 떨릴 만한 금액이었다..
“어, 어지러워요…….”
“에그머니! 공작 부인!”
“어서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와라!”
루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리는 걸 보고 제인과 비아가 유난을 떨었다. 집무실에 있던 아키스마저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공작 부인께서 어지러우시다고…….”
아키스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보게 된 것은 편지를 끌어안고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는 루나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키스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그는 그녀에게 무섭게 정색하고 몸을 숙였다.
“……아키스.”
루나가 살며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죠? 저 진짜로 부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네?”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곧 루나가 떨리는 손으로 내민 정산서를 본 아키스는 상황을 납득했다. 그는 피식 웃어 버렸다.
“이게 1차 정산 아닙니까?”
루나는 꿈꾸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앞으로 돈은 더 들어올 거예요. 놀랐나 보군요.”
“하, 하지만…… 엄청난 부수가 팔렸어요.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될까요?”
“왜 안 됩니까. 당신은 누릴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감정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복잡해졌다. 페니의 말이 맞았다. 스스로 뭔가를 이루는 건 위대하고 완벽한 경험이었다.
“부인이 현기증이 난 것 같으니 침실에 향을 피워라. 따뜻한 차도 가져오고.”
“네, 알겠습니다.”
비아가 급하게 주방으로 직접 달려갔다. 아키스는 루나를 부드럽게 안아 일으켰다.
“진정하고 침대에 좀 누워요. 자꾸 이렇게 현기증을 일으키면 일 못하게 할 거니까.”
“일에는 질투 안 한다고 해 놓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도 이젠 날 막지 못할걸요?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있나요? 이제 일을 시작했는데.”
루나는 그 와중에도 아키스의 농담 섞인 질책에 피식 웃었다.
“왜 못합니까. 일하는 동안 계속 옆에서 귀찮게 하고 관심 가져 달라 하면 방해할 수 있죠.”
“울프라면 모를까, 당신이요?”
그 말에 루나는 웃어 버렸다.
울프는 종종 루나가 바쁘면 그녀의 무릎에 주둥이를 들이대며 애교를 떨었는데, 마치 아키스가 애완견 울프처럼 제게 관심 가져 달라 보채는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 * *
그리하여 월플라워 부인 전 3권은 전례 없는 히트를 쳤다. 그리고 루나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통장 잔고가 남았다.
그 책이 일으킨 사회적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대배우 테세스 남작이 연전연승으로 1위를 하던 여성 잡지 ‘제국 여성’의 인기 독신남 순위에 소설의 남주인공인 우드가 1위로 올라섰을 정도였다.
루나는 다음 작품인 <보석 영애 이야기>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나는 출판사와 협의하여 앞으로 출간하는 모든 작품의 홍보를 페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페니는 홍보부장, 루나는 명예 이사로 취임했다.
아키스가 뒤에서 출판사에 자금을 대고 있으니 이사에 취임한 루나가 사실상 출판사에 큰 영향력을 과시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모두 고대어 능력 덕분이야.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보석 같은 문화. 그리고 빙산의 일각이겠지.’
루나는 점점 더 열망이 생겨나는 자신을 느꼈다. 루나는 손에 들린 통장을 보았다.
‘……이런 통장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시간 호위 100명을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루나는 목표하던 대로 미래를 완벽히 방비했다. 이제 공작가를 떠나더라도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이제 만족하니?’
루나는 미래의 자기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꿈에서 본 일기장에 적힌 일상들이 너무 세세해서, 루나는 미래의 자신의 삶을 훤히 알았다. 그녀는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다. 바라는 것도 참 많았다.
‘이상한 생각이지만 그 능력을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 자신에게 보내 준 것만 같아.’
어쩌면 미래를 바꿔 달라고 준 선물일까. 루나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는 왜…….’
루나는 눈을 감았다.
‘점점 더 바라는 게 많아질까.’
고대 문화에 대해 더 공부하고, 좋은 것들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큰 욕심은…….
‘아키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
그가 만일 자신의 거짓말을 용서해준다면, 루의 과거를 덮어준다면 루나는 지난 삶에는 꿈도 못 꾸던 것을 가질 수 있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 그가 그녀를 사랑까진 안하더라도, 아키스는 평생 루나의 헌신적인 남편으로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내 비밀이 드러나는 게 무서워, 하지만, 계속 욕심이 생겨.’
문득 모든 걸 고백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곤 했다. 그날 밤에 그와 하룻밤 동침했던 일도 존재했음을, 그날도 그녀의 짝사랑이 있었음을 알리고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제 평생 가난하지 않게, 안락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점점 더 많은 걸 가지고 싶을까.
‘그가 마음을 받아줄지도 확실치 않잖아.’
아이니, 사랑이니. 하는 간질거리는 건 질색이라 했다. 하지만 때로 그의 곁에 있어 행복한 순간에도 뱉어선 안 될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전과는 다른 풍요 속에서 낯선 고민들이 루나를 흩트려 놓았다.
* * *
출판사 일이 정리되고, 페니는 루나를 가족들과 함께하는 점심에 초대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친구 어머니의 초대.’
친구 집에 놀러가는 건 처음이라, 루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어머니가 오늘 너 본다고 기대 많이 하셨어. 편하게 놀다가가.”
페니가 저택 앞까지 루나를 마중 나왔다. 저택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음에 들면 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관문 같은 거지? 나, 최선을 다할게.”
“……넌 친구의 의미에 대해 뭔가 좀 착각하고 있어. 사이를 허락받기 위한 절차나 관문 같은 게 아니거든?”
엄한 친척 사이에서 격리되듯 자랐다 했던가. 루나는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페니는 집에 돌아가서 남몰래 벽을 치며 루나를 귀여워했다. 너무 순진해서 이 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허락 같은 거 없어도 이미 넌 너무 좋은 친구야.”
“응?”
“……아무것도 아냐.”
페니는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역시, 아직은 루나처럼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건 부끄러웠다.
* * *
“공작 부인께서 와 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제 집처럼 편히 있다 가세요.”
초대 받은 만찬 자리는 훌륭했다.
크고 오래된 성 같은 공작가와 달리, 페니의 집은 여성스럽고 우아했다. 집 안 곳곳에 안주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예의를 갖춰 루나를 대했다.
“저녁을 먹고 공작 부인께 온실을 안내해 드리렴.”
“아냐, 아냐. 그림을 먼저 보여 줘야지. 우리 집의 그림 방은 자랑이거든.”
“어머니 아버지도 참, 어련히 보여 줄 거예요.”
그들은 앞다퉈 루나에게 친절을 베풀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루나는 페니의 모친인 르시타 후작 부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했다. 루나는 은근히 긴장했다.
“공작 부인, 이걸 받아 주시겠어요?”
정원 한편에서, 페니의 모친은 직접 구슬을 엮여 만든 영롱한 팔찌를 그녀의 손에 걸어 주었다. 루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이건…….”
“제 고향의 기법으로 직접 만든 거랍니다. 구슬을 한 개씩 꿸 때마다 공작 부인을 위해 기도했어요. 부인과 같이 우정과 용기를 아는 여인이 계속 그 마음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요. 우리 집에선 어릴 적에 어머니와 같이 팔찌를 만들었거든요. 페니에게도 여러 번 만들어 주었지요. 행운을 비는 의미가 있답니다.”
“정말 감사해요…….”
르시타 후작 부인은 루나를 보며 묘하게 가슴이 짠해졌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우리에게 와요. 가족이란 꼭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를 말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공작 부인을 가족처럼 대접하고 싶어요. 우리 가문은 한번 제 편이라 생각한 자를 절대 저버리지 않지요.”
그 말에는 봄바람처럼 따뜻한 호의가 스며들어 있었다. 루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루나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페니는 저가 상상한 가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끝에 아키스가 생각나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만일, 아키스와 내가…… 내가 비밀이 없다면…… 그와 계속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도 그 사람과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그와 아이를 가지고…….’
가슴 아림은 결코 페니가 샘이 나서가 아니었다.
최근 주변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 속에서 루나 자신의 마음은 새순이 돋듯 점점 나아가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이전에는 무뎌져 서럽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루나를 간질였다.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가족을 갖고 싶었어.’
그것이 미래의 루나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며, 현재의 루나가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막연한 꿈이었다. 그러나 페니의 가족은 루나에게 상상력을 실어주기 충분했다.
* * *
“루나, 무슨 일 있어요?”
“……네?”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키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르시타 가문의 점심 초대로 그 집에 놀러갔다 왔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온 후 그녀의 상태가 계속 이상했다.
요즘 아키스는 아내에게 점점 더 애착을 가지고 집착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기분을 면밀히 살폈다.
“우울해 보여서요. 괜찮습니까?”
혹시 르시타 가문에서 그녀에게 뭔가 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아,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조금 피곤해요.”
“어디 아픈 것은 아닙니까?”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루나는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런 거 아녜요, 조금 자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결국, 침대에 일찍 누워서도 루나는 계속 마음이 어수선했다.
‘나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루나는 엄마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건 루나의 오랜 콤플렉스이자, 상처였다.
엄마의 초상화라도 한 점 남아 있다면, 그 기억을 추억 삼아 많은 고통들을 버텨 낼 수 있을 것이다.
‘아키스도 나와 같을까?’
그는 자신과 달리 어미가 누군지나 알고 있을까? 그녀의 얼굴을 기억할까?
‘마음이 약해지는지도.’
이전과 달리 호화로운 생활 속에 많은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를 받으니 조금 더 예민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리광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 *
‘울었나?’
아키스가 침실에 들어왔을 때, 웅크린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서 놀랐다. 그녀는 작은 몸을 웅크리듯 하고 이불 시트를 감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조심해서 들어왔는데, 루나는 민감하게 눈을 떴다.
몽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나더니, 그녀는 작은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왔어요?”
그에게선 풀 냄새와 물 냄새가 났다. 루나는 작게 웃었다.
“승마했나 봐요?”
“오랜만에 호위들과 검술 훈련을 했습니다.”
“그래요? 연무장에 가서 구경할걸.”
“냄새나는 사내놈들 봐서 무엇합니까.”
아름다운 그녀가 연무장에 나오면 기사들이 얼마나 멀거니 쳐다볼지, 아키스는 상상만 해도 못마땅했다.
루나가 자리를 비켜 주자 그는 침대로 들어갔다. 자기 전에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이미 서로에게 익숙해진 일과였다.
“역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요?”
“아, 아뇨. 그런 거 아니라니까…….”
