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은 황궁 입궁 날이었다.
“정말 혼자 괜찮겠습니까?”
“네. 원래 독대하기로 한 거니까요.”
아키스는 루나를 황후궁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냥 인사만 드리고 오세요. 내가 어릴 적에 신세를 많이 진 분이라, 얼굴 도장 한번 찍는 거니까.”
“알았어요.”
흐읍. 루나는 숨을 한번 들이켰다.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자신이 황족과 독대하는 날이 올 줄이야. 공작 부인 역할은 역시 비범한 일이었다.
“그럼, 다녀와요.”
아키스가 루나의 뺨에 키스했다. 루나의 뺨이 살짝 상기되었다. 황후궁 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던 시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키스는 황제궁에 들렀다 오겠다 했다. 황궁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그도 아마 바쁠 것이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내고 황후궁의 시녀를 따라 황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시면 금방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제 두통이 심하셔서 늦게 일어나셨답니다.”
황후 알현을 위해 머무르는 대기실엔 루나뿐이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에 앉았다.
루나는 황후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한번 떠올렸다.
‘미래에 황후에 대해 묘한 소문이 돌지. 황후가 후궁들에게 너무 괴롭힘을 당해 미쳐 버렸다는 소문 말이야.’
현 황제는 병환 중으로 거의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 했다. 멀쩡했을 땐 애인을 여럿 두었는데, 그는 좀 성격이 괴팍해서 애인들이 투기를 부리는 걸 말리지 않았다 했다.
그 질척한 황궁의 틈바구니에서 황후는 끝까지 사랑 받지 못하는 몸으로 제자리를 지켜 냈다.
그리고 제 적자를 결국 황태자의 자리에 밀어 넣는다. 그가 현 황태자인 에르고스였다. 황제가 오래 혼수상태가 되며 사실상 실권자는 황태자 에르고스와 평의회였다. 그러니 황후의 입김이 강한 건 당연한 일이다.
‘미래에 황후의 병명이 밝혀지지. 무기력 증세.’
권력을 쥔 황태자는 황후가 마음의 병이 있으니 백방으로 의사를 수소문해 황후의 마음의 병을 고치게 한다. 몇 년 후, 유명해지는 정신 관련 학자가 말하기를 황후의 증세는 ‘우울증’이라고 했다.
몇 년간 무기력하고 의욕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 ‘무기력증’이 ‘우울증’으로 변한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 진단은 학계는 물론 사교계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일기장대로라면 지금은 그다지 증세가 심각하지 않으시겠군.’
루나가 황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눈을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달리아 드 라미라. 아키스를 짝사랑한다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녀는 루나를 힐끔거리더니 허락도 없이 옆에 앉았다. 예법에 따라서는 달리아가 루나에게 인사해야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그녀는 루나를 아랫사람을 보듯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은은한 불쾌감에, 루나는 달리아를 보고 대놓고 물었다. 아키스에 대한 일은 둘째 치고, 페니의 사연을 듣고 나니 루나는 달리아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페니에게 한 짓만 생각하면 이 여자는 범죄자야’
제일 나쁜 건 페니를 납치한 그 영식이지만.
“불편할 게 있나요? 공작 부인이야말로 평안하실지요. 수군거리는 말들이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네?”
“아키스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서 다들 수군거리고 있으니까요.”
“아, 그래요? 예를 들면 라미라 영애 본인 같은 분들이 수군대는 이야기들 말인가요?”
루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새틴에게 시달리며 자라온 루나에게 달리아의 시비는 가려운 정도였다.
“전 걱정해 주는 사람에 가깝죠. 아키스는 예전부터 말했어요. 가문이 한미한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그래서 선택한 약혼녀가 새틴이었는데, 그 새틴 말고 당신하고 결혼한 걸 보니 당신이 더 나았나 보죠. 비교적 멍청한 여자 쪽이 아내감으로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으니까.”
달리아는 아키스의 이름을 말할 때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루나는 은근히 거슬렸다. 거기다 아키스가 멍청한 사람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기에 웃기기까지 했다.
“아, 제가 새틴보다 똑똑하지 않아서 다루기 쉬울 것 같아 결혼했다 이 말씀이시죠?”
달리아의 표정이 붉어졌다.
“말조심하세요. 멍청하고 가난한 거. 그 재능 하나로 얻은 공작 부인 자리를 귀하게 여기는 게 좋을 겁니다. 응당 저 같은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이 가져야 할 자리를 손에 넣었으면 겸손할 줄도 알아야지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토록 꿈꾸던 아키스의 아내 자리를 빼앗긴 것 같아 화가 나신 거군요. 하지만 일생의 꿈이 혼인이라니, 당신도 멍청함 기준으로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뭐라고요?”
“거짓말을 했으면 이어지는 말이라도 조심하세요. 정말 가문이 한미한 여자랑 결혼하려 했다 운운했는지 아키스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지기 전에.”
“…….”
아키스가 달리아를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을 리가 없었다. 그를 알기에 한 말이었는데 달리아의 얼굴이 하얘졌다. 역시 뻔하군.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작 부인, 겸손함을 배우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보아하니, 페니 드 르시타 같은 품행 나쁜 여자랑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것만 배우고 다니는 것 같은데. 아키스의 친구로서 걱정되돼서 하는 말이에요. 그의 아내 노릇을 똑바로 하세요.”
루나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바쁘시겠어요. 제 품행 걱정하느라, 페니를 감시하느라, 아키스 생각을 하느라. 공교롭게도 우리들 모두 당신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제게 묻지 않은 충고를 하고 남 생각할 시간에 본인 인생이나 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혼인 외에도 세상엔 중요한 게 많거든요.”
아, 해 버렸다. 루나가 말을 내뱉고 느낀 생각이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페니를 생각하면 깨소금이었다.
“뭐…… 뭐라고요?”
달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충고하는 거 좋아하시면서 듣는 건 싫어하시나 봐요. 난 또 서로하자는 줄 알았죠.”
공작 부인 자리에 어울리는 기품이니 겸손함은 내일부터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페니를 생각하면 이 여자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그나마 아키스의 체면을 생각해서 말로 하는 것이었다. 달리아는 한참을 쌔근거렸다. 한마디만 더하면 뒷목잡고 쓰러질 사람의 표정이었다.
“다, 당신…….”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 부인,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황후의 시녀였다.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루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힐 때 언뜻 보니 달리아는 의자 손잡이를 꼭 쥐고 이를 갈고 있었다.
* * *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루나는 연습한 대로 인사했다. 그녀는 긴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황후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기품 있어 보였다.
‘피로해 보이는 기색 없이도 지쳐 보이는 분이네.’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황후의 나른한 표정은 콕 짚어 말할 수 없이 지쳐 보였다. 황후는 루나의 인사를 받고는, 대뜸 말했다.
“재미있었네.”
“네?”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달리아와 대화하는 걸 들었거든.”
“그걸 어떻게…….”
루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알현 전에 왜 대기실에서 사람을 기다리게 하겠나. 엿볼 수 있기 때문이지.”
황후는 초상화 하나를 가리켰다. 초상화 구멍. 루나는 침을 삼켰다. 비밀 장치가 되어 있는 초상화들은 구멍이 나 있어 맞은편 방의 소리와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했다.
“송구합니다.”
“아니네. 달리아를 제법 잘 다루더군. 흥미로웠어. 맞는 말 아닌가. 혼인 외에도 세상엔 중요한 게 참 많지.”
황후는 살짝 웃었다. 그녀가 조금도 불쾌해 보이지 않아 루나는 약간 안도했다.
“달리아는 쓸 만한 애지만 정말 건방지지. 똑똑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교계 안에서 똑똑한 거고 말이야.”
“…….”
“아. 그리고 초상화 장치 이야기는 비밀이네. 내 곁에 오래 있었던 이들도 모르지.”
“네.”
루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심드렁한 표정이지만 황후는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엿들은 건 미안하네. 다신 그러지 않겠네. 공작 부인에게는 말이지.”
그러면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엿보고 떠보겠다는 게 아닌가.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또 한 번 대기실에 머무를 일이 생기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페니어 드 르시타와 친하다고? 의외로군.”
“같은 의상실에 다니다 친해졌습니다.”
“하긴, 르시타 가문의 외동딸과 공작 부인이라면 더없이 격이 맞는 조합이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겠어.”
황후는 몇 마디 하고 벌써 피곤한 듯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나는 페니의 평판 따위는 아무래도 좋거든.”
“……네?”
“그 애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황궁 시녀들이며, 사교계의 앵무새들까지 다 그렇게 난리인지. 어차피 내 남편은 내 눈앞에서 계집질까지 한 마당에 말이지. 페니가 사내애라면 하룻밤 도피든 통정이든 문제나 되었겠는가? 하여간 정말 어이없는 치들이야.”
그러나 루나는 황후의 말에 십분 공감하여 박수를 치고 싶었다.
문득 아키스가 황후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말을 엿들으신 건 좀 그렇지만, 말은 맞는 말을 하시는데?’
루나는 황후가 조금 좋아질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공감하나 보군? 그럼, 사교계에서 부채나 휘두르는 앵무새들보다는 똑똑한 모양이야.”
“…….”
루나는 웃어도 될지 말지 기분이 야릇했다.
