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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31화 (980/1,000)

01031  106. 제국 선포  =========================================================================

1637년 봄, <해양연감 1636년 판>이 발행돼 이민호의 손을 거친 다음 궁정 도서관에 입고됐다. 해양연감은 세계 모든 바다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매년 자료와 내용을 갱신해 발간하는 책이었다. 주립과 군립 도서관은 물론 각급 학교도서관에 비치됐고, 세계 각국에 주재하는 대사관과 외국 정부에도 책을 보냈다.

해양연감에서 팔라완 해 편을 펼치면 지난해에 현대 이름 남중국해를 거쳐 간 선박들의 명세, 이 해로를 통해 이루어진 무역액 추정치, 각종 해난사고, 어획량 등이 해도와 함께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또한 남사군도와 동사군도, 즉 스프래틀리 군도와 파라셀 제도의 유인도에 입항한 외국 선박들이 지불한 입어료, 입항료 명세서가 영인 형식으로 실렸다.

외국 선박 선원들은 팔라완 해 곳곳에서 항구와 등대를 운영하는 고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섬 항구시설을 이용했다. 항구에서 외국 선원들도 고산국이나 류큐국 선원들처럼 식수와 식량을 싸게 공급받을 수 있었고, 병원이 외국인에게도 개방돼 있어서 자국에서 치료받기 어려운 환자들이 배를 타고 이곳 병원을 찾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섬들과 주변 바다가 고산국 영토와 영해임을 주변 모든 나라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서 외국 선원들과 주고받은 모든 거래는 문서화돼서 보관됐다. 안남과 브루나이, 에스파냐 필리핀 총독부, 참파왕국 등 주변국들과 주고받은 외교문서와 함께 이 문서들이 해당 해역에서 고산국의 해양 주권을 증명하는 강력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이 책 하나 만드는데 자금이 얼마가 들고 또 공무원들이 얼마나 시달렸겠느냐? 그러나 이런 국가적 노력이 꾸준히 쌓여야 미래에도 영토와 영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이다.”

“전쟁만으로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힘이 우선하는 국제사회라 해도 항상 강한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매번 이익을 취할 수는 없었다. 더더구나 고산국은 다른 나라들의 위에 서는 제국을 칭하기로 했으므로 나머지 나라들을 두들겨 패기보다는 먼저 어르고 달래야 했다.

“미래에는 도서 영유권을 놓고 전쟁 없이 말로만 다툴 수도 있다. 차라리 한바탕 전쟁을 해서 승패가 확연히 갈리면 조약을 맺거나 역사서에 기록돼서 더 확실한 문서적 증거를 남기겠지. 하지만 이 시대에 어느 나라가 외딴 섬과 바다에 욕심을 내겠느냐? 이런 책이라도 꾸준히 발행해야 나중에 우리가 해양과 도서 영유권을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지금은 외국에서 관심이 없더라도 미래에 필요하게 되면 역사적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가 영토를 지키려는 명시적인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조선이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실시했더라도 조정에서 정식 관원들을 꾸준히 섬에 보내 관리했기에 울릉도 같은 경우에도 확실한 조선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때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에서 경제활동을 했지만 일본 어부들과 막부에서도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독도는 동래수군 안용복이 일본까지 가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해 일본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행정적 처리가 미흡해 나중에 일본이 노리는 빈틈을 주게 되었다.

필리핀과 보르네오 섬, 베트남 사이에 펼쳐진 현대의 남중국해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섬과 바다를 관리해달라고 외국에서 요구할까봐 걱정하던 주변 국가들이 남중국해 대륙붕이 자원의 보고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현대 중국은 외국의 반대를 무시한 채 암초를 인공 섬으로 만들고 역사 기록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심지어 옛날 동전을 무인도 바닷가에 뿌리는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이익이 안 되는 작은 섬들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인력과 자금이 소요되고 있다. 무인도를 지키는 등대지기는 얼마나 외롭겠느냐? 죽어라 말 안 듣는 원주민들이 서로 싸우지 못하게 말려야 하는 관리들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그러나 군주는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 선견지명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예, 아바마마. 당대에 이익이 안 되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땅과 바다를 지켜야 하는 것이 선조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아 깊은 원한을 사서 후손들에게 부담을 줄 일은 극도로 자제했다. 고산국은 일본을 제외하면 타국의 영토를 전쟁으로 빼앗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체계가 세워지지 않은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면서도 결코 무리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을 동등한 백성으로 받아들이면서 학살을 하거나 노예로 부린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원주민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천으로 향했던 관군 100만이 일단 남경으로 이동해 재정비를 한다는구나. 당연히 북경을 가장 먼저 탈환하려 하겠지. 태원은 산서 순무 원숭환이 계속 지키기로 했다.”