루나는 작게 웅얼대며 그의 가슴을 손으로 덧그렸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눈을 보았다.
“그냥 페니의 가족이 너무……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예쁜 아이를 갖고, 화목한 가족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나는 나른하게 말했다.
“아이요?”
아키스의 몸이 굳었다. 루나는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아이를 싫어한다 했는데.
“막연한 꿈이에요. 무슨 의도가 있진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먼 미래를 상상하는 그런 거요.”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키스는 신경이 긁히는 듯했다.
“당신 꿈은 행복하게 사는 거라 했지요.”
“네. 맞아요. 언젠가는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싶어요.”
그의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졌다.
“그렇군요, 누구와 그러고 싶냐고 물어봐야 합니까?”
“네?”
“아니면 이것도 결혼 조약의 물어보면 안 되는 부분과 관련 있는 건가?”
루나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키스의 눈매가 싸늘했다.
갑자기 얼마 전부터 품었던 생각들이 물거품처럼 잠겨 들어갔다. 그가 자신에게 헌신적이고 뭐든 해 준다 해서, 그게 꼭 사랑은 아닐 거라는 걸 아는데. 그런데도-.
갑자기 속상함이 확 치밀어 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고 내가 사랑을 줄 아이를 원해요. 하지만 그걸 당신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뱉었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어느새 침대에 반듯하게 앉은 루나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피했다.
“나는, 루나…….”
아키스의 눈이 흐려졌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재능은 별로 없습니다.”
“…….”
“당신 말이 맞습니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자색 눈의 아이를 가지려 합니다. 어미 또한 누구든 상관없다는 태도고요. 만일 보라색 눈의 아이를 통해 혈통을 계승하지 못한다면, 공작가가 가진 수많은 특권을 포기해야 할 테니 필사적이죠.”
“…….”
루나는 아키스의 눈 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섞이는 걸 보았다. 너무 많은 질척함이 섞여 있어 도무지 읽어 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종마보다는 사람에 가까워서, 그렇게 기를 쓰고 혈통을 보존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꽃이 지금도 피어나고 있었다. 이게 끝까지 이어지면 소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키스는 온건히 그 소년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불안정한 사내인 그는 필부와도 경쟁할 수 없다. 이 여자에게 평범한 가정을 주겠다며 접근하는 그 어떤 사내와도 경쟁할 수 없다.
‘아무한테도 줄 수 없어.’
루나가 막연하게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했을 때, 그 그림 안에 자신이 없다는 걸 암시했을 때 아키스는 속이 타는 듯한 소유욕과 열망을 느꼈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공작가의 사내가 아닌 필부라도 되어 그녀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면, 각인에 대해 알게 되면 루나는 자신을 떠날 것이다. 영영 온건히 사랑받을 수도, 아이를 줄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될 터이니.
그러니, 자신의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차갑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겐 그런 의미군요.”
그녀는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바짝 붙였던 몸을 서서히 떨어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아키스는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살짝 몸을 피했다. 아키스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 루나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내 말이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당신에게 아이를 가지라는 압박이 들어오는 건 알아요. 나까지 피곤하게 굴려는 생각은 없었거든요.”
“…….”
“다만…… 내가 왜 그런 꿈을 꿀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 줘요. 난 제대로 된 가족이 없어요. 아이를 만들지 않으면 날 사랑해 주고, 사랑할 혈육을 가질 수 없다고요.”
“…….”
“내가 어릴 적에, 숙모와 새틴이 내게 늘 말했어요. 너 같은 년은 시집가도 사랑받긴 글렀다고.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금도 사랑받을 만한 부분이 없다고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내가 왜 평범한 가정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는 알아줘요, 아키스.”
루나의 친척들.
이것들을 그냥. 이미 망하게 만들었지만 도륙을 해도 모자랐다. 아키스는 이가 갈렸다. 동시에 가슴이 아려 왔다.
‘아이를 원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공작가의 혈통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다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의 세계를 온전히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결혼 기한인 2년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모든 걸 알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떠나 버릴 것 같았다.
“오늘 왜 슬펐는지 물었지요? 그냥,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어요.”
“……”
“……난 어머니의 얼굴을 몰라요. 초상화 한 점도 없죠. 그래서 가슴이 아팠어요. 아버지와의 추억이라도 있지만 어머니는……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렇기에 당신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노라, 루나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물기 어린 큰 눈을 깜빡이다 아키스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가 흠칫했다. 불에 덴 듯 그녀가 닿은 부위가 화끈했다. 그 고통이 서서히 심장께까지 내려와 그의 마음을 조여 왔다.
“그래서 막연하게 많은 생각이 났어요. 오늘만 이럴 테니, 그냥 모른 척해 줘요.”
아키스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사실은…….”
루나의 쓸쓸한 눈을 보는 순간, 아키스의 마음속에서 기묘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치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불완전하고, 연소되지 못한, 그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객기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그래서 아키스는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저지르곤 하는 실수였다. 일반인에게 공개하면 안 되는 마법을 말해 버리는 것.
“루나, 당신 어머니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네?”
루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루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말해 줘요, 아키스. 정말 내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나요?”
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가 묵직하게 대답했다.
“……꿈 마법을 사용하면 됩니다.”
“꿈 마법이요?”
“이름 그대로 꿈을 꾸는 마법입니다. 당신 어머니가 나오는 꿈을 꿀 수 있지요.”
“어…… 그러니까, 꿈을 통해 어머니의 영혼을 만난다는 거예요?”
루나의 얼굴에 당혹과 두려움이 번졌다. 아키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난 강령술사가 아니에요, 루나.”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꿈을 꾸는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죽지 않은 미래의 꿈을요.”
“…….”
루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어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엔 여러 갈래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중 딱 하나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죠. 그 수많은 가설로 이루어진 미래 중 하나를 꿈 마법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요.”
루나는 폐부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들 저 이야기에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그중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그런 미래도 있겠군요.”
어느새 루나는 아키스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거고요.”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키스는 나직이 그녀의 말을 수정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옳겠지요. 이 세상에 그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마법이라면 부작용이 있겠죠?”
루나의 눈에 불타는 열망이 타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그녀는 수많은 고대어 책을 통해 마법을 이미 접했기에 어떤 종류의 마법들은 몹시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요? 마법은 달콤한 것만은 아니니까요.”
루나의 말에 아키스가 놀란 기색을 띠었다.
“당신은 정말 총명해요, 루나. 맞습니다. 많이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한두 번은…… 괜찮습니다. 중독되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루나는 결혼식 날 아키스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고대인은 현실을 포기하고 꿈속에 살기를 원했으며, 결국 꿈 마법에 너무 도취되어 고대가 멸망했다는 말이었다.
달콤한 호기심이 그녀를 유혹했다.
자신의 근원을 알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말을 잃고 어두운 표정을 짓는 루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그냥 난 당신이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을 꺼낸 것뿐이에요.”
아키스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미소였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냥 잊어요. 그다지 좋은 마법도 아니니까요.”
아키스는 와인이라도 가져오겠다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루나가 그의 옷소매를 꽉 잡았다.
“……아키스, 내게 그 마법을…… 사용해 줄 수 있어요?”
아키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루나의 눈 속에서 강렬한 호기심과 욕구를 발견했다. 아키스는 그녀가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딱, 하룻밤입니다.”
항상 그랬다.
꿈 마법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은 누구든 매혹되어 버린다. 아키스는 씁쓸한 심정을 느끼며 수락했다.
* * *
꿈 마법의 준비는 대단한 것이 없었다.
아키스는 하녀들을 불러 침대에 평소보다 더 많은 쿠션과 베개를 준비시켰다. 꿈을 꾸다가 그녀가 혹시 뒤척여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누워요. 그거면 됩니다.”
루나는 눈을 굴리며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아픈 건 아무것도 없으니 걱정 마요.”
아키스가 작게 속삭이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눈앞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너무 빨리 끝나 놀랄 정도였다.
“끝이에요?”
“끝입니다.”
아키스가 단정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향로에 가루를 넣고 불을 피웠다.
“이제 푹 자요. 그러면 좋은 꿈을 꿀 겁니다. 꿈에서 당신이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던 현실을 볼 거예요. 하지만 기억해 둬요. 당신이 꿈속에서 보는 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가정일 뿐,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꿈이 보여 주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약속할게요.”
루나가 작게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졸음이 왔다. 아키스의 묵직한 미성의 목소리에 이상한 힘이 담긴 듯, 그녀를 느릿하게 잠의 세계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루나는 문득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내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아키스는 침대 옆에 놓인 낡은 놋쇠 자명종 시계의 태엽을 감았다.
“이게 울리면 꿈 안에서 당신은 어떤 문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럼 그 문을 열고 나오면 됩니다.”
탁―
그는 자명종 시계를 다시 내려놓았다.
루나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아키스는 그녀의 심장까지 스며드는 듯한 낮은 미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제 잘 자요.”
아키스의 큰 손이 루나의 눈을 덮어 가렸다. 차갑고 단단한 손이었다.
루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쾅쾅!
무언가가 귓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루나는 침대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따사로운 햇빛이 얼굴을 간질였고, 그녀는 눈을 비볐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이불에 휘감겨 있었다. 루나는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린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살던 오두막이잖아.”
방 구조가 몹시 눈에 익었다. 혼인 전까지만 해도 루나가 홀로 지냈던 춥디추운 오두막이었다.
그러나 위화감이 느껴졌기에 그녀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분명 구조는 같았는데 내부는 전혀 딴판이었다.
벽난로에는 아직 훈기가 남아 있었고, 낮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반짝이는 장식품들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창문을 가린 커튼은 예쁜 붉은색이었고, 바닥엔 손으로 직접 짠 꽃무늬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이곳이 이렇게 아늑한 곳이었나?”
루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다시 탕탕! 소리가 울렸다.
“루나? 아직 자니?”
낯선 여인의 목소리였다. 루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상냥한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루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처음 보는 여인이 서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을 하나로 땋아 뒤로 늘어뜨린 채 검소한 드레스를 입고 숄을 두른 여인은 몹시도 다정한 인상이었다. 눈가와 입가의 희미한 주름을 제외하고는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엄마?”
“너, 또 오두막에서 잤구나. 그렇지? 너도 참 여기가 그렇게 좋아?”
문 너머에서 그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루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쿵쾅대고 마음이 먹먹했다.
“엄마, 맞아요?”
“당연하지. 너 어디 아프니? 왜 그래?”
