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5)

5

수도에서 마차로 반나절, 게이트로는 곧바로 연결된 조그만 해안 도시 리튼은 눈부신 백사장과 푸른 해변, 그리고 사계절 내내 따뜻한 햇빛을 가진 곳이었다.

리튼은 귀족들의 휴양 도시였고, 수도의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들은 모두 리튼에 크고 작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로텐베른 공작가는 리튼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큰 별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루나의 결혼식 장소는 해변가에 위치한 공작가의 별장이었다.

아키스는 오전에 수도에 일이 있어 따로 오기로 했다. 결혼식 며칠 전, 신부가 식 당일 웨딩드레스를 입기 전까지 서로를 보지 않는 건 제국의 관례기도 했기에, 결혼식장까지 따로 이동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공작 부인의 이름을 달고 게이트를 타는 건 몹시도 쉬운 일이었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와 만으로 루나는 황족 전용 입구로 안내되어 별다른 검사 없이 바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루나가 황족 전용 입구로 향할 때, 밖에는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게이트를 타는구나.’

숙부의 집에 살 때, 그녀는 늘 게이트를 타고 멀리 도망치는 것을 꿈꿨다. 그때는 그토록 어려워 보였던 일이 지금은 이렇게나 쉬웠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 게이트를 타게 될 줄이야.’

그녀는 게이트를 타고 리튼에 내려 대기된 마차에 올라탔다.

시녀장 비아와 레이디스 메이드가 마차에 동행했다. 비아가 창문 밖으로 풍경을 감상하는 루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리튼은 사계절 날씨가 좋은 곳입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편이지요. 수도 귀족들은 이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곤 합니다.”

“그렇군요. 말로만 듣고 처음 와 봐요.”

리튼 별장에 초대받는 날이면 새틴은 며칠간 법석을 떨었다. 그곳은 지상 낙원이라며 아키스와 혼인하면 여름마다 리튼에 갈 것이라 했었다.

곧, 마차가 멈추고 별장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뛰어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루나는 파란 지붕을 가진 별장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이제 매년 오시게 될 거예요.”

“그럼 얼마나 좋을까요. ……아, 저기 봐요.”

비아의 다정한 말이 끝나자마자 루나의 고개가 저 멀리로 돌아갔다.

“저게 바다예요? 세상에, 너무 예뻐요. 진짜 넓다.”

루나는 바다를 보고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가을하늘은 새파랬고,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코발트색 바다와 밟으면 설탕 파우더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흰모래들이 모래사장을 채우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시니 매일매일 바다를 보실 수 있으시답니다. 자, 이제 어서 들어가세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오전 내내 꾸며도 부족하니까요.”

“어서 드레스를 입고 준비하셔야 해요, 부인.”

비아에 이어 레이디스 메이드 제인이 루나의 짐을 내리며 재촉했다.

루나는 바다를 더 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담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름다운 날에 결혼하고 싶다.

새파란 하늘 아래서, 내 손을 잡은 멋진 사내와.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수도에서 제일 인기 있는 부띠끄면 좋을 것이다. 마담 모이라의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되고 싶다.

그 다음에는 밤새 춤을 추고 싶다. 마지막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신방에 들어가고 싶다.

새틴처럼 예쁜 별장에서 결혼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결혼식이 아니라도 괜찮아. 아주 평범한 남자라도 괜찮아.

그러니, 이 추운 세상의 돌로 된 낡은 성에서 죽어가고 싶지 않아.

진짜 가족을 가지고 싶다. 모래알처럼 부서진 인생에서, 나를 나무처럼 심어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루나는 무릎에 손을 올렸다. 꿈속에서 본 일기장에서 본 글귀를 떠올린다. 미래의 루나가 썼던 글이다. 그녀는 혼자라서 너무 괴로웠고 힘들었다.

미래의 그녀가 멋대로 적어 넣은 막연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들이 지금 눈에 잡힐 듯 다가와 있다.

제인이 화장을 하는 도중 몇 번이나 물었다.

“괜찮으세요?”

“응, 물론 괜찮아.”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루나를 보고 비아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결혼식은 오늘 저녁이면 끝나요. 그러고 나면 즐거운 신혼여행을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조금만 힘내세요.”

제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려 네 시간 동안이나 루나의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했다.

“자, 이제 눈 뜨시고 거울을 보세요.”

루나는 거울 앞에서 눈을 떴다. 그녀도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긴 금발 머리는 귀 옆 몇 가닥만 남기고 우아하게 틀어 올렸고, 머리에는 보석 핀을 잔뜩 박았다. 그리고 목에는 모이라가 빌려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눈가에는 청초한 펄이 들어간 화장을 하고, 눈 라인을 따라 눈가를 물들였다. 입술은 코랄색으로 마무리했다. 그녀의 피부는 새하얀 베일 같았고, 잘못 만지면 은은한 펄이 묻어나올 듯 반짝였다.

모이라의 웨딩드레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날씬한 몸을 탄탄하게 잡아 주는 드레스 위로 그녀의 몸매가 곡선을 그리며 아름답게 드러났다. 패티코트는 없었고, 드레스 폭이 좁았다.

‘정말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까. 일기장 속의 내가 입고 싶다고 적어 두었던 모이라가 유행시키는 패티코트 없는, 흘러내리는 폭이 좁은 드레스를 만들어 오다니.’

루나는 오래도록 전신 거울을 보았다.

‘일기장을 읽은 덕분일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호사스런 결혼식을 하게 될 줄이야.’

문득 허름한 소년 루가 스쳐 지나갔다. 그 소년은 거울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만 꿈을 이뤄 줘서 미안하네, 일기장 속의 나에게 말이야.’

루나는 미소 지었다. 진짜 혼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면, 다 이뤄진 격이었다. 모이라의 드레스. 화려한 결혼식.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미래의 루나가 절절히 원하던 진짜 가족은 아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주 먼 일이었다.

“자, 이제 끝나셨어요.”

마지막으로 제인이 베일을 가져와 머리 위에 조심스레 씌웠다. 베일에는 은가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루나는 비아를 보고 물었다.

“공작님은 뭐하고 계세요?”

“지금 막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곧 신부를 확인하러 오실 겁니다.”

이제 루나가 결혼식 준비를 마쳤으니, 아키스는 누구보다 먼저 새 신부의 모습을 확인할 권리가 있었다.

‘막상 결혼식이 코앞으로 닥치니 조금 불안해지긴 하네.’

루나는 그와의 결혼 생활이 별문제 없이 흘러가길 바랐다. 부부 사이에 숨길 건 숨기고 드러낼 것만 드러내면서 수월하게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 그녀의 안위를 위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안전하게 끝이 올 것이다.

“황족의 마차가 도착했어요.”

그때, 하녀 한 명이 창밖을 보다 큰 소리로 외쳤다.

“황태자 전하실까요?”

“아마도. 직계 황족 중에선 그분만 참석하신다고 했어.”

“공작님께선 참 대단하세요. 황태자 전하와 친구라니.”

“말조심하거라. 그분께는 당연한 일이야.”

비아가 짐짓 엄하게 하녀의 입을 단속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하녀 한 명이 밖에서 외쳤다.

곧바로 아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리고 거울 앞에 선 루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나?”

“아키스.”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런데, 아키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려 3일 만에 제대로 보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눈이 부시군.’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의 드레스는 아키스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좀 많이 파인 것 같은데.’

화려한 레이스로 가슴을 완벽히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가슴의 중간 부분이 너무 파여서 그녀의 하얀 가슴골이 다 보였다.

가슴골이라니, 이건 정말 생각도 못했다. 아키스는 살짝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노출된 부위 아래 높게 잡힌 허리선 위로 보석 박힌 하얀 레이스 벨트를 차고 있었다. 허리선과 가슴 선을 가린 레이스 위로 다이아몬드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소매가 아예 없는 형태였기에 그녀의 새하얀 팔이 다 보였다.

“역시 별로…… 안 어울려요?”

루나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이자, 아키스의 눈에 그녀의 부드러운 힙 선이 도드라진 드레스 형태가 다 드러났다.

그걸 보는 순간, 눈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날씬한 허리선과 적당히 볼륨 있는 둥근 힙. 그녀의 저 부위가 벗으면 얼마나 아찔한데. 만지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데 이렇게 다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었단 말인가.

3일 간이나 그녀를 탐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키스를 미치게 하는 건 이 모습이 너무 예쁘다는 거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나 빛나는 여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예뻐 보였다. 결혼식이고 뭐고 당장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문을 닫고 저 드레스를 처음 만난 날처럼 찢은 후 바로 여기서 당장에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공작님?”

“다 나가라.”

아키스가 다른 이들에게 눈짓했다. 그에 루나의 눈이 흔들렸다.

비아는 방을 나가면서 아키스에게 속삭였다. 그녀 나름대로 큰맘 먹고 한 행동이었다.

“부인께서 많이 긴장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아키스는 조금 정신을 되찾았다. 지금 아키스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심기를 보인다면 그녀는 더 불안해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거울 앞쪽에 놓인 긴 의자에 앉혔다.

“……왜 그래요?”

“너무 예뻐서 잠깐 놀랐습니다.”

그 말에 루나의 눈에 서린 불안함이 사라지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정말로요?”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아키스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다만.”

“…….”

“너무 예쁘군요. 그게 문제인 것 같은데.”

아키스가 나른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턱을 손으로 가만히 쥐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엔 화장이니 드레스니, 여자들의 보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영 관심이 없었다. 주변에 여자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다 의미가 있었다. 원래 민얼굴도 충분히 예쁜 여자인데, 특별하게 공들인 화장을 하니 놀라울 정도로 눈부셨다.

키스하고 싶을 만큼.

아키스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리고 하얀 레이스와 투명한 천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쇄골 아래에 손을 댔다. 그는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루나의 드레스 안의 살결이 저도 모르게 닭살이 돋고 단단해졌다. 아키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라인을 드러내면서 제 손의 침입은 단단히 막는 드레스를 노려보았다.

“불편한 디자인이군요.”

“뭐, 좀 불편하긴 하지만 예식용 드레스는 벗기는 용도가 아닌걸요.”

그의 의도를 알아들은 루나가 빨개진 뺨으로 그를 보았다.

아키스는 루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어처럼 펼쳐진 드레스 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꺅!”

루나는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하얀 망사 스타킹에 감싸인 루나의 종아리를 슬슬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역시 이 드레스, 당신을 부끄럽게 할까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난…….”