‘이 말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런데 황후의 말에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졌다. 루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황공하옵니다. 황후 폐하.”
황후는 어렴풋 미소 지었다.
“아키스가 혼인했다는 말은 나를 정말 기쁘게 했지. 내가 그 애의 중신을 서려 여러 번 노력했거든. ……그런데 알아서 제 짝을 만나는 걸 보니 괜히 노력했어. 그 애가 몹시도 외로운 아이인데, 잘 와 주었구나. 아키스가 무뚝뚝하게 굴지는 않느냐?”
“아니요, 그는 몹시 상냥한 남편입니다.”
“아키스가?”
황후는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널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구나. 그 애는 순수해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지…….”
황후는 말을 이었다.
“그래, 뭘 원하니?”
“황공하오나,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공작이 배필을 맞이하였으니 황궁에서도 그대를 존중하고 대접해야 함이 옳아. 원한다면 황궁에 버젓한 직함이나 지위를 마련해 주마. 난 요즘 바깥일에 통 관심이 없어, 네가 여러 일을 맡아 주면 좋겠구나.”
“아직 결혼 초라, 공작가의 일을 정비하기도 벅찹니다. 배움이 부족하여 제게는 과분한 말씀 같아요.”
루나는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황궁 일은 버거울 뿐더러, 맡아 봐야 피곤하기만 할 일이었다. 황후는 대수롭잖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궁에 있어 봐야 크게 좋을 일도 없지. 바깥에서 보는 사계절이 더 예쁘니까.”
루나는 그제야 황후의 말에 기시감을 느낀 이유를 찾았다.
‘어? 설마…….’
[기사님, 당신과 바깥에서 사계절을 보는 게 훨씬 예쁠 거예요.
날 데리고 도망쳐 줘요.]
루나가 몹시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 중 숨겨진 보석 같은 명작인 <궁정의 진주를 훔친 기사>에 나오는 대사였다.
‘어어?’
밤을 지새워 피곤한 흔적이 남은 얼굴, 황후의 테이블 위에 흩어진 산더미 같은 책들. 루나는 눈치챘다. 황후가 루나와 마찬가지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아, 그래서 방에만 처박혀 계신다는 소문이 돈 건가?’
루나는 납득했다. 뜻밖이었다.
“왜 그러니? 아아, 저 책들? 요즘은 저런 소설이 유행이라는구나. 내 젊을 때는 참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취미 생활도 마음대로 즐기지 못했지. 요즘은 저런 통속 소설을 읽는 낙으로 사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사실 그리 품위 있는 내용은 아닌데도 눈을 뗄 수가 없더구나.”
“사실은…….”
루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어려운 소설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좋아해요. 물론, 공작 부인으로서의 공부를 위하여 역사 소설이나 교양서적도 읽습니다만…….”
“그렇게 체면 차릴 것 없어. 나도 이미 다 들통난 마당 아닌가.”
황후가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한결 풀려 있었다.
“사실, 나이 든 노부인들도 몰래 규방에서 이런 통속 소설들을 구해 읽지. 나도 뒤늦게 푹 빠졌어.”
“그러세요? 사실, 저도 <궁정의 진주를 훔친 기사>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 소설은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추천으로 읽었는데 몹시 흡입력 있더구나. 내가 그 소설을 읽었는지 어떻게 알았니?”
“엔딩의 대사를 말씀하신 것 같아서…….”
“아, 어젯밤 새 다시 읽었더니 나도 모르게 말을 했나 보구나. 그 소설은 정말 재미있었지. 특히…… 여주인공이 첫 만남에 호수에 빠지는 장면이 가장 좋더구나.”
루나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맞아요, 그리고 남주인공이 그걸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두고 가는 장면도 몹시 우스웠지요. 여주인공이 황제의 광대인 줄 알았잖아요. 그다음 장면도 좋았어요.”
루나와 황후는 어느새 훈훈하게 취미 생활 이야기를 공유했다.
황후와 루나는 소설을 읽는 관점이 비슷했다. 취미 이야기에는 어느 나이 때든 즐거워하는 데 앞뒤가 없어 둘은 어느새 이야기가 길어졌다.
“내 나이에는 무언가에 열을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 정말이지 요즘 푹 빠져서 이제 웬만한 건 꽤 읽었는데 혹시 재미있는 소설이 있으면 추천해 주겠니?”
알고 보니 황후는 보통 마니아가 아니었다. 루나가 몇 가지 작품을 추천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소설은 다 읽은 상태였다.
“좀 새로운 소설이 없을지……. 재미는 있는데 다 거기서 거기야. 그래서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것들을 또 읽고 있는 처지란다.”
“그러면…….”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도 황후와 마찬가지 상태일 때 붉은 책이 보여 준 <월플라워 부인>을 읽었다. 그 재미있는 소설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부터 가지게 된 욕구였다. 목구멍까지 이야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아, 어쩌지. 너무 말하고 싶다……. 그런 고대 소설을 나만 안다는 건 불공평해.’
황후는 루나의 기색을 살피며 미소 지었다.
“그리 강권은 아니니 긴장하지 말렴. 다만, 예전에 받았던 고통들을 생각하면 종이 위의 책들로 분풀이를 하는 게 지금 유일한 삶의 낙이란다. 하지만 어디 가서 말은 하지 말고. 황후의 체통이 있으니.”
“황공합니다.”
놀랍게도 루나는 일국의 황후를 이해할 것 같았다. 황제의 여자 버릇으로 인해 후궁들에게 치이며 살아온 황후에게 이야기는 큰 위안일 것이다.
루나도 더부살이하던 시절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마음의 도피처 삼았다. 일기장 속의 미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제가 읽은 소설 중 특이한 소설이 있습니다. 몹시 기억에 남는 내용입니다.”
“특이한 소설? 어떤 내용이지?”
루나는 침을 삼키고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는 매 장마다 사건으로 꽉 차 있고, 각 장이 몹시 자극적이라 단편적인 스토리와 배경만 설명해도 들을 만했다.
루나는 소설의 배경과 초반의 가장 큰 사건인 백마 사건을 이야기했다.
“아아, 세상에. 그런 못된 년이 다 있다니, 정말 치가 떨리는구나. 나도 그런 일이 있었지. 후궁 중 한 계집이 내가 아끼는 예쁜 말의 등에 핀을 찔러 그 말을 탄 황태자를 떨어뜨리려 한 적이 있었단다.”
황후는 치를 떨면서 말했다. 그녀는 루나의 이야기에 몹시 공감하고 몰입하는 듯했다.
“정말 큰일이었네요. 황태자 전하는 무사하셨는지…….”
“다행히 황태자는 무사했네. 낙마할 때 대처법을 승마 선생에게 잘 배운 덕이 컸지. 아무튼 그래서, 소설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되지……?”
“네, 그래서 여주인공은…….”
로맨스 소설이라면 제목을 좔좔 욀 정도로 읽었던 루나는 다른 소설이며 역사적 사실까지 비유해 구성지게 내용을 설명했다.
“그 장면, 기억하시나요? <백기사 이야기>에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처음 만난 장면요. 그 장면처럼 아름다운 꽃 절벽 아래에서 뚝뚝 젖은 옷을 입은 우드가 월플라워 부인의 눈앞에 첫 등장을 해요. 뒤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뿌연 은하수가 하늘을 수놓는 장면인데…….”
황후는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그래서?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데?”
황후는 악녀 아이비가 케이크 세례로 복수를 당하는 장면에선 소리 내어 크게 웃기까지 했다.
한참을 들은 황후는 몹시 흡족해하며 말했다.
“그래, 그 소설 제목이 뭐지?”
“사실 저도 오래전에 읽은 신인 작가의 소설이라 기억이 잘…….”
책 제목을 말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식 출간된 소설이 아니니 황후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황후는 몹시 실망했다.
“꼭 읽고 싶은데, 그 책을 좀 찾아줄 수 없을까?”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저도 내용만 기억날 뿐이라서요. 황공합니다.”
“그런 말은 되었고, 한번 찾아보고 단서를 찾으면 꼭 말해 주도록 해. 뒷이야기는 직접 책으로 읽고 싶으니. 기억나면 바로 편지하고.”
황후는 루나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과연 애착을 가진 취미는 여자를 활력 있게 만드는지, 처음의 심드렁한 얼굴과 달리 황후는 한결 안색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정말 간만에 대화에 흠뻑 빠졌군.”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닐지…….”
좋아하는 소설 이야기를 한 데다 그토록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던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까지 했으니, 긴장한 것도 무색하게 루나도 즐거웠다.
“아아, 그게 무슨 소린가. 요즘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공작 부인은 소문과는 달리, 몹시 말을 잘하고 지적이군. 괜찮다면 또 방문해 주겠나?”
“불러 주신다면 물론입니다.”
“다음에도 공작 없이 만나지. 내 좋은 말벗을 얻었어.”
황후는 몹시도 흡족한 듯 말했다.
“그런데 조그만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황후가 흥미를 보였다.
“아까 라미라 영애와 언쟁한 걸 제 부군에게 전하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황후의 눈이 커졌다.
“왜지? 힘없는 집안 영애를 데려오고 싶어 공작이 그대와 결혼했다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나?”