그녀는 몹시도 다정한 얼굴로 걱정된다는 듯 루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루나는 그녀의 동작과 표정이 소름 끼치도록 자신과 닮았다는 것에 전율했다.
루나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곤 애써 웃었다.
“제가 이 오두막을 좋아한다니,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멀쩡한 네 방 놔두고 취미로 꾸민 이 오두막에서 살다시피 하잖니. 네 보물 창고 아니랄까 봐, 왜 엄마 아빠는 여기 초대 안 해 주는 거니?”
그녀는 애교스럽고 다정한 어조로 툴툴거렸다.
루나의 기분이 벅차올랐다. 그 지옥 같았던 추운 오두막이 이쪽 세계에서는 그녀의 별장이자 보물 창고인 모양이었다.
“왜 그래, 진짜 어디 아파? 아직 감기 기운이 있나?”
루나는 그 말에 목이 따끔따끔하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는 걸까?
‘이쪽의 나는 감기에 걸려 있나 봐. 어쩌면 이렇게 자잘한 아픔마저 생생할까.’
그녀는 루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역시 이마가 좀 뜨겁네.”
몹시도 다정한 손길이었다.
“괜찮아요. 막 일어나서 그런가 봐요.”
루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기침이 나오려 하기에 오두막을 둘러보는 척하며 숨죽여 기침을 했다.
루나는 오두막에 놓인 키 작은 테이블 위에 가득 자리한 물건들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장식품들은 반짝이는 아름다운 오르골들이었다.
루나는 오르골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작은 집 모양도 있었고 성 모양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가인 듯했다.
“이게, 내 보물인가요?”
루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매년 하나씩 모아 애지중지했잖니?”
“……그랬군요. 내가…… 그랬어요. 정말 예쁜 것들만 골랐네요.”
“당연하지. 네 아버지와 내가 네 생일마다 하나씩 골라 사 준 거잖니. 매년 오르골을 마련했지. 가장 예쁜 것들로만 말이야.”
루나는 오르골을 손에 든 채 생각했다.
이건 너무도, 완벽한 세계였다.
그녀의 부모가 살아 있는 이 세계에서 생일은 매년 가혹한 외로움으로 보내는 날이 아니었다.
그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다시 한번 오두막을 훑어보았다. 손때 묻은 카펫부터 커튼까지, 모두 하나하나 좋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프면 이따가 엄마가 만든 약 줄게. 넌 가끔 두통을 일으키니 참 걱정이야.”
“정말로 괜찮아요.”
루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는…… 요?”
“네가 아침 먹으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지. 목 빠지시겠다. 어서 옷 갈아입어.”
어머니는 급하게 루나의 등을 떠밀었다.
루나는 오두막에 있는 옷, 그녀가 어젯밤에 벗어 둔 것이 분명한 원피스를 입었다. 라벤더색에 귀여운 레이스가 달린 예쁜 비단 옷이었다.
루나는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표정도, 외형도 똑같았지만 이쪽의 루나의 눈동자는 더욱더 무구해 보였다.
루나는 어머니를 따라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 왔다. 익숙한 냄새였다.
‘……약초밭…… 이구나.’
루나는 멍하니 제가 알던 것과 너무 다른 정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약초는…… 뭐예요?”
“씀바귀 풀이랑 바늘귀 풀, 그리고 만리향 풀이야. 우리가 같이 심은 거잖아. 그렇게 많이 배워 놓고 가끔 기초적인 걸 헷갈리더라. 하면 잘하면서.”
루나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녀가 약사라는 걸 어림짐작했다.
‘……그래서 약재상을 하던 아버지와 만난 거구나……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난 엄마한테 약학을 배웠겠지…….’
루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대답하지 않는 루나의 모습에 어머니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렇게 매일 오두막에서 놀다 잠들고, 거기다 숲에 있는 덫들은 언제 치울 거니? 누누이 말하지만 뒤쪽 숲으로 침입할 사람은 없단다. 저 숲엔 토끼도 안 살아.”
“덫……. 덫 말이죠, 네. 치, 치울게요.”
루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밤마다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니, 아이들이나 할 만한 상상 아니니. 나 참, 언제까지 이렇게 아이 같을 건지. 하여간…… 이렇게 아직 다 큰 아기니 시집을 못 보내지. 그냥 데리고 살아야 할 짝이라니까.”
어머니는 그렇게 타박하면서도 루나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 표정이었다.
“내가 시집가면 좋겠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평생 우리랑 살면 네 아빠랑 나만 좋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응?”
마침내 식당에 도착했고, 루나의 마음이 다시금 먹먹해졌다.
식당의 문이 열렸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얼굴의 아버지가 식당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루나를 발견하자 그가 신문을 내려놓고 활짝 웃었다.
“루나, 어서 와서 앉으렴.”
루나는 미소 지었다.
“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루나는 그 말을 속으로 길게 삼켰다.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 심장을 눌러 참느라 힘들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기억보다 조금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 * *
식사하는 내내, 루나는 자신이 사교계 데뷔는 통 관심이 없는 왈가닥이며, 아버지의 일터에 불쑥 놀러 가 아버지를 당황시키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았다. 종종 숲에 혼자 처박혀 어머니와 아버지를 걱정하게 만든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친의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받는 외동딸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서로를 몹시 사랑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기념일이면 꽃을 사다 주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직접 땋고,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쿠키를 구워 주거나 요리를 해 주곤 했다.
‘그런데, 여기가 계속 우리 집이면 숙부 가족은 어딜 간 거지?’
루나가 자란 저택, 버몬드 남작가의 본가. 이곳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부 가족들이 상속 받았다. 버몬드 남작에게 상속되는 저택이었기 때문이다.
“저어, 숙부님 가족은 어디 있어요?”
그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안 그래도 시골에서 편지가 왔지요? 얼마 전에 돈을 보냈는데도 자꾸 요구하니…….”
어머니의 얼굴에도 근심이 어렸다.
“나 참, 내가 여러 번 빚을 갚아 주었는데도 아직도 그러는구나.”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요.”
“몇 년 전 축제 핑계로 수도에 새틴까지 데리고 올라왔을 때였나? 다신 너와 만날 일이 없으니 걱정 마렴. 너한테까지 돈 이야기를 꺼내다니, 내 동생이지만 어처구니없는 녀석이지. 거기다 그 새틴이라는 애는 벨레를 닮아서 네 드레스며 머리 장식까지 얼마나 탐을 내는지.”
아버지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 한마디로 루나는 많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루나는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계속 마음이 먹먹해졌다.
“아버지가 배를 안 타셔서 다행이에요. 10년 전에 말이에요…….”
10년 전, 아버지는 무리한 투자를 받아 무역선을 타고 나갔다가 배가 침몰해 돌아가셨다. 루나의 인생이 한번 망가진 날이었다.
“네 어머니의 충고 덕분이지. 네 숙부가 약방 분점을 망하게 만든 일 기억나니? 그걸 만회한다고 상회 이름으로 투자를 잔뜩 끌어와 어떻게든 배를 띄워야 할 상황이 되어 우리가 참 곤혹을 겪었지. 어머니가 돈을 어떻게든 갚아 주자고 나를 만류해 배를 띄우는 걸 무기한 연기했고, 배상금을 상당히 물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긴 태풍이 가신 후에 배를 띄운 건 천운이었어. 그때 가라앉은 다른 상회들의 배만 해도 세 척이던가. 넌 기억조차 못할 거다.”
루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때 돈을 투자 받은 것이 숙부…… 였다고요?”
그건 루나와 알던 진실과 상당히 달랐다.
‘……날 속였어?’
숙부 가족은 루나에게 평생 아버지가 사업을 말아먹었으니 미안해하라고 했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루나는 포크를 손으로 꾹 쥐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인간도 아니야…….’
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루나? 너 정말 괜찮아? 얼굴이 빨갛구나. 역시 열이 있는 거지?”
그때, 루나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정말 감기 기운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오후에 소풍 갈 수 있겠어? 그러게 감기 기운 있으면 취소하자고 했잖아.”
“다 같이 가는 건가요……?”
루나는 포크를 꼭 쥔 채 물었다. 저도 모르게 기대가 차올랐다.
“어디로 가는데요?”
“당연히 다 같이 가야지. 뱃놀이 가기로 했잖니.”
“꼭 갈래요. 가고 싶어요.”
루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도시락도 준비했으니 가는 게 좋긴 하지.”
“그래요, 도시락 준비도 도울게요. 어서 가요.”
루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루나는 어머니를 도와 직접 피크닉 도시락을 꾸렸고, 하녀들은 옆에서 거들기만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우리가 집에서 요리한다는 거 절대 티 내지 말렴. 알겠지?”
루나의 어머니가 피크닉 가방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가 평민 출신이라 직접 요리를 하는 걸 흠잡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나는 요리하는 게 좋거든.”
“……그렇군요.”
버몬드 남작가가 그다지 상류 계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족 가문 안주인이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요리는 전문 요리사의 일이었다.
“이건 어머니의 취미 생활…… 인가요?”
“그래. 난 요리를 좋아하니까 말이야.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하지.”
루나는 자신의 집안일 실력이 어머니를 닮은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찡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숙부 가족 때문에 죽도록 해 왔던 집안일도 조금은 좋아졌다. 이 미래에서 요리는 지옥 같은 착취가 아니었다.
“빨리 가요, 빨리. 배 타고 가면서 내 어릴 적 이야기 좀 해 줘요.”
루나는 아이처럼 양친을 보챘다.
그렇게 천국 같은 하루가 흘러갔다. 꽃구경에 가족과 함께하는 나들이. 평생을 잊지 못할 달콤한 하루에 대한 꿈이었다.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노을이 질 무렵, 루나는 어머니에게 꼭 붙어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평화롭고, 완벽했다.
저택의 분주한 일상을 바라보며 루나는 멍하니 집 안의 모습을 응시했다. 더 이상 뭉클한 감정을 누를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만 오두막에 다녀올게요.”
“너 오늘도 오두막에서 잘 거니?”
오두막에서 자기는커녕 아마 내일은 없을 것이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구조를 기억해 두려고요.”
“응?”
의아해하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루나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노을 지는 시간이 되니 장식된 오두막 주변은 더 봐 줄 만했다. 루나는 야외 테이블을 손으로 쓸고 천천히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아…….”
루나는 오두막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 세계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
문득 루나는 자신의 양손을 보았다. 새하얗고 깨끗했다.
‘그토록 오래 물일을 했는데…….’
그녀는 눈가를 눌러 닦았다.
