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6화 (7/15)

6

아키스는 점심 식사를 하며 오늘따라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를 관찰했다.

어제 늦게 잔 탓인지, 아니면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그녀는 낮부터 연신 하품을 했다.

‘저는 친척 집에서 자라서 돈을 아껴 쓰는 데 익숙하거든요.’

루나와 리튼에서 보내는 며칠은 그도 상당히 즐거웠다. 새로운 곳을 보며 기뻐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아키스는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그녀로서는 자신에게 동정을 사기 위해 한 말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아키스는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게다가,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예전부터 식사를 할 때의 그녀의 행동에 묘한 이질감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들어 점점 더 그랬다.

‘예의범절은 완벽한데.’

식사 버릇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조용하게 식사를 했다. 오물오물 예쁘게도 음식을 씹었다.

아키스가 루나의 식사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리튼에서였다.

그녀와 하루 세 끼를 함께한 건 리튼에서가 처음이었다. 막 혼인하여 최음 독 기운에 취해 있을 땐 그녀의 식사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공작가의 식사는 아침과 점심은 만찬식이었다. 만찬 하는 것처럼 음식을 차려 놓고 직접 음식을 덜어 먹었다. 아침은 음식을 적게 먹으니 특별할 게 없었고, 저녁은 하인들이 음식을 직접 덜어 주었다.

문제는 점심 식사였다. 점심에도 오리나 닭구이, 아니면 소고기나 큰 바다 생선 요리 같은 메인이 되는 요리가 나오기 마련인데, 루나는 주변에 있는 푸성귀나 빵, 아니면 주변 음식들만 먹었다.

처음엔 고기나 생선 요리를 싫어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기 전에 아키스가 충분히 메인 요리를 먹으면 그를 한번 보고 메인 요리를 먹었다.

그에 리튼에서 식사하던 때, 아키스가 물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군요. 뭘 좋아합니까?”

“난 다 잘 먹어요. 하지만 채소보다는 고기가 좋죠.”

그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리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키스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눈치를 보는 게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천성이 밝고 순해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식사를 할 때조차 눈치를 보는 식사 방법, 그런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아키스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놈의 친척 집.’

그렇게 눈치채고 나니 묘한 기시감들이 이해가 됐다. 공작 부인이나 돼서 드레스 값을 고민하고, 낭비하지 않는 검소한 습관들.

그리고 작은 것들. 이를테면 꽃장식이나 작은 액세서리 하나에도 감탄하고 신기해하는 모습. 고작 책 몇 권을 샀다고 기뻐하며 그에게 말하던 그녀.

‘검소한 건 좋은데.’

검소한 모습도 나름대로 매력적이었지만, 아키스가 보기에 그녀는 이렇게 살 여자가 아니었다. 귀하고 좋은 걸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친척집에서 그녀에게 빈궁한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그런 환경에서 참 대단하게도 자랐군.’

아키스는 그 점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오히려 그녀의 검소함은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힘들게 자란 이들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어느 한 곳에서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새틴은 이미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 한 번 갔다 왔으니 귀족 사회에서 새틴의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이제 버몬드 남작가에는 거액의 배상금 요청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사람을 고용해 죽이거나, 불법 마법으로 미쳐 버리게 만드는 방법도 고민해 봐야겠다. 아키스는 남몰래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들에게 자비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빨리 그녀에게 더 잘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식사를 마치자, 집사는 따뜻한 홍차를 내왔다. 평소라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에서 공무를 보며 차를 마셨을 아키스였지만, 요즘 그의 엉덩이는 무거워진 지 오래였다. 아내와 식사하는 날이 많아졌으니.

아키스는 루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참, 이제부터 당신도 공작 부인으로서 할 일들이 있을 겁니다.”

“아, 물론이죠. 뭐든지 열심히 해 볼게요.”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나가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쁠 거예요.”

“고맙군요. 마침 부탁할 일이 있는데.”

“뭔데요?”

루나는 조금 긴장하며 물었다.

토끼 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는데, 정말이지 귀여웠다. 아키스는 기분이 왔다 갔다 했다. 금세 짜증을 잊고 웃을 뻔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사교나 외교 또한 공작 부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입니다.”

“네, 맞아요. 그렇게 들었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는 외국과 거래하는 큰 상회를 하나 보유하고 있죠. 그리고 가장 큰 수입원 중 하나는 광물 수출입니다.”

루나도 익히 들은 바였다.

공작가의 서쪽 영지에는 수많은 광산들이 있다 했다. 공작가의 금은 몹시 순도가 높아 고급품 중에서도 최상급이라 들었다.

“상회의 가장 큰 외국 거래처의 딸이 얼마 전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과 비슷한 나이죠. 그래서 그녀가 성인이 된 걸 기념하여 귀금속을 사서 보내려고 합니다. 친교의 의미죠. 그것을, 나 대신 골라 줄 수 있겠습니까?”

루나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치만 제가 보석을 아직 잘 몰라서……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급한가요?”

“공부요?”

“네. 책에는 뭐든 나와 있는걸요.”

그녀의 말에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공부까지는 필요 없고, 유행하는 디자인을 보석상과 함께 골라 보세요. 좋은 물건들은 보석상들이 알아서 구해 올 겁니다. 그중, 괜찮아 보이는 걸 골라 주십시오. 좋은 물건보다 취향껏 고른 물건이 진정한 선물일 수도 있는 겁니다.”

아키스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루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흥정해 볼게요.”

“……그것도 디온이 해 줄 겁니다. 가격은 걱정 말고, 좋은 디자인만 골라 줘요. 그런 건 같은 여인이 잘 보는 법이지요.”

“알겠어요. 열심히 할게요.”

아키스는 그런 루나가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애써 웃음을 꾹 참았다.

* * *

이튿날, 저택에 아키스가 부른 보석상이 도착했다. 수도에서 가장 비싼 보석을 판다는 전문 숍의 보석상이 루나에게 엄청난 보석들을 잔뜩 보여 주었다.

5캐럿이나 되는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든 반지, 다이아몬드를 잔뜩 박은 티아라, 수많은 사파이어와 루비, 그리고 에메랄드 반지들. 루나는 응접실에 그런 값비싼 보석들이 쌓이는 걸 보자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요즘 유행하는 것들은 이렇습니다.”

“……와, 너무 예뻐요. 이렇게 많은 보석을 한 번에 본 건 처음이에요.”

“역시 언제나 유행하는 건 다이아몬드지요. 요즘은 이렇게 깃털처럼 위아래로 목을 감싸 주는 역세모꼴의 다이아몬드 조형이 유행이랍니다. 한번 직접 해 보시겠습니까?”

“아, 나를 위한 물건을 구입하는 게 아닌걸요. 선물을 고르려는 거예요.”

루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혹시, 선물 받을 분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분명 아키스는 거래처의 딸이 막 성인이 된 나이라 했다. 그럼 루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럼 직접 해 보는 게 제일이지요. 비슷한 연령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직접 해 봤을 때와 눈으로 보는 건 확연히 다르니까요.”

“그럼…….”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에 대기 중이던 제인이 달려와 루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이럴 수가, 정말 잘 어울리시는군요.”

보석상이 권유한 다이아몬드는 깃털 조각이 달린 백금 목걸이였다. 금체인 대신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 생각 없던 루나도 순간 혹했다.

‘사심을 가지려는 건 아닌데…….’

루나도 여자인지라 처음 해 보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쇼핑이 몹시 즐거웠다. 사업상 경비라는 말은 일종의 마법의 단어와 같았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금액도 일과 관련되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되었다.

‘그래. 괜히 돈을 아껴서 아키스를 망신 줄 순 없으니까.’

루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돈 걱정 없이 쇼핑을 했다. 그랬더니 뜻밖에 즐거웠다. 거기다 보석상이 비위를 몹시 잘 맞춰서 루나는 제가 사지도 않을 보석을 실컷 착용해 보았다.

제인이 옆에서 보석상과 맞장구를 치며 이 보석이 어울린다, 저 보석이 어울린다 칭찬하자 빈말인 걸 알면서도 들뜨기까지 했다.

돈을 쓰지 않고도 사치하는 기분을 누릴 수 있다니, 공작 부인 역할은 재미있는 부분도 있구나. 루나는 그런 생각까지 했다.

“이 정도면 어디에 선물로 보내도 부족함이 없겠죠?”

보석상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일국의 왕비님의 소장품이 되기에도 부족함 없는 보석들이죠.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모두 최상급의 물건들이라 경매에 내놔도 손색없는 물건들입죠! 공작님께서는 저희 상회의 투자자시기도 하시니 아주 특별한 가격에 모셨습니다.”

“그래요. 계산서는 남편의 보좌관이 검토할 거예요. 세부 사항을 꼭 적어서 줘요. 그리고 선물 받을 사람의 반지 사이즈를 보낼 테니 맞춰 주세요.”

“예. 최선을 다해 작업하겠습니다, 공작 부인.”

상인이 떠나고도 루나는 내내 들뜬 기분이었다. 황족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오후 내내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아키스에게 오전 중에 보석을 다 골랐다 하니, 그가 고생 많았다며 루나를 칭찬해 주었다.

* * *

“멋진 생각을 하셨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아키스는 청구서를 확인하고 일언반구 없이 수표에 사인해 보석 숍에 보냈다.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루나에게 더 보석이나 드레스를 사라고 해 봐야 그녀는 몹시 부담스러워하며 어렵게 고를 것이다.

아키스는 제국에 제일가는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아내의 사치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고, 가문의 기반에 생채기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물건을 사서 주면 그녀의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거짓 일을 생각해 루나가 제 눈에 예쁜 물건을 실컷 고르게 한 것이다.

“깜짝 선물을 하고 싶었거든.”

“제인에게 듣기로 고르는 내내 부인께서 몹시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디온의 말에 아키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결혼식 전에 맞춘 가구들이 차곡차곡 들어왔다. 주문 제작이기에 보통은 더 걸리지만, 모든 주문을 미루고 공작가를 위해 제일 먼저 만든 가구들이라 했다.

알렉은 침실 근처의 손님용 방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응접실 겸 서재, 한쪽은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으로 만들었다.

루나의 보물 같은 금고도 그 방에 옮겨 놓았다. 드디어 이 저택에 처음으로 생긴 루나만의 공간이었다.

“이제 난방 장치는 고쳐진 건가요?”

“네. 완전히 고쳐졌답니다.”

알렉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이제 공작 부인만의 공간이 생겼으니, 더 편히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알렉.”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전에 루나는 제인을 데리고 드레스 룸을 정리하기로 했다.

“와, 화장대가 정말 예뻐요.”

제인은 루나의 화장대를 보고 감탄했다. 화장대의 덮개에는 아름다운 여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먼저, 화장품을 정리하고 바로 드레스를 정리해야겠어요. 지금껏 부인의 드레스를 둘 곳이 없어서 큰일이었다니까요. 어머나…… 세상에.”

말하다 말고 제인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루나를 급하게 불렀다.

“공작 부인, 이걸 보세요. 화장대 안이요……!”

루나는 제인의 말에 화장대로 다가갔다. 제인이 화장대 덮개를 완전히 올리자, 그 안에서 빛나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혹시, 낮에 보석상이 왔었니?”

“그건 못 봤습니다만, 아침에 낯선 마차가 집에 들어오는 건 보았어요.”

화장대 안은 번쩍이는 보석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두 루나가 한 번 본 디자인들이었다. 바로 어제 그녀가 보석상과 만나 골랐던 보석들이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구나.”

그에게는 분명히 선물이라 말해 두었다. 그런데 보석상은 그녀의 방 안으로 보석을 곱게 배달해 두었다.

상인이 큰 실수를 한 건 물론, 아키스가 오해할까 걱정이었다.

‘오해한다고 해도, 이런 걸로 화를 낼 만큼 쪼잔한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물건이 자신의 파우더 룸을 떡하니 차지하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키스에게 가서 의논해 보려던 찰나, 루나는 마침 문으로 들어오는 그와 마주쳤다.

“공작님.”

루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인은 눈치 빠르게 방에서 나갔다.

“방은 마음에 듭니까?”

“네, 그런데 문제가 좀…….”

그런데, 오늘따라 아키스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루나는 빠르게 말했다.

“보석이 잘못 배달 온 것 같아요. 내 방에 가져다달라 한 적 없는데, 여기로 도착해 있더라고요. 하인들을 시켜 물건을 포장할 터이니 제 주인에게 보내야겠어요.”

아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보석이 주인을 찾아온 것 맞습니다.”

“……네?”

“내가 당신 방으로 보내 달라 했거든. 반지도 사이즈를 고쳐서 도착할 겁니다.”

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는 뒤늦게 눈치를 발휘해 아키스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럼 루나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럼, 거래처 이야기는요?”

“그건 핑계였고, 사실 처음부터 당신 선물이었습니다. 깜짝 선물을 하려고 한 거였죠.”

“선물이라니…… 왜요?”

“필요하니까.”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루나는 자신의 행색을 떠올렸다. 공작 부인이라기엔 수수한 행색이었다.

“결혼식 날 보석을 빌려 썼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난 내 아내 손에 보석 반지 하나 못 끼워 주는 남자가 아닙니다.”

루나는 오만 생각이 다 밀려들었다.

보통 정략으로 결혼한 커플들 사이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나? 사실 이 남자는 바람둥이가 아닐까? 루나는 혼자 전전긍긍하는 대신, 그를 향해 대놓고 저의를 물었다.

“이건 무슨 의도시죠?”

“의도가 아니라 전략입니다. 내 아내가 부담 없이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게 할 전략. 굳이 따지자면 뇌물이고.”

“공작님이 제게 뇌물을 줄 일이 뭐가 있나요?”

루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큰 선물을 받으니 머리가 멍했다.

“왜 없습니까. 그렇게 바짝 얼어붙어 공작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라는 그런 뇌물이죠. 그리고…….”

아키스는 다음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속내 이야기도 더 해 주고, 자신을 더 편하게 대해 달라는 뇌물.

그러나 아키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말을 당사자가 직접 해 봐야 뭐 하겠는가. 그녀가 자신을 편하게 대하게 하려면 앞으로 그가 알아서 잘해야 할 일이었다.

“앞으로 잘해 보자는 의미죠.”

“뇌물을 받았으니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뭘 해 달라고 하실 건데요?”

루나는 이제 숫제 피식 웃고 있었다.

솔직히 심장이 뛰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시자 은근한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대가라.

그 순간, 그는 저 찬란한 보석들을 걸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알몸으로. 그 새하얀 몸 위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치고 루비와 사파이어 반지를 끼고, 배 위로 보석 줄을 엮어 만든 금목걸이를 올린 채 침대에 나른히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 날씬한 배를 따라 흐르는 보석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관능이 자극 받자,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군요.”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루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럼, 정말 이거 전부 제게 주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키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폐부 깊숙한 곳까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가 충격을 받은 건 선물이 너무 비싼 것도 있었지만, 아키스가 저에게 보석을 선물하고자 계략까지 꾸몄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쨌든, 이 선물을 거절하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었다. 정말 이 남자가 어떤 생각인지 혼란스러웠다.

“왜요, 혹시 마음에 안 듭니까?”

루나는 제게 나직이 묻는 아키스의 말에서 약간의 초조함을 읽었다.

놀랍게도 그랬다. 그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루나의 입가에 곤란함 섞인 미소가 번졌다. 역시 여기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뇨, 너무 예뻐서. 내가 이런 걸 가져도 될까 하고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 짧게 입술에 키스했다.

“깜짝 이벤트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아키스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매달린 루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음에 들어 해 줘서 고맙군요. 고민했거든요.”

“고민요?”

“어떻게 하면 당신 맘에 드는 방법으로 선물할까 하고.”

루나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아키스의 눈을 바라보다 그에게 한 번 더 쪽 키스했다.

“일 때문에 바쁘신 줄 알았는데, 사실 딴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아내 생각은 딴생각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생각이지. 때로는 일보다 중요하고.”

그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남잔 살아 봐야 아나 보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공작님은 정말 멋진 남편이에요.”

루나의 말에 아키스의 심장은 흐늘흐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왜 이 여자는 그의 기분에 이렇게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가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면 그는 자신이 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가 못할 일은 없지만, 느낌이 달랐다. 하늘 끝까지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공작님이 아니고, 아키스.”

그가 나직이 말하며 그녀의 날씬한 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뇌물 받았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이걸론 안 되겠는데요.”

루나가 팔을 떼고 개구지게 그를 보았다. 아키스는 눈을 한 번 치떴다.

“어째서?”

“전달 방법이 로맨틱하지 못했어요. 난 이 보석들이 내 화장대에 있는 걸 보고 내 욕심을 들킨 줄 알고 민망했거든요. 사실, 예쁜 보석들이라 나도 하나쯤은 가지고 싶다, 그런 흑심 품었거든요. 내가 그런 마음을 품에서 얘네가 발이라도 달려 내게 온 줄 알고.”

“그럼 다음번엔 정말 발을 달아 주죠. 난 마법사니까. 마음껏 흑심 품고 조르십시오. 부인의 욕망을 채워 주는 건 남편의 소임이니.”

루나는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장난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진심이기도 했다. 아키스를 속이고 그의 아내자리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수가 틀리면 언제든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보석을 보고 예쁘다 느끼고 탐내는 자신이 민망했다.

“욕심내세요. 뭐든지.”

루나는 그 말에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삼켰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가 가장 욕심내면 안 될 것은 아키스일 것이다. 남편의 사랑, 이 남자를 독점하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루나는 칭얼대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그럼, 선물은 안 주는 거예요?”

“선물?”

“내가 일을 잘해 내면 선물 준다고 했는데. 나, 그거 기대했는데.”

루나는 비죽이며 말했다. 귀여워서 잠깐 팔에 힘이 풀릴 뻔했다. 아키스는 그녀가 누굴 때려 달라 해도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키스라고 불러 주면 그 선물도 주겠습니다.”

“다행이다. 받고 싶은 걸 정해 뒀거든요.”

루나는 아키스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다음번엔 이렇게 돈 쓰지 말고요. 알겠죠, 아키스?”

아키스는 알쏭달쏭한 심정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요구한 건 뜻밖의 것이었다. 역시 사람 들었다 놨다하는 덴 천재적인 여자였다.

“알겠습니다. 꼭 주죠.”

“고마워요.”

루나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아키스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뭔지, 알 수 없었다.

* * *

“……아.”

아키스가 방을 나가고, 루나는 문을 닫았다. 그녀는 문에 기대서 저도 모르게 스르르 주저앉았다.

“……진짜.”

그녀의 눈가는 발개져 있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나 어떻게 해.”

부끄러웠다.

사실, 아키스에게 이 보석을 받게 될 여인이 부러웠다. 사업상의 관계인걸 알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못난 마음을 눈치챈 듯 아키스는 그녀에게 역으로 선물을 했다.

할 질투가 따로 있지.

무엇보다 루나를 흐물흐물하게 만든 건 아키스였다. 왜 이렇게 잘해 줄까. 불안하게. 자신 때문에 고민하고 고심해서 선물 방법을 생각했다니.

“내 생각하지 마요…….”

그녀는 혼자서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어차피 그의 생각밖에 안 하는 하루하루인데, 그가 자신 생각을 한다는 걸 알자 심장이 멈출 줄 몰랐다. 너무 좋아서. 이러다 몇 안 남은 이성까지 그에게 다 줄 참이었다.

너무 좋아하게 만들지 마요.

오늘 루나가 아키스에게 하지 못한 말이었다.

“……난 이미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 * *

“그럼 서부로 떠나나요?”

“주치의가 출장을 허락했으니 그렇습니다.”

그날 저녁, 선물 이후엔 섭섭한 이야기도 있었다. 한동안 아키스가 서부 사막 쪽으로 출장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마법사들은 한번 서부로 가면 반년은 머무르기도 한다던데…….’

루나는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얼마나요?”

“일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 다르지만, 2주는 넘지 않을 겁니다.”

반년까진 아니구나. 루나는 그 말에 내심 안심했다.

사실, 정체를 들킬지 모르는 위험을 생각하면 그와 따로 지내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의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을 제어하기 점점 힘들어졌다. 그녀의 마음을 장악한 그에 대한 감정은 나아지기는커녕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예전엔 어떻게 혼자 살았나 싶었다.

“그래요, 내 걱정 말고 천천히 다녀와요. 알렉과 의논해서 저택을 잘 꾸리도록 노력할게요.”

루나는 복합적인 감정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약간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 * *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서부로 떠나는 게 미안한지, 아키스는 그녀에게 자꾸 선물을 해 주려 했다.

“루나, 글씨 교정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까? 디온 말로는 강사를 구할 수 있다 하던데.”

루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글씨를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어릴 적부터 그랬거든요.”

사실 이제 루나에게 개인 공간이 생겼으니, 아키스가 출장 간 사이 몰래 필체 연습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소년 루의 필체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썼다가 글씨를 보고 그가 무언가 눈치챌까 두려워 악필을 핑계로 아키스의 앞에서 글씨를 쓰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아키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어느 오후, 그녀를 서재로 불렀다. 루나는 아키스의 책상에 놓인 물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글씨 교정이 싫다면, 이걸 배워 보면 어떻습니까?”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건 타자기잖아? 이 비싼 물건을…….’

마법사들이 만든 타자기는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루나가 듣기로 타자기만 있다면 엄청나게 빨리 글씨를 쓸 수 있고, 손도 아프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서 루로서 달빛 서점에서 일할 당시, 루나에게 타자기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필립도 타자기를 구해 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그것도 최고급품…….’

고급스런 금인장이 들어간 타자기는 딱 봐도 몹시 귀해 보였다.

“타자기를 쓰는 법을 배우면 글씨를 굳이 고치지 않아도 됩니다. 편지도 쓸 수 있고, 긴 글도 편하게 칠 수 있죠.”

“정말 내가 써도 돼요?”

이제 번역 일을 할 일은 없는데도 루나는 너무 탐이나 입에 침이 고였다.

예전엔 오매불망 바라던 물건이다. 타자기 쓰는 법만 배웠으면 일을 두 배로 했을 텐데. 많이 아깝기도 했다.

“이렇게 기뻐할 줄 몰랐는데. 혹시, 이 물건이 뭔지 아는 겁니까?”

아키스는 보석을 받을 때보다 훨씬 들뜬 루나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루나는 타자기를 이래저래 만져 보다 흠칫, 동작을 멈췄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냥 전 특이한 수집품을 좋아하거든요. 방에 꼭 장식해 두고 싶어요. 이거, 비싼 물건 맞죠? 금장식도 되어 있네요. 와, 예쁘다!”

루나는 최대한 무구하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타자기? 이거 먹는 건가요? 이런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아키스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녀의 엉뚱한 말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장식해 놓는 것도 좋지만, 사용 방법을 배우는 게 먼저입니다. 이걸 사용해 종이를 끼워서 치기만 하면 일정한 필체의 글자가 나오죠.”

아키스는 루나에게 타자 치는 방법을 시범 삼아 보여 주었다.

루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루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이걸 내게 주면 아키스, 당신은요?”

“난 한 개 더 가지고 있습니다.”

루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자는 달랐다. 루나는 생각난 김에 조심스레 물었다.

“참, 아키스. 남편의 서재에 드나드는 게 예의는 아닌 것 알아요. 하지만 밤에…… 당신이 업무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종종 서재에서 책을 꺼내 읽어도 될까요? 그곳에 있는 고전 소설들은 나도 못 읽어 본 것들이 있어서요…….”

루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키스는 잠시 고민했다. 서재 안에는 중요한 서류도 있었고, 종종 그가 고대어 책을 꺼내 놓기도 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고대어 책은 비밀 서재 안에 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알겠습니다, 편히 책을 꺼내 가도록 해요. 단, 일반교양 서적만. 업무 관련 서류나 마법 관련 책들은 열어 보면 안 됩니다.”

“물론이죠. 소설책들만 볼게요.”

루나는 믿음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키스는 그 밝은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밤에만 드나들게요,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낮에도 종종 와도 됩니다. 요즘은 저택에서 공무를 보는 일이 많으니, 당신 얼굴을 보고 일하면 좋을 것 같아서.”

루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키스는 곧바로 루나에게 타자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번엔 마이아의 수업 때와 달랐다. 아키스가 루나의 옆에 딱 붙어 때로는 그녀의 등 뒤에서 바로 타자기에 손을 뻗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는 내내 야릇했지만 성과는 있었다.

“익히는 것이 몹시 빠르군요. 편지 쓰는 용도로 준 건데, 이 정도면 조금만 연습해도 보좌관으로 일해도 될 정도입니다.”

“정말요?”

타자기 사용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루나는 오랜만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 즐거웠다.

‘어쩌면…… 내가 루로서 그의 곁에 머물렀다면 이렇게 지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타자기를 만지고 있으니 직접 돈을 벌 때가 그리웠다. 아키스가 책상에 앉아 타자기를 만지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정말 당신은 똑똑하군요.”

루나의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루였다면, 그랬다면 아키스와 이런 일은 못했겠지. 그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키스의 입술이 닿았다.

그 후, 루나는 2, 3일간 타자기에 달라붙어 시간을 보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이 몹시 즐거웠다.

* * *

하지만 타자기에 흠뻑 빠진 것은 딱 3일뿐이었다. 루나는 점점 하루하루가 지루해졌다.

어느 정도냐 하면 목숨을 걸고 번역 일로 돈을 벌던 그때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사는 데 부족함이 없으니 배가 불렀나?’

밥도 잘 나오고, 하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소일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괜히 하루에 두 번이나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할 줄 아는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게 무서웠다.

공작 부인 자리에 영원히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2년 후 그와 살게 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살롱을 오픈 하겠다 하면 그이가 기겁하겠지?’

모은 돈으로 작은 살롱을 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서 화장을 해 주고 머리를 하고, 그런 일을 하면 공작가에 누를 끼치게 된다. 공작 부인의 자리란 그런 거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자니 굳이 살롱을 오픈 할 이유도 없었다. 원래 머리와 화장을 잘한다는 이유로 하려고 했던 거니까.

‘다른 할 일을 찾아봐야 해. 돈 나올 구멍이 있으면 좋지. 어느 날 내 돈만 들고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 내가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돈이 좀 생기면 좋겠는데…….’

어차피 공작가는 루나가 없이도 잘 돌아갔다. 아키스는 낮에는 집에서 공무를 보거나 간간이 외출했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라 마냥 루나와 놀아 줄 수 없었다.

하여 비아에게 지루한 티를 냈더니, 그녀가 수예를 권유했다.

‘오랜만에 바느질이나 해 볼까?’

루나는 그 말에 솔깃했다.

이튿날부터 루나는 수예를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큼직큼직한 집안일을 하고 자란 루나는 손이 큰 편이었다.

