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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43화 (992/1,000)

01044  107. 양위  =========================================================================

1638년 1월 3일, 황제로서 6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날이었다. 새벽에 짧게 비가 내린 다음 온종일 맑게 개어 제국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했다.

“주인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에요. 하지만 저는 말이죠. 한 달 전만 해도 주인님의 양위가 최소 몇 년은 늦춰질 줄 알았어요. 지금도 주인님이 계속 황제로 남아계시길 원하는 여론이 아주 강하거든요.”

“그 동안 황태자가 늙잖아. 양위 후에 내가 할 일도 많이 남아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

혜영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민호의 첫 번째 아내이며 다음 황제의 어머니이기도 해서 감정이 매우 복잡하고 격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 순간에도 현대 영국에서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이었을지, 아니면 왕손이 즉위했을지 몹시 궁금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장수해서 왕세자가 너무 늙어버리자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왕세자를 건너뛰고 왕손에게 왕위계승을 시키자는 여론이 강했다.

“업무는 차기 황후에게 다 넘겼지?”

“예, 당연하죠. 일하는 걸 보면 새 황후가 저보다 훨씬 나아요. 황비들도 영민해서 우리 자매 너덧 사람 몫을 하고 있어요.”

새 황제가 어린 것도 아니라서 이민호는 과학연구소를 제외한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다. 부황으로서 양위 후에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가 현직 황제와 권력다툼을 하는 추한 꼴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은 양위 후에도 군사권을 쥐고 세종이 아닌 대신들을 견제했다. 이민호는 그때 당시에는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비록 한때였지만 일왕들이 후계자에게 양위한 후에야 진정한 권력을 쥔 시기도 있었다. 퇴위한 부왕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자기가 누리고 싶다면 어린 후계자라도 얼른 즉위시키고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가능했다.

“며늘아이들이 고생하겠군.”

“정식 관료체계에 더욱 의존하게 될 테니 오히려 정상화하는 거여요.”

“그래. 마누라들 고생시켰으니 내가 나쁜 놈이지.”

“여자로 태어나 거대한 나라를 다스려봤으니 나쁘지는 않았어요.”

혜영이 풋 하고 웃었다. 좋게 말하면 본처에게 권력을 나눠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업에 온가족을 동원해 혹사시킨 것이었다. 건국 초에 일할 사람이 부족했고, 특히 믿을 만한 사람이 적어 후궁 정치에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자라고 권력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정당성이 없는 방법으로 권력을 쥐고 흔든 역사도 꽤 있었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아들인 중종 황제를 폐위시키고, 이어서 황제에 오른 다른 아들 예종도 폐위시키고 나서 주나라를 세워 스스로 황제에 오른 일은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며느리 위 씨는 한 술 더 떠서, 복위한 남편인 중종 황제를 독살시키고 나서 상황 예종과 태평공주를 죽이려 하다가 거꾸로 사형 당했다.

“서민이나 황실이나 다 여자가 살림을 맡는 거야.”

“어휴! 말을 말죠.”

틀린 말은 아닌데 스케일이 무척이나 커서 문제였다. 인구는 조만간 명나라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고, 영토 면적은 지구 육지 전체의 절반에 가까웠다. 경제 규모로 따지면 나머지 국가 전체를 합한 것보다 훨씬 컸다.

과학과 기술 수준은 외국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의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이 앞서 나갔고, 지금도 제도 상공에는 제트기 편대가 축하 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미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두 달 후에는 유인 우주선을 발사할 예정이었다.

백성들을 키우고 교육시키고 병들면 치료하는 모든 것에 돈이 들었다. 도시를 건설하고 농경지를 확대하고 철도와 도로를 놓는 것도 모두 돈이었다.

“어쨌든 평생 수고했어.”

“주인님도요.”

이 모든 것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총리 혜영이었다. 이민호가 벌어다준 돈도 많았으나 예산은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혜영은 지구상에서 전쟁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니까.