“그다지 신경 쓸 만한 말도 아닌데, 남편 귀에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예 틀린 말도 아니고요.”
루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외부의 일을 결혼 생활에 끌고 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걸요. 남편이 안다면,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니 라미라 영애를 질책할 텐데, 가문간에 쓸모없는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렇습니다. 제 말이 무례하다면 죄송해요.”
황후는 루나의 현명한 대처에 감탄했다.
‘역시 아키스가 선택한 아이군.’
아키스가 보통 남자가 아닌데, 아무하고나 결혼했을 리 만무했다. 아마 사람됨을 알아보고 한 것이리라.
“그래, 알겠네. 다만 달리아에게 그대에게 건방지게 굴지 말라 말해 두겠네. 위계질서를 관리하는 건 내 영역이니까. 그건 자네가 하라 말라 할 것이 아니야. 감히 내 손님으로 온 공작 부인에게 무례하게 굴다니. 그러라고 황후궁에 자유로운 출입을 허한 게 아닌데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
루나는 미소 짓고 감사를 표했다.
“공작이 좋은 여인을 얻었군. 이만 나가 보게. 조만간 또 보았으면 좋겠군. 내 편지하겠네.”
루나는 예법에 맞추어 인사하고 물러났다.
* * *
루나가 방을 나가자, 그녀는 측근 시녀를 불렀다.
지긋한 얼굴의 노부인이 종소리를 듣고 들어왔다. 황후는 미소 지은 얼굴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달리아를 데려와. 감히 날 만나러 온 손님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에 대해 교육을 좀 해 줘야겠다. 요즘 이런저런 일을 맡겼더니 건방져졌어. 황가도 공작가를 어려워하거늘, 어디 어린 것이.”
“네. 폐하.”
시녀는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 * *
한편, 아키스는 황후 궁 앞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그런 그를 훔쳐보며 귀부인들부터 여관들까지 수군대며 뺨을 붉혔다.
“공작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지?”
“황후 폐하를 뵙기로 한 걸까?”
아키스가 일없이 황궁에 오래 머무르는 일은 잘 없기에, 다들 힐끔거리며 그를 구경했다. 그리고 마침내 궁인의 시중을 받으며 공작 부인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 공작이 공작 부인을 기다리던 건가?’
루나는 아키스를 발견하고 서두르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키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천천히 와요.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루나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그의 팔을 잡았다.
“아키스. 빨리 왔네요. 난 내가 기다리게 될 줄 알았는데, 미안해요. 일은 잘 끝났어요?”
“잘 끝났습니다.”
“이제 가도 되어요?”
사실 황태자를 잠깐 보고 왔다. 그가 공작 부인과 함께 좀 더 황궁에 머물라 권유한 참이었다.
하지만 물론, 오늘도 칼처럼 자른 아키스였다.
“황후 폐하를 뵌 일은 잘 끝났습니까?”
“가면서 이야기해요. 뜻밖에 즐거웠거든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으며 끌어당겼다. 그녀가 앞장서서 걷는 통에 아키스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끌려갈 수 없었다.
숫제 손까지 잡고 걸어가는 둘의 모습에, 여관들은 이게 웬일이냐며 수선을 피웠다.
어린 여관들은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정자에서 훔쳐보던 귀부인들은 부채 너머로 공작의 부부 금실에 대해 바쁘게 속삭였다.
* * *
며칠 후, 루나와 페니는 시내 중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페니,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아, 그런가?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아아, 달리아가 요즘 궁정에서 기세등등하다가, 뭘 잘못했는지 황후 폐하에게 크게 혼이 나고 근신 처분을 받았대.”
“그래? 뭘 그리 잘못한 걸까?”
루나는 빙그레 웃었다.
“글쎄, 그걸 아무도 모른다나 봐. 사실 실수 한두 개 했다고 혼내시겠니. 다만 공작이 혼인한 후, 달리아가 공작 부인에게 말을 걸지 말라느니 하면서 먼저 사람들을 포섭하고 나선 것 같아. 그걸 주시하시다가 구실 잡아 크게 혼내신 거지 뭐. 네가 사교계에 크게 관심 없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엄청 피곤해졌을 거야.”
루나는 은근히 물었다.
“그래서 기분 좋았어?”
“조금. 나 너무 철없지?”
페니가 뺨을 붉혔다.
“뭐 어때. 나라면 더 크게 신나서 난리 쳤을 거야.”
솔직히 지금도 새틴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길 바라거든. 루나는 그 말을 뒤로 삼켰다. 하물며 페니도 달리아에게 더 당하면 당했지 루나 못지않은 원한이 있을 터다.
“그런가?”
“응.”
루나와 페니는 마주 보며 거의 바보 같을 정도로 후후, 웃었다. 식사가 끝나가자, 웨이터들이 차와 달콤한 디저트를 날라 왔다. 루나가 페니와 소곤대며 담소를 나누는 그때, 두 명의 영애가 조심스레 둘에게 접근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두 영애는 루나를 향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루나는 그녀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앵무새 영애들이잖아?’
뜻밖의 얼굴이었다.
과거, 새틴이 공작의 약혼자였을 때 그녀를 추종하며 주변을 맴돌고 따라다니던 영애들.
당연히 루나는 그녀들과 감정이 좋지 않았다. 새틴이 루나를 괴롭힐 때면 옆에서 재밌다는 듯 거들곤 했으니까. 심지어 앵무새 1호 영애는 새틴의 지시로 루나에게 물을 끼얹은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절로 떠오르는 나쁜 기억들로 인해 루나의 미간이 자연히 찌푸려졌다.
그녀는 감정을 누르고 최대한 냉정하게 대꾸했다.
“내게 무슨 용무지요?”
그녀들은 예전에 루나를 인간 취급도 안 하던 것과는 딴판인 얼굴로 비굴하게 웃었다.
“이 레스토랑에 자주 오시는지는 몰랐어요. 용기를 내서 안부를 여쭙고자…….”
“그래도 저희가 안면이 있는 사이잖아요?”
루나는 잠시 그녀들의 말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러자 앵무새 1호 영애가 비굴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공작 부인께서는 사교계 생활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희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앵무새 2호 영애가 말을 이었다.
“저희도 평소 새틴 영애의 행실을 나쁘다 생각했어요! 공작 부인의 진가를 진작 알아보고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루나는 대번에 상황을 눈치챘다.
아마도 대놓고 새틴의 부하 노릇을 하던 이 두 영애는, 새틴이 몰락하자 같이 발붙일 곳이 없어졌을 것이다. 새틴은 달리아와 몹시 사이가 나빴으니 두 영애들이 달리아가 득세하는 사교계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아, 그러니까 추종할 사람을 갈아타시겠다?’
그러니 이제는 루나의 부하 노릇을 할 터이니, 새틴 대신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는 말이었다. 비굴하게 달라붙는 짝이 안 봐도 뻔했다.
‘정말 뻔뻔한 사고방식이네. 나를 그렇게 하녀 취급하더니…….’
루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와 조용히 식사를 하는 중이니 물러나 주면 좋겠군요.”
“그게, 저희는 인사라도 드리려고…….”
“우리가 인사를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거기다, 나는 가까이 둘 사람을 선별하는 편이니 앞으로도 우리가 아는 사이로 지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앵무새 1호 영애가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니 더욱 옳은 이들과 친구로 지내셔야죠.”
앵무새 1호, 에린 영애가 페니를 힐끔였다.
“저런 분은 공작 부인의 친구로 조금…….”
그 말에 페니의 미간이 가소롭다는 듯 찌푸려졌다. 루나는 입매가 굳고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사교계가 꼭 가문으로 위아래가 정해지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니는 제국을 뒤흔드는 3대 명문가의 고명한 외동딸이었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혹시 지금 목말라요?”
“네?”
루나의 뜬금없는 말에 앵무새 1호, 에린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내가 그쪽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싶어지는데, 혹시 목이 말라서 그런가 해서.”
루나가 나른하게 말했다. 페니는 그 말투에서 뜻밖에도 아키스가 떠올라 더 놀랐다.
“공작 부인,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무슨 뜻이고 뭐고 관심 없으니, 당장 물러나요.”
루나가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바로 홍차 잔을 들어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그제야 앵무새 영애들은 혼비백산 물러났다. 루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는지. 신경도 쓰지 마.”
“아는 사이야?”
“아니, 전혀 몰라. 새틴의 예전 친구들이었거든.”
그 말에 눈치가 빠른 페니는 단박에 상황을 이해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텐데, 나 때문에 일일이 화낼 필요는 없어.”
“앞으로도 저런 사람은 많이 꼬이겠지만, 너 같은 친구만 가까이해야 하는 거지. 나도 사람 볼 줄은 알거든.”
루나가 웬일인지 야무지게 대답했다. 페니는 어이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루나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저 여자들 이름이 뭐라고?”
“뭐였더라? 왜……?”
페니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물었다. 루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냥, 기억해 두려고.”
페니가 품위 있게 대답하고 미소 지었다.
* * *
달리아가 크게 혼난 뒤, 연이어 황후는 이전부터 별러오던 시녀들도 솎아냈다. 황후가 몸이 안 좋아 두문불출하고부터 황궁 시녀 자리를 두고 이런저런 다툼이 많았던 것이다.
