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25 105. 대국의 길 =========================================================================
새 왕도 동쪽 100km에 위치한 멕시칼리를 순시했다. 미국 7개 주가 강물을 갈라먹는 1920년대의 콜로라도 유역 개발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기에 이 시대 콜로라도 강 하류의 수량은 매우 풍부했다. 그리고 북쪽에 해수면보다 낮은 거대한 담수호인 카우이야 호수를 통해 농업용수를 무제한 공급받았다.
현대에 바다라 불리는 거대한 솔턴 호(Salton sea)는 20세기 초에 콜로라도 강을 잘못 건드린 인간의 실수로 생겼고, 남북으로 길이 56km, 동서 폭이 24km에 달한다. 원래 그 자리에는 표면적이 네 배나 되는 카우이야 호수가 있었다. 이곳의 광활한 분지는 강의 범람과 빗물의 유입, 건조 과정을 통해 400~500년 주기로 염호와 담수호, 사막을 오갔다.
어쨌든 멕시칼리 주변이 광대하고 수량이 풍부한 평야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코코파 원주민의 조상들이 천 년 전에 파놓은 운하를 개량하는 것만으로도 사막 한가운데에 드넓은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멕시칼리의 농경지 개발 사업을 주도한 세자가 이민호에게 사업 확대를 청했다.
“동쪽 지류인 길라 강 유역에도 고대 원주민의 농경 유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토양에서 염분만 제거할 수 있다면 즉시 농경지로 개발이 가능합니다.”
“세자! 여기 멕시칼리에서 남쪽, 북쪽, 동쪽 각 30km가 죄다 관개사업이 완료된 농경지다. 여차 하면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농민들이 남김없이 파산하겠어. 소빙기에 대비해야 하더라도 개발 속도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농경지 확장은 전 세계 작황 변화를 살피면서 천천히 추진하겠습니다. 오대호 주변 농지의 생산성이 해마다 떨어지는 탓에 남쪽에서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미에 농경지로 개발할 만한 땅이 지나치게 넓었고, 유통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이 문제라면 아주 큰 문제였다. 넓은 땅과 큰 수송선의 이점을 이 시대에는 따라올 나라가 없었고,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세계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실업자로 만들어버리고 그 세금을 받아먹고 사는 영주와 군주들을 가난뱅이로 전락시킬 수 있었다. 군주정 공화정 가리지 않고 세계 모든 나라 정부가 붕괴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북미의 농경지가 세계 정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세자도 잘 알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밭이 굉장히 넓구나.”
“예, 아바마마. 계산하기 쉽게 가로세로 1km를 기본으로 구획했습니다. 작물에 따라서는 농민 혼자서도 경작이 가능하나 여유 있게 다섯 가구에 나눠줬습니다. 다만 파종과 추수 때는 멕시코에서 계절노동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도시민들의 주말 부업이 농촌에서 임노동자로 일하는 것이었다. 곡물생산지는 일이 고된 대신 임금이 높았고, 과수원에서는 여자들도 할 일이 많았다. 학생들도 주말에 농장에서 일하면서 용돈벌이를 했다.
“멕시코에서도 농지 개발이 한창이야. 언젠가는 계절노동자를 구하지 못하게 될 거야.”
“농기계 개량과 대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습니다. 물론 그 전에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 노동력 부족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이민호가 이삭을 훑어보니 밀이 아니라 쌀이었다. 북미에서는 밭에서 쌀농사를 짓고 있었다. 조선 후기 같으면 부지런한 농부가 스무 마지기 6천 평 쌀농사를 짓는데 이곳 농민들은 기계영농으로 그 열 배 면적을 감당했다. 관개사업이 잘 된 평평하고 기름진 땅이라 가능했다.
대한민국의 2010년대 경지면적은 논밭을 합해 170만 헥타르 정도였다. 이는 만 7천 평방킬로미터에 해당한다. 멕시칼리 주변 농지가 2천 평방킬로미터가 넘었고, 앞으로 개발 가능한 콜로라도 강 유역이 4천 평방킬로미터가 남았다. 새 왕도 북쪽과 동쪽 가까이에 대단위 농경지를 두고 있어서 아주 든든했다.
“마을마다 50가구 정도가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아바마마. 정전제(井田制)와 비슷하게 호구를 편성했습니다. 가운데 밭은 조선 혈통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주변 여덟 곳은 외국 이주민과 원주민들이 나눠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본토 출신 농민들이 이주민과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농법과 농기계 작동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머지 몇 가구는 어린이집과 농기계 수리소 등 마을 공동의 일을 돌보고 있었다. 항공기로 씨앗과 농약을 뿌리는 현대 북미 농업회사보다는 못하겠지만 고산국 농민들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자랑했다.