아키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그러나 돌려 말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아키스가 실토하듯 작게 말했다.

“……너무 예뻐서 몹쓸 사람들까지 쳐다볼까 걱정입니다.”

“네?”

루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 했다. 그녀는 조금 늦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아키스는 루나가 대답이 없자, 손톱으로 살살 스타킹의 솔기 부분을 긁어 올리다가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목에 끈으로 감긴 하이힐이 공중에서 달랑였다. 그는 그대로 무릎 뒤쪽의 연한 살에 손을 넣어 매만지다 허벅지 안쪽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읏, 공작님…….”

“내가 너무 쓸모없는 걱정을 하는 게 아니면 좋겠는데.”

“대체…….”

루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밉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흘겼다.

“몹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당신을 보고 음흉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결혼식 날 신부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단 자신부터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키스는 오늘 참석하는 사내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아키스 본인이야 깨끗하게 살았지만, 귀족 사내들 중에는 호색한 사내들이 꽤 있었다. 그녀는 너무 순진해서 남자들이 어떤 족속인지 모른다.

아키스가 딱 잘라 말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죠.”

“옆에 신랑이 버티고 있을 텐데?”

“…….”

“사람들은 공작님을 무서워하잖아요. 누가 드래곤 공작의 신부로 서 있는 여자를 음흉하게 보겠어요.”

아키스는 그녀의 발목을 어루만지며 손을 천천히 뺐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을 손으로 쓱 감싸고 쥐었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야릇한 감촉에 루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그렇군.’

그랬다. 계속 그가 옆에 있으면 그녀가 어떻게 하고 다닌다 한들 감히 음흉하게 구는 놈이 있을까. 허튼짓을 하는 사내가 있으면 바로 벌을 주면 된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역시 당신은 총명합니다.”

루나는 뛰는 심장을 누르며 가슴을 쓸었다. 그러고는 웅얼거렸다.

“그리고, 첫날밤은 멀었다구요…….”

“이미 할 건 다한 사이 아닌가, 우리.”

“오늘은 좀 모르는 척해 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우리. 처음처럼 행동해야 하는 거 몰라요? 일단 버진 로드를 걷긴 해야 하잖아요.”

“그럽시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아키스는 피식 웃고 묘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입술로 가볍게 물고 핥기 시작했다.

제인이 물도 입에 대지 말랬는데. 루나는 그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아키스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빨다가 혀끝으로 그녀의 앞니 뒤쪽을 어루만지고 쪽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럼 지금은 키스나 몇 번 하고, 그다음에.”

“그래요.”

“일단, 한 번 더.”

아키스가 그녀의 의자에 등받이에 손을 짚고 속삭였다.

루나는 어깨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청명한 향이 몸에 닿았고, 감미로운 그의 입술이 제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아아, 난 몰라. 루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잔뜩 핑크빛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 * *

“신랑 신부, 입장하십니다.”

집사, 알렉이 크게 외쳤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손을 맞잡은 신랑 신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공작은 언제 봐도 몹시도 놀라운 미남자였다. 흑발에 독특한 색으로 오묘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을 가진 훤칠하고 넓은 어깨의 그는 고대의 그림에서 막 빠져나온 미청년 같았다. 그에게는 단순한 남성미가 아닌, 기품이 스며든 우아하고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손을 잡고 사뿐히 걸어 들어오는 신부. 금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 드레스는 뭐지?”

그녀가 사뿐히 걸을 때마다 샹들리에 아래서 마치 겨울의 새하얀 눈처럼 빛났다. 무엇보다 적당히 큰 키를 돋보이게 하는, 몸매를 잘 잡아 주는 독특한 라인의 드레스.

난생처음 보는 드레스가 너무 특이했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드레스를 그녀는 몹시도 잘 소화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드레스를 입었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 부인이었다.

파격적인 모습도 너무 높은 신분의 사람이 하면 하나의 기품이나 유행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작의 별장에서 하는 비교적 소박한 결혼식이라, 사람들은 엄격한 규율의 잣대를 들이대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 드레스는 몹시 아름다웠다.

“신부가 아주 예쁘군.”

“소문에는 무슨 남자 잡아먹는 요부라고 하던데, 그러긴커녕 기품 있고 청순해.”

달리아 옆의 귀족 사내들이 수군거렸다.

달리아는 앞으로 평생 동안 증오할 여인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다.

‘……내 작전대로 결혼식장에 잘 들어왔군. 후작 영식이 자신의 파트너로 새틴의 신분을 잘 꾸며 낸 모양이야.’

달리아는 2층을 향해 눈짓했다. 지금껏 아키스에게 순정을 바치고 공들였다.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보상을 받지 못한 그녀에게 이정도 유희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식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예식 내내 공작은 놀랍게도 새 공작 부인의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나이 들고 눈치 빠른 몇몇 노부인들이 눈을 휘면서 웃었다.

‘아니, 결혼에 대해 별별 소문이 돈 것치곤 공작님이 손을 놓을 줄을 모르시는군. 이거, 혹시…….’

소수의 귀빈들만 초대했기에 하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객들이 누구냐는 게 문제였다. 걷다가 툭 치면 아무렇지 않게 어느 후작, 어느 부의 재정대신, 이런 수준이었다.

‘나, 저 사람 신문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 저분은 기사단장 아니시던가?’

루나는 긴장으로 자연히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아키스가 옆에 꼭 붙어 있으니 긴장이 덜했다.

“신랑 신부의 아름다운 화혼을 축복합니다.”

먼저, 예식 사제가 형식에 맞춰 간단히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넣어 긴 기도를 읊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자 잔잔한 박수가 터졌다. 그다음은 건배와 축사 순서였다.

“오늘 결혼식에 참석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먼저 축사가 있겠습니다.”

결혼식의 진행은 유명한 극작가이자 귀족 출신 연극배우인 테세스 드 발런 남작이 맡았다. 입장권을 구하는 것이 전쟁이나 다름없는 인기 연극배우였다.

루나는 공작가의 사람들, 특히 공작의 보좌관인 디온의 능력에 감탄했다.

테세스 남작은 제국 최고의 배우이자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테세스 남작은 바람둥이라는 소문에 걸맞게 과연 상당히 매끈한 얼굴의 청년이었다.

‘유명한 배우라더니 과연 분위기가 있네. 그런데 나만 그런가? 아키스, 그이같이 놀랍게 생기진 않았는데.’

그러나 매일 아키스의 얼굴을 보고 사는 루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만큼 아키스가 비현실적인 그린 듯한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테세스 남작이 입을 열었다.

“먼저, 제국의 가장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곧, 황족의 복장으로 성장한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아, 저 사람은…….’

루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예전에 여인 모습으로 아키스와 처음 만난 날, 카베이가의 저택에서 본 것과는 딴판인 멀쩡한 모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황태자였군. 오늘은 아주 멀끔한 모습이야.’

황태자는 루나를 알아보지 못한 건지, 잊어버린 건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황태자의 축사가 시작됐다.

“나의 절친한 벗 아키스는 평소 여자를 돌로 보며, 또 몹시도 건전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여 사내들 사이의 이단자로 불릴 만큼 아주 깨끗한 과거를 지녔네. 정말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소개하고 싶을 정도의 사내지. 다만, 너무도 고결한 성정 탓에 그가 노총각이 되지 않을까 암암리에 황가의 걱정거리로 등극하는 중이었으나, 운 좋게 제 짝을 만나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바이네.”

황태자는 그때도 그랬지만 대단히 밝고 유들유들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키스의 평소 결백한 생활을 장난스럽게 말하며 타박을 주는 척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그를 추어올림과 동시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 자리가 비교적 편안한 결혼식이기에 가능한 축사였다.

언뜻 들으면 실없게 들리는 축사들이 재미있어 루나도 몇 번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키스는 그녀가 웃을 때마다 그녀를 힐끔댔다.

축사를 하는 사람들도 대단했다. 황태자를 시작으로 서부의 지배자라는 변경백 라이오스 경, 황후 대신 축사하겠다고 자신을 소개한, 사교계의 대모 격이자 노부인들의 우두머리 격인 메리벨 후작의 미망인 등.

그들은 모두 부부가 결혼 후 가져야 할 의무와 예의에 대해 부드러운 언변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축사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의 큰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러나 젊은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은 박수를 칠 때 루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제국의 중대 행사 같네. 이렇게 소탈하게 앉아 계신 분도 다 어마어마한 분들이니.’

루나는 자신이 이런 결혼식을 치를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지금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본래 축사 이후의 순서는 양가의 부친의 축사로 마무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아키스와 루나는 둘 다 부모를 여의었고, 루나는 양부모와 의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 결혼식에 초대해 주신 공작님께 다시 한번 예를 올리며 신랑 신부에 대한 마무리 축사를 드리겠습니다. 두 분을 대신하여 제가 두 분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인 배우, 테세스 남작이 넉살좋게 말했다.

사회자가 마지막 축사를 할 경우는, 보통 신랑과 신부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그들이 서로의 이런 모습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테세스 남작은 아키스의 경력과 성품에 대해 길게 늘어놓았다. 아키스가 워낙 대귀족 출신이기에 그는 가진 지위가 많았다. 아카데미의 수석 교수, 정치 경력, 지역 모임 등. 그는 아직 20대임에도 대단히 훌륭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신부에 대한 차례였다.

문제는 루나가 알려진 것이 없어도 너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보통 신부의 경력은 아버지의 지위나 사교계에서 한 일들, 이를테면 사교 참여 경험이나 파티 주최 등을 경력으로 쳤다. 그러나 루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테세스 남작은 루나에 대한 소개를 그녀의 매력과 성격에 대해서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루나의 성격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여기 계신 새 신부는, 대단히 소박한 성정을 가졌으나 보다시피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셨습니다. 아직 목소리를 듣지 않아 모두가 이분의 목소리를 궁금해하나, 이토록 청순한 미모의 새 공작 부인이라면 목소리가 허스키하면 허스키한 대로, 청명하면 청명한 대로 모두에게 큰 놀라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몹시 아름다운 금발을 가지셨으며, 도전 정신이 출중하여 놀랍게도 우아한 드레스 모습으로 하객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가 아름답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하객들이 살짝 웃을 정도였다.

테세스 남작은 루나가 아무 경력이 없는, 미천한 집안 출신인 것을 커버하기 위해 익살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아름다움이나 성격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것이 비꼬는 태도로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넉살로 보여 사람들에게 아주 재미있게 보였다.

