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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23화 (972/1,000)

01023  105. 대국의 길  =========================================================================

수도를 옮긴 기념으로 새목포 앞바다에서 관함식을 개최했다. 외국 여러 나라에서 보낸 범선들 외에 태평양 함대 소속 3, 5함대와 대서양 함대 소속 4함대가 참가해 고산국 해군의 위용을 만방에 과시했다.

고산국과 외국 군함들은 일단 그 크기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다. 외국 배들은 만재배수량 2천 톤을 넘어가는 배가 극히 드문 반면 고산국 함선은 구식 경순양함이 5천 톤이며 주력 순양함은 1만 톤을 초과했다. 전함과 상륙함은 3만 톤이 넘었고 얼마 전 기존의 호위항모 외에 경항모가 진수됐는데 이것도 3만 톤을 넘겼다.

전열함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은 유럽 배들은 크기가 작았다. 스웨덴에서 진수식 날 침몰한 전함 바사 호는 당시 최대급 군함이었으나 겨우 1,200톤에 불과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유럽 전열함들에 대형화가 이뤄졌다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의 기함으로 사용됐고, 104문을 보유한 일급 전열함이었던 HMS 빅토리도 3,500톤이었다.

“오! 세자야 저길 봐라. 아체 술탄국의 군선은 꽤 크구나.”

“예, 아바마마. 큰 배는 천 명 넘게 탄다고 합니다. 정화의 함대도 선체가 컸습니다만, 지금은 책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범선과 범노선 200여 척이 바다에 구역을 정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를 거대한 국왕좌승함이 육상에서 장군이 말을 타고 군부대를 사열하듯 천천히 지나갔다.

국왕좌승함은 신조 전함 티완이 지정됐고, 앞뒤 호위는 신조 순양함 티파이와 이파이가 맡았다. 새 수도 티완을 쿠메야이의 남북 두 부족이 옹위하는 모양새였다. 얼마 전 명명식을 끝낸 신조함들을 진수했을 때 티완과 새목포, 그리고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우호관계 강화와 정보 수집을 위해 빠짐없이 군함을 보냈다. 유럽 국가들에게 고산국의 강대한 해군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에서도 한 척씩 보냈는데 각자 순양함에 예인된 상태로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거북선은 여전히 인상적인 모습이었고, 유럽 국가 해군 장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해군이 국가방위뿐만 아니라 국익 증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결과다.”

“맞습니다. 향료제도의 트르나테와 티도레, 유럽 몇몇 나라들은 인구가 극히 적은데도 해군이 강해 제국을 칭합니다.”

국왕이 군주인 에스파냐는 물론 포르투갈과 스웨덴 같은 작은 나라들도 한때는 제국을 칭했다. 이는 실제 제국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보유해 강대했던 시기를 구분하기 위해 역사학계에서 정한 명칭이었다.

사열이 끝나자 이번에는 해상 화력 시범이 준비돼 있었다. 표적은 바다 한가운데에 고정돼 있는 에스파냐 갈레온 세 척이었다. 해군 육상기지에서 발진한 초계기들이 북쪽 하늘에 나타났다.

- 우웅~

현대에 해군 초계기는 정찰과 수색뿐만 아니라 대잠, 대함 공격 임무도 맡는다. 고산국 초계기도 마찬가지로 해상 및 육상 표적에 대한 수평 폭격이 가능했다. 이민호가 쌍안경을 쥐고 살펴보는 동안 초계기 하부 폭탄창이 열리며 자그마한 검은 점을 투하했다.

- 콰쾅!

낡고 작은 갈레온에게는 비교적 소형인 250kg 폭탄으로도 충분했다. 폭발한 직후 두 척이 활활 불타오르며 가라앉았고, 빗맞은 한 척은 선수 부분이 날아간 채 표류하고 있었다. 배에 사람이 탔다면 어떻게 됐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활발히 작전을 펼치는 초계기와 달리 해군 급강하폭격기는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 않았다. 만약 외국에서 대양을 건너 고산국을 침공한다면, 해안을 구경하기도 전에 침략함대 전체가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다. 잠수함도 마찬가지로 공개할 필요가 없었다.

