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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 드 라미라.
사교계 최고의 여인으로 불리는 그녀는 고결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작 15세의 나이에 모든 걸 가졌다. 그녀는 15세가 되는 해, 사교계의 ‘그해의 영애’로 선정되어 국왕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 받았고, 또 황제와 사람들 앞에서 박수를 받으며 춤을 췄다.
거기다 그녀의 어머니는 황제의 사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제국 3대 명문가의 가주이자 부유하기로 유명한 라미라 후작이었다. 금지옥엽 외동딸인 그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지극했다.
혼기가 무르익은 지금은 영식들의 청혼이 줄을 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딱 하나, 사랑하는 남자의 관심을 제외하고는.
라미라 영애, 달리아의 오랜 짝사랑은 유명했다. 그녀는 제국 유일한 공작인 젊은 로텐베른 공작, 아키스를 짝사랑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달리아는 운명이란 단어를 배웠다. 운명, 그것 외에는 그 감정을 무엇이라 설명한단 말인가.
아키스는 아름다웠고, 그의 차가운 표정 아래 감춰진 섬세함은 그녀를 현혹했다.
아키스가 약혼한 뒤에도 그녀의 짝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조상의 은덕. 약속으로 아키스에게 약혼녀가 생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 비렁뱅이의 딸이 아키스와 결혼한다니, 말도 안 돼.’
새틴, 그 찢어 죽여도 부족할 얄미운 여자. 운 좋게 아키스의 약혼자 자리를 꿰찬 여자. 저는 특별한 여자라는 양 순진한 척하고 다니는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달리아는 피가 솟구쳤다.
아키스와 약혼하기 전에도 달리아에게 새틴은 눈엣가시였다. 새틴은 다른 귀족 영애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같은 여자를 깔보며 영식들에게 다가가 이간질을 하곤 했다.
‘영애들이 절 따돌리나 봐요. 아마 제 성격이 영식들과 어울리는 데 더 익숙해서 그런 건지…… 영애들은 남의 험담을 해서 저와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더라고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사내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부류의 여자가 새틴이었다. 달리아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질 만한 상대에게 진 게 아니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설사 결혼한다 해도 이혼하는 방법도 있지. 결국 아키스를 차지하는 건 내가 될 거야.’
달리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달리아가 아끼는 미소년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하녀가 도착하였습니다.”
달리아는 시종에게 물었다.
“조용히 데려왔겠지?”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문의 문양이 없는 마차를 보내 데려왔습니다.”
“좋아, 잘했다.”
시종은 곧 하녀 한 명을 끌고 왔다. 파리한 얼굴의 가냘픈 하녀는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시킨 건 가져왔니?”
“……네, 네.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걸 제가 빼돌린 걸 들키면 저는 마법사님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녀가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어쩌겠니, 네 여동생의 목숨이 내 손에 달린 것을. 어서 약을 주렴. 그러면 네 여동생을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
하녀는 울먹이며 액체가 담긴 병을 내밀었다. 달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가질 거야.’
달리아는 아키스를 가지기 위해서 뭐든지 할 심산이었다. 마음을 조종하는 독을 먹여서라도.
마법사들이 사람의 정신이나 몸에 영향을 미치는 약을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건 불법이었다. 그러나 유명한 흑마법사들은 집 안에 몰래 불법 약들을 감춰 놓고는 했다. 그리고 고위 귀족들에게 은밀히 팔곤 했다.
마침 달리아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의 친언니가 제국 최고의 흑마법사의 집에서 일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달리아는 여동생의 안위를 걸고 흑마법사의 하녀를 협박했다. 약을 훔쳐 내면 여동생을 풀어 주겠다고.
달리아는 미소 지었다.
“들켜도 내 이름을 절대 말하지 말도록 해. 그랬다간 네 여동생을 죽을 때까지 매질할 거야.”
“히익. 네, 알겠습니다.”
“내보내.”
달리아가 턱짓했다.
그녀의 하인들이 훌쩍이는 하녀를 끌어냈다.
달리아는 미리 하인들에게 일러두었다. 하녀를 도시 밖으로 데려가 버리고 오라고. 사라진 약에 대해 흑마법사가 눈치챈들 죄는 없어진 하녀가 덮어쓸 것이다.
‘흑마법사의 사랑의 묘약이라…….’
달리아는 약병을 손안에서 굴렸다.
아키스와 자신을 이어 줄 약은 새까만 색이었다. 투명한 병 안에 든 검은색은 매혹적이었다. 그의 명줄을 틀어쥘 수 있는 도구가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내가 못된 것 같으니?”
문득 달리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의 시선을 느꼈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어때 보이니?”
“아주 예쁘시고, 천사 같아 보이십니다.”
시종은 당황한 채 말했다.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선해 보이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란다. 여인이 선해 보이면 그때야말로 아무에게도 의심 받지 않거든.”
“네?”
달리아는 자신이 순결한 미모를 가진 걸 알았다. 그런 여인일수록 타인의 눈에 선해 보이기 마련이다.
외모만큼 큰 방패가 있을까.
가장 악한 여인은 가장 선하게 생긴 여인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지혜였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같이 살기만 하면 돼. 그럼 아키스도 언젠가는 나를 사랑할 거야. 내가 선택한 남자인걸.’
달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생각했다.
아키스도 자신에게 무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대할 때의 표정, 몸짓, 눈빛 등. 적어도 아키스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리라. 달리아는 남몰래 확신하고 있었다.
‘남녀가 맺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계기지. 계기야 만들면 되는 거고. 난 결국 원하는 걸 모두 손에 넣을 거야.’
그러니 그전까지 아키스가 누구와 약혼하든 누굴 만나든 과거는 다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미소년 나부랭이에 대한 새 정보는 없니?”
달리아가 시종을 향해 물었다.
요즘 달리아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새틴만이 아니었다. 아키스가 누구에게 관심을 보이는 성정이 아닌데 서점에서 일하는 어떤 미소년 한 명에게 꾸준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아키스와 미소년이 엮인 야릇한 소문이 슬슬 달리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혹시 몰라 아키스에게서 떼 놓을 생각에 급한 대로 자신의 시종으로 데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달리아의 제의를 거절했다.
‘고서점 거리에서 일한다 하니 내가 직접 가 볼 수도 없고…….’
고서점 거리는 달리아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직접 나다녔다간 큰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것이다.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만, 그 소년을 보기 위해 여전히 공작님이 자주 서점에 드나든다 하십니다.”
달리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조치를 취할까요?”
“내가 직접 얼굴을 한번 봐야겠어. 내 정체는 드러나지 않게 하고 한번 끌고 와. 공작님이 드러내 놓고 총애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감정이 흑심이신지 연정이신지, 아니면 그냥 관심이신지 한번 판단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시종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 * *
루나는 요즘 멍할 때가 많았다.
주방에서 파이 반죽을 주무르다가도, 약간 생긴 짬에 정원 한편에서 몰래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도, 새틴의 드레스를 정리하다가도.
문득 심장 가운데 이상하게 간질간질한 것이 들어차 작은 한숨을 내쉴 때가 많았다. 그러다 퍼뜩 놀라며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것이다.
모두 공작을 만난 이튿날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그녀 자신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루나는 그러느라 새틴이 방에 들어온 줄도 몰랐다.
“너, 뭐 해?”
“응?”
루나는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내려놓았다. 새틴은 수상하다는 듯 루나를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 짐은 다 쌌어?”
가을이 무르익어 감에 따라 어느덧 추수회 축제가 바짝 다가왔다.
추수회 전후로 수많은 무도회가 다양한 귀족 가문의 별장과 저택에서 열렸다. 하루를 묵고 오는 무도회도 많았다. 새틴은 중요한 무도회들이 많다며 드레스 고르는 일로 루나를 닦달했다.
“거의 다했어. 무도회는 다음 주라고 했잖아. 무도회 드레스와 아침 연회 때 입을 두 종류만 두벌 씩 챙기면 되는 거지?”
새틴은 순간 심술이 들어 그렇다 대답했다.
“응, 그 두 종류면 돼.”
사실 악보라든가 피크닉 모자 같은 몇 가지 준비물이 더 필요했으나, 새틴은 루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은 고개를 기울여 루나를 관찰했다.
‘이 계집애가 왜 점점 예뻐지는 거지?’
이상하게 요즘 루나는 들떠 보였다.
뿐만 아니라 피부 결이 점점 좋아지고 금발의 머리카락은 점점 더 구름같이 풍성하고 결도 좋아졌다. 루나가 아키스가 준 마도구 펜던트와 잘 맞는 체질이라 그 효과로 계속 건강해진다는 걸 모르는 새틴은 거슬릴 뿐이었다.
“그리고, 황실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치는 데는 공들여 줘. 그날 공작님도 오실 거니까.”
새틴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축제 당일 날에는 황실 무도회가 열렸고 공작의 후광으로 새틴도 초청 받았다. 새틴은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틴의 뺨에는 홍조가 돌고 눈은 반짝였다. 그토록 자기애가 강한 새틴이건만, 그녀 또한 공작에게 진심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번에 아키스, 그분 말이야. 저번에 공작님이 내 머리카락을 오래 쳐다보셨어. 왜 그랬을까?”
새틴의 질문 세례가 또 시작이었다.
그녀는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루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물어보곤 했다. 그리고 원하는 대답은 항상 칭찬이었다.
네가 예뻐서, 네가 멋져서 그래. 이런 대답을 으레 원하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새틴은 여전히 아이 같았다.
루나는 약간 피곤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저번에 네가 그분에 대해 워낙 알기 힘든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거야 그분은 성장 배경이 남다르시니까.”
루나의 대답에 새틴의 뺨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젊은 로텐베른 공작 아키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키스는 어릴 적 공작가의 실수로 잃어버린 아이였다. 정실부인의 자식은 아니었지만 공작가의 귀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시골 마을의 잡배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고 우연히 시골 마을을 지나가던 선대 로텐베른 공작은 기적적으로 아키스를 찾아내고 감동의 상봉을 했다고 한다.
그의 혈통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들만 물려받는 보랏빛 눈동자는 보증이나 다름없었다.
아키스는 더없이 단정한 태도를 보이는 사내였지만, 눈 안에 묘한 야성을 감추고 있었다. 철없는 귀족 영애들은 어린 시절 아키스가 자란 가난한 시골 마을마저 낭만적으로 느끼곤 했다.
“공작님은 좀 거친 면이 있으시잖아. 이중성이 있으시니 내가 잘 이해해 줘야 해. 아내가 되면 그분을 내조하며 살게 될 테니까.”
“그래, 잘되었네.”
루나는 무심히 대답했다. 새틴의 표정이 민망함에 달아올랐다.
‘정말 건방져졌어. 꼴 보기 싫어 죽겠네.’
새틴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러곤 루나를 향해 나긋이 말했다.
“너, 날 질투하니?”
“뭐?”
“내가 공작님과 약혼한 걸 질투하는 거야? 요새 왜 이래?”
루나는 기가 찼다. 이건 또 뭔지. 새틴의 정신세계는 오래 체험했지만 새삼 경험할 때마다 새로웠다.
“안 그래.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걸.”
그 대답을 하면서도 루나의 머릿속에 구름 같은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비밀스러운 남장 모습으로 밤이면 그를 만났다. 그러나 루나는 아키스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의외로 예의 바른 말씨를 구사한다는 것, 사람을 오래 쳐다본다는 것.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 항상 두둑한 팁으로 그녀를 기쁘게 해 준다는 것.
오늘 밤도 묘하게 그가 기다려지리라는 것. 그 정도밖에는.
새틴의 입매가 굳었다.
루나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요즘 새틴은 점점 자신이 바보가 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 *
귀족가 곳곳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거리마다 사람들이 붐비는 추수회 기간. 이때엔 시장을 드나든다는 핑계로 루나도 자주 낮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루나는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으로 좋아하는 소설책들을 사 오거나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사람 구경을 하곤 했다.
오늘은 새틴이 하루 종일 외부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루나는 오늘 하루가 평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했다. 숙부 가족들은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루나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지만, 그중 으뜸은 단연 새틴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성가시게 만드는 새틴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루나의 일은 한결 편해졌다.
새틴은 오전에는 티 파티에 참석하고, 오후는 어떤 귀족의 집에서 열리는 소녀들만의 이브닝 파티에 참석한다 했다. 여인들만 참석하는 파티는 샤프롱도 없이 진행된다던가.
그리고 이브닝 파티 장소인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 했다. 물론, 새틴의 드레스를 고르고 짐을 싸는 건 루나의 몫이었다.
“넌 정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니?! 왜 새틴의 악보를 챙기지 않은 거야?”
숙모인 벨레가 펄펄 뛰면서 말했다.
“분명 새틴이 이브닝 파티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말했는데, 우리 말이 우스워?”
티 파티에 참석 중인 새틴이 하인을 보낸 모양이었다. 짐을 확인했는데 루나가 악보를 깜빡하고 빠뜨려 이브닝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고.
루나는 새틴에게 세 번이나 더 필요한 건 없냐고 물었고, 새틴은 단 한 번도 악보 이야기는 꺼낸 적 없었다. 루나는 이 정도로는 이제 뒤통수가 아프지도 않았다.
루나는 억울해하는 대신 벨레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어차피 새틴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 봐야 벨레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새틴이 저는 분명히 말했다 우길 테니까.
“이브닝 파티라고 하셨죠? 제가 가서 파티 장소에 악보를 맡겨 놓을게요. 아직 아침이니까 낮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벨레가 어마어마한 돈을 내서 유명한 피아노 선생을 붙여 훈련시켰지만 새틴의 연주 실력은 그저 그랬다.
다만 그녀가 공작의 약혼녀기에 사람들은 새틴의 연주를 칭찬해 주었고, 연주하는 폼만은 일취월장했다. 피아노 선생이 하녀에게 에둘러 욕하는 걸 엿들은 적이 있었다.
“전 요즘 새틴이 열심히 연습하기에 당연히 악보를 다 외운 줄 알았죠. 저번에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다 했거든요.”
그 말에 벨레의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새틴의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건 벨레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새틴이 악보를 거의 외웠다는 말에 기분이 좀 풀린 것이다. 고슴도치지만 제 새끼긴 한 모양이었다.
“당장 다녀오렴.”
하지만 벨레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듯 꽥꽥거렸다. 루나는 벨레의 뒤통수를 쏘아보았지만 그다지 상처 받은 건 아니었다.
이 집안에서 부려 먹히는 생활도 몇 개월 남지 않았기에.
* * *
그래도 다른 귀족가에 심부름을 가는 것이라 루나는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긴 금발 머리를 빗어 내렸다. 그리고 가짓수 없는 옷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루나가 아끼는 베이지색 꽃무늬 드레스는 오래되었지만 깨끗했고, 밑단에는 올해 초에 남는 레이스를 새로 달았다. 거기에 꽃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턱 아래로는 리본을 묶었다. 입술은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거울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긴 금발 머리를 뒤로 늘어뜨렸다. 검은 머리 소년 루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브닝 파티가 열린다는 카베이가는, 수도 중심부에 위치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 안 꼴이 왜 이래?’
카베이가는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곳곳에서 아직 이브닝 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에도 파티가 있었는지, 긴 의자 곳곳에 늘어진 허술한 복장의 여인들과 아직도 술에 취한 귀족 영식들이 흐느적대고 있었다.
“버몬드 남작가에서 심부름을 왔습니다. 새틴 드 버몬드 영애가 이브닝 파티에서 연주할 악보를 가지고 왔어요.”
루나는 카베이가의 하인으로 보이는 이에게 단정히 말했다.
한창 주변을 정리하던 나이 든 하인이 루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피아노 룸은 2층에 있습니다. 거기도 한창 파티 준비 중이니 올라가면 하인들이 안내해 줄 겁니다.”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 지어 감사를 표했다.
“어젯밤에도 파티가 있었나 보죠?”
공기 중에는 아직도 술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나이 든 하인이 혀를 찼다.
“말도 마세요. 집주인들이 여행을 가셔서 이 집 자제분들이 아주 신이 났답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가씨의 호화로운 이브닝 파티가 열리지만, 어젯밤에는 도련님께서 아주 걸쭉한 술잔치를 벌였답니다. 코르티잔들도 몰려와서 아주 난리였어요.”
루나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코르티잔을 부른 질펀한 파티를 하고 난 장소에서 이브닝 파티라. 새틴이 이런 곳에 왔다는 걸 알면 숙부 부부는 기절할 것이다.
루나는 이 사실을 숨기는 것으로 숙부 부부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루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어머,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해요! 호호!”
루나는 2층에 올라서자마자 비틀대며 뛰어가는 반라의 여자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그녀는 복도가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그 뒤로 비슷한 행색의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이리 와!”
루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그러던 중 복도를 치우던 하인 한 명을 발견했다.
“피아노 룸이 어디죠?”
“오른쪽 방이오.”
하인의 피곤함이 찌든 대답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층 한가운데에 위치한 방은 다른 곳보다 튼튼하고 두꺼운 철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루나는 문을 열기 위해 철문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루나는 순간 휘청했다. 앞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누군가가 잡아 주었다. 붙잡힌 팔이 아플 정도로 단단한 손아귀였다.