‘왜 이렇게 남의 부인한테 외모 칭찬을 하지? 이게 상식인가? 혹시, 이 자식이 무슨 흑심이 있나?’

그리고 오직 이 분위기에서 아키스만 혼자 슬슬 골이 나기 시작했다. 테세스가 바람둥이로 유명한 미남 배우라는 것도 그를 짜증 나게 했다.

테세스가 과장하여 루나를 찬양하면 할수록 아키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아내가 칭찬 받는데 뭐라 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들을 만한 찬사라는 것을 알기에 참았다.

반면에 듣는 루나는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점점 민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억지 외모 찬양을 받는 이유가 경력이 없어서라는 걸 잘 알았다.

다행히 아키스의 인내심과 루나의 부끄러움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 축사가 끝났다. 테세스가 완벽한 발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더 축사를 할 분이 없으면 맹세의 키스를…….”

그때였다.

“제가 신부의 가족으로서 축사를 해도 될까요?”

2층에서 한 여인이 내려오며 말했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계단으로 집중되었다.

루나는 눈을 의심했다.

‘……새틴?’

새틴이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채 2층에서 사뿐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루나가 없어서인지 차림새도 조금 허술하고 화장도 예전만 못했다.

도대체 새틴이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결혼식장의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저 여자가 누군데?”

“그 여자예요. 공작 부인의 양자매라던.”

“아, 그 자매에게 남자를 빼앗긴 여자?”

새틴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순식간에 수군거림이 번져 갔다. 새틴은 끔찍한 증오를 담고 루나와 아키스를 보았다.

‘저 여자가 어떻게 여기…….’

디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아키스가 고개를 저어 디온을 만류했다. 디온이 경비를 불러 새틴을 끌어내려는 의도는 알지만 이제 와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 소란이 일어났다간 결혼식 분위기를 망칠 것이다.

“저는 공작 부인의 자매인 새틴 드 버몬드라고 합니다. 제가 신부의 가족으로 축사를 준비했는데, 해도 될까요?”

“예정되지 않은 축사는 곤란합니다, 영애.”

테세스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가족의 축복을 막는 법이 어디 있나요? 제가 꼭 축복을 하고 싶어 그래요. 짧게 끝내겠어요.”

아키스가 불편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새틴은 드디어 아키스가 자신을 바라봐 주자 행복해 미칠 것 같았다.

“공작 부인께 바치는, 제 축사예요. 공작 부인, 부인께서는 저에게 지금껏 슬픔도 기쁨도 많이 주셨습니다. 비록 제 마음은 공작 부인의 사랑을 위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부디…… 행복하세요. 비록 이 신께서 결혼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축복하겠어요.”

말을 마친 새틴의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새틴은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막고 흑, 하고 흐느꼈다.

결혼식장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새틴의 말을 해석하자면 이것이었다. ‘네가 내 남자를 빼앗았고 내 눈에 피눈물 나게 했지만 용서하겠다. 그 대신 여기 모인 사람들도 네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냐.’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뜻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가련하게 우는 새틴의 모습에 참석한 젊은 영애들이 파르르 떨며 루나를 노려보았다.

“전…….”

루나는 새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키스가 가만히 루나의 손을 꽉 잡아 눌렀다.

“마침 잘되었군요.”

아키스는 가만히 무표정하게 새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데, 이 기회에 말하죠. 내가 루나와 결혼한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키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홀을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루나와 혼인한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내가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원칙…… 주의자 말씀이십니까?”

테세스가 어벙하게 대꾸했다. 아키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내가 아내와 만난 건 새틴 양과의 파혼 조정 기간 중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작은 웅성임이 번졌다. 사실 루나가 사교계에서 몹시 나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건, 그녀가 몸을 써서 새틴의 약혼자를 빼앗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전에 아키스와 새틴이 파혼 예정이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다.

“나와 새틴은 선대의 약속으로 약혼했으나, 나는 결혼 직전 그녀에게 파혼을 통보했습니다. 그리고 버몬드가에 파혼에 대한 위자료 목록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루나를 만났습니다.”

아키스는 곁눈질로 루나를 보았다.

“루나를 만나고서야 새틴 영애에게 자매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지요. 루나의 부친이 본래 버몬드 남작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난, 새틴의 부친이 차남 출신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실이었다. 루나의 아버지는 적법하게 작위를 상속 받은 버몬드 남작이었다. 아버지 사후, 차남이었던 숙부가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태어남을 기준으로 보면 루나는 새틴보다 4개월 일찍 태어났고, 나는 루나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버몬드 남작가에서는 그들에게 딸이 있으니 선대의 혼인 약속을 이행해 달라 청원했습니다. 혼인 의무의 우선권은 장자의 딸이었던 루나에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버몬드 남작가에서는 새틴과의 혼인을 청원할 때 루나의 존재는 물론, 현 버몬드 남작이 작위 승계를 받은 차남이었다는 걸 밝히지 않았더군요. 그에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루나와 혼인하는 것이 선대의 약속을 완벽하게 이행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그럼.”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새틴의 얼굴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규칙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내 성정은 여기 계신 황태자 전하도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말이 틀립니까, 새틴 양. 그대의 가문은 나를 기만하고도 여기 와서 쓸데없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의 귀까지 더럽히는군요.”

“그, 그게…….”

새틴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부인들이나 사내들은 이미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의 아비는 내 이름을 팔아 빚을 만들고 다녔지요. 나도 눈과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굳이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를테면 쥐나 벌레에게까지 눈과 귀를 열지 않을 뿐이죠. 새틴 양이 내게 부당하게 고소당했다며 말하고 다니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려 했는데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군요.”

아키스는 은유적으로 불편함을 암시했다. 지금껏 봐주고 있었는데 기어올라 온다, 이 뜻이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공작님.”

새틴이 바짝 얼어붙었다.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까. 한때 약혼한 사이였는데. 새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제 말도 좀 들어 주세요! 전 당신을 정말로…….”

하지만 아키스는 새틴의 말을 자비 없이 끊었다.

“그리고, 새틴 양과 나의 파혼 사유도 말해야겠습니다. 그녀는 내게 계속 이상한 편지를 보내며 계속 불안한 정신 상태를 호소했죠. 심지어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적은 편지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진짜냐며 내게 물었죠.”

새틴은 순식간에 고위 귀족들로 이루어진 하객들 사이에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새틴을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루나의 도움을 받아 꾸미지 못해 허술한 꼴은 꼬장꼬장한 대귀족들 사이에서 그녀를 더 이상한 여자로 보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건, 저는…… 공작님을 믿는다는 뜻이었어요.”

새틴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키스를 만나기만 하면 그가 마음을 돌려주지 않을까, 자신을 동정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이 와르르 무너진 타격은 컸다.

그러나 아키스는 인정사정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새틴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새틴 영애가 정신이 온건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파혼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거기다 초대받지도 않은 결혼식에 난입하여 이런 행동을 하니,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란 내 생각에 확신을 주는군요.”

“아, 아…….”

새틴의 입이 벌어졌다.

아키스는 디온에게 눈짓했다.

디온이 경비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빠르게 새틴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여자는 미친 여자였군요.’

‘난 평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느낀 새틴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새틴은 이를 악물고 루나를 노려보았다.

“저년, 남자가 있었어요!”

결혼식장이 다시금 얼어붙었다.

새틴의 날카로운 외침에 다들 아무런 말도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키스를 보고,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파랗게 질렸지만 아무 말 없이 새틴을 노려보았다.

“놔줘라. 뭐라 말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지.”

아키스가 손짓하자, 경비들이 새틴을 놓았다.

새틴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예상 외로 자신이 가진 제일 좋은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루나가 버몬드가에 살 때, 그녀의 방에 남자가 공공연히 드나들었어요. 직접 목격한 사람도 있고요. 저년은 저기 서 있을 자격이 없는 더러운 여자예요!”

새틴의 말에 숨을 삼키며 입을 막는 영애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유명한 드래곤 공작이 진심으로 분노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의 주변을 감싼 공기가 오싹할 만큼 서늘했다. 그가 너무 또렷해서 끊기는 것처럼 들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귀족가에서 자란 내 아내의 방에 수시로 남자가 드나들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맞아요, 저희 하녀장이 직접 보았어요. 그래서 알게 되었죠. 그는 젊은 남자였는데…….”

“그 목격자가 네 측근이나 다름없는 하녀장이라고? 그럼, 일개 하녀의 말을 믿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도 작작하도록 해!”

새틴의 말은 아키스에게 어처구니없이 들렸다.

아무리 하급 귀족이라고 해도 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귀족 가문의 여인의 방에 애인이 서슴없이 드나든단 말인가?

새틴이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하는 아키스에게, 그 말은 억지 망상으로 들리기 충분했다.

아키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얼어붙은 사람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키스가 화를 내는 모습은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두려웠다. 옆에 선 루나까지 움츠러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감히 내 아내가 더럽다는 말을 해?”

이어 아키스가 이제는 아주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저 미친 여자를 끌어내라. 공작 부인 모독죄다. 당장 경비대로 보내도록.”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비병들은 다시 그녀를 거칠게 잡았다.

“너, 어서 말해 봐! 남자가 있었잖아! 그렇지?!”

새틴이 루나를 향해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루나.”

아키스가 루나를 바라보며 표정을 바꿨다. 쓴웃음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런 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겁니다.”

그리고 그가 루나의 허리에 손을 미끄러뜨렸다.

“아마 앞으로 당신이 살 세계에서는, 평생 그녀를 못 볼 테니까요.”

“……!”

그 말은 새틴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그러니 작별 인사하세요.”

루나는 새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루나가 아키스와 비슷한, 아주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틴.”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마지막 인사였다.

“거짓말하는 버릇, 꼭 고치길 바랄게. 그리고 허언증도 꼭 고치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치료라도 받으면 어떨까?”

새틴의 눈이 커졌다. 눈에 핏발이 선 그녀를 경비병들은 더 봐주지 않고 끌어냈다. 그렇게 새틴은 최악의 방법으로 자신이 가진 최후의 카드를 낭비해 버렸다.

“곧바로 수도로 이송해 유치장으로 보내도록.”

공작가의 경비병들이 내뱉었다.

새틴은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은, 그녀가 겪을 고난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 * *

결혼식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키스가 화를 낸 걸 보고 놀라서 히끅, 하는 영애와 창백하게 질린 영식도 있었다.

