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0 106. 제국 선포 =========================================================================
12월 초에 남명의 10만 별동대가 동정호에서 상륙해 서쪽으로 진군했다. 그런데 사천 땅을 지키는 촉의 군대는 그 지역에서 유명한 어느 도사의 예언을 믿고 북쪽 한중 방면만 집중 방어하고 있었다. 산맥을 넘은 남명 별동대가 소수민족 전사들과 함께 전혀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사천분지에 쏟아져 들어갔다.
촉의 한중 방어군이 급히 남하했으나 단숨에 격파됐고, 남명의 승리는 거의 손에 잡힌 듯했다. 그러나 별동대를 이끈 양광 총독 겸 병부시랑이 소수민족 추장들을 붙잡아 곤장을 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수민족 야만인 추장 주제에 황제의 신하인 자신에게 건방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분위기가 흉흉해지더니 별동대와 소수민족들이 곳곳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촉군이 별동대 지휘부를 들이쳐서 몰살시켰고, 별동대 소속 부대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중국 역사에서 흔히 보던 친숙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구나. 이런 전쟁은 항상 같아. 누가 더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삽질을 덜 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지.”
합동참모본부에 들러 전황 보고를 받은 이민호가 혀를 찼다. 합참차장과 정보참모본부장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들겼으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폐하.”
“무슨 일인가?”
“남명과 촉나라의 병력 자원 특성이 몇 달 새 크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황하 이북 중원지역에서 징집됐다가 남방으로 밀려났던 남명군이 지금은 남중국 출신 병력으로 절반 이상 교체됐다. 그리고 사천과 그 주변 지역에서 봉기한 촉군에는 중원 지역 농민반란군이 대거 가담했다고 한다. 본거지 사천을 잃으면 붕괴될 거라고 예상했던 촉군이 의외로 더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촉이 붕괴하지 않고 남북 정권으로 정립하는 건가?”
“이번 일을 기화로 사천과 그 이남의 소수민족들이 대거 봉기했습니다. 어쩌면 사천이 소수민족들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음. 그리 되면 소수민족들끼리 싸우려나?”
실제 역사에서 명나라 초기, 그리고 청나라 초기에 중앙 조정에서 주도해 사천으로 대규모 이주를 추진했다. 이는 국초에 적정 인구보다 훨씬 적은 인구가 사천에 거주했다는 뜻이며, 이는 왕조교체기에 사천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장헌충의 반란을 청나라가 잔혹하게 진압할 일이 없어졌으므로 아직 사천에는 적정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청나라 기록에는 장헌충이 사람백정이라서 자기 백성과 군대를 자체적으로 몰살시켰다고 한다.
“예전 소수민족들이 아닙니다. 저들이 자주 반란 진압 작전에 동원되면서 이제는 화약무기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발전해야겠지.”
어찌 됐든 이민호는 가능하면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삼국지 상황이 중국 대륙에 전개되는 것도 제국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민호 재위 기간 안에 중국 내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짜증이 샘솟았다.
이민호와 혜영이 보고 있는 영상수신기에는 작은 창고 같은 곳에서 세 사람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영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작은 공구를 사용해 벽에 붙은 통신기를 수리하는 청년은 이민호에게 몹시 낯이 익었다.
- 선장님! 수리 완료했습니다.
- 수고했다, 고 소령. 김 박사는?
- 저도 공기정화장치 수리를 마쳤어요.
- 3초 남았다. 전원 중력 상승에 대비하라.
허공에 떠 있던 우주비행사 세 명이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았다. 곧이어 세 명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온몸에 안간힘을 쓰며 일어났다.
무중력 훈련에는 제트 수송기가 동원돼 고도 5천에서 일만 미터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우주비행사들은 수송기가 급강하하는 시간인 25초에서 50초 동안 무중력을 경험한 다음, 수송기가 45도 각도로 상승하는 동안에는 반대로 높은 중력을 견뎌야 했다.
“석현이도 그렇지만요, 폐하의 자식들은 도대체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목숨이야 다들 아까워하지. 다만 용감할 뿐이야.”
이민호의 대꾸에 혜영이 한숨을 팍 내쉬었다. 우주비행사를 지원한 공군 소령 고석문은 혜영의 동생, 혜진의 둘째 아들이었다.
