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3 106. 제국 선포 =========================================================================
새 수도 전체에서 제국 선포식을 위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됐다. 주작대로와 주변 건물을 단장하고 새 수도는 물론 새목포와 새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위성도시들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행사가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도 호텔과 여각, 숙박업소 객실은 예약이 이미 끝났고 대학교 기숙사 절반과 입주 전 공실인 공동주택을 관광객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내외 축하객들이 끝없이 몰려들어 여차 하면 수도 주변 사막과 산기슭에 천막이라도 쳐야 할 판이었다. 숙소가 부족한 나머지 관광객들이 타고 온 여객선을 선포식 기간 중에 숙소로 제공하기로 했다.
“폐하! 연습을 좀 더 실제처럼 하세요.”
“민망하잖아. 옷과 장신구가 너무 치렁치렁하고.”
일주일 예정인 제국 선포식의 핵심 행사는 고산국 국왕이었던 이민호의 황제 대관식이었다. 그리고 혜영의 황후 대관식이기도 했다. 예행연습 내내 혜영이 웃으며 이민호의 소극적인 태도에 지적을 퍼부었다.
“옥좌에 좀 더 느긋하게 앉으세요. 키가 큰 폐하께서 꼿꼿이 앉으면 다른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폐하께 황관을 씌워주기 어렵잖아요.”
“관이 쓸데없이 무거워. 내가 파라오나 교황도 아닌데 오중관은 도대체 누가 생각해낸 거야?”
“폐하께서 오대륙, 오대양의 지배자시니까 당연히 오중관을 쓰셔야죠.”
혜진과 주상아 공주, 비올레타와 헤드비히 공주, 아라 공주, 그리고 포카혼타스가 황비로 지명됐다. 모두가 제국 건설에 기여한 바가 컸기에 당연한 인선이었지만, 민영과 민희 등 여진 호위들은 끝내 황비 지명을 사양했다.
대관식 때 오중관을 쓰되, 교황 같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민족의 대표자로부터 관을 받기로 결정했다. 조선 혈통 북미의 중년 농민, 남미의 원주민 상인, 여진족 혈통이며 옛 본토인 고산도 출생의 젊은 군인, 호주 장영실 항에서 근무하는 과학자의 어린 딸, 남아프리카 금광에서 일하는 흑인 광부의 어린 아들이 차례로 이민호에게 관을 씌워주었다.
“무거워. 이집트는 독립시켰고 남아프리카도 돌려줘야 하니 아프리카는 빼지 그래?”
“어머! 알리 파샤이시며 이집트 총독 대리이신 이순신 상원수님께서 섭섭하시겠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참으로 많았다. 어려서 작은 섬나라를 세워 세계를 아우르는 대 제국으로 성장시키는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보냈다. 인구는 국력이라는 정책을 솔선수범해 자식도 많이 낳아 훌륭하게 길렀다.
그리고 의학 발전과 종자 개량, 농법 개량을 주도해 소빙기가 오는 와중에도 세계 인구를 두 배로 불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외국에서 고산국의 칭제를 용인하고 축하하는 것은 군사력과 국력 때문이 아니라 타국의 모든 인간들에게 베푼 은혜를 진심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라 이름을 왜 저렇게 정한 거야? 순우리말이면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렵잖아.”
“외국어로 번역할 필요 없어요.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우니까요.”
혜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민호는 대한제국이나 대고려가 국명으로 정해지고 한자어와 라틴어 이름이 부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거대한 대전 기둥에 매달린 깃발부터 주작대로 가로등마다 길게 늘어뜨린 깃발에는 ‘따뜻한 바다의 제국’이라는, 이민호가 보기에도 촌스런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혹시 저게 내가 지은 이름이라고 투표에 참가한 백성들에게 알려줬어?”
“네. 폐하께서 이름을 제대로 못 짓는 것은 여전하대요. 잘하든 못하든 일관되면 그게 매력으로 작용하기도 하나 봐요.”
“나는 촌스런 매력을 지녔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괜히 국명을 두고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어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국명을 두고 혜영과 이야기하는 동안 세자와 황비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자, 아니 황태자는 성군이 될 거야.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을 발전시켜 모든 백성들이 발전의 혜택을 누려야한다는 황태자의 말이 옳아.”
“예. 그러니까 명나라 내전과 포르투갈 독립전쟁을 올해 안에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참전하지 않으면 절대 무리야.”
