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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황궁에 나타난 건 축제 날의 무도회 이후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병색이 남아 있었지만, 얼굴 살이 빠져 더욱 날카롭고 수려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는 무심하게 생각했다.
아키스가 입궁한 순간부터 황족을 알현하기 위한 홀을 향해 걷는 순간까지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아키스는 자신이 미소년에게 실연당하고, 동시에 요부에게 홀린 희대의 호색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 같은 것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남의 결혼이 그렇게 큰 관심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다.
황태자가 반가운 얼굴로 직접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시게, 공작. 몸은 괜찮고? 여러 번 시종을 보냈는데 병문안 사절이라기에.”
최음 독으로 인한 병을 앓은 것이 자랑은 아니기에 공작은 자신이 아픈 이유를 숨겼었다.
“그냥, 심한 감기였습니다.”
“감기……? 공작가의 사람들이 감기도 걸리나?”
아키스의 성의 없는 핑계에 황태자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공작가의 사람들이 보통 사람보다 튼튼하다는 건 황태자도 잘 알았다.
“네, 감기입니다.”
그러나 아키스는 딱 잘라 말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되었네. 그나저나 돌연 결혼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사생활입니다.”
오늘도 틈 없이 철벽을 치는 공작에 황태자는 김빠지는 표정이었다. 아프다고 하더니만, 역시 아프든 말든 공작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다.
“그래, 결혼식 전에 한번 공작 부인의 얼굴을 보여 줘야지? 도대체 어떤 신비한 여인이 공작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서 잠도 못 잤네.”
황태자가 물고 늘어지자, 공작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결혼식 날 보시면 되잖습니까.”
“우리 사이에 이럴 텐가? 우린 같이 자란 친구 아닌가.”
질척거리는 황태자에 아키스가 정색했다.
“자꾸 이러시면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겠습니다.”
“아, 아니, 그건 안 되지! 나도 공작 부인을 꼭 보고 싶네.”
“그러면 얌전히 기다리십시오. 내가 여기 오는 걸 기다리셨듯이.”
황태자는 무심하다 못해 무례한 공작의 말에도 화내지 않았다. 어쨌든 아쉬운 쪽은 공작이 아니었다.
아키스는 화제를 돌렸다. 그가 오늘 황궁에 온 이유였다.
“그래서, 황제 폐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네.”
황태자는 앞장서 황제의 침실로 아키스를 안내했다.
제국의 황제는 노쇠하여 죽어 가고 있었다. 부유한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을 정도로, 딱 그 정도로만 적당히 치세를 떨친 평범한 왕이었다. 문제는 후궁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는 것 정도. 그렇다고 제국을 흔들어 놓을 정도의 난봉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혈육들의 사랑을 받을 만큼 인간미가 넘치는 황제도 아니었다. 딱, 그 정도의 남자가 현 황제였다.
그런 황제도 죽음 앞에서는 과거를 후회하고 눈물지었다. 노쇠하여 죽어 가는 몸도 문제였지만, 황제는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황태자가 아키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가겠는가.”
“꽤 오래. 아직은 마법이 통할 겁니다.”
아키스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황제의 침실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 하인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들은 황제의 침대 앞까지 다가갔다. 마도구인 생명 유지 장치에 몸이 연결된 채 누워 있는 노쇠한 황제가 보였다. 그는 의식이 있었다.
황제는 아키스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손을 들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입에 물린 호스를 뺐다.
“오오, 아키스. 정말 기다렸다네……. 다시, 내게 꿈을 꾸게 해 주게나. 부디…….”
아키스는 대답 대신 황제에게 다가갔다.
“강녕하셨습니까.”
“그대가 와 주지 않아 강녕하지 못했네. 부디…….”
“알겠습니다. 그 전에 황태자 전하가 할 말이 있다고 하는군요.”
황태자는 아키스보다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황제에게 몸을 숙였다.
“아버님, 저도 여기 있습니다.”
“그래, 너도 왔구나. 그보다 난 아키스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공작의 마법도 좋지만, 아버님이 명하신 대로 올해 제국 축제를 마쳤습니다. 제가 대리한 일에 대한 보고를 들으셔야지요. 그리고 새 집정대신의 임명 건도 황명으로 살피셔야 합니다. 참, 그리고 헌법 재판소에도 결원이 생길 것 같고요.”
“그런 일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모두 네가 알아서 해…….”
황제는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황태자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번졌다. 황태자와 아키스는 눈을 마주했다. 아키스는 바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지금 바로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키스는 속삭이며 작게 주문을 외웠다.
아키스의 손에서 만들어진 부드러운 빛이 황제의 주름진 이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살 거죽 위로 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제야 황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다시 꿈을 꿀 수 있겠군, 아주 좋은 꿈을 말이야…….”
“이번엔 더 좋은 꿈을 꾸실 겁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 이제 난 좀 자야겠구나. 모두들 물러가거라.”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었다. 황태자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아비의 한심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새삼 부끄럽군. 제 맘대로 살면서 이 나라의 황제로서 자랑스런 일이라곤 한 번도 못하다가 결국엔 꿈 중독에나 걸리다니.”
“뭘 새삼.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키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꿈 마법이란 고대 마법의 한 종류였다. 현실과 똑같은 정교한 꿈을 꾸게 해 주는 마법. 중독성이 강해 금단의 마법이기도 했다.
황제는 몸이 나빠지니 병의 고통에서 도피하기 위해 아키스에게 꿈 마법의 처방을 부탁했다. 그리고 중독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꿈 마법을 처음 권유한 건 황태자였다.
그들은 시가렛 룸으로 향했다. 황태자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젊은 시절 여자를 몇이나 두고 할 거 다 하고는 이제 와 첫사랑과 이루어지는 꿈을 꾼다니. 소년 시절 자신을 돌봐 주었던 시녀와 결혼하여 강가에 집을 짓고 필부로 사는 꿈속에서 산다고 하더군. 노인네 뻔뻔하고 역겨운 것도 정도가 있지.”
황태자는 경멸스럽다는 듯 속삭였다. 그러더니 표정을 바꾸어 권유했다.
“그럼,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할 텐가?”
“아니요, 바빠서.”
“한동안 두문불출하더니 뭐가 바빠? 몸도 다 나은 것이 아닌가?”
“아카데미에 들러야 합니다.”
“건강 문제로 이번 학기 수업은 중단했다며?”
아키스는 매우 귀찮다는 표정으로 황태자를 보았다. 도대체 왜 이 인간을 포함한 사교계의 인사들은 남의 사생활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없었다.
“결혼 휴가계를 내야합니다.”
“……뭐?”
“결혼을 해야 하니 당분간 아카데미를 쉰다는 정식 휴가계를 낼 겁니다. 그 김에 연구실도 정리하고.”
황태자는 입을 떡 벌렸다. 정말로 이자가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긴 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군. 그럼 언제 다시 입궁할 건지…….”
“다시 말하기 지칩니다만, 요즘 바쁩니다.”
아키스는 딱 잘랐다. 황태자는 아키스의 기색에서 묘한 모습을 발견했다.
“……공작, 아까부터 이상하게 서두르고 있는 것 같은데…….”
황태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아카데미까지 얼마가 걸리지? 그리고 또 공작저까지…….
“혹시, 집에 빨리 돌아갈 생각에 그러나?”
공작의 동작이 멎었다. 아키스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가 풀었다. 명백히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놀릴 거리를 찾은 황태자는 활짝 웃었다.
“그게 무슨…….”
“이런, 내 예상이 맞았군. 집에 숨겨 둔 새 신부가 너무 보고 싶은 거야, 그렇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아키스는 차갑게 내뱉었다. 황태자는 아키스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 공작이…….’
공작이 저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지금 제가 서두른다는 걸 깨달은 건가.
그 순간 황태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작 부인이 궁금해졌다. 소문에는 하룻밤 만에 남자를 녹이는 아주 육감적인 요부라던데.
“하하, 내가 정말 눈치가 없었군그래. 신혼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아키스는 매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안 그래도 계속 그녀가 생각나긴 했다. 아침에 인사도 못하고 나왔으니. 게다가 그가 병중이라 최근에는 계속 한 몸처럼 붙어 지냈다.
결국, 아키스는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침에 얼굴을 못 봐서 그런 것뿐입니다.”
황태자는 입을 떡 벌렸다. 고, 공작이 진짜…….
“도대체,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가? 응? 예쁜가? 정말 그리 예뻐?”
아키스는 슬슬 진심으로 황태자를 한 대 칠까 고민했다. 그가 진짜 치더라도 공작의 마법에 의지하고 있는 황가는 그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징그럽게 보는 황태자를 보니 전의가 상실되었다.
아키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예쁘다면 어쩔 겁니까?”
“그럼 어떤 식으로 예쁜지 물어봐야지. 요염하게 예쁜지, 우아하게 예쁜지, 청순하게 예쁜지.”
“글쎄요, 여인의 외모에 대해 세속적 평가를 내리는 걸 즐기지 않아서.”
아키스는 싸늘하게 내뱉고는 루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가 미인이라는 덴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녹색 눈은 투명했고, 머리카락은 황금 실 같았다. 그리고…… 조금 눈치를 보는 버릇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만큼 생각이 많고 속이 깊은 여자였다.
생각. 그 생각이 문제였다.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계속 상상하게 만드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여자 같았다.
“내가 설마 세속적 의도가 있어 그러겠나? 그대가 어떤 여인과 혼인한지 너무 궁금해서 그러지. 그것만 말해 준다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하겠네. 집으로 초대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을 거야.”
아키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그녀가 어땠더라. 아키스의 품에 안겨 그의 등에 손톱을 세우며 흐느꼈다.
‘아, 공작님. 더는…… 앗, 못 참겠어…….’
세 번째에서는 그녀도 더는 못하겠다고 울먹이다가 결국 절정에 달해 고개를 꺾었다.
하얀 살결을 바들바들 떨며 서로 얽힌 나뭇가지처럼 그의 몸에 감겨 오는 버드나무 같은 몸……. 아키스는 그녀가 정말 끝내주게 요염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우아한 건 잘 모르겠지만 움직임이 절도 있었고 자세도 좋았다. 집에서 엄하게 교육을 받았다던가.
그리고 청순한 건 당연했다. 생긴 것 자체가 청초하니까, 보통 그런 느낌의 여인을 청초하다고 할 것이다. 아키스는 이견이 없었다.
“……귀엽기도 합니다.”
“뭐?”
“다 예쁘고, 그리고 귀엽기도 합니다.”
글씨를 못 쓴다든가 좀 엉뚱한 면이 있다든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다든가, 민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한다든가.
굳이 그녀의 매력을 꼽자면 귀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모든 것이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황태자가 그녀를 보면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조금 짜증이 일었다. 제 객관적인 판단으로 그러한데, 저런 여자 밝히는 황태자가 보면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고, 공작? 자네 공작 맞나? 당신 누구야?”
아키스는 황태자의 실없는 소리에 넘어가지 않았다.
“저 공작 맞습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예쁜 타입이더군요.”
아키스는 처음에 그녀가 예쁘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미친 듯이 자신을 자극하는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그녀가 미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고,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 자네. 자네가…….”
황태자는 턱이 빠질 것 같았다. 그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아키스를 가리켰다. 공작이 진짜 임자를 만났구나, 황태자는 충격에 젖어 생각했다.
“이런, 불쌍한 라미라 영애. 그녀가 공작 부인을 보면 난리를 치겠군.”
“달리아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겁니까?”
“그거야 공작을 향한 라미라 영애의 순정이 워낙 유명하잖나. 달리아가 아직 미혼이지만 황가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상당한데, 공작 부인을 귀찮게 하지 않을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달리아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새틴을 괴롭혔던 게 떠올랐다. 물론, 그의 전 약혼녀 새틴도 만만치 않아 자기 사람들을 포섭해 접전 수준으로 싸웠던 모양이지만.
아키스는 황태자에게 관심을 끊고 걸음을 돌렸다.
“어, 어딜 가나?”
“황후께 갑니다. 문안 인사를 드리러요.”
“아.”
황태자는 아키스를 따라가려다 멈춰 섰다.
* * *
황후에게 향하던 아키스는 어떤 젊은 영애들 무리를 발견했다.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은 낯이 익었다. 모두 명문 귀족가의 미혼 영애들이었다. 아키스는 지나가는 하인을 붙들었다.
“저들이 오늘 무슨 일로 황궁에 왔지?”
“네, 오늘 황궁 서관에서 티 파티가 있는 모양입니다.”
“주최자는?”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입니다.”
“그래.”
아키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벌을 줄 사람이 참 많았다.
* * *
“달리아 영애,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요즘 영애께서 계속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요. 오늘도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시고…….”
“아, 그냥 생각할 일이 있어 그렇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시죠.”
차갑게 쏘아붙인 달리아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티 파티에 참가한 영애들은 오늘 공작이 황궁에 왔다는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하루아침에 생긴 공작 부인에 대한 일은 요즘 전 사교계의 화제였다.
공작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다른 영애들이 자신을 힐끔하는 건 알았지만, 달리아는 그런 일은 다 부차적인 문제였다.
‘멍청한 것들, 너희들이 내 고민을 어찌 알겠어.’
요즘 그녀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으며, 눈 뜨고 있어도 멍할 때가 많았다. 공포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날 뭐가 어떻게 된 걸까.’
황후의 응접실에서 달리아가 아키스와 차를 마신 그날. 달리아가 제 모든 걸 걸고 아키스의 차에 약을 탄 그날.
독을 탄 차를 마신 아키스의 몸에서는 약효가 돌지 않은 듯했고, 달리아는 용의주도하게 외부에서 사람들을 고용했다. 달리아의 미소년 시종 한 명이 뒷골목 출신이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아키스를 뒤쫓다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곧바로 납치하라고 했지, 아키스를 습격하란 말은 하지 않았다고! 멍청한 놈들, 정말 그놈들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이 안 와.’
그들은 아키스가 인적 드문 곳에 들어서자 곧바로 아키스를 습격했다. 그리고 아키스와 싸움을 벌인 끝에 한 놈이 죽었고, 아키스는 종적을 감췄다.
‘그가 어디 뒷골목에 쓰러져 죽거나 엄한 여자라도 품었으면…….’
달리아는 초조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차 안에 독을 넣은 것이 자신이라는 걸 아키스가 눈치채면 가문 차원에서 큰일이 날 터였다. 달리아의 아버지는 제국 3대 명문가의 가주였으며, 세도가였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난 죽은 목숨이야…….’
그런데, 아키스의 동태가 이상했다.
그는 달리아를 족치러 오기는커녕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곧 달리아는 아키스가 심각한 병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분명 그 독 때문이다. 달리아는 확신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그녀를 찾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 달리아가 멀쩡한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아키스가 그녀를 의심하지 않거나, 독이 엉뚱하게 돌았거나.
최음 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아키스의 몸에 상해만 입혔다. 이것도 가능한 예측이었다. 그는 워낙 독특한 혈통이니 제 아무리 독한 흑마법사의 약이라고 해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뭘까. 제발, 내가 말려들지 않기를…….’
그날부터 달리아는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키스가 갑자기 아무 기별도 없이 혼인했다는 소식이었다. 달리아는 며칠을 울고 또 울었다.
‘그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만큼 노력한 내가 보답 받지 못하고 엉뚱한 여자가 그를 가지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빌어먹을 새틴도 얄미웠지만, 아키스가 그녀의 양자매와 결혼한 연유도 정말 궁금했다. 그러던 와중 그가 돌연 황궁에 걸음 했다고 한다.
달리아는 안절부절못했다. 그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떳떳하지 못하니 그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달리아는 티 파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몰래 빠져나왔다. 그녀는 서궁 주변을 맴돌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차라리 지방 영지로 내려갈까? 아, 그건 안 돼. 아키스를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그이가 결혼했다고 꼭 아내를 좋아하리란 보장은 없어. 내가 저지른 짓만 눈치채지 못한다면 주변에서 맴돌면서 기회를 노려야 해.’
달리아는 회랑을 지나 빈방으로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때였다.
쿵! 무겁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어……?”
그 순간 달리아는 등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방이 추워졌다.
“달리아 영애.”
꿈에도 그리던 아키스가 그녀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달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고, 공작님…….”
달리아는 벌벌 떨면서도 그를 본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잘 지내셨어요?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내 건강은 영애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보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키스는 여전히 훤칠하고 숨 막힐 정도로 잘생긴 사내였다. 아픈지 좀 야위긴 했는데, 오히려 더욱 날카롭고 수려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몸에 깃든 분위기는 조금 변해 있었다. 원래 금욕적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묘한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을 주목하게 하는 더운 느낌. 사내의 묘한 색기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달리아의 심장이 공포도 잊고 뛰었다.
“하, 할 말이요? 우리 사이에 대해서요?”
그 순간, 달리아가 앉은 의자가 크게 덜컹거렸다. 말 그대로 정말 위아래로 한 번.
달리아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몸이 못 박힌 듯이 숨이 턱 막혔다.
“꺅!”
아키스가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요즘 내 몸이 좀 이상했습니다. 듣기로는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었다 하더군요. 주치의조차 이름을 모를 만큼 희귀한 독이라 들었습니다.”
“그, 그래요? 지금은 멀쩡해 보이시는데…….”
“네, 덕분에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키스가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달리아의 얼굴에 광기어린 환희가 번졌다.
“황후 폐하를 뵈었는데.”
“네, 네에…….”
“내가 약을 먹은 날, 달리아 영애와 차를 마셨다 하더군요.”
달리아는 순식간에 해골처럼 핼쑥해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날 밤 일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키스는 그녀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꾹 누르고 떨어졌다.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네, 까맣게 잊었습니다. 독의 부작용이라는군요.”
달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됐다. 됐어. 나는 살았다. 달리아는 울 뻔했다. 독이 어떤 농간을 부린지 몰라도 아키스는 그날 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달리아의 환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키스는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 영애.”
“네.”
“심증이란 말을 압니까?”
아키스는 느긋하고 평화롭게 말했다. 달리아의 기분이 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증거는 없는데, 그날 내게 독을 먹인 사람. 심증이 가는 사람이 있더군요. 만나지 않던 사람과 내가 갑작스레 차를 마셨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심증은 증거가 아니잖아요. 전 도통 무슨 말을 하시는지…….”
달리아는 뛰는 심장을 누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아키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니 심증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아키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심증만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달리아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아주 비밀스럽게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요. 어떤 마법은 자는 사이에 걸어 사람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도 합니다. 또 어떤 마법은 매일 밤 죽는 것보다 못한 악몽을 꾸게 만들어 사람을 미치게도 하지요.”
아키스가 이 제국 제일가는 마법사라는 건 달리아도 잘 알았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농담입니다.”
아키스는 곧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나직이 말했다.
“당신 아버지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아십시오. 내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거든.”
달리아는 그 순간 제국 3대 명문가인 자신의 가문에게 절을 하고 싶어졌다.
“……목숨 건진 줄 알라고요?”
“네. 그리고 내 기분이 가장 더럽고 나쁜 날, 화풀이를 할 겁니다.”
“히, 히익…….”
달리아는 쇳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걸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그러니 날 두려워하십시오. 그리고.”
아키스가 달리아에게 몸을 숙여 속삭였다.
“이번에는 새틴처럼 안 될 겁니다. 내 아내에게 허튼 짓하면 재미없을 줄 아세요.”
“아…… 아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기서 얼굴조차 모르는 그의 아내가 왜 나온단 말인가. 새틴처럼은 안 될 거라고?
달리아는 새틴이 공작의 약혼녀라는 이유로 그간 그녀를 무던히 괴롭히고, 또 세력 싸움을 했다.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경고였다.
내 아내를 건드리면 가만 안 놔둘 거라는 경고.
심증은 말 그대로 심증이다. 아키스가 그녀를 떠보더라도 이미 증거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굳이 그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있다면…….
‘……이 말을 하기 위해 날 찾은 거야?’
달리아의 입장에선 위협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키스가 고작 제 아내를 위해 제게 경고하러 왔다고?
“저를…… 저를 이렇게 근거 없는 일로 협박하시면…… 그건 공작님에게도…….”
이건 불공평했다! 지금껏 그렇게 마음을 얻으려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가 그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다.
“영애가 내 걱정을 할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 그리고 이건 협박이 아니라.”
아키스가 속삭였다.
“통보입니다.”
방 안의 온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달리아는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여자가 도대체 뭐길래.’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키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엔 새틴 때와는 달랐다. 달리아는 분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기에…… 그 낯짝을 한번 봐야겠어.’
달리아는 부들부들 떨며 생각했다.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아키스와 결혼한 대가를 치러야지.’
* * *
황궁에서 보내는 시간은 항상 이유 없이 피곤했다.
‘어디 있을까…….’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키스는 오랜만에 루나 없이 홀로 하루를 보내며 품속에 넣어 둔 펜던트를 매만졌다.
그날 밤, 서점 2층의 좁은 간이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펜던트였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걸 쓰다듬었다.
‘왜 단서가 잡히지 않는 거지?’
아키스에게 마음을 사고 그를 흔들어 놓은 후,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 버린 소년. 공작가의 정보력과 정보 길드를 동원하고 있음에도 소년의 행적은 털끝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은신처에 숨어 있거나, 누가 숨겨 주지 않은 한…….’
아키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마차가 멈추고 나서야 아키스는 등에 힘을 풀고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댔다.
* * *
아키스는 아카데미의 고명한 교수였다. 방황하는 마법사들은 유능한 마법사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당분간 아카데미에는 주1회만 나올 테니, 중요한 일들은 모두 그때 처리하도록 합시다.”
아키스는 그날 오후를 바쁘게 보냈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오랜만에 나온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독 기운이 좀 남은 건가.’
아키스는 급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제 몸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주치의 말로는 완치라 했다. 독 기운은 몸에 남아 있지 않다고. 재발의 위험은 지켜봐야겠지만, 더 이상 중독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런데, 왜…… 자꾸 그녀가 생각나는 거지?’
요즘 그녀와 붙어 지냈다. 독 기운을 이유로 아침저녁으로 계속 부부 관계를 맺었다. 격렬하고, 느긋하게, 때로는 급하게.
저녁 식사 후에는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그러다 사람들 없는 으슥한 곳에선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허리에 손을 두르곤 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욕구를 발산시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독 기운은 끝났을 텐데, 왜 자꾸 그녀를 만지던 감촉이 손끝에서 감돈단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계속 그녀가 생각났다. 웃는 얼굴이라든가, 그럴 필요 없는데도 아침이면 고집부려 화장하는 모습 같은 것들. 사소한 버릇들.
‘그러고 보니 식사 버릇도 좀 이상해.’
루나는 뭐든 잘 먹는 편이었는데, 식사하면서도 그가 무슨 음식을 집는지 확인하고서야 자신 몫의 음식을 접시로 옮겼다. 마치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참 이상한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속이 술렁거리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하고,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미로 속에 빠진 기분이군.’
