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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44화 (993/1,000)

01045  107. 양위  =========================================================================

새 황제가 즉위한 날부터 제도 티완에서 일주일 동안 광란의 축제가 이어졌다. 티완에 몰려든 축하객 수백만 명이 광장에 남아 밤새 춤추고 노래를 불렀고, 일부는 떼를 지어 시가 곳곳을 행진하기도 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무제한 제공된 덕에 약탈과 방화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술 먹고 싸우는 인간들은 즉시 경찰에 체포돼서 인근 사막에 버려졌다. 교통편을 이용하는 곳까지 가려면 한나절을 걸어야 해서 피부가 새까맣게 탔다.

새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외국 군주, 외교관들이 상황으로 물러난 이민호를 만나러 다음 날부터 해중국 왕궁을 줄줄이 방문했다. 이들 대부분은 그 동안 자기 나라를 잘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나는 퇴위해서 끈 떨어진 연 신세인데 뭐하려고 오셨소?”

“인사를 안 드렸다가 자칫 상황폐하께서 꽁해서 황제께 나쁜 말을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하! 추기경은 참으로 솔직하시오.”

프랑스 수석국무대신 리슐리외 추기경과 느긋하게 환담을 나눴다. 햇빛 드는 창가의 그늘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자니 은근히 졸음이 쏟아졌다. 예전에 이민호는 리슐리외 같은 외교 능력이 뛰어난 거물을 만났을 때는 바짝 긴장했으나, 실권이 없는 지금은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그 동안 남프랑스의 와인을 제국에 다섯 배가 넘는 가격에 팔았습니다. 폭리를 취해 죄송합니다. 유럽에서 전쟁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니 올해부터는 가격을 대폭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지 가격 확인은 무역의 기본이니 당연히 알고 있었소. 프랑스가 독일 내전에 개입하고 에스파냐를 견제하려면 군사력 증강이 필요했겠지요.”

프랑스에서 와인을 참나무 통 단위로 수입해서 유리병에 넣어 국내에서 판매했다. 유리병 생산과 와인 밀봉에 드는 비용이 유럽에 비해 훨씬 적었으므로 제국 내에서 판매되는 가격이 병 가격으로는 비싸지 않았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직접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폐하께서 시장을 조종해 국제적 세력 균형을 맞추신다는 소문이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그것도 있고, 프랑스와 무역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몇몇 품목은 시장가보다 비싸게 사야 했소. 국내 시장을 보호하려다 보니 싸게 더 많이 살 수가 없었소. 그리고 와인 수출가 차액을 프랑스 정부가 중간에서 다 가로챈 게 아니라 포도 재배 농민과 양조업자들에게 이익 일부를 나눠줬다고 들어서 별로 아깝지 않소.”

제국에서 옷과 생활용품을 비롯한 상품을 유럽 국가들에게 싸게 공급해주었다. 제국의 과학기술과 상품의 질이 워낙 높아서, 이민호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무역 역조가 만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대금 지급으로 인한 귀금속의 국외 유출을 걱정해야 했으나, 이민호가 무역수지 균형을 억지로나마 맞춰줘서 무역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만성적으로 금이 부족했던 고산국이 만약 무작정 무역 흑자를 노렸다면 무역을 계속할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금과 은이 계속 유출되면 국내 시장이 마비될 테고, 굶어죽을 위기에 몰리지 않더라도 삶의 질이 크게 저하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옷을 싸게 팔아주셔서 고마웠습니다. 프랑스가 마냥 온화한 지역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겨울에는 매서운 미스트랄이 불어와서 몹시 춥습니다.”

“알고 있소. 오죽하면 미사일에 미스트랄이라는 이름을 붙이겠소?”

“예, 폐하?”

“아니오. 양털 외투와 오리털을 넣은 외투가 프랑스에서 인기가 좋다고 들었소.”

유럽인들은 가난하더라도 살아서 겨울을 나기 위해 모피코트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킹 시대의 겨울에 덴마크 왕들이 강아지 몇 마리와 함께 침대에서 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난방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대에는 모피 품질과 관리방법이 뒤떨어져서 몇 년 입지도 못하는데 모피코트 가격은 무지무지 비쌌다. 실제 역사에서 러시아가 제국으로 발전하고 북미 동해안이 짧은 시간에 개척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와중에 고산국에서 모직물이 아닌 양털 외투와 오리털 파카를 싸게 수출해서 이것들이 프랑스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량 생산으로 가격도 싸서 유럽인들이 고산국 주화 1원 안팎에 구입할 수 있었다. 현대 한국의 인터넷 의류업체들이 판매하는 저가 의류 브랜드와 비슷한 가격이었다. 사치품은 아주 비싸게, 생필품은 싸게 거래하는 것이 제국의 무역 방침이었다.