참전하지 않더라도 전쟁을 당장 끝내라고 외국에 압력을 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 동안 쌓인 적대감을 지금 해소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명나라 황제가 북경을 탈환하기 위해 100만 대군을 북쪽으로 진군시켰다. 그러나 고향이 반란군에게 점령된 병사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 관군이 북경에 접근했을 때는 병력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북경을 점령한 농민반란군은 황궁과 시내에 대한 약탈이 끝난 후 예상한 대로 병력이 절반 정도 줄어들었다. 관군 50만 대군이 공격하고 농민반란군 100만 대군이 북경성을 방어하는 식으로 전투가 오래도록 전개됐다.
이 와중에 산서 순무 원숭환이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다음 남경으로 끌려가서 능치처사를 당했다. 북경과 사천의 반란 세력이 서로 연락할 길을 차단하고 있던 요지 태원을 원숭환 대신 부총병 모문룡이 맡았다.
그러나 태원을 지키던 관군의 군율이 점차 무너지고 모문룡이 자체 보급을 추진한다면서 주변 농촌을 약탈해 스스로 위기에 빠졌다. 반란군에 귀순한 홍승주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간단히 함락시켰다.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모문룡은 부하 공유덕, 상가희 등과 함께 반란군에 투항했다.
“충신은 역적으로 몰려 죽고 역신은 승승장구하는구나.”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상황 전개입니다.”
이민호는 매일 같이 합동참모본부에 가서 명나라 내란과 포르투갈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을 살폈다. 사천에서는 촉나라 대장군 장헌충이 촉왕 장헌국을 독살한 다음, 장헌국이 남겼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서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장헌국을 후원하던 세력을 같은 지역 출신인 장헌충이 고스란히 흡수해 세력이 단일화되면서 촉나라가 더욱 탄탄해졌다.
장헌충은 고영상이나 이자성처럼 농민반란군 지도자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의외로 국가 운영에도 훌륭한 자질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명나라 관군이 북경성을 공략하는 동안 장헌충은 차근차근 주변 지역을 장악해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장헌충이 하는 짓을 보면 결코 장비의 후손답지 않아.”
“진짜 장비의 후손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은 세력구도가 몹시 유동적이지만 적당히 고착되고 나면 우리가 나서서 삼자협상을 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원수를 져서 협상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삼국지에 등장한 무장들과 달리 세 세력을 이끄는 자들은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세 세력 모두 기반이 되는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느라 가족들이 고향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보통 가족이라 하면 직계가족보다는 문중이나 일족 전체를 뜻했다.
세 세력은 적과 맞서 싸우기 전에 먼저 적장의 가족을 붙잡아 협박을 하다가 결국 죄다 죽여 버렸다. 가족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복수를 부르짖는 자들이 모든 세력 통틀어 수천 명에 달했다.
“세 세력이 직접 협상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각자 아국과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개격파를 할 일은 없더라도 배후 조종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외세가 개입할 염려가 없어서 내전이 더욱 치열한지도 모르지. 그런데 바닷가에 가까운 북명과 남명이 유리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촉나라가 가장 인기가 높다지?”
“예, 폐하. 촉나라가 내륙에 웅거한 탓에 아국에서 군량을 매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이 고산국에 적대감을 갖지 않더라도 묘하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편의상 명칭인 남명과 북명이 고산국에서 군량을 수입하는 반면, 촉나라는 군량을 자체 해결하고 있었다. 고산국에서는 명나라 양민들이 굶어죽을까 우려해 중립적인 곡물 수출에 나선 것에 불과했으나, 이를 군사적 지원으로 인식한 명나라 농민들이 촉나라를 지지하는 경향이 커졌다.
“중화사상이란 게 참 대단해. 그 무엇도 중국 위에 놓을 수 없다는 거지?”
“명나라 백성들이 고산국에 비해 자랑할 건 과거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고산국이 더 크고 강하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것입니다.”
“중국 역사상 흔했던 내전 때처럼 양민들이 떼로 굶어죽을 염려가 없으니 당분간은 내버려둬.”
이때 묘족은 버마의 산족으로부터, 장족은 안남으로부터 화약무기를 대량 입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산간지역에 흩어진 소수민족들이 서로 연락을 활발히 주고받는 정황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고산국 첩보원들에게 여러 번 포착됐다. 조만간 운남과 광서에서 소수민족들이 대규모로 봉기할 것 같았다.
이민호는 소수민족들의 움직임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티베트와 위구르족이 명나라 영토를 침공하려는 기도를 포착해 일단 무위로 돌려놓았다. 명나라가 안정된 다음 괜히 반격의 빌미를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독일 내전에서는 황제나 신교 연맹에 고용된 용병들이 약탈을 통해 봉급과 보급을 충당하는 바람에 나라 전체가 엉망이 돼버렸다. 그러나 현재 명나라에서는 관군과 반군 양쪽 다 일단 보급체계를 갖춘 덕에 농민을 수탈하지 않고도 전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여유를 갖고 내전을 차분히 구경할 수 있게 됐다.
