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3화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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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말도 없이 사라졌다 돌아온 공작을 집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이했다.

간혹 소리 없이 홀로 외출하는 일이 잦은 주인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수색대라도 보내야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주인님, 도대체 어디서 밤을 지내신 겁니까. 괜찮으십니까?”

아키스의 창백한 낯을 본 집사가 기겁하며 말했다. 아키스는 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주치의를 불러라. 그리고…… 신관도 부르도록.”

“신관이요?”

“드래곤의 신전의 그 빌어먹을 신관 말이다. 놈을 불러라.”

아키스는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결국 몸을 휘청했다. 하인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지만, 아키스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아키스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주변을 보좌관과 신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키스가 눈을 뜨자마자 신관이 기다렸다는 듯 종알거렸다.

“꽃이 피다니!”

드래곤의 신관은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아키스의 손목에 피어난 꽃문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공작님.”

디온이 걱정이 묻어나는 어조로 물었다.

아키스는 인상을 쓴 채 기억나는 것들을 말해 주었고, 신관은 듣는 내내 흥미 가득한 눈을 했다.

“그러니까, 최음 독을 드신 채 무단으로 외박하신 데다 어젯밤 일을 기억하기는커녕 모르는 이와 동침을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덧붙여 황태자 전하의 국보급 준마도 잃어버리시고요?”

신관은 여전히 건방진 놈이었다. 그는 아키스가 죽을 뻔한 이야기를 유희거리처럼 이야기했다.

아키스는 신관을 무시하고 보좌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황태자의 말을 빌렸나?”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키스의 질문에 보좌관, 디온이 미간을 찌푸린 채 조심스레 대답했다.

“네, 방금 황태자 전하의 시종이 와서 말을 돌려달라 했습니다만…….”

디온의 대답에 아키스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기억이 안 나.”

“주치의가 진찰하고 말하길, 독의 부작용으로 일부 기억을 잃으셨을 거라 했습니다. 아주 지독한 고대의 독을 드신 것 같습니다. 주치의가 혀를 내두르더군요.”

아키스가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이 이어서 종알거렸다.

“세상에, 역대 가장 금욕적이신 공작님께서 이런 일을 저지르시다니 소인은 정말 놀랐습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좀 닥쳐.”

아키스가 으르렁거렸다.

지금 제국에 남은 드래곤의 신관이 저놈 하나뿐이 아니었다면 쳐 죽였을 것이다.

공작가의 사내들에게는 비밀이 있다.

공작가의 사내들은 특정한 시기에 여인을 안으면 그 여인에게 각인을 할 수 있다.

드래곤의 각인.

그 각인의 증상은 간단했다. 드래곤이 공작과 밤을 함께한 여인을 마음에 들어 한 후, 사랑하기 시작하면 검은 꽃이 공작의 몸에 피어난다. 손목부터 시작된 꽃문양이 피부를 타고 올라가 왼쪽 심장에까지 퍼지면 비로소 그 여인이 드래곤의 신부로 각인된 것이다.

그것이 드래곤의 꽃이었다.

아키스는 뭐라 말하려다 두통에 침통한 소리를 냈다.

“일단 약부터 드십시오.”

디온은 급하게 약을 내밀었다.

아키스가 쓰러진 사이, 진료를 하고 간 주치의가 처방한 해독약이었다. 아키스는 약을 몇 모금 마시고 신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내 몸이 어떻게 된 거냐. 내 손목에 문양이 피어났으니 어떻게 되는 거지?”

“보시다시피 각인이 이루어지셨다면 꽃이 공작님의 왼쪽 손목에서 왼쪽 심장까지 이어져야 합니다요. 그런데 꽃이 팔뚝에만 피어나 있습니다. 이는 각인이 시작되기는 했는데, 완성되지는 않은 것이지요.”

신관의 설명에 디온이 침통한 신음을 내뱉었다.

디온은 유일하게 공작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최측근이었다. 공작이 독을 먹은 것만 해도 온 제국이 뒤집힐 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공작이 무사한 이상 각인이 일어난 것이 더욱더 큰일이었다.

만일 공작이 여인과 동침해 각인을 일으킨 것이라면 빨리 그 여인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그 여인이 공작가의 직계 혈통을 이을 유일한 사람이기에.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도대체 어떤 자가 공작님께 독을……. 그보다, 어떤 여인과 동침하신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디온의 물음에 아키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문제였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두통이 더욱 심해졌다.

‘어젯밤, 달빛 서점에서 본 사람…….’

아키스는 자주 드나들던 달빛 서점 2층, 땀에 젖은 시트 위에서 눈을 떴다.

서점 안은 텅 빈 채였다. 소년이 떨어뜨리고 간 펜던트를 제외하고. 그리고, 황궁에서 새틴을 만났다. 그러고는 라미라 영애도 잠시 보았던 것 같다. 그때까지는 분명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 그 소년을 보았다.

“……젠장.”

달빛 서점 2층에 소년이 있었다.

제대로 기억나는 순간은 없지만 크게 고통 받았던 기억은 있었다. 왜? 왜 고통이 있었지? 그게 뭐였지?

흑마법사.

그 단어가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흑마법사의 마력에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건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때, 그곳에는 루가 있었다. 그와 몸을 가깝게 밀착한 채.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일을 저지른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그 소년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니……. 아키스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아키스가 여인을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사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키스는 여인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사내는 더욱더 싫어했다. 그것도 몹시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루는 이상한 소년이었다. 그는 여인도 남자도 아닌 중성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고 끔찍한 기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나마 상대가 루이기에 덜한 것이지, 다른 사내였다고 생각하면 아키스는 이미 지독한 살의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 각인을.”

아키스는 무겁게 숨을 뱉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신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와도, 할 수 있나?”

“……네?”

놀란 듯 신관이 되물었다.

“그리고…… 밤을 보내는 것 외에도 각인이 될 방법이 있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디온과 신관은 아키스의 말에 입만 쩍 벌렸다. 아키스는 몰려오는 두통에 다시금 눈을 꽉 감아 버렸다.

* * *

아키스의 설명을 들은 신관이 배를 잡고 웃었다.

“푸, 푸훕! 세상에 공작님께서 그런 일을 저지르시다니, 미소년은 주지육림을 즐기는 자들의 마지막 코스라는데 시작부터 미소년에게 손을 대신 겁니까? 조금만 더 가시면 세상의 모든 쾌락을 섭렵하시겠는데요. 푸하핫!”

“……닥치라고 했다.”

아키스는 이를 갈며 말했다.

“하하하,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 보는…… 악!”

디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민했고, 신관은 결국 아키스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각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중간에 멈췄을 수도…….

“…….”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큰 타격을 받아서 아키스는 인상을 썼다.

아키스에게 얻어맞은 갈비뼈를 감싸 쥐고 신관이 우는 소리를 냈다.

“에구구…… 난폭하십니다. 어쨌든, 저도 이건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그 소년 외에는 만난 이가 없으십니까? 조금이라도 기억나지 않으시는지…….”

“황궁을 나선 후로는 그 소년밖에 기억나지 않아.”

“그래도, 어쨌든 다행입니다.”

“다행?”

아키스가 으르렁거렸다. 이 상황의 어디가 다행이란 말인가.

신관이 말을 이었다.

“몇대 전의 일입니다만, 이런 비슷한 증상이 일어난 적 있지요. 혹시 르세우스 드 로텐베른 공작님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잘 모르겠군, 말해 봐.”

“그분은 섹스 중독이셨습니다. 대단히 문란한 분이었죠. 각인 기간을 참지 못하고 그 시기에 여인을 안으셨죠. 아시다시피, 각인도 상대가 드래곤님의 마음에 들어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 각인 기간에 동침했지만, 각인이 완전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각인……?”

“네, 딱 지금 공작님 같은 상태였지요. 팔뚝까지만 꽃문양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각인은 드래곤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신관의 이야기에 아키스는 물론, 디온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쉽게 말해, 드래곤님께서 간을 보고 계신 상태라는 겁니다. 르세우스 님의 각인 상대는 특수한 마력을 가진 독특한 여자였다고 하거든요. 하하하, 드래곤님께도 취향이 있는 거죠.”

신관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당시 고명한 드래곤의 신관이 말하기를, 각인이 반만 일어났으니 그 여인과 다시는 정을 통하지 않으면 될 것이라 했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 죽이라고 했답니다. 꽃이 핀 이상, 그 여인을 통해서만 아이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보랏빛 눈의 자식을 낳을 때까지 자손을 보는 건 모든 공작의 의무 아닙니까.”

“……각인은 되지 않되, 그 여인을 통해서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태라고?”

“네, 그러니 반만 각인된 상태지요. 그래서 르세우스 님께서 어떻게 하셨냐면…….”

신관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인들을 불러 한껏 즐기시고는 두 달 후, 반만 각인된 여인을 죽였다고 합니다.”

“끔찍한 이야기군.”

아키스는 그 이야기에 큰 역겨움을 느꼈다. 자신이 저지른 일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이야기 속의 선조는 훨씬 더 더러웠다.

“네, 하지만 축하드립니다. 이제부터는 각인 걱정 없이 안전한 성생활을 즐기실 수 있지요. 기록 속의 선조처럼요.”

아키스는 화를 낼 기운도 없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켰다. 각인 기간이 끝나고 저 신관이 쓸모가 없어지면 반드시 목을 베리라 결심했다.

“그러니까, 반만 각인된 상대를 죽이면 각인이 끊긴다고?”

“네. 각인이 완성되면 되돌릴 수 없지만, 지금 경우는 그렇습니다.”

정말 소년과 각인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키스는 보좌관을 불렀다.

“디온.”

“네, 공작님.”

“달빛 서점으로 사람을 보내 그 소년을 데려와라. 소년이 없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오도록.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알아보고 일을 처리해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디온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바로 부하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나가려는 디온에게 덧붙였다.

“내가 어제 황궁에서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황궁 시종들을 불러 자세히 물어라.”

소년의 일이 급선무긴 했지만, 제게 독을 먹인 자도 가려내야 했다. 아키스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까부터 몸에 열이 조금씩 올랐다.

아키스의 목이 바짝 탔다.

* * *

잠에서 깨어난 후, 루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상한 꿈을 꿨네.’

곧 루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입술은 바싹 말랐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여 이불을 들추고 확인해 보니 속옷에 옅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정작 성교를 할 때는 피가 나지 않았는데. 나중에 피가 나는 경우도 있다고 들은 적이 있긴 했다.

‘그렇게 많이 했는데 당연하지…….’

그날 밤, 아키스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루나를 탐했다. 나중에는 그녀도 이성을 잃은 채 그에게 매달렸다. 아픈 온몸은 그날의 대가처럼 느껴졌다.

* * *

오후가 되어서야 숙부 가족이 돌아왔다. 그들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황궁이 얼마나 별천지인지, 얼마나 대단한 귀족들만 드나드는지 연신 떠들어 댔다. 루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맞장구를 쳤다.

“왜 그래, 너 아프니?”

새틴이 루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몸살 기운이 있나 봐.”

루나의 대답에 숙모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감기니? 옮을 수도 있잖아. 우리 새틴이 지금 중요한 시기라서…….”

“독감은 아녜요. 저도 약학을 배워서 제 몸은 대강 알아요. 그냥 피곤한가 봐요.”

“그래? 심한 건 아니지?”

“네……. 물론, 더 심해지면 의사를 불러야겠지만…….”

루나는 일그러진 표정을 채 숨기지도 않는 숙모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몹시 아프면 싫어도 의사를 불러 주긴 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뒤에서 루나를 비싸게 팔아넘길 혼처를 알아보고 있을 터이니, 루나의 건강은 그들에게도 중요할 테니까.

그래서 루나는 일부러 의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그들의 얕은 생각 정도는 속속들이 알아챌 수 있었다.

요즘 가문의 살림은 팍팍했다. 새틴이 공작 부인이 되면 공작가의 재산을 얼마든 빼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숙부 부부는 여기저기 돈을 끌어서 새틴의 치장비며 파티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루나의 예상대로 숙모는 정색하며 말했다.

“가서 다 나을 때까지 쉬렴. 주방 일도 마찬가지야.”

“네, 숙모.”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오두막으로 향했다.

오두막에 딸린 간이 욕실에는 낡긴 했지만 깨끗한 욕조가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따듯한 물에 푹 담그면 좋을 것 같았다.

루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욕조에 따듯한 물을 가득 채운 후, 천천히 물속으로 몸을 누였다. 그러자 긴장된 몸이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은 똑같이 파랗고, 루나는 여전히 루나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녀는 몸을 끌어안았다.

‘자꾸 생각나서 어떻게 하지…….’

계속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름답다고, 너를 원한다고 속삭이던 공작의 낮은 목소리. 떠올리기만 하면 온몸에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남자는 겉만 봐선 모른다던데…….’

그렇게 금욕적이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공작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침대에서 정욕에 달떠 혼자 몸을 비틀던 모습은 물론이고, 그녀가 옷을 벗고 다가가자마자 잡아먹을 듯 애무하던 공작을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았다.

‘으으, 안 돼. 잊자, 잊어…….’

루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긴 금발 머리에 묻은 물방울들이 떨어졌다.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이, 이게 뭐야…….”

루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녀의 팔 위로 새까만 꽃문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팔꽃 같은 까만 꽃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팔뚝 중간까지 뻗어 있었다.

‘난 이런 거 새긴 적 없는데, 세상에…….’

루나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꿈속에서 본 검은 꽃과 똑같았다.

‘이걸 들키면 숙부님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보다, 왜 이런 게…….’

닦으면 사라질까 싶어 루나는 급하게 수건을 찾았고, 수건을 든 채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긴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던 검은 꽃문양이 씻은 듯 깨끗하게 없어졌다.

‘꽃문양이 없잖아? 나, 환상이라도 본 건가?’

제 뺨을 톡톡 쳐 보았지만 역시나 꿈은 아니었다.

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사라져서…… 다행이다. 공작이 당했던 독이 내게도 옮은 줄 알았잖아. 나, 괜찮은 거지……?’

공작이 마셨던 독에 관한 내용.

책에서 그 독에 대해 읽었을 때 전염된다는 말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거울 앞에서 제 몸을 살폈지만, 다시 검은 꽃문양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루나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침대 시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키스가…… 공작님이 내 몸에 흑마법사의 마법이 걸려 있다 했지. 혹시 그것 때문일까……?’

루나는 침대에서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흑마법 중에는 몸에 독특한 징후가 나타나는 것도 있다고 했다. 루나는 생각에 집중해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몸살이 단단히 든 듯했다.

‘만약 휘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지만…… 또 그를 만날 수 있긴 할까? 이제 루의 모습으로는 다닐 수가 없으니…….’

결국, 루나는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꼬박 이틀을 잤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서점을 그만두었으니 루나의 이중생활은 끝났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공작과의 격렬한 관계 때문에 든 몸살이었지만, 펜던트의 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중생활을 하며 쌓였던 피로까지 한꺼번에 그녀를 덮쳤다. 그 때문에 루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자고 앓았다.

앓는 와중에도 루나는 종종 자신의 손등을 확인했다. 또 그 이상한 문양이 생겨나지 않을까 걱정된 탓이었다.

* * *

아키스가 병상에 누워 있는 사이, 디온과 기사단의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년을 찾았다.

책방 주인인 필립이란 자를 위협하며 캐 보았지만, 필립은 굽실대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저도 정말 모릅니다. 실력이 엄청난 아이였는데, 고용 조건이 사는 곳이나 연고지를 묻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아니, 신분증 검사도 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했단 말입니까?’

‘아이고, 높으신 분들께서 이리 융통성 없으십니까. 신분이 불확실한 아이니까 그런 대단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게처럼 작은 곳에서 일해 준 것이지요. 공작 나리께 가서 한번 여쭤보십시오. 루가 정말 다시없을 천재라는 걸 그분께서 잘 아실 겁니다.’

‘……만일, 소년을 숨겨 주고 있다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달빛 서점을 나온 디온은 소년과 평소 조금이라도 접촉한 주변 상점 주인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가 탐문했지만, 아무도 소년에 대한 것을 몰랐다.

‘루’라는 예쁘장한 소년이 항상 성실하고 얌전했다는 것, 집이 몹시도 가난하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돈에 집착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서점 거리 사람들에게 은근히 동정과 귀여움을 받는 존재였다는 것.

하루 종일 서점 거리를 털어 디온이 찾은 성과는 그게 다였다. 그는 답답함만 안고 공작가로 돌아와 아키스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하필이면 나와 만났던 그날이 그 아이의 마지막 근무일이었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건가.”

아키스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루가 여인이었다면 애초에 무언가를 노리고 계략을 꾸미고 있나 하는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 그게 아닐 테니 사건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사람을 풀어 계속 찾아.”

아키스는 나직이 명령했다.

그는 만에 하나의 가정으로라도 루의 성별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고대어를 몇 글자 정도 외우는 여인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루만큼 능숙하게 고대어를 할 수 있는 재능은 여인에게 발휘되지 않았다. 고대에 카리노 대왕이 펼친 마법 때문이었다.

“후…….”

설상가상으로 아키스의 상태는 쉬이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독 기운이 회복돼 가는 와중에도 계속 침대 신세를 져야 했다.

가문의 주치의는 아키스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큰일 나실 뻔했습니다. 쉬이 해독되지 않는 고대의 독을 드신 데다, 그 와중에 흑마법사의 마력에 당하셨다고요. 며칠은 꼬박 앓으셔야 할 겁니다.’

주치의는 아키스가 드문드문 기억하는 세세한 것까지 점검했다.

‘심한 독에 당하신 데다 상극인 흑마법이 몸에 닿으셨죠. 그것의 여파가 심했을 겁니다. 조금만 잘못되었더라면 백치가 되셨을 겁니다. 기억 상실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죠. 오히려 하루치의 기억만 잃으신 것이 행운입니다.’

몸이 아파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것 또한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년을 찾으러 직접 나가고 싶었다.

그 묘한 분위기를 가진 소년을 잡아다 눈앞에 앉혀 두고 소매를 걷어 자신처럼 팔목에 문신이 떠올랐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 모든 진실이 명쾌해질 테니까.

* * *

“결과가 나왔습니다. 푸른색입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고, 주치의가 다시 공작가를 찾았다. 그가 다짜고짜 한 말에 디온과 아키스는 동시에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공작가의 사내들은 대대로 마법사였기에, 주치의는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사와 의사 역할을 동시에 했다.

주치의는 어제 아키스의 피를 채취해 특수한 마법 용액에 넣고 관찰했다. 마력이 누군가와 통해 있는 상태라면 푸른색, 정상적인 상태라면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푸른색. 마력이 어딘가에 묶여 있다는 뜻이었고, 아키스의 각인이 반만이라도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각인 상대방에게서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태라는 것. 또한 각인이 지금보다 더욱 강해지면 언제 상대방을 사랑하고 열망하게 될지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아키스가 제정신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건 행운이지만…….’

아키스는 차오르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생각했다.

이 와중에도 소년의 재능이 탐났다. 소년은 진짜 전무후무한 천재였다. 그런데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이 드래곤과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소년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소년을 해할 수 있을까.

기묘한 마음이 배 속을 간질였다. 남자와 동침했을지도 모른다는 건 짜증스럽고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날 밤 자신이 소년을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니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답답했다.

복잡했다. 이 와중에도 소년에 대한 총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특히나 복잡했다.

“……그리고, 찾아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아키스는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흑마법사.”

제국 내에서 그를 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독을 제조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몇 명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멜베른에 살고 있었다.

아키스가 떠올린 용의자, 휘멘은 예전부터 지내던 수도 중심에 위치한 작은 집과, 수도 근처 황야에 위치한 본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양쪽 모두 기사들을 보내긴 했지만 아마도 별 성과 없이 돌아올 확률이 컸다. 아키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이 제국의 유일한 흑마법사인 휘멘을 일개 기사들이 잡을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아키스는 그를 크게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다. 휘멘은 아키스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일 놈은 아니었고, 멍청해서라도 그럴 야심은 없는 놈이었으니까.

다만, 이 일에 휘멘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했다.

‘……달리아.’

그리고 황궁 시종의 말로는 그가 독에 당한 날, 달리아와 단둘이 차를 마셨다고 했다. 증거도, 기억도 없지만 수상한 냄새가 났다.

아무튼 손봐 줘야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회복은 더뎠다. 아키스는 짜증스럽게 톡톡, 침대 옆 탁자를 두드렸다.

밤이면 그의 몸은 열에 달떴고, 앓으며 새벽을 보냈다. 주치의는 독 기운이 아직 채 빠지지 않은 탓이라 했다. 아키스의 짜증은 늘어만 갔다.

“주치의의 검진 결과를 드래곤의 신전으로 보내. 그리고 신관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찾으면 바로 내게 보고하라 일러라.”

아키스는 피곤함을 느끼며 디온을 불러 지시했다.

* * *

아키스를 진찰하고 나온 주치의는 자신을 배웅하는 디온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주치의가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왜 코르티잔을 부르는 걸 거부하시는 겁니까?”

디온 또한 아키스의 침실에 말이 들릴까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 상태가 나쁘십니까?”

“회복 중이시긴 합니다. 조금씩이나마 독기는 빠져나가고 있으니까요. 다행히 워낙 튼튼하신 체질이라 해독제가 잘 드시는 편입니다. 그런데, 밤마다 남은 독 기운 때문에 몸에 열이 차오르시니……. 이건 직접 여인을 취해 해결하시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면역력과 독 기운이 충돌할 때마다 두통이나 요통이 있으실 텐데.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실 겁니다.”

주치의의 말을 들은 디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의 신관, 그 무례한 자는 망측한 말을 했었다.

‘지금이라면 피임 걱정도 없겠다, 각인 걱정도 없겠다. 한번 일을 치신 김에 여인들을 꼬드겨서 신나게 즐겨 보시지요. 뭐, 역대 공작들은 다 인생을 즐기며 살았는데 뭐가 문젭니까? 금욕적인 공작은 거의 없었습니다요?’

아키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인들을 부르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디온은 말을 골랐다.

“공작님께서는 워낙…… 결백한 면이 있으시니까요. 책임감이 강하셔서 독에 중독되신 날 밤의 일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책임지지 못할 여인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시니까요.”

“흠……. 그러면 약혼녀 분을 저택으로 모시면 어떻습니까? 약혼자 사이라면 거리끼지도 않으실 테고, 적어도 1년 안에는 결혼하실 터이니 법도를 조금 어길지언정 크게 나쁜 짓을 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허 참, 정말 고집 센 분이십니다.”

“워낙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셨으니까요. 어린 시절 공작님께서 자란 곳은…….”

주치의가 디온을 바라보았다. 디온은 쓸데없는 말을 할 뻔한 걸 깨닫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키스는 고귀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엔 가난한 빈민가에서 거지와 창부들을 벗 삼아 자랐다. 아마도 그가 코르티잔이나 첩을 두는 것을 질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 못 볼꼴을 다 보았을 테니, 그 방면으로 학을 떼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공작님께서는 약혼녀 분도 부르지 않으실 겁니다.”

디온은 때때로 아키스보다 그에 대해 더 잘 알았다. 아키스가 새틴과 혼인한 사정도 알았다.

공작 계승 조건이 혼인인 것도, 보통 공작 후계자들은 조혼한다는 것도. 그리고 역대 공작들과 달리 조혼하지 않은 아키스는 섣부른 각인을 피하고자 결혼을 미뤄 버렸다.

아무 여자와 혼인해도 상관없다며 선대와의 약속을 빌미로 결혼을 주장하는 새틴을 쉽사리 받아들인 아키스였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건 복잡하고 섬세한 것이었다. 디온이 보기에 아키스는 새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디온은 두 사람이 파혼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곤 했다.

열등감이 많아 매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다 권력욕이 강한 새틴과, 세상일에 무심한 아키스는 최악의 궁합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상황이 불투명해진 와중에 공작이 약혼녀를 상대로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할 리 없었다.

“……정 버티기 힘들어하시면 제가 다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아무튼, 공작님 앞에서 코르티잔 같은 이야기를 잘못 꺼내면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진통제도 드리고 갈 테니 심한 고통에 시달리시면 드리도록 하세요.”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을 나서는 주치의를 배웅하고 그가 한숨을 쉬었다.

공작가의 불빛이 꺼졌다.

길고 어두운 밤이 다가왔다.

* * *

루나는 3일 만에 침대 밖으로 나왔다.

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술이 좀 까칠했고, 얼굴 살이 내렸다. 그녀는 긴 머리를 빗어 하나로 묶었다.

루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 일하고 새틴의 시녀 노릇을 했다. 평소같이 순종적으로 집안일에 열중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다른 데에 가 있었다.

‘아아, 겨울까지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게이트는 타는 데만 몇 시간을 기다리며 수속을 밟아야 한다 들었다.

숙부 가족들의 장기 여행. 게이트를 타고 도망가기에 그만큼 좋은 찬스는 없었다. 이제 돈도 마련되었고, 남장 일도 끝났다. 그러니 어서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서두르며 움직이다 그르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너무 조급해해서는 안 됐다. 게이트에서 잡혀 와 집으로 끌려오면 루나는 영영 감금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수도를 떠나고 싶은 또 다른 이유.

계속 수도에 있다가는 먼발치에서나마 아키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질 것 같았다. 비록 사내 모습으로 만났으나, 루나도 사람이기에 마음을 뒤흔든 상대와 동침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루나에게 위안을 주는 건 딱 하나였다. 그간 밤마다 몰래 이중생활을 하며 고생해서 번 돈.

‘믿는 구석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돈만큼 위안이 되는 건 없지.’

루나는 밤마다 남몰래 오두막의 마룻바닥을 열고 그 아래에서 금화가 든 궤짝을 열어 확인했다.

무려 금화를 만 개도 넘게 모았다. 심지어 몇몇 마법사들이 팁으로 준 보석들은 환산하지도 않은 채였다. 공작의 일을 맡은 건 고작 몇 개월뿐이었지만, 이 수북한 금화들 중에서 공작이 준 돈의 비중이 꽤 컸다.

‘내년에는 제일 먼저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지.’

제국에는 단 한 곳의 은행이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 1년 후부터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만일 그 전에 여인이 은행 계좌를 만들고자 한다면 남편이나 소속된 가문 가주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 큰 돈을 계속 마룻바닥 밑에 두는 것도 불안했기에, 은행 계좌를 만드는 일은 그녀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남부 도시는 정말 예쁘다고 들었어.’

추운 곳은 질색이었다. 일기장에 적힌 불행한 미래처럼 춥고 습한 시골 지역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찍어 둔 도시는 남부의 한 따스한 도시였다.

‘……남부에는 멜베른만큼 부유한 도시가 많댔어.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런 곳이 치안도 좋고 일을 시작하기에도 좋겠지.’

돈을 쓸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나왔다.

새틴이 가진 것처럼 예쁜 드레스도 두어 벌 장만하고, 늘 하나로 꽉 묶고 다녔던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을 것이다. 그다음에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녀야지. 물론, 안전이 제일이니 신중하게.

책도 많이 읽고 싶었다. 루나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대중 소설이라 불리는 연애담이나 모험담을 좋아했다. 이제 시간도 지금보다 많이 생길 테니 책을 볼 시간도 많아지리라.

루나는 펼쳐 두었던 지도 위 따뜻한 남부 지방을 손으로 콕 찍었다.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 * *

새틴은 무슨 일이 있는지 요 며칠 계속 우울한 티를 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마도 공작에게 계속 편지며 연락을 하는데 한 번도 답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 오전에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

여느 때처럼 루나는 몸치장을 돕기 위해 새틴의 옷을 가지고 그녀의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주 살짝 열린 문틈으로 숙모와 새틴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문이 진짜면 어떻게 하죠…….”

“……그럴 분이 아니야. 일단 결혼만 하면 네게 맘을 줄 거라니까?”

“하지만, 세상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잖아요. 만약에 그가 아예 여자를…….”

그 무렵, 그들은 대화를 멈췄다. 새틴이 루나의 기척을 눈치챈 탓이다.

새틴은 창백해진 얼굴을 갈무리하며 루나를 불렀다.

“뭐야, 혹시 무슨 말 들었어?”

“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어.

루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실은 공작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그녀는 애써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작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도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요즘 들어 더더욱 새틴에게 무관심한 그였다. 그 때문에 새틴이 심적으로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새틴은 모른 척 표정을 바꿨고, 숙모는 루나에게 저녁 식사 준비는 했느냐 괜히 쪼고서야 방을 나갔다.

“마침 잘 왔어, 루나. 부탁할 게 있었거든. 황궁 무도회에서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 편지를 썼어. 하인을 통해 보내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까 네가 좀 대신 전해 줄래?”

새틴은 어제부터 계속 루나에게 귀찮은 심부름들을 시켰다. 그쯤, 루나도 새틴을 대하는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부드럽게 물었다.

“……하인을 보내면 체면이 안 서니?”

“그분들 다 대단한 가문의 분들인데 우리 집안 하인들을 보내는 건 좀 그렇잖아. 우리 집엔 교육을 받은 하인이나 시녀가 없잖니. 그러니까 네가 내 시녀인 척 행세를 좀 해 줘야겠어. 네가 예쁘게 입고 가서 편지를 전하면 나도 체면이 좀 설 거야. 그런 일은 익숙하잖아?”

새틴이 조곤조곤 상냥하게 말했고, 루나는 조금 미심쩍음을 느꼈다. 그러나 딱히 트집을 잡을 만한 게 없는 부탁이었다.

요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는 용모와 혈통이 좋은 시종이나 시녀를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용모가 빼어난 고용인을 단정히 꾸며 안부 인사를 묻는 편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전달하면 받는 쪽도 흡족해하고 모양새가 좋다고 했다. 제국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어.”

루나로서는 딱히 거부해서 반목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 집에서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것보단 외출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오늘 다녀오면 어때? 내일 아버지가 지방에서 돌아오시면 마차를 쓰셔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차를 타고 가게 해 준다면 더욱이 힘든 일은 없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좀 꾸미고 가렴. 필요하면 내 화장품을 써도 좋아.”

심지어 새틴은 제가 안 입게 된 드레스 중 하나를 고르라고까지 했다. 이만큼이나 신경을 쓰는 걸 보면 새틴이 이번 황궁 무도회에서 어지간히 귀빈들과 안면을 튼 듯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선뜻 대답하고 나가는 루나의 뒷모습을 새틴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 * *

새틴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도느라 온종일 걸렸지만 심부름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떤 귀부인들은 루나에게 친절하게 차를 권하기도 했다.

“어머, 예쁜 아가씨네. 버몬드 가문에서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부인.”

“이렇게 직접 와 주다니, 성의가 있네요. 편지에 꼭 답장하겠다고 전해 줘요.”

반면 주인이 나와 보지도 않는 곳도 있었고, 어떤 집은 여주인들이 부재한 탓에 주인이나 그들의 아들이 직접 나와 편지를 받기도 했다.

새틴이 워낙 말라서 그녀의 드레스는 루나의 몸에 약간 불편하게 끼었다. 그에 루나의 봉긋한 가슴선과 허리선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들은 루나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잘 다녀왔니?”

웬일인지 새틴이 거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나는 또다시 미심쩍음을 느끼며 대답했다.

“편지는 다 전하고 왔어.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네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저녁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난 내 오두막에서 먹을게. 혹시 주방 하녀들이 저녁 준비를 안 한 거야?”

“아니, 네가 없어도 주방은 잘 돌아가니까 걱정 마.”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제법 지쳤기에 새틴을 상대할 기운이 없었다. 루나는 새틴을 지나쳐 갔다.

“드레스는 내일 돌려줄게. 그럼…….”

“그래, 들어가 봐.”

새틴은 짐짓 상냥하게 웃으며 턱짓했다. 루나는 은은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루나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느낌이 안 좋은데…….’

오두막으로 향하는 내내, 이유 모를 불안함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왜 문이 열려 있지?’2

루나는 외출할 때 오두막의 문을 늘 잠가 뒀다. 그런데 오늘은 오두막의 문이 열려 있었다.

루나는 곧장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마룻바닥을 열었다.

“……!!”

그간 루나가 모은 돈을 담아 둔 궤짝을 숨긴 비밀 공간. 그곳이 텅 비어 있었다.

루나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 * *

요 며칠 새틴의 기분은 천국과 지옥을 수시로 오갔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한 날만 해도 새틴은 천국에 있었다. 예전의 그녀라면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귀족 중의 귀족만 모이는 호화로운 연회.

사람들은 공작의 이름값 때문에 그의 약혼녀인 새틴에게 정중하게 대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관심을 보였다.

“과연, 공작님의 약혼녀 분답게 현숙하시군요.”

“여인은 출신이 전부가 아니지요. 상냥한 여인을 배필로 고른 공작께서는 참으로 안목이 있으십니다.”

새틴의 꿈대로 사람들은 그녀에게 온갖 찬사를 보냈다. 정말이지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파티가 무르익어 갈수록 새틴에게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의 시선에 약간의 의구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작의 성격이 워낙 무심하고 차가운 것이야 모두가 알았지만, 너무도 새틴에게 관심 없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공작은 오로지 황족들의 사이에 서서 그들과만 대화했다. 다가오면 상대해 주긴 했지만, 결코 새틴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허수아비 약혼녀였군. 그러면 그렇지, 공작이 신분이 떨어지는 여자와 약혼했다 해서, 뭐 대단한 것이 있나 했더니만…….’

‘아까부터 공작은 황제 폐하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해 참석했다는 걸 숨기지도 않는군. 보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따분한 표정이야.’

‘진짜 약혼녀 맞아? 이럴 거면 내 딸을 좀 소개해 볼까……?’

그리고 새틴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됐다.

절박해진 새틴은 그날, 선을 넘어 공작에게 다가가 응석을 부렸다. 오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다행히 공작은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해 주었고, 형식적이나마 같이 와인도 한잔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심의 빛이 사그라든 건 그때쯤이었다.

새틴은 안심하는 한편 무서웠다. 요즘 들어 공작이 더욱 차가웠다. 마치 다른 데 마음이 팔린 사람 같았다.

새틴은 무도회에서 돌아오자마자 공작의 마음을 살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공작이 그러지 말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틴은 기어코 편지를 썼다. 그녀는 집요하고 고집이 세서 순종적인 척하면서도 결국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마고야 하는 성정이었다.

그러면서 같은 여자들이 드세게 행동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온갖 욕은 다 했다. 주로 그런 식으로 귀족 영식들에게 다른 영애들의 흉을 봐서 평판을 떨어뜨리는 게 새틴의 가장 큰 특기였다.