루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다가도, 제 눈앞에서 사라진 소년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그 잠깐의 순간이 지나면 다시 아내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
혼잡한 감정의 미로. 누구도 그를 가둔 적 없는데 그는 그 안에서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미로 속에는 두 사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루와 루나. 다른 의미로 그에게 다가온 존재들.
* * *
아키스가 없는 하루는 지루했지만 빠르게 지나갔다. 사실 아직도 몸이 피곤해서 루나는 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책을 쥔 채 꾸벅꾸벅 졸았다. 옛 기사들의 사랑담을 각색한 이 사소설은 루나가 어릴 적부터 재미있게 읽던 것이었다. 디온이 아키스의 서재에서 찾아다 준 책이었다.
귀족 가문의 저택은 보통 남편의 공간과 아내의 공간이 유별했다. 서재는 대표적인 남편의 공간이었다. 아무리 부인이라고 해도 남편의 허락 없이 서재에 들어갈 수 없었다. 디온은 공작에게 서재 출입을 허락 받았기에 예외였다.
결국, 밀려오는 피로함에 루나는 일찍 자기로 했다. 비아가 침실에 잠자리를 봐주었다. 루나는 잠옷을 입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피곤하시지요? 신혼이라 며칠은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을 테니까요.”
“조금요.”
비아의 말에 뺨을 붉힌 루나는 베개에 얼굴을 대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가 없어서 좀 허하기도 했지만 편하기도 했다. 혼자 있을 때는 긴장을 풀 수 있었으니까.
“내일부터는 저택도 제대로 돌아갈 테니, 할 일이 더욱 많으실 겁니다. 공작저를 신혼집으로 꾸며야 해서 구입할 물건도 많을 거고요.”
“난 별로 필요한 물건이 없는걸요. 하지만, 쇼핑은 좀 하고 싶어요.”
“요즘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직접 물건을 구입하는 쇼핑이 유행이죠. 공작님께 말씀하시면 보내 주실 겁니다.”
루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작님은 늘 이렇게 늦게 들어오나요?”
“대중없으십니다. 한밤중에 나가시기도 하고, 연구할 것이 많을 때는 하루 종일 서재에 계시기도 하죠.”
비아는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루나는 조금은 쓸쓸함을 느꼈다.
‘하긴, ‘루’였을 때도 그는 늘 바빠 보였지.’
언제나 새벽에 불쑥 등장하던 그였으니까.
루나는 비아의 말에서 앞으로 자신의 신혼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남편은 늘 바쁠 테니 식사 때나 얼굴을 보며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되지 않을까?
‘존중, 아내에 대한 존중…….’
몰려드는 졸음을 느끼며 루나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루나야 그를 남자로 보고,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루나는 이제 아키스의 호의에 의지해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하리라. 마음을 은은하게 태우는 이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불을 꺼 드릴게요. 어쩌면 오늘밤은 안 들어오실지도 몰라요. 아까 집사가 손님방을 봐 놓는 것을 보았으니, 그쪽에서 주무실지도 모르고요.”
루나는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동침은 끝이었다.
루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좀 멀쩡한 하루를 보내는 거야…….’
* * *
아키스의 이상한 증상은 계속되었다.
‘……마차가 왜 이렇게 느리지?’
오늘따라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가 한없이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마부를 두 번이나 독촉했다.
드디어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키스는 평소보다 성급하게 마차를 박차고 나갔다. 갑자기 그녀, 제 아내가 잘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녀가 멀쩡하게 있을 건 당연한 일인데 참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늦으셨군요. 오늘은 호텔에서 주무시고 오실 줄 알았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은 어떠셨습니까.”
아키스는 아카데미 근처 시내에 자신 소유의 호텔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수업이 늦으면 종종 그곳에서 머물곤 했다.
아키스는 그제야 자신이 호텔에 대한 것을 아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는 건 상상도 못했다. 집사는 아키스의 코트를 받았다.
“평소와 같았지. 아내는……?”
“부인께서는 일찍 주무십니다.”
“별일 없었나?”
“사실은…….”
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새틴이 왔다 갔다고?”
아키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쓸데없이 감 하나는 좋은 여자였다. 그 많은 날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그가 딱 하루 외출한 오늘 쳐들어오다니.
“부인의 면을 봐서 관대하게 봐주었더니 기어오르는군. 그 여자를 집에 들이다니 제정신인가? 디온과 자네는 도대체 뭘 한 거지?”
집사는 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디온 말로는 공작 부인께서 들이라 하셨다 합니다. 직접 따끔하게 타이르겠다며…….”
“……그녀가?”
“네, 디온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몹시 놀라웠다고 하더군요. 새틴 영애를 아주 어린애 혼내듯 크게 혼내셨다고 합니다. 새틴 영애가 눈물을 쏙 빼고 도망쳤습니다. 부인께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는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셨고요.”
집사가 털어놓은 사실은 또 의외였다. 아키스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녀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새틴의 면전에서 욕이라도 한 건가? 그는 그녀가 욕하는 걸 한 번 본 적 있었다.
아키스는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1층이 왜 이렇게 춥지?”
집사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부서진 응접실 유리창 때문에 당분간 1층은 추울 예정이었다.
“아무튼, 일단 늦으셨으니 나머지 일은 아침에 처리하시지요. 디온이 버몬드 남작가에 항의를 보낼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직접 보고를 들으시지요.”
아키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주무시라고 손님방을 정리해 두었는데, 어디서 주무시겠습니까?”
집사가 눈치 없이 말했다.
제국에서는 부부 사이여도 따로 침실을 쓰고 합방 일에만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기에 집사도 당연히 오늘부터는 공작이 따로 침실을 쓰겠거니 했다.
아키스는 헛기침을 했다.
“나는 내 침실이 편해. 목욕 준비만 다른 방에 해 두도록.”
아키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집사는 아키스의 언짢은 표정을 바로 눈치챘다. 그러고는 빠르게 기지를 발휘했다.
“예, 손님방 침대가 공작님께서 쓰시는 침대만큼 편하진 않지요. 그래서 저도 그냥 공작님의 침실에서 주무시는 게 낫지 않냐 권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거기다 언제 오실지 몰라 손님방 난로도 켜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키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쩔 수 없고말고요.”
집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집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아키스는 잘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안, 휘장 속에서 그녀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기척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곤히 잠든 듯했다.
뽀얀 얼굴 위로 금발이 흩어져 있었고 앙다물린 핑크빛 입술은 작고 귀여웠다. 아키스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의 옆에 누웠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분명 주치의는 오늘부터 과한 성욕 증상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니 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작은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날씬한 쇄골 아래, 비단 잠옷 아래 감싸인 그녀의 하얗고 말랑한 몸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미쳤나 보군.’
아키스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주치의를 바꾸든 해야겠어. 돌팔이야.’
아니, 만지는 것뿐만 아니라 입술로 그녀의 몸을 느끼고 싶었다. 어젯밤에도 원 없이 안았는데 부족했다. 그의 배 속에서 뭉글뭉글 은근한 정욕이 피어올랐다.
결국, 아키스는 제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으응…….”
곤한 잠에 든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키스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 안은 따뜻하고 말캉했다. 그녀의 작은 혀가 손끝에 닿을 때, 아키스는 황급히 손가락을 뺐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자는 아내를 멋대로 만지는 건 신사다운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방에 가서 잘까 하다 그냥 침대로 들어갔다.
“응…….”
“……!”
루나는 잠결에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몸. 그녀에게 익숙한 그의 품으로.
아키스는 망설이다 제 품에 들어온 그녀를 끌어안았다. 말캉한 몸이 그에게 닿았고, 부드러운 두 가슴이 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비벼졌다.
‘……못 참겠군.’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루나는 그의 탄탄한 가슴에 코를 박고 자고 있었다. 그의 손이 루나의 잠옷 안에서 점점 위로 올라가 속옷 위를 맴돌았다. 그는 손가락을 뒤적여 속옷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살결이 느껴졌다.
아키스는 잠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한참 꿈에 빠져 있던 루나가 나른하게 의식을 찾았다.
“아……?”
루나는 깨기 직전, 꿈에서 좋은 향기를 맡았다. 거기다 온몸이 간질간질하고 확 열이 오르는 감촉. 잠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포개며 꼬았다.
“응…….”
누군가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익숙한 감촉. 아키스의 입술이었다. 그게 떨어지자 그의 손이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속옷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왔다.
“아키스…….”
루나가 뭐라 말하는데, 자신 위에 드리워진 큰 그림자가 느껴졌다. 하아, 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쉬, 나 맞습니다.”
동시에 아랫입술을 더듬던 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침이 그득한 뜨거운 입 안의 점막을 그가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동시에 속옷 속에 있던 조그만 구멍에도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마디가 굵은 그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들어올 때마다 감각이 느껴졌다. 혀 위쪽을 굵은 손가락의 끝이 누르자, 아래쪽에서도 끝까지 도달했다.
“자는 사이에 젖었나, 아니면 좋은 꿈을 꾸고 있었나.”
루나는 더운 숨을 쉬며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그가 손가락을 한참을 비볐다.
“잠깐. 응…….”
루나가 더운 숨을 토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요즘 섹스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음란한 꿈이라도 꾸나 했다. 그러나 몸이 달아오르는 묘한 감각이 점점 생생히 느껴지자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뽀얀 얼굴 위로 입술을 내렸다.
“일어났군요.”
루나는 그 감촉에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른하게 낮은 신음을 냈다. 입 안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대신 그는 타액으로 질척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선과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애무하는 손에 뺨을 가져다 댔다.
“이게 무슨……”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루나는 안도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지금 새벽인데…… 갑자기 무슨…… 으응…….”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은데 새벽이라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루나는 그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아키스가 가볍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입술로 물었기 때문이다.
쪽쪽. 이어서 그가 버드 키스를 해 댔다. 루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못 이기는 것처럼 슬쩍 입술을 열었다.
입술이 떨어졌다.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보이는,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말도 못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속옷을 허벅지까지 내리고 잠옷 치마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둔부 사이를 더듬어, 조그만 음핵을 찾았다. 그는 음핵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몸을 비비꼬았다.
“앗……!”
“낮에 새틴이 왔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깨운 거예요? 으응, 흣……!”
그의 손가락 아래 음핵을 희롱당하며 질문을 받으면 꼭 심문당하는 기분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아키스가 웃었다.
“노린 건 아닌데, 솔직한 대답이 나올 것 같군요.”
루나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키스가 음핵을 누른 손가락을 그대로 빙글빙글 돌렸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앗……. 별일 아니었어요. 금방 쫓아냈거든요…….”
루나는 빠르게 속삭였다.
“진짜 아무 일이 없었나?”
루나는 고개를 젓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왜 못 믿어요. 별일 없었다니까…….”
아키스는 그녀가 조금도 주눅 들거나 상처 받은 것 같지 않자 안심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날이 밝으면 새틴의 집안부터 박살 내야겠군.
아키스가 자신의 발기한 것을 루나의 허벅지에 가져다댔다. 말려 올라간 잠옷 치마 아래, 허벅지 너머로 몽둥이처럼 부푼 뜨거운 살덩이를 느낀 루나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정말로, 지금요?”
아키스는 대답 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꽉 눌렀다. 허기짐에 가까운 갈급. 그게 느껴졌다.
“주치의가 공작님이 다 나았다고…….”
“어쩌면 덜 나은지도 모르지요.”
그런 건가. 정말 독이 얼마나 지독한 거야. 루나는 울상이 되었다.
“정말로요?”
“넣고 싶어요.”
아키스가 루나의 귀에 솔직하게 속삭였다. 루나의 귀까지 붉어졌다. 아무래도 이 남자를 거절하는 법을 연습해야겠어.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밤중에 이러면 나빠요.”
그리고 빨리, 해요.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는 루나의 뒤에서 그녀를 옆으로 눕힌 자신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을 삽입했다.
그녀의 젖은 점막은 말과 달리 그의 것을 급하게 삼켰다. 안도감, 쾌감, 충족. 그런 감정을 느끼며 아키스는 더운 숨을 내쉬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스러지게 그녀의 골반을 잡는다. 비단 잠옷이 마구 구겨지며 아키스의 단단한 몸과 말랑한 몸 사이에서 비벼졌다.
“흐응, 흐……. 흣……!”
푹푹 박히는 소리가 나며, 루나는 땀에 젖기 시작한 손으로 시트를 그러쥐었다. 회음부에 그의 귀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아키스는 그녀의 한쪽 무릎 아래 아예 손을 집어넣고 그녀의 다리를 공중에 띄웠다.
퍽퍽!
루나는 그의 팔 사이에 한쪽 다리가 걸쳐져 꼼짝 못하고 그의 커다란 성기를 받아냈다. 맞닿은 살덩이 사이에서 생겨난 열기가 아랫배를 완전히 장악하고 조였다.
“흐읏, 아키스. 너무 커요.”
루나가 끊어질 듯 속삭였다.
“너무 빨라.”
그녀가 속삭였다. 아키스가 천천히 힘을 풀고 얕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음문에 힘을 주었다. 조여 오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등 뒤의 사내가 더운 숨을 토했다.
아키스가 루나의 다리를 놓았다. 그녀의 양 무릎 안쪽에 손을 넣고 정자세로 눕혀 깊게 치받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아, 아키스. 좋아…….”
루나는 약간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자신이 그런 목소리를 낼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입술이 꾹 다물렸다.
“괜찮아, 너무 예뻐. 울지 마.”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나 키스했다. 루나는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서 이렇게 몇 번이나 열정을 받아내고, 원하고 더 원하면 그것 때문에 숨 막혀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 가게 될까 문득 두려워졌다.
루나의 손에 아키스의 손이 깍지 끼워졌다. 단단한 손을 잡은 채 그는 뿌리 까지 넣을 듯 욕심내어 파고들었다. 루나는 목을 꺾었다.
“히익, 흐으, 응…….”
아키스는 루나의 안에 더운 열정을 토해 냈다. 거의 동시에 루나도 음문을 조이며 발가락을 접었다. 아키스는 그러고도 부족한지 그녀의 안에서 몇 번 더 자신을 비틀었다.
‘너무 좋아서 이상해. 한밤에 이러는 거 이상하잖아.’
머리가 몽롱해졌다. 루나는 숨을 토하면서 생각했다.
* * *
“하아…….”
얇은 잠옷만을 걸친 채 그녀는 알몸으로 아키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잠옷은 분비물이 묻어 엉망이고, 속옷은 침대 아래로 떨어진지 오래였다.
아키스는 잔쾌감에 떠는 그녀의 몸을 손바닥으로 계속 어루만졌다.
“집사가 오늘 안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자다가 정말 놀랐어요.”
루나의 목소리에는 투정이 섞여 있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달래듯 어깨를 어루만졌다.
“황궁은 어떠셨어요?”
“다들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더군요.”
아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요? 누가 그렇게?”
“황태자.”
루나는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불을 뒤집어쓴 모습이었지. 도무지 위엄이라곤 없는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예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키스는 그 말을 입안으로 삼키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저, 목말라요.”
물을 가져오기 위해 그가 일어나자, 루나도 상체를 일으켜 가운을 여몄다. 아키스는 그제야 흘러내린 가운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이게 뭡니까?”
아키스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아, 이건 사고가 좀 있었어요.”
루나는 머쓱하게 팔을 숨겼다.
사실 살짝 생채기가 난 것뿐인데 디온을 비롯한 고용인들이 하도 성화라 붕대를 감아 놓은 것이었다. 정말로 너무 작은 상처라 예전이라면 약도 안 바르고 잊었을 상처였다.
아키스는 미미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몸에 상처가 난 것도 모르고 철없이 그녀를 탐한 자신이 좀 한심했다.
“집사는 내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야 큰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내가 말하지 말라 했어요. 당신에게 직접 말하려고요.”
집사나 디온, 둘 중 한 명은 그가 늦은 새벽에 들어오더라도 꼭 기다린다고 했다. 아키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물을 건 자명했다.
“혹시 새틴이 그런 건가?”
루나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울프가 새틴에게 덤벼든 것, 그러다 유리가 깨져 자신이 팔을 다친 것.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키스는 낯은 서늘하기만 했다.
“아파 보입니다.”
아키스는 루나의 가운 자락을 걷고 조심스레 붕대를 감은 팔목 주변에 입을 맞췄다.
“울프를 혼낼 거예요?”
“명령 없이 사람을 습격했으니 훈련 받아야겠죠. 하지만 상도 받아야죠. 여주인을 지켰으니.”
“울프는 겁만 주려 한 거예요. 너무 엄하게는 혼내지 마세요.”
루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이라도 자요. 피곤하실 텐데.”
루나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아키스가 제 작은 상처에 이렇게나 신경을 쓸 줄은 몰랐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여도 그가 걱정해 주는 게 좋았다.
이 정도 상처에 고용인들이 수선을 떠는 건 민망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걱정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라 속이 술렁이기까지 했다.
고작 작년만 해도.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찬 겨울에 물일을 했다. 손이 부르트고 갈라져 아프기 일쑤였지만 아무도 루나에게 신경 써 주지 않았었다.
거기다 ‘루’로 밤에 일하면서 글씨를 많이 써서 손가락이 자주 아팠었다. 문득, 루나는 자신의 거친 손에 생각이 미쳤다.
‘날이 밝으면 화장품을 좀 사야겠어. 손에 바르는 걸로…….’
아키스와 닿을 일이 많으니 그런 것도 신경 쓰였다. 저도 여자인 모양이었다. 외모의 장점만 보이고 싶은 걸 보면.
“하암…….”
루나는 작게 하품하며 아키스의 품에 코를 박았다.
이제 내일부터는 이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 하루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녀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오늘 밤은 다른 방에서 주무실 줄 알았어요. 집사가 손님방을 준비했다고 들었거든요.”
아키스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집사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는지 갑자기 의문이 치밀었고, 그녀에게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침묵에 루나가 잠에 감기는 눈을 떴다.
“아, 생각해 보니 내가 눈치가 없었네요.”
“……뭐가?”
“내가 내일부터 손님방으로 옮길게요. 원래 당신 침실이니까…….”
루나는 그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했다. 아키스는 이제 몸이 다 나았다. 그리고 여긴 원래 그의 침실이니까. 이곳에서 가장 좋은 침실을 그녀가 차지할 수는 없었다.
이후에 품위 유지비를 받는다면 책상이라든가 화장대 같은 새 가구를 두세 가지 살 수 있으리라. 어디든 그가 새 방을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진짜 아내가 아니었으니까. 아키스가 왜 자신과 결혼했는지 정도는 알았다. 어리광을 부릴 생각은 없다.
‘오늘 밤에도 하자고 날 깨우기까지 한 건 의외긴 하네.’
그건 일종의 쾌유 기념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몸이 부서질 정도로 격렬하고 애틋했던 신혼 기간에 대한 마지막 같은 것.
“지금은 여기서 자도 되죠?”
그렇게 납득하고 그제야 루나는 졸린 눈을 비볐다. 지금 당장 그가 나가라고 하지 않는다면 자고 싶었다.
그 말을 들은 아키스의 몸이 굳었다. 방을 따로 쓰는 건 아키스도 당연히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게 명문가의 법도였으니까.
부부가 늘 침실을 함께하는 것은 정말 격렬히 사랑하는, 그런 이들이나 아주 드물게 그런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입으로 각방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좀 그랬다.
“……그.”
만약 방을 따로 썼는데 또 오늘같이 이 여자가 새벽녘에 잘 자고 있는지 신경 쓰이면? 매번 새벽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아키스는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결국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집은 수리하는 게 몹시 힘듭니다. 방 구조를 바꾼다든가 하는 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죠. 공작저 자체가 고대의 큰 유산 중 하나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어느 방을 쓸지는 신중하게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려던 루나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키스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명문가의 저택들은 보통 고대 시절에 설계된 곳들이 대부분이라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매우 가치 있는 곳이라 했다.
혹시 그는 자신이 집 안을 마음대로 활개 치며 다니다 저택을 손상시킬까 걱정하는 걸까?
“그래요? 저는 구조 수리 같은 큰일은 필요 없어요. 손님방이라도 상관없으니까요. 그냥 있는 가구만 써도 되고, 한두 개만 새로운 걸 사면…….”
“…….”
사실 손님방은 그의 침실에서 너무 멀었다. 가장 가까운 손님방도 방을 두 개나 지나쳐야 했다.
문득, 아키스는 집사가 말한 손님방 난로 이야기가 떠올랐다.
“……손님방은 추운 편이라서요.”
“그건 걱정 마세요. 저는 추운 곳에서도 잘 자요.”
루나는 싹싹하게 대답했다.
난방 장치는커녕 변변찮은 벽난로 하나만 달린 오두막에서도 잘만 잤다. 어느 날은 땔감을 달라고 하기도 어려워서 직접 나뭇가지를 주워 오기도 했었다.
아키스는 다시 침묵하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많이…… 춥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공작 부인의 의무를 제대로 못하잖습니까. 그런 건 싫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참 까다로운 사람이다 싶었다. 공작 부인의 의무가 얼마나 많기에. 하긴, 공작가의 안주인이니 원래는 바쁜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면 어쩌죠?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나요? 다른 층의 남는 작은 방이라도 좋아요.”
아키스는 조금 슬슬 짜증이 날 뻔했다. 혹시 이 여자, 원래 눈치가 없나? 아키스는 그녀에게 또 하나 희한한 점을 발견했다.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둔한 부분은 엄청나게 둔했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아마 내일이면 또 이 여자에 대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루 종일 그녀의 독특한 점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당분간 잠은 여기서 자면 자고…… 새 공간을 어떻게 정리할지 건축업자를 불러 의논해 봅시다. 명문가는 모든 일이 느리게 돌아갑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결국, 아키스는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루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끄덕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가 옆에 있으면 심장이 불편하게 뛰거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면 계속 붙어 지내자는 그의 제안이 별로여야 하는데, 싫지 않았다.
‘나도 참…….’
루나는 쓰게 웃었다.
아무튼, 이제는 정말 몰려오는 잠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녀가 짙게 하품을 하자, 아키스가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녀는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아키스는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작은 말을 흘려 넣었다. 그게 잘 자라는 말인 걸 깨달은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 * *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아키스의 이상한 증상은 끝나지 않았다. 아침에는 또 그녀가 새롭게 요염해 보였다. 지치지 않고 욕정이 솟아올랐고, 아키스의 잠옷 안이 팽팽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또 섣불리 그녀에게 손을 대기는 싫었다. 이런 기분은 뭘까? 아키스는 그녀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저도 모르게 계속 그녀의 자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으응…….”
몇 분 후, 루나는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그녀는 아키스의 시선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직후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가 최음 독 때문에 아픈 동안, 아키스는 그녀를 늘 긴 키스로 깨우곤 했다. 오늘도 그러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아키스는 나른하게 그녀를 응시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루나는 아키스가 회복했다는 걸 떠올렸다. 루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빠르게 물었다.
“아, 나 또 늦잠 잤나요?”