“차장은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얼마나 끌 것 같은가?”
“유럽에서 전쟁이 났다 하면 기본이 10년 아닙니까?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현재 59년째입니다. 포르투갈이 독립에 실패한다면 오래 끌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성공한다면 네덜란드보다 더 길게 전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80년 전쟁이라 불렀다. 중간에 휴전 기간까지 포함해 156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원래 1640년에 시작돼 1668년에 끝난다. 그리고 포르투갈-네덜란드 전쟁은 1602년부터 1663년까지 전 세계를 배경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실제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1592년에 시작돼 1598년에 끝났다. 그러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기간은 임진년과 계사년, 그리고 정유년과 무술년에 한정됐고 중간 3년 동안은 사실상의 휴전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휴전 기간이 훨씬 짧은 편이었고 바다와 육지에서 매년 몇 차례씩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가면서 싸웠다.
“포르투갈 독립전쟁도 오래 끌 것 같아 걱정이야. 전쟁 중에 우리 대서양 함대를 위해 포르투갈에 군항을 빌려달라고 하기엔 양쪽 눈치가 보이잖아?”
“만약 윤지 공주님이 적극 돕는다면 단기간에 끝낼 것 같습니다.”
“그럼 효녀지. 윤지가 꽤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니까 설마 마드리드를 점령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을 거야.”
고산국이 에이레 독립군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에도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럼 에이레처럼 포르투갈이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더라도 부채를 청산하기 전까진 채권국인 고산국에 모든 국가정책이 휘둘리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에이레처럼 포르투갈에 무기를 지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윤지 공주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술이 포르투갈 군에서 아주 강력한 무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만약 포르투갈을 잃게 되면 세계 영토 절반을 잃는 셈입니다. 에스파냐가 몰락해도 상관없겠습니까?”
“에스파냐는 이미 몰락했다고 봐도 돼. 두 나라가 큰 피해 없이 적당한 선에서 종전을 했으면 좋겠어.”
한때 고산국의 최고 우방이었던 에스파냐는 단물을 쪽 빨린 다음 이민호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북미와 남미 영토 매매 조약에서는 에스파냐가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팔아넘겨 고산국 상대로 사기를 친 셈이었다. 이민호가 알고도 당해준 셈이었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예. 그러나 지중해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에스파냐가 지나치게 약화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에스파냐 자체가 가망성이 전혀 없어. 본토의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꾸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발전상을 보면서도 여전히 농노제를 유지하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과 모리스코를 본토에서 추방한 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야.”
중남미의 은이 본토로 유입되면서 인건비가 어마어마하게 올랐지만 에스파냐가 아니라 프랑스 노동자들이 그 과실을 따먹었다. 은이 넘쳐나는 동안에 에스파냐 국내에 산업기반이라곤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본격적인 산업혁명 전인데도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공업생산력은 높은 편이었다. 아직 위그노를 추방하기 전이므로 프랑스도 충분히 많은 숙련노동자 숫자를 보유했다.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 독일은 고산국의 도움을 받아 농업생산성을 높였고, 스웨덴 역시 이민호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광산을 대규모로 개발했다. 유럽의 모든 나라가 급격히 발전하는 와중에 유독 에스파냐만 낙후된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의 신변 경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 없어. 에스파냐가 차장이 하는 생각 비슷하게만 했더라도 이렇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거야. 오락에 빠진 국왕과 극소수 총신으로 이뤄진 통치 집단이 지나치게 무능한 탓이야.”
펠리페 2세는 최소한 열심히 일했다 해도 펠리페 3세와 4세는 무능한 주제에 각자 수십 년씩 에스파냐를 통치했다. 직접적인 통치는 주로 총신을 통해 했으므로 국왕 외에 귀족 지배집단도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황실에서는 말씀을 조심하시면 좋겠습니다. 에스파냐 출신이신 비올레타 황비마마께 미움을 받으시면 어떡합니까?”
“주상아 공주 때 알았는데, 여자가 한 번 삐지면 싹싹 빌어도 절대 안 통하더군. 다 늙어서 마누라한테 제대로 밥을 얻어먹으려면 말을 조심해야겠지.”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 합참차장이 안쓰러운 눈길로 이민호를 바라봤다. 동병상련의 동지의식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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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다가 늦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