“요즘 천은 방수도 되고 정말 신기하네요. 예전엔 이런 비싼 천은 못 샀거든요.”

비아는 루나가 끌어안은 바느질거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공작 부인. 이렇게 바느질을 잘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뭘 만드시는 건지…….”

“이왕이면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어야죠.”

남편에게 줄 자수 손수건이나 만들라고 권유한 건데, 루나는 저택 살림에 보탬이 되겠다며 큼직한 천을 끊어 와 바느질을 시작했다.

‘커튼을 만드시는 것 같은데, 저걸 어디 걸어 두시려고…….’

그것도 리본 달린 거대한 핑크색 방수 커튼을 만드는 모습에 비아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다 만들어 선물했을 때, 아키스가 저 핑크색 커튼을 거는 걸 허락할지 몹시 궁금했다. 저 화사하다 못해 요란한 핑크색 커튼이 공작가에서 펄럭이는 모습은 볼만할 것이다.

공작 부인은 약간 특이했는데, 그게 비아와 같은 나이 많은 고용인들 눈에는 몹시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키스가 출장 간 동안 할 일도 없으니 바느질이나 붙잡고 있어야겠어요.”

“그렇군요. 공작님께서도 공작 부인이 지루하지 않게 보내시는 걸 좋아하실 겁니다.”

비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말했다.

* * *

아키스가 출장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아내와 헤어지는 것에 몹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달콤한 그녀의 몸과 떨어지는 것도 아쉬웠지만 그건 부차적이었다. 그냥 벌써부터 공허했다. 분리를 두려워하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떠나기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줘야겠군.’

아키스는 저녁 식사 시간에 루나를 보며 생각했다.

‘또 예쁜 거 보여 주세요. 나만을 위해서. 아주 예쁜 걸로.’

그녀에게 보석 선물을 한 날, 루나가 그의 귀에 속삭인 말은 그것이었다. 그때 보았던 환상 마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미 가장 예쁜 건 보여 줬는데.’

결혼식 날,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환상 마법은 이미 보여 주었다.

무얼 보여 줘야 그녀를 만족시킬까. 그는 출장 준비를 하는 며칠 내에 고민했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그가 루나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오늘 밤은 바로 잠자리에 들지 마요.”

“알겠어요. 무슨 일이라도……?”

“내일 출장을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루나는 무슨 일일까 생각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 * *

루나가 아키스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 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에 시작이란 건 따로 없다지만, 그에게 반해 버린 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하루가 있었다.

어두운 도서관, 소년 루로 가장하고 일하고 있던 그녀에게 아키스가 반짝이는 반딧불 마법을 보여 준 날. 루나는 종종 눈 뜨고 있을 때도, 밤에 잠들면서도 그날의 꿈을 꿨다.

결혼식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마법도 좋았지만, 종종 그날이 그리웠다. 그래서 루나는 뭐든지 하나 들어 주겠다는 아키스에게 아름다운 마법을 보여 달라 부탁했다.

‘무슨 일일까?’

루나는 아키스의 말대로 식사 후에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하녀가 침실문을 두드렸다.

“공작 부인,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직 서재에 계시니?”

“네, 그렇습니다.”

루나는 그의 서재 문을 노크했다. 대답이 들리자,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어?”

루나는 여러 차례 아키스의 서재에 들어와 본 적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서재 구조가 좀 이상했다. 항상 깨끗이 비어 있던 서재 오른쪽 벽. 그 벽에 못 보던 문이 있었다. 루나는 처음에 제가 헛것을 보나 싶었다.

“저 문은 뭐예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선물.”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선물요?”

“약속했잖습니까. 보석을 잘 고르면 선물을 주겠다고.”

그 말에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마법사였다. 어느 날 벽에 문이 솟아난다고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문이 생긴 거예요? 와 역시 마법사는 대단해……. 문을 열어 봐도 되나요?”

아키스가 루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가 문고리에 손을 대기 전, 그녀의 뒤에서 문고리를 잡았다.

“이곳은 내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죠. 내가 원할 때만 이 문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저 안에 뭐가 있는데요……?”

“이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안에 들어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안엔 두 개의 방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들어가는 곳의 책은 당신이 읽으면 안 되고, 기억해서도 안 됩니다.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루나는 그 말에 바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예측했다.

‘고대어 책을 모아 두는 공간인 모양이군.’

루나가 질리도록 본 그의 컬렉션이 거기 있을 터였다.

‘어쩐지 도서관에 고대어 책을 모아 두는 곳이 없더라니…….’

루나는 호기심을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게요.”

루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대답했다. 속으로는 호기심과 의구심이 치밀어 올랐다.

‘……말로만 듣던 마법사들의 비밀 도서관이구나.’

달빛 서점에서 일할 때 얼핏 듣기로 마법사들은 자신만의 비밀 도서관을 가졌다고 한다. 귀중한 책이 많기에 그곳에 고대어 책을 숨겨 둔다는 모양이었다. 또, 그 구조는 신비롭고 독특해서 마법사 본인이 아니면 미아가 된다고 했다.

희미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한번 발을 들여놓은 번역가와 마법사의 세계는 그녀에게 두렵고, 매혹적인 세계였다.

아키스가 무거운 남색 문을 열었다.

“와…….”

드러난 광경에 루나는 감탄하며 눈을 돌렸다.

들어선 비밀 도서관은 몹시 넓었다.

분명 들어선 순간에는 좁아 보였는데, 어디에 이런 넓은 공간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굉장히 넓네요.”

천장은 끝없이 높았고, 어두운 곳곳을 밝은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허공에는 작고 큰 빛무리가 밤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래된 양식이 새겨진 조각들이 책장 곳곳을 메우고 있었고, 가장 높은 책장은 루나의 키 두세 명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도서관 바닥은 새까만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위로 가죽을 씌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낡은 곳이었지만 무섭도록 깔끔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대부분 마법사들은 이렇게 각자 자신의 이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에겐 고대어만큼이나 마법에 대한 것도 금기였다. 마법사들의 세계는 항상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었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마법사가 되는 조건은 하나입니다. 자신의 이공간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 이런 이공간은 마법사가 자신의 마법 주문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들은 이렇게 자신만의 책을 저장해 둘 수 있는 비밀 도서관을 가지고 있죠. 이런 이공간이 넓고 충실할수록 그 마법사의 능력이 뛰어난 겁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루나는 천천히 아름다운 도서관의 모습을 구경했다. 사실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아키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날 놓치지 말고 조심스레 움직여요. 이 안은 내가 마법을 걸어 둬서 구조가 자주 바뀌니 말입니다.”

“알겠어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순간, 루나의 눈에 도서관 중간에 놓인 테이블의 책 더미가 들어왔다. 다른 책들과 달리 공들여 정리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올라와 있는 책 무더기였다.

그리고, 그 책무더기 위에는 붉은 표지의 책 한 권이 올라와 있었다.

‘……어? 저 책 표지는 설마…….’

책 더미 가장 위에 놓여 있는 붉고 낡은 표지의 책은 분명히 본 적 있는 책이었다.

“저건…… 뭐예요? 저 빨간 표지의 책이요…….”

루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분명했다. 저 붉은 책 표지는 루나가 꿈속에서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루나의 일기장.

그녀가 꿈속에서 보고 자신의 미래를 읽었던 그 일기장과 똑같았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다가갔다.

“루나?”

아키스가 의아하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나는 홀린 듯 책을 향해 손을 뻗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미, 미안해요. 책이 너무 예뻐서…… 신기해서요.”

아키스에게 의심 받았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낯을 살피다 피식 웃었다.

“절대 고대어 책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어요. 난…….”

“괜찮습니다.”

“……네?”

아키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저 책을 보고 싶다면 보여 주죠.”

루나의 심장이 요동쳤다.

꿈속에서 읽은 일기장 내용은 지금도 모두 생생히 기억났다. 정말 이 책이 자신의 일기장이라면 아키스가 내용을 보게 되는 거였다.

혹시 지금 이 책을 보여 주겠다는 건 아키스의 함정일까? 그녀를 시험해 보는 걸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러트렸다.

그사이,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잡고 성큼 걸어 그 책을 집었다. 루나에게 그 동작은 몹시 느리게 느껴졌다.

“아키스, 그 책을 보면 안…….”

“괜찮습니다.”

아키스가 책을 활짝 펼쳤다.

안 돼, 아키스가 내 일기 내용을……! 루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루나?”

아키스가 그녀의 이름을 어르듯 불렀다.

“눈 떠도 돼요.”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키스가 펼친 책 페이지는 텅 비어 있었다.

“여기 쌓인 책들은 당신이 이 안에서 유일하게 봐도 되는 책들일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런 책을 ‘고장 난 책’이라고 하죠. 고대 마법사가 쓴 마법서는 맞는데, 내용이 봉인된 책입니다. 많은 방법으로 시험해 봐도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책을 그렇게 지칭하죠. 보통 두 경우인데, 마법이 오래되어 소멸했거나, 책의 발동 조건이 몹시 까다로워 찾아내지 못한 경우죠. 대부분 전자입니다. 하지만, 후자일 경우는 몹시 강력한 마법사가 만든 책이죠. 나도 뚫지 못하는 봉인이 되어 있는 책이니까.”

“그, 그래요?”

“네. 보다시피 안이 텅 비어 있죠.”

아키스가 페이지들을 넘겨서 보여 주었다. 새하얀 백지의 연속일 뿐이었다. 루나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럼 쓸모없는 책이겠네요.”

“그렇지요. 보통 조금 가지고 있다 처분합니다.”

처분이라는 말에 루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처분이라면, 어떻게……?”

“불태워 없애야죠. 그래도 마법서인데 외부로 유출되어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루나는 아키스를 올려다보았다. 겁먹은 그녀를 아키스가 다독였다.

“고대책에는 표지가 아름다운 책도 많죠. 그러니 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마, 맞아요.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랬어요. 나는 책을 좋아하니까.”

루나는 묘하게 풀이 죽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키스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팔을 감았다.

“이제 진짜 선물을 보여 주겠습니다.”

아키스가 도서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루나는 그의 팔에 감싸여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절로 시선이 붉은 표지의 책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쁜 광경을 보고 싶다고 했죠.”

“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도서관 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하나의 문이 하나 있었다. 아키스는 그 문을 확 열었다.

“아…….”

그리고 드러난 광경에 루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밤하늘의 바다였다. 남색 비로드 천처럼 넓게 펼쳐진 광경 위로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별이 떠올라 있었다. 몽환적인 별들이 반짝이고 부딪치며 서로 소멸되고 날아다니기를 반복했다.

“와…….”

루나는 바닥을 보았다. 바닥은 호수였다. 루나는 흠칫 놀랐다.

“나…….”

“괜찮아요. 환상이니 빠지지 않습니다.”

아키스가 루나를 다독였다. 자세히 보니 물 아래로 반짝이는 색들이 계속 올라왔다 사라져 갔다.

“여긴 어디예요?”

“내 진짜 이공간이죠.”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마법사들은 고대의 마법서에서 주문을 추출하여 자신의 이공간에 저장시킵니다. 그리고 이 공간이, 내가 가진 마법들을 저장해 놓는 공간이죠. 이 공간에서 주문을 불러내서 마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서 감을 잡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녀가 별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별빛처럼 흩어진 글자였다.

모두 고대어 글자들이었다. 그녀가 아키스를 위해 수없이 번역했던 그 암호 같은 글자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와 있었다. 루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너무 바라보지 마요. 모두 고대어 글자니.”

아키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루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글자와 금색 글자가 있어요. 이게 바로 고대어인가요?”

루나는 순진무구하게 속삭였다. 아키스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맞아요. 특히 금빛 글자는 내가 가진 마법들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금색의 별처럼 아주 예뻐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리고 정감 넘치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키스.”

루나는 아키스를 확 끌어안았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루나는 아키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발돋움했다.

“너무 멋져요. 이런 광경을 보여 줘서 고마워요.”

루나가 품에 파고들자, 아키스는 영문을 알지 못했지만 기뻤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날갯죽지를 어루만졌다.

“기뻐해 주니 고맙군요.”

루나는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살폈다.

‘……호오. 그렇구나. 금색 글자는 금의 언어고, 반면에 은색 글자는…… 은의 언어군.’

루나는 응석을 부리는 체하며 은빛 글자들을 면밀하게 힐끔거렸다.

그건 마법 주문이 아니었다. 연구, 집, 집사, 평온, 기쁨, 조용함, 분노, 고민, 죽음. 이런 단어 들이 두서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은색 언어들은 너무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어 루나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은빛 글자들은 몹시 빠르게 날아다니네요. 정말 진짜 별똥별 같아요.”

아키스는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어서 말했다.

“금색 글씨는 내가 저장해 둔 마법 주문들인 데 반해 은색 글자는 전혀 신경 쓸 거 없는 단어들입니다. 나도 읽을 수 없기도 하고.”

“왜요?”

“고대어는 종류가 많은데 저건 내가 모르는 언어입니다. 고대어는 살아 숨 쉬는 언어이기 때문에 혼자서 생명력을 키워 자라거든요.”

루나도 그건 처음 들었다.

‘보아 하니 아키스가 금의 언어는 읽을 줄 아는 것 같은데, 은의 언어는 못 읽는군. 어쩐지 금의 언어로 된 책은 번역을 안 맡기더라니…….’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자라는 건데요?”

아키스는 루나를 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가늠하듯 보았다.

아키스의 시선을 받으며 루나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 궁금했다.

“은빛 글자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이 두서없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냥 내 머릿속이죠.”

“그렇군요.”

루나는 그 말에 글자를 더 읽고 싶었지만, 아키스가 그녀의 손을 당기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여긴 정말 아름답네요.”

루나는 그의 머릿속을 읽는 대신, 아키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고 어렴풋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사들의 소중한 비밀, 아니면 약점 같은 곳 아닌가요? 나한테 보여 줘도 돼요?”

“당신이 아름다운 곳을 보고 싶어 했으니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겁니다. 이 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당신 머릿속이라서 그런가요?”

루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건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하긴 하더군요.”

“뭘요?”

“이 공간을 허락하는 것. 마법사들의 이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걸 일컬어 그렇게 말합니다.”

“…….”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다’라고. 마법사들의 은어죠.”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심장이 불편할 정도로 크게 뛰었다.

그녀는 간신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들던 복잡하던 생각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자꾸만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루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이런 소중한 공간을 내게 보여 줘서 고마워요, 아키스.”

아키스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조심스럽게 아키스를 바라보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의 큰 손을 작은 손으로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최고로 아름다웠고, 최고로 좋았어요.”

그때, 하늘 위에 떠 있는 아키스의 은빛 글자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루나는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보려 했으나, 그러기 전에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입 맞췄다. 루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에게 스쳤다.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을 놓는 순간, 빠르게 빙빙 도는 은빛 글자가 ‘루나’라는 걸 눈치챘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자리도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예쁜 글자로.

어쩐지 웃음이 자꾸 비어져 나와 참기 힘들었다.

“이제 그만 나가죠. 그리고 오늘 본 광경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아키스는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손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그들 앞에 문이 생겼다. 아키스와 함께 루나는 급하게 문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다시 아까 그 비밀 도서관 안에 서 있었다. 불현듯 자신의 일기장과 똑같은 표지의 책 생각에 루나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런데, 아까 그 고장 난 책 말이에요.”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빨간 표지의 책, 정말 처분하실 건가요?”

루나는 조심스레 그걸 달라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의심 받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처분해야겠군요. 고장 난 마법책을 가지고 있어 봐야 좋을 것이 없지요. 이런 물건 중엔 수상한 것도 많습니다.”

아키스가 손끝을 튕기자, 문간에서 불타고 있던 사각 통에 담긴 횃불이 스르르 다가왔다. 그리고 아키스가 손짓하자 테이블에 쌓여 있던 책 더미들이 불 속으로 처박혔다.

‘아, 안 돼……!’

루나가 속으로 짧게 절규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며 심장을 꾹 눌렀다.

“저, 저 불은 위험하지 않은가요? 진짜 불 같은데…….”

“이건 마법으로 켠 불이라 괜찮습니다. 마법책들은 보통 방어 주문이 걸려 있어 쉬이 소멸하지 않지요. 그래서 마법의 불로 하루를 꼬박 태워야 합니다. 안전하니 걱정 마요.”

“네에…….”

루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 우연일 거야.’

그러면서도 그녀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루나의 일기로 빼곡했던 꿈속의 책과는 달리 텅 비어 있었다. 그냥 표지만 같은 책일 거다.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책에 대한 생각에 둘만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도 루나는 계속 잡념에 빠져 있었다.

“집중해요.”

아키스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속삭였다. 루나가 아까부터 정신을 딴 곳에 빼놓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이. 아키스가 루나의 목덜미를 살짝 아프게 물었다.

“아얏…….”

루나가 작게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아팠지만 야릇하게 목덜미께의 연한 살이 화끈거렸다. 루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아키스를 보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부풀어 오른 야들한 살을 핥았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유령이 되는 기분을 맛봐야 하지?”

루나는 그의 말투에서 서운함을 읽었다.

그녀는 그제야 아키스가 그녀에게 자신의 이공간을 보여 준 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걸 새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결혼 후, 한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도.

“미안해요……. 무시한 건 아니었어요.”

루나는 그제야 아키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몽롱하고 몽환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여전히 그녀를 홀리는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운합니까?”

“네?”

“내가 당신을 두고 출장을 가서 서운하고 그런 건 아니지요?”

아키스의 말에 루나의 심장이 따듯하게 콩닥거렸다.

아까부터 그녀의 기색을 신경 써 주고 있었던 건가. 생각 못한 부분에서 저를 신경 써 주는 것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루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걸 긍정으로 생각했는지 아키스가 루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선물, 사 줄까요.”

그가 나직이 말했다. 낮고 청명한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진중하게 파고들었다.

“선물은 오늘 이미 받았잖아요.”

루나는 작게 대답했다.

“남들이 못 보는 보석요.”

“내 아내가 시인인 줄은 몰랐군요.”

아키스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잠옷 속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 안의 늘씬하고 긴 하얀 다리를 어루만지며 그가 그녀의 눈을 끝까지 응시했다. 그의 뜨거운 손바닥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쓸고 속옷에 달린 레이스를 살짝 당기며 긁었다. 루나는 달아오르는 체온을 느꼈다.

“너무 예뻐서, 계속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요.”

루나는 조금 미안함을 느끼며 그에게 둘러댔다. 아키스는 낮은 신음을 냈다.

“혹시 무서웠습니까?”

루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걱정을 깨닫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는 마법사인 자신을 그녀가 새삼 다르게 보기 시작했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뇨, 아니었어요. 난 그냥…….”

루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아키스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내일부터 혼자 자는 일이 걱정되기도 하고…….”

아키스가 그녀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온 뒤 저택에 혼자 머무는 건 처음이니까…….”

아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커다란 저택에서 그녀 혼자 지내는 일은 어쩌면 외로울 법도 하다. 서운함에 생각이 많아질 만도 했다. 혹시 모르니 떠나기 전에 식솔들에게 그녀를 각별히 대하라 이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키스하죠. 며칠간 못할 것만큼.”

그가 희미한 소유욕이 샘솟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의 입술이 뜨겁게 그녀를 덮쳤다. 순식간에 벗겨지는 잠옷을 느끼며 그녀는 목을 뒤로 꺾었다.

이상하게 그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은 머릿속의 모든 번뇌가 날아갔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충만감이 그녀를 감싸고 바르르 떨게 만들었다.

* * *

이튿날 새벽, 아키스는 서부로 떠났다.

루나도 새벽 일찍 일어났다. 디온과 알렉, 몇몇 하인과 함께 아키스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어스름한 새벽 속에서 알렉이 마차에 짐을 실었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아키스는 루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굳이 나올 필요 없는데요. 왜 더 자지 않고.”

수수한 드레스 차림에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리고 연신 하품을 하는 그녀를 보는 아키스의 눈빛이 따뜻했다.

“가는 거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가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키스는 디온과 알렉이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읍…….”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동시에 아키스를 배웅하기 위해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필사의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흘러가는 구름이며 저택을 새삼 돌아보았다.

결국 알렉이 헛기침을 해야 하나 생각했을 무렵, 입술이 떨어졌다.

“아키스…….”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 민망할 정도로 쪽, 하는 소리가 났다.

루나는 새근대는 숨을 쉬면서 아키스의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그의 옷깃을 잡은 손은 여전히 꼭 쥔 채였다.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게.”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디온에게 말하도록 해요.”

“몸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루나는 부끄러움을 누르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마차가 떠났다. 마차가 출발하는 순간에 루나는 미소 지으며 아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키스를 보내고, 루나는 졸린 얼굴로 다시 침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드레스 차림으로 침대에 폭 엎어졌다.

‘피곤해…….’

어젯밤 늦게까지 아키스가 재우지 않아 졸음이 몰려왔다. 이런 날은 보통 늦잠을 자곤 했다.

그러나 한번 깨니 마음이 스산해서 쉬이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붉은 표지의 책이 생각났다.

‘고민해 봐야 뭐 해. 그 방에 다시 갈수도 없는걸.’

그 방은 아키스의 비밀 공간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루나는 절대 그곳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책이 내 일기장이라 쳐,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 미래는 이미 잘 아는걸. 불행하고, 병에 걸려 죽어 가는 미래. 그리고 수도에서 일어날 몇몇 사건들.’

체스터 후작 부인 사건, 모이라의 드레스의 유행, 새틴의 혼사, 달리아가 노처녀가 되는 것, 테세스의 인기, 독감의 유행……. 그녀가 알게 되는 사실들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기의 끝은 뻔하지.’

세상에 대한 원망, 고통스런 병마로 끝난 삶.

루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미래를 더 알아서 무엇 하나 싶었다.

‘내가 너무 과하게 신경 썼나 봐. 뭐…… 일기장과 표지가 비슷한 것뿐일 거야. 잊자, 이미 그 책은 사라졌을 텐데 생각해서 뭐 해.’

루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 * *

결국 루나는 20분도 자지 못하고 아키스의 서재를 기웃거렸다. 핑계는 있었다. 어제 읽던 역사서의 다음 권을 빌린다는 핑계.

문이 있던 벽은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말끔하고 만질만질하기만 했다.

‘문이 있을 리가 없지. 아키스가 마법으로 불러내는 거니까.’

그녀는 책들을 기웃거리다 아키스의 서재 의자에 앉았다.

‘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침 식사나 해야겠다. 이러다 늦겠어. 하인들이 준비할 텐데.’

루나는 서재 책상에 두 손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어?’

드르륵, 하는 긁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빈 벽에 하얀 금이 생기더니, 곧 그 균열을 따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루나는 눈을 의심했다. 곧이어 균열을 따라 벽을 밀어내듯 보이지 않던 문이 생겨났다. 분명히 어제 아키스가 보여 준 문과 똑같았다.

‘아키스의 비밀 도서관이자 이공간으로 들어가는 문…….’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생겨난 거지?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기서 그냥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이라구.’

그때였다.

철컥― 서재 문고리가 돌아갔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곧이어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듯, 상대가 문 바깥쪽에서 문을 노크했다.

“공작 부인, 혹시 여기 계십니까?”

디온의 목소리였다. 루나는 비밀 문을 한 번 바라보고 서재 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공작 부인께선 어딜 가셨는지…….”

침실에 공작 부인이 없다는 시녀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은 건 알렉이었다. 그는 격식에 맞춰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아마 울프의 먹이를 주고 계신가 봅니다. 아침이면 종종 직접 울프를 예뻐하곤 하시니까요.”

디온은 선뜻 제가 루나를 데려오겠다 말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정원에도 없었다. 그리고 2층 서재를 지나가다 디온은 서재 문이 닫혀 있는 걸 발견했다. 문고리를 돌려보니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에 당황한 것도 잠시, 디온은 공작이 부인의 서재 출입을 허락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디온은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렸다.

“공작 부인, 혹시 여기 계십니까?”

안에선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열쇠로 문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곧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히 공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곧이어 문이 작게 열리더니 루나가 빨개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빠끔 얼굴을 보여 주었다.

“부인?”

“잠깐…… 혼자 있고 싶어요.”

루나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디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공작 부인이 공작이 없는 서재에서 혼자 울고 있다니?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에요. 조금 있다가 나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식사는 다시 준비하면 되니 걱정 마시고 천천히 나오십시오.”

디온은 딱딱하게 굳어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디온은 벙찐 표정이었다.

알렉이 식당에서 나오며 물었다.

“부인을 못 뵈셨습니까?”

“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계십니까?”

디온은 알렉을 향해 몸을 낮추고 속삭였다.

“공작 부인께서 공작님의 서재에서 홀로 울고 계셨습니다. 맙소사, 공작님이 며칠이나 출장을 가신 것이 충격이셨던 모양입니다.”

“공작 부인께서 공작님을 그렇게나…….”

알렉도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그는 디온에게 급히 물었다.

“혹시, 심하게 울고 계셨습니까?”

“꾹 눌러 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제게 우는 모습을 보인 걸 정말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셨죠.”

“벌써 공작님이 그리워지셨나 봅니다.”

결혼식 이후, 공작이 그녀에게 몇 번이나 각별히 신경 쓰는 걸 목격한 그들이었다.

최소한의 품위를 갖춘 여자만 데려 와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자신을 좋아해 주는 여인을 아내로 맞으시다니.

아키스가 부모의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자란 건 알렉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염려도 되고, 감동을 받기도 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당찬 분인 줄만 알았는데, 저도 놀랐습니다.”

공작이 없는 동안 그녀를 살뜰하게 돌봐야겠다. 그 순간 그들은 굳게 다짐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공작 부인께서 기운을 내서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좋아하시는 체리 파이라도 구워야겠습니다. 요리사, 요리사!”

알렉이 부리나케 말했다.

“저번에 보니 과일 향 홍차를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홍차를 내려 드리며 기운을 북돋아 드려야겠습니다.”

집사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후아…….”

디온이 서재 앞을 떠나자, 루나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디온 앞에서 보인 표정은 당혹한 것 반, 정말 울고 싶은 마음이 반의반, 그리고 나머지는 연기였다.

제 주인의 아내의 우는 모습.

이만큼이나 사내를 쫓아내기 적절한 방법이 또 있겠는가. 예상대로 디온은 바로 서재 앞을 떠났다.

루나는 자신의 앞에 떡 버티고 선 문제를 보았다. 마법사의 비밀공간이 나타나 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없애…….”

루나의 눈앞에 나타난 아키스의 비밀 문은 눈치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빨간 표지의 책을 다시 보고 싶다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나타나길 바란 건 아니라고…….”

루나는 문으로 다가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방법이 숨겨져 있다든가…….”