그리고 새틴의 두 번째 특기는 수면 위에 눈을 내민 악어처럼 남몰래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약점을 드러낼 때까지.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루나가 보이지 않았다. 새틴은 하녀장에게 황궁 무도회에 가기 전에 지시했던 일을 떠올렸다.

새틴이 하녀장을 불렀다.

“이 편지를 공작가에 보내 줘. 그리고,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어?”

하녀장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시킨 대로 축제 날 밤, 루나 아가씨의 오두막을 숨어서 관찰했어요. 다른 이들이 다 축제를 보러 외출한 그때요.”

“잘했어. 루나는 좀 영악하잖아. 걔는 고용인들이 다 외출을 하고서야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걔가 밤에 몰래 놀러 나갔니?”

“아뇨, 루나 아가씨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럼?”

하녀장의 보고에 새틴은 실망했다.

최근 루나의 행실이 워낙 수상해서 남자라도 생긴 건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뭔가 있다면 필시 떠들썩한 축제 날 저택이 빈틈을 타서 몰래 외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걸 보았어요. 세상에!”

하녀장이 호들갑을 떨며 새틴의 귀에 속삭였다.

“루나 아가씨의 오두막에 드나드는 남자가 있었지 뭐예요!”

“……남자……?”

“네, 애인이 분명해요. 소년처럼 체구가 가느다란 사내였는데, 흑발의 청년이었어요. 남작님 부부와 아가씨께서 무도회에 간 사이에 일을 치른 것인지 쏜살같이 저택 밖으로 튀어 나가더라니까요!”

“……그래서? 루나는 방 안에서 어쩌고 있었는데? 그 애, 옷은 제대로 입고 있더니?”

“그것까지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못했어요. 방에 불은 켜져 있었지만 커튼이 다 내려가 있었거든요. 의심을 살까 봐 저도 자세히는 못 봤어요. 뭐, 하지만 뻔한 것 아니겠어요? 방 안에 남자가 드나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새틴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대담하게 남자를 끌어들이고 있었다니, 루나가 내 생각보다 멍청한 애였네. 그런 애를 지금껏 경계해 온 나도 정말 바본가 봐. 제 팔자를 스스로 망치는 걸 보면 제 부모를 꼭 닮았어.’

새틴은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새틴의 세계에서 또래의 여자는 모두 경쟁자이고 적이었다. 그런데 루나가 스스로 제 팔자를 망쳤다니.

새틴의 관념으론 순결하지 못한 여자는 여자도 아니었다. 그런 여자는 질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 남자는 어때 보였니?”

“글쎄요, 그냥 평범한 사내 같았어요. 옷도 좀 남루했고요……. 아, 여자처럼 가느다란 남자였어요.”

심지어 그런 가난한 남자를 애인으로 삼다니, 어쩜 이렇게 멍청한지.

“루나가 좀 순진한 면이 있잖아. 분명히 사랑에 빠진 걸 거야. 불쌍한 루나.”

손으로 애써 가린 새틴의 입가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새틴은 루나의 약점을 잡고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리고 이 약점을 이용해 루나를 어떻게 휘두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고민이었다.

‘루나는 쓸모가 많은 애야.’

한때는 정말 루나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나 했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 겁먹지도, 냉대에 상처 받지도 않는 것처럼 굴던 루나가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제 다시 모든 것이 제 위치를 찾을 것이다. 주제 파악시키고 다시 제 눈치를 보며 벌벌 기게 만들 것이다.

새틴은 표정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루나를 대했다. 루나도 평소처럼 행동했다.

사실 그럴 틈이 없기도 했다. 루나가 며칠 아팠기 때문이다. 그 애를 위해 쓸 돈은 없었기에, 가족들 누구도 루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무렵엔 새틴 또한 경황이 없었다. 수도 사교계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묘한 소문 때문이다.

‘……그이가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새틴은 맘속으로 아키스를 마음대로 그이, 당신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키스가 여인에게 초연한 남자라는 건 잘 알았다. 그가 다정하지 않았음에도 새틴이 참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어차피 아키스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키스가 처음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다.

사실 스캔들이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저 뜬소문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황태자의 준마 때문이었다. 축제 날에 아키스가 황태자가 아끼는 준마를 빌려 갔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준마는 시내 공용 마구간에서 말고삐를 끊고 도망쳤다가 광장 한복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둑맞은 것을 되찾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작의 부하들은 말을 찾자마자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물론, 사과의 뜻으로 귀한 보석들도 함께 보냈다.

반면, 황태자는 이 일을 웃어넘겼다고 한다.

‘공작이 이런 인간적인 실수를 하다니 웬일인가 싶네. 하하, 이렇게 틈이 보이니 사람 냄새가 나는군.’

그는 만찬 자리에서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공작은 숨만 쉬어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기에 당연했다.

‘그 철두철미한 공작이 황태자의 준마를 잃어버려?’

곧, 사람들은 묘한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디서 뭘 했기에 그랬을까? 그것도 축제의 밤에…….’

‘축제 날 밤에는 문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곧 소문에는 새로운 정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으며 추가되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 평민 미소년을 총애한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나요?’

그건 새틴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키스가 묘하게 자주 찾는 미소년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미소년은 번역가라 했다. 새틴도 아키스가 학문에 욕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가 번역가를 총애한다는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의 실력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소문에 빠르게 살이 붙었다.

아키스가 아파서 며칠째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하더라, 병명은 비밀이라더라, 그리고 공작의 부하들이 갑자기 거리를 들쑤시며 사라진 미소년을 찾아 헤맨다더라. 사교계의 사람들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다음 날, 교외의 별장에서 조찬회가 열렸다. 거기에는 새틴이 치를 떠는 아름다운 라미라 영애, 달리아도 참석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공작의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님이 그 미소년에 빠져 있다죠?’

‘축제 날, 저녁에 황태자 전하의 준마를 타고 사라지셨대요.’

‘그리고 세상에, 공작님이 총애하는 그 소년이 사라져서 충격으로 앓아누우셨다는데요?’

‘그럼 상사병이란 말예요? 공작님처럼 아름다운 분이…… 믿기지 않는군요.’

‘뭐, 듣자 하니 여자처럼 정말 예쁜 미소년이라고 하니까요. 고대의 마법사들은 미동을 많이 뒀다잖아요? 마법사들은 워낙 괴팍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끝없이 수군거렸다.

그리고 소문의 기폭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말에 창백하게 질린 라미라 영애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이를 악물고 물었다는 것이다.

‘공작님이 그렇게 아프시다고요?’

그토록 자존심 강한 달리아가 사람들 앞에서 충격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소문은 또다시 덩치를 불렸다.

‘공작을 그렇게 오래 쫓아다닌 라미라 영애라면 알아도 뭘 알겠지…….’

타이밍도 참 신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축제 전후에는 거의 매일 모임과 파티가 있었고, 고작 2, 3일 사이에 공작의 미소년 사이의 스캔들은 발 빠르게 퍼졌다. 덩달아 새틴도 끌려 나왔다.

‘그럼 그렇지…… 왜 그런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여인과 약혼했나 했어.’

‘운이 좋은 줄 알았더니, 가짜 약혼녀였네! 진짜는 따로 있었어. 호호호!’

새틴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녀를 찾아와 소문을 전했다. 새틴은 손발이 떨릴 만큼 불안하고 화가 났다.

‘이러다 정말 버려지는 게 아닐까?’

새틴은 공작과 혼인하기 위해 야망을 감추고 그에게 거짓을 말했다. 그에게 절대 집착하지 않고, 참견도 하지 않겠다는 말. 처음에는 새틴도 공작의 권력만 누릴 수 있다면 그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키스는 너무 아름다웠고, 또 특별한 사내였다. 그는 여인에게 선을 그으면서도 묘하게 가끔 친절했는데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친절이었다.

그게 여자를 미치게 했다. 새틴은 이성을 잃고 아키스에게 정성 들인 장문의 편지를 썼다.

호소의 편지였다.

한 번만 제게 진심을 보여 달라는 편지. 약혼자로서의 예의를 비추어 자신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해 달라는 내용의 호소였다. 저는 당신을 둘러싼 소문을 하나도 믿지 않고, 당신만을 믿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혼인 전까지 정말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병문안이라도 허락해 달라는 내용도 담았다.

‘공작님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거야. 사람이 죽을 정도로 아프다는데…… 병문안 정도는 가도 되겠지?’

편지를 보내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겉으로는 얌전한 듯 보이지만 새틴의 기본적인 성정은 이기적이었기에, 신경질이 나 예민함을 마구 토해 내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곤 했다.

‘……그래도 쟤보단 낫지.’

새틴은 루나를 보며 보일 듯 말듯 묘하게 웃었다.

‘멍청한 것. 애인을 만들다니…… 쟤는 끝났어.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몰라도 후회하게 될 거야, 루나.’

그날 이후, 새틴은 일부러 루나를 종일 심부름 보냈다. 약점을 잡으려면 증거를 잡아야 했다. 남자가 축제 날에 드나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필시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관계가 아닐 것이다.

분명히 흔적이 남았을 터였다. 남자의 옷가지라든가, 은밀한 성관계를 위한 도구들이라든가. 약점이 될 것이 있을까 해서 새틴은 하루 종일 루나의 방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잖아?’

원래 가진 물건이 많지 않은 루나라, 오래 입은 옷가지 몇 벌과 몇 안 되는 화장품을 제외하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 정말. 주고받은 편지라도 있을까 했는데…….’

혹시 몰라 루나가 애지중지하는 낡은 로맨스 소설까지 뒤져 보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새틴이 그 공간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유도 심문을 하거나 계속 괴롭혀서 실토하게 만든 후에 증거를 잡을 수밖에 없나?’

고개를 숙이고 침대 밑을 뒤지던 새틴이 신경질 적으로 침대를 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뜻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난 새틴은 루나의 책꽂이에서 꺼내 살펴보던 책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책 모서리가 마룻바닥의 틈을 가격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끼익―

‘어? 방금…… 뭐지? 마룻바닥이 움직인 거야?’

새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이내 새틴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새틴은 천천히 다가가 마룻바닥을 발로 꾸욱 밟았다.

삐걱이며 마룻바닥이 열렸다.

* * *

“왜 그러니, 루나. 뭐 급한 일이라도 있어?”

새틴은 차를 마시며 얄미울 정도로 우아하게 말했다.

루나는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마음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가 내 방에 들어갔다 나왔어.”

“그래? 뭐 없어진 거라도 있나 봐?”

새틴은 여유 있는 얼굴로 웃으면서 루나를 약 올렸다. 루나는 뛰는 심장을 다잡았다.

“……돌려줘.”

“뭘 말이야?”

“……네가 가져갔잖아. 네가 더 잘 알겠지.”

새틴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루나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그래, 이래야지. 내 말에 울고 웃고 당황하고 그래야지, 루나. 이제야 주제를 파악한 것 같네.’

그녀의 입가에 비로소 진실한 미소가 번졌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아, 하나는 알겠다. 네가 밤에 뭘 하는지.”

루나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하늘이 노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루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다 봤어, 루나.”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해.”

루나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 방에서 남자가 나가는 것 말이야. 그것도 매일 밤……. 넌 정말 양심이라는 게 없는 애구나? 우리 집안의 체통이 있지, 남자를 끌어들여?”

이어진 새틴의 말에 루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로 변장한 나를 보고 애인이라 착각한 모양이네. 차라리 이게 나아.’

신고당해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새틴이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루나, 난 널 옳은 길로 이끌어 주려는 거야.”

“무슨 헛소리야?”

“처음에는 네가 애인을 두었나 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 네 오두막에 밤마다 남자가 드나들고…… 그리고 네가 마룻바닥 아래에 돈을 숨겨 두고 있었지. 그게 무슨 뜻이겠니? 정말 나는 상상도 못했어. 네가 그런 비도덕적인 짓을 할 줄은.”

루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지금 나한테…….”

“네가 남자들에게 화대를 받을 줄이야. 마치 창부처럼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루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새틴은 루나가 길길이 날뛰거나 울 거라 생각했다.

새틴은 이미 루나가 남자에게 무언가 금전적인 도움이나 대가를 받은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창부지, 뭐. 새틴은 그렇게 정리했다.

‘너도 수치심이 있으면 내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울거나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지.’

새틴은 자신만만하게 루나가 굴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루나는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과해, 새틴.”

“왜? 진실을 말한 게 잘못이니? 너 그러면 안 돼. 잘못한 건 인정할 줄 알아야지. 내가 널 생각해서 바로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너에게 먼저 말해 주는 거야. 앞으로 네가 하기에 따라서 내가 비밀을 감춰 줄 수도…….”

“새틴.”

루나가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했다. 새틴이 한번도 들은 적 없는 어른스러운 어조였다.

“뭐니? 말해 봐.”

“시끄러워.”

“……뭐?”

새틴은 입을 벌렸다.

“입 다물어. 그리고 어서 돈 돌려줘.”

“……너 미쳤니? 네가 지금 내게 이럴 상황이야?”

“후회하게 될 거야.”

루나가 새틴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새틴은 누가 매도하고 있는 입장인지 순간 잊어버릴 뻔했다.

루나가 싸늘한 녹색 눈으로 새틴을 보았다.

“너는 세상을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 믿겠지만,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 네게 해를 끼치고 벌을 줄 수도 있지.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어서 후회하지 말고 돈 돌려줘. 어차피 일부는 너희 부모에게 주려고 했어. 반이라도 돌려줘.”

새틴은 루나의 기색에 저도 모르게 겁먹어서 외쳤다.

“난 공작 부인이 될 거란 말이야! 날 존중해!”

루나는 그 말을 듣고도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올릴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새틴에게는 조롱으로 느껴졌다.

“뭐야, 그 표정은?”

눈치 빠른 새틴의 예상대로 루나는 속으로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넌 공작과 결혼 못해, 새틴. 내가 네 미래를 아니까.’

일기장을 통해 미래를 본 루나였다. 그 안에 새틴과 공작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히 적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새틴은 루나가 팔려 가기 직전, 공작과의 약혼은 어찌된 것인지 한 부유한 상인 가문의 사내와 약혼한다. 그 사내는 부자라고 들었지만 대단히 뚱뚱해서 풍선처럼 생겼다 들었다. 그러니 새틴의 미래의 신랑은 공작은 아니었다. 일기장에는 미래의 루나가 쓴 추측도 적혀 있었다.

아마 자신을 반시체의 신부로 팔고 나온 돈으로 새틴의 지참금에 보탰을 것이라고. 그 뒤 루나는 숙부 가족과 연락이 끊긴다. 새틴이 공작과 어떻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새틴은 평범하고 부유한 혼인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공작 부인이 되겠다는 제 욕망은 채우지 못할 것이다.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새틴은 파혼당할 테니까.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야?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양심이라는 게 없니?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네 아버지의 빚 때문에 우리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어. 그런데 내가 왜 그 돈을 돌려줘야 해? 네가 몸 팔아서 번 돈이라고 해도 다 우리 거야. 여태 널 입히고 먹인 돈을 생각해 봐.”

루나를 굴복시키려 한 말인데, 루나는 화를 내거나 이성을 잃기는커녕 점점 더 이성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루나가 나직이 말했다.

“새틴, 난 말로 했어.”

“뭐?”

짜악―!

새틴의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그녀는 너무 놀라 제 뺨에 손을 댔다. 새틴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너 지금 나 때렸어?”

“다시 한번 말할게. 돈, 돌려줘.”

“내가 그럴 것 같아? 너 진짜 미쳤구나?!”

루나는 나직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새틴의 반대편 뺨을 때렸다. 새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충격으로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두피가 뽑히는 듯한 아픔이 휘몰아쳤다.

새틴은 목쉰 암탉처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 *

새틴은 소리도 내지 않고 서럽게 눈물만 뚝뚝 흘렀다. 새틴의 모친, 벨레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니. 사람 새끼는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루나, 그 계집애가 미쳤나 보구나. 감히 널 때려?”

루나는 무슨 독이 올랐는지 하인들이 달려와 떼어 낼 때까지 새틴의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

“모, 모르겠어요. 저는 루나가 요즘 너무…… 어머니 아버지에게 건방지게 굴고 매사에 건성인 것 같아서 잘 가르치려 한 건데, 루나는 제가 질투가 났나 봐요.”

“뭐? 질투?”

“제 신분 상승을 은근히 질투하는 눈치였어요.”

벨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 하는 소리만 냈다.

“아니, 제까짓 게 주제를 알아야지. 어떻게 그러니? 한참을 앓더니…… 정말 머리가 이상해진 것 아닐까?”

“너무 답답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저를 생각해서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도 저 애 때문에 고민이 많으실 텐데.”

새틴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 계집애. 뭘 믿고 덤볐는지 몰라도 이제 시집은 못 갈 것이다. 어떤 냄새나는 늙은 부자의 첩으로 가도 할 말 없는 몸이 된 셈이다. 결혼 전에 애인을 두는 사고를 쳤으니.

‘두고 봐. 꼭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야.’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아까의 루나를 생각하면 조금 오싹했다. 저를 때릴 줄은 몰랐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리 말하던 루나의 말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꼭 뭔가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 애한테서 빼앗은 돈은 일단 내가 가져야지.’

새틴은 그러면서도 어머니에게 루나에게 빼앗은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속이 음흉한 새틴은 좀 더 결정적인 순간에 루나의 약점들을 터뜨리고자 했다. 뭐, 앞으로도 목돈이 들어갈 일이 있으면 그냥 제 걸로 삼을 수도 있고.

“일단 제 방에 가둬 뒀으니 네 아버지가 오면 크게 혼내라 해야겠구나. 원…… 잘 가르쳐 놨더니 못 배운 애처럼 굴어. 하여간 종자가 문제야, 종자가.”

벨레가 구시렁댔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하녀장이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새틴 아가씨! 공작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전달해 준 시종이 그러는데, 공작님이 친필 편지를 쓰셨대요!”

새틴의 얼굴이 순식간에 폈다. 공작에게서 답신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직접 편지를 써 주셨다고?”

바닥으로 추락했던 새틴의 기분이 수직 상승했다. 이번엔 그녀의 진심이 통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사교계의 모든 사람들이 공작을 욕하는 마당에 자신만은 그를 믿겠다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분명 공작의 마음도 자신의 다정한 마음씨에 흔들렸을 것이다. 새틴의 마음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새틴은 편지 봉투를 살폈다.

“어머니, 진짜예요. 공작가의 인장이에요.”

“어머나, 병문안 오라는 말인가 보다. 어서 열어 봐.”

새틴은 조심조심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새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편지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왜, 무슨 내용이기에 그래?”

모친 벨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걱정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새틴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파혼…… 요구장이에요.”

“……뭐?”

“……파혼당했어요, 저.”

* * *

루나는 오두막에 갇혔다.

하인들은 그녀를 끌고 가 오두막에 가두고 창문과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것도 부족해 정원사를 시켜 창문 바깥쪽에서 못질까지 했다. 하인들은 루나에게 미안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났다.

숙부가 돌아오면 경을 치겠지만 새틴을 때린 것은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어떻게 고생을 해서 번 돈인데. 그 돈을 훔친 새틴을 더 때려도 부족했다.

‘이제 어쩌지.’

끔찍한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마음은 오히려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더 바닥으로 떨어질 길이 없기에.

이대로 돈 한 푼 없는 빈 몸으로 도망쳐 봐야 무엇도 되지 않았다. 거지나 거리의 여자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돈을 찾아야 돼.’

그러나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루나는 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새틴은 잔머리가 비상한 애였다. 루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았다.

‘……만일 새틴이 숙모에게 말하려 했다면 내게 경고하기 전에 바로 말했을 거야. 내게 경고한 건 아마도 다른 꿍꿍이가 있어 서겠지. 날 이용하려 하거나…… 아니면 그 돈이 탐났거나. 새틴이라면 바로 이 일을 폭로하는 것보다 내 약점을 잡아서 더 괴롭히려 들 거야.’

루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펴며 생각했다.

정말 너무 분했지만 지금은 일단 이 집에 남아야 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올해 말, 숙부 가족이 떠날 여행. 그 여행 날 같은 절호의 찬스는 다신 오지 않았다. 그러니 숙부 가족이 예정대로 여행을 떠나게 만들려면 수상하게 보여서는 안 되었다.

‘게이트를 타고 도망가기로 한 날. 그날까지 어떻게든 돈을 조금이라도 찾아내야 해. 이제 더는 못 참아. 여차하면 맨몸으로 도망쳐도 상관없어.’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루’의 신분으로 번역가 일로 다시 돈을 벌 길도 요원했다.

더 이상 남장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 공작에게 잡히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니 새틴에게서 돈을 다시 훔치든, 숙부의 돈에 손을 대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셈이었다.

멜베른은 제국 최고의 마법사의 도시였다. 이곳만큼 짭짤한 번역 일이 많은 곳이라곤 서부 던전 출몰 지대뿐이라 들었는데, 그곳은 거친 마법사와 용병들이 많이 모여들어 치안이 좋지 않다 들었다.

‘휘멘…… 그 마법사에게라도 몸을 의탁하고 싶을 정도야.’

충동으로 한 말일지 몰라도 휘멘은 루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소년 ‘루’의 모습으로 다시 위장하는 게 옳은 일인지는……. 루나는 답답한 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냉정하자. 일단 새틴이 돈을 숨긴 곳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야.’

* * *

새틴이 받은 편지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파혼 통지서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선택지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쭈글쭈글하게 주름진 탐욕스런 얼굴을 일그러트린 벨레는 편지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공작이 보낸 편지 내용은 간결했다.

[그대의 생각대로 내가 정상적으로 여인과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원한다면 합의하여 파혼하도록 합시다.

내가 제시하는 위자료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어서 쓰인 어마어마한 재물 목록에 벨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말 이걸 다 준다는 거니? 파혼하는 조건으로 이 정도 위자료를 지급하겠다고? 세상에……. 보석 광산, 건물, 그리고 금화도 이만큼이나…….”

공작 부인 자리에 눈이 먼 새틴도 혹할 만한 재산들이었다. 부친도 부재한 상황에서 두 모녀는 엄청난 돈들에 눈이 멀었다.

새틴은 특유의 조용조용한 요조숙녀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건 협의 요청서예요. 만일 파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벨레의 눈이 번쩍였다. 그녀는 주름진 탐욕스런 얼굴 가득 은근한 빛을 담았다.

“그러니까,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파혼은 하지 않겠다는 거지? 만약 파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돈을 더 받을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이 문제는 조금 달라요. 그분 성격상 거짓말은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이건 기 싸움이에요. 제가 선을 넘었다 생각하고 벌주시려 하는 거죠…….”

“만일 그가 소문대로 정말…… 그거…… 라고 해도.”

벨레는 차마 남색가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도 혼인만 하면 네가 공작 부인이 되는 건 변함없잖니?”

“하지만 어머니, 그가 만약…… 여자와 아예 잘 수 없는 부류의 남자면요?”

새틴은 민망한 내용을 에둘러 털어놓았다. 새틴이 줄곧 고민해 온 것이었다.

만약 아키스의 미소년 스캔들이 진짜라면, 그래서 그가 여자와 아예 관계를 거부한다면, 그래서 자식을 볼 수 없는 몸이라면 어떨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공작 부인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 새틴은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공작가의 혈통은 정말 중요해. 내가 그걸 이어야 진정한 공작 부인이 되는 거라고.’

그리고 결국 자식만 보면 결국 공작도 빼도 박도 못하게 제 남자가 될 것이다. 새틴의 야심이었다.

“그게 나도 걱정되는구나. 여인에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데.”

“차라리 먼저 동침이라도 해 보고 싶은 심정인 걸요. 그가 정상적인 남자인지 아닌지 시험이라도 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얘가 큰일 날 소리를. 지금 파혼하고 위자료를 받으면 새 시집이라도 갈 수라도 있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면 큰일 나! 파혼장을 받기 전이라면 모를까, 인생 망칠 일 있니?”

벨레의 말이 맞았다.

차라리 위자료를 두둑이 챙긴 후 공작의 스캔들을 이용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법도 있다. 새틴은 썩 미인이 아니었지만 남자들을 대하는 사교술은 사교계 제일이었다.

‘남잔 고분하고 적당히 예쁜 여자를 가장 좋아하는 법이거든. 암만 예뻐 봐야 라미라 영애처럼 도도하면 누가 좋아해? 루나도 마찬가지야. 나랑은 비교가 안 돼.’

아무튼, 차라리 깔끔하게 정리하고 새 남자와 약혼하는 것이 출세하는 길일 수도 있다. 공작 부인까지는 못되더라도.

‘하지만…….’

그러나 한번 엿본 권력의 냄새는 너무 달콤했다.

‘난 내년에도 황궁 무도회에 가고 싶어. 고위 귀족이 되고 싶어. 무엇보다 아키스는 너무 특별해. 그이와 한번 약혼해 본 이상, 웬만한 남자가 눈에 찰 리 없잖아.’

욕망이 새틴의 마음을 뒤덮었다.

반이라도 좋으니 그가 가지고 싶었다.

그가 정말 남색가라면 그 또한 흠이 있는 몸이니 다른 여인을 약혼녀로 들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이 계산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차라리 그가 첩질이라도 하고 코르티잔이라도 안는 남자라면 얼마나 좋니. 그럼 정상적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세상에. 미소년이 뭐야, 미소년이.”

벨레의 탄식을 듣던 새틴은 문득 번뜩이는 생각을 떠올렸다.

‘……난 정말 똑똑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새틴이 희열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꼭 잡고 생각했다.

“어머니, 좋은 생각이 났어요.”

“좋은 생각?”

“그에게 여자를 보내는 거예요. 왜, 그 권리를 쓰면 되어요. 예비 신랑의 남성성을 검사해 볼 권리요.”

놀란 듯 벨레의 입이 벌어졌다.

고대 귀족들은 특수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마법사, 고위 귀족 가문의 사람들은 빼어난 마법사들끼리 결합해 혈통을 남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때는 여자 마법사도 흔하던 때였다.

그래서 신랑감이 밤일을 잘하는지, 불구는 아닌지 신부 집안에서 검사할 권리가 있었다.

신부 측 집안에서는 결혼 며칠 전에 신랑의 집으로 자신의 측근 시녀나 최상급 코르티잔을 보냈다. 이때 보내는 여인은 성 경험이 많지 않고 순진한 여인일수록 좋았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초야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신랑과 먼저 동침했다. 이튿날, 시녀나 코르티잔은 신부의 집으로 와 제 주인에게 남자의 잠자리 매너며 그가 얼마나 밤일에 능숙한지를 자세히 설명하곤 했다. 놀랍게도 당시에는 신랑의 잠자리 매너가 별로라는 이유로 파혼당하는 사례도 왕왕 있었다 한다.

그래서 한낱 시녀를 보내더라도 신랑의 집에서는 그 여인을 극진히 대접했다. 반대로 터무니없이 초라한 여인을 보내면 신랑 측에서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큰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얘, 그 제도가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그리고 우리 집에는 공작가에 보낼 만한 빼어난 시녀가 없단다. 그렇다고 코르티잔을 데려올 수도 없고, 우린 그럴 돈이 없어.”

귀족들을 상대하는 고급 창부, 코르티잔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몸값이 엄청난 건 둘째 치고 그녀들은 소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내일까지 답장을 달라잖니.”

심지어 공작은 기한을 길게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바로 어디서 괜찮은 여자를 구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어설픈 여자를 들이밀면 공작의 진노를 살 수도 있다.

‘……그이는 코르티잔이라면 질색해. 잘못 들이밀면 진노를 살 거야. 그럼 하녀를…… 보내야 할 텐데.’

버몬드가의 하녀들은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았다. 예의범절은 둘째 치고 미색이 뛰어난 아이도 없었다.

그때, 새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가 가장 나쁜 생각을 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있어요, 아주 적임자가 있잖아요.”

새틴은 속으로 생각했다. 난 정말 머리가 좋아. 그녀는 급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 말이니. 우리 집에는 그럴 만한 아이가…….”

“루나가 있잖아요.”

“……!”

벨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애가 제 하녀이자 몸종이고 고급 시녀잖아요. 안 그래요?”

“얘, 하지만 루나는 아직 시집가기도 전인 몸이고…… 네 아버지가 그 애를 내년이나 내후년엔 시집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새틴이 뱀의 혀를 가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루나의 행실에 대해서 알려 드릴 사실이 있어요.”

* * *

루나는 꼬박 하루를 오두막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새틴이 찾아왔다. 가만히 저를 노려보는 루나를 보며 새틴이 조금 토라진 듯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날 때린 게 미안하지도 않니?”

“네가 사람이야? 양심 좀 차려서 말해.”

루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새틴의 뺨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루나가 전혀 고분고분하지 않자 새틴은 움찔했다. 저도 다시 뺨을 맞는 건 무서운 모양이었다.

새틴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께는 말 안 했어. 아버지께도 말 안 할 거야. 네가 남자를 끌어들인 거랑, 수상한 돈을 가지고 있었던 거.”

“무슨 꿍꿍이속일지 뻔하지만, 계속 말해 봐.”

“나도 네가 아빠한테 맞는 건 보기 싫거든. 어머니한텐 잘 둘러댔어. 너랑 사소한 문제로 싸웠다고 말이야.”

루나가 그 말에 움찔했다. 그녀 또한 맞는 건 질색이었다.

새틴과 루나는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서로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했고, 그만큼 서로를 잘 알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돈을 일부 돌려줄 수도 있어. 어머니 아버지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네 돈을 다 빼앗으실 테니까. 물론, 전부는 돌려줄 수는 없고.”

“너도 참 대단해. 그 돈이 욕심이 나니? 정말?”

“어차피 내가 공작 부인이 되면 푼돈이야. 조금만 쓰다 돌려줄게.”

새틴이 천사 같은 어조로 조곤조곤 말했다. 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돈이 필요해, 루나. 네가 어떻게 그 돈을 구했는지는 묻지 않을게……. 그런데 나도 공작 부인이 되기 전까지 나름대로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좀 써야 하거든?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지금처럼 날 도와주면 조금씩 돈을 돌려줄게. 대신, 나도 돈을 좀 쓰고. 응? 우리 화해하자.”

루나는 새틴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차라리 강아지나 고양이를 믿지.’

그래도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하면 새틴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어쨌든 숙부나 숙모에게 돈을 들키면 루나도 성치 않게 될 터였다. 지금은 새틴과 화해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집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아직 성인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개인 은행 계좌를 만들지 못하는 건 새틴도 마찬가지였다. 새틴의 성격에 누군가를 믿을 리 없으니 누군가에게 돈을 맡겨 둘 리도 없을 테고, 분명히 집 안에 돈을 숨겨 두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도망칠 거야.’

열흘간의 숙부 가족들의 연말 여행. 루나는 이를 갈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좋아, 화해하자. 하지만 새틴.”

루나가 나직이 말했다.

“나, 이제 별로 잃을 것이 없어. 그러니 너도 행동 조심해. 다음번엔 머리채를 잡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새틴은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고고한 척하는 그 미소는 간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 * *

“어제 네가 없어서 정말 아쉬웠어. 네가 도와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새틴은 곧바로 루나에게 온갖 어리광을 부리며 이것저것 일을 도와 달라 했다. 여행 짐을 싸 달라느니, 머리 리본을 골라 달라느니.

새틴이 화장대 앞에서 지나가듯 툭 던졌다.

“그 전에 먼저 편지 배달부터 좀 해 줄래? 내 뺨이 부풀어 올라서 내일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거든.”

“약속이 있었다고?”

“응, 황궁 무도회에서 만난 귀빈 중 한 분의 집에 초대되었거든. 아쉽긴 하지만 약속을 취소한다는 사과를 담은 편지를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 갑작스런 약속 취소가 예의가 아닌 건 알지? 그러니 네가 사과 편지를 좀 전해 주고 와. 네가 날 때렸으니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새틴은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루나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편지 배달은 여러 번 해 봤기에 낯설진 않았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아.’

차라리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새틴의 얼굴도 숙모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새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루나를 보며 묘하게 말했다.

“솔직히 나랑 너, 지금 얼굴 보기 편하진 않잖아. 그러니 가서 귀족들의 저택도 좀 구경하고 머리 식히고 와. 그런데, 아주 중요한 분이니 정중하게 대해야 해.”

루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주 높은 신분의 분이셔. 그러니 꼭 꾸미고 다녀오렴.”

새틴은 그렇게 말하곤 루나에게 제가 안 입는 드레스를 던져 주었다. 어제 그랬듯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편지를 뜯어볼 생각은 마. 혹시 편지를 빼돌려서 날 골리기라도 하면, 아버지에게 네 비밀에 대해 전부 다 말할 테니까.”

루나는 새틴의 말을 무시했다. 새틴은 루나가 대답을 하지 않자 짜증을 내며 이것저것 간섭했다.

“화장하는 게 어때? 넌 본판이 좀 수수하게 생겼잖아. 나도 다른 귀족 가문들에게 면을 세워야지. 다른 자리도 아니고 날 대신해서 가는 자리잖아? 마음 같아선 내가 가고 싶은데.”

새틴은 말끝에 은근한 진심을 섞었다. 루나는 새틴을 상대하며 이미 진한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새틴.”

루나가 나직이 말했다.

“조용히 좀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새틴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기가 죽지 않았는지 조곤조곤 덧붙였다.

“꼭 그분들에게 얌전하게 굴어야 돼. 네 기분 나쁘다고 티 내고 그러지 말고 내 입장을 생각해 줘. 그리고 꼭 편지를 직접 전해 줘야 해. 저택 주인에게 말이야.”

“알겠으니 제발 좀 그만해.”

새틴은 루나의 피를 말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듯했다.

루나는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 * *

덜컹덜컹―

새틴은 루나가 탄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 방법이 성공하면 좋겠는데 말이야.’

새틴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만들며 생각에 잠겼다.

루나를 속이기 위해 별의별 거짓말을 다 준비했다. 약속 취소의 사과 편지라느니, 편지 상대는 부유한 대부호라느니. 완벽하게 루나를 속이기 위해 별스러운 일을 다 가져다 붙여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어쨌든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지 뭐야.’

루나의 행실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아키스가 루나를 하룻밤 안고 마음이 혹한다 해도 그녀에게 애인이 있는 걸 알면 바로 정을 뗄 것이다. 제국 고위 귀족들은 몹시 보수적이었으니까.

‘루나 같은 여자한테 마음을 줄 사람도 아니지만. 그리고 이게 루나와 나의 차이지. 넌 딱 내 몸종으로 살 팔자야.’

새틴은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서성였다.

‘아. 아키스, 그이가 내게 마음을 조금만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정상적인 남자기라도 하다면 바로 결혼할 거야. 제발 내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게 해줘요.’

* * *

마차는 평소보다 빠르게 달렸다.