“무모한 게 아니고요?”
“조금 그런 면이 있긴 한데, 성공 가능성이 있으니까 도전하는 거지.”
지구 중력권을 벗어나는 로켓을 발사한 다음 인공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리는 일도 차례로 성공했다. 현재 정지궤도 위성들은 군사용 통신 중개 및 방송용으로 성공적인 임무수행에 들어갔다.
발사 성공률이 절반을 넘어서자 욕심을 내어 이번에는 유인 우주선 발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고석문은 첫 번째 우주 비행사에 지원했고, 유인 우주선이 제작 중인 지금은 한창 훈련받는 중이었다.
“우주 비행사를 선발하는 동안 지원자를 익명 처리한 건 석문이를 합격시키기 위한 음모였어요!”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거지. 그런데 저 농학박사 예쁘고 똑똑한 것 같지 않아? 석문이하고 은근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 같은데.”
“말 돌리지 마세요!”
그러나 우주 비행사 선발 과정에서 이민호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차별이나 역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기본 지침을 내렸을 뿐이었다.
선장은 공군 대령이었고 제국에서 흔치 않은 흑인이었다. 현대 미국의 우주 비행사에 해군 조종사들이 많은 반면, 공군을 창설하면서 해군 항공대를 분리한 지 얼마 안 된 제국에서는 압도적으로 공군 조종사가 많았다.
그리고 우주 비행사에 선발된 여성 농학박사는 김 씨라고 하지만 아이누 섬 출신이었다. 국초부터 아이누 섬에서 농업연구가 활발했던 탓에 아이누 젊은이들이 농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고 우주는 농업발전을 위한 새로운 기회의 장이었다.
“석문이가 서른 세 살인데 박사 아가씨는 몇 살이려나?”
“스물 아홉요. 둘 다 우주 비행사 따위는 당장 그만 두고 결혼이나 하면 좋겠어요.”
혜영이 여자 박사에 대해 다 알아봤고 마음에도 든 모양이었다. 황실 식구들이 일반 백성들에 비해 혼인이 늦은 편이지만, 제대로 된 배우자를 고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와아~ 바보! 바보! 바보!”
“난 바보가 아냐! 거기 서!”
황제 집무실에서 아이들 세 명이 뛰어다녔다. 바닥에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아이들이 놀기에 황제 집무실은 아주 좋은 장소였다.
“여왕폐하! 상대방의 의견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보다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부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맞아요, 공작. 애들아! 난 5개 국어를 한다?”
“헉! 그럼 넌 천재?”
“언어를 배우면 다 구사하는 거지, 그게 뭐가 어려워?”
데카르트 공작이 적절한 시기에 조언을 해주자, 바보로 몰렸던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콧대를 세울 수 있게 됐다. 크리스티나로부터 도망가던 황손들이 갑자기 풀이 죽어 이민호에게 달려왔다.
“할바마마! 저도 외국어 배우게 해주세요. 네?”
“그건 아직 이르지 않니? 어차피 중학교 가면 다 배울 텐데.”
“저 바보도 5개 국어를 한다잖아요.”
“크리스티나는 외국 사람이잖아? 그럼 제국어가 서툰 것이 당연하다. 외국인이 제국어가 서툴다고 바보라고 놀리면 안 돼.”
스웨덴 섭정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스웨덴의 겨울 동안만이라도 크리스티나를 제도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천방지축인 황손들을 크리스티나와 엮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는 보통 여자아이의 지적 능력이 더 높고, 일반적으로 여자는 외국어에 좀 더 쉽게 능숙해진다.
특히나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 공작의 제자라서 어린 나이부터 매우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했다. 어렸을 때는 막 풀어 키우다시피 하는 제국 황실의 어린 황손들보다 당연히 훨씬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는 황실의 교육 방침이었고, 제국민 전체에 통용되는 교육 방침이기도 했다.
“5개 국어라니! 공작! 어린아이에게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시키는 것은 아동학대 같은데 말이야. 우리 제국의 교육방침은 공작이 세우지 않았나?”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 선왕의 서거로 스웨덴이 국가 위기에 처한 이상, 아직 어리더라도 국왕이 인생의 여유를 즐길 일은 없습니다.”
“비정하지만 할 수 없겠군.”
