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24화 (973/1,000)

01024  105. 대국의 길  =========================================================================

1636년 여름, 명나라에서 농민반란이 완전히 진압됐다 싶었을 때 사천에서 장헌국이라는 자가 촉나라를 세웠다. 장헌국은 섬서성 유림 정변현 출신으로서 그가 어릴 때 고산국으로 이주한 상인 집안의 아들이었다. 이민 1.5세대로서 고북 시에서 자라고 젊어서부터 상인으로 활동했던 장헌국은 2년 전에 사천에 돌아가 세력을 모았다.

장헌국은 마치 이민호가 개국할 때처럼 돈으로 세력을 끌어 모으고 점령지에서 땅을 무상 분배해 사천 지방 농민들에게서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장헌국이 장비의 후손이라는 선전이 잘 먹혀들지 않자 고영상 밑에서 부장으로 활약했던 팔촌동생 장헌충을 불러들였다.

1606년생인 장헌충은 농민반란군에서 부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장비의 후손에 걸맞은 무명을 쌓고 있었기에 둘의 결합은 반란군의 세를 불리는 데 큰 효과를 낳았다. 현재 장헌국이 왕으로, 장헌충이 대장군으로 각각 병력을 이끌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왕가윤과 고영상, 이자성으로 이어지는 반란군 수괴의 자리를 이번에는 장헌국이 차지한 셈이다.

“명나라에서 농민반란이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 장헌국이 아국에서 파견한 간세가 아니냐고 명나라 대사가 자꾸 묻는구나.”

“황제가 남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더니 아국까지 의심하는군요.”

세자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고산국에서는 장헌국이 사천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 즉시 세무국과 감사국을 동원해 사천 농민반란군의 자금 출처를 캐고 있었다. 장헌국은 고산국에서 자금을 지원한 간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반란 수괴가 아국에 이주했다가 다시 귀국했으니 정황상 황제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명나라 상인들은 정말 탈세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구나. 장헌국 일가가 금 백만 냥을 모을 때까지 우리 세무국이 몰랐다니. 세무공무원이 저지른 아주 약간의 비리만으로도 상인들이 그만큼 남겨 먹는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세율을 올리자니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상인들은 영업 활동을 펼칠 의지가 크게 꺾일 것입니다. 농민이나 상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수익의 절반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사실 농민들은 수익이 아닌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소작료가 관례상 수확량의 절반에 육박하고 그 외에 지주인 영주에 의해 부역을 부과하는 경우가 흔하기에 농민들이 감내할 만한 세율이었다. 기름지고 드넓은 농지에서 기계 영농을 하는 고산국 농민들은 세금 5할을 내고도 경제적 여유를 누렸다.

이차대전 직후 일본에서는 전범기업들에 거래세율 100퍼센트를 부과한 적이 있었다. 100엔짜리 물건을 팔면 세금이 100엔이었다. 당연히 망하라는 소리였고, 죄다 망했다.

현대 일본 국채 비율이 높아지면서 자주 언급되는 덕정령(德政令)은 막부 시대에 가끔 행해진 채권채무 소멸 명령이었다. 상인에게 빚을 진 사무라이 계급의 경제적 회생을 위한 정책인데, 오히려 빚을 얻을 곳이 사라진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나도 상인이었으니 잘 안다. 그래서 세원을 포착하고 세무비리를 샅샅이 적발해야 한다만, 인류 역사를 통틀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면 기업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현대에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어느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각종 절세와 탈세, 비리를 동원해야 기업 생존이 가능하도록 세무 환경이 형성되기 쉬웠다.

이런 환경에서는 비리 공무원과 탈세 기업인들, 뒷배를 봐주는 정치인들에게만 이익이었고, 이로 인해 빈 액수를 순진한 기업인과 봉급생활자들이 채워 넣어야 한다. 누군가 탈세를 하면 나머지 세금납부자에게 명백히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자기만 안 할 수도 없다는 문제가 생기고, 유리지갑인 봉급생활자는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다.

“상인들과 학자들은 아국이 거래마다 세금을 부과하는 게 아니라 매년 재산 증가분에 세금을 부과하기에 탈세의 여지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거래마다 세금을 부과하면 더 많은 탈세 기회가 생길 거다. 그리고 물가가 세금 비율 이상으로 대폭 상승할 수 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계산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속이려 합니다.”