달리아를 비롯한 시녀들이 물갈이 되고 난 후, 처음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시녀들이 황후의 옆을 채웠다.
‘참 특이한 아이야.’
그러나 황후의 생활에 하나 변화가 있다면 새로운 편지 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귀부인에게 편지 주고받기는 중요한 사교 방법이었다. 친분을 유지하는 방법이며,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수준으로 사회적 위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 황후가 루나에게 편지를 하자고 한 말은 앞으로 친분을 깊게 유지하자는 뜻이었다.
황후는 루나의 첫 답장을 받은 날, 웃음까지 터뜨려 버렸다.
‘이런 편지는 또 처음 받아 보는군.’
제 남편이 기인 아니랄까 봐 루나도 상당히 특이한 여인이었다.
황후가 시녀를 시켜 대필한 편지에 루나는 타자기로 타이핑한 답장을 보낸 것이다.
‘하긴, 예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
글씨를 잘 쓰는 하인이나 시녀를 데려다 편지를 대필시키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
타자기는 마도구를 다룰 줄 아는 아카데미의 마법사들이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 자체가 적었다. 참 신기한 재주가 다 있다 싶었다.
거기다 말은 어찌나 잘하는지, 이전에 루나가 방문했을 때 들려준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는 간만에 황후를 몹시 즐겁게 했었다.
황후는 그 책 내용이 자기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쏙 들어 출판사며 대형 서점들에 연락해 그 책을 찾아보았는데, 아무도 그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황후는 그 책의 뒷이야기를 루나에게 두 번이나 편지로 물어보았다.
루나는 뒷이야기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편지로 적어 보내 주었다. 그 내용과 풍자하는 대사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황후는 오랜만에 편지를 붙잡고 웃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드셨습니다.”
황후는 마리벨 후작 부인과 티타임을 함께하기로 한 걸 떠올렸다.
노부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마리벨 후작 부인은 황후가 어린 시절부터 자매처럼 지낸 사람이었다.
곧 테이블 가득 하인들이 다과를 내오기 시작했다. 황후는 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엇이 그리 즐거우신가요? 이리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물었다.
“공작 부인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네. 화술이 상당한 아이라, 편지 주고받는 재미가 있어.”
마리벨 후작 부인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요. 공작 부인은 어떤 여인으로 보이시더랍니까?”
“어리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더군. 그런데 좀…….”
“좀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죠?”
“응. 그런 면이 있더군. 내가 편지로 예의상 취미를 물었거든. 그랬더니 취미가 타자기로 타이핑을 하는 것이라 하네.”
“타자기요? 그건 마법사나 연구자들이나 쓰는 쓰기 어려운 도구 아닙니까?”
“공작이 가르쳐 주었다는군. 내 참, 재미있는 아가씨야. 아, 그리고 말이지…….”
황후는 월플라워 부인 소설 내용이 적힌 편지를 들어올렸다.
“공작 부인이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네.”
“무슨 비밀요?”
황후는 가만히 미소 짓기만 했다.
“그보다 후작 부인,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공작 부인이 들려준 책 이야기인데…….”
황후의 나이쯤 되면 그리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황후는 절친한 마리벨 후작 부인에게 <월플라워 부인>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황후보다 더 연배가 많은 마리벨 후작 부인 나이쯤 되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이를테면 잡담 내용 같은 건 다소 제 마음대로 해석해 기억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못된 계집이 다 있습니까? 그 남편이란 자도 아주……. 제 처남이 생각나네요. 제 남편은 아주 인격자였지만 처남은 아주 방탕한 이였지요. 그리고 처남의 첩인 계집도 똑같았어요. 아내가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귀족가에 첩질 하는 사내들은 몹시도 흔했고, 방탕한 친척 한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사내에게 시집을 가는 여인들도 흔했다.
아무튼, 월플라워 부인의 초반 구박 받는 에피소드들은 귀족 여인들이 공감하기 쉬운 자극적이면서도 흔한 스토리였다.
“그래서 월플라워 부인이…….”
황후는 마리벨 후작 부인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마리벨 후작 부인은 이 이야기를 인상 깊게 기억했다가, 다음 날 노부인들의 티파티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황후 폐하에게 젊은 로텐베른 공작 부인이 유희거리라며 해 준 이야기네. 월플라워 부인이라는 부인의 이야기인데……”
노부인들도 이 이야기를 몹시 즐겁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는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에게 월플라워 부인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겪은 일이라는 거죠?”
“누굴까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해괴한 집안이 다 있어요.”
“그 여자 보통 내기가 아니네. 첩을 골탕 먹이는 수단 좀 봐. 거기다 그 남편이란 놈도 따끔한 맛을 봤으니, 듣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래서 그 부인이 지금은 어디서 산대요?”
“한번 꼭 그 부인을 만나 보고 싶군요.”
사교계에 순식간에 소문이 조금 왜곡된 채 퍼졌다.
특히 사람들은 월플라워 부인의 크림 에피소드를 좋아했다. 건방진 남편의 첩에게 크림 파이를 뒤집어씌운 월플라워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주 달콤한 디저트 같군요. 그러니 남편이 당신을 그리 좋아하는 거겠지요?’
‘질투도 정도가 있지. 당연하죠, 난 그쪽 같은 뻣뻣하고 쓴 나무 막대 같은 여자와 비교도 안 되는 사람이라구요!’
‘이해해요. 정말 크림이랑 똑같네. 안에 텅 빈 것까지 말이죠.’
크림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통쾌하다며 폭소를 했다. 제국 귀족들은 농담이니 가십을 좋아했고, 가장 좋아하는 가십 종류는 남의 집 가정사였다.
“월플라워 부인이 그렇게 한 방 먹였는데, 그 다음부터 그 여자의 별명이 ‘미스 크림’이 되었다는 거야.”
“어머나, 너무 웃겨라. 그 여자 다음 무도회에 꼭 초대하고 싶네요!”
“내가 듣기로 외국인이라는데? 공국사람이라고 해.”
“아녜요, 내가 듣기로 남부의 유복한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라 들었어요.”
“공작 부인이 그 여자를 사교계에 소개한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공작의 혼사 이후, 요즘은 이렇다 할 사교계의 스캔들이 없었다. 그 말인즉 제국 귀족들이 몹시 무료하다는 뜻이었고, 모이기만 하면 공작 부인의 지인으로 소문난 월플라워 부인의 이야기를 했다.
소문이 이렇게 나 버리니, 누구도 월플라워 부인이 그냥 소설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 *
며칠간 일이 많았다. 아키스도 집에 일찍 들어왔고 페니도 자주 만났다. 루나는 붉은 책을 펼쳤다.
<오랜만에 펼쳐서 미안.>
루나는 책 뒤에 그런 글자를 적어 넣었다. 요즘은 종종 매 회차 짧은 감상을 적어 놓기도 했다.
그러자 책이 글자가 떠올랐다.
<제 이야기가 질렸나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이 책을 열어도 환영이에요.>
<항상 좋은 이야기를 보여 줘서 고마워.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야.>
루나는 책 뒤에 글을 쓰면 글자가 떠오르는 것이 언제나 신기했다. 의사소통이 되는 마도구라니.
<책을 널리 보급해 주세요. 그리고 다양한 감상을 수집해 주세요. 그러면 성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루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읽던 이야기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마음이 생겨 루나는 빠르게 책을 읽었다. 젬 영애 이야기도 상당히 진척되어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젬 영애는 미용 약학자가 된다.
이 작품 또한 배경이 고대 사회였다. 그런데 이 작품 안에는 특이하게 ‘미용 약학자’라는 직업이 굉장한 고소득 직종이었다. 희귀한 약초들을 구해서 미용 환약을 만들어 부유한 귀부인들에게 공급하는 직업이었다.
‘나도 어릴 적에 약학을 배웠는데.’
루나가 만들 줄 아는 유일한 미용 환약은 루비트 씨앗 약이었다. 피부를 검게 만들어 주는 약이다.
루나는 그걸 보며 젬 영애 이야기에 더욱 몰입했다. 이 소설의 작품들은 모두 여성이 직업을 가지거나 돈을 버는 것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고대의 문화는 오직 마법과 기술, 과학만 중요하게 여겨지지.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도 중요한 사료일 텐데…….’
마법사들은, 사내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과학서와 마법서만 탐했지, 그 누구도 고대 문학을 번역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파괴하고 창조하는 마법도 이 세상의 중요한 질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루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알아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페니는 내가 잘하는 일을 사업으로 하라 충고했지.’
루나는 입술에 손을 댔다.
‘내가 잘 아는 분야, 남보다 훨씬 나은 분야는 고대어……. 그리고 이 소설들은 고대어…….’
로맨스 소설과 고대어 책.
둘 다 루나가 잘 아는 분야였다. 그녀는 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이런 소설을 나만 읽는 것이 너무 아까워.’
황후는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를 환장하며 좋아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겨났다.
거기다 이 책은 분명히, 내용을 보급해 달라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 고대어는 특별법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위한 법이었다. ‘고대어 책과 그 책이 가진 마법은 책 소유자에게 모든 권리가 귀속된다’라는 법이었다.
