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6 106. 제국 선포 =========================================================================
군주들과 외교관들이 대전에서 만찬에 참가하는 동안 현무대로와 주변 공원, 광장에서도 잔치가 벌어졌다. 축하객들은 곳곳에서 열린 곡예단과 무용단의 공연을 구경하면서 맹렬한 속도로 하사품을 먹어치웠다. 하객 백만 명을 예상했다가 그 두 배 이상이 몰리자 애꿎은 요리사들만 밤낮으로 일하느라 죽어 나갔다.
축제는 일주일 동안 계속될 예정이며 수도 외에도 전국에서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닭 4억 마리, 돼지 2천만 마리, 소 천만 마리가 이 기간 동안 도축됐고 각종 생선 백만 톤이 소비됐다. 축제에 사용하기 위해 도시마다 비축해놓은 쌀과 밀, 꿀과 소금, 각종 술과 과일의 재고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대관식 때 백성들에게 음식을 공짜로 베푸는 것은 이 시대 군주의 의무였기에 물자를 아낌없이 풀었다. 어차피 식품과 주류가 항상 남아돌아서 이 기회에 약간 소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또한 백성들이 군주에게 얻어먹은 만큼 충성심이 오른다고 믿었기에 근검절약의 대명사 혜영도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황태자! 식품을 비롯한 물자 소모량과 비용을 계산해서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을 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책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나옵니다. 책의 본문 첫 장을 펼치자마자 모든 나라의 재상들이 기절할 것입니다.”
대관식 전에 이미 세계 모든 나라에 선물을 보냈다. 군주와 귀족들에게는 보석과 진주 같은 귀중품을, 일반 백성들에게는 고기와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를 위기로 받아들여 긴장하는 군주가 있다면, 영민한 군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었다. 제국이 소유한 무한한 부를 자랑하면서 국제적 영향력과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정치적인 이벤트였다. 북미 원주민이나 남태평양의 추장들이 부와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벌이는 포틀래치(potlatch), 선물 교환 정치가 지구 규모로 진행된 셈이었다. 조선 후기에도 고을 수령이 양반들에게는 부채를, 농민들에게는 돈과 고기를 나눠주는 선물 정치 관습이 있다.
무제한으로 푼 하사품 외에도 이민호가 쥔 홀에 달린 커다란 루비와 황후, 황태자, 황비들의 왕관에 박힌 루비와 다이아몬드, 흑백 진주목걸이가 각국 상류사회에서 회자될 것이다. 제국 황실에서 보석은 남아도는 것이었고, 곡식창고와 가축 숫자는 일이 년 지나면 금방 채워질 거라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제국의 발전과 인류 평화를 위해 건배합시다. 건배!”
“건배!”
제국 선포식을 겸한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외국 군주들을 상석에 모셨다. 아프리카 제국 황제 므부투 2세와 오스만제국 황제 무라트 4세, 모든 루스인들의 차르 표도르 2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한 자리에 모였다.
므부투 2세가 다른 군주들로부터 이민호에 이은 강대국의 황제 대우를 받았다. 영토 넓이와 인구, 경제력과 대륙에서의 영향력, 보유한 군대의 양과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당연한 대우였다.
이민호가 오스만제국 황제의 보호자이므로 무라트 4세가 안심하고 이스탄불을 비워둔 채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권력자들은 괜히 불순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예전처럼 하늘에서 군대가 내려올까 두려워했다.
무라트의 형제와 자식들은 예전과 달리 감금된 채 양육되지 않았다. 그러나 무라트의 자식 20명 중에서 16명이 어린 나이에 죽었고, 곧 죽어갈 운명이었다. 고산국에서 유학한 궁정의사들이 보살피는데도 전염병이나 각종 사고로 아이들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무라트의 하렘은 기존 전통에서 벗어나 특이하게 구성됐다. 선대 황제들과 달리 황궁에 바쳐진 여자 노예가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고관대작이나 주변국 군주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확실히 무라트는 근대적 군주였으나, 실제 역사에서는 자기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다.