그러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돌아가잖아?’

문은 잠기지도 않은 듯 수월하게 열렸다. 그녀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었다 닫으면 사라진다든가.’

그리고 루나는 문을 바로 닫으려 했다.

“어? 어?”

그 순간, 그녀는 문에 빨려 들어갔다. 말 그대로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아, 안 돼……!”

루나는 순식간에 아키스의 도서관 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몽환적인 천장과 고풍스런 구조. 어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도서관이었다.

“미치겠네…….”

루나는 바로 등을 돌려 문을 잡았다. 열려 했으나, 문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키스의 말이 떠올랐다.

‘조심하십시오. 이 안은 내가 마법을 걸어 둬서 구조가 자주 바뀌거든.’

루나는 한숨을 크게 포옥 쉬었다. 눈앞이 다 캄캄했다.

‘나, 이 안에 갇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조난당하면 언젠가 아키스가 들어와 구해 주긴 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든 자력으로 나가야 했다. 이 안에 들어온 걸 알면 아키스가 크게 화를 낼지 모른다. 자칫하면 사이를 되돌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이가 어제 어떻게 나갔지?’

그 순간, 반짝이는 작은 빛이 루나의 시야를 간질였다.

“이 빛은…….”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홀린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딱 열 걸음.

열 걸음 앞에는 어제 아키스가 책을 버렸던 사각 상자에 들어 있는 마법 횃불이 불타고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본 루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왜 이 책만 타지 않은 거지?”

그녀의 꿈속의 일기장과 똑같은 붉은 표지의 책.

그 책만 불타지 않고 멀쩡했다.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 온전한 제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어제 아키스가 같이 던져 넣은 다른 책들만 무심한 재가 되어 불꽃의 바닥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루나는 더 이상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꺼내지?’

그녀는 조심스레 불꽃 위로 손바닥을 가까이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 뜨거워야 할 불꽃이 서늘하기만 했다.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조금 더 손을 밀어 넣었다.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불이구나.’

불꽃은 그녀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녀의 살갗을 해하지 않았다.

루나는 눈을 딱 감고 책을 집어 올렸다. 빨간 표지의 책은 가까이서 보니 꿈속의 일기장과 정말 똑같았다. 그녀는 책을 품에 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또다시 무언가가 반짝였다. 루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문이야.’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눈앞에 또 낯선 문이 나타났다. 루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여긴, 아키스의 마음속이잖아…….”

무수한 단어의 밤하늘, 금과 은이 번쩍이는 글씨의 세계. 아키스가 마법 주문을 저장해 두는 공간이자 그의 마음속인 곳.

루나는 잠시 상황도 잊고 숨죽이고 그 풍경을 감상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아키스조차 모르는 언어…….’

루나는 은색으로 된 아키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구경하는 기분…….’

은빛 단어들은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다 보니 나름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단어는 굉장히 많이 중복되고, 어떤 단어는 굉장히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 자주 생각하는 단어는 개수가 많은 건가……?’

루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생각했다.

그러다 낯선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그 단어를 입속으로 읽었다.

루나.

그렇게 읽는 단어였다.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자세히 보니 그 단어가 몇 개나 있었고, 글자도 크고 빠르게 움직였다.

같이 사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괜스레 부끄러웠다.

‘아……!’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니, 눈앞에 또 다른 문이 생겨 있었다. 루나는 책을 끌어안은 채 문이 사라질 새라 급하게 뛰었다.

‘제발 나가는 문이어라……!’

그녀는 간절히 기원하며 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광경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키스의 진짜 서재,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제 품 안의 붉은 표지의 책을 보았다.

“문이 사라졌어…….”

품 안의 책이 아니라면 루나는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인 줄 알았을 것이다. 루나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비밀 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루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루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급히 자신의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짧은 걸음 동안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루나가 떨리는 손으로 책을 펼치려는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나는 소파 아래로 급하게 책을 숨겼다.

“공작 부인, 여기 계셨군요. 괜찮으십니까?”

비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파우더 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욕이 없다면 아침 식사를 물리라 할까요?”

그러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가솔들이 힘들게 준비한 식사인 것도 그렇고,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뇨, 갈게요. 식사에 늦어 미안해요.”

루나는 소파를 힐끔하며 걸음을 옮겼다.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는 척…….’

알렉과 비아, 웬일로 디온까지 식당에 모여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그날따라 소란이었다.

“부인, 혹시 심심하시면 오후에 드레스 숍에 가서 쇼핑을 하시면 어떻습니까? 저번에 마음에 들어 하신 디자이너 모이라의 숍에 놀러 가시면 어떨까요?”

디온은 아까 그녀가 서재에서 우는 모습을 본 것이 신경 쓰였는지, 평소의 몇 배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괘, 괜찮아요. 오늘은 그다지 외출하고 싶지 않아요.”

거기다 오늘따라 다른 고용인들은 또 왜 이렇게 친절하단 말인가.

“오후에 마사지사를 불러 드릴까요? 피부를 매끈매끈하게 만드는 마사지가 수도에서 유행이라더군요. 어제 외출했다 다른 집안의 레이디스 메이드에게 들었답니다.”

비아까지 그런 말을 했다. 루나는 고개만 갸웃했다.

“저번에 가향 홍차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새로 들여온 과일 향 홍차를 내렸답니다. 맛이 어떠신지요?”

평소에는 공작의 시중만 드는 알렉마저 홍차를 직접 내려 대접했다. 루나는 그들의 과한 친절에 애써 미소 지을 뿐이었다.

‘빨리 가서 책을 보고 싶은데…….’

공작이 없는데도 저에게 마음을 써 주는 게 고마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루나는 겨우 새 모이만큼 식사를 하고 냅킨으로 입가를 찍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오후에 방에서 책을 좀 읽고 낮잠이나 자고 싶어요. 게을러 보일까 봐 부끄럽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요.”

루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식솔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더니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짠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표정이었다.

“…….”

루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했다.

파우더 룸으로 돌아온 루나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소파 아래 숨겨 둔 책을 꺼냈다. 루나는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책을 살폈다. 붉은색 달문양의 표지. 꿈과 같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책을 펼쳤다.

‘……역시…….’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책은 아키스가 보여 준 그대로 텅 빈 백지였다.

‘……내 일기장일 거라 생각한 게 바보 같네…….’

루나는 피식 웃고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싶었다. 그녀는 책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그다음 페이지를 끝까지 신중하게 넘겨보았지만 역시 모두 백지였다.

‘다시 불 속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그래야겠지?’

루나는 허탈감을 느끼며 뒤늦게 아키스에게 희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책에서 희미하게 빛이 났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책의 첫 페이지에 천천히 글자가 떠올랐다.

<판독 완료.>

“……응?”

곧이어 다음 글자가 떠올랐다.

<사용자 확인― 사용자의 성별이 여성입니다.

책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기능을 시작합니다.>

고대어 글자가 떠올랐다.

루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 책을 집어 던졌다.

“노…… 놀래라…….”

꿈속이랑 똑같았다. 갑자기 글자가 떠오르는 경험. 꿈속과 다른 점이 있다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점이었다. 루나는 손을 가늘게 떨며 다시 책을 펼쳤다.

<사용자의 언어 능력이 최상입니다. 모든 기능이 사용 가능합니다. 사용자 등록을 위해 책에 피를 묻혀 주세요.>

루나는 눈을 의심했다. 피를, 어쩌라고?

“피? 내 피?”

루나는 자신의 손을 보고, 책을 다시 한번 보았다.

<사용자의 마력 정보가 필요합니다. 피를 주세요.>

“뭐 이런 무서운 말을…….”

루나는 질려서 중얼거렸다.

<사용자가 등록되지 않으면 보안을 위해 책은 폭발합니다.

첫 번째 페이지에 피를 묻혀 주세요. 마력 정보가 필요합니다.>

지금 뭐라고? 폭발? 루나는 기겁했다.

‘폭발하면 큰일이지…….’

이건 더 무서운 말이었다. 루나는 고민하다가 서랍을 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게 내 일기장이 맞는지 아닌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서랍에는 얼마 전 새로 구입한 보석 브로치가 있었다. 루나는 브로치 끝으로 아주 살짝 피를 내어 책의 첫 번째 페이지에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입력되었습니다. 최후 판독 완료. 마력 정보 입력 완료.

기능합니다.>

곧 책에는 새로운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고대어였다. 다양한 종류의 고대어들이 섞여 있었다.

루나는 숨죽이고 글자를 읽었다.

* * *

<몹시도 유능한 천재인 나는,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유희를 위한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세상 모든 책 중 가장 재미있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만들었으니까.

지금부터 여기 적힌 이야기는 역사와 실화를 막론한 이야기이다.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일 테니, 남는 시간에 천천히 즐기도록 해라.>

지금까지 떠올랐던 모든 글자가 지워지고 딱 이 글자만 떠올랐다.

루나의 핏방울은 어느덧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루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떠오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루나는 책을 덮어 버렸다.

“……진짜 뭐야 이 책?”

그녀는 요모조모 책의 곳곳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펼쳤다.

“아…….”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몇 글자 외에 텅 비어 있던 책이 새로운 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루나는 책의 첫 페이지를 읽었다.

<그녀의 이름은 월플라워 부인이다.

월플라워 부인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영리했다.>

첫 줄에 쓰인 내용이었다. 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어서 빠르게 책을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루나는 입을 떡 벌렸다.

‘통속 소설이잖아?’

루나가 평소에 즐겨 읽는 여인들의 규방 취미인 통속 소설, 일명 로맨스 소설. 영락없는 그런 소설이었다.

루나는 어이가 없음을 느끼면서도 빠르게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훑어만 보려던 것이 내용이 꽤 정교해서 계속 집중해서 읽게 되었다. 순식간에 몇십 페이지나 책을 읽은 루나는 책을 덮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거, 엄청나게 재밌다.’

지금껏 루나는 로맨스 소설, 통속 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그런 루나가 보기에 이 책은 상당히 잘 쓴 책이었다.

내용은 심플했다. 월플라워 부인이라 불리는 한 귀부인이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고대이기에, 그녀는 마법사 출신이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가문의 빚 대신에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시집가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자에게는 이미 결혼 전부터 오래 만나 온 성질 고약하고 못된, 대단한 미녀이자 정부인 ‘아이비’가 있었다.

정부, 아이비는 집안에 들어앉아 월플라워 부인을 도리어 첩 취급하며 남편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한다.

초반 내용은 그 정부가 월플라워 부인을 끔찍하게 구박하는 내용이었다. 몇몇 개의 에피소드는 루나가 봐도 치가 떨릴 만큼 악독했다.

‘아, 답답해. 해결이 보고 싶어…….’

원래 단순한 것보다 해결이 될 듯 말듯 고난과 역경이 느껴지는 것이 더 자극적이었다.

1장의 길이는 꽤 길었다. 남편과 아이비의 혹독한 구박을 참다못한 월플라워 부인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데서 끝났다.

‘세상에 이렇게 못된 사람들이 있다니.’

월플라워 부인이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하던 아름다운 하얀 백마. 일부러 그 백마의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백마를 안락사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월플라워 부인이 공들여 준비한 파티의 메인 디쉬를 죽은 백마의 고기로 바꿔치기한 에피소드에서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자극적인 장면들이 나왔다. 월플라워 부인의 남편의 인성은 쓰레기였지만 얼굴은 대단한 미남자로 묘사되었다.

얌전하고 조용한 여주인공, 월플라워 부인에게 남편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아이비는 더욱더 패악을 부린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계속 보게 하는 중독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장이 끝나고는 이런 글귀까지 떠올랐다.

<다음 편은 하루가 지난 후, 열람 가능합니다.>

루나는 정말 울면서 웃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고대인의 오락 도구고, 이 소설은 연재되는 책이라 이거지?”

자동으로 글을 창작해 주는 책이라니, 이 책은 대단한 마도구였다.

‘그런데, 나한테나 보물이려나……?’

루나도 고대어 책을 다뤄 본 적 있어 잘 알았다.

마법서나 과학서가 아닌 고대어 책은 그다지 가치 없는 취급을 받았다. 예전에 숙부가 고가에 산 고대의 마법 청소책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이 속아서 고대어 책입네, 하고 속아 구입하곤 했다.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야 아무 가치 없이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아니, 이렇게까지 자극적일 필요가 있나?’

소설 내용은 배경이 고대 마법 세계인 것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고, 도리어 본능적이고 감각적이었다. 그러니 루나는 자연히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내일 다시 펼쳐 보자.’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다행하게도 귀한 마법서나 그런 건 아니었구나. 아키스에겐 가치 없을 물건이야. 물론, 그의 허락 없이 책을 빼 온 건 잘못이지만…….’

심지어 그는 이 책을 발동시키지도 못했다. 루나가 이 책에 손대기 전까지 이 책은 그저 하얀 백지였다.

‘맞아, 어차피 아키스도 이 책은 사용하지 못해.’

루나는 책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소설 1장을 다 읽고, 이 책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서야 의구심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잖아?’

분명히 루나가 여성이라 발동한다는 고대어 글자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내가 여자라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 맞지? 한낱 유희거리라도 이 책은 분명히 고대어로 만들어진 고대 마법사의 책이야. 그런데…….’

여자는 고대어를 할 수 없다 배웠다. 고대어를 몇 글자만 배워도 큰 죄였다.

그런데, 왜?

그녀의 동작이 굳었다.

‘어떻게 여자만 읽을 수 있는 고대어 책이 있는 거지?’

루나는 의문을 느꼈다.

살아온 세상에 대한 의문. 그건 본능적인 거부감이기도 했다.

루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 * *

이튿날부터 루나에게는 새로운 일상이 생겼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파우더 룸에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나왔다.”

책에 적혔던 대로 다음 날, 뒷장에는 2장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루나는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이 마약 같은 소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2장은 더욱더 흥미진진했다.

그간 성질을 죽여 살았지만 여주인공인 월플라워 부인은 사실 대단한 마법사였다.

백마 사건 이후로 인내심이 완전히 끊긴 월플라워 부인은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남편의 정부이자 악녀인 아이비에게 반격을 시작한 월플라워 부인은, 아이비가 그녀를 망신 주기 위해 준비한 티 파티에서 오히려 아이비가 준비한 다과를 모두 쓴맛 나는 것으로 바꾸어 아이비에게 큰 망신을 준다.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 받자 완벽하게 준비한 알리바이를 들이대 또 한 번 그녀를 망신 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케이크를 던지며 아이비가 패악을 부리자, 오히려 자신이 먼저 악녀 아이비의 뺨에 케이크를 던져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거기다 새로운 남자 캐릭터인 ‘우드’라는 이름의 절세미남 기사까지 등장했는데, 그 기사는 기혼자인 여주인공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뽐냈다. 2장 또한 숨 쉴 틈 없이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매 순간마다 사건이 계속 터지는 데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몹시 자극적이고 원초적이라 정신없이 보게 되었다.

‘와, 2장도 진짜 재밌잖아…….’

루나도 웬만한 로맨스 소설은 다 읽었지만, 이만큼이나 막 나가면서도 개연성을 지키는 소설은 처음이었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순식간에 2장을 읽긴 했는데, 문제는 1장 내용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재미있는 소설을 딱 한 번만 보여 주는 마법 책이라는 거지? 고대 여자 마법사들의 유희거리란 정말 신기하기도 하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대어로 읽은 책 내용은 기억 속에 매우 오래 남는다는 것이었다.

‘으음……. 거기다 쓰인 고대어가 뒤죽박죽이네? 이래서야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보지도 못할 책이군.’

분명히 1장은 적의 언어였는데, 2장은 은의 언어였다.

‘아까워, 사라지게 할 수 없어.’

루나도 어쩔 수 없는 통속 소설 애호가이기 때문에, 이 재미있는 소설을 혼자 보기가 너무너무 아까웠다.

‘아, 남들한테도 보게 해 주고 싶다.’

루나의 눈에 파우더 룸 한편 책상에 놓인 최고급 타자기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아키스가 타자기 사용법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주 사용하라 했었다. 루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기억하는 대로 1편과 2편의 내용을 타자기로 치기 시작했다. 서점 일과 번역가 일을 하느라 문장을 다루는 데는 몹시 익숙한 일류 번역가 출신의 그녀였다. 소설 내용을 완벽하게 복원하진 못해도 구색을 맞추어 쳐 내는 일쯤은 그녀에겐 몹시 쉬웠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함께 감상을 나누고 싶어…….’

그런 마음이 새록새록 생겨났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래 귀부인 친구가 없었다. 루나는 아쉬움을 눌러 참았다.

‘도대체 이 책은 뭘까?’

* * *

“역시 공작 부인이 이상하시군.”

고용인들은 최선을 다해 루나를 돌봤지만, 그녀의 울적한 모습을 공작의 부재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서부 저택 도착. 목표물 수색 중.

던전도 들렀다 올 예정이라 일정이 길어질 가능성 있음.]

디온은 공작이 서부 지대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아키스의 명령으로 집안일을 전보로 이틀에 한 번씩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 조금 쓸쓸해하시지만 공작가에는 별일이 없습니다.

떠나신 날에는 공작님의 서재에서 홀로 우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하십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디온은 공작 부인께서 공작을 그리워하시며 약간은 울적해하신다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하인을 시켜 전보국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 * *

[검은 머리에 천재적인 번역 능력을 가진 미소년, 열여덟~열아홉 살 정도의 나이. ‘루’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소년을 찾아내는 이에게 후하게 포상한다.]

아키스가 서부 정보 길드에 의뢰한 내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작의 부하들은 서부 거리를 헤매며 소년에 대해 들쑤시고 다녔다.

그러나 서부에서도 소년의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휘멘, 그놈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키스는 골몰히 생각했다. 그는 지금 서부의 휘멘의 빈 저택에 무단 침입한 상태였다.

서부 지역은 항상 메말랐고 소란스러웠다. 서부는 다른 곳들에 비해 마력의 흐름이 빠르고 풍부했다. 고대에는 마법사들이 연구를 위해 둥지를 틀던 곳이었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연구소 안에 비밀 도서관을 만들어 수많은 책들을 쓰고 보관했다. 고대어로 적은 책은 그들이 마법을 저장하고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서부에서는 수천 개의 던전들이 발견되었고, 마도서들이 끝없이 발굴되었다. 때때로 들어가기 까다로운 던전들이 발견되면 직접 탐사를 하기도 했다.

고위 마법사들은 서부에 연구실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휘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키스는 휘멘의 집 위치를 알았고, 문을 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놈이 이렇게까지 안 나온다는 건 대단한 던전을 찾아낸 모양이군.’

한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듯 집 안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감돌았다.

그날 밤, 기억이 날아간 아키스의 유일한 단서 중 하나가 휘멘이었다.

처음 아키스는 휘멘을 찾아 단서를 물으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곳에 온 후 계속 신경이 팽팽하고 날카로웠다. 이제는 슬슬 ‘이 자식을 잡으면 가만 안 둔다’ 이 정도까지 생각이 발전하고 있었다.

“집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덫을 놓는 수밖에.”

아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휘멘 정도의 마법사를 사로잡을 덫. 그러기 위해선 꼬박 이틀은 준비해야 했다.

“공작님, 수도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그때, 밖에서 대기하던 아키스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아키스는 전보를 펴 보았다. 루나가 쓸쓸해한다는 내용과, 공작가에는 별일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울었다고?’

아키스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며칠 자리를 비우는 건데, 조금도 티 내지 않고 씩씩해 보이던 그녀가 그렇게 슬퍼할 줄이야. 심장이 지끈했다.

‘한 달도 안 되어 돌아갈 텐데 왜…… 내가 외롭게 만든 건가?’

사실 아키스도 도착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은근히 그녀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나 그건 비이성적인 일이었고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그가 없는 동안 그녀가 어디로 도망갈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떠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디온의 전보는 아키스의 가슴속을 쿡쿡 찌르던 감정에 불을 질렀다.

아키스는 급하게 휘멘의 책상에서 마음대로 그의 펜과 종이를 이용해 답장을 썼다. 루나를 위로하기 위해 돈을 얼마든 써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루나에게도 메시지를 썼다.

“이걸 당장 디온에게 보내라. 그리고 아내 앞으로는 이 메시지를 보내도록 해.”

아키스는 나직이 명령했다. 그리고 호위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모여라.”

아키스는 그들에게 우아하게 손짓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오늘부터 수면은 없다. 모든 업무를 분 단위로 쪼개서 마치고 돌아간다.”

아키스의 기사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저, 그런데…… 오랜만에 서부에서 오신 거라 볼일이 많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수도에 급한 볼일이 생겼다. 그쪽을 우선시해야 해.”

아키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했다.

어차피 아키스가 ‘아내가 너무 보고 싶으니 빨리 집에 가야겠다.’라고 말했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와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 *

그날도 루나는 요즘 푹 빠져 있는 <월플라워 부인>을 읽고 있었다.

어느덧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이제 황실까지 계략이 엮이고 있었다.

‘월플라워 부인이 상속 받을 땅이 마나 광석이 나와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니…… 이런 반전이 있었네.’

루나는 손에 땀을 쥐며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약간 허무감마저 몰려왔다.

‘그나마 읽을 책이라도 있어 다행이야.’

아키스가 떠난 후 하루 이틀은 괜찮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 살아온 세월이 참 길었음에도 조금씩 외롭기 시작했다.

‘그이는 잘 지내고 있나? 밥은 챙겨 먹었으려나?’

그와 진짜 부부도 아닌데, 그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혼자 밥 먹는 것도 지겨워.’

루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요새 한동안 계속 만지작대던 수예품도 거의 다 완성되었다. 비아는 루나의 빠른 바느질 실력에 감탄했다.

‘아키스가 없는데도 아무도 내게 함부로 대하지 않아. 오히려 더 공손하지. 명문가의 사람들이라 그런가 정말 예의 바른 사람들이야.’

요즘 공작가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를 만큼 루나에게 잘해 주었다.

식사 때면 알렉이 직접 시중까지 들며 새로 담근 잼이다, 방금 구운 고기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시중을 드는지.

하지만 무엇도 근본적인 외로움을 채워 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몸도…….’

루나는 아키스의 단단한 품을 떠올리고 뺨을 붉혔다.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루나를 단 하룻밤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아키스와의 성관계는 참 이상했다. 그와 결합된 순간은 쾌락도 쾌락이었지만, 온몸을 채우는 충만감이 느껴졌다.

외떨어진 세상에 자신이 혼자라는 걸 잊고, 그와 하나라는 게 느껴져서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영혼까지 떨릴 정도로 좋았다.

루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여자보다 조금 거친 손. 이 손이 빈손인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그의 손을 잡는 게 몹시도 익숙해졌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촉감에 너무 익숙해져서. 마음보다 몸이 먼저 그의 것이 되어 버리고 그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버려서. 그럴지도.

달콤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걱정스런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아키스의 마음속에 몰래 들어갔다 나온 걸 들키진 않았겠지. 그것도 좀 걱정돼…….’

그리움은 그리움이고, 죄책감은 죄책감이었다. 그의 비밀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온 걸 들키지 않을까 다소 걱정되었다.

아키스가 어차피 버린 책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여자만 읽을 수 있는 책이니까. 그게 루나가 가진 면죄부였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 부인.”

그녀의 시녀, 제인의 목소리였다.

루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인이 은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공작님께서 전보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래?”

뜻밖의 소식에 루나의 눈이 커졌다.

전보는 중요한 일에나 쓰는 거 아니었나. 루나는 은쟁반 위의 전보 봉투를 뜯었다.

단 한 줄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보고 싶으니 가능한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그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줄의 파급력은 컸다.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보고 싶다니…….’

루나의 심장이 뛰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의 비밀 도서관에 들어갔다 나온걸 알았다면 이런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나?’

피가 빠르게 돌 만큼 좋은데, 저도 모르게 속내와는 영 딴소리가 나왔다.

“며칠이면 된다더니, 뭐 이런 메시지까지…….”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주변이 온통 달콤한 광경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갑자기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것처럼 들떴다. 루나는 몇 번이고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배시시 고였다.

루나는 한층 나아진 기분으로 바람을 쐬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 마침 루나가 파우더 룸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디온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나오셨군요, 부인. 오늘은 쇼핑을 가시면 어떻습니까?”

“쇼핑이요?”

“공작 부인께서 지루하실까 봐 공작님께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제게 재미있게 즐기실 만한 거리를 찾아보라 하셨습니다. 물론, 금액은 부인의 품위 유지비와는 별도로 공작님의 비용에서 지출됩니다. 의상실 구경은 어떠십니까? 결혼식 이후 새 드레스를 몇 벌 맞추지 못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하지만 지금 딱히 입고 있는 옷에 불편함도 없고…….”

“그럼 의상실에 놀러 가 보시면 어떻습니까? 옷을 맞추지 않아도 귀부인들은 숍에 마련된 살롱에서 차도 마시고 디자이너의 접대도 받고 하지요. 그 모이라라는 신진 디자이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시내 구경도 좋아하시니까요.”

아키스의 메시지를 받은 후라서 그런지 그 말이 몹시 매력적으로 들렸다. 시내 구경도 하고 새 드레스 구경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도록 할게요.”

* * *

“아, 당신은…….”

루나는 모이라의 의상실 앞에서 낯익은 여성과 마주쳤다.

결혼식에서 만났던 여성이었다. 아무도 부케를 받아 주지 않으려 했을 때 부케를 받아 주려 한 영애.

‘이름이 페니……? 라고 했나.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나네.’

듣기로 평판이 나쁘다고 했던가, 결혼식 이후로도 간혹 떠오르곤 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페니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그녀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의 미인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절 만나서 부인에게 좋으실 일이 없을 텐데요.”

페니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그러나 루나는 이상하게 그 모습에 이유 없이 정이 갔다. 겉은 천사 같아도 속은 시커먼 새틴을 평생 접하고 자란 그녀는 무뚝뚝한 사람에게 더 신뢰가 갔다. 중요한 건 사람의 내면이니까.

“어쨌든, 그날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니 인사라도 하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난 결혼 전에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아 그다지 친한 사람들이 없거든요.”

루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친해지고 싶다, 호감이 있다, 이 뜻을 은근히 내비친 말이었다. 그러자 페니의 얼굴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어?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혹시 부끄러워하는 건가?’

루나는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오늘은 다음 일정이 있으니, 이만 실례하죠, 공작 부인.”

페니는 루나를 한번 노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타 버렸다. 그리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벨벳과 은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마차가 떠나갔다.

‘……저 영애, 부자인가 봐.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네.’

루나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 *

“선생님, 그러니까 저 영애를 고객으로 받으면 곤란해지실 거라니까요.”