“아마도.”
아키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녀가 원래 언제 기상하는지 모르니 그는 그의 기준에서 대답했다.
루나는 시간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오늘은 할 일이 많은데, 꼭 외출하려고 했거든요.”
“외출……?”
새벽에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살 물건이 너무 많아서요. 음, 속옷이나 옷도 더 필요하고.”
루나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했다.
아키스는 그제야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을 붙여 줄 터이니 원하는 건 뭐든 사세요. 다만, 고가품의 경우 업자를 부르는 편이 나으니 많이 사지 마십시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느라 아키스는 그녀를 잡을 타이밍을 놓쳤다. 그녀의 매끈한 하얀 몸이 침대에서 빠져나가자 몹시도 아쉬웠다.
루나는 욕실에서 빠끔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아침 식사 같이하실래요?”
“좋습니다.”
아키스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작게 미소 짓고 욕실 문을 닫았다.
아침 식사 내내 아키스는 묘한 기분에 둘러싸여 있었다. 루나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며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루나.”
“네?”
테이블 대각선에 앉아 식사하던 루나가 눈을 들었다.
“정말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까?”
그 말에 루나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랐다.
“네?”
“우리가 정말 카베이가에서 만난 것이 처음인가해서요.”
오늘 루나는 화장을 살짝 옅게 하고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그 수수한 모습을 보는데 문득 익숙한 느낌이 떠올랐다.
물론, 성격이나 외모는 전혀 달랐다. 물결치는 금발의 그녀와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의 소년은 정반대였다.
그런데 그녀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물론이죠.”
아키스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키스는 종종 서점에서 소년 ‘루’를 저렇게 바라보곤 했다. 루나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세요?”
아키스는 한숨을 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한 소리를 했군요. 그냥 예전에 알던 사람을 닮았단 생각이 들어서.”
“누구 닮았다는 말, 자주 들어요. 전 평범하게 생겼거든요.”
루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새틴도 그랬거든요. 흔한 외모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사람에 비해 매력 없다고 했죠.”
정확히 말하면 새틴은 루나에게 좀 예쁘장한 흔한 외모의 여자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추녀보다 못하다, 그렇게 말했다. 도대체 남이 미녀든 추녀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 대강 넘겼지만.
루나의 말에 아키스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요. 흔하고 말고는 모르겠고, 내 눈에 당신은 독특합니다.”
“그…… 그래요? 난 흔한 얼굴인데. 이상하다.”
“흔한 게 아니라 독특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더 하지 마십시오.”
아키스가 쌀쌀맞게 말하자, 루나는 칭찬을 들은 건지 혼난 건지 기분이 애매해졌다.
그 뒤로 그녀는 밥을 먹는지 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외출 준비를 하겠다는 핑계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급하게 하녀장을 찾았다.
“비아, 비아!”
“네, 부인.”
오늘도 허리춤에 열쇠를 달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품위 있는 하녀장, 비아가 다가왔다. 비아는 몹시 서두르며 다가온 루나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도움이 필요해요. 저, 액세서리가 없을까요?”
“……액세서리요?”
“비아가 이 드레스가 역대 공작가 여인들의 재산이라고 했죠?”
“맞습니다.”
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작가의 여인들이 쓰던 보석이나 액세서리 같은 게 없을까요?”
“……아, 물론 있지요. 천천히 보여 드리려 했습니다만, 갑자기 왜…….”
“잠깐 빌리고 싶어서요. 오늘 외출할 건데 아무것도 안 하고 나가기가 좀……. 거기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계속 공작님께 너무 수수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요.”
“아.”
의아한 듯 루나를 보던 비아의 눈에 웃음이 번졌다.
그런 거였군. 아직 젊은 부인이니 이제 공작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집사에게 부탁해서 액세서리를 몇 개 빼 올게요. 어차피 결혼식 후, 차후 모두 공작 부인의 것이 될 물건이니 문제될 것도 없지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루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급하게 없는 화장품으로 정성껏 화장했다. 그나마 아키스가 사람을 보내 화장품 몇 가지를 사다 줘서 다행이었다.
제국에서는 여인들이 화장을 하는 건 보통이었다. 상류층 여인들도 공들여 화장을 했다. 보수적인 시골에서는 창부들이나 짙은 화장을 한다며 경시한다지만, 제국은 변화가 빠른 편답게 짙은 화장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여성용 고급 잡화점에서는 흔히 비단 속옷이나 화장품들을 팔았다. 다행히 공작가에서 구입해 온 화장품에는 분이나, 궁핍하나마 색조 화장품들도 있었다.
루나는 긴 막대 분첩을 얼굴에 두드리고 정성들여 색조 화장을 했다. 얼굴이 희어서 모든 색이 다 어울렸지만, 오늘은 은은한 살구빛으로 눈가를 살짝 물들이고 코랄색으로 입술을 칠했다.
“부인, 여기 있습니다.”
비아가 보석 몇 개를 들고 왔다. 디자인이 좀 구식이긴 했지만 훌륭한 세공의 보석 핀과 목걸이, 반지들이었다.
“공작가의 물건들 중에서 그다지 상등품은 아니지만, 당분간 편하게 쓰실 수 있는 것으로 골라 왔습니다.”
루나는 머리를 직접 틀어 올리고 고정한 큼지막한 오렌지색 보석이 달린 핀으로 머리를 고정했다. 오렌지색인 걸 봐선 가짜 보석이나 유색 오팔, 호박이려니 했다. 공작가의 물건이라 그런지 비싼 보석이 아니라도 몹시 반짝거렸다.
웬일인지 계속 비아는 웃음을 눌러 참는 모양새였다.
“공작님께 보여 주러 가실 건가요?”
“네, 나가기 전에 인사도 할 겸사요.”
“아무렴요. 아, 마차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비아가 가져다준 드레스 중 그나마 가장 화려한 것을 입었다. 녹색 꽃이 수놓인 오래된 연보랏빛 드레스였다. 가슴이 은근히 파인 디자인이기도 했다.
‘여성스런 모습을 어필해야 해.’
루나는 아침에 아키스가 했던 누굴 닮았다는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화장을 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밤에 민얼굴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년 루와 다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음침하고 남루한 루와 반대되는 인상을 새겨야 한다.
순진무구하고 약간은 철없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그런 모습. 사내들은 만난 여인을 인상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루나가 미래의 일기장에 써 있는 내용이었다.
* * *
아키스는 오랜만에 아침부터 서재에서 알렉과 디온을 순서대로 면담했다.
“그녀가 아주 조금 다쳤더라도 바로 보고해. 이 집에서 공작 부인의 안위는 중요한 것이니까.”
알렉은 묘하게 부드러운 얼굴로 그러겠다 대꾸했다. 그 다음은 디온이었다.
“다음부터는 새틴이 공작저 앞이든 어디든 찾아오면 마차에 태워 길 한복판에 집어 던져. 내가 허가할 테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뤄 온 소송 건 말인데.”
“네, 버몬드 가문에서 공작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빌려 온 것에 대한 명예 훼손 소송 말씀이시지요?”
어제 새틴은 도를 넘었다.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도 감히 저택에 찾아오다니. 그래도 그녀의 가족이라 생각해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렇게 저의 심기를 거스른다. 아마 자비는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소송 실행해라. 자비 없이 쥐어짜. 집안에 동전 한 푼도 남기지마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디온은 예상했던 듯 공손히 대답했다.
* * *
루나는 아키스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곧 들어오라는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루나는 서재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아키스에게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가능한 한 우아하고, 화사하고, 애교 있게.
“그, 저 외출하려고요.”
“그렇게 꾸미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냉엄하게 디온에게 명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벼, 별로 꾸민 것도 아니에요. 전 늘 이렇게 하고 다니는 걸요? 옷이 없어서 그렇지.”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근사한 자세로 섰다.
“어때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애써 요염하게 웃었다. 아키스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예쁘긴 엄청 예쁘군. 이건 뭐야, 유혹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그에게 엉뚱한 효과를 발휘했다.
오늘 하루 쌓인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는 드러난 그녀의 하얀 가슴골에 입술을 묻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기가 막히게 예뻐 보였다. 원래 큰 눈은 은은한 색조로 물들자 더 고혹적으로 보였고 속눈썹도 이전보다 길어 보였다. 그녀가 빠르게 속눈썹을 깜빡이자 그의 하반신이 뻣뻣해졌다.
‘확실히 어제보다 오늘이 더 예뻐.’
아키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옷이 참 예쁘군요.”
“그, 그쵸?”
루나는 아키스에게 허리선을 보여 주며 드레스 자락을 살짝 집어 올렸다.
그러자 이제 그녀가 왜 이러나,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졌다. 침대까지도 바라지 않고 그녀를 책상 위에 올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저 풍성한 치마 자락 속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허벅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은밀한 천에 가려진 그곳을 손가락으로 희롱하고 싶었다. 그다음엔 키스하며 그녀를…….
아키스는 자제력을 찾으려 노력해야 했다. 아내가 조금만 예쁜 모습을 보여 준다고 바로 끌어안고 치근대는 남편은 진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인내심은 최근 종잇장이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가 루나에게 다가가도 전에 그녀가 발랄하게 말했다.
“하하,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전 나가기 전에 울프 좀 보고 올게요. 좋은 하루 보내요!”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살짝 미소 지은 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키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도도도, 소리를 내며 뛰어나갔다. 아키스는 움찔거리던 빈손만 꾹 쥐었다.
“디온!”
아키스는 짜증을 담아 보좌관을 찾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디온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님.”
“혹시 약이 남았나?”
“어제까지 드시던 약 말씀이십니까. 주치의는 이제 그만 드셔도 된다고 했습니다만…… 아직 있을 겁니다.”
“당장 가져와.”
“……네? 혹시 몸이 아프신가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됐고, 그냥 약을 가져와라. 있는 대로 다!”
“알겠습니다.”
디온이 종을 쳐서 하녀를 부르려는데, 뭔가 생각난 것인지 아키스가 손짓으로 그의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넌 오늘 저택에서 근무하지 마라. 오늘은 외부에 다녀오도록.”
“알겠습니다, 시키실 심부름이라도?”
“그녀를 따라 다녀와. 아내가 처음 혼자 외출하는 거니까 가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직접 지켜.”
“……네, 알겠습니다.”
“특히, 이상한 놈들이 말 못 걸게 살피도록.”
디온은 내심 놀랐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디온은 비록 몰락 귀족 출신이나 귀족 가문의 사람이었고, 공작의 측근으로 오래 일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아키스가 아내의 쇼핑 시중을 드는 일에 측근을 붙여 보냈다. 그건 그만큼 아내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잡스러운 일을 시키는 것에 거부감이 들 수 있었겠지만, 디온은 공작 부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했다.
함께 나선 수도 거리 중심가 쪽에는 평민들을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귀족들의 사치품 거리, 고급 상점가가 발달해 있었다. 이곳을 갤러리라고 불렀다.
천장이 씌워진 갤러리에는 고급 잡화점과 부티크 의상실, 그리고 디저트 가게와 편지지 가게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워낙 유명한 상점가였기에 촘촘하게 들어선 작은 가게들도 많았다.
몇몇 가게는 부유한 귀족이 아니고서야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었지만, 몇몇 가게는 중산층의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루나는 그런 가게들을 돌면서 잡다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디온은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얼굴로 쇼핑을 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봐…….’
루나는 날아갈 듯 행복한 얼굴로 물건을 구경하고, 또 구입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엄청난 고가품들을 보며 다니는 건 아니었다.
“아, 이 리본도 예쁘다.”
“다른 색도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루나는 색색의 리본이 걸린 쇼윈도를 구경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에는 작고 사랑스런 모자들과 리본이 가득했다.
루나가 빨간 리본을 바라보자, 점원이 다정하게 다른 색상 리본을 권유했다. 가장자리가 촘촘한 레이스로 장식된 남색 리본이었다.
“와, 둘 다 예뻐요.”
“두 개 다 잘 어울리실 거예요.”
루나는 가격을 확인했다. 그리고 큰맘 먹고 두 개를 다 달라고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디온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 직접 계산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건…….”
“아뇨.”
루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산할게요.”
루나는 디온을 가로막고 직접 계산했다. 점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루나가 산 두 개의 리본을 모두 포장해 주었다.
“부인의 물건은 당연히 공작가에서 계산할 겁니다. 공작님께서 알면 언짢아하실 텐데…….”
디온은 아키스의 명령으로 버몬드 남작가에 가서 루나의 지참금을 받아 왔다. 그래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다 알았다.
하지만 루나는 뜻 모를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요. 오늘은 꼭 내 돈으로 쇼핑하고 싶어요.”
오늘은 루나에게 몹시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 다음 가게를 향해 춤추듯 날아갔다.
‘그간 정말 참고 개미처럼 돈을 모으기만 했지, 내가 번 돈을 쓰는 건 처음이야.’
오늘의 쇼핑을 위해 루나는 피 같은 금화를 모아 둔 궤짝을 열었다. 그간 이 돈을 벌기 위해 안위를 걸었고, 수많은 밤을 지새웠고, 또 긴 시간을 몸이 부셔져라 일했다.
예전부터 결심한 일이 하나 있었다. 도망쳐서 자리 잡고 안전을 확보하면, 그다음에는 마음껏 쇼핑을 해 보겠다고. 모은 돈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쓰겠다고.
그간 루나는 모두 새틴이 쓰다 버린 것을 물려받아 입었다. 자신을 위해 마음껏 사치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노동의 단맛…….’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거리를 거닐며 생각했다. 쇼윈도 안의 물건들을 오늘 하루는 바라만 보지 않아도 되었다.
‘……아, 행복해.’
평소라면 들어갈 수 없었던 고급 초콜릿 가게에 들어가 달콤한 간식을 샀다. 그것도 무려 세 가지 종류나.
봉봉과 장미 필이 들어간 초콜릿과 프랄린. 종업원이 다양한 종류의 상자를 보여 주었다. 장미 무늬 상자, 핑크색 상자, 파란 상자…….
“이 중 어떤 상자에 포장해 드릴까요?”
“빨간 상자에 포장해 주세요.”
루나는 직접 마음에 드는 상자를 골랐다. 비싼 가게는 선물 상자도 고를 수 있다니 내심 놀라웠다.
빨간색의 벨벳 상자에 보석 같은 초콜릿이 담겼다. 루나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직접 상자를 안았다.
‘……사치스러운 건지, 소박한 건지 알 수가 없군. 초콜릿 한 상자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공작 부인이라니.’
디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나는 스카프나 장갑, 모자 따위의 소소한 쇼핑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계속 계산하겠다 하던 디온도 이제는 포기하고 그녀가 하는 양 내버려 두었다.
‘이걸 사치품이라고 해도 되나? 이런 물건들을 좋아하신다고 공작님께 꼭 알려 드려야겠어.’
루나의 속사정을 모르는 디온은 그녀에 대해 살짝 오해한 결론을 내렸다.
루나는 마지막으로 고대하던 서점으로 향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대사를 드디어 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루나는 로맨스나 모험담 소설을 몹시 좋아했다. 그러나 많이 읽지는 못했고, 겨우겨우 오래된 책을 구해서 읽었을 뿐이었다. 버몬드가에서도 쥐꼬리만 한 용돈을 모두 책에 쏟아붓던 그녀였다.
벼르고 벼르던 로맨스 소설 시리즈를 아예 책장 통째로 다 샀다. 영롱한 책들을 서점 주인이 포장해 줄 때, 루나는 꿈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꼈다.
꿈은 이뤄진다. 아무리 소박하고 작은 꿈일지라도.
“책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공작님의 서재에도 소설책이 많습니다.”
“공작님이 소설을 읽나요?”
“주로 논문이나 학술서를 많이 읽으시지요. 하지만 원래 공작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장서들이 많아서, 부탁하시면 찾아 주실 겁니다. 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요.”
“고전 소설도 읽긴 해요.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면…….”
루나는 나중에 아키스에게 서재에 있는 책을 보여 달라 부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마법사들은 책에 욕심이 많아 집착하고는 하니까. 아키스가 그런 방면으론 워낙 괴팍한 걸 안다.
루나의 사치스러운 듯 소박한 쇼핑이 끝나갈 무렵, 디온이 권유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새 드레스를 맞추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상실이 많이 입점해 있는 곳으로 가서 드레스를 좀 보고 가시지요.”
“하지만…….”
루나는 잠시 고민했다.
앞으로 옷을 차려입을 일이 많을까? 저택에 손님이 오기도 할까? 어쩌면 아키스는 조용한 생활을 원할 수도 있다. 굳이 아내와 여러 모임에 동반 외출을 하지 않는, 그런 생활.
“결혼식을 올려야 하니, 그때 입을 드레스도 필요하실 겁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 손님들을 초대하실지도 모르고요. 잘은 모르지만, 요즘은 전속 디자이너를 두고 옷을 맞추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수도의 가장 유명한 가게들은 다 이곳에 있으니 오늘은 구경만 해 보고 다음번에 디자이너들을 저택으로 부르시죠.”
디온은 루나의 고민하는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루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이 너무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건 아키스를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
‘고급 부띠끄의 드레스는 정말 비쌀 텐데. 그건 내 돈으론 무리야.’
새틴의 레이디스 메이드 노릇을 오랫동안 해 온 루나는 드레스를 볼 줄 알았다. 최고급 부띠끄들의 드레스 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새틴도 빚까지 내며 자기 자신을 꾸몄지만, 최고급 부띠끄 드레스는 한 벌도 맞추지 못했다. 루나는 힘들게 모은 피 같은 돈을 드레스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구경만 할까.’
루나는 먼저 가장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요즘 수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곳이었다. 마담 다프의 부띠끄. 새틴이 여기 드레스를 한 번이라도 입어 보고 싶다고 노래를 해 댔기에 루나는 원치 않게 이곳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부인께서 사신 물건들을 마차에 실어 두고 오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오늘 디온은 루나가 돌아다니는 내내 상점 밖에서 대기했지만, 이곳은 워낙 고급 상점이니 에스코트를 해 주려는 듯했다.
“먼저 들어가서 보고 있을게요. 천천히 다녀와요.”
루나는 부띠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와.”
드레스 숍 안은 다른 세상 같았다.
화사한 옷을 입은 귀부인들이 커다란 숍 곳곳에 마련된 소파에서 종업원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마네킹에 입혀진 드레스는 무엇 하나 고급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샹들리에는 크리스털이 반짝였고, 바닥은 모두 대리석이었다. 루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주변을 구경했다.
드레스들은 몹시 화려했다. 요즘은 엉덩이 부분에 심지를 넣은 요염한 버슬 드레스가 유행이라 하던가.
‘저런 드레스는 좀 무겁지 않을까……?’
루나는 드레스의 공단이며 자수를 구경하며 생각했다.
그때, 손님을 응대하고 있지 않던 종업원 한 명이 다가왔다. 루나는 종업원의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서 수석 종업원이라는 글자를 읽었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습니까?”
루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디온이 따로 예약을 해 두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니요. 그냥 잠시 구경하려 했을 뿐이에요.”
종업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요즘 너무 인기가 많아져서 초대 받은 손님만 받고 있었다. 숍의 명성이 드높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구경을 하시는 것도 미리 예약을 해 주셔야 합니다.”
구경하는 것도 예약해야 한다니. 루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역시 수도의 고급 숍은 문턱이 높았다.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종업원은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혹시, 수도의 가문 출신이신지요? 저희 숍은 대단한 손님을 많이 유치한 곳입니다. 그 유명한 사교계의 공주,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께서도 저희 숍의 단골이시지요. 그만큼 드레스 값도 많이 비싸고요.”
“그래요?”
루나도 달리아라는 영애는 신문에서 사진을 봐서 이름도, 얼굴도 알았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거기다 아키스를 매우 좋아하는 여자라고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개 귀족 영애에게 사교계의 공주라느니, 좀 과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언제 드레스를 보실 수 있는지 예약을 잡아 드릴게요.”
종업원은 선심 쓰듯 대기 명단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 주겠다고 했다. 아마, 그녀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혹시, 오늘 안에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나요?”
“그건 숍 상황에 달렸지요. 뭐, 워낙 대기 손님이 많아서 언제 볼 수 있을 거라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종업원은 묘하게 루나를 깔보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당신이 이 나라 황녀라면 가능하겠지.’
종업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여인은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모양이었다.
루나는 그냥 갈까하다 디온이 막 마차에 물건을 실으러 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이름을 댔다.
“루나 드 로텐베른이에요.”
말해 놓고도 조금 민망했다. 성이 바뀐 이후로 타인에게 이름을 말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네. 로텐베른 가문의 아가씨…… 네?”
소곤소곤하던 숍의 사위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루나는 순식간에 숍 안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왜 쳐다보는 거지?’
루나는 영문을 몰랐다. 점원의 눈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곧 그녀가 간사할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했다. 말투는 싹 달라져 있었다.
“로텐베른…… 가문에…… 따님이 계셨나요? 혹시 공작님의 여동생이신가요?”
로텐베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 종업원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아뇨…… 저, 부인이에요.”
루나는 약간 뺨이 붉어져서 대답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 세상에. 공작의 보좌관이잖아!”
누군가가 외쳤다. 몇몇 귀부인들이 디온을 알아본 탓이다. 디온은 수도 부인네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꽤 잘생긴 편이라서.
심지어 아직 미혼인 데다 젊은 편이고, 부드러운 미형에 이름뿐이나마 귀족 가문 출신인 디온은 수도 귀족들이 노리는 신랑감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는 공작이 총애하는 이 중 한 명이었다.
이만큼 출셋길이 보장된 신랑감이 어디 있는가. 그는 꽤 인기 있는 결혼 시장의 매물이었다. 디온을 알아본 귀족들이 부채로 입을 가렸다.
‘치, 침착하자.’
종업원은 빠르게 루나를 다시 훑었다. 드레스는 오래된 디자인이었지만 재질이 굉장히 좋았고, 봉제도 완벽했다. 최초에는 상당히 고가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제야 루나가 금발 머리를 틀어 올린 핀을 보았다.
‘……오렌지 다이아몬드.’
큼지막한 오렌지 다이아몬드가 박힌 핀은 고대 식으로 우아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왜 내가 이걸 못 봤지? 종업원은 땅을 치고 싶었다.
딸랑!
종업원이 은색 종을 들어 흔들었다. 초우량 고객이 등장했을 때만 사용하는 종이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루나의 앞에 직원들이 일렬로 도열했다. 루나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니, 이게 무슨 황족의 행차도 아니고…….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직원은 그녀를 도열한 직원들 사이로 안내했다. 루나가 지나갈 때마다 종업원들이 각진 자세로 인사했다. 똑같은 제복을 맞춰 입은 종업원들이 인사하는 모습이 꼭 도미노 게임 같았다.
‘차, 창피해…….’
루나는 이 상황이 매우 부끄러워졌다.
