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8 107. 양위 =========================================================================
1639년 2월, 조선군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사수와 살수, 포수 각 2만으로 삼수병 체제가 갖춰진 조선군은 기병 1만에 운량병(運糧兵) 3만까지 더해서 육군만 물경 10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올 봄부터 조선 농민들이 경작할 요동 남해안 평야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했다.
경기 충청 황해 삼도통어사가 지휘하는 수군은 해안선을 따라 서진하며 육군과 보조를 맞췄다. 촉나라의 수군 세력이 미미하므로 조선 수군은 해전보다는 보급 임무를 주로 맡았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수군이 담당한 역할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다만 조선 수군이 적의 방어선 뒤쪽에 상륙해서 후방을 휘저어줄 상륙작전 능력은 없었다.
명나라 내전이 이렇게 국제전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이민호는 황제와 함께 합동참모본부에서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외국군이 우리 영토를 통과하는 꼴을 보게 되다니. 중립을 지킨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조선군이 통과 요청을 했다고 촉나라에 통보했느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촉나라에서도 어민으로 위장한 간세들을 통해 조선군 출병 소식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중국 어선들이 한반도 가까운 해역에 들어와 고기잡이를 한 역사는 오래 되었다. 중국 어부들은 오랫동안 불법 어획뿐만 아니라 황해도 바닷가 고을 사람들을 상대로 밀무역을 함으로써 조선 조정에 부담을 주었다.
이 시대 중국의 어업 기술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16세기 이전에 중국 근해에서 해삼과 전복을 아예 멸종시킨 집요한 사람들이었다. 21세기에 어느 방송에서 중국 어민들이, 한국 바다에 고기가 많은데 좀 잡으면 어떠냐는 식으로 인터뷰했었다.
“조선군이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작전참모본부장이 예상한 바로는 조선군이 초반에 승기를 잡다가 산해관에서 공격이 돈좌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합동참모본부에서 조선군의 전투능력을 높이 사는 것은 고산국 시절부터 기병부대에서 근무한 조선 무과합격자들과 군관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무예 실력도 출중했고 조선의 진법뿐만 아니라 근대를 넘어 현대에 가까운 제국의 전법을 익혀서 어딜 가더라도 무참히 패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예전과 다른 조선의 지휘체계에 있었다. 공주 지은과의 대화를 통해 국가전략과 전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조선 국왕은 원정군을 최정예로 구성하고 출병 전에 제대로 된 훈련까지 시켰다.
원정군 지휘관도 문관 출신 도원수가 아니라 무관인 현직 평안도 병마절도사에게 맡겼다. 문관은 그 위에 명목상 감군으로서 지휘부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 이후에 물러날 때가 문제지. 조선군이 곱게 퇴각하도록 촉나라가 내버려두겠느냐? 지은이가 이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더라.”
공주 지은은 물론 조선 국왕도 원정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료들은 물론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원정을 추진하게 됐다. 군역과 세금을 회피하는 양반들이 전쟁을 주장하는 작태에 이민호가 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가 조선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제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민호도 결국 조선 출신이라 아무래도 조선을 편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민호는 한국 출신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민호가 조선 상민들에 대한 애정은 있어도 양반들을 좋게 볼 수는 없었다.
“통어영이 통제영보다는 비록 약하다 하나 그래도 판옥선에 화포를 갖추고 있습니다. 수군이 육군의 퇴각을 엄호하기로 했으니 촉나라가 함부로 추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길이 해안으로만 연결된 게 아니라서 말이다.”
조선군의 전력이 예전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지만 기본적인 병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황은 합동참모본부에서 예측한 대로 흘러갔다.
조선군은 요동반도 끄트머리 다이렌을 점령하고, 잉커우에서 구원군으로 달려온 촉나라 병력을 격파해 서전을 멋지게 장식했다. 요동에 널린 강과 하천은 수군의 도움을 받아 의외로 쉽게 극복했다. 그리고 북경을 향해 꾸준히 전진했다.
이와 동시에 남명에서도 대군을 출정시켰다. 양면 공격을 처음으로 당해봐서 당황한 촉나라가 병력배치 문제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남명의 관군이 전선을 150km나 밀고 올라갔다. 이것이 명나라에서 기대한 협공의 효과였다.
“그 동안 연구 성과는 많이 얻으셨습니까?”
“물론이다. 대학의 수학과 물리학, 생물학 교재를 많이 바꿔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하 과학 교과서는 당분간 고치지 말고 내버려둬라.”
과학 연구의 성과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 성과가 새로운 상품이 되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영기업을 통해 방향제와 세정제, 살충 분무기 등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상품들이 연달아 출시됐다.