- 씨우우웅~

“어? 저건 뭐지?”

순양함 티파이에서 발사한 유선조종 유도탄이 파도를 스치듯 낮게 날아갔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갈레온의 선체에 박힌 직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죽어가던 갈레온의 숨통을 끊은 유도탄에 외국 해군 관계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전하! 방금 그건 포탄도 아니고 무엇입니까?”

“좌우 방향과 고도를 조절해서 목표에 날아가 폭발하는 유도탄이오.”

이민호가 유도탄이 유선조종이라는 사실은 쏙 빼고 설명했다. 유도탄이 가느다란 광섬유를 달고 날아가서 초청받은 외국 손님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아 무선조종으로 착각케 했다.

자체적으로 목표를 포착해 돌입하는 현대식 유도탄을 만드는 것은 아직도 무리였다. 이민호가 가진 기술로 억지로 만들 수는 있었지만 대신에 작은 어선만한 크기가 필요했고,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 쿠쿠쿵!

표적으로 준비한 갈레온 세 척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준비된 화력행사를 취소하지 않았다. 전함과 순양함에서 함포를 쏘자 나뭇조각과 각종 부유물만 둥둥 떠 있는 해상에 거대한 물기둥이 연속 치솟았다.

“역시 대단합니다. 국왕전하께서 관함식을 개최해 일차적으로 목적한 바를 충분히 성취했다고 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어느 나라를 공격하실 계획이십니까? 역시 포르투갈이 목표입니까?”

에스파냐 해군 제독과 외교관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민호에게 물었다. 어이가 없어진 이민호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군함을 모아 관함식을 연다는 것은 특정 국가를 공격하기 직전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관함식은 1346년 잉글랜드에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공격하기 직전 에드워드 3세가 배를 모은 전쟁준비 행위에 불과했다. 아쟁쿠르 전투 전인 1415년 헨리 5세가 사우샘프턴에 군함을 모은 관함식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관함식은 중요한 외국 손님을 영접하거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또는 외국에 자국의 해군력을 과시할 때도 개최됐다. 그러나 이 시대까지 국왕이 참석한 관함식이라면 당연히 전쟁 준비 완료를 선언하는 의미로 개최됐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겠소만, 초청장에 명시된 목적 그대로요. 수도 이전을 축하하고 고산국 함대의 위용을 외국 손님들에게 자랑하며 외국과 우호를 다지는 행사요.”

“아하! 군사원정은 대외비밀이니 전하께서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셔야지요.”

관함식의 목적이 전쟁에 있다는 기존 상식 때문에 도무지 말이 안 통했다. 그리고 고산국이 포르투갈 독립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한 것도 에스파냐 귀족들 대부분이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남의 전쟁에 제3자가 개입해 영토나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어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고산국에서 유학 중인 대명제국의 황태자요. 인사하시지요.”

“오오! 인사 올립니다, 황태자 전하!”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민감한 에스파냐 외교관들이 황태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고산국 왕실 예법에 익숙해진 황태자는 오체투지를 하지 않는다고 외교관들을 욕하지 않았다. 외교관들은 미래의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혼신을 다해 노력했다.

“국왕전하! 유럽의 해군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황태자! 명나라 군선으로 저 배들을 이길 자신이 있느냐?”

“나무로 만든 범선의 한계는 뻔하지 않습니까? 홍이포가 사거리가 길고 위력이 강하다지만 배가 흔들리는 해전에서 장점을 제대로 발휘하긴 어렵습니다. 유럽의 대포를 쏴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두꺼운 거북선이나 판옥선이 차라리 훨씬 강력하겠습니다.”

“그건 그렇다만.”

유럽 해군과 아시아 해군을 비교하는 현대인들은 양쪽 해군이 활약한 시기를 잘못 가늠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양현에 대포 74문 이상을 탑재한 거대한 전열함이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고 포탄이 폭발하는 작열탄은 19세기 후반에나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 명나라 말기는 물론 청나라 초기에도 유럽 함선들이 중국 배와 싸워서 패한 적도 많았다.