“원, 내 이런 깜짝쇼는 처음 보는군. 미친 사람 구경이라니.”

사위가 조용해진 가운데, 황태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테세스가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신랑 신부의 키스 순서가 남았군요!”

테세스의 낮은 미성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꿈에서 깬 듯 아키스와 루나를 보았다.

“먼저 축배부터 하죠.”

테세스가 말했다.

“그럼, 건배합시다!”

테세스가 잔을 들어 올리자, 사람들이 따라서 잔을 들어 올렸다.

신랑 신부가 먼저 샴페인을 마셨고, 사람들은 뒤늦게 크게 웃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그리고 얼어붙은 결혼식장의 분위기가 서서히 녹아 가며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결혼식에서 더 이상 아무도 새틴을 언급하지 않았다.

* * *

만찬회를 끝으로 결혼식의 1부 순서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늦은 밤까지 무도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루나는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기 위해 잠시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하객들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루나의 피로연 드레스는 아주 연한 살구빛에 소매가 없는 쉬폰으로 제작된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이 드레스 또한 모이라가 보내온 것이었다. 루나는 화장을 고치는 제인의 시중을 받으며 새틴의 등장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괜찮으세요, 공작 부인?”

“네, 괜찮아요.”

비아의 물음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음 순서는 케이크와 부케인가요?”

“네, 옆방으로 이동하셔서 미혼의 영애들에게 부케를 던진 후, 웨딩 케이크를 손수 나눠 주실 차례예요.”

미리 듣기는 했기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은 남자들을 위해 마련된 곳으로 가 술을 마시며 다음 연회를 준비하고, 루나는 다른 응접실에서 귀부인들의 관전 속에서 부케를 던진다. 부케 던지기 순서는 제국의 독특한 결혼 문화였다.

몹시 행복한 결혼을 한 신부, 시집을 잘 간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으면 그 신부만큼이나 결혼을 잘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또, 그 신부가 나눠 주는 케이크를 먹으면 연인이 생긴다고도 했다.

그래서 루나처럼 신분 높은 이에게 시집가는 여자의 결혼식에서는 부케를 잡기 위해 영애들의 싸움까지 일어난다고 했다.

“홀에 들어가면 먼저 한 말씀하시고, 다음 제일 앞줄에 있는 영애들에게 부케를 던지면 됩니다. 첫째 줄에는 명문가의 영애들이 서 있을 거예요. 두 번째 줄에 선 아가씨들의 신분도 좋긴 하나, 첫 번째 줄의 영애들보다는 못한 편이죠. 그 영애들 중의 한 명이 부케를 받는 행운을 잡을 거랍니다.”

“행운까지야…….”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 부인만큼 뭇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신분의 혼처 자리는 없었다. 미천한 하급 귀족 신분에서 벼락출세하는 것이다. 웬만해선 다들 부케를 잡고 싶어 할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불공평한가? 좋은 집안의 영애들이 가장 첫 번째 줄에 있다니. 사교계는 어딜 가든 서열 싸움이군. 부케가 대체 뭐라고…….’

루나는 조금 씁쓸하게 생각했다.

“힘드시면 다음 순서를 좀 미뤄 달라 전하고 올까요?”

비아가 재차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별일 아니었어요. 여기까지 쳐들어오다니 정말 독하기도 하지…….”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키스?”

제인이 문을 여니, 한참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을 아키스였다. 루나는 그의 뜻밖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놀라진 않았나 걱정되어 왔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자 염려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새틴이 지껄인 말을 그가 신경 쓸까 걱정된 탓이었다.

아키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혼전 애인이 있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루나의 마음이 불편한 건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루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키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새틴이 무슨 수를 썼는지, 안면이 있던 한 영식의 파트너 자격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자 또한 찾아서 함께 쫓아내겠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아까 새틴이 한 말 말인데요…….”

아키스는 루나의 일렁이는 눈을 보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미친 여자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을 만큼 내가 멍청하진 않습니다.”

아키스가 덧붙였다.

“그리고 과거는 묻지 않기로 한 계약 내용,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 마지막에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루나는 그가 화나지 않았다는 데 안심했다.

“신경 쓰실 일, 정말 없어요. 적어도 새틴이 말한 내용이 거짓이라는 데는 맹세라도 하겠어요.”

루나는 정말 떳떳했다. 새틴이 내연남이라 주장하는 그는 루나가 ‘루’로 남장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루나는 아키스의 눈에 묘한 안심이 퍼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지금 보이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소유욕? 아니면 아내의 과거가 별것 아니라는 데서 오는 안심? 루나의 기분이 묘해졌다.

“당신에겐 변명할 의무가 없는데. 그런데도 말해 주니 기쁘군요.”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들어 손등에 키스했다.

“조금 있다가 봅시다.”

아키스가 신부 대기실 문을 닫고 나가자 조용히 대기하던 디온이 따라왔다.

“새틴 영애를 데려온 후작 영식은 무도회장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또, 새틴 영애는 바로 수도로 이송되어 유치장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황족 직접 모독죄는 즉각 재판이 가능합니다.”

“즉각 재판하지 마라. 며칠 유치장에서 썩으면 정신이 좀 들겠지.”

디온은 아키스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유치장에 갔다 온 귀족 집안 영애. 앞으로 사교계에서의 생활이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어디든 발붙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새틴은 방금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쓸데없는 말 돌지 않도록 신문이나 가십지도 단속해 둬.”

괜히 새틴이 피해자처럼 보이는 기사가 나지 않도록 미리 신문사에 공문을 보내 놓으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부케 던지기 순서를 위해, 루나는 영애들이 자신을 기다리는 응접실로 이동했다.

응접실 천장에는 고대의 아름다운 여신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방 안쪽에는 케이크가 놓인 흰 테이블이 있었다. 분홍빛으로 꾸민 5단 케이크는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운 흰색과 하늘색, 분홍색 크림과 설탕 공예로 장식되어 있었다.

루나는 케이크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무리의 귀족 영애들과, 그 뒤쪽에 관전을 위해 모여 있는 귀부인들을 보았다.

‘저 여자가 달리아 드 라미라.’

사교계의 붉은 장미. 사교계의 꽃이자 대부호 라미라 후작의 딸, 달리아.

루나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미 신문에서 여러 차례 본 얼굴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줄 중앙에 서서 루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제국에서 그녀가 아키스를 너무도 사랑해서 집요하게 쫓아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교계 제일 미녀라더니, 정말 예쁘긴 하구나. 그런데 남의 결혼식에 보통 저만큼 화려하게 하고 오나?’

모피에 금장식까지. 달리아의 차림새는 루나보다 더 화려했다. 은은한 살구빛 드레스에 빌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한 루나가 검소해 보일 정도였다.

루나는 결혼식 절차를 미리 들어 알았다. 그녀에게 다가와 비슷한 나이 때의 영애들이 축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에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가.’

루나는 자신이 뜬금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보통 사교계에서는 어릴 적부터 안면 있는 이들이 자라며 친분을 이룬다. 그쪽은 애초에 포기하고 있었고, 아키스도 그녀의 사교 활동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어서 케이크 나눠 주기 행사나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루나는 영애 무리 사이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어떤 뜨거운 시선을 발견했다.

‘저 여잔…… 누구지?’

비아가 알려 준 대로 영애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서 있었다.

첫 번째 무리에 서 있는 영애들. 비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문가의 영애들로, 부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영애들이었다.

두 번째 무리는 비교적 신분이 떨어지는 집안의 여식들이라 했다. 물론, 결혼식에 참석했을 정도면 모두 보통 집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인 신분의 고하가 있었다.

두 번째 무리의 여식들 중, 긴 붉은 머리의 영애 한 명이 루나를 거의 이글대는 강렬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날 싫어하는 건가? 왜 노려보지?’

그런데, 묘한 것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그 무서운 표정을 한 영애 주변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 주변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녀는 2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서 있었다.

‘뭐지? 저 여자, 혹시 날 알고 있나?’

그리고 붉은 머리의 영애가 루나가 자신을 보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시선을 내려 루나가 든 부케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사이 그녀는 루나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던지…… 던지라고? 자기한테 부케를 던지라는 거야?’

그녀가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했다.

루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루나는 곤혹스러운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리아는 루나가 홀로 선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 방안의 영애들은 모두 달리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아마 아무도 부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주제넘은 혼인을 했으니 소외감은 본인 책임이지.’

그때였다. 갑자기 루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러면, 이제 부케를 던질게요.”

루나가 부케를 들어 올렸다.

루나는 영애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스르르, 부케를 감싼 리본을 풀었다. 리본이 풀리며 여러 송이의 새하얀 카라 꽃들이 루나의 팔 안에서 흐트러졌다.

“사실, 오늘 부케를 받을 영애들이 가장 앞에 나와 계신다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불공평한 것 같아요. 부케를 받는다는 건 행복한 결혼 상대를 만나라는 축복의 의미인데 축복은 누구든 받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 많은 분에게 행운을 빌기 위해 꽃을 여러 번 던지겠어요.”

루나는 꽃 한 송이를 던졌다. 두 번째 무리의 영애들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루나를 무섭게 노려보던 붉은 머리의 영애가 꽃을 잡았다.

“잡았어.”

“꽃을 받았어!”

영애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 순간, 그녀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공통된 생각이 떠올렸다.

‘나도 꽃을 받고 싶어.’

‘나도 시집을 잘 가고 싶어, 저 여자만큼…… 내가 저 여자보다 못한 게 뭐야?’

한창 나이 대 영애들에게 시집을 잘 가고 못 가고는 미래의 신분이 결정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루나가 유래 없이 혼인을 잘한 여인이었기에, 신분이 애매한 영애들일수록 꽃을 잡고 싶어 했다.

“그럼 계속 던질게요.”

루나는 싱긋 웃으면서 두 번째 꽃을 던졌다.

누구 한 명이 꽃을 받고, 모두가 꽃을 받겠다 움직이기 시작하자 영애들의 심리가 순식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 나 받았어!”

두 번째 꽃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받았다.

“나도 받을 거예요!”

“잠시만요, 나도…….”

달리아가 속해 있는 무리, 명문가의 여식들마저 열을 무너뜨리고 두 번째 대열에 합류했다. 다들 꽃을 받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달리아는 심통이 나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 *

루나는 마지막 영애에게 케이크를 주기 위해 기다렸다. 붉은 머리의 영애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애들이 케이크를 받아 갔다.