‘하지만 그건 안 돼. 아키스와 약속했으니까.’
양손으로 놓칠 새라 오르골들을 꼭 쥔 채 루나는 눈물을 삼켰다.
‘내가 돌아가지 않을 방도가 있다고 해도, 내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키스가 당황할 거야.’
그때였다.
바스락― 낯선 소리가 났다.
루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곧이어 날카롭게 짐승이 우는 소리가 났다.
“뭐지?”
루나는 숄을 걸치고 램프를 든 채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히힝―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귀를 더욱더 쫑긋 세웠다.
“거기, 누구 있어요?”
루나가 목청을 가다듬고 외쳤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루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언가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돌진한 탓이다.
바닥에 떨어진 램프 불빛이 말의 거대한 위용을 비추었다. 말발굽 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아…….”
루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조심해요!”
그때, 말 위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가 루나의 위로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니 루나는 사내의 팔 사이에 갇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키스……?”
루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차림은 낯설었지만 틀림없는 아키스였다.
“제길.”
그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이 숲에 덫을 놓은 게 당신입니까?”
“네에?”
루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심장이 두근대며 뛰었다.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내 말이 놀라지 않았습니까.”
그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한참을 달리다 멈추고는 자리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 꿈에 세계에서…… 당신도 등장인물이라는 건 말 안 해 줬잖아요…….”
루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키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루나는 찔끔 놀랐다.
“무슨 일인데요?”
“내 말이 덫에 발목을 물렸단 말입니다. 말이 폭주하다가 내가 이렇게 당신 위로 떨어졌고요. 이 뻔한 상황을 새삼 물어봐 줘서 고맙군요.”
그가 비꼬았다.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라고는 하지만 남의 집 숲을 침범한 사람이 할 말인가?
“여긴 사유지예요!”
“여긴 사유지가 아닙니다.”
아키스가 딱 잘라 말했다.
“수도 근교의 숲은 모두 황실 소유입니다.”
“이 뒤가 바로 우리 집이라구요.”
“그럼 사유지를 침범한 건 당신이겠군요.”
“…….”
루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는 아침에 엄마가 한 잔소리를 떠올렸다. 밤마다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덫을 놓은 건 그녀였다.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구요. 그건 그냥 장난감 덫이에요.”
하지만 이미 아키스는 그녀를 이상한 여자 보듯 보고 있었다.
루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숲 뒤쪽은 수도의 고서점 야간 거리와 가까웠다. 아키스가 이 지름길을 찾아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길은 아카데미에서 고서점 거리까지 통하는 지름길이란 말입니다.”
“그럼요, 이 시간에 매일 고서점 거리에 가겠다며 나다니는 일중독자는 이 나라에 단 한 명 뿐일 테니까요.”
루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댔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됐고, 이 상황이나 수습해 봅시다.”
“……네?”
아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망설이다 신경질 나는 표정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 * *
“말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줘요.”
아키스가 말했다.
루나는 그 말에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말의 콧잔등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그사이 아키스가 말의 발목에 걸린 장난감 덫을 빠르게 빼냈다.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한번 발을 굴렀다.
그에 루나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키스도 말에게서 몸을 떨어뜨렸기에 둘은 바짝 붙어 서게 되었다.
루나는 놀란 눈으로 아키스를 보았다. 그 또한 숨죽여 그녀를 응시했다.
1초, 2초, 3초.
묘한 기류에 그녀의 가슴이 오싹해질 무렵, 아키스가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이걸 어떻게 보상할 겁니까?”
“보상이라뇨?”
“내 말이 발목을 다쳤잖습니까. 혹시, 일부러 나와 엮이려 덫을 놓은 겁니까?”
그거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혹시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아는 사이였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화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생전 처음 보는 내가 당신 관심을 끌고자 덫을 놓았다고요? 그것참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랍니다, 공작님. 비록 내가 당신 이름과 얼굴을 바로 알아볼 만큼 유명하신 분이라 해도 말이죠.”
루나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아키스의 얼굴에 당혹이 퍼졌다.
“고서점 거리는 가서 뭐해요? 그럴싸한 번역가도 없을 텐데, 안 그래요?”
“……당신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예요, 당신의 번역가이자 미래의 부인이랍니다. 거기다 이 꿈의 주인이죠.
루나는 비꼬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이름이 뭡니까, 당신.”
“루나예요.”
그녀는 아키스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저택으로 오면 말의 발목을 달랠 습포를 드리겠어요. 장난감 덫이라 심하게 다치진 않았을 거예요. 아까도 멀쩡히 잘 달리던걸요. 어차피 말이 좀 진정해야 돌아가실 수 있잖아요.”
“…….”
아키스는 가늠하듯 그녀를 보았다.
이 시간에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는 그녀가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진심입니까?”
“난 더 대담한 일도 할 수 있답니다. 싫다면 마세요.”
루나는 등을 돌렸다.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쥐고 그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이게 당신 집입니까?”
오두막에 도착한 아키스가 짧게 말했다. 그녀의 오두막은 작다 못해 초라했다.
“……가난한 줄은 몰랐군요.”
“여기 우리 집 아니고 별채거든요?”
루나가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키스의 싸늘한 말투나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농담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계속 그렇게 지껄이시면 차 대접 받기는 그른 줄 아세요.”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그녀를 따라 불이 환하게 밝혀진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가정집 같군요.”
작은 부엌 시설과 난로가 딸린 오두막을 본 아키스의 감상이었다.
“그렇게 여기가 맘에 안 드시면 나가도 좋아요.”
“아닙니다.”
아키스는 나직이 대답했다.
“그냥 신기해서 그랬습니다. 난 평범한 가정집을 겪어 본 적이 없거든요. 이전에 내가 살던 거리에도 이런 집들이 있었죠. 이런 집 안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거리의 소년이었던 시절, 루나가 새틴의 하녀였을 때처럼 그에게도 평범한 가정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루나는 말없이 습포와 차를 준비했다. 말을 먼저 진정시키고, 그들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짧은 티타임이 끝나고 루나는 아키스가 저를 응시하는 걸 깨달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따로, 가문을 통해 기별을 보내면 받아 줄 겁니까?”
“왜요?”
“……눈치가 없는 것 같으니 알아서 기별을 보내죠. 도와준 것에 대한 사례 말입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이 세계는 루나의 무의식이 선택한 행복한 세계였다. 그러니 이런 달콤한 일만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으리라.
‘아아,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도 있었구나.’
그러니까 이 행복한 세계에 마지막 결말은 평범한 귀족 소녀 루나와 공작 아키스가 만나는 미래였다.
루나는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또 만나요, 만날 수 있다면요.”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테이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키스가 루나의 눈을 보았다. 루나도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눈을 깜빡였다 뜨자, 오두막 벽에는 낯선 문이 나타나 있었다. 이질적인 문은 붉은 벨벳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잠깐.”
아키스가 루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당신, 꿈을 꾸는 중이었습니까?”
“네에, 맞아요.”
루나는 꿈이 끝나 가는 걸 느끼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 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을 꿈꾸게 해 준 사람이…….”
“꿈 밖에서 만나요, 공작님.”
루나가 아키스의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좋은 꿈꾸게 해 줘서 고마워요.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세계의 마지막은 당신이 장식하는 것 같네요.”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붉은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암전이었다.
꿈이, 끝났다.
* * *
“……아…….”
루나는 제 젖은 눈가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뎅― 뎅― 뎅―
머리맡의 자명종이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명종을 눌러 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침대 위에서 옹송그렸다. 기쁘고도 슬퍼서 한동안 날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완벽한 꿈이야……. 아버지도 건강하셨고…….’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하루라도 체험한 것은 정말 큰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꿈의 마지막에 아키스를 만난 건…… 슬펐고, 또 기쁜 일이었다.
루나는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그런 완벽한 세계에서도 난 당신 없이는 행복할 수 없구나…….’
그녀는 두 가지 사실로 마음이 아프고도 슬펐다.
어머니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슬픔이요, 아키스를 제가 그만큼이나 사랑한다는 걸 깨달은 것은 충격이었다.
‘지나갈 마음이 아니구나.’
영원히 지속될 그 마음은, 아마도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사그라들지 않을 불꽃이리라.
그를 많이 사랑했고, 열망했다.
그래서 가슴이 저며 왔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웃었다.
‘당신의 꿈에도, 내가 나올까?’
루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명종 소리를 들은 건 루나만이 아니었다.
아키스는 천천히 침실의 문을 열었다.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에 루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루나?”
그는 그녀의 상태를 가늠하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뭐라 더 말할 새도 없이, 그녀는 겁먹은 작은 동물처럼 그에게 파고들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랬다.
“잘 잤어요?”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꿈이었어요.”
그녀는 아키스의 옷깃을 꽉 쥐고 속삭였다.
“숨 막히게 좋은 꿈이요.”
그녀의 말투의 마지막이 넘쳐흐르는 감정들이 뭉근하게 흩어졌다.
아키스는 그녀를 더욱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 * *
하룻밤의 백일몽.
최고의 행복을 엿본 꿈은 약간의 후유증을 남겼다. 루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기억들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부터 계속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감기 기운이 있나 봐요.”
마치 꿈속의 감기가 옮아온 것 같았다. 아키스는 급하게 주치의를 불렀다. 아침부터 공작가의 주치의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피로가 쌓여 몸이 쇠약해져 계십니다. 단순한 감기이니, 며칠 푹 쉬면 나으실 겁니다.”
아키스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피곤했나 보군요.”
“네, 아무래도 이번에 새로 출판 일을 시작하며 조금 무리했나 봐요. 집필도 며칠 쉬어야겠어요.”
루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려 아키스가 더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는 나직하게 눌러 말했다.
“루나, 혹시 계속 불안 증세가 나타나면 꼭 내게 말해야 해요. 알겠지요?”
“……알겠어요.”
“한 번이기에 그럴 확률은 적지만, 꿈 마법은 부작용이 있기도 합니다. 허탈감이나 허무감이 느껴지면 바로 내게 말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그날 내내 계속 열을 앓았다. 아키스는 그녀를 몹시 걱정하며 하루 종일 침대에서 앓는 그녀를 돌보았다.
열에 달떠 앓으면서 루나는 아키스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이 심한 감기가 꿈의 부작용일까 걱정되었다.
“있잖아요…… 아키스, 꿈 마법의 부작용이라는 게…… 정확히 뭐죠?”
말을 하는데 목이 까슬했다.
