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1 106. 제국 선포 =========================================================================
“그리고 공작! 군 형법 개정안 말인데.”
“예, 폐하. 그로티우스 백작은 물론 대법원 법률연구소와도 협의를 마쳤습니다. 군 형법에서 몇 가지 조문만 개정하면 제국의 법 논리가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먼치킨은 이민호가 아니라 데카르트일지도 몰랐다. 그는 수학자, 철학자, 물리학자로서 여러 분야의 학문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상, 즉 이성과 평등을 주축으로 한 합리주의와 기계적 세계관은 근대 정치사상과 철학, 과학 발전에 장기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역학이 완성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결국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바꿨고 자연을 보는 인간의 눈을 바꿔놓았다.
“사실 인간의 평등이란 제국이나 군주정에 전혀 걸맞지 않는 요소라네. 공작이 전개하는 논리의 끝에 이르면 군주제를 폐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정이 돼야 하겠지.”
“바로 그렇습니다만, 저는 군주제의 역사적 존재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우리 제국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정인 현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미래에 대비해 입헌군주제를 마련하신 것보다 훨씬 천천히 세상의 변화가 이뤄질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군 형법 개정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지휘관의 명령을 일개 병사가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차대전 때 상부에서 내려온 양민 학살 명령을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한 자들은 전범재판에서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일개 병사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항변은 재판과정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현재 제국의 군 형법은 상관의 불법적인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병사들에게 보장했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권리에 불과했다. 지휘관의 불법적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불법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을 의무를 병사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이번 군 형법 개정안의 요체였다.
예를 들어 중대장이 아무 죄 없는 양민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할 경우, 병사들은 양민을 사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중대장이 직접 나서서 총질을 할 때 제지까지 해야 한다. 소대장은 지휘관이 아니므로 그런 명령을 내릴 권한 자체가 없다.
“군 형법 개정안을 잘 읽었네. 나도 물론 궁극적으로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시대에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모르겠어.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병사들도 많잖아?”
“폐하! 제국에서 군인은 만 16세 이상에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춘 자에게만 허락된 직업이므로 병사들은 이미 충분한 교육을 받은 성인들입니다. 성인은 국가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누림과 함께 의무를 부담해야 합니다.”
“공작! 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 절반에서 3분의 1 정도가 대학에 가기 전에 군에 입대한다네. 그런 병사들 중에 철학과 법을 제대로 배운 경우가 얼마나 있겠나?”
“성인은 법과 사회규칙을 당연히 알아야 하고, 국가는 백성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법규를 알도록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 문명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차대전 전범재판이나 동서독 통일 후에 열린 재판에서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복종했을 뿐인 행위가 설마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항변한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이미 성인이며 그 사회에서 행해지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범죄행위 당시 피고가 합리적인 판단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는 이유로 형량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공작 말이 맞는데, 과연 개정안이 현실에 순탄히 적용될까 하는 의문이야. 지휘관이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 병사들을 불법행위로 내몬다면,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부사관과 병사가 많지 않을 걸세.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명령을 받는 병사와 부사관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 않아.”
“그래서 지휘관의 자격이 더욱 중요합니다. 감히 국법을 어기는 장교는 이미 지휘관으로서 부적격자이므로 반드시 걸러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법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더라도 법이 국가와 사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데카르트는 올해 <방법서설>을 프랑스어와 제국어로 출간했다. 그는 결코 고지식하거나 책상물림이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과 현실을 매우 비관적으로 보는 축에 속했다. 책 내용에서도 그는 인간 정신의 평등이란 개념에 대해 수없이 회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할 객관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휴우! 공작의 말이 맞긴 한데.”
“폐하의 결정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래! 발전 과정에서 생길 온갖 것을 두려워하면서 바꾸지 못하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어? 군 형법 개정안을 승인하겠네.”
“역시 황제폐하이십니다.”