만일 루나가 고대어를 할 줄 암을 떳떳하게 공표할 수 있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발견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책을 발간하면 되었을 테니까. 물론, 그전에 아키스와 합의해야 할 문제가 있긴 했다.
이 책은 여자만 볼 수 있는 마도구 책. 그리고 루나는 고대어를 능숙하게 하는 여성이었다. 루나가 아는 한에서는 이 이야기를 세상에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 떠오른 작품들의 가치를 알았다. 자꾸만 생각이 많아졌다.
* * *
다음날 오후, 루나와 아키스는 황궁으로 향했다.
황후가 아키스와 루나를 오후 티타임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오늘 황궁에서 볼일이 많으세요?”
“잠시 황제 궁에 들르는 것 외엔 없습니다. 아마 금방 끝날 거고요.”
“황제 궁에 정기적으로 입궁하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병문안 때문인가요?”
그녀가 알기로 황제는 정상적인 집권이 불가할 만큼 몸이 아프다 들었다.
아키스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병세가 꽤 심각하십니다. 그래서 병의 고통을 덜어 드리기 위해 고통을 더는 마법을 걸어 드리고 있지요. 그리고 종종 상태가 어떠신지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고통을 더는 마법도 있다니, 그가 마법사라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키스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황후 폐하가 불편하진 않습니까?”
아키스는 황후와 자신이 막역한 사이임은 인정했다. 그러나 루나가 불편하게 느낀다면, 다신 독대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반적으로 황족이 편한 대화 상대는 아니니까.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친절하세요. 그리고 황가와 교류하는 것도 공작 부인의 역할이라고 이야기하셨잖아요?”
“황후 폐하가 당신이 자주 입궁해 종종 얼굴을 보여 주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당신이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하지만 황궁에는 날벌레들이 많으니까. 난 자주 가지 않으면 좋겠는데.”
루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황후 폐하가 무료하신가 봐요. 저도 걱정하실 만큼 자주 갈 생각은 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공작가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리라. 루나는 아마 후자가 더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문젭니다. 혼자 무료하실 분이지, 심심하단 이유로 누굴 부를 분이 아닌데…….”
그녀가 너무 매력적이라, 다른 사람들도 끌리는 모양이었다. 조금 질투가 났다. 그런 아키스의 마음을 모른 채 루나가 말을 이었다.
“글쎄요. 이틀 전, 편지로 저를 보고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시긴 했는데 저도 짐작은 안 가요.”
그렇게 말했지만 루나는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월플라워 부인의 뒷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것일 터였다. 안 그래도 안부 편지를 주고받으며 두 번이나 월플라워 부인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통에, 중반부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편지로 써서 답장한 참이었다.
‘나만 알고 있는 이야기니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황후가 과하게 흥미를 가지니, 원본 책을 찾아 달라 계속 조르실까 걱정이었다.
어느새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아키스는 이번에도 루나를 황후 궁까지 데려다주었다. 이후에는 아키스가 황제 궁에서 일을 간단히 마치고 황태자와 함께 황후 궁으로 오기로 했다.
“황제 폐하의 용태만 보고 올 터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어요.”
아키스는 루나의 볼에 살짝 키스했다.
루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민망해했다.
* * *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루나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진주 귀걸이를 한 채 몸의 재단을 날씬하게 잡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디자이너 모이라가 최선을 다해 만든 드레스였다.
“이리 와요, 루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군.”
황후가 루나에게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변변한 결혼 선물도 못한 것 같아, 오늘은 선물을 주려 불렀어요. 이리로.”
황후가 손짓하자, 대기하던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사파이어 팔찌가 들어 있었다.
“내가 결혼 전에 가져온 본가의 보물 중, 어울릴 만한 것으로 하나 가져오라 했네. 자네의 금발과 잘 어울릴 거야.”
황후는 나른하게 말하고 미소 지었다.
“값진 것은 이미 아키스가 많이 주었을 터이니, 난 오래 간직해 온 물건을 주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본가에서 가져오신 거면 소중한 물건일 텐데…….”
루나는 예법에 맞춰 인사했다.
그녀는 황후가 왜 이렇게 제게 잘해 줄까 싶었다. 아키스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또 그러기엔 그녀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들려준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또 들려줄 거니? 재미있더구나.”
“저도 기억이 희미하지만, 원하신다면…….”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 내용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실 줄 몰랐습니다.”
“내가 통속 소설을 읽는 게 이상하니?”
“그건 아닙니다만…….”
루나는 황후의 말에 답을 망설였다.
“모두들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법이지.”
황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길거리의 광대도, 나와 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몸도 다들 나름 삶의 힘듦이 있는 거지……. 나 또한 하루가 지긋지긋하다 생각하며 산 시간이 있으니, 가끔은 꿈을 꾸고 싶단다. 다들 각자의 환상이나 꿈을 꿀 방법을 가지고 있지. 어떤 이에겐 그게 사랑이고, 어떤 이에겐 취미지. 어떤 이에겐 검술이나 승마고 말이야. 아무리 천한 저잣거리의 여인도 작은 즐거움은 가지고 있지 않니. 그러니, 삶이 힘들 때는 그런 것에 의지하는 거란다.”
“…….”
“그래서, 내게는 잠깐의 꿈을 꿀 수단이 이 이야기인 거야. 그래서 나는 통속 소설에 아무 편견이 없고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황후가 루나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편견 이야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걸까? 반면, 루나는 황후의 의중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해 주렴. 내 성심을 다해 도울 테니.”
황후가 은근히 그렇게 말했다.
루나는 그녀가 하는 말의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티 내지 않고 그러겠다 대답했다.
“그럼,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산책이나 할까? 오늘은 야외에 티타임을 준비하라고 했거든.”
“네, 알겠습니다.”
루나는 황후를 따라 일어섰다.
* * *
한편, 정작 아키스의 입궁 목적은 허사가 되었다. 황제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전하.”
아키스는 황태자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은근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노인네 변덕을 어찌 알겠나. 어젯밤 내내 아프다며 난리다가 아침에는 멀쩡해졌네. 나도 이 영감 때문에 그대를 오라 가라 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가끔은 황후께 문안드린다 생각하시게. 우리 어머니가 그대를 참 귀애하시지 않나.”
그 말엔 아키스도 어쩔 수 없었다. 하여 그들은 예정보다 빨리 황후 궁으로 향했다.
“두 분께서는 정원의 야외 테이블에 계십니다.”
시녀들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그들을 안내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 테이블에 황후와 루나가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황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게, 아키스. 오랜만이군. 예정보다 빨리 왔는걸?”
황후는 달갑게 자리를 권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는 아키스와 눈이 마주치자, 루나는 살짝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귀한 공작 부인을 만나 뵈어 참으로 기쁘군.”
황태자는 루나에게 유난스레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테이블에 둘러앉자, 황후는 오늘따라 밝은 낯으로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공작 부인. 내가 오늘 그렇게 떠 봤는데, 먼저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 건가?”
“네?”
루나는 황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이제 다 알았네.”
“……무슨 말씀이신지…….”
루나는 갑자기 스산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키스와 황태자의 시선이 루나에게 닿았다.
“뭐긴 뭘 말인가. 공작 부인의 일 욕심에 대해 말이네.”
“…….”
루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사실 마법사인가? 어떻게 말 몇 마디로 그녀가 남몰래 일을 찾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키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들어 보게, 공작. 내가 그걸 모르고 괜히 헛수고를 했어.”
“…….”
“<월플라워 부인> 말이야. 그 소설에 대한 공작 부인 비밀을 알아냈지.”
루나의 심장이 순간 바닥에 ‘쿵’ 떨어졌다.
‘황후 폐하가, 알았다고……?’
찻잔을 든 손이 떨리려 하는 걸 루나는 겨우 참아 냈다.
아키스가 타오르는 시선으로 루나를 한번 보고 황후를 보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후에게 캐묻고 싶은 걸 참는 기색이었다.
황후는 그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공작 부인, 귀여운 거짓말을 했더군. 왜 내게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가 예전에 읽은 소설이라 했지? 그게 아니잖나.”
“저는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부디 관대하게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세요.”
루나는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황후가 월플라워 부인을 어디서 읽은 건지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간자를 파견해 공작저의 루나를 감시하여 마법책을 보는 걸 엿본 것이 이상, 알 방도는 없었다.
그건 도무지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공작저에 황후의 간자가 있다 해도 그녀가 이리 당당하게 말할 리 없었다.
황후가 웃음기 서린 어조로 말했다.
“내 요즘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도 눈치는 있다네. 월플라워 부인의 작가에 대해서 말이지.”
그때, 황태자가 끼어들었다.
“월플라워 부인이라면, 그 요즘 사교계에서 유명한 여자 말씀이십니까? 그 여자 이야기가 소설 내용이었습니까?”
루나는 눈뜨고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여자’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월플라워 부인? 그게 누굽니까?”
아키스는 황태자를 보며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공작 부인의 지인이라는 재미있는 가정사를 가진 부인 말이네. 요즘 그 부인의 막 나가는 가족 관계 이야기가 사교계의 뜨거운 화제지.”
황태자가 설명했다.
“그렇습니까? 난 정말 처음 듣는데.”
아키스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루나를 보았다.
