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4 106. 제국 선포 =========================================================================
“아바마마! 외국의 축하 사절단 대부분이 황도에 도착해 외교부에 신고를 마쳤습니다. 사절단은 대사관 공관과 외교관 사택, 선박에서 숙박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제국 선포식을 며칠 앞두고 황도 티완과 새목포, 새인천 등 수도권 도시들에 백만 명 넘는 축하객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황도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웅장한 황궁과 넓은 도로, 높은 건물과 매끈하고 소음이 적은 전철 등 각종 현대적 시설에 잔뜩 매료돼 있었다.
“중요한 행사인데 평온하게 잘 치러지겠구나. 내년 초에 있을 대관식도 이번 일을 참조하면 쉽게 진행될 것이다.”
이민호가 황태자와 함께 황궁 본전 건물의 3층 테라스에 올랐다. 광장을 겸하는 황궁 앞 주작대로에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후 제국 선포식에 백만 명 이상이 운집할 곳이었다.
축하객들은 황실에서 무제한 무료로 제공하는 술과 음식, 각종 볼거리에 잔뜩 흥이 나 있었다. 거리에 동전을 뿌리고 다니는 관리가 없다는 점을 빼면 유럽의 대관식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바마마. 감상에 젖으실 때가 아니옵니다. 오늘은 앞으로 속국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책 방향을 지도해주시옵소서.”
“그래. 내 팔자에 무슨 구경이냐? 일이나 해야지.”
말없이 광장을 지켜보던 이민호가 황태자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집무실로 향했다. 총리 혜영과 황태자비가 세계 지도를 펼쳐놓은 채 이민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가 워낙 커서 학생들이 지리 공부하기 힘들겠어.”
“호호! 적당히 넓히지 그러셨어요?”
이민호가 끝도 없이 정복 사업을 벌이는 동안 자금을 대면서 내정을 안정시켰던 혜영은 할 말이 참으로 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영토란 넓혀놓을 기회가 있을 때 넓혀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기에 혜영은 묵묵히 내조만 했었다.
고산국은 북미주, 남미주, 호주, 태평양주, 몽골주, 여진주, 동서 시베리아주와 티완과 고북 양도(兩都)로 구성돼 있었다. 각 지방이 지나치게 넓었으나 대부분 지방에 아직 인구가 희박해서 발전 양상을 지켜보면서 지방을 분획하기로 했다.
북미 내륙 평원과 남미 아마존 강 유역, 시베리아 깊은 삼림이나 남태평양 절해고도에는 아직도 국가에 복속하지 않은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차차 국가체계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지식과 체력으로 단단히 무장한 모험가들 집단인 탐사전단이 앞으로도 계속 활동해야 할 이유였다.
“불경기가 닥쳐서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지면 일단 수도로 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몰려오다 보면 대책이 없다.”
“수도는 상징적인 역할만 하면 충분하고 대신 지방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래도 수도 거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리는 셈입니다.”
지구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 중에서 특히 북미와 남미가 맹렬한 속도로 개발되고 있었다. 철도와 도로가 각 지방과 도시를 엮고 촘촘하게 구성된 항공망이 이동 시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태평양을 질주하는 고속냉동선들 덕택에 알래스카 연어와 새강릉의 청게, 아이누 섬에서 난 감자와 호주에서 생산한 소고기를 티완의 시장에서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싱싱한 재료에 혜진이 개발한 조리법이 결합되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양적 성장이 지나쳐 불균형에 처했다는 평가를 받는 고산국은 아직 여러 분야에서 성장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음식문화에 한해서는 지상천국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았다.
“맞다. 지방에서도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굳이 수도로 몰려들 이유가 없다. 그리고 개척마을이 차차 발전해서 도시로 성장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상하수도와 자급자족할 규모를 갖춘 도시가 한 번에 들어서는 편이 낭비가 적다.”
“예, 아바마마. 하지만 북미 한 곳에서만 도시를 매년 열 개씩 건설해야 합니다. 장래에 확장할 것도 미리 대비해야 해서 보통 일이 아닙니다.”