‘올해 말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돈을 찾아야 한다. 루나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어느 대저택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루나는 커튼을 걷고 밖을 보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정말 큰 저택이네.’

새틴의 심부름을 하느라 부유한 귀족들의 집을 제법 많이 돌았지만, 이렇게 큰 정원을 가진 곳은 처음이었다.

‘넓긴 한데, 황량한 느낌이야.’

값비싼 석조 조각들과 오래된 나무들이 자리한 정원은 무서울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어 오히려 어딘가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보통 귀족 가문처럼 형형색색의 꽃들로 정원이 화사하게 가꾸어져 있지 않았다.

‘……왜 가문의 문장이 없지?’

아까 정문에도 가문의 문장이 없었고, 또 정원 어디서도 가문의 상징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나는 그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곧, 마차가 멈췄다.

* * *

“……어째서 주인님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시는 겁니까.”

젊은 공작 아키스의 보좌관, 디온은 아키스의 열병이 낫지 않아 근심에 빠져 있었다. 디온과 대화를 나누는 집사 또한 침울한 표정이었다.

“정말 답답합니다. 저잣거리에 별 소문이 다 돌아요. 각하께서 상사병이니 하는…….”

“하아……. 하필이면 소년에 대한 작은 단서도 찾을 수가 없으니…….”

강력한 고대의 최음 독을 먹은 후, 공작은 계속 병중이었다.

열 여자 마다하는 영웅 없다는데, 소인배도 아니고 웬만한 영웅호걸보다 뛰어난 사내인 그가 정작 여인과 하룻밤을 나누는 일은 거부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어 그러시는 걸까요.”

집사가 답답함을 느끼며 말했다.

측근들만 속이 탔다. 밖에서는 소문이 좋지 않은 공작이지만, 집 안에서는 하인들에게 단 한 번도 난폭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다들 아키스를 두려워하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외했다. 주인이 아프니 자연스레 집안 분위기도 나빴다.

“어제는 코르티잔을 되돌려 보내셨지요.”

“아마 그 코르티잔이 마음에 안 드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데다 대뜸 파혼 요청 편지까지 보내셨으니.”

“……곧장 그런 답장을 보내실 줄은……. 정말 그건 제가 큰 실수했습니다.”

디온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 우리 잘못입니다. 눈물 젖은 약혼녀의 편지를 보면 혹시라도 약혼녀 분이라도 불러 밤을 나누려는 마음이 생기시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으니까요.”

집사의 말에 디온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제 큰 실수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틴이 눈물로 써서 보낸 편지를 아키스에게 가져다주었더니, 그는 새틴의 오만 방자한 편지에 화가 나서 곧장 파혼 요청서를 보냈다.

‘언젠가 일어날 것 같은 일이긴 했지만, 공작님 상태가 이러시니 그 일조차 좋아 보이지 않는군. 새틴 님은 자존심이 센데 이번엔 어떤 나쁜 소문이 돌지…….’

그때, 하인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공작님의 약혼자이신 새틴 드 버몬드 영애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들고 온 분이 중요한 편지이니 공작님께 꼭 직접 전하겠다 합니다.”

“알겠다. 이리로 들여보내라.”

새틴 영애가?

의아해하면서도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파혼 동의서라면 중요한 편지이니 당연히 공작에게 직접 전해야 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전령이 들어왔다.

들어온 이는 뜻밖에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진한 붉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타이트한 드레스가 잘록한 허리와 적당하고 소담하게 부푼 가슴을 강조하고 있었다.

얼굴은 상당히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란 집사가 디온을 한번 바라보았다. 곧 여인이 다가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정확히 예법에 맞는 인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버몬드 남작가에서 편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주인님의 보좌관 디온 드 시드라고 합니다. 편지는 제가 대신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인, 루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어, 중요한 내용이라 가능하다면 저택의 주인 분께 직접 편지를 전하고 싶은데요.”

루나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

그녀는 뺨이 조금 붉어지는 걸 느꼈다. 새틴이 재작년에 입었던 드레스는 루나의 몸에 너무 꼭 맞았고, 가슴 선도 깊게 파여 있었다.

빨간 실크 재질에 반짝이는 드레스는 가슴 부분에 길게 늘어진 리본이 달려 있었다. 소매에는 하얀 레이스가 달려 있었는데, 팔목 아래가 살짝살짝 들여다보였다.

일부러 이런 드레스를 입힌 건 새틴의 심술일 것이다. 이런 드레스는 유행이 지난 스타일이었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저희 주인님께서 병환 중이십니다. 그래서 매우 예민하신데…… 저희가 편지 내용을 미리 검수해도 될지요.”

“그렇게 하세요.”

루나는 잠시 망설이다 장갑 낀 손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저택의 방침이라면 루나도 어쩔 수 없었다.

디온이 편지를 열었다.

“…….”

그리고 디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였다.

[이 아이는 저희 집에서 오래 신세를 진 코르티잔이에요.

아주 순진하고 깨끗한 아이랍니다. 한 번도 제대로 ‘데뷔’해 본 적 없는 아이니 안심하셔도 되어요.

항상 공무와 노고로 지치신 공작님을 위로하기 위하여, 또 잠자리 검증 전통에 입각해 이 아이를 보냅니다. 정숙한 아내감은 남편의 피로를 어떤 방면으로든 돌봐야 하기 마련이죠.

부디, 이 아이를 내일 무사히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대단한 여자군.’

디온은 경악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여인을 공작이 안는다면 파혼하지 않겠다는 수를 쓴 것이었다.

디온은 망설이다 집사에게 편지를 보여 주었다. 집사 또한 말을 잇지 못하고 디온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혹시, 편지 내용에 문제가 있나요?”

루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디온은 헛기침을 했다.

“실례지만, 아가씨…… 께서는 새틴 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저는…….”

루나가 대답을 망설였다.

“시녀신가요?”

“예, 맞아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시녀 노릇을 할 때 친척임을 드러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고 오셨나요?”

“새틴 아가씨와 잘 아는 사이인 분의 저택 아닌가요?”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코르티잔이 맞는 듯했다. 보통 신랑감 검증을 위해 보내진 코르티잔들은 자신의 신분을 아가씨의 시녀로 가장했다. 이젠 거의 없어진 전통이라 문제지.

‘……이걸 어쩌지.’

편지를 전하긴 해야 할 텐데.

디온은 고민에 빠졌다. 공작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한편으로 디온은 새틴이라는 여자가 정말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리한 건지 자승자박을 하고 있는 건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정말 무서울 정도로 공작님의 취향인 아가씨를 어떻게 골라 보낸 건지.’

디온은 공작이 어떤 타입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성별을 떠나서 그냥 사람의 호불호 말이다.

그가 총애했던 그 서점 미소년과 느낌이 참 비슷한 여인이었다. 외모도 그랬다. 공작은 총명하고, 또 괜한 꿍꿍이가 없어 보이는 청명한 느낌의 사람을 좋아했다.

편지 내용과는 연관이 안 될 정도로 청아한 분위기와 깨끗한 미모. 여색을 즐기지 않는 공작이라지만, 그가 좋아할 법한 분위기와 모습을 형상화하면 이런 여자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

루나는 생각에 빠진 디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냥 돌아갈까요?”

“아뇨, 아닙니다. 들어가서 주인님께 편지를 전해 주시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주인님께서는 현재 병환 중이시니 조심스럽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병환 중이신데…… 정말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루나가 걱정 어린 어조로 물었다.

디온이 매우 온화하게 말했다.

“예, 걱정 마십시오. 낮에는 비교적 괜찮으십니다.”

“그럼…….”

루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집사가 무거운 문을 열어 주었고, 루나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문득, 일기장의 내용이 생각났다.

첫날밤, 신랑을 만나러 들어간 신방. 침대까지 걸어가던 길. 그리고 그 끝에 침대 위에서 아픈 신랑을 발견하고 미래의 루나가 얼마나 경악했는지. 그 경험 아닌 경험이 생각나 루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무슨 방이 이렇게 넓어?’

침실은 몹시 넓었다. 방 끝에는 붉은 휘장이 쳐진 거대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루나는 망설이며 더욱 발걸음 소리를 죽여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루나의 걸음이 침대 바로 앞에서 멈췄다. 침대 머리 부분에 온통 휘장이 드리워져 있어 침대에 누운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죽을병인가?’

루나는 침대 앞까지 바짝 다가갔다.

‘깊은 잠이면 깨우지 말자.’

만일 상대가 깊게 자고 있다면 테이블에 편지만 살짝 두고 갈 생각이었다. 루나는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누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는 아키스였다.

‘……세, 세상에.’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가 공작가였어? 새틴, 이 미친 계집애는 왜 말도 안 해 주고 대부호의 집이라느니 하는 거짓말을 했지?’

루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이었다.

“……음.”

침대 위에 누운 공작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공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며칠 새 정교하고 아름다웠던 공작의 얼굴은 살이 확 빠져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창백했고 병색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더 날카로워진 턱선은 묘하게 남성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픈가? 안 그래도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듣긴 했어.’

루나는 굳은 상태로 생각했다. 공작은 아픈지 고통스런 숨을 쌕쌕 내쉬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는 많이 나은 것 같았는데.’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저 단단한 가슴 위에 푸른 선이 그어져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뒷걸음질 쳤다. 공작이 깰까 두려워 숨조차 죽이고.

그 순간, 공작이 눈을 떴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루나의 손목을 잡았다.

“꺅!”

아키스가 루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루나는 순식간의 그의 얼굴에 바짝 다가가게 되었다. 공작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짚어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넌 누구지? 누가 널 여기 들여보냈지?”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쉬지 못했다.

그의 나른한 목소리엔 피로와 짜증이 가득했다. 그가 보라색 눈동자로 서서히 루나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은 것처럼 꼼꼼히.

“그러고 보니.”

아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낯이 익군요.”

루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녹색 눈동자로 공작을 응시했다.

* * *

빌어먹을 독에 중독된 후, 아키스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그가 자란 호숫가, 그곳에 빠지는 꿈.

호수의 바닥이 너무 깊어 그는 끝도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그러다 보면 숨이 막혀 꼭 죽기 직전까지 가서야 눈이 떠졌다. 오늘도 악몽 속에서 헤매던 아키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느낌이 조금 달랐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청명하고 부드러운 향이 그의 몸에 닿았다. 그에 시선을 살짝 돌리자, 제 옆에 서 있는 낯선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또 여자를 불렀군.’

그가 아프고 나서 부하들은 조심성이 없어졌다. 자꾸 그가 허락하지 않은 여인들을 방으로 들이밀었다.

순간 짜증이 일어났다.

자신을 보고 놀란 듯 도망치려는 여인을 붙잡아 침대에 눕혔다.

그러나 그녀의 초록색 눈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분노가 사라졌다. 몸을 억죄던 불쾌감이 사라지고 서서히 심장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군요.”

아키스는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속삭였다.

“……절 아시나요?”

루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겨우 누르며 대꾸했다.

“카베이가에서 한번 마주쳤죠.”

아키스의 말에 루나는 온몸에 힘이 빠질 만큼 안도했다. 아키스는 그날 밤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아키스는 피아를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환각을 보며 그녀를 보듬고 계속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속삭였으니.

“……네, 맞아요. 그날 카베이 경에게 당할 뻔한 절 도와주셨죠.”

루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루나의 그 매끄러운 목소리가 아키스의 귀에 불편하게 걸렸다. 은근히 몸과 마음에 자극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찾아서 데려온 거지?’

황태자를 데려오기 위해 카베이가에 간 날 마주친 여인이었다. 그날 그녀는 손에 악보를 들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날, 황태자는 그녀가 코르티잔일지도 모른다 했다. 아키스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더 추궁해 봐야 알 노릇이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부하들이 어떻게든 자신이 거부하지 않을 만한 여자를 찾아내 들여보낸 것 같았다.

월권을 한 부하들을 벌줘야겠지만, 한편으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내 부하들이 당신을 보냈습니까?”

그녀, 루나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이 방에 들어가도 된다고 했어요.”

아키스는 넋을 놓고 그녀의 핑크빛 입술이 열리며 청명한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눈앞의 여인에게 미칠 듯한 성욕을 느끼고 있었고, 그건 정말 낯선 느낌이었다.

그때, 그녀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였다. 몸에 꼭 끼는 붉은색 실크 드레스는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속살을 살짝살짝 드러냈다.

“놔주세요.”

루나가 빠르게 속삭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암살자는 아닌 모양이군요.”

“당연하죠. 전 그냥 편지를 전하러 온 것뿐이에요.”

루나는 발개진 손목을 쓰다듬으며 황급히 말했다.

“편지?”

루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그제야 침대 위로 떨어진 편지를 발견했다. 버몬드 남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연한 분홍색 편지 봉투였다.

“새틴 아가씨께서 보낸 편지예요.”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떨어졌다.

온몸에 온기가 돌고 뺨이 붉어졌다. 며칠이나 지난 그날 밤의 기억이 루나를 괴롭혔다.

아키스의 사내다운 체향과 신비한 보라색 눈을 마주하자 흉골까지 숨이 차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왜 질척한 감정이란 이렇게 염치없이 어디에나 불쑥 등장하는 건지.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계속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두려움에, 그리고 또 다른 감정에.

첫사랑이기 때문일까. 이토록 철없이 달리는 마음이 어처구니없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죠.”

어째서 그녀가 새틴의 편지를 전하러 왔단 말인가. 아키스는 편지를 뜯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편지 내용을 확인하자 아키스의 표정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

그녀를 부른 건 부하들이 아니었다. 아키스는 어이가 없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백번 양보하여 봐주었더니 어디까지 기어오르려는 것인지. 아키스는 편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표정이 왜 이러지?’

루나는 아키스가 화난 표정을 짓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키스는 소년, 루에게 늘 관대했기에 비교적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편이었다.

그녀는 아키스의 눈치를 살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새틴이 당신 손에 이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다는 말입니까?”

아키스가 무표정하게 속삭였다.

루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러면.”

아키스가 나긋하게 대꾸했다.

“내 전 약혼녀가 당신을 내게 보냈으니, 우리는 용무가 있군요. 그렇지요?”

“……무슨 용무 말씀이시죠? 편지를 전했으니 전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그리고 전 약혼녀라니…….”

루나는 녹색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아키스는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순진한 건지 궁금해졌다. 여자에게 궁금증을 느끼는 건 그의 삶에서 거의 없는 일이었다.

‘……이 여자는 잘못이 없지.’

아키스의 짜증은 새틴을 향한 것이었다. 감히 맹랑하게 코르티잔을 보내 그를 시험하려 한 전 약혼녀가 될 예정인 여자, 새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제가 편지를 봐도 될까요?”

루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조심스레 편지를 요청했다. 아키스는 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확인해 보라는 듯이.

루나가 건네받은 편지를 훑었다. 그리고 잠시 굳었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미간을 한 번 찌푸렸다 풀었다.

그녀는 이상하게 그를 자극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부터 장갑을 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까지. 작은 행동에도 그의 몸 안의 남성이 자극 받고, 바지 안이 팽팽해지는 느낌이었다.

‘……독 때문에 미치겠군.’

그의 몸을 괴롭히는 독.

그 독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지금 그런 그의 욕구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녀를 쫓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는 책임지지 못할 성욕을 쓰레기처럼 풀어놓는 행위를 증오했다. 그렇기에 그간 밤마다 앓으면서도 코르티잔을 두 번이나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목이 탔다. 그녀의 하얀 살결이 너무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멍하니 편지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

루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내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너무 분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 편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루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버몬드가 사람들은 어디까지 그녀를 몰아붙이려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나름대로 자매로 자란 새틴은 제 부모보다 더한 짓을 했다.

반면, 아키스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맺힐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낯모르는 여자가 훌쩍이는 모습을 보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심장 안쪽에서 조그마한 벌레가 움직이는 기분. 울렁거리기도 하고, 미미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갑게 물었다.

“도대체 왜 우는 겁니까?”

“대답해 주세요. 이 편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냐고요.”

그러더니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루나의 깊은 속눈썹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키스의 심장이 묵직해졌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쁜 생각을 한 제가 몹쓸 놈이 된 것 같았다. 그의 잘못이 아닌 최음 독에 중독된 상태인 몸의 잘못인데도.

아키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루나가 말을 이었다.

“이 편지 내용을 보셨으니 마음대로 생각하셨겠군요. 새틴이 왜…….”

루나는 눈가를 쓱쓱 문질러 닦더니 훌쩍이다 중얼거렸다.

“씨발년.”

“…….”

지금 이 여자가 뭐라고 했지? 아키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여인이 면전에서 욕하는 들은 건 처음이었다. 아키스는 그 욕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물어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루나는 편지를 집어 던졌다.

욕이 절로 나왔다. 새틴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제 약혼자에게 자신을 가져다 바치다니.

저를 약혼자를 붙잡을 수단으로 쓰려 한 건지도 모른다. 루나도 요즘 새틴이 공작과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알았다. 공작이 아프다는 소문도 얼핏 들었다.

루나는 그가 왜 아픈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겨우 속을 가라앉히고 공작을 향해 물었다.

“혹시 몸에 열이 나시나요?”

아키스는 그녀에게 압도되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 하시면 되겠네요. 편지에는 당신을 염려해서 날 보냈다고 적혀 있잖아요. 마음대로 하세요.”

루나가 툭 던지듯 비꼬아 말했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났다. 새틴의 영악함에 화가 났고, 이 편지를 읽고 독 때문에 저를 그렇게 보았을 공작에게도 화가 났다. 제가 생명의 은인임도 모르는 공작에게도 화가 났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났고, 멍청함에 화가 났다.

‘난 정말…….’

그간 운명을 바꾸기 위해 발버둥 쳤고 성실하게 일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한에선 최대한 노력했다.

그러나 그건 부족했다. 늘 그녀는 여전히 이용당하는 존재였다. 그런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난…….”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풀었다.

“그런 남자가 아닙니다.”

“절 그런 여자로 보셨다면 그런 남자나 마찬가지예요.”

루나는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여자 앞에서 쩔쩔매 보는 건 처음인지라, 그는 망설이다 매우 어색한 동작으로 루나의 눈가에 손을 댔다.

맨손으로 루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말랑하고 하얀 뺨에 손이 닿는데, 아키스는 온몸에서 전류가 튀는 것 같았다. 정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오해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아키스는 매우 어색하게 말했다. 여자에게 이런 간질간질한 말을 하는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 말에 루나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이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계속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왜 자꾸 이 사람과 엮이는 걸까.

그녀는 지금 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멍청한 자기 스스로 다그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위로하려 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키스는 매우 어색한 동작으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고, 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가 아키스의 팔에 닿았다.

‘……미치, 겠군…….’

오늘은 독 기운이 더 강력하게 도는 모양이었다. 정말 참기 힘들었다. 아키스는 딴생각을 하려 무던히 노력했다.

루나는 제법 오래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아키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녀의 모습을 찰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라보며. 이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낯익었다. 그 소년과 닮은 얼굴이었다.

“저는…….”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공작에게 정체를 숨기긴 힘들었다.

“저는 루나예요. 새틴의 양자매죠.”

“그럼 새틴이 왜 양자매인 당신을 내게 보낸 겁니까.”

“글쎄요, 절 이용하려 한 건 틀림없겠죠.”

루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공작이 남색가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몰랐다. 그렇기에 어쩌면 새틴이 공작의 열병을 알고…… 그가 아직 최음 독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루나를 보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틴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어처구니없는 우연이었다.

‘……이렇게까지 해독이 더디다니.’

최음 독에 취한 그날 밤, 아키스는 정말 고통스러워했다. 밤새 환각을 보며 앓았다. 그 독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잔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이다.

‘……고통이 심할 텐데.’

그러면 매일 밤, 그날 루나를 안았던 것처럼 다른 여인들을 안아 온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마음을 스쳐서 기분이 이상했다.

“왜 당신을 보냈는지 알 것 같은데.”

아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루나는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땅거미가 그들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편지에는 전통에 따라 날 검증해 보고 싶다고 되어 있군요. 신랑감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시험이요?”

“이젠 거의 사라져 없는 전통입니다. 결혼 전에 신랑이 정상적인 남성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리인을 보내 동침시키는 거죠.”

“그런 어이없는 시험이 어디 있어요.”

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키스는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보았다. 독 기운 때문에 온몸에 열이 가파르게 돌았다.

“말 그대로 어이없는 시험이지만…….”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문제였다.

아키스는 그 말을 삼켰다.

아키스는 자제심을 발휘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나직이 숨을 들이켰다.

참아야 했다. 아무리 그녀를 만지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해도. 한 번의 키스만 허락해 준다면 발치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절박함마저 느낀다고 해도.

‘도대체 내가 왜…….’

정말이지 이런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때, 그는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속눈썹에는 아직 촉촉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아키스는 홀린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성이라는 녀석은 욕구 앞에 처절히 부서졌다. 그나마 그녀를 덮치지 않는 것이 아키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의 몸에 닿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손을, 잡아도 됩니까?”

“손요?

루나는 어이없는 질문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아키스가 장갑 낀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쥐었다.

‘……뜨거워.’

그날, 달빛 서점에서 독에 취해 미쳐 있던 아키스의 상태. 그날 이후 몸이 별로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상에, 증세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도대체 주치의가 얼마나 무능한 거야?’

도대체 이 남자는 만날 때마다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루나는 약간의 위기감을 느끼고 손을 빼내려 했다. 그의 손은 크고 뜨거워 루나의 심장을 뛰게 했다.

“내가 미친 소리를 하는 건 알지만.”

아키스가 괴로운 듯 살짝 찡그린 얼굴로 속삭였다.

“당신에게…… 키스해도 됩니까?”

루나는 멍하니 핑크빛 입술을 벌렸다. ‘안 돼요’라고 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 남자에게 약한 거지?’

루나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 첫사랑이란 어마어마하게 멍청한 감정임이 분명했다.

루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키스가 루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낡은 비단 장갑 위로, 입술을 훑으며 가볍게. 그의 입술이 루나의 손등 끝에 닿고 나서야 그는 입술을 떨어뜨렸다.

루나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기분이 몽롱해졌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이 남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게 키스하시는 거죠?”

“아직 안 했습니다.”

“…….”

그리고 아키스는 이어서 루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신 것 같아요.”

반쯤 열린 그의 셔츠 사이로 푸른 선이 보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희미한 색이다. 이 정도라면 목숨이 위험한 단계는 지났지만, 독 기운은 남아있을 터이다. 루나는 어림짐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아키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어느새 홀린 듯 낯선 여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난 지독한 최음 독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치료 단계죠.”

“그래서 매일 밤 이렇게 저 같은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이나요?”

“어떤 여자들을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침대에 누가 들어온 적은 없습니다. 태어나서 당신이 처음이죠.”

그 말에 루나는 왠지 모르게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한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 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인데.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날 이후 한 명도 안지 않았다면 지금 체온으로 봐서는 꽤 고통이 심했을 텐데. 도대체 뭐 하는 남자인지…….’

루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머리로는 그를 밀어내고 방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정말 어이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집이 센 이 남자가 가엾기까지 했다.

아키스의 손이 흘러내린 루나의 금발 머리를 넘겼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제게 키스하고 싶으신 거예요?”

“미칠 만큼.”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루나는 피하지 않았다.

“딱, 키스까지만이에요.”

루나가 속삭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입술이 겹쳐졌다. 다음 순간, 아키스는 온몸에 불이 붙은 듯했다.

그는 요 며칠 끔찍한 갈증에 시달렸다.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이 성욕이 역겨웠다. 그의 타고난 결벽 성향은 단순히 필요에 의해 누군와 몸을 섞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를 미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었다.

‘잠깐, 이러다 또…….’

루나는 아키스의 굶주린 키스를 받으며 생각했다. 그는 성급했고, 그녀의 입안을 삼킬 듯 애무했다.

“흐윽, 힉…….”

그는 루나의 혀를 삼킬 듯이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혀 아래 주름진 부분을 찌르고, 그녀의 앞니 뒤쪽과 잇몸까지 샅샅이 훑었다. 루나의 체온도 올라갔다.

‘날 먹으려는 사람 같아.’

루나는 머리로 오르는 피를 느끼며 생각했다.

‘살 것 같군.’

아키스의 몸에 감돌던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이 여자는 이상했다. 키스 한 번만으로 그의 온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독 때문인 것도 같았다.

“하아……. 하아…….”

아키스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둘 사이에는 은빛의 실이 이어져 있었다.

어느새 루나는 침대에 누워 아키스의 팔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아키스를 밀어내고 입가를 닦았다. 그의 넓고 단단한 몸이 조금도 밀려나지는 않았기에 무의미한 행동이었지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루나는 뺨을 붉히고 말했다. 아키스의 단정한 얼굴은 괴로움에 일그러져 있었다.

또, 그 얼굴이다.

그날 밤, 고통 속에서 루나를 갈구하던 그 얼굴. 루나는 순간 아키스가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릴까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지금 그가 제정신이긴 할지도 걱정되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아키스는 밭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똑바로 그녀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 루나는 조금 안심했다. 아예 정신이 나가진 않은 것 같았다.

‘……못 견디겠군.’

그는 루나의 매끄러워 보이는 몸을 쓰다듬고 싶다는 본능과 치열하게 싸웠다. 갈증이 일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그의 접촉을 용서한다면 발등에 입 맞추며 빌라 해도 얼마든 할 수 있었다.

아키스는 속삭였다.

“……당신에게, 손대도 됩니까?”

“…….”

루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눈을 보았다. 내내 고통에 시달렸을 그를 상상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자 그가 조심스럽게, 아주 성스러운 것을 만지듯 그녀의 뽀얀 어깨에 손을 대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승마를 해 말고삐를 오래 쥔 손이었다. 학자의 손이지만 생각보다 거칠었다.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 위로 그 거친 손끝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루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온몸을 집어삼킬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등에 루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도 미쳤나 봐. 내가 정말 왜 이러지…….’

바닥까지 치달은 마음은 자꾸만 이성적인 생각이 모이는 걸 방해했다.

오늘은 루나 인생의 최악의 날이었다. 그냥 바닥으로 떨어진 김에 갈 데까지 가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생소해서 자꾸 눈물이 났다.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울지 마요.”

아키스가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갑자기 키스한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도저히 못 참으시겠어요?”

“매일 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앓고 있지만, 견딜 만하죠.”

“지금은 전혀 참지 못하고 계시는데요.”

“당신이 내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렸잖습니까.”

아키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잠시만…… 조금만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아키스가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루나는 그가 가여웠고,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조금만 당신을 만지게 해 준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아키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손가락만.”

“…….”

“딱 그것만 허락해 줘.”

아키스가 루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비한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어두워진 방 안에서도 이상하게 잘 보였다. 루나는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흔들리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의 욕구라는 게 이렇게 강력한 것이었나. 겨우 하룻밤의 기억이 이렇게나 사람의 머릿속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싫다면 언제든 그만두겠습니다.”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엄지와 검지를 움직여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그녀의 둥근 귓불과 귓불 뒤를 쥐었다 폈다 하며 천천히 만졌다. 그러다 턱선의 뼈를 양 집게손가락 사이에 가두고 천천히 훑으며 내려온다. 그 아래 목선과 어깨까지…….

아랫도리까지는 닿지도 않았는데 저도 모르게 구멍을 조이며 아랫배에 힘을 주게 된다.

“흐윽!”

드레스와 그 안에 갇힌 속옷이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 위로 생긴 부푼 젖무덤 굴곡을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슬슬 쓰다듬다가 쇄골 사이와 사이의 파인 흠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

그대로, 아키스는 가만히 루나를 응시했다.

마치, 루나의 허락을 기다리듯이.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미치겠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루나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로. 그는 곧바로 그녀의 드레스 속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아…….”

가슴 사이를 휘젓던 손가락이 드레스 속에서 천천히 유륜 주변을 맴돌았다. 그 주변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좋아서, 속이 울렁거려서. 천천히 그가 엄지와 검지로 유두를 집고 비비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와 허벅지를 비비며 낮은 신음을 울렸다.

“앗…….”

드레스 사이에 갇힌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 그는 나머지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 아래 손을 넣어 드레스 상체 끈을 단번에 풀어 버렸다. 가슴과 배가 편해지며 눌려 있던 가슴이 튀어나왔다.

“흐으…….”

그의 두 손가락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배꼽까지 닿았다.

루나는 엄지와 검지로 얼마나 많은 촉감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태어나 처음 알았다.

닿은 살갗 표면이 딱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달아올랐다. 아키스의 탄탄한 허벅지가 루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키스의 손목에 그녀의 심장 소리가 닿았다. 그녀의 심장은 팔딱이며 일정한 속도로 뛰고 있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그의 심장으로 가져다 댔다.

쿵쿵. 그의 심장은 천둥소리만큼 크게 뛰었다. 서로의 심장 소리가 서로의 귀에 닿았다. 그 순간,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관통했다.

‘……뭐야, 이 감각은?’

아키스가 느끼는 감정이 순간 그녀의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크고, 거대한 성욕.

그녀를 가지고 싶어 미치겠다는 본능.

그가 느끼는 성욕이 진득하게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루나는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그 감정을 느낀 순간 다리 사이가 노곤하고 허리 아래가 뜨거워졌다.

“아…….”

아키스는 더 견디지 못하고 루나의 허벅지 사이에 가져다 댄 허벅지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 그의 두 손가락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루나는 온몸을 움찔거렸다.

“더, 허락해 주겠습니까.”

아키스가 더운 숨을 그녀의 귓가에 흘리며 애원했다.

“제발.”

그의 애원에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성이 점점 마비되었다. 짐승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런 감각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루나는 작게 입술을 열어 허락의 말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단어는 채 완성되지 못했다.

짐승 같은 키스를 나누며 그는 손가락을 그녀의 드레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밀려 올라가고 낡은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드러났다.

“천천히…….”

루나는 겨우 이성을 잡고 속삭였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뭘 시키든 복종할 사람 같았다.

아키스는 아직도 벗지 않은 그녀의 실크 장갑을 이로 물어 급하게 벗겨 냈다. 드레스는 벗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입은 드레스의 비단 거들을 찢었다.

찍―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의 하얀 살갗이 드러났다.

루나는 뺨을 붉혔다. 그의 시선이 반쯤 어두운 방 안에 드러난 그녀의 벌거벗은 하반신에 닿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섬모가 덮은 도톰한 그녀의 둔덕. 부드럽게 손끝을 대보았더니 꿀물이 묻어났다. 아키스는 목을 울리며 더없는 흥분을 느꼈다.

‘좋은 냄새가 나.’

그를 유혹하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건 착각일까. 이 여자에게 너무 목이 말라 느껴지는 환상일까.

“그만 봐요.”

루나가 꼼지락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려서 더 보고 싶은데.”

그가 속삭였다. 루나의 얼굴이 폭발할 듯 붉어졌다.

“벗어도 됩니까.”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가 바지를 풀어 내리자,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봐도 적응 안 돼.’

이렇게 큰 게 보통이냐고. 도대체 저게 어떻게 몸 안에 들어갔던 거지? 그의 성기 끝이 뿌연 쿠퍼액으로 젖어있었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키스의 하반신에 허리를 가져다 붙였다.

“나만 하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아서 참 기쁜데.”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조급했다. 아, 이러다 진짜 이 여자를 가지고 싶을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이런 느낌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

아키스가 루나의 허리를 잡고 단번에 자신을 삽입했다. 뜨겁고 질척대는 그녀의 음부는 거짓말처럼 그의 것을 쑥 삼켰다.

루나는 콧숨을 쉬며 고개를 꺾었다.

압박감은 그다음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성기가 한 번에 삼켜지자, 소변이 마려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번 느낌은 또 달랐다. 뱃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흐으, 응…….”

“당신, 너무 조여. 쉬, 천천히.”

아키스가 이를 물고 말했다. 루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처음엔 확 아픈 느낌이 들었는데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고통이 묘한 쾌락이 되었다. 급한 건 급한 대로 좋았다.

“박으니까 미치겠군. 당신 안, 미치겠어.”

아키스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푹푹.

그가 쳐올리기 시작하자 살덩이 부딪히는 소리와 물 질퍽이는 소리가 루나의 귀를 간질였다. 루나는 다리의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맞닿은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으, 으응…… 으.”

자꾸 팔다리에 힘이 빠지자 아키스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루나는 온몸으로 그에게 안긴 채 발정 난 고양이처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흐응, 응…… 아아……!”

루나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이며 동조했다.

“흑…….”

문득 이런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눈가에서 눈물이 퐁퐁 솟았다. 아키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가에 키스하며 눈물을 핥았다.

“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울지 말아요.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서 그런 거야. 온몸에서 단내가 나. 당신 몸이 내 걸 먹으니 더 단내를 풍겨.”

아키스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아키스가 오른팔로 그녀의 상체를 품에 넣고 그러안은 채, 루나의 오른쪽 무릎 아래로 왼손을 넣어 확 들어올렸다.

“흣!”

상체가 다리에 딸려 올라가며, 공중에 비스듬히 떴다. 무릎을 거머쥔 아키스의 팔 힘이 너무 세서 온몸이 그에게 매달린 기분이었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아. 응……!”

그대로 그는 사정없이 쾅쾅 꽂아 넣기 시작했다.

“읏!”

마찰이 더 깊어지며 푹푹 찔리는 소리가 났다. 루나가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오른 어깨를 침대에 꽉 눌렀다. 그러나 루나의 다리는 계속 아키스의 손에 잡힌 채였다. 그는 루나의 다리 한쪽을 높이 올린 채 계속 전진했다. 안을 돌리면서 쑤시고, 뿌리까지 넣을 듯 깊게 처넣었다가 공중에서 치고 빠지고, 루나는 어느새 부들부들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하아, 흐응…….”

루나의 온몸이 전율했다. 음문이 조여지고 항문까지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뭐가 팡팡 터지는 것 같았다.

“갔어? 빠르군.”

아키스가 속삭였다. 더운 그 목소리가 뜻밖에 무심하게 들려 루나의 배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아키스의 것을 덥석 삼키자 아키스의 머리도 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잡아먹을 듯 자신의 것을 삼켜 얽힌 내벽 전체에서 더운 애액이 분비되었다. 그곳에 꼼짝없이 갇힌 채, 아키스는 자신을 쥐고 흔드는 쾌감을 느꼈다.

‘이 여자 때문에 미치겠어.’

기묘할 정도의 일체감, 전율이 일 정도의 쾌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는 조였던 목구멍을 풀며 자신을 풀어놓았다. 끝까지 처박은 채였다.

“하아…….”

온몸에 내쏘아진 진한 정액이 맞물린 틈새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 루나는 온몸에 힘을 뺀 채 아키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흐읏!”

루나는 어깨를 떨었다.