그가 알기로 루나에게 결혼 전부터 친하게 지낸 이렇다 할 지인은 없다고 들었다. 최근에도 페니 말고는 만나는 이가 없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 이야기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이죠, 루나?”
“아, 그게. 아키스…….”
루나는 입을 벌렸다.
그녀는 <월플라워 부인>이 마리벨 후작 부인의 입을 통해 왜곡되어 제 지인의 사연으로 소문난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야 매일 만나는 사람이 세상사에 초연한 아키스 아니면 남 뒷말에는 그다지 관심 페니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루나는 먼저 월플라워 부인에 대한 오해를 풀기로 했다.
“월플라워 부인은 제 지인이 아니에요. 그건 제가 예전에, 아주 예전에 읽은 소설 제목이에요. 작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요.”
“그래, 그 소설 작가 말이네. 그 소설 작가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가 <월플라워 부인> 작가지?”
황후는 재미있다는 듯 손을 입으로 가리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루나는 입을 ‘쩍’ 벌렸다.
“……네?”
“나 참, 정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네.”
황후는 즐겁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황태자와 아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가 진즉 눈치를 못 챘지? 공작 부인이 타이핑이 취미라니, 괜히 타자기 사용법을 배웠을 리 없지. 내 모든 출판사에 연락하고, 국립 도서관에 의뢰하여 물어봐도 여주인공 이름이 월플라워 부인인 소설은 없었거든. 그 말인즉, 애초에 출간된 적이 없는 책이란 뜻이지.”
“…….”
“그런데 공작 부인은 책 내용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었어. 소설의 문장을 내게 직접 인용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네. 그 말뜻은 딱 하나지. 공작 부인이 그 작품을 쓴 거야. 공작 부인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황후는 손뼉을 쳤다.
그녀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후궁들을 휘어잡고 황궁을 암투로 물들이던 시절의 눈치가 살아 있었다. 물론, 아주 가끔 빗맞힐 때도 있었지만.
“폐하, 전 그 소설의 작가가 아닙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네. 나도 황족이 작가나 배우 같은 직종을 할 수 없다는 특별법에 대해서는 잘 알거든.”
황후가 나른하게 말했다.
제국에서 작가나 배우, 화가 같은 일은 예술 쪽 일은 상류층의 직업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황족들이 가질 수 없는 직업이 더러 있었는데, 그중 작가나 가수, 배우도 포함되었다.
공작 부인 또한 혈통과 상관없이 황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루나도 그 법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다 편법이 있는 법이지. 황가의 먼 친척 중에도 화가로 활동한 이가 있었네.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였지. 공작 부인도 그런 방법을 쓰면 되지 않나? 그 정도 눈 가리고 아웅은 관례이니 너무 걱정 말게.”
루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아키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미지에 대한 은근한 불쾌함과 흥미로움, 놀람이 뒤섞여 빛나고 있었다,
“루나, 당신 글을 쓰고 있었습니까?”
“그게…….”
순간 루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키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당신이 버린 책을 주웠는데 그 책이 여자만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표정을 보니 공작도 몰랐나 보군. 혹시 공작이 아내가 글을 쓰는 일을 용인하지 않을 것 같아 숨기고 있었던 건가? 공작, 내 그대에게 사적인 잔소리는 하지 않겠다 약속했지. 그러나 규방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도 막을 만큼 그대가 꽉 막히진 않았을 거라 믿네. 우리 여인들도 아주 유능하거든. 그렇지 않나?”
“나는 편견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황스럽긴 하군요. 도대체 당신이 언제…….”
생각을 더듬던 아키스는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가 요즘 루나에게 은근히 섭섭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차를 혼자 마시겠다는 이유로 파우더 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방에 틀어박히던 그녀의 모습. 그 시간에는 산책이나 차를 권해도 절대 상대해 주지 않았다.
갑자기 그런 그녀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거니와, 그 안에서 무슨 비밀을 키우고 있나 궁금해서 문을 따 버릴까 하는 충동마저 느껴 본 적 있는 아키스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예의를 지키는 남자이기에 그 욕구를 꾹 눌러 참았다.
그런데, 돌연 그녀에 대한 수수께끼 중 하나가 풀렸다.
“그렇지? 역시 공작 부인이 작가가 맞지?”
“…….”
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신념의 문제였다. 만일 그녀가 마법사이고, 마법 주문을 발견한 거라면 거리낌 없이 이건 내 주문이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그 이야기의 발견자로서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어도, 제가 창작을 했다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루나는 결국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회피했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저는 정말 작가가 아닙니다, 황후 폐하. 정말로, 믿어 주세요…….”
그러고는 사연이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도 통했다. 황후는 알겠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 그래. 제 입장이 불편해질까 곤란한 모양이군. 고귀한 공작 부인이 작가라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 거기다, 그녀는 출신이 버젓하지도 않으니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을 테고.’
루나는 입지가 탄탄한 공작 부인이 아니었기에, 괜한 일을 하는 것에 책을 잡힐까 조심스레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도 젊은 시절, 꿈이 많았지만 가문의 혼약으로 원치 않게 황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늘 루나에게 더욱 살갑게 군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래서 황후는 루나에게 용기만 조금 북돋아 주기로 했다.
“내 사정은 다 알겠네. 꼭 공작 부인이 작가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내게 원고를 꼭 보여 주면 좋겠군. 만일 익명으로 글을 출간한다면, 내 응원할 테니 말이지. 꼭 본인이 쓴 원고가 아니라도 출간은 할 수 있지 않나?”
황후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눌러 박아 말했다.
“출간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하고 있겠네.”
출간이라니. 루나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게…… 그 책이 출간된 적 없는 책인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런데 이번에는 황태자가 루나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아키스, 내 그렇게 안 봤는데 교수라는 사람이 딱딱하군. 아내가 작가인 게 뭐가 어때서 그런가? 이런 미인이 아내라면 작가가 아니라 청부 살인마라도 감사할 일이지!”
아키스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내 아내가 예쁜 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남의 아내를 멋대로 칭찬하지 마십시오.”
“자네가 무뚝뚝하니 그렇지! 집에서 제대로 찬사도 안 해 주고 있는 것 아닌가? 자고로 여인에겐…….”
“내 아내가 예쁜 건 내가 잘 압니다. 남의 가정사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시죠.”
심지어 황태자까지 끼어들어 논점을 흐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민망함과 혼란까지 더해져 머리가 핑핑 돌았다. 쓸데없는 논쟁을 키우는 황태자는 루나에게 여전히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기만 했다.
“거참, 사람이 인색하군. 안 그러던 사람이 더한다고, 결혼하자마자 자기 부인 싸고도는 것 좀 보게. 이젠 우정도 없는 건가?”
“있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키스가 딱 잘랐다.
“일단 전 청부 살인마가 아니에요.”
루나는 황태자의 말에 항변했다.
“그는 저에게 정말 잘해 줘요. 결혼 생활에도 불만이 없고요.”
아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를 좀 하죠, 루나.”
아키스가 몹시 부드럽게 말했지만 말속에 묘한 기색이 숨어 있었다.
“둘이서만요.”
그리고 눈치 빠른 황후는 바로 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제 딴에는 공작 부인이 재능을 펼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부부 싸움을 야기했다면 곤란했다.
황후는 루나가 대답하기 전에 말을 끊었다.
“황태자, 공작 부인에게 내 찻잔들을 좀 보여 주지 않겠나요?”
황후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또한 바로 말뜻을 알아듣고 루나를 에스코트했다.
“가시죠. 황후 폐하께서 잠깐 공작에게 하실 말씀이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
아키스는 제 금쪽같은 아내를 황태자가 데리고 나간다는 사실에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는 말없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황태자와 황후를 노려보았다.
“2분이면 되네, 아키스. 벌써 어린 시절을 다 잊었는가? 내 그대에게는 부모 같은 존재 아닌가.”
황후가 그 기색을 눈치채고 미소 지었다.
루나와 황태자가 나가고, 황후는 아키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키스, 여자는 절대 어르거나 구속하려 들면 안 되는 법이야. 사기그릇처럼 조심히, 소중히 다뤄야 해.”
“잘 압니다.”
“때로 여인이 비밀을 가지고 싶어 한다면 그 비밀을 소중히, 보석처럼 지켜 줘야 하네. 알겠지?”
“부부 관계에 대한 충고는 받지 않겠다 했습니다만.”
아키스는 불쾌한 기색을 은근히 내비쳤다. 황후는 나른하게 웃었다.
“내 분란을 만들었을까 걱정되어 그런 거야. 그러니 어떤 사실이든, 상대가 직접 털어놓을 때까지는 묻지 말게. 여인들은 그런 대화법을 좋아하거든.”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들이었다.
제 아내를 위한 충고라, 아키스는 그 충고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 * *
“집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월플라워 부인>의 작가가 누군지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덕분에 루나는 침착해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굴려 아키스를 보았다. 마차가 한참을 달렸을 때, 루나는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에게, 물어볼 것…… 있지 않아요?”
“많습니다.”
아키스는 앞을 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에 대해선 늘 궁금해하는 편인데, 오늘은 정말 미치도록 궁금하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화났어요?”
루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아키스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당신과 혼인할 때, 과거는 묻지 않겠다 약조했지요. 기억합니까?”
“……네.”