도제는 오늘도 디자이너 모이라에게 잔소리 중이었다. 워낙 태평하고 예술가 기질이 농후한 모이라는 오늘도 침착하게 성공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아휴, 안 그래도 웨딩드레스를 만들 때 먼저 부른 금액을 훌쩍 초과해 버리셔서 공작께도 밉보이셨잖아요. 정말, 공작 부인을 고객을 단골로 잡을 기회였는데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십니다. 선생님 재능이 아까워요!”

“난 그 웨딩드레스 만든 것, 후회 없다니까? 청초한 공작 부인에게는 그 웨딩드레스가 딱이었어.”

“그거야 알죠. 그치만 결국 웨딩드레스값도 얼마 못 받으셨구…….”

“그건 그렇고, 좀 재미있는 손님들은 안 오나? 하아, 공작 부인 같은 사람만 오면 100벌이라도 짓겠는데.”

모이라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재능이라면 그 누구도 못지않은 그녀였지만 성격이 문제였다.

윗사람에게도 뻗대느라 자기 스승하고도 틀어졌고, 흥미 위주로 옷을 제작하고 싶어 했다.

얼마 전, 그래도 운 좋게 공작 부인의 웨딩드레스를 제작했다. 이제 그 웨딩드레스를 시작으로 잘 풀릴 참이었는데 일을 그르쳐 버린 것이다. 비용도 넉넉히 부르지 못한 데다, 예산 비용을 초과해 공작 부인에게 금액 이야기까지 꺼내 버렸다.

덕분에 모이라는 결혼식 이후, 공작에게 언짢음을 담은 편지를 받았다.

[초과 대금은 넉넉히 지불할 테니, 비용 상세 내역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보내도록 하시오.

그런데 내 아내에게 금액 걱정을 시키다니, 나는 이 일이 상당히 불쾌하군.]

공작의 편지를 읽은 모이라와 도제는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그리고 공작의 비위를 거스른 탓인지 그날 이후 공작 부인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아, 저도 편견은 없지만…… 오늘 온 페니 영애의 드레스를 맞춰 준걸 알면 공작 부인께서 더더욱 마음이 상하실 거라고요.”

거기다 오늘은 페니라는 평판 나쁜 영애까지 덥석 고객으로 받아 버렸다. 도제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선생님은 진짜 그놈의 성격 좀…….”

“아, 아. 잔소리는 그만.”

모이라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의 종소리가 울렸다.

“모이라, 있나요?”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모이라와 도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공작 부인?”

루나가 해맑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차 한 잔 얻어 마시러 왔어요.”

* * *

신진 디자이너인 모이라의 의상실은 상대적으로 소박했고, 살롱도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살롱은 청결했지만, 우드 톤의 가구와 하얀 식탁보로 이루어져 낡은 느낌을 주었다. 궁궐 같은 다프의 부띠끄와는 확연히 달랐다.

“누추한 곳에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도제가 곧 급히 차를 내왔다. 루나는 자리에 앉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살롱에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나요?”

“아, 솔직히 말해 전 아직 유명한 편이 아니라서 살롱이 조용하답니다.”

모이라의 솔직한 대답에 도제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이럴 땐 ‘원래 오가는 손님이 많은데 오늘만 한산하다.’ 하고 허세를 떨어 줘야 맞을 텐데 저 솔직함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차피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될 사람인데, 앞으로 당신 숍은 굉장히 호화로운 살롱을 가지게 될걸요.’

루나는 모이라의 대답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아까 밖에 보니 다른 손님이 있던데요. 붉은 머리의…… 이름이 페니라던가?”

“아, 페니 영애 말씀이시군요. 네, 방금 다녀가셨습니다.”

“그녀가 여기서 드레스를 맞췄나요?”

도제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모이라에게 빠르게 눈짓했다.

공작 부인이 좋게 보는 곳에서 평판 나쁜 영애가 옷을 잔뜩 맞췄다 하면 공작 부인이 뭐라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도 도제의 간절한 눈짓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이라는 눈치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공작 부인이 입었던 웨딩드레스가 몹시 예뻤는지 비슷한 디자인으로 맞춰 줄 수 없느냐 문의하기에 맞춰 주었습니다. 똑같은 디자인으로요. 그리고 추가로 드레스를 세 벌이나 계약하고 갔어요.”

이제 도제는 내 뒷목!이라고 소리 지르며 쓰러지고 싶었다. 똑같은 드레스를 맞췄다는 것까지 실토할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루나는 그 말에 조금 들떴다. 그 영애가 자신이 입은 웨딩드레스가 예쁘다 생각해 주었더니 왠지 좋은 일 같았다.

“아 그래요? 그 비싼 드레스를?”

“완전 같은 건 아니고, 보석 장식은 좀 뺐어요. 디자인도 페니 영애에게 맞게 약간 변형해 주었고요. 부인의 웨딩드레스는 하나뿐이니까.”

모이라의 말에 루나는 미소 지었다.

“페니 영애가 말하기를, 공작 부인이 결혼식 날 몹시 아름다우셨다고 하더군요.”

이번엔 루나가 괜히 민망해졌다.

누군가 뒤에서 제 칭찬을 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반대로 욕을 먹은 적은 많았다. 주로 새틴과 그 추종자 무리들이었는데, 거기다 새틴의 문제는 앞에서도 욕을 하고 뒤에서도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페니 영애는 어떤 영애인가요? 혹시 아는 일이 있나요?”

마리벨 후작 부인은 그녀에 대해 정색하고 평판이 나쁜 영애라 했다. 그 예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의 허물을 궁금해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디자이너들이 사교계의 소식이 밝은 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난 아직 사교계의 인사들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그러니…….”

모이라와 도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보았다.

“그 유명한 페니 영애 사건을 모르세요?”

“그게 무슨 사건인데요?”

루나의 일기장엔 수많은 큼지막한 사건들이 많이 적혀 있었는데, 페니 영애 사건은 본 적 없었다. 미래의 루나가 모르거나 흥미를 가질 정도의 사건은 아닌 듯했다.

어린 도제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시, 실례합니다, 부인. 혹시 페니 영애가 이곳에 오는 게 싫으시다면 저희가 조치를…….”

“내가 왜 그걸 싫어하나요?”

모이라는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털어놓았다.

“페니 영애는 공작님과 염문을 뿌린 일로 유명해요. 정확히 말하면 공작님께 매달려 고백했다 차였는데, 그전엔 사귀었다는 소문도 있고요.”

루나는 귀를 의심했다. 연인이, 뭐?

“……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키스에게 친밀하게 지낸 여인이 있었다니?

“……설명 좀 해 줄래요?”

“그녀가 공작의 침실에 알몸으로 침입했다 쫓겨난 여자예요. 거기다, 공작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들켰지요.”

모이라는 고민하는 듯하다 결국 솔직하게 자신이 아는 사실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루나가 경악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모이라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페니 영애는 평소 행실이 몹시 나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공작과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그 친분을 이용해 공작에게 접근해 끊임없이 들이대다 사교계의 여왕 달리아의 증오를 샀다.

달리아와 페니는 원래 집안도 좋고 미모도 뛰어나 몹시 친한 사이였는데, 그 일로 페니는 달리아에게 단단히 찍혔다.

어느 날, 페니는 공작에게 러브레터를 보냈고 달리아에게 그 사실을 들켰다. 공작에게 러브레터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걸 빼돌린 달리아는 사람들 앞에서 페니를 망신 주었다.

“그다음이 더 큰 문제였죠. 페니 영애는 충격을 받아 술을 마시고 저질러선 안 될 일을 저질렀어요. ……그것도 황실 무도회 날에요.”

“안 될 일이라뇨?”

“……사랑의 도피요. 제국에서 영애와 영식들이 가장 하면 안 될 그것요.”

“……에?”

모이라는 이어 말했다.

그날 밤, 페니는 술을 마시고 홧김에 아무 남성과 동침하고 그 남성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가 하루 만에 잡혀 왔다.

그녀가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이 전 사교계에 돌았고, 사교계에서 잘나가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사교계의 망신이자 오욕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부자인 페니의 부친은 결단을 내려 조치를 취했다.

“신랑을 돈 주고 사 왔다고요?”

“네, 페니 영애의 가문의 먼 친척인 영식과 약혼시키는 걸로 일을 무마했죠. 그래서 그녀는 사교계에서 따돌림당하지만 그나마 여기저기 면을 세우고 다닌다 들었어요.”

“그녀가 도대체 어떤 집안이기에…….”

루나는 입가가 다 굳는 느낌이었다.

“정말 모르세요? ‘르시타’ 가문이라고…….”

“르시타요……? 제국 3대 명문가 중 하나인 르시타?”

사교계에 무지한 루나라고 해도 제국 3대 명문가의 이름 정도는 알았다.

첫 번째가 로텐베른 공작가, 두 번째가 르시타 후작가, 세 번째가 라미라 후작가였다.

“네. 어마어마한 명문가죠. 개국 공신인 후작가니까요. 그 사건만 없었으면 지금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가 사교계에서 그렇게 독주를 하진 못했을 거예요.”

“하…….”

루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이 제국의 고위 귀족 집안 여식들이 모두 아키스에게 목을 매고 있다? 인기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새삼 놀라웠다.

‘그래서 저 페니라는 영애가 날 피한 건가? 아니 그보다, 나 이래서 누구랑 친해질 수나 있겠어?’

루나는 입술이 댓 발 나왔다. 페니 영애가 자신에게 괜히 호의를 베푼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거기다 루나는 이상하게 그녀에게 끌렸다. 그런데, 그녀까지 공작을 좋아한다니.

‘아예 제국의 모든 여인들을 다 사랑에 빠지게 만들지, 왜?’

루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제 또래 귀족 여인들을 만날 때마다 혹시 제 남편을 짝사랑해 보신 적 있으세요?라고 물어봐야 하나 하고.

루나의 표정을 살핀 점원 겸 도제가 조심스레 권했다.

“모처럼 여기 오신 거니, 시제품 드레스라도 몇 벌 입어 보고 가시겠어요?”

“그럴까요?”

루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 분풀이 삼아 아키스의 돈이라도 써 버릴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빛 비단 드레스부터 검정색의 매혹적인 비로드 드레스, 아니면 무늬가 들어간 사랑스런 소녀풍 드레스까지. 저희 모이라 선생님이 공작 부인만을 생각하며 참 많이도 드레스를 디자인하셨답니다.”

도제가 루나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쓰며 말했다. 그리고 눈치 없이 입을 연 모이라를 순간순간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나는 애써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키스의 돈을 잔뜩 써 주겠다는 결심이 무색하게 루나는 드레스를 세 벌만 맞췄다.

그나마도 모이라가 할인가에 해 준 것이었다. 루나는 이런 면에선 아직도 크게 과감하지 못했다.

공작가에 돌아와서도 내내 기분이 침체되어 있었다. 마침 장대비가 내렸다.

“장마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 봅니다.”

루나는 며칠간 붙잡고 있던 거대한 천 바느질을 마쳤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부에도 비가 내릴까요?”

그 귀여운 물음에 알렉은 홍차를 따라 주며 미소 지었다.

“서부는 메마른 지대라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답니다. 혹시 공작님께서 비를 맞으실까 걱정되시나요?”

아니요, 그런 바람둥이는 확, 비나 맞으라고요. 루나의 목구멍까지 그 말이 치밀었다.

사실 은근히 진심이었다. 이번에 그가 돌아오면 도대체 침대에 파고들었던 여자가 몇 명이냐 한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루나는 바느질거리를 정리했다. 커다란 핑크빛 덩어리를 끌어안은 그녀를 본 알렉이 웃음을 꾹 참았다.

“새 커튼을 완성하셨다니 잘되었군요. 어디에 달아 드릴까요? 공작 부인의 파우더 룸에 달아 드릴까요?”

“그건 알아서 할게요. 따로 쓸데가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알렉은 공작 부인의 엉뚱한 매력에 작게 미소 지었다.

“아, 울프가 춥겠네요. 비 오는 날은 꽤 쌀쌀해서…….”

문득 그녀는 마당에서 자고 있을 울프가 안쓰러웠다.

어차피 오늘도 아키스는 없으니 가엾은 울프나 끌어안고 자야겠다.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식사 후, 루나는 파우더 룸에서 붉은 책을 읽었다. 하녀들에 의해 강제로 목욕을 한 울프는 발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침실로 들어왔을 때 벽난로의 훈기로 울프의 털은 뽀송해져 있었다.

“울프, 오늘은 같이 잘까?”

분명 그의 자리에서 울프를 재웠다면 아키스가 화낼 것이다.

그러나 루나는 곁에 있지도 않은 아키스에게 단단히 앵돌아져 오늘은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목욕하느라 힘들었지? 미안, 너랑 같이 자려면 비아가 꼭 목욕을 시켜야 한다지 뭐니?”

“끄응, 끼잉.”

자기가 작은 강아지인 줄 아는 것인지 울프가 온갖 불쌍한 시늉을 내며 루나의 침대에 턱을 기댔다.

루나는 피식 웃고 울프의 앞발을 잡고 당겼다. 울프가 착하게 침대로 올라왔다.

“와, 우리 강아지 뽀송하고 좋은 냄새나네. 아키스가 오면 널 집 안에서 키우자고 말해 봐야겠다.”

루나는 아이처럼 울프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울프의 체온이 마음을 점점 안정시켰다. 루나는 코를 훌쩍이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 * *

아키스가 저택에 도착한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집사가 눈을 비비며 잠옷 차림에 가운만 입은 채신없는 차림으로 그를 맞이했다.

“세상에, 공작님. 어떻게 이 시간에 오셨습니까. 며칠 후에 오시는 걸로 알았는데…….”

집사가 놀란 소리를 냈다.

“일이 좀 일찍 끝났다.”

부하들을 초 단위로 닦달해서 일을 마쳤다는 부분은 생략한 채 아키스는 급한 귀환을 일축했다. 그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이 한밤중에 게이트를 타고 오셨습니까?”

“관리자에게 부탁해 문을 열어 달라 했다.”

“그게 가능하더랍니까?”

아키스는 게이트 담당자를 닦달했다는 설명도 굳이 하지 않았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아키스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부인은?”

“당연히 주무십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아내는 깨우지 마라. 간단히 씻고 바로 침실로 들어갈 테니.”

여행 후의 행색으로 침실에 들어갈 순 없었다. 그는 씻은 후 급히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향했다.

이젠 같은 장소에 있는데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보다 그녀가 보고 싶은가 보다.

침실로 들어가 램프를 켰는데 불룩한 이불 더미가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쌕쌕 자는 조용한 얼굴 옆으로 이불 더미가 하나 더 불쑥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지?’

순간 아키스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다음으로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누르며 이불을 들추자,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울프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녀의 옆에 낯선 사내가 누워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키스는 미쳐서 침대를 피로 물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렇지.’

아키스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쉿, 저리가.”

울프를 쫓아내자 주인도 못 알아보는지, 녀석은 개 주제에 꽤나 억울한 얼굴로 꼬리를 흔들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침대에 파고들자 그녀의 정겨운 살 내음이 그를 반겼다. 며칠 만에 말랑한 그녀의 몸에 손이 닿자 눈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잠옷 치마 속으로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음…….”

루나는 뒤척이다 살갗에 닿는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깜짝 놀라 눈을 뜬 그녀는, 상대가 아키스라는 걸 알고 놀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고 속삭였다.

“꿈이에요?”

나른하게 중얼대는 그녀가 몹시 귀여웠다.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나긋하게 대꾸했다.

“꿈이면?”

루나가 눈을 비볐다. 그리고 작게 코를 훌쩍이고 아키스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바짝 붙였다. 아키스는 새삼 자신이 그녀의 키스를 정말 바라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녀의 키스와 달콤한 살결.

그리고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

갈망해 온 그녀의 입술이 아키스의 귀에 닿았다. 루나는 잠결에 잠긴 목소리로 아키스의 귀에 중얼거렸다.

“바람둥이.”

“……뭐?”

루나는 그대로 아키스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불을 돌돌 감고 눈을 감았다. 루나의 등에 아키스가 손을 댔지만 루나는 잠결에 손을 밀어내고 더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마음 같아선 아내의 얇은 잠옷을 찢어 버리고 그 향기 나는 살결을 마음대로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키스가 그녀에게 더 다가가자, 루나는 잠결에 뾰로통하게 속삭였다.

“으응, 아키스. 싫어요…….”

그 말까지 들은 아키스는 그야말로 얼음이 되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 * *

‘아키스가 온 꿈을 꿨어.’

아침에 눈을 뜬 루나는 바로 그 생각을 떠올렸다.

옆자리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울프겠지, 하고 바라본 루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나른한 졸음이 다 날아갔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자는 너른 등은 다름 아닌 아키스였다.

‘세상에, 꿈이 아니었어?’

루나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숙여 아키스의 자는 모습을 보았다.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미모의 그는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자고 있었다. 루나는 그에게 몸을 숙였다.

그러곤 그가 깰까 입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아키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가 눈을 떴다.

그는 낮은 신음을 내며 눈을 비볐다. 그 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러워서 루나는 그에게 화가 난 중이라는 걸 잊을 뻔했다. 루나는 헛기침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루나.”

그가 루나를 보았다. 그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바로 루나를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그에게 끌어안긴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어서 그가 그야말로 야성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루나는 정신 못 차리고 그의 키스에 대응했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읍…….”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질문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루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꿈인 줄 알았어요.”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을 덮치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중얼거렸다.

“급한 것부터 하고 대화하죠.”

“아, 안 돼.”

루나는 아키스에게 난 화가 한 번에 다 풀려 버릴 뻔했다. 이래서 너무 잘생긴 남편은 위험하다.

“밥 먹고요, 그리고 대화부터 해요.”

루나는 아키스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루나는 아키스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어서, 빨리.”

아키스는 평소와 다른, 뭔가 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루나는 뺨을 문질렀다. 그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도 그녀는 아직도 침대 위에 있었다. 루나는 울프를 끌어안고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키스는 슬슬 울프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저놈, 개 맞나? 요즘 왜 이렇게 사람처럼 굴지? 마치 애첩처럼 앙큼하게 부인의 옆구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아키스는 헛기침을 했다.

“울프, 부인의 아침을 방해하지 말고 이리 와라. 부인은 오늘 바쁘거든.”

아키스가 혀를 차며 불렀다. 울프가 귀를 쫑긋했다.

“나 오늘 한가한데요.”

루나는 바로 대답했다.

울프는 루나를 한번 보고는 아키스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명백하게 아키스를 외면했다.

그러고는 루나에게 끄응, 하고 가증스런 소리를 내며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루나는 자신을 냉대하던 것과는 달리 정성을 다해 울프를 어루만져 주었다.

“예쁘기도 하지, 우리 강아지.”

저 강아지가 사슴도 사냥하는 강아지라는 걸 알긴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오늘 그녀는 이상할 만큼 쌀쌀맞았다. 아키스가 참지 못하고 뭐라 말하려는데, 루나가 울프를 데리고 자신의 파우더 룸으로 가 버렸다.

* * *

아침 식사 내내, 루나는 묘하게 서먹하게 굴었다.

울 정도로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키스에겐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늘 자신을 나긋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울프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있다.

“서부는 어떠셨어요?”

루나는 빵에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괜찮았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이게 대화의 끝이었다. 아까는 대화부터 하자고 하지 않았나?

평소라면 아키스가 좀 무뚝뚝하게 대답해도 그녀는 조잘조잘 질문하곤 했다. 어디가 어떻게 괜찮았어요? 뭐가 제일 좋았는데요? 힘든 일은 없었어요?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귀여운 목소리로 재잘대기는커녕 묵묵히 아침 식사만 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습니까?”

“없어요.”

또 단답형이었다.

그 누구도 아키스의 앞에서 이렇게 버릇없이 행동한 적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최소한 그가 뭘 잘못했는지,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마음이 있을 때에 한해서였다.

거기다 아키스는 루나를 위해 며칠을 밤새워 일하곤 달려왔다.

결국, 아키스는 그대로 있다간 루나에게 짜증을 낼까 걱정되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

날씨는 어젯밤과는 달리 몹시 좋았다. 공작가 근처의 수풀과 나무들,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 비에 젖어 상쾌한 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비가 왔군.’

호숫가 근처의 나룻배에 갈까 했는데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울프가 뒤늦게 꼬리를 흔들며 아키스의 옆으로 왔다.

‘배신자 녀석…….’

이미 완벽하게 부인의 강아지가 되어 버린 이 흉악한 개를 보며, 아키스는 자기 집 개마저 자신보다 부인을 더 염려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네 녀석의 이름은 오늘부터 울프가 아니라 바둑이다.”

아키스는 치졸하게 울프에게 화풀이를 했다.

울프는 아까 루나에게 끄응, 대며 애교를 떨던 것과는 달리 컹컹, 하고 울었다. 아키스는 커다란 울프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너 지금 몸에서 장미 냄새가 나는 거냐?”

거기다 이놈 몸에서는 부인의 비누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아키스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이윽고 안개 걷힌 공작가의 호숫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지?”

아키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호숫가 위의 나룻배.

처음에는 거대한 핑크색이 배를 감싸고 있다, 그 정도만 인식되었다. 그다음에 아키스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들던 커튼이군.’

그가 떠나기 전부터 그녀가 열심히 만들고 있던 레이스 달린 커튼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방수 천에 달린 화려한 리본 장식들이 나풀거렸다.

“그러니까, 이걸 만들고 있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어젯밤 내린 비로 인해 흠뻑 젖은 핑크색 덮개는 물 이슬에 덮여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홀로 호숫가를 산책할 때,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접근한 적 없었다. 그가 이 나룻배를 왜 여기 두는지 그녀가 눈치챈 걸까?

‘도대체 뭘 알고…….’

어느새 아키스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 어이없고, 대단한 여자였다.

* * *

루나는 아키스가 산책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못되게 군 것을 후회했다.

사실, 아키스가 잘못한 건 전혀 없었다. 굳이 죄가 있다면 쓸데없이 인기가 많은 죄일 터이다.

‘그 사람이 결혼 전 여자 문제가 깨끗했던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사랑이라는 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논리도 없이 화를 내게도 만든다. 루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 전에는 순수를 강요받지만, 결혼 후에는 바람을 피우는 귀족 부부가 많았다. 남자는 더했다.

혹시 그가 딴 여자에게 눈을 돌린다 해도 자신이 추궁할 자격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아키스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건, 그가 공정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루나가 바람을 피우거나 눈을 돌리는 건 싫다고 했으니, 아마 그도 그러지 않을 거다.

‘원래 여자한테 관심도 없던 사람이고.’

루나는 깨작대던 자수 판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한 것인데 바늘 코만 뜨고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답답했어.’

그들이 부부긴 했으나 서로를 독점하고 사랑하기로 맹세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그를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음을 들킨다면 그는 곤란해 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답답했다.

문득 루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길이 생각보다 질었다. 루나는 제인에게 물었다.

“혹시 어젯밤 내내 비가 내렸니?”

“네, 아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그쳤답니다.”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밤새 비가 온 줄은 몰랐다. 그럼 아키스는 내내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들어오자마자 환대는커녕 짜증만 냈으니 그가 화를 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 * *

아키스가 저택에 돌아왔을 때, 루나는 1층 응접실에서 자수를 하는 중이었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자마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키스, 할 말이…… 응?”

아키스는 루나를 보자마자 왠지 모를 기분이 들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나게 하더니, 이제는 안고 싶어서 미치게 만들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그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애가 타기만 했다.

성욕과는 관계없었다. 그냥,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여린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키스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댄 채 대답했다.

“네, 듣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루나의 뺨과 귀가 붉어졌다. 계단을 내려오던 제인이 뺨을 붉힌 채 입을 막고 걸음을 돌렸다. 루나는 그걸 눈치챘지만 민망해서 더 눈을 돌리지 못했다.

“왜 그래요?”

“나한테 화났나 해서. 오늘 아침에 이상한 모습 보였지 않습니까.”

“화가…….”

나긴 했는데, 화 안 내기로 결정한 참이에요. 당신은 죄가 없어서요. 차마 그렇게 솔직히 대답할 수는 없어 루나는 말을 삼켰다.

“상관없습니다.”

아키스가 루나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당신이 화내도 옆에 있고 싶으니까. 왜 화났는지는 천천히 이야기해요.”

“……네?”

루나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 남자, 요즘 퍽 감성적이었다. 요즘 계속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은 일이 많았다.

‘왜 이래? 원래 남의 성질 같은 거 받아 주는 성격 아니잖아.’

그녀는 남편에 대해 객관화가 되는 편이었다.

“으응……. 숨 막혀요…… 아키스…….”

계속 안겨 있으니 답답해서 루나는 아키스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가 루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나룻배 위에 있는 건 뭡니까?”

루나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제야 눈치챘다.

“아, 호숫가에 다녀왔어요? 제가 만든 방수 덮개예요. 꽤 그럴듯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이 순진무구하게 답변하는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를 달콤한 과일처럼 자근자근 깨물어 즙까지 다 핥고 싶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소유욕이 그를 감쌌다. 너무 소중하면 이런 마음을 느낄 수도 있구나, 그런 기분이 들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닌데.”

“이제 곧 장마철이라서 씌워 뒀어요. 비를 많이 맞으면 배는 낡으니까. 이 저택엔 없는 게 없어서 더 만들 것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뭘 만들까 하다가 결정했죠.”

아키스는 귀부인들이 수예를 하는 이유가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입꼬리를 치밀고 올라오는 미소를 참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키스가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가 풀렸으면 함께 산책이나 나갑시다. 그게 좋겠군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는 루나를 데리고 비에 젖은 호숫가로 갔다. 루나의 팔은 아키스의 팔에 감겨 있었다. 아키스는 나룻배를 감싼 덮개를 보았다.

“다 좋은데 저 리본은 뭡니까?”

“자투리 천이 남아서요. 전 리본 만들기가 특기거든요.”

“그럼 왜 하필이면 분홍색을…….”

“분홍색이 예쁘지 않나요?”

루나가 순진무구하게 대답했다.

“아무튼, 만들어 줘서 고맙군요.”

그는 웃음을 참고 말했다.

“네, 아키스가 이 배를 아끼는 것 같아서…….”

루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디온 말로는 당신이 호숫가에서 혼자 사색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 호숫가에 있는 것이라곤 이 낡은 나룻배밖에 없는걸요. 그래서 당신이 이 배를 좋아하는구나 싶었어요. 소중한 장소일 테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이라면 치워 버렸겠지요.”