아직 그녀에게 너무 벅찼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충만감이 가득 채웠다. 아키스는 루나의 땀에 젖은 이마부터 얼굴까지를 물고 빨았다. 그 애무를 받으며 루나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내가 어떻게 돼 버린 거지.’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루나는 더운 숨을 쉬다 아키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집어삼켜지는 것 같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 * *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 아키스의 약혼자 새틴이 보낸 여인이 방에서 나오지 않자, 디온은 긴장하면서도 안심했다.

혼전의 여인, 그것도 코르티잔으로 추정되는 이를 안았다면 아키스의 기분이 더러울 것은 자명했다. 어쩌면 그녀를 들여보낸 집사와 자신을 엄하게 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온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아키스의 몸은 차도를 보일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아키스가 침실에서 나왔다. 그의 안색은 한결 좋아져 있었다. 복장은 온통 흐트러져 있었고, 몸 위에 두꺼운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편할 정도로 색기를 풍기는 얼굴 위로 검은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밖에서 준비하도록. 시중도 들이지 마.”

공작의 침실에는 전용 욕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욕실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다른 방을 욕실을 사용하려는 저의가 뭔지 추측하며 디온은 아키스의 침실 안을 힐끔거렸다.

그런 디온의 생각을 읽은 듯, 아키스가 짧게 명령했다.

“침실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라. 아무도 내보내지도 말고.”

“네.”

대답하며 디온은 아키스의 눈치를 보았다. 방금까지의 예상과는 달리 아키스는 심기가 꽤나 괜찮아 보였다.

디온은 사실 아키스가 곧바로 여자를 바로 쫓아낼 줄 알았다. 황궁에서 자기 침대로 숨어든 귀족 영애를 반라로 집어 던져 쫓아냈던 아키스였다.

“더 자게 놔둬라.”

아키스가 나직하게 한 말에 디온은 내심 놀랐다. 디온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버몬드 남작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저분을 가능하면 오늘 모시고 가고 싶다는데요. 내일 다시 오라고 할까요?”

아키스는 디온을 노려보았다. 디온은 영문을 모른 채 흠칫했다.

“남작가의 마차는 당장 돌려보내라. 그 마차엔 아무도 타고 가지 않아. 그리고…… 내일도 안 돼.”

아키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버몬드 남작가의 루나라는 여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지금 당장. 그리고 내가 예전에 새틴의 주변을 조사하라고 한 적 있지 않나?

“네, 서류는 공작님의 서재에 두었습니다. 찾아 드릴까요?”

새틴과 약혼하고 나서 그녀의 주변을 조사했다. 딱히 수상할 것 없다는 디온의 보고에 보고서를 따로 읽어 보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뒤에도 서류를 꽂아만 두었다.

“됐다. 직접 찾아보지.”

아키스는 서재로 들어가며 말했다.

서재에서 문서를 찾은 그는, 서류를 펼쳤다. 새틴의 가족 관계란에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

입양한 자매, 루나 드 버몬드.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이름에 손을 짚었다.

* * *

깊은 꿈속. 루나는 어떤 꿈을 보았다.

또 그 꿈이었다. 검은 꽃에 온몸이 둘러싸이는 꿈.

‘……이게…… 뭐지?’

꿈속에서 그녀는 드래곤을 만났던 그 절벽 위에 있었다. 루나의 손목 위에는 그때 보았던 검은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또…….’

루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갑자기 손등 위의 작은 꽃가지 중 하나에 봉오리가 피어났다. 그 신비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나는 깨어나듯 눈을 떴다.

“……여긴…….”

안개 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그녀는 낯선 천장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 위에는 두터운 이불이 덮여 있었고 그녀는 알몸이었다. 그녀는 아직 공작의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감싸고 조심조심 일어나 침대 주변에 흩어진 속옷을 주워 올렸다. 뷔스티에는 무사했지만 거들은 찢어져 있었다.

루나는 침대 옆의 등불을 켰다. 그러자 엉망이 된 시트 위로 그녀의 엉덩이 아래 땀과 정액, 애액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뺨이 붉어져서 급히 시트를 덮어 가렸다.

‘……엉망이네.’

루나는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충동과 실패로 점철된 날.

바닥을 겪고 욕구에 몸을 내맡긴 날.

‘……도대체 그건 뭐였을까.’

공작의 심장 소리를 듣고 그가 흥분한 걸 느꼈을 때 몸을 관통하던 그 느낌. 그건 뭐였을까. 그때 루나도 서서히 이성을 놓아 버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쾌감.

이상할 정도의 일체감과 쾌감. 무서울 정도의 그 느낌을 떠올리니 어깨가 다 떨렸다. 정말 생소한 감각이었다.

루나는 시트로 몸을 감싼 채 일어났다.

‘……내 옷.’

그녀가 입고 온 붉은 드레스가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나는 공작의 침실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지?’

어젯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낯선 장소에서도 까무룩 잠들었나 보다. 시간은 이미 깜깜한 새벽이었다.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방에 남겨 두고 어디 간 걸까. 어쩌면 하룻밤을 보낸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공작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루나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 * *

아키스는 무심한 시선으로 서류를 보았다.

[루나 드 버몬드.

입양된 선대 남작의 외동딸.

선대 버몬드 남작 사후, 남작 직위는 차남에게 승계되었음.]

그 외에 적혀 있는 내용은 별거 없었다.

집안사람 외에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고, 사교계 활동도 전무하며, 외부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어 보인다는 짤막한 몇 줄뿐이었다.

한마디로 루나는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새틴이 양자매를 이용해 내가 정상적인 사내인지를 시험하려 했다는 건가. 생각보다 비정한 구석이 있군.’

새 옷으로 갈아입고 열이 조금 내린 그는, 오늘 낮보다 한층 혈색이 돌았다. 몸도 가벼웠다.

“디온.”

아키스는 종을 쳐 디온을 불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디온이 급한 걸음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네, 공작님.”

“내가 허락하지 않은 여자를 침실로 들여? 마지막 코르티잔을 돌려보냈을 때 다시는 그러지 말라 명령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언짢아하실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작님의 상태가…… 극단적인 조치라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벌하신다면 받겠습니다.”

아키스는 디온을 싸늘하게 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다지 화가 난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배부른 맹수처럼 기분이 몹시 나른했다. 그는 지금의 좋은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됐다. 필요한 일이기는 했지. 여인과 밤을 나누어야만 차도가 생긴다고 주치의도 말했으니. 그러나 다시는 내 명령을 거스르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아키스는 미간을 눌렀다.

그는 이미 한 번 사고를 저질렀다. 그것도 소년을 상대로. 책임지지 못할 사고를 두 번이나 치르는 건 질색이었다.

침실 안에 있는 여인, 자신을 루나라고 밝힌 그녀를 안았을 때 그는 거의 이성을 놓았었다. 그리고 지독한 쾌락으로 그녀를 안고 또 안았다. 그녀가 힘들다 흐느끼며 애원할 때까지. 그리고 이제 그는 한층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새틴이 멍청한 일을 벌여 준 덕분에 일이 쉽게 정리될 것 같았다.

아키스는 문득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새까만 꽃문양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라.”

그가 속삭였다.

카일라는 고대의 주문 중 하나로, 반영구적인 환시를 일으키는 마법이었다. 그의 손목에 자리한 꽃문양이 사라지고 그 위로 서서히 그의 본래 피부색이 드러났다.

‘꼴 보기 싫으니 당분간 이렇게 둬야겠군.’

아키스는 답답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검은 꽃문양을 공유한 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문신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현재 그는 정상적으로 여인과 감정을 교류하거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쨌든, 단번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회복된 건 놀라웠다. 그는 한숨을 들이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하녀장이었다. 하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

“공작님, 침실에 계신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만날 테니 서재로 안내하도록.”

“네……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그분께서…….”

하녀장이 조금 민망한 듯 말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는 공작님을 뵐 수 없다고 하는데요.”

“…….”

이건 또 무슨…….

의아한 듯 아키스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준비되면 오라고 해.”

* * *

루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작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고운 얼굴의 중년의 하녀였다.

하녀는 루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루나는 무심결에 그녀의 손을 보았다. 하녀는 귀부인들의 수발을 드는 일반 하녀의 손이 아닌, 노동한 이의 거친 손을 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저, 제 옷은 어디 있죠? 돌아가야 하는데…….”

말해 놓고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돈을 빼앗긴 데다 이런 꼴까지 당했는데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지금 새틴을 보면 목을 졸라 버리지 않을까. 그만큼 새틴에 대한 분노는 컸다.

“제가 타고 온 마차는 돌아갔죠?”

“네, 그렇습니다. 귀가에 대해서는 공작님을 뵙고 의논하시죠. 먼저 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루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 드레스는요?”

“드레스가 다 망가져서 수선을 보냈습니다. 곧 새 옷이 준비될 겁니다.”

루나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아키스가 거칠게 옷을 벗긴 탓에 치맛단은 물론 거들까지 모두 찢어져 버렸다.

“저, 새 속옷도…….”

“네, 주무시는 사이에 시내에 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곧 심부름꾼이 돌아올 겁니다.”

“……아, 네.”

루나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목욕물을 들이겠습니다.”

하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온몸이 후끈거려 때마침 목욕을 하고 싶어 죽을 싶던 차였다. 루나는 그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침대의 휘장을 닫았다. 그사이 하인들이 뜨거운 물을 방 안으로 날라 왔다. 분주히 오가며 욕조를 채워 목욕물을 준비했고, 루나는 민망해서 휘장 뒤에서 몸을 웅크렸다.

“제가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부인들께서 쓰는 목욕 용품은 없지만, 공작님께서 쓰시는 향유도 그럭저럭 향이 좋답니다.”

목욕이 준비되었는지 하녀가 침대 휘장을 열고 말했다.

“네, 그런데 왜 목욕물을 욕실에서 준비하지 않으시고…….”

이런 오래된 저택에는 고대의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집주인의 개인 욕실에도 수도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휘장 너머 본 하인들은 밖에서 목욕물을 길어 왔다.

“있습니다만, 물 받는 소리 때문에 아가씨의 잠을 깨울까 염려하신 공작님께서 따로 목욕물을 데우라 하셨습니다.”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 이렇게 다정할 줄 몰랐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루나는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조심스레 욕조에 몸을 담갔다.

‘……없어.’

혹시 몰라 그녀는 손목을 확인했다. 꿈속에서처럼 손목에 다시 꽃문양이 생겨났을까 봐. 하지만 그녀의 하얀 팔은 아주 깨끗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하녀가 물 안에 향긋한 향유를 부었다. 우드 향이 나는 향유에서는 그의 체향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루나는 제 피부를 쓸었다.

‘……또.’

달빛 서점 2층에서 그와 정을 통한 날.

그날, 그가 몸에 새겼던 키스 마크들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새로운 흔적이 생겨났다. 붉게 달아오른 손목하며 목과 쇄골, 배까지 깨문 자국들. 이번에도 공작이 남긴 흔적이었다.

아키스는 정사를 치르자 이번엔 그녀를 눕혀 놓고 온몸을 남김없이 물고 빨았다. 그다음에도 몇 번이나 다시 꺼떡이며 발기한 성기를 들이대고…….

‘점잖아 보이는데 밤에는 정말 딴판이야. 깨무는 걸 좋아하는 건 물론이고, 어쩌면 그렇게 집요하게 온몸을…….’

그 생각을 하자, 폐부에 숨이 차고 민망해졌다.

“물은 괜찮으세요? 불편하신 덴 없으신지요.”

손에서부터 짐작했지만, 하녀는 원래 몸시중 드는 사람이 아닌 듯 조금 서툴렀다.

루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 혼자 씻어도 될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이쪽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쓰셔도 됩니다.”

하녀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루나는 물속에 몸을 깊게 담갔다.

어차피 떠나려고 했지만 오늘부로 루나에게 집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루나에게 남은 길은 다시 남장을 하고 루의 신분이 되어 다른 도시에서 번역 일로 돈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물론, 문제는 산재했다.

또다시 남장하는 건 그녀의 안위를 내거는 일이었다. 정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목욕을 마쳤다. 밖으로 나오니 하녀가 준비해 둔 여성용 속옷과 드레스, 그리고 새 화장품들을 건네주었다. 아마 어떻게든 새벽에 문을 연 여성용 잡화점을 찾아낸 듯했다.

루나는 안심했다. 화장품이 있으면 본래 얼굴을 가리기 좋으리라. 그가 혹시라도 ‘루’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루나는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미색의 드레스는 유행이 조금 지난 수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질이 아주 고급스러웠다. 정기적으로 세탁을 한 듯 좋은 냄새가 났다.

“이 드레스는…….”

“아, 돌아가신 선대 공작 부인의 드레스입니다. 지금 주인님의 모친뻘 되시는 분이죠. 보관해 두고 있던 걸 아가씨를 위해 급히 손질했습니다.”

“……그렇군요.”

루나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었다.

“준비가 되시면 공작님께서 바로 보자고 하십니다.”

“지금요?”

그녀가 제법 오랜 시간을 기절하듯 잤기에 시간은 깜깜한 새벽 중이었다.

“아까부터 아가씨가 깨어나는 걸 기다리고 계셨답니다.”

“잠깐만요, 저…… 공작님을 뵙기 전에 화장을 좀 해야겠어요. 지금 제 모습이…….”

하녀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 새벽에 화장을 하겠다고?

“그러면, 공작님께 조금 더 기다리시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중년의 하녀는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이 때의 아가씨라면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게 이상하진 않지, 하고.

루나는 자신이 오해받는 것을 깨닫고 조금 민망해졌다.

* * *

하녀는 루나를 공작의 서재까지 안내해 주었다.

서재의 무거운 문이 열렸다. 공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낯빛은 한결 나아 보였다.

“일어났군요.”

아키스가 보던 서류를 덮고 천천히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의 보라색 눈을 마주하니, 루나의 심장이 뛰었다. 동시에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까지 짐승처럼 한데 뒹굴던 상대와 체면을 차린다는 건 묘한 느낌이었다.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루나를 대하는 아키스의 얼굴은 싸늘했다. 루나는 그런 그가 멀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식사와 와인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가 졌지만 식욕이 생기진 않았다.

“무슨 말을 하실지 대강 알고 있어요.”

루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키스가 뭐라고 말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키스는 지난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루나는 아키스가 독에 중독되어 있는 걸 잘 알았다. 운명의 장난인지 벌써 그와 두 번이나 밤을 나눴다. 그것도 두 번 다 독 기운 때문에.

그가 여자를 지독히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루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가 있으면 곤란했다.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 행운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어요.”

아키스는 루나의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안다니 다행이군요.”

루나는 쓰게 웃었다.

문득, 그녀는 그의 몸 상태가 궁금해졌다.

“……아까보다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으세요. 다 나으셨어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아직 몸에 열이 돕니다.”

“…….”

루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거동이 가능하고 이렇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여기서 그녀가 뭘 더 해 줄 의무는 없는 셈이었다.

“아직 저에 대해 오해하고 계시나요?”

“당신이 코르티잔이 아니라는 건 이제 압니다. 코르티잔이라도 상관없지만.”

“그러시겠지요.”

루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네, 그러세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아마도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어젯밤 일은 어처구니없는 사고이자, 충동이었습니다.”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루나는 그 말에 조금 심장이 아렸지만,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그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어젯밤, 내가 무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뇨, 무례하지 않았어요. 충동이었다는 것도 인정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루나는 이어질 뻔한 말을 기다리며 속으로 숨을 삼켰다.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애원한 것까지 모두 덮고 싶겠지.

결백한 그이니 만큼 어쩌면 그녀의 입을 막는 대가로 큰돈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제게 새틴에 대한 화풀이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눈치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루나는 이 도시를 뜨기 위한 도움이 필요했다. 큰돈도 필요했다. 그러나 과연 도망가기 위해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루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의중을 추측하고, 자신의 대답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네, 좋아요. 네……?”

루나는 무심결에 긍정했다. 그랬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결혼이요?”

루나는 아키스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미혼의 여인을 안았는데 사내로서 책임지는 게 당연합니다.”

“자, 잠깐만요. 공작님께서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잖아요?”

루나는 그 말을 해 놓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앞으로도 영영 몰라야 했다.

“압니다. 당신 입으로 말했죠. 이름을요.”

“……이름을 안다고 저와 결혼하겠다고요? 그게 결혼에 필요한 요건인가요?”

루나는 어이가 없어 비꼬았다. 아키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당신이 버몬드 남작가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마침 버몬드 남작가에서 신부를 맞이하겠다는 선대의 약속도 있으니 명분은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공작님은 새틴의 약혼자시잖아요. 그 혼인 약속은 새틴과 하신 게 아니시던가요?”

루나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파혼 요구서를 보냈습니다. 공작가와 남작가의 약속은 당신과의 혼인으로 이행되게 될 겁니다.”

“…….”

루나는 새틴이 파혼 요구서를 받은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공작이 침실에서 지나가듯 했던 말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쩐지 새틴이 미친 것처럼 굴더라니, 그 애는 어쩜 이렇게 투명한지…….’

루나가 여기 오기 직전, 새틴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루나를 쥐 잡듯이 잡으며 일종의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지극히 새틴다운 행동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혼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수월하게 풀리겠군요. 잘되었습니다.”

아키스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너무 태연하게 해서 루나는 점점 제 쪽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잘되긴 뭐가 잘돼?’

거기다 아키스의 표정은 침착하다 못해 차가웠다.

절대 청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 루나는 그에게 무슨 의뢰 내용을 지시 받는 입장이 된 줄 알 뻔했다. 마치, 달빛 서점에서 그를 위해 일을 했던 그 순간처럼.

‘최대한 빨리 혼인해 주십시오, 최우선으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받지 마십시오. 내일 바로 결혼하러 오겠습니다.’

루나는 속으로 일을 맡길 때의 아키스의 말투를 빗대어 혼자 비꼬았다. 머리가 띵해서 현실 도피라도 하고 싶었다.

“하룻밤을 보냈다는 이유로 제게 청혼하실 의무는 없어요. 공작님께는 아내가 필요 없으시잖아요?”

루나는 그가 새틴을 어떻게 냉대해 왔는지 잘 알았다.

그는 아내가 필요한 부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인에게 애달파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여자를 돌같이 보는 사내였다. 그 증거로 지금도 루나를 얼음장 같은 태도로 대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난 아내가 필요합니다.”

아키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공작님은 여자 없이도 잘 살 분 아니시던가요?”

루나의 질문에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간략히 설명했다.

“난 공작위를 물려받으며 황가와 약속했습니다. 일정 기한 안에 혼인하여 공작의 계승 요건을 채우겠다는 걸요. 최소한 몇 년간은 결혼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누구와든, 형식적으로든.”

“……그래서 새틴과 약혼하셨던 건가요?”

루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그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어쨌든, 난 당신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군요.”

아키스는 루나가 몹시 적절한 결혼 상대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집안이라면 수양딸을 코르티잔으로 둔갑시켜 양자매의 약혼자에게 바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 대해 짤막하게 적힌 서류만 봐도 어렵지 않게 그녀의 처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가난한 귀족 가문, 그 집안의 구박받는 위치의 군식구, 창부 취급까지도 받는 수양딸. 바보가 아닌 이상 그곳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아키스가 그녀를 안았으니 청혼은 당연한 예의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앞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알겠지만, 당신에게 반해서 청혼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청혼이자 제안입니다. 내게는 아내가 필요하고, 우리는 어젯밤을 같이 보냈지요. 필요로 인한 청혼이지만 당신이 내 아내가 되어 준다면 부족함 없는 사례가 돌아갈 겁니다. 나 또한 예의를 다해 당신을 대할 것이고요.”

그제야 루나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평범한 청혼이 아닌 일종의 ‘제안’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라니…….’

루나는 그가 내민 종이를 읽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재산 목록이 적혀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화, 그리고 지방의 땅들. 각 세부 항목에는 그 재산들에서 나오는 연 수입들도 적혀 있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액수였다.

“이게…… 다 뭐죠?”

“공작 부인에게 주어지는 재산 목록입니다. 나와 혼인하면 당신 것이 될 겁니다. 다만, 혼전 계약서에는 사인해야겠지요.”

루나는 지금 갈 곳도, 미래도 없는 신세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 목록들은 너무 달콤하고 엄청났다.

잠시 눈을 떼지 못하던 루나가 종이에서 시선을 뗐다.

“왜 이렇게 많은 재산을 주시는 거죠?”

“공작 부인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재산이니까요.”

“대가는 뭔데요? 정상적인 혼인이라면 제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시겠죠.”

금발의 아름다운 그녀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듯했다. 아키스는 훨씬 수월하게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군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몹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난,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

아키스는 루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키스는 마음을 다해 아내를 사랑할 수도,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에게는 반쪽짜리 각인자가 있었으니.

소년을 찾아내 각인을 끊지 않는다면, 그는 영영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절반짜리 각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맞으면 아픈 공이었다. 아키스는 자신이 혼인하게 될 아내에게 어떤 종류의 책임감을 느꼈다.

그나마 다행히도 지금은 독 때문인지 그의 성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그러지고 그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각인이 강해진다면, 그 소년 외의 존재에게 성욕을 느끼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어쩌면 몇 개월 동안.

운이 나쁘면 몇 년 동안.

언젠가 문제가 해결되긴 할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한들 공작가의 힘으로 찾아낼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소년을 찾아내면, 그 순간이 오면 소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문제지.

그러나 그녀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 가문의 ‘각인’에 대한 이야기는 극비였다.

그는 대신 짧게 말했다.

“내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봤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결혼 생활에서 감정의 교류를 요구하지 말라는 입막음인가요?”

그녀는 초록색 눈으로 아키스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군요.”

아키스는 약간의 가책을 느끼며 묵묵히 대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왠지 불편했다.

“그러면, 정말 아무나 상관없기에 제게 청혼하시는 거군요.”

루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상황에 모두 현실감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절망에 빠져 있었고, 오늘 이 저택에 와서는 바닥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생의 동아줄을 뜻밖의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그녀에게 던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하늘을 향해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왜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이런 제안을 받게 하냐고. 왜 계약이라는 비참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 사내 옆에 머무르고 싶다는 유혹 속에 그녀를 몰아넣느냐고.

“당신이 총명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

“그리고, 당신도 절 책임져야 하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논리인지 모를 말이었다. 루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전 미혼의 당신을 건드렸고, 당신 또한 그랬지요.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아니, 지금 저한테 공작님을 건드렸으니 책임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상식 아닙니까?”

무슨 희한한 말인지.

루나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눌렀다. 그가 이렇게까지 성에 결백한 남자일 줄 몰랐다.

‘그 책임감인지 뭔지 때문에 전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청혼하다니 정말 대단하네. 차라리 ‘루’에게 훨씬 다정했던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루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의 냉대에 가까운 표정을 보면 아까의 열정이 거짓말 같았다.

“제 생각엔 공작님이 훗날 이 제안을 후회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억지로 제게 청혼하실 것 없어요.”

“무슨 뜻입니까?”

“새틴과 약혼하셨을 때, 그 애와 사이가 좋으셨던 것도 아니잖아요. 아무리 필요로 인한 결혼이라고 해도 아무하고나 해 버리면 결국 파국을 맞을 거예요. 어쨌든…… 몇 년간이라도 혼인 생활을 이어 가야 하잖아요? 그렇죠? 인생은 짧으니까 맞지 않는 사람과 살면 생활이 엉망이 될 수도 있어요. 아무리 누군들 상관없다고 해도, 결혼 같은 건 신중해야 옳다고 생각해요.”

결국 루나는 참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난 당신에게 억지로 청혼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계시면 다 티가 나는걸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아키스는 그제야 그녀가 아까부터 눈치를 보던 이유를 깨달았다.

사실 그는 루나가 이 방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녀를 만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독.’

그 때문에 평정을 유지하느라 이미 심기에 골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청순한 외모와는 달리 숨만 쉬어도 유혹적이었고, 독은 끊이지 않고 그의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의 핑크빛 입술을 다시 삼키고 싶었고, 그녀를 서재 책상 위에 올리고 온몸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어젯밤의 경험으로 그녀의 몸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았다.

저 하얀 피부가 얼마나 보드라운지, 목선에서 풍기는 봄의 사이프러스 숲 같은 냄새가 얼마나 아찔한지…… 말랑한 두 가슴 둔덕은 제 손안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뭉개지는지.

그리고 젖기 시작하는 그녀의 도톰한 음부 사이는 지옥과 천국으로 그를 오가게 만들었다. 하나가 될 때의 감각은 또 어떤가. 그녀의 아랫입을 먹어버린 채 윗입까지 물어뜯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제처럼…….

그의 생각은 위험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는 바지 안에서 단단히 일어나는 하반신을 느꼈다. 그리고 아키스는 그런 자기 자신에게 환멸이 났다.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아키스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난 지금 당신에게 다시 키스하고 당신의 목덜미를 핥고, 또 깨물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억누르고 있으니 가능하면 자극하지 말아 주시길. 오늘 새벽에 문을 닫은 잡화점의 주인을 얼러서 구입해 온 당신 속옷을 다시 못쓰게 되면 곤란하잖습니까. 안 그래요?”

“…….”

루나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상상도 못한 대답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뭐 이런 남자가…….’

루나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먹은 최음 독은 아주 강력하고 지긋지긋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당분간 당신을 보면 그런 생각밖에 못할지 모르니, 혼인을 수락할 것이 아니면 지금 당장은 날 자극하는 말을 삼가는 게 서로에게 좋겠습니다.”

“누, 누가 당신을 자극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키스는 그녀의 눈을 똑똑히 보며 말했다.

루나는 하반신에서부터 체온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제발 뺨이 붉어지지 않았길 기도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게 힘들어졌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정말 혼란스러우니까요.”

루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만일 돌아갈 곳이 있었다면, 그녀가 피땀을 흘려 번 돈이라도 수중에 있었다면 그녀는 이 위험천만한 요구를 단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치고 의지할 곳 없는 그녀에게 공작의 제안은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적어도 영혼결혼식이나 도망쳐서 길거리의 거지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한 미래를 피해서 달리고 달렸더니, 이번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달콤한 덫이었다. 그에게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위험을 머금은 위험천만한 덫.

그러나 그녀 인생에 다시없을 제안인 건 확실했다.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죠.”

아키스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루나의 뺨만 애꿎게 달아올라 있을 뿐이었다.

“하룻밤 드리죠. 오늘 아침까지 결정해 주시길.”

“……하룻밤요?”

루나는 그의 채근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이 남자는 결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겨우 몇 시간 만에 하라는 건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아키스는 루나를 그만 쳐다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상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는 그의 인내심이 끊어질지도 몰랐다.

다음번에 그녀에게 손을 댄다면, 반드시 그녀와 혼인한 후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여인이 아닌 이상 절대 손대선 안 됐다. 그게 그의 신념이었으니.

“이만 침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아침에 식사하며 마저 이야기합시다.”

루나는 핑크빛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보았다. 몹시 자극적이라 아키스는 루나를 응시하고 있던 것을 바로 후회했다.

“그러시겠죠. 안녕히 주무세요.”

루나는 입술을 깨물고 약식으로 인사한 후 방을 나왔다. 서재를 나오니 등에 힘이 쭉 빠졌다.

그제야 허기가 졌다. 손님방으로 안내될 줄 알았는데,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그녀를 아키스의 침실로 안내했다.

“……저.”

루나는 당황해서 하녀를 보았다.

“공작님께서 손님방에서 주무시겠다 하셨습니다. 이 집에서는 공작님의 침실이 가장 좋은 방이니까요. 집에는 손님이 거의 오지 않아 손님방 가구가 그리 좋지 않답니다.”

“아…….”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가 새벽에 침실로 들어오는 건 아닌지, 그럼 곤란하지 않을까 공연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루나는 혼란을 느끼며 공작의 침실로 향했다.

* * *

돌아온 침실에는 간단한 간식거리와 함께 잠옷 대신 가운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늦은 새벽녘이었고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루나는 스스로 드레스를 벗고 가운을 입었다. 입고 나서야 가운이 그게 공작의 가운임을 깨달았다. 그의 큰 옷에 폭 둘러싸이자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작가에 살면 먹을 건 잘 나올 모양이야.’

루나는 탁자 위에 놓인 빵과 쿠키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빵을 조금 먹었다. 허기가 조금 해결되자 천천히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루나는 공작의 침대 위로 그의 가운만을 걸친 채 몸을 누였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그녀는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침대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동침했다고 자기를 책임지라는 건 뭐야. 어차피 독 때문이면서.’

루나는 여염집 처녀를 건드린 동네 총각이 된 기분이었다. 처음인 척 행세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그럼 그날 밤…… 그가 독을 먹은 날의 나는 뭐가 돼.’

루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아키스가 제안한 돈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게다가 거취 문제까지 해결된다. 아키스는 결혼이 계속될 필요는 없다는 걸 암시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단 몇 년이라도 안락하고 부유한 생활을 손에 넣는다면…… .

아키스가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지만 않는다면 루나는 팔자를 고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아키스는 루나의 정체를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말 싫다, 내 이런 마음…….’

루나는 그의 제안에 흑심을 품게 되는 자신이 싫었다. 아키스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헛된 희망을 품는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정신 차려, 루나.’

루나는 스스로를 채근하며 제 양 볼을 쭉 늘렸다.

그녀처럼 삶이 안정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감정은 독이고, 욕구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남자와 두 번이나 잤는데 마냥 초연한 여자가 있다면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진 여자이리라.

‘……감정은 배제하고 생각하자.’

만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최대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야 했다. 만일 수가 틀리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그런 상황도 만들어 둬야 했다.

‘만일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나올까.’

루나는 공작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제법 알았다.

자신의 정의나 믿음이 확고하기에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한 건 어떻게든 밀어붙이는 부류. 그래서 ‘루’로서 그의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고자 했을 때도 분노를 사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그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권위주의자였다. 그가 아무리 겉으로는 상냥할지언정,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수치심이나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공작이 마음먹었다면…… 그는 나와 강제로 혼인할 수도 있을 거야. 그는 그럴 힘을 가졌어.’

만약 공작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루나는 도망갈 길이 없었다.

‘혹시 성욕 때문에 결혼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독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도, 한두 번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였어…….’

루나는 가만히 자신의 팔을 어루만졌다.

그는 참 이상했다.

보통 권력 있는 사내들은 창부들에게 성욕을 풀고 애인을 사귀는 것에 서슴없었다. 그런데 공작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아마 그가 괴짜인 걸 감안하더라도 제국에 저런 남자가 둘은 없을 거다.

‘……나를 위한 선택.’

루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의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메모하기 위한 종이와 펜, 그리고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루나는 램프를 기울여 종이에 비추고 급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 맞다, 내 필체.’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의 필체를 안다는 것을 떠올렸다. 번역 일을 하면서 수없이 그에게 자료를 손수 써서 건넸다.

루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가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마구 글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 * *

결국, 루나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혹시 몰라 침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직접 드레스를 입었다. 곧, 루나를 부르러 온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아침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제가 몸치장을 도와드릴게요.”

루나는 대답 대신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몸을 숙여 밤새 쓴 메모를 접어 문 아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 편지를 공작님께 전해 주세요. 그리고 답변을 들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도요.”

“네?”

하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냥 이 쪽지를 전해 주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

루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에 등을 기댔다.

* * *

“생각보다 효과가 좋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주치의가 아침에 아키스를 왕진하고 그렇게 말했다.

몸이 바로 차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아키스는 별말 없이 아직 창백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다.

공작이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그보다는 공작가에서 여인이 아침 식사를 하는 일도 생소했다. 식솔들은 정성을 들여 아침부터 만찬을 준비했다. 공작은 손님방에서 씻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옷을 입었다.

“……공작님께서 여인과 아침을 맞이하시다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디온이 집사에게 소곤거렸다.

“그분께서 코르티잔이 아니신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집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분과 둘이서 식사하실 거면 아침부터 저는 왜 부르셨는지…….”

디온은 의아한 듯 중얼댔다.

집사는 티포트를 들고 디온과 함께 아키스가 자리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아키스는 오랜만에 식당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집사는 아키스의 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럭저럭, 좀 낫다.”

“침실에 계신 분을 깨울까요?”

“그래.”

아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문에서 고개를 뗐다.

“그리고, 디온.”

“네, 공작 각하.”

“어제 집에 방문했던 손님과 혼인하기로 했다. 그러니 적당히 준비하도록.”

시선은 여전히 신문을 향한 채 아키스가 몹시도 평화롭게 말했다.

반면, 이야기를 들은 고용인들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집사는 뜨거운 티포트를 공작의 무릎에 떨굴 뻔했다.

“네!?”

디온은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언제 결정하셨습니까?”

“몇 시간 전에.”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청혼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니,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아키스는 몇 초 후, 이어 대답했다.

“물론, 수락하게 만들 거지만.”

아까부터 얼음이 된 집사는 입만 벌린 채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티포트가 위협적인데, 그만 내려놓도록.”

“……네, 네.”

집사가 뚝뚝 끊어지는 동작으로 티 트레이에 티포트를 옮겼다. 집사와 디온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 식당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루나를 데리러 갔던 하녀장이 들어왔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 하십니다.”

“편지?”

아키스는 바로 쪽지를 펼쳤다.

“……글씨를 참 못 쓰는군.”

쪽지를 본 아키스는 먼저 그녀의 충격적인 악필에 감명 받았다.

춤추는 지렁이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글씨를 쓰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단정한 외모와는 다르게 개성적인 글씨가 귀엽다고 할까, 의외였다.

신기하게도 읽을 수는 있었다.

“…….”

편지를 읽는 아키스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이건 또 무슨 뜻인지.”

아키스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디온과 집사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편지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내게 결혼 조건을 거는구나. 그런데, 몇 가지 조항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디온은 공작이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에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키스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협상은 내가 아쉬운 쪽이 될 것 같구나.”

“네?”

“모든 협상은 불리한 쪽이 유리한 쪽을 찾아가기 마련이니까.”

아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똑똑.

아키스의 침실에 앉아 있던 루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접니다.”

문밖에서 아키스가 짧은 목소리로 받아쳤다.

루나는 무거운 문을 낑낑대며 조금만 열었다. 그녀는 문틈으로 눈만 빠끔 보여 준 채 입을 열었다.

“제 조건을 읽으셨나요?”

“읽었습니다.”

“전부 수용하실 건가요?”

“일단 대화합시다. 협상해 보죠.”

“전면 수용이 아니라면 제 태도 변화는 없어요.”

루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아키스가 문 사이에 자신의 발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대화로 합시다. 숨지 말고.”

“하지만…….”