아키스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려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꿈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지금 살아 있는 실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걸 말합니다. 그건 꿈 중독의 초기 증상이지요.”
루나는 몽롱한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증세가 나타나면 망각 약을 먹어야 해요. 꿈에서 본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백마법사는 꿈을 만들고, 흑마법사는 꿈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약을 만든다.
이는 마법의 이치였다.
그리고 아키스는 망각의 약을 가지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다고요?”
아키스의 설명을 들은 루나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아키스가 어르듯 부드럽게 설명했다.
“꿈이니까요. 대부분의 꿈은 눈을 뜬 후 얼마 가지 않아 잊히죠.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고요.”
“그건 싫어요.”
루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억하고 싶어요, 엄마 얼굴을요…….”
그렇게 말하는 루나는 몹시 슬퍼 보였다. 결국 아키스는 마음이 약해져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더 자요. 푹 자면 나아질 겁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며칠 쉬고 싶어요. 그러면 나아지겠지요. 난 1년에 한두 번 가끔 이렇게 심한 감기에 걸리곤 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요.”
루나는 중얼거렸다. 아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녀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 * *
‘역시 그녀에게 괜히 꿈을 보여 준건가…….’
아키스는 꿈 마법을 사용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주치의는 피로 때문이라 했지만 아키스는 그녀가 꿈을 꾼 후 정신적 타격을 받은 영향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예 일을 쉬게 할까. 당분간 푹 쉬라 설득해야겠군.’
역시 그녀가 과로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아픈 2, 3일간 아키스는 계속 그녀만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나 이렇게 누군가를 걱정하며 며칠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아직도 열이 내리지 않았나?”
“송구합니다, 공작님. 주치의가 처방한 해열제를 드셨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시녀장님이 계속 방에 계셨고요.”
제인이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와 비단 수건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키스는 시녀들의 간호조차 못 미더웠다.
아키스는 손짓해서 그녀를 물렸다.
“밤에는 내가 직접 간호할 테니 모두 침실을 비워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 * *
루나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또 꿈을 꾸고 꾸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따듯한 것이 몸에 닿아 있었다. 루나는 온몸에 땀을 흘렸다는 걸 깨달았다.
“아키…… 스?”
큰 손이 이마를 쓸었다.
아키스는 따뜻한 물에 적셔진 비단 수건으로 그녀의 알몸을 부드럽게 닦았다. 루나는 무의식중에 뺨을 붉혔다.
“당신이…… 직접 하지 않아도 돼요.”
“씻겨 준 게 처음도 아닌데, 새삼.”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루나는 멍하니 아키스를 보았다. 그가 비단 수건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말캉한 가슴과 날씬한 배가 비단 수건 아래 쓸리자 따듯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 은밀한 곳까지……, 루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엎드려 봐요.”
그녀는 봉긋한 힙선을 보이며 겨우 누웠다.
아키스가 루나의 매끈하고 하얀 등을 닦아 내렸다. 루나는 숨을 쌕쌕 쉬었다.
“흐…….”
아키스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가운을 입혀 주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아래서 가쁜 숨을 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래도 땀을 닦아 내니 한결 개운했다.
“열이 쉬이 내리지 않는군요.”
“……그러게요.”
루나는 몽롱한 어조로 어리광을 부렸다.
“당신 손이 차가우니까 계속 이마를 짚어 줘요.”
아키스는 큰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그러자 스르르 다시 눈을 감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옆에 있을 테니 더 자요.”
“밤새 옆에 있어 줄 건가요?”
루나가 물었다.
“약속하죠. 계속 옆에 있을 겁니다.”
그녀는 아키스의 옷깃을 꽉 쥐었다.
아키스는 그 손을 바라보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가 이토록 깨질 것처럼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 여자가 아프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게 조여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루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루나는 방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까만 창밖을 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루나는 곱게 입혀진 비단 잠옷을 끌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아직 멍했지만 목이 바짝 탔다.
‘아키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이었나 싶었다.
그녀는 가운을 걸치고 비틀대며 방을 나갔다. 죽을 것 같던 열은 한층 내렸다.
‘물, 마시고 싶어…….’
서재 앞을 지나던 루나는 열린 문틈으로 서재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루나는 조심스레 서재를 살폈다.
‘그가 여기 있나?’
서재 안에 들어가 기웃거렸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몹시 목이 말라 그의 서재 책상에 놓인 물병의 물을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약간 들었다. 루나는 서재 책상을 짚은 채 겨우 섰다.
‘정말 몸이 형편없이 약해졌네. 며칠 앓았다고 걷는 것도 힘들다니.’
그때였다.
익숙한 소리가 들리며 벽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루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건…… 또?”
아키스의 비밀의 방.
어느새 그의 비밀 도서관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나 혼자 서재 문을 닫고 있으면 이 공간이 열리는 건가? 이건 또 뭔지…….’
루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마른침을 삼키고 먼저 서재 문을 잠갔다.
문득, 루나는 그의 마음속 공간을 떠올렸다.
‘난 가장 행복한 꿈에서도 당신을 보는데, 당신은 지금 내 생각을 지금 하고 있을까?’
안 되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의 마음속이 몹시도 궁금했다.
알지 못하면 심장이 다 타 버릴 것 같았다. 꿈을 꾼 이후로 계속 아키스를 갈급했고 조바심이 났다.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이 문이 사라지는 거였지?’
그녀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아키스의 비밀 공간, 그의 이공간인 도서관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 신비한 그녀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도서관 안을 걸었다.
스르르―
공간은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다음 문을 열어 주었다. 루나는 홀린 듯이 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그의 마음속 바다.
아무도 모르는 아키스의 머릿속.
그곳은 여전히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대어의 별로 장식된 하늘…….’
듣기로 이곳에 떠오르는 글자가 그가 지금 떠올리는 것이라 했던가.
금과 은의 글자가 반짝이며 하늘을 수놓았다. 금색 글자는 그가 가진 마법 주문, 은색 글자는 그가 평소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것들이라 했다.
‘아…….’
멍한 머리로 그 하늘을 응시한 루나의 몸이 굳었다. 루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서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해…….’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그 밤하늘을 응시했다.
온통, 자신의 이름이었다.
수많은 단어들이 가득 메우고 있던 그의 마음속 은빛 글자가 모두 그녀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나, 루나, 루나, 루나.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증식한 은빛의 별과 같은 글자가 밤하늘처럼 온통 그의 머릿속을 수놓고 있었다.
‘난, 내 생각을 하기는 하나 생각했는데…….’
결국 루나는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아…….’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 수많은 단어들이 모두 그녀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별의 빗속에서 루나는 어깨를 떨었다.
그는 이토록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다니…….’
하늘이 빙글빙글 돌며 고대어로 이루어진 그녀의 이름 글자가 천천히 별동별처럼 아스라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반짝이며 서서히 흩어져 내렸다.
그는, 아키스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글자의 별 속에서, 루나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완벽한 미래를 가질 순 없어도, 이 세상은 그녀에게 가능한 한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온통 그를 차지했다는 걸 처음 느꼈을 때 깨달은 건 그것이었다.
루나는 눈물을 닦았다.
처음 밤바다를 본 날을 떠올렸다.
새까만 바다 위로, 해변의 별들이 보석처럼 흩어져 내렸었다.
그 경이로운 바다보다 더 깊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고, 세상의 신비를 품은 별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의 마음속은 바다보다 더 깊게 루나를 감싸 왔다.
한차례의 별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그다음에야 루나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단어가 다른 단어가 되어 떠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수많은 루나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이름. 자신의 옆에 떠오르는 ‘루’라는 이름은 환상 속에 빠진 그녀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루나는 슬프게 웃었다. 그녀는 루라는 이름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훔쳐보는 건 나쁜 짓이지만, 후회는 없어.’
그녀가 도서관을 나오자, 비밀 문은 스르르 사라졌다. 루나는 서재에서 잠시 제 감정을 추슬렀다.
그때, 복도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나는 심호흡을 하고 서재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때마침 아키스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루나, 도대체 어디 있던 겁니까. 침실에 없던데.”
늦은 밤인데도 그는 아직 잠옷 차림이 아니었다.
그의 뺨이 창백했다. 루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작은 손을 가져다 댔다. 꿈속과는 달리 거친 손이 그의 뺨을 감싸고 어루만졌다.
“자다가 당신이 없어서…….”
“잠깐 바람을 좀 쐬고 왔습니다. 당신이 계속 앓으면서 자기에, 잠 깰 겸요.”
“졸리면 자지 그랬어요. 손님방도 있고…….”
루나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행동에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키스의 마음속에 그녀에 대한 염려가 가득 차 있기에, 그의 마음을 점령한 것이 그녀의 이름이기에.
그래서 아키스는 제 옆에 머무른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열은 좀 내린 것 같은데…….”
그가 이마에 손을 짚어 열을 재고 한층 내려간 체온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한결 나았어요.”
루나가 속삭이며 아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품에 파고들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루나?”
“……어서 침대로 가요. 당신 품에서 자고 싶어요.”
아키스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런 그녀의 모습이 숨 막히게 사랑스러웠다.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루나의 마음은 슬플 만큼 충만하게 차올랐다. 루나는 그의 팔을 베고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건 아키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날이 뜨면 바로 주치의를 부를 겁니다. 그리고 며칠은 더 꼼짝도 하지 말고 쉬어요.”
아키스는 그녀의 어깨를 둥글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 내용이 계속 생각납니까?”
아키스의 조심스런 물음에 루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몹시도 달콤한 꿈이었지만 잊어야 할 꿈이었다.
“……꿈속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냥, 특별할 것 없었어요. 지금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그거 대단하군요.”
“네?”
뜻밖의 그의 말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게 말했죠. 내 어린 시절과 상관없이 나란 사람은 변함없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고요. 분명 꿈속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을 텐데, 지금이과 다름없이 상냥하고 영리한 여자라니 당신답군요. 어떤 과거도 당신을 마모시키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제야 아키스의 말을 알아들은 루나의 가슴에 몽글몽글 무언가가 맺혔다.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키스가 이토록 세심하게 그녀가 한 모든 말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마모되고 망가진 나는 싫은가요?”
“당신이 그런 여자라면 그건 그거대로 내 관심을 붙들어 놓았겠지요. 시험하는 듯한 말은 하지 마요, 루나.”
루나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고 소중해서 두려워…….’