- 애애앵~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소방차 세 대가 넓은 농로를 따라 마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방향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농가에 화재가 난 것 같아 이민호가 세자를 데리고 급히 그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본 것은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의 1층에서 거세게 뿜어 나오는 화염이었다. 건물 자체는 불연소재였으나 가구 대부분이 목재라서 화재에 취약한 편이었다.
소방관들이 불길을 잡는 중에 아이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다가와 울부짖었다.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나선 직후에 도착한 경찰이 여자를 가로막았다.
“화재 진압 중입니다. 위험하니 물러나세요!”
“아이고! 집안에 아이가 아직 못 빠져나왔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이 울부짖자 소방관들이 물었다. 저 멀리 밭에서 일하던 마을 주민들이 경운기를 타고 몰려오는 중이라 마을에는 몇 사람 없었다.
“아이가 몇 살이죠? 어느 방에 있어요?”
“여덟 살이에요. 얼른 구해주지 않고 뭐하는 거여요? 빨리요! 애 죽겠어요!”
화재 현장에서 보기 흔한 장면이었지만 이민호는 뭔가 부조리함을 느꼈다. 활활 타오르는 농가 안으로 소방관들이 산소주입기를 쓰고 진입하려는 순간 이민호가 나섰다.
“잠깐! 어명이다. 소방관들은 진입하지 마라!”
“국왕전하! 하오나 당장 아이 목숨이 위험합니다.”
“아이가 집안에 남아있다면 벌써 불타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저희들은 들어가야 합니다. 황공하오나 어명을 거역한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이민호가 말려도 소방관들이 화재 현장에 들어가려 하는 순간 세자가 여인의 무릎 뒤를 차서 꿇어 앉혔다. 뭔가 이상을 알아차린 간부 소방관이 그래도 집안에 돌입하려는 젊은 소방관들을 제지했다.
“소방관들은 어명을 받들라! 아이가 여덟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평일 대낮인데 여덟 살 아이가 집에 있을 리가 있나?”
“다리를 저는 아이라서 집에 있었어요!”
우물쭈물 대답하는 여인의 머리채를 세자가 잡아당겨 얼굴을 드러나도록 했다. 소방관과 경찰들이 몹시 당황했지만 세자를 말릴 수는 없었다. 물론 천한 백성이 감히 국왕 앞에서 부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대가 아이의 어머니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임금님. 저는 이웃집 사람인데 이 집과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에요.”
“연기를 잘하더구나. 소방관들은 집안에 진입하지 말고 화재 진압이나 해라.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판결문을 읽다 보면 이런 인간들을 지긋지긋하게 본다.”
곧이어 불이 난 집 주인 부부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자기 집에 난 화재보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국왕 행차에 더 놀랐다.
“자식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고, 임금님! 당연히 학교에 갔습죠. 아이들을 농사에 동원하는 것은 불법 아니겠습니까?”
“막내 아이가 몇 살인가?”
“열다섯입니다, 대왕마마. 이 개구쟁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노느라 해 지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민호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울부짖던 여인에게 향했다. 여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아! 제가 나이를 혼동했어요. 네. 이 시간에는 학교 갔겠군요.”
“호위는 이 자를 체포해서 경찰에 인계하라. 거짓으로 구조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린 죄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대충 들어보니 이 마을에 정착하고 나서 최근 몇 년 동안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낮에는 대부분 빈집들만 남아서 인명피해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범죄자에게 방화혐의가 추가됐다. 있지도 않은 아이를 찾아 불 난 집안에서 헤매다가 하마터면 소방관들이 덧없이 죽을 뻔했다. 현실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났다.
불길은 금방 잡혔다. 관개사업이 잘 된 농경지라 주변에서 물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는 곳이었다. 화재가 진압되자 이민호가 소방관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백성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대들을 더욱 사랑한다. 귀관들이 다치거나 죽으면 누가 백성들을 구해줄 것인가? 부디 귀관들의 생명을 더욱 소중히 하기 바란다.”
소방관들에게 이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목숨이 위태로우면 위험 속으로 당장 뛰어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예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가도 시큰둥하던 병사들이, 의무병이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자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장면이 인상 깊이 남았다. 의무병이 죽어버리면 내가 위험한 순간에 누가 날 구해주랴?
“황공하옵니다, 전하. 소방학교에서 배운 내용인데도 현장에서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과 비슷한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생길 것이다. 화재에 관련된 수사권을 소방 조직에 주겠다. 신분증을 확인해서라도 범죄인들에게 속지 않도록 주의하라.”
화재 신고를 받자마자 즉각 출동하고 인명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소방관들에게 금일봉을 하사했다. 일계급 특진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소방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소방국장이 반대할 것이 뻔해서 그 부분은 포기했다. 마치 영국 총리 차량에 신호위반 딱지를 발부한 경찰을 승진시켜달라고 총리가 요구하자 경시청장이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라며 거절한 것과 비슷했다.