“훗! 아직 여유가 있구나.”
어느덧 도시 건설의 전문가로 떠오른 황태자가 과로로 잘못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래로 권한을 이양하고 황태자는 최종 결정권만 갖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도시 확장과 건설로 인해 사적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공무원들이 세부적인 도시계획을 수립해 황태자에게 보고하는 식으로 업무가 진행됐다.
“인구가 느는 대로 성장이 계속될 것입니다. 아국이 내적 성장에 주력하는 동안만이라도 외부가 안정됐으면 좋겠습니다.”
“윤지와 자랑이가 잘하고 있더구나. 우리 군을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윤지는 포르투갈 왕비라서 공적인 자리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작전계획서를 들고 주앙 4세가 왕궁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그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서 나왔다고 한다.
포르투갈 독립군은 에스파냐 국왕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한때 포르투갈 기병군이 에스파냐 영토 깊숙이 쳐들어가 마드리드를 위협하기도 해서, 에스파냐 국왕군이 함부로 리스본으로 진격하기 어려워졌다.
명나라 황태자 주자랑도 내정과 외정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부황 숭정제에게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으려 했으나, 지금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북경을 탈환하러 보냈던 100만 대군이 얼마 전에 4분의 1로 줄어들어 귀환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보다 적은 병력인 10만으로 남경 주변 지방들을 확실히 장악해나갔다. 농민반란군이 휩쓸고 지나가 한때 붕괴됐던 지방행정체제가 어느덧 회복해 남명 정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어린 황태자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사방에서 반발이 거세졌다. 특히 숭정제가 퇴위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가위란의 순간에 황태자가 다른 일을 못하고 며칠 동안 석고대죄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숭정제가 전면에 나서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남명의 황제군이 대패를 거듭했다.
“혹시나 우리 군이 외국 원정에 나서더라도 국내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내수경제 규모가 커졌다는 뜻이다.”
“병력은 적지만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입니다.”
이 시대에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국가가 아시아 외에는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산국 병력이 적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 광대한 영토와 대양을 지키기에 30만 병력으로는 확실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구가 늘면 적당히 더 늘려도 된다. 젊었을 때 공짜로 외국 구경도 하고 좋지 않으냐?”
“해외여행을 하면 애국심이 높아진다고 하더군요. 해군과 해병대 외에 에이레나 핀란드, 이집트 주둔군을 잘 활용해야겠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선진국을 여행해도 애국심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후진국을 여행하면 애국심이 더욱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 모든 나라가 고산국에 비해 후진국이었으니 애국심 고양을 위해서라도 국가적으로 해외여행을 장려할 만했다.
“예전에 에스파냐로부터 아소르스 제도를 매입한 것을 두고 이번에 포르투갈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원래 포르투갈령인데 에스파냐가 아국에 매도했으니 문제를 삼을 만합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에스파냐의 지배를 무력봉기로 거부하던 아소르스 제도 미구엘 섬의 주민들은 고산국의 지배를 반겼다. 여기서 포르투갈이 개입할 일은 사실상 없었으나, 명목상 포르투갈 영토였으니 한 몫을 떼어주기로 했다.
“포르투갈 고위 귀족의 영애를 차기 고산국 황제의 황후로 데려가는 대신 지참금으로 주겠다는데 황태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억! 저는 싫습니다, 아바마마.”
“잠깐 생각만이라도 해보고 나서 거부하세요,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단숨에 거부하는 바람에 황태자비로부터 큰 점수를 땄다. 그러나 자그마한 영토를 얻자고 20년 가까이 키운 차기 황후를 교체할 수는 없었다. 능력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키워진다는 것이 고산국 왕실 가족들의 신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의 딸 카타리나를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의 왕비로 시집보내면서 북아프리카 탕헤르와 봄베이의 일곱 섬을 지참금조로 잉글랜드에 넘겼다. 봄베이의 일곱 섬은 이후 잉글랜드가 인도를 정복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으며, 간척사업을 통해 합해지고 육지로 연결됐다.