아키스는 루나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뒤로 빨간 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아키스는 침대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위협적으로 굴지도 않고, 가능한 한 조건을 들어주겠습니다. 다만 세부적인 조건만 이야기합시다. 서로 눈을 보고.”

루나는 아키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또 주책맞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미리 조건을 써서 주길 잘했지.’

아키스의 얼굴만 보면 머릿속에 불꽃이 튀고 냉정해지기 힘드니, 제가 원하는 조건을 관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아키스는 사내였고 루나는 여자였다. 이성 관계란 참 단순하고도 불합리한 것이다. 좋아하는 쪽만 냉정해지기 힘드니까.

궁여지책으로 조건을 써서 아키스에게 쪽지를 보냈다.

‘좀 괴팍한 조건들이라 화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루나가 아키스의 눈치를 보는 사이, 그가 루나에게 다가왔다.

“자, 잠깐만요!”

“내 서재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아키스는 루나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바동대는 그녀를 그대로 안고 바로 옆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엉겁결에 그의 품 안에 쏙 안긴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아키스의 품은 몹시 넓었고, 그의 팔은 탄탄했다. 그는 그녀가 작은 인형인 것처럼 쉽게 다루었다.

“……공작님?”

밖에 대기하고 있던 디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키스는 서재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디온은 마른침을 삼키고 서재 주변에 아무도 얼씬하지 말라 일렀다.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내게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난 대화를 피하는 걸 상당히 싫어합니다.”

“……저도 갑자기 안아 올리는 건 싫어해서요.”

“서로 싫어하는 걸 하나씩 알았으니 잘됐군요. 앉으시죠.”

아키스는 루나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루나는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도대체 이 조건들은 뭡니까?”

“……별로 어려운 조건도 아니잖아요.”

“어려운 조건은 아닌데, 이상한 조건은 좀 많군요.”

아키스는 루나의 앞에 그녀가 쓴 메모를 내밀었다.

“먼저, 첫 번째 조건.”

메모 제일 위쪽에는 휘갈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래 다섯 가지를 결혼 조건으로 요구합니다.

1번. 과거는 묻지 말 것.]

첫 번째 조항부터 아키스는 어이가 나간 지 오래였다.

“말 그대로예요.”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제가 그…… 어떤 과거를 가졌더라도 파고들지 말아 주셨음 해요.”

아키스와 결혼하게 된다면 새틴이 그에게 찾아와 자신에 대한 별의별 말을 다 할 것이다. 옛 남자가 있다느니, 문란하다느니. 그때 아키스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무엇보다 내 과거는 당신이잖아.’

아키스는 까맣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루나만 기억하는 그 일을 그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을 줄 알고 묻지 말라는 겁니까?”

“살인자나 암살자는 아니니 안심하세요. 어차피 제 과거도 조사해 보실 거잖아요, 그렇죠?”

“…….”

이미 새틴을 조사하며 그녀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아키스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루나는 뺨을 붉힌 채 작게 말했다.

“제가 말하는 과거는…… 좀 더 개인적인 일이에요.”

아키스는 뒤늦게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루나는 자신이 결혼 전에 애인을 두었을지 모른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 부인 같은 어마어마한 혼처에서 결혼 전 염문은 중요한 요소였다. 제국 귀족들의 결혼은 보수적이었다.

“어차피 진짜 아내를 구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 까다롭게 굴지…… 않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득인지 통보인지 모를 애매한 표현에 아키스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어차피 그녀가 코르티잔이라고 해도 책임지고 청혼하려 마음먹었던 그였다. 이상하게 껄끄러운 기분이 남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젯밤 일은 우연이었지만 책임은 현실이었다. 아키스가 그녀에게 청혼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을 비판할 권리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개인사는 파고들지 않기로 하죠. 그런데 두 번째는 더 첩첩산중이군요.”

[2번. 결혼 생활 중,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사면권 요청. 무슨 일이든 절대 화내지 않고 사면해 줄 것.]

아키스가 두 번째 조항에서 손을 뗐다.

“혹시 날 이용해서 뭐 큰 국가 중대사를 일으키거나 암살, 테러 사건에 연루될 예정이 있습니까? 과거는 비밀인 데다 큰 죄를 저지를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무조건 사면해 달라니. 이 정도면 의심할 수밖에 없군요.”

아키스가 비꼬았고, 루나는 뜨끔했다. 그는 감이 아주 좋았다.

사실 죄는 이미 지었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그녀의 정체가 소년 ‘루’라는 걸 숨기고 있으니까. 만에 하나 들켰을 경우, 분노한 아키스가 단칼에 그녀를 베거나 벌을 주기 전에 한 번 진정하라고 넣은 조항이었다.

루나가 본 아키스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찮은 점원 소년과의 약속도 지켜 주었으니, 공작 부인과의 약속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절 보호하기 위한 방법인걸요.”

루나는 아키스의 눈을 보며 항변했다.

“신분 차이 나는 결혼인 것 알아요. 그것도 하늘과 땅 차이죠. 그러니 제가 본의 아니게 실수해서 공작님의 분노를 사게 됐을 때, 공작님의 화를 진정시킬 안전장치를 원해요.”

“……혹시, 결혼 생활 내내 나를 미치게 할 계획입니까? 이미 나를 매우 놀라게 했으니 당신이 맘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요.”

애써 침실에서 빠져나온 온 것이 무색할 만큼 아키스는 지금도 루나의 몸에 손을 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 1번과 2번의 조항을 본 순간, 아키스는 바로 야릇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혼전 애인 관계를 계속 끌고 가겠다는 뜻인가?’

1번은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하였으니 남자가 있어도 그가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이고, 2번은 계속 그 남자와 만나더라도 조항에 따라 사면해야 할 수도 있다. 순식간에 별생각을 다 했다.

“아녜요, 절대 공작님을 일부러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요. 제 말은 불가항력에 의한 실수에 국한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밤중에 아내를 대문 밖으로 쫓아내거나 청소하다 실수를 했다고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거나 하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아키스에 대해 떠도는 실제 소문들이었다.

“물론, 그 소문 중 사실이 있긴 해도 반만 사실인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조금 화가 날 것 같긴 하군요.”

그 말에 루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녜요.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하잖아요. 그리고 남편을 위해 한 일인데 뜻밖의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요. 오직 그런 경우를 위해 한 말이었어요.”

루나는 아키스를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

“공작가의 명예를 일부러 훼손시키는 일도, 또 나쁜 짓도 하지 않을게요. 공작님과 사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거나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든 진짜든 결혼은 절대적인 둘만의 일이니까요. 그렇죠?”

둘만의 대한 일이라. 그 말은 마음에 들었다. 덧붙여 우리라는 표현도 꽤나 괜찮게 들렸다. 아키스는 몇 초 생각에 잠겼다.

‘그런 건가?’

어째서 그녀가 방 안에서 농성하며 제게 조건을 들이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 그 자체로 제 분노를 살까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겐 작은 일도 그녀에게는 위협으로 느낄 수 있다,라…….’

아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그의 몸짓을 보고 안심했다.

‘……그는 틀린 건 틀렸다 인정하는 사람이지.’

루나는 아키스의 번역가로 몇 개월을 일했다. 밀접하게 오래 일하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기 마련이었다.

종종 그는 루나의 작업물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는데, 루나가 조곤조곤 설명하면 납득하고 자신이 틀린 걸 인정하곤 했다. 한마디로 아키스는 꽤 대인배였다.

“……내 입장에선 어이없는 조항이지만 당신 입장에선 그럴 법하군요. 일단은 좋습니다. 치명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고서야 모두 사면하도록 하죠. 그런데 서너 번째가 문제인데.”

[3번. 원할 때 떠날 수 있는 이혼권 지급.

4번. 결혼 생활 중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게 해 줄 것.]

만일 이 조건을 수락한다면 아키스는 호구인 셈이었다.

아키스는 설명해 보라는 듯 루나를 보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예요……. 만일, 제가 결혼 생활 중 지치고 힘들어 떠나고 싶어졌을 땐 놔주셨으면 해요. 왜 아내가 필요하신지는 알겠어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책임지려 해 주시는 것도 고맙고요. 하지만, 제가 평생 공작 부인 노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어차피 황가와의 혼인 약속이란 것이 평생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공작 부인 자리를 누군가가 채워 준다면 좋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죠. 그럼, 네 번째는 뭡니까?”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결국 같은 이야기예요. 저도 꿈이 있고 바라는 삶이 있어요. 그걸 막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물론, 제가 너무 많은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알아요. 대신, 메모에 썼듯이 공작 부인의 재산은 아무것도 받지 않을게요.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일을 하진 하지 않을 거예요. 예를 들어, 갑자기 오페라 가수로 데뷔하겠다거나 하면 공작가에 누를 끼치잖아요.”

아키스는 눈가를 눌렀다.

루나는 그가 짜증을 낼까 긴장했다. 그러나 그는 루나에게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럽게 물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길래?”

“그거야 당연히 삶의 목적은 행복이죠. 평화로운 삶을 보내다 행복하게 죽는 것.”

아키스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몽글몽글한 개념은 그에게 친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살아 보고 불행하면 도망치겠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안 되나요?”

아마도 그녀와 살면 최선을 다해 그녀가 결혼 생활에 만족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도망간다고 하니까.

혹시 그녀가 남자를 휘어잡는 요부가 아닐지 그는 잠시 고민했다. 어이없어 웃음은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맹랑한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보기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이군요, 영애.”

“그러게 저에 대해 전혀 모르신다고 말했잖아요. 제 이름을 기억은 하시나요?”

“루나.”

아키스가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쿵. 루나의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그가 저 보랏빛 눈으로 바라보며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무너질 것 같은데, 앞으로 그의 옆에서 이 마음을 어찌할 수 있을까. 감출 수 있을까.

‘첫사랑은 금방 지나간다고 하던데.’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루나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당신 이름이죠, 예쁜 이름이기도 하고……. 아무튼, 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아키스는 관자놀이를 한 번 눌렀다.

“앞으로 2년간 진짜 부부처럼 살아 봅시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대로 뭐, 행복한 흉내를 내려고 노력해 보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하고 싶은 건 다 지원해 주겠습니다. 사치도 좋고, 공부도 좋고, 또 사교도 좋습니다. 공작가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는 일이라면 다 허락해 주죠.”

“…….”

“그리고 2년째 되는 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합시다. 그건 어떻습니까?”

“결정이라면……?”

“양자 동의하에 이혼하고, 양자 동의하에 같이 사는 거죠.”

루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건 꽤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그리고 2년간 아이도 가지지 맙시다.”

루나가 고개를 휙 들었다.

사실 가장 걱정하던 것이 그것이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 아키스의 아이라면 가지고 싶었지만 그건 꿈같은 이야기였고, 아이가 생기면 아키스를 떠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못된 생각도 했다. 만일 아이가 생기면, 루나가 정체를 들키더라도 아키스가 그녀를 죽이거나 가혹하게 보복하진 못할 것 같았다.

그녀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 것을 들켜도 그때라면 아키스도 루나의 비밀을 숨겨 줘야 하리라. 미래 공작이 될 아이를 위해서라도. 루나는 그런 자신이 너무 음흉하다고 생각했다.

“가능…… 한가요?”

“마법을 사용하면 안전하게 1, 2년 피임하는 건 일도 아니죠.”

아키스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기에 에둘러 거짓말을 했다.

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그녀에게 어디까지 정상적인 사내이자 남편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평생 붙잡아 놓는 건 못할 짓 같기도 했다.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그땐 그녀의 평생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정략결혼의 요구지만.

“왜 2년이죠?”

“공국, 제국, 왕국, 그리고 동서 대륙의 다양한 결혼 제도에 빗대어 정식 결혼이 인정받는 기간이 최소 2년이니까요. 2년 이하의 결혼은 타국에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

루나도 알 것 같았다.

고대 신성 제국 교황의 딸은 이혼을 무려 아홉 번이나 했다고 했다. 정략혼을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몇몇 나라에서는 짧은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무효 처리하기도 했다.

“단, 이거 하나는 약속합시다. 만일 2년 후에 당신이 단 하루라도 나랑 같이 있고 싶다, 딱 하루라도 계약을 연장하고 싶다 하면.”

아키스는 루나에게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그의 몸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그땐 평생 나랑 사는 겁니다. 절대 무를 수 없습니다. 어디도 도망갈 기회는 없을 겁니다.”

“……알았어요.”

루나는 붉어진 뺨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짝사랑하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사내와 인생의 딱 2년이라도 함께 살 기회. 그리고 한 2년 살고 나면 그 마음도 없어질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던 마음이 사라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

루나는 한 번 인생을 망쳤고, 불행만 가득한 자신의 미래를 알았다. 한 번이라도 인생의 한 자락에 원하는 사람을 가진다면.

‘……만일 평생 들키지 않는다면?’

그럼 정말 아키스의 옆에 평생 있어도 될까?

하지만 루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2년이 지나더라도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여자의 행복은, 아니 한 사람의 행복은 짝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마음을 감추는 삶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감정의 교류를 하며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나을 터였다.

지금 당장은 아키스만 보면 심장이 멈추지 않는다고 해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고 해도.

“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습니까?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요. 나 지금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는.”

아키스가 루나의 눈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공작님께서 정말로 제게 청혼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루나는 손가락으로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아키스의 눈이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쫓았다.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풀었다.

“아무튼,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제일 의문인 게 마지막 조항인데……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이게 가장 중요해요. 이건 꼭 들어주셔야 해요.”

루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키스는 손가락으로 다섯 번째 조항을 가리켰다.

[5번. 제 본가인 버몬드 남작가에서 지참금 금화 1만 2천 개를 받아다 주세요. 꼭 징수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제게 주세요.]

얼마나 중요한지 밑줄까지 쫙쫙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루나의 단호한 말이 화룡점정이었다.

[위 사항을 들어주세요. 타협은 없습니다.]

휘갈겨 쓴 엉망인 글씨로 이런 말도 추가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위엄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버몬드 남작가가 가난한다는 건 아키스도 알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문에서 부유한 신랑감을 볼 경우, 여자 쪽 집안 쪽에 돈을 주는 게 보통이었다. 신부 측 지참금도 그럴 땐 예외였다.

수양딸인 루나를 하룻밤 상대로 보낸 집안이다. 범상치 않은 막장 집안인 건 알겠다. 그래서 버몬드가에 돈 한 푼 주지 말라고 할 것은 이미 예상했다.

그런데, 반대로 돈을 받아다 달라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받아 주세요.”

“……그렇게 그곳이 밉습니까? 왜, 차라리 호적에서 파 달라고 하지. 그게 낫지 않습니까.”

“정말요? 세상에, 그것도 가능하세요?”

“…….”

루나가 반색했다. 아키스는 점점 더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5번 조항은 조건 없이 수락하겠습니다. 버몬드가에 돈을 주는 쪽이 훨씬 수월하겠지만…… 당신이 원한다니 그렇게 하지요.”

“고맙습니다. 정말 기뻐요.”

루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차라리 내게 금화 1만 2천 개를 달라고 하는 게 나을 텐데. 그편이 훨씬 빠릅니다.”

“아뇨, 전 버몬드가의 돈을 원해요. 반드시 분할 납부 말고, 바로 받는 조건으로요.”

아키스는 미심쩍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데 공작 부인의 재산을 마다해도 되겠습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루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아, 저는 자산은 현물을 선호해서…….”

“…….”

평생을 괴짜라 불린 그였지만, 저보다 더한 괴짜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어마어마하게 성적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운 여자는 더더욱.

루나는 루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공작 부인의 재산들을 받았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공작 부인의 재산은 채굴권, 토지 증서, 채권 등이 대부분이었다. 즉, 바로 들고 나를 수 있는 현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복잡한 재산들을 양도 받았다 정체가 탄로 나면? 그랬다간 아키스의 분노를 몇 배로 살 것이다.

그리고 아키스를 속이는 입장이면서 공작 부인의 재산을 받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강 이렇게 조건들을 들어주면 나와 혼인하는 겁니까?”

“네. 그…… 원하시는 대로 제가 공작님을 책임질게요.”

“어른스럽군요. 어른은 자기가 한 일에 책임지는 법이죠.”

“…….”

굳이 따지자면 일을 저지른 건 당신 쪽 아니냐고 루나는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루나도 지난밤을 어느 정도는 즐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네, 뭐…… 맞아요. 그리고 공작님도 절 책임지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키스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 피식 웃었다.

“그럼, 나도 조건을 말하죠.”

“네, 좋아요.”

“첫 번째, 글씨 연습을 좀 할 것.”

“…….”

루나는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는 듯했다.

“두 번째는, 오늘 밤부터 합방할 것.”

합방이란 말에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글씨를 못 쓰는 여자는 싫어하시나요?”

“좋고 싫음은 장단점으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일단, 사람이 마음에 들어야 장단점도 보이는 거죠. 앞으로 공작 부인이 되면 황족과 편지를 주고받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최소한만 글자를 교정하는 게 좋겠다는 말입니다.”

루나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대필은 안 되나요? 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하잖아요.”

“글씨 쓰는 걸 싫어합니까?”

“네. 그, 어릴 적부터 글씨가 이래서…….”

말해 놓고도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객관적으로 루나는 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다. 필체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좋습니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 오늘 바로 혼인 서약서에 사인할 것. 혼인 서약서에 사인한 이후부터는 합방을 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죠.”

“…….”

그는 아까부터 루나의 입술과 목선을 관찰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과 요구에 루나의 체온이 계속 올라갔다.

“……독 기운이 아직 남아 있나요?”

“네, 지금 당신을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의 손목을 보았다. 그의 몸에 최음 독 효과가 돌고 있다면 경맥이 아직 뜨거울 것이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아키스가 손을 뻗어 루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젯밤으론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루나의 손등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의자 위에서 허벅지를 딱 붙였다. 찌릿한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 그녀 안의 어떤 것, 여성이 들끓었다. 몸이 뜨거워졌다.

“……순간의 성욕 때문에 저와 결혼하시는 건 아니죠?”

“순간의 성욕이면 어떻습니까, 서로 책임지면 되는 거지.”

“충동은 나쁜 거라고 배웠는데요.”

“어째서죠? 인생은 불확실한 것의 연속인데, 한순간의 충동이라고는 해도 진실한 감정이지 않습니까. 충동적이면 행복해질 수 없기라도 합니까?”

아키스가 속삭였다. 아까 루나의 말을 빗대어 비꼰 것이었다. 루나의 볼이 부풀었다.

‘와 진짜, 여자로서 만나니 이렇게 다르구나…….’

아키스는 소년 ‘루’로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성이라 그런지 계속 긴장감이 생겼다.

게다가 그는 잘생겼지만 이상할 정도로 금욕적인 사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대놓고 그것을 요구할 줄이야.

“그럼 나와 혼인하는 겁니다.”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감싸 쥐며 속삭이듯 물었다.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요…….”

“혼전 계약서에는 조항을 써 줄 수 없고, 대신 따로 언약서를 써 주겠습니다. 내 서명을 넣어서. 그럼 되겠습니까?”

“언약서라면……?”

“앞으로 결혼 생활에 신랑이 신부에게 매사 성심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편지 말입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결혼해요.”

루나는 아키스를 속이는 것에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여자를 잘 모르겠지. 내가 정체를 숨긴 데다 금기를 깬 걸 전혀 모를 텐데 이런 조건까지 다 들어주다니. 조금 미안한걸.’

아키스도 루나를 보고 생각했다.

‘정말 순진한 여자군.’

아키스는 2년 후, 결혼 생활에 대해 재협의하자 말했다. 그 말인즉 아키스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에게 평생 붙잡힌다는 것이다. 꼼짝없이 자신의 아내로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똑똑하게 처신해 놓고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맹탕으로 합의하다니. 아키스가 이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으려 마음먹으면 루나는 저항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날 믿고 있는 건가.’

그녀는 자신을 믿고 이런 요청들을 던진 것이다.

가능하면 이 그녀를 배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는 루나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남녀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루나는 아키스가 아까부터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어떡해. 엄청 쳐다보잖아.’

몸 안 어딘가에서 위험한 촉이 왔다. 그가 이런 눈빛을 하면 원하는 건 딱 하나였다. 만지고 싶어 죽겠다는 것.

“그럼, 합의가 끝났으니 키스하죠.”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물론, 키스로 끝낼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의 법적인 아내가 될 거고, 몸을 원하는 건 당연한 서로의 권리였다.

“……그건 무슨 어이없는 말이에요?”

“사실 어젯밤부터 하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최음 독을 먹었기에 이렇게까지…….”

아키스가 루나의 손을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큰손과 뜨거운 체온이 더욱 밀착해 닿자, 루나는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알겠어요, 하셔도 돼…… 꺄!”

루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키스가 허리를 안아 그녀를 차가운 대리석 책상 위에 올렸다.

“끝까지는 안 돼요…….”

“참아 보죠.”

아키스가 하얗게 드러난 루나의 종아리를 어루만지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루나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감질나게 그녀의 입술을 쪽쪽 마주치다가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간질였다.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간질간질한 감촉에 아랫도리까지 찌릿했다. 루나는 등을 타고 올라오는 간지러움에 책상 위에서 펄쩍 뛰었다.

“바, 방금…….”

“쉿, 살살 할게요.”

아키스가 달래듯 애원하며 속삭였다.

거미처럼 타고 올라온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스타킹 밴드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밴드와 살 사이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가 그녀의 음부를 희롱하듯 그 사이를 쑤셨다.

“흐응…….”

루나는 또다시 약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아키스를 자극한 것인지 그는 루나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응…….”

아키스의 손이 더 위로 올라가 얇은 천 위를 쓸기 시작했다. 속옷 위로 오목하게 패인 그녀의 음부 선을 덧그린다. 그곳에서 미미한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한 그 느낌에 루나는 배 아래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아키스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뜨거운 손의 감촉에 그녀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 * *

“……안 나오시는데요. 그만 식사를 정리할까요?”

이미 수프를 두 번이나 다시 데운 참이었다.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조용히 물었다. 디온의 표정은 계속 묘했다.

“……두 분 다 아직 공복이시니 나오시면 곧바로 식사하시겠지요. 그냥 기다리는 게 좋겠…….”

그때였다.

잠시 서재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곧 옷을 가다듬으며 공작과 그 여인이 나왔다.

그녀의 입술은 살짝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멋쩍은 듯 흠흠, 헛기침하고 입가를 어루만졌다. 디온은 못 본 척하며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집사는 꼭 꿈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우리 주인님이……. 우리 주인님도 정상적인 사내셨구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식당에 도착한 아키스는 루나가 앉도록 의자를 빼 주었다. 루나는 차림새를 가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참, 하나 더 합의 봅시다.”

“네. 말씀하세요.”

루나의 대각선에 자리하며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다음부터 중요한 이야기는 식사하고 합시다. 당신에게 키스하는 것만큼이나 같이 식사 한 번 하는 게 힘들군요. 난 여자를 굶기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으니.”

“아, 알겠어요.”

루나는 붉어지는 뺨을 감추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럼 이분이…….”

결국, 집사는 참지 못하고 아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키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온과 집사는 그 사인을 알아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느닷없이 공작가에 걸어 들어온 여인. 그녀가 이제 공작가의 안주인이자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경악과 아랑곳없이 아키스와 루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참 맛있네.’

공작가의 음식은 그녀가 평소 먹던 음식보다 훨씬 괜찮았다. 한눈에 봐도 진귀한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어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제야 루나는 제대로 식욕이 돌았다. 그녀는 자신을 힐끔대는 집사와 디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부드러운 로스트비프를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그녀를 훔쳐보는 건 둘만이 아니었다. 아키스 또한 식사하면서도 종종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루나는 그때마다 공연이 귀가 붉어졌다.

‘……이게 뭐지? 공작님께서 눈을 못 떼시잖아?’

여자를 쫓아다니기는커녕 그가 여자를 이성으로 대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이었다. 루나를 계속 힐끔거리는 아키스의 모습에 집사와 디온은 더욱더 경악할 뿐이었다.

“구경났나? 식사 중이니 나가도록. 당분간 식사 시중은 필요 없어.”

“네, 알겠습니다. 당분간 두 분께서 오붓하게 식사하시도록…….”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디온, 이따 서재로 와라. 혼인 문제로 할 말이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디온 또한 고개를 숙이고는 집사를 따라 황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 * *

새틴은 종일 방 안을 서성였다.

그녀의 손에는 아키스가 보낸 파혼 요구장이 들려 있었다.

‘루나가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그 애를 안긴 한 것 같은데…….’

아키스가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기뻐야 하는데, 막상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만일 그년이 아키스에게 안겼다면 그냥 안 둘 거야. 평생을 걸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줄 거야. 한 번 했는데 또 못할 게 뭐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평생 남자들의 방을 전전하는 신세로 만들어 주겠어. 내가 공작 부인이 되면 권력도 생길 테니, 그 정돈 쉽겠지.’

새틴은 제가 루나를 이용하기 위해 보내 놓고도 그녀를 욕하며 치를 떨었다.

제 약혼자가 누군가를 안았다고 생각하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 내가 이렇게 질투심 많고 추한 여자였다니, 몰랐어.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을 거야. 당장에 혼인하자고 해야지. 이제 공작 부인은 나야.’

새틴은 루나가 돌아오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다.

그때, 마차 소리가 들렸다. 새틴은 급하게 창가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틴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 * *

새틴은 벨레와 함께 저택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은 당연히 공작가의 마차에서 루나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공작은 정상적인 사내이고 어젯밤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고, 그렇게 확인시켜 줄 것이다. 새틴은 희망에 부풀어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또 뵙는군요.”

그러나 공작가의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루나가 아니었다.

‘……왜 공작의 보좌관이 직접 왔지?’

공작의 보좌관인 디온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키스가 신뢰하여 많은 중책을 맡기는 이였다. 그런 만큼 웬만한 용건이 아닌 이상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 새틴은 그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루나는 어디 있나요? 혹시, 그 애가 공작님의 비위를 거슬러 벌이라도 받았나요?”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영애. 루나 님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네?”

“이제 그분의 신분이 달라졌으니까요.”

“그게 무슨…….”

벨레는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작님께서는 루나 님과 혼인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새틴은 제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구랑 뭘 해?

“……농담하시는 거죠? 공작님의 약혼녀는 저예요!”

“확인 결과, 루나 님께서는 버몬드 남작가의 피를 이으셨더군요. 그리고 어젯밤 두 분께서는 조금 이르게 혼인 의식을 치르셨지요. 공작님께서는 이를 유효한 혼인이라 판단하셨고, 바로 결혼을 결정하셨습니다. 혼인 서약서에 서명도 하셨고요.”

뎅. 뎅. 뎅.

머릿속에서 큰 종이 울리는 듯했다. 새틴의 무릎이 꺾였다.

“이, 이건 규칙 위반이에요. 약혼녀는 저잖아요.”

“영애.”

디온이 나직이 말했다.

“규칙은 없습니다. 제국의 규칙은 황족과 공작님이십니다. 그분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그러는 겁니다. 혹시, 이 혼인에 대해 소송을 걸 생각이 있으시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위자료…… 혼인 위자료는요?”

벨레는 새틴보다 금방 정신을 차렸다. 돈이라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벨레가 황급히 나서서 물었다.

“선대의 약속대로 두 가문이 결합하였으니 위자료도 없습니다. 파기된 약속이 없으니까요.”

“마, 말도 안 돼!”

벨레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럼 지금껏 쓴 돈들은! 이 애를 공작 부인으로 만들려고 우리가 얼마나 큰돈을 쓴 줄 아세요?!”

“네, 그 돈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디온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쪽은 공작님께서 요구하시는 지참금입니다.”

“……지참금이요? 우리가 돈을 받는 게 아니라요……?”

벨레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합니다. 제국엔 지참금 문화가 있으니까요.”

“그 말은…… 우리가 돈을 한 푼도 못 받게 되었다는…….”

벨레도 무릎을 풀썩 꺾었다. 하녀들이 놀라서 달려와 벨레를 부축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새틴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잘못된 거죠? 그렇죠? 그럴 리가 없어요. 그리고 신부를 보낸 건 우리 쪽인데, 왜…….”

“새틴 영애, 죄송하지만 아직 안 끝났습니다.”

“……네?”

그 말에 새틴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불처럼 번졌다.

“공작님께서 전하시기를…….”

디온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공작가에 대한 명예 훼손, 사기 혐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셨습니다.”

황망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새틴이 물었다.

“보상이요?”

“확인해 보니, 버몬드 남작께서 지금껏 공작님의 이름을 빌려 사업을 좀 벌이셨더군요. 투자도 받으셨고 돈도 빌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작가에는 황위 계승권이 있습니다. 황족인 공작의 이름을 팔아 금전적 이득을 취하다니요. 공작가의 명예를 훼손시키신 셈입니다.”

“그건, 저…….”

새틴과 벨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새틴은 지금껏 공작의 약혼녀 행세를 하며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나마 새틴이 그 많은 파티비며 드레스 값을 충당한 것은 공작의 이름을 팔아 돈을 빌렸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차피 새틴이 결혼만 하면 어마어마한 재산을 받을 것이고, 바로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간 공작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새틴은 그가 눈감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지금 와서 그걸 문제 삼으시는 거죠?”

“이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더 이상 영애께서 특혜를 받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공작님은 옳고 그름에 칼 같으신 분이시지요. 지금껏 용서하신 것만 해도 공작님께서 대단한 아량을 베푸신 겁니다.”

디온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늘 새틴에게 예의를 다했다. 새틴이 공작의 무관심에 디온에게 하소연을 하고 성질을 부려도 늘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받아 주고는 했다.

새틴은 순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새틴은 자신이 루나를 보내 공작을 시험하려 든 작태가 공작은 물론, 공작가 식솔들의 자존심을 긁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새틴은 바짝 독이 올랐다.

“아버지께서 공작님 이름으로 투자를 받으셨다고요? 그건 그 사람들이 멋대로 투자해 준 거예요!”

“그래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황족의 이름을 판 건 국가 반역죄에도 해당됩니다.”

“국가 반역죄…….”

벨레는 그 말에 숨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 있습니다. 지금껏 공작가의 근교 별장을 파티 장소로 사용하신 대관비, 공작님의 이름을 빌려 드레스 숍에서 외상을 쓰신 것, 또…….”

디온은 그간 새틴이 누린 특혜들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이제 약혼이 끝났으니 그 모든 비용을 지급해 주셔야겠습니다.”

“아, 아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공작님께서 이렇게 냉혹하게 구는 것에 대해 뭐라 할지 두렵지도 않으신가요?!”

새틴이 악에 받쳐 외쳤다.

디온은 여상한 표정으로 새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공작님께서는 원래 평판이 좋은 분이 아니시니 별로 걱정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평판을 믿고 공작님께서 정상적인 남성인지 알기 위해 검증을 감행하신 건 영애십니다.”

‘……이럴 수가…….’

새틴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배상금으로 금화 5만 닢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바로 대금을 납부하지 못할 경우에는 송구하지만, 버몬드 남작가의 재산과 상회에 바로 압류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새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벨레는 이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새틴은 입술을 꽉 깨물고 디온을 보았다.

“디온, 공작님께서 이러시는 이유가 뭐죠? 본론만 말해 주세요. 도대체 왜…….”

“공작님께서는 영애의 행동에 대해 화가 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코르티잔이 아니라는 것에 더욱 화가 나셨지요.”

“아, 알아요. 사과할게요. 그렇다고 저를 벌주시느라 공작님이 루나와 억지 혼인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다 농담이죠, 그렇죠? 저를 가르치기 위해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영애.”

디온이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현실을 좀 인정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새틴의 머리가 핑 돌았다.

‘정말 루나와 혼인한 거야? 겨우 하룻밤 때문에? 정말 그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디온은 새틴과 벨레의 낯을 살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공작님께서는 자비가 있으신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 자로 바로 버몬드 남작가에서 금화 1만 2천 개를 갚을 수 있다면 5만 닢까지는 징수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그제야 새틴은 상황이 파악됐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화 1만 2천 개.

루나에게서 훔친 금화가 그 정도 금액이었다. 그 돈을 돌려받기 위해 루나가 수를 쓴 것이다. 그것도 공작을 사주해서.

‘이…… 이 계집애가…….’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지 몰라도 루나가 하룻밤 재주로 공작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고 그런 년들은 다 똑같아. 공작도 사내였구나.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 공작을 홀려서 이렇게 조종할 줄이야. 공작님이 속고 계신 거야!’

새틴은 만만한 루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래, 루나가 농간을 부린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지금 바로 금화 1만 2천 개를 내주시면 나머지는 탕감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내주시지 못하면 5만 닢에 대한 징수에 들어가겠습니다.”

벨레가 울먹이며 디온에게 악을 썼다.

“그런 금화를 어떻게 바로 마련하란 말이에요! 정말 사람이 가혹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 수가……!”

“어머니, 품위를 지키세요.”

새틴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혔다. 이를 갈며 디온을 보았다.

“……제가 금화를…… 1만 2천 개만큼의 금화와 재물을 내드리겠어요. 그러면 되죠?”

벨레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돈을 갖고 있다고? 도대체 그 큰돈이 어디서 났니?”

새틴은 부들부들 떨며 숨겨 둔 금화를 찾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하인을 시켜 자신의 방 비밀 장소에 숨겨 둔 금화를 꺼내 왔다.

“제 비자금이에요. 이걸 받으시고 빚을 징수하는 것만은 그만둬 주세요.”

“말이 통하시는군요. 잘 받겠습니다, 영애.”

디온은 얼추 금액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공작님께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세요. 제 실수에 대해서 사과하고 싶어요.”

“그건 곤란합니다.”

디온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렇다면 금화를 내드릴 수 없어요.”

“영애,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꼭 이 금화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돈을 징수할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요.”

“이……!”

새틴은 분을 참지 못하고 씨근거렸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금화를 내주었다.

“저는…… 루나에 대한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어요. 그걸 아시면 공작님도 마음을 돌리실 거예요. 제발, 한 번만 공작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릴게요.”

새틴은 디온에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원했다. 하지만 디온은 더없이 예의 바르고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일단 빚은 이걸로 정리하죠. 명예 훼손에 대한 문제는 차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이걸로 끝난 게 아닌가요?”

“끝나다니요? 그건 영애께서 결정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공작님의 기분에 달렸지요.”

디온은 마차 문을 닫았다. 공작가의 마차가 사라지자, 새틴은 뒤늦게 울부짖으며 울분을 터뜨렸다.

“가만 안 둬, 그 계집애.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 * *

정말 폭풍 같은 하루였다.

공작과 만찬에 가까운 호화로운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루나는 혼인 서약서와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다. 결혼 계약서에는 그가 미리 말한 대로 세부적인 결혼 조건이 적혀 있었고, 혼인 서약서는 황실에 보내는 용도였다.