군주들의 배우자는 황후 혜영과 같은 식탁에 앉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전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를 황후와 왕비들에게 선물로 줬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브루나이 술탄과 에이레 공화국 총리, 베네치아 도제를 비롯한 속국 군주, 혹은 대표자들은 황태자가 접대했다.
“남자는 역시 힘이죠.”
막간을 이용해 20대 중반의 무라트 4세가 재롱을 피웠다. 60kg짜리 메이스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고 50kg이 넘는 양손검을 붕붕 바람소리가 나도록 휘둘러 다른 군주들의 기를 죽였다. 황실 주치의가 평범한 인간의 뼈와 근육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움직임이라면서 놀라워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오스만제국 황제 무라트 4세는 군대의 맨 앞에서 돌격하는, 역사상 마지막 전사 황제라고 불렸다. 그의 용력은 이 시대에도 거의 전설 취급을 받지만, 그가 실제 전쟁터에서 사용한 무기들은 현대에도 톱카피 궁전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저 같은 사람은 화약무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항우의 역발산기개세를 현실에서 보는구먼. 하지만 오스만제국 황제가 아쉬워할 이유는 없지.”
“그건 그렇습니다. 제가 재주를 보여드렸으니 황제폐하께서 한 잔 따라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허! 환자가 술을 마시면 못 써. 황제가 오래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무라트 4세는 담배와 커피를 몹시 싫어해서 걸리는 족족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슬림답지 않게 무라트는 술을 너무 좋아했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지금으로부터 겨우 3년 후인 1640년, 27살 나이로 간경변이 악화돼 사망한다. 현재 무라트는 제도 티완의 제국병원에서 엄중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술 좋아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다.
“폐하께서 제국을 선포하시니 이제야 제대로 된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왕국이 제국 선포가 너무 빨랐지.”
고산국이 따뜻한 바다의 제국, 통칭 제국이 되자 므부투 2세가 가장 기뻐했다. 제국이 성장을 멈추고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대한 대책은 제국 의사들도 아직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토착병과 거주지 위생 문제는 인구 증가를 꾀하는 아프리카 제국 최대의 현안입니다. 부디 이른 시간 내에 말라리아 완치제가 개발되면 좋겠습니다.”
“그건 우리로서도 어려운 이야기야. 그래도 감염환자 사망률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서 다행이야.”
“이 모든 게 다 폐하 덕분입니다.”
요즘은 아프리카 제국에도 의사와 의학자들이 충분히 배출돼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도 불가능한 완치제 개발이 이 시대에 완성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크리스 자네는 왜 조용히 있나?”
“남미에 사탕수수 농사를 지을 땅도 빌려주고, 독일 용병들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해주고, 무역에서도 특혜를 주고, 항상 고마워. 자네에 비하면 나는 너무 무능한 군주 같아.”
“또 그런 소릴! 힘내게, 크리스. 자넨 모든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재위 중에 인구를 두 배로 불렸지 않나? 최소한 유럽에서는 자네만 한 성군은 없다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민호와 비교하면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독일 내전에서 좀 더 잘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이미 지난 일이었다.
“표도르도 조용하네? 혹시 마르그레타하고 문제가 있나?”
“아! 전혀 아닙니다. 제가 요즘 철학 연구에 빠져 있어서 그럽니다.”
“국정은 어떻게 하고?”
“황후가 잘하고 있어서 굳이 제가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차르는 전쟁과 외교에 주력하고 내정은 꼼꼼한 차리나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지.”
그러나 루스 차르국의 국경이 안정되면서 차르가 할 일이 아예 없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쪽 우랄산맥은 제국과의 국경이었고 남쪽 평원은 기마민족 토르구트의 영지라서 분쟁이 일어날 일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토르구트 기병들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이후 이민호의 눈에 벗어날까 두려워하는 폴란드 귀족들이 루스 차르국과의 국경분쟁을 극도로 꺼렸다.
마르그레타가 황후가 되면서 토지귀족 보야르들이 이민호 눈치를 보느라 반란 가능성도 사라졌다. 할 일이 없는 차르가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가 데카르트 공작의 권유로 철학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근무 시간에 철학 연구를 할 수는 없어서 요즘에도 계속 황후의 경호를 맡고 있습니다.”