명나라에서는 반란 진압에 정신이 없는데 이민호와 세자는 세무 비리를 논하고 있었다. 만약 세무 비리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다면 장헌국이 사천에 나라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금 탈루를 했더라도 상인 가문 하나가 겨우 몇 십 년 동안 금 백만 냥, 3,750만 원을 모으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장헌국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나중에 보상을 받기로 한 상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예. 세무국이 현재 정밀 조사 중이고 상회들 사이의 금전 이동 상황을 일부 포착했습니다. 감사국에서는 세무국을 정밀 감사 중입니다.”

“일 년 중 6개월 동안 감사를 받아도 세무 비리는 여전하구나.”

“그래도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작은 비리에 머물러서 다행입니다.”

한때 한국에서는 감사원이 관세청 어느 지청의 비리 첩보를 접하고 감사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대놓고 출근을 안 해버리거나, 연락을 취하려 하면 아예 잠적해버렸다. 관세 업무가 마비되면서 민원이 폭주하자 감사를 취소하고 직원들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이 단체행동에 들어가 위력을 과시해도 이를 저지할 수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요즘 비리 공무원에 대한 처벌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뇌물이나 비리 액수의 12배를 추징하고 탄광 노동 5년 이상인 것은 국초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비리 사실을 악착같이 숨기겠구나. 나 같으면 그런 노력을 할 바에야 차라리 안 먹고 말겠다.”

“다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남들은 귀찮아 할 일에도 몹시 부지런한 자들이 있습니다.”

봉급을 충분히 받는 고산국에서도 공무원이 비리에 연루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날 리 없고 견물생심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생계형 비리나 관행상 기름칠이 없다 뿐이지 적은 뇌물로 큰 이익을 얻으려는 상인과, 뒤탈 없는 뇌물에 눈이 돌아가는 공무원은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투명한 세무 및 인허가 행정이 이루어져야 여러 가지 고질적인 비효율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상납하고, 무허가 건물주가 돈 보따리를 내밀면 그 사무실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자리에서 나눠먹는 게 현실이었다. 뒤는 1970년대 한국 이야기다.

“어쨌든, 명나라 조정에서 사천의 장헌국과 장현충을 제거해달라는 요청이 왔다만, 직승기의 항속거리 부족으로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명나라 조정에서 안심하겠군요. 만약 아국과 관계가 약화된다면 황도를 멀리 내륙지방으로 옮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폭격을 우려해서 산악지방으로 숨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우리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반란 진압에 이용하려고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명나라의 상황 변화를 유심히 살피도록 해라.”

명나라 농민반란을 고산국이 배후조종한 일은 없었다. 다만 반란 추세를 꾸준히 지켜보기 위해 인력과 예산을 투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같은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 반란을 주도했다면 벌써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굳이 명나라 조정을 뒤집어엎을 필요는 없었다.

“제국 선포일이 앞으로 일 년도 남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와 조선에서 크게 환영은 안 한다지만 그래도 현실을 납득하고 있습니다. 경하 사절단 인선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양위는 일 년 반 남았다. 몹시 기대되는구나.”

“제위에 오르시고 나서 최소 일 년은 채우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웃기지 마!”

왕위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누구는 귀를 씻고 누구는 상류로 소를 몰고 갔다는 고사가 겨우 이해가 됐다. 세자도 재위기간이 오래 되면 충분히 느낄 것 같았다. 이민호가 여러 가지 업무를 떠넘기는 바람에 세자는 벌써부터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저도 60세에 퇴위하면 됩니까?”

“그건 아니다! 나는 기술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퇴위하려는 거지, 쉬려고 퇴위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앞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날 테니 너는 70세쯤 돼서 후계 상황을 감안하면서 퇴위하거라.”

“그 나이에 업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65세가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노후에 편히 쉬면서 인생을 정리할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여행도 다니려면 그 나이가 좋겠다. 더 늙으면 쉽게 못 움직일 테니까.”

사이좋게 노후설계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세자도 벌써 40세가 넘었다.

“독일 내전이 끝나면서 체결된 프라하 조약에서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됐소. 고산국에서 보장하던 바로 그 신앙의 자유요.”

“국왕전하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교급 신부들, 개신교 종파에 따라 목사 또는 장로들, 이맘들, 지역마다 유명한 선비와 스님들이 새 수도 티완에서 처음 열린 연례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고산국에서 교세를 확장하면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은 종교가 없었다. 새 수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이 건축돼 신도들에게 절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은 그 사회에서 소수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주 합리적이고 아량이 넓었다. 문제는 다수파가 되는 순간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향에서는 마녀 사냥을 하고 이교도를 핍박하던 자들이 외국 땅에서는 순진한 신도 행세를 하는 꼴을 많이 봐왔소. 세계 어딜 가든 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싶으면 고향에서도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에게 아량을 베풀어야 하오.”

