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28 106. 제국 선포 =========================================================================
106. 제국 선포
어느덧 1637년이 왔다. 고산국이 제국을 선포하고, 이민호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 연말에 퇴위할 계획을 세운 해였다.
여기서 제국이란 황제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지역적, 역사적 규정을 뛰어넘어, 다른 나라로부터 더 높은 권위를 빌리지 않는 독립적인 초강대국을 뜻했다. 유럽 국가가 아니라서 굳이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을 필요도 없고, 다른 왕국이나 공화국을 속국이나 식민지 명목으로 지배하에 둘 필요도 없었다. 고산국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이란 오롯이 스스로 서는 나라들 중에서도 특히 큰 나라라고 정의했다.
현재 군제 개혁과 지방행정기구 개편, 외국과의 관계 설정 등 제국 선포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현대 타이완 섬을 가리키는 고산국은 결코 제국에 걸맞지 않았다.
“외국 군주들에게 초청장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국명을 안 정했어요?”
“설마 내가 지은 이름으로 정할 거야?”
“그건 아니죠. 후손들이 불쌍해요. 이걸 보세요.”
혜영이 최종 후보로 오른 국명 100가지를 이민호에게 내밀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고산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백성들, 심지어 외국인들도 거액의 상금을 노리고 국명 창작 현상공모전에 엽서를 보냈다.
현존하는 국명과 혼동될 일을 피하라는 것만이 유일한 제한 조건이었다. 이름에서 강대국을 연상시키거나, 이름에 미래 지향적인 의미를 넣으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국명에서 한민족의 정통성을 이어받으라거나, 반대로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대한제국이 언론에 언급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자그마치 2,800만 명이 같은 이름을 제시했다. 그러나 백성들 과반수를 차지하는 조선 혈통 출신자들의 희망을 담은 이름일 뿐이었다. 명나라나 일본에서 조선을 아직도 고려라 부르는 경우가 흔해서 고려나 신라 같은 옛 국명도 인기가 높았다.
초등학생들이 엽서를 보냈는지 민호제국이나 별나라 같은 장난스런 이름들도 섞여 있었다. 아메리카 제국이라는 이름은 다른 대륙에 위치한 영토들 때문에 기각됐다.
예상한 것처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응모한 이름 1위는 대한제국, 2위는 대제국이었다. 3위는 유럽인들이 고산국에 붙인 별명인 이른바 오오제국, 오대양오대주제국이었다. 이집트를 반독립적 속국이 아닌 직할령에 준해 계산한 탓이었다. 아프리카 남단에 남겨둔 항구와 금광, 다이아몬드 광산과 그 주변 지역도 아직은 고산국 영토였다.
“허! 인류제국은 또 뭐야? 우주, 아니 세계 정복을 지향하는 이름 같은데 이게 후보 서열 4위야?”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홍익인간처럼 세상에 사는 모든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는 개념이니까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고 그 사람들이 잘 정착해 국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으니까 인류제국도 충분히 좋은 이름이에요.”
인류제국은 이민호가 한국에서 살 때 영국의 미니어처 게임이나 일본의 라이트 노벨에서 본 개념 같았다. 그러나 그 작품들 안에서도 결코 좋은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제국이라는 호칭 자체도 18세기를 지나서부터는 폭력을 국가정책에 동원한 패권주의와 식민주의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이 가미됐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 붙은 제국이라는 호칭은 아예 대놓고 경멸적인 시선을 담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애국주의자들은 국익을 위해서든 인류를 위해서든 미국이 제국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에서 오해할 여지가 있으면 처음부터 피하는 게 좋아. 만에 하나 세계 정복을 하고 싶더라도 다른 나라에 괜히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가 없어.”
“이런 식이면 제국 선포일까지 이름을 짓지 못해요. 주인님께 새로운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최종적으로 주인님이 국명을 결정해야 해요.”
“그럼 뭐가 좋겠어? 100가지나 되는 이름을 골랐는데도 여기에 딱히 좋은 이름은 없는데?”
사실 이민호는 국명으로 대한민국, 혹은 이와 비슷한 대한제국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헌법에서 금지한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고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기득권들 때문에 이민호도 몹시 고생했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일하며 살아왔던 나라였다. 젊은 세대가 흔히 말하는 지옥불반도 헬조선이라는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현재 아국은 영토가 너무 넓어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통합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혈연적, 문화적 통합이 어려울 것 같으면 종교적 통합이 그 대안으로 가능해요.”