“이 일이 당신 ‘과거’와 관련되었다면 난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이젠 달갑지 않았다.
그사이 저택에 거의 도착했는지,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루나는 마이아 선생에게 배운 가르침을 떠올렸다.
말할수록 불리해질 것 같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침묵하고 에둘러라.
사교계에서의 침묵은 금과 같다. 참으로 도움 되는 가르침이었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몸을 숙였다.
“오늘 난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그래서 아직 마음이 정리가 안 되었고,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거든요. 언젠가는…… 당신에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니까, 준비가 되면 내가 먼저 말할게요.”
루나는 마이아에게 배운 대로 애매하게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붉은 책과 좀 대화를 해 보자.’
아키스는 눌러 참고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마차가 저택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마차가 멈추고도 아키스는 내리지 않았다.
“아키스?”
그는 마차 문고리만 움켜쥔 채 미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루나는 마차 벽에 바짝 등을 붙였다. 심장이 뛰었다. 그가 숨결까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아 훅 끌어당겼다. 말랑한 가슴과 따스한 몸이 그의 단단한 상체에 꽉 맞물렸다. 그대로 아키스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정리되면 나에게 제일 먼저 들려줘요. 황후 폐하 말고, 내게 뭐든 먼저 말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든 이야기든 뭐든 좋으니까.”
루나는 바짝 굳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과 비밀 만들지 말아요. 아예 내가 모르게 하면 몰라도, 날 애타게 하지 마세요. 질투 나니까.”
그가 입술을 뗐다. 보라색 눈동자가 질투로 새카맣게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의 창문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온 햇빛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반은 그늘지고 반은 햇빛에 감싸인 얼굴이 오묘하면서 위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루나는 은근히 술렁이는 속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아키스.”
“좋아요. 착하군요.”
아키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루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 *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루나는 급하게 파우더 룸으로 왔다.
“혼자 생각할 일이 있으니, 아무도 들이지 마.”
제인에게 그렇게 명령하고 문을 단단히 틀어 잠갔다. 옷시중을 들려던 제인만 영문을 모른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루나는 급히 붉은 책을 금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이어 책의 가장 뒷장을 펼쳐 빠르게 글씨를 휘갈겨 썼다. 예법에 맞춰 정중하게 쓸 여유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네 소설을 보고 싶어 해.>
책에서는 바로 반응이 왔다.
곧 신비한 글자들이 빈 페이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사람에게 제 글을 보여 주세요. 그것이 제 존재 가치입니다.>
<나도 너를 공표하고 싶어. 네 이야기는 나 혼자 보기 아까운 수작이니까. 하지만, 이 책을 누가 썼다고 하지? 네 정체를 공개할 순 없어.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고대가 아니야. 네 존재를 들키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는걸.>
여자만 읽을 수 있는 고대어 책이라니, 발견되면 루나와 책은 큰일을 당할 것이다.
<해답을 논할 가치가 없군요. 적절한 대리인을 구해 대신 발표하면 됩니다.>
책에는 몹시 빠르게 글자가 나타났다.
<혹시 그것도 불가능한 환경인가요?>
루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네 것이야. 그런데 괜찮겠어?>
<나는 책이라 소유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책을 발표하세요. 그리고 그 파급 효과를 알려 주세요. 객관적인 수치일수록 좋습니다.>
책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객관적인 수치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내가 원하는 건 마도구의 발전을 위한 자료 수집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의 다양한 감상을 적어 주세요.>
루나는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넌 누구야?>
<나는 마법사의 창조물입니다. 무엇도 아닙니다.>
루나는 책이 보여 주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상황이 몹시 흥미로워졌다.
<내가 만일 이 책을 발표하면 배경을 수정해야 해. 고대 배경의 작품을 발표할 순 없어. 그럼 네 정체를 의심 받을 거야.>
<작품의 수정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시는 건가요?>
<아마도…….>
<알겠습니다. 역사적 배경, 현실적 배경에 대한 수정만 허가합니다.>
루나는 숨을 삼켰다.
그녀로서도 이 재미있는 작품들을 타인과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다.
<그럼 책을 발표해서 얻는 수입은?>
<내게 돈이 필요하겠습니까? 논할 가치가 없는 질문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고성능의 마도구입니다.>
루나는 순간 책이 너무 사람 같아서 흠칫했다. 심지어 책인 루나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이어 책에 글자가 떠올랐다.
<이 책의 부가 가치는 모두 책의 소유자의 것입니다. 귀하는 소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본 도서는 최상급 재능의 소유자에게만 열람이 허락되는 마도구입니다. 그러니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하세요. 아래 사항은 마법 보호법을 인용한 규칙으로, 이후 소송 발생 시 증거로 활용 가능합니다.>
‘마법 보호법?’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고대에 있었던 법 같았다.
거기다 부가 가치까지 알아서 하라니. 즉, 책을 팔아서 얻는 돈은 모두 그녀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송?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고대 사회는 몹시 복잡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돼. 왜 내게 이런 특권이…….”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이 책을 가지게 된 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럼 세상 어딘가에는 루나가 접근할 수조차 없는 이런 수많은 권리의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세계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거지?’
루나의 마음속에 몽글몽글 의문이 피어올랐다.
‘하긴, 출간한다고 팔려 봐야 얼마나 팔리겠냐만은.’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가 유행을 탄 것 같으니, 귀족 계급들 사이에서 잠깐이나마 인기가 있긴 할 것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돈을 벌긴 할 테고. 그렇다면 루나가 바란 대로 미래를 위해 돈을 더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발표할 순 없어.’
현대의 마법사들은 고대 마법사들의 마법 주문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것은 법으로도 보장 받는 권리이며, 제국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나는 이 이야기를 자신이 소유할 수 없다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건 위선이었다. 루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익명 발표…….’
책에게 필명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단, 아키스에게만 거짓말을 해 두자.’
원고를 어디선가 ‘얻었다’라고 하면 그는 분명 의심할 것이 자명했다. 이 책은 본디 아키스가 버린 책을 루나가 주워 온 것이니까.
루나는 책을 꼭 안고 생각에 잠겼다. 마이아가 가르쳐 준 사교법을 좀 더 응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아가 뭐라고 했더라. ‘상대방이 오해하도록 만들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가.
루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 * *
아키스는 약속대로 다음 날까지 루나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가 아카데미에 가는 날이었기에 그와 대화를 할 기회를 놓쳤다.
‘차라리 잘됐어. 일단 원고를 만들어 보자.’
루나는 파우더 룸에 처박혀 타이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월플라워 부인의 초반부는 거의 고칠 내용이 없었다.
사회 배경을 바꾸고 편집을 조금 더 부드럽게 하는 것뿐. 물론, 원작자를 존중하여 책에게 그 내용을 적어 수정한 부분을 알렸다. 책은 간간이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대부분 좋다는 뜻을 밝혔다.
<월플라워 부인이 마법으로 소금맛 나는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 말인데, 이걸 충복 시녀를 시켜 부엌에서 바꿔치기 하는 장면으로 바꿀게.>
<77페이지의 다섯 번째 줄부터 열한 번째 줄까지의 내용 수정을 허가합니다.>
간단한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파우더 룸에서 몇 시간 동안 골머리를 앓은 루나는 손은 잉크투성이에 손가락은 얼얼했다. 나중에는 책과 필담으로 열띤 의논을 하느라 머리가 다 아팠다.
‘나 지금 뭐 하는 건지…….’
루나는 기분이 점점 묘해졌다.
어쩌면 모르는 사에 이 마도구에 홀려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루나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 * *
“어서 와요, 아키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고, 아키스가 귀가했다. 그녀는 아키스를 마중했다. 그리고 수줍게 그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다.
아키스 또한 그녀의 달가운 향과 품이 몹시 익숙해서, 그녀를 단단히 마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몸을 부드럽게 놓았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이제 대화하고 싶어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에서 이야기하죠.”
* * *
루나는 아키스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그녀가 오늘 내내 타이핑하고 편집, 각색한 원고였다.
“이게 황후 폐하가 말씀하신 원고예요.”
아키스는 손때 묻은 원고를 보았다.
첫 페이지는 <월플라워 부인>이라는 제목 외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루나를 보며 물었다.
“읽어 봐도 됩니까?”
“자, 잠시만요.”
루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전에, 부탁할 것이 있어요.”
“말해 봐요.”
루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헛기침했다.
“나는 이 글을 철저하게 익명 발표하고 싶어요. 그리고 주목 받고 싶지도 않고, 남들이 왈가왈부하는 일에 상처 받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 아키스도 나를 존중하여 내가…… 작업을 하는 걸 모른 척해 주면 좋겠어요.”
“…….”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말뜻은……?”
“만일 이 작품을 누가 내가 쓴 것이라 말하고…… 욕하거나 칭찬하거나 하면, 나는 부끄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난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
“난 정말…… 부끄러워요. 그러니 그냥 내가 글 쓰는 걸 모른 척 해 달란 거예요.”
아. 아키스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납득했다.
‘작은 초식 동물처럼 예민하군. 그러니까, 익명 작가 취급해 달라는 건가. 눈 가리고 아웅이군.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루나는 붉어진 눈으로 아키스를 보았다.