“낡고 썩은 물건인데 귀해 보였습니까?”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 낡고 썩은 물건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면 정말 소중한 거잖아요. 아키스는 실용주의자니까, 그쵸?”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그는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느낌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허리를 감싸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 과거에 대해 알지 모르지만, 난 시골의 끔찍하게 가난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국에서 그의 과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의 난 집이 없었습니다. 거리가 내 집이었고, 유일하게 행운인 건 남부는 따뜻했다는 거였죠.”

루나의 눈빛이 순간 염려가 서렸다.

“그거 다행이네요. 어릴 적에 추운 곳에서 자라면 뼈가 약해져요. 어린아이가 약골로 자라면 정말 고생하는걸요.”

그녀는 아키스의 팔을 잡고 진중하게 속삭였다.

아키스는 빗장뼈가 간질간질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정말 다정한 여자였다.

“난 특수 체질이라 언제나 건강합니다. 아무튼, 나와 같은 거리의 아이들에겐 이 배가 아지트였죠. 다들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이곳에 모아 두었습니다. 난 이 배에서 자랐고, 종종 나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배로 와서 먹을 걸 주었죠.”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건 거의 부랑아 수준 아닌가. 소문대로 그의 모친은 거지나 창부인 걸까? 그가 비천하게 자란 건 익히 알았지만 그의 입으로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루나도 힘들게 자랐지만 최소한 다락방에 지붕은 있었다.

“다행히 시골 마을이라 그런지 인심이 좋았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죠. 주로 여자들이었고요.”

“아…….”

그건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아키스의 비범한 외모는 땟국 속에서도 빛났을 거다. 루나만 해도 어린 아키스가 거리의 부랑아라면 눈에 밟힐 것 같았다.

“그 당시 내가 가진 건 저 배밖에 없었습니다. 이 공작가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발작하듯 이 배를 찾아 달라고 울었다고 하는군요.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아무튼, 내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물건인데 나 없는 사이 소중하게 대해 줘서 고맙군요.”

루나의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괜히 눈가가 달아올랐다.

“내가 배에 손댔다고 화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좋아해 줘서 기뻐요.”

아키스는 가만히 루나를 보았다.

“어릴 적의 나는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그리고 선대 공작이 이 배를 가져다주고부터는 난 종종 이 배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때 불면증을 치료했죠.”

루나의 마음이 아려 왔다.

그와 자신에게 공통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못해 봤다. 아키스에게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느라 잠도 깊게 못 자던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루나는 나긋하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요람은 배라고 했죠. 요람을 흔들면, 그 배가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아주 어릴 적 일인데 그 말 하나는 선명히 기억이 나요. 난 어릴 적에 종종 그 요람을 떠올렸어요. 숙부 가족들이 너무 싫어서 탈출하고 싶어지면, 내가 있는 침대는 요람이고 이 침대는 어디론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죠.”

아키스는 가만히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낡은 나룻배 안에서 이 배가 호수 위를 달려 바다 위를 가 또 다른 세상에 나아가는 걸 꿈꿨다.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아버지의 부하들은 그를 고요한 바다로 데려가기는커녕, 배 밖으로 내동댕이쳤지만.

공작가에 도착해서도 배 위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단어들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해 후, 처음으로 ‘문’을 보았다. 마법사들이 자신의 힘을 자각한 순간을 ‘문’을 열었다고 표현한다.

마법사가 될 수 있고 없고는 단 하나로 판가름 났다. 이공간, 자신의 주문을 담아 둘 수 있는 공간을 열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 때문일까. 이 배에 집착한 이유는.

“아키스, 그러면 당신이 자란 그 마을은…….”

“내가 아버지를 따라오며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좀 뿌렸습니다. 그 뒤엔 한 번도 가 본 적 없죠.”

루나는 그가 담담하게 말할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키스는 그녀의 흐린 얼굴을 보기 싫었다. 자신을 동정해도 좋았지만 다 지난 일로 그녀가 속상해하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키스는 루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키스?”

“힌트나 좀 듣죠.”

“힌트요?”

“오늘 아침에 날 보지도 않고 화내던 이유. 공으로 맞추겠다는 뻔뻔한 소리는 안 합니다. 여자의 기분이 나빠지는 대부분이 남자 잘못이라는 상식 정도는 아니까.”

루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키스의 말에 일말의 화마저도 풀려 버렸다. 사실, 지금 아키스와 이렇게 대화하고 있으니 별것으로 토라진 제가 좀 민망하기도 했다.

“내가 수수께끼를 별로 안 좋아해서 운이 좋네요. 힌트 말고 바로 정답을 말해 주고 싶어졌으니.”

“안됐군요. 나름대로 선물이나 유도 심문으로 힌트를 더 얻어 낼 자신도 있었는데.”

“그건 공작님의 적성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음…… 내가 화낸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질투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모처럼 친해지고 싶은 영애가 있었는데 그게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첫 번째도 흥미로운데, 두 번째는 더 어렵게 느껴지는데.”

아키스는 그 영문 모를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질투라니?

“난 내 출장이 길어서 당신이 화가 났다 생각했는데.”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더 길어도 괜찮았는걸요.”

아키스는 더 길면 내가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삼켰다. 루나는 저를 감싼 팔을 놓았다. 그러고는 뺨을 붉혔다.

“사실, 페니 드 르시타 영애와 당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었어요.”

루나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키스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페니어 드 르시타? 그 여자가 왜요?”

루나는 페니의 본명이 ‘페니어’라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페니의 이름이 아키스의 입에서 몹시도 여상하게 흘러나왔다. 루나는 가슴이 이유 없이 한번 지끈 했다.

루나는 한숨을 폭, 쉬고 의상실에서 들은 일을 말했다.

“페니 영애가 당신 방에 속옷 차림으로 뛰어든 여자라면서요? 난 그것도 모르고 혹시 그 영애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기대했는데…….”

루나는 한 번도 또래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었기에 내심 기대했다. 페니 영애도 제게 관심이 있으니 호의를 보여 준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그녀가 싫다기보단 상황이 실망스러운 것이 더 컸다.

그러나 아키스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이내 얼추 비슷하게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달리아가 내게 좀 이상한 말을 한 적 있긴 하군요.”

“……달리아요?”

“황실 무도회 날 밤이었는데, 2년 전쯤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영애가 술에 취해 허술한 차림으로 황궁 안에 마련된 내 방으로 뛰어들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페니였는지는 몰랐는데.”

“본 게 아니라 들었다고요?”

“달리아가 그녀를 친구들과 합심해 끌어냈다던데, 정작 내방에 돌아오니 엉망으로 흐트러진 시트와 어수선한 방 안밖에 없더군요.”

당시 아키스는 술에 취한 영애들이 제 방에서 방자한 장난을 친 것이라 생각했다. 불쾌한 기억이었으나 그다지 대수로운 기억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를 방에서 끌어낸 게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라고요? 그리고 그녀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네, 자기가 해결했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아키스는 말을 골랐다.

“그 당시 달리아는 내게 가끔 거짓말을 하곤 했기에 그다지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알 만했다. 달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아키스에게 미쳐 있던 건 유명한 사실이니까, 그는 달리아가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또 무언가 꾸몄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달리아는 아키스에게 접근하기 위해 꽤 많은 계략을 꾸몄다. 자연히 아키스에게 달리아는 기피하고 싶은 상대가 되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주의 깊게 듣지 않게 되었다.

‘이상하다? 내가 들은 것과 좀 다른데.’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루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라미라 영애가 하는 일이 뻔하니 그렇죠. 보나마나 그녀가 분위기를 주도했겠지요.’

문득, 루나는 결혼식 날 페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나는 갑자기 속이 섬뜩해졌다.

“왜 그래요?”

“그게…… 그냥 들어 보니 정황이 이상한 거 같아서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고…….”

“그럼,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잖습니까?”

아키스는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페니와 마주칠 일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아키스, 혹시 내가 이런 걸 묻는 것이 불편하다만 말해 줘요. 결혼 전에 당신과 페니 영애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아키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면이 있는 사이긴 하지만 그다지 특별한 사이는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지만, 명문가의 자제들은 어릴 적부터 황궁에 드나들지요. 머리가 굵어지며 자연스레 소원해졌고요.”

그건 납득 가는 말이었다. 3대 명문가의 자제 정도 되면 황가의 아이들과 어우러져 자라기 마련이니까.

“그럼, 당신 침대에 뛰어든 아가씨가 페니가 아니었군요.”

루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리고 아키스는 해선 안 될 대답을 해 버렸다.

“네, 그건 페니가 아닙니다.”

“……그건,이라고요?”

루나의 동작이 굳었다.

“……도대체 당신 방 안으로 숨어든 영애가 몇 명이에요?”

……이런.

아키스는 속으로 탄식하며 입을 다물었다.

구체적인 숫자를 대답하면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루나의 고운 미간은 이미 찌푸려진 뒤였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싫으면 마요.”

루나가 그의 품에서 스르르 빠져나왔다. 아키스는 몹시 억울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네, 알아요.”

루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 가문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아키스는 변명하려 애썼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특이한 형질이 후계자에게 이어지잖습니까. 그러니…….”

그는 점잖은 편이었기에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루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넘어뜨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죠?”

“아주 드물게 있었던 겁니다.”

“누가 뭐라나요. 변명 안 해도 괜찮아요.”

루나는 그다지 화가 나진 않았지만,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정말로 질색합니다. 결혼이니 아이니 하는 건 나와 맞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키스는 루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루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알아요, 새틴이 당신의 사생활에 대해 늘 미주알고주알 말했으니까요. 그다지 오해하고 있지는 않아요. 다만, 조금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거예요. 이제 더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사실 루나도 이대로 아키스와의 결혼 생활을 이어 가다, 그가 말한 2년 후에 같이 사는 걸 상상하기도 했다.

2년 후, 그때 그의 아이를 가진다면 방금 전 표현대로 끝이라는 생각도 내심 했었다. 아키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더라도 그는 자신을 받아 줄 수밖에 없을 터이니.

하지만 그런 생각은 루나만 한 것이 아니었다. 새틴은 종종 그와 결혼해 보랏빛 눈의 후계자만 낳는다면 공작은 제 남자가 될 것이라 말하곤 했던 것이다.

‘……나도 똑같아.’

그를 사랑해서,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라 해도 루나도 똑같았다. 자기 자신에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루나?”

“나, 정말 괜찮아요. 이제 들어가요. 바람이 차요.”

루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아키스는 여자 문제는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 팔로 그녀를 감싸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결국, 아키스는 하루 종일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해서 뭐해.’

결국, 루나는 그런 아키스의 호의 속에서 자세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집착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미 충분히 행복할 만큼 그가 잘해 주고 있으니까. 자신에게 신경 써 주는 아키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 * *

“으음…….”

루나는 자신의 입을 가득 메운 그의 혀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파득 몸을 떨자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아키스는 오늘따라 조급하게 굴었다. 그녀가 목욕하는 시간도 아쉬워 욕실에 같이 들어오다니.

“하아, 아……. 아키스, 응. 그렇게 만지면, 기분 이상해요.”

아키스는 루나의 목욕을 도와준다는 구실로 그녀를 욕실에 세워 놓고, 온몸에 비눗물을 발랐다. 미끌미끌한 몸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목 아래 모든 구멍에 손가락을 한 번씩 비비고, 쑤셔 넣었다 뺀 참이었다.

“여기도 좋아요?”

“아, 거긴…….”

요도구 쪽을 살짝 누르며 간질이는 손길에 루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안은 채 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사이즈는 두 사람의 몸이 얽힌 채 가득차기 충분했다.

‘하아, 이렇게 문란해지다니. 이 남자…….’

혼전 순결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처럼 외간 여자를 경계하던 그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아니지, 아내하고만 하면 문란이 아닌가. 루나는 잠시 생각을 모으려 노력했다.

여유를 가질 틈은 없었다. 물속에서 아키스가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아!”

아까부터 물속에서 달아오른 몸 위로 그의 성기가 단번에 꽂혔다. 커다란 성기가 한 번에 디밀고 들어오자 숨이 다 막혔다.

“물, 들어오는 것 같아…….”

루나가 끊어 뱉듯이 속삭였다. 허스키하게 쉬기 시작한 목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마음과 감각이 따로 놀았다. 늘, 감각이 먼저 질주했다.

“쉬이. 안 그래요. 평소처럼 힘 빼고. 당신은 너무 조여. 할 수 있지.”

아키스가 애를 다루듯 다독이며 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등을 큰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렇게 만져 줬는데도 긴장해서 조이니, 부족하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내 것이 좋은 건지. 응?”

귀가 붉어졌다.

“하지 마요.”

“왜요, 아니면 저번처럼 말해 줄까. 당신 내가 상스러운 말 쓰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교수님답게 조곤조곤 말했다.

그거야, 뒷골목 출신다운 말투로 말하면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루나는 항변하고 싶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몸에 온몸으로 매달렸다.

“물 안에선…… 쉽게 달아올라요.”

체온이 훅 올라간다. 루나가 하아, 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뜨겁거든. 물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아키스가 입꼬리만 올려 속삭였다. 물속에서는 움직임이 더 자유로웠다.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성기가 꽂힐 때마다 철벅이는 소리가 났다.

“하아, 안 돼. 물속에서 끝까지는…….”

“밖에서 싸 줄까요.”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민망해 죽겠다. 그가 깊게 꽂아 넣은 채 루나의 무릎 안에 손을 넣어 오른쪽 다리를 높게 들어올렸다. 루나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허벅지 안쪽이 당겼다. 그의 얼굴 옆까지 올라온 매끈한 발뒤꿈치를 깨물고 핥는다. 젖은 발뒤꿈치가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흐…….”

각도를 비스듬히 해서 찔러 들어오는 성기에 루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축축하니까 더 맛있어, 당신 살결.”

“그만, 밖에서, 이제-.”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물 안에서 그대로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며 루나의 얽혀오는 축축한 속살을 즐겼다.

“으응, 아키스. 제대로 해 줘요.”

절로 콧소리가 났다. 아키스가 루나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었다. 어린애를 일으키듯, 그러나 삽입된 채로 번쩍 일어났다.

“핫!”

촤락.

몸에서 떨어진 물이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하게 났다.

아키스가 겨드랑이 아래 넣은 손을 내려 루나의 허리를 잡았다. 루나는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그의 손에 의지해 버텼다. 그리고 욕조에 엉덩이를 걸친 채 자세를 잡았다.

“꽉 껴…….”

맞물린 성기는 아직도 이어져 있었고, 아키스의 몸은 루나의 안에서 뻐근하게 버텼다.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은 몸에 골반이 아릿했다.

“미끌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그가 속삭였다. 그는 루나의 몸을 떼어냈다. 그대로 등을 돌리게 했다.

“벽 짚어.”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녀의 허리를 주무른다. 루나는 욕실 벽을 붙잡았다.

아키스가 단번에 성기를 다시 삽입했다.

퍽! 퍼억!

아키스가 뒤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음낭과 루나의 엉덩이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어깨가 추웠지만 하반신은 불에 타는 것 같았다.

거기에 물 첨벙대는 소리까지 섞이자 루나는 귀가 괴롭혀지는 것 같았다. 더운 숨이 깊어졌다.

“흐읏. 응……!”

아키스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내려, 엉덩이 사이를 활짝 벌렸다. 욕실의 불이 켜져 있어서 아키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왔다.

작고 귀여운 항문 주름부터 그 아래 쫙 벌려진 붉은 비부, 그의 손으로 쥐어 발개진 하얀 엉덩이 살까지.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온몸으로 그의 것을 잡고 조이는 그녀는 그를 미치게 했다. 너무 더워서 불탈 것 같아서 아키스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숨을 쉬었다.

“보지 말아요.”

루나가 웅얼대며 말했다.

“온몸이 너무 예뻐서 그래요. 이 예쁜 몸을 못 봐 며칠간 죽는 줄 알았어.”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대로 루나의 양손이 단단히 벽을 쥔 걸 확인하자 그는 손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루나의 배를 더듬으며 아래로 손을 내렸다.

물과 애액에 젖어 그에게 엉겨 붙는 부드러운 섬모를 느끼며 그대로 살을 헤쳐 조그만 음핵을 찾아냈다. 빼꼼히 작은 몸을 부풀리고 그의 손끝을 자극하는 음핵을 느끼며 그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벅, 철벅, 퍽퍽!

음핵을 문지르는 손과 속도를 맞춰, 동시에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에 루나는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아아, 응! 아키스!”

결국 금방 가 버린 그녀의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다시 욕조 안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아키스가 나머지 한손으로 단단히 그녀의 배를 감싸고 더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루나의 몸이 벽 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그는 그녀의 몸을 뒤에서 부둥켜안고 성기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더 깊게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처박은 그의 굵은 성기가 그녀의 더운 안에서 폭발했다. 길게 내쏘아진 절정이었다.

“흐응!”

루나는 두 번째 절정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빨랐다. 전율이 일었다. 하반신부터 온몸이 환희에 부들부들 떨었다.

온몸이 아키스의 성기를 조였다.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의 감각으로 물드는 듯했다.

“하아…….”

아키스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상해질 것 같았다. 기묘할 정도의 쾌락. 며칠만이니 더 쾌감이 생생했다.

그녀는 흐느끼며 아키스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이제 그녀의 몸 없이는 못 살겠군.’

단 며칠인데도 죽는 줄 알았다.

아키스는 그녀의 부들 떨리는 몸을 느끼고도 놔주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고개를 부드럽게 돌렸다. 루나의 어깨 위로 두 사람의 입술이 능란하게 얽혔다. 이번엔 입술을 빨며 춥춥대는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욕실에 울리기 시작했다.

* * *

결국 침대에서도 두 번이나 회포를 풀었다.

그러고도 아키스는 루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계속 그녀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온몸을 깨물고 빨았다. 루나는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흐응……. 아파, 예민해져서 피부가 얼얼해요…….”

루나가 호소하듯 속삭이자, 그는 루나의 턱을 들어 입술에 쪽 키스했다. 그가 움직이자 탄탄한 등 근육이 꿈틀했다.

‘학자인데 몸은 또 왜 이렇게 좋아서…….’

루나는 괜히 그의 탄탄한 날갯죽지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를 꼭 안았다.

“그만……. 진짜 나 이러다 죽겠어요.”

그녀가 칭얼대자 아키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키스가 그녀의 둥근 어깨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헤어져 있는 동안 안고 싶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많이.”

“구체적으로 말해 봐요.”

루나는 감정의 기복을 숨기기 위해 괜히 짓궂게 말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몸을 끌어당겨 얼굴을 나란히 마주 보았다. 서로의 이마가 닿았다. 루나는 심장이 저미도록 뛰는 느낌에 눈을 꼭 감았다.

“서부에 있는 저택의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네.”

“당신의 환상을 봤죠.”

“뭔데요?”

“당신이 책상 아래서 두 팔을 짚고, 내 허벅지에 손을 대고…….”

헙…….

루나는 더 참지 못하고 아키스의 입을 막았다. 온 뺨이 다 붉어졌다. 이 남자는 정말 침대에만 올라오면 왜 이렇게 변하는지.

“그만, 나 민망해요!”

“방금 할 것 다하고 이건 민망합니까?”

“상상할 것 같단 말예요.”

아키스는 설핏 웃었다. 집에서 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물론, 그 반대도 괜찮다.

아키스는 루나의 귀를 깨물었다 놓았다. 루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다니깐…….”

“알았어요. 이제 안 할게.”

아키스가 속삭이듯 루나를 달랬다.

“진짜, 언제부터 이런 취향이 생겨 가지고…….”

아키스는 그녀가 눈을 흘기는 것이 좋기만 한 듯했다. 이렇게 살결을 맞대고 있으면 사소한 일들은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 없는 동안 식솔들이 잘 챙겨 주었습니까?”

“말해 뭐해요. 정말 다들 잘해 줘요. 매사 챙겨 주었다니까요.”

이런 말은 조금 나쁘지만, 나중에는 몰래 붉은 책을 읽는 것에 방해되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평생 받을 관심과 애정은 다 받는 줄 알았어요.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들인지…….”

“앞으로도 귀하게 살 거니까, 그런 쓸데없는 말하지 마요.”

아키스가 흘리듯 말했다.

“나보다 더 잘 챙겨 줬습니까?”

“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걸 물어요?”

루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비교해요. 당신하곤 다른걸.”

모든 면에서 다 달랐다.

아키스는 그녀가 살아오며 만난 그 어떤 사람과도 모두 달랐다.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미 내 인생은 어느 정도 바뀌었구나.’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 2년을 다 채우고도 아키스의 아내로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생을 뻔뻔하게 비밀을 가진 채 그의 옆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의 애정에 둘러싸인 기억이 있다면 일기장에 적힌 미래의 루나만큼 비참한 인생을 살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귀한 사람이었다는 기억, 그것으로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루나?”

아키스는 갑자기 새끼 양처럼 제 품에 파고드는 그녀가 낯설었다.

천천히 그녀의 둥근 어깨를 어루만지며 낮은 숨을 쉬었다. 가끔 그녀가 이럴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켜 주고 싶기도 하고 파고들어 낱낱이 여린 면을 모두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한때, 그 소년을 생각했듯이.

그러나 그녀는 그 소년과 같고도 달랐다. 아키스는 그녀에게 자기 자신을 투사하지 않았다.

그저 온건한 타인으로 그녀를 받아들이고, 생각했다.

* * *

이튿날, 둘은 나란히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아키스와 루나는 식당에서 단둘이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제국 신문에는 요양에서 돌아온 황후에 대한 소식이 짧게 실렸다. 그리고 집사는 식사 중인 아키스에게 쪽지 한 장을 전했다.

“루나, 황궁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황후 폐하가 다음 달 초쯤 시간을 물으셨는데, 어떠십니까?”

다음 달이면 시간도 넉넉했다.

아키스는 황족과 가깝다고 들었다. 그가 황족과 가까이 지낼 일이 있을 것이라 몇 번 언질 한 적 있기에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게요.”

“황후 폐하 말로는 부인과 한번 독대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혹시 부담되면 거절해도 됩니다. 나중에 나랑 같이 만나도 되니까요.”

그래도 일국의 황후의 요청인데 이유 없이 거절할 순 없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뵐게요,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굳이 따로 보고 싶다 하시는 거면 이유가 있겠지요.”

“소란스럽게 여러 사람을 보기 싫어서 그러셨을 겁니다.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거의 알현을 허락하지 않으시지요.”

“따로 준비할 것이 없을까요?”

“없습니다. 굳이 잘 보일 필요 없으니 부담 가지지 말아요. 그냥 관례라고 생각하세요.”

아키스는 신문을 집으며 말했다. 황족을 알현하는 일이 그에겐 별거 아닐 것이다. 루나는 그를 빤히 보았다.

“할 말이 있습니까?”

“……어젯밤에 당신이 하도 밀어붙이는 바람에 말하는 걸 잊었는데, 일찍 돌아와 줘서 기쁘다고요. 난 2주는 걸릴 줄 알았는데.”

루나가 수줍게 말했다. 아키스는 그 말에 몹시 온화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

그때 식사를 나르는 하인이 메인 디쉬를 가지고 들어왔다. 부드럽게 삶아 와인이 잘 스며들도록 푹 익힌 부드러운 소고기 요리였다.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나가 봐.”

아키스가 손짓했다.

본래 제국 정찬에서는 하인들이 상석 순서대로 요리를 직접 하나하나 떠서 접시까지 올려놓아 주는 게 맞으나, 평소에는 직접 옮겨서 먹기도 했다. 아키스는 아내와 단둘이 식사하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그리고 루나는 긴 밤을 보내고 먹는 첫 끼니였기에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그녀는 전체 요리와 샐러드, 수프를 싹 비운 상태였다. 아키스는 아직 전체 요리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루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메인 디쉬를 먼저 조심스레 떠서 자신의 접시로 옮겼다. 야들한 소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있는데 아키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루나는 먹보가 된 기분에 조금 민망해졌다.

“맛있어요?”

“응, 맛있어요.”

“천천히 먹어요. 난 메인 디쉬를 먹기 전에 와인을 먹고 싶어서.”

아키스는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이이가 왜 웃지?’

그런데 아키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의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아키스는 식사하는 내내 그녀에게 부드럽게 행동했고, 최근 본 것 중 가장 기분 좋아 보였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아무튼, 요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루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식사를 이어 갔다.

* * *

아키스의 기행은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카데미에 안 가도 괜찮아요?”

“천천히 나가도 됩니다.”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잡고 만지작대며 놓을 줄을 몰랐다.

분명 식사를 다 마치고 디저트와 홍차까지 마셨는데도 일어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외출하기 몹시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내 기분 탓인가, 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 같지?’

루나는 이제 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외출하기 전에 붉은 책에 떠오르는 <월플라워 부인> 오늘 자 연재를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도 오늘 의상실에 들르고 싶어요. 황후 폐하를 알연할 때 입고 갈 드레스에 대해 모이라와 의논해 봐야겠어요.”

루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키스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오늘도 외출하겠다고요?”

“네. 모자랑 장갑도 새로 사야 할 것 같고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싶은 건 다 사요. 잘되었군요. 아카데미에 가는 길에 데려다주겠습니다.”

“……모이라의 숍과 아카데미는 반대편인걸요? 아카데미에 가시는 날은 몹시 바쁘시잖아요. 하루 만에 많은 학생들을 보셔야 한다 들었어요.”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외출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간 오후가 되어 버릴걸요? 그러니 어서 출근해요. 아시겠죠?”

아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밖은 위험하니까, 호위 기사들을 주변에서 떨어뜨리지 마요.”

“알고 있다니까요.”

루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한 번 더 키스했다. 루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 * *

디온은 멋모르고 아키스를 모시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놀라서 뒷걸음질 쳐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는 집사가 자신과 비슷한 자세로 벽에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티 세트를 치울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는 건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디온과 달리 은근한 흐뭇함을 느끼며 연신 어깨를 으쓱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계십니까?”

“한참 되었습니다.”

둘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나?’

디온은 이상한 세계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공작 부인 옆에 붙어 있지 못해 안달 난 공작이라니.

‘서부에서도 소년의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몹시 마음이 상해 있으실 줄 알았는데, 차라리 다행인가…….’

디온은 공작에게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말을 언제 해야 할지 참으로 고민스러웠다.

* * *

오전의 수도 거리는 웬일인지 한산했다. 루나는 창밖을 구경하며 거리를 보았다. 그러던 중, 루나는 고서점 거리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

“마차를 조금만 천천히 달려 주겠어요?”

루나가 마부를 향해 말했다. 마차가 느리게 달리기 시작했고, 루나는 묘한 눈으로 그 거리를 응시했다.

‘이렇게 호강하며 사는데, 왜 가끔 그때가 그리운 걸까?’