“하오나 전하! 이교도는 상관없지만 그래도 무신론자는......”

“그래서, 뭐요?”

이민호가 노려보자 이맘이 입을 다물었다. 아브라함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싸워왔으면서도 서로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 기독교 안에서 신구교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이교도보다 무신론자와 다신교도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가 상상을 불허했다. 그래도 국왕인 이민호가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어서 대놓고 무신론자들을 탄압하기 어려워졌다.

“만약 다른 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 자를 핍박한다면 바로 그 종교 전체가 국가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이오. 종교로 인해 계속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 종교를 금지시키고 교도들을 강제 개종시키거나 추방할 것이오. 만약 모든 종교가 그렇다면 그 모든 종교를 몰아내고 무신론을 국교로 삼을 수도 있소. 내 말을 절대 흘려듣지 마시오.”

“나무관세음보살. 국왕전하! 40년 넘게 들어온 윤음이옵니다. 아무리 멍청이에 고집불통이라도 이제 귀에 못이 박힐 때가 됐습니다.”

조선조 내내 핍박을 받았던 스님이 허허 웃었다. 조선 양반들이 모여 경치 좋은 곳을 골라 고기를 구워먹을 때, 반드시 절이나 암자에서 구워 연기를 휘날린다. 두부를 만들어 해먹을 때도 스님들을 시키고, 소금 값과 두부를 만든 삯을 주지 않는다. 불교를 억압하는 일에 선비들이 일종의 소명의식을 갖고 나섰다.

고산국은 건국 초부터 여러 민족으로 구성돼서 타 인종과 종교에 대한 공격성향 노출은 국가반역에 해당하는 중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건국 이후 계속해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종교가 국가분열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교도를 핍박한다는 소리가 들려서 말이오.”

“일반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전하께서 제시하신 선을 넘지 않습니다. 혹시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이 종교를 핑계로 삼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 말씀이 옳소. 그러나 그런 악독한 자들이 종교를 핑계 삼을 수 있도록 종교계가 멍석을 깔아준다면, 나는 그 종교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바이오. 주와 군별로 교구를 나눴으니, 앞으로 종교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교구를 없애버리겠소. 이는 종교 탄압이 아니라 그 교구의 불충한 신도들에 대한 징벌이오.”

항상 그렇듯 모든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일부 범죄자가 문제였고, 모든 손님이 문제가 아니라 일부 진상이 문제였다. 그러나 진상 고객에게 과잉 친절을 베풀고 일반 손님을 무시하는 일부 종업원 때문에 더욱 진상이 늘어나고 진상질이 갈수록 진화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로 신도를 보호하고 신도들끼리 경제적 이익을 독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종교가 교세를 확장하기 쉬웠다. 이민호는 바로 이것도 문제로 삼았다.

유대교라면 종교를 기준으로 민족과 경제단위가 결합한 특수한 형태였지만 역사적인 이유가 있고 소규모라서 심각성이 덜했다. 그러나 대규모 신도를 보유한 다른 종파가 이런 행태를 바람직하다고 고무하고 방조한다면 타 종교인 혹은 무종교인을 배척하는 셈이 된다.

“고산국은 정교분리가 원칙인데도 아직 종교인 연례회의에 국왕인 내가 참석하고 있소. 정치권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여러 종교가 공생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시오. 종교인에게 다른 종교는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오. 알겠소?”

“국왕전하께서 본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옥음에 경전과 다른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다른 종교와 싸우겠다면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내 선택이 반대쪽일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명시하시오.”

이 시대의 고등종교들은 따지고 보면 비슷한 요소를 갖고 있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인 이 종교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는 것이 독실한 신도들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호는 더더욱 종교계에 압박을 가했다. 정치권으로부터 간섭 받는 게 싫다면 종교계가 먼저 타 종교를 인정해야 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국가에서도 종교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시대 고산국이라 해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종교계를 지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종교에 대한 견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앞으로 최소 100년 동안은 꾸준히 종교계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정 종파에게 반발을 사서 국왕이나 황제가 암살을 당할 일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고산국의 여러 종파들은 이민호가 그런 각오을 당당히 드러내기에 처신에 몹시 주의를 기울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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