“명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균형이 맞춰지면 좋겠습니다. 이대로 영토가 고착된다면 우리가 미래에도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성격을 가진 반란군 조직 둘이 양립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맞다. 남경 정권을 놔두고 둘이 먼저 맞붙을 수도 있겠지. 남방에 소수민족이라고 해야 할까? 운남과 귀주, 광동에 사는 묘족과 장족 등 원주민들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현대 중국 영토인 신강위구르자치구와 청해성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감숙성 대부분 지역이 현재 명나라 영토가 아니었다. 티베트도 독립국이고 만주와 내몽골도 명나라 입장에서 외국 영토였기에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3분의 1 면적에 불과했다.

그것마저도 지금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고 언제 소수민족들이 봉기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중국 땅이 적당히 분열된 채로 국경선이 고착된다면 고산국 입장에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지금도 남경의 황제와 사천의 촉, 북경을 점령한 반란군이 각자 고산국에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주요 세력들을 조종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이상적인 상황이 됐다.

“북경을 점령한 자들이 대부분 농민이라 쳐도 그들 수뇌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활동하던 반란 수괴들이 이번 반란의 지도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신기합니다.”

“너도 예상하고 있지 않느냐? 아무리 명나라가 농업국가라 해도 약탈만으로 자그마치 200만 대군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 예상과 달리 북경을 점령한 농민반란군이 시간이 지나도 자체 붕괴되지 않았다. 조사해보니 북경을 점령한 농민반란군 200만 대군 중에서 치중병은 30만에 불과했다. 병참선 유지에 필요한 병력을 위험할 정도로 줄인 현대 미군에서도 불가능한 비전투 병력 비율이었다.

만약 마차 수만 대에 군량을 실어 날랐다면 치중병이 몇 배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반란군은 운하를 이용해 군량을 배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충성하는 관군에 의해 북경이 금방 탈환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도부가 이른바 귀국인들로 구성됐겠군요.”

“맞다. 우리가 군을 동원해서 굳이 황제를 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반란군은 우리가 저들을 도울 거라고 농민들에게 선전을 했던 모양이다. 거짓이 드러났고 약속한 금은보화를 나눠주지 못하게 됐으니 단기간에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는데, 귀국인들이 아국에서 배운 게 있을 테니 예상 밖으로 오래 버틸지도 모른다.”

고산국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방안은 전쟁 없이 이 상황이 고착되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명나라 내전에 고산국이 적극 개입해 단기간에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나라의 내전이 길어질 것 같다. 내가 재위하는 동안 해결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군사력을 투입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세자에게 부담을 주게 돼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아바마마. 상황에 맞게 전략을 세워놓았으니 앞으로도 예상 밖의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정은 혜영과 세자빈에게 맡겨놓고 남자들은 계속 외국 문제만 논의하고 있었다. 제국을 선포한 다음에 황제가 될 세자가 앞으로 국내문제에 신경 쓰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 같았다.

다행히 세자빈이 무연화약과 신관도 만들고 부총리로서 국정운영도 잘해서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외교와 군대는 세자가, 내정은 세자빈이 맡기로 했다.

“브라간사 공작 동 주앙(Dom João)이 주앙 4세로 즉위했다.”

“독립전쟁의 명분을 포르투갈 왕정복고에 두었으니 일찍 즉위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그 과정에서 해외 식민지 다수를 잃어 해양 강대국인 포르투갈 제국이 쇠퇴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에는 에스파냐와 동군연합이라는 이유로 공격하더니, 독립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느라 해외 식민지를 지킬 여력이 없는 틈을 네덜란드가 노린 것이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싸우면서도 브라질과 아시아에도 병력을 보내 네덜란드의 침공을 막아야 하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현재 네덜란드는 이민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적의 적인 포르투갈을 아군으로 인정했다. 덕택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각자 독립을 위해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됐고, 반대로 에스파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진행해야 하는 곤란에 빠졌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왜 울상이십니까? 포르투갈이 독립해야 해군기지를 정식으로 임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윤지 그 여우같은 것이 포르투갈 국왕의 대관식에 포르투갈 왕비 자격으로 참가했다.”