“감사…….”
그 순간, 루나는 문 너머에 서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 또한 루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쿵― 그녀의 심장이 멎었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내는 아키스 드 로텐베른, 그였다.
‘왜 이 사람이 여기…….’
루나의 눈이 커졌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했다. 이건 어젯밤에 계속 그를 생각해서 보는 환상인가?
그러나 틀림없는 그였다. 아키스는 목 근처가 느슨하게 풀린 셔츠를 입은 차림에, 눈가에는 피로가 스며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고 남성미가 풍기는 생김새는 여전했고,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눈매는 여전히 깊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 * *
그날 아침, 아키스는 아카데미에서 밤을 지새우고 집에 오자마자 황후궁에서 도착한 쪽지를 보았다.
[황태자가 밤새 야행 중.
아키스, 그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 줘요. 카지노에 갔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파티에 간다 했습니다. 파티 장소는 카베이가라는 미행 중인 심복들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황후는 아키스가 황족 중 유일하게 약한 상대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 아침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황태자를 찾아 카베이가로 향했다.
황태자는 외유라면 환장을 했고, 서민들의 축제부터 젊은 영식들이 벌이는 떠들썩한 파티까지 꼭 제 눈으로 보고 체험해야 직성이 풀렸다.
‘정말 귀찮은 아침이군.’
카베이가에서는 지난 밤, 장남이 벌인 떠들썩하고 문란한 파티의 흔적이 가득했다. 요즘 카드놀이에 빠진 황태자는 젊은 영식들과 어울려 신분을 숨긴 채 밤을 샌 듯했다.
황태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밤을 샌 황태자는 피아노 근처의 긴 의자에 늘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졸려 죽겠군. 아키스, 딱 10분만 자게 해 주게.”
“10초 안에 일어나십시오. 내 인내심이 딱 10초 남았으니.”
“으흐, 정말이지 딱 죽겠어. 어제 독한 싸구려 술을 마셨거든. 으흠, 그런데 제대로 놀려면 싸구려 술을 마시고 아예 맛이 가야 한다는 걸 배웠네. 이 집 장남인 카베이 경이 그러더군?”
아키스는 대답 대신 등을 돌렸다. 물병이라도 구해 와 끼얹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도 못할 불경한 행동이지만 아키스는 정말로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키스는 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너머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법처럼 나타난 그 여인은 긴 금발이었고 눈은 초록색이었다. 갑작스레 열린 문 때문에 그녀가 넘어지려 하기에 아키스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뽀얀 피부에 긴 속눈썹.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의 여인이었다.
‘누구지?’
아키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혔다.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짧은 몇 초 사이, 아키스의 보랏빛 눈동자와 여인의 녹색 눈이 서로를 깊게 응시했다.
‘내가 이 여자를 어디서 봤나?’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팔을 놓았다. 드레스 소매 사이로 드러난 말랑한 팔이 희고 가늘었다. 기시감이 드는 마음과는 달리, 아키스는 여인을 향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무슨 일입니까?”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금발의 여인, 루나는 딱딱하게 굳은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그녀는 수상하게 보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침착해. 루나는 속으로 중얼댔다. 여기서 그를 등지고 도망치면 ‘나 수상한 사람이에요!’라고 떠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나는 최대한 평범한 여인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악보를 가져왔는데요. 혹시 방 안의 피아노에 악보를 가져다 두어도 될까요?”
루나는 자신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딱딱하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면서도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했다. 아키스와 자신이 출연하는 깜짝 연극을 멀리서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루나는 아키스가 비켜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피아노가 아닙니다. 날 쳐다보고 있다고 당신 일이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루나는 아키스가 나직하게 내뱉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얼어붙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루나는 아키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방은 쓸데없이 넓었고, 새까맣고 거대한 피아노는 방 끝에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태어나 배운 모든 예의범절을 끌어모아서 사뿐하게 걸었다.
‘……진정하자. 악보만 두고 나오면 돼. 날 알아볼 리 없어.’
루나는 오늘 예쁘게 화장을 하고 가짓수 없는 옷이나마 단정하게 차려입은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곧게 편 등과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부터 발끝까지 그의 시선이 몹시 뜨거워서, 루나는 그의 앞에서 발가벗고 뒷모습을 다 드러낸 채 걷는 기분이었다.
‘날 쳐다보는 건가? 왜? 내가 뭐 수상하게 굴었나?’
피아노까지의 거리가 천리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루나는 피아노 악보를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려 두었다.
이제 등을 돌려 걸어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 순간 하얗고 커다란 것이 쑥 올라왔다.
“히익!”
루나는 낯선 사내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자세히 보니 그랜드 피아노 뒤에는 긴 의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시트를 둘둘 감은 채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이런, 공작이 여인과 세 마디 이상 나누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황태자의 얼굴엔 술과 밤샘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뜻밖의 상황에 대한 즐거움이 가득했다.
“저, 전 두 마디밖에 안 했는데요.”
루나는 당황해 무심코 대꾸했다. 그녀의 하얗고 단정한 얼굴 위로 황태자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내달렸다.
“두 마디라 해도 공작이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은…….”
“나도 여자와 대화는 합니다. 황후 폐하는 여인이 아니라 남자라도 되시는 모양입니다.”
루나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방 맞은편에 선 아키스가 입을 열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분은 예외지. 우리는 아주 각별하잖은가. 아니, 황후 폐하가 어디 여인이시던가?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
“그런 사이 아닙니다. 핏줄이라고 해 봐야 먼 친척뻘로 이어져 있을까 말까 아닙니까. 혈통 팔지 마시죠.”
아키스는 냉엄하게 말했다. 루나는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대화를 들으며 그들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잠깐, 대화 내용이…… 설마.’
황후 폐하를 엮어 ‘우리’를 운운하는 걸 보면, 이 사내의 신분은…….
루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으로 팔이 다 아팠다. 루나는 눈치를 보며 살짝살짝 걸음을 뒤로 옮겼다. 남자의 신분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예감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문간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이제 무릎을 굽혀 예법에 맞춰 인사만 하면 방을 나갈 수 있다.
‘어?’
그런데, 문 앞에서 공작이 비켜서 주지 않았다.
루나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응시했다. 아키스가 문간에 손을 짚은 채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순간 아키스가 자신을 만지는 줄 알고 루나는 흠칫했다. 그의 체향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혹시.”
아키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루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
루나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느낌이 닮았어.’
아키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히 난생처음 보는 여인인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더니 달빛 서점에서 일하는 순박한 점원, 루와 느낌이 닮았다. 갸름한 얼굴선도 체구도.
꼭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닮았다. 한 번 닮았다는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고 묻고 있었다.
여인은 꽤 미인이었다. 가까이 서니 이상하게 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아키스는 그녀 또한 자신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근거 없는 예감이었다.
“……당연히 저는 뵌 적 있지요.”
루나는 아키스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살짝 동요를 드러냈다. 그녀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이 제국에서 공작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신문에서 자주 뵈었답니다. 젊은 여인네들은 모두 공작님이 나오는 기사를 좋아하지요.”
신문을 통해 젊은 로텐베른 공작인 그를 알아보았다. 그만하면 핑계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뿐이랍니다. 예법에 맞춰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죄송…….”
“그런 사과는 되었고.”
아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내가 미쳤나 보군. 이 여자는 그냥 평범한 여자야.’
자세히 보니 여인은 소년 ‘루’와 달랐다.
얼굴 생김새도 달랐고 피부도 훨씬 희었다. 평소 루가 쓰는 큰 안경 덕에 예쁘장한 소년의 얼굴 생김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는데, 루의 특징적인 얼굴의 점 두 개도 여인의 얼굴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느낌이 참 비슷했다.
마음 바닥에 있는 몽글몽글한 무언가를 쿡쿡 찌르는 듯한 말랑한 느낌. 유순하고 선한 사람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 그런 느낌. 예민한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조용한 분위기라든가.
“혹시, 남자 형제가 있습니까?”
아키스가 재차 물었다.
루나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친형제자매가 없어요.”
그제야 아키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실례가 안 된다면…….”
루나는 수줍고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공작에게 눈짓했다. 소년 루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만 가 봐도 좋습니다.”
아키스는 희미한 아쉬움을 얼굴에 띄우고 문에서 비켜 주었다.
루나는 아키스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혹시 몰라 멀리 긴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에게도 인사했다.
그리고 그녀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악몽인지 길몽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꿈 같은 아침이었다. 방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 * *
“우리가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라고?”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황태자가 씩 웃었다. 간만에 공작의 빈틈을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공작이 여인에게 수작을 걸어? 그것도 이런 고전적인 수법으로…….”
아키스는 대번에 찌푸렸다. 그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황태자는 계속 지껄였다.
“절세미인인 라미라 영애도 마다하는 공작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네. 공작이 저런 외모의 여인을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지 뭔가! 쫓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악보를 가져온 걸 보면 코르티잔의 집에서 심부름을 온 거 같은데, 혹시 그곳에서 일하는 가수나 연주자인가? 참 청순하고 독특한 미모를 가진 여인이더군. 아니면, 코르티잔의 시녀일지도.”
어젯밤에 이곳에는 한 떼의 코르티잔들이 놀러 와 저택을 휩쓸고 갔다. 이다음에는 영애들의 이브닝 파티가 열린다는 걸 모르는 황태자가 멋대로 추측을 늘어놓았다. 아키스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헛소리를.’
황태자는 간만에 공작의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데 너무 기뻐, 아키스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일어나서 채비하십시오.”
“거참, 공작이 관심을 보이는 여인이 생겼는데, 채비가 무슨 문제란…… 읍읍!”
아키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해 손짓했고, 황태자가 끌어안고 있던 하얀 침대 시트는 살아 있는 것처럼 황태자를 휘감았다.
“아니 마법 쓰는 건 반칙…… 읍!”
“이만 돌아갑시다. 내 인내심은 아까 딱 10초 버티고 사라졌거든. 이제 이 귀찮은 일을 해치우고 난 내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은데, 안 됩니까?”
발버둥 치는 황태자를 향해 아키스가 다시 한번 손짓하자 시트가 두둥실 공중에 떠올랐다.
아키스는 아까운 마법을 낭비한 게 아까워 쯧, 하고 혀를 찼다. 황태자의 인권은 상당히 무시된 상태였다.
* * *
오늘 이 비현실적인 하루는 악몽에 가깝다.
루나는 방을 나온 지 몇 초 되지도 않아 남몰래 결론 내렸다. 그녀는 급하게 타고 온 마차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1층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아까 코르티잔의 뒤를 쫓고 있던 남자에게 붙잡혔다.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루나는 딸꾹질을 했다.
“어젯밤엔 못 봤는데, 어디서 이런 미인이 튀어나왔지?”
다짜고짜 그녀를 붙잡은 남자는 젊은 귀족 영식이었다. 비록 꼴은 아주 난장판에 눈은 아직도 취기로 풀려 있었지만. 남자는 그녀의 팔을 꽉 붙잡고 끌어당겼다. 루나는 질겁했다.
“놔주세요. 전 심부름을 왔을 뿐입니다.”
루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는 루나를 놔주기는커녕 입이 더욱 입 찢어져라 기뻐했다.
“어느 집의 시녀냐?”
루나는 그의 속내를 눈치채고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런 이들에게 시녀는 코르티잔보다 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였다. 코르티잔은 몸값이 비쌌지만, 경우에 따라 시녀는 그냥 건드리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루나는 이 상황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 이상 두려운 건 2층에 있는 아키스가 소란을 듣고 걸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더 이상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이러지 마시라구요.”
루나는 급하게 남자를 밀어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는 냄새나는 몸으로 루나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코르티잔보다 더 상등품인데, 응? 이리 와, 내가 잘해 주지. 이봐, 저쪽에 아직 남아 있는 내 친구들이 있는데 다른 저택에 가서 애프터 파티를 할 거거든? 같이 가 주기만 한다면…….”
루나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가능한 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버몬드 남작가의 양녀임을 밝힐 생각이었다.
버몬드 남작 가문은 가난해서 레이디스 메이드가 따로 없었다. 전문 시녀가 없다는 건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심부름을 갈 때면 절대 양녀임을 밝히지 말라고, 반드시 시녀인 척하라 교육 받은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전, 시녀가 아니…….”
영식은 루나의 말은 듣지도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다들 이리로 와 봐! 끝내주는 여자가 남아 있었다고! 어제 그 닳아빠진 년들하곤 다른…….”
설상가상으로 그는 친구들까지 불러 모았다.
루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택의 정원이 넓어 마부는 정문 밖에 마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 영식들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에서 마부가 루나를 도와줄지도 미지수였다.
그 순간이었다.
쿵― 소리가 났다. 말 그대로 쿵.
정신을 차리자 하얀 이불 더미 아래에 귀족 영식이 깔려 있었다.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상황을 보았다.
“푸하!”
“아이 씨, 어떤 놈이야!”
이불 더미 아래서 아까 긴 의자에 늘어져 있던 사내가 허우적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 깔려 방금까지 루나를 희롱하던 남자가 바르작대고 있었다.
그리고 뚜벅, 뚜벅. 이어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이런.”
아키스가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로 취한 영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요즘 젊은 귀족들의 예의범절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나, 눈앞에서 황족 모독의 장면을 보다니 놀랍군.”
아키스가 어느새 그녀 앞에 서있었다. 루나는 그 틈을 타 남자에게서 후닥닥 떨어졌다.
“안 그런가, 윌리엄 경?”
“그게 무슨…….”
윌리엄은 황태자의 엉덩이에 깔린 상태였다.
“아키스의 말이 맞군! 감히 내 몸을 치다니!”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성공한 황태자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미 까치집 그 이상이 된 머리를 수습하려는 가련한 시도였다. 그 모습을 보건데 루나의 눈에는 그도 아직 취중인 것 같았다.
“부복.”
아키스가 윌리엄을 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키스와 황태자를 번갈아 보던 그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공작 앞에서 황족을 때리고도 고개를 들고 있다니, 뻔뻔한 놈이군.”
루나라고 해도 먼저 선방을 친 건 아키스라는 걸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키스가 하얀 시트에 감싸인 황태자를 알 수 없는 힘으로 윌리엄이라는 사내 위로 투하했다. 그러나 루나는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윌리엄 경, 자네는 정말 무례하군.”
아키스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루나가 보기에 이 중 가장 무례한 사람을 굳이 꼽자면 황태자를 몽둥이처럼 휘두른 아키스였다. 그러나 루나는 그것을 지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고, 공작…… 님?”
윌리엄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다 뒤늦게 휘청거리며 허둥지둥 부복했다.
“무엄하다.”
황태자가 윌리엄을 향해 외쳤다. 그는 침대 시트를 어깨에 망토처럼 두른 채였다.
“정말이지 무엄해! 내 앞에서 공작이 찍은 여인을 희롱하다니!”
아키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황태자를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루나는 귀를 의심했다.
‘뭘 찍어? 나를?’
아키스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윌리엄을 한 대 치기에 앞서 루나에게 눈짓했다. 아주 싸늘한 표정이었지만 루나는 그 눈짓을 알아챘다. ‘볼일 없으면 가시오’라는 눈빛이었다.
루나는 떨리는 팔을 감싸 쥐고 너무 서두른 끝에 조금 절뚝이며 1층 거실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어제의 잔재처럼 늘어져 있던 취객들과 하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저택을 빠져나가기에 앞서, 루나는 저도 모르게 아키스를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는 카베이가의 현관문을 꼭 붙잡고 있었다.
꿇어앉은 윌리엄을 뒤로하고 아키스가 아직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쭈뼛 돋았지만 루나는 닭살이 돋은 제 몸을 끌어안고 저도 모르게 아키스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내뱉는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루나는 녹색 눈으로 아키스에게 눈짓했다. 입과 눈도 빨랐지만, 다리도 그에 못지않게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루나는 문을 쾅, 닫고 정원을 가로질러 타고 온 마차로 뛰어갔다. 마차 벽을 붙잡고 나서야 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귀찮은 일은 계속됐다.
아키스는 황태자를 시트로 휘감아 공중에 들어 올려 강제 연행했다.
문을 열자마자 난간 아래, 1층에서 펼쳐진 광경은 아까 그 금발의 이름 모를 여인이 이 저택 주인의 아들인 윌리엄에게 희롱당하는 광경이었다.
정신 차려 보니 그는 공중에 붕 띄운 황태자를 윌리엄의 위로 던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난 이런 일이 참 싫었지.’
아키스는 윌리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어린 시절, 창부와 깡패들이 사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자랐다. 그곳의 하층민 여인들은 아키스에게 호의를 베풀어 없는 음식이나마 나누어 주었다. 때로 담요나 옷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인들을 짓밟는 윌리엄 같은 사내는 늘 존재했다.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키스는 오랜만에 화를 분출하기로 했다.
아마 오늘부로 귀족 사회에서 아키스의 악명이 하나 더 추가되겠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인데 어쩌겠는가. 그들은 아키스를 경질할 수 없었다. 그저 구설수만 가득한 입들은 뒤에서 뭐라고 할 뿐이라는 걸 그는 잘 알았고, 그마저도 무관심했다.