루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귀빈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종업원의 태도가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원하시는 건 뭐든 주문 가능하십니다. 가장 먼저 명단에 올려드릴게요.”
“……그렇군요. 그런데, 예약하지 않으면 구경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요?”
루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겁니다. 귀빈을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루나는 그냥 쓰게 웃었다. 그리고 예의상 그나마 마음에 든 드레스의 가격을 물었다. 종업원은 루나의 귀에 어마어마한 가격을 속삭였다.
‘……아찔한 가격이군…….’
순간 좀 흔들릴 뻔했지만 겨우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드레스 숍을 나오며 루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루’로 남장하기 위해 자신이 입었던 옷을 떠올렸다.
‘헌옷 가게에서 옷을 샀지.’
그 남루한 남자 옷을 다시 입기 위해 손질을 해야 했다. 드레스 아래 봉긋한 가슴을 보았다. 붕대로 이 가슴을 칭칭 동여맸다. 그랬던 자신이 저런 드레스 숍에서 귀빈 대접을 다 받다니 웃음이 나왔다.
디온은 루나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루나는 도리어 바뀐 자신의 처지가 어이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래의 ‘나’는 귀부인 생활을 엄청나게 동경했지.’
루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했다. 비참한 시골 생활을 하며 루나는 머릿속으로 점점 더 수도 생활을 미화해 나갔다. 예쁜 옷, 향수, 머리 핀, 그 모든 것들을 갖고 싶다고 징징대는 일기를 썼다.
정말 바랐다기보단 현실 도피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드레스 구경 실컷 했으니 한은 풀겠네.’
루나는 자신의 거친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 루가 없어지면 루나는 어떤 여자가 되어야 할까. 비록 진짜가 아니라도 일기장 속의 그녀가 바랐던 걸 모두 가져도 될까?
* * *
‘……늦는군.’
아키스가 병으로 드러누운 동안 지방 영지와 아카데미, 정부에서 도착한 일들이 많았다.
그는 바쁜 오후를 보내다가 문득 창문을 보았다.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집사를 불러 물어보았는데, 아직 아내는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디온과 함께 갔으니 별일은 없겠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슬슬 땅거미가 질 시간임에도 현관에는 마차 들어오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말없이 나간 것도 아니고 외출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스멀스멀 초조감이 올라오는 것은.
* * *
루나가 탄 마차가 공작가의 정문을 통과하는 걸 보았을 때, 아키스는 제가 그녀를 기다렸다는 걸 치열한 고민 끝에 인정했다. 아키스는 미간을 눌렀다.
디온은 곧바로 아키스의 서재로 올라왔다.
“……왜 이렇게 늦었지?”
“부인께서 너무 즐거워하시기에 돌아가자는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워서 그만…….”
오늘따라 번드르르하게 곱살한 디온의 얼굴이 눈에 거슬렸다.
“즐거워했다고?”
“네, 정말 즐거워하시더군요. 이렇게 쇼핑을 좋아하는 귀부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은 혼자 외식을 하고 싶다 하시기에 저녁은 시내의 레스토랑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은 또 처음이라며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가족들 없이 혼자 외식하는 건 처음이라며 신나 하셨습니다.”
글씨를 쓰던 아키스의 손이 멎었다.
첫 외식이라 들떴다고? 그런데 나는 왜 그 들떠 하는 모습을 못 봤지? 아키스의 마음속에서 그런 의문이 비집고 올라왔다.
“……어디로 갔지?”
“아, 갤러리 왼편의 파르테에 다녀왔습니다.”
파르테라면 최고급 식당은 아니었다. 아마 예약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만일 그녀와 함께 외식을 한다면 더 좋은 곳에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최고급 식당에 새롭게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아키스는 그렇게 안심하는 스스로의 치졸함에 내심 놀랐다.
“그녀가 쇼핑을 즐겼다니 잘되었군.”
어차피 돈은 썩어 나고, 연구를 제외하면 거의 돈을 쓰는 곳도 없었다.
오히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녀를 기쁘게 하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는 부유했고, 아내를 위해 돈은 얼마든 쓸 수 있었다.
“청구서는?”
디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따로 금액은 들지 않았습니다. 부인께서는 오늘 구입한 물건값을 전부 본인의 돈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아키스는 미미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가 가진 돈이라고 해 봐야 버몬드가에서 가져온 지참금 정도였다. 왜 디온까지 딸려 보냈는데 그 적은 돈을 쪼개 사용했단 말인가?
“그다지 비싼 물건들을 사시진 않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신혼 초기도 하고 적응도 덜되셔서 공작님 없이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부담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수도 중심가의 갤러리에 간 것 아니었나? 그런데 비싼 물건을 사지 않았다고?”
“네, 그런데 주로 잡화점이나 서점에 가서 소소한 물건들을 사시더군요. 마지막에 드레스를 보러 부띠끄에 가시긴 했습니다만…… 드레스 가격을 듣고 얼굴이 하얘지시더니 괜찮다고 말하고 나오셨습니다. 작은 사건도 있었고요.”
작은 사건에 대해 디온이 짧게 보고했다.
요즘 수도에서 제일가는 명성의 고급 부띠끄에 갔는데, 그곳에서 루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서서 기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 루나의 이름을 듣고 태도가 싹 변해서 그녀의 마음이 조금 상한 것 같다는 보고였다.
“그러고는 바로 잊은 것처럼 저녁 식사를 즐기셨습니다.”
“그래.”
아키스는 그런 문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그런 귀찮은 일이 없도록 잘 모셔라. 시간이 되면 내가 같이 가는 것도 괜찮겠군.”
“네, 공작님.”
앞으로도 그녀의 품위 유지를 위한 비용은 더욱더 많이 들 것이다. 그녀가 결혼하며 돈을 많이 가져온 것도 아닌데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을 불편해하는 건 곤란했다.
아니, 솔직히 조금 불쾌했다. 능력 없는 사내 취급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부유한 사내였고, 마땅히 아내에게 돈을 쓸 의무가 있었다.
* * *
저택에 도착했을 때, 루나의 기분은 여전히 둥둥 뜬 상태였다.
집사가 디온과 루나를 맞이해 주었다. 루나는 목을 길게 빼고 저택을 둘러보았다.
행동하는 바를 눈치챈 듯 알렉이 부드럽게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아직 서재에 계십니다.”
“아, 아직 일이 안 끝났나 봐요. 그러면 난 먼저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있을게요.”
루나는 오늘 그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닐 것 같았다.
루나는 그가 있는 서재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루나는 목욕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쇼핑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일 줄이야.
목욕 후, 루나는 곱게 포장된 상자를 침대 위에 늘어뜨리고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자기 전엔 오늘 사 온 아몬드 프랄린을 먹으면서 책 읽어야지.’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저녁이 될 것 같았다.
* * *
아키스는 하던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루나, 할 말이…….”
아키스는 조용히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본 사람처럼 못 박힌 듯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 공작님…….”
루나가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놀라서 손으로 몸을 가렸다가 조심스레 팔을 내렸다. 아찔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속옷 차림으로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보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매끈한 등이 다 보였다. 한 손으로 금발 머리를 틀어쥐고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아키스를 발견하고 놀라 손을 놓자, 부드러운 금발이 폭포수처럼 어깨와 등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은은한 새몬 핑크의 레이스 뷔스티에를 걸치고 있었다. 뷔스티에는 그가 한 번도 본적 없는 디자인이었다. 등이 다 파여 있었고 허리를 끈으로 묶는 형태였다.
그녀가 살짝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뷔스티에의 가슴 부분은 충격적이게도 레이스로 되어 있어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그녀의 은밀한 유륜까지 보일 것 같았다. 속옷이 그녀의 가슴을 밀어 올리고 있었기에, 원래 소담하게 부푼 우윳빛 가슴 곡선이 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허리도 반투명한 레이스였다. 거기다 그녀는 아주 짧은 레이스 거들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거들이 몹시 얇아 둥근 엉덩이의 곡선이 다 드러나 있었다.
어느새 아키스는 방에 온 목적을 깡그리 다 잊고 저도 모르게 불같은 흥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 옷은 뭐죠?”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루나는 얼굴을 붉혔다.
“요즘 이런 속옷이 유행이라기에…… 한번 사 봤어요. 그런데 저도 이런 속옷을 입는 건 처음이라…….”
아키스는 이 속옷을 디자인한 사람에게 기립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정말 훌륭한 쇼핑이군.’
인류 역사에 드물게 태어나는 문화 유산급 마법사인 그가 봐도 이토록 위대한 발명품은 없었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민망한 장면을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주춤주춤 움직여 침대에 놓인 가운을 걸쳤다. 아키스는 몹시 실망스러워졌다.
“오늘 쇼핑한 물건들을 풀어 보다가 한번 입어 봤어요. 몸에 맞는지 보려고…….”
루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녀는 이런 방면으로 아직 소심해서 생애 첫 쇼핑에 고가의 보석이나 드레스를 구입할 담력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실크 속옷을 파는 잡화점에 가서 처음으로 고급 속옷을 사기로 했다. 속옷 정도라면 기분 좋게 사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이런 짧은 거들이 유행이랍니다. 레이스 속옷은 어떻고요. 아름답고 화려한 속옷은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드레스거든요. 덤으로 신혼이라면 부부 생활에 도움이 된답니다.’
‘으음, 예쁘긴 하네요. 그런데 너무 대담해 보이는데……. 거들이 어쩜 이렇게 짧죠?’
본래 거들은 허벅지를 완전히 가리는 디자인이 정석이었고 루나도 그런 거들을 입었었다.
그런데 잡화점 점원의 말로는 이런 짧은 거들이 요즘 유행이라는 것이었다. 점원이 말을 얼마나 잘하던지 루나는 홀딱 넘어가 고급 속옷을 세트로 구입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 입어 보는 와중에 아키스가 딱 들어올 줄이야.
“오늘 산 물건이라고요?”
“……네.”
아키스는 나직이 물었다. 속으로는 몇 벌 더 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좀 별로죠? 전 맘에 들긴 한데…… 아무튼, 이만 잠옷으로 갈아입을…… 앗!”
루나는 갑자기 아키스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놀랐다.
“더 자세히 봅시다.”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와 보기 좋게 살이 붙은 허벅지께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가 한 번에 엉덩이를 움켜쥐자 루나는 놀란 숨을 토했다.
“아, 잠깐…….”
아키스는 루나를 안아 올렸다. 침대에 앉아 그녀를 단번에 자신의 무릎 위로 앉힌다. 루나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할 말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아키스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루나의 끝내주는 속옷을 보았다. 용건은 달라진 지 오래였다.
“……오늘 쇼핑, 아주 잘했다고요.”
“아. 그, 그래요?”
“네.”
아키스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감았다. 동그랗게 뜬 저 초록색 눈을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다. 아키스는 그녀의 눈가에 살짝 이를 세웠다. 루나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의 크고 찬 손이 등께를 바쁘게 오갔다.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어오는 통에 루나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긴 혀가 그녀의 혀에 덥게 얽혔다.
“응…….”
더운 입안에서 타액이 엮이는 걸 느끼며 루나가 하아, 하고 숨을 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나중에 당신이 덜 예뻐 보이면, 그러니까 한두 시간 후에. 지금은 너무 예뻐 보이니까, 그렇게 하자고.
아키스는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아키스의 손이 거들 위로 그녀의 은밀한 엉덩이 구멍을 꾹 눌렀다. 루나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흐…….”
붉은 비단 시트 위로 아키스가 루나를 눕혔다. 침대 위에는 상자나 리본 장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키스는 잠시 멈추고 속옷을 입은 루나의 모습을 눈으로 훑어 감상했다.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누르며 주물렀다. 루나는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자, 잠깐만요. 제가 벗을게요.”
“안 벗어도 됩니다.”
“네? 앗…….”
그리 말하며 아키스가 오늘따라 도드라지게 부각된 가슴골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그녀의 거들을 걸어 천천히 벗기며 가슴골과 뷔스티에 위로 쪽쪽 입을 맞췄다.
“이렇게 보는 게 더 맛있어 보여서.”
도대체 이 남자. 뭐 하는 남잘까. 언제 이런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지?
루나는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순식간에 거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아키스는 천천히 그녀의 음부께에 손을 가져다댔다. 더워지기 시작한 도톰한 음부를 손등으로 스치다가 가만히 허벅지 안쪽의 패인 부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여기, 만져 주는 거 좋아하던가.”
그가 속삭였다. 두툼한 손가락이 음문 사이를 파고들어 회음부까지 꾹꾹 눌렀다.
“어디가 제일 좋아요, 응?”
“아, 몰라요.”
루나가 목소리까지 상기되어 속삭였다. 회음부를 집요하게 애무하자 루나는 반사적으로 음문을 조였다. 대음순이 다물리며 그의 손가락은 뜨거운 그녀의 살덩이에 파묻혔다.
“애교라도 떨 생각입니까, 귀여운데.”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꾸 그렇게 말하면 안 할 거예요.”
루나가 중얼거렸다. 노려보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아키스는 자기가 뭐 하는 놈인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요. 그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당신 비위를 맞춰야죠. 아내에게 잘 보여야 좋은 남편이니까.”
그가 M자를 그리며 벌려진 무릎 안쪽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대로 그는 고개를 그녀의 다리 사이에 들이밀었다. 오늘은 거기에 꽂혔는지, 회음부를 길게 빨아올리다 음모를 입술로 쪽쪽 빨고, 혀를 길게 내밀어 대음순 사이로 파고든다.
“아하, 흑……. 흐읏……!”
아까부터 습해지기 시작한 그녀의 도톰한 육벽에서 더운 애액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아키스의 혀와 혀 아래가 부딪히며 쪽, 하는 소리가 났다.
“이제, 그만. 아키스…… 빨리.”
루나가 애원할 때까지 아키스는 길게도 그녀의 음부를 맛봤다. 촉촉하게 젖은 꿀물을 모두 빨아 삼키려는 사람처럼. 그녀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애원했을 때가 돼서야 아키스는 입술을 뗐다. 그의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선정적이었다. 루나는 홀린 듯 자신의 다리에 고개를 처박고 빨아대는 미남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키스의 바지를 팽팽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밀어내며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루나는 홀린 듯 그 성기를 풀어냈다. 그녀의 손을 탄력 있는 성기가 때리며 튀어나왔다. 루나는 핏줄 선 그 엄청난 크기의 것을 손으로 쥐었다.
“말해 봐.”
아키스가 속삭였다.
“나도 못 참겠으니까, 빨리.”
“하고 싶어요.”
루나가 개미처럼 작게 말했다. 수줍은 말과는 달리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의 것을 손으로 휘어잡았다. 그간 모든 성교에서 아키스가 애무를 해주는 쪽이었다.
‘기분 이상해.’
그래서 그녀는 그의 성기를 쥐는 것도 처음이었다.
뜨겁고, 몽둥이처럼 단단했다. 이걸 자신의 안에 가져가고 싶었다.
뚝뚝 떨어지는 성욕이 가득하던 아키스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생겨났다.
“올라타 봐요. 아까처럼.”
“…….”
루나는 망설였다. 아키스가 침대에 앉았다. 그의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쉬. 익숙하지 않은 자세라 아플지도 몰라.”
아키스가 깍지를 끼고 루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꺼떡이는 큰 성기가 그녀의 엉덩이 골 사이로 사라졌다.
“아아!”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압력에 루나는 겨우 숨을 쉬었다. 아키스는 욕심내어 양껏 그녀의 엉덩이를 쥐었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그대로 그가 아래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흐으, 읏…….”
낯선 각도로 찔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평소보다 더 큰 압력을 느끼며 발가락을 오므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푹푹, 퍽.
아키스가 인정사정없이 아래에서 쳐올리자 루나는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 더 달라붙었다.
루나의 온몸이 요동치며 흔들렸다. 그가 치받을 때마다 엉덩이 사이로 고환이 부딪히고, 엉덩이 살이 진동했다.
“아키스, 아……. 으으!”
아랫도리만 드러낸 채 그에게 꿰뚫려 허리를 떨어 대는 자신의 모습. 이전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좋았다. 이 열정이, 그와 하나가 되는 기분이…….
좋았다.
“좋아요, 아키스.”
루나가 헐떡이며 속삭였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초록색 눈을 응시하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열정으로 인해 탁해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빨고 삼켰다. 아랫도리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푹푹 박아 대는 그의 거센 허리 짓에 그녀의 온몸은 빨판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빨아들이며, 닿은 곳에서 질퍽한 소리를 냈다.
“히익, 흑……!”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루나는 아키스의 아랫입술을 문 채 가 버렸다.
“반도 안 했는데 가다니, 당신 몸은 정말 알기 쉬워서 좋아. 먹어치우고 싶을 정도야.”
아키스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그르렁댔다.
좋다는 말. 루나가 던진 그 짧은 한마디에 미칠 것 같다. 이 여자는 도대체 뭘까? 아키스는 아득한 쾌감을 느꼈다.
이대로 하나가 되어 녹아 버리고 싶다. 각인도, 그의 비루한 출생도, 그리고 루에 대한 문제에서도 모두 도망쳐, 이대로 그녀의 품안에 몸을 묻은 채 있고 싶었다.
더운 절정을 느끼며 루나는 아키스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흐으, 으…….”
아래서부터 꿰뚫린 곳에서 하얀 정액과 그녀의 애액이 섞여 주륵 흘러내렸다.
“하아…….”
루나는 안도의 숨을 쉬며 아키스의 어깨에 고개를 내렸다.
* * *
루나는 뷔스티에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급한 행위가 끝난 몸에는 아직 열기가 감돌았고, 다리 사이는 후끈한 통증과 함께 알싸한 쾌감이 맴돌았다.
“이거 벗는 것 좀 도와줘요…….”
루나는 손 하나 꼼짝할 힘이 없어 아키스를 향해 말했다. 루나는 아키스 쪽으로 엉덩이를 보이고 엎드렸다.
아키스는 뷔스티에 끈을 하나하나 풀었다. 그녀의 둥근 엉덩이가 불빛 아래 보이자 아키스는 또 하반신이 무거워졌다.
그는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려 노력하며, 이를테면 지루한 원고나 어려운 고서적 같은 것들을 애써 떠올리며 루나의 속옷을 벗겨 냈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힘들어…….’
오랜 외출로 지친 상태였는데, 속옷 때문인지 얼렁뚱땅 아키스와 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속옷을 입은 상태로.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분명 그는 아무리 예쁜 여성이 고혹적으로 다가와도 꼼짝도 안 한다 들었다. 언제 한번은 절세미녀 코르티잔이 작정하고 유혹했는데, 그 풍성한 가슴을 보고 흔들리기는커녕 추워 보인다고 했다던가.
공작 일이라면 집착 수준으로 관심을 보이며 미주알고주알 나불대던 새틴 덕에 루나는 본의 아니게 아키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것들이 오늘 산 물건들입니까?”
“네, 하나하나 풀어 보면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루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쇼핑하는 걸 좋아하는 줄 몰랐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쇼핑을 했거든요. 하루 종일 너무 재미있었어요.”
수줍게 웃는 루나를 보며 아키스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는 미간을 약간 좁혔다. 그가 아는 귀족 영애들은 모두 쇼핑을 하거나 차를 마시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쇼핑이 처음이라니, 그녀는 정말 검소하게 살아온 듯했다.
“그랬습니까? 뭐가 그렇게 재밌었습니까?”
“쇼윈도를 구경하고, 길거리에서 사람도 구경하고, 예쁜 상점도 들어가 보고, 또…….”
얼마나 신났던지 루나가 하나하나 꼽으면서 조잘거렸고, 아키스는 그런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도 그의 몸에는 이상한 증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별거 아닌 그녀의 사소한 이야기들이 빨려 들어갈 듯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웠다니 기쁘군요. 그럼 다음엔 뭘 하고 싶습니까?”
아키스가 물었다. 작은 일에 이렇게 좋아한다면 다른 것들도 얼마든 하게 해 줄 수 있었다.
“으음…….”
오늘만 해도 몹시 즐거워서 다른 건 생각 안 해 봤다. 잠시 고민하던 루나는 살짝 미소 짓고 대답했다.
“아직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어요.”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꿈에선 본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그녀는 멀리 놀러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쇼핑도 처음이고 여행도 가 본 적 없다니, 해 본 게 뭔지 묻는 것이 빠르겠군요.”
아키스는 속으로 적당한 여행지를 생각하며 말했다. 여유가 생기면 함께 여행을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한 손가락 안으로 다 셀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도 이제 해 본 게 많아요.”
“세 봅시다.”
“오늘은 비싼 비단 구두를 샀어요.”
아키스는 상자에 담긴 초록색 구두를 보았다. 최고급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몹시 마음에 드는 듯 보였다.
“새 속옷도 샀고요.”
“그리고?”
“……결혼, 해 봤어요. 그리고 결혼 생활 중이고요.”
아키스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그녀는 매력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었다. 매력적인 화법이란 것이 꼭 고상한 체하거나 아는 걸 과시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상대를 편안하고 기쁘게 하면 되는 거지.
“그렇군요. 우리는 같은 경험을 공유했군요.”
아키스가 그녀에게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눈앞에서 그녀의 초록빛 눈이 휘어졌다. 또다시 속이 술렁였다.
아키스는 말을 돌려 물었다.
“디온에게 들었는데, 비용을 직접 냈다죠.”
“아……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공작가의 돈을 쓰는 게 당연한 일도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아키스는 그녀를 타이르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신의 품위 유지비도 공작가의 1년 예산에 포함되어 있어요. 소중한 지참금을 낭비하지 말고, 다음번에 갖고 싶은 건 내게 말하거나 아니면 디온에게 말해 사는 게 좋겠습니다.”
“낭비라뇨, 오늘 이렇게 행복했는데 그게 낭비인가요?”
루나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루나에게 궤짝 안의 금화가 어떤 의미인지, 그걸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전혀 모를 테니까.
“그보다 값진 곳에 쓰십시오.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추운 방에서 자는 것에도 익숙해지지 말고, 가장 좋은 방에서 자고 좋은 것만 쓰세요.”
“왜요?”
“당신이 나의 아내니까.”
“제가 공작님의 아내라면, 공작님은 절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나요?”
“아뇨, 당신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 전 당신을 어떤 식으로 책임지면 되는데요?”
아키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잠시 머릿속으로 단어를 훑어 답을 찾았다.
“그냥 이대로 있으십시오.”
진심이었다.
지금 이대로, 이런 모습만 보여 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으니까. 그녀가 이 집에 있으면, 당분간 그의 삶이 권태로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루나는 뭐라 말하려다 픽 웃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가 신경 써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여인으로 연모해서 마음 써 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작은 관심에도 루나는 감동받았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도록 더 노력해야 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조금 더 일찍 귀가하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하지만,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는걸요.”
아키스는 투덜대는 그녀가 꽤 귀여워 보였다.
“이제 날은 많습니다.”
아키스는 그녀의 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침대 밑에 쌓아 둔 책 더미에 손을 댔다.
