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8 106. 제국 선포 =========================================================================
명목상 독립 공화국인 제노바가 성모마리아를 제노바의 여왕으로 선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작은 도시국가들이 흔히 선택하는 공화국을 유럽에서는 보통 왕국보다 낮은 등급의 정체로 여겼기에, 공화국이면서도 왕국 대우를 받기 위한 꼼수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전혀 다르게 대응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이민호가 제국의 유명 예술가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다들 뭐하시오? 제노바는 개신교나 이슬람과 달리 이콘을 금지하지 않는 가톨릭 국가란 말이오. 우리 제국의 예술가들에게 큰 기회요! 당장 성모마리아 성상과 성화, 성모마리아에게 바쳐질 오페라와 도자기 등등을 만들어 제노바에 선물하시오! 예산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소.”
제노바에서 올해에 성모마리아를 여왕으로 추대하는 일은 국가적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제국에서 보낼 예술품이 쉽게 제노바의 국보로 지정돼 오랫동안 전시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랑스에서 제작해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면 된다.
“폐하! 하오나 저희들 중에 가톨릭교도는 많지 않습니다.”
“특정 종교의 성인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일에 예술가의 종교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당신들이 우리 제국은 너무 평온해서 예술적 영감을 얻기 곤란하다고 불평을 터뜨린 게 바로 몇 달 전이오. 예술적 영감이 부족하면 종교적 영감이라도 빌려오시오!”
이민호가 어리둥절한 예술가들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소재거리가 떨어졌다고 불만이 많던 예술가들에게 할당량을 강제로 분배했다. 결국 시인과 소설가, 화가, 조각가, 작곡가 등이 자료를 찾고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조언을 받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자유의 여신상 같은 거대한 석상을 만들기 위한 임시 조직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와 건축가, 조각가, 신학자, 철학자 등이 포함됐다.
“주제나 소재, 자세는 당신들이 알아서 정하시오. 다만 한 번 본 사람에게 평생 인상에 남도록 아주 거대한 편이 좋겠소. 석상의 높이는 대충 50미터, 기단부도 비슷한 높이로 만들어 전체 높이가 지표면에서 100미터 정도를 기준으로 삼으시오. 물론 크면 클수록 좋소.”
“폐하! 석상이라면 자세에 제한이 생기고 세월이 흘러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철근콘크리트로 제작해야겠습니다.”
“그게 좋겠소. 그리고 여기서 다 만들어서 보낼 생각을 할 필요가 없소. 부분품을 나눠 제작해서 제노바 항구까지 싣고 가서 조립하면 되오.”
제노바가 항구도시라서 등대로 활용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민호는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우선했다.
“얼굴이나 석상 가장 높은 부분에 일반인들이 관람할 전망대를 만들려면 석상 내부에 나선형 계단이나 승강기를 넣어야 할 것이오. 혹시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제가 교황청에 문의해보겠습니다. 폐하.”
제노바하고도 진열 장소 등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다. 제노바 바로 앞바다에 석상을 세울 만한 작은 섬이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방파제를 새로 건설해 그 끝인 항구 입구에 세우기로 했다.
얼떨떨한 표정의 제노바 대사는 난데없는 제국의 호의에 그저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제노바와 사이가 나쁜 사보이 공국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나, 비슷한 일이 생기면 사보이 공국에도 같은 선물을 하기로 약속했다.
“폐하! 개신교나 이슬람 국가에서도 비슷한 것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국가간 우호를 위해 당연히 선물해야지요. 그런데 그 종교에서는 이콘이 금지돼 있지 않소?”
아직 종교 관련 문화가 자유로운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이 시대에 만약 자유의 여신상이나 어머니 조국상 같은 거대한 조각상을 세운다면 이교도의 우상이라고 파괴운동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황태자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세계를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야심찬 계획입니다. 제노바도 우리 제국과의 우호를 과시할 수 있으니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겁니다.”
“바로 그렇다. 문화 교류에서 정치성을 배제하기란 불가능하다. 한꺼번에 할 생각하지 말고 대를 이어서 꾸준히 이런 사업을 펼치도록 해라.”
그러나 이민호는 강아지가 산책하면서 영역 표시를 위해 여기저기에 소변을 보는, 마킹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중국 내전이 꽤 급하게 돌아갔다. 북경성 밖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남명이 패하고 촉나라가 승리를 거뒀다.