“프랑스가 폐하 덕택에 제국에 채무를 지지 않았고, 네덜란드와 스웨덴에 자금 지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제국으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프랑스가 오히려 폐하로부터 가장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좋지만, 남들에게 떠들거나 문서 기록으로 남기지는 말아주시오. 에스파냐는 우리 제국에 중요한 동맹이니 말이오.”

딱히 프랑스를 더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한 국가전략의 일환이었다. 20세기 중후반에 소련과 공산 중국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 상륙할까 두려운 미국이 북태평양 서부에 대공산권 방파제를 만들기 위해 일본과 한국에 무역상의 특혜를 줘서 발전시킨 것과 비슷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반합스부르크 연합의 기치를 올려 신교도 국가들을 지원한 덕택에 에스파냐의 국고가 말랐고, 고산국 시절에 남미 대륙을 매입할 수 있게 됐다. 고산국이 프랑스를 지원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나, 에스파냐에서 항의할 수 있으므로 직접적인 자금 지원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무역으로 국제관계를 조정하는 고차원적인 방법을 배웠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국내 모직산업을 보호하려고 양모 수출을 금지한 탓에 국제 분쟁만 일으켰는데 말입니다.”

“아국에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그런 선택이 가능했소. 참! 프랑스에서도 화상방송이 잘 나오고 있소?”

“예, 폐하. 파리 주재 제국 대사관에서 전력과 통신선을 연결해줘서 제국의 국제 방송과 국영 주파수 1 방송을 매일 한두 시간씩 보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소식이 영상과 함께 즉시 전달되다니,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국제 방송은 라틴어와 제국 기준어를 번갈아서, 주파수 1은 제국 기준어로 방송하고 있었다. 조선어에서 비롯된 제국 기준어가 현재 유럽에서 라틴어를 슬슬 밀어내고 가교언어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방송 채널이 소수에 불과한 시절에는 전파의 월경(越境)만으로도 문화 제국주의의 폐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을 제외한 국가에서 화상방송은 물론 단순한 전파 송출도 못하는 시대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TV, 즉 화상방송 수신기는 프랑스 왕궁에 하나, 재상인 리슐리외의 집무실에 하나가 있었다. 제국의 대사관이 개설된 국가 수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주고 따로 수상기를 사더라도 전기를 구할 수 없어 방송을 볼 방법이 없었다.

휴일에 수상기를 대사관 밖에 전시할 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구경했다. 이는 수많은 국가로 나뉜 세계 인간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었고, 자연스럽게 제국이 초강대국으로서 지위를 누리는 기반을 제공했다. 제국과 강제로 비교당하는 일부 국가의 군주들은 참담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번에 추기경이 새 황제와 이민협정을 개정했다고 들었는데, 연간 3만 명이면 적정한 수준인 것 같소.”

“예, 폐하. 제국으로의 이민을 완전 개방했다가는 프랑스에 남아있을 사람이 없을 것 같고, 이민을 막으려면 국경과 해안선을 봉쇄해야 하는데 그건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제국으로 이민하는 자에게 영주와 국가가 일정 금액을 받거나, 재산을 고향에 남겨두고 가도록 강제하는 식으로 이익을 챙기는 나라도 많았다. 이런 식으로 외국 이민이 그 국가에 손해만 끼치는 것은 아니라서 협상을 통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리고 제국도 인구가 이미 1억을 넘었기 때문에 이민자를 무조건 환영할 단계는 지났다.

“프랑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오. 노르웨이는 이미 인구 절반이 북미로 이주했다오. 먼 친척이 사는 아이슬란드나 셰틀랜드 제도를 징검다리 삼아 북미로 건너간다면 덴마크 국왕 입장에서도 막을 방법이 없소.”

“아! 상황폐하께서 오전에 덴마크 국왕과 환담을 나누셨지요.”

결국 제국으로의 이민이 유럽의 국가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국가별 쿼터제를 실시하게 됐다. 전쟁의 상흔이 깊었던 독일에서는 많은 숫자가 북미로 이주하려 했고, 인구밀도가 낮은 에스파냐에서는 결사적으로 이민을 막았다. 그래서 국가마다 협정을 체결해 연간 허가된 이민자 숫자가 천차만별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인구압에 시달리고 있어서 오히려 제국에 쿼터 확대를 요청하는 쪽이었다. 사촌 결혼이나 미성년자 결혼 등 제국의 법률과 충돌하는 중동의 이슬람권은 이민 자격이 꽤 제한적이었다.

“흠! 추기경이 들고 있는 그 책은...... 새 황제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들었소?”

“예, 폐하. 고맙게도 중앙집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의 장단점과 준비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을 분석한 책을 하사해주셨습니다. 프랑스와 프랑스 왕실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새로이 시도하는 도전이니 프랑스가 먼저 잘해보시오. 다만 왕실이나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한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역시 저자는 상황폐하셨군요.”

