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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48화 (997/1,000)

01049  107. 양위  =========================================================================

1639년 10월, 제국해군 제1원수 충무왕 이순신이 훙서(薨逝)했다. 향년 94세로, 모친의 수명보다 몇 년 짧았지만 별다른 병치레 없이 천수를 누린 편이었다. 실제 역사와 달리 정유재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면서 갑작스럽게 모친상을 치르지도 않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덕에 장수할 수 있었다.

과학도시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이민호가 놀라 허겁지겁 티완으로 날아왔다. 공군 참모총장, 원수 이면이 충무왕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아침에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제가 처음 발견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호상(好喪)이라 다행이야. 아무렴. 조선 백성들을 구하고 제국을 세우셨으니 호상을 당할 자격이 있으시지. 형님께서 혹시 유언을 남기셨나?”

“예, 폐하. 제국에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기셨습니다.”

“고맙네.”

이면이 충무왕의 유언장을 이민호에게 건넸다. 구구절절이 제국과 조선의 우호를 당부하는 내용을 읽은 이민호는 이순신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속으로 울컥했다.

조선을 구해주는 대가로 7년 동안 고산국에 봉사하기로 약속했던 이순신은 결국 고산국과 제국에 평생을 봉사하게 됐다. 그것으로 모자라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제국에 남기로 했다.

방송에서 특보가 보도되고 신문사에서는 길거리마다 호외를 뿌렸다. 몇 년 전에 미리 준비해놓은 충무왕의 일대기가 전국에 전파를 탔다.

제국 전체에 조기가 걸리고 수많은 나라에서 보낸 조전(弔電)이 빈소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태상황 이응화가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예복을 입은 해군과 해병대 예비역들이 급히 티완에 몰려왔다.

고 이순신의 명성은 고산국의 발전과 함께 하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드높았다. 세계 모든 해군이 그가 쓴 책을 해전과 해군 운영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영토가 바다에 접한 세계 모든 나라에서 조문사절을 보냈다.

“장례식장으로 황궁의 대전과 정원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폐하. 선친께서도 영광으로 여기실 겁니다.”

“이 정도밖에 못해드리는 것이 송구할 뿐이야. 이면 원수에게도 미안하네. 황제는 승인하려 했는데 장관들이 곤란하다고 해서 말이야.”

“선친께서도 제국의 신하이시며 군주와 신하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 선친께서 추증 황위를 받는 것은 제가 생각해도 어불성설입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수많은 백성들이 줄을 서서 황궁에 입장해 영정에 꽃 한 송이씩을 바쳤다. 신도들은 각자 그 종교의 방식으로 조문했다. 전국에서 조문객들이 쇄도해 티완으로 가는 항공기와 열차, 여객선을 다수 증편했다.

충무왕비 상주 방 씨는 장남 이회의 가족들과 함께 아산에서 살고 있다가 황실에서 보낸 특별기편으로 티완에 날아왔다. 상황 이민호와 황제, 태상황 이응화까지 공항에 나가 충무왕비를 직접 맞이했다.

“남아로 태어나 장수가 되어 외적을 물리치고 제국의 왕작까지 받으셨으니 일생에 아쉬움이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감사를 표합니다, 상황폐하.”

“예, 형수님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민호가 그 나이에 아직도 정정한 충무왕비에게 허리를 숙였다. 태상황 이응화는 평생 충무왕을 모신 아랫사람으로서 더욱 조심스러워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무왕비는 여자임에도 배포가 크고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인세의 호걸이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 충무공이 오랜 세월 외직을 전전하는 동안 가계는 방 씨 부인이 집안 식구들과 노비들을 이끌고 꾸려갔다는 이야기가 류성룡의 <서애집>에 나온다. 최소한 명궁 방진의 외동딸이었으며 평생 무관이었던 이순신의 부인이었다.

제도 티완의 맑은 하늘 아래 60여 국가에서 보낸 조문사절과 백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식이 엄수됐다. 고(故) 이순신의 생전 직책과 작위, 추증된 작위로 이루어진 묘호는 다음과 같았다.

<충무대왕 제국해군 제1 원수 합동참모본부 의장 겸 국방대학원 원장, 오스만제국 알리 파샤 지중해 해군 제독 겸 이집트 총독, 신성로마제국 북해 및 발트해 해군 최고 장군, 아프리카 제국 남아프리카 대공 겸 해군 상원수, 에티오피아 제국 해군 원수, 유명(有明) 복건왕 겸 해남공 흠차제독남북수륙관병 수군도독부 좌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에스파냐 팔마 데 마요르카 공작, 포르투갈 국왕 해사(海事) 고문, 프랑스 툴롱 공작, 루스 차르국 무르만스크 대공, 에이레 공화국 트라모레 백작,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 대원수, 덴마크 왕국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공작, 브루나이 술탄국 세리아 왕자, 아체 술탄국 해군 대원수, 오만 이맘국 해군 최고 제독.> 기타 자바 섬 여러 도시국가들로부터 갖가지 명예직과 칭호를 받았다.