“저어…… 혼인에 필요한 서류는 좀 더 많지 않나요? 정해진 양식이라든가…….”

“직계 황족이나 공작위 이상부터는 양식을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접 쓴 문서가 곧 법적 효력을 발휘하니 내가 직접 쓴 이 서약서면 됩니다. 서명만 마치면 바로 혼인이 발효되죠. 이제 이걸 황실에서 승인하면 끝입니다.”

“그렇군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제국에서 배부하는 서약서 양식에 따라 써서 제출해야겠지만, 공작은 아니었다. 그가 쓰는 것이 곧 제국의 법이었다.

내용은 아주 간결했다.

[로텐베른 공작, 아키스 드 로텐베른은 루나 드 버몬드를 신부로 맞이하고 황실과 제국민들 앞에 드래곤과 만물의 신 앞에 혼인을 서약한다.]

루나는 긴장 속에서 서명을 마쳤다.

‘나, 진짜 해 버렸어.’

서명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위험한 도박에 손을 댔고, 흔들리는 배에 올라탔다는 것.

흔들리는 배지만 금은보화로 치장된 배였다. 그녀의 정체를 들키면 곧장 물아래로 떨어지겠지만, 들키지 않는다면 꽤 튼튼하고 안전한 배가 돼 줄 것이다.

루나의 기색을 읽었는지 다정하게 얼렀다.

“겁먹지 마십시오. 결혼식 날 약속대로 언약서를 써 줄 거고, 그 내용도 잘 지킬 겁니다.”

“……알아요. 공작님을 의심하는 건 아녜요.”

루나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키스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말해 두지만, 난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내가 독에 취한 상태인 건 알고 있겠지요.”

“네, 그것도 알아요.”

“평상시의 나는 이것보단 이성적인 인간입니다. 지금 당신 몸에 미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차차 나아지겠지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얼마나 차갑고 조용한 사람인지 잘 알죠. 그게 문제죠.’

그녀는 속으로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공작의 병이 다 나으면, 그럼 성관계는 없는 건가?’

성은 루나가 이제 막 알게 된 영역이었다. 부부 생활에 너무 성관계가 없는 것도 쓸쓸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나 할 고민이었다.

“내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우울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루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조용히 물었다.

그 질문에 루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공작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는 공작 앞에서 위축된 모습을 자주 보였다. 공작을 실제로 무서워하기도 했었다. 루나는 순간적으로 그에게는 가급적 루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뇨,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정말로, 진짜로요.”

“……그렇게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는데요.”

아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루나는 좀 민망함을 느꼈지만, 약간 과장해서 대답했다.

“그냥, 너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서 실감이 안 나서요. 그리고 여자들이 공작님을 두려워하는 건 8할이 공작님이 잘생기고 무뚝뚝해서 그런 걸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전 너무 잘생긴 사람 앞에 서면 긴장하거든요.”

‘루’와 반대로 행동한다는 게 그만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공작은 처음 보는 것을 관찰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덜 잘생기고 다정하면 조금 더 편할 거란 말입니까?”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뭐, 네…….”

루나의 뺨이 달아올랐다. 공작은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참 희한한 여자였다. 갑자기 그의 침실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기상천외한 결혼 조항도 그렇고. 이제는 할 말 다 해 놓고는 혼자 부끄러워한다.

보는 재미가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흔히 재미는 흥미를 끌어내기 마련이었다.

“잘생긴 건 잘 모르겠고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다정한 건 조금이라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녀는 뺨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이 민망했다.

나만 휘둘리나, 하는 느낌.

‘이 사람에겐 혼인이 별일 아닌가 봐.’

그에겐 자신과의 결혼도 그냥 필요에 인한 정략혼일 텐데. 저 혼자 새 신부처럼 떨려 하는 게 민망했다.

그때, 불현 듯 이제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음…… 여보?”

“…….”

아키스는 맨입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도무지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으음. 노, 농담이에요.”

막 던진 루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역시 공작님이 좋겠어요. 부부 사이에도 예의는 유별하니까, 그렇죠? 하하, 결혼한다고 지위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난 루나라고 부를 건데.”

아키스는 어이가 없어 그렇게 대답했다. 루나는 뺨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마, 맘대로 하세요. 저도 맘대로 부를 테니까…….”

루나는 더워지는 체온을 외면하며 입술을 삐죽이고 대답했다.

토라진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니 꽤 귀여웠다. 그 토끼 같이 동그란 눈을 보느라 아키스는 호칭에 대해 정리하는 걸 잊어버렸다.

저 여자가 입술을 좀 안 삐죽이는 방법이 없나? 자꾸 키스하고 싶어져서 곤란한데. 아키스는 속으로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아무튼요. 네. 그래서…… 결혼 축하드린다고요.”

“……서로 축하하면 되겠군요.”

이제 아키스는 매우 독특한 사람 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앞으로 실수로라도 장난은 하지 말아야겠군.’

루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그래서, 저는 이제 뭘 하면 되나요?”

“일단 내 몸이 나을 때까지는 저택에서 조용히 보내는 게 낫겠습니다. 그다음부턴 바빠질 테니까요.”

“바빠질 일이라도 있나요?”

“공작저엔 여인을 위한 물품이 하나도 없으니, 당신이 필요한 것들을 살 준비를 해야겠지요. 공작가를 신혼집으로 꾸밀 준비.”

신혼집이라. 묘한 어감이었다.

그러고 보면 공작 부인도 한 집안의 안주인이니,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준비.”

“결혼식…… 이요?”

“혼인 서약서를 먼저 썼지만, 결혼식은 해야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우린 결혼을 한 거니까요. 그러니 그 준비로 한동안 바쁠 겁니다.”

“알겠…… 어요.”

루나는 일기장을 통해 귀족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어느 정도 알았다.

그러나, 그건 가난한 시골 귀족의 안주인 이야기였다. 이렇게 큰 공작가의 안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물며 공작가의 결혼식이면 얼마나 큰 규모가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잘 모르지만, 열심히 준비해 볼게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뭔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네.”

루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루나를 보는 아키스의 입술 한쪽이 어느새 올라가 있었다.

* * *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아무도 루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아키스는 바쁜 일이 있는지 대화를 마친 다음 집무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 주변을 산책해 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자신을 집사라 소개한 품위 있는 노인이 부드럽게 산책을 권유했다.

“전 이 집의 집사, 알렉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알렉.”

집사, 알렉은 자신이 안내를 하겠다 말했지만 루나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혼자 산책을 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모든 건물을 전부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를 봐도 부족하겠는걸. 그런데, 사용 중인 건물은 몇 개 없는 것 같네.’

공작가는 수도 내에 있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숲을 끼고 있었고, 앞쪽으로는 번화가로 바로 통하는 길을 끼고 있었다.

저택 뒤편의 숲과 저택 사이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고요한 물가에는 다 썩어 가는 나룻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까지 돌아보고 나자 루나는 천천히 발을 돌렸다.

어릴 적, 새틴은 대저택들 앞을 지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난 나중에 꼭 저런 집에서 살 거야.’

그런데 정작 루나가 이런 집에 들어앉게 되다니, 인생은 진짜 모를 일이었다. 공작가는 어린 시절 새틴과 루나가 지나가며 본 그 어떤 저택들보다 크고 넓었다. 공작가의 호숫가며, 건물들, 그리고 본채와 방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벌써부터 졸음과 피로가 몰려왔다. 공작과 아침부터 기 싸움을 하고 서재에서 진한 스킨십을 하느라 기력을 다 소진했다.

그때, 루나는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설마…….’

루나의 가슴이 가쁘게 뛰었다.

그녀는 급히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침 디온이 시종 한 명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아…….”

디온이 거느린 시종은 루나가 꿈에 그리던 궤짝을 들고 있었다.

“혹시 기다리셨습니까?”

디온이 뛰어 들어오는 루나를 보고 놀라 말했다.

“집사가 길을 알려 줘서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네, 버몬드 남작가에서 받아 온 지참금입니다. 아가씨의 돈이지요. 아, 이제는 부인이라 불러 드려야지요. 죄송합니다.”

디온도 오늘 아침 덜컥 벌어진 일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루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호칭은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아직 실감이 안 나니까…… 혹시 버몬드가에서 대화가 길어지나 했어요.”

디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버몬드 남작가에서는 대화라고 하기도 힘든 이야기들이 오갔다.

“시내의 변호사 사무실에 들르느라 늦었습니다. 조금 더 서둘러 올걸 그랬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적절한 타이밍이었어요. 그런데, 궤짝은…….”

“공작님의 침실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지참금은 신부에게 가장 먼저 소유권이 있으니까요.”

“그래요.”

루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하인이 침실까지 돈을 옮겨 주었다. 루나는 침대에 앉아 궤짝을 열었다

‘내가 밤을 지새우며 번 돈.’

잃어버린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궤짝 안에는 루나가 오매불망 그리던 눈부신 금화들이 여전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서 그녀는 금화들을 만져도 보고 궤짝을 쓰다듬어도 보았다. 그리고 금액을 세 보았다. 금액도 얼추 맞았다.

‘새틴이 돈을 빼돌리진 않은 모양이야.’

어찌나 안도감이 드는지 눈가가 다 촉촉해졌다.

우리 다시는 헤어지자 말자. 루나는 마음속으로 금화에게 굳게 약속했다.

* * *

루나는 금화를 돌려받은 것만으로 들떠서 그날 저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집사는 몹시 친절했고, 루나를 위해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공작님은 일이 바쁘셔서 집무실에서 식사하시겠다 합니다.”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까 걱정하던 루나는 되레 민망해졌다.

‘……음, 그러니까 그 최음 약효라는 그게 생겼다 말았다 하는 건가?’

그는 자신이 다 나을 때까지 외출을 삼가자고 말했다. 독 기운 때문이라도 뜨거운 신혼 밤을 보내자, 그런 말인 줄 알았다.

그는 유능한 황실 아카데미 교수이자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산도 관리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평소에도 몹시 바쁠 것이다. 모두 새틴이 루나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해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저녁이 되자, 공작저에 도착한 후부터 루나를 시중들어 주었던 나이 든 하녀가 직접 차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수면을 돕는 향긋한 캐머마일 티였다.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티를 준비했습니다. 혹시 잠드시기 전에 와인을 드시는 걸 선호하시면, 내일부터는 와인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딱히 기호가 없어요. 하지만 차를 준비해 주면 고맙겠군요.”

편안한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있던 루나는 하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런데 내 시중을…… 앞으로도 당신이 들어 주나요?”

“상황이 좀 안정되면 제대로 된 담당 하녀를 뽑을 예정입니다. 이 집에는 레이디스 메이드가 없어서요.”

귀부인들이 입을 옷을 관리하며 몸치장을 돕고 아침저녁으로 시중을 드는 레이디스 메이드.

전문직에 속하는 편이었기에 레이디스 메이드는 청소와 빨래만 하는 일반 하녀보다 몸값도 높았고 비교적 교육받은 경우가 많았다. 새틴은 레이디스 메이드가 없어 루나에게 시녀 노릇을 시켰다.

공작저에 여자가 산 지 오래되었다 들었으니 레이디스 메이드가 없을 법도 했다.

“그러면…… 저, 실례지만 당신은?”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전 공작저의 하녀장, 비아라고 합니다. 부족한 솜씨입니다만 간단한 일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루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녀장은 말 그대로 모든 여성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경우에 따라 하녀장이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하루 이틀이라도 하녀장이 루나의 시중을 들어 준 건, 그녀를 대단히 대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마요. 난 웬만한 레이디스 메이드들보다 화장도 잘하고, 옷도 다룰 줄 알아요. 하녀장은 하녀장의 일을 하세요. 적절한 사람을 뽑을 때까지 시중은 필요 없어요.”

“직접…… 자신을 꾸밀 줄 아신다고요?”

그녀는 루나의 말에 내심 놀랐다.

공작가의 가솔들은 명문가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만큼 자존심이 셌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 공작의 예전 약혼자인 새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새틴은 공작의 격에 맞지 않는 약혼녀였다. 집안도 근본 없는 데다 겉보기만 음전했지 야심이 넘쳐 사교계에서 공작의 이름을 팔아 나대고 다닌다 들었다. 심지어 은근히 공작가의 집사를 포함한 식솔들을 깔보곤 했다.

그런데 새 공작 부인은 새틴의 양자매라 들었다. 그런 데다 어느 날 갑자기 공작저로 와 공작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바로 공작 부인 자리를 꿰찼다.

혹시나 루나가 공작 부인의 몸시중을 들 시녀가 없다고 패악을 부릴까 걱정한 하녀장은, 자존심을 굽히고 당분간 자신이 시중을 들 예정이었다. 좋든 싫든 공작이 선택한 부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새틴 님과는 정말 딴판이신데?’

버몬드가는 몹시 가난해서 하녀가 많지 않다 들었다. 그래서 새틴은 하녀장의 역할에 대해서도 잘 몰랐었다. 그녀는 하녀는 다 하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안해하는 표정의 루나는 하녀장인 그녀에게 몸종 노릇을 시킨 것에 진심으로 마음을 쓰는 듯했다.

“하녀장을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요.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저는 괜찮습니다. 공작저에 하녀라고는 허드렛일을 하녀들뿐이지요. 제가 부인을 도와드리지 못할 때 종종 그 아이들이 부인의 시중을 거들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사실, 정말 나 혼자 해도 되지만 드레스를 입을 때엔 좀 도와주면 좋겠군요.”

비아는 그 말에 루나의 궁색한 옷장 사정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비아가 급하게 공수해 온 옛 공작 부인의 드레스 하나 외엔 드레스가 없었다.

“드레스를 사는 게 급선무일 것 같군요. 그 부분은 제가 집사님께 먼저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녀들이 오늘 전 공작 부인님의 드레스를 몇 벌 더 손질했으니, 당분간 그걸 입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나 집사에게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네, 하녀장.”

“비아라고 불러 주셔도 됩니다.”

비아는 향초에 불을 켰다. 루나는 그것에도 작게 고맙다고 말했다. 비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루나에게 짧게 말했다.

“저어, 부인.”

“네.”

“듣기로 오늘 남작가에서 지참금을 보냈다고요.”

루나는 테이블 위에 잘 모셔 둔 궤짝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공작님께서는 지참금을 전부 부인께 드리려 마음먹으셨다 합니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니 꼭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세요. 공작님은 성정이 아주 까다로운 분이셔서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하시지요.”

비아의 그 뜻밖의 충고에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맞는 말이었다.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의 소유권이 신부에게 있는 건 사실이나, 보통은 신랑에게 일부를 나눠 주거나 가문의 재산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루나처럼 지참금을 전부 신부가 가지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애초에 공작 부인 자리인데, 지참금을 이만큼만 받은 것도 파격적이지만.’

루나는 속으로 새삼 생각했다.

공작의 혼사는 황실의 혼사나 다름없었다. 성이 오가고 어마어마한 토지와 재산, 보석과 금으로 가득한 궤짝들이 오가는 그런 혼사. 루나가 가져온 이 돈은 공작가에선 쌈짓돈도 아니었다.

“네, 저도 공작님의 성정은 알아요. 충고해 줘서 고마워요.”

하녀장의 충고, 도도한 귀부인이라면 자존심 상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비아가 자신을 염려해 말한 것을 알았다. 루나는 비아의 마음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걱정한 만큼 공작가의 사람들이 무섭진 않을 것 같았다.

“네, 부인.”

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녀는 루나가 극구 사양하는데도 직접 목욕 준비를 해 주고 욕실에 향초를 켜 주었다.

“목욕 시중은 정말 되었어요. 편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비아가 나가고, 루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그녀는 욕조 옆에 놓은 손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낯설다.’

모르는 집에 들어앉은, 낯선 자신.

얼마 전까지 돈을 벌기 위해 이중생활을 했다. 루의 과거는 사라졌다. 그럼 이 거울 안에 있는 여자는 뭐가 될까. 확실한 건, 구박데기 루나보단 나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거다.

‘……아무것도 실감이 안 나.’

루나는 거울을 보았다.

“……그런데, 화장은 어쩌지.”

지금까지는 화장을 한 모습만 보여 주었는데, 오늘밤에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잘 때까지 화장을 할 순 없었다.

결국, 고민하던 루나는 화장을 지웠다.

‘오늘 밤에도 침실로 들어오려나?’

루나는 아키스의 가운을 걸치고 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램프를 전부 끄고 향초 한 개만을 켜 두었다.

* * *

그간 병상에서 앓느라 처리 못한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잠깐 급한 일들만 처리하려 했는데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창밖이 어둑했다.

디온은 황야와 시내, 양쪽 집 모두 휘멘의 흔적이 없었음을 보고했다.

“집이 비어 있었다고?”

“……송구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흑마법사 휘멘은 직접 던전을 떠돌며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며 위험한 약과 도구들을 제작하는 부류의 마법사였다. 그런 그이니 만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서부 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쪽에서 최근 녀석을 본 사람이 없나 수소문해 봐. 조만간 내가 서부에 한번 직접 가 볼 테니.”

휘멘과는 그가 아카데미 교수직을 그만둘 때 크게 싸운 후부터 만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앙숙으로 소문나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몸이 다 나으시고 하실 일이지요. 결혼식도 하셔야 할 테고…….”

“그래, 그래야겠지. 그건 그렇고 소년을 보았다는 목격담은 없나?”

“네…… 아직도.”

소년, 루를 생각하자 입맛이 썼다.

디온은 아키스의 안위를 걱정해 말을 돌렸다. 아직은 그가 몸을 회복해야 할 시기였다.

“오늘밤도 잠자리를 손님방에 준비할까요? 주인님의 침실에는 그분이 계셔서…….”

디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분이라는 호칭은 루나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부인이라 부르도록.”

“그러겠습니다.”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부터 바로 합방하기로 했으니 따로 방을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알겠습니다.”

아키스가 디온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쩌고 있지?”

디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낮에 버몬드가에서 온 돈을 받으시더니, 계속 싱글벙글 웃으셨다 합니다.”

“싱글벙글?”

“네. 아까 하녀장에게 언뜻 들었는데 궤짝을 쓰다듬기도 하시고, 갑자기 소리 내서 웃기도 하신다고…….”

“……그렇군.”

그 사연이 참 궁금해졌다.

정말 뭐 하는 여잘까, 그녀는. 돈이 좋아 그런 거라면 제게 재산을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버몬드가에 원한이 깊기에 돈을 받아 내고 그렇게나 좋아하지?’

하기야, 그들이 그녀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원한도 이해는 갔다. 굳이 따지자면 아키스도 제 어린 시절에 감정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마냥 해맑은 규중 규수보다는 마음이 갔다.

‘아니면, 무슨 사연이 있는 돈인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떤 여자인지, 뭐 하는 여자인지.

독 때문이다. 그녀만 생각하면 그 말캉하고 부드러운 몸의 촉감부터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볼륨 있는 몸의 곡선과 하얀 허벅지, 그리고 배꼽 아래를 상상하니 심장이 이상하게 가빠졌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아내였다. 아무리 매혹적이라고 해도 볼 때마다 그 짓만 할 순 없었다.

‘대화를 좀 해 봐야겠군.’

그녀에 대해 지금은 아무것도 몰랐다. 엉뚱하고 귀여운 면이 있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 * *

아키스는 밤이 늦도록 방으로 오지 않았다.

루나는 잠옷 대신 사이즈가 큰 아키스의 가운을 입은 채였다. 그의 가운은 재질이 푹신하고 따뜻했다. 가운 끈을 매고 그녀는 침대 위에 폭 누웠다.

“침대가 편하긴 하다…….”

공작의 이불은 비단보다 부드러웠고, 침대는 폭신했다. 루나가 지내던 오두막의 낡고 딱딱한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루나는 화들짝 놀라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곧이어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키스였다.

실내복 차림의 그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루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안 자는 것 압니다.”

루나는 뒤집어쓴 채 꼭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아키스가 침대에 앉았다.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안 잡아먹을 테니 잠깐 얼굴이나 보죠. 저녁 식사도 따로 했는데.”

“…….”

“지금 컨디션이 괜찮습니다. 주치의가 처방해 준 약도 먹었으니, 또 이상해지지 않을 겁니다.”

아키스는 어르고 달래듯 말했다.

루나는 뒤집어쓴 이불을 걷고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만지는 게 싫어서 자는 척한 건 아닌데.’

루나는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을 보이는 것이 염려되어 자는 척한 것이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데굴 굴러가는 걸 보자, 아키스는 갑자기 목이 탔다. 와인 한 병을 가져오길 잘한 듯했다.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을 내는 향초 외에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너무 어둡군요. 불을 켜겠습니다.”

루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안 돼요.”

“어째서죠?”

아키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저는 민얼굴을 보이는 걸 싫어하거든요. 민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아키스는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희한한 점을 하나 더 추가했다. 화장한 얼굴과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다고?

여자의 화장한 얼굴을 구별할 줄은 모르지만, 아침에 그녀에게 났던 화장품 향기는 진하지 않았다. 그때도 얼굴이 바뀔 만큼 진한 화장을 했던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앞으로 같은 침대를 쓸 건데, 민얼굴을 못 보인단 말입니까? 그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

“그게, 음…….”

“램프 하나만 켜죠. 그리고 당신 얼굴을 안 보겠습니다. 그럼 되겠죠. 자기 전에 목을 축이고 싶어서.”

루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스는 침대 옆 램프를 켰다. 루나는 시트를 끌어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눈만 내밀고 빼꼼히 그를 보는 얼굴이 귀여워서, 아키스는 와인을 따르다 말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릴 뻔했다.

꽤 재미있는 여자긴 했다. 참 신기했다. 그의 인생에 재미있는 일은 거의 없는데.

“와인, 마실 겁니까?”

“저는 괜찮아요.”

아키스는 와인으로 목을 축인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하얀 이불 덩이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아키스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루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침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자려면 불을 다 끄고 들어오세요.”

루나가 조그맣게 말했다.

아키스는 향초를 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 옆 램프를 끄기 위해 몸을 숙였고, 그 모습을 본 루나는 이불을 꼭 쥔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그는 램프를 끄는 척하면서 램프 불을 더 밝혔다. 아키스는 그녀가 쥔 이불 끝을 가볍게 당겼다. 아주 살짝. 그것만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던 이불이 쑥 내려갔다.

루나는 이불을 놓친 빈손만 쥔 채 놀란 토끼 눈으로 아키스를 응시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몇 초 간 흘렀다.

“뭐, 뭐예요?”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오래도록 그녀의 민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화장을 안 한 게 친숙해서 더 귀엽군.’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화장한 얼굴도 예뻤지만, 민얼굴은 더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애교 살 때문인가. 눈가에 화려하게 반짝이는 게 없으니 도톰한 눈 밑이 더 도드라졌고, 그래서인지 귀여웠다.

그다음 아키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부터 보았던 사이처럼.

‘역시, 낯이 익어. 이상할 만큼…….’

아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루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술을 오므렸다. 투명한 속눈썹이 팔랑였다. 소탈한 모습인데도 괜히 관능적으로 느껴져서 아키스의 생각이 멈췄다.

그녀의 폭포수 같은 금발이 실타래처럼 뭉쳐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상당한 미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예뻐서 청혼한 건 아니지만, 보통 사내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에 기뻐할 것이다.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내 생각엔 화장한 얼굴과 별 차이 없는데요. 편하게 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루나는 아키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순간 심장이 다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내 얼굴을 알아보진 못한 것 같네. 휴우…….’

루나는 그제야 볼멘소리를 냈다.

“원래 그렇게 비겁하세요? 불 끄는 척하고 여자의 민얼굴을 몰래 훔쳐보다니, 책략가신지는 몰랐네요.”

“나한테 비겁하단 말을 하는 여자는 처음이군요.”

“기분 상하셨어요?”

또 뱉어 놓고서 루나는 소심해졌다.

“아뇨. 당신은? 나 때문에 기분 상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루나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아키스는 또 입꼬리가 올라갈 뻔한 자신이 참 신기했다.

“혹시, 자기가 예쁜 편인 걸 모르는 겁니까?”

“……네?”

루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일부러 꾸미고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자신감은 그다지 상관없으니, 쓸데없는 데 마음 쓰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루나는 그가 자신을 칭찬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예쁘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칭찬인 것 같긴 한데, 자신을 유혹하거나 찬사를 던지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그냥 생각한 대로 말한 것 같았다. 루나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음, 별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그런데, 예쁘다는 말로 제 민얼굴을 본 걸 때우려는 건 아니겠죠?”

아키스는 그녀와 대화하는 것이 꽤 즐거워졌다.

“그건 아니죠. 아무튼, 예의 없이 행동해 미안하군요.”

아키스가 바로 사과하자, 루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할 말도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루나는 꼬물거리며 이불 밖으로 나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드러누워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침대에 앉은 아키스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일부러 거리를 좀 둔 채로.

‘이런.’

아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은 정말 몸이 괜찮은 것 같았다. 독 기운도 잠잠해서 멀쩡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루나가 자신의 가운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게 이런 기호도 있던가? 그녀의 늘씬하고 가녀린 몸에 그의 가운은 너무 컸다. 큰 가운에 폭 감싸인 그녀를 보니 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독.’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루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자신이 그녀를 덮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매혹적이었다.

“그 가운은…….”

“아, 하녀장이 입으라고 주었어요. 제가 맨몸으로 와서 잠옷도 없고, 평상복도 부족해서…….”

“그렇군요. 곧 품위 유지비도 책정될 테고, 필요한 것들도 모두 구비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키스는 그녀가 자신의 가운을 입지 않을 게 아쉬웠다.

마음 같아선 매일 밤 입으라고 하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가운 안의 낭창하고 가느다란, 말랑한 그녀의 몸이 궁금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부신 포장지 안에 든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간식 같았다. 그것도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달콤한 것.

그런 아키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가 말을 이었다.

“저, 할 말이 있는데요.”

“네.”

아키스는 당장 그녀를 눕히고 저 가운을 벗긴 채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누르며 기계처럼 대답했다.

“제 지참금 말이에요.”

“아, 오늘 디온이 남작가에서 받아 왔다고 하더군요.”

“네, 잘 받았어요. 제게 지참금을 다 주셔서 감사해요. 큰돈도 아니고, 적은 지참금일수록 신랑 측에 주는 게 관례인 건 저도 알거든요. 하지만…… 이 돈은 꼭 제가 받고 싶었어요.”

지참금이라는 명목으로 남작가에서 빼앗아 왔지만, 사실은 루나가 땀 흘려 번 돈이었다. 그리고 그 돈 상당수의 지분이 그가 주었다는 건 영영 모를 것이다. 아니, 영영 몰라야 한다.

“왜 금화 1만 2천 개를 받아 달라고 한 건지 궁금하군요. 무슨 연유입니까?”

“과거는 묻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루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미소는 또 느낌이 달랐다. 새롭게 그의 기분을 자극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무튼,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아키스는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루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실은…… 가지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아키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인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녀에게 보석 같은 것들을 사 주어야 하나 싶었다.

“튼튼한 금고가 가지고 싶어요. 저 말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금고요.”

“…….”

그런데 그녀는 또 희한한 요구를 했다. 모르긴 몰라도 보통 드레스나 보석 같은 걸 요구하지 않나? 아키스는 그녀가 보물 모시듯 대하는 궤짝을 보았다.

“……저 돈을 보관하려고?”

“네! 돈은 소중하니까요. 누가 몰래 침입해서 가져갈지도 모르고…….”

“공작가에 도둑이 들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래도요. 제겐 소중한 돈이니까.”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은행 계좌를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은행 계좌…….”

그러고 보니 이제 그녀의 법적 보호자는 남편인 아키스였다. 그가 도와주면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계좌를 만들려면 남편의 위임장도 필요하고, 은행까지 동행해야 하는데요.”

“그렇게 하죠. 몸이 나으면 같이 갑시다.”

루나에겐 달가운 소리였다.

그는 속을 알긴 어려운 사람이지만, 어쨌든 아키스는 루나가 뭘 원하는지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개인 재산도 좀 생길 테니, 은행 계좌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루나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켕기는 게 있으니 공작가의 재산을 빼돌릴 생각은 없어. 켕기는 게 없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돈이 있다면 고마울 따름이지.’

어쨌든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몸을 기울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의 손이라도 잡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그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미소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키스는 속이 메슥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허물없이 말했나? 더 예의 있게 말해야 하나?’

사실 아키스는 웃는 루나가 너무 예뻐 자제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이제 자도 돼요?”

“물론.”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나는 침대 위에서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긴 가운 자락이 옆으로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루나를 홀린 응시하고 있던 아키스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그녀의 큰 가운 사이로, 딱 다물린 하얗고 말랑한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다. 그 새하얀 허벅지가 온통 불그스름했다. 키스 마크가 붉은 열꽃처럼 잔뜩 피어나 있었다. 모두 그의 흔적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 서재 책상 위에 그녀를 앉히고 새하얀 허벅지를 몇 번이나 이를 세워 깨물었다. 흐느끼며 파득대던 그녀의 움직임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뒤 신음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서 떠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겼다. 그는 또다시 독에 대해 머릿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 독을 만든 놈은 나한테 잡히면 죽을 줄 알아라. 아니, 하지만 이 여자가 너무 예쁜 탓도 있어.’

몸에 발열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는 루나의 허벅지 사이에 파고들어 그녀를 팔 사이에 가두고 있었다. 루나가 아키스의 옷깃을 잡고 땡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 잠깐, 오늘은 멀쩡하다면서요.”

“다시 아파진 것 같습니다.”

아키스는 울긋불긋한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었다.

“이것도 병이니까 어쩔 수 없죠.”

“앗, 무슨 밤낮으로 아파요? 지금껏 멀쩡했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무릎을 꾹 누르며 그녀의 가운을 스르르 풀었다. 새하얀 젖가슴이 램프 불빛에 드러났다.

하얀 몸은 더 가관이었다. 그가 어젯밤 남긴 자국들이 점점이 더 드러났다.

“이건 어젯밤의 흔적. 이건 오늘 아침의 흔적?”

아키스가 속삭이며 그녀의 피부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닿은 곳에서부터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어떻게 하지. 모처럼 예쁘게 살이 부풀었는데.”

“…….”

“이걸로도 부족해 보여서.”

아키스가 속삭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바짝 선 유두를 입에 물었다. 슬슬 혀로 굴리면서 뾰족해진 그곳을 톡톡 치다가 부드러운 색의 유륜을 이로 악물었다. 둥근 자국이 남았다.

“흐으, 으응……!”

키스마크로 도배해서 매일매일 감상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이런 소유욕은 처음이었다. 아키스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달았다. 냄새도, 살결도.

“역시 안 돼?”

아키스가 루나의 유륜에 새겨진 낙인 같은 잇자국을 혀로 뾰족하게 건드리며 속삭였다.

“못하겠어요?”

‘……으.’

정말 피곤한데, 사실 아까부터 은근한 긴장감이 있긴 했다. 아키스의 눈과 눈이 마주치자 루나도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저, 정말…….”

“내일 늦잠자도 됩니다. 더는 거칠게 하지 않을게.”

아키스가 속삭이며 루나를 달랬다. 이제 이 남자는 루나가 어떻게 하면 약해지는지 알았다. 그녀의 말랑한 뺨과 코에 입술을 내리며 달래듯 속삭인다.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당분간 계속 이 상태야? 진짜, 이러다가 나도 이거 생각밖에 못하게 되겠네.’

루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가 목덜미에 이를 세우기 시작하자 이내 생각을 할 수 없어졌다. 루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윽, 응…… 으응…….”

아키스는 그녀의 활짝 벌려진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의 허벅지 살에 한이 맺힌 사람처럼 자신이 만든 자국 위에 이를 세우고 또 세웠다.

“평생 이대로 남았으면 좋겠군요.”

루나는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세게 빨아들이는가 하면, 이로 물고 놓았다 핥는 아키스 때문에 허리를 튀며 비명을 질렀다.

“으응…….”

그녀의 엉덩이가 들썩이자 아키스가 오른쪽 골반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옅은 섬모와 도톰한 둔덕이 아키스의 눈에 드러났다.

그녀의 음부 사이는 앙다물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키스는 단번에 그녀의 양 무릎 사이에 손을 넣어 높이 들어올렸다. 엉덩이까지 위로 올라갔다. 소담한 항문 주름마저 숨길 수 없게 된 루나가 숨을 내뱉었다.

“부끄러워요.”

루나가 아키스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가 그녀의 무릎에 키스하고 엉덩이 아래 베개를 깔았다. 더 빨개질 수 있을까. 부끄러워 한줌 재가 되어 타버릴 것 같다. 아키스가 섬모위로 입을 맞췄다.

“왜 온몸이 예쁘지. 내가 여기에 키스하면서 쭉쭉 빨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내 턱을 간질이는 것도 귀엽고.”

어떻게 그런 말을. 루나는 입을 벌렸다. 아키스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정말 온몸이 귀엽다. 그는 입술을 내려 빠끔히 벌어지며 살짝 자신을 드러낸 붉은 대음순 위로 더운 숨결을 밀어 넣었다.

“젖었어요?”

“……읏.”

아키스는 천천히 그녀의 음부를 벌려 확인했다.

그녀의 새빨간 내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숨 쉬며 촉촉하고 끈적한 액을 분비하고 있었다. 꽃잎처럼 내밀하게 주름이 잡힌 그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다 아키스는 아래쪽의 조그만 구멍을 보았다.

그곳은 언제 그의 것을 품어 본 적 있냐는 듯, 조그맣게 뻐끔대고 있었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자 루나가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보지 말아요.”

루나가 뒤늦게 민망하다는 듯 속삭였다.

“왜요, 이미 다 봤잖습니까. 서로 볼 것 보고 갈 데까지 갔으면서.”

아키스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엄청 귀여운 여자였다. 루나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혼자 다 입고 빤히 보면 부끄럽단 말예요…….”

그 말을 알아들은 아키스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여자 이렇게 심각하게 귀여워도 되나.

루나는 불만스럽다는 듯 그를 보았고, 아키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옷을 벗었다. 밝은 데서 보니 타고나게 골격이 좋은 그의 탄탄한 몸과 점이나 흉도 없는 매끈하고 단단한 그의 살결이 잘 보였다. 루나는 뺨을 붉히며 침을 삼켰다.

그의 커다란 성기가 반쯤 일어서 그녀의 눈에 완전히 드러났다. 두툼한 귀두와 핏줄 선 모습.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크기다. 다른 남자의 것을 본적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게 보통은 아닐 거다.

신혼 생활, 결혼생활은 쉴 틈 없이 하기도 한다는데. 매일 밤 남자 몸을 보는 일상은 상상이 안 된다.