루나는 자신을 노려보던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영애가 오는 걸 기다렸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안 오지?’

그러나 그녀는 응접실 한구석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 루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케이크를 받은 대부분의 영애들은 연회장으로 장소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썰물처럼 빠지는 그들 사이에서 루나는 마지막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처음 뵙겠어요.”

루나가 미소 지었다.

“아까 첫 꽃을 받아 주어서 감사해요. 성함이……?”

“난 페니라고 해요.”

마이아에게 배운 예법 기준에서 그녀는 몹시 무례했다. 자신의 성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나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는 고위 귀족 가문의 딸은 아닐 것 같았다.

‘느낌이 독특한 여자네. 이런 느낌의 사람은 태어나 처음이야.’

멀리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페니는 달리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달리아처럼 황홀하게 아름답진 않았지만, 도도한 매력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눈길을 사로잡는 미인이었다.

“케이크는 필요 없으신가요?”

루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난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 연인이 생길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맞고 퉁명스러웠지만, 루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루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혹시…… 절 도와주신 건가요?”

루나는 방금 전 일을 떠올렸다.

“그거야, 라미라 영애가 하는 일이 뻔하니 그렇죠. 보나마나 그녀가 분위기를 주도했겠지요. 부케를 받아주지 말라고 유치한 명령을 내렸겠지요.”

페니는 루나를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잘 대처하시더군요.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루나는 작게 웃었다.

“루나,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그때, 아키스가 그녀를 찾기 위해 응접실에 도착했다.

“아. 아키스, 지금 나가려고요.”

루나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페니는 없어져 있었다. 성을 물으려던 루나는 눈만 깜빡였다.

* * *

다음 순서는 신랑 신부가 첫 춤을 출 순서였다. 루나는 갑자기 사라진 페니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잡고 중앙 홀로 나오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루나와 아키스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품에 안겨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쉬, 내가 옆에 있어요.”

그런 루나를 아키스가 달래며 속삭였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쌌다. 신혼부부의 밀착된 자세에 사람들이 뺨을 붉히거나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무 예뻤습니다.”

아키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춤을 추며 속삭였다.

루나의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애정하고 좋아한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설렘이 온몸을 휘감았다.

“공작님도 멋지셨어요.”

“당장 침대로 가고 싶군요.”

아키스의 말에 루나의 귀가 붉어졌다. 루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아키스가 연습한 대로 루나의 몸을 들어 올렸다.

루나는 그의 목과 어깨에 한 팔을 걸친 채 몸을 지탱했다. 그가 공중에서 그녀를 돌리자 연한 살구빛 드레스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휘날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키스는 루나의 몸을 내릴 때, 그녀의 눈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춤을 마친 그가 장갑을 낀 그녀의 손등 위로 키스했다. 젊은 영애들이 탄성을 지르며 손을 꼭 쥐었다.

* * *

아키스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그는 피로연 내내 루나에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오늘 결혼식장을 밝히시는 숲속의 요정 같으셨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와 줘서 고맙군.”

그는 사내들이 루나에게 껄떡대려고 하면 원천 봉쇄했다.

그러던 와중, 한 노부인이 다가왔다. 루나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까 축사를 했던 품위 있는 노부인이었다.

“공작 부인,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마리벨 후작 부인.

그녀는 황후의 절친한 벗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사교계의 나이 있는 귀부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병환 중인 황후를 대신하여 사교계에 나서는 일이 많은 그녀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잠시, 부인에게 몇 마디 말을 해도 될까요?”

마리벨 후작 부인은 아키스를 보며 말했다. 아키스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아키스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인사였다. 아키스는 루나의 음료수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혼인을 축하해요. 오늘 아주 예쁘군요.”

“감사합니다.”

“결혼식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녀가 새틴 이야기를 한다는 걸 깨달은 루나는 쓰게 미소 지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해요.”

루나의 겸손한 태도에 마리벨 후작 부인은 미소 지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지만, 예의바른 태도가 좋군요.”

“칭찬 새겨듣겠습니다.”

미래에서 루나는 말이 제대로 안 통할 정도로 고집 센 노부부를 모시고 사는 미망인이 된다. 지금은 사라진 미래지만, 그래서인지 노인을 상대하는 데 이미 익숙한 기분이었다.

‘공작님이 하룻밤 만에 결혼했다기에 이상한 여자가 아닐까 황후 폐하가 걱정을 하시던데 짧은 시간 안에 태도가 잘 갖추어졌군. 예법도 괜찮고, 들은 것과 달라.’

마리벨 후작 부인은 축사 때 흉한 모습으로 쫓겨난 새틴도 떠올렸다.

‘그 새틴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는 겉보기엔 음전한데 하는 짓은 달리아보다도 못한 천둥벌거숭이였는데 말이야.’

마리벨 후작 부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저어, 후작 부인.”

“네.”

“후작 부인께서는 이 사교계의 스승 같은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사교계 대부분의 영애들을 아시겠지요?”

“물론이에요.”

“그럼 혹시, 붉은 머리의 페니라는 영애를 들어 보셨는지요? 아까 부케를 던질 때, 그 방에 있었는데.”

루나의 말에 마리벨 후작 부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루나를 보았다. 마치, 의중을 알고 싶다는 듯.

“그 아이는 품행도, 소문도 좋지 않아 공작 부인의 벗으로는 적절하지 않답니다.”

“네?”

“거기다 사업을 배우겠다며 항구며 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죠. 좀 특이한 아이로 알고 있어요.”

루나가 조금 더 물으려는 순간, 아키스가 다가왔다.

“제 아내를 너무 피곤하게 하지 마십시오.”

아키스가 루나에게 황금빛 샴페인 잔을 건넸다. 마리벨 후작 부인은 황후와 같이 어릴 적부터 아키스를 봐 온 인사였다. 그녀의 표정이 쌜쭉해졌다.

“사내들은 다 똑같군요. 아내만 챙기는 모습이 여타 범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내에게 차가운 범인보다는 다정한 범부가 낫지요. 그런 의미의 범부라면 제 그릇을 기꺼이 인정하겠습니다.”

아키스는 나직이 대꾸하곤 루나의 팔에 허리를 감았다.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살짝 잡았다. 마리벨 후작 부인 앞이라 민망했다. 그녀는 아키스의 팔을 잡아끌어 내렸지만, 그는 아예 루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한시라도 그녀를 제 품에서 떨어뜨리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살다 보니 이런 모습을 다 보는군. 공작님이 안달이 나도 단단히 나 있어.”

마리벨 후작 부인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다 제짝이 있는 법이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계시나?”

그때,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황태자가 다가왔다.

“저런, 제가 신랑 신부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마리벨 후작 부인은 우아한 예법으로 인사하고 물러났다.

황태자가 루나에게 눈인사했다.

“언제 신부를 소개시켜 주나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네, 아키스.”

황태자는 아까부터 흥미진진한 얼굴로 루나의 옆에 꼭 붙어 있는 아키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루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무릎을 굽혀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반갑습니다, 공작 부인.”

그리고 황태자는 가까이에서 루나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역시, 내 생각이 맞군요. 그때 카베이가에서…….”

루나도 그때의 일을 기억했다. 그때 황태자는 이불을 둘러쓰고 위엄은 멀리 팔아먹은 모습이었다.

“그래요, 그때 벌꿀 같은 금발의 영애. 내 또 한 번 본 미인은 잘 잊지 못한답니다.”

“오늘로서 두 번 보았으니, 이제 제 아내를 잊으시면 되겠군요.”

아키스가 거침없이 치고 들어왔다.

황태자는 혀를 찼다.

“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리 솔직하지 못하답니다.”

“그런 끔찍한 소리 마시죠.”

아키스는 진심으로 질색했다.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키스는 황태자와 가까운 사이인 듯했다.

“그래, 그날 만나서 관계가 발전된 건가?”

“말하자면 깁니다만, 짧아도 이야기할 생각 없습니다. 캐묻지 마시죠.”

“남의 연애사 이야기가 얼마나 재밌는데 이러긴가?”

황태자가 정색했다.

“자꾸 이러면 그날 일을 공작 부인에게 불어 버릴 거네.”

“……그날 일요?”

루나의 표정이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 문란한 파티에는 코르티잔들이 가득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루나가 관심을 보이자, 황태자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공작 부인이 곤경에 빠졌었지요. 그대를 시녀로 착각한 멍청한 카베이가의 장남 때문에 말입니다.”

“네, 맞아요.”

루나에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날, 아키스가 카베이가의 장남을 손수 흠씬 두들겨 패고는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대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가지 뭡니까? 분명 이름이나 어디 사는지를 물으려고 간 거겠죠. 안 그러나, 아키스?”

“……왜 그러셨어요?”

너무 뜻밖의 말에 루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았다.

그런데 그의 기색이 몹시 이상했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긴 왜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관심이 생겼으니 그런 거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아키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친구가 여자를 보고 그러는 건 난생처음이라 하도 희귀한 구경을 해서 지금껏 그날이 잊히지 않더군요. 원래 공작은 여자를 돌같이 보는 사람 아닙니까.”

“……제게 관심이라도 있으셨어요?”

아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도 하지 않았다. 루나는 빙긋 웃었다.

“정말요?”

“……그건 둘만 있을 때 이야기합시다.”

휘어지는 루나의 눈을 보며 황태자는 더욱 유난을 떨었다.

“대관절 둘이 어떻게 다시 만나 이뤄지게 된 건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사교계에 드러나지 않은 이런 흙 속의 진주 같은 분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알 수 없고. 아키스는 입이 무거우니, 아무래도 공작 부인을 공략하는 게 빠르겠습니다.”

루나는 피식 웃었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의례상 칭찬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키스는 쌀쌀맞게 말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면 전하가 귀찮게 했겠지요. 괜찮은 여인이라면 꼭 귀찮게 하시잖습니까.”

“저런, 나도 도리를 안다네. 귀찮겐 하되, 아키스와 연결해 주려 노력하려 했을걸.”

루나는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사랑이란 정말 바보 같은 것이라, 빈말이라도 좋았다. 아키스가 그녀를 여인으로 보고 관심을 가져 준다면 몹시 기뻤다. 그 끝이 허무할지 모르는 감정이라 해도, 밀려오는 기쁨의 파도는 막을 수 없었다.