충무대왕은 생전의 충무왕에서 추증으로 승작된 군호(君號)였다. 이순신이 직접 참전해 세계 여러 나라의 군주들로부터 감사의 의미로 받은 작위가 절반, 제국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려고 외국에서 명예직으로 봉작한 작위가 절반이었다. 그런데 작위 대부분은 수여한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데 그치고 본인 사망 이후 그 국가에 회수되므로 별로 상관없는데, 그 중에서 몇 개는 알고 보니 황당하게도 세습 작위였다.

“명나라의 복건왕과 해남공, 프랑스 툴롱 공작, 루스 차르국 무르만스크 대공, 에이레 공화국 트라모레 백작, 덴마크 왕국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공작은 세습직이오. 봉작을 받은 자가 그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으나 그 지역의 세입 일부나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 작위라오. 아마도 충무대왕께서는 이들 작위를 실직이 아닌 영직으로 오해하시고, 이들 작위에 대한 상속문제를 유언장에서 언급하지 않으신 것 같소.”

“제가 장남이라서 선산을 지키기 위해 조선에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국과 관련된 선친의 모든 작위는 제국에서 봉사 중인 막내 면에게 상속해주시옵소서, 상황폐하.”

이순신의 장남 이회가 사양하며 이면에게 작위 계승권을 넘겼다. 차남 이열과 충무왕비 상주 방 씨도 마찬가지 의견이었다.

명나라의 작위는 세습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후계자가 무조건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세습할 권리를 따로 수여받았다. 일례로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은 대대로 지휘첨사 지위를 세습하던 무관 가문 출신인데, 영원백 작위를 받고 나서 그 다음 해에 그 작위의 세습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후계자도 선친 사후 즉시 작위를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조건을 충족하고 나서야 세습이 가능했다.

“원수의 생각은 어떤가? 작위를 세습하겠는가, 아니면 작위를 내려준 나라들에게 회수하라고 통보할까?”

“여러 나라에서 선친의 작위를 세습직으로 봉작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니, 그들의 선의를 사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들과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받아서 후대에 계속 물려주겠습니다.”

이민호가 의견을 묻자 이면이 차분히 대답했다.

“원수가 잘 생각했네.”

“선친께서는 평생 여러 작위를 통해 수령한 연금을 제국 해군사관학교와 국방대학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셨습니다. 일부는 조선의 각 수영과 진포마다 쌀을 기탁해서 수군 병졸들이 입번할 때 자비로 쌀을 이고지고 오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맙소사! 나는 전혀 몰랐네. 선대인께서는 진정 청렴하시면서 자애로운 분이셨네.”

임진왜란을 지나고부터 조선 수군에 방군수포와 대립(代立)이 일상화됐으나 이순신이 각 수영과 진포에 쌀을 보낸 이후 이에 필요한 비용이 확 줄어들었다. 군역이란 몸이 고달픈 외에 경제적 부담이 큰 문제였는데 최근에는 수군 정병들이 육체적, 경제적으로 아주 편하게 됐다.

그러나 이순신의 자선이 모든 이들에게 칭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충무왕비 방 씨 부인이 나섰다.

“흥! 본가에는 쌀 한 톨 안 보내시더니 역시 군졸들을 먼저 생각하셨군요.”

“저런요! 형수님. 혹시 가세가 기울어지셨습니까?”

실제 역사에서 상주 방 씨는 임진왜란 전인 1589년에 이미 분재기(分財記)를 작성했다. 분재기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특정해서 기록한 유산분배 유언장이 아니라 생존 중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면서, 즉 사전 상속을 하면서 기록한 문서였다. 재산을 이미 나눠줬다 해서 상주 방 씨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이민호가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전혀요. 폐하께서 철마다 금은보화를 보내주신 덕에 제가 다시 만석꾼에 올랐답니다. 거기다 제국에서 매 분기마다 제 봉록을 넘치도록 보내주셔서 제 이름으로 충청감영에 돈을 보내 무과응시자들을 후원하도록 하고 나머지 돈은 아산과 온양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역시 부창부수로군요. 존경합니다, 형수님.”

이민호는 방 씨 부인이 남편 이순신이나 아들들 명의로 자선을 베풀지 않고 직접 이름을 내세운 사실에 주목했다. 과연 지혜로운 부인이었다.

조선에서 광범위한 지역에 자선을 베풀 경우 자칫 역모 혐의가 씌워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조선에서 했던 호구 짓을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이민호는 조선 왕실과 조정을 무너뜨리는 대신 새로운 땅에서 나라를 세웠으나, 조선에서 베푼 딱 그만큼 이주민들을 쉽게 고산국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 대신 나이 많은 여자인 방 씨 부인이 직접 자선에 나서면서 조선 조정에서도 그런 의혹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었다. 손도 크고 지역적 영향력도 커서 충청도 관찰사나 아산 현감이 부임하면 가장 먼저 찾아 인사를 올리는 사람이 방 씨 부인이었다. 또한 이웃나라 제국의 왕비와 왕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이유로 조선에서 이순신 본가의 경비를 철통 같이 해주었다.

