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50 107. 양위 =========================================================================
“저를 평생 과로에 시달리게 하시더니, 좀 쉴까 하는데 또 귀찮게 하시는군요. 환갑 넘은 아직도 제가 돌봐드려야 해요?”
“남자는 나이 들면 다시 애가 된다고 하잖아. 역시 마누라 품이 최고야.”
이민호는 혜영과 함께 연말을 티완의 황실병원 입원실에서 보냈다. 손수 사과를 깎는 황태후 혜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운 이민호는 기분이 꽤 풀어져 있었다. 조강지처로 인정받은 혜영도 내심 기쁜 표정이었다.
이민호가 입원한 것은 가슴 아픈 장례식을 두 번이나 치른 외에도 그 동안 과학연구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주치의도 며칠 푹 쉬면 낫는다고 했고, 사실 이민호의 몸은 며칠 전에 이미 나았다.
“그런데 창밖이 왜 이리 시끄러워? 불빛도 자꾸 어른거리고.”
“종교인들이 폐하의 무사 쾌유를 비는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대요.”
“날 편하게 내버려두면 더 빨리 일어나겠다.”
“종교인들이 마음을 써줬으면 그저 고맙게 생각하세요.”
이민호는 종교 자체에는 반감이 들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통해 개인이 심신의 안정을 꾀하고, 성인의 가르침과 양심에 따라 불의와 부정에 저항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존경받을 만한 사제나 스님들도 역사상 꽤 많이 있었다. 또한 절대적인 존재에 크게 의존하는 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에 순응하는 경향이 커서 황실 입장에서도 유리했다.
그러나 종교 단체가 항상 문제였다. 종교 단체가 그 종교 신도들의 집단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래도 아직은 정상이겠거니 이해하겠지만, 종교 단체가 어느덧 개인의 소유가 돼버리면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종교 단체의 힘이 커지는 것을 항상 경계했고, 개인이 전권을 장악하는 체제보다는 가급적 평의회 체제를 권장했다. 그래서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에서 평신도회가 좀 더 강력히 조직돼 활발한 신앙공동체 생활 및 감사활동을 벌였다.
“아! 하세요.”
“아.”
아삭아삭 사과를 베어 먹고 있는데 마침 황제가 병실에 들어오더니 못 볼꼴을 봤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후가 과일바구니를 들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민호가 황제에게 한 소리했을 것이다.
“아직도 뒤숭숭한 것 같으냐?”
“연말연시 분위기에 어느 정도 덮인 것 같습니다.”
“흥!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던 자칭 애국자들이 연휴를 챙겨가면서 애국을 하는가보구나.”
연거푸 국상을 치르면서 백성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할 고위 관료나 언론에서 먼저 호들갑을 떠는 꼴을 보자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제국을 아바마마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백성들 사이에 아직 크게 남아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자그마치 50년 동안 나라를 이끌어 오셨으니까요. 아바마마께서 건강을 되찾으셨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민심이 금방 안정될 것입니다.”
“꼭 나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퇴위한 내가 병이 드는 바람에 제국에 위기가 왔다고 떠드는 놈들은 황제인 너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자들이다. 자칭 지배층 놈들이 호가호위로 권세를 누리면서도, 반대로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보일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위 관료 몇 명을 쳐내고 경영상태가 나쁜 신문사 몇 곳을 폐간시켰습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자기들은 무조건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남들에게 호통을 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민호를 도와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들 중에서 항상 최고 지휘관 자리에 있던 계복은 예외라 치고, 감동과 감불이 가장 이상적인 무관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군사작전에 참가한 둘은 계급이나 직책의 고하에 상관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한때는 감동이, 경우에 따라서는 감불이 지휘권을 쥐고 다른 한 명은 돕는 입장인데도 둘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른 지휘관과 공동 작전을 수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조선이나 중국, 동북아시아 기마민족들 대부분에 통용되는 일종의 관료 문화였다. 오랜 관직 생활에서 지위의 고하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기에 관료든 장수든 직책에 따른 책임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일종의 통과의례인 신참학례가 재산상 착취로 변질된 일이나, 원균처럼 후배 밑에 있다고 짜증을 내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예외 상황이었다.