소년 루의 신분으로 야간에 번역가로 일할 때, 그때는 정말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았다. 끼니도 못 챙겨 먹기 일쑤였고,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지금은 먹고 사는 데 돈 걱정할 필요 없는데도 가끔은 그때가 그리웠다. 그때 번 돈은 모두 오롯이 루나의 것이기도 했다. 업무로 인정받는 즐거움도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돈이 필요하긴 했다. 물론, 아키스에게 달라고 하면 돈을 줄건 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재산도 아키스의 것도, 진짜 부부로 살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쉽게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만의 돈을 원했고, 그녀만의 일이 있었으면 했다. 아키스에게 의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으면 했다.

‘언제 내 자리가 아니게 될지 모르니까.’

정체를 들키거나, 혹은 도저히 숨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 땐 언제든 공작가를 떠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게 일 욕심이 있나.’

예전에는 살기에 급급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제 손으로 돈을 버는 그 느낌이 종종 그리웠다.

* * *

“당신은…….”

고서점 거리를 지나고, 마차를 달려 도착한 모이라의 의상실 앞에서 루나는 낯익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 여인은 막 모이라의 의상실에 들어서려던 참인 듯했는데, 잘못하면 부딪힐 뻔했다.

“페니 영애, 맞지요?”

페니는 루나를 쓱 보더니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루나는 괜히 어려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는 루나를 못 본 것처럼 의상실로 들어갔고, 루나도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 들어갔다.

* * *

“홍차라도 드시겠어요?”

“그래요. 난 과일 향 가향 홍차 아무거나…….”

“나는 아무 홍차나 상관없어요.”

동시에 들려온 대답에 모이라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새로 들인 딸기 향 홍차가 있는데 르시타 영애께서는 그걸 드시고, 공작 부인께는 스트레이트 홍차를…….”

디자이너 모이라와 그 도제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제국에서 신분이 높은 여인 범주에 들어가는 두 사람이 한 살롱에 따로 앉아 서로를 의식하는 장면이었다. 거기다 그 장소가 자신의 보잘것없는 살롱이라는 것이 가장 믿기지 않는 부분이었다.

‘보는 것만 해도 어색하군.’

그 둘은 나란히 앞을 보며 앉아 있었다. 이따금 서로를 힐끔했지만, 어느 쪽도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지 않고 있었다. 결국 살롱은 서로를 의식하는 상황 특유의 긴장감만 남아 분위기가 몹시도 어색했다.

“두 번 차를 끓이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루나가 모이라를 보며 말했다. 까칠하고 도도한 페니는 모이라를 힐긋 보았다.

“사실 난 아무 홍차나 다 잘 마셔요.”

페니는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도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같은 종류의 홍차로 만족하신다는 말이죠?”

모이라가 마치 통역사가 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별로, 공작 부인과 같은 종류의 차를 마시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페니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루나는 또 모이라를 힐끗 보고 페니를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꼭 같은 걸 마시고 싶은 건 아니고…….”

루나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네, 같은 딸기 향 가향 홍차로 두 잔 올리겠습니다.”

새롭게 주문을 받은 도제는 이제는 될 대로 되란 표정이었다.

공작 부인과 공작과 혼전 염문을 일으킨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는 숍이라. 이 숍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왠지 앞으로 이 숍이 뜰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제는 슬슬 체념하고 싶어졌다. 그는 홍차를 내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루나는 헛기침을 하고 의상실에 오기 전, 공립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펼쳤다. <백기사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루나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고전 로맨스 소설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을 겸 빌리긴 했는데, 요즘 마법책이 보여 주는 <월플라워 부인>에 흠뻑 빠져 있다 보니 무슨 책을 읽어도 예전만 못했다.

흔한 내용의 소설이었다. 순결한 귀족 영애가 왕자님을 만나 라이벌을 물리치고 사랑에 빠지는 고루한 내용이었다. 그나마 유명한 소설이라 구성이 탄탄해서 볼만했다.

‘월플라워 부인만 한 작품이 없다니까. 결국 아키스가 늦게 나가는 바람에 못 읽었어. 빨리 집에 가서 그거나 읽어야지.’

흥미가 떨어지다 보니 자연히 책을 읽는 것이 느려졌다.

결국 루나는 결국 책을 덮었다. 마침 도제가 차를 내왔고, 모이라가 직접 차를 루나에게 건넸다.

그때, 루나가 생각난 김에 말했다.

“참, 모이라. 저번에 왔을 때 맞춘 드레스 말인데요.”

“네, 공작 부인.”

“혹시 목깃을 좀 높이는 디자인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셋 중 한 벌이라도 좋아요.”

“이미 제작에 들어가긴 했지만, 고치는 건 가능합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아, 그런 건 아녜요. 다만 그 드레스 중 하나를 입고 황후 폐하를 뵈러 갈 것 같아서요. 귀한 분을 처음 뵙는데 너무 파인 드레스를 입는 건 좀…….”

그 말에 모이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 드레스를 입고 황후 폐하를 알현하신다고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내 디자이너는 모이라 아니에요?”

그 순간, 모이라의 표정은 정말 승천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도제 또한 쟁반을 든 채 굳어 버렸다.

모이라는 뛰는 가슴을 누르고 겨우 대답했다.

“그, 그럼요. 저는 공작 부인의 디자이너랍니다. 마음 같아선 무보수라도 좋아요!”

“아니, 무보수는 안 되죠! 안 됩니다. 선생님!”

도제가 중간에 필사적으로 말했다. 모이라라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었다.

루나는 미소 짓고 고개를 저었다.

“저번처럼 예산 협의 없이 비싼 드레스만 만들지 말아 줘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야 모이라의 드레스를 몇 벌이고 맞춰도 된다고 남편이 말했거든요.”

모이라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에게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으리라.

“그럼, 공작 부인. 어제 맞춘 세 벌 중 뭐가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 푸른색 드레스, 선명한 분홍색 드레스, 그리고 폭이 좁은 검은 드레스…… 이렇게 세벌을 맞추셨죠. 드레스 제작도 더 서둘러야겠군요.”

“아, 일정이 또 촉박하게 되어서 미안해요.”

“열흘이면 충분합니다. 최우선으로 달라붙어 만들 테니까요.”

도제가 눈치 빠르게 어제 준비한 드레스를 들고 왔다.

“셋 다 예쁘니,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않아요?”

“그럼, 이 분홍색 드레스는 어떠실까요?”

“그럼 이 드레스의 목깃만 조금 높이면 되겠군요. 그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작 부인.”

그때, 무료한 듯 잡지를 넘기던 페니가 무심하게 흘렸다.

“그 핑크색은 절대 안 될 텐데요, 모이라.”

도제와 모이라, 루나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페니는 움찔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모이라가 얼른 물었다.

“핑크색 드레스 싫어하세요. 살아생전 끝까지 황후 폐하를 괴롭힌 후궁 중 하나가 주야장천 입고 다니던 드레스가 딱 그렇게 또렷한 핑크색이었거든요. 지금도 그 여자 생각만 나면 발작이 일어난다 하셨죠.”

“모이라,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봐 주시…… 아, 당연히 알겠군요.”

루나는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페니는 르시타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역사적으로 공주가 시집간 적도 여러 번이라 희미하지만 황가와도 피가 이어져 있다 들었다.

“참고하라고 전해 줘요, 모이라.”

페니는 루나를 한번 힐끔하더니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럼, 무슨 드레스를 입으면 될 것 같아요? 추천해 줄 수 있나요?”

“푸른색 드레스라고 대답해 줘요 모이…….”

말하다가 페니는 이번엔 루나가 직접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 폐하는 푸른색 드레스를 좋아하세요. 동방 대륙에서 수입한 도자기 같은 푸른색이요.”

루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또 궁금한 건 없나요?”

페니는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미하게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네, 있어요.”

“물어봐요.”

누가 보면 둘의 위치가 반대일 줄 알 법한 광경이었다.

루나가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저…… 혹시 제 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좋아하시거나…….”

풉! 페니는 마시던 홍차를 살짝 뿜었다.

“정말 믿을 수 없군요.”

“맞아요…… 아, 비밀로 해 드릴게요. 페니 영애처럼 품위 있는 영애가 차를…….”

루나는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예의 있게 행동했다. 대놓고 ‘페니 영애가 차를 뿜다니.’라고 말하지 않고 말끝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페니의 뺨이 더 붉어졌다.

“아, 아니 그거 말고요.”

정말 이 여자는…….

루나는 걱정스런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페니는 민망함을 감추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따지려는 건가요?”

“아니요, 물어보려고요. 소문이라는 건 현실과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을까 하고요.”

“…….”

그 말은 페니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녀의 입장을 듣고 싶다, 그런 말.

그러나 페니가 사교계에서 몰락하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진실 같은 건 묻지 않았다.

페니는 이상한 기대감과 환희로 뛰는 심장을 누르기 위해 입술을 감쳐물고 한번 감정을 억눌렀다.

“……진심이에요?”

“궁금한 게 있으면 본인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혹시, 터무니없이 사람을 잘 믿는 편이신가요?”

루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아니죠. 하지만 지금부터의 대화에 따라 믿게 될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기초잖아요?”

“호, 호감요?”

“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거나, 아니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 그래서 대화해 보고 싶어지는 거.”

페니는 점점 알 수 없어졌다.

이 이상한 말을 하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지? 혹시 그녀는 너무 순진무구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아키스는 나에 대해 뭐라 하던가요?”

“어릴 적에 알던 사람이라 하던 걸요? 그 외에 특별한 건 없다고 했어요.”

아키스라면 그럴 만도 했다. 페니는 서늘한 눈으로 모이라와 도제를 보았다.

얼어붙어 있던 그들은 눈치 빠르게 살롱을 나갔다. 이제 텅 빈 살롱에는 둘만 남았다.

페니는 한이 서린 어조로 말했다.

“절대 아니에요.”

“네?”

“난 아키스와 엮이려 노력한 적 없어요. 집안의 격이 얼추 비슷해서 어릴 적부터 안면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교계에서 떠드는 말은 거짓말이라고요. 그 미친 여자가 뭐라고 했든지 간에, 난 절대 아키스를 짝사랑하지 않았어요.”

“미친 여자라면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를 말하는 건가요?”

페니는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들의 초점이 잡히는 듯했다.

“실례지만, 혹시…… 그럼 그 사건은…….”

“절대 속옷 차림이 아니었어요. 알몸도 아니었고요. 겉에 걸친 숄을 벗은 것뿐이었어요!”

페니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처음엔 그녀가 화가 난 건가 했는데, 루나는 페니의 말투가 원래 그렇게 쌀쌀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달리아는 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황궁 무도회 날, 내 음료수에 약을 탔어요. 내가 빠르게 취하자 아키스의 침실로 밀어 넣었죠. 그래서 날 웃음거리로 만들었어요.”

“라미라 영애가 왜 그런 짓을 했죠?”

“그날, 술을 마시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죠.”

루나는 자신이 들은 소문을 되짚었다.

그날 페니가 아키스의 방에 헐벗은 채 침입하기 전, 아키스에게 러브레터를 썼다고 들었다.

“혹시…….”

“그 러브레터는 아키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달리아는 나와 아키스의 사이를 쭉 의심하고 있었죠. 그 미친 여자는 아키스만 엮이면 정신이 나가거든요. 그래서 날 파멸시키려 한 거예요.”

루나는 입을 벌렸다.

“그게 정말이에요?”

페니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 나갔다.

* * *

단 하룻밤의 실수.

그날은 페니의 인생을 망쳐 놓은 하룻밤이었다.

‘르시타 가문에서 어떻게 저런 딸이 태어났는지. 혼전에 남자랑 사고를 치다니, 부모의 신분이 어떤데 이런 사건을 일으킬 수가…….’

달리아와 페니는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로, 일종의 단짝이었다.

겉만 거칠지 속은 독하지 못한 페니와, 겉보기엔 천사 같지만 속은 샘으로 가득한 달리아. 간혹 삐걱거릴 때도 있었지만 둘은 정말 친구였다.

달리아는 뭐든지 가장 뛰어났고, 항상 또래 영애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반면, 페니는 그다지 큰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둘은 친구였다.

그러나 페니는 가문과 외모 모두 숨길 수 없이 빼어났고, 커 가며 점점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둘을 비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건, 달리아가 페니와 아키스의 사이를 의심하면서 부터였다.

“아키스와 잠시나마 혼담이 오간 건 사실이지요. 고위 귀족 가문 자제들이 나이가 비슷하면 한 번씩 다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루나는 페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자꾸 실례되는 질문을 해서 미안한데, 그럼 그 러브레터는…….”

“내가 누군가에게 러브레터를 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키스에게 쓴 건 아니에요. 누구에게 쓴 건진 말할 수 없고요.”

페니가 뺨을 붉힌 채 작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맹세코 내게 아키스는 그런 대상이 아니에요. 솔직히 나도 그 염문이 정말 지독히 불쾌하다구요.”

“자, 잠깐. 그럼 설마 당신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말은…….”

혼전의 젊은 영애가 영식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 그건 귀족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을 의미했다.

그날, 페니가 계략에 의해 술에 취해 있었다면. 설마…….

“난 술에 취해 엉망진창이었고, 달리아는 마차를 불러 나와 한 영식을 태웠죠. 그리고 수도 근처의 도시까지 달리라고 마부에게 명령했어요. 내가 정신 차렸을 땐, 낯선 여관의 침대였고요.”

루나는 충격으로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그건 범죄지 않은가? 어떻게 친구였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새틴도 내게 비슷한 일을 했어.’

새틴도 신랑감 검증을 하겠다고 루나가 코르티잔이라 거짓말을 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게 환멸이 느껴질 정도였다. 페니와 비슷한 일을 겪은 루나는 그녀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다.

“그럼…… 당신은…… 괜찮았어요? 정말 끔찍한 일을 겪었네요.”

“나와 마차를 타고 간 영식은 겁이 많았어요. 말로는 평소 날 짝사랑했니 어쩌니 했지만 정작 내가 잠들자 손을 대진 못했죠. 그게 유일하게 운 좋은 일이었어요.”

“그자가 누군진 몰라도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술에 취한 당신을 끌고 가다니……. 절대 용서해선 안돼요.”

아무 일 없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루나는 생각했다.

“그럼, 그 일의 진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나요?”

“내가 그 영식의 부축을 받아 나가는 걸 많은 사람들이 보았어요. 그런데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내가 남자와 마차를 타고 간 모양새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아침에 수도로 돌아오자 모든 게 바뀌어 있었죠.”

어마어마한 신분의 영애라도 한 번의 실수로 추락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페니가 겪었을 일들이 안 봐도 선했다.

“정말 힘들었겠어요.”

가슴이 아렸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말했다.

그 말에 페니는 굳어 버린 것처럼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문득 그녀가 결혼식 날 자기를 집요하게 노려보던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내 알바 아니지만, 조금 걱정돼서 그랬어요.”

“…….”

“달리아가 당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했죠. 그나마 난 집안이라도 좋고 돈이라도 많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그녀가 아는 아키스 드 로텐베른은 무심한 남자였다. 아마 그는 제 부인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달리아가 루나를 괴롭혀도 아키스는 아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지도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본 바로는 아키스가 의외로 부인에게 신경을 쓰는 듯해서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의구심이 해결되었다.

루나는 결혼식에 참석했던 페니를 떠올렸다. 정말 짝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식이라면 더 감정이 흔들리는 티를 내야 맞았다.

하지만 루나의 결혼식 날, 페니는 아키스를 전혀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육탄 공세를 펼칠 정도로 좋아했다면 그렇게 초연할 수 없었다. 달리아의 표정이 비하면 페니는 그날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평온했다.

루나의 마음에 비로소 안심이 들었다.

“그럼, 페니 영애는 내 생각을 해 준 거죠? 잘 모르는 사람을 염려하다니, 정말 마음이 따뜻하네요. 고마워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겉만 까칠했지 사실 페니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페니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더 궁금한 것이 없으면 이만 가겠어요. 잠깐 차나 한잔 마시러 왔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군요.”

페니는 겨우 도도함을 유지한 채 약식으로 예법에 맞춰 인사했다.

“그럼 우리, 혹시…….”

그런데 루나의 낌새가 이상했다. 그녀가 페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요. 나는 당분간 한가하거든요.”

루나의 말에 페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친하게 지내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요?”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지금껏 날 보러 이곳에 오던 거 아니에요?”

페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거 아니……!”

“난 혹시나 여기 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온 건데…….”

“…….”

루나는 솔직한 대답에 페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페니는 아무 대답도 없이 급하게 가게를 나섰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의상실에서 돌아온 후, 천천히 화장을 지우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곤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그 곁에서 제인이 루나의 머리를 천천히 빗겨 주었다.

비아는 종종 아키스가 늦을 때면 차를 가지고 와 루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루나는 오늘도 밖에서 있었던 일을 비아에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셨군요.”

“네, 의상실에서 만났어요. 그 페니라는 영애는 정말 고귀한 명문가의 여식이래요. 혹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참 신기해요. 예전에는 그런 신분의 영애들과 엮일 일이 없었거든요.”

루나는 자신의 엄마뻘인 비아 앞에서는 이상하게 솔직해졌다.

비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황후 폐하를 제외하면 사교계에서 공작 부인보다 높은 지위의 여인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분께도 공작 부인이 관심을 가져 주시는 건 영광인 셈이죠.”

곱게 나이 든 얼굴의 비아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루나는 마주 미소 지었다.

“나,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요? 같은 여자를 이렇게 의식한다는 거…….”

“그런 경우도 있답니다.”

말을 마친 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인이 루나의 머리를 땋으려 하기에 손을 휘저어 제지했다. 제인의 솜씨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머리는 비아가 조금 더 잘 땋았다. 비아는 루나의 머리를 손수 땋아 주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남녀 관계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단짝 친구를 사귀는 일이죠. 이성은 외모나 매력, 화술로 구워삶을 수 있지만, 잘 맞는 동성 친구는 하늘이 내려 줘야 하는 거거든요. 처음 본 남녀가 본능적으로 끌리듯, 잘 맞는 동성 친구는 서로를 알아보기도 한답니다.”

“그럴까요? 이것도 본능 같은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분이 아니라도 공작 부인처럼 다정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면 꼭 잘 맞는 친구가 생길 거예요. 공감대를 공유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요.”

비아가 루나의 머리를 마무리하고 손짓하자, 제인이 와서 루나의 머리를 핀으로 고정해 주었다.

“꼭 이렇게 직접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루나는 괜히 부끄러워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마워요, 비아. 조언도, 머리도.”

루나는 수줍게 말했다.

“정말로, 항상 잘해 줘서 고마워요.”

비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공작님이 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쉬셔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아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방을 나갔다.

* * *

<가끔, 아빠가 날 두고 떠날 때 형제자매 한 명이라도 두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난 좋은 언니도, 누나도, 동생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진 게 너무 없으니까. 초라한 형제는 누구나 싫어했겠지.

하지만, 가족을 만들 수 없다면 단 한 명의 친구라도 있으면 좋겠다. 서로 얼마나 가졌는지 재지 않고, 내게서 뭘 빼앗을 건지 경계하지 않을 친구가.

내 가난함을 모르는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사무치는 외로움도, 고통도 조금만 덜어줄 수 있을 텐데. 아주 조금만 덜어 준다면 나는 더 큰 짐도 받아 줄 수 있을 텐데.

친한 친구가 생기면, 수도의 아가씨들이 그랬던 것처럼 같이 산책도 하고 웃고 싶다. 즐거운 곳을 같이 다니고 싶다. 그러면 좋겠다.>

루나는 꿈속의 일기장의 내용을 떠올렸다. 미래의 어느 날,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쓴 일기 내용이었다.

루나는 어제와 비슷한 시간대에 모이라의 의상실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며 그녀는 내심 걱정했다.

‘혹시 페니 영애가 안 왔으면 어쩌지?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던데.’

꼭 남자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도제가 2층 살롱 문을 열어 주었고, 루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페니는 먼저 도착해서 잡지를 보고 있었다.

반가운 기색의 루나와 달리, 페니는 부드럽게 약식으로 인사만 했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반가워요, 페니.”

페니는 무심한 얼굴로 잡지를 읽었다. 루나가 좀 서운해지려 하는 참에 스케치 판을 든 모이라가 올라왔다.

“바뀐 디자인이 어떤가요?”

“예쁜 것 같아요.”

자연스레 루나와 모이라의 시선이 페니에게 닿았다.

“페니 영애, 드레스 디자인을 좀 봐주실래요? 첫 알현용 드레스이니 황후 폐하의 취향을 잘 아는 분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루나의 부탁에 페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루나는 은근히 그녀가 부탁 받은 걸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페니는 디자인을 꼼꼼히 보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페니가 아주 조그맣게 덧붙였다.

“어울릴 것 같네요.”

루나는 기민하게 그 말을 알아듣고 미소 지었다.

“……혹시, 영애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나요?”

루나는 지금 <월플라워 부인>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마법책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혼자만 알고 있기 답답했다. 그녀 안의 로맨스 마니아의 피가 들끓었다. 혹시 페니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면 스토리의 골조라도 말해 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군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에 루나는 실망한 듯했고, 페니는 그 눈빛에 움찔했다. 페니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루나는 그녀가 내려놓은 찻잔 옆에서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봉투 끝으로 티켓 두 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연극 티켓이네요? 연극 구경이라도 가시나요?”

루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런데 페니의 뺨이 훅 붉어지는 것이었다. 페니가 급히 티켓을 집어 감추려 했다.

그때, 루나의 눈에 스치듯 티켓에 적힌 제목이 들어왔다.

“<백기사의 연인> 연극 티켓……? 와, 1열 중앙이네요. 세상에…… 이거 이미 매진된 것 아니에요? 대배우 테세스 주연 맞죠?”

제국에서 연극을 보는 건 귀부인들의 중요한 유희 거리였다. 티켓값은 출연 배우에 따라 결정되었다. 출연하는 배우가 유명하고 몸값이 비쌀수록 티켓값도 올라가는 식이었다.

그중 최고의 값을 자랑하는 공연은 테세스 남작 주연의 공연이었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평생 연극 구경도 못해 본 미래의 루나도 테세스의 공연에는 한번 가 보는 게 꿈이었을 정도였다.

테세스의 공연은 시작일 반년 전부터 모든 티켓이 매진되는 걸로 유명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반짝이는 눈으로 페니를 보았다.

“……이거 보고 싶어요?”

페니가 붉어진 얼굴로 새침하게 되물었다.

“보고 싶기야 하죠. 하지만 전 회 차 매진이라고 들었어요.”

“아는 사람이 있어서 티켓을 구할 수 있었어요. 두 장이라 한 장이 남긴 한데…….”

“이 귀한 티켓이 남아요?”

“……남는 거니까 보고 싶으면 오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런 신세를…….”

“……어차피 누군가 가지 않으면 버릴 거예요.”

페니의 말을 알아들은 루나의 입이 타원형으로 살짝 벌어졌다. 환희의 동그라미였다. 페니가 구시렁대듯 작게 덧붙였다.

“안 가도 돼요. 바로 오늘 저녁 공연이거든요.”

“갈래요!”

루나는 페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고, 페니의 뺨이 또 한 번 붉어졌다.

그녀는 급히 공작가에 늦는다는 쪽지를 보냈다.

* * *

공연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루나는 공연 내내 압도되어 숨도 못 쉬고 보았다.

“와, 정말 재미있었어요! 영애는 어땠어요? 나, 연극 보는 것 처음이거든요.”

“처음이었어요?”

그 말에 도리어 페니가 놀랐다.

“네, 정말 너무 재미있었어요. 노래를 하는 연극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정말 멋져요. 배우들이 정말 노래를 잘하네요. 거기다가 연기는 또 얼마나 실감 나게 하는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다니.

페니는 괜히 심장이 뛰고 기분이 민망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 베푼 호의에 누가 이렇게 진솔하고 크게 기뻐해 주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솔직하네.’

루나는 눈을 반짝이며 재잘재잘 공연의 어디가 좋았는지, 어느 부분이 감동이었는지를 말했다.

‘공작 부인은 귀여운 여자구나.’

페니는 루나를 보며 생각했다. 이상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겐 어린애 같은 해맑음이 있었다. 철이 없어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친척 집에서 갇히다시피 자랐다던가, 어릴 적부터 사교계를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고 했지.’

어쩌면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들을 접하지 못한 채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태생이 순수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리기 마련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저녁 식사 시간에 늦겠어요.”

페니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때, 페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루나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뺨이 다시금 확 달아올랐다.

“벌써 저녁 시간이네요. 지금 돌아가도 각자 저택의 저녁 시간을 놓칠 거예요. 그렇죠?”

루나가 수줍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루나는 은근히 기뻐 보였다.

* * *

그 무렵, 공작가의 만찬 홀.

아키스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홀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늘따라 쓸데없이 넓은 만찬 홀은 조용하기만 했다.

“……언제 온다고?”

벌써 세 번째 질문이었다.

“연극만 보고 금방 오신다고 했습니다만…….”

공작 부인의 쪽지를 받은 집사만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사실, 집사도 공작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다. 분명히 부인과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돌아왔을 것이다.

혼인 후, 아키스는 놀라울 정도로 가정적이었다. 이전에는 며칠이나 아카데미에서 밤을 새우거나 호텔에서 지내다 온 적도 많았고, 툭하면 서부로 연구 목적의 여행을 떠났다.

아키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냅킨을 내려놓았다.

“아내가 오면 내게 바로 알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저택의 만찬 홀은 다시 조용한 침묵이 지배했다.

아키스는 홀을 나서며 생각했다.

참 이상했다.

원래 이 저택은 늘 조용하고 적막했는데, 그녀가 없는 것만으로 드넓은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 * *

페니와 저녁 식사까지 함께하고 로텐베른 공작가에 돌아왔을 땐, 이미 거뭇한 어둠이 저택 전체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루나는 아직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너무 재밌었어.’

공연이 최고로 재밌었던 건 물론, 극장에 아는 사람이 있는 페니 덕분에 극장의 지배인이 직접 인사까지 왔다.

거기다 같이 먹었던 저녁도 정말 맛있었다. 페니는 루나를 깊숙한 골목에 있는 조용한 레스토랑에 데려갔는데 디저트까지 모두 훌륭했다.

‘덕분에 정말 최고의 하루를 보냈네. 페니는 정말 멋있는 것 같아.’

비슷한 나이 때의 페니는 루나와 달리 유복하게 자란 티가 났다. 그래서 좋은 것들을 보고 먹으면서도 대단히 초연해 보였다.

그것을 질시한다면 아니꼬워 보일 텐데, 이상하게 루나는 자신과 다른 페니가 굉장히 멋져 보였다.

“컹! 컹!”