“역사책을 읽나요?”
아키스가 오늘 루나가 서점에서 사 온 <제국과 공국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며 말했다. 어려운 역사를 대중 소설처럼 쉽게 풀어낸 책이었다.
루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에게 소년 ‘루’와 비슷한 느낌을 줘서 좋을 것이 없었다. 루는 조용한 책벌레 소년이었다.
“표, 표지가 예뻐서…….”
루나가 궁색하게 변명했다.
“<대륙의 기후와 역사>. 이 책도요?”
“그, 그림이 많아서…… 제가 지도 그림을 좋아하거든요, 하하. 풍경 그림도 많고…… 그림 구경하려고요!”
“…….”
아키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보았다. 앞선 책들과 달리 표지에 그림이 그려진 책들이었다. 큼직한 글씨로 제목이 새겨져 있었고, 책 표지도 핑크빛 일색이었다.
“그럼 이 책들은……?”
“악, 그건 안 돼요!”
루나가 급히 팔을 뻗었다. 아키스는 반사적으로 책을 높이 들어 올렸다.
“……<후작 부인의 은밀한 방앗간>?”
그 밖에도 <백작은 가정사의 채찍을 감는다>, <제국의 뜨거운 스캔들>……. 모두 자극적인 제목의 대중 소설들이었다. 아키스는 희한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 번 보고 책 제목들을 훑어보았다.
“<하인 로돌프의 은밀한 연정>…… <기사 헨리의 노름빚으로 딴 신부>…… <악녀의 뜨거운 사교계>…….”
“그, 그만. 그만 읽으시라니까요!”
루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외쳤다. 아키스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재밌는 여자야.’
아니, 아카데미 학생들이나 읽을 법한 역사서와 지리책, 그 뒤에 자극적인 대중 소설이라니. 아무래도 자신의 아내는 다양한 독서 취향을 가진 것 같았다.
“이상한 소설 아니에요. 그냥 귀부인들이 주인공인 연애담이라구요.”
제국에서는 대중 소설 문화가 몹시 발달했기 때문에 부인들의 규방 소설이 발달했다.
제국인들은 최소한의 글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문맹률이 낮은 덕에 신문 문화와 소설 문화가 발달했다. 또, 보급형 마도구인 활자 인쇄기를 이용한 책을 만드는 데 국가의 지원이 들어갔다. 그래서 책 보급률도 높은 편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최근 유행하는 건 자극적이고 세속적인 내용의 소설들이었다. 주로 기사와 공주의 연애담이나 현모양처인 귀부인이 위기를 겪고 집안과 남편을 틀어쥐는 내용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신인 작가들은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내용과 무관할 정도의 자극적인 제목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혹시 이건…….”
“야, 야한 소설 아니에요. 진짜라니까요.”
루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변명했다. 요즘은 약간 야릇한 키스 신이나 애무 신, 은근한 정사 묘사 정도는 들어가는 것이 대세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색 소설이 아닌 로맨스 소설이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놀리고 싶어지는 걸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런 소설의 애독자라고요.”
“으…….”
루나는 아키스가 손에 든 역사책과 대중 소설을 보았다.
아무래도 대중 소설을 훨씬 좋아한다는 인상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편이 루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좋았다. 그리고 로맨스 소설광인 것도 사실이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극적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 뭐가 나빠요? 설마, 공작님처럼 어려운 책들을 읽는 것만 독서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아키스는 웃음을 애써 눌러 참고 말했고, 루나는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몰라요, 전 잘 거니까 불 꺼 줘요.”
루나는 침대 옆에 놓인 실크 잠옷을 꺼내 이불 속에서 꾸물대며 입었다. 그에게 알몸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키스는 눈앞에서 굼질대는 동그란 이불 더미를 보며 이 여자가 미치도록 귀엽게 느껴지는 제가 정상인가 아닌가를 고민했다.
“……잘 자요.”
“잘 자요.”
아키스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도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이불 더미에서 루나의 머리가 쏙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오늘 쇼핑하면서 내 것만 사기 미안해서 샀어요. 초콜릿이에요.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 중 한 곳이래요.”
사실 아키스는 단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끼는 돈을 쪼개 쇼핑하면서 자신의 것까지 챙겨 주다니.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예뻤다.
“단것 별로 안 좋아하세요?”
“가끔은 먹습니다. 초콜릿은요.”
“다행이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단 걸 먹으면 좋다고 해서…….”
그녀는 수줍게 말하다가 부끄러웠는지 다시 이불을 폭 덮었다.
“정말로 잘게요.”
“……그래요. 난 연구를 좀 더 마치고 들어오겠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불을 끄기 위해 탁자 쪽으로 가던 아키스는, 바로 읽으려는 듯 놓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녀가 책 더미에서 미리 빼 둔 책인 듯했다.
<고대식 문화와 명문가의 예절 기본서>.
아키스는 책 제목을 보고 입술을 매만졌다. 그녀 나름대로 공작 부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 모양이었다.
사랑스러웠다.
* * *
“말씀하신 대로 공작 부인의 예법 교사를 섭외했습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마이아라고, 아주 유명한 교사입니다. 웬만해선 데려오기 힘든 귀부인 전문 교사인데 황후궁에서 도와주셨습니다.”
“황후 폐하께 감사하군.”
아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 귀부인들의 예법 교사는 나이 든 귀부인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황후의 인맥이라면 필시 그런 부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공작님께서 집무를 보시는 낮 시간 동안 공작 부인은 아래층 홀에서 예법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좋아, 수고했다.”
디온은 아키스에게 준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급하게 편성한 것입니다만, 공작 부인께 책정한 예산의 초안입니다. 결혼식 부분은 이 정도고요.”
아키스는 디온이 내민 예산안을 들여다보다가, 사치 항목의 금액에 줄을 쫙쫙 그었다.
“이 부분은 비워 둬라.”
“네?”
“무제한으로 두라고. 그녀가 쇼핑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거기다 그녀가 쇼핑을 하면 그에게 좋은 일도 생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제와 같은 레이스 속옷이라든가.
“……아. 알겠습니다.”
디온은 아키스의 낯선 모습에 내심 놀라며 수긍하다가 낯선 걸 하나 더 발견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초콜릿 상자였다.
‘아니, 단 건 질색하시는 분이…….’
심지어 초콜릿 상자는 이미 누가 몇 개 빼 먹기라도 한 양 리본이 풀려 있었다. 아키스는 디온의 시선을 느끼고 헛기침했다.
“내 책상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만 나가 봐.”
“……네. 알겠습니다.”
디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며칠 후 디온은 더욱 기겁했다. 아키스가 다 먹은 초콜릿 상자를 리본과 함께 서랍에 넣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걸 발견한 순간에 마주친 아키스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그는 분명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닥쳐. 지적하면 죽는다.
그래서 디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치라는 걸 아는 보좌관이었다.
* * *
아키스가 잡은 결혼식 일정은 급박했다. 고작 3주 후였으니 누가 봐도 촉박한 일정이었다.
집사가 예고한 대로 루나는 결혼식 준비로 바빠졌다.
“오늘부터 공작 부인을 모시게 된 레이디스 메이드, 제인이라고 합니다.”
루나는 디온과 비아의 도움을 받아 새 메이드를 뽑았다. 새로 온 레이디스 메이드는 얌전한 인상이었다.
제인이 들어온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비단 루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온 후 하녀장 비아는 하녀와 시녀를 모두 통솔하는 시녀장으로 승진했다.
집사는 디온과 협조하며 초대 리스트를 작성하며 루나에게 물었다.
“따로 초대할 분은 없으십니까?”
“없어요.”
“그러면 가족분들은 초대하지 않겠습니다.”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알렉.”
루나는 집사가 먼저 그 말을 꺼내 준 데에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그녀로서는 초대하기는커녕 그들이 찾아올까 무서웠다.
결혼식은 수도에서 약간 떨어진 휴양지의 아키스의 별장에서 주최하기로 했다. 귀빈들만 초대한 행사였다.
“꼭 초대해야 하는 분들만 초대하는 행사가 될 겁니다. 예식도 비교적 편안하게 진행할 거고요. 짧게 결혼식을 하실 거니 걱정 마세요. 신전 결혼식처럼 하루 종일 진행되지 않습니다.”
루나는 속으로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꼭 필요한 사람들만 부르는 행사라면 덜 긴장될 것 같았다.
“공작님께 별장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자고 권한 것이 집사인가요?”
“아뇨, 별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건 공작님의 의견입니다.”
“아, 그래요?”
그건 의외였다. 집사는 미소 띤 채 부드럽게 말했다.
“결혼식이 열릴 별장은 리튼이라는 휴양 도시에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몹시 아름다운 곳이지요. 주인님께서는 몹시 바쁘셔서 별장에 거의 다니질 못하시니, 부인께서 별장을 구경하시기엔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을 겁니다.”
“그럼 바다도 볼 수 있을까요?”
태어나서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나는 벌써부터 들뜨는 기분이었다.
“물론입니다. 공작님께서 리튼에서 며칠을 보내겠다 하셨으니 충분히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리튼은 수도 인근의 귀족들의 휴양도시였다. 그 말을 들은 루나는 새삼 가슴이 설렜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같이 여행을 가 주겠다던 말을 그가 기억하고 있나 하고.
* * *
루나가 결혼식 준비에 매진하는 동안 아키스는 그녀에게 크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한 학기 수업을 통째로 빼게 된 덕에 아키스만 바라보던 마법사 제자들이 수없이 연락을 해 댔던 것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회신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닌데, 추수 감사제가 지나자 영지의 일이 폭주했다.
풍년 덕분에 공작가 소유의 영지 예산이 풍족해진 게 문제였다. 그 풍족한 예산으로 영지대리인들은 여러 가지 일을 시행했고, 마치 구애를 하듯 아키스에게 끊임없이 보고서를 보내고 있었다.
‘휘멘, 이 자식은 또 어딜 간 거야.’
사실 소년에 대한 일이 가장 급했는데, 서부로 파견한 정보 길드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주치의는 아키스의 서부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완치되었다 하지 않았나?’
‘네, 물론 완치하셨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환경이 열악한 곳에는 가지 않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동행할 수 있는 리튼 같은 곳이면 모를까, 서부처럼 환경이 좋지 못한 곳은 금하셔야 합니다. 고대의 독약은 몹시도 끈질깁니다. 만에 하나 재발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한두 달은 지켜보셔야 합니다. 당분간은 공작 부인 곁에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키스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아키스는 집사와 보좌관에게 결혼식 준비를 일임했다. 식솔들 중 일부가 리튼으로 파견되었고, 남은 사람들도 누구 하나 열외 없이 결혼식 준비를 위해 급하게 일했다.
그럼에도 외려 지치기는커녕 다들 전보다 온화해지고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더욱이 전날에는 시녀장 비아가 수선화 꽃을 소중히 안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 또한 묘한 광경이었다.
비아는 일찍 남편과 사별해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늘 표정 한구석이 슬퍼 보였던 비아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아키스는 지나가던 집사에게 슬쩍 물었다.
“요즘 저택에 별다른 문제는 없나?”
“그럼요, 몹시도 좋습니다.”
“다들 바빠졌을 텐데, 그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다. 공작 부인이 오신 후로 저택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비아의 얼굴이 좋아 보이던데.”
“아아, 공작 부인께서 승진을 축하한다며 숲에서 꽃을 꺾어다 주셨다지 뭡니까. 그것도 꽃꽂이를 할 줄 아셔서 직접 만드신 꽃다발이었다더군요.”
집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정말이지, 모두 다 깜짝 놀랐습니다. 하녀장과 시녀장의 차이를 아시다니요.”
지금까지는 집안에 귀부인이 없었기에 전문 시녀를 둘 이유가 없었고 하녀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공작 부인이 들어온 이상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앞으로는 시녀들을 더 뽑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하녀장 비아를 시녀장으로 임명했다.
어찌 보면 루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을 썼다. 승진 기념이라며 직접 숲속에서 꽃을 잘라다 꽃다발을 만든 것이다.
“그녀가 꽃꽂이도 할 줄 안다고?”
“네, 버몬드가에서 배우셨다 합니다. 비아가 어찌나 기뻐하는지, 그녀가 상부하기 전처럼 환히 웃는 건 정말이지 처음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네겐 그런 일도 이야기하나?”
“아, 그 일 외엔 딱히 말씀하신 건 없으십니다.”
집사가 버몬드가를 언급한 순간 아키스는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몰랐다. 다만 한편으론 아내가 고용인들에게 너무 친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랫사람을 잘 살피는 건 사려가 깊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순진한 여자니까 잘 지켜봐. 어느 정도 선을 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새틴을 떠올렸다.
공작의 옛 약혼녀였던 새틴은 온화하고 얌전한 외모와 달리 안하무인이었다.
그녀는 만찬회조차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온갖 아는 체를 하며 식사를 흠잡거나 괜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 체했다.
거기다 새틴은 이상한 주관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명문가의 영애일수록 응당 까다로워야 하고 응당 쉬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새틴이 질시한 희대의 미녀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가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새틴은 달리아의 그런 태도를 흉내 내곤 했다. 그래야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런 새틴을 겪었던 고용인들에게 루나는 그야말로 진심을 다할 만한 사람이었다.
‘인연은 어떻게 올지 모른다고, 원래부터 공작 부인과 이렇게 만날 인연이셨을지도 모르지.’
새틴은 너무 권력욕이 컸고, 달리아는 집안의 격은 맞았지만 가문의 입김이 셌다. 아키스가 워낙 무심하고 차가운 사람이니 집사는 내심 루나 같은 여자가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분위기는 안주인이 만드는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밝은 분이 오시니 저택 분위기가 환해졌습니다.”
“그럼 그녀가 계속 좋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신경 쓰도록.”
“네, 공작님.”
* * *
오늘 루나는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 점심을 먹은 후, 리튼의 최고급 제과점에서 구운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 오후 내내 결혼식이나 살림에 쓸 물건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웨딩 케이크는 이걸로 괜찮을 것 같아요.”
루나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 접시를 알렉이 집어 들었다.
“이 쪽이 결혼식 드레스를 만들 디자이너 명단입니다.”
명단을 대충 훑던 루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모이라라는 이름의 디자이너가 명단에 있었다.
미래의 일기장에 적혀있던 디자이너였다.
‘정말 그 모이라가 맞나?’
미래의 루나가 일기장에 단 한번이라도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적어놓은 여자였다.
몇 년 후, 수도에서 모이라의 디자인이 크게 유행하기 때문이었다.
시골로 팔려 간 미래의 루나조차 그녀의 명성을 듣고 일기장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수도의 잡지에도 단골로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모이라 이벨 부띠끄’. 미래의 모두가 선망하는 곳이었다.
‘디온은 어디서 그녀를 섭외했지? 아직 유명해지기 전일 텐데.’
그녀는 버슬 드레스며 무거운 페티코트 문화를 끝냈고, 일각에서는 그녀를 ‘페티코트의 해방자’라고도 불렀다.
‘미래에 엄청나게 드레스 값이 비싼 디자이너가 된다고 했어.’
그런 사람의 이름이 떡하니 눈앞에 있으니 참 신기하다고 할까. 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아아, 이 모이라라는 사람이 괜찮을 것 같군요.”
그런데 지금 시기면 아직 뜨기 전이지? 정말 괜찮을까? 잠시 생각하던 루나는 미래의 자신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드레스가 망해 봐야, 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섭외하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피곤하시면 좀 주무시겠습니까?”
“오늘은 겨우 케이크와 꽃밖에 못 골랐는데요.”
루나는 아키스가 빌려줬던 마도구 펜던트 생각이 간절했다. 그 펜던트가 있다면 예전처럼 강철 체력이 될 수 있을 텐데…….
루나는 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키스가 밤마다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으니 하루가 꼬이고 있었다. 뭐든 잠깐 집중하고 있다 보면 금세 또 졸음이 꾸벅꾸벅 밀려왔다. 미열도 자주 났다.
“이다음은 뭐였죠?”
“화장대를 만들 가구상을 만나실 차례입니다.”
아키스와 의논한 끝에, 결국 루나의 새 방은 손님방에 서재 겸 파우더 룸을 만들기로 했다. 아키스의 침실과 겨우 방 두 개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 화장대도 급한데…….”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 줄 겁니다. 차를 대접하고 조금 대기하라 하죠.”
“정말 그래도 될까요?”
“의견을 물으실 필요 없으십니다. 공작 부인께서는 마땅히 하고 싶으신 대로 하셔야죠.”
“그런 말 마요. 오만해질지도 모르니까.”
루나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았다. 주변인들이 잘해 주는 건 반은 호의요, 나머지 절반은 그들 스스로의 성품이 좋기 때문임도 알았다. 아키스가 필요로 인해 결혼한 여인에게 권력을 쥐어 줄 만큼 멍청한 사내가 아니란 것도.
무엇보다 그는 그녀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을 때, 크게 화를 내면 냈지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알았기에 루나는 늘 겸손하려고 마음먹었다.
집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오만해지셔도 됩니다. 신분이 높음에도 착하기만 한 사람은 무시당하기 마련이죠.”
루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착하지도 않았다. 저 살자고 이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에 불과했다. 일단 아키스를 속이고 있으니까.
“그럼 딱 15분만…….”
루나가 졸기 시작하자, 제인이 그녀가 덮을 만한 부드러운 담요를 가져왔다.
“저기, 알렉.”
“네. 부인.”
“늘 묻고 싶은 거였는데, 내가 정말 2층에 방을 만들어도 될까요?”
루나는 잠들기 전의 나른함 속에서 물었다. 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2층은 작은 옷 방이 딸린 손님방을 제외하면 온전히 연구자인 아키스를 위한 구역이었다.
“공작님께서 그러는데 이 집은 몹시 귀하고 오래된 저택이라 집을 조심해서 써야 한대요. 그래서 내 침실을 만드느라 보수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어요. 차라리 자기 침실을 같이 쓰자고…….”
“……네?”
집사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낯이었지만 곧 표정을 감췄다.
아키스는 기회만 닿는다면 이 집을 때려 부수고야 말 사람이었다. 굳이 그가 저택을 바꾸지 않는 건 정말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내 서재와 파우더 룸을 만들어도 괜찮은가 하고…….”
“당연히 됩니다. 부인을 위한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손님방에 벽난로 공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벽난로요? 이 집은 마정석을 이용한 난방 설비가 온 집안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치만, 내가 손님방에서 자겠다고 하니 아키스가 그 방은 몹시 춥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 방을 내 새 침실로 바꿀 수가 없대요.”
집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무슨 말인지 눈치챈 탓이다.
솔직하지 못한 공작이 계속 침실을 같이 쓰고 싶어서 궁색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알렉은 웃음을 참고 엄숙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흠……. 네, 그 방이 몹시 춥긴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은 마법사시니 겨울이 오기 전에 그 방의 난방 시설도 어떻게든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네. 제가 주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알렉.”
루나는 기쁜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방의 난방 시설이 고쳐진 후에 아키스가 그냥 그곳을 내 침실로 사용하라고 하면 어쩌죠? 그게, 나는 한 번도 내 서재나 파우더 룸을 가져 본 적 없어서 꼭 가지고 싶거든요.”
루나는 혼자 이런 걸 고민한 모양이었다.
집사는 이제는 등 뒤에 가지런히 모은 손을 스스로 꼬집고 있었다. 안 그랬다간 잇몸이 활짝 만개해서 흐뭇한 웃음을 지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귀여우시군, 정말…….’
그리고 알렉은 루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님과 한 침대에서 주무시는 일은 괜찮으신지요……? 제 말은, 어떤 분들께서는 부부 침실을 쓰는 일을 불편해한다고 하더군요.”
“네, 그건 괜찮아요.”
처음에야 민얼굴을 들킬까 전전긍긍했지만 최근 들어서부터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루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매일 밤을 어두운 오두막에서 홀로 잠들었다. 밤의 오두막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가끔은 무서웠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깊게 잠들지 못하기도 했다.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고 고성의 낡은 방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조금의 잠버릇도 없는 아키스 옆에서 잠들 때, 가까이서 나직하고 고른 그의 숨소리가 들려오면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금이나마 그의 따뜻한 품을 자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루나가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공작님이 많이 불편하실까요? 그렇다면 공작님의 침실에 내가 쓸 작은 침대를 하나 마련해 주는 방법도 괜찮아요.”
알렉은 눈치 빠르게 아키스의 거짓말에 동참하기로 했다.
“주인님께서는 까다로우셔서 배치를 바꾸는 일을 싫어하실 겁니다. 불편하셨다면 제게 언질 하셨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요?”
“네. 그보다 모처럼 생긴 부인의 파우더 룸을 마음껏 꾸미시죠. 예쁜 가구를 사서 방을 잘 꾸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작님께서도 바라실 테고요. 부디 공작가의 품위에 맞는 멋진 가구를 골라 주십시오. 가구도 저택의 일부이며, 재산입니다.”
“흐응…… 그런가요?”
집사의 말이 몹시 그럴 듯해서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루나는 가구 상인과 의논하여 새 화장대와 책상을 맞췄다. 최고급 원목으로 짜서 흰색과 녹색 꽃을 아름답게 아로새기고 물감으로 덧칠한 최상급 가구였다.
‘드디어 내 소파를 가지게 되네.’
거기다 귀부인용의 긴 의자도 주문했다. 드레스를 입고 생활하는 귀부인들이 편하게 낮에 사용하는 용도로 누울 수 있는 긴 의자였다.
숙모와 새틴은 각자 자신만의 긴 의자를 가지고 있었다. 루나도 늘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웠다.
* * *
“공작님, 서부에서 흑마법사 휘멘을 목격했다는 이를 찾았습니다. 새벽에 낙타로 물을 나르던 상인이 비슷한 인상착의의 사람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디온의 보고에 아키스는 탄식했다.
그의 손에는 정보 길드에서 보내온 쪽지가 들려 있었다. 마법사가 사막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고대 마법사의 연구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사막의 유적지를 찾기 위한 탐사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탐사는 보통 한 달 이상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쯧, 당분간 지상에서 놈의 얼굴을 보긴 힘들겠군.”
고대 마법사들의 연구실 입구는 숨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고대 마법사의 연구실을 ‘던전’이라 불렀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자신들만의 비밀 연구실에 수많은 마법을 걸어 치밀하게 입구를 숨겼다.
그러니 그 넓은 사막에서 휘멘이 향했을 마법사의 연구실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아내는 격이었다.
“게다가 휘멘과 공작님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혹여 찾아내더라도 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공작님이 찾는다는 걸 눈치채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지 않을지…….”
“사이가 나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저를 찾고 있는 걸 알면 오히려 따지러 오겠지. 그런 성격이니까.”
아키스와 휘멘. 제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최고의 마법사.
한때 그들은 아카데미에서 함께 수학하던 사이였고, 당시 그 서로를 친우라 생각했을 만큼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둘은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어느 날 학문적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싸운 후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지금은 몹시 사이가 나빴으나, 한때 가까운 친우였던 만큼 둘은 서로를 잘 알았다.