본토 출신자들뿐만 아니라 이주민과 원주민들에게도 소방관의 인기가 높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체력 기준이 너무 높아서 아직도 본토 출신이 소방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젠 욕쟁이 여동생 따위는 잊어버려. 자! 이번에는 황태자가 남동생인데 밤늦게 배고파서 라면을 끓이려고 할 때 마침 누나가 본 거야. 참! 라면은 먹어봤지?”
“두 번이나 먹어봤습니다, 국왕전하. 요리 과정을 숙수 옆에서 지켜봤는데, 튀긴 면발을 끓는 물에 넣고 송이버섯과 몇 가지 채소, 인삼, 소고기 등심과 달걀을 넣어서 먹는 음식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민호가 주상아 공주와 함께 명나라 황태자 주자랑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었다. 고산국 왕실답게 매우 실용적인 교육이었지만 학생이 아주 조금 특별했다. 어떤 채소를 라면에 넣었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먹을 수도 있구나. 그 누나는 10대 중반인데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폭력적인 누나란다. 황실에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일반 서민들은 다 그렇게 산단다.”
“아! 동화책에서 읽었습니다. 원래 남매는 서로 죽일 듯이 싸우면서 크게 돼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 큰 다음에 누나를 때리는 남동생은 아주 나쁜 놈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거 매우 현실적인 묘사를 하는 동화책이군. 어쨌든 평소에 남동생을 못 살게 굴고 무시하고 생리대 심부름까지 시키는 악질 누나야. 원래 누나들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민호가 설명하자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상아 공주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주상아 공주는 분명 환갑이 넘었을 텐데 아직도 머리가 검었고, 바로 얼마 전에 폐경기가 왔다고 들었다. 명나라 황실의 비법은 고산국 왕실 여자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국왕전하! 생리대가 무엇인가요?”
“험! 험! 여자들이 매달 걸리는 마법에 필요한 물건이란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생리와 생리대에 대해 잘 가르쳐줄 테니 숙제를 내주마.”
“환관한테 물으면 안 되나요?”
“환관에게 남녀의 차이에 대해 묻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일이란다.”
육아는 여자들이 더 잘하고 교육은 데카르트 백작이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원래 이민호가 할 일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기에 황태자 주자랑의 교육에 끼어들었다.
황태자는 명나라 조정에서 고산국에 제공한 인질도 아니고 농민반란 때문에 피난 온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숭정제가 고산국에 있는 동안 새로 배운 게 많아 황태자 교육을 떠맡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에서도 세자는 지은 공주와 고산국에서 초빙된 선생들이 가르쳤다. 그러나 대군이나 군에 해당하는 왕자들 중에서 절반 정도는 고산국에 유학을 와서 배웠다. 양반들이 고산국 학문과 교육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오직 고산국 신문만 참고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요즘 들어서 양반들도 고산국의 새로운 학문에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환관도 저하고 같은 사람이니 감정을 상하게 하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훌륭하구나. 황태자는 자라서 억조창생을 골고루 사랑하는 성군이 될 것이야. 어쨌든, 누나란 인간은 남동생이 라면을 끓일 때 자기도 먹겠다고 두 개 끓이라고 하는 법이 절대로 없단다.”
조금 전에는 오빠가 여동생에게 라면을 끓이라고 강요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황태자는 책을 통해 동기간의 우애 같은 내용을 배웠겠지만 이민호가 가르치는 내용에는 리얼리티가 살아 넘쳤다.
“그럼 누나가 남동생의 라면을 빼앗아 먹나요? 그럼 둘 다 배고플 텐데, 누나가 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모름지기 여자란 살쪄 보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두 개 끓여서 나눠먹으면 온전히 하나를 먹게 되는 셈이지만, 빼앗아 먹으면 하나도 안 먹은 셈이 되니까.”
남자는 하루 종일 섹스를 생각하고 여자는 그 이상으로 먹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이민호가 알고 있는 현실에서 남녀의 차이였다. 하지만 황태자가 아직 어려서 그 부분은 쏙 빼놓았다. 여자를 돼지로 묘사했다가 주상아 공주가 삐칠까봐 두렵기도 했다.
고산국 초기에는 명나라가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경쟁상대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경제력과 군사력 등 여러 가지 지표로 비교한 결과 인구가 비슷한 명나라의 국력은 지금 고산국을 기준으로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황위를 이을 황태자에게 고산국 왕자들과 동일하게 제대로 가르치고 있었다.
현대의 세계 구도를 보면 중국이 서넛으로 나뉘면 좋을 것 같지만 이제는 명나라를 가만 내버려둬도 될 것 같았다. 실제 역사처럼 농민반란에 의해 망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미래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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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조사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