2013년 9월 임진강에서 월북을 시도하는 자를 중대장의 명령으로 소대 병력이 사격을 실시해 사살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군사적 대치상황에 놓여있고 휴전선을 넘나드는 자들은 일단 무장간첩으로 의심되므로 기본적으로 큰 논란은 없었다.
그러나 동독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는 비무장 시민들을 정조준해 사살한 동독 경비대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잡혀봐야 실형 5년 이하를 선고받을 동독 주민의 범죄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사살이라는 과도한 대응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살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경비대원이 거부하더라도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을 상황이었다. 겨우 휴가 며칠이나 동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베를린장벽을 넘는 주민을 사살한 행위는 반인간적인 범죄로 처단을 당했다.
전투지역이 아닌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를 넘어 탈출하는 북한 주민을 사살한 북한 경비대원들도 처벌을 받는 것이 법 논리에 맞았다.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밀라이 마을 학살사건이나 201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재미로 민간인들을 사살한 사건들은 미군 군사작전의 명분에 큰 손상을 주었다. 적국 민간인에 대한 증오감의 표출이나 재미로 민간인을 죽이는 행위는 전쟁을 수행하는 자국 입장에서도 결코 용납 받을 수 없었다.
“비록 껍데기는 내가 만들었지만 제국의 법률 체계와 교육 체계의 알맹이는 실로 공작이 만들었네. 크리스티나를 교육하는 일을 제외하고 실권은 거의 없더라도 공작이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지배자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비록 제가 건의했다 하나 수용하신 분은 황제폐하이십니다. 신하들이 상주한 여러 가지 제안 중에서 하나를 폐하께서 고르신 것입니다. 결정권자가 명예를 누리며 또한 모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항상 고맙네.”
데카르트 공작이 이민호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민호만큼 데카르트를 철학자로서 이토록 높은 대우를 해줄 만한 군주가 이 세상에 더 없었다. 서로 고마운 처지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를 가리켜서, 이제 퇴근할 시간이었다. 황태자에게 내정에 관한 섭정 권한을 주면서 재위 말에는 이민호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황제와 공작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크리스티나 여왕이 황손들과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크리스티나 국왕폐하! 다섯 시가 됐습니다.”
“아이 참! 나는 더 놀고 싶은데 공작과 밖에서 대기하는 신하들이 퇴근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겠소.”
“관대하십니다, 국왕폐하.”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 왕궁과 달리 눈치 안 보고 실컷 뛰어놀 수 있는 제국 황궁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황손들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이민호는 크리스티나를 교육하는 동시에, 황손들을 교육할 책임도 맡고 있었다. 이민호가 멀뚱거리는 황손들을 불렀다.
“자! 이제 스웨덴 국왕폐하께 작별 인사를 드려야지? 스웨덴 궁중 예법은 배웠지?”
“할바마마! 제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친구 아닙니까?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여왕, 아니 국왕이라도 제국인이 아닌 외국인입니다.”
크리스티나가 곤란에 빠진 황손들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공주가 아닌 왕자로 키워진 크리스티나는 여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사석에서는 옷을 남자처럼 입고 다녔다.
그래서 선머슴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어린 황손들과 터울 없이 지내게 된 요인이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크리스티나의 공식 칭호는 여왕이 아닌 국왕이었다.
“크리스티나 국왕은 주권자인 군주이고 너희 황손들은 제국의 신민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제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우호국 군주에게 예의를 차리는 게 당연하다. 꼬우면 네가 황제나 왕이 되든지.”
“으윽!”
크리스티나가 얄밉게 턱을 치켜들고 기다리자 황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황손들이 어쩔 수 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고, 크리스티나가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황손들이 차례로 크리스티나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한 다음 일어섰다.
“할바마마! 제가 황제가 되기는 싫습니다. 크리스티나에게 절하는 건 더욱 싫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민주공화정을 지지하고 싶어집니다!”
“여자가 신분이 높은 게 싫으냐?”