“……사막에서 나오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군. 수배를 내리도록.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그가 나타나든 말든 내가 직접 서부로 내려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루에 대한 소식은 없나?”
“죄송합니다. 아직 아무 것도…….”
아키스는 낮은 숨을 내쉬었다.
루.
그의 반쪽짜리 각인자로 추정되는 인물이자, 유능한 번역가.
수도 멜베른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번역가의 일거리가 가장 많은 곳은 서부 사막 도시였다. 혹시나 해서 정보 길드와 기사들을 풀어 서부에서 소년의 단서를 찾았으나, 그곳에서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아키스의 눈치를 보며 디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살아만 있다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살아 있는 것, 그게 문제지.”
아키스는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소년이 죽지 않는 한 각인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각인자가 죽으면 정신적 타격으로 미쳐 버린다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각인이 완전하지 않으니, 그 소년이 죽는다 한들 정신적 타격은 없을 것이다.
‘찾는다 해도 문제군.’
루를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찾는다고 해도 소년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호숫가에 다녀오겠다. 나머지 보고는 오후에 마저 듣지.”
결혼식에 대해 보고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디온은 아키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키스가 호숫가로 향한다는 건 생각할 일이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 *
루나는 결혼식 전까지 오후마다 예절 교습을 하기로 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수업은 속성으로 빠르게, 조금의 쉼 없이 진행되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예법을 가르쳐 드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들은 것보다 훨씬 대단하시군요! 예법의 기초는 이미 모두 알고 계세요. 아는 것들을 다시 한번 복습하시고 화술과 댄스, 사교술만 조금 더 집중하면 되겠어요.”
“오래전에 배운 것들인데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에요.”
루나는 예법 교사의 찬사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버몬드가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 와중에도 루나에게 귀부인의 기본 예법을 가르쳤다. 왜냐하면 후에 루나를 비싼 값이 팔아넘기기 위해서였다.
뭣도 모르는 천치 같은 여자보다는 기본적인 예법을 아는 여자가 더 비싸게 팔릴 건 당연했다. 게다가, 새틴의 수업에 루나를 끼워 넣기만 하면 되었으니 돈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다행히 루나는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배운 건 잘 잊지 않았다. 그래도 신분 높은 분들을 대하는 법이나 사교술은 배운 적이 없었기에 수업은 큰 도움이 되었다.
수업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는데, 이유인 즉 예법 교사인 마이아가 몹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는 채찍이 아니라 칭찬으로 학생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루나와 아주 잘 맞았다.
“좋아요, 아주 잘하고 계세요. 어머, 이 정도라면 황궁에서 사람들이 부인을 보고 까무러치겠어요.”
마이아 교사는 맑고 고상한 목소리를 가진 반반한 외모의 젊은 사내였는데, 루나는 이렇게 화려하게 입는 사내를 난생처음 보았다.
말투가 중성적이라 그런지 다른 사내들과 달리, 마이아 교사와 같은 공간에 밀착하여 있는 것이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귀족 전문 예절 교사라 그런지 개성이 정말 확실하네. 재미있는 사람이야.’
마이아는 루나보다 훨씬 참하고 고상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센스가 있어 수업 중간중간 재미있는 농담이나 가십 이야기를 기가 막히는 말솜씨로 끼워 넣었다.
“그래서, 몹시 행복해 보이는 그 남작 부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죠. ‘남편이 공국에서 반년 만에 돌아오셔서 기쁜 모양이군요.’ 하고. 그랬더니 그 남작 부인이 대답하기를, ‘그럼요, 그것보다 더 기쁜 것은 다음 주에 남편이 1년간 다시 지방으로 부임한답니다. 그리고 또 좋은 일은 호텔비가 일주일밖에 안 든다는 건데, 왜냐면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제가 호텔에 가거든요. 그게 우리 부부 금실의 비결이랍니다.’ 라고요. 어쩜, 요즘 수도 세련된 귀족들은 같이 안 지내는 게 유행이라죠, 호호.”
루나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는 사이가 나빠 같이 살지 않는 한 남작 부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풍자했는데, 이야기의 내용보다 마이아가 흉내 내는 말투가 더 웃겼다.
“정말 재미있네요. 하지만 나라면 남편과 같이 사는 편을 택하겠어요.”
“공작님과 함께 사는 것이 즐거우신가 봐요.”
루나는 그 말에 뺨을 붉혔다. 그러고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장갑을 낀 손으로 뺨을 감쌌다.
“곁에 있으면 보기보다 두려운 분은 아니거든요. 같이 있으면 즐겁기도 하고…….”
마이아는 그 말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간에 공작은 예민하고 두려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일류 예절 교사인 그는 능숙하게 놀람을 감췄다.
“아무튼, 아주 잘하고 계세요. 사람들 앞에서 웃을 땐 입을 가리시는 것 잊지 말고, 표정 변화가 드러날 것 같을 땐 손동작으로 주의를 돌리시는 거예요.”
“알겠어요.”
루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수업 내내 집중하고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사교계에서는 루나가 양자매의 남자를 빼앗은 희대의 악녀 정도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마이아는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수업은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정시에 끝났다.
“첫 수업부터 아주 훌륭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했어요, 마이아.”
공작저를 나서는 마이아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온 루나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수업을 받을 땐 몰랐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조금 피곤했다.
‘다음 일정이 뭐였지?’
루나는 창밖을 구경하며 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키스?’
그때, 창문 너머로 아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책하는 건가? 바쁜 줄 알았는데…….’
루나는 창문을 열고 길게 목을 뺐다. 그는 루나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낮에 아키스의 얼굴을 보는 건 며칠 만인지라 루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몸을 회복하고 난 뒤 아키스는 늘 집무실에서 일에 파묻혀 있었다. 디온이 언질 해 주기로 그가 아픈 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잔뜩 쌓여 있다 했다. 그래서 한집에 있으나 다른 공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그가 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아, 저 방향은……. 호숫가로 산책을 가나 보네. 무언가 생각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
디온이 예전에 귀띔해 준 적 있다. 아키스가 호숫가로 산책을 가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루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 * *
공작가 뒤편에 위치한 작은 호수에는 기이한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다 썩어 가는 나룻배 한 척.
고요한 호수와 하얀 석조로 이루어진 공작가의 고고함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나룻배는 아키스가 이 적막한 대저택 안에서 애착을 가진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 나룻배는 어린 시절 아키스가 자란 마을 호숫가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고, 그가 유일하게 공작가로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빈민가에서 자란 어린 시절, 누군가가 호숫가에 버린 이 나룻배는 그의 집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을의 헛간이나 창부들의 집 바닥에서 새우잠을 잤지만,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 나룻배에서 잠들고 깨어났다.
‘넌 우리랑 외모도, 말하는 것도 다른 것 같아.’
그가 자란 가난하고 헐벗은 마을. 창부들이 길거리를 떠돌고 사내들 태반이 주정뱅이들이었던 가난한 마을. 그는 그곳에서 몹시 이질적인 존재였다.
아키스는 어릴 적부터 건강했다. 햇빛을 아무리 쬐어도, 더러운 흙바닥에서 잠들어도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고생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의 피부는 늘 깨끗했고, 눈빛은 맑았다. 어린 시절 고생의 흔적은 제 나이보다 성숙한 깊은 눈매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키스는 낡은 나룻배 위에서 흘러가는 구름과 잔잔한 호수를 보며 언젠가 이 오래된 나룻배가 움직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자신을 먼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라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그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버려진 어린 시절, 그가 또렷이 알고 있던 건 단 하나였다. 자신의 이름이 ‘아키스’라는 것. 그가 입고 있던 옷 안에 적혀 있었다고 그를 주운 여자가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아키스’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나중에 고대어를 깨우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청의 언어로 ‘환상’이라는 뜻이었다. 선대 공작은 공작가의 사람답게 마법사였고, 그에게 그런 기이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것이 하룻밤의 환상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키스는 숨을 들이켜 폐부에 공기를 넣었다.
과거 어느 여름날, 어느 별장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대 공작가의 젊은 후계자였던 아버지와 공국의 대귀족의 여식이었던 어머니는 처음 만났다.
둘은 보자마자 서로 운명을 느꼈고,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흔한 로맨스 소설의 스토리처럼 함께 도망가기로 했다. 소설 같은 사랑의 도피였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지만 당시 어렸던 그들은 그게 운명이고, 사랑이라 믿었다.
그리고 도망친 둘은 비렁뱅이들의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챙겨 온 보석과 돈을 털어 마을 뒤쪽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을 샀다.
그리고 그들은 소설처럼 행복하게 살았다. 밤낮으로 사랑을 속삭였고, 매일을 숨 막히게 사랑했다.
그리고 그 철없는 사랑의 유효 기간은 딱 2년이었다.
2년째 되는 해, 아키스의 어미는 자신을 돌봐 주는 이가 없어 모든 걸 직접 해야 하는 상황에 진저리를 냈고, 공작은 자신들을 찾는 공작가의 사람들을 피해 숨죽여야 하는 나날들에 지쳐 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공작은 본국에 자신의 의무와 명예, 그리고 두고 온 약혼녀도 있었다. 또한 어머니도 화려한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둘은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지금 돌아가면 삶을 되돌릴 수 있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사랑이 식은 2년째 되는 날, 그들은 헤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과오의 증거인 갓난아이 아키스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아이는 보라색 눈이 아니니 드래곤의 계약을 할 수도 없어. 그러니 공작가에도 쓸모없는 아이네.’
태어날 당시 아키스의 눈은 푸른색이었다고 한다.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들은 모두 보라색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아키스는 공작에게 꼭 필요한 아이도 아니었다. 공국의 대귀족 여식인 어머니에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에 그 이야기를 들은 아키스는 종종 홀로 생각하곤 했다. 만일 그가 보랏빛 눈이었다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면 과거는 달라졌을까, 하고.
갓난아이인 아키스의 처분을 두고 둘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를 죽이는 것이 가장 편하긴 했겠지만, 그러기엔 그의 몸에 흐르는 둘의 피가 너무도 고귀했다.
‘이 아이를 죽이면 전쟁도 불사해야 할 겁니다.’
결국 아키스의 어머니는 그를 죽이는 것에 반대했고, 그들은 논쟁 끝에 아키스를 거리에 내버리기로 했다. 아이가 죽을지 살지 운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들은 각자 본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삶을 되찾았고, 새로운 사람과 혼인했다. 둘 다 과거를 필사적으로 숨겼기에 과거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아키스의 아버지는 수순대로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드래곤의 계약을 했고, 그로부터 몇 개월간 ‘각인’을 피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드래곤의 계약이 완성된 후에야 그는 혼인한 아내를 취했고, 새로 결혼한 부인에게서 보라색 눈을 가진 후계자를 얻었다.
그 후계자의 이름은 아키스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 ‘단달로스’라는 이름의 아이였다.
그렇게 안정된 생활을 얻었을 때, 둘은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아키스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각자 비밀스레 사람을 비렁뱅이의 마을로 파견했다. 그리고 다섯 살 난 아키스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그때부터 어미는 사람을 보내 남몰래 아키스를 돌봤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키스는 아버지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키스가 열 살이 되던 해, 그는 어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그는 절벽 위에서 거대한 드래곤을 보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호숫가에 얼굴을 비추어 보니 눈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거울을 보았다.
‘너, 눈 색이 왜 그래?’
신비한 보라색은 보면 볼수록 이상한 색이었다. 아키스는 누군가 버린 거울 조각에 눈을 계속 비추어 보았다.
같은 날, 공작가의 저택에서 공작 부인은 드래곤에게 단달로스가 물려 죽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단달로스는 승마 연습 도중 울타리를 넘다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공작 부인이 보는 앞에서 목이 꺾여 죽었다.
공작 부인은 그날 이후 반쯤 정신을 놓았다. 모두 후에 그의 아버지가 아키스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 * *
아키스의 의붓동생, 죽은 단달로스를 낳을 당시 공작 부인은 난산이었다고 했다.
단달로스가 태어난 후, 주치의는 공작 부인이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 했고, 후계자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는 상황에 공작가는 절망과 침통에 빠졌다.
‘내가 그 비렁뱅이들의 마을에 두고 온 아이…….’
그때, 공작은 문득 아키스를 떠올렸다.
공작은 충동적으로 게이트를 타고 비렁뱅이의 마을로 향했다. 그곳은 게이트를 두 번이나 타고도 꼬박 하루를 더 달려야 했다.
단달로스를 잃은 슬픔과 절망을 안은 그가 아키스를 찾은 그때, 그는 운명의 오묘함에 전율했다.
‘어, 어떻게, 태어날 땐 분명히 푸른 눈이었는데……. 아아, 그랬구나. 이럴 운명이었던 것이었어.’
거기다 공작은 마법을 사용하여 아키스에게 전대미문의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공작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래, 드래곤께서 더 강한 아이를 택하신 거야, 그런 거였어.’
드래곤의 신전에서, 신관은 아키스가 전대미문의 ‘그릇’이라고 말했다.
‘이만한 재능을 가진 후계자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분은 최고의 마법사가 되실 것이며, 제국에 위기가 닥치면 드래곤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어 드래곤의 신관은 설명했다.
아주 드물게 공작가의 특수한 혈통, 드래곤의 그릇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중에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관은 아키스의 발현이 단달로스의 죽음과 연관 있냐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아키스는 운명이란 걸 믿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공작가의 중요한 운명을 짊어졌다면 하찮은 장난처럼 태어났을 리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키스가 공작을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었고, 공작 또한 아키스를 공작가에 필요한 후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대했다.
새엄마인 공작 부인은 더욱 상태가 나빴다. 친아들인 단달로스가 죽고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았는데, 아키스를 볼 때마다 발작했다.
단달로스가 죽은 것은 드래곤이 더 강한 마법사의 재능을 가진 아키스를 택했기 때문이라는 공작의 근거 없는 믿음, 공작 부인은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은 아키스를 볼 때마다 미쳐 갔다.
‘너, 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야! 네가 죽였어!’
공작은 그런 부인을 볼 때마다 낮게 혀를 찼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 부인은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공작가는 더더욱 적막해졌다. 공작은 우울해진 공작가의 꼴을 볼 때마다 그것을 은연중에 아키스의 탓으로 돌렸다. 결국, 아키스와 공작은 마지막까지 조금도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
아니, 그나마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다. 수도원으로 보내진 공작 부인이 죽고 아버지가 병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키스는 제 손으로 아비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니까.
공작이 병들자마자 아키스는 그를 요양이라는 명목하에 지방의 외딴 성으로 쫓아냈다. 공작은 그곳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했다.
소년 시절, 아키스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누구도 그를 돌봐 주지도, 주기는커녕 돌아봐 주지도 않았다.
당시 알렉과 비아가 공작과 공작 부인의 눈을 피해 아키스를 물심양면으로 돌보지 않았다면, 곧 머리가 굵어져 아카데미로 가지 않았다면 아키스는 공작 부인을 따라 미쳐 버렸을지 모른다.
아키스는 부친을 증오했으나, 그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에 한편으로 안도했다. 부친은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제 모친과 살았던 2년뿐이라 했다.
그 조차도 지긋지긋하게 끝나 버렸지만.
아버지에게 저를 낳아 준 친어미를 사랑했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은 그의 인생에 가장 역겨운 순간이었다.
아키스는 제가 사랑의 산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길 바랐다. 부모들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이길, 차라리 사창가의 많은 아이들처럼 부모가 내버린 아이이길 바랐다. 그래야 어린 시절의 제 처지가 설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아키스의 친부모는 그를 사랑해서 낳았고, 사랑이 식어서 버렸다. 식어 버린 사랑에 딸린 부속품이자 장난감, 그것이 아키스의 운명이었다.
단달로스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버려진 장난감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너의 선택이 아니더냐? 나를 따라 이곳에 와 권세를 누리기로 한 것은 네 선택이다. 그저 공작가만 이어 다오. 그럼 그것만으로 너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거다.’
아키스의 손에 의해 외딴 성으로 쫓겨나며 공작이 남긴 말이 그것이었다.
‘그냥 그곳에서 죽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찾지 마세요. 그렇게 죽으면 아무 말 않겠습니다. 아파도 연락하지 말고, 외로워도 그저 삭이며 혼자서 죽으세요. 죽는 순간 간병인조차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부자간의 마지막에 주고받은 말은 그것이었다.
아키스도 인정하기는 했다. 뒷골목의 비렁뱅이로 살다 병들어 죽는 삶보다는 지금이 나음을.
그러나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미와 아비의 철없는 사랑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충동적인 사랑이란 감정의 배설물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비참함은 몰랐을 것이다.
아키스는 곧 친부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친부를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자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실수로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을 것이고, 아버지처럼 끔찍한 가정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대로 후계자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루, 그 소년을 어떻게든 해야 해.’
그가 가장 걱정하는 건, 혹시 각인이 완성되어 루에 대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를 태어나게 한 그 불합리한 사랑에 빠질까 걱정이었다.
원하지 않는 사랑에 빠지게 될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그의 은밀한 속내였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소년을 증오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그는 아직도 소년에 대한 걱정과 총애를 품고 있었다.
루는 사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또 어디에서 혼자 떨고 있지 않을지 그를 걱정하는 자신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 펜던트만 아니라면 정말 꿈을 꾼 기분이군. 그 소년을 만난 일이 실제로 있긴 한 건가…….’
아키스는 품 안에 지니고 다니던 자수정 펜던트를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정말 제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뒷조사를 철저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 소년만 보면 논리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잘해주고 싶었다. 다 해주고 싶었다.
아키스는 작은 한숨을 쉬고 펜던트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몇 번이나 이걸 호수에 집어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조차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제 와 그의 인생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소년은 운명이 아니었다. 운명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 소년은 사디스틱하게 꼬인 오묘한 우연의 결정체였다.
‘루의 존재가 내게 계시인지, 벌인지 모르겠군.’
어쩌면 공작가의 대를 끊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챈 신의 벌이자 상일지도 모른다.
반쪽짜리 사내 각인자라니, 정말이지 저에게 어울리는 끔찍한 일이 아닌가. 아키스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 * *
드래곤의 신전.
동굴 안에 위치한 그 음침한 곳에는 오늘도 빛이 잘 들지 않았다. 신전의 유일한 신관만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히죽대는 얼굴로 홀로 신전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대 로텐베른 공작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벌일 줄이야.”
선대 공작이 죽고 나서 다음 대 공작이 계약을 이어받는 각인 기간.
그 기간을 지켜 내지 못하고 사고를 친 공작은 역대 거의 없었다. 공작들은 어릴 적부터 각인을 조심하라고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중 절대 안 그럴 것 같던 금욕적인 아키스가 사고를 친 것은 의외였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홀로 고성에서 죽게 만들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께서 어쩌다 발목이 잡히셔서…….”
흥얼거리던 그는 석실 문을 열었다. 그의 입에 함지박만한 웃음이 걸렸다.
어두운 동굴 안에는 희미한 은빛을 내는 꽃들이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드래곤이 보내는 신호였다.
신전의 은빛 꽃.
드래곤과 공작의 계약이 완성되었을 때만 피는 꽃이었다.
그는 춤을 출 듯한 걸음걸이로 뛰어가 급하게 편지를 썼다.
[계약 완성,
이제 그 반쪽짜리 각인자라는 남자애만 찾아서 죽이면,
공작가는 태평성대를 누릴 것입니다.
부디 공작가의 대를 무사히 이어 주시길.]
그 쪽지는 집무실에서 일하던 공작의 손에 전달되었다.
쪽지를 본 아키스는 겨우 가라앉은 심기가 다시 엉망진창이 되었다.
“……예정대로 계약은 완성되었다니 다행이군.”
말과는 달리 그는 화를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이자가 필요가 없어졌으니 다시는 허락 없이 공작가에 들이지 마라. 내가 신전으로 가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단, 각인 관련한 정보를 가져올 때만 상대하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디온은 아키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짧게 대답했다.
* * *
“와인을 더 드릴까요?”
알렉의 말에 아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잔에 평소보다 많은 와인이 채워졌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루나는 아키스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역시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봐.’
호숫가로 산책을 다녀온 아키스는 어딘가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식사 내내 아키스는 평소보다 과묵했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원래 과묵한 사람이긴 한데…… 오늘은 더 그러네.’
루나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부러 밝은 모습을 보여 주거나 마이아가 해 준 농담이라도 들려줘서 그를 웃게 만들까? 아니면 괜찮냐고 물어보고 따뜻한 말이라도 할까?
하지만 루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새틴이 아키스의 약혼녀였을 때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했던 무던한 노력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키스는 늘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의 기분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것이 루나의 역할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신경쓰지도 말자.’
이런 날도 있겠거니 했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런 만큼 조바심 내며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키스가 식사를 하며 나직하게 물었다.
“오늘 마음에 드는 가구는 골랐습니까?”
“네. 화장대도 사고, 예절 수업도 좋았어요.”
루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키스는 예의를 갖춰 루나에게 말을 걸었고, 루나도 길지 않게 짧게 대답했다.
아키스는 식사가 끝날 무렵 저녁에는 남은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말했고, 루나는 일찍 자겠다 대답했다.
그날 그들의 저녁 식사 대화는 간결하게 끝났다.
* * *
루에 대해 떠오르는 상념을 지우기 위해 아키스는 식사를 하고 승마를 하러 갔다. 미친 듯이 숲을 달리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는 땀에 젖어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책상위에 쌓인 고대어 서적들을 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를 더욱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유능한 번역가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다른 번역가들로는 성이 안 찼다. 앞으로 생길 일의 차질을 생각하니 피곤했다.
미친 듯이 밀린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키스는 뻐근한 눈가를 누르며 일어났다.
그가 침실로 들어왔을 때, 침실에는 램프 불만 켜져 있었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루나?’
루나가 없는 걸 보고 처음에는 잠깐 자리를 비웠겠거니 했다. 그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2분, 3분, 그리고 5분이 지나고도 루나는 오지 않았다. 아키스는 침대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읽고 있던 듯한 로맨스책이 활짝 펼쳐져 있었고, 침대 시트가 구겨진 흔적이 있었다.
결국, 아키스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나?”
부부 침실이 있는 2층은 이 시간엔 루나와 아키스밖에 없었다.
그는 루나를 찾으며 방을 돌아다녔다. 한참 꾸미는 중이라 엉망진창인 그녀의 드레스 룸, 그리고 서재, 작은 응접실과 복도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현 듯, 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 그녀의 표정이 어땠지?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는 아래층을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정원을 찾아보고 그곳에도 그녀가 없으면 기사들을 동원해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으로 나서는 무렵의 그의 걸음은 몹시 거칠어져 있었다.
“아키스?”
루나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돌아보았을 때, 아키스는 크게 화를 내기 직전이었다.
루나는 얇은 비단 잠옷 위로 낡은 선대 공작 부인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위태하고 얇은 복장으로 정원에 서 있던 그녀가 태연하게 그를 불렀다.