종종 그가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이 사람이 마음대로 증식하고 뛰어다니는데, 그걸 혼자 아는 게 답답해서 심장이 뛸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의 말과 행동 모두가 하나하나 다르게 느껴졌다. 이토록이나 저를 생각하고 있는 이니, 그 모든 행동에 애정의 단초가 없을 리 없다.
“이제는 괜찮아요? 꿈을 꾸고 나서, 줄곧 힘들어 했잖습니까.”
“아뇨, 이제는…… 힘들지 않아요.”
루나가 속삭였다.
‘이미 낮에도 꿈을 꾸고 있으니, 괜찮아.’
그는 루나에게 낮에 뜨는 달이었다.
밤에는 하늘을 빛내 주고 몽환적인 마음에 빠져들게 하고, 낮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달. 그것이었다.
그렇게 빛나고 있어서 평생을 이정표 삼아서 따라갈, 그런 꿈.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그만큼이나 하면서, 그게 첫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언제쯤 그 마음을 자각해 줄까?
“아키스, 모든 걸 다 잃더라도 갖고 싶은 것이 생긴 적 있나요?”
루나는 그에게 몸을 맞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그 말에 아키스가 움찔했다.
“어쩌면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다 걸어야 할 정도로, 논리적으로 생각 못하더라도 갖고 싶은 거요.”
아키스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알아가는 중입니다, 그런 걸.”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거면 만족했다. 아키스의 마음속엔 루나가 있었다. 약간의 좋아함이든, 사랑이든.
‘말하자.’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2년의 기한 안에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이다.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옆에 머물러 줄 수 있는지 물어볼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날 선택해 준다면…….’
루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달이 여물고, 적절한 시간에 도달하기까지.
그러나 그 기다림은 행복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고독한 짝사랑이 아님을 확인하였으니.
* * *
이튿날 아침.
의사는 루나의 감기가 많이 나았다 말했다. 3일 만에 제대로 된 아침 식사를 하며 루나는 아키스에게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꿈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네, 꿈속에서 아버지가 분명히 말했어요. 그때 무리하게 항해를 강행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고요…… 투자를 받은 건 숙부님이라고 말이죠.”
“……알겠습니다. 조사해 볼 가치가 있는 일 같군요.”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날 즉시 디온을 시켜 버몬드가가 망했던 경위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라 했다.
그리고 당시의 일에 대한 조사는 빠르게 끝났다. 당시 수출입을 관리했던 회사에 관련 서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루나가 꿈속에서 들은 이야기가 맞았다. 무리하게 투자를 받고 상회의 이름을 판 건 루나의 부친이 아닌 숙부였다.
“……그래요, 결국 내가 평생 듣고 자라 온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아키스의 말에 루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숙부 가족은 루나에게 죄책감을 심어 주어 그녀의 어린 시절을 망가트렸다.
“그래. 어떻게 처리해 줄까요?”
아키스는 나직이 물었다.
‘아예 죽여 버릴까, 이참에.’
아키스는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다 했죠?”
“친척집과 지인 집을 전전하다, 수도에서 머물 곳을 마련하지 못해 시골로 내려갔다는군요. 아마 그곳에서 변변찮게 쥐꼬리만 한 녹봉으로 사는 모양입니다.”
거기다 그들은 아키스의 명예 훼손 재판에서 크게 패소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상태였다. 아키스는 그들에게 배상금 지불을 가혹하게 쪼아야겠다 생각했다. 어쩌면 폭력도 동반될 것이다.
‘꿈속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신기하군.’
이것 하나만큼은 꿈속에서 본 현실과 똑같았다. 숙부 가족이 저들 분수에 맞게 시골로 쫓겨나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 다른 미래를 줘도 그들은 저들의 격에 맞는 운명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정말 어리석은 치들이었다.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시는 그들의 얼굴을 수도에서 보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아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시골에서의 그들 삶을 고달프게 하라 남몰래 디온에게 지시했다.
“녹봉도 바로 압류해. 그리고 평생 수도 사교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라. 굶어 죽으면 딱 좋겠군.”
아키스의 지시를 받은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버몬드가의 자택이 경매에 나왔는데 그건 어떻게 할까요? 우리 쪽에서도 배상금 요구를 한 상태라 압류할 수 있습니다.”
아키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다나다 가끔 그 저택을 보는데 꼴 보기 싫더군. 저택은 밀어 버리고 그 터는 아내 마음대로 쓰라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디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방을 나갔다.
* * *
며칠 후, 루나는 아키스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옛 버몬드가의 저택이라고요?”
“혹시 몰라 내가 인수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써요.”
“……그렇게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첫 출간 기념 선물이라 치죠. 그래서 말인데, 당신에게 나쁜 의미가 있는 곳이니 저택을 밀어 버리면 어떨까요.”
루나는 아키스의 엉뚱한 말에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그의 행동력은 알아줘야 했다.
“그 저택이 그다지 필요하진 않지만…….”
어차피 꿈속에서 그녀의 부모와 함께 살았던 버몬드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한번 그 집을 보러 가고 싶긴 하네요.”
* * *
루나는 꿈속에서와는 정반대의 풍경인 버몬드가의 저택을 둘러보았다.
집 구조만 똑같았지 꿈속에서의 따스한 저택과 영 딴판이었다.
‘저 계단은 손님이 오는 날이면 하녀들의 도움도 없이 며칠 전부터 왁스칠을 해야 했지. 손이 부르트도록 말이야. 그리고 장식품 닦기도 다 내 몫이었어. 저 다림질 방에서는 새벽녘이면 새틴의 옷을 다렸지…….’
걸음걸음 나쁜 추억이 없는 곳이 없었다.
루나는 팔짱을 켰다. 그녀는 울프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 루나는 씩 웃고 울프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울프, 뛰어. 맘대로 휘저어도 돼. 커튼도 물어뜯고, 카펫도 네 맘대로 가지고 놀아.”
컹! 울프는 루나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집안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루나 또한 울프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녀의 뒤를 하인들이 따랐다. 울프는 루나가 지긋지긋해했던, 직접 먼지를 하나하나 다 청소해야 했던 카펫을 물고 늘어지며 마구 물어뜯었다.
“이 장식품, 다 버려요.”
루나는 쓰레기 수거 상자에 벨레가 산 형편없는 조악한 조형품들을 집어 던졌다. 내친김에 새틴의 방에 가서 아직 남은 드레스들도 모두 끌어 내렸다.
“모두 가져가 기부해 달라 전해 줄래?”
마음대로 방들을 휘젓고 다니며 싸구려 도자기를 내버려 던지고, 마침내 숙부의 서재마저 맘대로 휘젓고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버리고, 깼다.
루나는 신이 나서 아이처럼 저택을 휘저었다. 이제, 악몽은 끝이었다.
‘속이 다 시원하군.’
루나는 씩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 * *
몸을 회복한 이후, 루나는 다시 집필에 들어갔다. 상황과 상관없이 체력이 되는 한은 이 책의 소설들을 세상에 공개할 생각이었다.
‘도대체 고대 소설에는 왜 지진이 이렇게 중요한 사건으로 나오는 걸까.’
루나는 골몰히 생각했다.
새 작품을 집필하고 있었지만, 월플라워 부인에 대한 팬레터도 꾸준히 왔다.
그중 몇몇 편지는 용기를 낸 여인들의 목소리였다.
[월플라워 부인을 읽고, 저는 집을 나가기 위해 몰래 삯바느질과 시 쓰기를 해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했지만 제게 무엇보다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월플라워 부인처럼 남편의 바람이나, 아니면 정서적 학대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용기를 내서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든가, 아니면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무엇 하나 루나에게 영감을 주지 않는 내용이 없었다.
루나는 심호흡을 하고 펜을 휘갈겨 썼다.
<다음 작품은 더 세게 가자.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억눌리고 억압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내용을 쓰고 싶어. 보석 영애 이야기의 후반부를 보수적으로 고치자는 의견은 철회야.>
<진심이십니까? 현재의 보수적 사회 수준으로는 꽤 논란을 일으키게 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 논란이 생긴다면 받으면 되는 거지. 다만, 상업성은 유지하는 선에서. 그래야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재미가 채워지잖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게 소설의 제일 요소니까.>
<훌륭한 생각입니다.>
붉은 책에 글자가 떠올랐다.
<세상을 바꾸는 건 펜입니다. 또한 문화이기도 하죠.>
루나는 그 말에 미소 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루나는 할 줄 아는 모든 일을 다 하기로 했다.
‘뭐든지 안 하면 잊어버리는 법이야.’
루나의 하루는 다시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알렉, 이 빈 오두막을 내가 써도 될까요?”
공작가의 뒤 정원에는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예전에는 고용인 숙소로 쓰던 코티지인데, 고용인 수가 줄어들며 텅 빈 것이다.
“물론입니다, 부인. 그런데 무엇에 쓰시려고요?”
“아지트를 만들려고요. 아, 그리고 주변에 텃밭을 만들어 약초를 심을 거예요.”
“네?”
루나는 오두막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녀는 꿈속의 따뜻한 오두막을 떠올렸다. 마음 가는 곳은 어디든 만들면 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되던 그녀는 또다시 그러한 장소를 만들 것이다.
* * *
서부 사막.
마법사들의 수많은 비밀 던전이 발견되는 곳. 그리고 그곳의 은밀하게 숨겨진 던전 중 한 곳에 휘멘은 웅크리고 있었다.
석조로 만들어진 구조의 지하 연구실은 오래된 고대 신전 같았다. 그는 문득 낡은 짐 속에서 시계를 꺼내 보았다.
“오늘이 며칠 째지?”
그가 서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연구실은 구역별로 개미굴처럼 연구실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각 연구실의 암호를 풀고 그 안에 있는 고서적들을 훔치고, 그리고 다음 단계로 계속 향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 시간 개념을 잊어 버렸다.
‘예전에 한 던전에 일 년 정도 처박혀 있었던 이후로 이렇게 긴 던전은 처음이군.’
그는 자신의 이공간 안에 숨겨 둔 마른 빵과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마지막 관문이라…….”
아무래도 이곳은 가공할 만한 마법사의 던전인 것 같았다.
인간을 불신하는 건지, 이 고대 연구실의 주인은 수십 개의 결계와 암호들로 연구실 안에 곳곳에 비밀 통로를 숨겨 두었다.
이런 난이도 높은 곳인 만큼, 이 연구실 안의 자료는 굉장히 풍부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휘멘도 이만큼 많은 주문들이 숨겨져 있는 공간은 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도구 제작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도 적혀 있었다.
“내 참, 멸망론자인 마법사는 또 처음 보는군.”