거짓말은 안 했다. 자신이 이 글을 썼다는 걸 숨기겠다는 식으로, 아키스에게 작가 취급 받는 일을 모면할 셈이었다.
“……보호라.”
아키스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용을 읽어 봐도 됩니까?”
루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석연찮은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토록 긴장하는 그녀를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듯했다.
글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면 루나는 얼굴이 폭탄처럼 붉어져 방에서 도망 나갈 사람 같았다. 이토록 긴장하니 정말 모른 척해 주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서는 그녀가 뭘 하고 다니는지만 알면 되었다. 아키스는 그렇게 납득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약속대로 그에게 가장 먼저 원고를 보여 주지 않았나.
아키스는 냉랭하고 수려한 얼굴 그대로 조용히 원고에 집중했다. 조용히 속독을 마친 그가 원고를 내려놓았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재능을 숨기겠다고요?”
“아. 제발 그러지 마요, 아키스.”
루나는 기겁하며 경기하듯 대답했다.
“모른 척해 줘요, 제발. 난 너무 민망한걸요.”
아키스는 루나의 태도에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루나, 제국법상 황족이 통속 소설을 출간할 수 없긴 하지만, 그게 가문을 무너뜨릴 정도로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나는 편법을 권장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관례상 편법은 흔한 일이고요.”
“하지만 난 감당할 자신이 없는걸요.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공작 부인이라니,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루나가 말한 ‘이런 일’은 마도구인 붉은 책을 몰래 애독하는 저의 버릇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키스는 ‘이런 일’을 작가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로 받아들였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그의 오해를 이끌어 낸 셈이었다. 그야말로 마이아의 가르침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원고는 훌륭한 사회 풍자를 담고 있군요.”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사회…… 풍자라고요?”
“한 가정의 예시를 들어 모순적인 가주의 모습과, 다른 계층에서 온 첩이라는 존재로 규범을 흩트려 놓고 있는 구조잖습니까. 거기다 풍자적인 유머가 가득하군요. 나는 로맨스 소설에 대해선 모르지만, 출간될 가치가 충분한 소설 같습니다.”
“……그래요?”
말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그가 괜히 교수가 아닌 모양이었다. 대강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괜찮다 하시니 황후 폐하에게도 보여 드리겠어요. 하지만 이후, 날 작가 취급할 생각 마요. 그랬다간 부끄러워서 난 원고를 다 불태워 버릴지도 몰라요.”
루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아키스는 정말 그녀가 기인이란 생각을 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로맨스 소설을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아키스가 그런 후한 평가를 내렸는데, 황후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너무 재미있어 그녀는 두 번이나 간만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다. 황후는 출간할 때 쓰라며 곧장 추천사를 써 주기까지 했다.
‘……해 버리자.’
결국, 루나는 황후의 추천을 계기로 출판을 결심했다.
타이핑을 하고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애착이 생기기도 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이 소설을 발표하는 것이 재능을 가진 자신의 의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키스는 부탁대로 루나가 사업을 준비하는 걸 모른 척해 주었다. 그러나 디온을 시켜 뒤에서 루나를 몰래 도왔다.
디온이 문서 몇 개를 내밀며 말했다.
“출판사는 작가에게 작품을 받아 편집을 하고 작품을 보완합니다. 그다음 활자 인쇄소에 넘기지요. 인쇄소는 그 서적들을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 다섯 곳에 납품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유통 역할은 대형 서점에서 합니다.”
“유통을 한다면……?”
“소규모 서점과 책 대여점, 그리고 방문 판매를 하는 이들에게 책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출판사들은 규모가 작은 곳이 많습니다. 그중 영업이 괜찮은 출판사를 몇 곳 골라 보았으니 한번 투고해 보시지요.”
디온은 아키스의 뜻을 귀신같이 맞출 줄 아는 재주를 가진 보좌관이었다.
그는 기본은 잘하지만 자본금이 적고, 내부 경영이 원활하지 않은 작은 출판사 두세 곳을 골랐다. 작은 곳을 고른 이유는 당연했다. 만의 하나의 상황에 출판사를 뒤에서 쥐고 흔들기 위해서였다.
루나는 아무 생각 없이 디온이 권한 출판사 중 첫 번째 출판사에 투고를 해 보겠다 말했다.
“그럼, 제가 대신 이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마, 사교계에서 꽤 화제가 된 사건이 수록된 작품이니 제법 팔릴 겁니다.”
“잘되면 좋겠네요.”
루나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 *
그 즈음, <막장 가족 월플라워 부인 집안 이야기> 소문은 중산층에게도 제법 퍼져 있었다.
“분명 화제성 있는 소설이 될 겁니다!”
루나가 작품을 투고한 출판사에서는 쌍수를 들고 원고를 환영했다.
출간이 결정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아키스는 약속대로 루나가 하는 일을 아예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몰래 디온을 불러 물었다.
“그 출판사가 영세한가?”
“그런 편입니다만, 일은 잘한다는 소문입니다.”
“그럼 투자하는 형식으로 소유해 버려. 나중에 일이 잘되면 부인에게 아예 출판사를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담당자는 남자인가?”
“여성 편집자가 있는 출판사로 골랐습니다. 여성 편집장 외에는 공작 부인 곁에 접근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디온은 이번에도 몹시 눈치가 빨랐다.
아키스는 그의 일 처리에 만족했다. 그렇게 루나가 모르는 사이, 그녀가 출간한 출판사는 아키스의 관할에 아래 위치하게 되었다.
* * *
“……내 얼마 전 황후 폐하를 알현했는데, 공작 부인이 사교계에 재미있는 책을 소개한다는군.”
사교계의 소식통, 마리벨 후작 부인은 노부인들이 모인 티 파티 자리에서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공작 부인이 그런 재주가 있었습니까?”
“혹시 공작 부인이 작가를 후원한다는 말인가요?”
노부인들은 마리벨 후작 부인의 말이 아리송하여 되물었다.
“그게 말이네, 어떤 익명 작가가 쓴 글을 소개한다 하는군.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공작 부인 본인이 작가인데 공작가에 누가 될까 숨기는 것 같아. 알고 보니 요즘 화제인 월플라워 부인의 가정사를 책으로 출간한다지 뭔가?”
마리벨 후작 부인의 의도는 월플라워 부인 이야기가 실화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걸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작 부인 나이대의 노부인들은 마리벨 후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제멋대로 재구성하곤 했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이 월플라워 부인의 지인인데 그 지인 이야기를 엮어서 낸다고요? 흥미롭네요. 그 크림 농담은 정말 웃기더군요.”
“아들 부부에게 시켜 출간되면 한 권 사 와 보라 해야겠군요.”
그리고 소문은 순조롭게 아래로 흘렀다.
출간 소식은 사교계의 점차 젊은 계층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공작 부인의 책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 소식은 근신 중인 달리아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 여자가 책을 출간한다고? 그런 짓을 왜 해?”
달리아는 루나가 하는 짓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튀려고 별짓을 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천박한 행동은 달리아가 제일 경멸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만일 내가 아키스와 혼인했다면…….’
달리아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저가 아키스와 혼인했다면 그런 해괴한 짓을 할 시간에 좀 더 지극정성으로 아키스의 뒷바라지를 하고 성심을 다했을 것이다.
‘주제 모르고 과분한 결혼을 했으면 얌전히 살아야지. 어차피 아키스는 늦어도 꼭 내 남자가 될 사람인데, 잠시나마 저런 여자랑 살아서 참 안타까워. 내 품위에 맞는 사람으로 계속 남아 있어 줘야 할 텐데, 그 입버릇 더러운 년에게 물들면 어쩌지?’
요즘 달리아는 아키스에게 자신의 죄를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끔 이성이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리아에게도 좋은 점이 있었다. 그녀의 가문은 귀족 가문 중 손에 꼽는 부자였다. 그들의 재산은 수없이 많았고, 그중 하나는 수도에서 가장 큰 대형 서점들이었다.
달리아는 급하게 부모님을 찾았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이러다 죽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얘야.”
라미라 후작 부부는 달리아라면 사족을 못 썼다. 달리아는 후작 부부를 보며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공작 부인 말예요. 그 여자 때문에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를 대신해 제가 공작님의 결혼식에 참석한 걸 기억하시나요? 그때 제가 조금 예쁜 옷을 입고 갔다고 공작 부인이 저를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는 제게 누명을 씌워 황궁에도 입궁을 못하게 했죠. 황후 폐하는 아직도 절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이러다가 제가 페니어 드 르시타 같은 처지로 전락하면 어쩌죠? 아아, 전 그럼 죽어 버릴 거예요.”
“그런 큰일 날 소리를! 아무리 가문이 비슷하다고 네가 그 행실 나쁜 페니 같은 아이와 무엇이 같다는 말이니?”
드물게 눈물까지 보이며 괴로워하는 달리아를 보며 라미라 후작 부부는 경악했다.
“제가 이번에 전면으로 나서 공작 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제가 완전히 몰락했다 생각할 거예요…….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사교계에 제가 건재함을 보여 줘야 해요. 애초에 공작 부인이 작품을 출간하는 일은 불법이잖아요?”
달리아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도와달란 말이더냐?”
“대형 서점의 점주들과 만날 자리를 좀 마련해 주세요.”
달리아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라미라 후작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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