“여기서 뭐 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입니다. 자정이 다 되었는데 침실이 비어 있어서…….”
“아,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어요. 금방 들어갈 생각이었고요.”
루나는 그의 속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이었다. 보름달의 밝은 빛 아래, 그리고 저택의 곳곳을 밝힌 불빛 아래 루나의 하얀 얼굴이 찬바람 탓인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달이 크게 떠 있기에 보러 나왔어요. 당신은 새벽에 들어올 거라 생각했거든요.”
“……달은 창문으로 봐도 되잖습니까. 날이 추운데.”
루나는 아키스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걱정 어린 기색에 살짝 미소 지었다.
“그냥,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요.”
아키스는 루나에게 한 발짝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 들어갑시다.”
“잠깐만요, 그게…….”
루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키스는 의아함을 느끼며 루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알아요.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는 미신이 있었거든요.”
아키스는 도통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서요?”
“뭐긴요, 몰라요? 보름달을 향해 자정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요. 그런 말,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소녀들은 1년에 열두 번의 소원을 빌 기회가 있었는데, 달의 여신이 소녀들을 수호한다는 그런 미신이었다. 물론, 전혀 근거는 없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믿습니까?”
“진지하게 믿지는 않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루나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곧 그녀의 깊은 속눈썹이 내리깔아졌고, 루나는 몇 초간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루나의 얼굴을 보는데, 아키스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다 날아갔다. 왜 그런 건지는 모를 일이다.
소원을 다 빈 듯, 루나가 그대로 곁눈질하여 아키스를 보았다.
“같이 소원 빌래요?”
“아뇨.”
“그럴 줄 알았어요.”
루나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리고 그 핑크빛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과정은 아키스의 시선이 홀린 듯 따라가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루나에게 미안해졌다. 어쨌든 애정과 사랑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그의 하나뿐인 아내였다.
저녁 내내 루의 생각을 한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내를 앞에 두고 다른 이의 생각에 몰두한 것이다.
“아키스?”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아키스는 루나의 망토를 여며 주며 물었다.
루나는 녹색 눈을 들어 아키스를 보았다. 밝은 달빛이 그녀의 금빛 머리와 망토 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아름다웠다.
“소원 내용을 비웃을 것 같아서 싫어요. 벌써 웃고 있잖아요.”
“아뇨, 비웃은 것 아닙니다.”
루나는 아키스의 입꼬리가 은근하게 올라간 것에 툴툴거렸다.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어제오늘 내가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아서.”
“그냥 하찮은 소원들을 빌었어요.”
“그래요? 중요한 소원이니 이 시간에 밖에 나온 거 아닙니까?”
루나는 머뭇대며 미소 지었다.
“정말 별것 아녜요. 다만, 제가 소원 비는 방법이 좋아서 그런지 소원을 빌면 잘 이뤄지는 편이거든요.”
“방법이라뇨?”
루나는 자신의 어깨 위에 단단하게 올라온 그의 팔에 살짝 몸을 실었다.
“정말로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하겠습니다.”
타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저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빌 때, 소원을 두 번에 나누어 빌어요.”
루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의미가 있어요. 첫 번째 소원은 이뤄질 만한, 아주 작은 일을 비는 거예요. 아니면 이뤄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일을 비는 거죠. 두 번째 소원은 욕심을 내서 더 큰 소원을 빌어요. 그러고 나서 기도를 마무리 지어요. 만일 제가 욕심을 부리는 것 같으면 첫 번째만 이뤄 주세요, 하고요.”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잘생긴 얼굴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에요. 전 어릴 적에 아주 푸석푸석한 밀짚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밀짚 바구니처럼 탁한 색이었죠. 예쁜 갈색 머리도 아니고, 밝은 금발도 아닌 어중간한 색이었는데, 소원을 빌었죠. 첫 번째 소원으로는 금발이나 갈색이 되게 해 주세요. 평생 어중간한 머리로 살 순 없어요, 하고요. 이어서 두 번째 소원을 빌 때는 이왕이면 아름답고 예쁜 금발이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소원을 빌었어요. 그리고 덕분인지 자라면서 금발 머리가 되었죠.”
“그래서 당신 머리가 아름다운 색이로군요.”
아키스는 흘리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뭐, 하찮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뒤로 소원을 두 번에 나누어 빌었어요. 그래서 첫 번째 소원만 이뤄져도 좋은 건데, 두 번째 소원까지 이루어지면 날아갈 듯 행복한 거죠.”
“예시를 더 듣고 싶군요.”
그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새어 들었다. 그의 매혹적인 보랏빛 눈이 냉엄함 외의 감정으로 휘어지는 걸 보자 숨이 턱 막혀 왔다.
루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이런 식이죠. 첫 번째 소원은 내일 새틴이 드레스 가지고 난리 치지 않게 해 주세요. 두 번째 소원은 새틴이 알아서 옷도 차려입고 나간 다음, 늦게 들어오게 해 주세요.”
아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새틴이 그렇게 당신을 못살게 굴었습니까?”
루나는 즉시 제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화제를 돌렸다.
“그…… 아무튼, 그래서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대개 첫 번째만 이루어지지만, 두 번째까지 이루어지면 한동안 얼마나 행복한데요. 얼마 전에도 내 소원이 이뤄졌다구요.”
“얼마 전에도 그랬다고요?”
루나가 고개를 끄덕인 후, 아키스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속삭이듯 말했다.
“첫 번째는 생애 첫 여행을 가게 해 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바다를 보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죠. 그리고 그 소원을 빈 날은 공작님이 같이 여행을 가자고 말해 준 날이었어요. 그러니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소원이잖아요? 물론 두 번째는 제 욕심이었지만…… 당신이 결혼식을 바닷가의 별장에서 하자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몹시 행복했어요.”
루나가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아키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에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쇼핑을 다녀왔다 했던 날, 아키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다음 소원대로 여행을 데려가 주겠다 했다. 그래서 결혼식장을 바닷가에 위치한 고급 휴양지인 리튼에 소유한 별장으로 잡았다.
“그럼 당신이 진짜 원하던 건…….”
“바다를 보는 건 오랜 꿈이었어요. 하지만 바다에 가고 싶다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럽게 할까 봐 그냥 여행이라 말했어요. 아, 그래도 오해하지는 말아요. 바다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더라도 정말로 즐거웠을 테니까요. 어쨌든, 제 소원이 그만큼 잘 듣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키스는 루나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 귀여워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단순했지만 속내를 알기 어려웠고, 그가 상상 못하는 방법으로 행복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그녀 또한 어린 시절, 자신처럼 고생하며 자랐다 들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비틀려 있던 자신과는 매우 판이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원하는 걸 참으며 살아온 그녀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바다를 본다는 사소할 수 있는 일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너무 예뻤다. 그녀는 너무 특별했다.
아키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바다에 가고 싶어 한 줄은 몰랐군요.”
“바다는 하늘과 땅이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면서요? 밤에는 깊은 어둠에 물들고, 파도가 치는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의 끝까지 이어져 있다고요. 정말로 한번 보고 싶었어요.”
“진작 말해 주지 그랬습니까.”
루나는 뺨을 붉힌 채 수줍게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바다에 가게 돼서 기쁘다고 말하려 했는데, 당신이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아서…….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꼭 고맙다고 말하려 했어요.”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몹시도 미안했다. 뭐라 짚어 말할 것 없이 미안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루나가 나직하게 물었다. 아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원래는 문제없었을 일에 조금,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었지요.”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아키스는 어느새 풀리는 자신의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염려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일로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그녀가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싫어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였지만 나는 나일뿐이라고 생각했다고. 분명 그녀는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런 소박한 행복을 찾는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사랑스런 그녀를 만들었다.
지켜 주고 싶었다. 앞으로는 그녀의 두 번째 소원까지 다 이뤄 주고 싶었다.
“공작님?
루나가 속삭였다.
“들어갑시다, 추우니까.”
아키스는 한 팔로 안은 루나를 부드럽게 놓으며 말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데 불어온 바람에 추워서인지 루나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계단 아래로 그녀의 망토가 흘러내렸다. 아키스는 잠옷 차림의 루나를 들어 올려 안았다.
“앗……!”
루나가 작게 소리 질렀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침실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곤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눕혔다. 루나가 놀란 토끼 눈으로 아키스를 올려다보았다.
“약속 하나 합시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원하는 건 뭐든지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가 먼저 알아채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년간 남편으로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럴게요.”
루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좋아, 아주 착하군요.”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로 루나의 입술을 덮었다.
루나의 잠옷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 * *
루나는 모이라에게 드레스를 맡기기로 한 한 후, 이전에 들렀던 마담 다프의 의상실에서 장문의 사과편지를 받았다.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잘하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루나는 피식 웃고 그 편지를 무시했다. 디자이너 모이라는 바짝 긴장한 채 왔다.
“정말 제게 맡기시겠다고요?”
“네. 당신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난 요즘 유행하는 무거운 드레스는 질색이에요. 치렁치렁한 것도 싫고요. 결혼식 내내 수십 겹의 천과 장식들을 단 채 돌아다니는 건 싫어요.”
“저도 여성의 몸을 괴롭히는 드레스는 질색이에요. 코르셋 없이도 예쁜 라인을 만들 수 있는 드레스를 지향합니다.”
“내가 바라는 바네요.”
루나는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만들고 싶은 걸 만들도록 해요. 하지만 예쁜 옷이면 좋겠네요.”
결혼식 날 새 신부의 모습.
그만큼 아키스에게 자신을 ‘여인’으로 각인시킬 큰 기회는 없었다. 기왕이면 그날 아키스의 기억에 화사한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화려한 새 신부의 모습은 소년 루와 확연히 상반되는 모습일 터였다.
“정말 그거 외에 주문 사항이 없으시다고요?”
“예.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세요.”
모이라는 너무 큰 행운에 이 일이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이라는 오늘 루나가 만난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아직 신진 디자이너였기에 그녀의 숍은 수도 외곽 쪽에 있었다. 귀부인들이 드나들만한 호화로운 살롱도, 영업기술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소문만 무성한 공작 부인의 웨딩드레스를 맡게 되다니.
“그렇다면, 새롭고 화려하면서도 공작 부인 본연의 매력을 살리는 드레스를 만들겠습니다. 마침 급한 주문이 없으니 밤을 새서 만들면 결혼식 전까지 완성이 가능할 것 같군요.”
“정말 드레스를 만들어 주겠어요?”
루나는 몹시 기뻐했고, 모이라의 의문은 깊어졌다. 오늘 이곳에 온 다른 디자이너들에 비하면 모이라는 정말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로 나한테 웨딩드레스를 맡긴다고? 그 유명한 마담 다프도 옷을 맡게 해달라 애걸한 모양인데.’
모이라는 아첨하는 재주는 없었다. 그녀는 성격이 우직한 장인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녀는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만들고 말고는 공작 부인이 선택하실 일이지요. 사실 저는 오늘 이곳에 오면서도 공작 부인께서 제 디자인을 선택하시리라고 생각 못했습니다. 도대체 절 어떻게 알고 부르신 건가요?”
“아, 우리 쪽 사람이 준 디자이너 리스트에 당신 이름이 있었어요. 사실 다들 샘플을 들고 오겠다 했는데 그냥 당신만 불렀고요.”
“아, 리스트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짚이는 곳이 있긴 해요.”
“짚이는 곳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저는 마담 다프의 제자였거든요. 그다지 그녀와는 의견이 맞지 않아 지금은 교류가 없지만…….”
루나는 그 말에 납득할 수 있었다. 디온이 나름대로 수도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을 적은 듯한데, 마담 다프가 빠진 대신 그녀의 제자 출신이자 막 유명해지는 중인 모이라를 부른 것이다. 모이라는 말 그대로 다프의 대체였다.
“아, 그래서 모이라가 온 것이군요. 아무튼, 나는 당신에게 맡기고 싶어요.”
거기다 모이라가 부른 가격까지 마음에 들었다. 다프보다 훨씬 현실적인 가격이었다.
“정말로, 믿겨지지 않아요. 제가 이런 고위 귀족의 옷을 만들다니. 사실 전 그런 수준은 아니거든요.”
“그런가요? 누군가는 죽을 만큼 당신 옷을 입고 싶어 할지도 모른답니다.”
“네?”
모이라는 루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루나는 그저 살풋 미소 짓기만 했다.
“유행이나 격식에 국한되지 말고 만들어 줘요.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요.”
루나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살짝 흑심이 들기도 했다. 모이라가 엄청나게 유명해지면 드레스가 돈이 될 테니까. 공작 부인의 재산은 손댈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 돈을 조금씩 만들어둬야 그와 헤어지게 돼도 대비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저는 디자인을 시작해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이라는 신이 나서 말했다.
* * *
새틴은 끔찍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악몽이었다.
‘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어.’
새틴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이게 다 루나 때문이었다. 그 망할 년.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아 버린 그년만 아니었으면 지금 이런 꼴이 날 일도 없었다.
현재 버몬드가는 하루아침에 망하기 직전이었다. 아키스의 이름을 팔아 아버지가 사업 자금을 빌린 걸 들켰기 때문이다.
공작가 측은 새틴의 집안, 버몬드 남작가에 돈을 빌려준 모든 투자자들에게 친절하게 연락했다.
[버몬드 남작가는 공작가와 아무 상관없고, 공작가가 버몬드 남작가를 지원할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관련하여 소송을 준비 중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에 투자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투자금 상환을 요구했다.
결국, 아버지는 저택을 제외한 모든 걸 다 팔아야 했다. 그러고도 빚이 남았고, 파산해 버렸다. 루나의 아버지의 배가 침몰한 후 두 번째 파산이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앓아누웠다.
그리고 공작가에서는 정말로 소송을 걸었다. 소송 명목은 공작가에 대한 명예 훼손죄였다. 보통 재판은 몇 달까지도 걸리나, 공작은 황족이라 재판 과정이 상이했다. 곧 버몬드 가문이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새틴의 가족들은 먼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이게 다 루나 때문이야. 공작과 관계만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텐데, 걔가 방해물이야.’
새틴은 매일매일 루나를 증오했다.
‘어릴 때부터 맞고 자라서 그런가, 애가 어쩜 이렇게 사악하고 못됐는지. 역시, 그런 걸 받아 주면 안 됐어. 아버지가 쓸데없이 인정을 베풀어 가문이 망하다니…….’
그녀가 공작의 약혼녀였을 시절에는 언제든 달려와 알랑대던 영애들은 모두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새틴은 거울을 보았다. 엉망인 머리와 화장기 없는 얼굴이 그녀를 더 초라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새틴을 더 미치게 하는 건 루나가 없으니 불편해 죽겠다는 것이다. 루나는 부엌 하녀부터 레이디스 메이드의 역할까지 홀로 다 해냈다. 새틴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는 건 당연했다.
‘빌어먹을 계집애. 지금쯤 공작가에서 호의호식하고 있겠지?’
그리고 새틴이 생각도 못한 이의 방문을 받은 건 그날 오후였다. 그녀가 절대 말 섞을 일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영애.”
새틴은 당황을 감추고 앙큼하게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기별도 없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새틴의 맞은편에 앉은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가 미소 지었다. 속으로는 새틴에게 욕을 한 무더기 하면서.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할 말도 있고.”
“할 말요?”
“결혼식은 초대받았나 해서요. 별장에서 아주 멋진 결혼식을 한다죠.”
새틴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정말 가족도 초대 안 한 거예요? 공작 부인이 아주 못됐네요.”
“원래 그런 애에요.”
“부모님은 몰라도 새틴은 참석해야죠. 안 그래요? 내가 도와줄게요. 마지막으로 공작님의 얼굴은 뵈어야죠.”
새틴은 살짝 미소 지었다. 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내게 도움이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새틴은 못된 방면으로만 눈치가 좋았다.
“왜 도와주시는 거죠?”
“공작 부인보단 당신이 낫단 생각이 드니 그렇죠.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근본 없는 여자보단 당신이 상대하기 용이해요. 거기다 동병상련도 있고. 나라도 아키스에게 버림받으면 못 살 거예요.”
“……이해했어요.”
새틴의 눈동자가 광기로 일렁였다.
아키스를 되찾을 단 한 번의 기회다.
“공작님이 그래도 속정이 있는 분이라, 옛 약혼녀를 보면 그리 가혹하게 굴진 못하실 겁니다. 나야 솔직히 그분을 사모하는 입장이니 당신도 끔찍하지만, 그 더러운 요부보단 낫죠. 그러니 공작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 애원하고 그 여자를 밀어내요.”
달리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새틴을 부추겼다.
그녀는 새틴 같은 여자는 중요한 순간에 이성이 마비되는 타입임을 잘 알았다. 딱 그 정도 그릇이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부추기면 알아서 자폭할 것이고, 그건 달리아에게 결혼식의 유일한 구경거리이자 볼거리가 되리라.
* * *
“……너무 파격적인가?”
드레스를 완성한 모이라는 자신의 작품을 보았다. 도제들이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와…… 이 드레스, 끝내주네요.”
“그렇지? 완성되면 더 대단할 거야. 이쪽에는 다 보석을 박을 거거든.”
“그런데, 이걸 공작 부인이 입으신다고요? 정말로?”
“왜 안 돼? 버슬 드레스는 닭처럼 보인다고.”
“닭이 아니라 꿩처럼 요염해 보이는 게 버슬 드레스의 매력인데요.”
“……흠. 어쨌든, 일단 공작 부인 마음에 들길 빌어 보자.”
모이라는 제가 만든 드레스의 찬란한 위용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물릴 수도 없었다. 모이라는 이 드레스 한 벌에 이미 엄청난 재료비를 썼다.
“아니 선생님, 원가 생각도 하셔야죠. 이 드레스에 진짜 보석을 이만큼이나 박아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이러다 의상실 망해요. 이거야 이득을 보기는커녕…….”
도제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아 몰라. 이건 예술의 영역이야, 예술!”
“……예술이 밥 먹여 준답니까.”
모이라는 귀찮다는 듯 도제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이제 보석을 구해야 하는데…….’
딱히 신부 측에서 요청이 없는 이상, 드레스 숍에서 부가적인 보석을 같이 빌려주는 것이 웨딩드레스를 지을 때의 관례였다. 웨딩드레스에 어울리는 보석들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모이라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점이 그거였다. 보통 그 정도 혼처라면 호화로운 보석을 알아서 준비하는 게 보통일 텐데, 공작 부인은 별말 없이 보석을 빌려달라고 했다.
최고급 숍이면 나름대로 보유하고 있는 보석들이 있겠지만, 이제 막 겨우 뜬 신진 디자이너인 모이라는 보석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모이라는 제 돈으로 보석을 빌려 오기로 했다.
‘후회는 안 해. 뭐, 원 없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으니까. 아, 몰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모이라는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 * *
매일 밤 그와 정사를 나누고 낮에는 결혼식을 준비했다.
루나는 낮에도 꾸벅꾸벅 졸았다. 마이아가 다녀간 후,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녀는 아키스가 침대에 들기 전에 몸을 누였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옅은 잠에 들었다가 그녀는 인기척에 부스스 눈을 떴다.
“쉿.”
아키스가 그녀의 뺨을 큰 손으로 쓸었다.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채 침대에 들었다. 루나는 잠결에 작은 소리를 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늦었네요.”
“조금 바빴습니다.”
아키스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잠에 취한 나른한 모습을 보았다. 아키스는 제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정욕은 줄어들기는커녕 매일매일 불탔고, 루나를 향한 쾌락의 갈급은 더 심해졌다.
심지어 하룻밤이라도 거르면 섭섭할 정도였다. 아키스의 손은 어느새 부드럽게 그녀의 아랫배를 쓸고 있었다.
“으응…… 졸려요.”
루나가 하품을 하고 나른하게 말했다. 솔직히 루나도 그와 하는 걸 좋아했지만 오늘은 정말 손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 결혼식에 쓸 장식도 고르고, 울프의 산책도 시켜 줬고, 예법 수업도 받았거든요. 그러고는 결혼식 꽃 장식을 조금 더 예쁘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직접 고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하암…….”
아키스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의 눈썹 모양대로 손가락을 쓸었다. 그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그녀의 헤어 라인을 덧그렸다.
“아쉽군요.”
루나는 그 손길에 키득키득 웃었다.
잠결이라 그녀는 꿈과 현실의 중간에 있었다. 그 모습이 숨넘어가게 예뻤다. 살살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키스는 그녀의 잠옷 깃을 슬쩍 밀어 올렸다.
그때, 루나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꿈을 꿨어요.”
“꿈?”
“결혼식 날 춤을 추다가 당신 발을 밟아서 사람들이 웃는 꿈이요.”
아키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춤이 뭐가 대수라고.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그래도 제대로 출 수 있을지 걱정돼요. 신랑 신부의 댄스 타임…… 그때는 귀빈들이 다 나만 바라볼 텐데, 긴장될 것 같아요. 굳이 결혼식을 했나 싶기도 하고.”
아키스는 그녀를 다독였다.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아키스의 가문 때문이었다. 필요로 인해 급하게 한 결혼인 만큼 형식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잘할 겁니다.”
아키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난 리드를 잘하는 편이거든요. 그런 건 남자가 잘하면 되는 겁니다.”
루나는 그제야 살짝 눈을 뜨고 그를 제대로 보았다. 문득 새틴이 아키스와 춤춘 일을 자랑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날은 새틴이 무도회에서 운 좋게 아키스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춤을 춘 날이었다. 그날 저택으로 돌아온 새틴은 루나를 붙잡고 그가 얼마나 황홀하고 잘생겼는지에 대해 몇 시간이 늘어놓았다.
“그건 좀 안심이네요. 그렇지만 내가 몹시 엉망이면 안 되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내일 마이아가 속성으로 춤을 가르쳐 주기로 했어요. 사교댄스는 한 번도 배운 적 없어서……. 그리고 그거 알아요? 시녀장 비아 말이에요. 비아가 피아노를 칠 줄 안데요. 그래서 내일 춤 연습할 때 연주해 주기로 했어요.”
“……비아가?”
아키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로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공작가에 걸맞게 도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새 비아를 구워삶은 것 같았다. 아니, 비아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사, 알렉도 루나의 이야기를 할 땐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그럼 지금껏 한 번도 춤을 춰 본 적 없다는 말입니까? 파티에서도?”
“제대로 된 파티에 참석해 본 적 없거든요.”
루나는 점점 잠이 깨는 것 같아 뒤척이며 말했다. 아키스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래서 내일이 기대돼요.”
“디온이 말하기를, 예법 선생이 당신이 배우는 게 몹시 빠르다 극찬했다더군요.”
“정말요?”
루나는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안 그래도 마이아와의 수업은 정말 즐거웠다.
“마이아가 아주 잘 가르쳐요. 오늘은 세 시간이나 내리 수업을 했거든요. 그런데 세 시간이 지났다는 것도 끝날 때쯤이야 알았다니까요. 어찌나 재미있는지…… 역시 유명한 사람은 달라요.”