루나가 저택을 나가자, 아키스는 윌리엄을 힘껏 걷어찼다. 윌리엄이 지르는 비명이 홀 안에 가득 찼다.
“사, 살려 주십시오, 공작님!”
* * *
루나는 자신이 버몬드가의 하녀나 다름없이, 사실은 노예처럼 부려지며 자라 온 걸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짜 하녀는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하녀였다면 어제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독립하면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가자…….”
서부 사막 지대의 도시들은 치안이 좋지 않다 들었다. 난봉꾼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남부의 유복한 도시들은 치안이 몹시 좋다 들었다.
오늘은 다행하게도 달빛 서점 근무일이 아니었다. 루나는 하루 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쉬었다.
그날, 루나의 예상대로 새틴이 피아노 연주회를 한다는 파티는 망했다. 새틴이 피아노 연주를 하긴 했는데, 이브닝 파티 겸 잠옷 파티가 샤프롱도 없이 젊은 영식들이 드나든다는 걸 알게 된 각 귀족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영애들을 다시 데려갔다 한다.
그러니 자연히 파티의 흥이 깨져 망했다. 새틴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 준 건 그녀의 추종자 몇 명뿐이었다.
‘공작이 그런 파티에…….’
어제의 공포가 어느 정도 가시자, 루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 저택에서 있었을 난잡한 파티는 공작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 고혹적일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공작이 여인네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뺨이 붉어지면서 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구해 준 건 참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을 할 기회는 다신 없겠지.’
그녀를 곤혹에서 구해 준 공작이 고마웠다. 그러나 그를 여인 모습으로 만날 기회는 다신 없을 것임을 알았다.
루나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했다.
‘정말, 여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보통 곤혹스러운 게 아냐. 어젠 정말 봉변을 당했어.’
모르는 남자가 뒤에서 안고 희롱한 기억은 정말 끔찍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마음이 스산했다.
* * *
그러나, 재수가 없으려면 소년 모습으로도 봉변을 당할 수 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공작에게 여인의 모습을 보인 것 때문인지, 아니면 희롱을 당한 충격이었는지 그날은 처음으로 서점에 지각했다.
숙부 가족들은 여전히 그녀에게 몹시 무관심했기에 그들 때문은 아니었다. 짧게 잠들어 몰래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바보 같이 정신을 빼놓고 있다니.’
놀란 가슴도 가슴이었지만, 그녀의 혼란의 절반은 아키스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을 곤혹에서 구해 준 아키스. 여인 모습의 자신을 응시하던 그만 생각하면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야 말았다.
‘지각은 처음이야. 사장님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루나는 급하게 서점으로 향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서점의 교대 시간은 늘 빠듯하기에 교대가 늦으면 남은 이가 피해를 보기 마련이었다.
허둥지둥 가게 앞에 도착했는데, 가게는 불이 꺼진 상태였다.
‘먼저 퇴근하셨구나.’
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곧 출근하리라 믿고 퇴근한 것이다. 루나는 능숙하게 서점 뒤쪽의 화분 아래를 뒤져 스페어 키를 찾아냈다.
야서점 거리는 밤에 치안이 좋은 터라 가끔 교대 시간이 엇갈리면 필립은 문을 잠가 둔 채 먼저 퇴근하곤 했다. 가게에 들어가서 루나는 근무를 준비했다.
[린 할아버지네 가게에 고서적을 맡겨 두었으니 좀 찾아다 줘. 공작이 부탁한 책이야.]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필립이 남겨 둔 쪽지였다.
가게에 없는 고서적을 옆 가게에 부탁해 받은 다음 수수료를 떼 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루나도 종종 심부름을 가곤 했다.
린 할아버지는 필립의 가게와 가장 거래를 많이 하는 고서점 주인이었다.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히 다녀왔다.
루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에 오는 단골손님이라곤 공작뿐이었고, 공작은 늘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왔다.
‘빨리 갔다 오자.’
루나는 가게 문을 다시 잠근 채 길을 걸었다.
오래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이 거리를, 루나는 이제 눈 감고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건물들 사이를 가로지르면 15분 걸리는 린 할아버지네 가게가 10분 거리인 것도 잘 알았다.
평소처럼 지름길을 가로질렀다. 길은 조금 어두컴컴했지만 조금만 나가면 바로 번화가였다.
좁은 골목을 돈주머니를 안은 채 가로지르던 루나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언제부터인가 키 큰 장정이 골목 반대편에 서서 루나를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처음 보는 이었다. 서점 관계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루나는 놀라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때, 뒤에서 다른 누가 루나를 확 잡아챘다. 루나가 큰 소리를 지르려 하자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루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계집처럼 생겼구나. 아저씨가 잠깐 할 말이 있어 그런데, 얌전히 따라오지 않으련?”
그들은 라미라 영애가 고용한 사내들이었다.
그걸 까맣게 모르는 루나의 몸이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루나가 움직이려 하자 사내는 루나의 몸을 꽉 눌렀다. 어찌나 힘이 센지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우리도 굳이 다치게 할 생각은 없거든? 그냥 순순히 저 마차에만 타면 된단다.”
사내가 말했다.
골목 끝에는 어느새 마차 한 대가 대져 있었는데, 가문의 문양이 하나도 새겨지지 않은 새까만 마차였다. 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고 입을 막은 사내의 손을 콱 물어 버렸다.
“악, 이 계집같이 생긴 새끼가!”
사내가 화가 나 루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딱딱한 벽돌 벽에 찧어진 등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뒤에서 한 사내가 루나를 잡고, 또 한 사내가 루나를 잡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다.
“읍읍!”
루나는 안경과 가발이 벗겨질까 무서워 크게 발버둥 치지도 못했다.
‘내가 여자인 걸 이들이 알아채면……!’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들이 소년 루를 끌고 가려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들에게 여인인 걸 들키면 어찌 될지 모른다.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고 희롱하던 윌리엄이 떠올랐다.
“네가 반반해서 그렇다니까. 잠깐 용무가 있어서 그렇단다. 순순히 따라오면 어디 하나 다치지 않을 거다.”
정말 아키스를 홀린 남색인지 궁금하다며 라미라 영애는 미소년을 끌고 오라 했다. 따로 손을 보라고 하진 않았기에 그들은 소년을 최대한 탈 없이 데려가려 했다.
그때였다.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린 건.
“몇 대 몇이냐?”
고개를 들자, 좁은 골목에서 용케 고개를 내민 한 사내가 테라스에서 루나와 괴한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사내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괴한이 사내를 향해 외쳤다.
“뭐야! 남의 일에 상관 마라!”
“아니, 내가 오늘 안 그래도 한바탕 붙고 싶은데 머릿수가 안 맞는 싸움이 있다면 당장 참전해야지. 그런데 지켜보고 있자니 이게 숫제 공정한 싸움이 아니라 두 명이서 한 녀석을 희롱하고 있는 모양새잖아?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저 녀석이 계집이냐, 사내냐?”
사내가 팔을 괴고 아주 구경거리 났다는 듯 쾌활하게 외쳤다.
사내가 후드를 젖혔고,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붉은 머리의 사내는 의외로 꽤 반반한 젊은 미남자였다.
“계집이면 뭐,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며 구해 주기라도 하려는 거요? 이놈은 사내이니 괜히 봉변당하지 말고 못 본 척하시오!”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재갈 위로 루나의 입을 꾹 누르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루나는 이 수상한 사내가 교육받은 말씨를 사용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 말이 테라스 위 사내의 어떤 부분을 열 받게 한 것인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좁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봐, 만약 그 녀석이 계집이면 어쩌려고 그런 큰일 날 소리냐!”
“뭐?”
내려온 사내가 화를 내는 핵심이 하도 희한하여 루나조차 벙찌고 말았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여자를 구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그 여자와 혼인해야 할 것 아니냐! 어디서 그런 악담을, 그런 사내인지 계집인지도 모를 놈과 나를 혼인시키려 들어?”
아, 그냥 미친놈이구나.
루나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올랐다.
설상가상이었다. 괴한들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한데, 그 사내는 버럭 화를 내며 손목을 걷어 올렸다.
“그래, 잘 걸렸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끼는 하녀가 비싼 약을 들고 도망쳐 화가 나 분풀이를 할 데도 따로 없었는데. 아주 판을 깔아 주는구나!”
씩씩거리며 내려온 사내의 광기를 감지한 것인지, 괴한들이 눈짓했다. 한 놈은 앞으로 나섰고 한 놈은 루나의 입을 막은 채 서둘러 끌고 가기 시작했다.
싫어! 루나는 막힌 입 대신 속으로 외치며 버둥거렸다.
“읍, 읍……!”
그럴수록 괴한들은 루나의 몸을 옭아매고 입을 꽉 막았다. 숨이 막혔다. 머리가 노래졌다.
“제정신 아닌 것 같은데 상대하지 말고 먼저 마차에 태워라. 이 정신 빠진 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
“호오, 나를 상대해? 나를 모르나?”
사내가 바짝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사내를 알아본 것인지 괴한의 눈이 커졌다.
“흐, 흑마법사?”
“그래, 내가 우는 아이도 떨어뜨린다는 흑마법사 휘멘이다! 이 골목이 내 집 앞인 건 알고 그리 난동을 부린 거냐?”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한다,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괴한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흑마법사와 이 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냥 모른 척하시오! 우리가 이 아이를 데려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귀여운 아이라 이야기 좀 하겠다는 건데, 악……!”
휘멘은 모자 쓴 괴한의 턱을 올려붙였다. 빠각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변태 새끼들을 봤나. 난 변태라면 학을 떼는 놈이다. 내가 지금껏 마음껏 패지 못한 변태 놈은 공작 녀석뿐이거든.”
자신을 휘멘이라 소개한 사내, 흑마법사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기운이 뻗어 나와 괴한들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휘멘은 모자 쓴 사내를 무자비하게 패기 시작했다. 그 덕에 풀려난 루나는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재갈을 풀었다.
“새 실험 재료가 필요했는데 잘되었구나. 내 연구실에 끌려가 볼 테냐?”
“아, 아니 이것 보시오! 진정하시고……!”
괴한이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그때,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순찰 중인 황실 경비대의 발소리였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경비대다!”
루나를 붙잡고 있던 괴한이 루나를 휘멘 쪽으로 확 밀었다. 그리고 괴한들은 혼비백산하며 골목 반대쪽으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나는 겨우 휘멘의 어깨를 잡고 버텼다.
“빌어먹을.”
황실 경비대를 보고 휘멘이 욕지기를 지껄였다.
이어 골목길을 향해 다가오는 경비대들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휘멘은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애꿎은 루나를 노려보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휘멘은 그대로 그녀를 망토 자락으로 감싸 넣고 골목 맞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맞닿은 몸이 단단했다. 루나는 엉겁결에 그에게 끌려가며 입을 벌렸다.
“쉿, 잠깐만 조용히 해라.”
휘멘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한 건물로 들어가 그녀를 밀어 넣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 누구의 집인지 모를 건물 복도 위에 서 있게 되었다.
“……여긴 어디에요?”
말하는 루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어디긴 어디야, 내 집이지.”
루나는 그 장소가 아까 휘멘이 서 있던 테라스의 건물의 안쪽이라는 걸 눈치챘다. 경비대들이 주변을 쑤시고 다니는지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조용히 해라. 나, 경비대에 걸리면 안 된다고.”
휘멘이 빠르게 속삭였다.
루나는 눈만 빠끔 내밀어 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경비대가 지르는 소리가 멀리 사라져 갔다.
루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휘멘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섭지도 않으냐?”
“네?”
루나는 벙찐 소리를 냈다.
“흑마법사의 집에 끌려와 무섭지도 않으냐고.”
“그게…….”
당연히 모르는 곳에 끌려온 건 무서웠지만 휘멘은 그녀를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휘멘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난 맨입으로 고맙다 하는 건 딱 질색이라, 어디 고맙다고 하기만 해 봐라, 아까 그 녀석들 대신 너한테 화풀이하고 말 테니.”
루나는 그 말에 입을 꾸욱 다물고 눈을 굴렸다.
“하지만, 도와주셨는데…….”
“거참, 쓸데없이 건설적인 녀석이군.”
“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착각할 만큼 여자처럼 생겼군. 하지만 사내놈 아냐? 시커먼 사내놈이 고맙다고 해 봐야 소름만 돋는다.”
그 말에 루나는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루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누르며 말했다. 휘멘이라는 사내는 루나를 보며 흥, 하고 웃고는 문을 열었다.
“고마우면 당장 나가. 지금부터 옷을 갈아입고 내기 권투나 하러 가서 저 덜떨어진 놈들에게 못 푼 화를 풀어야겠거든. 네 녀석이 시시한 변태 놈들에게 걸린 덕에 주먹도 제대로 못 풀었다.”
루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그녀의 탓을 하는 건가?
“그래도 은혜를…….”
“당장 나가!”
문 앞에서 꽝! 하고 문이 닫혔다.
루나는 입만 벌린 채 닫힌 문을 보았다. 밖으로 통하는 작은 계단을 통해 비틀대며 걸어 내려갔다. 그녀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자기를 따라오지 않나, 아까 그놈들이 다시 나타나진 않을까 온몸이 떨렸다.
루나는 좁은 골목을 떨면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급히 달빛 서점으로 들어갔다.
* * *
‘경비대에는 신고 못해.’
만일 그녀의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하면? 가문이나 이름을 물으면? 신고는 꿈도 못 꿨다.
돌아오는 길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의 매무새를 쳐다보는 게 느껴지는데 그게 너무도 두려웠다. 온몸이 오한이라도 난 것처럼 벌벌 떨렸다.
“하아, 하아…….”
너무 놀라서 처음엔 그녀도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점점 속이 울렁거리며 공포가 커졌다.
루나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기듯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 창문의 모든 커튼을 다 닫았다. 그리고 카운터 뒤로 들어갔다.
몸이 다 떨렸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게 그제야 실감되었다.
만일 그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끌려갔다면…… 그러다가 여성인 것이 밝혀졌다면…… 소년으로서도, 여인으로서도 험한 일을 당했을 게 뻔했다.
이쯤 되니 뭐가 낀 건가, 아니면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루나는 카운터 너머에서 몸을 웅크렸다.
‘무서웠어…….’
저를 강제로 끌고 가려던 괴한들의 억센 손길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가발이 벗겨지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봉변을 당할 뻔한 일 자체도 끔찍하고 두려웠지만, 가장 두려운 일은 여인임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휘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머리가 다 아찔했다. 루나는 울먹이면서도 이를 악물고 자신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도 진정되지 않아 스스로를 부둥켜안은 채, 공처럼 몸을 말고 카운터 너머에 뺨을 기대고 숨만 몰아쉬었다.
뎅―
이윽고 시간이 한 시를 알렸다.
* * *
아키스가 서점에 도착했을 때,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서점 안은 희미한 불만 밝혀져 있을 뿐 카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키스는 천천히 다가갔다.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키스는 카운터 너머의 통로에 비죽 튀어나온 소년의 낡은 부츠 끄트머리를 발견했다.
작게 훌쩍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키스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자, 낡은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삐죽이 튀어나온 부츠 끝이 움찔하더니 사라졌다.
아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천천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루?”
루나는 머리 위에서 울리는 아키스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든 매혹적이었다. 어떤 끔찍한 상황이라도. 루나든, 루든. 가짜 이름일지라도.
루나는 시간을 보았다.
늘 그렇듯 한 시 5분이었다. 오늘 그가 온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가능한 한 낮은 목소리를 냈다. 평소처럼 꾸며낸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꺽꺽대는 것처럼 들렸다.
“번역본은 카운터 위에 있어요.”
잠시 카운터 너머를 침묵이 지배했다. 아키스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고, 문서를 넘기는 소리가 느껴졌다.
“돈은 나중에 주셔도 돼요.”
아키스에겐 대답이 없었다.
문득, 루나는 이유 없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저번에 자신을 구해 줬을 때처럼 그의 얼굴을 보고 안심하고 싶었다.
그러나 엉망인 얼굴을 보일 순 없었다. 더는 아키스의 의심을 살 수 없었으니까.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리고,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똑똑.
그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카운터를 두드린 것이다. 아키스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숙였다. 훤칠하고 큰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듯 위로 드리워졌다.
“일은 잘되었으니, 이제.”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문젠지 말해 주겠습니까?”
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에게 불안한 마음을 토해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괴롭혔습니까?”
“그냥, 저는…….”
루나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두려워요.”
“뭐가?”
아키스가 나직이 말했다.
루나는 참지 못하고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든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상한 사내들이 잠깐 보자며 쫓아왔어요. 방금 전에요……. 상황은 다행히 모면했는데…… 그냥 무서워요. 떨림이 진정되지 않아서…….”
루나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아키스는 몇 초간 말이 없었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몰라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루나는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아키스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조금 더 말미를 주었다.
“그냥 갑자기 모든 게 무서워졌어요.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전부…….”
루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오한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아키스가 그녀의 동글한 뒤통수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럼 결국 사는 것이 두렵다는 겁니까?”