“이제 만족해요?”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다 벗었으니 마음대로 보고 댈 것 대도 됩니까?”

루나는 대답도 없이 그를 보았다. 아키스는 그녀를 솔직하게 만들려면 그냥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키스가 그녀의 음부 사이에 고개를 파묻자 루나는 더운 숨을 토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원래 좀 잘 젖는 체질인가요.”

그가 짓궂게 속삭였다. 루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키스의 덥고 축축한 혀가 그녀의 음부 사이에 침입했다.

“으응……!”

그의 혀는 그녀의 모습을 새기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꽃잎처럼 조밀하게 피어난 음부 안쪽의 긴 주름들을 혀로 하나하나 펴듯이 움직이고, 회음부까지 닿기 전까지 쓸어내렸다.

뾰족한 혀가 그녀의 음부의 은밀한 곳, 뾰족하게 서서 자신을 주장하고 있는 클리토리스에 닿았을 때 루나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는 허벅지를 누르고 그가 혀를 길게 핥아 올리며 자극했다. 그대로 혀로 찌르고, 돌리고…….

물이 튀었다. 루나 자신도 느껴질지 몰랐다. 어쩌면 아직 낮의 애무가 올린 체온이 남아있어 그럴지도 몰랐다. 아키스는 진정,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벌써 갔어?”

“응……. 아……!”

루나가 허벅지를 오므리려 하자, 아키스는 둔덕을 세게 빨아올렸다. 그 예상치 못한 행동에 루나는 음문을 조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맛있는데, 왜 그래요. 갔을 때 맛봤으면 좋았을걸. 혀를 파묻고…….”

“으응…….”

루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꽉 잡고 졸랐다. 그 뜻을 알아들은 아키스는 아까부터 팽팽히 서 있던 자신의 것을 루나의 음부 사이에 댔다. 루나는 무릎을 접고 그의 팔에 목을 감은 채 눈을 꼭 감았다. 그는 귀두 끝을 서서히 그녀의 젖은 구멍에 마찰시키다, 순식간에 한 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빠듯하고 뻐근하게 안을 압박하는 그것에, 루나는 더운 숨을 쉬었다.

“아……!”

그녀의 몸 안, 내벽 하나하나가 안쪽으로부터 자리를 만들며 그의 것을 빈틈없이 감쌌다. 내벽을 밀어 올리듯 끝까지 들어온 성기에 루나는 충만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들어온 것만으로 그의 것을 빈틈없이 감싸고 쫀쫀하게 조이는 음부가 숨 쉬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좋아서 미치겠군.’

보통 이렇게까지 좋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는 일체감과 충만감이 아키스를 감쌌다. 벌써 익숙해진 건지. 그녀의 안이 포근했고 또 기분이 좋았다.

“아, 응……. 아……!”

아키스가 몸 안을 휘젓듯이 움직이며 천천히 골반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살덩이와 살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탁탁대며 울렸다.

“흐응…….”

루나의 질척한 음부 안에 온몸의 세포가 몰려들어 감각을 달라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아키스의 것이 몸 안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루나의 음부는 그의 것을 온몸으로 조였고, 나갈 때면 귀두끝까지 잡아먹을 듯 나가지 말라 졸랐다.

“하아…….”

피곤했는데 피곤하면 피곤한 대로 세포들은 그녀의 몸에 남은 모든 기운에서 쾌락을 만들어 내며 그녀를 쥐어짰다.

“흐응, 으응……!”

엄청나게 큰 성기가 몸 안을 쑤셔 대는데, 몸 안의 점막이 긁히면서 안에서부터 꿀물이 튀었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항문에 힘이 들어가고 그가 길게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젖가슴이 출렁였다.

“너무 조이지 마요, 어차피 당신하고만 할 거니까.”

아키스가 더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결혼했으면 자신도 그녀의 것이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얼마든지 줄 수 있거든.”

그 말을 알아들은 루나의 뺨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루나는 서툴게 허리를 움직였다. 원래부터 몸에 내재한 본능으로. 아키스는 점점 이성을 잃고 본능만으로 허리를 움직였고, 한 덩이가 된 듯한 맞물린 부위에서 느껴지는 박자에 맞춰 루나도 허리를 움직였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발가락이 계속 오므라들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귓속과 머리 안을 괴롭혔다.

“으응…… 흐응…… 흥…….”

“또 가요, 그것도 먼저. 안 되죠. 나쁜데.”

아키스가 루나의 귀를 깨물며 혼내듯 속삭였다. 루나는 하얀 쾌감을 느끼며 뱃속까지 떨리는 걸 느꼈다.

절정에 간 루나의 온몸이 아키스를 잡고 졸라, 그는 사정을 참기 위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참았다. 아키스의 이마에 맺힌 땀이 그녀의 몸 위로 쏟아졌다.

아키스가 벌을 주듯 루나의 유두를 살짝 비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그것도 달콤한 쾌락으로 받아들였다.

“조금 더 참아 봐. 더 좋아질 거야.”

아키스가 유두가 곤두선 그녀의 하얀 산을 양손으로 쥐고 탁탁 박자에 맞춰 쳐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부드러운 가슴이 찌그러지고 요동쳤다.

“하아……. 해도 돼요?”

아키스가 루나의 몸을 더욱 그러안으며 말했다. 뿌리까지 넣을 듯 깊게 더 치밀어오는 그의 성기에 루나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으응…….”

어젯밤에도 그렇게 뽑았는데 지치지도 않는지, 양 많은 정액이 그녀의 몸 안에서 터졌다.

루나는 다리를 오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품안에서 뻗었다.

더운 숨이 엮이고, 아키스는 루나의 입술에 입 맞췄다. 맞물린 곳을 빼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두 남녀는 급하게 입술을 엮었다.

춥춥, 혀가 질척이며 서로를 탐하는 소리가 어두운 침실에 울렸다.

* * *

“……오늘 아침도?”

“네, 두 분 다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아키스의 늦잠은 몇 년 만이었다.

아침이 되어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신혼부부의 모습이 참 낯설었다.

주인이 일어나지 않으니 미리 준비한 식사는 식어 버렸고, 고용인들은 오랜만에 한가한 아침을 맞았다.

비아는 단순한 호의로 종종 업무가 시작하기 전, 디온과 알렉에게 부엌에서 쿠키를 가져다주었고, 알렉은 차를 준비하곤 했다. 주인을 기다리며 그들은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거실 한편에서 조용히 티타임을 가졌다.

그들의 오늘 대화 주제는 몹시 풍성했다. 며칠 전 덜컥 들어온 공작 부인 덕분이었다.

“주인님께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시다니, 정말 놀랍군요.”

“……조금 급작스럽게 혼인하시긴 했지만 신혼 기간이니까요. 아마 당분간은 저러실 거 같습니다.”

알렉이 말했다. 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아무튼, 공작님이 드디어 결혼하신 건 경사지요.”

“공작 부인께서는 어떤 분 같으십니까, 하녀장은 그분을 시중들었으니 아시지요?”

알렉의 물음에 비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치가 빠른 분 같아서 공작님의 비위를 거스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상상과는 조금 다른 분이시더군요.”

“그다지 영리한 분 같지 않던가요?”

“아뇨, 똑똑하신 분 같습니다. 다만…… 생각보다 순진해 보이셨어요. 그리 표독해 보이시진 않더군요.”

“그래요, 안 되셨군요.”

디온이 나직이 말했다. 그들은 조카뻘인 디온을 돌아보았다.

“독한 분인 편이 나을 텐데요.”

“무슨 뜻이죠, 디온?”

“오늘 아침 황실로 혼인 증서가 도착했을 겁니다. 보나 마나 전 사교계가 들썩일 정도로 소문이 나겠죠. 저희가 아무리 입을 막아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은 이 결혼에 대해서는 온 사교계에 소문이 날 거고요. 사교계에서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겠습니까.”

알렉과 비아는 고위 귀족 가문에 오래 봉사한 만큼 눈치가 백단이었다. 그들은 바로 디온의 말을 알아들었다.

‘공작 부인이 희대의 요부라고 온갖 입방아를 찧어 대겠군.’

본래 약혼녀인 새틴의 양자매 신분으로 하룻밤의 정사를 통해 공작 부인의 자리를 꿰찬 여인. 온 사교계가 탐내는 신랑감을 훔친 여인이었다. 그러니 공작 부인에 대해 온갖 소문이 다 나리라. 소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마음이 강한 여인인 편이 나았다.

그리고 공작은 원체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간 저에게 목매던 영애들을 시큰둥하게 대하던 그 가닥이 어디 가겠는가. 병이 다 나은 후, 일변한 공작 때문에 그녀가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었다. 무심한 공작만을 의지해 사교계에서 버티는 일은 공작 부인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공작님께서 지금만 같으시면 좋겠군요. 부인을 위해서도.”

비아가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 *

그들의 예상대로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공작이 사교계를 뒤흔든 미소년 스캔들을 일으키자마자 갑작스레 덜컥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 소문의 진원지는 이번에도 황태자였다.

황실에서 고위 귀족들과 조찬회를 가지고 있는 자리에 공작의 비보가 도착했는데, 황태자는 아침 식사를 하며 편지를 뜯었고, 기겁해서 ‘아키스, 이제 놀기로 한 것 아니었나?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외침을 조찬회의 모든 사람이 다 들었다. 공작은 다시 한번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그 미소년을 잊지 못하다가 덜컥 결혼하셨다고 해요.’

‘그럼 새틴 영애는?’

‘새틴 영애가 아닌 다른 여자를 신부로 보았다던데요?’

‘그러니까, 그 여자가 그 미소년보다 훨씬 대단하다 이거죠?’

소문 속에서 루나는 절세 미소년을 제치고 아키스에게 청혼을 받은, 뭐 전설 속의 요부와 같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고자도 치료하고 미소년을 좋아하는 취향까지 바꿀 수 있으며 눈만 마주쳐도 남자들을 혼미하게 하는 그런 여자.

그러나 정작 공작과 염문에 휩싸인 소문의 미소년을 본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그 미소년을 시종으로 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낸 영애들은 있었으나, 그들 또한 소년을 실제로 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공작이 버몬드 가문에서 신부를 보긴 했는데 새틴이 아닌 그녀의 양자매와 혼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틴 영애의 양자매와 결혼했단 말인가? 왜?’

사람들의 시선이 새틴에게 모였다.

새틴은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구 흐느끼며 온갖 피해자 행세를 하고 다녔다.

‘남녀 간의 일이란 것이 그렇지요. 육탄전까지 써서 제 약혼자를 유혹하는데…… 그걸 어쩌겠어요? 전 너무 불쌍해요. 자매에게 이런 일을 당하다니…….’

귀족들은 그 말에 경악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그 금욕적이고 딱딱한 공작이 그렇게 파격적인 일을 벌였단 말인가.

‘공작이 미인계에 넘어가서 혼인하다니.’

귀족들은 놀람과 충격에 빠져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했다.

‘제 가문을 버릴 만큼 독종이래. 오히려 제게 방해가 될까 봐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버렸다던데?’

곧이어 아키스가 버몬드 가문에 재산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새틴은 공작의 약혼녀에서 하룻밤 만에 사교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나 참, 새틴 영애만 아주 뭣 같은 상황이 되었군.’

‘주제도 모르고 나댈 때 알아봤다니까? 무능력한 거지. 얼마나 제 밥그릇 못 챙기면 자매에게 남편감을 뺏길까?’

사람들은 새틴의 양자매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사교계 활동을 한 적이 없었기에 정체에 관해선 계속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가십이라면 누구보다도 열광하는 것이 제국의 귀족들이었다. 곧, 그런 사교계 귀족들을 기쁘게 할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사교계 제일 미녀인 라미라 영애가 화병으로 앓아누웠다는 소식이었다.

황실에서도 이례적으로 공작 부인의 입궁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공작의 친필 서한이 왔다고 한다.

[결혼식 이전에는 외출을 삼갈 예정입니다. 제가 요즘 병으로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니, 회복한 후 정식 일정을 잡을 예정입니다.]

공작이 결혼식을 한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는가.

사람들은 결혼식 초대 명단부터 드레스까지 예측하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혹시…… 공작님이 어처구니없는 여자와 결혼한 건 아니겠지요? 왜, 가끔 무뚝뚝하고 사생활이 깨끗한 사람일수록 못된 여자에게 속는 일도 있잖아요.’

‘두고 볼 일이죠. 지켜봅시다, 어떤 여자일지.’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소곤거렸다.

* * *

정작 소문의 대상이 된 공작과 루나는 며칠째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는 상태였다.

“……하…….”

루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훤한 대낮부터 아키스의 무릎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하녀장이 직접 시내에 나가 사 온 비단 잠옷은, 말려 올라가 새하얀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미쳤다, 진짜……. 오늘도 낮부터.’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루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최근 그녀의 일상을 정리하면 이랬다.

잤고, 했다. 계속했고, 계속 좋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아니 도대체 병이 언제 낫는 거야.’

이렇게 어이가 없어 생각하면서도 아키스의 눈만 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공작가의 사내들의 보랏빛 눈.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그들의 눈에는 묘한 귀기와 색기가 있다 했다. 그 눈을 바라보니 꼭 홀리는 것 같아서, 루나는 눈을 감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더운 숨이 깊어졌다.

* * *

“또……?”

하인이 가져온 편지를 본 디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 디온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 버몬드 남작가에 다녀왔는데, 그날 이후 새틴은 뭐가 문제인지 계속 아침저녁으로 계속 아키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전하기 전 디온은 혹시 몰라 편지 내용을 열어 보았는데, 편지 내용은 아주 격렬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루나의 진실을 알려 주겠다는 둥, 한 번만 만나 달라는 둥, 용서를 빌겠다는 둥, 우리 사이의 추억을 기억해 달라는 둥.

편지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루나에 대해 꼭 아셔야 할 진실이 있어요. 그 애는 공작 부인의 자리에 어울리는 아이가 아닙니다.]

편지 말미에 새틴은 꼭 이런 말을 휘갈겨 적었다.

‘무슨 말을 할지 짐작되는데, 어지간히 관심을 끌고 싶은 모양이로군.’

디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공작님께 드려야겠지만, 이러다 새틴 영애가 공작님의 진노를 사겠어. 차라리 지금 공작님이 바깥일에 전혀 관심 없는 게 다행이지.’

디온은 혀를 찼다.

그리고 일단 새틴의 편지를 정리해 아키스의 집무실 한편에 올려 두었다.

* * *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추며 그녀의 새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하녀장이 사 온 속옷은 너무 깊게 패여 있어 붉은 열꽃이 피어난 그녀의 봉긋한 가슴골이 다 보였다.

그들은 대낮부터 전혀 건전하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혼 기간이라는 핑계로 그는 밤낮이고 루나를 놔주지 않았다.

루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바보가 되면 어쩌지? 하는 그런 걱정.

사람의 몸이란 신기했다. 며칠을 이렇게 보내니 서서히 아픔은 사라지고 충만감과 쾌감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아키스가 저를 만지면 곧바로 체온이 달아오르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많이 아파하더니…….”

아키스가 루나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이제는 아픔보다는 쾌감을 보이는 그녀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키스는 땀에 젖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루나는 익숙하게 팔을 벌리고 아키스에게 안겼다. 새털같은 버드 키스가 이어졌다.

‘이상하다, 왜 몇 번을 키스해도 떨리지.’

첫사랑이라는 건 참 이상했다. 이미 몇 번이나 입술을 겹쳤는데도 더 떨리는 순간은 있어도 안 떨리는 순간은 없었다.

방금 한 일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루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한 그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하지만 아프다고 해도 참지 못하시잖아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나아질 겁니다.”

루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주치의는 아키스가 점차 나아져서 곧 완치될 거라 했지만, 루나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루나만 보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아키스는 아키스대로 루나를 안은 채 침대 천장을 보았다.

‘……원래 이렇게 기분 좋은 건가?’

아무리 남녀 간의 일이 황홀하고 달콤하고, 어쩌고 한다지만 아키스는 이쪽 방면으로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없던 관심을 생기게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솔직히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야. 최음 독 때문인가.’

누군가와 이토록 이어지는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녀와 하나가 되고 그녀를 느끼고 나서야 아키스는 자신의 외로움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는 불완전한 존재였고, 그녀가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외로움을 잊고 완벽해졌다.

‘보통 이렇게까지 생각하나?’

아키스는 그런 자신이 기묘했다.

그녀의 몸은 얼마나 신비롭단 말인가. 정말이지 그녀가 원한다면 뭐든지 가져다 바치고 복종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려고 해도 그녀의 초록색 눈과 매끄러운 목선만 보면 또 정신이 나가 버린다.

아키스는 생각난 겸사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은 위에 쪽쪽, 소리 나게.

루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강아지 같아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여자는 또 처음이군요.”

“안 돼요?”

“아뇨,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당황하는 중입니다.”

“그럼, 기분이 나쁘지 않은 김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아키스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옆으로 누웠다.

단단한 근육, 몸에서 풍기는 묘한 땀내와 체향. 그리고 섬세하고 황홀하게 잘생긴 얼굴. 루나는 아직도 그와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바람둥이세요? 원래 여자를 멀리하신다고 들었는데, 이건 마치…….”

말해 놓고 루나는 미미하게 뺨을 붉혔다. 아키스는 몹시 금욕적인 사람이라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상당히 절륜했다.

아키스는 그 질문을 듣고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러곤 곧 어이가 없다는 듯 루나를 보았다. 그녀는 이상한 면에서 솔직했다.

“아뇨, 내가 애인이 있었다면 당신도 알았겠지요.”

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루나는 몰라도 새틴이 몰랐을 리 없다.

‘……자꾸 누가 생각나는데.’

아키스는 문득 루를 떠올렸다. 부하들을 밤낮으로 샅샅이 찾아 헤매고 있는데도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 소년.

‘그 소년도 이런 면이 있었지.’

아키스의 머릿속으로 루나와 루의 모습이 겹쳐졌다.

하긴, 어쩌면 사람들이 떠드는 대로 그의 이상형은 루였을지도 모른다.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에게 덜컥 청혼한 걸 보면.

“내가 나쁘진 않은가 보군요.”

“……이상한 것들을 다 아시잖아요.”

아키스의 잠자리 테크닉은 좋았다. 워낙 육체적인 매력을 풍기는 부류인 데다, 한번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뿐이 아니라 그는 상대를 다양하게 두드리고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았다.

‘……혀를 그렇게 쓰는 건지는 또 처음 배웠네.’

루나는 엎드려 눈을 굴린 채 물었다.

“공작님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요. 제가 오기 전에도 최음 독에 중독되어 있었잖아요? 정말 그때도 여자를 부르지 않았어요?”

그날 아키스는 분명히 이 침대에 올라온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라 했다.

루나는 의문스러웠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참지 못하고 덤볐을 정도면 그냥 누군가를 부르는 게 나았을 텐데. 어차피 귀족 사내들이 문란한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아키스가 왜 그렇게까지 목숨 건 고집을 부렸는지 궁금했다.

뭐, 그녀 개인적으로는 여자를 사는 남자들을 상당히 혐오하긴 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개인적 견해일 뿐이었다.

아키스는 그 질문에 움찔했다. 여자들이 오긴 했으나 부하들이 맘대로 불렀던 거라 그는 정말 무고했다.

‘최음 독 때문에 사고를 치긴 쳤지.’

과거가 있긴 했다. 그 과거가 ‘여자’가 아니라 문제였다.

아키스는 몇 초 후 대답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로?”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보았다.

“…….”

순간, 아키스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결혼이라는 건 사내의 말 한마디로 천국에서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유명한 제국의 학자가 한 말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천국이고 지옥이고 좀 과장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키스 그 학자의 말뜻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시종인들이 절 너무 쉽게 방에 들여보내던데요?”

루나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슴처럼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키스는 결국 나직이 대답했다. 말을 돌리는 치졸한 경험은 그의 인생에 처음이었다.

“……혼냈습니다.”

“네?”

“그래서 혼을 냈습니다. 그들을요.”

“아, 날 들여보내서……?”

루나는 아키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정작 저한텐 화 안 내셨네요, 그렇죠?”

아키스는 루나의 맑은 목소리를 듣고 왠지 이상한 안심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화를 냅니까. 처음부터 큰 실례만 했는데.”

루나는 쿡쿡 웃었다. 아키스는 웃는 그녀를 홀린 듯 보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리고…….”

“네.”

“알지도 모르겠지만, 난 뒷골목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에선 아이들도 성을 일찍 배우죠. 어렸을 때부터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 원치 않아도 쓸데없는 지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뒷골목 빈민가에서 자랐다 했다. 루나는 새틴이 말했던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자란 거리의 주민 대부분이 창부들과 술꾼들, 그리고 나 같은 부랑아들이었죠. 다들 상스러운 말을 썼습니다.”

“어떤 말요?”

아키스는 몇 가지 짧은 단어를 발음했다. 무미건조하고 날카롭기까지 한 단정한 그의 얼굴에서 뱉어질 만한 말은 전혀 아니었다.

루나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음탕한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시킨다고 정말 말하다니. 자극적이지만 두 번은 시키지 말아야겠어.’

루나는 헛기침했다.

“아무튼…… 그래서였군요.”

아키스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과거를 여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어릴 적 잃어버린 아이라…….’

루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들어도 소설 같고 석연찮은 이야기였다.

어떻게 공작가의 후계자를 잃어버릴 수 있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찾은 건지. 루나는 그의 어린 시절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모습을 보면 뒷골목 출신의 부랑아라고 상상도 못하겠어.’

루나는 아키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거니까. 내게 평생 밝힐 수 없는 비밀…… 루의 얼굴이 있듯이.’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아키스는 무심결에 과거에 대해 말한 것을 후회했다.

‘괜한 소리를 했군.’

공작가는 워낙 특수해서 정실 자식이 아니어도 흠이 되지 않았다.

공작가의 자손들 중 소수에게만 발현되는 신체 특징은 후계자의 절대 조건이었다. 모친의 신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지 못하면 정실의 자식이라도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사생아는 경멸당하는 존재였고, 심지어 그는 길바닥 사생아 출신이었다.

대부분의 귀족 여인들은 그의 거친 과거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동정했다.

그리고 그런 여인들이 보내는 시선이 아키스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불쾌했다.

‘어떤 사연인지 궁금하긴 한데.’

루나는 과거에 대해 더 물어봐야 할지, 아니면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길에서 나고 자랐다면 분명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다.

‘나라면 내 고생에 대해 누가 동정하는 게 참 싫을 것 같아. 어림짐작도 싫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담담하게 반응해 줬으면 좋겠어.’

그녀 또한 구박데기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며 컸다. 그래서인지 이상한 자존심, 그런 것이 있었다.

크게 힘들지 않은 일이라면 위로 받고 싶겠지만,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힘든 일을 타인이 어림짐작해 위로해 봤자였다.

루나는 나직이 말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날 때부터 쭉 일관된 모습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후자의 사람은 절대 상황에 굴복해서 변하지 않는데요. 왠지 공작님은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독특한 분이라서 그런가.”

루나는 아키스의 손을 만지며 속삭였다.

뜻밖의 말에 아키스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루나는 괜히 말을 길게 한 것 같아 뺨을 붉혔다.

“사실, 전 저를 싫어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랐거든요. 그래서 스스로를 싫어하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을 해야 했어요. 환경이 어쨌든 난 나일 뿐이다, 이런 암시를 해야 했거든요. 그게 그냥 생각나서 말해 봤어요.”

“…….”

아키스는 루나의 말에 내심 놀랐다. 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루나가 몹시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왠지 공작님은 어렸을 때도 근엄했을 것 같거든요. 타고난 품위, 뭐 그런 거?”

장성한 지금도 대단한 미남이니, 어릴 적에도 예쁘긴 했을 것 같았다.

귀엽고 근엄한 어린애라니, 아키스는 그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뭐, 네…… 어쨌든 전 변함없는 사람 쪽이 좋다고요.”

아키스는 그녀가 과한 감정 이입을 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키스는 이상하게 그녀가 편하게 느껴졌고, 계속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저번엔 스스로를 지칭하며 환경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라 하더니.”

루나는 그가 자신의 사소한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옅게 웃었다.

“그건,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란 자리는 제가 살아온 환경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니까요. 그래서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면 하겠단 말이죠. 일단은, 역할은 다해야하니까.”

아키스는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성욕으로 시작된 관계치고는 꽤나 행운이라 생각했다.

“그럼, 당신 인생은?”

“……저요?”

루나의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좋은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까, 나쁜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까.”

“글쎄요, 제가 상상도 못한 길로 들어선 건 맞아요.”

아키스의 말에 루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위험한 길에 있었다. 지금이야 옅게 화장하고 그의 품에 부드럽게 안겨 있지만, 이 관계는 그녀의 삶의 종착역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체를 들킬 위험에 도망치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들키지 않은 채 오래 머무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독립할 기반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이대로 아키스와 잠자리만 계속 가져서야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전 잃을 게 너무 없는 나머지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소중한 건 없습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아키스가 그런 것을 물으니 퍽 의외였다.

“그런 것이 궁금하세요?”

“나도 내 아내에 대해 궁금해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루나는 아키스가 제게 보이는 흥미가 생소하여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별로 가진 게 없어서. 일단은…… 조금이지만 제 재산요.”

금화 1만 2천 개. 루의 과거를 없앤 후에 남은 유일한 유산. 지금은 그것이 루나의 보물이었다.

“그것뿐?”

아키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는 이상하게 그 시선을 마주하자 배 속이 뜨거워졌다.

“또…… 추억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랑했거든요.”

비록 빚만 남기고 돌아가신 아버지만, 루나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 추억이 가장 소중했다.

그리고, 또 하나.

‘라티아스.’

‘특별한 사람.’

갑자기 왜 그 말이 떠오르는 걸까.

아키스가 ‘루’로 변장한 그녀를 찾아 달빛 서점에 왔을 때, 보여 준 마법.

금빛 반딧불이 떠오르고, 흩날리는 금빛 불티 사이에서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던 아키스.

왜 그날 밤의 추억이 왜 떠오를까.

날카로운 첫사랑의 고동을 처음 느낀 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이었다. 그에게 반했고 마음의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어졌다. 하지만 아키스에겐 그 추억을 평생 말할 수 없으리라.

“다른 건, 비밀이에요.”

루나는 속삭였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길게 대화를 한 탓인지, 대낮부터 뜨거운 정사를 나눈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아키스는 망설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아키스는 한 번도 친부에 대한 애정을 가져 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달랐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사랑한다 했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타인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완벽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고.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잠시간 응시했다. 낯선 감정이 그의 마음을 점령했다.

그녀에 관련된 많은 것들이 생소했다.

* * *

탁―

아키스는 루나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침실을 빠져나왔다. 요즘 그는 루나가 낮에 잠든 틈을 타 집무실에서 급한 일들을 처리했다.

‘무례한 여자 같으니.’

아키스는 집무실 책상 한편에 놓인 새틴의 편지를 보았다. 그 여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자꾸 루나 님에 대한 편지를 보내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새틴의 이름 첫 글자만 꺼내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아키스 때문인지, 보고하는 디온의 어조가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새틴의 편지를 깡그리 무시하려던 아키스는 루나가 언급되었다는 말에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 속의 새틴은 루나에 대해 그가 꼭 알아야 할 비밀이 있다, 반복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루나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아키스는 편지를 던지듯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 * *

“놀라울 정도로 비생산적인 하루네…….”

루나가 눈을 떴을 때, 벌써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저녁 시간.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일어났다. 아키스는 곁에 없었다.

“……외출을 좀 하고 싶은데, 그가 놔주질 않으니.”

신혼 아닌 신혼이라고 아키스는 하루도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벌써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이네. 해가 지기 전에 가볍게 산책이라도 해야겠어.’

그나마 하루를 생산적으로 쓰기 위해 루나는 방을 나섰다.

‘……앗.’

계단을 내려가려 발을 내딛는 순간, 하반신에서 욱신욱신한 느낌이 왔다.

요즘 계속 그랬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나른한 느낌. 그녀는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안녕하십니까.”

내려가던 중, 루나는 2층으로 올라오던 디온과 눈이 마주쳤다. 루나가 가볍게 마주 인사했다.

“디온 님.”

“존칭을 붙이시다니요, 디온이라 불러 주십시오.”

루나는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디온.”

“산책하러 나가시나요?”

“네, 저녁 식사 전에 좀 걸으려고요.”

“공작님께서 뒤쪽 정원을 산책하고 계십니다. 함께 걷자 하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그럴까요?”

아키스가 밤만 되면 그녀를 원하는 건 맞았다. 그러나 그 외의 시간에도 그녀를 보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루나의 기색을 살핀 디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공작님이 일견 까다로워 보이는 분이나, 가까이 다가가면 보기보다 장점이 많으시답니다. 걱정 마시고 한번 나가 보세요.”

“그럴게요.”

루나는 디온의 다정한 조언에 살짝 미소 지었다. 루나를 그냥 보내려던 디온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아, 혹시 공작님께서 호숫가로 가시는 걸 보면 그때는 그냥 모른 척하시는 것이 나으실 겁니다.”

의외의 말에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숫가요?”

“네, 정원 뒤쪽의…… 작은 호수 말입니다.”

공작가 저택 뒤편에 위치한 작은 호수는 숲과 통한 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에 디온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졌다.

“그곳은 공작님께서 혼자 사색하시는 장소라, 그곳을 산책하실 땐 아무도 옆에 두지 않으시지요.”

“아,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죠. 알겠어요.”

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좋아하는 소설을 읽을 때 누군가에게 방해받는 걸 싫어하니, 아키스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 * *

“예쁘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하늘이 붉고 노랗게 물들었다.

루나는 사뿐사뿐 걸어 정원 뒤쪽을 거닐었다. 이렇게 걷다가 그와 마주치면 마주치는 거고, 아니면 그냥 돌아가자. 루나는 낡은 구두 끝으로 돌을 툭툭 치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사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

풀숲에서 불쑥 나타난 어떤 생명체를 보고 루나는 흠칫 놀랐다.

‘개……?’

새까맣고 큰 검은 개가 반질반질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뾰족한 귀는 양쪽으로 쫑긋 섰고, 탄탄한 근육질의 몸은 새카맣고 다리는 늘씬했다. 눈은 노을 속에서도 기묘하게 빛나는 노란색이었다.

크기나 늘씬한 몸집이 꼭 개라기 보단 늑대 같았다. 루나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컹!”

“꺄악!”

루나는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집채만 한 검은 개가 루나에게 달려들어 올라탔다.

“아?”

기겁한 루나는 곧 뺨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려든 검은 개가 검은 주둥이를 루나의 뺨에 비비고 코를 킁킁대며 얼굴을 핥고 난리였다. 당황한 루나는 검은 개의 몸을 더듬다가 목에 걸린 단단한 것을 찾았다. 가죽으로 무두질한 목줄이었다.

“……아. 너, 키우는 애구나.”

그제야 루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헥헥.”

검은 개는 꼬리를 흔들며 루나에게 올라탄 채 그녀를 반질반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얘, 무거워…….”

검은 개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순순히 루나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얌전히 앉아 루나를 보았다.

“너, 누가 키우는 애니? 혹시…….”

루나는 자세를 고쳐 검은 개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끙. 끄응.”

그러자 검은 개는 온갖 응석 부리는 소리를 내며 루나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긴 가죽 목줄을 손에 든 아키스였다. 아키스는 루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검은 개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울프, 이쪽으로.”

아키스는 속삭이듯 손짓했다.

검은 개는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유순하게 아키스를 보며 다가가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공작님.”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소개해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어졌군요.”

“공작님이 기르는 아이인가요?”

아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튼튼한 가죽 목줄을 개의 목에 채웠다. 그리고 그는 개의 목줄을 끌었다.

키가 훤칠한 그가 크고 늘씬한 검은 개의 목줄을 잡고 끄는 모습은 다소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한 폭의 매혹적인 그림 같기도 했다.

“사람을 잘 따르나 봐요. 갑자기 달려들어 얼굴을 핥기에 놀랐어요.”

루나는 그를 보고 말했다.

“혹시, 이 애가 실례를 했습니까?”

울프는 사람을 잘 따르는 편이 아니었다. 성질이 도도하고 사나운 맹견이라 주인 외에는 다 자기 아래 취급했다. 아키스가 튼튼한 징이 박힌 목줄을 당겼다.

울프는 작은 강아지처럼 끼잉, 하는 소리를 내며 루나에게 불쌍한 시선을 보냈다.

“괜찮아요, 좀 놀라긴 했지만 애교가 많아서 귀여웠는걸요.”

루나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가 아닌데, 신기하군요.”

“이런 개는 처음 봐요. 개 맞죠?”

“맞습니다. 보통 개는 아니지만요. 아마 처음 보는 종류일 겁니다.”

“무슨 종류인데요?”

“고대의 키메라 혼혈종입니다.”

아키스가 낮게 말했다.

‘키메라……. 들어 본 적 있어.’

달빛 서점에서 일할 당시, 고대 생물 이론학을 접해 본 적 있었기에 키메라가 무엇인지 알았다.

고대의 마법 생물학자들이 만들어 낸 생명체를 키메라라고 했다. 고대에 존재했던 몬스터들이나 동물을 합성해서 만든 인조 생명체.

루나는 시치미 떼고 모른 척했다.

“그게 뭔가요?”

“고대의 이형종을 키메라라고 합니다.”

아키스는 키메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울프는 몇 남지 않은 키메라와 사냥개가 결합하여 태어난 종입니다. 키메라의 피는 몇 대를 지나도 희석되지 않아 드물게 혼혈종이 만들어집니다. 영리하고 보통 개보다 튼튼합니다.”

아키스가 울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울프는 순종적으로 루나와 아키스를 번갈아 보았다.

‘……무섭게 생겼는데, 꽤 귀엽네.’

루나는 울프를 보며 생각했다.

“만져 봐도 돼요?”

루나의 물음에 아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울프는 마치 고양이처럼 그르렁, 목을 울리며 주둥이를 비볐다. 그리고 루나에게 제 냄새를 묻혔다.

“물진 않네요.”

“물려고 했으면 처음 보자마자 물었을 겁니다. 도둑을 잡는 개니까. 당신을 도둑으로 오해했다면 그랬겠죠.”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루나가 놀라 손을 떼려 하자 아키스가 그녀의 팔을 잡고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울프를 어루만지던 루나의 손 위로 아키스의 단단한 손이 겹쳐졌다.

“하지만, 한 번 마음에든 사람에겐 절대 덤비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서 내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르지요. 적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절대 공격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

확실히 요즘 질리도록 계속 붙어 있었으니 그의 냄새가 배었을지도 모른다.