이 연구실의 주인이 얼마나 비관적인지, 세상에 멸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연구해서 보고서를 적어 두었다.
그중에는 허무맹랑한 내용도 있었지만, 몇 가지는 가설이 제법 흥미로웠다.
“하, 그나저나…….”
그런데 며칠 전부터 큰 문제에 직면했다. 이곳의 마지막 문을 여는 것을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어 능력자를 데려와야겠는데?”
그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혀를 찼다.
마지막 관문은 고대어로 된 암호가 떠오르는 구조였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새겨진 문구가 바뀌었다. 모두 고대어 암호였다.
“제국력 670년 이후, 이런 던전이 발견된 건 처음이군.”
아마 최상급 고대어 능력자 겸 마법사가 만들어 놓은 시설 같았다.
“……거기다 도대체 몇 가지 고대어가 암호로 떠오르는 거야?”
언어별로 고대어 번역가를 다 데려와도 부족할 듯했다. 턱을 쓰다듬던 휘멘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일곱 가지 언어를 다 할 수 있다 주장하는 놈이 있었지.”
루라고 했던가.
그 녀석을 떠올리자 휘멘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데려와 제자로 삼고 싶었다.
“이제 슬슬 잡으러 가 볼까.”
휘멘은 오랜만에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향하기 위해 던전을 나섰다.
“수호 주문을 걸어 두길 잘했지.”
마지막에 루를 만났을 때 휘멘은 흑마법사의 가호, 수호 주문을 걸었었다. 흑마법사의 가호 주문은 주문의 대상자가 어디 있든 찾아낼 수 있었다. 소년이 전 세계 어디에 있든 말이다.
“뭐, 일단은 서점에 있겠지. 거기 먼저 가 볼까.”
일단 먼저 집으로 가서 쉬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던전 안은 마력장이 강해서 수호 주문을 추적할 수 없었다. 휘멘은 조금 쉰 뒤 고대어 서적들을 정리해 수도로 가기로 했다.
휘멘은 오랜만에 던전을 나왔다. 햇빛이 이렇게 눈부셨던가.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 * *
“카일라.”
아키스는 오랜만에 주문을 속삭였다.
그의 팔을 가린 환시 마법이 사라지고, 살결 위에 문신처럼 달라붙은 검은 꽃문양이 떠올랐다. 아키스는 혀를 찼다.
“꽃이 또 늘었군.‘
아주 희미하게 돋아났지만,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지만 분명이 늘어났다. 한 송이 더 피어난 꽃을 보고 아키스는 의자에 목을 기댔다. 피곤했다.
‘빌어먹을.’
아키스는 책상 위의 보고서를 보았다.
보고서 위에는 북부부터 남부까지의 모든 도시 이름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 이름 옆에 단 한 단어가 떠올라있다.
<소재 확인 불가.>
여기도 없음, 저기도 없음. 들어온 정보 없음. 비슷한 사람 있었으나 오인으로 판명.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야.’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분통이 터져 아키스는 책상을 한번 내려쳤다.
분명 그의 팔에 돋은 검은 꽃문양이 왼쪽 가슴까지 닿으면 그 대상에게 각인해 버리는 것이라 했다.
‘휘멘은 또 왜 두문불출이지. 이렇게 오래 사라진 게 한 던전에 1년 이상 처박혀 있었던 것 이후 처음인가.’
휘멘 또한 사라졌다. 혹시 둘이 함께 사라졌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루가 처음부터 자신을 망치고자 접근하여 각인하려 한 것이 아닌 이상 이럴 순 없었다. 공작가의 대를 끊고 그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 아닌가 하는 생각.
‘찾으면 심문부터 해야겠군. 하지만 이상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게 한 번은 나타나 협박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공작가의 비밀이 유출된 정황도 없어.’
루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졌다.
‘루나.’
아키스는 애타게 아내를 원했다. 정상적인 몸이 되어 아내를 안고, 그녀에게 영원히 자신에게 머물러 달라 하고 싶었다. 처음엔 사랑에 빠질지 모른다는 공포로 루를 쫓았으나 이제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루나를 머무르게 하기 위해, 그는 루를 없앨 필요가 있다.
그는 교착 상태에 갇혔다. 그리고 그를 혼란하게 하는 건, 아키스 자신이 아직도 루를 그리워한다는 점이었다.
* * *
가끔, 아키스가 조용한 날이 있었다. 워낙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인데도, 기분이 안 좋구나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 날도 잘해 주려 노력하니 그냥 놔두는데.’
오늘 같은 날은 신경 쓰인다고 할까. 루나는 조용히 식사하며 아키스를 보았다.
“왜?”
아키스가 나직이 물었다.
“아뇨, 그냥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아서요.”
아키스는 눈을 들어 루나를 보았다. 정보길드는 물론 현상금 협회에서 돈을 받은 것도 무색하게 이번에도 아무 성과가 없다는 보고였다. 그러나 루나에게 루의 일은 절대로 감추고 싶었다. 각인은 그가 루나에게 절대 들켜선 안 될 비밀이었다.
“그냥요, 지방 영지 관련해서 일이 좀 있을 뿐입니다.”
“기다리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오래전부터 정기 보고가 오는 것 같던데. 바깥에서 사람이 다녀가고 나면 기분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루나의 말에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오래 전부터 초대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안 오는군요.”
“친한 사람인가요?”
“아뇨. 증오하는 사람에 가깝죠.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
그때였다. 천장이 흔들렸다. 그리고 샹들리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쿵.
아키스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게 무슨 일이죠, 아키스?”
“자리에서 일어나서 좀 떨어지겠어요, 루나?”
루나는 당황하면서도 문께로 물러섰다.
“기다리던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네?”
그때, 천장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천장에 구멍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그 아래에서 떨어진 사람이 테이블 위에 처박혔다. 우지끈. 테이블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접시들을 피해 테이블의 끝부분에 처박혔다.
‘히익!’
루나는 테이블 위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휘멘?’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흑마법사이자, 루를 구해 준 적 있는 사내. 휘멘이 테이블 위에 누워 있었다.
“……빌어먹을. 사람을 이렇게 개 부르듯 불러? 내 집에 무슨 짓을 해해놓은 거야?”
“짐승을 잡는 덴 덫이 제격이거든.”
아키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휘멘이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길래-.”
“너야말로 이렇게 오래 던전 지대에 있었던 건 오랜만인데. 드디어 죽은 줄 알았다.”
“아아, 살아서 네놈 얼굴을 보니 차라리 죽고 싶어지는군.”
아키스는 휘멘의 받아치는 말을 무시했다.
“공작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때 집사가 노크했다.
“모두 나가. 방 근처로 오지 마!”
아키스가 외쳤다. 곧 문 너머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키스의 시선이 그제야 루나에게 닿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층 누그러졌다. 아키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루나, 잠깐 나가 있겠어요? 당신이 접촉해 좋을 것 없는 거친 놈이라서요.”
루나는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휘멘의 시선이, 천천히 루나에게 닿았다.
“루?”
휘멘이 말했다. 루나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여자 차림을 하고. 안 그래도 마법으로도 네가 찾아지지 않아서 표식이 지워졌나 하고-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게 무슨 말이지?”
대답은 아키스에게서 나왔다. 아키스가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루나는 처음 보았다. 그는 약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네가 루에게 표식을 남긴 게 맞군. 그렇지? 그런데 찾아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아. 던전을 수색하는데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번역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수색마법으로 표식을 찾았는데, 그 소년이 없어서 혹시 죽은 건가 했는데. 이건 무슨 일이지?”
휘멘이 아키스를 손으로 가리키고 루나를 가리켰다.
“그녀는 내 아내야.”
아키스가 으르렁대면서 말했다.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란 말이다.”
“뭐라고?”
휘멘은 그 말에 루나를 자세히 살폈다.
“하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가 있을 리 없지.”
휘멘이 중얼댔다.
“카리노 대왕의 마법이 발동 중이니까 말이야. 아마도, 말이지.”
그는 여전히 수상쩍다는 눈으로 루나를 훑었다. 자세히 보니 외모도 좀 다르긴 한데…….
“정말 닮았군. 넌 역시 기분 나쁜 변태야, 아키스.”
“내 아내 앞에서 예의 갖춰. 그리고 말조심해라.”
아키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교육 한번 하고 대화 시작할까?”
“주먹다짐은 언제나 환영이긴 한데. 네가 루는 왜 찾는 거지? 그보다 그 애 살아는 있어? 설마 너 그 애를 또 실레노스처럼 만들려고. 아. 혹시 그 애를 공격했나? 그러지 않고서야 표식이 새겨진 걸 눈치챌 리 없는데.”
“실레노스 따위와 루를 비교하지 마.”
아키스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아키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모르는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오는군요.”
루나는 불편한 낯으로 물었다. 아키스가 써늘하게 침묵했다.
“루나, 잠시 당신은 나가있는 게…….”
“나가서 아무것도 모른 척, 얌전히 바느질이나 할까요?”
루나가 조용히 묻자 휘멘이 휘파람을 불었다. 아키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는 순식간에 말투가 둥글어졌다.
“내가 누굴 좀 찾는데, 일 관련입니다. 좋은 일로 찾는 게 아니니 당신은 마음 쓸 것 없습니다.”
루나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렸다.
“괜찮아요. 루나. 정말 별일 아니니까.”
휘멘은 그런 아키스를 생소한 듯 보았다. 저 여자는 뭐지? 괴물 조련사인가? 휘멘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키스가 고개를 휙 돌려 휘멘을 보았다.
“다시 해봐. 당장 다시 찾아. 도대체 그 애에게 표식은 왜 남긴 거야?”
“아아, 루는 인재니까 찍어두려 했지.”
어느새 아키스와 휘멘은 다시 옥신각신하게 되었다.
“그럼 지도 가져와. 네 눈앞에서 한번 더 찾아주면 되잖아. 나야말로 루가 안 찾아져서 죽었나 망연자실 하고 있는 차에 이게 불을 질러?”
휘멘은 벌컥 화를 냈다.
“나도 그 소년이 꼭 필요하다고! 얼마나 중요한 자료들을 발견한 줄 알아?”
아키스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하인을 불렀다. 곧 하인이 상자 하나와 큰 지도를 가져왔다. 아키스는 식당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펴고 상자에서 수정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펜듈럼 맞지?”
“그래.”
펜듈럼? 루나는 그 수정목걸이를 보았다. 곧 휘멘이 펜듈럼을 집어 들었다. 그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펜듈럼이 안 떠.”