북명과 대규모 전투를 치르고 난 직후였던 남명 군대는 병력 열세와 보급 부족으로 인해 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촉나라가 북경을 차지하면서 전체 국면에서 우세를 점했고, 남명 군대는 패잔병을 추스르며 빠른 속도로 퇴각했다.
승기를 잡은 촉나라 군대가 남명군을 추격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누구나 당연히 남명 정권이 빠르게 몰락할 줄로 알았다. 그러나 북경 점령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촉나라 군대는 북경에서 장장 보름간이나 머물렀다. 촉나라 군대가 북경 약탈보다는 민심 안정에 주력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합동참모본부를 바짝 긴장시켰다.
10월 하순, 촉나라는 남명 정권을 끝장내려고 다시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제남 남쪽에서 남명 군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그래도 북경 전투 승리와 북경 점령으로 사기가 오른 촉나라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와아~”
이민호는 명나라 내전을 찍은 영상을 황궁에서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잘 싸우던 촉나라 군대가 갑자기 전열이 무너지더니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남명 군대가 용감하게 적을 향해 돌격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명이나 촉나라나 모든 병사들이 자꾸 하늘을 바라보았고, 그 의미를 이민호가 바로 알아챘다.
“이러면 안 돼! 최소한 겉으로는 중립을 지켜야지! 남명에서 파병이나 공동 작전을 요구하고 촉나라가 항의하면 어쩔 거야?”
“시정하겠습니다, 폐하.”
정보참모본부장은 빠르고 객관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정찰기를 동원해 상공에서 전장을 촬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원래는 촉나라가 이기고 있는 전투였는데, 제국 정찰기 한 대가 전투지역 상공을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전황이 뒤집혀버렸다.
명나라 사람들의 비행기에 대한 공포와, 제국이 중립을 표방했으나 아무래도 남명을 편들고 있다는 오해가 겹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상황에서 정찰기가 뜨면서 전황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마치 중립국 종군기자가 대포를 쏘고 국제적십자 소속 간호사가 식수에 독을 푼 격이었다.
“그래도 큰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양군 합해서 5만쯤 되나?”
“황공하오나 이번 일로 전선이 붕괴되는 바람에 촉나라가 최소 40km를 후퇴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입은 병력 손실도 막대합니다.”
“끙! 저들이 폭격기와 정찰기를 구별하지 못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의도하지 않았다고 촉나라 쪽에 변명을 해봤자 믿지 않겠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정보참모본부장만의 잘못은 아니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비행기를 띄웠을 거야.”
장군들이 자기 잘못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민호는 안심할 수 있었다. 만약 합동참모본부의 장군들이 최고 지휘관인 황제를 속이려 든다면 황제가 국가에 치명적인 전략적 오판을 할 수도 있었다.
“역시 제남 전선에 모든 병력을 투입한 게 아니었어.”
영상이 끝나자 이민호가 전황도를 살폈다. 남경에서 출발한 별동대 10만이 양자강을 따라 무한을 지나 사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촉나라의 근거지인 사천에는 30만이 남아있었지만 병력이 흩어져 있기에 공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운남과 귀주 곳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을 회유해서 병력 10만을 모아 사천 공략에 동원했다고 한다.
“현재 묘족과 포의족, 려족 등이 참전했습니다. 대명 관료들이 파견돼 다른 소수민족들도 설득 중이랍니다.”
“중앙 조정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압박을 받던 소수민족이 황실을 지지한다는 게 신기하네. 그렇게 당하고도 명나라 관료의 약속을 믿나?”
“누가 이기든 어차피 한족 정권입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반독립적인 영지를 얻는 편이 낫다고 소수민족들이 판단한 모양입니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더라도 점령지를 약탈할 기회를 보장받았을 것입니다.”
한때는 이민호도 묘족을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는 공작을 시도했었다. 임진왜란 때는 묘족 병사들을 고용해 일본 정벌에도 참전시켰다. 그러나 그때 묘족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교만해서 혀를 내둘렀던 적이 있었다.
“별동대가 만약 빈집털이, 아니 사천 공략에 성공한다면 북경에 원정 간 촉나라 군 본대가 무너질까?”