“…….”
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뭐라 말할 수 없는 총체적인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숙부 가족과 사는 것보단 낫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희망으로 가득찰 것이라 생각한 그 미래가 갑자기 두려워진 건 사실이니까.
“겁이 많군요.”
“그…….”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겁이 많은 건 좋은 겁니다.”
아키스의 말은 사실이기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루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입술만 깨물었다.
“그럼, 나와 함께 가겠습니까?”
“……네?”
아키스의 뜻밖의 말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루나는 눈물이 말라붙은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두렵다면 나와 함께 가서 내 보호를 받고, 내 옆에서 살겠습니까? 내게 와 준다면 세상 모든 두려운 일은 다 없애 줄 수 있는데.”
너무 놀라운 말이라 그녀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침묵을 뭐라 해석한 것인지, 나무 카운터 위로 그가 손을 움직였다.
“그게 무슨…….”
“나와 함께 가서 그 능력을 날 위해 써 달라는 말입니다. 난 당신의 능력이 필요하고, 지켜 줄 힘이 있으니까. 그러면, 당신 고민은 해결될 것 같은데.”
결국 자신의 사람이 되란 말이었다.
주책맞게 뛰기 시작한 루나의 심장은 그 말을 고백으로 해석할 뻔했다. 당연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그는 일종의 제안을 하고 있었다.
“부담 주려는 생각은 아닙니다.”
“아, 아니에요?”
“네, 아닙니다.”
아키스는 대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그를 제자로 들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터였다. 그간 소년의 실력을 높이 사고 있다 충분히 어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모르겠어요.”
루나는 혼란스러웠다.
아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약점을 파고들 생각은 없었는데 고맙게도 시기적절하게 이렇게 무너진 모습을 보여 주다니. 이것도 인연의 일종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진심으로 소년이 가련했다.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자기 연민일지도 몰랐다. 소년은 어린 시절의 아키스를 닮았으니까.
“시간을 좀 주죠.”
아키스가 말을 이었다.
“마음에 결심이 서면 데리러 오겠습니다. 일주일 후가 좋겠군요. 그때 대답을 듣겠습니다.”
“전…….”
“대답은 일주일 후에 듣겠습니다.”
아키스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얼굴 안 보여 줄 겁니까?”
루나는 그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으로 엉망이 되고 모든 변장과 방어가 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동시에 루나는 아키스가 왜 이런 관심을 제게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준 펜던트,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루나는 아키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루나는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풀었다.
“있어요.”
그가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넘겼다. 아키스가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효력이 다해 가는군요.”
“들었어요……. 마도구 감정업자가…….”
처음 마도구 감정업자가 이 펜던트를 보고 소모품이라 했다.
아키스가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루나는 카운터 위로 작은 빛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마음이 안정되는 마법을 걸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은 진정될 겁니다.”
“고, 고맙습니다.”
루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기에 더듬대며 말했다.
“손.”
아키스가 말했다.
어차피 오늘 소년의 눈을 마주 보기는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움찔대는 손이 카운터 너머로 올라왔다.
건강한 피부색을 한 손이었다. 아키스는 작은 손바닥 위에 펜던트를 내려놓았다. 여인처럼 작은 손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의 손이 스치자 루나의 뺨이 붉어졌다.
“또 보죠.”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내려놓는 기척이 느껴졌다.
“원래 오늘은 이걸 주러 온 거였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발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문 닫기는 소리가 났다.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건넨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펜던트를 손으로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기분이 점점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루나는 하아, 하고 작은 숨을 쉬었다.
루나는 얼굴과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책상 위에는 낯선 문서 봉투가 놓여 있었다. 루나는 아키스가 일을 맡기기 위해 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이 새 일거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문서 봉투를 열어 본 루나는 경악했다.
‘고용 계약서?’
아키스가 가져온 계약서에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 미쳤나 봐.’
루나는 어느새 자신을 점령하던 공포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어마어마한 연봉에 숙식 제공.
‘1년에 금화 8천 개?’
특이한 조건은 단 하나였다. 그녀가 공작가에 거주하며 아키스의 연구에 협력하는 조건. 전속 번역가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내게 이런 제안을 한다고?’
태어나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조건이었다.
‘도대체 왜…….’
루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생각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엔 그녀도 왜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내게 친절한 건데…….’
루나는 꿈속의 일기장을 통해 이미 그녀의 미래를 세세히 알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선의를 베풀어 주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루나’의 불행한 삶은 그랬다.
그러나 소년 ‘루’는 달랐다.
필립도 그녀를 많이 도와주었고, 공작은 더없이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미리 엿본 미래와 지금을 통틀어 자신과 함께 가자며, 기회를 주겠노라 달콤한 말을 한 이는 공작뿐이었다.
그래도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그런데 왜 항상 그녀가 최악의 상황일 때 와서 손을 내밀어 주는 건지 그를 정말 알 수 없었다.
이제 영영 안 볼 사이인데 자꾸만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불편했다. 루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 *
아키스는 마차에 타며 대기 중인 보좌관, 디온에게 명령했다.
“이 근방의 치안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으니 근처 치안대에 따로 내 지시를 하달하도록. 치안을 강화하라 명령해. 아니, 내가 치안 기사단장을 직접 보겠다.”
“네. 알겠습니다.”
디온이 바로 대답했다. 디온이 왜,라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마차에 올라타는 아키스의 걸음이 한 번 휘청였다.
“괜찮으십니까?”
디온이 급히 아키스를 부축했다.
“그러게 집 안에 계시지 그랬습니까. 이 기간에는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다고 신전에서…….”
“지겹다. 그놈의 신전 이야기는 하지 마라.”
부축을 받고 마차에 올라탄 아키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디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향할까요?”
아키스는 마차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키스는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가끔 심장이 지끈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그는 몸 안에 괴물을 품고 있었다. 이 제국의 지지 기반인 드래곤을 붙들어 두는 마법. 그 거대한 마법의 매개체로 살아 있는 몸이 그였다. 계약이 완성되기 직전에는 다양한 통증이 있을 수도 있다 들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컨디션이 들쭉날쭉했다.
‘정작 나는 드래곤의 그림자도 본 적 없는데 말이지.’
그의 몸에 깃들어 있다는 창세 이후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그 괴물, 드래곤을 그는 정작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런데 그것에 맞추어 그의 인생이 움직이고, 이 제국은 젊은 공작에게 꼼짝을 못하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아키스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삶이 그토록 권태롭고 모순적이니 그 순박한 소년을 옆에 두면 좋을 것이다.
소년의 작게 옹송그린 모습이 진심으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게 총애일지도 모른다.
아키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각별했다. 아키스는 소년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었다. 가진 거라곤 약간의 재능과 자기 자신밖에 없던 시절.
‘빨리 데려오고 싶군.’
소년을 지켜 주고 싶었다.
* * *
공작의 제안에 놀란 것과는 별개로 루나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발 빼자.’
요즘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촉이 좋지 않았다. 원래는 초겨울까지 일하며 돈을 모으고 천천히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벌써 두 번이나 이상한 사람들에게 이상한 일을 당했다.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러니 이런 때에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했다. 필립에겐 미안하지만 바로 일을 그만두겠다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 결론을 내렸지만, 아키스의 제안은 계속 마음에 밟혔다.
‘……가게를 그만두는 건 두는 건데, 만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마어마한 금액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살얼음판에 올라가 있는 듯한 이 거짓말을 계속해 볼까. 정체를 숨기고 계속 소년 ‘루’인 척하며 그의 옆에 붙어 돈을 벌어 볼까, 하는 그런 유혹.
어차피 고대어를 번역하는 건 루나에겐 일도 아니었다. 이 일에 딱히 애정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의 옆에서 일한다면.’
혹시 그렇다면, 앞으로도 아키스를 볼 수 있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작은 소년 ‘루’에게 상당히 호의를 베풀어 주고 있었다.
만일 아키스의 옆에서 연구자로 함께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는다면, 그래서 그와 친밀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돈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들키면 최악의 경우,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는 새틴의 약혼자야…….’
잠시 혹했던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가 한 상상에 짜증이 났다.
‘아키스의 옆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멍청한 짓을 할 순 없어.’
심지어 루나는 제가 여인인 걸 공작에게 고백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상상도 했다. 상상한 결과, 정말 끔찍했다.
만일 잘된다면 상관없다며 그녀를 지원해 주겠다 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수가 틀리면 바로 감옥행이었다.
‘절대 안 돼.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어.’
루나는 이 비밀을 평생 지고 갈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금기를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 더 또렷하게 닿았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지 못하다니.’
루나는 아쉽고, 또 서러웠다.
차라리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이렇게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여인인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싫어한 적 없었다. 그러나 묘하게 입맛이 썼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가 일주일 후에 오면 거절하자.’
루나는 들뜬 심장을 가라앉히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은 아키스와 작별하는 날이 될 것이다.
도시도 정해 두었다. 남부의 따스한 한 무역 도시였다. 문제는 게이트였다.
루나가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에는 사랑의 도피를 하다 게이트에서 잡혀 오는 남녀 커플의 이야기가 종종 나왔다. 게이트에서 젊은 소년 소녀들이 홀로 여행을 하면 수상하다고 가문에 연락을 하는 일이 왕왕 있는 모양이었다.
게이트를 사용해야 멀리 도망갈 수 있을 것이고, 게이트를 여러 번 타면 며칠 안에 먼 도시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바로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청 후 수속을 밟는 데 몇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게이트를 여러 번 타려면 최소한 2, 3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단시간에 멀리 도망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게이트를 타야 했다. 숙부 가족들이 며칠 저택을 비우는 때가 찬스였다. 그래야 게이트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재차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숙부 가족이 여행 가는 틈을 노리자.’
숙부 가족은 축제 두 달 후, 12월에 연말을 기념하여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잡고 있었다.
한 부유한 지방 영주의 초대를 받았다 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루나를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축제 두 달 후. 그때가 루나가 노리는 타이밍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이제 루의 신분을 정리하고 차분히 도망 계획을 짤 시기였다.
* * *
“그깟 소년 하나 잡아 오는 게 뭐가 힘들다고…….”
아름다운 얼굴의 달리아는 시종의 보고에 얼굴을 찌푸렸다.
“고서점 거리는 워낙 치안이 좋아 타이밍을 잘 노려야 했습니다. 타이밍은 겨우 잡았으나, 방해꾼이 끼어들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흑마법사 휘멘이 왜 거기 끼어든 건지…….”
시종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흑마법사의 연구실 중 한 곳이 고서점 거리에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설마 그렇다고 그자와 마주칠 줄은…….”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속삭였다.
“다시 기회를 노려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되었다. 흑마법사가 엮이면 피곤해지는 건 우리 쪽이야. 하녀를 겁박해 약을 훔친 일을 들키면 곤란해져. 내가 시킨 대로 사람들이나 제대로 모아 둬. 이제 곧 쓸 일이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 일만 성공하면 아키스는 내 것이 될 터이니, 상관없다.”
달리아는 중얼대면서 초조하게 제 목을 어루만졌다.
“당분간 그 소년은 그대로 놔둬.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 * *
루나가 야서점 거리에서 습격을 당한 다음 날.
필립이 가게에 출근하자 오전조 직원이 루가 남긴 쪽지라며 종이 한 장을 넘겨주었다.
[일이 있어 며칠 쉬겠습니다. ―루]
다른 점원이 이렇게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다면 크게 화를 냈겠지만, 상대는 금덩이 같은 천재 번역가 루였다. 필립은 야간 근무를 서며 루의 빈자리를 메웠다.
루는 정확히 3일 만에 파리한 얼굴로 출근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거리에서 이상한 변태 놈들한테 끌려갈 뻔했다고?”
“네…….”
루는 충격을 받고 며칠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황실 경비대에 가자며 손목을 잡아끄는 필립에게 루는 질색하며 절대 그러지 말라 했다.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필립은 혀를 차면서 루가 놀랄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사실 치안 기사들에게 신고하기도 애매한 것이, 우리 가게가 특수 순찰 지대로 지정되었다지 뭐냐……?”
“……네?”
필립의 말에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의 말은 이러했다. 야간에 영업하는 거리인 만큼 범죄 발생 확률도 높으니, 이 주변의 치안을 강화하기로 경비대에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달빛 서점이 요주의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치안 기사들이 수시로 가게 앞을 직접 순찰 다니고 있었다.
“별일 없습니까?”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방금만 해도 안을 들여다보며 인사하는 치안 기사에게 필립이 응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히 거리낄 일 있는 루나만 등골이 서늘했다.
‘혹시 공작이……?’
루나는 오싹해하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치안 기사대의 가게에 대한 과한 관심은 루나의 결심에 마지막 쐐기를 박아 주었다.
루나는 필립에게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사실 오늘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드리려 하는데요.”
“응, 그래. 뭐든지 말해 봐.”
“저, 사실 가게를 그만두려 해요.”
루나는 조심스럽게 퇴직 의사를 밝혔다.
“……농담이지? 정말 그만두겠다고?”
그 말을 들은 필립은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루가 번역가 겸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후 가게 매상이 엄청나게 올랐다. 이 거리에 슬슬 가게의 명성이 퍼져서 어려운 문서를 들고 오는 마법사들도 많았고, 고위 번역가들과의 연도 생기고 있었다.
그랬는데 복덩이인 루가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줄이야. 필립은 루나에게 몇 번이나 재차 물었다.
“너 정말 그만둘 거야? 내가 뭐 아쉽게 한 것 있어?”
“사장님도, 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처음부터 일을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요. 번역도 그렇고요. 계속 불법적인 일을 하며 살 순 없으니까요.”
루나처럼 국가에서 공인 받지 않은 번역가가 일하는 것이 불법이긴 했다.
필립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불법인 게 좀 어때서? 이 정도 범법은 다들 아름아름하고 살아. 너같이 일 잘하는 녀석이 그만두면 도대체 누가 이 일을 한단 말이야?”
“알아요, 아는데. 그냥 제가 신경 쓰여요. 그리고 워낙 귀한 문서들을 다루는 일이니까 좀 부담되기도 하고.”
“그럼 일을 줄여 주면 어때? 그리고 수수료 비율도 좀 바꿔 주면.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최대한…….”
필립은 큰맘 먹고 대단한 제의까지 내놓았다. 수수료를 10퍼센트만 받고 일을 주겠다는 것이다. 루나 같은 무허가에게는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루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짓말로 주변을 계속 속이는 것도 힘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저도 제 살길 찾아야죠. 계속 밤에 근무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결국 루나는 그리 말했다. 필립은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왠지 너는 언제든 떠날 녀석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필립의 말에 루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넌 정말 크게 되어야 할 녀석인데. 차라리 제대로 좋은 곳에서 연구를 시작한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거다. 네 능력이야 내가 잘 아니까, 더 잘되려고 나가면 나도 붙잡을 생각 없거든. 근데 뭘 할 생각인지도 제대로 말 안 해 주니…….”
루나는 필립의 말에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급하게 그만두게 돼서 죄송해요.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지는 찾아봐야죠.”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와야 한다, 알겠지? 가족도 없다니까 신경이 쓰여서…….”
“알겠어요, 사장님.”
아무튼, 낮에 일할 점원을 더 뽑은 덕에 근무는 덜 빡빡해졌다.
필립은 이전처럼 바로 교대 퇴근하지 않고 루나와 서점에 남아 대화를 나누거나 같이 남은 일들을 정리했다.
사실 루나도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후로 그녀는 며칠간 벌벌 떨며 밤에 잠도 못 잤다. 그리고 자꾸만 밖을 내다보며 누가 있진 않나 확인했다. 그런데 필립이 같이 근무해 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 * *
<달빛 서점>을 그만두는 날은 공작이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오기로 한 날과 같았다.
루나는 남장용 옷을 한 벌만 남겨 두고 남은 것들은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주변을 정리했다.
공작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 ‘루’로서의 마지막 남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지나면 루는 사라질 것이고, 곧 루나조차 이 도시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루나가 신경 쓰이는 점은 단 하나였다.
“사장님, 혹시 휘멘이라는 이름의 흑마법사에 대해 들어 보셨어요?”
그 말을 들은 필립은 경기를 일으켰다. 루나는 제가 무슨 실례되는 질문이라도 했나 싶어 찔끔했다.
“그자는 왜?”
필립은 몸을 낮춰 속삭이듯 물었다. 루나는 눈을 끔뻑였다.
“사실 괴한들에게 잡혀갈 뻔한 날, 절 도와준 게 그 사람이거든요.”
“……뭐라고? 잘못 안 거 아니냐?”
“왜요?”
“너 정말 휘멘이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없어?”
“없는데요?”
“흑마법사잖아! 흑마법사들은 아이를 잡아먹고 사람을 납치해 인체 실험을 하고 맹독을 밥처럼 먹고 마셔. 세계에 몇 없는 흑마법사 중 하나가 휘멘이라는 자인데,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네.”
루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그 괴한들이 휘멘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기겁하더니, 예사 사람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공작을 적으로 돌리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자라니, 말 다했지.”
“……공작요?”