그리고 예전에 발명했던 X선 발생기에 이어 초기 단계의 자기공명영상 장치, 즉 MRI 장치를 개발했다. 실제 역사에서 1946년에 이론이 확립된 다음부터 MRI 장비의 발전은 컴퓨터의 발전과 궤를 함께 했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MRI 전 단계 장비라고 할 수 있을 컴퓨터 단층촬영, CT는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 영상 합성을 하기에는 컴퓨터 성능이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공관을 넘어 반도체를 사용한 작고 고성능의 전자계산기가 제국의 과학연구소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기초 과학이 발전할수록 전자계산기의 성능 개선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매번 지적된 문제긴 한데 화학 분야의 인력 수급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화학을 국내에 공개하기는 어렵겠지요?”
“외국에서 우리 제국의 학문이라면 환장하고 베껴가니까 국내에도 공개하기 어렵지. 화학은 제국과 다른 나라들을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유럽과 아랍의 화학자들은 앞으로 최소한 200년은 더 헤매야 할 것이다.”
유럽과 아랍 지역에서는 아직도 원소 변환설이 대세를 점했다. 싸구려 납을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연금술사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귀족들이 지금도 막대한 연구비를 바치고 있었다.
“아바마마! 새로운 과학적 업적을 이룬 연구자들에게 상을 내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연구에 도전하는데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과학의 길에 들어서게 만드는 데도 일조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이름을 짓기 어려울 테니 제국과학상이라고 해라.”
“와! 아바마마께서 이렇게 직관적인 작명을 하신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나야 항상 직관적인 이름을 붙였지.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큰 업적을 세운 사람들에게도 상을 주는 게 어떻겠느냐?”
이민호가 작명한 이름이 직관적이긴 한데, 항상 촌스러워서 문제였다. 어쨌든 현대의 노벨상에 해당할 시상 제도를 갖추기로 했다. 수상자 선정위원회는 그 분야 전문가와 일반인 절반씩으로 구성하도록 결정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그리고 평화상을 제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제학상은 나중에 추가됐다.
이민호는 여기에 더해 수학상, 천문학상, 음악상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황제는 미술상과 산악가상, 운동가상을 제안했으나 일반적인 학문이나 예술이어야 한다는 이민호의 반대로 미술상만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열 개 분야에 나눠서 상을 주기로 했다.
황제가 또 응용과학상을 제안했지만 이미 제국에서 포상하는 공학상과 발명상이 따로 있어서 제국과학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분야를 추가해야 한다면 그때 결정하기로 했다.
“수상 자격에 제한이 없어야겠습니다.”
“물론이다. 외국인도 수상이 가능해야 상의 권위가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수상자 자격에서 군주는 빼는 게 어떻겠느냐?”
“예? 아바마마께 맨 먼저 드리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군주나 국가원수는 아예 후보에도 올리지 못한다는 규정을 만들자.”
평화상은 전쟁을 끝내면서 평화협정을 직접 체결한 양쪽 당사자 군주나 이를 중재한 군주가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 중에서 다수가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또한 20세기 후반부터 미국 대통령 같은 유명 정치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은 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래도 조금 아쉽습니다.”
“너와 나는 이미 황제를 해봤지 않느냐? 상을 받는 사람보다 상을 주는 사람이 더 높은 법이다.”
“그렇긴 합니다.”
이민호가 황제에게 ‘상 조반니?’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 만화를 본 지 80년이 넘었지만 닭살 돋는 어색한 개그는 기억에 아주 오래 남는 법이었다.
“재미를 위해 얼토당토않은 연구를 하거나 과학 발전에 역행하는 사람에게도 상을 주는 게 어떻겠느냐?”
“수상자를 웃음거리로 만들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것도 꽤 재미가 있겠습니다. 적당한 연구소나 언론사를 시상자로 고르겠습니다.”
이민호는 다윈상과 이그노벨상을 떠올려 그렇게 제안했다. 다윈상은 어이없고 한심하게 죽거나 생식 능력을 잃은 사람에게 인류 진화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주는 상이었다.
제국과학상은 매년 12월 초에 수상자를 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상 이름이 고민호상으로 바뀐 것을 황제가 수상자들을 발표하는 순간에야 알았다. 나중에 이민호가 나무랐지만 황제는 이미 수상자들에게 상을 줬으니 상 이름을 다시 바꿀 수 없다고 버텼다.