“촉군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라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북경을 점령했던 촉군 100만이 개별적으로 고향 땅 사천과 인근 지방으로 향하다가 굶어죽고 얼어 죽고 별동대나 지방 향용에게 붙잡혀 맞아죽는 장면을 연상했다. 100만 대군이 강한 것은 조직으로서 모든 것이 갖춰졌기 때문이지, 흩어지면 아무런 힘도 없었다.
바로 여기서 남명이 동원한 군대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명 군대에도 동원된 농민이 병력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 주축은 무관의 개인 사병인 가정(家丁)이었다. 웬만한 일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을 군조직의 정예 겸 핵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번 같은 내전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였다.
“남명의 전략가가 누군지 파악됐나?”
“예, 폐하. 이름은 왕학상이며 고북에서 출생한 학군장교 출신입니다. 3보병사단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하다가 5년 전에 대위로 예편했습니다. 남명의 황태자 명의로 발표된,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역시 그렇군. 요즘 남명의 보급이 예상 외로 원활하던데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아나?”
“마카오 출신으로서 한때 국영상단 소속 범선의 선장이었던 정지룡이 귀국해서 선단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인재를 키워서 넘겨준 셈이군.”
정지룡이라면 상선 진수식에서 이민호가 만났던 정일관 선장의 본명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대만을 정복하고 반청운동에 나섰던 정성공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물론 이민호는 그런 사실을 몰랐으나, 씁쓸해서 혀를 찼다.
“송구합니다, 폐하.”
“합참차장이 미안할 이유는 없지. 이런 일은 당연히 생긴다고 봐야 해.”
입장을 바꿔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재미교포 2세나 3세가 대한민국에 귀국하면 애국자고, 미국에 남으면 민족반역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이민을 가서 이미 미국인이 된 자의 후손이니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같은 독일 혈통 미국인인데 이차대전 때 누구는 미군에, 누구는 독일군에 입대해 서로 총을 겨눴다. 모국을 따로 가진 다민족국가에서 개인의 선택을 뭐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같은 특수한 예외를 뺀다면 이민 3대 정도만 지나도 모국을 잊게 된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 식민지에서 영국을 지지하는 왕당파 민병대보다 독립파 민병대가 훨씬 많았고, 그래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고산국과 제국에 귀화했던 중국인들이 다시 귀국한 것은 수구초심이 아니라 기회를 찾아 떠난 것뿐이었다. 인재 유출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폐하! 북명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이른바 귀국인 지도자들은 참수당하거나 산골짜기, 혹은 도시 뒷골목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젠 둘이 남았는데 차장은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나?”
“현재 남명과 촉나라의 병력 동원 능력을 감안하면 촉나라가 조금 더 유리합니다. 하지만 인재를 영입해 그들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도록 제도화하는 힘은 남명이 압도적입니다. 부정부패와 무능의 대명사였던 예전 명나라와 과연 같은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소수민족을 전쟁에 동원하면서 그들이 독립을 꾀할 가능성까지 차단했어. 아주 훌륭하다고 봐야지.”
합동참모본부에서 예상한 여러 가지가 계속 깨지고 있었다. 유사시 남중국의 소수민족을 자극해 독립운동을 벌이게 하는 것이 합참의 선택사항 중에 하나로 있었으나, 남명에서 발 빠르게 움직인 바람에 앞으로 써먹기 어렵게 됐다.
“국가 위기상황에서도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명나라에도 있긴 있었습니다. 예전 북경의 조정은 위아래가 다 같이 썩어서 참으로 끔찍했었는데 남경에 가면서 전혀 달라졌습니다. 폐하께서 북경의 고위관료들을 직승기에 태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청백리 충신들이야 당연히 어느 나라에나 있지. 하지만 좀 더 일찍 그런 사람들을 중용했다면 이런 위기에 몰리지도 않았을 거야.”
부패한 자는 결코 유능할 수가 없었다. 고위 관료가 뇌물 1원을 받으면 국가예산 최소 100원이 허공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끗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무능하더라도 조직 내 정치를 잘하는 사람이 승진할 가능성이 높았다. 인사가 만사는 아니더라도, 이런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것이 조직의 수장이 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숭정제가 남명에서 권력을 이미 잃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확인해보니 과연 황제는 후원에서 술만 마시고 있다고 한다. 실권은 어린 황태자가 쥐고 남경의 제2 조정을 움직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퇴위 전에 명나라 문제가 해결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