* * *

“이제 올라갑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도회는 무르익고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등에 손을 댄 채 부드럽게 계단으로 향했다. 루나에게 인사하고 싶어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일찍 올라가도 되나요?”

“원래 물러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은 우리 없이도 사람들이 즐길 때입니다.”

그의 말대로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조금 피로해지던 참이었기에,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황태자 전하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카드 게임 룸에 있을 테니.”

“그래도 혹시 인사할 사람이…….”

“나중에.”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는 조금 급하게 루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아키스를 보며 몇몇 귀부인이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왜 이렇게 서둘러요?”

루나는 그에게 안기듯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신방은 별장의 3층 중앙 방에 차려져 있었다. 3층은 손님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곳이라 매우 조용했다.

“첫날밤이잖습니까.”

“새삼 뭐가…….”

이미 할 건 다 하지 않았는가. 자고 나서 바로 혼인 증서에 사인했고, 지칠 틈 없이 매일 밤 배를 맞췄으니.

아키스가 루나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뺨이 붉어져서 아키스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우리 오늘 처음인 척하기로 한 것, 합의된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었죠.”

루나는 그의 품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기분이 들떴다. 형식상의 첫날밤 때문이 아니라, 황태자가 한 말 때문에.

아키스가 저를 처음부터 여인으로 생각했다고, 마음에 들어 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럴 상황이 아님을 알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눈 가리고 귀를 막았다. 결혼식으로 들뜬 기분은 루나의 정신을 풀어 놓게 만들었다.

신방 근처에 대기 중이던 레이디 메이드, 제인이 급하게 달려왔다.

“저, 옷시중을 들겠습니다. 첫날밤 준비를…….”

“괜찮으니 나가 봐.”

아키스는 점잖게 제인을 돌려보냈다.

제인에게 민망한 모습을 보인 루나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그가 거침없이 어깨로 문을 밀고 신방으로 들어섰다.

루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떼고 신방을 둘러보았다.

하녀들이 정성껏 꾸민 침대는 붉은 시트로 꾸며져 있었고, 그 위에 분홍색과 흰색 장미 꽃잎이 뿌려져 있었다. 투명한 은사를 섞은 천으로 침대 주변을 장식했고, 좋은 향이 나는 초가 금촛대 위에서 일렁이며 빛나고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드디어 둘만 있게 되었군요.”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까?”

“아, 무, 물론이죠.”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베이가에서 왜 자신을 응시했냐고 묻고 싶었다. 동시에 답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가 너무 좋은 대답을 해 주면, 이를테면 이끌려서 봤다든가, 마음에 들었다든가 하는 대답을 들으면 아키스를 너무 좋아하게 돼 버릴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그녀의 짝사랑은 충분히 무르익어 있었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되는 일이 무서울 정도로.

한편으로, 루를 닮아서 보았다는 대답이 나올까 무섭기도 했다. 복합적인 마음이었다.

“와인, 마실 겁니까?”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홀에서 마신 샴페인 기운으로 들뜨고 나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에 와인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루나는 와인을 홀짝이며 아키스가 와인을 마시는 걸 보았다.

곧, 그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루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와인 잔으로 방어하려던 루나는, 바로 잔을 빼앗겼다.

아키스가 무릎을 세워 침대에 체중을 실었다. 그의 몸이 바짝 다가왔다.

“웨딩 밴드, 했습니까?”

“……네.”

루나는 그의 신비한 보랏빛 눈을 보며 홀린 듯 대답했다. 아키스는 대답 대신 루나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꺄!”

루나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아키스는 그녀의 치마를 위로 올렸다.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입은 루나는 허벅지 위에 새하얀 레이스 웨딩 밴드를 차고 있었다.

전통대로 첫날밤에 신랑은 신부의 허벅지에 걸린 웨딩 밴드를 벗겨 내야 첫날밤을 치를 수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말랑한 허벅지를 누르고 있는 웨딩 밴드 끝을 이로 물어 끌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웨딩 밴드가 쓸고 가는 자리를 뜨거운 손바닥으로 덧그렸다.

그가 큰 손으로 맨살을 문지를 때마다 맞닿은 루나의 살결이 화끈했다.

그는 루나의 발에 걸린 하얀색 하이힐을 벗겨 내고 웨딩 밴드를 침대 밖으로 던졌다.

“아, 아키스…….”

이어서 그는 루나의 속옷을 이로 물어 끌어내렸다. 그녀의 속옷이 벗겨지고, 순식간에 루나는 하반신에 가터벨트와 스타킹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친 것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래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느낌이 묘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종아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녀의 긴장이 풀리고 하반신 끝에서부터 피가 돌도록. 그의 몸 밖으로 더운 성욕과 팽팽한 긴장감이 발산되고 있었다. 루나는 엉겁결에 물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몸이 달았어요?”

역시 며칠 쉬어서 그런가? 루나는 술기운에 엉겁결에 뱉어 놓고는 제 입을 막고 싶어졌다.

아키스는 기침을 할 뻔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아키스는 말해 놓고 대답을 깨달았다. 그녀가 읽던 야릇한 대중 소설들. 딱 거기서 배웠을 짝이었다.

‘정말, 이 여자는…….’

그녀가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말한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팡 터지는 느낌이었다.

조바심, 성욕, 소유욕 같은 것들.

“뭘 상상하는지 몰라도, 내가 이렇게 흥분한 건 당신이 오늘 너무 예뻐서입니다. 오해는 마요, 아내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래서 몸이 달았습니다. 이게 나쁜 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 그거야. 그렇죠…….”

루나는 스륵, 손을 내밀어 아키스의 어깨를 덧그렸다.

“그럼, 언제부터 이렇게 여자를 칭찬하는 데 관대해지셨나요?”

“관대하지 않은데. 그냥 그래 보이니 말하는 겁니다.”

“……언제부터 그래 보였는데요. 요즘 정말 이상해요.”

루나는 그래서 설렌다는 말을 제 입으로 언급하진 못했다.

“처음 신경 쓰인 건, 카베이가에서 심부름을 온 당신을 봤을 때부터였죠.”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심장이 물감 통이 된 것 같았다. 물감 같은 붉은 감정이 마음속에서 팡 터졌다.

루나는 말없이 아키스에게 키스했다. 아주 작게, 쪽.

그가 자신을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로 봐준 남자라 좋았다. 그녀가 아는 한에선 그녀는 한 번도 사내에게 여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루나에게 그는 최초로 사내로 보이는 남자였으니까.

아키스는 그녀가 입 맞추는 순간, 견디지 못했다. 그는 격렬하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을 빨고, 핥고, 이 뒤와 혀 아래를 세세히 훑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전부를 삼키고 싶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음…….”

격한 키스가 끝나자, 루나의 입에서 희미한 은사가 이어졌다. 아키스는 입을 한 번 더 맞추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유욕이 솟아났다. 오늘 남자들의 찬탄의 시선 속에 서 있던 그녀는 자신의 아내였다.

아키스는 루나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그녀의 치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루나는 입을 막았다. 어찌나 성급한지 그는 드레스조차 벗기지 않았다. 치마가 휙 위로 올라갔다.

“읏!”

쭙쭙, 그의 혀가 빠는 소리가 루나의 귀를 간질였다. 루나가 침대 시트 위에서 몸을 비비자, 허벅지에 드레스 자락이 비벼졌다.

“드레스 다 망치겠는데.”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당신 여기서 흘러내린 물이 치마를 잔뜩 물들이고 있어.”

말을 마친 아키스의 혀가 도톰한 음부 위를 훑었다. 음모를 헤치고, 그는 혀끝으로 뾰족해진 음핵을 간질였다.

“평소처럼 발가벗겨 줄까요?”

“네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싼 옷인걸요. 벗고 해요.”

“그래요? 이것도 한번 찢고 싶었는데 아쉽군.”

루나는 귀가 확 붉어졌다.

“첫날밤이잖아요. 고전적인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고전이에요. 도대체 어떤 첫날밤을 상상하는데요.”

“그렇다면 유감이고.”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못됐다. 매력적이다. 루나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말 나온 김에…….”

그가 머리맡에 손을 뻗었다.

“우리가 결혼식 첫날밤까지 서로 순결을 지켰을까 봐 준비해 준 모양이군요.”

널찍한 타원형 그릇에 담긴 오일이었다. 분명, 첫날밤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라고 준비한 것이리라. 그건 관행이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의 바지 앞섶을 보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팽팽하게 일어서 있었다.

“신부만 벗는 거 아니잖아요.”

루나가 소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가 옷을 벗는 걸 도와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도 벗었음 해요?”

“…….”

“좋아요. 하지만 준비된 건 쓰고.”

준비된 거? 루나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아키스가 그녀의 젖가슴 위로 오일을 쏟아부었다. 달달한 향이 나는 금빛 오일이 그녀의 위로 흘러내렸다. 매끈한 하얀 살결을 감상하며 아키스는 혀를 핥았다.

“이게 뭐예요?”

“그대로 움직이지 마요. 시트를 전부 더럽히기 싫으면.”

루나는 몸을 긴장시켰다. 아키스는 농담에 곧이곧대로 반응하는 그녀가 귀여워 웃었다. 아키스는 바로 옷을 벗었다.

단단한 성기가 반쯤 서 있다, 금빛 오일이 유두를 타고 흘러내는 걸 보고 완전히 일어섰다. 루나는 침을 삼켰다.

“이거 기분 이상해요.”

“그래요, 좋아질 텐데.”

아키스가 루나의 젖가슴을 덥석 잡았다. 탄력 있는 젖가슴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움켜쥐었다 놓는다.

“예쁘군요.”

“…….”

“당신 살결은 참 하얀데, 오일로 반들거리니까 온몸을 깨물고 먹고 싶을 정도입니다. 아파하지만 않으면 온몸을 내 잇자국으로 물들인 다음 내 눈앞을 걸어 다니게 하면서 그걸 감상하고 싶을 정돕니다.”

루나는 흐으, 하고 새된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말과 감촉, 두 가지 모두 루나의 음부를 젖게 만들었다.

손바닥에 문질러지는 젖꼭지가 뾰족하게 선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날씬한 배를 문지른다.

“흐으…….”

가슴에서부터 충분한 양의 오일이 배에 흘러내렸다. 그러다 가터벨트만 찬 벌거벗은 하반신에 손을 뻗는다. 둔부 위의 섬모가 오일에 젖어 번들거렸다.

“아…….”

미끌미끌한 기름이 묻은 굵은 손가락이 음핵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으응!”