이건 또 뜻밖의 곳에서 등장하는 공작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니까. 그 휘멘이라는 자가 본래 아카데미의 교수였는데, 공작과 대판 싸우고 나온 이야기가 아주 유명하지. 그리고 수도 광장에서 둘이 싸우다가 건물을 무너뜨렸다던가. 그 후 그 흑마법사는 연구실을 차리고 그 안에서 인체 실험을 한다는 소문이야.”
이건 무슨 어린애나 무서워할 괴담 같았다. 루나는 어디까지 그 소문을 믿어야 할지 몰라 그저 하하 웃었다.
‘그 흑마법사가 이 근처에 산다는 걸 모르는구나, 필립 사장님은…….’
말하면 필립이 가게를 그만두고 도망간다 질색할까 걱정된 루나는 그 사실을 고이 숨기기로 했다.
‘인체 실험은 무슨, 멀쩡한 집 같았는데…….’
안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사람 시체 같은 건 없었다. 루나는 휘멘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항상 말했다.
빚을 만들지 말고, 또 감사 인사도 잊지 말라고. 신세는 빚만큼이나 무서운 것이기에 베풀어 준 이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언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고. 개차반 같은 숙부 가족들 사이에서 제법 예의 바른 사람으로 자랐다는 건 루나의 비밀스런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루나는 고심한 끝에 감사 편지를 썼다. 화풀이든 뭐든, 그날 저를 도와준 휘멘에 대한 감사를 담은 편지였다.
‘괜한 일을 하는 게 아니면 좋겠는데.’
그리고 작은 보답도 함께 동봉하여 필립을 대동해 휘멘의 집 앞에 갔다. 그런 일이 있었던 골목에 도저히 혼자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립은 이곳이 흑마법사의 집이라는 말에 기겁했지만 루나를 혼자 보내진 않았다. 그리고 루나는 그의 집 문 아래 틈으로 편지를 넣고 왔다.
그랬던 게 오늘 새벽 출근하자 마자다. 그리고 지금은 공작이 늘 방문하곤 하는 새벽 한 시 언저리. 루나는 그 무섭다는 흑마법사가 득달같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도 못했다.
“이봐, 장난하는 거야, 뭐야. 이게 무슨 요망한 수작이지?”
분노 조절을 못하는 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오늘도 화난 모습인 휘멘이 가게 문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왔다. 여전히 얼굴만 참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내였다.
루나는 오랜만입니다, 대신 당황한 얼굴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휘멘이 루나의 앞에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았다.
“사람을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냔 말이다.”
“감사…… 의 표시인데요?”
휘멘이 루나의 눈앞에서 흔들고 있는 종이는 루나가 편지에 동봉한 이용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료 번역 이용권.
감사의 표시로 뭘 해 줄 건 없고 그도 지체 높은 흑마법사라고 하니, 무료로 고서적 번역이라도 해 줄까 싶어 직접 만들었다.
[달빛 서점 무료 번역 이용권
―모든 언어, 모든 문서 가능. 1회 사용 가능합니다.]
그리고 감사 편지와 함께 휘멘의 집 문 아래에 넣어 두고 온 것이다.
“감사의 표시면 표시지, 여인처럼 나긋하고 예쁘장한 내용의 편지로 사람 소름 돋게 할 건 무엇이며, 이 유효 기간 짧은 이용권은 뭐지?”
그랬다. 흠이라면 이용권 사용 기간이 몹시도 짧다는 것이었다. 딱 이틀, 그것도 새벽에만 쓸 수 있었다.
이건 루나도 할 말이 있었다. 공작을 만나기로 한 날까지 앞으로 사흘. 그 기간 동안 루나의 근무일은 딱 이틀 남아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유효 기간이 짧은 이용권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돈을 줄 수도 없고, 고마움은 표하고 싶었다.
“어, 어쨌든 여기 나타나셨잖아요. 원하시는 게 뭐든 처리해 드릴 테니 주세요.”
루나는 미안한 마음에 괜히 더 의연한 체하며 말했다. 겉보기만 멀쩡한 휘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보니 아주 오만하고 배포만 담대한 놈이로군. 난 흑마법사라 가장 어려운 서적들만 다루는데 내가 내 책을 어떻게 번역하겠단 말이냐. 그런 실력 좋은 번역가가 이 코딱지만 한 서점에 있다고?”
“거참, 지금 당장 한다니까요. 이 코딱지만 한 서점에서 당장 해 드립죠. 어서 주세요!”
루나는 손을 뻗었다. 휘멘이 못마땅하게 루나를 보다 품 안에서 돌돌 말린 스크롤을 꺼냈다.
“조심해라. 흑마법 문서는 잘못하면 저주 받으니까.”
그리고 피식하고 웃으며 루나를 겁주었다.
루나는 돌돌 말린 문서를 펴 보았다. 양이 많지 않아 두어 시간이면 얼추 될 것 같았다.
“바보도 아니고 누가 그런 말에 속습니까? 두 시간 후에 오세요. 감사 인사도, 번역물도 그때 드릴 테니.”
“이봐, 도대체 번역가가 어디 있다고…….”
휘멘은 고개를 휘휘 저어 서점 안을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너, 꼬맹이가 번역가라고?”
“네, 제가 코딱지만 한 서점의 꼬맹이 번역가랍니다.”
루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휘멘이 팔짱을 꼈다.
“네가 이걸 번역해 내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그래서 제가 얻을 게 뭐예요? 은인이 장을 지져 다치기라도 하면 난 놀라기만 하지.”
루나는 기겁했다. 그녀의 말이 뜻밖인 듯 휘멘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루나를 빤히 보았다.
“그럼 다른 내기라면 할래?”
“무슨 내기요?”
“만일 네가 두 시간 안에 이 문서를 번역해 내지 못하면 날 따라와 내 시종이 되는 거다. 만일 번역해 내면 뭐든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루나는 뾰로통하게 휘멘을 보았다.
뭐 이런 제멋대로인 사내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은혜를 입은 건 그녀 쪽이라 어쩔 수 없었다. 루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한 시간 반.”
“……뭐라고?”
“한 시간 반 안에 해낼 테니, 제가 해내면 감사 인사를 받아 주시는 조건까지 붙여요. 어때요?”
휘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맘대로 해라. 내가 평생 부릴 공짜 시종을 얻겠구나.”
* * *
그리고 한 시간 반 후.
“…….”
휘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문서를 보았다. 그는 번역된 문서를 보고 또 보고, 입안으로 도식을 중얼거렸다.
확실하다. 이 도식은 발동 가능한 마법이었다. 그 말인즉, 고대어 중 가장 어렵다는 흑의 언어를 이 소년이 한 시간 반 만에 번역해 냈다는 것이었다.
루나는 아픈 팔을 주무르며 밀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확실히 효력이 끝나 가는 것인지 요즘 공작이 준 펜던트의 효과가 예전만 못했다.
“됐죠?”
“……이걸 정말 니가 해냈다고?”
“속고만 사셨어요? 의자에 앉아서 글 적는 거 보셨잖아요.”
이건 천재였다. 휘멘의 표정이 일변했다.
“너, 날 따라올래?”
“공짜 시종은 사양인데요.”
“그런 거 말고, 내 제자 말이다.”
루나의 손길이 멈췄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도 그렇고, 요즘 뜻밖의 사람들이 이상한 제안을 해 왔다.
“자, 잠깐만요. 손님,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 제국 최강의 흑마법사가 나지. 흑마법사 휘멘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흑마법사고 뭐고, 전 마법 같은 거 하나도 모르거든요. 그것도 타고나야 하는 거지, 전 무리예요.”
“흠…… 그럼 제자 말고 내 조수 해라. 나 돈 많거든? 날 따라오면 돈 많이 줄게. 너 정도면 틀림없이 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아니 뭐 유괴범이세요? 뭐 돈으로 사람을 꼬드겨요?”
루나는 점점 어이가 없었다. 휘멘은 고개를 갸웃했다.
“흑마법사에 대해 도는 세간의 소문들은 다 헛소문이야.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제물로 쓰거나 하지 않는다고.”
“……저도 그런 구시대적인 편견은 없거든요. 아무튼, 저는 못가요.”
“왜? 혼자라며. 발목 잡을 가족들이 있어? 내가 네 가족들까지 다 먹여 살릴게.”
호언장담하는 걸 보니 허풍인지 정말 부자인지.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가족 없어요.”
“오, 그럼 잘됐네. 혼자 살아 좋을 게 뭐가 있냐. 대충 서로 도움 되는 사람들끼리 엮여 사는 거지.”
“……차라리 혼자가 되는 게 더 나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알았다.
다 죽어 가는 병자 남편과의 영혼결혼식, 그녀를 학대하는 시부모. 그리고 그녀를 팔아 버릴 현재의 보호자들. 그런 이들과 있느니, 쉽게 남을 믿느니 혼자가 나았다.
휘멘과 대화하며 루나는 새삼 자신이 혼자라는 걸 떠올렸다.
만일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어떨까. 이 세상을 여성의 몸으로 혼자 살아가야 한다. 그나마 든든한 돈이 있어 위안이 되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인의 혼자 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고 남장을 한 채 공작이나 낯선 흑마법사를 따라갈 순 없다. 루는 어디까지나 가짜 신분이다. 루나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마주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날 따라오면 평생 호의호식시켜 줄게.”
“자꾸 억지 부리지 마세요. 저는 누구도 따라갈 생각 없으니.”
루나는 볼을 부풀리고 말했다.
“진짜 그렇게 싫어?”
“싫은 건 아니고, 저한테 마법이나 그런 어려운 일은 무리예요. 아무튼 지금은 됐어요.”
“……체, 알았다.”
휘멘은 의외로 깔끔하게 포기했다. 루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그가 마치 장난감 뺏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슬슬 그녀의 근무 시간이 끝나갔다. 며칠 남지 않은 근무일. 그날 중 하루를 이 사내와 말장난으로 보낼 줄이야. 이래서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가 보다.
“그럼, 소원 들어주실 거예요?”
루나는 마침 생각난 김에 말했다. 휘멘은 체, 하고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뭘 해 줄까?”
“으음, 건강해지는 마법은 어때요?”
아키스의 말이 떠올랐다. 마도구의 효력이 곧 끝나 간다는 말. 이 힘을 계속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던진 말이었다.
“뭘 좀 아는 녀석이군. 그것보다 좋은 걸 해 줄게.”
휘멘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루나를 보았다.
“이리 와 봐.”
“왜…… 요?”
루나는 그를 경계하며 다가갔다. 휘멘이 바짝 다가왔다.
“내기에 대한 보상이다.”
휘멘이 루나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조렸다.
그 순간 휘멘의 손끝에서 새까만 빛이 나왔다. 그대로 휘멘이 루나의 이마를 톡, 쳤다.
“이게 뭐예요?”
“수호 주문. 몸에 나쁜 건 아니니 걱정 말고.”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이마를 감싸 쥐고 문질렀다. 일단은 아무 효과도 없어 속는 기분이었다.
“정말 이상한 건 아니죠?”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아무 효과도 없는데…….”
“그딴 잔재주 같은 건강 주문보다 훨씬 좋은 거라니까.”
“뭔데요?”
“때 되면 알아. 네가 위기에 빠지면 발동하는 주문이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프진 않으니까 괜찮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 주문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신 것도 감사해요.”
이것도 내기의 내용이었다. 그녀의 감사 인사를 받아 주는 것.
“쳇, 알았다.”
휘멘은 ‘이걸 구해 준 걸 구실 삼아 어떻게 감아야 하는데’라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 가세요?”
“안 그래도 갈 거다. 아무튼, 또 봐.”
루나의 말에 휘멘은 또 뭐가 성이 난 것인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가게를 나갔다. 루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이상하게 미운 정이 간다고 해야 하나, 순수해 보이는 사람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제 저 이상한 마법사와 다시 만날 일도 없으리라.
루나는 창문 밖으로 사라지는 멀대 같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거참, 기분 이상하다. 꼭 원래 알던 녀석 같단 말이지. 한 번 보면 쉬이 잊힐 것 같지 않은 예쁘장한 녀석인데…….’
일단 소년의 축객령에 왠지 성이 나서 나오긴 했는데, 휘멘은 계속 기분이 야릇했다.
하룻강아지처럼 조그만 게 제게 툭툭 내뱉는데도 하나도 얄밉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났다가도 종알대는 걸 보면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휘멘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아이처럼 귀엽게 생긴 소년이었다. 그래서인가 머리도 쓰다듬고 싶고 꼭 동생처럼 귀여워하고 싶었다.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놈은 또 처음이네.’
체향도 포근하고 뭐라고 할까…… 사랑스러웠다.
달릴 것 달린 사내놈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정말 외롭기라도 한 것인지. 휘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찜찜한 기분을 끌어안았다.
‘뭐, 또 찾아가면 되겠지. 이렇게 빨리 흑의 언어를 번역하는 놈은 처음 보는군. 언젠가 잡아가서라도 제자로 삼아야지.’
이것이 루와 만나는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한 채 휘멘은 마음대로 결론을 내렸다.
* * *
요즘 루나를 제외한 숙부 가족들은 모두 신이 나 있었다.
다름 아닌 무도회 때문이었다.
“황궁 무도회에 초대 받은 데다, 이튿날 조찬회까지 초대 받다니.”
“세상에, 이게 바로 공작가의 힘 아니겠어요?”
축제 날, 황실에서는 큰 무도회가 열린다고 한다. 숙부 가족 모두가 거기에 초대받은 건 물론이고 이튿날 조찬회까지 초대받았다고 했다. 그 말인즉, 황궁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뜻이었다.
하급 귀족들에게 황궁은 꿈의 장소였다. 하물며 황궁에서 하룻밤을 묵을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새틴도 내내 들떠 있었다.
“무도회에 공작님도 나오신대. 오랜만에 그분을 뵐 수 있을 거야.”
“그래. 잘됐구나.”
루나는 새틴이 하루를 지낼 짐을 꾸리는 걸 도와주며 대답했다.
새틴과 이유는 달랐지만 루나도 계속 공작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공작과 약속 아닌 약속을 한 탓이다.
축제 날.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
그날이 아키스가 ‘루’를 데리러 오겠다 약조한 날이었다.
어쨌든 숙부 가족이 황궁에 초대 받은 것은 루나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그들이 없다면 루나의 밤 외출은 더 수월해질 터였다. 루나는 기분이 들떴다가 싱숭생숭했다가 했다.
그리고 새틴이 그런 루나의 뒷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요즘 저 계집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을 어디에 판 사람 같아.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새틴의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수상한 점이 있으면 확인해 보면 될 터였다.
* * *
요즘 아키스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평소보다 예민했고, 생각이 굼떴다. 몸에 무거운 쇠를 매달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신관은 이것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라 말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니, 그 말은 참 얼마나 많은 핑계가 되는지 모른다.
추수회 기간에는 황가의 일원들, 젊은 공작 아키스를 포함한 이들이 모두 황궁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축제 당일에는 황궁에서는 가장 성대한 무도회가 열렸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사이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키스의 모습은 무도회장의 그 누구보다 수려했다. 그는 별다른 장식 없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눈에 띄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선 그를 영애들이 훔쳐보고 사내들조차 의식했다. 제국의 살아 있는 신화, 젊은 드래곤 공작은 누구든 한 번이라도 비벼 보고 싶어 했다.
‘……지루하군.’
그러고 보니 오늘 밤은 소년을 데리러 가기로 한 날이다.
오랜만에 볼 소년의 모습이 기대되었다. 그는 저택을 떠나기 전, 집사에게 루를 위한 방을 준비해 두라 일렀다. 아키스는 소년을 떠올리며 와인 잔을 입에 댔다.
“아키스 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악혼녀, 새틴이 서 있었다. 아키스는 그녀에게 눈인사했다.
“저어, 지난번 저녁 약속이 깨진 이후에 찾아 주시지 않아서…….”
늘 소녀 같은 모습의 새틴이 수줍게 말했다. 아키스는 피곤한 정신에 짜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새틴을 혼약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는 아내가 필요했고 새틴은 아내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가문은 너무 미천하여 힘이 없었다.
새틴은 주제를 아는 여자였다.
그녀의 집안에서 혼약을 약속한 문서가 발견되고, 새틴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했다. 사랑도 관심도 바라지 않을 테니 공작 부인의 권력만 누리게 해 달라고.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 쳐 내셔도 되어요. 다만, 기회를 주세요. 공작님의 사람이 될, 기회…….’
그는 젊은 나이에 공작이 되었다. 제국법에 따라 본디 기혼자만이 공작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공작 후계자로 지정되는 이들은 아주 어릴 적에 조혼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성인이 훌쩍 지나서까지 미혼이었다. 그는 황실에 혼인의 유예를 요청했다.
황실은 그에게 먼저 공작위를 수여하고 혼인을 준비할 유예 기간을 주었다. 드래곤과의 계약이 완성되는 내년쯤엔 결혼해야 했다. 그래야 공작의 직위가 공고해졌다. 그것이 그에게 아내가 필요한 유일한 이유였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건지.’