“그건 차르가 할 일이 아니지. 작은 지방 도시 건설을 차르가 맡아보면 어떨까?”
“그런 일은 황후가 훨씬 잘하니까요.”
마누라에게 권력을 통째로 빼앗긴 표도르 2세의 신세한탄에 공감한 이민호가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가 두 사람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나, 똑똑한 마누라를 두었으니 그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 자명했다.
옆자리에서 윤지가 소수의 포르투갈 독립군을 활용해 세 배나 되는 에스파냐 군대를 격파한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표도르 2세와 달리 주앙 4세는 군대마저도 마음대로 지휘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폐하께서 자식들을 아주 잘 키우신 것 같습니다.”
“마르그레타처럼 윤지도 제국이 아니라 자국을 위해 일할 테니 걱정 말게. 에잉! 불효막심한 것!”
앞으로 주앙 4세가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유럽에서는 외국 왕실에 시집가더라도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모국과 강력히 연결되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런 경우가 잦았는데 이민호의 딸들은 반대로 애비에게서 뜯어내지 못해 안달을 했다.
그러나 이는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했다. 고산국과 정상적인 교역이 지속됐다면 무역적자와 금 유출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경제적 식민지가 되기 전에 전면적인 경제공황이 먼저 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민호와 혜영이 외국으로 시집간 공주들의 요구를 적당한 선에서 들어주는 편이었다.
“크리스티나! 이제 곧 열한 살이 되는구나. 제도를 본 감상이 어때?”
“따뜻하고 간식도 다양해서 참 좋아요, 폐하. 저는 스웨덴의 여왕이니 여기서 살면 안 되겠죠?”
“섭정들에게 교육 핑계를 대면 일 년 중 한두 달은 제도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추운 겨울에 올래요!”
크리스티나가 좋다고 웃어댔지만, 여왕 뒤에 배석한 스웨덴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크리스티나의 스승인 데카르트 공작이 조금 더 힘을 쓴다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이민호는 손자들 중에서 황태자의 셋째아들을 크리스티나하고 엮어볼까 하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
“황제폐하! 이 불쌍한 아녀자에게 남편을 구해주소서! 어서 강력한 남편을 얻지 못하면 조만간 지방 토호들에게 술탄의 위를 빼앗길 것 같습니다.”
“그래. 선대 술탄이 걱정하던 때가 왔구나. 술타나를 위해 아직 장가를 못 간 노총각 황자들과 선을 볼 기회를 주겠다.”
이민호가 다른 자리에도 들러 속국 대표자들에게서 주청을 직접 받았다. 결국 아체 여술탄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아내 세 분이 계신 분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더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무슬림으로 골라주소서.”
“결혼 결정은 당사자끼리 한다. 술타나도 후보들 중에서 잘 골라보아라.”
이민호가 꼽은 후보들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브루나이 공주들의 아들과 손자 몇 명, 그리고 아체 술탄국과 혈연관계를 맺은 공군 대장 이면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이면이 아버지 충무왕을 핑계로 대면서 사양하는 바람에 무슬림 황자들만 선 자리에 내보내기로 했다.
“윤지 너!”
“헤헤! 마음에 드는 남편감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좀 봐주세요, 아바마마.”
윤지가 일곱 살 이후로 보기 힘들었던 애교를 피우자 이민호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무의식 속에서 제우스처럼 딸들을 영원한 처녀로 남겨두고 싶어 하지만 아르테미스나 아테나 같은 딸은 몹시 드물다.
“쳇! 알았다. 귀국하기 전에 합참에 들러서 전략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편이 좋겠다. 합참에는 일러두었다.”
“고마워요, 아바마마! 딱 독립까지만 하고 절대로 에스파냐를 정복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반드시 예전 국경선을 준수할게요.”
철없는 공주에게는 대제국 에스파냐도 한 주먹거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윤지에게 그럴 실력이 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다만 왕실 가족들이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윤지가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에게도 그 약속을 관철시킬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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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나라들은 생략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