뾰족하게 선 그곳이 간질간질해서 배꼽 아래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대음순 사이사이 꽃잎 주름을 긁듯이 손가락을 살살 움직였다. 그녀의 점막에 넘치는 애액과 오일이 섞이며 묘한 내음을 풍겼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골반을 꾹 누르고 나머지 한 손은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위치시켰다.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하아…….”

“오일을 칠하지 않아도, 당신은 물이 많아서 이미 충분히 질척해져있는데. 어느 쪽 향이 더 진할까. 당신 구멍에서 나오는 냄새가 엄청나게 달고 야릇하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아니, 섞이면 무슨 맛이 나려나.”

귀를 두드리는 민망한 말에 루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끄러워서 허리를 들썩인다. 굵은 손가락이 쑥 들어와 위로 쳐올리듯 움직였다.

“하앙!”

루나는 허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팔을 잡았다. 빨리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며칠간의 금욕은 그녀도 몸이 달게 만들었다.

“그럼 나도, 쓸래요. 이거.”

“할 수 있겠어요?”

아키스가 루나의 땀에 배인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

아키스가 남은 오일을 쏟아 주자 루나는 손바닥에 그걸 문질러 아키스의 성기를 손에 잡았다. 그녀가 손을 조금 쥐었다 폈다 하는 것만으로 그의 것이 팔딱대며 자맥질했다. 끝이 뿌연 액으로 젖어 가기 시작한 성기가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아키스가 더운 숨을 토했다.

“앗!”

루나가 두세 번 주물럭거린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루나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단번에 가르며 들어왔다. 향유가 미끈해서 더 수월했다. 일단 넣는 건 쉬웠지만 언제나 엄청난 사이즈의 그의 것은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 루나는 코로 숨을 쉬었다.

“내 아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

“어쩌면, 당신이 날 이상하게 만들었나봐.”

푹, 푹. 그가 힘차게 성기를 꽂아 넣었다.

루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더럽히진 스타킹처럼, 그녀의 마음도 쾌감으로 얼룩져갔다.

“어쩌면 오일이 의미가 없었나 봅니다. 당신 몸은 평소처럼 숨 막히게 하고, 날 먹어치우니까. 그리고 당신 체액이 더 진하거든.”

“…….”

“아. 씹물이라고 하나.”

루나는 입을 벌렸다. 온몸이 부들거렸다.

그가 뒷골목에서 자랄 당시의 거친 언어를 잠자리에서 쓰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흥분되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당신은 달아, 향유 냄새보다 더.”

아키스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더 단단하게 잡았다. 목에 감긴 팔을 확인하자 그가 침대를 팔로 받치고 더 힘차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퍽퍽!

머릿속으로 별이 뛰어다니고 찰박이는 소리는 커지고, 오일 섞인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새 절정에 달한 루나의 육벽은 그의 것을 세차게 조여 댔다. 아키스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흐윽, 흑……! 아키스, 아키스!”

천장이 눈앞에서 마구 흔들렸다. 속절없이 쾌락이 휘둘리는 감각에 시간이 인지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흔들렸다. 온몸이 얽히고 얽혔다.

“아아, 흐응…….”

며칠간 빼지 않아 평소보다 진하게 느껴지는 체액이 몸에 토해질 때도, 그녀는 더운 숨을 쉬고 있었다.

“예쁩니다, 정말.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는 가터벨트를 찬 그녀의 비부 사이, 빠끔 열린 구멍에서 뿌연 정액과 오일이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 손으로 그 비부를 쓰다듬으며 그가 쓱 훔쳐냈다. 이렇게 해도, 그 각인 때문에 절대 그녀는 임신할 일이 없을 것이다.

다행인데, 또 가슴이 스산했다. 어쩌면…….

아키스는 밀려오는 생각을 멈췄다. 비육이 숨 쉬는 모습을 바라보다, 손으로 흘러내리는 걸 모두 훔쳤다.

“냄새 맡아 볼래요, 난 좋을 것 같은데.”

루나는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아키스가 작게 웃었다.

“장난치지 마요.”

“알겠습니다.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아키스가 루나의 뺨이 키스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그의 가슴에 뺨을 대며 파고들었다. 맞닿은 숨을 쉬며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완벽하다. 떨어진 신체 부위가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허무감도 없이 이 순간이 완벽했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존재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키스는 닿은 살결 너머 그녀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음…….”

짧은 잠에 들었던 루나가 눈을 떴다.

아키스가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른한 소리를 내며 눈을 반만 뜨고 아키스를 보았다.

창밖을 보니 아직 시간은 초저녁이었다. 루나는 아키스가 어처구니없이 급한 첫날밤을 치렀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도 극도로 흥분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손님들은요……?”

“아직 한창 파티 중입니다.”

루나는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그녀의 드레스와 속옷들은 모두 침대 아래에 널브러져 있었다. 루나는 쌕쌕, 작은 숨을 쉬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키스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루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요?”

“파티의 마무리를 할 시간. 다시 드레스를 입도록 하죠.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아키스는 손수 루나의 옷시중을 들었다.

“자, 이제 일어나요. 발코니로 나갑시다.”

아키스는 루나의 어깨를 감싼 채 그녀를 부축했다. 루나가 그의 등을 쓸었다. 그의 살결이 닿을 때마다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단련된 그의 몸은 타고나게 탄탄했다.

그가 등을 한번 움찔했다. 루나는 자신이 만든 손톱자국에 그가 아파하는 것을 느끼고 뺨을 붉혔다. 공연히 민망해졌다.

루나는 숄로 어깨를 감싸고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정원으로 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뭘 기다리는 거지?’

루나는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을 구경한 적 있습니까?”

루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루’로서는 달빛 서점에서 아키스가 천장에서 반딧불이 떨어지는 마법을 보여 준 적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마법을 본 적이 없었다.

“보통 이런 행사에서 볼거리는 서커스나 무희들의 쇼, 아니면 연주회지요. 하지만 나는 다른 걸 보여 줍니다.”

어느새 정원에는 야외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연주자 몇 명이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오, 이제 시작되려나 보군요.”

손님들이 수군거렸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즐거워 보였다. 루나는 아키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들이 뭘 기다리는 거죠?”

“볼거리요.”

아키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발코니에 손을 댔다. 아키스가 작게 주문을 속삭였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아키스와 루나의 눈앞에 금빛 공 하나가 생겨났다. 점차 모습을 키운 그것은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금빛 공이 팍, 하는 소리를 내며 터지고 그 안에서 빛나는 금빛 사자가 나왔다.

“시작됐어!”

정원 바닥이 이내 검게 물들었다. 그 아래로 반짝이는 별들이 튀었다.

빛나는 금빛 사자가 정원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크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금빛 사자의 발걸음을 따라 금빛의 가루가 점점이 번졌고, 그 점들은 금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카펫이 되어 사람들의 다리를 눈부신 빛으로 적셨다.

이내, 사자의 몸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수십 마리의 눈부신 새가 되었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듯 빛나는 새들이 정원을 날며 볼거리를 만들자 환호와 갈채가 터졌다. 다음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꽃이 발밑에 피어났고, 진주 같은 비가 알알이 내리기도 했다.

한참을 계속된 황홀한 마법이 끝나자, 정원의 모든 사람들은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코니를 향해 무릎을 굽히고 가슴에 팔을 댄 채 경의를 표했다.

“역시 공작님의 마법은 최고군요.”

“언제 봐도 이만한 구경이 없다니까요.”

루나도 흠뻑 빠진 채 그것을 보았다.

“……와, 정말 멋졌어요.”

“환상 마법인데, 오늘은 당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평소보다 화려하게 했습니다.”

루나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있는 사람들은 환상 마법에 현혹되었지만, 아키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루나에게 현혹되어 눈을 뗄 수 없었다.

방금 전의 관계로 매무새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살구빛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화려해요. 예쁘고요.”

루나는 들떠서 말했다.

“그렇군요, 정말 예쁩니다.”

아키스는 루나를 보며 홀린 듯 중얼거렸다.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마법사와 결혼했다는 게 실감이 나요.”

루나는 아키스의 옷깃을 쥐고 속삭였다. 그가 마법사라는 건 알았으나, 오늘처럼 크게 실감한 건 처음이었다.

“괜찮았다면 다음번에 또 보여 주죠.”

“정말 좋았어요. 또 보여 줘요, 약속이에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들은 한동안 첫날밤의 여운과, 또 결혼식을 곱씹듯 침묵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루나의 머릿결을 간질였다.

‘이것 또한 꿈속이 아닌지 무서울 정도야.’

정신을 차려보면 초라한 오두막의 하녀 소녀 루나가 되어있지 않을까 싶었다. 꿈속의 일기장에서 열망한 것들이 모두 실현되니까.

“아키스.”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멈춰야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아키스가 처음으로 보여줬던 금빛의 환상 마법을 떠올렸다. 그날부터 그녀는 아키스가 건 마법에 걸려버린 것이 아닐까. 그날부터 그를 사랑했으니까.

“나를 처음 만난 날 내게 물었죠. 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냐고.”

“그랬죠.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과 닮았습니다. 느낌이 닮은 거지만요.”

“그런가요?”

루나는 말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알아선 안 된다- 그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여인으로 느꼈고 호감을 가졌다. 이걸로 끝내자. 그렇게 납득시켜야 했다. 하지만 입을 멈출 수 없었다.

이 황홀한 결혼식이 끝나고, 그녀가 아키스에게 숨기는 비밀만 없다면 앞으로도 그의 아내로 살 수도 있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의 곁에 머물 수도 있는 것이다. 자꾸만 그런 희망이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꿈같은 시간이라, 자꾸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에요?”

아키스는 침묵했다.

“사랑스런 사람입니다.”

“…….”

“당신과 그 사람의 첫 느낌이 참 비슷했습니다. 처음 보고 생각했죠. 만일 저 사람과 알게 된다면,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지금은 못 만나나요?”

“아마도. 그리고, 다음번에 만나면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루나의 심장이 뛰었다.

“왜요?”

“서로 나쁜 일로 엮여 버렸거든요. 다시 만나면 분명 큰 상처를 주게 될 겁니다. 나를 다시 만나지 않는 게 그 상대에게 좋을 겁니다.”

루나는 아키스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손을 떨던 그녀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키스는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루가 모욕감을 주었다고 생각했으리라. 잡으면 복수하겠다고…….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

“침대로 들어가죠.”