“잘했다. 지위의 고하를 사람 신분의 고하로 착각하는 인간들은 고위 관료에 오를 자격도, 조직생활을 할 자격도 없다.”
“그런 면에서 천거제도를 운영하는 조선이 나은 점이 있습니다. 관찰사가 일개 유생을 절대 무시하지 못하니까요.”
조선의 문관들은 천거제도를 통해 일개 유생이 언제든 중앙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정승이라도 일개 산골의 선비에게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선 일도 흔했다.
그래서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 유생을 대할 때도 말투 하나까지 조심했다. 또한 고집불통인 시골 선비가 자꾸 편지를 보내 귀찮게 하더라도 일일이 답장을 써야 했다.
반대로 조선 무관들은 상명하복이 철저해야 하기에 상황이 전혀 달랐다. 자기 지휘권 아래에 있는 무관, 혹은 지방 수령 같은 문관으로서 무관직을 겸직한 자가 잘못을 저지를 경우 상대방의 이력을 따지지 않고 그냥 군법대로 처벌했다.
세월이 흘러 만약 상하가 뒤바뀌고 나서 자기가 잘못했을 경우 예전의 아랫사람에게 곤장을 맞으면 되는 것이다. 탄금대에서 도순변사 신립이 무과 9년 선배이며 함경도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기 상관이었던 순변사 이일을 참수 운운한다 해서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공무원 사회가 정체된 모양이구나. 내가 재위하는 동안에도 그런 낌새가 보였다.”
“예. 연공서열이 현실적으로 중시되면서 공무원 조직의 활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전문직에 한해 외부 인사를 등용할까 합니다.”
“관과 학이 순환하고 외부에서 수혈을 하는 것이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관료 조직에 항상 긍정적인 효과만 내는 것이 아니다.”
“예, 아바마마. 하지만 제국에서는 공무원들이 사직하더라도 금방 직업을 새로 얻을 수 있어서 쉽게 그만 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수한 인력이 빠져 나가는 대신 무능하고 조직문화에 순응하는 자들만 남기가 쉽습니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항상 문제가 생기고 개혁할 필요성이 있으므로 이민호는 황제가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다. 어느 조직에서든 오히려 유능한 자들이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이민호도 직장생활을 할 때 무능한 상사와 동료들이 능력은 없으면서 조직생활만 잘하는 모습을 보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직 구성원 탓을 하기보다는, 조직이 그렇게 변하도록 방치한 관리자 레벨의 잘못이기도 했다.
“이제 퇴원해도 되겠느냐?”
“어이쿠! 제가 언제 아바마마께 병원에 계셔달라고 요청했습니까?”
“말은 안했지만 이심전심 아니더냐?”
“어휴! 제가 불효잡니다, 아바마마.”
이민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음 사흘은 진짜로 끙끙 앓았으나 열흘 넘게 누워있을 중한 병은 절대 아니었다. 상황인 이민호가 와병 중일 때 불순한 움직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좀 더 누워있었으면 하는 황제의 의향을 읽었을 뿐이었다.
“돌아가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할 일을 반드시 마치고 가야겠다. 황제 입장에서 상황이란 존재 자체가 사실 몹시 껄끄러울 거다. 하지만 몇 년 만 더 지나면 사람들이 다 나를 잊을 게야.”
“국가의 개조(開祖)를 백성들이 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십시오.”
“실권 말이다. 권력에 민감한 자들이나 외국에서 나에게 실권이 남아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 들 테니까. 나는 그저 조용히 연구나 하고 살련다. 네가 주도해서 내가 만들었던 제도 몇 가지를 바꾼 다음에는 관료들이 제대로 줄서기를 할 게다.”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제도를 바꾸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데카르트 공작도 그 문제로 고민 중입니다.”