“일단 종교적 통합은 말도 안 돼. 그리고 혈통적, 문화적으로 통합되고 나면 이미 같은 한 나라지, 굳이 제국이라 칭할 필요가 없어. 현존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을 보호하고 발전시켜야 전체적으로 이익이야. 미래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종과 문화 통합을 지향하다가 반발을 사서 오히려 분열의 씨앗이 될 거야.”
“네. 특히 모든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으니 국가는 앞으로도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해요.”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제국은 힘의 중심지와 문화적,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지역이나 구성원에게 통치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뜻한다. 강압을 통해 하나로 섞어버리면 그게 민족국가지 제국이라 칭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산국이 지향하는 제국은 다른 지역과 주민을 군사력으로써 지배하는 패권주의나 식민주의와도 달랐다.
그래도 같은 나라이니 장기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문화요소를 갖게 되겠지만, 다름과 다양성을 부정하는 전체주의를 지향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혜영은 알면서도 최종적으로 이민호의 의사를 확인해본 것에 불과했다.
“왕실 식구들의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할 필요가 없어.”
“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개인의 선택에 맡길 게요. 시간이 흐를수록 인종별 소득 격차가 줄어들면서 이제는 대부분 백성들이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요. 결혼할 때 배우자 선택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현대 재미교포들이 한국인 혈통의 사위나 며느리를 원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재미교포들이 소수파에 머물러 있고,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산국은 조선 혈통이 오히려 다수파였고 고산국말이 어딜 가나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2세의 결혼문제에서 조금 더 관대했다.
이민호는 강제적인 인종 통합을 시도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놔둬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규모 혼혈이 일어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와 반대로 유대인 마을 같은 폐쇄적인 인종, 종교, 언어집단이 꽤 오래 지속될 것도 예상했다.
현대 미국 같으면 세대를 이어나갈수록 혼혈이 매우 복잡하게 진행돼 21세기 초에 이르면 조상의 혈통을 구분하는 일이 더 이상 의미 없게 됐다. 이와 동시에 미국인이면서도 영어를 전혀 모르는 히스패닉 지역사회가 공고하게 유지돼 보수파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는 비슷한 혈통과 문화권 내에서 배우자를 고를 확률이 더 높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족별 차이점이 옅어질 것이 확실했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민호였다. 문제는 이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 강제로 어느 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민족의 순수 혈통을 지키려는 정책이나, 반대로 억지로 혼혈을 유도하는 것이나 모두 인간의 자율적 결정에 간섭하는 나쁜 정책이었다. 최소한 현대 한국처럼 농촌 노총각이 결혼을 못할 환경을 만들고, 외국에서 신부를 데려오게 한 다음 혼혈아를 차별하는 그런 미친 짓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저기 11위에 대조선제국은 뭐야? 다른 나라 이름은 안 된다고 했잖아.”
“조선을 합방한 다음 그 이름을 물려받자는 주장이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군사력을 동원해 조선을 정복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합병하는 것은 이민호가 평생 고민했던 주제였다. 백성들도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두 나라가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으므로 더 이상 유효한 제안이 될 수는 없었다.
아직도 조선을 집어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에서 사는 동안 지배층에 원한을 품었거나, 아니면 조선 왕조의 학정에 시달리는 친척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지금 조선이 예전에 비해 훨씬 살기 좋아졌다지만 고산국에 비하면 여전히 야만스러울 테니 일부에서는 학정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다.
“혜영이 선택한 이름은?”
“왕실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었어요. 저는 삼한과 달리 순우리말로 같은 나라, 최고의 나라라는 뜻에서 한 나라, 한자로는 한국(韓國)이 마음에 들어요. 그건 약칭이고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이 되겠죠.”
“세자는 뭐래?”
“세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일개 나라보다 훨씬 크니까 새누리로 정하자고 하더군요. 한자로는 신(新)이에요. 다만 둘 다 중국 왕조에 같은 이름이 있어서 문제에요.”
한나라나 새누리나 현대 대한민국의 정당 이름 같았지만 편견을 배제하면 뜻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전국시대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이나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신(新)과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이 걸렸다. 둘 다 중국에서 오래 가지 못했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39위에 고려는 어때? 이미 패망한 나라지만 명나라나 일본, 유럽에서는 조선을 여전히 고려라 부른다더군. 그 이름을 가져와서 우리가 쓰는 거야.”
“아랍 지역에서는 조선을 신라로 불러요. 그런데 옛 이름을 쓴다고 조선에서 반대하지 않겠어요?”
“새로운 이름을 짓기 어려우니까 그렇지.”