아키스는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새틴을 정중히 대하되 선을 지켰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키스 자신이 어떠한 스위치를 눌러 버린 것인지 새틴도 서서히 선을 넘기 시작했다.
“영애.”
“네, 공작님.”
그녀는 한없이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곧 예의를 갖춰 기별하겠습니다. 그러니 선은 지켜 주시지요.”
새틴의 뺨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그녀는 수치심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선을 넘었나요?”
“정확하게 넘으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인내심의 한계를 건드리지는 않았지요. 거의 근접하긴 했지만요. 현명하게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알겠어요.”
새틴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부채 너머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왜 내 맘을 몰라주시는 걸까.’
새틴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공작이 아직 그녀를 쳐 낼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한편으론 안심했다.
* * *
멀리서 그들을 훔쳐보는 젊은 영애와 영식들은 뺨을 붉히며 탄식했다.
“로텐베른 공작님이 약혼녀와 대화하고 계시군요.”
“공작님이 너무 미남자시라 새틴 영애가 가끔은 수수해 보인다니까요.”
공작과 새틴의 대화는 멀리서 보면 마치 다정한 피앙세들이 서로를 보고 소곤대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 대화 내용은 사랑의 속삭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라미라 영애께서 서운하시겠어요.”
그리고 그들은 은근히 눈짓을 교환한 후 눈으로 라미라 영애를 찾았다.
사교계의 여왕인 라미라 영애. 그녀가 아키스를 죽을 정도로 짝사랑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새틴과 아키스가 같이 있는 모습만 봐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몹시 유명했다.
“라미라 영애가 어디 가셨죠?”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가 무도회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좋은 구경 놓쳤다는 얼굴로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라미라 영애가 공작님이 계신 자리에 빠질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온데간데없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사람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수군거렸다.
* * *
황태자가 붙잡는 통에 아키스는 생각한 것보다 늦게 퇴궁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뒷골목 서점에서 일하는 소년과의 약속이 하잘것없다 하겠지만, 아키스에게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귀족들의 무도회보다 중요했다.
사람을 묘하게 편안하게 해 주는 소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 일주일이나 황궁에서 귀족을 상대하느라 활시위처럼 당겨진 그의 마음이 고요해질 것 같았다.
“공작 각하, 잠시만…….”
무도회장을 나가려던 아키스는 황후의 시녀와 마주쳤다. 무도회장 밖에서 아키스를 기다리고 있던 황후의 시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황후 폐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황후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황후는 몸이 좋지 않아 거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꼭 지금 봐야겠다 하셨나?”
“네, 꼭 들러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아키스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돌려 황후궁으로 향했다.
* * *
그리고 아키스는 황후가 기다리고 있다는 황후궁의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정작 그를 초대한 황후는 온데간데없고, 꽃같이 아름다운 라미라 영애 달리아가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오늘이 날이라고 아주 난리로군.’
아키스는 그녀를 보자마자 정교한 아미를 확 찌푸렸다. 짜증이 치미는 아키스의 속과는 정반대로 절세미녀 달리아는 오늘따라 물을 머금은 꽃처럼 밝고 생기가 넘쳤다.
“공작님, 공작님을 만나기 위해 이런 갑작스러운 자리를 마련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사실은 꼭 할 말이…….”
“용서 못합니다.”
아키스는 냉정하게 내뱉었다. 달리아는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네?”
아키스는 냉엄하게 내뱉었다.
“서로 간의 사회적 체면과 예의상 지키고 있는 교양들을 위해 더 이상 이러지 말라 몇 번을 경고했습니다, 영애.”
아키스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미라 후작 영애.
명문가의 영애인 그녀가 아키스를 만나기 위해 주변인을 이용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공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기 위해 하인들을 매수하고, 아버지의 입김을 이용해 아키스와 맞선을 잡고, 심지어 황후의 총애를 이용해 아키스를 불러낼 때도 있었다.
달리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흐려졌다. 그녀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그저 뵙고 싶어서…….”
“인간은 욕구의 생물입니다. 보고 싶다는 충동적 욕구도 충분히 들 수 있죠. 그러나 그걸 통제하기에 인간인 겁니다.”
“…….”
라미라 영애, 달리아가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아키스를 보았다.
아키스는 눌러 박듯 말했다.
“그러니, 부디 우리 서로를 통제해서 불쾌한 충돌을 일으키지 맙시다.”
아키스가 세 번쯤 달리아를 거절했을 때, 최근 달리아는 아키스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는지 달리아는 다시 똑같은 행동을 시작했다. 아키스는 두통이 도지는 느낌이었다.
“전, 그저 오해를 풀어 드리려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예요.”
달리아는 고운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달리아가 슬픈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면 넘어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저도 명예가 있는 여자예요. 저를 나쁘게 생각하시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러나 아키스는 달리아가 말을 길게 꺼내기도 전에 딱 잘랐다.
“오해도, 걱정도, 관심도, 기대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달리아는 아키스가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 하자 입술이 바짝 탔다.
“그간 제가 한 일을 사과드리고자 하는 거예요.”
아키스가 그제야 달리아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외쳤다.
“전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아키스는 뒷목이 다 당겨 왔다.
“저는 여성을 어떤 부류라고 판단하고 편견을 가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길.”
아키스는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말했다. 달리아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그저 오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했어요.”
달리아가 수치심을 누른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간 품위 없는 모습을 보였을지 몰라요. 하지만 저도 그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녜요. 그러나 딱 한 번만 저와 대화해 주시길 바랐어요. 왜냐면, 저는 오늘 부로 공작님을 포기할 테니까요.”
이건 또 무슨 장단인지.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달리아가 그에게 한 그 모든 시도 중 오늘이 가장 유별난 시도였다.
달리아는 사교계의 어린 여왕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키스를 사모한다는 이유로 그는 지금껏 별 귀찮은 일들을 겪어야 했다.
달리아가 자신의 곁에 접근하는 여자들은 물론, 약혼녀인 새틴과 싸운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그에게 그 일들은 별 관심 없는 일들이었을 뿐이었다.
달리아는 모든 걸 가진 여자였고, 그녀는 성취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성취에 대한 욕구로 불타올랐다. 그녀가 미모, 부, 사교계의 권력, 그리고 명성, 그중 그녀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이 아키스였으므로 그녀는 아키스를 열망했다.
아키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원하지 않는 열망은 아집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아키스에게 그녀가 관심을 끊겠다는 말은 매력적으로 들렸다.
“제가 그간 공작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 온 걸 아실 거예요. 그러나 이제 공작님께 접근하지 않겠어요.”
“수법을 바꾼 건지, 아니면 세상이 내게 친절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들어나 보죠.”
아키스는 그녀에게 딱 5분을 할애하기로 했다. 어차피 더 여유도 없었다. 오늘 그는 중요한 선약이 있었다.
“제가 공작님을 그간 연모한 건…… 권력이나 부 때문이 아니에요. 전 그저 사랑을 원했거든요.”
“그래서?”
아키스의 인내심은 벌써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이후 달리아가 자신에게 멀어질 것을 기대하며 겨우 인내심을 끌어모아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은 약혼녀에게도 무관심한 분이죠. 당신의 약혼녀인 새틴 영애를 제가 뒤에서 계속 괴롭혀 온 걸 아시면서도 말리지 않으셨어요. 그게 제게 희망을 주었죠. 당신이 약혼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았으니까요.”
달리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키스는 말문이 막혔다. 희망을 얻기 위해 남을 괴롭힌다니 정말 기가 막히게 신기한 발상이었다.
참 대단한 여자였다. 아키스가 새틴에게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도 달리아를 정말 증오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게 자랑이라고 하는 말입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달리아는 눈물을 훔치듯 손가락으로 눈가를 찍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당신의 권력이나 부, 명예가 아니라 사랑을 원한 거예요. 사랑 없는 결혼, 그런 걸 원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새틴 영애를 사랑하셨다면 저도 포기했을 거예요. 당신의 마음만 얻는다면, 진실한 사랑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당신의 아내가 아니라도 좋았어요.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잘못입니다.”
“네……?”
속눈썹을 가련하게 떨던 달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남녀 간의 불쾌하고 질척이는, 서로의 인생을 싸구려 칵테일처럼 섞어 흔드는 모든 감정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큰 잘못이죠. 섣부른 착각도 큰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내버려 둔 건.”
아키스는 더없이 부드러운 미성으로 발음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결정타였다. 천하의 달리아도 입가를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잘 알아요.”
“안다고요?”
“네, 이제는 잘 알아요. 당신이 제게 아무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 이제 인정…… 하겠어요. 그렇지만 단 하나,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그간 당신과 다정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단 한 시간이라도 좋아요. 제게 추억을 주세요. 그러면 이제는 다시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겠어요.”
달리아의 말에 아키스는 나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딱 20분입니다.”
달리아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듯 올라갔다.
달리아는 정성 들여 준비한 차를 따랐다. 아키스는 그것을 거절하려다 짜증으로 인해 목이 타서 차를 몇 모금 마셨다. 달리아는 미소 지었다.
“차 맛이 괜찮지요? 동대륙에서 수입한 고급 차예요. 차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잘 우려진 홍차는 유난히 붉었다.
소년의 근무 시간이 언제 끝이었더라. 이 피곤한 시간이 끝나면 말을 달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키스는 소년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장갑을 낀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공작님?”
뭐라고 말하던 달리아가 아키스를 불렀다. 아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키스는 이 짧은 순간에도 전혀 달리아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심장이 차가운 남자 같으니. 그러나 이제 당신도 변할 거야. 당신은 꼼짝없이 덫에 걸렸거든.’
달리아는 찢어져라 올라가는 입술을 감추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달리아에게만 꿈결 같은 20분간의 티타임이 끝나고 아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아는 그때까지도 집요하게 아키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 이상하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분명히 그의 차에…… 약을 넣었는데?’
유명한 흑마법사, 휘멘의 집에서 훔쳐 낸 약을 그의 차 안에 넣었다.
하녀에게 듣기로 그 약을 먹으면 시체도 온몸에 열이 들끓어 오르며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라 했다.
‘분명히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즉효 약이라 했는데. 설마, 내게 그 하녀 년이 거짓말을 했다고?’
아키스는 더없이 멀쩡했고, 달리아는 몹시 당황했다. 오히려 그는 체온이 식어 가는 듯 점점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아키스는 당황한 달리아의 속도 모르고 등을 돌렸다.
‘약이…… 안 통하는 건가? 그 하녀 년이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달리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아키스를 따라 일어났다.
“고, 공작님!”
아키스는 달리아를 냉랭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저어, 몸은 괜찮으신가요? 요즘 계속 병환 중이라 사교계에 잘 나오지 않으신다고 들었는데.”
아키스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정말 가 봐도 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아키스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짜증이 떠올랐다. 그 기세에 달리아는 움찔했다.
“그, 그게…… 그간 감사하고 고마웠다고요.”
“알겠습니다. 이제 서로 미안함도, 고마움도 표현하지 않는 사이가 됩시다.”
아키스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달리아는 자신이 이미 그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건드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겠…… 어요.”
달리아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도대체 왜 약효가 들지 않는 거지? 설마…….’
달리아는 아키스가 드래곤 공작이라 불리는 특수한 혈통을 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이 매우 급하게 돌아갔다. 아키스의 뒷모습을 보던 그녀는 급하게 달려가 자신의 시종을 찾았다.
“……차선책이다. 당장 공작을 추적해. 공작이 약을 마신 상태로 나갔다가 만일 나중에라도 공작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모두 죽어!”
애초 달리아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는 강력한 최음 독. 열을 바로 풀지 못하면 사람이 미쳐 버린다는 약.
그것을 차 안에 섞어 공작에게 먹인다. 그리고 공작이 독의 효과로 이곳에서 그녀를 덮친다면…… 그것도 공작이 자신을 덮치기 전의 상황이 달리아가 공작을 포기하겠다 선언한 상황이라면 어떨까.
황궁 내에서 증인이 얼마든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달리아를 건드렸다면 공작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달리아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일지도 모르나, 달리아는 아키스의 성정을 알았다.
결백한 성향의 공작이라면 분명히 자신을 책임질 것이다. 그리고 정 안 되면 그가 자신을 덮쳤다 큰 소란을 만들면 된다. 자신이 피해자라면 아키스는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그게 달리아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달리아는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 * *
“공작님, 곧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담당 시종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본래 대기시켜 놓은 마차는 아키스가 오지 않아 마차 보관소로 되돌아갔다. 아키스가 달리아에게 발목이 잡혀서 늦게 나왔기 때문이다.
아키스는 마음이 급했다. 오늘 소년, 루를 만나기로 한 탓이다. 이러다가 인재를 놓칠지도 모른다.
“되었다. 시간이 없으니 내 마차는 따로 공작가로 보내도록. 황태자 전하의 준마를 좀 빌리겠다.”
“혼자서 가시겠다고요? 호위들은…….”
“되었으니 빨리. 황태자께 내가 말을 빌려 간다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시종들은 급하게 말을 끌고 왔다. 아키스는 디딤대도 없이 말안장에 발을 얻고 빠르게 올라탔다. 그는 급하게 말을 출발시켰다.
* * *
말을 달리던 아키스는 지름길인 숲을 지나 도시로 들어섰다.
새까만 밤이었고, 축제 당일이라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이런 날은 치안 기사대의 순찰도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근처의 공용 마구간에 말을 묶어 두었다.
그의 목적지인 서점은 도시 중앙의 밤거리에 있었다. 골목길로 접어들 무렵,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아까부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불청객이 따라붙었군.’
아키스는 조용히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누군가 아키스를 뒤에서 덮쳤다.
아키스는 팔꿈치로 저를 덮친 상대를 찍었다. 복면을 쓴 상대가 비틀대다 품속에서 단도를 뽑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키스가 더 빨랐다. 아키스는 허리춤에 찬 단도를 정확히 상대의 목에 꽂아 넣었다. 피가 튀며 아키스의 뺨에 솟아오른 피가 번졌다. 상대는 소리도 없이 절명했다.
“누가 보낸 놈들이냐.”
어느새 아키스의 주변을 여러 명의 장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고 낯선 이들이었다. 아키스는 오른손을 들었다. 오늘은 운세가 사나운 날이었다.
“되었다. 한 놈만 살려서 심문하면 되니.”
아키스의 손에서 새하얀 빛무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로텐베른 공작이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사내들이 흠칫했다.
그 순간이었다.
“……!”
지끈―
심장을 강타하는 듯한 큰 충격이 아키스의 몸을 덮쳤다. 그 고통이 어찌나 큰지 심장을 감싸 쥐고 무릎을 꺾었다.
‘이게…… 뭐지?’
다음 순간, 아키스의 몸에 은은한 발열이 시작되었다. 아키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상대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윽!”
그 순간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새하얀 빛무리들이 다가오는 상대의 발목을 묶었다. 겨우 정신을 집중해 겨우 마법을 쓴 아키스는 비틀대며 골목 끝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잡아야 해!”
마법에 발이 묶인 이들이 고함을 질렀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키스는 비틀대며 벽을 짚고 걷기 시작했다.
점점 혼미해지는 그의 정신은 자신이 걷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몽롱하고 그가 있는 곳이 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무의식중에 익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안 오는 건가?”
오늘은 공작이 서점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리고 공작은 오늘 루나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에 대한 확답을 달라 했다. 공작이 오면 뭐라고 거절의 말을 해야 할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던 루나였다.
그리고 어떻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도. 오늘이 소년 루가 공작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 테니.
오늘은 축제 날이었다. 숙부 가족들은 모두 황궁에 갔고, 몇 안 되는 하녀와 하인들도 외출했다. 루나는 평소보다 가게에 일찍 나왔다. 필립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사장님, 이따 가게 문은 제가 닫을게요. 내일은 가게 쉬는 날이죠? 가서 술도 한잔하시고 축제도 보고 오세요.”
“정말 혼자 괜찮겠어? 나가서 나랑 같이 술이라도 한잔하자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하고, 또 마지막 근무니까 저도 천천히 정리하고 들어가고 싶어서요. 어서 가세요.”
“손님 없으면 적당히 정리하고 들어가.”
루나는 모두가 일하기 마다하는 축제 날, 밤새워 가게를 혼자 보겠다 자처했다.
필립은 미안한 듯 몇 번이나 괜찮겠냐 물었지만, 결국 축제를 보고 싶었는지 가게를 나섰다.
‘……다들 문을 닫았네.’
축제 날은 고서점 거리에도 손님이 들지 않아 주변 가게들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공작은 오지 않았다. 루나는 단념하고 저도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못 봐서 아쉽네.’
루나는 약속을 어긴 그가 서운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은 황궁에서 큰 무도회가 열린다 했다. 공작도 당연히 그곳에 갔을 것이고, 무도회 때문에 약속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마지막 근무를 기념하여 루나는 서점 안을 깔끔히 정리했다. 그러고는 앞문을 단단히 잠그고 뒷문을 단속하기 위해 나갔다.
뒷문을 닫으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확 잡아챘다. 루나는 흠칫 놀랐다.
“……공작, 님?”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같이 그가 거기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다치셨어요?”