아키스는 그녀의 얼굴이 이상한 것이 피곤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키스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그는 루나의 창백한 낯을 보았다. 달빛과 바깥의 불빛이 어우러져 그녀의 얼굴에 묘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 환상 마법이 너무 예뻐서요. 그래서.”

루나는 겨우 말을 돌렸다.

“고대 사람들은 환상 마법에 중독되곤 했죠.”

아키스가 속삭였다.

“마법이 중독도 되나요?”

“흔한 일이죠.”

“아무리 대단한 볼거리라도 언젠간 질릴 것 같은데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런 환상 마법은 별것 아닙니다. 가장 위험한 건 환상 마법을 응용한 꿈 마법이죠. 고대의 마법사들을 타락시킨 마법이니까요.”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제국 역사에서는 고대 마법 제국의 멸망 원인이 지배층의 오만과 나태라 가르쳤다.

“전 처음 들어요.”

“일반인에게 공개된 역사가 아니니까요.”

아키스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고대에 꿈과 환상을 보여 주는 마법이 발달하면서 모든 마법사들이 현실에서 사는 걸 포기하고 꿈속에 살게 되었죠. 그러다 결국 세상의 균형을 책임지는 중대한 역할을 맡은 마법사들마저 정신을 잃고 중독자가 되어 고대 제국의 근간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써도 되는 거예요?”

“이런 마법은 환상 마법 중 가장 기본적인 거라 괜찮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으로서 알게 되는 사실이니, 기밀로 하세요.”

“알겠…… 어요.”

루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표정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밖에 이야기하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알아도 별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중간에 이상한 일이 있기도 했고, 거기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느라 피곤했을 텐데.”

아키스가 속삭였다.

“공작님도 고생하셨어요. 이런 자리를 싫어하시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지루하셨을 텐데.”

루나는 그제야 겨우 미소 지었다.

“지루해서, 그냥 당신을 구경했습니다. 그건 꽤 즐겁더군요.”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 말에 루나의 뺨은 붉어졌고 겨우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루’에 대한 일만 떠올리고 있었다.

“아키스, 오늘 정말 멋졌어요. 예복도 잘 어울렸고. 또, 나도 예쁜 옷 입고 결혼식도 치러서 좋았어요. 아, 모이라가 빌려준 보석도 예뻤고. 상상도 못했어요. 제가 이런 결혼식을 할 거라곤요.”

“그게 빌린 거였습니까?”

아키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반짝이는 다이아 목걸이를 하고 있길래 당연히 알아서 구입한 줄 알았다. 그는 결혼식 세부 과정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을 통해 돈을 얼마든 써도 된다고 지시했을 뿐이다.

“네, 다만, 드레스에 보석을 너무 많이 써서 약간 예산 초과가 났다고 해요.. 재료비만 조금 지불해 줄 수 있냐고 말을 꺼내더라고요. 하지만 공작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루나.”

아키스는 언짢은 듯 말했다.

“그녀에게 계산서를 새로 받지요. 정말 재료비를 초과해서 쓴 거라면 돈은 내 쪽에서 지불할 겁니다. 그리고, 오늘 걸친 모든 보석 다 돈을 지불하고 내가 사겠습니다. 어울리니까요. 그리고 그런 건 진즉 내게 묻지 그랬습니까.”

루나는 뺨을 붉혔다.

“그게……. 당신 자존심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나는…… 친척 집에서 자랐잖아요. 그래서 남의 돈을 당연하게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숙부님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껴 써야 했거든요.”

결국 루나는 아키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녀가 보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남주인공에게 선물을 많이 받았다. 그러니 그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멋진 여자라면 선물을 턱턱 받고 당연하다 여길 테니까. 루나도 그런 여자들이 훨씬 더 대범하고 우아해 보인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살아온 방식을 바꿀 순 없었다. 루나는 말을 해 놓고도 아키스가 이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키스는 몇 초간 입을 다물고 루나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친척들이 엄했나 보군요.”

“조금은요. 하지만, 굶고 자라진 않았어요.”

“그건 당연한 거고.”

아키스는 묘하게 그 말이 신경 쓰였다.

“부모나 남편을 잃은 가문의 여인들을 보호하는 건 귀족 가문의 의무기도 할 텐데.”

“저는 좀 사정이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진 빚을 남작가의 재산을 팔아 갚아야 했거든요. 그 빚 때문에 남작가 사람들은 늘 팍팍하게 살았죠. 자연히 저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랐고요.”

루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놈의 남작가.’

아키스는 그녀의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시렸다. 어린 시절의 일일 뿐이고, 지금은 그녀가 그곳을 벗어났다는 걸 알았음에도 말이다.

‘이 기분은 또 뭔지. 책임감인가?’

수양딸을 창부로 둔갑시킨 집안. 그녀가 그런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다는 게 거슬렸다. 꼭 그 일에 제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까?”

혹시 그간 자신이 맞지 않는 생활에 억지로 적응하라 그녀를 채근했나 해서 아키스가 조용히 물었다.

루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결혼식을 준비하며 예쁜 것들도 많이 보고. 호강했어요. 게다가 디온 말로는 앞으로 내가 드레스를 마음껏 맞춰도 될 거라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공작 부인으로 생활하며 입을 새 드레스들을 얼마든 주문하세요.”

“봐요, 지금도 통 크게 돈 쓰라고 했잖아요? 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요. 새 보석은 너무 큰돈을 쓰는 거니까요.”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드레스를 맞추는 건 기쁜데 보석은 안 받겠다는 건가?

‘그래서 선물을 더 사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녀가 기쁘다고 말해 준 건 몹시 좋았으나, 아키스는 왠지 그 말에 그녀에게 무언가를 더 해 주고 싶어 애가 타는 자신을 발견했다. 루나는 의도치 않게 아키스를 아리송한 말로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여자를 더 기쁘게 만들 수 있지? 아키스는 묵직한 고민을 시작했다. 자신이 왜 이런 고민을 하는지 파고드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방법을 좀 바꿔야겠어.’

아키스는 속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보석을 선물하거나 그녀에게 잘해 주려면 좀 더 직접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녀가 겁을 집어먹지 않도록 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은 뭘 사 준다고 해 봐야 낭비하기 싫다며 가격에 신경 쓸 그녀였다. 그런 점이 가련하게 느껴졌고, 자꾸 지켜 주고 싶었다. 그녀는 참 이상한 여자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웨딩드레스 대금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고마워요.”

루나는 그제야 맑은 웃음을 보여 주었다. 기분이 자꾸 이상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잡았다.

“목욕부터 하고 좀 쉰 후, 뭘 먹는 게 좋겠습니다.”

“네, 지금은 그거면 정말 행복할 것 같네요.”

루나는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아키스는 종을 쳐 하녀들을 불렀다.

“공작가에선 아무것도 미안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 집안 사정은 알겠지만 그것도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때로 세상은 염치 있는 사람에게 더 가혹하죠. 당신이 그런 케이스였던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물론, 쉽지 않겠지만.”

아키스는 쌀쌀맞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게 말했다. 뜻밖의 말에 루나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곧 눈이 휘어졌다. 아키스의 심장이 또 이상하게 요동쳤다.

그녀가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그녀가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루나는 테이블 옆에 올려진 봉인 된 아키스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용히 편지를 뜯어보았다.

[언약서.

나,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은 루나 드 버몬드를 아내를 맞이함에 앞서 아래와 같은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아내의 과거를 사사로이 따지지 않으며, 아내의 자유와 행복을 존중한다. 또 그녀의 행복을 위해 항상 관심을 기울일 것을 서약한다. 그리고 아내가 잘못을 하더라도 사사로운 잘못을 묻기 전에 침착하게 대화하고 먼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루나 드 로텐베른에게만 국한된 권리이며, 제국의 유일한 공작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바이다.]

가슴이 살짝 아렸다. 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든 그녀를 항상 소중히 해 준다. 그 거짓말만 아니라면-

그를 믿고, 자신이 이단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라는 걸 말할 수만 있다면.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알싸함에서 시작한 두근거림이 그녀의 마음을 장악했다.

그녀는 설렘만 남기고 그 생각을 편지와 함께 조용히 접었다.

* * *

루나는 리튼에서 3일을 보냈다.

결혼식 다음 날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별장에서 아키스와 단둘이 보낸 3일은 몹시 즐거웠다. 디온을 비롯한 고용인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채 집으로 먼저 돌아갔기에 더 오붓한 시간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바다는 기대 이상이었다.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보석 같은 연하늘색 바닷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키스의 별장에 딸린 해변은 보는 사람이 없어 루나는 맨발을 드러내고 발을 담그기도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리튼 인근 바다에서 잡힌 해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레스토랑에 가서 아키스와 단둘이 식사했다. 부띠끄들을 구경하기도 했고, 휴양객들을 위한 공원에도 놀러 갔다.

밤에도 푹 자고 쉬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아키스는 결혼식 이후 또 무슨 자극을 받은 건지 매일 새벽까지 그녀를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독 때문이려니 하던 루나도 마지막에는 해탈했다. 이것도 한때다, 하는 마음으로.

낮에는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고 밤에는 그가 못살게 구니, 결국 3일 후, 루나는 체력이 고갈되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많이 피곤하죠. 게이트를 타면 곧 도착할 겁니다.”

아키스는 마차 안에서 자신에게 기댄 루나에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으음, 아직 떠나고 싶지 않은데…….”

리튼의 낙원 같은 풍경이 점차 사라져 갔다. 그녀는 졸면서도 중얼거렸다. 아키스의 입가에 웃음이 샜다.

“여름에 또 옵시다. 여름이 더 볼만하거든요.”

“약속하는 거죠?”

“물론이죠.”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공작 부인.”

하인들이 루나의 가방을 내렸다. 결혼식을 마친 공작 부부를 위해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처음 가 본 리튼은 어떠셨는지요, 부인.”

디온이 다정스레 물었다.

“너무 즐거웠어요.”

루나가 대답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점심을 준비하겠습니다.”

알렉이 말했다. 루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키스를 보았다.

“점심, 함께할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그럼, 옷 갈아입고 봅시다.”

“네, 그래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은 루나와 아키스가 주고받는 눈빛에서 결혼식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했다.

‘아무래도 다르지.’

결혼식이라는 건 서로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공표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귀빈들이 모인 큰 행사였다.

그러니 만큼 결혼식을 통해 둘 사이의 유대감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알렉은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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