- 대엥~

오후 세 시 정각이 되면서 황궁 대문 밖에서 징소리가 울렸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서 광장과 대로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수백만 명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무거운 침묵이었다.

동쪽 셰틀랜드 제도부터 서쪽 바스라까지, 영토가 너무 넓어서 티완 기준으로 오전에 행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넓게 흩어진 시간대를 감안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깨어서 화상방송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고른 것이 오후 세 시였다. 물론 누구는 밤늦게, 누구는 새벽에 황제의 퇴위와 새 황제 대관식을 실시간으로 화상방송을 통해 지켜보게 됐다.

타악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라는 리듬을 표현하는 악기다. 타악기들 중에서도 북은 음정 표현을 못해 매우 단순한 소리를 내지만 사람의 맥박과 동조할 경우 감정을 크게 고양할 수 있다. 양위 및 대관식 초반을 장식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악기였다.

- 투두둥! 탁! 탁! 두두두둥!

황궁 대문 앞 무대에 단정한 무복을 입은 여자들이 줄지어 북을 쳤다. 삼고무로 분위기를 띄우고, 이어서 화려한 한복을 입은 무용단이 부채춤으로 축하객들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황궁 앞 광장과 현무대로에는 반 년 전 대관식 때보다 많은 3백 5십만 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나라에 놀거리, 구경거리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이민호가 말했다가 혜영에게 허리를 꼬집히고 말았다. 이민호와 달리 혜영은 황실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 빰빠바아암~

대로 양쪽에 4열로 도열한 군인 3만 2천 명이 일시에 부는 나팔소리가 광장과 대로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민호가 혜영과 함께 단상에 올랐다.

“와아~”

귀청이 아플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에 이민호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미리 귀마개를 하고 나온 혜영이 웃으며 이곳저곳을 향해 손을 흔들 때마다 새로운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리 단상에 올라와있던 세계 각국의 황제들과 군주들, 그 대리인들, 그리고 외교관들이 전원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거대한 광장과 대로와 그 배경이 된 화려한 고층건물들, 행사에 참가한 백성들의 어마어마한 숫자, 이런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할 자본력과 행정능력에 압도된 외국 군주들과 외교관들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따뜻한 바다의 제국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초거대제국을 따라잡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는 이민호가 원하던 바였고, 엄청난 자금을 들여 이런 보여주기를 위한 대규모 행사를 연 이유였다. 로마황제와 히틀러가, 현대의 대통령 후보들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지지자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이를 대세를 점했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것은 지지자의 충성도를 올리고 반대자의 입을 다물게 함으로써 과반수 이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생존을 위해 세력이 강해 보이는 쪽에 붙는 본능을 자극해 실제로 세력을 불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나의 백성들이여, 들으시오!”

“와아~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에~”

“건국 이후 나는 여러분과 오랜 세월을 함께......”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세에~”

확성장치의 수화기에 대고 첫 마디를 내뱉을 때부터 환호가 이어지더니, 이민호가 말을 몇 마디씩 할 때마다 요란하게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물을 줄줄 흘리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이들도 많았다.

축하객들의 감정이 지나치게 고양돼 도저히 연설을 이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이민호가 연설 원고를 접었다.

그리고 단상에서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황제 이민호의 돌발 행동을 본 수백만 명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백성들에게 감사하는 나의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

수화기에서는 멀어졌지만 국영 화상방송의 현장 카메라가 이민호의 발언을 담고 있었다. 제도에 모인 축하객 수백만 명과, 전국에서 화상방송을 지켜볼 1억 가까운 백성들과, 그리고 미래에 이 화면 혹은 사진을 보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민호가 허리를 깊이, 90도로 숙였다.

“고맙습니다.”