마차가 들어오자, 울프가 뛰어들어 와 루나를 반겼다. 루나는 평소보다 기뻐 보이는 울프의 머리를 쓰다듬고 꼭 안았다.

“남편은요?”

“응접실에서 부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루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있었던 신나는 일들을 어서 아키스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아키스의 뒷모습을 보고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키스는 그녀의 기척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외출에서 너무 늦지 말라는 따끔한 말을 하기 위해 그녀를 모른 척했다. 가뜩이나 그녀에게 약하기에 그녀에게 근엄해 보이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뭘 이렇게 집중해서 보는 거야?’

그 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루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아키스의 눈을 가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체향이 그를 감쌌다.

“누구게요?”

루나는 해놓고서 아차, 했다. 자기가 너무 스스럼없이 굴었나 했다.

“…….”

한편, 아키스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장갑 낀 손에 가려진 아키스의 눈이 커졌다.

‘지금 이 여자가 뭘 하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쳤다면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스런 행동에 아키스는 몸이 굳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지? 아키스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당장 끌어안고 싶어졌다.

“나 왔어요.”

루나는 아키스가 반응이 없자, 쭈뼛대며 손을 내렸다.

아키스는 무의식중에 내려가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곤 그녀의 팔을 확 끌어당기자 루나는 자동으로 그의 무릎에 앉게 되었다.

“장난쳐서 화났어요?”

루나가 배시시 웃었다.

아키스의 심장이 거품이 된 것처럼 몽글몽글 녹아 내렸다. 분명 무뚝뚝하게 말하려 했지만…… 진작 불가능했다.

“별로.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그게, 오늘 말이에요, 페니 영애를 만나서 같이 연극도 보고 식사도 했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루나의 입가는 기쁜 듯 풀려 있었다. 곧이어 그녀는 조잘대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늘어놓았다.

아키스는 그녀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던 짜증이 단번에 격퇴되는 걸 느꼈다.

언제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그녀의 웃는 얼굴과 키스 한 번에 사르르 짜증이 사라졌었다.

……도대체 나란 놈은 어떤 놈이 되어 가는 거지?

“나, 친구와 둘이서 외출한 거 처음이에요. 페니와 오해도 풀었구요.”

루나가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그녀의 말캉한 몸이 아키스의 탄탄한 몸에 비벼졌다.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다 잊고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무슨 오해인지 궁금한데.”

“말하자면 길어요.”

루나는 아키스의 볼에 쪽, 키스했다.

아키스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갈비뼈 아래가 쿡쿡 쑤시고 심장이 근질근질했다.

* * *

“또 페니를 만나도 돼요?”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들어온 루나가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빗으며 물었다.

아키스는 침대에 앉아 책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걸 왜 내게 묻습니까? 만나러 나가기 전에 집사나 내게 꼭 말만 해 주면 좋겠군요. 당신이 어디로 외출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알겠어요.”

루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니까 의외로 말도 잘 통하더라고요.”

루나는 기분이 살짝 들떴다.

반면, 아키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치졸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세상 밖을 알게 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게 싫으면서도 좋았다.

독점욕.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에겐 또래 친구가 없으니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할 친구가 있으면 좋으리라.

“……종종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내요. 내가 기억하기로 페니는 성품이 괜찮은 사람이죠. 가문도 공작가와 격이 맞으니 어울리기 편할 겁니다.”

“어쩌면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루나는 수줍게 말했다.

“사실은 고민이에요. 오늘 페니가 오늘 연극도 보여 줬고, 사례를 해야 할 텐데 뭘 하면 좋을지…….”

“올해 보석 경매 티켓을 구해 주죠. 가장 앞자리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두어 달 후에 주최하는데 같이 가도록 해요.”

“보석 경매요?”

“제국 귀부인들에게 가장 인기 좋은 경매 중 하나입니다. 소장품이 괜찮아서 티켓을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구경할 만할 거예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보석이 있으면 사도록 하고요. 티켓을 구하는 대로 말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키스.”

루나는 몹시 기뻐했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페니를 만날 때 뭘 입고 나가면 좋을까요? 아아, 벌써 기대돼요.”

아키스는 순간 멈칫했다.

“내일 또 만나기로 했다고요?”

아키스는 기분이 묘해졌다. 설레 하는 루나의 얼굴은 꼭 첫사랑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사춘기 소녀 같았다.

“네, 페니가 재미있는 곳을 많이 알더라고요. 내일은 머릿결을 좋게 만드는 살롱에 데려가 준대요. 가 봐도 괜찮죠?”

루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별 곳이 다 있다 싶어 아키스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거긴 어떤 곳이죠?”

“음, 귀부인들이 가는 회원제 미용 살롱이 있대요. 아무나 못 가는 데라고 하는데, 그곳에 날 소개해 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일모레엔 모이라의 숍에서 드레스 가봉을 하는데 와서 같이 봐주기로 했고요.”

방금 페니와 차라도 마시는 사이가 되라고 권한 건 아키스였다. 그러나 매일 만나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건 조금 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키스는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지켜서 만날 테니 걱정 말아요. 페니도 명문가의 사람이니, 조심해서 대해야겠죠?”

루나는 그렇게 말했으나 이미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아키스는 마음이 조금 답답해졌지만 왜인지 몰랐다. 그는 이런 자신의 유치한 질투를 인정하기엔 제 감정에 서툴렀다.

* * *

서로 외롭던 두 사람이 만났으니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당연했다. 거기다 루나와 페니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는데, 마치 전생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양 서로가 친숙했다.

어느 날 페니는 약속한 대로 루나를 회원제 뷰티 살롱에 데리고 갔다.

고가의 뷰티 살롱은 고객의 신분을 엄격하게 가리는 곳이라 했다. 거기다, 같은 여성 회원의 추천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정말 그냥 받아도 돼?”

“괜찮아. 어머니도 회원인데, 이번 달엔 사교 모임이 너무 많아서 한 번도 뷰티 살롱에 못 가셨거든. 대신 네가 받아 준다면 기뻐하실 거야. 마음에 들면 너도 가입하면 되잖아.”

루나에겐 손뼉을 칠 만큼 반가운 이야기였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만 해도 좋은데, 페니와 함께 간다니 더더욱 기뻤다.

“나도 가입할 수 있을까?”

“응, 당연하지. 보통은 가입 심사 기간이 꽤 길어. 물론, 공작 부인이라면 수도 어떤 살롱도 맨발로 달려와 반길 테니 넌 예외겠지만.”

“왜 가입 심사까지 있는데? 아무나 가입을 못할 정도로 회원비가 비싸?”

페니는 루나의 순진한 말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평소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꾹 눌렀다.

“그게, 여기선 옷을 벗고 마사지를 받기도 하거든. 귀한 신분의 여인네들이 옷을 벗는 곳인데 아무나 들어오면 큰일 나잖아. 그래서 관리사는 물론, 모든 직원이 여자인 데다 신분 검사도 아주 철저해.”

“살롱에서 옷을 벗는단 말이야?”

루나는 페니의 말에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해괴한 곳이 있다니.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란 루나에겐 문화 충격이었다.

“당연하지 않아? 그래야 온몸의 피부를 곱게 만드는 관리를 받지.”

“상상도 못했어. 와, 정말 신기한 곳이 다 있구나.”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루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부자들이 다니는 살롱이 어떤 곳인지 정말 궁금했다. 사실, 페니나 아키스 정도의 가문 사람들에게는 부자라는 말도 겸손한 말이긴 했지만.

살롱은 겉보기엔 평범한 중산층의 저택 같았는데, 안으로 들어서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빛났고, 공간 곳곳에는 화사한 장식물들이 놓여 있었다. 화사한 곳이었다.

곧 직원들이 페니와 루나를 화려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부드러운 천을 깐 붉은 벨벳 침대가 놓여 있었다.

“수백 송이의 장미를 압축하여 만든 최고급 장미 오일입니다. 지금부터 이걸로 피부를 마사지해 드릴 거예요. 잠시만 엎드려 주시겠습니까?”

루나는 약간 민망함을 느끼며 그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침대에 엎드렸다.

페니의 말대로 옷을 전부 벗는 건 아니었고, 거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얇은 비단 천으로 온몸을 감싸고 그 위에 욕의까지 걸쳤다.

먼저, 부드러운 손을 가진 여성 관리사들이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루나의 등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었다.

“흐으, 느낌이 이상해요.”

루나는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냈다.

근육이 꾹꾹 눌리는데 시원하면서도 야릇한 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달콤한 장미 향이 코끝을 간질여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피부가 매끈매끈해지실 거예요.”

그 말에 루나는 엎드린 채 뺨을 붉혔다.

“그런데 이미 피부가 정말 놀랄 만큼 매끄러우세요. 이런 피부는 유지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죠.”

관리사 두셋이 붙어 루나의 피부를 정성 들여 마사지했다. 묵은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코스는 손톱과 발톱의 관리였다. 페니와 루나에게 나란히 관리사가 두 명씩 달라붙어 정성 들여 손발톱을 갈아 주고 오일로 마사지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헤어 관리를 받았다. 루나의 매끄러운 긴 금발 머리에 해초와 캐머마일 꽃을 짜내 만든 기름으로 오래 마사지를 한 후, 천천히 헹궜다. 두피를 꾹꾹 누르는데 이 또한 몹시 기분이 좋아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다 마치고 나니 머릿결이 그야말로 비단 실타래 같았다. 손가락을 쓱 미끄러뜨리면 사르르 쏟아져 내릴 정도였다.

“와, 이거 봐. 머릿결이 정말 좋아졌어.”

“원래 머릿결이 좋으세요. 이만큼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분은 흔치 않지요.”

관리사가 공손하게 말했다.

‘아키스가 좋아할까?’

예전에 새틴이 아키스가 머릿결이 좋은 여자를 좋아한다 말했던 기억이 났다. 반은 한 귀로 흘려서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지만. 그리고 새틴이 아키스에 대해 하는 말은 태반이 망상이고 추측이었기에 루나는 반만 믿었다.

그래도 밤에 성관계를 맺을 때,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무릎 위에 올라타서 할 때는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기도 하니까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관리사들은 차를 주고 나갔다. 둘만 남았다. 루나는 뽀송해진 몸이 신기해 몇 번이나 제 피부를 쓸었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

페니가 쌀쌀맞은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속뜻은 달랐다. 같이 있을 때면 항상 루나의 기분이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응. 신기하고 좋아. 매일매일 마사지를 받으면 손이 부드러워질까, 페니?”

가운 차림의 루나는 마사지 받고 있는 제 손을 보며 작게 물었다. 그 말에 페니는 무심결에 루나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루나의 손이 너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가느다란 루나의 부드러운 손. 그러나 자세히 보니 손바닥이 꽤 거칠었다. 곱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비해 손은 딴판이었다.

루나도 그걸 눈치채고 멋쩍게 웃었다.

“난 숙부 집에서 자라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거든.”

“나도 알아.”

페니는 작게 대답했다.

“응? 뭘 알아?”

“네가 숙부 집에서 자란거 말이야. 꽤 유명하거든.”

“그래?”

페니는 루나의 출생에 대해 알려진 작은 일로도 사교계 사람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는지, 그건 루나가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네 숙부는 정말 나쁜 사람이다. 너 같은 애한테 일을 시키다니.”

페니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래서 마음과는 달리 몹시 무뚝뚝한 목소리가 나왔다.

루나는 작게 웃었다.

“사실 난 꽤 일을 잘해. 요리도 할 줄 안다? 이건 비밀이야.”

친구는 비밀을 공유한다고 했다. 또래 친구에게 자기 비밀을 말한 건 처음이라 루나는 괜스레 설렜다. 페니는 눈을 깜빡였다.

“사실 네가 처음부터 신경 쓰였어.”

“그게 무슨 말이야?”

“마리벨 후작 부인이 너에 대해 말했거든. 넌 사업을 배우러 다닌다며.”

루나도 허울뿐이지만 귀족이었다. 귀족들은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없다. 아키스도 큰 상회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는 결제만 하고 일은 대리인들이 했다. 교수나 판사, 공직에 관련된 일만 예외였다.

페니는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아,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회 일에 관심이 있어. 하지만 그런 건 배우지 말라고 부모님이 말리셔서 내가 마음대로 쫓아다니는 정도지. 나한텐 절대 일 안 물려주신다고 하셨어. 그래도 난 포기 안 해.”

“…….”

“귀족들은 거드름 피우며 직업 가지는 걸 부끄러워하잖아? 하지만 돈이라면 누구보다 정신을 못 차리지. 이중적이야. 난 그들과 달리 솔직해. 일 욕심도 있고.”

그래서 욕을 엄청나게 먹고 있지만. 사실 그러든 말든 상관없었다. 루나는 눈을 반짝였다. 역시 페니는 달랐다.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넌 직접 돈을 벌어 본 적도 있어? 귀부인도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공작 부인이 돈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설마. 페니는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다.

“저기, 결혼 전에 혼전 계약서는 제대로 작성한 거지? 예를 들면, 당연한 신부의 권리 있잖아. 공작 부인들에게만 상속되는 재산이라든가…….”

루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게, 사실 그가 공작 부인의 재산을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대부분 거절했어.”

페니의 눈이 커졌다.

“뭐?”

“너무 급하게 결혼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거든. 그리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 난 지참금 한 푼 못 가져가는데 재산 증여까지 원하는 건 좀……. 그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 공작 부인을 그만두게 될지 몰라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받았다, 이런 설명을 세세하게 할 순 없어 루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반면, 페니는 머리가 다 아찔했다.

‘이 애, 어쩌지? 왜 이렇게 맹추 같을 정도로 착해? 너무 순진해서 제 잇속을 챙길 줄도 모르고. 거기다 공작이…… 그럴 줄은……. 공작 부인을 재산이라곤 한 푼도 없는 상태로 만들다니…….’

페니는 어떻게든 루나의 순수함을 지켜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 줄 생각이었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면 정말 큰일 나겠구나. 약간 오해가 가미된 결론이었다.

“혹시 그러면 품위 유지비를 제대로 지급 받고 있지 못한다거나…….”

“에이, 그럴 일은 없어.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내 앞으로 예산이 충분히 배정되어 있다고 했는걸. 매일매일 쇼핑만 해도 부족할 정도라고 보좌관이 말해 줬어.”

자신의 쇼핑비가 무제한이라는 걸 모르는 루나가 순진하게 답변했다.

“그리고 너와 식사 정도는 언제든 마음껏 써도 되고, 모이라의 숍에서 드레스도 마음껏 맞추라고 했는걸.”

루나는 해맑게 웃었지만 페니는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정도는 페니의 기준에서 사탕값도 아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짠돌이로군. 로텐베른 공작, 다시 봤어.’

페니는 미미한 불쾌감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다만, 내 가게나 일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

“앞으로 어떻게 살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좀 있으면 좋겠어.”

루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페니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녀에겐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페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 좋아. 내가 아는 건 뭐든지 가르쳐줄게. 난 상업법과 회계, 그리고 경영을 공부했어. 궁금한 건 뭐든 물어봐.”

“응!”

루나는 페니에게 다양한 걸 물어보고, 또 배웠다. 채권의 개념, 무역 시장, 유망한 사업. 페니는 뭐든지 알고 있었다.

“헤어 살롱을 연다는 건 괜찮은 계획이야. 네가 제일 잘하는 분야를 업으로 삼는 것도 좋아.”

“그래? 하지만 내가 제일 잘하는 분야는 아마 안 될걸.”

“응?”

루나는 붉은 책과, 수많은 번역서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순히 번역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었지만 위험했다. 하지만 누구도 원본을 모르는 번역물이라면? 예를 들면 그 붉은 책 같은…….

“루나?”

“아, 아무것도 아냐. 정말 페니는 대단해. 흥미로워.”

다음날부터 루나는 페니를 만날 때마다 질문 거리를 잔뜩 가져왔고, 페니는 아는 바는 모두 대답해주었다. 그 바람에 페니도 다시 책을 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페니는 아는 것도 많아. 대화하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최고야.”

루나는 늘 페니를 보면 그렇게 말했다. 그런 루나와 헤어지고 나면 페니는 집에 와서 잠시 숨을 골랐다.

‘……하, 정말 어이가 없네.’

어떤 감정을 참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는 감정이 일렁였다. 그녀는 손으로 벽을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벽을 한 대 치고 싶었다.

‘너무…….’

페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귀여워…….’

루나는 페니가 소개해 주는 곳이며 연극 공연들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꼭 세상을 처음 알게 된, 막 눈을 뜬 새 한 마리 같다고 할까? 작은 일들에 지저귀며 우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 미치겠다.’

순간 루나를 여동생처럼 대할 뻔했다. 손을 어루만진다든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든가. 공작 부인의 신분인 그녀에게 무엄한 일일지 모르지만, 루나는 너무 귀여웠다.

“공작 부인이 이렇게 사랑스런 여자일 줄이야.”

* * *

“치울까요?”

그 무렵, 공작가의 만찬 홀.

이 만찬 홀에서 조용히 식사하는 이가 젊은 공작 혼자뿐인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이 시집오기 전에는 홀로 식사하는 공작을 시중드는 일에 익숙한 집사였다.

그런데 요즘, 늘 공작 부인이 앉던 아키스의 대각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아키스는 고요 속에서 홀로 천천히 식사했다. 조금 과장해서 포크라도 떨어뜨리면 천둥 같은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물론, 아키스의 식사 매너는 완벽해서 포크를 떨어뜨릴 일은 없었지만.

아키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평소보다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그는 후식 대신 나온 와인을 마시며 무료함을 느꼈다.

‘……식사 중에 딴짓을 하신 적이 없는데.’

집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현실인지 아닌지 제 눈을 의심했다.

‘성냥을 쌓고 계셔……?’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성냥을 쌓고 있었다. 심지어 성냥도 잘 쌓았다.

성냥의 탑이 마법의 탑만큼 웅장하게 높아질 무렵, 집사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와인 잔을 치웠다. 왠지 모를 압박감에 평소보다 긴장해 급히 정리했다.

그때, 아키스가 낮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나가십니까?”

“개를 데리고 산책이나 해야겠다.”

심지어 집사는 며칠 전, 공작이 울프를 바둑이라 부르는 모습까지 목격했다. 왜 이름이 바둑이가 되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공작이 맹견을 바둑이라 부르면 바둑이인 것이었다.

* * *

“페니는 대단해요! 연극도 매번 보여주고요, 또. 물어보는 건 뭐든 가르쳐줘요, 엄청나게 부자고 똑똑한데 조금도 과시를 안 해요. 사실 너무 좋은데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제하고 있어요.”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안겨 침실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키스는 계속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최근 페니에게 경쟁심리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즐거웠습니까?”

“네. 뷰티살롱에 다녀왔다가 식사했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도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네요.”

아키스가 몸을 숙여 루나의 머리 향기를 맡았다.

오늘도 다녀왔다는 그 뷰티 살롱이라는 곳 덕분에 그녀의 머릿결은 비단결 같았고, 머리카락에서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풍겼다. 아키스는 뷰티 살롱이 머릿결 관리를 받는 미용실 정도라 생각했다.

“피부가 매끈매끈하지 않아요? 오늘은 초콜릿 마사지를 받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단 향이 나더군요.”

그녀의 말캉한 몸에서 초콜릿 냄새까지 나니 정신이 나가게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어떻게 온몸에서 초콜릿 냄새가 나는 거지?

아키스가 나직이 물었다.

“너무 좋은 곳 같아 그러는데, 어떤 걸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설명 좀 해 줄래요?”

“그냥 온몸에 피부에 좋은 것들을 녹인 오일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요. 오늘은 초콜릿이었죠. 피부 노화를 방지해 준대요.”

“……여자 관리사들이?”

“물론이죠. 처음에는 옷을 벗고 마사지를 받는 게 충격이었지만, 이제는 거기서 목욕까지 안 하고 오면 얼마나 허전한데요.”

옷을 벗고 목욕까지 한다고?

순간 아키스는 그녀가 새하얀 몸을 다 드러내고 온몸에 초콜릿을 바른 광경을 상상했다. 끝내주게 요염했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는 간신히 자제력을 발휘해 침착하게 대꾸했다.

“별 장소가 다 있군요.”

“그렇죠? 하지만 마사지를 받으면 얼마나 시원한데요. 처음에는 벗은 몸을 만지는 게 민망했는데.”

루나는 무구하게 말했다.

아키스는 회원권을 끊기는커녕 그 살롱과 아내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참았다.

그러나 아키스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새 친구가 생긴 것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심경 변화인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루나는 별안간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아침 식사를 하고 파우더 룸에서 혼자 홍차를 마시겠어요.”

아키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키스가 바쁘지 않은 날에는 아침 식사 후 홀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느새 공작 부부의 일상이었다.

“티타임을 혼자 보내겠다고요?”

“페니가 그러는데, 세련된 귀부인들은 아침 식사 후에 파우더 룸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대요. 그날 할 일을 정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고 했어요. 내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아키스를 귀찮게만 할 것 같은걸요.”

“난 당신이 내 서재에 오는 게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거기다 당신이 딱히 편지를 쓸 곳이…….”

“페니에게 쓸 거예요.”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뾰로통하게 답변했다.

“나도 친구가 생긴걸요.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갑작스레 시작된 그녀의 내외.

아키스는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항상 사람들이 제게 관심을 갈구하는 삶만 살아왔다. 뒷골목의 부랑아였을 때도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했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난 후에 그는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거기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정도로 잘생겼다. 그의 신분과 외형에 사람들은 꿀에 꼬여 드는 벌처럼 달려들었다. 자신이 아쉬운 쪽이 되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그녀가 왜 이러는 거지?’

왜 자꾸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한단 말인가.

아키스는 말도 못하고 테이블 귀퉁이만 손으로 꽉 눌렀다. 홀로 그걸 눈치챈 집사는 대리석 테이블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키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데 그 권리를 빼앗을 순 없었다.

루나는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 그럼 이따가 봐요. 알렉, 내 방으로 홍차를 좀 가져다주겠어요?”

루나는 점점 한계로 치달아 가는 아키스의 인내심을 모른 채 순진하게 말했다.

* * *

파우더 룸은 귀부인들이 공식적으로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장소였다.

보통 귀부인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 보통 파우더 룸에 놓인 긴 소파에 드러누워 책이나 편지를 읽는다. 혹은 편지 답장을 쓰기도 한다.

그다음 내킬 때 레이디스 메이드를 불러 몸단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외출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 정말 월플라워 부인이 너무 재미있어서 미치겠네…….’

그러나 루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한 건 핑계였다.

당연히 붉은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요즘 아키스가 그녀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중이라, 몰래 책 읽을 시간을 가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루나는 하녀까지 모두 내보내고 긴 의자에 앉아 밀크 티를 마시며 아침 독서를 즐겼다. 입안에서 딸기잼을 바른 부드러운 쿠키가 사르르 부서졌다.

작품에는 중반부 이후 농염한 베드 신이 나왔다. 그 강도가 루나가 읽던 소설들에 비하여 농염했다. 월플라워 부인의 성적 쾌감에 대해 다각도로 묘사되는 몇 줄에서는 뺨이 다 붉어졌을 정도였다.

‘그래, 우드랑 맺어질 줄 알았다니까? 정말 끝내줘.’

충격적인 건 베드 신의 상대가 남편이 아니었다. 비밀스런 기사 역할의 미남자, 우드였다.

지금까지 루나가 읽은 로맨스 소설들은 모두 상대가 남편이었다. 미혼 남녀의 베드 신이 묘사되더라도 그 둘은 꼭 결혼하는 걸로 엔딩이 났다. 파격적이었다.

‘드디어 완결이야.’

그리고, 그녀가 애독했던 월플라워 부인이 드디어 끝났다.

해피 엔딩이었다. 비밀스런 남주인공 우드와 재혼한 월플라워 부인은 남편의 상단을 빼앗아 대단히 유명한 경영자가 되었다.

악녀 아이비는 굴뚝 청소부가 되었고, 남편은 술주정뱅이로 전락해 집도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다.

마지막까지 정말 짜릿하고 통쾌했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해.’

제국 유행하는 통속 소설들은 야릇한 것들도 많았지만, 기본적인 스토리들이 보수적이었다.

여주인공이 부인이라면, 거의 다 가정을 지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자극적인 묘사가 나와도 어떤 체계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월플라워 부인은 개심한 남편을 용서하기는커녕 더 비참한 꼴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권선징악의 끝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월플라워 부인이 어릴 적에 큰 지진을 겪었다는 것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부분이었다.

‘예전에는 지진이 있었나?’

루나가 알기로 제국에는 전국을 관통하는 큰 지진은 발생한 적이 없으며, 일기장을 미루어 보아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고대에는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많았던 듯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

루나는 몹시 아쉬움을 느꼈다.

‘게다가 이 재미있는 소설을 딱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니…….’

가슴이 쓰라릴 만큼 아쉬웠다.

루나는 오늘도 잊기 전에 책 내용을 적어 두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새로운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글을 재미있게 읽었나요?>

질문이었다.

루나는 헉, 소리 나게 숨을 들이켰다. 질문 역시 소설과 마찬가지로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루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펜을 들어 대답을 적어 넣었다.

<네.>

<이 소설이 재미있다면 널리 보급해 주세요.>

“……보, 보급?”

루나는 뜻밖의 말에 눈이 커졌다. 그다음 줄이 떠올랐다.

<소설의 자료 축적을 위해 감상을 적어 주세요.>

“……어? 가, 감상?”

감상이라니? 책이 사람처럼 관심이라도 바란단 말인가?

<감상을 적어 주시면 가용 가능한 언어로 다음 소설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적어 주세요.>

“뭐라고?”

루나는 입을 떡 벌렸다.

고대 문명이란 정말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루나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가용 가능한 언어라 함은 고대어를 말하는 것일 거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급하게 감상을 적기 시작했다.

<정말로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월플라워 부인이 부자가 되는 엔딩이 몹시 통쾌했고…… 파격적인 스토리 라인…… 남주인공이 멋있었습니다. 특히 우드가 빗속에서 월플라워 부인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은…….>

쓰다 보니 감상이 폭주해서 루나는 페이지를 꽉 채우고 말았다.

<다만, 월플라워 부인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두 간극이 공평하게 묘사되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루나는 마침표 하나까지 꼭 눌러 적어 감상을 마무리했다.

“와…….”

다음 순간,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나가 쓴 글자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사라져 갔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꼭 책이 글자를 섭취한 다음 새로운 글자를 낳는 것 같았다.

<감상을 참고로 하여 다음 작품을 준비하겠습니다.

본 책 이용의 적절한 수준의 사용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이용 방법을 안내드립니다.