이민호는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줬지만 세상 사람들 중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상륙병력을 함대에 싣고 외국 원정을 나서던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백성들과 외국 군주들은 퇴위 후에도 이민호가 뭔가 비장의 카드를 쥐고 있는 줄로 오해했다. 그것이 현 황제의 위엄을 깎는 동시에, 권력 유지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민호는 조선 태조와 태종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 그리고 퇴위했다가 복위한 중국 황제들의 일을 떠올리며 전현직 황제 사이의 미묘한 권력 갈등을 걱정했었다. 그러나 퇴위하고 나서 보니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 권력은 쏠림 현상이 심해서 지금은 황제 석현이 제국의 군주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방금 이민호의 발언은 노파심에 말한 것뿐이었다.
“며칠 더 쉬다가 연초부터 과학도시로 가야겠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바마마의 연구는 제국과 전 인류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과학연구에 투입된 학자들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민호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황제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어느 연구의 성공 가능성과 종착역을 미리 알고 연구를 계속하거나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는 것은 제국의 학계에서 아주 큰 자산이었다. 일례로 이민호가 열역학 제1, 제2 법칙을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도전은 끊임이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영구기관이 불가능한 이유만은 확실히 제시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일이지. 그런데 중국 내전은 요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중원을 차지한 촉나라가 유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이 참전할 가능성만으로도 산해관과 천진에 수십 만 병력이 묶이니까요.”
“그거 뜻밖이로구나.”
이민호가 원한 바와 달리 중국의 세력 균형에 조선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이 산해관 공략에 실패한 이후 전략적 식견이 높은 조선 국왕이 발해만에 수군 판옥선을 수시로 보내 북경과 천진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북경을 중심으로 북중국을 차지한 촉나라는 제국이 지키는 요동을 통해 조선을 침공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수군 세력이 미약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칠 수도 없었다. 조선은 수륙 양쪽에서 마음껏 공격할 수 있는 반면 촉나라는 반격을 가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북경 방어를 위해 조선 수군을 몹시 중요하게 여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조선 수군이 무너지면 왜선들이 바로 천진에 들이닥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언제 올지 모를 왜선의 상륙에 대비해 해안지대에 50만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것보다는 몇 만 정도를 조선에 파병하는 편이 훨씬 싸게 먹혔다.”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것은 조선을 구원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우선 조선 땅을 지켜서 조선 수군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조선 수군이 사라져 왜선이 해안을 따라 북상해 천진이나 그 주변에 상륙하면 명나라는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제 때 남경 주변과 그 이남 해안지방이 소수의 왜구에 의해 초토화됐던 경험이 명나라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번 일로 남명과 북명이 조선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한 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 수군은 우리 제국을 빼면 동아시아에서 최강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남명이 조선을 계속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하겠지.”
“조선이 원정 과정에서 병력 피해가 커서 당분간은 수군만 움직일 것 같습니다.”
조선이 만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마음대로 부려먹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본격적으로 대치하면서부터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가치가 대폭 올라갔다. 조선 수군을 두 나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송나라와 요나라가 대치하던 시절에 고려의 가치가 올라간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남명이든 북명이든 우리한테 불만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느냐?”
“오히려 두 나라 다 우리 제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조선 수군보다 강한 제국의 해군을 동원하지 않은 일로 남명에서는 아쉬움을, 북명에서는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중립을 지킨다고 미워하지는 못하겠구나.”
“예, 아바마마. 일단 나라가 강하고 볼 일입니다.”
약했다면 조선처럼 양쪽으로부터 시달렸을 텐데 제국이 강하다는 인식이 중국인들에게 박히고 나서부터 두 나라에게서 존중을 받았다. 괜히 제국의 신경을 건드렸다가 자칫 반대쪽을 지원해주면 자기들만 손해였기 때문이다. 결국 금방 결판날 것 같던 명나라 내전이 묘하게 오래 끌었고, 당장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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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명나라는 이걸로 땡입니다. 3국 고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