연단 앞에서 촬영을 하던 기자들이 화들짝 놀라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리고 광장과 대로를 가득 메운 축하객 수백만 명이 갑자기 무릎을 꿇느라 큰 소동이 벌어졌다. 황제에게도 허리만 숙이는 것이 제국의 예법인데도 이상한 분위기에 떠밀려 백성들이 이민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이민호가 뒤를 살짝 돌아보니 황후 혜영과 다른 아내들이 사뿐히 앉아 이민호와, 그 뒤에 모인 백성들에게 절을 하고 있었다. 부창부수라고, 이민호와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남편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모두 행복하세 사세요!”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세에~ 만세에~”

이민호가 손을 휘휘 저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황후 혜영을 비롯해 아내들도 한 줄로 따라왔다.

만세는 삼창을 한다는 상식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백성들이 끝없이 만세를 불렀다. 매우 성공적인 한 시대의 마감이었다.

“선대 황제가 차기 황제에게 황관을 씌워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요?”

“보통 선대 황제가 죽어야 제위를 물려주니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어. 그리고 새 황제에게는 나처럼 백성 대표들이 씌워주기로 했어. 아! 홀가분하다.”

“이젠 이사를 가야죠.”

퇴위 후에는 티완 서쪽 외곽, 황궁과 태평양이 동시에 보이는 언덕에 지은 궁전에서 지내기로 했다. 후궁들 일부는 얼마 전부터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물론 이민호는 로키산맥 기슭에 건설 중인 과학도시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와아~”

갑자기 엄청난 함성이 터진 걸 보면 황태자가 연단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참 오래도 기다렸다. 그러나 영국의 찰스 왕세자보다 훨씬 운이 좋은 경우였다.

새로운 황제가 잘할 것으로 믿고, 이민호는 앞으로 정치에 관심을 끊기로 했다. 대관식 직전까지 이민호를 괴롭혔던 외국 군주와 외교관들도 이제부터는 온전히 새 황제의 손님들이었다.

“왜? 아들을 더 챙겨주고 싶어? 이제부터는 며느리들이 할 일이야.”

“아니에요. 시원섭섭하네요.”

연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잠시 멈춰 섰던 혜영이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평생 일했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온갖 감회가 떠오를 것이다. 그것은 이민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차 두 개를 잘라서 이어붙인 기다란 승용차에 올랐다. 그리고 황궁 서문을 빠져 나가 서쪽으로 차를 달렸다. 황궁만큼 크지는 않지만 예전 고북 시의 왕궁만 한 궁궐 대문이 열려 있었고, 연미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 옆에 도열해서 차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해중국 여왕폐하! 제국 상황폐하!”

이민호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지만 혜영은 아직 아니었다. 그리고 제국의 상황과 태후가 머물 궁전은 해중국의 북미 영토 왕궁을 겸하고 있었다.

“석현이가 저를 끝까지 부려먹을 모양이에요.”

“적당한 시기에 새 황후한테 왕위를 물려줘.”

“예. 아직 해중국 사람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어요. 사실 이주도 덜 마쳤어요. 앞으로 일 년 안에 며늘아가한테 물려줄게요.”

해중국이 독립국으로서 제국의 황궁을 방어한다는 개념을 고산국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 해중국 자체의 군사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제국과 별도의 세력이 황궁을 보호한다는 관념은 반란, 특히 궁정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도 새 황제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새 황제와 황후가 대관식 준비로 워낙 바빠서 혜영이 잠시 맡아준 것뿐이었다. 퇴위 후에도 혜영이 할 일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새 황제 입장에서는 아들이 많아 선택권이 많은 상황 이민호보다는, 아들 석현만 믿고 살아온 혜영이 훨씬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물론 제국의 새 황제는 측천무후의 며느리 위 씨 같은 사람도 있으니 모후든 황후든 전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다.

황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황실 가족에 대한 불신은 어느 정도 필요했다. 당나라나 말리 제국처럼 황실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권력 승계가 반드시 보장돼야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우주비행, 원자력, 디지털 등등 어마어마한 것들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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