이전 작품을 보시려면 책의 가장 뒤편에 가용 가능한 언어로 책의 제목을 적어 주시면 글자가 다시 떠오릅니다. 해당 책의 이용을 종료하시려면 끝이라는 글자를 적어 주세요.>

루나는 급하게 월플라워 부인이라고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 적어 넣었다.

<월플라워 부인은 총 두 권 분량입니다. 상기 작품의 원하는 권 수를 적어 주세요.>

루나는 급하게 1권을 적어 넣었다.

그러자 책은 말 그대로 월플라워 부인 1권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월플라워 부인 1권으로 책이 변한 것이다.

‘그렇구나……!’

루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책은 한 권뿐이나 이런 식이라면 수십 권의 책을 한 권에 압축할 수 있었다. 고대의 마도구들이란 정말 신비했다.

‘그러니까…….’

루나는 급하게 ‘끝’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러자 서서히 책이 빛나며 이번엔 새로운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보석 영애 이야기>

루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책에 코를 박았다. 이번 이야기는 제목이 평이했다. 그러나 루나는 곧 정신없이 책에 빠져들었다.

‘이, 이 이야기도 재미있잖아?’

새로운 이야기는 혼전 임신을 한 젬이라는 이름의 영애 이야기였다. 혼전 임신을 다룬 게 파격이었다.

‘그러니까, 이 마법책은…….’

루나가 오늘 책에 대해 알게 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책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책은 루나의 감상을 통해 취향을 수집한다.

책에 떠오르는 내용은 새로운 1장씩의 분량,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면 모든 내용을 불러낼 수 있다. 책 뒤에 그 책의 제목과 권수를 적으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고대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일곱 가지 고대어를 모두 아는 이만 읽을 수 있다. 월플라워 부인의 각 장은 무작위의 고대어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여자만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이다.

흥미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이지 혼자 읽는 게 너무 아까워, 그거 하나 빼고 최고야.’

루나는 천장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만일, 여자가 고대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전에 남장을 하고 번역 일을 할 때 생각했다. 서점에는 수많은 책들이 흘러들어 왔지만 개중 금전적 가치가 있는 책은 마법서가 대부분이었다. 그 외의 책들은 버려지거나 방치되었다.

‘어쩌면 마법서 외에도 이런 고대문명이 많을까.’

다른 번역가들은 속도가 느려 무리일지 모르지만 루나는 고대어를 제국어보다 더 빨리 읽었다. 만일 고대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세상이라면 루나는 이런 고대문화들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일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선 안 될 일이지.’

루나는 피식 웃으며 책을 덮었다. 하지만 붉은 사과 같은 유혹은 그 뒤에도 종종 루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그리하여 아침마다 몰래 비밀스런 독서를 하랴, 페니를 만나랴 루나는 최근 바빴다.

조금 신경쓰이는 점이 있다면 아키스와 이전만큼 시간을 못보낸다는 거. 그거하나였다. 하지만 아키스는 낮엔 늘 바빴다.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 얼굴을 보러 갈까?’

책을 다 읽고 나자 루나는 아키스의 서재문을 조심히 두드렸다.

“아키스, 바빠요?”

아키스는 안경을 끼고 문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새롭게 마음이 설렜다.

페니와 노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정말 즐거웠지만 항상 가장 큰 설렘은 늘 아키스가 주었다.

“이리 와요.”

아키스가 고개를 들고 손짓했다. 루나는 그에게 다가가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나갔다 오려고요. 페니랑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그 말에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루나는 보지 못했다.

아키스는 목구멍까지 불만이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서재에 앉혀 두고 하루 종일 지켜보다 나가야 할 땐 제 옷 안에 넣어 나가고 싶었다. 좀 소름 끼치는 생각이었지만 그의 심정이 정말 그랬다.

아키스는 그런 제 독점욕을 꾹 누르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은 늦지 마요. 요즘 자꾸 귀가가 늦더군요.”

“그럴게요.”

루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쓸쓸한 기색을 읽고는 내심 놀랐다.

“나가지 말까요?”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루나는 타인의 감정 변화에 대해 눈치가 밝았다. 그 순간 루나는 아키스가 외롭다거나,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페니와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없어 아쉽다는 티를 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 주면 기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피곤한 듯 눈가를 누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중요한 것이니, 다녀와요.”

그러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꽉 잡았다.

“페니가 그렇게 좋습니까?”

“그럼요. 첫 친구인걸요. 좋은데도 데려다주고, 또 아는 것도 많고.”

뷰티 살롱이나 연극 구경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설마 루나가 페니에게 세상 물정을 배우고 있으리라 생각을 못하는 아키스는 또다시 경쟁심을 느꼈다. 심지어 아키스는 돈은 내가 더 많은데, 이런 생각까지 했다.

“너무 그러지 마요.”

루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키스는 루나가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의 어깨 위에 턱을 올리며 속삭였다.

“질투 나니까.”

그리고 루나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어?’

루나는 놀라서 심장이 다 뛰었다.

누가 누굴 질투해?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살살 깨물었다. 휘청하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고 입술을 삼켰다. 진득한 키스가 이어지고, 그의 입술에선 쌉쌀한 홍차 맛이 났다.

‘응?’

루나는 키스를 정신없이 받으면서 자기가 방금 들은 말이 진짜인지 생각했다.

“보내기 싫어지니까 여기까지 하죠.”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수갑처럼 그녀를 옭아맸던 손이 풀렸다. 루나의 입술이 홧홧했다.

그가 속삭였다.

“다녀와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루나는 페니와의 약속장소로 가기위해, 마차에 올라타서도 내내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질투라니.’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하나 보다. 처음 루의 모습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비처럼 루나에게 스며들었다.

이내 격렬한 파도가 되었던 그 마음은 이제 호수처럼 잔잔한 사랑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흐르지 않는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니었다. 웅덩이가 깊어져 호수가 되듯, 그 사랑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작은 감정 표현에도 루나의 세상은 뒤흔들렸다. 그가 자신이 주는 감정보다 아주 작은 감정을 표현해 주기만 해도 설렜다.

‘정말 어떻게 하나. 이러다가 이 마음이 영영 안 끝나겠어.’

마치 아키스의 옆자리가 당연한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그러면서도 설렘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를 너무 사랑했다.

* * *

르시타 후작 부인은 페니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파우더 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까 친구와 점심을 먹고 온다더니, 밖에 나가 또 수모를 당할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다.

그녀가 아는 페니는 늘 완벽한 귀족이었다. 그런 딸이 겪는 역경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다.

“페니, 괜찮니?”

르시타 후작 부인은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다. 기척이 없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페니가 맨발로 긴 의자 위에 비단 가운만 걸친 채 앉아 있었다.

"무슨 일 있었니?"

“어머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죄송해요.”

페니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단지…….”

페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르시타 후작 부인은 페니의 팔을 잡았다.

“그런데 왜 그러니?”

“공작 부인과 친구가 되었어요. 요즘 거의 만나요. 꽤 즐거운 것 같아요.”

“잘되었구나, 그렇지?”

그 사건 이후 페니는 사교계의 투명 인간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평소라면 페니에게 감히 말을 붙이지도 못할 여인들까지도.

후작부인은 딸의 무너진 평판보다 생채기 난 마음이 더 아팠다.

“공작 부인은 사람들 앞에서도 나와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싶어 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울상이니?”

“그녀는 너무 순진해서 그래요. 공작 부인은……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갑자기 그냥 두려워졌어요. 제가 그녀랑 친하게 지내서 피해를 주는게 아닌가 하고요.”

르시타 후작 부인은 그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페니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가끔 이렇게 무너졌다.

“그래서, 너는 공작 부인이 싫으니?”

“아니요, 그 공작 부인은 정말 사랑스러워요. 아키스 같은 사람이 선택할 만한 여자가 있다면 그녀뿐일 거예요.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럼 고민할 것이 뭐 있니?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친구 사이를 어떻게 인위적으로 끊겠어, 그렇지?”

“하지만, 결국 그녀도 날 상처 주면 어쩌죠?”

페니는 늘 도도하고 당당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 르시타 후작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건 네가 잘 알잖니. 한두 번 실수가 있긴 했지. 넌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믿었어. 하지만, 원래는 사리 분별이 되는 아이야. 내가 널 잘 아니까.”

“죄책감이 들어요. 공작 부인이 나 때문에 더 힘든 생활을 하게 되면 어쩌나…….”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고, 일어나게 되면 부인에게 보상할 방법을 찾아보자.”

“보상이요?”

“우린 돈이 아주 많아. 잊었니?”

르시타 후작 부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태생적 품위가 배인 미소였다.

“너희 나이 때 여인들은 아직 순진하지. 듣기로 공작 부인은 지참금 한 푼 가지지 못하고 시집왔다고 들었단다.”

“…….”

“아무리 부인을 귀애해도 공작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내들은 절대 부인에게 쉽게 재산 증여를 하지 않아. 공작 부인이 돈을 넉넉히 쓰는 성정으로 보였니?”

“아니요, 절대.”

오히려 루나는 검소한 편이었다. 이전에도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그 사고방식이 충격적이었다. 페니는 루나의 처지에 대해 약간 오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뒷배가 없는 공작 부인이고, 재산 증여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면 우리 가문의 힘이 필요할 수 있어. 그러니 공작 부인에게 혹시 폐를 끼칠 것 같으면 우리가 힘을 실어 주면 돼. 그러니 이렇게 울지 말고 네가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생각해 보렴.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가장 좋은 친구는 서로 간의 이득과 진실된 우정을 창출할 수 있는 사이다, 라고요. 하지만 그런 말을 가져다 붙이기엔 공작 부인은 너무 순수하고 사랑스런 여자예요.”

“네가 누굴 이렇게나 좋게 보는 건 또 처음 보는구나. 그럼, 우리 가문 차원에서 그녀를 지지하면 돼. 우리는 제국 3대 명문가 중 하나인 르시타란다. 항상 사람이 좋을 때만 있는 건 아니니, 그녀도 어느 때든 도와줄 힘 있는 친구가 생긴다면 손해 볼 게 없지 않니? 그러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아.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고, 용기를 냈다는 판단이 들면 겁쟁이가 되지 말렴. 친구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도 몹시 중요한 일이란다.”

페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눈가를 닦고 표정을 바로 고쳤다.

“제가 바보 같았던 것 같아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르시타 후작 부인은 딸의 어깨를 두드리고 싶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여 겨우 눈물을 참아 냈다. 어쩌면 공작 부인과 페니의 만남이 최악의 상황에 처한 자신의 딸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사교계에서 오래 지내 온 노련한 르시타 후작 부인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루나는 제국 3대 명문가 중 두 번째 가문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물론, 루나 본인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 * *

그러나 페니의 그런 생각이 와장창 깨진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날은 루나와 페니가 개봉을 기다리던 연극이 일주일 미뤄졌다는 소식으로 페니가 조금 실망한 참이었다. 연극이야 안 봐도 그만이었지만, 루나가 연극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은 몹시 귀여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와 달라니 무슨 일이지?’

르시타 가문으로 지금 당장 공작가에 방문해 달라는 급한 연통이 왔다. 페니는 의아함을 느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말로만 듣던 공작가에 직접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을씨년스럽고 커다란 곳이었다. 검소한 미색 드레스에 은은한 화장을 한 루나가 페니의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뛰어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 페니.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페니는 마차에서 내리며 루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루나는 무슨 일인지 곤란한 표정이었다. 공작과 싸우기라도 한 건가? 페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깐 보여 줄 게 있는데, 이리 올래? 미안해, 원래는 저택에 안내해서 차를 대접해야 하는데…….”

“답답해 죽겠네. 어디든 빨리 가서 사정 이야기나 해 봐.”

그녀는 페니를 데리고 공작가의 긴 회랑을 걸어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고대식의 구 신전 건물이 별채처럼 외떨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루나는 손님맞이는커녕 안절부절, 몹시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걸 좀 봐줄래?”

그리고 루나가 신전의 문을 열자, 페니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으응, 그게……. 나도 그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루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남편이 공작저 안에 극장을 만들어 버렸어…….”

그녀들의 눈앞에는 소극장 무대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 장막에 긴 무대, 그리고 정교한 무대 장식. 틀림없는 극장이었다. 무대 장치까지 화려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 이건 도대체 언제…….”

페니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공작에게 연극 취미가 있었니?”

“그럴 리가.”

루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런 거에 전혀 관심 없어. 아아, 정말 나도 그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난 며칠 동안 공사를 하길래, 오래된 건물을 재건축한다 말이 진짠 줄 알았지.”

공작가 본저 주변에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예전 신전 건물을 비롯하여 여러 별채들이 있었다.

공작가에 사는 사람들 수가 많지 않아 이제는 폐허가 된 건물들이었다. 아키스는 루나를 위해 제멋대로 그중 하나를 극장으로 고쳐 버렸다.

“그러니까 이걸 왜 한 건데?”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이걸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이가 테세스 남작의 극단을 사 버렸거든.”

“……응?”

“그래서 오늘 개봉 전의 초연극을 먼저 보여 주겠대…….”

페니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루나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갑작스런 공작의 이 미친 돈지랄을 한 이유를 축약하자면 간단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극단을 구입한 게 아니라 가장 큰 투자자가 됐다는 말이지?

“그이의 보좌관 말로는 실소유주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긴 했는데, 아마도…… 으응.”

“그러니까 그걸 왜…….”

“내가 극단 공연이 하도 좋다고 극찬하니까 투자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대. 정말, 그 속을 누가 알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서…….”

곧, 무대 뒤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소극장이 관객은 둘뿐이지만, 페니는 이 정적과 상황이 익숙했다. 이건 공연이 시작되기 전, 공연을 준비하며 나는 소란이었다.

“그래서 날 갑자기 부른 이유가…….”

“아, 공연을 같이 보기로 했잖아.”

루나가 당혹함이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는 페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곧 사회자가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초연, 테세스 극단의 <원수의 사랑>이 곧 시작됩니다!”

그 말에 루나와 페니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홀린 듯 단둘만을 위해 마련된 자석에 앉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거지?”

“……그런 거 같아.”

루나가 현실감 없다는 듯 대답했다.

“갑자기 불러서 정말 곤란한 거 아니지? 시간 괜찮아?”

페니는 루나가 그걸 참 빨리도 묻는단 생각이 들었다.

곧, 공작가의 하인들이 공연을 보며 마실 음료와, 먹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위주의 달콤한 과자를 내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페니가 명문가 출신이라 경거망동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않았어도, 당황해서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곧, 페니와 루나가 뭐라 대화를 할 새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소프라노로 노래하는 여배우의 목소리는 완벽했으며, 오늘도 테세스의 연기는 훌륭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장인이구나. 이런 환경에서 이만한 연기를…….’

루나와 페니는 같은 생각을 했다.

공연은 당연히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었다. 두 사람만을 위해 제국 최고의 극단이 눈앞에서 해 주는 공연이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프라노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회랑을 울릴 때마다 루나와 페니의 얼굴이 묘하게 식어 갔다.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정말 멋졌어요.”

관객이 두 명뿐이라 페니와 루나는 정말 작은 극장이 떠나가라 열정적으로 박수를 쳐야 했다. 손이 아플 정도의 기립 박수까지 한참을 치고 나서야 끝났다.

공연이 너무도 환상적이었기에 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애매했다. 꿈이라고 해도 안 믿겨질 것 같았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들인 거야?’

페니는 아키스가 아내에게 짠 남자라고 내린 평가를 바로 철회했다.

“저녁 먹고 갈 거지?”

루나는 페니의 손을 잡았다.

“사실 아키스가 저녁 식사에 테세스와 주연 배우들을 초대해 버렸거든. 나, 떨려서 식사도 못할 것 같아. 같이 있어 줄 거지?”

페니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채 물었다.

“공작이 왜 그런 일을 한 거야……?”

“내가 매일 외출해서 연극 공연 보러 다니는 게 힘들어 보였대.”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아내가 다른 귀족들과 섞여 공연을 보러 다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고생하는 게 싫었다는 말 같다. 그것도 스케일에 정도가 있지, 극단을 아예 사 버리다니.

“그럼, 이 소극장에서 매일 극단이 공연한다고?”

“그건 상식이 아닌 거 같다고 겨우 말렸어. 그래서 공연이 있을 때마다 개막 공연 며칠 전에 제일 먼저 공연을 보여 주겠대.”

어느 부분도 상식적인 이야기가 없었지만, 태생이 부자로 자란 페니는 그러려니 하고 납득했다.

“그래도 말려서 다행이지, 뭐야. 매일 공연했으면 정말 곤란했을 거야. 뷰티 살롱과는 다르니까.”

“……뷰티 살롱?”

“으응, 저번에 우리가 간 뷰티 살롱 말이야.”

루나가 붉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거기가 참 좋았다고 몇 번 말했더니…….”

“…….”

설마. 페니는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예감을 무시했다.

“그랬더니, 외부에서 옷을 벗고 남세스러운 관리를 받는 건 조금 그렇다고…….”

“다니지 말래?”

“아니…… 아키스가 공작저 내에 그 살롱의 분점을 열었어. 뒤편에 작은 코티지가 있는데, 거기야.”

“……거기를 만들 때도 저택 보수라고 속인 거니?”

“그런 걸 며칠 만에 만들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니. 당연히 그러려니 했지.”

어이가 없어 벙찐 페니에게 루나가 민망한 기색으로 이어서 말했다. 뷰티 살롱은 상시 오픈이이야.

“아키스가 그러는데 이미 돈을 다 내서 가게를 없애는 데 돈이 더 많이 든대. 정말 왜 이랬는지…….”

페니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돈을 주고 관리사를 빼내 오기만 하면 되니까 이거에 비하면 스케일이 현실적이다.”

사실 현실적인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페니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그날 저녁 만찬 자리는 더 가관이었다. 페니는 상석에 앉은 아키스를 보며 지금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지?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말 오늘 공연 멋졌어요. 평소 동경하던 무대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얼마나 즐거운지…….”

루나는 긴장과 당황으로 가득한 채 최고의 공연을 보인 연극 팀에 찬사를 던졌다.

“덕분에 아름다운 두 분의 시선 속에서 열연했으니, 배우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지요.”

대배우 테세스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루나는 여배우 케라의 열성 팬이었다. 케라는 테세스와 주로 페어 연기를 하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미녀 여배우였다.

“저도 즐거웠답니다.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공연이었어요.”

“제가 케라와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다니, 너무 기뻐요.”

“별말씀을요.”

테세스가 중간에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태생이 바람둥이인 그는 숨 쉬듯 여인들에게 흘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저번에 뵌 것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군요.”

“결혼식 사회를 봐 주신 이후 처음 보는 거죠?”

루나는 미소 짓고 말했다.

“아뇨, 그 뒤에 뵈었지요. 기억 안 나십니까? 얼마 전, <백기사의 연인> 공연 때요. 저번 공연의 1열에 계신 걸 보았습니다. 르시타 영애의 아름다움과 공작 부인의 우아함이 합쳐지니 관객석에서도 그 범상치 않은 보석 같은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더군요.”

루나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일개 관객을 알아봐 주는 대배우라니? 테세스가 공연 1열에 앉은 자신과 페니를 알아봐 준 것이다. 싫을 수가 없었다.

‘이 자식이 내 아내에게 흘려?’

루나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자, 아키스가 테세스의 말을 딱 끊었다.

“요즘 사교계에선 외모 칭찬을 촌스러운 걸로 치지. 내 아내가 몹시도 아름다운 거야 당연하지만, 지적이고 속이 깊은 여성이기도 해.”

아키스가 테세스의 찬사를 빼앗았다.

“아키스, 사람들이 들어요. 정말이지…….”

루나는 몹시 민망해했다. 그녀는 아키스의 손등을 꾹 누르며 입술을 비죽였다. 페니가 그 모습을 보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공작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페니는 기가 찼다. 자신이 공작 부부의 사이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께서 부인에게 단단히 빠지셨군요.”

여배우 케라가 은밀하게 미소 지으며 페니를 보았다. 페니는 납득하며 눈짓했다.

“그래, 늘 이러니?”

“뭐가?”

페니가 루나를 향해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공작이 늘 이러냐고.”

“아냐, 이런 기행은 정말 처음이셔.”

“……그럼, 늘 이렇게 식사하니?”

“아, 보통 우리는 둘이서 조용히 식사해. 손님이 오는 날이나 만찬 날에는 그이의 보좌관이 함께하는데,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외출했거든.”

페니는 숨을 들이켰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

“……그러게?”

페니의 말에 루나는 갑자기 어떤 예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디온이 바쁠 일이 뭐가 있지? 혹시 이 사람이 또 무슨 일을 벌이나 싶어 루나는 나중에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잊지 못할 식사 자리가 끝나고, 루나는 페니를 직접 환송했다. 웬일인지 아키스까지 따라 나왔다.

“오늘 정말 놀라지 않았어? 첫 초대는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멋진 티 세트도 준비하고, 정성 들여 티 파티를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페니는 좀 피곤하긴 했지만 몹시 즐겁긴 했다.

“좀 놀랐지만, 즐거웠어. 어디서도 못할 구경 많이 했거든.”

루나가 그녀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공작님.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놀라움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페니는 아키스를 향해 예의 바르게 말했다. 아키스가 눈짓했다.

“르시타 영애.”

그가 미성의 목소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자주 놀러 오세요. 내 아내가 영애를 아주 좋아하더군요. 이제 공작저에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아키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페니는 속으로 아, 하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거군.’

페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요, 하지만 가끔은 밖에서 만나자. 우리 집에도 놀러 오고.”

아키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루나는 미소 지으며 물론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내가 놀러 오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지?”

“응, 물론이지!”

* * *

‘나 정말 어쩌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자, 루나는 묘하게 풀이 죽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 나 정말 죄책감 느껴. 그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는데 난 공연이 너무 재미있다고 느꼈다니……. 정말,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루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그녀의 그런 속도 모르고, 아키스가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공연은 어땠어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루나가 휙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깜짝 선물이라며 사람을 아침부터 깨우더니, 눈을 가리고 데려와 보여 준다는 게 이 소극장이었다.

곧 공연이 시작된다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얄밉던지. 친구를 부르고 싶지 않냐는 권유에 급히 페니를 초대하긴 했는데 아직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랬어요?”

“왜라니? 난 당신이 연극을 워낙 좋아하기에…….”

“도대체 얼마를 쓰신 거예요?”

루나는 뱉어 놓고 얼마를 썼는지 정말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안 썼습니다.”

“거짓말.”

바보도 아니고 그 말을 믿을 리 없었다. 루나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아아, 어쩌자고 이런 큰일을 벌이셨어요.”

“난 그저…….”

“그저?”

아키스는 정말로 루나가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감동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녀의 반응이 몹시 의외라 해선 안 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싸길래…….”

이걸 대답이라고……. 루나의 뒷골이 강렬하게 당겨 왔다. 루나는 뾰로통하게 아키스를 노려보았다.

“매번 초빙 공연을 하는 것과 아예 사는 것의 가격이 별로 차이나지 않아서…….”

아키스가 궁색하게 덧붙였다. 루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키스, 당장…….”

“당장?”

“환불해요. 어떻게든.”

“…….”

아키스는 그날 이미 투자자가 되어 환불할 수 없다는 걸 루나에게 설득시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미술관 관련 계획을 위해 외출한 디온이 돌아오면 미술관 구입은 취소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루나가 페니가 미술관 구경을 시켜줬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제 와 계약을 깨는 건 힘들단 말에 공연은 1년에 두 번만 와서 해 주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뷰티 살롱은 그냥 둡시다. 어차피 집에 전속 관리사를 두는 귀부인이 많다고 들어 해 주려 한 겁니다.”

아키스는 루나를 달래며 설득했다. 루나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아직도 놀란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난 가난하게 자랐단 말이야. 이런 것 무서워서 심장이 뛴다고.’

아키스의 돈을 너무 썼다는 사실이 무섭기까지 했다.

“화났습니까?”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아키스가 은근히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꾸 루나의 옆얼굴을 힐끔대는 게, 그녀가 짜증 낸 게 신경 쓰이는 듯했다.

“화 안 났어요.”

결국, 루나는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눈을 보며 속삭였다.

“내가 괜한 짓을 했습니까? 난 정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조금은 좋긴 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단위의 일이 되니까.”

루나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면 안타깝군요.”

그 말에 루나는 모른 척 아키스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좋았어요.”

“네?”

“……마음은 기뻤다구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해 줘서 기뻤어요.”

아키스가 이어 뭐라 말하려 하자, 루나는 딱 잘랐다.

“마음만요, 마음만.”

“마음은 표현해야 아는 거 아닙니까.”

아키스가 받아쳤다.

“더 소박하게 표현해도 알아요. 잘해 주고 싶어 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이러다가 공작가의 재정이 파탄 나면요? 어떤 왕국도 사치하는 왕은 못 이겨 낸다고 했어요.”

“극장은 사업상 투자를 한 것이고, 뷰티 살롱은 그런 사치 수백 개한다고 공작가는 절대 안 흔들립니다. 가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요.”

아키스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제야 루나는 제가 너무 짜증만 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기쁜 부분도 있었다. 규모가 너무 커 압도되었을 뿐이지.

‘하긴…… 앞으로도 테세스의 극단은 유명하니까.’

일기장에서 본 바에 따르면 몇 년 뒤에 테세스의 극장은 향후 몇 년간 꽤 긴 시간 업계 최고 위치를 점한다. 분명히 앞으로도 돈이 되긴 할 것이다. 그가 틀린 투자를 한 것도 아니니 루나는 더 툴툴거릴 명목이 없었다.

“……고마워요.”

루나는 개미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나, 신경 써 주고 잘해 주려고 해 줘서 고마워요.”

아키스가 피식 웃었다.

루나는 그의 미소를 보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사실은 자만할까 봐 무서웠다.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는 아내에게 잘해 주려 노력하는 남자라고. 어쩌면, 그게 나라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아키스의 이런 배려가 끝나고, 차디찬 혼자만의 인생으로 돌아가면 몹시도 외롭지 않을까. 루나는 폐부를 푹푹 찌르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

“네?”

“가끔은 내게도 멋지다고 해 줘요.”

그 말뜻을 뒤늦게 알아들은 루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걸 신경 썼나요?”

어쩌면 요즘 그의 앞에서 페니가 좋다는 말을 너무했는지도 모르겠다. 루나는 뒤늦게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멋있는 거야 항상 멋있죠. 오늘같이 엉뚱한 일 할 때만 빼고.”

정말 그는 뜻밖의 면이 있었다. 루나는 아키스를 꼭 끌어안았다.

“알았으니까 이런 일은 이제 의논하고 해요. 알겠죠? 큰돈은 신중히 쓰는 게 좋으니까.”

아키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포근한 체향이 그의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가 원하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기분은 어느새 루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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