그녀가 즐거웠다니 다행이었다. 루나가 이렇게 좋아하니 디온을 시켜 그에게 사례라도 해야지 싶었다.
아키스는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습니까? 예법 선생이 어느 가문 출신의 부인이죠?”
그 말에 루나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휘어진 눈으로 아키스의 품속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인요? 마이아 선생님이요?”
“……그럼 미혼입니까?”
“네, 미혼이죠. 마이아 선생님은 저보다 훨씬 우아하긴 하지만, 그분은 남자예요.”
“……남자라고?”
아키스는 귀부인 전문 예법 선생이고, 이름이 마이아라고 하니 당연히 여자일 줄 알았다.
그럼 여태 자신이 집무실에서 일을 처리하는 동안 홀에서 매일 남자와 밀착해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키스는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내일 그와 댄스 연습을 한다는 말입니까?”
“네. 피로연 때 출 춤 연습이요.”
아키스의 속도 모르고 루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하암, 이제 자야겠어요. 전 이만 잘게요.”
잘 자요. 루나가 이어서 속삭였다. 그러나 아키스의 잠은 다 달아난 지 오래였다.
‘남자였다고……?’
* * *
“어머, 공작 부인. 아주 훌륭하세요. 이제 테이블 매너는 더 배울 것이 없군요.”
다음 날, 마이아 선생은 여느 때처럼 루나를 극찬했다.
그는 몹시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루나는 마이아의 몹시 부드러운, 완벽한 제국식의 말투가 가끔 낯부끄러웠다.
“네, 어렸을 때 배워서…….”
“어릴 적에 배우고도 아직도 포크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이 허다하답니다. 기억력이 좋은 것도 재능이죠. 그럼, 식사 예법은 이만 마치고 어제 연습한 댄스 스텝은 연습해 보셨나요?”
“네, 어제 혼자 스텝을 밟아 보았어요.”
“구두 신고 연습하셨죠?”
“네. 그랬어요.”
“좋아요. 연습도 늘 실전처럼, 하이힐이 불편하겠지만 꼭 연습할 때도 구두를 신어야 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결혼식이 코앞인데 귀빈들 앞에서 신랑 발을 밟아서 공작님을 망신 줄까 걱정되네요.”
“오늘 열심히 연습하면 되죠. 부인은 너무 겸손하세요. 걱정 마세요, 제가 보기에 공작 부인은 몹시 재능 있으시니까요.”
루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와 마이아는 작은 홀로 향했다.
“아직 비아가 안 왔나 봐요. 오늘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로 했는데…….”
“아, 그 곱고 아름다운 중년 부인 말씀이시군요. 그럼 그분이 올 때까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죠. 긴장도 좀 푸시고요.”
“네.”
* * *
“예법 선생이 남자라는 건 왜 말 안 했지?”
아키스는 디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디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마이아 선생이 대해 들어 보신 적 없으십니까?”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거리의 시장 통에서 일하는 소녀도 2주 만에 귀부인으로 만든다는 일류 예법 선생입니다. 정말 인기 있는 선생이죠. 내년 여름까지 잡혀 있는 스케줄을 겨우 빼서 공작 부인께 붙여 드렸습니다. 덧붙여…… 고위 귀족 가문에서 딸을 맡겨도 안심할 만한 사람으로 손꼽는다 합니다.”
“그런 게 어딨지?”
남자는 다 똑같은 늑대 아닌가?
이전의 아키스는 여자에게 큰 관심 없었기에 타인을 보고 그런 방향으로는 아예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그건 루나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그녀를 보면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여린 속살을 드러내 헤치고 더듬고 싶고…… 아무튼, 성욕이 무섭게 들끓어 올랐다.
혹여 다른 놈들도 그녀를 보고 흑심을 품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편이라 세상 남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물며 그녀의 고운 손을 잡고, 아름다운 몸을 끌어안은 채 춤을 춘다면…….
심기가 불편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키스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법 선생이 언제 온다고?”
“아, 이미 수업 중이십니다.”
“……예법 선생은 매일 오후 세 시에 온다고 하지 않았나?”
“마이아 선생은 바쁘니까 그의 일정을 많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한두 시간씩 일정 조정이 되기도 하지요. 아까 언뜻 보니 손님용 마차가 들어왔던데, 마이아 선생이 아닐까요?”
“…….”
“공작님, 어딜 가십니까? ……공작님?”
순간 아키스는 이성이 날아갔다. 정신 차려 보니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디온은 아키스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저렇게 걸음이 빠르셨나?’
아키스는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은 엄청난 속도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것도 무언가를 노려보는 표정으로.
* * *
마이아 선생은 댄스용 장갑을 마차에 두고 왔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루나는 스텝 순서를 되짚어 보았다.
“……이 순서가 맞나?”
마이아는 기본 스텝이 몸에 익으면 실수할 일이 없다 했다.
‘차라리 마이아가 나보다 몸이 사뿐한 것 같아…….’
그때, 누군가 뒤에서 루나를 끌어안았다.
크고 단단한 품이었다. 루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
당황도 잠시, 익숙한 체취가 몸을 휘감았다.
“아키스?”
루나는 스텝을 마저 밟아 반대로 빙글 돌아 그를 보았다. 어느새 루나의 가는 손목은 아키스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꽤 잘하는군요.”
“봤어요?”
루나는 뺨을 붉혔다. 혼자서 연습하는 모습이 바보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마이아는요?”
“오늘은 쉬라고 했습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였거든요. 몸이 아프다며 급하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갑자기요?”
“……네, 갑자기.”
아키스는 태연하게 힘주어 말했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픈 데엔 장사 없다고들 하죠.”
아키스는 역시 태연하게 대꾸했고,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오늘 댄스 수업은 쉬어야겠네요.”
그 말에 아키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있잖습니까.”
“공작님이 춤을 가르쳐 주신다고요?”
“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루나는 그가 아카데미 교수라는 걸 떠올렸다.
“……마법학 교수님이랑 사교댄스가 무슨 상관이죠?”
루나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키스는 잠시 다른 곳을 보았다가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열등생은 싫어하시잖아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루나는 저도 모르게 말하고 화들짝 놀랐다. 아키스가 일에 몹시 까다롭다는 건 달빛 서점에서 알게 된 것이었다.
“……그, 그건 공작님 성미는 유명하니까요.”
“미래의 아내에게까지 유명세가 퍼질 줄 알았다면 학생들을 좀 더 상냥하게 대할걸 그랬군요.”
아키스가 어이없다는 듯 비꼬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올리며 나긋하게 물었다.
“그러면, 엄하게 가르칠까요.”
“잘못하면 혼이 나나요?”
“나는 혼을 내기보다 벌을 주는 스타일이지만, 비슷하게 가죠.”
“싫어요.”
루나는 작게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아키스는 그녀를 끌어당겨 두 번째 스텝을 밟았다.
“그러면 부드럽게 하겠습니다. 먼저, 클로징 자세.”
클로징 자세는 남녀가 손을 맞잡는 댄스의 기본자세를 말했다. 아키스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다른 한 손은 얼굴께에 들어 자세를 취했다.
그다음은 가슴과 가슴 사이에 주먹 한 뼘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녀를 훅 끌어당겨 서로의 상체가 빈틈없이 딱 붙게 만들었다.
루나도 작은 키가 아니지만, 아키스가 워낙 장신이라 그녀는 아키스의 단단한 가슴이 뺨을 대게 되었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깜빡였다.
“……자세가 틀린 것 같은데요.”
“스텝만 맞으면 됩니다. 부부 사이엔 이렇게 추기도 하거든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가 스텝을 밟아 나가기가 무섭게 루나는 곧바로 그의 발을 밟았다. 너무 심장이 뛰어서 집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 미, 미안해요.”
아키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화내지 않았다.
“신발, 벗어 봐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홀린 듯 무도회용 하이힐을 벗었다. 이건 마이아에게 배운 것과 달랐다.
매끈한 실크 스타킹에 감싸인 그녀의 작은 발이 드러났다. 아키스는 그 발을 보고 문득 미소 지었다.
“올라와요.”
“……공작님의 구두 위에요?”
“이렇게 배우는 게 빠릅니다.”
아키스는 머뭇거리는 루나를 제 발등 위에 올린 채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가볍게 기본 스텝을 밟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상체를 숙였다. 얼떨결에 루나 또한 그를 따라 뒤로 몸을 숙였다.
그녀의 신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뒤로 쓰러졌다. 허리를 감싼 아키스의 팔이 워낙 단단해서 조금도 위험함을 느끼지 못했다.
루나의 다리가 공중에 떠서 아키스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그대로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신비로운 그의 보라색 눈은 빨려 들어갈 듯 사람을 현혹했다.
루나가 눈을 깜빡인 순간, 아키스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따뜻한 입술과 입술이 비벼지고 닿았다 떨어지며 루나의 몸이 점점 더 뒤로 기울었다.
결국, 완전히 아키스의 품에 안겨 바닥에 주저앉아 둘은 천천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쪽쪽, 하는 소리가 홀에 울렸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나가 그를 보며 앙큼하게 물었다.
“이것도 수업 내용이에요?”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저는 대낮부터 남자에게 키스를 구걸하는 여자가 아닌데요.”
“난 대낮부터 이러는 남잡니다. 그걸로 정리하죠.”
루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아키스의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 * *
아키스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며 생각했다.
오늘 그녀가 다른 사내의 품에서 댄스 연습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도 화가 났다.
아키스는 마침 문 앞에서 마주친 예절 선생을 곧바로 돌려보냈다. 솔직히 말해 그자를 멀쩡히 돌려보낸 것도 아키스에겐 꽤 예의 바른 행동이었다.
그와 반대로 그녀에게 직접 춤을 가르치기로 한 건 거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사교댄스를 구실로 이어진 키스도 마찬가지였다.
“음…….”
진득하고 따뜻한 키스가 끝나고 루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초록색 눈동자가 놀란 감정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키스로 살짝 달아올라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이러시는 걸 보니.”
루나가 나직이 속삭였다.
“좋은 선생님은 아니신 것 같군요.”
“난 가르칠 건 다 가르쳤습니다. 훌륭한 학생의 자세는 교육받은 내용을 잘 응용하는 법이죠.”
“……정 춤이 안 되면 결혼식 날 공작님의 발등 위에 올라가면 되겠어요.”
“이해력은 합격이네요.”
아키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완전히 올려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루나의 마음속이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 * *
“예법 선생의 안색이 나빠 보여서 돌아가라고 했다고요?”
“……그거야 공작님이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면 누군들 겁먹지 않을까요. 없던 병도 생겨서 돌아가겠다 하겠죠.”
비아와 디온은 홀이 내려다보이는 계단 위 모퉁이 부근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벽에 딱 붙어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 아키스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예절 선생을 쫓아내던 모습에 대해 숨죽여 수군대고 있었다.
비아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디온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거기다 결국 제 피아노 연주는 필요 없었군요.”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는 게 눈치 없는 행동이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디온은 싱숭생숭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마이아 선생은 절대로 위험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마이아를 이미 만난 적 있는 디온과 비아는 동시에 마이아를 떠올렸다. 언제나 하얀 장갑을 끼고 깔끔 떠는 손길과 기본 추임새가 ‘어머’인 그의 참한 자태를.
‘정말로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경계 대상이 틀렸다고 공작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디온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뭐, 신혼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결국, 비아가 민망한 듯 미소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 * *
그날 밤, 아키스는 평소보다 열정적으로 달려들었다.
“아, 공작님. 잠깐만…….”
아키스는 루나의 몸을 잡고 천천히 자신을 움직였다. 벌써 몇 번이나 한 건지 아래가 다 얼얼했다. 아키스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굴었다.
루나는 그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독 기운은 다 빠졌다고 들었는데. 분명히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 자신이 치료되면 이만큼 짐승처럼 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괜찮아요?”
불같은 밤이 지나갔다. 루나는 온몸에 끈끈한 비지땀이 흘러 힘이 빠진 채 아키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긴요, 그 이상이었지.”
아키스가 느긋하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배인 아직 남은 열정에 루나의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거 말고, 몸 말이에요. 전혀 나아지고 있지 않은데…….”
루나는 순진하게 속삭였다.
“계속 이렇게 심각하다니 별일이네요. 혹시 아직 그 독 기운이 빠지지 않은 걸까요?”
“그건…….”
“아, 아니면 부작용 같은 걸 수도 있겠네요.”
루나의 날씬한 배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던 아키스의 동작이 굳었다.
루나를 보면 늘 정신이 혼미했고 만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짐승이 되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요즘은 그렇게 좋아하던 일과 연구가 귀찮기도 했고, 외출할 시간도 아까웠다. 뿐만 아니라 바쁘게 일하다가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밤일은 또 어떤가.
한번 하면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좋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다 홀리는 기분이었다. 보통은 남녀 관계가 이렇게까지 황홀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키스가 루나 외의 사람의 생각을 할 때는 딱 한 경우뿐이었다.
‘루’를 찾지 못하는 것에 답답한 심경일 때. 그리고 신기루처럼 사라진 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그때뿐이었다.
‘……딱히 통증은 없지만 주치의를 부르긴 해야겠어. 정말로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르니.’
아키스와 루나는 이 방면으로 그다지 적극적으로 살아온 이들이 아니었기에 안타깝게도 둘 다 순진한 면이 있었다.
아키스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아픈 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치의를 불러 보죠.”
“그래요…….”
그가 그렇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루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땀 냄새가 섞였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체향은 여전히 좋았다.
“알렉이 그랬는데, 결혼 전 일주일간은 서로의 얼굴을 안 보는 게 예의래요. 알아요? 며칠 안 남았네요. 계속 아픈 것이 아니라면, 잠깐 각방을 쓰는 건 괜찮지요?”
아키스의 동작이 굳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그건 다른 집에 살다가 결혼하는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한집에 사는데 그렇게 체면이나 체통을 따질 필요는 없죠. 일주일은 너무 긴 것 같은데.”
“그래도 전통이잖아요.”
“그럼 2, 3일만 그렇게 합시다. 어차피 이미 혼인한 사이 아닙니까.”
아키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결혼식에는 새삼 설레는 것이 여자 마음이었다.
루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혹시 혼전 파티를 하고 싶을까 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미혼 귀족 사내들 중에서는 혼전 파티를 저택 밖에서 하는 사람도 많데요. 술집을 빌리거나, 남사스럽게 코르티잔의 집에서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키스는 입을 벌려 부정하려 했다.
그가 혼전 파티를 하고 싶을 리 없다. 결혼 전에는 그냥 여자와 대화하는 것도 즐기지 않지 않았는가.
그러나 루나는 방긋 웃으며 그가 미처 부정하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얼핏 들었는데, 황태자 전하가 혼전 파티를 제의하셨었다면서요?”
아키스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키스가 거절했다는 걸 디온이 전해 준 것이었지만, 굳이 디온에게 들었다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루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뭐, 어쩌다가 들었죠. 우린 한집에 살잖아요?”
“…….”
루나의 속마음을 모르는 아키스는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가정의 평안이 자신의 말에 걸려 있다는 그런 예감. 거의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일단 황태자가 제의한 혼전 파티는 근교로 사냥을 나가잔 말이었습니다. 혼전 파티 대신에요. 그리고 나는 혼전 파티니 뭐니 그런 문화를 몹시 싫어합니다. 쓸데없이 방탕하고 사치스런 문화죠.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결혼 전이면 몸을 정갈히 해야지 그게 무슨 짓들입니까.”
“그래도 결혼 전에 놀고 싶지 않나요?”
아키스에게는 나긋한 그녀의 말이 일종의 시험처럼 들렸다.
“정 뭔가 해야 한다면 저택 안에서 디온과 체스나 두며 보내죠.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말 마요. 알겠지요?”
아키스는 제 말에 루나의 눈이 부드럽게 휘는 걸 보며 암묵적으로 자신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에요. 나도 혼전 파티에는 관심 없거든요.”
루나에게 부를 친구가 없다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당연하지,라는 말이 아키스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나도 집 안에서 조용히 보낼래요.”
아키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루나는 내심 안심해서 입꼬리를 쓱 올렸다.
* * *
“또 늦잠을 주무십니까?”
“이런, 오늘은 새 가구가 들어오는 날인데.”
비아와 알렉은 공작 부부의 방 앞에서 수군거렸다. 집을 꾸미고 가구를 배치하는 건 안주인의 역할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드레스 가봉도 가셔야 할 텐데.”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루나도 더 바빠졌다.
문제는 공작이 밤마다 루나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거였다. 서류상으로는 혼인했다지만 결혼식을 치르기도 오기 전에 온 신혼이 어찌나 좋은지, 공작은 아예 부부 침실을 쓰며 매일 제 신부를 탐했다. 그러다 보니 이튿날 루나가 늦잠을 자 일정이 늦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다가 결혼식장에 신부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들어가시겠군요.”
“어제는 공작 부인께서 미열까지 나셨어요. 쇼핑하실 일도 아직 산더미인데.”
비아와 알렉은 혀를 찼다.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원래 금욕적인 사람일수록 제 짝을 만나면 변하는 법이니까.
“뭐, 전통에 따라 결혼식이 일주일 남았으니 공작님도 좀 자제하시겠지요. 일단 잡다한 일은 다 그때로 밀어 버립시다.”
비아와 알렉은 시선을 교환했다.
제국의 전통에 따라 결혼 며칠 전엔 신랑 신부는 얼굴을 보지 않고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니 일은 다 그때로 미루자. 알렉과 비아는 시선을 교환했다.
“뭐, 공작님께서 그 며칠을 존중해 주셔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설마요.”
알렉과 비아는 밀려오는 불안을 누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끝냈다.
* * *
결혼식이 코앞에 바짝 다가왔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키스와 루나는 각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부터 고용인들은 모두 아키스의 눈치를 보았다. 각방이 시작된 어제부터 아키스가 묘하게 기분 나빠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러지?’
그런데 그녀와 딱 이틀 각방을 썼을 뿐인데 아키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요즘 자신이 좀 이상하다 느끼긴 했다. 그런데 루나와 각방을 쓰느라 며칠 거리를 두자 그게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집사.”
아키스는 아침부터 집사를 불러 말했다.
“주치의를 불러라. 아침 식사 이후 바로 만나겠다.”
알렉이 흠칫 놀랐다. 곧 정부 고관부터 황족까지 초대한 중요한 결혼식 날이었다. 그의 몸에 탈이라도 났다면 큰일이었다.
“바로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글쎄, 한번 진단을 받아 봐야 할 것 같군. 혹 심각한 일일지도 모르니 서둘러 부르도록.”
아키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알렉은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치의가 급하게 저택에 들었다. 집사는 주치의에게 아키스의 기분이 좋지 않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
“조심해서 모시겠습니다.”
주치의가 노크하고 아키스의 방문을 열었다. 아키스는 셔츠를 푼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공작님.”
아키스는 작게 인상을 썼다. 그는 주치의와 집사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날 진료하는 데 있어서 거짓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공작님.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키스는 냉랭하게 내뱉었다.
“분명히 내 몸에서 최음 독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완치되었다 하지 않았나?”
“네, 물론입니다. 워낙 드문 독을 드셔 상태를 주시할 필요는 있으나 현재 독 기운은 깨끗이 빠져나간 상태십니다. 제가 수도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 말씀드린 이유도 그저 만에 하나를 위해서입니다.”
아키스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런데, 내 몸의 증상이 왜 점점 심해지지?”
“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약에 중독되었을 때. 그때는 루나를 만지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도 부족해서 이튿날도 그녀를 원하고, 또 그 다음 날엔 더 미칠 듯 그녀를 갈구했다. 그리고 한 번 하고 나면 너무 황홀해서 또다시 그녀의 피부를 만지고 싶어 감칠맛이 났다.
거기다 루나가 웃는 걸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고 심장이 들뜨며 가쁘게 뛰었다. 요즘 그는 계속 극도의 흥분 상태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를 이틀째 보지 못하니 화까지 났다.
그는 원래 규칙적이고 정적인 생활을 선호했다. 이건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증상이라 함은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절제 없는 욕구 말이다. 그리고 충동.”
주치의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 혹시 지나다니는 여인들을 보면 욕구 조절이 힘드십니까?”
아키스는 그 말에 성질이 폭발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범죄자나 변태가 아냐.”
“그러면, 공작 부인과 동침하실 때 욕구가 생기신다는 겁니까?”
“당연히. 그녀를 볼 때마다 만지고 싶고 귀찮게 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과해. 최음 독을 먹었을 때, 딱 그 기분이다.”
“음…… 그러면 공작 부인 옆에서 충동 조절이 안 되십니까?”
“조절은 된다. 욕구가 드는 게 문제지.”
“그럼, 공작 부인과 정상적인 의사소통…… 이를테면 산책이나 대화도 가능하신데 둘만 있을 때 그런 기분이 드신다는 거지요?”
“정확하군. 그런데 그게 좀, 잦고 심하다.”
주치의는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그러니까, 건장한 사내로서 대단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증세가 지속되는데, 이게 정상이라고?”
주치의는 입가를 씰룩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는 데 성공했다.
“결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동침 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셨는지요.”
“…….”
아키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내와의 성생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건 신사다운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키스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매우 좋으셨지요? 그러니 그, 부부 사이의 관계가 매우 좋으셔서 그걸 반복하고 싶으신 겁니다. 신혼에는 흔히 이런 일이 있기도 합니다. 공작님께서는 부인에게 매력을 느끼고 계신 겁니다. 것도 아주 많이.”
아키스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최음 독 기운과는 상관없다는 건가?”
“그 당시에는 몹시 아프셨잖습니까. 이제는 신체적 고통이 없으시지요. 그때의 좋은 기분을 기억하고 계셔서 부부 사이가 원활하게 정착된 겁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강한 성욕을 느끼는 걸 다른 말로 부부 금실이 좋다고 합니다.”
“금실이라고.”
아키스의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주치의는 이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랐다.
소년처럼 순진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천하의 드래곤 공작이라니. 대대로 공작가 집안의 주치의를 한 이례, 이런 극한 시련은 처음이었다.
“왕왕 있는 일입니다. 제게 맞는 여인을 만나기 전의 사내가 목석같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하는 일은요. 잘 맞는 사람을 만난 건 축복이지요.”
“……축복?”
“네. 축하드립니다. 신체 궁합이 천생연분이십니다.”
“…….”
그 말을 들은 아키스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가라.”
“네?”
“당장 나가 봐.”
“물러나겠습니다.”
주치의는 빠르게 방을 나왔다.
“뭐라 하십니까?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집사가 눈을 둥그렇게 뜨거 물고 물었다. 주치의는 입을 막았다.
“아, 아닙니다. 아주 건강하십니다. 아주요. 별일 아니었습니다.”
“…….”
그럼 왜 이렇게 어깨를 떠는 건지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집사는 멍하니 주치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