“…….”
“만일 루의 몸에 남긴 표식이 추적된다면 이 펜듈럼이 떠야하는데 안 뜬다고.”
휘멘이 피곤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엄청나게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흑마법사의 가호는 거리와 상관없이 추적 가능한 마법이지 않나?”
아키스가 휘멘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맞아……. 보통 이렇게 아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 죽은 사람을 추적할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럴 리가 없어. 그건 확실히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두 사람이 언쟁하는 사이 루나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잠시 벽을 잡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언젠가는 아키스에게 고백하려 했어. 이런 식은 아니라고.’
루나는 초조하게 복도를 돌았다.
‘표식이라면, 서점에서 휘멘이 내 이마에 남긴 거?’
보호하는 주문이라 했다. 그리고 그 주문이 그날 밤, 아키스가 최음제를 먹은 날 밤 발동했다.
‘그러니까, 그 주문으로 휘멘이 날 찾을 수 있는데 그게 지금 잘 안 된다는 거지.’
천만 다행이었다. 루나는 드래곤에 대한 꿈을 떠올렸다.
‘그럼 아키스가 그날 밤의 일부는 기억하는 건가?’
하지만 루가 여자인 건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루나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신 차려 보니 루나는 아키스의 서재 앞이었다.
‘……그 봉투.’
아키스가 정기적으로 받는 보고. 그때마다 불쾌해진 그의 기분. 설마 그게 모두 루와 관련 있는 일일까?
루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공작 부인? 식당에서 나오신 겁니까?”
“아, 그. 그래요.”
루나는 그때 디온과 마주쳤다. 디온도 비슷하게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 공작님이……. 혹시 붉그스름한 머리의 키 큰 미남자와 함께 방 안에 계십니까?”
“……네.”
“역시 휘멘 님이 오셨군요.”
디온이 탄식했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사람, 아키스의 친구인가요?”
“아, 예전엔 친구분이셨지만 지금은 조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셨지요. 그 뒤로 서로 만날 일만 있으면 부딪치십니다. 하지만, 서로를 잘 아는 사이라 악우라고도 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렇군요.”
루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디온, 이상한 말을 들었어요. 아키스가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루나의 말에 디온의 표정이 흔들렸다. 루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디온, 솔직히 말해 줘요. 그가 왜 사람을 찾고 있나요? 혹시 그 사람이 아키스에게 무언가 잘못을 했나요?”
루나의 마음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아키스는 루가 사내아이라 생각했다. 동침한 기억의 일부만 있다면, 자신이 사내와 동침했다 믿는 걸까? 그래서 그 사실 자체에 모욕감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에게 독을 먹인 일의 범인으로 루를 의심하는 건가? 무엇을 상상해도 제 신상엔 나쁜 답만 떠올랐다.
디온의 표정에 순식간에 당혹이 번져 갔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공작 부인.”
“나도 귀가 있어요. 디온. 알 건 다 알고요.”
디온이 침통한 신음을 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속삭였다.
“공작 부인. 공작님께서는 혼인 후, 부인 외에 절대 누군가에게 조금도 눈을 돌린 적 없는 분입니다. 그건 믿어 주시겠지요?”
루나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에 대한 사교계의 헛소문이 많지요. 하지만, 소문처럼 그 소년을 그리워하셔서 찾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지요. 그 소년과…… 꼭 해결 보셔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그건 공작님이 그 소년을 원하셔서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정리하려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디온은 루나의 질문에 대해 약간 오해했다.
아키스가 최음 독 때문에 아팠을 당시, 사교계에는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그중 가장 파급력이 컸던 소문은 아키스가 미소년에게 반해, 그 소년을 잊지 못해 상사병에 걸려 백방으로 찾아 헤맨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니, 디온은 당연히 루나가 그 소문을 알고 있다 생각한 것이다.
“그래요, 그랬군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증이 다 났다. 디온을 보내고, 루나는 망설이다 아키스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 보고들이 전부 루에 대한 것이라면…….’
아키스의 서재에 루나가 드나드는 건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듣기로 아키스의 금고와 서랍은 모두 마법으로 잠겨 있다 했다.
‘마법으로 잠겨 있어 열쇠 구멍이 없는 서랍.’
루나도 그간 한 번도 열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루나는 멀거니 서랍을 바라보았다. 살짝 손을 댔는데 튕기듯 희미한 빛과 함께 서랍이 열렸다.
‘또…….’
루나의 손이 바들 떨렸다. 아키스의 비밀 서재로 가는 문이 열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루나는 서랍 제일 위에 방금 넣은 것처럼 들어 있는 서류를 보았다.
-보고서-
현상 수배, 가명 ‘루’를 사용하던 소년.
현상금 규모 역대 최대.
현재는 서부 전체에 수배되어 있으나 전국 범위로 확대할 예정.
반드시 생포하여 압송. 고위 귀족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일로 수배 / 개인적인 원한으로 분류-
그리고 현상금 포스터와 정보 길드의 조사 결과, 전국의 고서점을 찾아다닌 흔적 등.
아키스가 이렇게 루를 집요하게 찾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가장 위에 써 있는 메모가 있었다.
-반드시 잡기 위해, 생사불문으로 수배 레벨을 올리는 것을 고려 중. 현상금은 같을 예정.
정보 길드 권유 사항으로, 최우선 고려 중-.
그건, 정보 길드에 보내는 쪽지인 듯했다. 루나는 그만 종이를 놓쳤다.
* * *
한바탕 소란을 피운 휘멘은 올 때와 달리 제 발로 저택을 나섰다.
“이곳에 다시는 오나 봐라.”
휘멘은 알렉이 공손하게 현관문을 열어 줬음에도 직접 문을 밀치며 쾅! 닫았다. 하인들에게 듣기로 휘멘과 아키스가 대화하는 내내 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했다. 루나는 창가에 서서 멀거니 그 모습을 보았다.
“저분은 공작님의 오래된 친구입니다. 볼 때마다 싸우시죠,”
“그런 것 같아요.”
루나는 알렉이 말을 걸자 겨우 미소 지었다.
“아키스가 저렇게 참아 주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군요.”
“아아, 저분은 굉장히 유명한 마법사니까요. 주인님껜 드물게 동등한 친구인 셈이죠.”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휘멘이 시선을 돌려 루나를 돌아보았다. 루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날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휘멘은 잠시 서 있다 등을 돌려 나갔다. 루나는 머리가 조금 아파왔다.
* * *
“현상금을 더 올려.”
아키스가 속삭였다.
“생사 여부는 어떻게 할까요. 이전부터 정보 길드에서 권유하는 대로, 생사불문으로 레벨을 올리면 일류 현상금 사냥꾼들이 많이 관심을 보일 거라 합니다. 생포는 아무래도-.”
디온은 말을 줄였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소년을 데려와도 죽여야 한다. 하지만 아키스가 소년을 총애했다는 걸 알기에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거기다, 디온도 개인적으로 소년이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생포로 해. 다만, 집안 안팎으로 사람들 입단속해. 이 모든 일을 아내가 모르게 해라.”
“……네.”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나라는 하녀의 행방에 대해 조사해. 성은 따로 없다 한다. 휘멘의 집에서 일했던 고아 출신 하녀다. 그 여자가 휘멘의 약을 가지고 도망쳤다는군.”
아키스는 오늘 휘멘과 다툼이 섞인 긴 대화를 나눴다. 휘멘이 아키스의 몸을 해할 수 있는, 극독이나 다름없는 최음제를 도둑맞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하녀가 살아 있든 죽었든 철저하게 조사해라. 무연고 시체들도 조사해. 만일 하녀에게 배후가 있었다면 죽였을 거다.”
“추적해 보겠습니다.”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루나는 가벼운 미열이 났다. 이대로 그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이대로 이 비밀 속에 갇혀서…….
‘그가 루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녀가 한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키스가 침대로 들어왔다. 루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오늘 그녀가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이마를 쓸었다.
“자요?”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키스는 그녀가 잠들지 않음을 알았다.
“날이 밝으면.”
아키스가 속삭였다.
“리튼으로 갑시다.”
“리튼요?”
루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냥요. 리튼으로 가요. 당신과 며칠 보내고 싶어요.”
루나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일렁이는 눈으로 아키스를 보았다.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어.’
자신의 마음이 변할까봐 두려웠고,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요. 가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옆에 모로 누웠다.
* * *
아키스의 별장에 딸린 전용 해변은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었다.
루나와 아키스는 사가의 연인들 같은 며칠을 보냈다. 밤이 되면 돗자리를 들고 해변으로 나가 모래사장에 깔고 서로를 탐하며 키스하고 뒹굴었다.
그러고 있으면 밤하늘의 파도가 몰아치고, 별은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이상하게 그 순간, 루나는 예전에도 이 광경을 본 적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쭉, 아키스가 옆에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도 붙어 있으려니 별생각이 다 드는군.’
루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요즘 그가 좀 이상해.’
그리고 요 며칠, 아키스는 두드러지게 그녀에게 애착이나 소유욕을 드러내 보였다.
그런 그의 뜨거운 감정을 정면으로 직면하는 일은 가슴 떨리고도 무언가 두려운 일이었다. 며칠간 입술과 입술이 엮이는 일이 더 많았고 몸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나 말은 적어졌다.
“무슨 생각해요?
루나는 자리 위에 엎드려 그에게 속삭였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당신 생각이요.”
아키스가 대답했고, 루나는 미소 지었다.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이요?”
아키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소년의 각인 문제로 인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자신 안의 감정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루나, 만일 내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리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키스는 루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당신에 대한 태도가 변해 버리고, 차갑게 변하면?”
“슬프겠죠, 몹시 가슴이 아플 거예요.”
루나는 처음 느꼈던 그에 대한 첫인상을 떠올렸다.
몹시도 냉정하고 차가웠던 그 모습. 그것처럼 그녀를 대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이 오면 당신이 왜 그리되었는지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지금 우리 둘이 이렇게 있는 시간을 떠올려 마음을 달래겠지요.”
루나는 팔 위로 뺨을 겹쳐 포갠 채 중얼거렸다. 아키스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만일 억지로 각인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의 운명을 다 바친다면, 그의 인생의 적법한 주인인 아내에게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겹지도, 불행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운명에 승복할지도 모른다.
* * *
충동적인 며칠의 리튼 여행 후, 루나의 모든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휘멘에 대한 일도, 아키스가 찾는 사람에 대한 일도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함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