아키스의 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의 눈은 풀려 있었고, 그는 문을 잡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루나는 급히 문을 열었다.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루나는 엉겁결에 그의 몸을 받았다.
그의 무게에 루나는 뒤로 쓰러질 뻔했다. 그의 온몸이 뜨거웠다. 루나는 놀라서 숨을 삼켰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공작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루나는 문을 닫고 급히 공작의 모습을 살폈다.
“문을…….”
공작이 헐떡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문을 잠그세요, 지금 당장.”
그때,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들이 울렸다.
“도대체…….”
아키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루나의 입을 막았다.
“쉿.”
아키스가 속삭였다.
아키스의 손바닥은 불처럼 뜨거웠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뭐라 외치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좁은 골목 사이로 울렸다. 이 근방을 다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사내들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루나는 급하게 문을 잠갔다. 모든 자물쇠를 잠그는데 그녀의 심장이 다 떨렸다.
“쫓기고 있어요?”
아키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아키스를 숨겨 주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사이 아키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루나는 다가가 아키스를 부축했다. 루나의 가녀린 몸이 아키스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아키스는 강렬한 감각을 느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사내일 텐데. 그를 부축한 소년의 몸은 너무 부드럽고 둥글었다.
아키스는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색정광 남색가가 된 기분이었다.
루나가 속삭였다.
“……2층 숙직실에 침대가 있어요.”
아키스를 부축한 채 루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아키스는 미칠 것 같았다. 소년의 몸에서는 포근하고 달콤한 체향이 풍겼다. 평소라면 그가 눈치채지도 못했을 그런 향기였다.
그 체향이 마치 여인의 것처럼 그를 유혹했다. 아키스의 머릿속은 점점 뒤죽박죽 얽히고, 온몸에 오른 열이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숙직실의 좁은 침대 위로 그를 겨우 눕혔다.
“……다, 다치신 건 아니죠? 몸에 열이 나요.”
루나는 그를 눕히고 나서야 아키스의 뺨과 목덜미에 묻은 피가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온몸에 열이 펄펄 끓었다. 이마나 목덜미에서만 열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서 열이 난다는 건 명백한 이상 증상이었다.
루나는 겉핥기나마 약학을 배워 알았다. 독초를 먹은 이만이 이 정도로 온몸에 열이 들끓거나 반대로 얼음장처럼 냉해지거나 했다. 루나는 손등으로 그의 목덜미 체온을 쟀다.
“혹시 독에 중독되신 거예요? 제 말에 대답하실 수 있나요?”
아키스는 겨우 정신을 잡고 대답했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마도, 그런 모양입니다.”
“의사, 의사를 불러 와야 하는데…….”
루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날. 이날만은 의사도 진료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축제를 즐기는 날이었다.
진료소가 문을 닫았을 것은 당연지사. 의사의 집으로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 진료를 와 줄지도 몰랐으나, 루나는 이 근방 의사가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루나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몸을 닦을 것을 가져올게요.”
루나가 속삭였다.
아키스는 저도 모르게 루나의 손을 꽉 잡았다. 소년의 손은 꼭 여성처럼 부드럽고 작았다. 그의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소년이 무구한 눈으로 아키스를 보았다.
“공작님……?”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이유를 모를 상실감이 그를 감쌌다.
소년이 저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싫었다. 아키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가지 말고…….”
“……네?”
“아무 데도 가지 마요.”
루나는 그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해요. 해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말 그대로 배수진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아키스를 쫓는 괴한들에게 잡힐지도 모르고, 이 안에서는 독을 해독할 방법이 없었다.
“언제 뭘 드신 것인지…… 아니면 들이마시는 종류의 독인가요? 짚이는 것이 없으세요? 공작님, 의식을 잃으시면 안 돼요. 공작님……?”
루나는 눈을 감으려 하는 아키스의 뺨을 살살 쳤다. 아키스는 이제 끔찍한 요통이 온몸을 휩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윽…….”
그리고 겨우 잡은 의식 속에 소년의 체향, 목소리, 그리고 몸에 닿는 숨결까지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아키스의 머리는 그가 소년이라 인지하고 있었지만 독으로 인해 각성한 그의 본능이, 짐승 같은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여인을 안고, 편해지라고.
그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의 본능은 루나가 여인임을 알아채고 날뛰고 있었다.
“……고통이…… 있는 걸 보니 이건 고대의 독입니다. 그러니…….”
아키스는 끊어 뱉듯 말했다.
아키스의 집안, 보랏빛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공작가의 후계자들. 그들은 모두 특수 체질이라 일반적인 독에는 내성이 있었다.
드래곤의 계약자이자 그릇으로서 몇백 년을 버텨 온 혈통이기에 그들은 보통 사람보다 더 강한 체력과 내성, 마력을 타고났다. 공작가의 사람들을 해할 수 있는 것은 흑마법사의 지식으로 만든 고대의 독뿐이었다.
그의 몸 안의 내성이 치열하게 독과 싸우고 있었다. 그때 일어나는 통증임을 아키스는 그제야 직감했다. 둔해진 머리는 그 생각 하나를 떠올리는데도 머릿속으로 온갖 투쟁을 벌여야 했다.
“……고대의 독……?”
그 말에 불현듯 루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아키스의 셔츠를 풀었다. 아키스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루나가 하는 양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세상에.’
루나는 아키스의 가슴을 보고 경악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는 혈관을 따라 푸른 선이 불거져 있었다.
‘흑마법사의 독…….’
아키스는 얼마 전부터 루나에게 고대 흑마법사의 독에 관한 책들의 번역을 맡겼다. 그중 가장 강력한 몇 가지 독에 관한 내용을 루나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루나의 손이 떨렸다.
온몸에 열이 들끓고 푸른 선이 가슴에 생기는 독. 그리고 사내를 혼미하게 만드는 독. 최음 독이었다.
‘어떤 종류의 최음 독이지?’
그가 맡겼던 책 안에 적힌 최음 독의 종류는 다양했다. 욕정을 풀지 못하면 불구가 되는 것부터 죽는 것까지. 아니면 죽을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까지.
‘가슴에 혈관을 따라 푸른색이 떠오르는 종류의 독…….’
그때였다.
“……아!”
아키스가 눈을 떴다.
그는 루나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뒤집혀 아키스의 밑에 깔린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키스는 무릎으로 침대를 딛고 앉아 자신의 팔 사이로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흘러내린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그의 몸에선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아키스의 보랏빛의 눈동자는 동공이 풀려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본 루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당신은…….”
“잠깐만요, 공작님. 진정하시고…….”
“당신은 누굽니까?”
“네?”
아키스가 메마른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약의 증상인지 아키스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이 또한 독을 먹은 자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루나는 불길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다.
아키스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그가 자란 어두운 골목길, 그곳에 살던 가난하고 헐벗은 아이들. 어른들은 수시로 싸웠고, 가난함은 모두의 벗이었다.
아키스는 맨발로 강가에서 뛰놀며 자랐다. 그곳에는 항상 손을 잡고 오는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보통 비밀스러운 불륜을 하는 남녀들이었다.
환각 속에서 나룻배 뒤에 숨어 서로에게 키스하던 남녀는 버터처럼 한 덩이가 되어 녹아내렸다.
어릴 적, 강가에서 놀다 물에 빠진 적 있었다. 아키스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강물 아래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아키스를 잡고 끌어 올렸다. 그 도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키스는 그 손을 꼭 쥐었다.
“공작님, 잠시만요. 상황은 이해하겠는데…… 진정하시고…….”
루나는 가느다랗게 중얼거렸다.
아키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나는 상황에 공포보다 그가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눈치챘을까 두려웠다.
“앗…….”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단단히 잡더니 하얗고 단단한, 긴 손가락을 루나의 손가락에 얽었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아키스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었다. 닿은 그의 숨결조차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좋은 향기가 나.”
아키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놀람과 긴장으로 루나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떻게 하지?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봐, 이 사람…….’
그 순간이었다. 아키스의 동작이 멎은 것은. 아키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누굽니까.”
“네?”
“당신 몸에 표식을 남겨 놓은 자가 누굽니까.”
아키스는 풀린 동공으로 루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루나의 이마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요동쳤다. 루나는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은 인지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 반짝이는 빛을 본 아키스가 몸을 발작하듯 움직였다. 그는 루나의 위에 엎어져 버렸다.
“흑마법사…….”
아키스가 헐떡이며 말했다. 아키스의 뜨겁고 단단한 온몸이 비벼져 루나는 긴장으로 기절해 버릴 지경이었다.
“그자의 마력은…… 나와 상극이란 말입니다. 빌어먹을, 누가 이런 장난을 쳐 놓은 거야.”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공작님, 괜찮아요? 정신을 차려야…….”
말하면서도 환각을 보는 아키스가 자신의 알아듣긴 할지 의심스러웠다.
루나는 아키스를 밀어냈다. 몸에 힘이 풀린 그는 힘없이 루나의 옆에 드러누웠다.
‘……세상에.’
루나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훤칠한 키의 아키스는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며 떨고 있었다. 그는 명백하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루나는 느낄 수 있었다.
“…….”
땀에 젖은 그의 색정적인 모습은 두려움과 동시에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내의 이런 모습을, 그것도 아키스 같이 아름다운 사내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루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발을 느끼며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책, 고대의 독에 관한 책.”
얼마 전, 번역을 맡긴 고대어 책을 공작은 아직 찾아가지 않았다.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대의 독에 대한 책을 펼쳤다.
[혈관을 타고 목 아래에 푸른 선이 생기는 최음 독.
블루 라인 포이즌이라고 한다.
기억 혼돈, 최음 상태, 즉각적인 광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독으로 이성과의 성교로 해독할 수 있다.
해독하지 못하면 죽어 가면서 가장 큰 고통을 주기에 때로는 혈통 좋은 마법사들의 씨를 훔치거나 가장 큰 고통 속에서 사형수를 죽이기 위해 사용한다.
초기 증상은 온몸에 열이 오르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며, 환각을 보기 시작하면 말기 증상이다…….]
루나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필이면 걸려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맹독이었다. 몇 초간의 짧은 순간 루나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새틴의 약혼자라는 생각, 그러나 이러다 아키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루나 자신의 안위에 대한 생각. 아키스에게 그녀의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루나는 아직 경험이 없었다. 제국은 이런 부분에서 보수적이었다.
루나 자신이 아무리 개방적인 사람이라도 그녀와 같은 신분의 사람이 혼전 금기를 깨면 어떻게 될까. 일기장 속에서 본 그녀의 비참한 미래. 그 끔찍한 미래보다 미래가 더 일그러질 수도 있다. 루나의 손에 땀이 배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놔둘 수 없다.
아키스가 아니라 모르는 사내였다만 루나는 더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 발짝이든 한 발짝이든 루나는 그에게 이미 마음을 주었다.
아키스가 루나와 루에게 각각 한 번씩 호의를 베풀어 주었기에. 그래서 일주일간 그의 생각만 하며 아키스를 기다리지 않았나. 마지막이나마 오늘 밤에 그의 얼굴을 본다는 기대를 감추지 못하지 않았는가.
루나는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물병을 들고 급하게 위로 올라갔다. 거추장스러운 가발을 벗고 쏟아져 내리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 금발의 긴 머리가 말총처럼 등 뒤로 늘어졌다. 혹시 몰라 안경은 쓴 채였다.
쿵!
그때, 2층에서 큰 소리가 났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걸음이 급박해졌다.
고통이 심해지는지 아키스는 침대 위에서 발작하듯 몸을 떨고 있었다. 루나는 떨리는 손을 느끼며 먼저 피 묻은 그의 뺨을 천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도 남녀의 정사가 대충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겉핥기 지식이었다. 미래의 일기장, 그녀가 엿본 미래에서도 루나는 금방 죽은 남편 탓에 독수공방하며 죽기 직전까지 처녀로 보냈다.
‘아니 일기에 미주알고주알 다 적어서 미래를 세세히 알게 해 준 건 좋은데, 왜 가장 필요한 지식은 안 적어 뒀냐고.’
루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키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고 있었다.
* * *
아키스는 뺨에 시원한 것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서서히 목 부근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환각 속에서 헤매던 그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부드러운 것이 온몸에 닿아 있었다. 그의 드러난 단단한 가슴팍을 누군가 매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작고 말랑한 손길이었다. 아키스는 가슴을 더듬어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끌어당겼다.
“꺄……!”
루나는 작은 소리를 냈다. 아키스가 그녀를 갑자기 확 끌어당겨 안은 탓이다.
아키스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은 여전히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공작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키스가 천천히 그녀에게 몸을 내렸다.
첫 키스였다.
루나는 아키스의 입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그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가신 아릿한 그의 체향이 났다. 그녀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루나는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아키스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춥, 춥 하는 소리가 나며 그의 입술이 루나의 입술을 삼켰다.
윗입술이 눌려서 까뒤집혔다. 입가에 뜨거운 타액이 흘렀다. 어느새 루나는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고 딱 붙이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루나는 눈을 꼭 감았다.
즉효약이나 다름없는 맹독이었다. 아키스의 몸이 특수 체질이 아니었다면, 아키스는 바로 욕정으로 이성을 잃고 루나를 덮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키스의 몸은 오랜 세월 강대한 마력도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진화한 공작가의 혈통이었다.
그러기에 독성분은 아키스를 바로 장악하지 못했다. 아키스의 몸 내부에서는 독성분과 면역력이 끈질기게 싸웠다.
이윽고 점점 마지막 이성마저 마비되고, 고통과 욕정에 떨던 아키스는 환각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본능만이 아키스의 몸을 움직였다.
아키스의 몸에 부드러운 여인의 몸, 이성의 살결이 닿았다. 반쯤 이성을 잃었던 아키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달콤해, 너무 달아. 죽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감촉을 탐하는 기분이었다.
작은 입술과 입술이 얽히고, 그녀의 입술이 퉁퉁 부을 때까지 아키스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흐응, 그만-.”
그녀의 타액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부족했다. 그녀를 더 삼키고 느끼고 싶었다.
“앗, 잠깐…….”
아키스는 루나의 가는 허리를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감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붕대가 풀리고 봉긋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두 가슴이 드러났다. 아키스는 그대로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한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눈앞의 달콤하고 향내 나는 살결을 맛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식욕이나 명예욕, 야망을 비롯한 그 모든 욕구가 하나의 점이 되어 그녀를 향했다.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 그것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토록 타인의 살결에 갈급을 느낀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
루나는 입을 막은 채 그가 리드하는 대로 눈만 깜박였다.
“으응…….”
루나의 등골을 타고 묘한 감각이 내달렸다.
“아, 어떻게 해. 이상하잖아요…….”
루나는 입을 막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꼭지가 단단해지며 피가 몰렸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목소리를 듣고 혀를 뗐다. 그리고 입술을 천천히 내리며 입술로 그녀의 젖가슴 모양을 덧그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가슴과 그 바로 아래 갈비뼈 사이의 살까지 천천히 빨아 올렸다.
“으응…….”
미칠 것 같던 그의 열기를 그녀의 우윳빛 피부가 진정시켰다. 그녀의 살결을 혀로, 손가락으로 더듬을 때마다 몸 안의 고통이 점점 빠져나갔다.
대신 새롭게 생겨난 불같은 욕구가 아키스의 단단한 살결 아래 모든 세포를 감쌌다.
“아……!”
그가 이를 세우자 루나는 입을 막았다. 아키스는 이를 세워 그녀의 부드럽고 날씬한 아랫배를 물었다. 루나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러면 아파요, 쉬…… 천천히.”
루나는 망설이다 그의 강건하고 단단한 어깨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루나는 그가 이성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를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루나의 하얀 피부에 발간 울혈을 남긴 뒤 혀를 내밀어 천천히 그녀를 어루만지고 핥기 시작했다.
“살살.”
루나는 그를 달래듯 속삭였다. 아키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혀를 사용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핥고, 입술 표면으로 훑으며 애무했다.
‘내 말을…… 듣잖아?’
고분한 그를 보며 루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최소한의 이성은 있는 것처럼 그녀의 말을 따르는 그가 조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으응…….”
아키스가 멈춘 건 아니었다. 아키스의 혀가 그녀의 배꼽 주변을 배회하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루나는 잠시 주저하다 그가 바지를 벗기기 쉽도록 엉덩이를 들었다. 그녀의 하반신이 침실의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드러났다.
“아!”
아키스는 그녀를 단번에 침대에 눕혔다.
“으응…!”
아키스의 혀는 그녀의 도톰한 둔덕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 곳에 혀가 닿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루나는 손가락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녀는 허리를 떨었다.
아키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다리 사이, 은밀하게 파인 비부를 문지르다 손가락과 함께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름거리는군.”
아키스가 속삭였다. 핑크빛 점막이 그의 눈과 손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으읏!”
아키스는 두 손가락을 이용해 그녀의 둔덕을 확 벌렸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시선이 닿았다.
“……당신, 젖어 있어.”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제정신이 아닌 목소리였지만 루나는 그 말에 점점 더 뜨거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혀를 길게 내어 그녀의 소중한 곳, 그곳의 작게 튀어나온 돌기를 찌르며 핥기 시작했다. 그의 뾰족한 혀끝이 쓸려 올라갈 때 그녀의 가는 섬모까지 그의 혀를 까칠하게 간질였다.