이 시대 유럽 함선들은 아시아에서도 매우 독특한 조선 함선들과는 아예 맞붙지 않는 편이 낫다. 임진왜란 전후의 거북선과 판옥선 함수, 즉 이물비우를 이루는 판자나 곡목은 매우 두꺼웠고 측면의 얇은 곳도 기본이 4치 이상이라 같은 시대의 유럽식 대포탄으로 관통하기 어렵다.

반면에 천자총통이나 지자총통에서 발사하는 대장군전이나 차대전은 관통에 특화된 뾰족한 형상 때문에 아무리 두꺼워도 10cm 미만인 유럽 배의 선현을 아주 쉽게 뚫을 수 있다. 그러나 동 시대의 유럽 화포로 유럽 선박을 관통하기는 극히 어렵다. 돛대와 상갑판의 전투 인원을 노리는 유럽식 해전 전술도 상갑판을 두꺼운 판으로 덮은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상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황태자는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느냐?”

“스승님이신 데카르트 백작께서 지도해주셨습니다. 갖가지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 제가 가진 상식을 산산이 부수고 나서 견고한 지식 체계를 쌓도록 도와주십니다.”

군인이나 과학자가 데카르트 백작에게 군사기밀을 노출시킨 적이 없었고, 백작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몇 가지 드러난 정보만으로도 쉽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능력을 가졌다. 이민호가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데카르트 백작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진 바 지식을 굳이 자랑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고산국 학생들이 착각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사고체계를 바르게 이끌어줄 뿐이었다. 뛰어난 인물이면서도 정치인이나 외국의 표적에서 벗어나 있기에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매달 스웨덴과 왕도를 오가느라 백작이 바쁘겠군. 하지만 황태자는 유럽 종교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 백작은 천주교인이니 종교에 관련된 내용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국왕전하. 종교는 성인이 되고 나서 선택하거나, 혹은 아예 믿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배움에 충실할 때입니다. 물론 낮 시간 절반 이상은 잘 뛰어놀고 있습니다.”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게 하는 것은 체력과 사회성을 길러주는 아주 중요한 교육이었다. 교육자들이 학생들의 성적이 아니라 출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였다. 물론 성적은 개인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

“황태자는 외국, 그것도 대명제국이라는 강대국의 후계자다. 너무 똑똑한 척하면 외국 군주들에게 미움 받는다.”

“국왕전하께서 다른 나라에 먼저 해를 끼치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사실 부황께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십니다. 고산국을 경계해야 한다면서도 실은 배우고 따르길 원하십니다.”

“반란의 원인을 파악해 불만과 불안을 해소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방법을 황태자가 이미 생각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황상께 아뢸 필요는 없다. 황태자는 미래를 대비해 천천히 준비하도록 해라.”

“예, 국왕전하. 저는 여덟 살에 불과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저와 대명의 백성들을 위한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민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의 자손들이라고 하나 같이 똑똑해서 불안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숭정제가 그렇듯이 똑똑하다고 해서 반드시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민호가 보기에 만력제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들이 문제가 아니라 시기심 많은 숭정제라는 인물 자체가 국가 존립에 더 큰 문제로 드러났다. 오스만 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열 개 국어를 구사하는 천재들이지만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과 비슷했다.

황태자에게 나라를 다스릴 기회가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황태자 주자랑은 이자성의 군세가 북경을 점령했을 때 생포된 다음 참살된다. 이자성이 이미 죽었으나 반란은 다시 명나라 전역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아바마마! 이만 들어가시지요. 바닷바람이 옥체에 해롭다고 합니다.”

“세자와 황태자는 들어라. 이런 바닷바람을 하루 종일 받으며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해군과 해안경비대다. 태양에 그을리고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 아바마마. 대우가 섭섭지 않도록 항상 신경 쓰겠습니다.”

이민호가 세자와 황태자를 거느리고 관측실로 향했다. 좌승함에 동승한 외국 해군 장교들과 귀족들이 일제히 상체를 숙여 세계 초강대국 국왕의 행렬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자국 군주를 대할 때보다 훨씬 공경하는 자세를 갖춰서 이민호가 실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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