“아이쿠!”

공주 윤지는 이민호와 베네치아 시녀 제시카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리스본의 항해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자 엔리케를 연구하는 해양사학자가 되겠다더니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브라간사 공작, 현재는 포르투갈 왕을 낚아챈 모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주앙 4세의 왕비는 에스파냐 귀족,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후안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의 딸 루이사 데 구스만이었다. 원래 1633년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데, 주앙 4세가 에스파냐 공작의 딸보다는 고산국 국왕의 딸을 선택하면서 운명이 달라지고 말았다.

“어제 대관식 직전에 윤지가 보낸 전보가 있다. 세자도 읽어봐라.”

“‘아바마마. 좋은 남자를 만났어요. 몇 년째 사귀고 있는데 서로 애정이 변치 않아서 이번에 결혼하기로 했어요. 축하해주실 거죠?’ 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는 윤지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청년과 결혼하는 줄 알고 당연히 축하한다고 답신을 보냈다. 가끔 건전하게 만나는 청년이 있다고 공주 호위가 보고했었거든.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몰랐지.”

나중에 조사해봤더니 주앙 4세가 젊은 상인으로 변장해 윤지 공주와 꾸준히 만났다고 한다. 귀족들이 모이는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으니 서로 신분을 알고 교제를 시작한 셈이었다.

“서른 넘은 노처녀, 노총각이 만나서 결혼하겠다니 일단 좋은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결혼이야 당사자가 알아서 결정한다지만 이번 결혼은 아국 중심의 국제관계를 크게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스파냐 대사가 득달같이 달려오고 있는 중이다.”

리스본 주재 고산국 대사관에서 포르투갈 독립 세력과 에스파냐 주둔군 양쪽의 전보를 대행해주고 있었다. 역시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에스파냐 대사가 알현을 청했다.

“내정 간섭입니다, 전하! 저는 국왕전하께서 최소한 중립을 지키실 줄 알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진정하시오, 대사. 나도 지금 몹시 황당하다오.”

대사가 뭐라 소리 지르려는 순간 세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황제 즉위를 일 년도 안 남긴 후계자는 현재의 군주보다 오히려 더 막강한 권세를 휘두를 수도 있었기에 대사가 찔끔했다.

“대사! 냉정하게 생각해보시오. 설마 아바마마께서 딸을 팔아가면서 국제관계를 조종할 것 같소?”

“그건 아닙니다만 예전에도 국왕전하와 브라간사 공작이 비밀리에 회동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군사 동맹의 증거로써 혼사 관계를 맺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고산국 같은 초강대국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동맹도 필요 없고 국혼은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그 비밀 알현은 단 한 번에 그쳤고 아바마마께서는 오히려 에스파냐 대사나 외교관을 비밀리에 만난 적이 더 많소.”

“송구합니다, 세자저하.”

“나도 오늘에야 알았지만, 내 여동생 윤지 공주가 브라간사 공작을 만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요. 포르투갈 국왕의 대관식을 앞두고 갑자기 결혼을 결정한 것은 아니요.”

“저희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우리 왕실에 알려주지 그랬소? 그럼 국제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왕실에서 혼사를 막았을지도 모르오. 세자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오라비로서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오.”

“사실 그것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 알면서 왜 화를 냈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화를 낸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군자금 대출을 좀 해주십시오.”

“대사는 임기 일 년 반 동안 여덟 번 알현을 신청한 중에서 일곱 번이나 대출을 요청했소. 독일 내전은 이미 끝났는데도 여전히 대출을 원하는구려.”

돈 빌리는 사람 자존심을 깎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윤지 공주가 포르투갈 왕비가 된 것이 미안해서 에스파냐에 뭔가 보상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금은 없고 은 몇 십 톤을 빌려주겠다고 이민호가 약속했다. 그러나 그 전에 포르투갈에 더 많은 은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전하. 전쟁에서 이기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국에 이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알현실을 나가는 대사를 이민호가 다시 붙잡았다.

“대사! 프랑스와 잉글랜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지원하고 있소. 일단 싸워보고 정 안되겠으면 내게 중재를 요청하시오.”

“에스파냐가 패할 일은 없겠지만 국왕전하의 호의는 본국에 반드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고산국 공주가 포르투갈 왕비가 됐다지만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에스파냐는 혹시나 고산국이 개입할까 두려워 포르투갈 원정군을 급하게 구성했다.

============================ 작품 후기 ============================

(예약연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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