“흐…….”
루나의 허리가 움찔했다. 당황해서 격하게 움직이느라 그의 입술에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거의 들이대는 것이 되었다. 맞닿은 곳에서 물이 튀었다.
“아, 안 돼. 그렇게 갑자기는…….”
추웁, 춥.
아키스의 혀가 길게 그녀의 균열 사이를 핥았다. 주름진 육벽 사이사이에 맺힌 액체가 그의 타액인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린 꿀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
아키스가 주름 사이사이를 혀끝으로 찌르다가, 천천히 그녀의 벌름대는 좁은 구멍에 혀를 밀어 넣었다. 난생처음 침입을 허락하는 그곳이 뻐끔댔다. 그의 혀가 찌르듯 안에서 움직이다, 천천히 혀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아, 아, 응!”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루나의 몸 전체를 관통하는 전율이 올라왔다.
“으응, 아아…… 안 돼……. 너무 이상해요.”
루나는 터지려는 신음을 손가락을 물어 참았다. 큰 소리를 내면 아직 주변을 배회하는 추적자들에게 들킬지 모른다.
그녀의 허벅지가 떨리자 아키스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낯선 감각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쉬이.”
아키스가 속삭였다. 루나는 그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지 알기나 해요.”
루나가 힘이 빠져서 중얼댔다. 아키스는 루나의 허벅지 안쪽에 양손을 올리고 밀어내듯 쓱쓱 애무하기 시작했다. 뜨겁고 큰 손바닥에 그녀의 말캉한 허벅지 살이 눌리며 다리가 위쪽으로 올라가, M자를 그렸다.
“으응…….”
루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루나는 어쩔 줄 몰라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꿀물이 넘쳐 그녀의 회음부까지 닿았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뗐다. 루나는 어느새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다음. 다음은 뭐지. 루나는 그 미지의 것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다음 단계로 가지 않았다.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젖가슴 아래, 배꼽 부근, 종아리까지 쪽쪽 키스하며 이미 달아오른 몸을 간질였다.
“흐으, 읏…….”
더, 더…….
제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 동시에 루나는 아키스가 환상을 통해 지금 누굴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아…… 하아…….”
아키스가 루나의 위에 올라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루나가 문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저의 손가락을 물려 주었다.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을 문 채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무릎이 루나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했다. 루나의 귀가 온통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루나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대로 그는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자신의 바지를 풀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드러낸 남성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루나는 눈만 깜빡였다.
‘원래, 이런가? 원래 이렇게…… 커?’
모습을 드러낸 그의 것은 팽팽하게 흥분해 있었다. 검붉고 단단한 그것은 차가워 보이는 아키스의 얼굴과 딴판이었다. 남녀의 성교가 결합이라는 것 정도가 루나가 아는 전부였다. 그러기에 믿을 수 없었다. 저게 어떻게 들어가?
“자, 잠깐…….”
루나는 그의 손가락을 문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키스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벌리고 천천히 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
루나는 잇자국이 나도록 아키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온몸이 열리는 느낌. 육벽이 비틀어지며 그의 큰 것을 삼키기 시작했다.
아키스가 아주 천천히 파고들었다. 그의 성기에 선 핏대와 루나의 주름이 천천히 맞물렸다. 뱃속으로 불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 루나의 빽빽한 내벽이 그의 것을 겨우겨우 물었다.
“흐응, 아……!”
루나가 정신 못 차리는 사이 결합이 끝나 버렸다. 엄청나게 빠듯했다. 루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읏……!”
루나의 속눈썹이 촘촘한 눈가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들어, 왔어…….’
그는 손가락을 빼고 그녀의 눈가에 키스하며 눈물을 핥았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는 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조금만 더 힘을 빼. 당신, 너무 꽉 껴.”
루나는 긴장한 온몸의 근육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으응…… 응……!”
아키스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픔과 동시에 몽롱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하앗…….”
그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몸 안을 관통하는 엄청난 통각이 있었다. 그 통증과 섞인 아릿한 느낌이, 그녀의 몸 중심으로 퍼졌다.
‘이상해. 이상해.’
그러나 점차 아픔은 사라지고 그 아픔 섞인 묘한 쾌감과 몽롱한 감각이 온몸의 세포에 전달되기 시작했다.
“흐흑…… 흑…….”
루나는 흐느끼는 듯한 작은 소리를 내며 등을 꺾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쇄골을 깨물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쳐올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퍽! 퍽!
힘이 풀린 그녀의 몸이 밀리자 그는 그녀의 머리가 침대헤드에 닿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머리와 침대 헤드 사이를 막았다.
그의 단단하게 달아오른 육봉이 그녀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치댔다. 마찰하는 질구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히이, 으, 응……!”
찌걱, 찌걱,
그러다 그의 동작이 은근하게 잦아들었다. 천천히 그녀의 몸 안에서 움직이며 조이는 내부를 마음껏 만끽했다.
“말도 안 되는 느낌이군. 미치겠어.”
아키스가 작게 중얼댔다. 그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았다.
“당신은, 완벽해.”
그가 속삭였다. 루나는 울 것 같았다.
“으응, 아…….”
퍽! 퍽!
그녀의 몸이 한층 부드러워지자 아키스는 일정한 힘으로 그녀를 세차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고환이 그녀의 섬모와 둔덕에 마구 비벼졌다.
‘아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루나는 발가락을 오므리며 저도 모르게 오른 다리를 아키스의 골반에 감았다.
닿은 곳에서 시작된 묘한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다. 루나는 이제 제가 아파서 우는지, 지금 느끼는 감각이 배 아래를 간질간질하게 해서 우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루나의 눈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뺨으로 떨어지면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고 끊임없이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아름다워.”
아키스가 나른하고 몽롱하고 속삭였다.
“당신 냄새가 날 미치게 해.”
루나는 아키스의 속삭임에 배 아래가 다 아릿했다.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말라고요,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루나는 그 말을 목구멍 아래로 꾹 눌러 참았다.
그의 온몸은 단단했고 세찼다.
한참을 그녀의 안을 음미하며 움직이던 그가, 더 끝까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뿌리까지 닿을 것 같았다.
더, 더 원해. 이 여자를 원해서 미치겠어.
아키스의 머릿속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누구지?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그녀를 너무 원했다. 평생 이 여자만 기다려 온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하나가 된 것이 완벽해서.
“히, 으응…….”
팽팽하게 부푼 그의 것이 그녀의 안을 꽉 점령했다. 그의 등 근육은 경직되었고, 그대로 그는 그녀의 안에 멈췄다. 길고 뜨거운 폭발이었다. 몸 안에 뜨거운 것이 확 퍼지는 것을 느끼며 루나는 아키스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아아!”
아키스가 그녀의 위로 엎어졌다. 아픔과 쾌감을 느끼며 루나의 입술은 멍하니 벌어져 있었다.
그의 숨은 여전히 더웠지만 불에 덴 듯 뜨거웠던 체온은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의 냄새를 들이마시다 그녀의 목을 빨고 핥았다. 간질간질한 그 느낌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공작님, 이제 그만…….”
그녀의 말을 아키스의 입술이 막았다. 루나는 뭐라 말할 생각도 못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그의 입술을 마주 빨았다. 긴 키스가 끝나고 루나는 경악했다.
“자, 잠시만요…….”
한풀 식었던 단단한 그의 것이 그녀의 몸 안에서 바로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뻐근하게 골반을 압박하는 그 감각에 루나는 당황했다.
콱. 그대로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삼켜지는 느낌. 루나는 새된 신음을 느꼈다. 그가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릿한 감각에 머리도, 정액과 애액이 줄줄 흐르는 하반신도 마비될 것 같았다.
‘무슨 자기가 굶주린 맹수냐고, 미치겠네.’
루나는 상대가 제정신이 아닌 터라, 뭐라 말도 못하고 쌔액쌔액 더운 숨만 내뱉기 시작했다.
삐걱, 삐걱.
이윽고, 침대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긴 밤이었다.
루나는 뻐근한 온몸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느껴진 감각은 배 아래가 뻐근하고 아프다는 것이었다.
좁은 침대 위에 그와 단둘이 엉켜 있었다. 루나는 아키스의 팔에 안겨 있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그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루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팠다.
‘……푸른 선이 희미해졌어.’
아직 그의 가슴에는 중독 증상인 푸른 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어제보다 훨씬 양호했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의 체온을 짚었다. 그의 체온은 서늘하게 내려가 있었다.
‘다행…… 이다.’
체온이 내려갔다면 위독한 상태는 벗어난 것이다.
아키스의 코 밑을 확인해 보니 숨결은 일정했다. 조금 깊게 잠든 듯했다. 그녀는 시트를 끌어당겨 제 가슴을 가렸다.
‘세상에, 정말 꿈이 아니었어.’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어난 그와 마주쳐 봐야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루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급하게 흩어진 옷을 주워 1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1층에 내려와 가슴에 붕대를 감고 옷을 대충 꿰어 걸쳤다. 그러곤 남성용 모자를 눌러썼다. 거울 속의 루나의 피부는 평소와 같은 우윳빛이었다.
“루비트 씨앗 약의 효과가 끝났어…….”
루나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고 장갑을 꼈다.
피부색을 탄 것처럼 바꿔 주는 루비트 씨앗 약의 효과가 끝났다. 이 상태로 루를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큰일이었다. 루나는 부랴부랴 서점을 나섰다.
마음은 급한데 아랫배가 뻐근해서 걸음이 더뎠다. 온몸이 피곤하다며, 아프다며 아우성을 쳤다.
‘숙부 가족들은 오늘 황궁 조찬회까지 참석하고 온다 했어.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점심때가 넘어서야 돌아올 거야.’
그나마 일찍 눈이 떠져서 다행이었다. 루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채찍질해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 * *
루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숙부 가족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하녀들도 축제 이튿날이라 모두 늦잠을 자서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두막으로 돌아오자마자 루나는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마도구 펜던트…….’
루나는 무심결에 목을 더듬었다.
아키스가 빌려준 마도구 펜던트, 그것이 없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맞아…….’
아키스와 동침하면서 옷을 벗을 때 펜던트도 벗었다. 아마 펜던트는 숙직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루비트 씨앗 약 효과가 끝나 급하게 도망치느라 펜던트가 없어진 것도 몰랐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아키스에게 오늘 돌려주려 한 물건이었다. 자신의 물건이 아니니 그가 알아서 챙겨 갈 것이다. 루나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루’의 복장과 가발 등, 변장 도구를 모두 묶어서 숲 깊은 곳에 숨겼다. 저택 뒤편의 작고 음침한 숲은 루나를 제외하고는 오가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루는 이제 사라졌구나…….’
그녀는 겨우 오두막의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꾸 눈이 감겼다. 루나는 오두막에 딸린 간이 욕실에서 겨우 몸을 씻었다.
‘기절할 것…… 같아…….’
루나는 기듯이 침대로 가 누웠다.
‘아직 내가 겪은 일이 믿어지지 않아.’
머릿속이 몽롱했다. 뻐근한 몸만이 어젯밤 일이 진실이라고 투쟁하는 듯했다.
‘아름다워. 당신 냄새가 날 미치게 해.’
아키스의 속삭임을 떠올리자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미쳤지.’
사람을 살리고자 한 일이었다. 그녀가 그러지 않았으면 아키스는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루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새틴이나 공작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러나 루나는 곧 마음을 돌렸다.
‘난 잘못한 것 없어. 그렇게 어른들 말에 순종한 끝에 간 혼처가 영혼결혼식이나 다름없는 자리였어. 그게 내 미래지. 앞으로 내가 뭘 할지는 스스로 정할 거야. 공작을 살리기 위해 그런 걸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를…… 공작님을…….’
마음이 먹먹했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언젠가는 잊힐 일이야.’
그렇게 정리하자.
루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키스가 그녀를 벌주기 위해 찾는다 한들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공작이 알던 소년 루는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그리고 루나도 곧 이 도시를 뜰 테니, 더더욱 이번 삶엔 그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루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혼절하듯 잠들었다.
* * *
루나는 죽은 듯이 곤한 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녀는 깊은 물속으로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시커먼 형체를 보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루나는 물 위로 빠져나왔다.
루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떨었다. 그녀는 어떤 황폐한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아……!”
절벽 위로 시커멓고 길쭉한 둥근 형체가 떠올렸다. 그것은 루나가 책 속에서 그림과 글로나마 보았던 존재와 닮아 있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고,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가 나 있었다. 온몸이 다이아몬드처럼 번쩍이는 하얀 비늘로 덮여, 마치 살아 있는 보석 덩어리 같았다.
그것, ‘드래곤’이 루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가 숨 쉴 때마다 비늘이 흔들렸다. 그리고 용암처럼 뜨거운 숨을 토했다.
“싫어, 무서워…….”
루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드래곤이 루나에게 입을 들이댔다.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줄만 알았던 루나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놀라 눈을 꼭 감았던 루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에 천천히 눈을 떴다. 드래곤은 가만히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야?’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용기를 내어 드래곤의 입가를 어루만졌다. 드래곤은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 것처럼 불꽃 섞인 뜨거운 숨을 그르렁댔다.
『인간의 딸아.』
그때, 드래곤이 속삭이듯 말했다.
『내 신부가 되겠느냐?』
“신부…… 요?”
드래곤의 말에 루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의 신부가 될 수 없어요. 당신은…… 드래곤이잖아요.”
그 말에 드래곤은 낮은 숨을 그르렁거렸다.
『그저 좋다고만 말하거라. 나의 신부가 되면 네가 생애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주마. 금은보화와 행복, 그리고 네가 원하는 사내가 너만을 사랑하고 갈구하게 해 주마. 나에겐 그렇게 해 줄 힘이 있고, 넌 네가 원하는 대로 행복해질 것이다.』
원하는 사내.
그 말에 루나는 곧바로 한 남자를 떠올렸다. 아키스의 얼굴이었다.
루나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이건 꿈이구나. 어차피 꿈일 테니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건, 말이 이상하잖아요…….”
드래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원하는 남자에게 사랑 받아도, 그가 당신 힘으로 강제로 절 사랑하게 되는 거라면 그건 진짜 행복이 아닌걸요.”
드래곤은 불꽃이 섞인 숨만 쌕쌕 쉬었다. 그가 내쉰 불꽃이 루나의 뺨 근처까지 불티가 튀었다. 그제야 루나는 그 불꽃이 하나도 뜨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드래곤의 표정을 읽을 줄은 몰랐지만, 루나는 그가 자신의 말에 웃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아이는 오랜만이구나. 그래, 진짜가 가지고 싶으냐?』
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가 아니면 싫어요.”
『어째서지?』
“그거야, 저는…….”
그의 루비 같은 새빨간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울컥하고 묘한 감정들이 치밀었다.
“전 평생 가짜만 가졌어요. 가짜 부모, 가짜 자매…… 가짜 애정까지. 그런데 이제는 가짜로 신분까지 위장해서 남자 행세를 한 걸요. 그러니까…… 앞으론 진짜로 살고 싶어요. 가짜는 가지고 싶지 않아요. 진짜로 날 생각해 주고, 사랑해 줄 사람만 곁에 두고 싶어요.”
꿈속인데도 눈가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드래곤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커다란 바위 같은 얼굴을 움직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그러면 내 아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는 그때, 나의 신부로 맞이하마.』
드래곤이 그녀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런, 다른 자의 마력이 묻었구나. 이건 지워 주마. 고귀한 몸에 다른 마법사의 마력이 묻어 있으면 안 되지.』
꿈속인데도 이마가 뜨끈했다. 루나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드래곤이 그녀의 뺨에 입가를 비볐다. 그리고 그때, 아래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기운이 느껴져 루나가 시선을 내렸다.
“……아.”
그녀의 발아래에서부터 검은색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십 송이의 검은색 꽃들이 서서히 피어올라 그녀의 머리끝까지 감쌌다. 루나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꿈……?’
루나는, 오두막 침대에서 눈을 떴다.
* * *
아키스는 죽은 듯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 좁은 침대, 낡은 가구들. 그는 난장판이 된 낯선 방을 돌아보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한편, 손끝부터 발끝까지가 뜨거웠다. 그는 엉망이 된 침대를 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자신의 옷가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러나.
“……기억이, 안 나.”
분명히 어제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어떤 장면이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정확히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선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독.’
그 순간, 희미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그는 지독한 독에 중독되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아키스는 몸을 일으켰다.
“……이건.”
침대 아래에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다. 아키스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 소년에게 준 물건…….’
그때, 번개 같은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키스는 황급히 자신의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그의 손목 안쪽에는 나팔 모양의 검은 꽃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담쟁이처럼 얽히고설킨 꽃문양은 동맥을 타고 팔뚝 중간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키스는 낮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제기랄.”
아키스는 펜던트를 내려놓고 손에 잡힌 것을 아무거나 던져 버렸다. 침대 옆에 놓여 있던 물병이 벽에 부딪치며 깨졌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키스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