중국 역대 왕조들처럼 반드시 한 글자로 나라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세계를 상대로 한 국명이므로 한자로 번역할 때 생기는 문제를 고려할 필요도 없었다. 반드시 멋진 이름이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백성들과 외국인들이 같은 발음으로 부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건국 초기라 내외국인이 동일한 이름으로 불러줄 기회가 남아 있었다.
“후금이 세력을 더 키운 다음 쓰려고 남겨두었던 청(淸)은 어떤가요?”
“뜻은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중국어 발음 칭으로 기억될 거야. 특히 유럽인들은 강세가 없는 어 발음을 하기 어렵잖아.”
이민호가 초조해진 와중에도 청을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 배제한다면 고사포 같은 느낌의 고산국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수도 이름을 따라 티완으로 결정된다면 그것도 어색했다.
“98위, 이건 이탈리아 출신 가톨릭 신부가 제안한 건데, 태평국은 어때요? 태평양을 내해로 삼은 대제국이라는 뜻이래요. 태평제국으로 칭할 수 있어요.”
“좋은데?”
“약칭은 태국이에요. 정식 명칭은 평화로운 나라이고 약칭은 큰 나라라는 뜻이니, 아주 좋잖아요?”
“다 좋은데 약칭 때문에......”
“왜요?”
현재 시암 또는 아유타야라 불리는 현대 태국, 타일랜드와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이 떠오른 이민호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시대 사람인 혜영에게 설명하기 참 곤란했지만, 이민호가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그냥 혜영이 알아서 하든지 투표해서 정해. 태평국이나 한나라, 새누리는 반드시 빼고.”
“관리들과 왕도 시민들을 모아 투표를 진행할게요.”
“티완도 빼고.”
이민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현재 고산국이 포용한 모든 민족과 지역을 아우르려다 보니 적당한 이름을 고르기가 극히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이민호가 현대의 지식을 가졌기에 제약이 더 심했다. 투표에 맡기면 아무래도 대한제국으로 정해질 것 같았다.
황태자 주자랑이 이민호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오늘따라 매우 울적해 보여서 이민호가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국왕전하! 혹시 대명을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촉 아니 사천의 반란군을 치려고 관군 100만이 원정을 떠난 사이 남직예까지 북상한 반란군 때문에 그러느냐?”
“예, 전하. 남쪽 네 방향에서 북상하는 역도의 무리가 무려 100만이라 합니다. 황도를 지키는 관군은 아무리 끌어 모아도 겨우 30만에 불과합니다.”
관군과 농민반란군이 각각 100만 대군씩을, 그것도 여러 번 동원하는 나라는 세계를 통틀어 중국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천에 자리 잡은 촉나라도 현재 병력이 100만을 상회했다.
이 시대 인도처럼 중국과 비슷한 인구를 가진 나라도 그 정도로 대규모 병력이나 반란군을 작전에 투입하기는커녕 모집하거나 단기간 유지하기조차 어렵다. 이 시대에 100만 대군을 운용한다면 농촌과 도시가 계속 이어진 중국이라서 가능했다.
“명나라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 고산국이 군사 개입을 할 경우 병력부족과 병참선 압박으로 인해 쉽지 않을 전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 번 개입하면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 부은 후가 될 거야. 그래서 전면 개입을 꺼리고 있단다.”
“하긴, 그 정도 자원을 투입할 정도라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차라리 정복하는 게 맞겠지요.”
“험! 험! 황태자는 여기 고모할머니를 봐라. 고산국이 대명제국을 정복할 일은 결코 없을 거란다.”
다 늙어서 마누라한테 할퀴어 얼굴에 핏빛 고속도로를 남기긴 싫었다. 명나라가 분열되고 황족이 몰살한다는 전제로 주상아 공주의 아들을 황제로 내세우는 방안을 마련해둔 것이 사실이긴 했으나, 이는 국가기밀에 속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실에서 남경 외에 왕족을 여기저기 분봉해두어 황족이 몰살할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와 주상아의 아들은 황족이 아니라 서인에 불과했다. 제위 계승권이 절대 없다는 뜻이다.
“그럼 황상과 황족들만이라도 구해주세요. 국왕전하! 제발요!”
“그 정도로 위태로운가?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잠시만.”
이민호가 합동참모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황태자가 손에 꼭 쥔 전보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황실에서 직접 황태자에게 보낸 전보 같았다.
============================ 작품 후기 ============================
이름 때문에 고민하느라 올리는 시간이 많이 늦춰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