크리스티나는 선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스웨덴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린 여왕이라도 국가 시스템에 갈아 넣어야 했다.
“그런데 공작은 뭘 그리 열심히 쓰고 있나?”
“아! 폐하. 프랑스 사람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3 이상의 지수를 가진 정수는 이와 동일한 지수를 가진 다른 두 수의 합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정리입니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훌륭한 수학자이기도 했다.
“책의 여백이 충분치 않아 증명을 옮겨 적지 않았다는 그것?”
“예, 폐하. 제가 편지로 페르마에게 문의해본 결과 지수 4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증명해놓았습니다. 그의 증명 방법을 이용해 지수 3도 간단히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지수가 소수인 5, 7, 11 등에 대한 일반적인 증명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공작에게 미안한데, 여러 가지 지수의 개별적인 증명은 몰라도 앞으로 한참 동안 일반적인 증명은 안 될 거야.”
한참 고민하던 데카르트 공작이 공책을 덮었다. 이민호는 현대에 이공계 학생에 불과했지만 이 시대 데카르트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수학적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수학에서 이민호의 능력을 엄청나게 높이 보고 있었다.
“수학에 여러 가지 새로운 개념과 공식을 도입하신 황제폐하께서 그렇다면 그럴 것입니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같은 것을 증명하는 것과 비슷해.”
“흠. 과연 그렇군요. 일단 100까지 계산해봤는데 모두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증명을 하기가 난감합니다.”
“그렇지? 하하!”
그 짧은 시간에 100까지 계산한 데카르트는 역시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현대 수학이 발견한 온갖 개념을 동원해 20세기말에 결국 증명해냈지만, 골드바흐의 추측은 간단해 보여도 이민호가 살았던 현대에서도 증명되지 못했다.
“가끔 저는 황제폐하께서 외계나 미래의 세상에서 오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설마.”
이민호가 속으로 뜨끔했다. 논리적인 데카르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 말고는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 손자와 크리스티나를 결혼시키는 게 가능할까?”
“예, 황제폐하. 섭정들은 크리스티나 여왕폐하를 스웨덴 국내에 머물게 하려는 것과 상관없이 제국과 통혼하는 것을 반기는 입장입니다.”
제국은 초강대국이고 스웨덴은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통혼을 시도할 가능성이 적었다. 제국의 원손이 아닌 제2, 혹은 제3 황손이 크리스티나 여왕의 배우자가 된다면 스웨덴에서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크리스티나가 자기보다 미숙해 보이는 황손들에게 애정을 갖지는 못할 것 같아.”
“왕가의 결혼에서 당사자들의 애정은 중요한 요인이 못 됩니다. 그런 사실은 군주가 될 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에게 좀 미안하긴 하네.”
“다만 여왕 부군 후보는 제위 계승권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분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스웨덴 궁정에 있었습니다.”
“혹시나 원손이 젊어서 잘못될 경우 여왕 부군이 제위를 계승하고, 스웨덴이 우리 제국에 흡수 합병될 것 같아서?”
“바로 그렇습니다, 폐하. 제국에 합방된다면 스웨덴 백성들이야 당연히 기뻐하겠지만 스웨덴 왕실이나 귀족들은 두려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스웨덴 귀족들이 가진 공포를 해소해주려면 황손 하나를 장가보낼 때 제국의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공주를 프랑스 왕실에 시집보낼 때 그 후손의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을 포기시키는 것과 비슷했다.
스웨덴 여왕의 아들이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권리를 미리 박탈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또한 제국이 유럽 국가들을 통혼을 통해 야금야금 집어삼킨다는 오해도 불식시켜야 했다.
“손자 장가보내는 일도 쉽지는 않네.”
“그리고 여왕 부군 후보가 정해지면 개신교도로서 종교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끙! 여왕에게 장가가려면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겠군.”
실제 역사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은 평생 미혼으로서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숙부에게 왕위를 양위한 다음 퇴위한다.
스웨덴과의 국혼을 추진하다가 여차 하면 황손 하나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포함해, 제국에서 유럽 국가와의 국혼을 꺼리는 이유였다. 그러나 스웨덴과의 국혼을 딱 한 번만 성공시켜도 이후 북유럽의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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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월입니다. 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