과학자들을 독려해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 조선 여의도의 설계 방향을 고민했다. 토목은 이민호가 맡고 건축은 황제가 맡는 식으로 여의도를 전면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홍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섬 주변에 둑을 쌓아야 했고, 유사시 방어문제도 충분히 고려했다. 그래서 여의도 샛강을 해자처럼 깊이 파고 섬 둘레에 높은 제방을 쌓을 계획을 세웠다. 제방이 완공될 즈음에는 한강 상류의 돌산 몇 개가 사라질 것이다. 참고로 현대 여의도의 윤중제는 밤섬을 폭파해서 얻은 골재로 110일 만에 완공됐다.
20세기 중후반 여의도 공항에는 섬의 폭에 해당하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활주로가 건설돼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섬의 길이에 맞춰 2km가 넘는 긴 활주로를 만들기로 했다. 제트 여객기가 착륙하려면 활주로 길이가 최소 1.5km는 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착륙하는 비행기가 한성 상공을 지나치면서 주민들이 소음공해에 시달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민호가 아주 살짝 고민했다.
상수도와 하수도, 전력선과 통신선은 모두 지하에 묻었다. 섬의 상류에서 취수를 하고 하류에서 정화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여의도 북서쪽 끝, 현대 한국의 국회의사당 자리에 땅을 파서 정화시설을 건설했다. 이민호가 한국 국회의원들을 미워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건축전문가이기도 한 현 황제는 철골철근콘크리트조로 시공해 초고층 건물을 건설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요나라 탑, 요대고탑(遼代古塔)들 중에서 조양 북탑은 높이가 70미터를 상회하므로 그 세 배 높이의 초고층건물을 건설하겠다고 이민호에게 알려왔다. 현대 마천루의 기준이 50층, 200미터라서 이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았다. 여의도에 지을 건물이 반드시 63층일 필요는 없었다.
6월, 북경으로 향하는 길에 산재한 여러 성을 함락한 조선군이 드디어 산해관 바깥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군이 촉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 관군이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봤었고 사르후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사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달라졌다. 이민호는 그 원인을 기병부대에 교대 근무한 조선 무관들보다는 공주 지은에게 두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관군이 제남 북쪽 전투에서 패해 남쪽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선군의 사기가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즉각 후퇴하라는 조선 국왕의 어명이 그 직후에 당도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이때부터 조선군이 촉나라군의 거센 추격을 받으며 퇴각하기 시작했다. 후퇴 과정이 다 그렇듯이 인명피해와 피로가 누적되면서 원정군 전체가 와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퇴각로 상공에 정찰기를 띄우는 게 어떻겠느냐? 저번처럼 촉나라 군대가 와해될지도 모른다.”
“이미 몇 번이나 실행했습니다만, 촉군이 잠깐 흩어지다가 말았습니다. 저번과 달리 우리 제국이 촉나라를 선제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입니다.”
“촉나라라면 반란군에 불과한데 왜 우리가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립을 철회하고 참전하면 어떻겠느냐?”
“진정하십시오, 아바마마. 길게 봐서 지금 명나라 내전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이민호가 황제에게 누누이 가르쳐준 바 있었다. 참전할 권리도 없고 이기더라도 얻을 국익이 없는 전쟁에 제국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이민호가 조선에 대해 동시에 상반된 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조선은 제국의 우방국도 아닌 그저 여러 외국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다만 매우 특별한 외국이라서 문제였다.
“폐하! 정찰기에서 급전입니다. 진저우 남쪽 소능하 하구에 조선 수군이 좌초 위험을 감수하고 진입했습니다. 통어영 수군이 촉군에게 화포를 쏘아 큰 피해를 입혀 격퇴했다고 합니다.”
“오! 다행이야.”
정보참모본부장이 보고한 내용에 이민호와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진왜란처럼 이번에도 수군이 숱한 생령들을 살렸다.
“아무리 명나라에서 강요했더라도 겨우 10만으로 북경을 치러 간 것은 만용이었습니다.”
“답답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건국 후 3대까지는 조선을 돌봐주도록 해라.”
“휴우~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바마마.”
17세기에 북미 식민지에 정착한 초기 이주민들은 대부분 잉글랜드 출신이었다. 시간이 100년이나 흘러 북미에 뿌리를 내렸으면 선조들의 고향을 잊을 만도 한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18세기 후반의 미국 독립전쟁 때 식민지 독립군이 아니라, 영국 정규군에 입대한 식민지인과 국왕파 민병대로 참전한 사람들이 각각 수만 명씩에 달했다.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자 7만 명이 고향을 떠나 영국과 캐나다로 이주하기도 했다.
제국이 조선을 여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겉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더라도 조선에 큰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히 다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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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