“폐하! 입관은 언제입니까? 군호를 받으셨으니 아무래도 내년 초가 되겠죠?”

“형수님. 3, 5, 7은 맞는데 조선과 달리 제국에서는 달이 아니라 날을 기준으로 합니다. 형님의 장례는 7일장으로 결정됐습니다. 오늘 바로 입관을 하실 예정입니다.”

“폐하! 제가 늦게 와서 아직 곡도 못했는데 입관을 하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당당한 여걸이라 해도 방 씨 부인도 여자였고 한 남편의 아내였다. 방 씨 부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장례 절차를 한 시간씩 미뤘다. 서럽게 우는 충무왕비의 곡이 끝나고 나서 관을 앞세워 현무대로를 행진했다. 상황 이민호와 황제, 태상황 이응화가 상여를 모신 차를 뒤따라 걸었고, 가로등에 걸린 확성기마다 모차르트 레퀴엠, 라크리모사가 흘러나왔다.

백만 조문객이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고 일부는 길바닥에 꿇어 앉아 곡을 했다. 흰 예복을 차려 입고 현무대로 양쪽에 늘어선 해군과 해병대 현역 및 예비역들이 거수경례를 한 채로 눈물을 흘렸다.

입관은 오후 늦게 이루어졌다. 묘지는 천도 이후에 조성한 새 국립묘지 충무대왕 묘역에 동상과 생전 업적을 기록한 비와 함께 이미 마련돼 있었다.

“사또! 할 일을 다 마쳐서 이제 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니 어찌 이리 갑자기 가셨소? 날 데려가시오, 사또!”

커다란 석관이 땅 밑으로 내려가는 동안 태상황 이응화가 가장 슬프게 곡을 했다. 두 번 살게 된 이응화는 상왕에 이어 태상황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일부러 해안경비대장 자리를 지키면서 이순신을 끝까지 상관으로 모셨다. 태상황 이응화는 이순신의 장례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에 해안경비대장 직책의 사표를 써서 황제에게 보냈다고 한다.

충무왕비 방 씨 부인을 비롯해 유족들이 한 삽씩 석관 위로 흙을 부었다. 이면 공군 원수가 삽을 건네자 이응화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귀퉁이에 살짝 흙을 뿌렸다. 그리고 주저앉아 다시 곡을 했다.

사또라는 단어는 부사, 목사, 감사 등 주요 지방관아의 으뜸 벼슬인 사(使)자가 들어간 관명에 대한 호칭이다. 춘향전에서 남원부사를 고을 아전이나 백성들, 혹은 춘향이가 사또라고 부르는 것은 정상이나, 군수, 현령, 현감을 사또라 부르면 아부를 위한 호칭 인플레이션에 불과했다.

그리고 사또는 전투 현장에 집결한 여러 장수들 중에서 최고 군사 지휘관 단 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기도 했다. 그래서 명량해전에 삼도수군통제사와 전라우수사, 순천부사 등이 참전했고 이들이 따로 행동했을 때는 각자가 사또라 불릴 수 있었으나, 해남과 진도의 산언덕에서 백성들이 목 놓아 부른 사또는 오직 통제사 한 사람뿐이었다.

“사또~”

태상황 이응화의 흐느낌이 하늘 가득 메아리쳤다. 그리고 이순신을 따라 제국에 자리 잡은 서자 세 명이 더욱 구슬피 울었다.

충무대왕의 장례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그러나 장례식 기간 내내 오열하던 태상황 이응화가 결국 드러눕더니, 병세가 갑자기 극도로 악화됐다. 이민호가 혜영과 혜진, 황제 부처와 함께 매일 같이 부친의 병실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

“아바마마! 힘을 내십시오. 이렇게 누워계시면 충무대왕께서 몹시 실망하실 겁니다.”

“아니다. 이제 됐다.”

“아버지?”

“억지로 날 붙잡을 필요 없다. 그 동안 고마웠다.”

“어인 말씀이십니까? 힘을 내세요!”

“네 덕택에 몹시 재미있고 보람찬 인생을 보냈다. 자식을 많이 낳아줘서 정말 고맙다. 아직도 결혼하지 못한 손주들이 안타깝지만 다들 알아서 하겠지. 마지막으로 손 한 번 잡아보자, 내 아들아.”

“아버지!”

충무대왕의 국장을 마치고 한 달 만에 다시 태상황의 국장을 치르게 됐다. 친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시아버지 이응화가 죽자 혜영과 혜진이 몹시 슬퍼했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해온 분들과 헤어진 충격을 받은 이민호가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불행이 연속된 제국 전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 작품 후기 ============================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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