고산국이 유럽 국가들과 국혼을 맺기 곤란한 이유 중에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고수하는 일부일처제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합법적 결혼관계에서 낳은 자식 외의 서자를 죄인 취급하며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유럽식 상속 제도를 받아들일 경우 여차 하면 고산국과 전혀 관계없는 외국인을 군주로 맞아들여야 할 수도 있었다. 고산국에도 승계에 관한 법이 있지만, 유럽 국가들이 이를 부정할 경우에는 계승전쟁을 벌여 승리해야 한다. 강대국인 고산국이 굳이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문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럴 줄 알고 결혼 지참금 대신 포르투갈의 부채 일부를 탕감해주기로 했다. 벌써부터 영토를 넘길 생각을 하다니,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다.”
“에스파냐가 전쟁을 하면서 해외영토를 다 팔아먹었지요. 하지만 포르투갈이 가진 해외영토라곤 브라질을 제외하면 항구도시 몇 개에 불과합니다.”
“마카오처럼 포르투갈 소유라고 하기 어려운 곳도 많다. 앞으로 포르투갈과 영토매매 조약을 체결할 때 조심하도록 해라. 특히 인도의 항구도시를 포르투갈에 돈을 주고 살 필요는 없다.”
고산국 입장에서 무역을 위해 외국 항구를 이용하면 그뿐, 굳이 항구 소유권을 유지하려고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19세기까지는 제국주의가 우세하겠지만 20세기부터 결국 민족주의가 압도하게 된다.
강대국의 과거가 영광이 아닌 죄악으로 비판받을 것을 아는 이민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고산국은 제국주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리고 속국들은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시켜주겠습니다. 그 중 일부는 아마도 직할령으로 편입될 것 같습니다.”
“아예 이번에 잡다한 속국들을 정리해서 단순화시키는 게 좋겠구나.”
이민호와 황실 핵심 가족들이 고산국을 종주국으로 삼는 속국들을 차례로 점검했다. 각자 민족과 문화와 역사가 다르고 현재 상황이 다르고 고산국에 속국으로 편입된 시기가 달랐으나 다들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서 이민호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동해여진은 직할령인 여진주에 흡수되면서 소멸하고 아이누 섬도 주민들의 요청으로 조만간 같은 길을 걷게 될 것 같았다. 명나라 영토인 해남도와 복건 차밭은 명나라 작위를 가진 제후 고산국왕의 개인 영지였기에, 제국을 선포한 후에는 다른 소유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규슈와 혼슈 서부는 왕실 직할령이었다. 시코쿠는 명목상 일본 영토이긴 한데, 규슈 총독부를 통해 간접 지배를 받는 소규모 다이묘들이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
유구국, 브루나이, 토르구트, 티베트, 에이레, 베네치아, 이집트, 핀란드, 아체는 따로 군주가 있거나 자체적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속국들이었다. 그리고 루스 차르국과 동남아의 여러 무역 소국들은 명목상 독립국이었으나 사실상 고산국의 속국이었다.
“유구국과 브루나이, 토르구트는 앞으로도 계속 속국 체제로 엮고, 이집트와 핀란드는 방계 왕국으로 설정해 독립을 지원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나머지는 차차 독립시키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독립시켜준다고 하면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두려워할 것 같습니다.”
“떠밀려서 독립한다 해서 아국의 영향력과 보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설득해봐라. 특히 동남아의 무역 소국들이 죽기 살기로 매달릴 것이다. 자바 섬 전체를 연방으로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열대 지방 특유의 풍토병 때문에 소국들을 직할령이나 속국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했다.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자국의 관리나 군인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황실의 핵심 가족들은 단 몇 마디 말로 세계를 경영하고 있었다.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석공이나 빛 같은 이상한 단체들이 만에 하나 실존한다 하더라도 이들 네 사람보다는 세계적 영향력이 훨씬 적을 것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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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