“험! 험! 책 표지에 인쇄됐듯이 2대 황제가 대표 저자요.”

프랑스는 갖가지 봉건제적 요소들을 털어내고 중앙집권 제도로 국가를 개편하는 중이었다. 프랑스의 중앙집권제가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추진한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왕권 강화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지방과 사회 전반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도 프랑스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국왕파보다 의회파가 우세하다 해도 귀족들이 지방분권주의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상속받은 영지의 힘을 넘어 중앙정부에서 차지한 직책이 권력의 근본이 된다.

군주제든 공화국이든 의회 주권이든 가리지 않고 유럽에서 모든 정치체제가 중앙집권을 지향하는 시대가 서서히 오고 있었다. 여기에 계몽주의가 널리 확산돼 천부 인권이 강조된다면 중앙집권제의 정점에 올랐던,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낡은 사상에 머물러 헛소리 빽빽 하는 군주의 목 따위는 언제든 뎅겅뎅겅 자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국은 유럽의 중앙집권제 지향과 전혀 다른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국이 동양에서 시작된 나라라서 중앙집권제가 오히려 익숙했다. 제국은 유럽과 반대로 지방자치제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물론 직위를 악용해 이득을 취하려거나 새로운 특권 계급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의원들을 꾸준히 제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폐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바쁠 텐데, 들르지 않는 게 좋겠소.”

“섭섭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만나면 따뜻한 차나 한 잔 주십시오.”

“아니, 내가 바쁠 거라는 말이오. 제도나 이곳 왕궁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소.”

“휴우~ 제국의 과학기술이 몇 단계 더 오르겠습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잔뜩 부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나머지 군주들, 외교관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1월 중순에 바위 산맥 기슭으로 떠났다.

과학도시가 건설되는 중에 이민호가 가장 신경을 쓴 곳은 대학원 과정과 연구 중심의 대학교였다. 이 도시의 시청은 과학연구를 위한 지원 관청에 불과하고 과학도시의 핵심은 국립대학교였기 때문이다. 현재 20여 개, 앞으로 50여 개로 늘어날 연구소도 대부분 대학교 소속이었고, 국가 소속이 몇 개 따로 있었다.

단과대학들은 화학, 물리, 기계, 전기, 정보통신, 의학, 생명공학 등 과학연구 위주로 설립했다. 물론 인문, 사회과학과 교양, 예체능 과목도 학생과 연구진의 인격도야를 위해 필요하므로 따로 두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경우 조형대학에 도자문화학과가 있고 인문사회대학에 행정학과와 문예창작학과도 있다.

“앞으로 나를 상황폐하라 부르지 말고 총장이라 부르시오.”

“예, 폐하.”

교수와 박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대학교 고위 간부들과 단과대학장들, 연구소장들을 소집해서 연 첫 회의부터 삐걱거렸다. 건국 초에 국방연구소에 자주 들렀을 때는 이 정도로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허! 다시 대답해보시오.”

“예, 총장님.”

“내가 상황이라서 여러분들이 지나치게 긴장한 것 같소. 하지만 나도 여러분과 같은 과학도의 한 사람이라오.”

“총장님께서 전 황제폐하라서 긴장한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모든 과학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이 바짝 긴장한 것입니다. 앞으로 엄격한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총장님.”

지식인 사회에서 흔히 쓰는 지도편달(指導鞭撻)이란 그리 좋은 말은 아니었다. 가축에게 그러는 것처럼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채찍으로 때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분은 좋소만, 앞으로는 듣기 좋은 말보다는 연구에 전념하는 게 좋겠소.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은 이미 여러분에게 풀어놓았으니, 여러분들이 연구를 진행해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하오.”

“긴장되지만 가슴이 벅차도록 기쁩니다!”

나라를 세운 다음부터 한동안 기초과학보다는 응용과학 발전에 치우쳤었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동안 기초과학의 발전이 지지부진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총장님. 문제는 화학과입니다. 화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신분조회를 통과해야 하고 거주지 이전이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크게 제한됩니다. 물론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연구가 금지된 분야도 있습니다. 봉급은 많이 받더라도 삶의 질이 크게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요. 그래서 이번에 화학전공자의 해외여행 불가를 제외한 모든 제한을 없애기로 했소. 새 황제와 논의된 사항이니 이번 신학기부터 적용하도록 하시오.”

“오오! 감사합니다, 폐하!”

걸핏하면 폐하 소리가 나와서 이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제부터 과학자들을 굴릴 예정이기 때문에 이민호는 속으로 몹시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화학이란 연금술처럼 몇 가지 비법만으로 뭔가 대단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책을 읽고 독학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외국에 화학 지식이 전달되지 않도록 주의하되 국내에서는 전공 학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유인우주선 발사장면입니다. 파이널 카운트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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