“그거하곤 상관없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착해서 괜찮은데 만약 바보 같은 놈이 왕이라고 제가 절해야 한다면 그건 차마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직위에 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을 한다 해서 존경하거나 충성을 맹세하는 것도 아니니 싫더라도 높은 자에게 허리를 굽히렴.”
이민호도 명나라 만력 황제나 조선 선조 임금에게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 적이 있었다. TV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높은 사람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말아도 괜찮지만 이 시대에 이민호가 그랬다간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물론 TV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시청자나 독자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야 하므로 현실과 달라야 했다.
“오후 교육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폐하.”
“편히 쉬시길 바라오. 내일 또 뵙겠소.”
크리스티나 여왕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여왕을 뒤따라 나가는 황손들이 뭐라 구시렁대는 것 같았다.
“큭큭! 공작! 황손들이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나?”
“‘민주주의 만세’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저 발언이 반역죄에 해당할까?”
“제국에서 미성년자의 발언과 행위에 따른 법적 책임은 부모와 함께 집니다. 그리고 특정 정치체제에 대한 평가나 호오의 감정 표현은 제국에서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법이 시행 중입니다.”
이민호는 그저 농담으로 해본 말이었다. 그러나 예민한 문제일 수가 있어 데카르트가 법조문을 인용해서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민호가 황실 내부에서 피를 흘리게 할 사람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손들의 발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양위를 앞두고 이민호가 신하들을 족치고 있었다. 재위기간을 겨우 한 달도 안 남긴 이민호는 더더욱 긴장한 채 관료사회를 단속했다. 이민호가 더 오래 정사를 돌봐달라고 청하는 신하들을 남김없이 내치는 사이, 황태자는 황제를 몰아내고 더 일찍 즉위하라고 유혹하는 신하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은 충성심으로 자기 발언을 치장하더라도 국가의 번성이나 황권의 안정보다는 개인의 출세와 부귀영화만 노리는 역신들이었다. 정권 교체기는 신하들의 내심을 살필 수 있는 아주 좋은 시험대였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높은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역모 고변을 잘못했다가는 역모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 하지만 잘하면 쉽사리 출세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정치 상황에 따라서는 권력자들이 가짜 역모 사건을 진짜로 뒤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꿀단지에 빠지는 개미처럼 끊이지 않고 역모 고변이 이어졌다. 제국에서는 양위 직전 시기를 리트머스 시험지로 잘 활용하고 있었다.
“황손들이 다른 나라 군주들 앞에서 실수할까 걱정이야. 이만 퇴근하세.”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습니다, 폐하. 황실 분들은 영리하시면서도 매사에 무척 신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직 애들이라네. 잘 가르쳐야지.”
데카르트 공작이 페르마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공책을 낡은 가죽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복장도 그리 고급스럽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제국의 공작씩이나 됐으면서도 여전히 검소했다.
공작에게 지급되는 연금이 10만 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데카르트가 절반은 제국 공식 자선단체에, 절반은 프랑스의 수도원에 보낸다고 들었다. 수도원은 종교시설이라기보다는 병원과 고아원을 대규모로 운영하는 자선단체였다.
이민호는 자선을 베풀기보다는 투자를 통해 그 지역의 평균 소득을 올리는 쪽을 훨씬 선호했다. 그 쪽이 차라리 장기적 효과가 컸고, 그 과정에서 오히려 이익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외국에 내정간섭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투자를 통해 저개발 지역의 소득을 올린다고 선전하는 현대 여러 나라의 정책들 대부분이 실패하거나 투자이익이 기업에 집중된 경우가 많았다. 자금이 옆으로 술술 새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민호는 외국 귀족이 돈냄새 맡고 끼어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선사업이 낫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8시간 반 걸렸네요. 액션이 많았던 연재 초반에는 하루 2, 3편씩 올렸는데 지금은 자료 조사 시간이 많아서 버겁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