아키스의 말에 루나는 괜히 체온이 올라갔다. 개가 정말 그렇게 코가 예민할까? 루나는 울프를 충분히 쓰다듬어 준 후, 조심스레 손을 뗐다.

“좀 걸을까요?”

아키스가 나직이 물었다.

“네, 좋아요.”

아키스가 줄을 당기자, 울프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루나는 아키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울프는 몸집이 큰 만큼 걸음이 빨랐고, 장신의 아키스 역시 보폭이 넓은 편이었다. 루나는 자연스레 뒤처졌다.

‘……아.’

아키스는 뒤처진 루나를 의식하고 울프의 목줄을 당겼다.

그는 루나의 옆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루나는 아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여자랑 걸어 본 적이 없으시군.’

당장이라도 그녀를 어루만질 것처럼 위험한 남성미를 발산하면서 여자를 대할 때 서투른 티가 나는 게 귀여웠다. 문득 루나는 그의 팔을 잡고 싶었지만 수줍어서 그러지 못했다.

아키스는 루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문득 이 각도에서 그녀를 보는 게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아키스보다는 훨씬 작았다. 자신보다 시선 아래에 흔들리는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이 각도에서 보는 그녀가 꽤 귀엽다는 걸 깨달았다.

참 이상한 여자다. 똑같은 여자인데 색다른 모습, 말투, 행동을 보여 줄 때마다 그녀만의 사랑스러움이 있었다.

“구두를 신었으니 걷기 힘들겠군요. 내 팔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고마워요.”

루나는 내밀어진 그의 팔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노을색 하늘이 점점 남색으로 물들었다. 이곳 근방은 유난히 별이 잘 보였다.

아키스가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아키스가 낙엽을 밟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네.”

루나는 그제야 아키스가 저에게 할 말이 있어 산책을 청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눈치챘다.

“새틴이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더군요.”

“새틴이요?”

“당신에 대해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던데, 내가 뭘 알아야 할지 궁금하군요. 혹시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그녀에 대한 이야기니 새틴에게 듣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키스의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반면, 아키스의 기습적인 질문에 루나의 심장이 조여 왔다.

“……그 애가 뭐라고 하던가요?”

루나는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쥐었다.

그녀는 아키스에게 루나에게 혼전 애인이 있었다는 말을 할 생각인 게 뻔했다. 새틴은 루나가 변장한 모습인 소년 루를 루나의 애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무시무시한 비밀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질문하려는 겁니다. 혹시, 혼전에 당신에게 있었던 일에 중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그게, 저…….”

루나는 비밀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도 아키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루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키스의 팔을 잡은 채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루나는 어두운 달빛 서점에서 일하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설레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첫사랑에 빠진 남장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그녀의 몽롱한 시선에 아키스는 심장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해졌다. 사실만 물으려 했는데, 이상하게 계속 말투가 뭉근해졌다.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무슨 과거든 상관없지만, 내가 미리 알고 수습해야 할 일이 있냐는 뜻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해도 믿으실 건가요?”

“네.”

아키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루나는 그의 대답에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좀 이상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그러니까, 이상한 상황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아키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루나는 그녀의 신분이 코르티잔이라 적힌 편지를 든 채 그의 앞에 나타났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에요. 저는 제 자신이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공작님께서 수습해 주실 일도 없고요.”

정확히 말하면 아키스가 수습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아키스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과거가 은근히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러나 아키스는 그것으로 납득했다. 그녀를 존중했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어 루나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끝인가? 정말 이런 간결한 말 한마디로 믿어 주는 건가?

“그걸로 되었습니다.”

“……네.”

루나는 그의 팔을 힘주어 꼭 붙잡았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는 숙부 가족들과 달랐다. 루나를 거짓말쟁이 취급하며 항상 쥐 잡듯 잡던 그들과는, 정말로 달랐다.

“그래서, 새틴에게 답장하실 건가요?”

“내가 왜? 그녀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키스는 몹시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시겠죠.”

루나는 입술을 작게 비틀어 웃었다. 아키스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정말 과거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말했지만, 당신이 코르티잔이라고 해도 청혼했을 겁니다.”

아키스는 울프의 목줄을 당기며 말했다. 울프는 아키스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공작님이야.’

루나는 그의 말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른 고위 귀족은 신부를 들일 때 사돈에 팔촌의 신분까지 따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요? 정말 어떤 여인과 혼인하든 상관없으셨군요. 공작님은 책임감이 있는 분이니까요.”

“…….”

아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나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도, 전 공작님이라서 몸도 결혼도 수락한 건데요.”

루나는 무심결에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아키스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렇습니까?”

아키스는 울프의 목줄을 잡은 채 루나를 돌아보았다. 루나는 앞을 보고 천천히 걸으며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네, 당연하죠.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가 자신을 만지면 정말 끔찍해하거든요. 당신이 절 만지는 걸 허락한 것도, 책임을 지겠다는 이유로 혼인을 허락한 것도 모두 그래도 괜찮은 상대기에 한 일이에요. 공작님은 저와 달리 호불호가 별로 없으신 것 같지만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호불호가 있다면…….”

“공작님이 호감 쪽인 건 당연하죠. 그러니까 만질 때 싫지 않았던 걸요.”

“왜……?”

아키스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등이 꼿꼿해졌다.

“음, 글쎄요? 본능 아닐까요? 좋고 싫음은 피부로 느끼는 거잖아요. 우리가 잤던 일은 충동에 가까웠지만, 보통 싫은 상대와는 충동도 생기지 않잖아요? 불장난도 상대를 가려 가며 치는 거고.”

루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가볍게 흘린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만일 아키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첫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그녀와 보낸 그날 밤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루나가 자신에게 떳떳한 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욕구도 충동도 인정할 수 있었다. 아키스를 속이고 있는 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내가 만지는 걸 좋아한다는 뜻인가? 나라서 괜찮았다고?’

한편, 아키스는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정작 그녀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인 듯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키스는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다 얼얼했다. 그러느라 그만 ‘아무 여자나 상관없었다’라는 변명할 적기를 놓치고 말았다.

‘……또 독 기운이 도나?’

저택이 가까워지며 정원에 밝게 켜진 불빛 아래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목과 도자기 같은 옆얼굴을 보는데 정말 느낌이 이상했다. 배 속이 쓰리다가 갑자기 간질간질해지면서 체온이 올랐다.

갑자기 아키스는 그녀를 만지고 격렬하게 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짐승 같은 성욕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기분이 낯설었다. 심장이 뛰긴 하는데, 독 기운에 의한 건 아니었다.

“울프는 어디서 자요?”

루나는 자신이 한 말은 잊은 듯, 아키스를 돌아보며 여상하게 물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바라보느라 평소보다 몇 초 대답이 늦었다.

“정원 뒤쪽의 집에서.”

“왜 지금껏 못 봤죠? 이렇게 큰 개를…….”

“당신이 울프를 보고 놀랄까 봐 요 며칠 묶어 두었습니다.”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종종 혼자 있을 때마다 정원을 산책하는 것 같기에.”

“배려해 주셔서 기뻐요. 공작님께서는 친절한 면이 있으시네요.”

루나가 맑게 웃어 보였다.

“내일도 울프랑 놀아도 되나요? 순한 아이 같아서요.”

“물론.”

아키스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배 속이 쓰린 게 가속화되었다.

대체 이건 또 무슨 증상인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는 이제 그의 팔짱을 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키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묘한 증상은 늦은 저녁까지도 계속되었다.

늦은 밤, 아키스는 서재에서 일을 하는 내내 슬쩍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문득 고개를 드니 디온이 그를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디온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디온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문득 아키스의 눈에 책상 한편에 쌓아 둔 편지 뭉텅이가 들어왔다. 모두 새틴이 보낸 편지였다.

“그런데 왜 부르신 것인지…….”

“이것들 모두 폐기해라. 생각 없이 아무 편지나 들이지 마.”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무슨 편지를 보내든, 무슨 말을 전하든 듣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처리해.”

“예, 전면 차단하겠습니다.”

아키스는 새틴에 관한 관심을 모두 끊었다.

* * *

루나는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그녀는 일어나 제 옆을 보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루나는 문득 그가 누웠던 자리를 쓸어 보았다.

‘……웬일이지, 먼저 일어났나 봐.’

요 며칠 신혼이라는 핑계로, 독 기운을 해소한다는 구실로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항상 옆에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루나의 입술을 덮치고 그녀를 어루만지던 아키스였다.

루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매끄러운 알몸 위로 시트가 미끄러졌다. 그녀의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여 있던 시트를 보니 그가 정리해 주고 나간 것 같았다.

‘아…….’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자, 다리 사이가 저릿했다. 그와 하나가 되었던 여운이 아침까지도 남아 있었다. 이제는 그런 아침이 익숙해졌다.

옷을 갈아입고 침실 밖으로 나가 1층으로 향했는데, 오늘따라 공작저가 분주했다.

‘……무슨 일이지?’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계단 아래에서 하녀 두 명이 수군거리다 루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침 루나는 2층에서 내려오던 디온과 마주쳤다.

“디온.”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 부인.”

“디온도 잘 잤나요? 공작님은요?”

“공작님은 오늘 황궁에 가셨습니다.”

“아…… 그래요?”

병환 중 아니던가? 언제 몸 상태가 나빠지거나 급격히 이상해질지 모른다며 외출을 삼가던 그였다.

루나의 기색을 알아챈 디온이 살짝 미소 지었다.

“궁으로 출발하시기 전 주치의가 와서 진료했는데, 공작님의 상태가 아주 좋다고 합니다.”

“아, 그런 줄은 몰랐네요.”

“네, 부인을 깨우기 싫으시다며 요즘은 응접실에서 진찰을 받으시니까요. 아무튼, 공작님의 몸에 나타난 푸른 선이 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독이 완전히 해독되었다고 하는군요. 약도 그만 드셔도 된다고 합니다.”

“아, 잘되었네요.”

루나는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가슴 한편이 묘하게 스산했다.

‘잘됐네. 매일 그렇게 하다가는 정말 딱 죽기 좋았다고. 복상사하나 했다니까. 마도구 펜던트가 그리워질 정도였어.’

그러면서도 이제 아키스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걸까 싶었다. 루나는 그런 제 생각이 민망했다.

‘……그럼 이제 각방을 쓰나? 독 때문에 좀 급하게 합방했으니까.’

그 생각도 잠시였다. 저택 밖에서 호위 기사 한 명이 급하게 들어오다 루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디온, 집에 무슨 일이 있나요?”

디온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외람되지만…… 부인께서 굳이 아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집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볼까요?”

루나가 디온의 눈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언짢게 해 드릴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공작님을 만나게 해 달라며 막무가내로 찾아온 손님이 있어서요.”

디온이 손님의 이야기를 꺼리며 숨기는 걸 보니 누굴지 뻔했다. 루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혹시, 숙부가 왔나요?”

“그게…… 새틴 영애가…….”

정말 새틴도 대단했다. 구태여 공작에게 미주알고주알 이르러 여기까지 쳐들어온 건가.

루나의 흐려진 표정을 본 디온이 다정하게 말했다.

“조용히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버티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 디온.”

루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디온은 루나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루나가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 어떤 편지를 들고 왔는지 알았다. 그리고 손수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새틴이라는 것도 알았다.

디온은 루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부인께서 새틴 영애를 직접 만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부드럽게 타일러 돌려보내겠습니다.”

“꼭 부드럽게 타일러 돌려보낼 필요 없어요.”

“……네?”

디온은 멍하니 되물었다.

루나는 순수하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거칠게 타일러 돌려보내도 된다고요.”

“…….”

디온은 뒤늦게 루나의 말을 알아듣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래야죠. 그 애는 워낙에 말이 안 통하는 아이라.”

“알겠습니다, 부인.”

“그럼, 전 식사하고 있을게요. 잘 부탁해요.”

루나는 몹시 평화롭게 말했다.

“네.”

그녀가 모르게 일을 처리하려던 디온은 머쓱해져 뺨을 긁적였다.

새로운 공작 부인은 뜻밖의 면모를 가진 듯했다.

* * *

루나는 혼자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마쳤다. 오늘도 공작가의 음식들은 훌륭했다.

그녀는 달콤한 오렌지 잼을 바른 따뜻한 빵과 근교 농가에서 막 짜 온 우유를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따뜻한 달걀과 고기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울프에게 간식을 주고 싶은데, 햄을 좀 가져다주겠어요?”

하인에게 부탁해 울프에게 줄 햄을 챙긴 루나는 느긋하게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루나를 알아본 울프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그녀가 머리를 어루만져 주자 작은 개처럼 끼잉, 하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햄을 먹었다.

“너, 비싼 햄만 좋아한다며? 나도 아침 식사로는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루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울프의 이마를 긁었다.

‘아키스의 개라 그런가, 그와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표정인데 알고 보면 다정할 때도 있고, 근육질의 탄탄한 몸에 자세가 좋은 것도 그렇고……. 흐음…….’

루나는 울프를 보며 생각했다.

“공작 부인, 아침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 나요.”

비아가 루나가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숄을 가져다주었다. 루나는 숄을 어깨에 둘렀다.

“고마워요, 비아.”

비아는 울프가 고분고분하게 루나의 다리 사이에서 고양이처럼 온갖 교태를 떠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이 애는 워낙 까탈스러워 주인님이 아니면 따르지 않는데 신기하군요.”

비아가 울프에게서 좀 거리를 두며 말했다.

“그래요? 애교가 많은 것 같은데.”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비아는 겁먹은 안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루나는 울프를 몇 번 더 만져 주고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비아가 한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르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공작님께서 외출을 하셨는데, 심심하시겠어요.”

“워낙 바쁜 분이 분이시니 익숙해져야지요. 나도 소일거리가 생기면 좋겠어요.”

루나는 비아와 담소를 나누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루나는 아직 몸이 피곤했다. 더 자고 싶었다. 오늘 밤부터는 아키스가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일도 없을 테니, 밤에도 푹 잘 수 있으리라.

루나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비아가 왜 저를 신경 써서 찾으러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호위 기사들이 저택으로 급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새틴이 버티고 있나 보군.’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디온이 기사와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디온, 어떻게 되어 가나요?”

루나를 보고 디온은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곤란한 듯한 미소와 함께 바로 대답했다.

“기사들이 윽박질렀는데도 계속 서서 버티고 있다 합니다. 차라리 대문으로 뛰어들어 오거나 난동을 부리면 끌어내기라도 할 텐데, 정문이 보이는 위치에서 거리를 두고 그냥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력을 쓰기도 애매해서…… 게다가, 공작님이 부재중이시지 않습니까.”

루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다시 말해 아키스의 허락을 받으면 무력을 써서라도 쫓아낼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새틴은 아키스의 부하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또, 디온이 새틴에게 쉽사리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허울뿐이라도 루나의 자매라는 이유도 있었다. 혹시나 새틴이 공작 가에서 험한 일을 당했다며 떠들고 다녀서 루나의 명예에 해가 될까 염려한 것이었다.

“거기다…….”

“난 상관없으니 말해요.”

디온이 몹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공작 부인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느니.”

루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새틴의 속은 뻔했다. 보나마나 아키스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아키스가 돌아오면 보란 듯이 그의 눈앞에서 쓰러지려는 작전일 것이다. 새틴의 얕은 수를 루나는 투명한 물속을 보듯 꿰뚫고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소원이라니 안으로 들여보내요. 내가 직접 만날게요.”

“그건…….”

“일단은 명맥상이라도 제 가족인걸요. 들여보내세요. 책임은 내가 질게요.”

디온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루나가 말을 덧붙였다.

“나도 새틴이 공작님을 만나는 상황은 피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도 여자니까요. 내 말을 알아듣겠지요?”

그 말에 디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공작이 전 약혼녀와 만나는 게 싫다는 공작 부인의 말에 어찌 말대답을 하겠는가.

“그리고 새틴은 궁지에 몰리면 말을 지어내는 것도 서슴지 않아 공작님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되어서요. 내가 타일러 돌려보내는 편이 나을 거예요.”

결국 디온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대신, 기사들이 대기한 상태에서 면담하시는 겁니다.”

“그건 좀 그러네요. 들려주고 싶지 않은 대화가 될 수도 있거든요. 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대화가 오갈지도 모를 텐데, 그걸 정말 기사들에게 들려주어도 되나요?”

루나가 그렇게 말하자 디온의 입이 벌어졌다.

“1층 응접실로 데려와요.”

“정 그러시면, 주변에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시면 바로 종을 울리거나 소리를 쳐 주세요.”

그녀가 그렇게 야무지게 말을 하니 디온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그런데 루나가 디온을 만류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약간 장난스런 미소 같기도 했다.

“오늘 날이 쌀쌀하잖아요. 바람도 많이 불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두 시간 있다가 부르세요. 두 시간은 충분히 버틸 거예요.”

“…….”

“아, 혹시 그러다 새틴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냥 의사를 바로 부르세요. 그리고 들것에 실어 버몬드가로 보내 버리고요.”

“네, 공작 부인.”

디온은 루나의 몹시도 부드러운 말투에 압도된 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디온은 앞으로 이 아름다운 공작 부인을 적으로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아한 외모와 달리 보통이 아니었다.

* * *

루나의 기대와는 달리, 새틴은 두 시간 후에도 악착같이 버텼다.

1층에 있는 작은 응접실은 현관 바로 옆에 있었고,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큰 창문이 달려 있었다.

루나의 지시대로 호위 기사들은 창문 밖과 응접실 문 앞에 대기했다. 그리고 디온이 새틴을 데리러 나갔다. 루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새틴을 기다렸다. 곧 씩씩거리는 걸음으로 새틴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는 새틴을 힐끗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루나는 새틴을 다시 보면 그녀에게 곧바로 손을 올리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사람에게 너무 정이 떨어지면 화도 나지 않는다는 걸 체감했다.

“루나…….”

새틴은 응접실 안에 다른 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비쩍 마른 몸의 새틴은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그녀는 보란 듯이 한 번 휘청거리니 벽을 잡고 섰다.

“이제 날 보고 아는 척도 안 하는구나? 루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집에 돌아와. 마음 깊이 반성하고 어머니 아버지께 싹싹 빌어.”

새틴은 정말 세상 모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루나에게 훈계했다.

새틴의 말에 루나는 귀를 의심했다. 누가 누구에게 빌라고?

“나보고 빌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루나가 어이없어서 한 대꾸에 새틴은 감정을 폭발시켰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울분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너, 어쩌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니?! 어떻게 너 같은 사람 같지 않은 애가 있을 수 있는지 정말 난 모르겠어! 너 때문에 어머니는 앓아 누우셨고, 아버지는 사업을 수습하러 다니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 다니고 계셔. 정말 사람 새끼는 거두는 거 아니라고,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내 남자를 빼앗아 가?”

놀라움에 루나의 입이 벌어졌다.

맞아, 얘는 이런 애였지. 새틴은 정말 진심으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한술 더 떠 새틴은 울먹울먹하다 흑, 하고 입을 막았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온몸으로 슬픔을 표현했다.

그녀가 한참을 들썩거리다 입을 열었다.

“물론, 난 너와 달라서…… 너 같은 부류의 여자애는 잘 이해 못하겠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자라면 정신 못 차리는 너 같은 여자. 그렇지만, 우리 한집에서 자매로 자랐잖아? 그러니 기회를 줄게 어서 집으로 돌아와.”

루나는 신박한 경험을 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대꾸를 할 의욕조차 없어지는 경험이었다. 뭐라 헛소리를 하나 들어 보려 했더니만,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겠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새틴은 피해자, 루나는 잔악무도한 가해자였다. 새틴의 피해망상병은 세계 제일이었다.

루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어쩔 건데?”

“……뭐?”

루나는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안 돌아가면 뭐 어쩔 거니? 아, 거기가 내 집이긴 해? 밖에 다닐 땐 항상 나를 시녀라고 소개하라 했잖아, 응?”

새틴은 루나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이를 부득 갈았다.

“네가 그렇게 여유 부릴 때야? 내가 공작님께 모든 걸 다 말하면 넌 죽은 목숨이야.”

“아…… 그러니까 넌 공작님께 내 과거를 말하면 공작님이 화가 나서 날 죽일 거라 말하는 거구나, 그렇지?”

루나는 새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다정하게 말했다.

새틴이 눈물을 멈추고 뺨을 쓱 닦더니 루나를 노려보았다. 이래야 새틴이지. 루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새틴이 표독하게 말했다.

“넌 정말 양심도 없구나.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니? 네 아버지와 네가 우리 집안을 두 번이나 망하게 만들었어. 그간 우리가 빚쟁이의 딸인 너를 얼마나 귀하게 먹이고 입혔니? 너 하나한테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아? 네 아버지가 남긴 빚이 얼만지 알기나 해?”

루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내가 아버지의 빚을 다 갚으면?”

“……뭐?”

“내가 그 빚 다 갚으면, 나도 너한테 똑같이 해도 돼?”

루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새틴은 입을 떡 벌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널 코르티잔으로 만들고 시녀 취급하고 내 시중들게 하고 무급으로 부려 먹고 화풀이 감으로 써도 되니?”

루나가 상냥하게 물었다. 새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돼?”

루나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빚 다 갚을게. 이자도 넉넉하게 쳐서.”

새틴의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녀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는 네가 하고 있지.”

“너, 내가 공작님께 입을 열면…….”

“열어, 얼마든지.”

루나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말했다.

“다 말해. 네 망상까지 보태서 말해도 돼.”

루나는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을 거야, 그치?”

새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공작님이 널 믿어 줄 것 같아? 그 사람이 얼마나……!”

그가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 사람인지 새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룻밤 자서 충동으로 루나와 혼인했을지언정 루나에게 관대하진 않을 것이다.

나처럼 매력이 넘치는 진짜 숙녀에게도 그토록 냉정한 그였으니, 루나같이 닳고 닳은 요부 년에겐 금방 질릴 것이다. 새틴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새틴, 네가 겪는 일이 뭐든지 간에 그건 자업자득이야.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

루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난 네 소원대로 숙부와 숙모님에게 돈도 갚아 주려 했거든. 그런데, 넌 그걸 못 기다리고 날 팔아 버렸지.”

“남자한테 몸 팔아서 번 그딴 더러운 돈을 내가 받을 것 같아?!”

새틴이 아득바득 소리 질렀다.

이제 루나는 머리가 다 아팠다. 뭐 어쩌라는 건지. 돈을 갚으라고 하기에 갚으려고 하자, 그 돈은 더러운 돈이라고 난리다.

루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말로 대한 게 잘못이다.

루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새틴.”

루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성인이야. 얻을 수 없는 걸 억지를 부려 얻을 나이는 지났어. 현실을 파악해, 그리고 이제 나가. 네 헛소리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를 돌려줘! 난 그 사람을 좋아했어! 어떻게 내 걸 뺏을 수 있니?”

“……공작님이 내 것도 아니지만, 네 것도 아니지 않니? 새틴, 넌 정말 긍정적이다.”

루나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매사를 제 맘대로 생각하는지.

“내게 협박은 안 통해. 그리고 네가 한 일을 난 용서하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 안 그러면…….”

루나는 새틴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새틴이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너, 너 이제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 이제 무서운 것도 없다 이거지?”

루나는 새틴의 눈앞까지 다가간 다음, 생긋 웃고 떨어졌다.

“아니, 난 널 예전과 똑같이 대하고 있어. 이제 네가 날 위협적으로 느끼는 거겠지.”

루나는 새틴의 생각이 가소로웠다.

“네가 이왕 그렇게 말했으니 하는 말인데. 지금의 나라면 널 하녀로 만들 수도 있고, 내가 당한 것들과 똑같은 꼴을 당하게 할 수도 있어.”

루나는 새틴에게 일종의 블러핑, 거짓 경고를 했다.

그녀가 공작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아직 그녀 자신은 힘이 없었다. 공작에게 그런 걸 부탁할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을 갈망하는 만큼 권력을 두려워하는 새틴은 분명 그 거짓에 속을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새틴이 움찔하더니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마치 희롱당하는 농가의 처녀처럼 가련하고 스스로를 동정하는 얼굴로 루나를 노려보았다.

루나는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새틴, 내가 지금 너를 그냥 봐주는 이유는 널 좋아해서가 아니야. 동정해서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너한테 아무 관심 없어.”

새틴이 바르르 떨었다.

무관심.

새틴에게 가장 타격 입힐 수 있는 말이 그것임을 루나는 잘 알았다. 그녀는 관심을 먹고 사는 애였으니까. 동정이든 미움이든 관심을 못 받으면 미쳐 버리는 애였다.

“너는 그럴 가치도 없거든.”

루나가 차갑게 내뱉었다.

“뭐, 뭐……?”

루나는 딱하단 눈으로 새틴을 보았다.

‘답 없는 애를 상대해 뭐 하겠니.’

딱 그런 눈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정말로 우리 이제 엮이지 말자. 그게 너한테 더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 마음이 바뀔 것 같으니까.”

루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새틴의 머릿속이 꼬였다. 루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말했다. 새틴이 루나의 돈을 훔치고 그녀를 희롱한 날.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게 말했다.

새틴의 망상병이 도졌다. 점점 그녀의 이성이 무너졌다.

‘……혹시 이 계집애, 다 의도한 거 아냐? 그래, 분명해. 내 옆에서 기다려 온 거야. 남자들을 꼬드기고 문란하게 살면서 내가 가진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 절대 용서 못해. 아, 도대체 세상은 왜 나처럼 착한 여자가 아닌 저런 못된 년들에게 유리한 걸까?’

새틴이 몸을 파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난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어. 난 정말 노력했고 그래서 기회를 잡았는데, 네가 내 기회를 빼앗아? 넌 정말 못된 년이야, 악마라고. 바꿀 수 있었는데…… 내 삶을 바꿀 수 있었는데…….”

새틴은 흐느끼며 말했다. 루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잔머리 굴리다 자멸한 걸 내 탓하지 마. 머리 굴리는 건 네 마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그러면 안 되지 않니?”

루나가 싸늘하게 비꼬았다.

“집에 돌아가서 파티 초대장이나 만들지 그러니? 이번엔 직접.”

루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간 새틴은 여러 사교계 모임에서 어른들과 사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일들을 떠맡곤 했다. 자선 행사 모임의 주최나, 사교 파티 주최 같은 것들.

그때마다 새틴은 제가 일을 맡아 놓고 온갖 노동을 루나에게 다 떠맡겼다. 예산도 적었기에 모든 일을 손으로 해내야 했다.

심지어 루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공평하고 과한 일들을 모두 떠맡아 놓고는 같은 모임의 영애들에게 시키듯 맡긴 적도 여러 번인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칭찬은 새틴이 독차지했다. 그때문에 몇 영애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제 공작이라는 방패가 사라졌으니 새틴은 사교계에서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남는 건 파혼 소식과 바닥까지 떨어진 평판, 가난한 가문뿐일 것이다.

비꼬는 루나의 말에 새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

“이…… 이……!”

새틴이 루나에게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루나가 먼저였다.

짝. 새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새틴은 휘청였다. 믿을 수 없었다.

“너 날 때렸어?”

루나는 싱긋 웃었다.

“아직 덜 때렸거든?”

아무래도 저번에 새틴이 머리를 덜 뽑힌 것 같다.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데 그때였다.

쨍그랑! 유리창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크게 울렸다.

“울프!”

동시에 밖에서 호위 기사들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뭔가 시꺼먼 것이 창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

아키스의 개, 울프였다. 창문이 깨지며 찬바람과 유리 조각들이 루나 쪽으로 날아들었다.

“……아.”

루나는 손등이 따끔한 걸 느꼈다.

그러나 그걸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울프가 새틴을 깔아뭉개고 그녀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꺄…… 꺄아아아아악!”

울프가 입을 벌리자, 뾰족한 이가 나 있는 입안이 드러났다.

울프는 그대로 새틴을 단단한 앞발로 누르고 목덜미에 위협적으로 이를 들이댔다. 새틴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찌익! 새틴이 입고 온 드레스 자락이 울프에 의해 찢겼다. 그리고 울프가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새틴의 목덜미를 물었다.

“울프, 그만해!”

루나는 뛰는 심장을 누르고 말했다

울프는 루나의 말을 알아들은 듯 튼튼한 앞발로 새틴을 누른 채 루나를 유순하게 보았다. 울프의 아가리 사이에 새틴의 가는 목이 갇혀있었다.

“빨리 이 괴물 치워줘! 이 망할 년!”

“…….”

루나는 울프가 자기 말을 얼마나 알아들을지 궁금해졌다. 루나는 그대로 새틴을 내려다보았다.

“잘못했다고 해.”

루나가 속삭였다. 새틴의 눈이 커졌다. 새틴이 거부하자 루나는 울프에게 눈짓했다. 크릉. 울프가 신묘하게 말을 알아듣고 새틴의 목덜미를 문 입에 힘을 주었다.

“잘못했어, 잘못했다구!”

“울프. 그만.”

루나가 말했다. 울프는 크릉, 하는 숨을 새틴을 향해 내쉬고는 비척비척 루나에게 다가왔다.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디온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사람의 눈으로 루나를 보고 있었다.

호위 기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놔! 내 몸에 손대지 마!”

호위 기사들이 새틴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새틴이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저 괴물을 당장 잡아요! 저게 사람을 공격했다고요!”

새틴은 울며불며 소리쳤다. 주변 기사들이 난감한 눈으로 새틴을 보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새틴을 더 꽉 붙들어 맬 뿐이었다.

“착하지, 울프.”

루나는 그런 새틴의 눈을 끝까지 마주하며 손을 뻗어 울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새까맣고 집채만 한 개를 손아래에 둔 루나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기백까지 느껴졌다.

울프는 크릉, 하는 소리를 내며 루나의 드레스 주위를 맴돌았다. 루나가 속삭였다.

“오늘은 특식 먹는 날 아니라고 했잖아. 안 돼.”

“……트, 특식…… 이라고?”

거짓말처럼 새틴의 동작이 멎었다.

“네가 좋아하는 야들야들하고 비싼 고기, 오늘은 이미 먹었잖니? 더는 안 돼.”

그 말에 무얼 상상했는지 새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나는 새틴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다음번엔 원하는 대로 먹게 해 줄게, 알았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이 애는 이형종이라서 다른 개와는 달리 완전 육식종이거든.”

루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상상하는 그거 맞아.”

루나는 울프의 턱을 가볍게 긁었다.

“저 여자 냄새, 기억해 뒀지?”

“히, 히익! 꺄악!”

새틴이 발작하듯 비명을 질러 댔다. 루나는 턱짓했다.

“이제 놔줘요.”

루나의 말에 기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새틴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새틴이 힘 풀린 듯 주저앉았다.

“살려 줘!”

새틴은 뒤로 비척비척 기어 엉덩이를 끌더니 벌떡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갔다. 거지꼴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루나는 쓰게 웃었다. 기사 두어 명이 그런 새틴을 쫓아 달려 나갔다.

‘……새틴, 복수는 이걸로 대신한다 쳐 줄게. 그러니 정신 좀 차려.’

저 꼴을 보니 죽이고 싶도록 밉던 새틴에 대한 미움이 좀 누그러들었다.

한편, 디온은 홀린 듯 루나를 보고 있었다. 호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어 공작 부인, 괜찮으십니까?”

“네, 나야 괜찮죠. 아…….”

루나는 그제야 자신의 손을 보았다. 유리 조각에 긁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디온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공작 부인께서 다치셨다! 어서 약을 가져와라!”

“네……!”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제야 루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리를 깼군요. 집사에게 좀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공작 부인의 몸에 난 상처가 더 큰일이죠.”

디온은 루나를 응접실 밖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하녀가 가져다준 약상자에서 약을 꺼냈다.

“저, 공작 부인…… 실례가 안 된다면.”

“아, 네. 미안해요, 디온.”

“아닙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디온은 그녀의 살에 닿지 않으려 노력하며 루나의 피를 닦아 주고 소독한 후 붕대를 감았다. 그 손길이 몹시 능숙했다. 루나는 약이 닿을 때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살짝 스치신 것뿐이라 흉은 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응급 처치는 해 두었으니, 곧 주치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녜요, 주치의를 부를 정도는 아닌걸요. 더 소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요.”

울프는 루나의 발치에서 계속 맴돌다, 그녀의 발목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디온은 그런 울프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

“울프를 이만큼 길들인 분은 처음 봅니다. 울프가 나쁜 개는 아니지만, 공작님 외에는 따르지 않으니까요.”

처치를 마친 디온이 약상자를 정리했다.

그의 태도는 몹시 신사적이었다.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디온도 꽤 잘생긴 청년이었다. 루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그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

그때, 디온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정말 놀랐습니다. 부인께서 직접 새틴 영애를 상대한다고 하셨을 때 많이 염려했는데…….”

디온의 말에 루나가 멋쩍게 웃어 보이고는 울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새틴이 울프에 대해 사람을 해한다고 나쁘게 소문내면 어쩌죠? 울프에게 미안하네요.”

그녀는 손을 뻗어 울프를 쓰다듬었다.

“분명 부인의 위기를 기민하게 눈치챈 것이지요. 이 녀석이 기사들보다 나았습니다.”

울프는 그런 루나의 걱정을 아는 것처럼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루나는 울프의 귀와 귀 사이를 긁었다.

“다만, 울프 녀석이 공작님께 혼나겠군요.”

“저 때문에…….”

“아, 아뇨. 훈련은 다시 받아야겠지만, 곧장 물지 않은 걸 보면 이 녀석도 위협만 하려 한 걸 겁니다. 다만, 녀석이 유리창을 깬 바람에 공작 부인께서 손을 다치신 게 문제지요. 그걸 혼내실 겁니다.”

“……그게 뭐 별일이라고.”

아키스도 루나가 조금 다친 일에 그렇게 신경 쓸 것 같진 않았다.

“아, 새틴 일은 별문제 없겠죠? 공작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폐라뇨.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부인. 누구든 공작 부인을 모독하는 사람은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부인께서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루나는 그 말에 디온의 성격을 알 것도 같았다. 갑작스레 들어온 공작 부인, 뒷배도 없는 그녀이니 무시하기 쉬울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 일기장 속의 미래, 그곳에서 만난 고용인들과는 딴판이구나.’

루나는 미소 지었다.

일기장 속 루나의 미래. 병자의 아내가 된 그 미래에서는 루나가 팔려 온 신부이기에 모두 루나를 무시하고 불손하게 대했다. 집사처럼 힘 있는 고용인들은 더욱 그랬다.

“고마워요, 디온. 빨리 신세지지 않도록 많은 걸 배우도록 할게요.”

디온은 그 말에 뜻밖이라는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공작님의 상태만 정상이었다면 참 좋은 배필이 되셨을 텐데. 아쉽군.’

디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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